제3장
승주
공비가 말다툼 중에 무호에게 발길질을 했고, 그 비호같은 돌려차기에 정통으로 맞은 무호가 실신을 했다는 말에 얼어붙은 것처럼 딱 굳었던 욱이 정신을 차리고 벗어놓았던 용포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곤 되는대로 걸치고 경황없이 침전을 나섰다.
“폐하, 잠시 기다리십시오. 같이 가셔야지요.”
허연 역시 갑옷을 다시 걸치고 매듭을 묶으며 욱을 따라 나섰다. 하지만 위병대 갑옷은 혼자 입기는 거추장스러운 옷이라 허연이 전각 밖으로 나왔을 때 욱은 벌써 마당을 가로질러 궁문을 나선 후였다.
정신이 반은 나간 것처럼 허둥거리는 욱의 뒷모습에 허연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허연의 투구와 장검을 들고 바쁘게 뒤를 좇던 환이와 명이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너희들이 뭔가 잘못 본 것이 아니냐?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일을 크게 부풀려서 폐하께 고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
허연의 추궁에 환이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보고 들은 것의 반의반의 반도 고해 올리지 못했습니다!”
“공비께서 무호 장군을 돌려차기 한 방으로 보내신 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소인들은 폐하께 사실만을 고해 올렸습니다!”
“허면, 되도록 충격을 덜 받으시도록 좀 더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고해 올릴 방도는 없었느냐?”
허연의 물음에 환이와 욱이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다시 허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는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마마.”
“향원궁에서 일어난 일을 소상히 고해 올리자면 반 시진도 부족합니다.”
환이와 명이의 대답에 허연이 어제 오늘 내쉰 한숨을 다 합한 것보다 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가자. 폐하께서 많이 놀라셨으니 얼른 따라 뫼셔야겠구나.”
청량전을 나와 단숨에 향원궁까지 달려간 욱이 향원궁의 내실에 한 발을 들이밀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내실을 가득 채운 부장들과 의원들 틈으로 침상 위에 쫙 뻗어 있는 무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헐…….”
환이와 명이에게서 공비의 돌려차기에 당한 무호가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엔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고, 향원궁까지 오는 중에 몇 번을 되뇌어봐도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더니…… 벼락 맞은 대추나무처럼 쓰러져 있는 무호를 보자 비로소 벌어진 일이 실감이 나면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어찌 된 일이냐?”
욱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바닥에 처박을 듯 푹 숙이고 있는 부장들을 한눈에 훑으며 다그쳐 물었다.
3년 만에 만난 남매가 격한 말다툼 끝에 하나는 맞아 쓰러지고 하나는 울면서 뛰쳐나간 상황만 해도 혼이 나갈 지경인데, 일 터진 지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서 황제가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허술한 복장으로 달려와 문을 열어젖히니 험한 변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장수들도 이 사태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아서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마른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왜 대답이 없느냐?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자 욱이 벌컥 소리를 쳤다.
“벼, 별일 아니옵니다, 폐하. 저희 큰형님…… 아니, 장군이 좀 전에 정자에서 약주가 과해 제풀에 넘어진…… 것이옵니다.”
“이런 고연! 내 이미 들은 말이 있거늘,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동북 최고의 맹장으로 명성이 자자한 무호가 목에 부목까지 대고 누워서 꼼짝을 못하고 있는데, 그것을 술에 취해 엎어진 것이라며 눙치고 넘어가려는 턱도 없는 수작에 욱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그 사나운 일갈에 장수들이 일제히 이마를 바닥에 조아리며 등을 떨었다.
“폐하! 죽여주시옵소서!”
“공비는 어딜 갔느냐?”
장수들을 붙들고 실랑이를 해봐야 바른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욱이 대뜸 공비를 찾았다. 향원궁의 침전은 무호의 부장들과 어의들, 그리고 내관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 유독 이 사건의 범인인 공비는 어디에서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라비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공비는 어딜 갔느냐고 묻지 않느냐?”
노여움과 짜증과 걱정이 뒤섞인 욱의 추궁에도 모두들 난감하다는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쓰러진 무호를 부장과 내관들이 급한 대로 향원궁 침실에 눕히고 의관을 부르는 사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공비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방을 뛰쳐나간 터라 그들도 공비의 행방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누워 있던 무호가 손을 까딱이며 영재를 찾았다.
“영재야, 나를 좀 일으켜라.”
“형님!”
“뭘 하느냐? 와서 일으키라는데…….”
동북쪽 국경에서 가장 험하고 거친 성읍을 지키며 평상시엔 장족과 맞서 싸우고, 한가할 땐 호랑이 잡으러 돌아다니던 장수가 제 힘으론 일어나지도 못해서 부장을 재촉하는 모습에 욱이 허…… 하고 탄식을 토해냈다.
영재가 무호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침상 옆으로 다가서자 주변에 있던 의관들이 놀라서 그를 말렸다.
“지금 함부로 움직이면 큰일 납니다.”
“목이 완전히 돌아갔으니 제대로 시료를 받아 놀란 근육과 힘줄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꼼짝도 하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평생 고생하십니다.”
의관들의 만류에 영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무호가 혼자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였다. 뒤늦게 욱을 쫓아와 내실에 들어선 허연이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네가 좀 말리라고 눈치를 주며 욱을 앞으로 밀어 보냈다.
그제야 공비를 잡아 혼찌검을 내는 것은 나중 일이고, 다친 사람의 상태를 보살피고 안부를 묻는 것이 우선이란 걸 깨달은 욱이 터덜터덜 무호에게 다가섰다.
“장군은 일어나려고 애쓸 것 없네.”
욱이 답답하고 복잡한 눈길로 무호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부장들을 거느리고 편전에 들 때엔 그 위풍당당함에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건만, 누이동생의 발차기 한 번에 무너져 운신도 못하게 된 무호를 보니 기가 막혀서 숨도 안 쉬어질 지경이었다.
“폐하…….”
“공비의 돌려차기에 관자놀이를 맞고 혼절했었다고 들었는데…… 정신이 돌아와서 다행일세.”
“폐하, 공비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소인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래, 피하지 못한 자네도 잘못이 있겠지. 어쨌든 상태가 중한 듯 보이니 공연히 버둥거리지 말고 누워 있게.”
그렇게 무호를 꾹 눌러놓고 욱이 옆에 있는 의관을 돌아보았다.
“장군의 상태가 어떠냐? 사람이 목을 크게 다치면 영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장군이 목을 다치기는 했으나 마비 증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충격에 목이 크게 돌아갔고, 뇌진탕도 의심되는 바가 있으니 침 맞고 뜸 뜨고…… 며칠간 시료를 하며 상태를 봐야 할 듯싶습니다.”
“에잇…….”
의관의 대답에 욱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런 고연…… 3년 만에 만난 오라비에게 발길질을 해서 운신도 못하도록 때려눕히다니…… 공비는 어찌 사람됨이 이토록 흉포하단 말이냐?”
욱이 이를 빠드득 갈며 으르렁거리자 무호가 다시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폐하…… 공비마마를 책망하지 마십시오. 제가 먼저 실언을 하여…….”
무호의 변명에 욱이 더는 못 참고 벌컥 언성을 높였다.
“이 지경을 당하고도 누이라고 두둔을 하는가? 그대는 장군이 아니라 보살일세!”
“폐하…….”
욱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의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군을 잘 치료하라. 향원궁은 어차피 외궁이고 종친들이 가끔 쉬어가기도 하는 곳이니, 아픈 사람 공연히 움직여서 덧나게 하지 말고 며칠간 이곳에 두어 치료하다가 거동이라도 하게 되면 내게 먼저 고하라.”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의관과 내관들에게 무호를 잘 보살피라고 거듭 이르고 향원궁에서 나온 욱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마당을 서성였다. 당장 공비를 잡아 휘명전에 끌고 오라고 명을 내릴까, 바로 영운궁으로 쳐들어갈까, 아니면 대체 공비와 무호가 무슨 일을 두고 다투다가 저 사달이 났는지 좀 더 알아볼까…….
“폐하, 고정하십시오. 그래도 저만하길 큰 다행입니다.”
욱을 뒤쫓아 나온 허연이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서 헐떡거리고 있는 욱을 잡아 등을 다독거렸다.
“목숨은 건졌으니 정말 큰 다행일세!”
“폐하!”
“그간은 공비가 심심치 않게 폭행 사건을 일으켰어도 사안이 그다지 중하지 않고, 내가 공비에게 지아비 노릇을 한 바도 없으니 일일이 나서서 야단치고 가르칠 면목도 없어서 모른 척 넘겼으나……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제 얼굴 한 번 보고자 지난 보름간 밤낮없이 말을 달려 온 오라비가 아닌가? 선대의 비빈들 중에는 성품이 음흉하고 간악해서 갖은 흉계를 꾸미다 쫓겨나거나 사사당한 후궁도 많다지만, 친정 오라비에게 발길질을 해서 저 지경을 만든 여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네.”
허연 역시 무호의 상태를 보고 나온 터라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겸연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동기간이라고 다 우애가 깊은 것은 아닙니다. 무 장군과 공비마마는 이복 남매간이라니…… 사이가 좀 안 좋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배다른 남매고 사이가 안 좋으면 저리하는가? 무호는 목이 부러질 뻔했네!”
“우선 휘명전으로 돌아가시지요. 가서 차라도 한 잔 드시고 마음을 좀 가라앉히십시오.”
“내 집안 담장 안에 깡패가 돌아다니는데 차 한 잔으로 마음이 가라앉겠는가?”
욱이 씩씩거리며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진관우가 부장들을 이끌고 향원궁 중문을 넘어섰다. 그러곤 우리에 갇힌 호랑이처럼 마당 복판을 빙빙 돌고 있는 욱을 발견하고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폐하.”
“위사령 들었는가?”
진관우는 오전에 무호 일행을 인솔해 편전에 같이 들었다가 명우당으로 돌아가서 평소처럼 집무를 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여부장이 달려와서 무호가 향원궁에서 갑자기 쓰러졌고, 그 일로 내관들이 내의원에 달려가 의관을 청했다며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달려오는 길이었다.
“예, 헌데, 폐하께서 어찌 마당에 나와 계십니까? 게다가…….”
욱의 옷차림이 입다 만 듯 영 허술한데다 머리도 봉두난발인 것이 영락없이 자다가 뛰쳐나온 형상이라 진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곧 황제도 무호의 소식을 듣고 경황없이 뛰쳐나왔나 보다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호 장군이 다쳤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상태가 중합니까?”
진관우의 물음에 욱이 넌더리를 내며 손과 고개를 동시에 내저었다.
“뭘 묻는가? 예까지 왔으니 들어가서 직접 보게.”
“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심기 불편한 황제를 붙들고 긴말 섞느니 들어가서 직접 보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며 진관우가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다음 순간, 욱의 곁을 지키고 선 위병의 정체를 깨닫고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아니, 형님…….”
허연이 종종 욱을 수행해서 휘명전에 같이 나오는 일이 있긴 했지만 주로 정 내관이 번이 없는 날에나 있는 일이었고, 위병의 갑옷으로 변복을 하고 다닌 적은 없었기 때문에 진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연을 쳐다보았다.
“형님께서 어찌 위병의 갑옷을 입고 계십니까? 자칫 몰라 뵙고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진관우의 인사에 허연이 헛기침을 하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잠깐 나와서 무호가 어떤 자인지나 볼 생각으로 변복을 했던 것인데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매부에게 딱 걸린 게 민망해서 허연이 얼른 말을 돌렸다.
“긴 얘기는 이따가 휘명전에 들어서 하고…… 들어가서 무호를 만나보게. 무호는 며칠 향원궁에 머물더라도 부장들은 날 저물기 전에 내보내야 할 것이니 그 일도 신경을 좀 써주고…….”
“무호가 향원궁에 머물다니요? 그것도 며칠이나요?”
진관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직접 보면 알겠지만 크게 다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 어려운 형편일세.”
“…….”
방금 전까지도 멀쩡하던 장수가 전장도 아니고 황궁에서 크게 다쳐서 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상황이란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진관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어쨌든 당사자가 지척에 있으니 마당에 서서 황제와 허연을 붙들고 연유를 따지느니 안에 들어가 상황을 직접 보고 판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진관우가 두 사람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전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욱이 진관우를 불러 세웠다.
“혹, 지난 반 시진 사이 위병을 때려눕히고 궐 밖으로 뛰쳐나간 자는 없었는가?”
“예?”
“없었다면 공비가 아직은 궐 안에 있겠구먼.”
“…….”
진관우가 이게 무슨 소린지 감도 못 잡고 멀뚱히 서 있는 사이 허연이 욱의 등을 한 대 갈겼다.
“연유도 확실치 않은 터에 그렇게 부인을 모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연한 말씀 마시고 이만 청량전으로 가시지요.”
“벌어진 일이 자명한데 연유는 무슨 연유? 이 일이 연유가 있다고 해서 그냥 넘길 일인가?”
새삼 분통을 터뜨리면서 욱이 칠궁 쪽으로 눈을 흘겼다.
뒤늦게 쫓아온 내관들과 허연을 이끌고 욱이 칠궁의 궁문을 넘었다. 황궁이 넓다고는 하지만 지난 3년간 다른 후궁들과 두루두루 싸움질을 하며 척을 진 공비가 갈 만한 곳은 오직 한곳, 자신의 처소인 영운궁뿐이었다.
“공비마마를 지금 보려고 하십니까?”
욱이 한눈도 팔지 않고 곧장 영운궁으로 향하자 윤 내관이 곁에 붙어 조심스럽게 의중을 살폈다.
“지금 안 보면 언제 보겠느냐?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오라비에게 그런 행패를 부렸는지 그 입으로 꼭 들어야겠다.”
“하오나 공비께서도 지금 무척 상심해 계실 텐데…….”
태산 같은 장수도 한 방에 보낸 공비이니 잘못 건드렸다가 황제에게까지 덤비면 큰일이란 생각에 윤 내관이 욱을 슬그머니 만류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욱의 서릿발 같은 눈총뿐이었다.
“왜? 나까지 공비의 돌려차기에 넘어갈까 걱정이냐?”
“아니옵니다, 폐하. 어찌 그런 망극한 일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앞길 막지 말고 비켜라.”
욱이 잘라 말하며 윤 내관을 밀어치웠다. 그러곤 영운궁의 궁문을 직접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영운궁은 앞마당에서부터 쓸쓸함이 느껴질 정도로 황량하고 초라했다. 담장 아래 화단엔 화초대신 잡초만 무성했고, 마당의 박석 틈으로 난 잡초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무릎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전각 옆의 연못도 말라서 진흙만 가득했으며 처마와 난간의 채색도 색이 바래고 비바람에 씻겨서 본래의 아름다움은 오간 곳이 없었다.
엄연히 주인이 있는 궁전임에도 그 형상은 버려진 지 10년은 지난 폐궁이라 윤 내관의 고개가 저도 모르는 사이 툭 떨어졌다. 황제가 공비에게 화가 난 것은 난 것이고, 전각 꼬라지가 왜 이 모양이냐고 묻기라도 하면 그간의 관리 소홀이 다 드러날 터…… 변명할 말이 영 궁색했던 것이다.
공비도 공비지만 미향궁은 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때 미향궁 신 내관이 공비에게 맞아서 목이 돌아갔어야 하는 것인데, 공비는 그 고연 놈은 며칠 절고 다니는 정도로 봐주었으면서 어찌 오라비는 그리 모질게 잡았단 말인가? 그렇게 속으로 늘어지게 신세타령을 하며 윤 내관이 영운궁 본채 앞에서 어흠…… 헛기침을 했다.
“공비마마, 안에…….”
궁 안에 불빛도, 인적도 없으니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윤 내관의 우려와는 달리 안에서는 바로 사람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이고, 이를 어째…… 폐하께서…….”
안에서 얼굴을 내민 권 상궁이 지난 3년간 영운궁의 궁문을 넘은 일이 없는 황제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혼비백산을 해서 달려 나왔다. 공비의 기습에 무호가 그렇게 나가떨어졌으니 휘명전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라 언제 지밀 내관들이 들이닥칠까 마음을 졸이던 권 상궁이 욱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폐하, 마마를……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마마께서도 큰 도련님과 다투신 일이 후회스러우셔서 계속 눈물만 흘리고 계십니다.”
“안에 있느냐?”
“폐하…….”
흐느끼는 권 상궁을 지나쳐 전각 안으로 들어선 욱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날이 저물어가는 저녁이라 사방이 컴컴하고 공기도 싸늘한데, 불기도 없고 온기도 없는 방 안은 마치 오래 비워놓은 집처럼 썰렁하기만 했다. 그 가운데 어디선가 여인의 흐느낌만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으니 이는 영락없는 빈집의 귀곡성이었다.
욱을 따라 들어온 윤 내관과 고 내관이 서둘러 불을 밝히고 장막이 내려진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나와서 예를 올리십시오.”
“으허어…….”
“마마,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폐하께서 드셨는데 이리 버티시는 것은 불충이옵니다.”
안쪽에서 불시에 주먹이나 발길질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윤 내관이 침상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서 안에다 거듭 말을 전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울음소리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욱이 침상으로 다가가서 장막을 거칠게 젖혔다. 그러고는 동그랗게 뭉쳐진 채 헐떡거리고 있는 이불뭉치를 향해 버럭 호통을 쳤다.
“수천 리 밖에서 온 오라비의 목을 부러뜨릴 뻔하고도 뭘 잘했다고 울면서 버티느냐? 당장 나와 꿇어앉지 못할까?”
욱의 호통에 공비가 그제야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고 침상에서 내려섰다. 영운궁에 돌아온 후 꼬박 한 시진 동안 눈물을 쏟으며 흐느낀 공비의 얼굴은 눈두덩뿐 아니라 얼굴 전체가 짓무른 듯 벌겋게 부어 있었고, 아직까지도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참느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눈물에 젖어 화장이 죄다 번지고 벌겋게 부은 공비의 험악한 얼굴을 본 욱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곧 이런 상황에서조차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녀의 난폭한 성정을 결코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얼른 표정을 고쳤다.
욱이 의자에 앉아 엄한 표정으로 공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앞에 꿇어앉은 공비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낄 뿐 좀처럼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밤을 새울 참이냐? 대체 뭣 때문에 먼 곳에서 온 오라비에게 그 행패를 부렸는지 썩 고하지 못할까?”
“…….”
“방자하고 흉악한 것! 그런 짓을 하고도 잘못을 모른단 말이냐?”
욱의 호통에 공비가 더욱 격하게 어깨를 떨며 헐떡거렸다. 그러고는 더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 하고 목을 놓아 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허연이 공비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마, 고정하십시오. 벌써 목이 다 쉬셨으니…… 이러다 병이라도 얻으실까 염려스럽습니다.”
3년 만에 만난 오라비와 단둘이 마주 앉은 자리에서 어찌 지내느냐, 얼마나 힘들었느냐는 위로 한마디 없이 대뜸 지아비를 대하는 태도가 거칠고 무뚝뚝하다고 야단부터 맞은 것도 서럽고, 한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오라비에게 발길질을 한 것도 미안하고…… 마음이 한없이 답답하고 서글펐던 공비가 따뜻한 위로의 말과 온기에 이끌려 허연에게 탈진한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그 어깨에 끝도 없이 흐르는 눈물을 꾹꾹 찍어냈다.
“귀인은 물러서게. 내가 지금 공비에게 향원궁에서 있었던 일을 묻고 있지 않은가?”
“폐하, 지금은 마마를 다그쳐봐야 말씀을 못하실 듯싶습니다. 오늘은 쉬며 심신을 추스르게 두시고 자초지종은 밝은 날 다시 불러 물으시지요.”
허연의 간청에 욱이 도리어 엄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물러서라고 했네!”
“폐하…….”
“공비가 사람을 쳐서 상하게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세. 어떤 내관은 걷어차서 몇 날 며칠 절뚝이며 다니게 만들고, 또 어떤 내관은 따귀를 때려 한쪽 귀를 아예 못 듣게 만들고…… 내명부, 외명부 할 것 없이 걸리는 대로 시비를 걸어 궁 안을 소란하게 하니, 선대 어느 비빈의 행실이 이토록 난폭하고 거칠었단 말인가?”
욱이 공비의 지난 과실까지 끄집어내서 더욱 언성을 높이자 허연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축 처진 공비의 어깨만 다독거렸다. 그러곤 공비의 흐느낌이 조금 잦아들자 달래듯 향원궁의 일을 대신 물었다.
“마마, 무슨 일로 장군과 다투셨습니까? 폐하께서 향원궁에 몸소 행차하셔서 장군이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크게 놀라셨습니다.”
“오라버니를 친 것은…… 잘못했습니다.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순간의 분기를 참지 못하여…… 정말 잘못했습니다.”
공비의 넋두리 같은 대답에 욱이 더욱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남도 아닌 오라비를 폭행하여 혼절케 한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만, 뭔가 연유가 있을 것이 아니냐? 만일 합당한 연유조차 없다면 너처럼 패악한 것을 한 번 사양도 않고 과인의 후비로 보낸 네 아비에게 불충의 죄를 물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멀리 있는 아비에게 묻겠다는 욱의 으름장에 간신히 진정이 되었던 공비의 어깨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공비가 또 울음을 터뜨릴까 걱정스러운 허연이 욱을 바라보며 오늘은 이만하자는 눈치를 주었지만 욱은 모른 척 팔짱을 끼고 흔들림 없이 공비만 노려볼 뿐이었다.
욱의 강경한 태도에 한숨만 연거푸 내쉬던 공비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3년 만에 만난 오라비가 궁에서 어찌 지냈느냐, 외롭지는 않았느냐, 힘든 일은 없었느냐…… 그간 가족의 소식조차 변변히 듣지 못하고 지낸 소인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없이…… 폐하께서 사냥을 같이 가자 청하셨는데 표정은 어찌 그리 시무룩하며 말투는 어찌 그리 무뚝뚝한가, 궐 안에 비빈이 너 하나뿐이 아닌데 그렇게 태도가 불손해서야 어찌 사랑을 받겠느냐고 야단부터 치기에…….”
한숨과 눈물이 섞인 공비의 대답에 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고연…… 고작 그 한마디 들은 것이 분해서 멀쩡한 사람을 저 지경을 만들었단 말이냐? 그간은 말썽이 많았어도 어린 나이에 먼 곳에 시집와서 마음 둘 곳이 없고 아직 철도 없어 그런 것이려니 하여 조용히 넘겨주었더니…… 철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품이 포악하고 못된 것이 아니냐?”
욱의 노성에 공비가 간신히 몸을 가누며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이 마치 큰 기둥이 무너지는 형상이라 혹시 바닥에 머리라도 부딪힐까 싶어서 허연이 얼른 그녀를 붙들었다.
“마마, 정말로 그뿐입니까? 그만한 일로 화가 나셔서 장군을…… 그리하셨습니까?”
허연의 물음에 공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욱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폐하. 소인을…… 벌하여주십시오.”
“못된 것!”
욱이 싸늘하게 한마디를 던지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몇 걸음을 걷다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영운궁의 풍경이 다른 궁과는 어딘지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공비의 소행이 못돼 먹은 것은 그렇다 치고, 전각이 어찌 이리 휑하고 살풍경한고? 선반엔 백자 항아리 하나 얹힌 것이 없고, 벽엔 족자 한 점 걸린 것이 없으니…… 황후궁이나 우화원에 비하는 것은 언감생심, 후궁의 처소가 아니라 빈 창고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전각 안을 슬쩍 살피던 욱이 울다가 진이 빠져서 축 늘어진 공비를 붙들고 난감해하는 허연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도 그만 일어나게. 아무리 사심이 없다고 해도, 어찌 후궁을 그리 오래 끌어안고 있는가?”
“끌어안다니요? 마마께서 실신지경이라 부축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관에게 맡기고 나오게. 고향에 있을 때에 멧돼지 때려잡던 실력으로 오라비도 때려잡은 여인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폐하!”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목이 쉬고 얼굴이 다 짓무르도록 울고 있는 부인에게 참으로 인정머리 없다 생각하며 허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영운궁 소속으로 보이는 내관은 보이질 않고 윤 내관이 지밀 내관들을 몰고 다가와 공비를 대신 받아 안았다.
“영운궁 태감은 어딜 갔는가.”
들어올 때부터 전각이 빈집 같았던 것이 새삼 떠올라서 허연이 윤 내관에게 물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도 칠궁의 일은 소상히 알지 못하는지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윤 내관이 욱의 눈치를 살폈다.
“마마께서 이리 기진을 하셨으니 의관도 부르고 신경 써서 보살펴드려야 할 텐데…… 어찌하여 궁에 사람이 통 안 보이는지 모르겠구먼.”
“여기 일은 소인에게 맡기시고 그만 일어나십시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지밀 내관들에게 공비를 어서 침상으로 옮기라고 지시를 내린 윤 내관이 허연을 재촉해 문 쪽으로 몰았다.
청량전으로 돌아온 욱이 저녁도 드는 둥 마는 둥 대강 물리고 침상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곤 허파를 토해낼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누웠다. 아침부터 공비 남매 때문에 긴장했다가 놀랐다가 흥분했다가…… 이제 진이 다 빠져서 욱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도 없을 지경이었다.
“왜 저녁을 반도 안 드셨습니까?”
어지간해서는 볼 수 없는 욱의 지친 모습에 허연이 침상에 다가와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욱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이마를 어루만졌다. 내 강아지가 유별난 안사람 때문에 축 늘어졌구나, 어린것이 겁도 없이 한 참에 후궁을 세 명씩 척척 들여앉히더니만, 그 틈에 호랑이가 끼어들어 왔으니…….
“많이 피곤하십니까? 인삼탕이라도 한 잔 올릴까요?”
“그렇지 않아도 입이 써서 밥도 안 넘어가는데 무슨 탕약까지 먹이려 드는가? 그냥 두게.”
욱이 낑……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욱이 심란한 마음을 좀처럼 다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걸 지켜보던 허연이 침상으로 올라가 욱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뭘 그렇게까지 언짢아하십니까? 무호 장군은 2~3일만 치료를 받으면 문제없이 털고 일어날 텐데요. 그리고 공비께서도 이번 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울며 자책을 하고 계시니 차후에 그 같은 불상사는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허연의 위로에 욱이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가 공비를 몰라서 그렇게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것이네. 지금이야 저도 놀랐을 테고, 거기에 내가 들이닥쳐서 크게 나무라기까지 하니 기가 죽은 듯 보이지만 천성이 어딜 가겠는가? 대체 성격이 어찌 그리 난폭하고 안하무인인지…….”
욱이 에구에구 죽는소리를 하며 허연의 가슴에 얼굴을 푹 묻었다. 나랏일만으로도 업무에 치여 늦은 시각까지 휘명전을 나서지 못하는 날이 많은 욱이 집안 일로 속이 상해서 끙끙거리는 것이 안타까워서 허연이 어리광을 있는 대로 다 받아주며 한 번 더 그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설상가상 기운까지 장사에, 무공은 또 언제 그리 익혔단 말인가? 나라 안에 무호보다 더 덩치 크고 힘 좋은 장수도 얼마 없을 텐데, 그런 오라비를 발차기 한 방에 넘어뜨릴 정도면 앞으로 다른 비빈이며 궁인들이 그 앞에서 숨인들 맘 편히 쉬겠는가?”
“제가 보기에 공비께서는 천성이 무례하고 난폭한 분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허연의 두둔에 욱이 헹,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대는 참 마음씨도 넓고 곱구먼. 공비의 성격이 무례하고 난폭한 것이 아니면 어느 지경까지 가야 난폭한 것인가? 전쟁터에 나가서 일당백으로 적병이라도 밟아야 하는가?”
“폐하.”
“후비가 여섯이면 선대에 비해선 후궁이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거늘,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무뢰배가 나타나 이리 온 궁중을 휘젓고 다닌단 말인가? 성질 같아선 후궁이고 뭐고 다 없었던 것으로 하고, 당장 궁 밖으로…….”
“폐하!”
허연이 갑자기 표정을 바꿔 엄한 눈길로 욱을 노려보았다.
“그런 말씀은 경솔히 입 밖에 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그저 홧김에 내지르는 말에 부인들은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
“또한, 아까는 영운궁에서 어찌 그러셨습니까? 공비께서 기진하여 몸도 못 가눌 지경이셨는데 내관에게 맡기라 하시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리시다니…… 공비께서 비록 큰 잘못을 하셨고, 그로 인하여 아무리 노여우셨다고 해도 너무 심하셨습니다.”
자신의 푸념을 다 받아줄 듯 끌어안고 다정하게 등을 다독이며 얼굴을 어루만져주던 허연이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을 꾸짖자 욱이 멍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 심하다니…… 이것이 정말 내게 하는 말인가?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그런 짓을 저지르고는 제풀에 혼절할 듯 울어대는 바람에 할 말을 반도 못한데다 아무런 처분도 내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 나왔거늘…….
“공비마마는 폐하의 신하이기 이전에 부인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낙점하고 후비로 맞아들이셨으면 합당한 대접을 하고 정으로 대하셔야지, 그런 상황에서까지 어찌 그토록 박정하십니까?”
허연이 타박을 하며 욱을 품 안에서 밀어내고는 침상에서 내려갔다.
“아니, 이보게…….”
쌩하니 멀어지는 허연을 붙들려다가 허공만 한 번 움키고 만 욱이 주섬주섬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도 허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 공비를 대한 자신의 태도엔 한 점의 실언이나 실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이상 관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 심하다니, 내가 공비에게 뭘 심하게 했단 말인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오늘은 그냥 쉬시고 내일 밝을 때에 다시 영운궁에 가셔서 공비마마를 잘 타이르고, 위로도 하십시오.”
허연이 싸늘한 얼굴로 이르고는 장지문 너머 곁방으로 건너갔다.
청량전 침전의 곁방은 다실 겸 서재로 쓰기에 적당한 크기였고, 누마루와 바로 이어져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면 방에 앉아서도 근사한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곁방을 잠깐 둘러본 허연이 창가 선반 위에 놓인 작은 화로를 내려서 숯을 옮겨 담고는 물 주전자를 올렸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침실의 곁방은 아무것도 없는 빈방이었지만 꼼꼼한 고 내관이 처소를 꾸미면서 지필묵이며 다기며 허연이 자주 쓰는 물품 일습을 갖추어놓았던 것이다.
“중요한 얘기 하던 중에 왜 사람을 밀치고 내빼는가?”
욱이 툴툴거리며 허연을 쫓아와 의자에 주저앉았다.
“침상에 들기는 이른 시각이 아닙니까? 폐하께서는 먼저 쉬십시오. 저는 윤 내관이 챙겨 온 장계나 봐둬야겠습니다.”
허연이 그렇게 말하며 탁자 옆에 쌓인 장계를 가리켰다. 그제야 욱이 아, 장계…… 하고 중얼거리며 잡히는 대로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애초에 허연은 오늘 종일 대현성에서 온 장계나 볼 생각이었는데 공연한 호기심으로 편전에 들었다가 하루 종일 욱과 함께 향원궁으로, 영운궁으로 돌아다니느라 일껏 부탁한 장계는 여태 들춰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난 3년간의 보고서라 장계 꾸러미가 응접실 한쪽에 수북이 쌓였으니 중신들과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국경 상황을 파악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장계를 봐둬야 했다.
“과인이 포악한 후비로 인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경이 착잡한데, 이것을 꼭 지금 봐야겠는가?”
욱이 잠깐 보는 척하던 장계를 탁자에 툭 던지며 투덜거렸다.
“폐하…….”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공비에 대한 험담에 허연이 욱을 언짢은 눈길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허연을 쳐다보는 욱의 눈길도 유감이 가득이었다.
“그리고 또, 너무한 것은 내가 아니지! 진짜 너무한 사람은 대현성 영주 무영준이 아닌가?”
“예?”
“아무리 내가 그 집안에 딸 있다는 소문만 듣고 덜컥 후비로 낙점을 하였기로, 여식이 저 지경이면 그쪽에서 알아서 사양을 했어야지, 무슨 염치로 비의 첩지를 넙죽 받고 저런 딸자식을 황궁에 들여보낸단 말인가? 충신은 무슨 얼어 죽을! 그자가 진정으로 내게 충심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네! 멧돼지 때려잡고, 오라비 후려치고…… 이제 보니 아무 데도 치울 곳 없는 골칫덩어리를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떠넘긴 것이 아닌가?”
부인 타박을 하다못해 이젠 수천 리 밖에 있는 장인까지 끌어들여 원망이 늘어지는 것을 보니 오늘 일로 정말 심하게 놀랐나 보다 생각하며 허연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장계를 펼쳐 들었다.
“피곤하면 주무시든가, 쉬든가 하십시오.”
“아직도 기가 막혀서 심장이 벌렁벌렁한데 잠이 오겠는가? 잔소리 한마디 들었다고 오라비에게 그런 고난도 기술을 걸어서 혼절을 시키다니…… 사건이 벌어진 것이 궐 안이었으니 우리끼리만 알고 넘어간 것이지, 일반 사가나 길바닥에서 그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당장 포청에 고변을 할 일이 아닌가?”
어디서 상추라도 한 광주리 뜯어다 먹여서 그만 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장계를 내려놓고 욱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 한마디에 그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뭔가 마마의 심경을 뒤흔들 만한 일이 더 있었겠지요.”
“…….”
“제가 느끼기론 오고 간 얘기가 그뿐이 아니지만 그쯤에서 말을 줄이신 듯했습니다. 남매간에 주고받은 얘기를 구구절절 늘어놓고 변명하고 싶지 않으셨거나, 폐하께 말씀 올리기 곤란한 일이 있었겠지요.”
저녁을 잔뜩 먹고 아래층 빈방에 들어 친구들과 놀다가 불려온 환이와 명이가 욱 앞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불러 계시옵니까? 폐하.”
“오냐. 내 물어볼 것이 있어서 들라 했느니라.”
“하문하시옵소서.”
“너희들이 오늘 향원궁에서 공비와 무호가 다투는 것을 다 보았느냐?”
욱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향원궁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캐물었다.
“그것이…… 다 본 것은 아니옵고…….”
“다 보질 못했다니? 너희는 공비와 같이 향원궁에 들지 않았느냐?”
욱이 다짜고짜 아이들을 다그치자 옆에 앉아 있던 허연이 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명이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곤 방에서 쉬다가 급히 나오느라 흐트러져 있는 명이의 옷깃을 바로 잡아주고 관모도 고쳐 씌웠다.
“저녁은 먹었느냐?”
“예, 마마. 오늘은 폐하께서 저녁 수라를 고스란히 물려주셔서 다른 날보다 맛있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배불리 먹었다니 다행이다. 한창 클 때인데 잘 먹어야지.”
허연이 흐뭇하게 웃으며 이제 제법 총각 티가 나는 명이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허연의 따뜻한 보살핌에 명이의 얼굴에 개구진 미소가 가득 피었다.
“미천한 소인을 이리 보살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마.”
허연이 명이를 마치 아들 보듯 정이 가득한 눈길로 보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다, 혹시 저놈들에게 맛있는 고기반찬 먹이려고 나한테는 나물 반찬만 잔뜩 먹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욱이 허연을 슬쩍 노려보았다.
“그래, 오늘 공비마마를 뫼시고 향원궁에 가서 무엇을 보았느냐? 공비마마와 무호 장군이 말다툼하는 것을 직접 보았느냐?”
“두 분께서 접객실에 들어 안부 인사를 몇 마디 주고받으시다가…… 중간에 공비마마께서 남매간에 조용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기에 다른 부장들이 방에서 물러나왔고, 저희들도 같이 방을 나왔습니다.”
“그럼 방 안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너희도 모르겠구나.”
“권 상궁이 아예 중문 밖으로 나가 있으라 하여 저희가 나온 직후에 주고받은 내용은 모릅니다.”
명이의 대답에 욱이 실망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향원궁에 윤 내관을 달려 보냈으면 벽에 구멍을 뚫어서라도 안에서 일어난 일을 염탐해 왔을 텐데, 어린것들만 보내 놓으니 통 실속이 없구나. 나가란다고 맥없이 밀려 나와서 중요한 사건 현장을 놓치다니…… 그때 환이가 톡 나서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눈치를 좀 보다가 접객실 곁방으로 숨어들어가서 어지간한 정황은 모두 듣고 보았습니다. 그 곁방엔 예전에 상선 나리가 뚫어놓으신 비밀 창구멍이 있는데 거기서 보면 접객실이 한눈에 다 들여다보입니다.”
명이가 관모를 벗고 허연의 패물함에서 꺼낸 옥비녀를 상투에 꾹 찔렀다. 그러곤 환이를 향해 돌아섰다. 환이는 맡은 역할에 실감을 더하기 위해 허연이 벗어두었던 위병의 붉은 도포를 걸치고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진즉부터 명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궁금하신 것이 그뿐입니까?”
환이가 명이를 엄한 눈초리로 노려보며 나직하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 모습이며 말투며 정말 그럴듯해서 욱이 허허…… 하고 나직하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명이도 머리에 비녀를 하나 꽂았을 뿐인데 그 뚱하고 냉랭한 표정은 갈데없이 평상시 공비의 얼굴이었다.
“다들 무탈히 잘 계신다니 되었습니다. 저야 기왕 이렇게 된 몸,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기왕지사 이렇게 된 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물으십니까?”
명이가 환이를 잠깐 흘겨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마마께서는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말입니까?”
“여인으로 태어나 황궁에 들어서 황제 폐하를 뫼시는 것은 일신의 복이요 가문의 광영이거늘, 무엇이 못마땅해서 그렇게 표정이 부어 계십니까?”
“일신의 복이라고 하셨습니까?”
명이가 살벌한 눈길로 환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환이도 두려움 없이 명이와 맞섰다. 이쯤에서 둘은 공비와 무호의 혼이라도 씐 듯 말투와 태도가 영락없이 그 두 사람이었다.
“복이고말고요! 게다가 지금의 황제께서는 한창 나이의 헌헌장부가 아니십니까? 나라 안에 사내도 많고 명문가도 많지만, 그만한 신랑이며 이만한 혼처가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너른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니다 하루아침에 붙들려 조롱에 갇힌 신세가 되었는데, 이것이 복이란 말입니까? 사내들이 생각하는 여인의 복이란 그런 것입니까?"
“사가에 시집을 가셨으면 전처럼 말 달리고 활 쏘며 나다니셨을 줄 아십니까? 어차피 여인은 혼인을 하면 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혼인을 하면 다 이렇게 사는 것인데, 후비가 되어 황궁에 들었다 한들 뭐가 또 그렇게 대단한 복이겠습니까?”
오라비가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한 마디도 안 지고 저렇게 따박따박 말대답을 했구나, 내 누이 같았으면 이쯤에서 한 대 쥐어박았겠다 생각하며 욱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서 그것이 원망스러워서 아까 정자에서 내도록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계셨습니까? 폐하께서 말씀 한 마디 하실 때마다 무안을 주며 툭툭 끊어먹고, 사냥을 같이 나가자고 권하시는데 너나 가라고 단칼에 거절을 하고…… 그것이 황제를 뫼시는 후비의 태도입니까? 배운 것 없는 천민의 아낙이라도 지아비에게 그토록 불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환이가 대뜸 언성을 높이며 명이를 나무랐다. 환이의 호통에 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저렇게 바른말을 하다가 얻어맞았구나. 무호라면 누이의 성질과 무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저리 두려움 없이 맞서다니…… 인상 사납고 무뚝뚝하다고 어렵게만 여겼는데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어두웠구나. 무호야말로 진정한 충신이 아닌가?
“폐하께 후궁이 마마뿐입니까? 가문도 훌륭하고 미색도 뛰어난 후궁들이 어떻게든 폐하의 성심을 잡으려고 노심초사하고 있을 것인데, 마마께서는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엇나가십니까? 폐하께서 아무리 어진 분이라도 마마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어떻게 정을 주시겠습니까? 그러니 입궁한 지 3년이 지나도록 후사가 없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 거침없는 훈계에 욱이 허연의 손을 찾아 꽉 움켜쥐었다. 이쯤에서 공비가 무호에게 발차기를 날리겠구나 싶어서 욱은 좀 전부터 심장이 조마조마하던 참이었다.
“부모님께서 요즘 들어 부쩍 마마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십니다. 입궁한 지 3년이 지나도록 회임하셨단 소식도 없고, 성에서 다달이 황궁으로 전령을 보내는데 마마께서는 그 편에 안부를 전하는 짧은 쪽지 한 장 보내지 않으시니…… 마마께서 혹 소박이라도 당하고 후미진 별궁에 갇혀 지내시는 것은 아닌지, 거칠고 조심성 없는 성품 탓에 폐하께 박대를 당하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서 어머니께서는 생으로 병을 얻으실 판입니다.”
“두 분이 제 걱정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죽어도 황궁엔 들지 못하겠다며 그렇게 매달리고 사정을 해도 들은 척조차 아니 하시기에 하찮은 딸자식은 가문에 이득이 되면 그뿐, 황궁에 든 이후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줄 알았습니다.”
“마마!”
“폐하께선 제게 잘해주십니다. 후사가 없는 것은 제 일신의 복이 없어 그런 것일 뿐, 폐하께서는 일개 후궁 따위를 박대할 정도로 옹졸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으십니다.”
오라비가 누이에게 할 만한 독한 소리는 대강 다 나온 것 같은데도 공비의 태도가 여전히 냉담하기만 할 뿐이라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면 무호가 대체 공비에게 무슨 말을 더 했기에 그런 봉변을 당했을꼬? 저렇게 다투다가 화가 나서 먼저 손찌검을 한 것인가? 아니면 대놓고 쌍욕이라도…… 그때, 환이가 명이를 더욱 엄한 눈길로 노려보다가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혹, 승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 한마디에 명이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환이를 노려보았다.
“마마의 눈빛이 그렇게 어둡고 생기라곤 통 없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닙니까? 폐하의 호의를 그리 퉁명스럽게 뿌리치시는 것 또한 아직도 그놈을 마음에 두고 계신 탓이 아닙니까?”
무호로 분한 환이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얘기가 나오자 허연이 당황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아이들의 재연을 이쯤에서 중단시키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욱이 허연의 팔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사이 명이와 환이는 자신들의 재연에 한껏 심취해서 정말 무호와 공비가 된 듯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만하십시오. 어찌 제 앞에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십니까?”
“이제 영 끊어진 인연이니 그놈은 꿈에도 더 생각지 마시라고 그렇게 당부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철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이미 후궁에 드신 분이 어찌 다른 사내를 마음에 두어 일생을 그르치려고 하십니까? 승주 때문에 마마께서 폐하의 손길도 뿌리치고 이리 지내시는 것을 아버지가 아시면, 그 아이를 살려두시겠습니까?”
“오라버니!”
명이가 부들부들 떨며 버럭 소리를 쳤다. 그쯤에서 언쟁을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두려움을 모르는 무호가 결국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극언을 내뱉고 말았다.
“아버지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승주로 인하여 마마의 일생이 고독하고 불행해진다면, 내 손으로 직접 그놈을 죽여 없앨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명이가 이야악 하고 기합을 넣으며 환이에게 돌려차기를 날렸다.
명이의 발차기에 환이가 어헉……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바닥에 떨어지는 것으로 두 아이의 재연극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환이가 주섬주섬 털고 일어나 ‘이리 되었습니다’ 하고 아뢸 때까지도 욱은 넋이 나간 듯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했다. 흠…… 헛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앞으로 부른 것은 허연이었다.
“애들 썼다. 바로 무대에 올라 연극을 해도 손색이 없겠구나.”
“과찬이십니다, 마마.”
“그만 나가 쉬어라. 좀 있다 밤참을 챙겨 보낼 것이니 다른 아이들과 나눠 먹고…….”
저녁 먹은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밤참을 내린다는 말에, 두 아이들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마마.”
“그리고 향원궁에서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아라. 이미 폐하께서 아셨으니 그 일은 다른 사람들이 더 알 필요가 없느니라. 알았느냐?”
허연이 당부를 하며 아이들의 등을 다독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두 아이들이 헉 하고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왜?”
“송구하옵니다, 마마. 실은 다른 아이들이 향원궁에서 있었던 일을 궁금해하기에 벌써 방에서 한 번 재연을…….”
명이와 환이의 대답에 허연이 허허……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바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내 명을 전하거라. 생과청에 일러 맛있는 과자와 수정과를 보내줄 것이니 그것을 먹고 오늘 보고 들은 것은 다 잊어야 한다.”
허연의 명에 아이들이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마마.”
“바로 가서 그렇게 이르겠습니다, 마마.”
한동안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잠잠하던 욱이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비밀 지킬 것을 당부하는 허연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러곤 뒷걸음으로 중문을 넘어서는 환이와 명이에게 심부름 한 가지를 보탰다.
“문 앞에 윤 내관이 붙어 있을 것이다. 안으로 들라고 전해라.”
오늘 밤참으로 무엇이 나올까, 귀인께서 생과청에 직접 명을 내리신다니 평소에 먹기 힘들었던 귀한 것을 먹을 수 있겠다 싶어 환이와 명이가 잔뜩 들떠서 침전을 나섰다. 그러곤 바로 중문 옆에 서 있는 윤 내관을 발견하고는 눈치도 없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상선 영감,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정 내관 나리도 같이 계셨습니까?”
“태감 나리! 어디 가십니까?”
중문에 붙어 서 있던 세 내관이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지만 오랜만에 황제와 귀인 앞에서 마음에 드는 재연 연기를 선보인 탓에 흥분한 아이들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악의 없는 고자질로 입장이 난처해진 세 내관이 난감한 얼굴로 꾸물거리자 안에서 다소 기운 빠진 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고 있느냐? 셋 다 안으로 들라!”
윤 내관, 정 내관, 고 내관이 서로 먼저 들어가라고 다퉈가며 뻘쭘한 얼굴로 침전 안으로 들어섰다.
“불러 계시옵니까?”
세 내관이 욱과 허연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허연은 아이들의 재연을 지켜보는 사이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마시는 중이었고, 욱은 그 옆에서 손으로 얼굴을 괸 채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다소 놀란 것 같기는 해도 언짢거나 화가 난 표정은 아니라서 윤 내관이 마음을 살짝 놓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관들이 문 앞에 와서 나란히 서자 욱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내관들을 건너다보았다.
“너희들은 이 일을 어찌 생각하느냐?”
욱의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세 내관이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치미를 딱 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일이라 하심은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지…….”
그 와중에 고 내관이 재빨리 대열을 이탈해서 허연 옆에 가서 붙었다. 그러곤 다 식은 차를 어찌 드시냐는 둥, 소인이 한 잔 다시 끓여 올리겠다는 둥 아부를 떨다가 욱의 매서운 눈총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섰다.
“장지문에 귀를 붙이고 서 있었으면 너희들도 아이들의 얘기를 모두 들었을 것이 아니냐?”
욱의 추궁에, 매사에 두려움이 없고 뭐든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툭툭 내뱉는 정 내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듣기는 들었으나 그 짧은 몇 마디로 어찌 정황을 알겠습니까? 남매간에 다투다가 흥분하여 막말 몇 마디 주고받은 것으로는 깊은 사정을 알기 어렵습니다.”
정 내관의 대답에 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욱을 돌아보았다.
“정 내관의 말이 옳습니다. 아이들이 엿들은 것만으로는 알아냈다고 할 만한 정황이 없으니 이 일은 그냥 덮으시지요.”
“알아냈다고 할 만한 정황은 없으나, 몇 가지 단서는 얻지 않았는가?”
욱이 마치 포청의 관원이라도 된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대답해보게. 공비와 무호가 주고받은 말 중, 핵심적인 단어가 무엇이었는가?”
“…….”
“뭔가 공비의 심경을 뒤흔든 말이 있었을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밤새도록 공비 험담을 하도록 그냥 버려둘 것을 공연히 일을 키웠나 보다 후회하며 허연이 입을 다물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욱이 만만한 세 내관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선?”
“아마…… 입궁한 지 3년이 지나도록 회임 소식이 없다는 말이 공비마마께는 심히 거슬리지 않았을까…… 사료되옵니다.”
“고 내관은 어찌 생각하는가?”
“배운 것 없는 천민의 아낙이라도 그리 불손하지는 않겠다는 말은…… 아무리 누이동생이라도 그처럼 지체 높으신 귀부인께 올릴 말씀은 아니지요. 무 장군이 크게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두 내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둘러대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욱이 이번엔 정 내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욱과의 관계가 윤 내관이나 고 내관과는 좀 다른데다 매사 직설적인 정 내관은 두 내관들처럼 쩔쩔매며 말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욱을 마주 보며 벌컥 언성을 높였다.
“이미 다 끝난 싸움에 핵심은 찾아서 뭐합니까? 그냥 모른 척 넘기십시오. 사내대장부가 부인의 과거지사를 시시콜콜 캐는 것이 아닙니다!”
후궁의 사통이란 내명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범죄로, 발각 시엔 그 처벌이 대역죄에 버금갈 정도로 참혹했다.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참형을 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속된 전각의 궁인들도 화를 면할 길이 없으며 자칫하면 그 후궁의 가문까지 엎어질 정도로 여파가 큰 사건이기 때문에, 후궁의 부정은 확실한 증거나 증인 없이는 감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사통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보느냐는 각자 나름대로의 관점이 있겠지만, 후비와 그 오라비의 대화 중에 아마도 사내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름이 언급되었고 그로 인해 둘 사이에 폭행 사건이 벌어진 것은 얼마든지 수상쩍게 볼 수 있는 정황이었다. 하지만 공비의 경우는 3년 전 열일곱 살의 꽃 같은 나이에 후궁에 든 이후, 첫날부터 황제에게 소박을 맞는 바람에 여태 머리를 올리지 못한 채 한창 좋을 나이를 외롭고 서글프게 보내고 있었고, 친정이 멀고 먼 탓에 외간 사내는커녕 친정 어미조차 영운궁에 드나든 일이 없었으니…… 후비의 첩지를 받기 전에 있었던 일을 문제 삼아 죄를 묻는 것은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내관들의 생각이었다.
정 내관의 거친 훈계에 윤 내관과 고 내관이 더욱 겁먹은 얼굴로 욱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화가 나거나 불쾌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는 듯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인의 과거지사를 캐자는 것이 아니라…… 궁금하지 않으냐? 그 승주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욱의 입에서 문제가 될 만한 핵심적인 단어가 나오자 허연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욱은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무 생각도 없는 천둥벌거숭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공비에게 정인이 있었단 말인가? 허, 참…….”
“폐하, 그것이 캐는 것입니다.”
허연의 단속에 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일까지 벌어졌는데 좀 캐면 안 되는가? 내 집안 담장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나도 어찌 된 일인지 정황은 알아야지.”
“자칫 아무것도 아닌 일이 큰일이 되고 죄 없는 자가 죄인이 될 수도 있으니, 그 일은 더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공연한 말씀을 올려 공비께 누를 끼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허연의 우려에 욱이 도리어 기분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어찌 보고 그대까지 그런 말을 하는가? 내가 설마 공비가 입궁도 하기 전의 일을 트집 잡아 죄를 만들겠는가?”
“송구합니다. 폐하는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허연이 미소를 지으며 욱의 손을 잡아 다독거렸다. 그러곤 쓸데없는 소리 더 하기 전에 데려다 재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욱은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허연의 손목을 잡아서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이 일엔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동하는구먼. 솜씨 없는 목수가 무딘 칼로 대강 깎아서 던져놓은 것처럼 거칠거칠하고 무뚝뚝한 공비에게 연심이 있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또한 공비가 저 혼자 짝사랑을 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인지 그것도 궁금하고…….”
“폐하…….”
“게다가 그 승주라는 자가 공비의 정인이었다면 이번 사건은 공비의 포악한 성품만을 탓할 일이 아니지. 마음에 두었던 자를 죽여버리겠다고 면전에서 그리 폭언을 하다니…… 공비의 돌려차기에 무호의 목이 부러졌다고 한들 어찌 억울하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뭘 어쩌고 싶으신 겁니까?”
허연의 물음에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잠깐 생각을 정리한 욱이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그 승주라는 자에 대해 알아보게.”
욱의 명령에 윤 내관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알아보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오나 대현성이 도성에서 먼 곳이니 심부름꾼이 갔다 오자면 다소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하는 자인지, 어떻게 생긴 자인지, 공비와는 어떻게 알고 지냈는지 궁금하구먼. 문제 생기지 않도록 조용히 알아보게.”
윤 내관에게 명을 내리고 난 욱이 그윽한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서 허연이 장계를 뒤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욱은 허연의 손에서 장계를 빼앗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그를 침상으로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히죽 웃으며 느긋한 음성으로 허연을 나무랐다.
“오늘따라 보채기는……. 밤이 깊었으니 내 어련히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주지 않을까 봐 이리 조바심을 내는가?”
“으…….”
잠결에 몸을 뒤척이던 무호가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무호는 앞으로 2~3일간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관들의 지시로 결국 퇴궐도 하지 못한 채 향원궁 침전에서 불편한 하룻밤을 보내고 눈을 뜬 참이었다.
누이동생과 다투다가 그 발차기에 걸려서 혼절을 한 것만 해도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인데 설상가상 그 일을 황제가 알고 달려와 자신의 상태를 보고 혼비백산을 했으니, 무호는 밤새 이것이 꿈이 아닐까, 차라리 장족과 큰 전투를 벌이다 심한 부상을 입어 막사에 누워 있는 것이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속으로 한탄을 하며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을 보냈다.
내가 어쩌자고 수진이 앞에서 그런 소리를 내질렀으며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그렇게 가까이 서 있었던고? 그 아이 성질머리와 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불현듯 어제 있었던 일이 선하게 떠올라서 무호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망할 것!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나는데다, 하나뿐인 누이라 내 저를 그리 아끼며 아버지께 꾸중을 들어가면서도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못하게 말린 적이 없건만, 어찌 내게 이리 한단 말인가? 어렸을 때엔 노상 내 옷자락을 붙들고 다니며 오라비에게 시집갈 것이라고 노래를 하더니만 이젠 승주 그놈 이름 좀 들먹였다고 이런 패악을 부리다니……. 정인이 생기면 오라비는 이토록 찬밥이란 말이냐?
그렇게 속으로 누이를 원망하던 무호가 침상에 둘러쳐진 장막이 휘날릴 정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황제가 이 꼴을 다 보고 그리 황망한 얼굴로 나갔으니 필경 수진이에게 달려갔을 터, 이 노릇은 또 어찌할꼬? 혹, 수진이가 이 일로 책망을 듣고 뭔가 벌이라도 받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영재 그놈이 눈치도 없이 수진이가 소싯적에 호랑이며 멧돼지 사냥 다닌 일을 떠벌리는 바람에 용안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졌으니…….
어제 오찬석에서 황제가 누이를 따로 불러 술도 내리고 다정하게 말도 걸고, 사냥을 같이 나가자고 권유하며 마음 써주는 것으로 보아 후미진 변방에서 온 한미한 가문의 딸이라고 홀대를 당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번 일로 누이가 황제의 눈밖에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서 무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 누구라도 불러서 어제 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고 황제에게 알현을 청해서 제대로 변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급증이 나서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다. 그때,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싶더니 침상에 둘러진 장막이 휙 젖혀졌다.
“일어나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내 몸은 걱정할 것 없고…….”
익숙한 목소리와 기척에 무심코 그렇게 대꾸하던 무호가 다음 순간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곤 그 충격에 그만 억…… 하고 비명을 지르며 침상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으십니까? 의관들이 앞으로 2~3일은 고개도 돌리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승주야, 네가 어찌…….”
“그렇지 않아도 의관이 탕약을 갖고 들었기에 장군을 깨우려던 참이었습니다. 부축을 해드릴 테니 조심히 일어나보십시오.”
승주가 들고 있던 약사발을 협탁에 내려놓고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무호를 부축하려고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무호는 승주에게 몸을 맡기는 대신 팔을 뻗어 그 멱살을 틀어잡았다.
“네놈이 어찌 여기에 있느냐? 어떤 놈이 너를 황궁에 들여보냈느냐?”
“저도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게 아닙니다. 이곳은 황궁이니 내관이며 의관이며 장군을 보살펴줄 사람들은 부족하지 않겠지만, 모두 낯선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 연유로 낮 동안만이라도 가까운 측근이 곁에서 보살피는 것이 안정에 더 좋을 것이라며 내관이 사신각에 와서 입궁할 사람을 청하기에 온 것입니다.”
“다른 놈들은 뭘 하고? 영재며 춘수며…… 다들 발목이라도 부러졌느냐?”
“장군께서 형제처럼 아끼는 그 부장들은 지난밤 사신각으로 거처를 옮긴 후,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한다는 옥로주를 물처럼 퍼마시고 모두 뻗어 있습니다.”
승주의 대답에 무호가 에잇! 하고 신경질을 내며 승주의 멱살을 놓고 말았다.
“변변치 못한 것들……. 내가 이러고 있는데 그놈들은 사신각에서 술타령을 했단 말이냐?”
“말도 마십시오. 촌에서 왔다고 얼마나 촌티를 내는지, 오가는 내관과 궁녀들 보기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담담하게 부장들 욕을 하면서 승주가 무호를 일으켜 앉혔다.
무호가 고개를 빳빳하게 고정한 채 힘들게 탕약을 마시는 동안 승주가 침전을 슥 훑어보았다.
“그래도 황궁의 인심이 야박하지는 않은가 봅니다. 부상을 입어 움직이기 어려운 형편이라고는 하지만 변방에서 성벽이나 지키다가 온 이름 없는 장수에게 어의를 붙여 치료를 받게 해주고, 이리 번듯한 거처를 내어주다니…….”
“폐하께서는 어진 분이시다.”
무호의 대꾸에 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재 형님과 다른 형님들도 저녁 내내 폐하를 뵌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풍채도 좋으시고, 또 어찌나 미남이신지 용안에서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았다고……. 또한 아씨께도 그렇게 다정하시더라고…….”
“들은 대로다. 폐하와 공비마마는 한 쌍의 원앙처럼 잘 어울리시더구나.”
“당연히 그랬겠지요. 아씨 또한 지존의 짝으로 부족함이 없는 분이 아니십니까?”
승주가 무호를 다시 자리에 눕혔다. 그러곤 무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느냐?”
“장군은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셨습니까?”
“…….”
“폐하께서 처남 대접도 섭섭지 않게 하셨고, 아씨께서도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시다면서요? 그런데 대체 무슨 말씀을 올리셨다가 이런 변을 당하셨습니까?”
승주의 거듭된 질문에 무호가 음……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냥 좀 다툰 것뿐이다. 마마의 성격을 몰라서 묻느냐?”
“아씨께서 성품이 다소 거칠기는 해도 어지간한 일로는 이러실 분이 아닌 것을 아니까 묻는 것입니다. 대체 아씨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무호가 대답 대신 승주를 노려보았다. 허옇고 비리비리하고 매사에 냉담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대체 이런 놈의 어느 구석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단 말인가? 말 잘 타고 활 잘 쏘고 성격 화통하고…… 도무지 나무랄 데라곤 없는 누이동생이건만, 사내 보는 눈은 어찌 이토록 맹탕인고? 미련한 것 같으니…….
“너는 알 것 없다.”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듯 유감이 잔뜩 실린 눈길로 승주를 노려보던 무호가 잘라 말하고 눈을 감았다.
무호가 입을 다물자 승주도 더는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정황을 캐묻지 않았다. 대신 침상에서 좀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서책을 꺼내 들었다.
“뭘 하는 거냐?”
얼굴도 보았겠다, 가져온 탕약도 한 그릇 비웠겠다…… 이제 인사하고 궁에서 후딱 나가겠거니 생각하던 무호가 승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서책이나 보려고요.”
“그만 가거라. 여긴 네가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
“고작 하루 쉰 것으로 여독이 풀리겠느냐? 숙소로 돌아가서 더 쉬든가 도성 구경을 하든가, 아니면…… 도성에 서신을 주고받는 친구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자라도 찾아가 만나든가…….”
무호의 재촉에 승주가 서책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마땅찮은 눈길로 무호를 쳐다보았다.
“저도 당당하게 출입패를 받고 들어왔는데, 뭘 그렇게 서둘러 쫓으십니까?”
“네놈이 궐 안에서 얼쩡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그런다.”
무호가 승주의 눈길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무식하고 거친 대현성의 부장들 틈에서 비리비리한 책벌레라고 조롱이나 당하는 승주였지만, 저렇게 배 속이라도 뒤집어 볼 듯 예리한 눈길로 사람을 노려보면 누구든 별로 감추는 것이 없더라도 공연히 뒤가 켕기고 주눅이 들어 눈길을 피하기 일쑤였다. 남다른 총명함과 함께 그런 기백이 있었으니 영주인 무영준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서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었고, 무호도 어딜 가나 승주를 데리고 다니며 기록이나 문서 작성을 전적으로 맡겼으며, 그 외에도 조언을 구할 일이 있으면 다른 부장들을 밀치고 승주의 의견부터 묻곤 했던 것이다.
“저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좀 있으면 궁인이 아침을 가져올 것이니 드시는 것을 도와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네놈이 없다고 내가 밥을 못 먹겠느냐?”
어떻게든 승주를 쫓아내려고 무호가 기를 썼다. 하지만 운신조차 하지 못하는 무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서 승주도 여유만만하게 버텼다.
“좀 전에 탕약도 반이나 흘리시던데요?”
“…….”
“아침 드시고 반 시진 정도 쉬시면 의관들이 들어 침도 놓고 뜸도 뜨고 필요한 시료를 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기왕 들었으니 의관에게서 경과는 듣고 가야 다른 형님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전할 것이 아닙니까?”
차분하게 대꾸하고는 서책을 펼쳐 들고 바로 독서 삼매경에 빠져든 승주를 무호가 사나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무호의 눈총을 잠시 견디던 승주가 한숨을 쉬며 책을 내려놓았다.
“후궁들은 특별한 일이 없이는 외궁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여기 잠시 머문다고 해서 아씨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니, 그렇게 노려보며 기운 빼지 마십시오.”
“궁에 들 때 그런 기대도 없었느냐?”
“장군께서 아씨 성질을 건드려서 이 지경이 되지 않으셨다면 제가 궁에 들어올 일도 없었겠지요.”
“하여튼 머릿속에 먹물 든 것들이라니…….”
무호가 공연히 신경질을 내며 투덜거렸다.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분명히 말을 하는 법이 없지. 무슨 말이든 돌리고, 비틀고, 딴소리나 지껄이고…….”
무호가 순한 사람은 아니지만 저렇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도 아닌데, 아무리 누이동생에게 얻어터져서 꼼짝 못하고 자리보전하는 처지가 되었다고는 해도 까탈이 심하다 생각하며 승주가 또다시 송곳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무호를 살폈다. 하지만 곧 무호의 심기가 불편한 진짜 이유 따위 알아서 뭣하랴. 이미 지난 일이고 끝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들고 있던 서책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 일어섰다.
“제 꼴이 그렇게 보기가 싫으시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침 챙겨 드시고, 시료 잘 받으십시오.”
“오냐, 멀리 안 나간다.”
무호가 퉁명스레 대꾸하며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밖이 다소 술렁인다 싶더니 향원궁을 돌보던 내관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황제 폐하 드시옵니다.”
향원궁 침전에 들어선 욱이 황제 폐하 드셨다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무호를 보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룻밤을 지내고도 혼자 일어나 앉지를 못하는구나. 그러게 입이 방정이지, 대체 뭣 때문에 그런 소리를 지껄여서 화를 자초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변방에서 가장 골치 아픈 외적이 기회를 엿보며 움찔거리고 있는 이 위태로운 때에 나이 든 아비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동북쪽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장수가 저리 뻗어 있으니…… 이 소식이 변방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전쟁을 피할 길이 없겠구먼. 그렇게 속으로 툴툴거리며 욱이 침상으로 다가갔다.
“일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있게. 그러다 덧나면 아예 황궁에 눌러살게 되지 않겠나?”
욱이 침상 옆에 다가가 앉으며 무호를 위로했다.
“폐하, 공무로 인하여 바쁘실 때에 어찌 이곳까지…….”
“이제 곧 점심때라 영운궁으로 가는 길에 생각나서 들렀네. 황제도 점심은 먹어야지.”
누이동생 얘기가 나오자 무호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구석에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는 승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마마께…… 가시옵니까?”
“공비도 이 일로 후회가 많은 듯 보였네. 어제 내가 영운궁에 갔을 때엔 이미 얼굴이 붓도록 울고 있다가 내 앞에 꿇어앉아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용서를 빌더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공비도 자네가 미워서 진짜 목이라도 부러뜨리고자 이리했겠나? 아직 어린 누이가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저지른 일이니, 내 면목을 봐서라도 마음을 풀게.”
“폐하…….”
그렇지 않아도 누이동생의 일로 지난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걱정이 많았던 무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또한…… 좋은 일은 아니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 했으니 휴가 받았다 생각하고 몸조리하며 푹 쉬게. 부장들 역시 먼 길 오느라 함께 고생했으니 도성 구경도 하며 쉬어가면 좋지 않겠나?”
“미천한 소신을 이토록 살펴주시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침 맞고, 뜸 뜨고, 쓴 탕약 먹고 하려면 고생이 많겠구먼. 몸조리 잘하게.”
황제의 위로와 너그러운 처분에 감동한 무호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다가 억…… 하고 신음을 삼키며 다시 자리에 쓰러졌다. 그 바람에 놀란 승주가 고개를 들고 말았다.
“장군…….”
그제야 구석에 사람이 엎드려 있었던 것을 깨달은 욱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수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쓰러졌으니 그 부장들이 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자는 어제 연회에서 보지 못했던 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놈은 제가 데리고 다니는 하인입니다, 폐하.”
“아…….”
무호의 설명에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호는 대현성의 장군일 뿐 아니라 영주의 후계자이니 어딜 가든 하인 서너 명쯤 거느리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관이 병구완할 사람을 찾는다기에 황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덜컥 들어온 모양인데…… 이제 금방 내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무호가 허둥거리며 변명을 하자 욱이 뭐 그럴 것 있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인이라면 수발드는 것이 거칠거칠한 무장들에 비할 바가 아닐 터…… 잘되었구먼. 여기 있는 동안 곁에 두도록 하게.”
그렇게 이르고는 욱이 침전을 나섰다. 그러다 문지방을 넘기 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무호는 긴장이 풀린 듯 침상 위에 축 늘어져 있었고 하인은 그때까지도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있었다. 제대로 본 것이라곤 잔뜩 웅크린 등판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니 묘하다 생각하며 욱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영운궁은 칠궁에서도 가장 깊고 구석진 곳이었다. 엄연히 칠궁 권역이긴 했지만 그 위치가 넓은 후원의 끄트머리로 여섯 개의 궁전이 모여 있는 육궁에서도 한 식경은 더 들어가야 닿는 곳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외궁인 향원궁에서 영운궁까지는 쉬엄쉬엄 가자면 반시진도 넘는 거리였다.
욱이 그간 영운궁에 간다면서도 후원 초입에 있는 정자에서 걸음을 멈추고 공비를 불러내 점심만 뚝딱 먹고 일어섰을 뿐, 좀처럼 궁문을 넘지 않았던 것도 실은 한 식경이나 더 걸어서 영운궁까지 가기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폐하, 걷기가 힘드시면 옥교에 오르시지요.”
“됐다. 거의 다 왔는데, 옥교에 오르락내리락하기도 귀찮구나.”
“귀인께서 같이 나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육궁을 지나쳐 후원 입구에서부터 귀찮고 배고파서 씩씩거리는 욱의 눈치를 살피며 윤 내관이 그렇게 비위를 맞췄다.
“그러게 말이다. 어차피 청량전에 머물고 있으니 뚝딱 일어서면 될 것을, 굳이 장계를 마저 보겠다며 꿈쩍을 않으니…… 장계가 낭군보다 중하단 말이냐? 그 사람이 날이 갈수록 내게 소홀하구나.”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귀인께서도 소싯적엔 전장을 쓸고 다니시던 분이니 변방의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여 조정에 도움을 주려고 그러시는 것이지요.”
윤 내관의 말에 욱이 짜증을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귀인은 과인과 같이 다니는 것이 귀찮고 창피한 것이다. 가만 보니 아침부터 장계를 들여다보며 필체가 아름답네, 문장이 간결하고 품위가 있네…… 한 장 넘길 때마다 감탄을 하며 소설책 보듯 재미로 보더구나.”
“귀인께서는 참으로 안목도 높으십니다. 최근 3~4년 전부터 대현성에서 보내오는 장계는 명문과 명필로 정평이 나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장계가 당도하면 승상부터 상서부 하급 시랑까지 순서를 정해가며 쫙 한 번씩 돌려 보는데,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셨나 봅니다.”
윤 내관의 설명에 욱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몇 년간 대현성에서 온 장계를 받아 빠짐없이 보았어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현성에서 보낸 장계가 그렇게 명필이었느냐?”
욱의 물음에 윤 내관이 아차 싶어서 얼른 허리를 굽혔다.
“소인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대감마님들 하시는 말씀을 몇 마디 들었을 뿐입니다.”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흥, 짧은 콧바람을 날렸다. 그러곤 다시 영운궁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장계 따위야 알아보기만 하면 그만이지, 서화도 아닌데 문장이며 필체가 좋아봐야 무슨 소용이냐?”
“지당하십니다, 폐하.”
윤 내관이 그렇게 아부를 떨며 종종걸음으로 욱을 뒤쫓았다.
영운궁 궁문을 넘어선 욱이 뚱한 눈길로 마당 안을 살폈다. 분명 어제 저녁까지 잡초만 무성했던 화단엔 색색의 가을꽃이 가득 피어 있고, 마당에 깔린 박석 틈으로 무릎까지 올라올 듯 무성하던 풀도 깨끗하게 뽑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진흙탕이었던 연못엔 맑은 물이 가득 차 있고 그 위엔 때늦은 연꽃까지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또한 공비와 상궁 한 사람 외엔 인적이라곤 없던 궁 안엔 얼핏 봐도 열 명이 넘는 내관과 궁녀들이 바삐 오가며 전각을 손보는 중이었다. 어제 보았던 그 폐궁의 정경과는 확연히 다른 영운궁 풍경에 멈칫했던 욱이 다음 순간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고 있는 윤 내관을 슬쩍 노려보았다.
“밤새 고생했겠구나. 전각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폐하.”
어제 저녁, 욱이 공비로 인해 기함할 지경으로 놀라서 심사가 몹시 언짢은 중에도 영운궁의 허름한 살림을 눈여겨 살피는 것을 눈치 챈 윤 내관은 이미 털린 외양간 문짝을 새로 해서 다는 심정으로 조 내관에게 영운궁의 신속한 정비를 지시했다. 그 바람에 밤엔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도 분간을 못하는 조 내관이 내관 수십 명을 동원해서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숨 돌릴 틈도 없이 영운궁을 쓸고 닦으며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마당이며 전각의 외관은 어제 저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짱하게 치워졌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어딘가 허술하고 어수선한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너는 할 말이 없어도, 나는 들어야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영운궁 사정은 좀 있다가 들을 것이다. 우선 안에 내가 왔다고 일러라.”
“예, 폐하.”
황제 폐하 행차하셨다는 윤 내관의 고함에 허둥거리며 달려 나온 것은 권 상궁이었다. 어제 저녁 황제가 달려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연이틀이나 행차가 이어질 줄은 몰랐던 터라 권 상궁이 황망히 욱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공비는 뭘 하고 상궁만 나오느냐? 옷이라도 갈아입느냐?”
잠깐 서서 기다려도 공비는 나타나질 않고 권 상궁만 쩔쩔맬 뿐이라 욱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마마께서는 몸이 불편하셔서…….”
“공비가 아프단 말이냐?”
욱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체격도 어지간한 사내 못지않고 기운도 펄펄하고, 무엇보다 한창 젊은 나이라 공비는 그간 다른 일로는 말썽을 많이 부렸어도 건강 문제로 주변을 걱정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오라비까지 단매에 때려눕힌 천하장사가 하룻밤 사이에 병을 얻었단 말이냐?”
“저, 그것이…… 어제 일로 상심이 지나치셔서…….”
아무리 상심이 지나쳐도 그런 장정이 하루아침에 쓰러지는 경우가 있나 싶어서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권 상궁을 지나쳐 전각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영운궁의 침전 역시 내관들이 밤새 궁내청에서 실어 나른 서화와 장식품으로 지난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빈집이나 진배없던 전각을 불과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바꿔놓다니, 윤 내관이 자신에게 두루두루 요긴한 최측근이긴 하지만 너무 약삭빠르고 얄밉다는 생각을 하며 욱이 다시 한 번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거듭되는 욱의 눈총에 윤 내관이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가는 길에 들어도 늦을 것이 없고, 일단 몸이 아프다는 공비를 살피는 일이 먼저라서 욱이 장막이 둘러쳐진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지간한 위병대 병사보다도 더 체력이 좋은 공비가 갑자기 병을 얻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한편, 어제 저녁에 너무 심하게 울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던 것이 떠올라서 욱의 마음도 매우 찜찜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그렇게 물으며 욱이 장막을 젖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으…… 하는 탄식과 함께 도리질을 치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어찌…….”
욱의 반응에 놀란 윤 내관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침상 곁으로 다가서다가 코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장막 안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 내관이 내관들에게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라고 이르는 사이 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인사불성으로 쓰러져 있는 공비를 노려보았다.
“아, 진짜…….”
욱이 벌컥 짜증을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연유야 어찌 되었건, 오라비에게 그런 짓을 했으면 반성하고 자숙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폐하, 마마께서는 아마도 약주를 좀…….”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더니, 어제 일로 상심이 지나쳐서 병을 얻었다는 게 아니라 술을 퍼마셨다는 말이었더냐?”
“마음이 고달프면 술이 땡기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 아니옵니까?”
윤 내관의 두둔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아서 욱이 창가로 다가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내 어쩌다 저런 화상을 후궁에 들였던고? 황실의 혼인이란 어차피 정략적인 것이고 명문가의 규수라면 기본적인 규례는 갖추고 있을 것으로 믿고서 그 가문과 아비의 이름만으로 간택을 했을 뿐 사람됨은 살피지 않았더니, 일곱 번 중에 한 번은 이런 참패를 겪는구나. 성질머리가 저 지경이면 기운이라도 없든가…… 어차피 초야도 그냥 건너뛰었겠다, 마음 같아선 혼인 자체를 없던 일로 치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지만 제 팔자를 생각하면 그것도 못할 짓이니, 이야말로 진퇴양난이로다.
황제가 침전에 들어서 머리카락을 잡아 뜯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그런 상황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공비를 권 상궁이 잡아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가 공비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온 궁인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 어제 오늘의 일로 완전히 눈 밖에 나서 아예 궐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권 상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마, 마마…… 일어나십시오. 폐하께서 드셔 계시옵니다.”
권 상궁이 곧 울 것처럼 울먹이며 애타게 공비를 흔들었다. 하지만 폭음을 하고 곯아떨어진 공비는 전혀 깰 기미가 없었다.
“아이고, 어쩌나…… 마마…….”
어떻게든 공비를 깨워 이제라도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용서를 빌게 하려던 권 상궁이 결국 눈물을 흘리며 대신 욱의 앞에 꿇어 엎드렸다.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폐하. 소인이 마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여…….”
“…….”
욱이 거친 숨만 쌕쌕 내쉴 뿐, 아무런 대꾸가 없자 윤 내관이 대신 나서서 권 상궁을 다그쳤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약주를 얼마나 하셨기에…….”
그렇게 묻던 윤 내관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제야 방구석을 굴러다니는 대여섯 개의 빈 술병을 본 까닭이었다. 술병에 붙은 붉은 봉인의 금박을 보니 소홍청주가 분명한데 저 독한 술을 여섯 병이나…….
“아니, 영운궁은 식재료도 부족할 정도라고 들었거늘…… 저 술은 어디서 구했는가?”
“송구합니다, 상선 영감. 지난밤에 조 내관이 내관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전각을 치우고 꾸미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라도 구해다 주겠다고 하여…….”
권 상궁의 대답에 윤 내관이 따라 들어와 중문 밖에 서 있던 조 내관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조 내관의 말에 저희 마마께서 다른 것은 별로 필요한 것이 없고, 심사가 복잡하고 괴로워 맨 정신으로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으니 술이나 좀 갖다달라고 하시니 조 내관이 구해다 준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 많은 술을…….”
윤 내관이 놀라서 중얼거리다 욱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어리신 마마께서 이리 과음을 하시도록 말리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으니…… 모든 것이 소인의 불찰입니다. 폐하, 소인을 벌하여주십시오.”
권 상궁이 거듭 죄를 청하자 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벌컥 짜증을 냈다.
“됐다! 아무리 만만한 것이 궁인이라고는 하지만 떡이 되도록 술을 퍼마신 당사자는 그냥 두고 곁에 있었던 너를 벌하겠느냐?”
“폐하, 마마께서는…….”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욱이 야단을 쳐서 권 상궁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침상에 쓰러져 있는 공비를 노려보았다. 잠시 침전에 쥐 죽은 듯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공비가 몸을 뒤척이더니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러고는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울먹이듯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승주야…….”
그 한 마디에 권 상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고, 윤 내관도 잘못하면 큰일이 나겠다 싶어서 욱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욱은 같잖다는 듯 공비를 노려보다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어쭈?”
몇 마디를 더 웅얼거리다 잠잠해진 공비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던 욱이 그대로 발길을 돌려 침전을 나섰다. 장정들도 한두 병 마시면 나가떨어지는 독한 술을 여섯 병이나 비웠으니 황제가 아니라 옥황상제가 왔다고 해도 공비가 오늘 안에 침상에서 일어나기는 그른 일, 더 버티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하오시면 점심 수라는 어느 전각에서…….”
“청량전으로 가자.”
“가시는 길은 옥교에 오르시지요.”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니, 걷는 것이 낫겠다.”
“예…….”
영운궁의 궁문을 넘은 욱이 터벅터벅 몇 걸음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여전히 활기라곤 없는 공비의 전각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장정이라도 그 술을 혼자 다 퍼마셨으면 몸이 온전치 못할 터, 어의를 불러 진맥을 하고 일어나면 해장국이라도 끓여 먹이도록 하라.”
“아, 예…… 바로 내관을 내의원에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욱이 청량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운을 뗐다. 그 한 마디에 아,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윤 내관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간 영운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전각 꼬라지가 허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공비는 볼 때마다 늘 입던 짙은 옥색 예복만 걸치고 있더구나. 또한 좀 전에 네 입으로 영운궁은 식재료도 부족할 정도인데 술이 어디서 났느냐고 묻는 것을 내가 직접 들었으니…….”
“모두가 소인의 불찰입니다. 앞으로는 육궁 마마님들의 안위를 좀 더 세심하게 살펴…….”
“공비의 태도가 거칠고 직설적이라서 후궁들 사이에 불평이 많은 것은 나도 안다. 혹, 공비의 기를 죽이려고 황후가 뭔가 처분을 내린 것이냐?”
“실은 미향궁에서…….”
“미향궁이라니?”
“향비께서 궁내청에 압력을 넣어 반년째 궁분을 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도 제대로 내주지 않아서 공비께서는 그간 연초에 하사받은 비단과 사가에서 마련해 온 패물을 팔아서 살림을 꾸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윤 내관의 설명에 욱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 같은 품계의 후비이거늘, 향비가 무슨 권한으로 공비에게 그런 처분을 내린단 말이냐? 비슷한 처지에 품계 따위로 윗사람 아랫사람 따지는 꼴을 보지 않으려고 품계도 균등히 하고, 대접도 똑같이 하고 있거늘…….”
“폐하께서는 마마님들을 공평히 대우를 하신다고 여기시지만, 향비는 슬하에 자녀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후궁에선 품계와는 상관없이 황제를 더 많이 뫼신 후궁, 자식 많은 후궁이 윗사람입니다.”
“…….”
“또한 향비께서는 제2황자의 생모가 아니십니까? 그런 분이 자식도 없고 폐하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후궁을 찍어 혼찌검을 내라고 하면 하찮은 내관 따위가 어찌 그 명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허면 황제인 나도 모르고 황후도 하지 않는 일을 향비가 멋대로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
욱이 발끈하자 윤 내관이 더욱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궁내청 배 내관은 이미 그 죄를 물어 한직으로 내쳤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연일 영운궁에 행차를 하시며 공비마마를 살펴주시니 궁인들이 어찌 공비께 방자하게 굴겠습니까? 그리고 그동안은 황후께서 회임과 태교로 후궁을 두루 살피지 못하셨으나 이제 무사히 황자마마를 생산하셨고 곧 전처럼 후궁을 다스리실 것이니 이 같은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윤 내관의 말이 길어질수록 내가 잘못 들인 후궁이 공비 하나가 아니구나 싶어서 욱이 어휴…… 하고 탄식을 토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후원 너머로 삐죽 솟은 미향궁의 지붕을 노려보았다.
“내 앞에선 항상 상냥한 척, 예의 바른 척, 여린 척하더니 제 위세를 이용해서 그런 짓을 꾸며 다른 후궁을 괴롭혔단 말이냐? 성격이 다소 가식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음험한 줄은 몰랐구나. 차라리 공비처럼 앞에서 들이받는 게 낫지, 하는 짓이 너무 악질이 아니냐?”
“그것을 이제 아셨습니까?”
무심코 대꾸하던 윤 내관이 당황해서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공연히 윤 내관을 노려보던 욱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걷다가 멈추고는 다시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향비건 공비건 내게는 모두 같은 후비들이다. 벌을 내려도 지아비인 내가 내려야지,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무슨 근거로 웃전, 아랫전 따져가며 서로 골탕을 먹인단 말이냐? 당장 공비에게 그동안 받지 못한 궁분을 지급하도록 하고 다른 후비들과 차등 없이 대접하도록 하라. 또한 차후로는 사사로운 분풀이에 궁인들이 부화뇌동하여 후궁을 핍박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 이 같은 일이 다시 생겨서 내 눈에 띈다면 그때는 모든 책임을 상선에게 물을 것이다.”
“아니, 그 책임은 일을 저지른 자에게 물으셔야지 왜 소인에게…….”
어지간한 일은 송구하옵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지당하시옵니다, 세 마디로 해결하고 넘어가던 윤 내관이 볼멘소리로 항의를 했다. 하지만 욱은 들은 척도 않고 청량전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따라오너라. 배고프다.”
궁내청에 갔던 신 내관이 미향궁으로 돌아온 것은 향비가 침전에서 낮잠 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점심을 거하게 먹은 후 한 시진 정도 자고 일어나는 것은 회임 중에 생긴 습관이었는데, 출산을 한 이후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탓에 향비는 날이 갈수록 몸매가 후덕해지고 있었다.
“왔느냐?”
머리에 꽂았던 비녀와 머리꽂이를 빼서 화장대 위에 수북이 쌓아놓던 향비가 신 내관을 돌아보았다.
“그래, 진목성에서 보냈다던 여우 가죽은 어떻더냐? 쓸 만하더냐?”
“예, 마마…… 근래 본 것 중에서는 제일 좋아 보였습니다.”
“가져온 것은 우선 곁방에 두어라. 지금은 피곤하니, 좀 쉬다 나와서 봐야겠구나.”
“마마, 실은…….”
“올겨울엔 나도 여우 모피로 만든 장옷을 한 벌 해 입어야겠구나. 황후에게는 이미 검은담비 외투가 있으니 내가 여우 모피 몇 장 갖다 쓰는 것으로 시비를 걸지는 않겠지.”
향비가 금팔찌 한 벌을 마저 빼서 화장대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아까부터 할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던 신 내관이 상궁들을 데리고 침전으로 들어가는 향비의 등에 대고 고개를 조아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실을 고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실은 모피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신 내관의 말에 향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냐? 모피를 가져오지 못하다니?”
향비의 앙칼진 추궁에 신 내관이 바짝 쫄아서 몸을 더욱 웅크렸다.
“궁내청에 들어온 물품은 모두 폐하의 것이니, 정해진 법이나 어명 없이 함부로 내어줄 수 없다고…….”
“뭣이라?”
“더욱이 여우 모피처럼 귀한 것은 후궁이 내키는 대로 집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황명으로 하사를 하셔야 비로소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며 후궁전 태감이란 자가 그런 기본적인 법도도 알지 못하느냐는 면박만 당했습니다.”
신 내관의 고변에 향비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가에 있을 때엔 말할 것도 없고, 후궁에 든 이후로도 향비는 원하는 것을 못 가져본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수모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배 내관 그놈이 실성을 한 것이 아니냐? 제놈이 누구 덕에 궁내청 태감직을 맡고 있으며 제 식솔들이 성 안에서 포목점이라도 하며 살고 있는데…….”
“마마, 배 내관은 어제 저녁에 태감직에서 잘린 이후, 궐 안에도 머물지 못하고 사신각으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소인이 궁내청에 갔을 때엔 휘명전 지밀에 있던 조 내관이 궁내청 태감의 직을 받아서 창고를 다 뒤집어엎다시피 난리를 피우며 남은 품목과 출납 대장을 맞춰보고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향비가 뭐라 말도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궁내청 배 내관은 향비가 막 입궁을 했을 때부터 뒤를 봐주며 수족처럼 부리던 내관이었다. 원자가 실명을 한 이후 후궁에서 향비의 위세는 막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배 내관도 자신이 미향궁으로부터 신임받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고, 미향궁에 보내는 물품은 무엇이든 최상품만 갖추어 보내며 향비의 비위를 맞췄었다. 궁내청 태감이라면 대전 상선만은 못해도 환관의 벼슬로는 상당한 것이고 황궁 살림을 실제로 맡고 있는 자리라서 그만한 실세도 드물었다. 일껏 손에 넣어 요긴하게 부려온 궁내청 태감이 하루아침에 잘려 나간 것은 황후의 황자 생산으로 낙심한 향비에게 또 한 번의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이냐? 그간 궁내청 일을 잘 처리해오던 배 내관이 무슨 일로 하룻저녁에 궐 밖으로 쫓겨 갔단 말이냐?”
졸음이 싹 달아난 향비가 화장대 의자에 다시 주저앉으며 신 내관을 다그쳤다.
“소인이 수소문하여 알아본 바로는 배 내관이 쫓겨난 것은 영운궁의 일과 관련이 있는 듯했습니다.”
신 내관으로부터 지난밤에 지밀과 궁내청 내관 수십 명이 불에 덴 듯 호들갑을 떨며 영운궁을 꾸민 일과 어제 오늘 이틀에 걸쳐 황제가 직접 영운궁에 행차한 사실을 전해 들은 향비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화장대를 내리쳤다.
“허면, 폐하께서 그 천한 것의 일을 아시고 배 내관을 궐 밖으로 내치셨단 말이냐?”
“마마의 비호를 받고 있는 궁내청의 태감을 한칼에 잘라낼 수 있는 자가 달리 있겠습니까?”
“그것이 입궁한 이후 첫날부터 소박을 놓으시고는 지난 3년간 영운궁에는 그림자도 안 비치시던 분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연이틀이나 그 후미진 곳에 걸음을 하셨단 말이냐?”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자 황성 못지않게 번화한 성읍을 다스리는 영주의 딸로, 세련되고 우아한 귀부인들 틈에서 자란 향비에게 험하고 외진 변방에서 온 공비는 처음부터 같은 후궁으로서 존중해야 할 상대가 아니었다.
공비는 험하고 가난한 성읍에서 온 무장의 딸이었으니 그 출신부터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옷차림도 초라하고 촌스러울 뿐 아니라 언행도 거칠고 투박해서 그 행동거지가 교육 잘 받은 궁녀만도 못했으니, 향비는 황후전 문후 때나 내전의 연회가 있을 때면 같은 품계의 비빈으로 공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조차 화가 날 정도였다.
그런 주제에 감히 궁 안에서 저 하고 싶은 말 다 지껄이며 자신에게까지 기어오르니, 그간 공비로 인해 향비의 혈압이 솟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성질 같아선 당장 궁 마당에 꿇어앉히고 단단히 혼찌검을 낼 일이었지만, 황후가 그런 눈치를 채고는 은근히 공비를 비호하며 감싸고도는 바람에 향비는 내내 가슴을 두드리며 분을 삭여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 마침 황후가 회임 중이라 내명부의 일에 일일이 참견하지 못하고 공비는 황제가 누이동생처럼 아끼는 은혜 공주와 다투다가 회임한 공주의 멱살을 잡아 흔드는 바람에 황제의 눈밖에 더욱 나고 말았으니, 기회는 이때다 싶어 궁분을 끊고 궁인들이 영운궁 근처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 것이었다.
신분 높은 자신이 출신이 미천하고 무례한 후궁의 버릇을 가르치고자 몇 달 궁분을 끊은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될 일도 아니었고, 혹 황후가 안다고 해도 잔소리 몇 마디 늘어놓고는 처분을 거두도록 하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게다가 황제는 공비와 애초에 아무런 정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천박한 언행을 누구보다 싫어했으니 자신이 공비를 어찌하든 관심도 두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우화원에 그자가 돌아온 후엔 줄곧 우화원을 들락거리시다가, 지난 며칠간은 태화궁만 잠깐씩 들여다보시던 분이 아니냐? 공비 그것이 대체 무슨 농간을 부렸기에…….”
“마마, 어제 대현성에서 사절이 와서 폐하께 귀한 백호 가죽을 바쳤고, 폐하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연회까지 따로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 사절단의 대표가 공비의 오라비인 무호 장군이라고 하니 폐하께서 그자의 성의를 보아 영운궁의 체면을 세워주신 게 아닐지요?”
“변방에서 성벽이나 지키는 무부 따위가 뭐라고…….”
“마마, 폐하께서 상선에게 명하시기를 공비에게 그간 받지 못한 궁분을 지급하고, 다른 마마님들과 차등 없이 대접하라고 하셨답니다. 또한 차후, 후궁 간의 사사로운 분풀이에 궁인들이 부화뇌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니…… 이는 마마를 경계하여 내리신 명이 아니겠습니까?”
“…….”
“마마, 폐하께서 부르시기 전에 먼저 가셔서 폐하께 사죄를 올리심이…….”
신 내관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향비가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실성을 했느냐? 사죄라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폐하께 사죄를 올린단 말이냐?”
향비의 불같은 신경질에 신 내관이 늘어진 찰떡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명도 두렵지만 향비의 패악과 신경질은 이미 후궁에 악명이 자자한 것이었고, 매일 그녀의 변덕과 짜증에 시달리는 미향궁 소속 궁인들은 향비의 발소리만 들어도 울렁증이 올라올 정도로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신이 경황이 없어서 그만…… 실언을 했사옵니다.”
처음엔 우화원, 그다음엔 황후의 회임 때문에 황제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도 억울한데 이젠 황제가 공비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이 야속하고 속이 뒤틀릴 정도로 시기가 난 향비가 좀처럼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연신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향비의 최측근인 오 상궁과 지 상궁이 마마님 성질 그만 건드리고 나가라고 신 내관에게 연신 눈짓을 했다. 궁인들의 태도에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일이 또 있구나 싶어서 향비가 다시 신 내관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냐?”
향비의 추궁에 신 내관이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별일은 아니옵고…….”
“썩 고하지 못할까?”
“실은 사신각에 머물고 계시던 수 대인께서 일가분들과 함께 사가로 돌아가셨습니다.”
신 내관의 보고에 향비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본가의 수리가 예상보다 규모가 커져서 일러도 다음 달 말에나 마무리가 될 것이라고 들었거늘…….”
“그것이…….”
사신각은 지방이나 외국에서 온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그 위치가 황궁 밖에 있을 뿐, 전각의 번듯함과 정원의 화려함이 황궁 안의 여느 전각에 뒤지지 않는 별궁이었다. 또한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기에 사신각을 관리하며 손님들의 시중을 드는 궁인들도 웃전을 뫼시듯 태도가 깍듯하고 민첩했으며 삼시 세 때 나오는 음식도 궁중의 그것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황궁에 당도해서 사신각에 머무는 것은 위세 있는 제후나 영주들도 큰 자랑거리로 삼는 일이었다.
친정 어미와 세 명의 올케들이 사신각 생활에 크게 만족하며 자신들이 사신각에 몇 달씩 머무는 것을 주변의 귀부인들도 크게 부러워하고 모두가 황제께서 향비마마를 지극히 총애하신다는 반증이 아니겠느냐고 입을 모으니, 본가의 수리가 끝난 연후라도 종종 사신각에 머물며 마마의 위세를 보여야겠다고 한 것이 불과 닷새 전의 일이었다. 그 며칠 사이에 본가의 수리가 끝났을 리 없고,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했을 리도 없는데 사가로 돌아가다니…….
“아뢰옵기 참으로 송구하오나…….”
“어허!”
신 내관이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향비가 노성을 토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제야 신 내관이 어제 대전 지밀에서 전해온 명을 향비에게 전했다.
“대현성에서 온 공비의 오라비가 객잔에 여장을 풀었다는 말을 들으신 폐하께서 멀리서 온 처남을 그런 곳에서 재우는 것은 민망한 일이라고 하시며…… 수 대인 일가를 이미 두 달이나 사신각에 머물도록 했으면 폐하께서는 처가를 대접할 만큼 하셨으며, 더욱이 요즘은 각처에서 사절들이 밀려드는 때라 처소가 없어서 나라와 황실의 귀한 손님이 저자를 떠돌며 방을 구하는 지경이니 수 대인 일가로 하여금 속히 사가로 나가 신하 된 도리를 지키게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
공비의 오라비 때문에 자신의 부모와 일가가 사신각에서 쫓겨난 것을 안 향비가 망연자실해서 숨을 멈췄다.
“사신각을 비우라는 명은 득달같고, 마마께서는 오수에 드신 때라 소신이 수 대인을 먼저 뵙고 명을 전했사온데, 대인께서 알았다고 하시며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마마의 심경이 편치 않으실 것이니 이 일을 굳이 아뢸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여…….”
“내, 이 요망한 것을 결단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향비가 탁자를 내리치며 신음하듯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황후의 황자 생산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향비에게 있어 공비에게조차 밀린다는 것은 결코 견딜 수 없는 수모였다. 황후는 자신이 입궁하기 이전에 이미 황후의 자
리에 올라 있었고, 슬하에 원자까지 두었으며 출신 또한 자신의 가문과 대등한 명문가였다. 하지만 공비는 그 어떤 면으로도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다.
“천한 것이 감히 폐하께 농간을 부려 내 사람을 궐 밖으로 내치고, 일가에게까지 해코지를 하다니…….”
노여움에 어깨를 떨며 중얼거리던 향비가 다시 신 내관을 돌아보았다.
“너는 다시 나가서 대체 폐하께서 무슨 연유로 지난 3년간 거들떠도 보지 않던 영운궁에 신경을 쓰시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알현장과 연회석에서 공비의 오라비란 자와 폐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도 소상히 알아 오너라. 또한 영운궁에 사람을 붙여서 그 패악한 것이 어딜 돌아다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여 내게 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