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재회
욱이 청량전에 도착했을 때, 오전 내내 장계를 들여다보던 허연은 같이 밥 먹자고 들른 시영과 함께 막 점심을 한술 뜨려던 참이었다.
“폐하…… 어인 일이십니까?”
허연이 숟가락을 들고 일어서며 의아한 얼굴로 욱을 맞았다.
“왜 놀라는가? 내가 못 올 곳에 왔는가?”
시무룩하게 대꾸하며 욱이 허연과 시영 사이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러곤 허연의 젓가락을 빼앗아 탁자 가운데 있던 오리고기를 한 번에 세 점씩 집어서 입안에 쓸어 넣었다.
“천천히 드십시오, 폐하. 그러다 체하십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욱을 말리며 허연이 고 내관에게 수라상 제대로 차리라는 손짓을 했다. 시영도 입이 짧고 허연도 점심은 가볍게 드는 편이라서 두 사람 앞에는 국수 한 그릇, 죽 한 그릇, 반찬 몇 가지가 전부였던 것이다.
“허기가 져서 그러네. 배가 고파서 오는 길에 주저앉는 줄 알았구먼.”
욱이 이번엔 허연의 그릇에서 국수 가닥을 반이나 건져서 한입에 밀어 넣었다. 그런 욱의 모습에 시영이 혀를 끌끌 차며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잠깐 기다리시면 수라청에서 새로 음식을 해서 올릴 텐데, 그사이를 못 참아 귀인이 먹던 국수를 빼앗아 드십니까? 체통을 좀 지키십시오.”
“여기 사람이라곤 귀인과 형님뿐인데 무슨 체통을 찾는단 말입니까?”
시영이 먹던 것도 한 숟가락 빼앗아 먹으려고 기웃거리던 욱이 약 냄새가 훅 풍기는 약죽인 것을 확인하고는 실망해서 젓가락을 쪽쪽 빨았다.
“아니, 대체 귀인과 형님의 점심상이 이게 뭡니까? 국수 한 그릇에 멀건 죽 한 그릇이라니…… 파촉으로 귀양 간 죄인도 이것보다는 잘 먹겠습니다.”
“점심이 아닙니까? 욕심 부려봐야 오후에 졸음이나 쏟아질 것이기에 간단히 먹는 것입니다.”
“형님이야 조금만 과식하시면 속 쓰리고 배 아픈 것이 고질병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욱이 멀건 국물만 남은 허연의 그릇을 들여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대는 내가 없다고 노상 점심을 이리 부실하게 먹고 치웠는가? 안 되겠구먼. 삼시 세 때 곁에서 챙겨주든가 해야지…….”
“안 챙겨주셔도 되니까 빼앗아 드시지나 마십시오.”
허연이 욱을 슬쩍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욱이 청량전에 들이닥친 지 채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지척에 있는 휘명전 조리각에서 보내온 음식이 응접실에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연의 점심을 다 빼앗아 먹고 대강 시장기는 속인 욱이 한 상 가득 차려지는 음식을 냄새부터 음미하며 고쳐 앉았다. 이미 자기 점심을 먹고 그릇을 치운 시영이 그 모습에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점심 한 끼 정도는 후궁에서 드셔야지, 어찌 종일 귀인하고만 붙어 계십니까? 귀인을 아끼시는 마음이야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이는 후궁에 계신 마마님들께는 심히 야박한 처사가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후궁에서 제일 먼 곳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 나온 길입니다.”
“예?”
허연과 시영이 욱을 쳐다보며 동시에 물었다.
“무호의 일도 있고 해서 영운궁에 갔는데, 글쎄, 공비가…….”
술을 퍼마시고 인사불성으로 뻗었더라고, 그것도 모자라 옛 남자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까지 하더라고…… 거침없이 일러바치려던 욱이 시영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공비마마가 왜요? 영운궁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파서 누워 있지 뭡니까? 그래서 그냥 돌아 나왔습니다.”
“저런…….”
공비가 아프다는 소식에 시영이 놀라서 욱을 쳐다보았다. 공비는 딱 보기에도 강골이라 평생 앓아누울 일이라곤 없어 보였고, 실제로 지난 3년간 그녀가 다른 말썽은 많이 피웠어도 몸 아프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프다니? 어디가요?”
“그냥…… 몸살인가 봅니다.”
욱의 엉성한 대답에 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살이라니? 후궁엔 그런 장정이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고된 일이 없을 텐데…….
“그래서 점심이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욱이 영운궁까지 갔다가 그냥 왔다는 말에 마음이 풀린 허연이 궁녀가 날라 온 메추리구이를 욱의 코앞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되었네.”
“무호도 몸이 아파 향원궁에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는데 공비마마까지 편찮으시다니…….”
“별일이야 있겠는가? 어제 그 일 때문에 마음도 상하고 기력도 떨어진 것이겠지. 어의를 보내 진맥을 하고 해장국을……, 아니, 탕약을 보내라 했으니 곧 괜찮아질 것이네.”
울적하게 대답하며 욱이 메추리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다리부터 야무지게 물어뜯었다.
허연이 욱의 앞 접시에 데친 버섯 무침을 수북이 올려주고 욱은 그것을 덜어내며 실랑이 벌이는 것을 무념무상으로 지켜보던 시영이, 찻잔을 집어 들다가 문득 무호의 일이 떠올라서 말문을 열었다.
“향원궁은 한 번 들여다보셨습니까? 무호는 좀 어떻습니까?”
“어제나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의관들도 사나흘은 지나야 차도가 있을 것이라 했으니 좀 더 경과를 봐야 할 듯싶습니다.”
“에그…… 덩치는 산만 한 자가 어쩌다가…….”
무호가 향원궁에서 운신을 못할 지경으로 크게 넘어져 결국 궁 안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은 오늘 아침 중신들 사이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조회에서도 계속 그 일을 떠드느라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제 아침, 그토록 늠름하고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편전을 술렁이게 만들었던 용장이 채 몇 시진도 지나지 않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놀랍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몇몇 중신들은 사람이 크게 다쳐 궐 안에 누워 있으니 마땅히 병문안을 해야지 않겠느냐며 슬그머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다가 시영에게 붙들려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대체 술을 얼마나 퍼먹였기에 그런 거한이 계단에서 굴러 목을 다쳤단 말입니까? 처남을 대접하신다더니, 잘못하면 사람을 잡을 뻔하셨습니다.”
시영이 혀를 끌끌 차며 욱을 나무랐다.
무호가 향원궁에서 쓰러진 일은 반시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미 몇몇 내관들에 의해 소문이 퍼지고 있어서 사건 자체를 아예 감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누이동생이자 황제의 후비인 공비의 돌려차기에 당해서 그리되었다는 사실이 그대로 퍼져 나가는 것은 당사자들의 체면이 심히 깎일 만한 일인데다 황제에게도 누가 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윤 내관이 지밀 내관들을 움직여 무호가 오찬석에서 황제가 거듭 내리는 어주를 마다하지 못하고 대취하는 바람에 계단에서 실족하여 크게 다친 것으로 말을 고쳐 소문을 깔았고, 그 덕에 궐 안의 모든 사람들은 무호가 취기를 이기지 못해 계단을 구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술이 약한 줄은 몰랐습니다.”
욱이 민어찜 뱃살을 골라 허연에게 먹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허면 공비께서는 오라비가 크게 다친 일로 상심을 하여 몸이 아프신 게 아닙니까?”
“아, 뭐…… 그런가 봅니다.”
욱이 이번엔 밀빵에 볶은 부추를 얹어서 허연에게 권하며 더욱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시영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버럭 소리를 쳤다.
“폐하!”
“예?”
그제야 욱이 의아한 눈길로 시영을 돌아보았다.
“점심도 다 들었으니 저는 먼저 휘명전으로 물러가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천천히 오십시오.”
시영이 씩씩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밥을 다 먹었으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영이 쌩하니 돌아섰다. 이는 누가 봐도 삐져서 뛰쳐나가는 것이라 허연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시영을 붙들어 세웠다.
“어찌 차도 다 안 드시고 일어나십니까? 잠시 더 계시다가 폐하를 뫼시고 같이 휘명전에 드십시오.”
“어차피 나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더 앉아 있어봐야 뭘 하겠습니까?”
시영의 불평에 욱이 그제야 슬그머니 밀빵을 놓고 일어나서 시영의 손목을 붙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까 국수를 다 빼앗아 먹은 것이 미안해서 점심 좀 챙겨 먹인 것인데…….”
“계속 챙겨 먹이십시오. 누가 뭐랬습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형님 점심도 제가 챙겨드릴 테니 마음 푸십시오.”
너스레를 떨며 살갑게 잡아끄는 욱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시영이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욱이 사과의 뜻으로 찻잔 옆 종지에 놓인 인삼정과를 하나 집어서 시영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점심을 마친 세 사람의 대화는 무호가 어제 바친 백호 가죽 이야기로 넘어갔다가 대현성 주변의 고갯길은 예전부터 호랑이가 많았고, 그 때문에 월국에서 나는 호랑이 가죽은 대부분 그곳에서 얻는다는 나라 안의 지리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술이 다소 약한 듯싶긴 하지만, 폐하께서 대단한 처남을 얻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나라 안에 장수가 많다고 해도 그만한 호랑이를 사냥할 만큼 용감하고 무공이 높은 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무호보다 용감하고 무공이 높은 자가 궐 안에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입맛이 써서 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욱의 말에 시영이 또 마땅치 않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귀인이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것이야 다 아는 일이지만, 이런 얘기엔 귀인은 좀 빼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이 사람 얘기가 아닙니다.”
욱이 갑자기 장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허연이 그만하라는 뜻으로 욱의 소맷자락을 슬쩍 붙들었다.
“귀인이 아니면…… 정 내관이나 위사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영의 물음에 욱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신세한탄을 꾹 눌러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사람이 호랑이를 잡아온 적은 없지만 무공이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허긴, 정 내관이나 위사령이나…… 어디다 내놔도 꿀릴 것 없는 천하제일의 검객들이지요. 그렇게 생각해보니 폐하의 주변이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 둘에, 여기 귀인까지 계시지 않습니까?”
진짜 숨은 고수가 한 명 더 있긴 하지만, 그 얘기를 꺼내면 또 허연이 마누라 흉본다고 야단을 칠 것이기에 욱이 대답 대신 한숨만 두어 번 내쉬었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던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내가 이른 일은 어찌 되었느냐?”
어제 오늘 욱이 자신에게 이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윤 내관이 잠깐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나온 ‘이른 일’이란 대현성에 사람을 보내 승주라는 자를 수소문하는 것이겠거니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적당한 자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물색 중이냐? 오가는 길이 머니 뭐라도 알아 오려면 두 달은 족히 걸릴 터, 후딱 보내지 않고…….”
“오늘 내일 중으로 적임자를 찾아 보낼 것이니 너무 조바심내지 마십시오. 본래 정보 수집이란 시일이 걸리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는 조심스러운 사안이니…….”
욱과 윤 내관 사이에 오가는 말에 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먼 곳에 사람을 보내 조사할 일이 있으십니까?”
시영의 물음에 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 둘러댔다.
“대현성 주변 정세가 어수선하다니 어느 정도인지 따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아…….”
요즘 동북부 국경이 위태로우니 그 주변에 관한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귀인과 같이 있을 때면 마냥 철없는 어린애 같아서 한심해 보여도 나랏일은 제대로 돌보고 있구나 싶어서 시영이 뿌듯한 표정으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 욱이 윤 내관을 다시 돌아보았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혹, 무호가 데려온 장수들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다들 대현성에선 한 가닥 하는 무장들일 터……. 무 장군이 마음에 둘 만한 자라면 분명 그처럼 무공 높고 성깔도 만만치 않은 사내일 듯싶은데…….”
“소인도 우선 그쪽부터 알아봤는데…… 그중에 승주란 이름을 가진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가……?”
만취해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공비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 이름이 신경 쓰여서 욱이 입술을 삐죽였다.
공비는 욱이 여태 만나본 여인은 물론이고 사내보다도 더 거칠고 투박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여장부의 마음을 뒤흔들었을꼬……. 평소 공비에겐 관심도 없었는데, 공비의 남자는 어쩐 일로 욱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어쨌든 궁금해서 좀이 쑤실 지경인데 진상을 파악하려면 최소한 두 달이라니, 나라가 너무 넓은 것도 이런 때에는 불리하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욱이 찻잔을 들었다. 그때 시영이 욱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지금 승주라고 하셨습니까?”
욱과 허연, 윤 내관의 시선이 일제히 시영에게 쏠렸다. 욱과 허연이 함께 있을 때,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 시영이 당황해서 세 사람을 마주 보았다.
“왜들…….”
“형님이 승주라는 자를 아십니까?”
욱의 물음에 시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넓은 세상에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한두 명은 아니겠지만, 대현성에 사는 승주라면 좀 압니다.”
멀고먼 대현성에 사는 승주를, 평생 도성 밖으로 나가본 적도 몇 번 없는 시영이 어떻게 아나 싶어서 욱이 허허…… 탄성을 토했다.
“아니, 형님이 어떻게…….”
알면 아는 것이지, 뭘 이렇게까지 잡아먹을 듯 다그치나 싶어서 시영이 슬쩍 몸을 뒤로 뺐다. 그러고는 윤 내관 같은 최고 전문가가 캐내려고 해도 장장 두 달의 시간과 수천 냥의 비용이 소요될 특급 정보를 대수롭지 않게 술술 불었다.
“매달 대현성에서 보내오는 장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 장계를 쓰는 이가 승주입니다.”
시영이 대현성에서 온 장계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약 5년 전, 각 성읍에서 보내오는 여느 장계와 마찬가지로 그저 그런 필체의 정세 보고서에 불과했던 대현성발 장계가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번쩍 띄는 명필과 명문으로 돌변한 그 시점부터였다.
어려서부터 서화에 관심이 많았고 종친이라는 높은 신분의 이점으로 고금의 아름다운 서화를 얼마든지 접할 기회가 있어서 그 방면으론 최고의 안목을 자랑하는 시영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대현성에서 보내온 장계는 아름다운 글씨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필체라는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 이는 그간 장계를 써서 보내던 자의 필체와 문장이 발전한 것이 아니라 문서 작성자가 바뀐 것이 분명했다. 대현성처럼 궁벽하고 거친 소읍에 이런 문사가 있었구나, 이만한 필체면 황성에 와서 글씨만 써서 팔아도 남부럽지 않게 살 것이고 이 정도 문장이면 장원급제도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시영은 한동안 대현성발 장계를 정기 간행물을 기다리는 독자의 심정으로 기다렸었다.
장계의 글씨는 어느 때에는 재치와 호방한 기운이 넘쳤지만, 또 어느 때에는 수심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고 간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변해가던 글자와 문장은 어느 순간엔 지극히 우아해져서 글자 한 자 한 자에 날개가 달린 듯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한 1년 장계를 받아서 차분히 음미하던 시영은 결국 솟구치는 동경과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대현성에서 온 전령을 따로 불러서 장계 쓰는 자의 신상을 캐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니, 승주라는 자가 글이나 쓰는 서생이었단 말입니까?”
공비가 꿈에도 못 잊을 정도로 사모하는 사내라면 분명 산으로 들로 말 달리며 같이 호랑이 잡으러 다니던 오라비 주변의 무장일 것이라고 거의 확신을 하고 있던 욱이 김샌 표정으로 되물었다. 욱의 물음에 시영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글이나 쓰는 서생이라니요? 그자는 그냥 서생이 아니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입니다. 폐하도 대현성에서 온 장계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보기는 봤습니다.”
“눈알이 제대로 박힌 자라면 모두 다 보기 드문 명필이라 칭찬이 자자하고, 요즘 상서부의 젊은 시랑 중에는 그자의 글씨를 흉내 내어 쓰는 자들이 적지 않을 정도입니다. 또한 제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뜨는 문사들의 글자와 문장은 대부분 보았으나 그보다 낫다 싶은 자는 아직껏 찾지 못했으니…… 최소한 당대엔 그자가 최고의 명필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그 글씨가 좋으면 가져다가 족자라도 만들어 벽에 걸어놓지 그러십니까?”
공비의 사내 취향이 어쩐지 실망스러워서 욱이 공연히 시영에게 틱틱거렸다. 하지만 시영은 그런 눈치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해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까 생각도 했었지만, 장계는 공문서가 아닙니까? 하여 3년쯤 전부터 그자와 개인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시영이 승주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라는 사실이 놀라워서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허허…… 탄성을 토해냈다. 수천 리 밖에 살고 있는 외지인, 그것도 달랑 승주라는 이름 두 글자밖에 알지 못하는 처지라 대현성에 사람을 보내도 그자를 수월하게 찾을지 장담할 수 없었는데, 그런 자와 성 안에도 친구가 몇 명 없는 시영이 3년 묵은 편지 친구라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얽히고설킨 실 같은 것이구나 생각하며 욱이 멍한 눈길로 시영을 쳐다보았다.
“편지를…… 그자와…… 3년째…….”
“제가 먼저 교류를 청해서 대현성에서 전령이 올 때마다 그 편에 편지를 한 장 보내면 그쪽에서도 다음 전령 편에 편지를 보내옵니다. 서간은 장계와 또 달라서 필체가 얼마나 곱고 섬세한지…… 어쨌든 그렇게 모은 편지가 벌써 스무 통이 넘습니다.”
허연의 곁에서 차 시중을 들며 오고 가는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만 있던 고 내관이 시영의 자랑에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에그, 저런…… 생판 남인 정안군께서도 편지를 스무 통이나 받으셨는데, 공비께서는 바람결에 소식 한 자락을 못 들으셨으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고 내관이 제풀에 놀라서 얼른 시영의 찻잔에 다시 차를 따랐다.
“편지의 글씨는 그토록 더 아름답다니, 소인도 언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혹, 시영이 뭔가 눈치를 채고 캐물을까 싶어서 고 내관이 얼른 말을 돌렸다.
“자네도 서화에 관심이 많고 안목이 높은 편이니…… 언제 한 번 집에 오게.”
“귀인께서도 어제 오늘 대현성에서 온 장계를 보시며 글씨도 좋고 문장도 빼어나다 감탄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고 내관의 말에 시영이 반색을 하며 허연을 쳐다보았다.
“그러셨습니까? 하긴, 학식 높은 귀인께서 그런 명필과 명문을 못 알아보실 리 없지요.”
“제게 무슨 학식이 있겠습니까? 그저 보다 보니 절로 눈에 띌 정도로 글자며 문장이 단정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허연의 겸손한 대답에 시영이 흐뭇하게 웃으며 한편으론 욱을 은근히 노려보았다.
“그런 명문이 다달이 당도해도 폐하께서는 글자만 달랑 보고 물리실 정도로 안목이라곤 통 없으시니…….”
대놓고 욱을 까며 시영이 허연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편지뿐 아니고 서화도 여섯 점 정도 얻어놓은 것이 있으니, 다음에 들 때 가져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여태 승상이나 광윤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아끼던 것인데…….”
“그자가 정안군께 서화도 보내왔습니까? 정말 많이 친하신 모양입니다.”
허연의 물음에 시영이 체면도 까먹고 키득키득 웃었다.
“노상 편지만 보내기가 민망해서 재작년에 승주에게 폐하께서 내리신 귀한 먹과 족제비 털로 만든 붓 한 벌을 보냈더니, 그 사람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서화를 석 점이나 보내왔지 무엇입니까? 그리고 작년엔 종실에서만 쓰는 귀한 종이 백 장과 하얀 비단 두 필을 보냈더니 또 석 장을…….”
시영이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자랑을 듣던 욱이 헹, 콧방귀를 날렸다.
“그것은 친구 간에 선물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물물교환이 아닙니까? 게다가 제가 형님 쓰시라고 드린 것은 모두 나라 안에서 제일 귀한 것이니 서화 석 장 값으로 싼 것도 아닌 듯합니다.”
“주고받는 물건에 존경과 정을 담았으면 선물이지요. 게다가 그 정도 작품이면 제가 무엇을 보냈든 거저 얻은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앞으로 여섯 장만 더 모으면 열두 폭 병풍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승주의 서화로만 열두 폭이라니…… 완성만 되면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보물이 될 것입니다.”
“좋으시겠습니다.”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욱은 3년 전 공비가 영운궁에 들던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본래 황제의 후궁은 별다른 절차 없이 입궁해서 처소를 받은 후, 황후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이 황궁의 법도었다. 하지만 욱은 후궁을 모두 명문가의 딸들로만 뽑아 들였고, 품계 또한 후궁의 그것으로는 상당히 높은 축에 드는 비의 첩지를 내렸기 때문에 일반 궁녀처럼 초라한 모양새로 궁에 들일 수는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후궁들은 모두 황궁의 정문인 대화문의 측문으로 들어와서 휘명전 권역의 별궁인 향원궁까지 수행인들과 함께 들어왔고, 황제에게 하례를 올린 연후에 별궁을 하사받는 특별 대접을 받았다. 그 같은 절차로 인해 욱이 공비를 처음 본 장소도 향원궁의 앞마당이었다.
공비가 입궁한 날은 욱에게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공비를 수행해 온 무호의 어마어마한 덩치에 한 번 놀라고, 남동생을 잘못 데려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듬직한 공비의 덩치에 또 한 번 놀라고, 보고 또 봐도 남동생 같은 그녀의 외모에 계속 놀라고…… 하지만 욱을 정말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은 영운궁에 든 이후 그녀가 보인 태도였다.
지나치게 수줍어하든, 들떠 있든, 혹은 두려워하든…… 후궁에 든 여인들은 모두 욱에게 순종적이었고 초야를 기쁘게 맞았었다. 하지만 공비는 돌부처처럼 굳은 표정으로 오랜 원행으로 피곤해서 폐하를 뫼시지 못하겠다고, 송구하지만 다른 전각에 드시라며 욱을 침전에서 쫓아냈던 것이다. 세간에는 욱이 공비를 밉게 보아 첫날부터 퇴짜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욱이 소박을 맞았던 것이었고, 공비는 그 이후 3년째 욱을 건성으로 보며 홀로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후비로 낙점된 순간부터 제 팔자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는데, 궁에 들어서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고 후궁의 가장자리로만 돌아다닌 것이 고작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서생 때문이었던 것인가? 돌처럼 굳은 무표정한 얼굴이 투박한 제 성격 그대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속이 영 켕겨서 욱이 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다시 시영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지난 3년간 스무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으셨다니, 형님은 그 사람됨이 어떤지 대강 아시겠습니다.”
“아직 약관의 젊은이지만 점잖고 차분한 사람입니다. 또한 서화에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총명하고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아 작년엔 <칠 부족 풍속기>란 잡서도 집필을 했답니다. 서화를 보내며 자필 원본을 같이 보내줘서 읽어봤는데, 장성 밖 이민족들의 생활상을 꼼꼼하면서도 재치 있게 묘사한 상당한 수준의 저서였습니다.”
공비가 그렇게 청승을 떨며 그리던 자가 글이나 읽고 글씨나 쓰는 서생이란 사실에 다소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눈은 있어서 그 동네에서 제일 똑똑한 놈을 찍었나 보다 생각하며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의 재주가 그렇게까지 가상하다면 진즉에 황성에 와서 과거시험이라도 볼 일이지, 어찌하여 그 궁벽한 곳에 처박혀서 장계나 써서 보내고 있답니까? 형님이나 귀인의 평가대로라면 장원급제는 떼놓은 당상이 아닙니까?”
욱의 물음에 시영이 갑자기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을 볼 수 있는 처지라면 그 사람이 왜 여태 그러고 있겠습니까? 하늘이 사람에게 재능을 내리실 때에 그 신분을 따져서 내리는 것은 아닌지라…….”
“무슨 말입니까?”
“승주는 귀족이나 사대부가 아니라 대현성의 관노입니다.”
입궁한 직후부터 툭하면 후궁들과 싸움을 벌이고 내관을 폭행하여 상해를 입히는 등, 점잖고 우아한 후궁에서 있을 수도 없는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는 공비는 욱에게 있어서는 잘못 들인 후궁이자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공비는 지금까지 욱이 알아온 어떤 여인과도 달랐고, 그 속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공비의 심사를 알기 위해 어떤 관심도 기울인 적 없이, 본시 감정이 메마르고 포악하여 그러려니, 저런 여식을 한 번 사양도 않고 황궁에 후비로 들여보낸 그 아비가 양심 없는 자라고 여기며 그저 버려두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공비에게 마음에 두고 있는 정인이 있다는 것, 입궁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잠결에 그 이름을 부를 정도로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욱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렇게 거칠고 투박한 여인에게도 사랑하는 사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우선 놀라웠고, 공비가 실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사납고 포악하고 경우 없고 무식한 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에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충격과 놀라움은 승주의 정체가 밝혀진 지금의 그것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꿈에도 못 잊을 정도로 연모하는 자이니 대현성에서는 제일 잘난 사내일 터, 좀 전에 시영의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다소 예상 밖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영이 인정한 당대 최고의 명필이자 문필가라니 나름대로 사내 보는 눈이 높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니, 노비가 어떻게…….”
욱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욱이 그렇게 놀란 것을 오랜만에 본 허연이 찬물 한 잔 마시고 정신 차리란 뜻으로 물 잔을 욱의 손에 쥐여주었다.
“본시 천재란 어디에서든 난데없이 튀어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대현성에서 온 전령을 통해 승주가 영주 집안의 노비란 사실을 알았을 때 누구보다도 놀랐었던 시영이 안타까움 가득한 표정으로 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노비를…….”
욱이 찬물 한 잔을 단숨에 마시고도 진정이 되지 않아서 연거푸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재능과 총명함은 감추고자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법, 승주의 재주를 알아본 무영준이 그 아들들과 함께 같은 사부 밑에서 글공부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면 무영준도 참 도량이 넓은 사람입니다. 노비라 하면 천하고 하찮게만 여기며 허드렛일이나 시키는 것이 보통인데, 자신의 아들들과 한 방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다니…….”
허면 내가 무호와 비슷한 급의 무장도 아니고, 직급 높은 문관도 아닌…… 노비에게 밀려서 소박을 당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욱이 멀뚱히 허공을 노려보았다.
“폐하?”
승주가 노비면 노비인 것이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사연을 듣고는 뭘 저렇게까지 넋이 나갔나 생각하며 시영이 욱의 눈앞에다 손을 까불었다.
“허면 형님이 지금 남의 집안 노비를 상대로 편지질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때때로 귀한 선물까지 바쳐가면서…….”
“저도 처음엔 승주의 신분 때문에 다소 얼떨떨했지만, 날이 갈수록 흠모하는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형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듯, 천재적인 예술가가 반드시 뼈대 있는 명문가에서만 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미한 가문, 미천한 출신에서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가진 인재가 종종 나타나곤 하니…… 세상 이치가 그런 것을 전들 어찌하겠습니까?”
아무리 서화에 관한 관심이 남다르고 소장욕이 하늘을 찔러도 그렇지, 어떻게 종친이 저런 말을 태연하게 지껄이나 싶어서 욱이 뜨악한 눈길로 시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영은 내가 뭐 틀린 말 했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종친이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 아닙니까?”
“형님은 참 화통하기도 하십니다.”
“헌데 폐하께서는 승주를 어찌 알고 그를 찾고 계셨습니까? 폐하께서는 본시 글씨나 서화엔 관심도 조예도 없으시니…… 혹 그가 쓴 <칠 부족 풍속기>를 보셨습니까?”
시영의 물음에 욱이 고개를 저었다.
“제목도 처음 들어봅니다.”
욱의 시큰둥한 대꾸에 시영이 에그 쯧쯧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책은 그저 잡서가 아니라 장족을 비롯한 동북쪽 이민족들의 풍속과 생활상, 그들의 기질을 기술한 책입니다. 수년간 장성 밖을 오가는 장사치들이나 성 안을 드나드는 부족민들과 교류하며 세심하게 관찰하여 집필한 저서이니 읽어보시면 동북쪽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실 텐데요.”
“각지에서 올라오는 장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알이 빠질 지경입니다.”
“폐하의 눈알이 진짜로 빠진다 한들, 그것이 어디 장계 탓이겠습니까?”
시영이 허연을 힐끔 쳐다보며 틱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좀 전의 질문에 관해 답을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닫고 다시 욱을 돌아보았다.
“그냥…… 어제 무호와의 오찬석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이름입니다. 공비도 잘 아는 듯싶어 어떤 자인지 궁금해서 대현성 상황을 알아보는 김에 그자에 관해서도 알아보라 이른 것입니다.”
“아…….”
그만한 재능이 있는 자라면 어느 자리에서든 그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라서 욱의 변명에 시영이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명전에 같이 나가자고 청하는 시영을 먼저 휘명전에 가서 승상과 함께 대현성을 비롯한 동북쪽 국경에 추가로 보낼 수 있는 군사의 규모를 의논하고 있으라며 떠밀어 보낸 후, 욱이 피곤에 전 얼굴로 일어나더니 침전으로 쑥 들어갔다.
“편전에 안 나가십니까?”
왜 저러나 싶어서 침실로 따라 들어온 허연이 침상에 뻗은 채 눈을 감고 미동도 없는 욱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 참…….”
욱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한 번 내더니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폐하?”
“참으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묻는가? 공비 말일세.”
그제야 허연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공비의 정인이 사가의 하인이란 사실은 허연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승주라는 자가 공비 친정의 하인이었다면 자연스럽게 마주칠 일이 외간 사내의 경우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이고, 그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성 안의 수많은 사대부, 문필가들을 제치고 황성에 올리는 장계를 도맡아 적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 사내라면 당연히 주변 여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을 터……. 다시 생각해보면 공비가 그자에게 연애 감정을 품은 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폐하의 후비로 낙점을 받아 황궁에 드셨을 때, 공비마마는 불과 열일곱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습니까? 공비께서 그자를 마음에 두셨다 한들 두 사람이 연애를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또래 어린 처자들의 흔한 짝사랑이거나…… 유치한 쪽지나 주고받는 장난 같은 교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애써 공비를 두둔할 것 없네. 나는 그자를 질투하거나 사가에서의 일을 문제 삼아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닐세.”
“그러시면 더는 그 일을 캐지 마시고 그냥 덮어두십시오.”
허연의 청에 욱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허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
“혹, 내가 공비에게 마음 쓰는 것이 꺼림칙해서 그러는가?”
“응?”
“내가 공비에게 호감을 갖게 되거나, 남녀 간의 정을 느끼게 될까 봐서…….”
그 싱거운 수작에 허연이 욱의 이마를 철썩 소리가 나도록 후려갈겼다.
“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매섭게 이마를 얻어맞은 욱이 허연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허연도 만만치 않게 싸늘한 눈길로 욱을 마주 보았다.
“싱거운 말씀 그만하시고 편전으로 돌아가십시오. 요즘 들어 오전 한때만 나랏일을 살피는 척하며 너무 노십니다.”
“반응이 이리 예민한 것을 보니 내가 잘못 짚은 것도 아니구먼.”
“폐하!”
“내가 후궁들에게 마음 쓰는 것이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하면 될 것을, 뭘 그렇게 말을 돌리는가? 설마 투기가 심하다고 내가 그대를 나무라겠는가?”
그렇게 칭얼거리며 욱이 허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날이 갈수록 손찌검에 내성이 생겨서 이젠 이마나 뒤통수 한두 대 맞는 것으로는 끄떡도 않는 욱을 허연이 기가 찬 얼굴로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짧은 한숨을 쉬며 좀 전에 매섭게 한 대 때렸던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저는 폐하께서 공비마마께 마음을 쓰시는 것도, 호기심을 느끼시는 것도 싫습니다. 그러니 공비마마를 그냥 놔두십시오.”
질투하느냐는 도발에 넘어가 허연이 죽고 싶냐고 버럭 화를 내며 달려들기를 내심 바랐던 욱이 실망감에 입을 삐죽거렸다.
“그냥 두지 않으면, 내가 공비를 어찌하겠는가? 입궁 전에 사내가 있었다 하여 공비를 후궁에 감금을 하겠는가? 아니면 아예 궐 밖으로 내치겠는가?”
“폐하!”
허연이 놀라서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욱이 더 못마땅한 눈길로 허연을 노려보았다.
“그대가 보기엔 내가 그렇게나 변변치 않은 사내인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자꾸 승주라는 자의 일을 알고자 하시니 걱정이 됩니다. 그 일이 자칫 궁인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나는 그냥…… 잠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일세.”
뜬금없는 대답에 허연이 의아한 눈길로 욱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내 필요에 의해서 내린 후궁의 첩지로 인하여 공비가 죽고 못 살던 정인과 헤어져 수천 리 길을 끌려온 것이라면…… 너무 가엾지 않은가? 그렇게 후궁에 들었다면 그간 그자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 것이며, 또한 나는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폐하…….”
“지난 3년간의 크고 작은 소란과 행패가 다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면 공비의 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없고, 지난 일을 무례와 부덕의 소치라고 비난할 것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내 처신이 공비에게는 더없이 무심하고 잔인했으니…….”
욱이 그간 그렇게도 못마땅히 여기던 공비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자신 앞에선 노상 어린애처럼 유치하고 짓궂기만 하던 욱이 실은 제법 속 깊고 의젓한 사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나서 허연의 가슴 한쪽이 뭉클하게 조여왔다.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알고 보니 모두 다 헛생각이었네.”
그렇게 투덜거리며 욱이 허연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고는 된통 얻어맞아서 여태 아릿한 이마를 박박 긁었다.
“예?”
“정인이라 하기에 같이 멧돼지 잡으러 다니던 오라비 수하 부장들 중 하나이거나, 못해도 그 일대에서 가장 촉망받는 똑똑한 문관은 되는 줄 알았더니만…… 승주라는 자의 신분이 그 지경이면 잘 지내던 둘 사이를 내가 끼어서 틀어놓은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것이…… 폐하께서 내린 결론입니까?”
조금 멋있을 만하다가 영 허술하게 난 욱의 결론에 허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공비와 그 승주라는 자에 관해 더는 알고 싶은 것도 없네. 자네 말대로 이제 와서 공연한 호기심으로 둘 사이를 캐봐야 뭘 하겠는가? 어차피 공비는 후궁에 든 몸인 것을…… 또한 그 둘은 처음부터 잘되기는 그른 사이였으니 공비도 좀 더 철이 들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미련을 버리겠지.”
좀 허전하긴 하지만, 공비의 일은 아무것도 몰랐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이상의 결론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 정이 없어도 나는 황제, 너는 후비이니 털끝만 한 오점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트집을 잡아 사람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면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묻어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리 생각하신다니, 그것도 다행입니다.”
“그러니 자네도 내 마음을 공비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전전긍긍할 것 없네. 나는 이미 예전부터 그대의 것인데 무엇을 그리도 두려워하는가?”
“이…….”
허연이 순간 확 열이 뻗쳐서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욱도 거의 동시에 팔을 들어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향원궁 침전에 자리를 펴고 누운 지 어언 3일째, 오전 이른 시각부터 목덜미에서 허리까지 수십 대의 침을 꽂은 채 옴짝 못하고 엎드려 있던 무호가 옆에서 얼씬거리는 의관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장군.”
“이 시료는 언제 끝나는가?”
이렇게 꼼짝 못하고 엎어져서 중얼거리는 소리도 마치 호랑이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아서 의관이 저도 모르게 붙들린 소매를 잡아 빼고는 뒤로 물러섰다.
“한 식경쯤 더 이대로 두었다가 목덜미의 침부터 뺄 것입니다. 갑갑하셔도 잠시만 더 참으십시오.”
“허면 침만 빼고 나면 나는 퇴궐을 하겠네.”
“그것은 경과를 봐서 결정할 일입니다, 장군.”
“이제 목도 이리저리 잘 돌아가고 혼자 일어나 앉을 수도 있는데 무슨 경과를 더 본단 말인가? 나는 멀쩡하다니까?”
어제 저녁부터 눈만 마주치면 같은 소리라서 의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장군의 퇴궐 결정은 1차로 어의 영감이 하시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윤허가 필요한 일입니다. 폐하께서 장군이 제 발로 일어나서 걸어 나갈 수 있기 전에는 퇴궐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허면 내 발로 일어나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무리해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시다가는 몸만 더 상하십니다. 폐하께서 큰 은혜를 베푸셔서 별궁도 내어주시고 어의 영감에게서 시료도 받도록 해주셨으니 마음을 편히 갖고 푹 쉬십시오. 어의 영감의 의술도 뛰어나고 장군께서도 워낙 강골이시니 곧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어제 저녁부터 앵무새처럼 똑같은 소리만 외고 있는 의관의 대답에 짜증이 나서 무호가 엎드린 채 거친 숨만 씩씩 내쉬었다.
향원궁은 황궁의 어떤 전각과 견주어도 그 규모와 화려함이 뒤지지 않는 번듯하고 화려한 전각이었다. 하지만 무호에게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시방석에 지나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경위 자체도 떳떳하지 않은데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한숨만 연거푸 내쉬다 나가는 황제의 태도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에 걸렸고…… 그리고 어제 아침에 황제와 승주가 이 방에서 맞닥뜨린 사실이 무호에게는 무엇보다도 꺼림칙했다.
물론 승주와 누이동생은 절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였고 황제와 승주는 한 방에 있었다 뿐 마주쳤다고 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호에게는 이 모든 정황이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까닭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일은 궐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데, 오늘 아침에도 몸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질 않았고 의관들은 자신의 퇴궐에 영 비협조적이라 시간이 갈수록 조바심만 더해가고 있었다.
“허면 침이나 빨리 뽑아주게.”
“이 침이 여인들의 침선에 쓰이는 바늘인 줄 아십니까? 시침이란 침을 놓은 후, 정해진 시간이 지나야 뽑을 수 있는 것이지 아무 데나 꾹 찔렀다가 뽑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거, 참…….”
무호가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끙끙 앓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났다. 혹시 어의가 들었나 싶어서 무호가 힘겹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크게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너…….”
얼결에 일어나 앉은 무호가 다음 순간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앞으로 엎어졌다. 그 바람에 곁에 있던 의관들도 크게 놀라서 허둥거리다 무호를 제대로 엎드리게 하고 목덜미와 등에서 침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장군, 대체 왜 이러십니까? 자꾸 이러시면 장군께서도 크게 고생을 하시고 저희들도 폐하께 호된 책망을 듣습니다.”
의관의 날카로운 잔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무호가 팔을 들어 의관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설렁설렁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승주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여긴 왜 또 왔느냐?”
“몸은 좀 어떠신지 뵈러 왔습니다.”
“다른 놈들은 다 어디 가고 네 녀석이 줄창 황궁을 들락거린단 말이냐? 다시는 궁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분명히 일렀거늘…….”
“저도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승주가 좀 떨어진 곳에 놓여 있던 의자를 집어다 침상 옆에 놓고 무호에게 다가 앉았다. 그러자 무호가 힘겹게 팔을 들어서 승주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
무호의 추궁에 승주가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형님들은 아침 먹고 숟가락 던져놓기가 바쁘게 도성 구경을 나갔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머리를 맞대고 꼭 구경해야 할 곳, 꼭 먹어봐야 할 음식, 꼭 사 가야 할 것의 목록을 끝도 없이 길게 적어서 나갔으니 해 떨어지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할 터……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은 장군을 보살펴야 하겠기에 저라도 걸음을 한 것입니다.”
차분하게 경위를 설명하면서 승주가 자신의 멱살을 움켜쥔 무호의 손을 살살 떼어냈다.
“저런, 천하에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자신은 옴짝도 못하고 별궁에 누워 지낸 것이 벌써 사흘째인데 그간 형제처럼 어울려 다니던 부장들은 사신각에서 술 퍼먹고, 술 깨면 놀러 나가기 바빠서 문병 한 번 오지 않는 것이 괘씸해서 무호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 형님들이 전장에서는 일당백의 장수들이지만, 이런 상황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인 것은 장군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너도 꼴 보기 싫으니 당장 궁에서 나가거라!”
“기왕 왔으니 한 시진 정도 말동무나 해드리다 가겠습니다.”
“너…….”
무호가 눈알이 쏟아질 것처럼 사납게 승주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승주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던 것이다.
“이렇게 궁을 들락거리면 수진이를 볼 수 있을 성싶으냐?”
무호의 나직한 추궁에 승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마마께서 어제 이곳에 오셨었습니까?”
“안 오셨다.”
“어제도 안 오셨는데 오늘은 오시겠습니까?”
“내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무호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그 바람에 곁에서 침구를 챙기고 있던 의관들이 놀라서 침통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승주가 혀를 끌끌 차며 무호를 돌아보았다.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을 어찌 그렇게까지 걱정하십니까?”
“나랑 말장난이 하고 싶으냐?”
“말동무를 해드린다니까요?”
무심하게 대꾸하며 승주가 늘 갖고 다니는 서책을 허리춤에서 빼 들었다.
오전에 한 시진에 걸친 중신 회의를 끝내고 나서 대조전으로 옮겨 천축국에서 온 사신단의 인사를 받은 후, 상서부 회의를 주관하기 위해 다시 휘명전으로 돌아간 욱이 상서시랑들이 모인 회의실로 들어섰다.
오늘의 상서부의 회의 안건은 그다지 시급한 일은 아니었다. 한 달 정도 남은 욱의 생일잔치 규모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황제의 탄신일을 맞아 특별히 치러지는 별시에서 급제는 몇 명으로 할지, 특별 사면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지 등등 생일잔치와 관련된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것이 주된 안건이었고, 욱의 목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일 일정에 화산 별궁 나들이와 그 근처 숲에서의 사냥 행사를 끼워 넣는 것이었다.
“별시는 원자마마께서 나셨던 해에 한 번 치르고 이번이 처음이니 문, 무, 예과 별로 백 명씩 급제자를 뽑고, 그중 장원은 열 명으로 하여 특별한 선물을 내리시지요.”
시영의 제안을 건성으로 들으며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한 선물이라면…….”
“지난 중추절에 기련성에서 올린 벼루가 아름답고 훌륭하니 좋은 선물이 될 듯합니다. 별시 전에 그것을 몇 개 더 준비하는 것이 어떨지…….”
“형님 마음에 드신다니 하사품은 그것으로 하십시오.”
벼루라니…… 그런 것이 무슨 선물이 될까 생각하면서도 욱이 마음대로 하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시 급제자에게 내릴 하사품 따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다 좀 있다가 중요한 협상에서 만족스러운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시영의 비위를 맞추며 밑밥을 잘 깔아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특별 사면은 전국에서 천 명 규모로 하되, 지은 죄에 비해 벌이 과했던 자나 노역이 마무리된 현장의 죄수들을 우선 선별하여 방면을 하려고 합니다.”
“그 또한 형부와 협의하여 잘 처결해주십시오.”
“그리고 또…….”
“화산 행궁 나들이는 열이틀 정도면 적당할 듯싶습니다.”
욱이 지나가는 말처럼 화산 나들이를 슬쩍 밀어 넣었다. 하지만 열이틀 일정이란 말에 시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뭘 열이틀씩이나…… 요즘이 그렇게 태평한 시절도 아니거늘…….”
“가는 데 사흘, 오는 데 사흘이 아닙니까? 사냥도 하고 온천도 하려면 열이틀도 빠듯합니다.”
“황후마마와 동행을 하실 것도 아니질 않습니까? 집안에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있는데 가장이 열이틀이나 원행을 다니는 것은 사가에서도 철없다고 걱정을 들을 일입니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각하며 욱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허면, 화산에 가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일정을 아흐레로 줄이시지요. 하루 사냥 하시고, 하루 온천 하시고, 또 하루는 빈둥빈둥 노시고…….”
일정을 반이나 후려친 시영의 제안에 이번엔 욱이 정색을 했다.
“그리 후다닥 갔다 올 바엔 안 가는 게 낫겠습니다.”
욱이 삐져서 투덜거리자 시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산엔 재작년에 행차하셔서 한 달 가까이나 머물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별로 좋은 내색도 없으시더니요?”
“저는 한 해 걸러 한 번씩 가는 곳이지만 귀인은 한 번도 못 가보질 않았습니까? 이번 기회에 바람도 쐬어주고 온천에서 몸조리도 시킬까 해서 그럽니다.”
욱의 대답에 역시나 그렇구나, 칠궁에 처첩이 득시글한데 덜렁 귀인만 데리고 화산에 갈 생각이었구나 생각하며 시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후궁의 마마님들은 전부 떼어놓고 귀인만 데리고 가려 하십니까?”
“그야 뭐…….”
욱이 애매하게 대답하며 잠깐 고민에 빠졌다.
“황후마마는 같이 못 가셔도 다른 분들은 좀 챙기십시오. 너무 그러시면 귀인이 구설에 오르는 수가 있습니다.”
“꼭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공비를 데려갈까 합니다.”
뜻밖의 대답에 놀라서 시영이 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간 욱은 공비의 이름만 나와도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그녀를 꺼렸었다. 물론 공비가 말썽을 많이 피운 것도 사실이지만 먼 곳에서 시집와 아무 데도 기댈 곳 없는 어린 후궁을 너무 홀대하며 못마땅하게만 여기는 것이 안타깝던 참이었는데 그녀를 원행에 데려가겠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공비를요?”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아서 마음을 좀 풀어주려고요. 또한 소싯적엔 말 달리며 활도 꽤 쐈다고 하니 실력도 좀 보고…….”
“공비마마가 활을 쏠 줄 아십니까?”
공비가 주먹질, 발길질에 일가견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지만, 활쏘기는 처음 듣는 종목이라 시영이 놀라서 물었다.
“사가에 있을 때에 오라비들을 따라 종종 사냥도 나가곤 했었던 모양입니다. 멧돼지, 호랑이 닥치는 대로…… 잡은 것은 아니지만…….”
“아…….”
그간 황궁의 말썽꾸러기, 소박데기로 겉돌며 쓸쓸히 지내던 공비를 화산에 데려가 사냥에도 끼워줄 생각이라니, 그럼 열이틀 일정을 추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무호는 언제까지 향원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장군이 사흘째 저러고 있으니 조정 중신들 사이에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상태가 어지간하면 사신각으로 보내 몸조리를 하도록 하시지요. 향원궁이 아무리 외궁이라 해도 엄연히 궁 안이니 외간 사내를 며칠이나 머물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궁에 멀쩡히 걸어 들어왔던 사람을 어찌 들것에 실어서 내보내겠습니까? 어의 말로는 하루 이틀 더 시료를 받으면 탈 없이 일어날 것이라니 좀 더 두고 보려고요.”
“허면 이틀만 더 기다려보지요. 그리고 화산 행차는 일단 열이틀로 잡고 세부 일정을 짜서 올리겠습니다.”
화산 일정이 별다른 언쟁 없이 얼렁뚱땅 열이틀로 결정이 나자 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영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열이틀을 부른 것은 시영과 밀고 당기며 말씨름을 하다가 열흘 정도로 타결을 보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순조롭게 시영의 허락이 떨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름쯤 부를 것을…… 내가 너무 소심하고 쪼잔해졌다고 속으로 한탄하며 욱이 푸시시 한숨을 쉬었다.
“오늘 점심은 귀인과 함께 들고 바둑도 한판 둘까 합니다. 폐하께서는 어느 전각으로 가시겠습니까?”
이제 점심때라 시영이 옆에 앉은 상서부 시랑에게 회의록을 가져오라 손짓을 하며 청량전 점심을 선점했다.
“아니, 귀인은 나의 정인인데 어찌 형님이 점심을 함께 들고 바둑을 두십니까?”
“귀인이 환궁한 후에 태화궁엔 얼굴이라도 한 번 비치셨습니까?”
“…….”
“귀인이 아무리 좋아도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오늘은 태화궁에 가셔서 황후마마와 점심 드시고 아기씨들에게 아비 노릇도 좀 하십시오.”
시영이 욱을 타이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탁자 옆에 두었던 서책을 챙겨 들었다.
“그것은 무슨 책입니까?”
비단실로 단단히 묶고 비단으로 표지를 바른 다른 서책과는 달리 거친 종이로 겉을 싸고 가죽 끈으로 성기게 묶은 것이 눈에 띄어서 욱이 물었다. 시중에 나도는 잡서는 질 낮은 종이를 쓰고 허술한 무명실로 엮은 것이 흔했지만 시영이 그런 책을 들고 다니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어제 말씀드렸던 <칠 부족 풍속기>입니다.”
“형님의 오랜 편지 친구가 썼다는 그 책 말입니까?”
“예, 귀인이 한 번 봤으면 하기에 빌려주기로 약조를 하여 가지고 온 것입니다.”
시영의 대답에 욱이 책 좀 보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시영이 건네준 책을 한 번 후루룩 넘겼다. 서책의 필체는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또한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나름대로 조사하고 연구해서 책 한 권을 쓸 정도라면 그 지식과 재능도 상당할 터였다. 게다가 공비가 그렇게 절절히 연모할 정도라면 사내로서의 매력도 만만치 않을 터…… 그런 자의 신분이 미천한 종이라니, 이놈도 참 답답하겠다 생각하며 욱이 시영에게 서책을 돌려주었다.
“점심 맛있게 드시고, 귀인도 좀 챙겨주십시오. 그 사람이 제가 없으면 먹는 것이 영 부실하여 노상 까칠하지 무엇입니까?”
“챙기려면 귀인이 저를 챙겨야지요, 제가 이 몸을 해가지고 전직 대장군을 챙겨 먹여야겠습니까?”
그저 허연만 생각하는 욱의 언행이 섭섭해서 시영이 투덜거렸다.
“허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제가 귀인과 형님을 둘 다 챙겨드리겠습니다.”
슬그머니 묻어서 청량전으로 같이 가려는 욱의 수작에 시영이 헹 하고 돌아섰다.
“귀인은 제가 잘 챙겨서 먹일 것이니 폐하께서는 태화궁으로나 가보십시오. 이러다 처자식 얼굴 잊으시겠습니다.”
난항이 예상되었던 열이틀 일정의 화산 나들이가 순조롭게 관철되긴 했지만, 자신은 태화궁으로 밀어 보내고 저 혼자 한들한들 청량전으로 가버린 시영이 못마땅해서 욱이 시무룩한 얼굴로 용상에 주저앉았다.
“궁 안에 어른이 없으니 형님이 시어미 노릇과 시누이 노릇을 동시에 하시는구나.”
“정안군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폐하. 그간 날마다 태화궁에 들르시다가 귀인께서 환궁하시자마자 걸음을 끊으셨으니 황후마마께서 서운해하시지 않겠습니까?”
윤 내관이 욱을 달래며 태화궁으로 가시자고 재촉을 했다. 듣고 보니 자신이 그간 황후에게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라서 욱이 더는 군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면 오늘 점심은 태화궁에서 들어야겠구나.”
“예, 폐하. 바로 태화궁에 연통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운궁에도 사람을 보내라. 공비가 술이 얼추 깨었으면 향원궁에 가서 오라비 구완이라도 하라 일러라. 아무리 오라비라 하지만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마땅히 사죄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
“예, 폐하.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윤 내관이 태화궁 쪽으로 길을 잡았다.
힘들게 일어나서 벽에 등을 딱 붙이고 꼿꼿하게 앉은 무호가 멀건 죽과 약간의 찬이 올라간 점심상을 받고는 태풍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호가 통 움직이질 못하는 환자라 내의원에선 소화불량을 염려해서 매 끼니 멀건 죽과 약간의 나물 반찬만을 처방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호는 본시 맹물을 마시면 마셨지 죽은 입에도 대지 않는 성격이었고, 고기반찬이 없으면 젓가락을 들지 않는 육식 동물이라 내관이 매번 날라 오는 밥상만 봐도 기운이 빠지고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밥상 위에 놓인 멀건 죽을 노려보던 무호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고기 냄새에 이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곤 승주의 앞에 놓인 점심상을 발견하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승주의 앞에는 사가로 따지면 생일상과 비슷한 정도의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내관들도 승주가 무호의 몸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간병인의 대접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상선의 특명이 있어서 승주의 점심은 품계 높은 대감들의 점심상과 급이 같은 진수성찬이었다.
아, 돼지고기…… 가운데 저것은 닭백숙…… 저놈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위장도 작아서 상 위에 놓인 음식을 반도 먹지 못할 것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무호가 승주를 노려보았다.
“왜 또 노려보십니까? 그렇게 눈에 힘을 주면 두통 생기십니다.”
승주가 삼색 고명이 화려하게 올라간 닭백숙을 젓가락으로 꾹꾹 찌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것만 먹고 가거라.”
“나가봐야 할 일도 없는데, 좀 더 있으면 안 됩니까?”
“네 이놈!”
무호의 호통에 승주의 표정이 더욱 시무룩해졌다. 글재주와 총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인 데 비해 신분은 미천한 탓에 승주는 그 성품이 냉담하고 경계심도 많았다. 그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친형처럼 자신을 돌봐준 무호에게조차 감정을 쉽게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 승주가 낙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럽고 불안해서 무호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알았으니 너무 닦달하지 마십시오. 점심만 먹고 바로 궁에서 나가겠습니다.”
“다른 놈들이 단체로 술을 퍼마시건, 쉰밥을 주워 먹고 쓰러지건 상관없으니 다시는 궁문을 넘어서지 마라.”
“예.”
울적하게 대꾸하고는 승주가 닭다리를 뜯어 들고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입이 짧은데다 뭐든 많이 먹는 법이 없던 승주가 삶은 닭고기를 목구멍이 미어지게 밀어 넣는 것을 보던 무호가 입맛을 잃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승주야.”
“예?”
“공연히 여기서 기웃거리지 말고 내일부터는 너도 영재를 따라서 도성 구경이나 다니거라. 나도 한 번 나오기 힘든 도성이니 너는 언제 다시 오겠느냐? 너는 구경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들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느냐?”
“내일부터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승주가 씹던 고기를 힘들게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부상을 당해 누웠다고 만만하게 보고 버틸 때에는 그렇게 괘씸하더니 풀이 죽어서 고분고분한 모습은 그것대로 안쓰러워서, 무호가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승주를 달랬다.
“그…… 너와 편지를 주고받던 그 상서부 시랑이란 자라도 찾아서 만나면 좋지 않으냐?”
승주가 지난 3년간 도성의 벼슬아치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화와 글자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그로부터 종종 서책이나 귀한 문방 물품을 선물로 받았던 것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수진이 비의 품계를 받아 입궁한 이후 좀처럼 웃음을 보이지 않던 승주의 얼굴이 유일하게 풀리는 것이 도성에서 온 친구의 편지를 받아볼 때 정도라서 무호도 그 교류를 내심 다행스럽게 생각하던 터였다.
“그자가 매번 네 글씨와 문장을 칭찬하며 귀한 붓이며 종이를 보내왔다니 찾아가면 분명 반가워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퇴궐하는 길에 지나가는 내관을 붙잡고 물어봤는데, 상서부에 그런 이름을 가진 자는 없답니다.”
“응?”
무호의 의아한 표정에 승주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자의 직급이 상서부의 하급 시랑이라면서?”
“지금의 황제께서 친정을 시작하신 후로 상서부의 기능이 크게 확대되어 내직의 시랑만 백여 명이랍니다. 그러니 내관이라도 직급 낮은 중신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알지 못하는 것일 테지요. 아니면 지난 몇 달 사이에 외직으로 나간 것일 수도 있고…….”
그렇게 대답하며 승주가 물 한 잔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현성은 궁벽한 시골 소읍이라서 성 안의 문사들도 글이나 간신히 읽고 쓸 뿐, 학식이 높다거나 예술적인 조예가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노상 같이 살다시피 몰려다니는 무호의 부장들은 대부분 까막눈이라 승주의 필체나 문장을 이해하기는커녕 사내가 되어서 말도 제대로 못 타고 무기도 다룰 줄 아는 것이 없으니 아무 데도 쓸모없다고 도리어 타박이나 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거친 환경에서 인정도, 이해도 받지 못한 채 삭막하게 지내던 승주에게 먼 곳에서나마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고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는 친구가 생긴 것은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만큼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사절단에 끼어 오면서 그자를 꼭 한 번 만나고 가려고 그간 썼던 글씨 중에 잘 쓴 것과 틈틈이 그려놓았던 서화를 짐 보따리 깊은 곳에 넣어 왔던 것인데, 상서부 시랑이란 벼슬과 이름만 알면 금방 찾을 줄 알았던 편지 친구를 찾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그자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느냐?”
“이시영이란 자입니다.”
“별궁지기 내관들이 수천 명에 이르는 중신들의 이름을 다 알기는 어렵겠지만, 누군가 아는 자가 있지 않겠느냐? 매일 저녁 대전 내관이 들어 안부를 묻고 가니 내 그 편에 알아봐주마.”
공연히 궁 안을 기웃거리며 어찌 수진이 얼굴이나 한 번 볼까 싶어 청승 떠는 것보다는 승주의 글씨와 그림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그 친구를 만나 술잔이라도 기울이며 좋아하는 서책 얘기나 하게 해주고 싶어서 무호가 승주를 위로하듯 조용히 달랬다.
“고맙습니다, 장군.”
“승주야.”
“예?”
“이미 끊어진 인연이다. 이리 서성거리면 어찌 얼굴은 한 번 더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뭘 하겠느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승주야!”
“잘 지내시는지 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아씨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실 적부터 꽃가지 꺾어 드리며 오누이처럼 지냈는데 그 정도도 하면 안 됩니까?”
더는 감추지 못하고 결국 속내를 토해낸 승주를 무호가 복잡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장군…….”
“밥도 아깝다. 먹던 것 내려놓고 이 길로 궐에서 나가거라.”
무호의 명에 승주가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곧 울 것 같은 눈길로 무호를 노려보았다.
“그만 잊어라. 너처럼 총명한 아이가 어찌 이렇게 미련스러우냐?”
“이런 일은 총명한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이럴 것이면 평소에 그렇게 똑똑한 척을 말든가…….”
“이만 물러갈 것이니 몸조리 잘하십시오. 쾌차하셔서 사신각으로 나오시면 그때 뵙겠습니다.”
승주가 무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향원궁의 긴 복도엔 가을날의 싸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벌써 서리가 내리고 이따금 세찬 바람이 불 때면 한겨울보다 더 추운 대현성의 공기와는 비할 수 없이 유순한 날씨였지만 승주에게는 이 바람조차 손끝이 시릴 정도로 춥게 느껴졌다.
어차피 무호가 황궁에서 공비의 돌려차기에 목이 돌아가는 불상사를 당하지만 않았으면 승주는 궁문을 넘어설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 것을, 이제 이렇게 돌아 나가면서 뭐 대단한 기회라도 잃은 듯 허탈한 기분이 드는 것조차 우스워서 승주가 허허…… 하고 남몰래 헛웃음을 웃었다.
하긴, 수진 아씨는 이미 황제의 후비가 아닌가? 게다가 황제는 아직 젊고 그리 잘났다니, 사가의 머슴 따위 기억이나 할까? 이러다 마주쳐봐야 내 속만 더욱 쓰릴 터……. 나도 내일부터는 영재 형님을 따라 도성 구경이나 다녀야겠다. 아니면 그 상서부 시랑을 다시 수소문해보든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승주가 복도 저 앞에서 사람들 몰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무호를 시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든 것이려니 생각하던 승주가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저만치 앞에서 다가오는 내관과 궁녀들 사이에서 3년 전,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정인의 얼굴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향원궁의 긴 복도에 어디선가 가을바람이 새어 들어와서 승주의 옷깃과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 찬 기운에 승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꾸벅 허리를 굽혔다. 공비도 그제야 자신이 그리움이 지나쳐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멈췄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승주야…….”
“아씨.”
짧은 한 마디였지만 지난 3년간 꿈에서나 듣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스치자 공비의 눈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씨, 그간…….”
승주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공비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평안히 잘 지내셨습니까?”
“네가 도성에 와 있는 줄은 몰랐구나. 오라버니를 뫼시고 온 것이냐?”
승주를 데리고 왔으면서 자신에게는 귀띔조차 없었던 무호가 원망스러워서 공비가 젖은 눈으로 침전 쪽을 노려보았다.
“예, 아씨.”
“여기서 오라버니를 돌봐드리고 있었느냐?”
“예.”
“허면…….”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왜 벌써? 아직 정오도 채 지나질 않았는데…… 벌써 가느냐?”
“수룡천변의 큰 서점에서 찾아볼 서책도 있고, 찾아야 할 사람도 있고……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장군께서 먼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3년을 하루같이 그리다가 이렇게 만났는데, 그나마 꿈결처럼 스쳐 지나가는구나 싶어서 공비가 안타까운 눈길로 승주를 쳐다보았다.
“허면 내일도 드느냐? 내일은…….”
“아씨께서 사가를 떠나시던 때에 어르신의 심부름으로 장성 밖에 나가 있느라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승주가 공비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내일은 안 오느냐?”
“미천한 제가 궁에 들어서 아씨께서 이리 귀히 되신 모습을 직접 뵌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복입니다. 앞으로 내도록 건강하시고, 황제 폐하와 함께 만복을 누리십시오.”
당장이라도 승주를 일으켜서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얼굴은 왜 이렇게 까칠한지, 아비와 오라비에게서 구박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앞뒤로 십여 명의 내관과 상궁들이 버티고 선 탓에 공비는 옴짝도 못하고 서서 승주의 등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이대로 가려고 하느냐? 잠시 곁방에라도 들어 고향 이야기라도 전해주지 않고?”
“송구합니다, 아씨. 소인은 이만 물러갈 것이니 침전에 들어 장군을 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장군께서 아씨를 많이 보고 싶어하셨습니다.”
“승주야…….”
승주가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서자 공비가 저도 모르게 승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승주가 이런 식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것은 그간 공비가 수없이 꿔왔던 악몽의 한 장면이었다. 그때 권 상궁이 기겁을 하고는 공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마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장군께서 기다리십니다.”
권 상궁이 그렇게 말하며 승주를 가로막고 섰다.
“왜 이러는가? 비켜보게.”
공비가 권 상궁을 옆으로 밀고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던 승주를 찾았다. 하지만 승주는 이미 발길을 돌려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승주가 그렇게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 시야에서 사라져버리자 공비의 눈에서 눈물이 마치 비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황후와 함께 점심을 들고 강보에 싸인 어린 황자를 한참 들여다보던 욱이 중문 너머 윤 내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에 환이와 명이가 들어와서 윤 내관의 귓가에 뭔가를 소곤거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
“별일은 아니옵고…….”
윤 내관이 황후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황제가 사흘 만에 중궁에 들어 화기애애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데 아이들이 눈치 없이 들어와 분위기를 깬 것이 아닌가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환이와 명이를 허연의 아이들로 여겨 예뻐하며 격의 없이 대하고 있었지만 황후는 입장이 또 다르니 견습 내관들의 조심성 없는 태도가 얼마든지 거슬릴 수 있었다.
“제가 아이들에게 영운궁 심부름을 시키며 공비께서 향원궁에 드시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일렀기에 그 일을 전한 것입니다.”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그제야 공비에게 향원궁에 가서 무호를 돌보라는 명을 내린 것을 기억해내고 두 아이들을 중문 안으로 불러들였다.
“너희들이 영운궁에 가서 과인의 명을 전했느냐?”
“예, 폐하.”
욱의 물음에 두 아이들이 마치 합창을 하듯 입을 맞춰 대답을 했다.
“공비는 어떻더냐? 몸은 괜찮은 듯싶더냐?”
“다소 기력이 없으신 듯싶으셨지만 바로 예복을 갖추고 궁을 나서셨습니다. 또한 향원궁 출입을 허락해주신 폐하의 배려에 황은이 망극하다며 거듭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환이의 대답에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곁에 있던 황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비가 몸이 아팠었습니까?”
“아…….”
욱이 황후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일이 좀 있었소.”
“일이라 하심은…….”
“큰일은 아니니 마음 쓸 것 없소. 황후는 당분간 몸조리하며 아이들에게나 마음을 쓰시오.”
욱의 대꾸에 황후가 측근의 상궁들에게 슬쩍 눈을 흘겼다. 그 눈총에 황후의 출산 이후 칠궁에서 일어난 일은 일체 함구를 하던 두 상궁이 당황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황후와 두 상궁 사이에 오가는 무언의 대화를 모른 척 욱이 명이를 쳐다보았다.
“그래, 공비는 향원궁에 들었느냐?”
“예, 폐하.”
“향원궁에 들어 오라비에게 잘못했다고 사과는 하더냐? 곁에 붙어 앉아 직접 탕약 시중이라도 들더냐?”
“…….”
욱의 물음에 환이와 명이가 서로를 쳐다보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공비가 향원궁에 든 것은 맞지만 침전의 정황은 욱이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두 아이들이 머뭇거리는 걸 본 욱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무호에게 폭행을 사죄하고 한나절 수발이라도 들며 반성을 하라는 뜻으로 향원궁에 보내준 것인데, 사과도 않고 시중도 들지 않는다면 거기서 대체 뭘 하고 있나 의아했던 것이다.
“공비마마께서는 침전에 드신 이후 한 말씀도 없이 계속 울고만 계십니다. 장군께서 어쩔 줄 몰라 어찌 우시느냐, 그만 그치시라 아무리 만류를 해도 그치지 못하시고…….”
“…….”
“그런 까닭에 소인들이 물러나올 때까지도 향원궁은 마치 초상집 같았습니다.”
아이들의 대답에 욱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향원궁에서 사고가 난 그날 오후에 영운궁에 갔다가 대성통곡하는 공비의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이미 이틀 전의 일인데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오라비를 걷어차 중상을 입힌 일은 백번 사죄를 해 마땅한 일이지만 공비의 무덤덤하고 무뚝뚝한 성격을 생각할 때 오늘까지도 그러는 것은 다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그 심정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비가 그간 워낙 외롭게 지내다 오라비를 만나고 보니 그간의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친 모양입니다. 친정은 수천 리 밖이고, 지난 3년간 친정 어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으니 성격이 무덤덤하고 퉁명스럽다고는 해도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몇 날 며칠 대성통곡을 할 정도로 후회스러우면 애초에 발길질을 하지 말지, 사람을 때려눕혀놓고 미안함과 후회 때문에 사흘이나 눈물바람을 하는 것도 유별나다 싶어서 욱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러지 마시고 편전에 드시기 전에 향원궁에 잠시 들러 공비를 달래주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하품을 하며 칭얼거리는 아기에게 손가락을 쥐여주며 황후가 말했다. 둘째 아들을 얻은 이후 황후는 자신감과 여유를 많이 되찾아서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져 있었다.
“오라비도 달래지 못하는데 내가 간다고 마음이 풀리겠소?”
“공비는 폐하의 후궁입니다. 지아비가 아픈 마음을 보살피고 달래주는데 그것을 싫어할 여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신이 그간 공비에게 지아비 노릇을 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욱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아까부터 자신의 옷고름을 쥐고는 묶었다 풀었다 하며 놀고 있는 원자를 번쩍 안아 무릎에 앉혔다.
“대체 왜 그러는지 영문을 통 모르겠구먼. 그동안에도 조용히 잘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대현성에서 오라비가 오고 나서는 궁 안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으니…….”
“멀리서 온 무호 장군을 봐서라도 공비를 어여삐 여겨주십시오. 저도 앞으로는 영운궁의 일을 좀 더 세심히 살피겠습니다.”
가만 보면 황후가 자신보다 더 정치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며 욱이 피식 웃었다. 자신을 공비에게로 슬쩍 밀어 보내는 것이 순수한 호의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 말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황후의 건강이니, 우선은 몸을 돌보고 다른 일은 그 이후에 생각합시다.”
점심을 들고 잠시 아이들과 놀아준 후 편전으로 돌아가는 황제를 문밖까지 배웅하고 온 황후가 태감과 측근의 두 상궁을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그들에게서 그간 향비가 남모르게 공비를 핍박했던 일, 그 일을 황제가 알고서 궁내청 태감을 윤 내관 직속으로 갈아치우고 공비의 처우를 개선해준 일, 무호 장군의 숙소를 마련하고자 향비 일가를 사신각에서 내보낸 일 등을 고해 올렸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런 일을 즉시 내게 고하지 않았느냐? 칠궁에서 일어난 일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황후의 책망에 두 상궁이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기씨를 생산하신 이후 마마께서 좀처럼 기력을 찾지 못하시고 하루의 절반을 누워서 보내시는 형편이시니, 소인들이 어찌 후궁의 사소한 다툼을 미주알고주알 고해 올려서 심기를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또한 마마께서 산후조리 하시는 동안은 칠궁의 일이건 조정의 일이건 좋지 않은 소식은 전하지 말라는 어명이 지엄하신지라…….”
“이런 답답한 사람들을 보았나? 지금 내 산후조리가 중한가?”
“마마, 어인 말씀이십니까? 마마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내 몸이야 시간이 흐르면 차차 회복이 될 터, 몸이 좀 불편하다 해서 중궁이 후궁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모르고 귀머거리 장님처럼 지내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 바람에 일개 후궁 따위가 마치 황후라도 된 듯 같은 품계의 후궁을 핍박하며 전횡을 휘두른 것이 아닌가?”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소인들이 생각이 짧아 마마께 큰 누를 끼쳤습니다. 하오나 마마께서 이제 둘째 아드님을 낳으셨으니 고작 향비 따위가 더 무슨 위세를 부릴 수 있겠습니까?”
상궁들이 사죄를 하며 황후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황후는 산달에 들면서부터 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자리에 누워 보내는 날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출산도 꼬박 이틀에 걸친 난산이었기에 아직까지도 쉽게 기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왕 상궁의 말이 맞습니다, 마마. 폐하께서 그간 향비가 수족처럼 부리던 궁내청 태감도 잘라내시고, 몇 달간이나 사신각이 제 집인 듯 눌러앉아 온갖 호사를 누리던 그 친정 식구들도 사가로 돌려보내셨으니 이는 더 이상 미향궁의 방자함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까? 또한 폐하께서 마마와 두 분 아기씨를 극진히 살피시니 향비가 앞으로는 감히 마마께 경거망동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마. 폐하처럼 영민하신 분께서 언제까지 그 탐욕스럽고 천박한 향비를 총애하시겠습니까? 아직은 어린 아기씨들을 보아 대접을 하고 계시지만 곧 만정이 떨어지실 것입니다.”
오 상궁의 설득에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태화궁의 궁인들은 황후가 오랜 노심초사 끝에 둘째 아들을 얻자 이제 그 누구도 태화궁을 넘보지 못하고 감히 그 앞에서 고개도 함부로 쳐들지 못할 것이라 크게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하룻밤 사이에 미향궁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고, 거기에 황제가 날마다 태화궁에 들어 황후와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살피며 전에 없는 다정함을 과시하기까지 하니, 태화궁의 위세는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하지만 둘째 아들을 낳아서 기쁘고 안심이 되는 중에도 황후는 마음 깊은 곳에 서린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하례를 올리는 모든 사람들이 큰일 하셨다고 치켜세우며 세상의 모든 복이 마마에게 있으니 앞으로는 평생 어떤 시름이나 고난도 없으리라 입을 모았지만, 그것은 이전에도 한 번 겪어본 일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황제의 유일한 아내로 가례를 올린 지 1년여 만에 원자를 낳았을 때엔 주변 사람들의 치하와 호들갑이 이 정도가 아니었었다. 영산에 가 있는 태황태후가 영종을 낳은 이후 무려 40여 년 만에 적통 황자가 났다며 온 나라가 잔칫집이었고, 전국 각지와 외국에서 몰려온 축하 사절의 행렬은 원자가 백일이 되는 날까지 끊이질 않았었다. 그때는 황후 자신 역시 비록 관계는 미지근했으나 천하의 주인이자 관옥 같은 미장부인 황제의 배필이 되어 순조롭게 아들을 낳은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워 자만심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하루 앞을 모르는 것, 자신이 아들을 얻고 그와 더불어 친정의 위세가 날이 갈수록 등등해지면서 모든 것을 다 이룬 것만 같았던 시절도 꿈결인 듯 지나가버렸고, 황제와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냉담해졌으며, 후궁의 비어 있던 전각은 어느 순간에 자신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명문가의 딸들로 가득 차고 말았다.
기세등등한 명문가의 여식들과 대거리를 해가며 힘겹게 황궁의 안주인 노릇을 하던 중,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아들이 큰 병을 얻어 결국 실명에 이른 일은 그녀의 모든 의지를 다 빼앗아 갈 만큼 모진 시련이었다. 실제로 원자의 실명은 조정에 크나큰 지각 변동을 일으켜서 제2황자의 생모인 향비에게 조정의 관심과 후궁의 권력이 집중되었고 태화궁은 인적 없는 빈집인 듯 황량해지고 말았었다. 그 뼈아픈 경험을 통해 황후는 아들의 출산이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향비가 미모가 뛰어나거나 제왕가의 여인으로서 자질이 빼어나 지금의 위세를 얻은 것인가? 제2황자의 생모라는 지위와 친정 가문의 영향력 때문에 모두가 그녀를 두려워하고 폐하께서도 향비를 존중하시는 것이네. 내가 이 아들을 얻은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지만 향비의 위치는 변한 것이 없으니, 그녀는 여전히 내게 가장 위협적인 적일세.”
“마마…….”
“그런데 목전에 그런 자를 두고서 먼 산 바라보며 몸조리나 하게 생겼는가? 앞으로 후궁의 일은 큰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내게 바로 고하도록 하게. 특히 향비 주변의 일은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허투루 보지 말고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네.”
황후의 단호한 명령에 두 상궁과 태감이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예, 마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왕 상궁은 이따가 영운궁에 가보게. 그 장승같은 사람이 그간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으면 다쳐서 누워 있는 오라비를 붙들고 그리 눈물바람을 하고 있겠는가? 향비의 행패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본궁의 실덕이니 맛있는 음식이라도 좀 들고 가서 내 위로를 전하라.”
“예, 마마.”
윤 내관이 향원궁의 침전에 들었을 때엔 공비는 이미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간 이후였고 무호만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의관들도 곁에 없고, 궁인들도 나가 있으라고 했는지 문 밖에 모여서서 공비가 한바탕 통곡을 하고 물러간 것을 두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느라 휑하니 큰 방에 무호 혼자 누워 있는 정경은 다소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휘명전 윤 내관입니다, 장군.”
갑작스러운 상선의 방문에 무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으려고 움찔거렸다. 하지만 윤 내관이 얼른 곁으로 다가가 무호를 말렸다.
“일어나실 것 없으십니다. 그러다 다친 목이 덧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냥 계십시오.”
“상선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소인은 천한 내관이니 말씀을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장군.”
“하지만…….”
“폐하께서 직접 오셔서 장군의 용태를 보고자 하셨으나 오후엔 시강원 교수들과 강론이 잡혀 있어서 시간을 내지 못하셨습니다. 하여 소인에게 장군이 어떠신지 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변방의 무장에게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니 참으로 황은이 망극할 뿐이오.”
그렇게 대답하며 무호가 자리에 털썩 누웠다. 공비의 돌려차기에 걸려 자리에 누운 것이 이제 꽉 채운 사흘. 그간 몸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자꾸 입궁해서 얼쩡거리는 승주 때문에 정신적으로 조마조마하고, 원수 같은 누이동생 때문에 속 터지고…… 게다가 내의원에서 들이는 보잘것없는 환자식 때문에 사흘을 꼬박 굶은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그 며칠 사이 무호는 얼굴이 반쪽이 나 있었다.
별궁에서 어의들에게서 시료를 받고 궁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몸조리를 하는 사람의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기만 하니 윤 내관도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크게 불편한 점이 있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장군.”
“이리 극진히 살펴주는데 몸 아픈 것 외에 무슨 불편이 있겠소? 하지만 궁 안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심히 민망하니…… 내일은 그만 출궁을 했으면 하오.”
“장군의 입장에선 별궁에 누워 계신 것이 불편하실 수도 있겠으나 이토록 몸이 상하실 정도이십니까? 폐하께서 오셔서 장군의 안색을 보셨다면 내일 출궁은 고사하고 어의가 불려와 크게 책망을 들었겠습니다.”
“그것은…….”
“오후에 공비마마께서 오셔서 그저 눈물만 흘리다 가셨다 들었을 때에는 잘 우는 분이 아니신데 어찌 그러셨을까 의아하더니만, 와서 장군의 상태를 직접 보니 공비마마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먼 곳에서 오신 오라버니께서 이렇게 얼굴이 다 상해 계시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 무정한 것은 내가 걱정스러워서 그렇게 펑펑 울었던 것이 아니라고…… 오는 길에 하필 승주와 마주친데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 것이 억울하고 서러워서 꼬박 한 시진을 전각이 떠나가라 울며 그렇지 않아도 심신이 불편한 자신의 진을 쏙 빼놓고 간 것이라고…… 다 일러바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무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이 다 내가 못난 탓이외다.”
“어서 회복을 하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윤 내관이 침상 곁으로 다가와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잡아주고 비뚤어진 베개를 고쳐 놓아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내의원에 들러서 장군의 상태를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시료나 약 처방을 바꾸어보든지 해야지, 이렇게 축이 나셔서야…….”
“마음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상선.”
“장군을 곁에서 돌보던 그 시종은 벌써 내보내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윤 내관의 질문에 무호가 당황해서 눈을 끔뻑였다.
“아, 그 아이는…….”
“궁인들을 부리기 편치 않으시면 그 아이라도 곁에 두시지 그러셨습니까? 이곳은 칠궁에서도 멀고 밤새 의관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니 데리고 계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숙직패를 한 벌 써서 보낼 것이니 내일부터는 그것을 지니고 다니게 하십시오. 그 하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 아니오. 그놈은 이제 궁에 드나들지 않을 것이외다.”
“예? 장군께서 아직도 이렇게 몸이 편찮으신데…….”
“그놈만 고생을 시키는 것 같아서 내일은 다른 부장을 보내라고 일렀소.”
생긴 것과는 달리 아랫사람을 부리는 일에 인정이 있다 생각하며 윤 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습니까?”
“여러모로 마음을 써주어 고맙소.”
“허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 폐하께 장군의 상태를 전해 올리겠습니다.”
윤 내관이 무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저, 잠시만…….”
막 침전을 나서려던 윤 내관을 무호가 불러 세웠다. 공비의 눈물바람으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떤 일이 퍼뜩 떠오른 탓이었다.
“예?”
“혹시 내직에 있는 상서부 시랑 중에 이시영이란 자가 있소이까?”
그 물음에 윤 내관이 무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인이 알기론 상서부 시랑 중엔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없고…… 상서령으로 계신 정안군께서 시자, 영자를 쓰십니다.”
윤 내관의 대답에 무호가 편치 않은 고개를 힘들게 갸웃거렸다.
“정안군이라면 지체 높은 종친이 아니십니까? 폐하의 사촌 형님이 되시는…….”
“그렇습니다만…… 혹, 그분을 찾으십니까?”
“아, 아니오.”
어찌 된 일인가? 승주와 편지를 주고받는 자가 분명 이시영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정안군의 이름이라니…… 이러니 승주가 그자를 찾는 데 애를 먹은 것이로구나. 혹…… 어떤 못된 놈이 촌구석에 찌그러져 사는 천한 종놈이라고 승주에게 장난질을 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무호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내가 사람의 이름을 잘못 알았던 모양이오. 상서부 시랑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있다고 하여…….”
“상서부 시랑 중에 이름 비슷한 자들이 몇 명 있긴 합니다. 상서부 예조에 이시은이란 자가 있고, 출간청에 이세영이란 자도 있고, 지난 과거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상서부에 보직을 받아서 이런저런 잡무를 맡아 보는 임시영이란 자도 있습니다.”
윤 내관의 설명에 그럼 승주가 서신을 주고받는 자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무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도성이나 황성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니 달랑 이름만 들고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대현성이었으면 이름 석 자는 고사하고 인상착의만 얼추 비슷해도 반나절이면 너끈히 찾아낼 것인데…….
“이름 외에 다른 사항은 혹, 모르십니까? 제가 한 번 찾아봐드리겠습니다.”
무호가 궁 안에서 사고를 당해 통 회복을 못하고 있으니 사람이라도 찾아주면 혹 위로가 될까 싶어서 윤 내관이 그 상서부 시랑의 인적 사항을 슬쩍 캐물었다.
“그것이, 나도 직접적으로 아는 자가 아니라서…….”
“아…….”
“글씨나 그림 같은 것에 관심이 많고, 먼 곳에서 서신이나 주고받는 상대에게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이나 질 좋은 화선지를 백 장씩 보내주는 사람이오. 전엔 무슨 먹을 받았다며 보여주는데, 굉장히 향기가 진하고 사면에 금박으로 고문자가 씌어 있었소이다.”
“그런 선물을 보낼 정도라면 무척 부유한 사람인가 봅니다.”
작금의 상서부는 요직 중의 요직이라 장원 급제자도 많았고, 지방의 유력자나 명문가의 자손들 중 재주가 뛰어난 자도 적지 않게 포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 정도로는 누구라고 콕 집어내기가 어려웠지만, 일단 단서는 잡았으니 부유하고 주머니 넉넉한 자부터 뒤지면 찾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윤 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이름만 알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을 꺼낸 것인데, 공연히 수고를 끼친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윤 내관이 무호에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일과를 다 마치고 청량전으로 돌아온 욱이 아무 데도 안 가고 서재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 허연을 발견하고는 헤벌쭉 웃었다. 허연이 다시 사가로 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붙들어 앉힌 것이라 혹시 그가 말도 없이 나가버리고 전각이 휑하니 비어 있으면 어쩌나 싶어서 욱은 일하는 중에도 몇 번이나 후원 쪽을 곁눈질하곤 했었다.
“오셨습니까? 드실 때 기척이라도 좀 내시지요.”
허연이 보던 책을 덮고 일어나 욱을 맞았다.
“자거나 쉬고 있는 데 방해가 될까 싶어 그냥 들어왔네.”
“오늘은 좀 늦으셨습니다. 일이 늦게까지 있으셨습니까? 아니면…….”
허연의 물음에 욱이 고개를 저었다.
“일이 늦게 끝났네. 저녁은 들었는가?”
“달리 기별이 없으셔서…….”
“먼저 들었는가? 난 아직인데…….”
때가 좀 지나긴 했지만 같이 먹으려고 배고픈 것도 참았는데 허연은 먼저 저녁을 먹었구나 싶어서 욱의 입술이 슬슬 앞으로 튀어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연이 씩 웃으며 오리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욱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내관과 상궁들이 서재에 저녁상을 차리는 사이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침대에 발랑 누워서 노닥거리던 욱이 침상머리에 앉아서 아까 보던 서책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허연을 쳐다보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허연이 자신을 맞아주고, 종일 고생했다고 위로하며 옥류관과 용포를 벗겨주는 것은 욱에게는 이제 익숙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쩌다 이런 사람을 만났으며, 그토록 아프게 헤어지고 나서 어떤 인연으로 또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열 살 어린 나이에 원치도 않았던 옥좌에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던 내게 어떻게 이런 행운과 복이 왔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가슴 깊은 곳이 싸하니 아파오곤 했다.
“귀인…….”
“예?”
허연이 책에서 눈을 떼고 욱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때에는 다정하고, 어떤 때에는 무심하고, 어떤 때에는 엄하고, 또 어떤 때에는 한없이 너그럽고…… 욱은 허연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가끔은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서방님이 종일 힘든 일에 시달리다 돌아왔는데 어찌 눈길도 한 번 안 주는가? 그것이 무슨 책이기에 그리 정신이 팔렸는가?”
“눈길도 안 주다니요? 드시자마자 무거운 관과 용포를 벗겨드리고, 입맞춤도 한 번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
“좀 있으면 저녁 수라 준비가 다 끝날 것입니다. 공연히 짜증 내지 마시고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허연이 일부러 무심한 척 다시 서책에 눈길을 주며 욱의 입술을 꽉 한 번 꼬집었다. 욱이 허연에게 입술을 잡혀서 웅얼웅얼 투덜거리고 있을 때 윤 내관이 침실 안으로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방 안 공기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다정한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자신이 태황태후궁 문서 수발 내관으로 있을 때, 일과 끝내고 나서 차 한 잔씩 같이 하던 생과청 민 상궁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물가에 핀 창포꽃처럼 수수하면서도 청초한 외모의 민 상궁은 윤 내관뿐 아니라 태황태후궁에서 일하는 많은 내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윤 내관이 그렇게 경쟁이 치열했던 민 상궁과 때때로 차를 나눌 정도로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궐 밖 출입이 자유로운 문서 수발 내관으로서의 이점 덕분이었다.
윤 내관은 사가 출입이 거의 불가능한 민 상궁을 대신해 심부름 나가는 길에 그 사가에 안부 편지와 함께 푼푼이 모은 돈이나 따로 챙겨놓은 귀한 과자 따위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마다 않고 들어주었고, 결국 민 상궁의 믿음과 호감을 얻어 친구처럼 지내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윤 내관이 대전 상선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민 상궁과 만날 기회가 확 줄더니만, 원수 같은 조가 형제들의 변란으로 태황태후가 영산으로 쫓겨 갈 때 그 이어 행렬에 민 상궁도 포함되어 태황태후궁의 다른 궁인들과 함께 영산으로 떠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태황태후가 환궁할 일도, 황제가 영산으로 태황태후를 보러 갈 일도 영 없을 것이니, 윤 내관은 민 상궁과 말 그대로 생이별을 하게 되고 만 것이었다.
그때 그 변란이 윤 내관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던데다 죽어나간 내관과 상궁들도 적지 않은 수였기에 당시엔 섭섭한 것도 잘 모르겠더니,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하루 일과 마친 후나 번이 없는 날이면, 따뜻한 차와 직접 만든 달콤한 과자를 가져와서 좀 드시라며 내놓던 민 상궁의 고운 얼굴과 상큼한 미소가 눈앞에 빈번히 어른거렸다.
게다가 요즘처럼 만추의 찬바람이 허파와 가슴속으로 파고들 때면 못 견딜 정도로 민 상궁이 보고 싶을 때가 드물지 않은데, 그 앞에서 황제와 허연이 날마다 이렇게 염장을 지르니 아무리 저분은 황제, 나는 내관이라도 윤 내관이 울적한 기분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저녁 수라 준비가 다 되었는가?”
갑자기 시무룩해진 윤 내관의 눈치를 살피며 허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서재로 드시지요.”
윤 내관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강원 교수들과의 강론이 길어지는 바람에 저녁때를 놓친 욱이 며칠 굶은 맹수와 같은 기세로 수라상에 놓인 각종 고기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욱의 수라상은 허연의 명으로 고기 반, 야채 반으로 비율을 맞추고 있었는데 고기 요리 세 접시가 바닥이 나고 꿩 만두 사발이 비도록 야채 요리는 처음 내온 그 모양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째 오늘은 나물 반찬 먹으라는 잔소리를 안 하네그려?”
“열흘에 하루 정도는 입맛대로 드십시오. 어의도 그 정도로는 건강을 크게 해치지 않으실 것이라 했으니…….”
“아, 그날이 오늘이었구먼.”
욱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간장에 조린 돼지고기 목살을 편안한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허연이 환궁한 이후, 욱은 늘 아침저녁은 그와 함께 들며 거의 나물로만 배를 채우고 있었다. 물론 허연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 먹이는 것이었지만, 딱히 땡기지도 않는 푸성귀를 질겅질겅 씹을 때면 내가 한 나라의 황제인지, 절에서 수행하는 승려인지 모르겠다는 투정이 절로 나오곤 했다. 그런 욱을 배려해서 허연은 열흘에 한 번 정도는 입맛대로 배를 채우는 것을 눈감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점심때는 여전히 기름진 육류로만 배를 채우지 않으십니까?”
“점심이라도 제대로 먹으니 버티고 있는 것이지,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쓰러졌네.”
그렇게 너스레를 떨면서 욱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 양고기 구이를 허연에게 권했다.
“저는 이미 많이 먹었습니다.”
“겨우 밀빵 한 조각하고 나물 조금 집어 먹은 것이 전부가 아닌가?”
욱의 계속된 권유에 허연이 양고기 조각을 받아 물었다. 그러곤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상 옆을 지키고 있는 윤 내관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자꾸 윤 내관의 눈치가 보이고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잘 밤에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폐하도 이만 상을 물리십시오.”
“무슨 소리? 든든히 먹어야 좀 이따 힘을 쓰지.”
닳고 닳은 난봉꾼 같은 대꾸에 허연이 욱을 노려보며 양고기를 힘겹게 꿀꺽 삼켰다.
허연의 눈총에도 굴하지 않고 양고기 구이를 싹싹 먹어치운 후에야 욱은 식탁에서 물러앉았다. 그러곤 막 생각이 났다는 듯 허연을 돌아보았다.
“다음 달 내 생일에 화산 행궁으로 원행을 할 것이네. 형님께서도 그간 나랏일 돌보느라 애 많이 썼으니 좀 놀다 오라며 열이틀 일정의 원행에 동의를 하셨네.”
“열이틀이면…… 다소 길지 않습니까?”
“오고 가는 데만 엿새가 걸리는 원행이니 일정이 길다고 할 수는 없지.”
“봄부터 그렇게 가고 싶어하시더니…… 잘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떠나는 원행인데다 둘이 오붓하게 화산 행궁에서 놀고 올 생각에 잔뜩 들떠 있던 욱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허연의 반응에 화산 행궁이 어떤 곳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다.
“화산의 숲은 예로부터 사슴이 많이 사는 곳이라네. 더욱이 그 일대는 황실의 영지로 백성들의 출입을 엄히 금하는 곳이라서 황성 인근엔 그만한 사냥터도 드물지. 게다가 온천은 또 어떻고? 본래 물 좋기로 소문난 곳이라 행궁에도 큰 욕탕이 있는데, 거기에 몸을 담그고 향기로운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면 그 운치가 아주 그만이라네.”
“폐하께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뵈니 저도 좋습니다만, 궁 안에 산모와 갓난 아기씨가 계신데 너무 오래 궁을 비우는 것은…….”
“내 생일 즈음이면 출산한 지 40일은 될 것이니 그때쯤이면 황후도 기력을 되찾지 않겠는가? 그때가 되도록 몸이 편치 않다면 취소를 하든가 미루면 될 일이고…… 그러니 일단은 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게.”
황후 눈치가 보이니 원행은 다음에 가자고 허연이 어깃장을 놓을까 겁이 나서 욱이 얼른 선수를 치고 나섰다.
사실 욱은 화산에 이미 두 번이나 갔다 왔었고, 후궁들과 종친, 휘하 신하를 백 명이나 이끌고 다녀온 원행에 큰 감흥도 없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환궁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우화원에만 갇혀 있었던 허연에게 바람도 쐬어주고, 번잡한 궁을 떠나 둘만의 시간을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은 화산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황후께서는 거동을 못하실 것이고…… 허면,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아도 노상 황제를 독차지하고 있는데 원행도 둘만 가는 것인가 해서 허연이 슬쩍 운을 뗐다. 어차피 궁 안에 갇혀 사는 입장이야 다 같은 것, 자신은 황제의 총애를 믿고 내키는 대로 궐 밖 출입도 하지만 다른 후궁들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칠궁의 담장 밖을 나서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후궁들에게도 궐 밖 나들이는 크게 기대되는 행사일 것이고…… 게다가 엊그제 초라한 전각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서럽게 울던 공비의 모습을 보니 산중의 호랑이를 잡아다 좁은 우리에 가둬놓은 형상이라 내도록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자네가 개의치 않는다면 공비를 데려갈까 하네.”
“공비마마를요?”
“그렇게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다니 사냥에 데리고 가도 걸리적거리는 일은 없을 터, 또한 무호의 부장이 그 활 솜씨를 일러 천하에 다시없는 명궁이라고까지 할 정도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솜씨를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영운궁에 갔다 온 이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멀리 나가서 말이라도 마음껏 달리면 공비마마의 답답한 마음도 다소 풀리시겠습니다.”
시영도 그렇고 허연도 그렇고…… 처음엔 원행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일정 길다고 트집을 잡다가 공비를 데려가겠다고 하니까 태도가 돌변해서 잘 생각했다 칭찬을 하며 더는 원행에 대해 가타부타 잔소리가 없는 것에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천방지축 사고뭉치가 언제 이 사람들에게서 인심을 얻었기에 이렇게 안타까워하며 걱정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내가 모르는 여리고 가여운 면이라도 있는 것인가?
“무호 장군은 몸이 좀 나았습니까? 고 내관의 말을 들으니 그가 향원궁에 사흘이나 머물러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는 중신들이 몇몇 있는 것 같던데요.”
허연이 욱에게 차를 올리며 무호의 안부를 물었다.
“여전히 기력을 못 찾고 있다네. 윤 내관이 오후에 향원궁에 들렀는데, 눈자위가 푹 꺼지고 전반적으로 수척해졌다는구먼. 몸이 좀 나아진 것도 아니고 날이 갈수록 그런데, 어찌 그 사람을 들것에 실어 궐 밖으로 내보내겠는가?”
“저런…… 공비께서 상심이 더욱 크시겠습니다.”
오라비를 실수로 밀친 것도 아니고, 작정하고 기술을 걸어서 그 지경을 만들었으니 정말 면목 없고 미안하겠다 싶어서 허연이 혀를 끌끌 찼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향원궁에 건너가서 한바탕 울고 돌아갔다 하네. 그럴 것이면 진즉에 성질을 좀 죽이든가…… 사람을 그 지경을 만들어놓고서 울면 다인가?”
“폐하…….”
“공비를 보고 있으면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
욱이 고개와 두 손을 동시에 내저으며 불평을 했다. 그 과격한 반발에 허연이 흠…… 하고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꿀에 절인 밀과를 욱의 입에 물렸다. 그리고 어린아이 달래듯 욱을 설득했다.
“그분이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엇나가기만 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다정하게 대하시고 잘 다독이시면 까칠한 성정도 차차 부드러워지실 겁니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네. 아쉬운 쪽에서 굽혀야지, 내가 공비에게 무슨 죄라도 지었는가?”
“애초에 공비마마는 첩지도, 입궁도 바라지 않았는데 폐하의 어명으로 입궁을 하신 게 아닙니까? 폐하의 결정은 폐하께서 책임을 지셔야지요.”
허연의 책임론에 욱이 흥 하고 콧바람을 날렸다.
“공비가 그대로 대현성에 있었으면 그 글 잘하는 노비와 혼인이라도 했을 것 같은가? 어차피 한두 해 더 몰래 사귀다가 근방의 지체 비슷한 가문으로 시집을 갔을 터, 이 모든 일은 턱도 없는 상대에게 연심을 품은 공비의 자업자득일 뿐, 나는 공비와 그 노비가 이별한 일에 져야 할 책임이 전혀 없네.”
“폐하…….”
공비가 그 노비와 이별한 것을 책임지라는 것이 아니라 후비를 들였으니 지아비 노릇을 하라는 뜻이었는데 그 말을 못 알아듣고 펄쩍 뛰는 욱을 허연이 피곤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깨알만큼도! 모래알만큼도!”
“알았으니 그만하십시오.”
욱의 완강한 태도에 허연이 내가 졌다며 두 손을 바짝 들었다.
욱과 허연의 아옹다옹 말다툼도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틈만 나면 나를 후궁으로 떠밀어 보내려고 하니, 저 사람이 내 정인인지 큰형님인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욱이 달콤한 대추차를 한입에 털어 마셨다.
“그것은 그렇고, 그 승주라는 자 말입니다…….”
이제 슬슬 침상에 들어볼까 싶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던 욱이 김 나간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자가 왜?”
“도성으로 불러 한 번 만나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욱이 허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재에 둘러서 있던 지밀 내관들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허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자네 갑자기 왜 이러나? 그자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하더니…… 불러다 공비와 대면이라도 시키려고 하는가?”
“그게 아니라…….”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자네 의외로 집요한 구석이 있네그려. 집안의 하인을 심중에 둔 것은 공비가 철딱서니가 없었던 것이지, 그자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리고 내 생각엔 그 일은 십중팔구, 그자는 꿈에도 모르는 공비의 외사랑이었을 것이네. 출신이 미천하면 눈도 없고 취향도 없겠는가?”
욱이 저 혼자 망상에 불을 지피며 헛소리를 늘어놓자 허연이 결국 못 참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라질 않습니까?”
허연의 박력 넘치는 호통에 욱이 흠칫 놀라서 의자에 바싹 붙어 앉았다.
“왜 화는 내고 그러나?”
“그냥…… 폐하와 이런 대화를 길게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화가 납니다.”
허연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자와 삼자대면을 할 것이 아니라면 불러다 무엇을 하란 말인가?”
욱의 물음에 허연이 중문 밖에 서 있던 명이를 불렀다.
“침상 머리맡에 서책이 한 권 있을 것이다. 들어가서 가져오너라.”
허연의 명을 받은 명이가 뽀로로 침실 쪽으로 사라졌다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후다닥 돌아왔다.
“이것 말씀이십니까?”
“폐하께 올리거라.”
허연의 명에 명이가 책을 두 손으로 받쳐 욱에게 내밀었다. 시강원 교수들과 강론 준비를 하느라 며칠 벼락공부에 시달린 욱이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책을 받아 들었다.
“야심한 밤에 웬 서책을…….”
“그것은 <칠 부족 풍속기>란 책입니다. 월국 동북쪽 장성 밖에 터를 잡고 있는 일곱 개 부족의 생활상과 풍속을 기술한 책으로 최근에 본 이런 종류의 잡서 중엔 가장 잘 쓰인 것입니다.”
<칠 부족 풍속기>라니, 제목이 귀에 설면서도 또 어디선가 들어본 듯싶기도 해서 욱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잘 밤에 서책이라니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못마땅한 눈길로 허연을 노려보았다.
“꼬박 두 시진을 시강원 교수들에게 시달리다 돌아와 이제 좀 쉬려던 참인데, 지금 나더러 서책을 보란 말인가?”
“제목은 <칠 부족 풍속기>이지만 반절이 넘는 분량이 장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책에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풍습도 적혀 있지만 부족장과 다른 유력자들의 성품과 특징, 인맥 등도 상세히 씌어 있습니다. 책을 쓴 자는 장족의 생활을 잘 알고, 그 족장들과도 직접 접촉을 해보았던 자가 틀림없습니다.”
장족이란 말에 욱이 손에 든 책을 펼쳐 뒤적뒤적 몇 장을 넘겼다. 황제로서 친정을 시작한 지 이제 7년, 간신히 나라의 재정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다른 걱정 없이 살 만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이때에 변방의 부족들이 들썩거리며 국경을 위협하니, 까딱 잘못하면 지난 7년의 고생이 허사로 돌아갈 판이라 욱으로서도 장족의 움직임은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을 쓴 자가 그럼 요번에 족장이 되었다는 그 싸움닭을 만나본 적이 있다는 것인가? 허면…… 그런 생각을 하며 책장을 건성으로 넘기던 욱이 그제야 이 서책과 필체가 눈에 익은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아까 낮에…….”
“제가 정안군께 부탁해서 빌린 책인데, 그 서책의 저자가 승주입니다.”
“아…….”
이제 보니 아까 낮에 보았던 책이구나 생각하며 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것 말고도 재능이 많은 자입니다. 우선 불러서 장족의 내부 상황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사람됨이 믿을 만하다면 계속 지근에 두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구먼. 평민도 아닌 남의 집 노비에게 관직을 내리려면 나는 중신들의 반발과 항의에 끝도 없이 시달릴 것이고, 공비는 그자를 지척에 두고서 피가 마를 것이니…….”
“폐하…….”
욱이 서책을 윤 내관에게 넘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허연의 손목을 잡아끌고 침실로 향했다.
“그 일은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의논을 하세. 과거 부지런한 황제들은 밤잠을 줄여가며 나랏일을 돌보았다고 하지만, 나는 야근 체질이 아니라서 그렇게는 못하겠네.”
“아직 초저녁인데 뭐가 그리 급하셔서…….”
너무 대놓고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잡아끄는 욱의 태도에 허연이 낯을 붉히며 버텼다. 허연은 욱과 일과 이야기도 나누고, 읽던 책도 마저 보고 느긋하게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지 밥숟가락 놓자마자 침상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욱은 남은 얘기는 침상에서 하자고 허연을 꼬시고, 허연은 일단 침상에 등 붙이고 누우면 끝이지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아느냐고 버티며 실랑이하는 것을 뚱한 눈길로 바라보던 윤 내관이 일단 지밀 내관들을 전각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곤 저렇게 치대다가 욱이 허연에게 한 대 얻어맞는 일이 다반사라 그거나 보고 나가려고 문 앞에 붙어 섰다.
“무정하고 무심한 사람 같으니…… 바로 담장 너머에서 내가 일을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잠깐 들여다보지도 않는가? 그대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던가?”
“제가 어찌 일없이 편전 주변을 기웃거리겠습니까? 이렇게 매일 보면서 그런 짓까지 하면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무호가 인사 들었을 때엔 위병으로 변복까지 해놓고서…….”
“그거야…….”
억지를 부리며 욱이 허연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침상으로 질질 잡아끌었다. 허연이 별로 앙탈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끌려가는 것을 보니 오늘도 밤이 길고 뜨겁겠구나 생각하며 윤 내관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조용히 장지문을 밀어 열었다. 하지만 그냥 나가긴 아무래도 약이 올라서 다시 돌아섰다.
“하오시면, 귀인. 어찌할까요? 사람을 대현성에 보내서 승주라는 자를 데려오게 할까요?”
윤 내관의 물음에 침상으로 밀쳐졌던 허연이 얼른 일어나 앉았다.
“음…… 그것은…….”
“내일 얘기하자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붙들어서 옷고름만 풀면 정말 중요한 일과가 시작될 참인데 윤 내관이 어깃장을 놓자 욱이 짜증을 내며 벌컥 소리쳤다.
“아니, 소인은…… 장족과 관련이 된 사항이면 신속하게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답을 주시면 밤 안에라도 사람을 뽑아서 대현성으로 보내겠습니다.”
“나는 그자를 한 번 봐야 할 것 같은데, 폐하께서 탐탁지 않게 여기시니…….”
허연이 윤 내관의 말을 받아주며 다시 침상 아래로 내려섰다. 허연이 멀찍이 떨어지기 전에 욱이 그 소맷자락을 얼른 움켜잡았다.
“폐하, 아무래도 이 일은 생각을 좀…….”
“그대는 내 생각이나 하게!”
허연을 윽박지르고 나서 욱이 윤 내관을 노려보았다.
“귀인이 보고자 하니 대현성에 당장 사람을 보내라. 이제 되었는가?”
“아, 예…… 폐하. 하명하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얼쩡거리지 말고 후딱 나가보게.”
윤 내관에게 엄명을 내리고 나서 욱이 허연을 살살 구슬려 다시 침상에 앉혔다. 그러곤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허연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처음 하는 입맞춤처럼 조심스럽게 허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허연 역시 욱의 깊은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애틋한 입맞춤에 마음이 울렁거려서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때, 방에서 거의 나갔던 윤 내관이 갑자기 자기 이마를 탁 치며 돌아섰다.
“아, 허면 혹시…….”
“또 뭔가?”
욱이 윤 내관을 귀양이라도 보낼 듯 으르렁거렸다. 욱의 사나운 기세에 윤 내관이 짐짓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큰일은 아니옵고…….”
“뭐시라?”
“아까 오후에 향원궁에 들러 무호 장군을 문병했는데, 그때 장군이 제게 사람을 찾고 있다며 상서부 시랑 중 이시영이란 자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윤 내관이 갑자기 무호를 끌어대며 말을 잇자 욱이 순간적으로 짜증도 잊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영은 형님의 함자가 아니냐? 무호가 형님을 찾더란 말이냐? 변방의 무장이 무슨 연고로?”
“직접 아는 자는 아니라니 누군가의 부탁을 받은 듯싶었는데, 찾는 자의 이름은 시영이고 직함은 상서시랑이라고 했습니다.”
윤 내관의 대답에 욱과 허연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면 무호가 이름이든 직함이든…… 둘 중 하나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구먼.”
“또 설명을 붙이길, 글씨와 서화에 관심이 많고 귀한 붓과 종이를 뭉치로 보내주었으며 금박이 새겨진 좋은 먹도 보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저께 정안군께서 점심을 드시면서 대현성에 있는 승주란 자에게 그런 선물을 보내고 보답으로 서화를 여러 점 얻으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허면…….”
“소인이 무호 장군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에 놀라서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어찌 그 일을 연관 짓지 못하고 그냥 찾아보겠다고만 하고 나왔는지…….”
무호가 찾는 그자가 형님이 맞나 보다. 영주의 장자이며 후계자로서 실질적으로 성을 다스리고 있는 지체 높은 공자가 데리고 있는 하인의 편지 친구를 몸소 찾고 있었다니…… 그 집안 가풍이 알려진 것보다 많이 너그러운 모양이라 생각하며 욱이 허연을 돌아보았다.
“누이동생과 사귀는 것도 눈감아주고, 황성에 올리는 장계도 쓰게 하고, 이젠 직접 편지 친구까지 찾는 것을 보니…… 승주의 지체가 그 지경만 아니었으면 사위를 삼고도 남았겠구먼.”
“똑똑하고 반듯한 사람이니 그만큼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는 길에 같이 데려왔으면 좋았을 것을. 당장 사람을 보내 잡아 와도 얼굴 보자면 한 달은 걸릴 것이니…….”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곧 겨울이고, 장족은 그간 대현성에서 받아먹던 양곡도 끊긴 형편이니 시간 여유가 넉넉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연이 침상에 바로 앉아 옷고름을 고쳐 묶으며 나라 걱정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린 욱이 엄한 눈길로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내일 정안군 형님이 입궐하시면 무호가 찾더라고 말을 전하라. 혹시 무호가 그자의 서화라도 몇 점 들고 왔다면 형님이 무척이나 기뻐하시겠구나.”
“예, 폐하.”
“그리고 이만 나가보되, 변방에서 전란이 났다고 해도 오늘 밤엔 다시 들지 말라!”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윤 내관이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뒷걸음질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