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흉계
미향궁에 현비와 연비가 놀러 온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본래 현비는 향비와 성격이 맞지 않는데다 제3황자의 생모로서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궁을 오가는 일이 별반 없었고, 연비는 향비가 한창 기세등등할 때에는 친동기간처럼 지내자며 바싹 붙어서 아양을 떨다가 황후가 4황자를 낳고부터는 미향궁에 걸음을 싹 끊고 황후궁 눈치를 살피던 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모처럼 미향궁 나들이를 온 것은 향비의 초대가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우화원 귀인에게 내려진 근신 처분과 금족령에 대해 마음껏 떠들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폐하를 뫼시는 자가 도성 밖 유흥가를 떠돌다 자정이 넘어서야 환궁을 하다니…… 참 별꼴을 다 봅니다.”
연비가 대추 경단을 꾹 찍어서 입안에 밀어 넣으며 쫑알거렸다.
“그러게 말일세. 환궁이 늦은 것도 늦은 것이지만 밖에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옷도 이곳저곳 베이고, 몸에 상처도 입어서 폐하께서 많이 놀라셨다고 들었네. 그간은 우화원에 박혀 꼼짝도 않던 자가 황후께서 해산을 하신 연후엔 무슨 심란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찌 그러는지…….”
향비의 속 보이는 트집에 현비가 차를 들며 피식 웃었다. 현비는 황후의 4황자 출산으로 향비가 기가 죽어서 궁이 조용해진 이후론 어지간한 일은 좋게 생각하고 넘기던 터였고, 우화원 귀인을 딱히 적대시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오히려 허연이 없을 때엔 자신에게 온 황제를 향비가 아이가 아프다는 둥, 제 몸이 아프다는 둥 얕은 수로 꼬여 가는 일이 잦았고 그로 인해 살심이 솟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요즘은 다 함께 독수공방이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황후께서 황자를 보신 일이 심란한 모양이지요.”
연비가 픽 콧바람을 날리며 비아냥거렸다.
“황후께서 4황자를 보신 일이 심란하면 우리가 심란하지 그 사람이 왜?”
현비가 향비를 슬쩍 넘겨다보며 되물었다.
“그간은 폐하의 성총을 온통 독차지했었는데, 4황자가 태어나 황후께서 기세를 찾고 폐하의 관심도 태화궁으로 쏠리니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4황자가 태어난 후 황후가 기세를 빠른 속도로 회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황제의 관심이 태화궁으로 쏠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던 터라 현비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비의 미심쩍은 표정에 마음이 조급해진 연비가 뭔가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을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제 처소에 지밀 내관들과 절친한 궁녀가 몇 명 있는데, 듣기론 황제께서 진노가 대단하셔서 금족령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답니다.”
“진노는 무슨 진노? 금족령이라 해봐야 귀인을 우화원으로 들여보낸 후 걸음을 끊으신 것도 아니고, 휘명전 지척인 청량전에 두고 여전히 그곳에서만 수침을 드신다면서? 내가 보기엔 폐하는 진노를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밖으로 내돌렸다가 또 어디 까져서 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아끼시는 것이네.”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만 해도 폐하께서 귀인을 크게 나무라시고는 조반도 드시다 말고 휘명전으로 드셨답니다. 이전엔 그자가 아무리 방자하게 굴어도 모두 좋게 넘기셨지 이 같은 일은 없지 않았습니까?”
이전에 허연이 황제에게 방자했던 행실이 무엇이 있었나 잠시 생각하던 현비가 향비를 돌아보았다.
“향비께서는 뭔가 들으신 바가 있습니까? 폐하께서 화는 크게 내셔도 오래 끄는 성품이 아니신데, 이틀 전의 일로 아직까지 귀인과 실랑이를 하신단 말입니까?”
현비의 물음에 향비가 어깨를 으쓱이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지밀의 일이니 나도 상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밖에서 귀인과 시비가 붙었던 자들을 폐하께서 엄히 다스리고자 하시는데, 귀인이 절대 안 된다며 만류를 했다더군.”
자신과 나이도 같고 품계도 같으면서, 저는 딸 하나를 더 낳고 집안도 더 짱짱하다는 이유로 꼭 하대를 하는 향비의 언사에 현비가 빈정이 상해서 흠…… 콧김을 내뿜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과연 전직 대장군이라 마음도 넓고 품위도 있습니다. 자신과 시비가 붙었던 자들이라면 폐하께 읍소를 해서라도 엄히 처벌해달라 하는 것이 보통일 텐데, 그자는 도리어 처벌을 반대하다가 꾸중을 들었다니…….”
자신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허연을 현비가 대놓고 두둔하자 향비도 불쾌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자신이 현비와 연비를 청한 것은 말꼬리 잡고 싸움이나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것이 일견 인정 있는 처사로 보이기도 하겠으나 엄연히 정사와 폐하의 결정에 관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자는 조정에 직이 있는 신하도 아니고, 엄밀히는 이 나라 사람도 아닌데 그래서야 쓰나?”
“비록 직함은 없으나 한때 대군을 다스리던 대장군이었으니 식견은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자신과 관련된 일로 여러 사람이 불벼락을 맞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도 실덕이니…… 폐하께 관대한 처분을 부탁드린 것을 두고 방자하다고 할 수 있을지요?”
“허면…… 후궁과의 사통은 어찌 생각하는가?”
향비의 기습적인 질문에 연비가 먹던 떡이 목에 걸려서 콜록거렸다. 현비도 몸을 바싹 사리며 향비를 쳐다보았다.
“후궁과의 사통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화원 귀인이 그간 도성을 돌아다니며 외지에서 온 무뢰배들과 칼부림을 하며 소란을 피운 것이 전부가 아니라 투전장이며 기생집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다네.”
“그자도 사내이니 궐 밖에 나가 놀다 보면 그런 곳도 드나들었겠지요. 하지만 그 일이 후궁의 사통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것은 궐 밖으로 돌아다니며 노류장화의 손목 몇 번 잡고 희롱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죄이며 자칫 여러 사람 죽어나갈 일이 아닙니까?”
현재의 후궁은 우화원 귀인의 등장으로 정궁, 후궁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독수공방이라 시름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정궁의 위세와 후궁 간의 암투로 음해, 모략, 심하면 독살까지 자행되던 선대에 비하면 나름대로 평온한 편이었다. 몇 년간 큰 사고도 없었겠다, 슬하에 귀한 자식도 하나 얻었겠다…… 황제에게서 큰 사랑을 받거나 대단한 위세를 휘두르지는 못했으나 이렇게 조용조용 지내는 것도 복이라 생각하던 현비가 생각하기도 두렵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들은 말이 있고, 알아본 바가 있어 그러네.”
아무래도 뭔가 꺼림칙해서 다과고 뭐고 이만 처소로 돌아갈 생각으로 현비가 수행 상궁에게 눈짓을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데다 호기심 많고 소문 옮기기 좋아하는 연비는 눈을 반짝이며 향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들은 말이며, 알아본 바가 있으시다니…….”
“우화원 귀인과 공비가 청량전에서 단둘만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네.”
향비의 대답에 연비가 엥? 하는 표정으로 현비를 돌아보았다. 현비 역시 뜬금없는 공비 운운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귀인과 공비 사이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며칠 전, 폭우가 내리던 침침한 날에 공비가 수행 궁녀 하나 없이 몰래 청량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궁인이 있네. 또한 들어갔다가 한 시진도 더 지난 후에야 귀인의 가마를 타고 영운궁으로 돌아갔다더군.”
“후궁이 외간 사내와 같은 방에 오랜 시간 같이 있었다면 연유를 막론하고 책잡힐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찌 그것을 두고 사통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공비라니요? 궐 안엔 꽃 같은 궁녀도 셀 수 없이 많은데 귀인이 눈을 돌리면 그쪽으로 돌리지 공비를 어찌했겠습니까?”
“허면 그 긴 시간 동안 남녀가 한 방에서 달리 무엇을 했겠는가?”
“장군 대 장군으로 시급한 나랏일이라도 논했나 보지요.”
현비의 시큰둥한 대꾸에 향비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실쭉하게 흘겼다.
“내가 들은 것이 그뿐이 아닐세.”
“무슨 말을 들으셨든…….”
“바로 어제 우화원 귀인이 영운궁에 비단옷을 무려 여섯 벌이나 지어 보냈다네. 또한 그에 어울리는 패물 일습도 같이 보냈는데 모두가 특상품의 비취와 진주, 산호로 꾸민 것이었다네. 사내가 계집에게 그 같은 선물을 보내는 뜻이 무엇이겠는가?”
향비의 말에 연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비는 그간 공비에게 멱살도 여러 번 잡혀본 아픈 기억이 있는데다 예쁜 옷과 값진 패물은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아니, 그자가 공비에게 그런 선물을 보냈단 말입니까?”
“아니면, 내가 없는 말을 지어서 하겠는가?”
“궐 밖을 휘젓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공비에게 그런 수작을 걸다니…… 그자가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그자의 행실이 노여워 금족령까지 내리셨는데, 그 일까지 아시면 궁 안이 한바탕 어지럽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무료하기 짝이 없던 연비가 갑자기 대두된 추문에 신이 나서 추임새를 넣고 나섰다. 그 모습에 현비가 혀를 끌끌 차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왜? 벌써 가려는가?”
“환절기라 3황자의 고뿔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아서요. 상궁 내인이 많다고 해도 어찌 자식을 그들 손에만 맡겨두겠습니까?”
현비가 향비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공비의 일이 듣기에 거북한가?”
“거북한 정도가 아니라 그 일은 아예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후궁에 그런 불충이 있다면 마땅히 밝혀서 폐하께 고하는 것 또한 내명부의 책무가 아닌가? 지엄한 궁 안에서 후궁이 폐하를 배신하는 일이 벌어져도 그저 모른 척하는 것이 능사인가?”
내 편을 들어 협조하지 않으면 너도 그냥 두지 않겠다는 은근한 위협에 현비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폐하의 후비이자 신하인데 어찌 그런 불충을 저지르겠습니까? 하지만 궁중이란 작은 일도 자칫 큰일이 되고, 무고로 인해 죄 없는 자가 상하는 일 또한 비일비재한 곳입니다. 허니 확실한 증좌가 없다면 향비께서도 말을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서둘러 말을 맺고는 현비가 발길을 돌려 미향궁을 나섰다.
태화궁에 가서 후딱 점심을 들고 휘명전으로 돌아온 욱이 상서부에서 올린 증원군 파병 계획서를 펼쳤다. 변방의 정세가 심상치 않은데다 이제 곧 겨울이니 5만 명 규모의 병력을 움직이는 일은 오늘 내일 중으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사안이었다.
대현성은 험하고 추운 곳이니 5만이나 되는 군사들을 이동시키고 우선 겨울을 나도록 하는 것만 해도 족히 수백만 냥의 군비가 추가되는 일이었다. 지난 몇 년간의 풍작으로 모처럼 가득했던 황궁의 금고가 휑하니 비겠구나 생각하며 욱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중문 앞에서 어른거리는 조그만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밖에 누구냐?”
“소인 환이입니다, 폐하.”
“들어오너라.”
욱의 명에 환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깊이 굽혔다.
“청량전에서 보냈느냐?”
“예, 폐하.”
“귀인의 고뿔은 좀 어떠냐?”
아침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미열이 남아 있던 허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욱이 물었다.
“이제 열도 내리시고, 기침도 안 하십니다.”
“다행이구나. 점심도 잘 드시더냐?”
“속 쓰리고 배 아프다시며 전복죽과 잣죽만 조금씩 드셨습니다.”
“저런…….”
그놈의 배앓이는 고질병인가 보다 생각하며 욱이 조그맣게 혀를 찼다. 허연이 어지간해서는 몸 불편한 것을 내색하지 않지만 배 아프다고 짜증을 내며 돌아눕는 일은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보통은 복통이 있으셔도 아침에 잠깐 불편해하시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늦게까지 침상에서 내려오질 못하시다가 태감 나리 성화에 못 이겨 일어나셔서 간신히 죽 한 그릇을 드셨으니…… 앞으로는 마마를 조금 조심히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환이의 당돌하고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요구에 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귀인의 복통이 과인 때문이라는 것이냐?”
욱의 물음에 환이도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아니옵니까? 귀인께서 배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하시니 태감 나리께서 이게 다 폐하께서 조심성이 없어 그러신 거라고 원망을 하시던데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욱과 환이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연이 도성을 싸돌아다니며 말썽에 휘말린 일로 다투느라 다소 흥분한 탓에 어젯밤의 정사가 조금 거칠고 과격하긴 했지만, 그게 복통과 무슨 상관이 있나 잠시 생각하던 욱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환이에게 다시 물었다.
“허면 귀인이 복통 때문에 따질 것이 있어서 너를 보낸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니옵고…….”
그제야 심부름이 떠오른 환이가 소맷자락을 뒤집어 작은 쪽지 한 장을 꺼냈다.
“귀인께서 이것을 적어주시며…… 폐하께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쪽지라…… 허연이 자신에게 쪽지 따위를 써서 보낸 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 욱이 미소를 지으며 환이에게서 쪽지를 받아 들었다. 두 번 접어 밀랍으로 작게 봉한 쪽지를 펼쳐본 욱이 큭,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재미있는 농이라도 적혀 있사옵니까?”
호기심 많은 환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귀인이 쪽지를 네게 주며 다른 말은 없었느냐?”
“아침에 중단한 얘기는 그것으로 마무리를 짓자고 하셨습니다.”
“겨우 서방님 다섯 번으로 말이냐?”
“예?”
말뜻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환이를 세워두고 욱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종이를 쪽지 크기로 잘랐다. 그러곤 가는 붓을 들어 몇 자 적고는 밀랍으로 봉한 후 환이에게 건넸다.
“귀인께 올려라. 이것이 과인의 조건이며 이에 관한 어떤 조정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제안이 마지막이며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고 전해라.”
“뭔가 대단한 제안을 적으셨나 봅니다.”
황제와 귀인이 서로 쪽지를 주고받으며 노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환이가 큭큭거렸다.
“가는 길에 뜯어보면 안 된다. 알겠느냐?”
“소인이 비록 어리지만 그리 서툰 짓은 하지 않습니다, 폐하.”
환이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욱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상선이 잘 가르쳤구나. 가거라.”
휘명전을 나온 환이가 막 회의실로 들어가는 중신들과 마주쳐서 회랑 가장자리로 얼른 물러섰다. 그러고는 중신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다시 걸음을 옮겨 마당으로 내려섰다. 청량전은 휘명전 후원에 딸린 별채로 바닥에 깔린 박석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만 하나 지나면 바로 청량전의 궁문이 나타났다.
종종걸음으로 단숨에 청량전으로 돌아온 환이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에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맷자락에서 쪽지를 꺼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따로 봉투에 넣지 않고 접혀만 있는 쪽지는 그렇게만 해도 안에 적힌 내용을 대강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쪽지에 적힌 글자는 어렵지 않게 읽었으나 ‘원행 시 어차 합승’이란 대체 무엇인가 고민하며 환이가 쪽지를 다시 소매 속에 넣었다.
대현성에 원군을 파병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 5만 병력의 이동과 겨우살이에 드는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가을걷이가 이미 끝나서 올해 세금을 거두어들인 터에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세금을 거두는 것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개인 금고에서 우선 천만 냥을 내서 군비를 충당하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파병에 관한 논의는 걸리는 것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한 시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대장군은 왕쾌로 임명하고 출병은 내달 초 이레에 한다는 구체적인 일자까지 결정이 되었다.
역시 세상일은 돈이 문제로구나, 당장 설날에 제사상 차릴 돈도 안 남아서 탈이지, 군소리 없어서 좋다 생각하며 욱이 출병 명령서에 옥새를 눌러 찍었다.
“왕쾌를 증원군의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대현성 일대의 병권도 일임할 것이니 내일 입궁토록 하십시오. 무호 또한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왕쾌를 보좌하도록 할 터…… 같이 들도록 하십시오.”
욱이 명령서를 시영에게 전하며 말했다.
“예, 그렇지 않아도 퇴궐 후에 사신각에 들를 생각이었는데 그 길에 말을 전하면 되겠습니다.”
시영이 욱에게서 받은 명령서를 자신의 보좌관인 장광윤에게 전하며 대답했다.
“상서령께서 사신각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승상이 시영에게 물었다. 그가 알기론 현재 사신각엔 무호 일행 외엔 머무는 자가 없으니 시영이 일부러 그곳에 들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제 수룡천변 묵향서방에서 희종 때의 고서 몇 권을 보내 왔기에 사신각에 머물고 있는 친구에게 선물로 주려고요.”
“사신각에 친구가 머물고 있습니까?”
승상의 물음에 시영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장광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서령께 친구가 있습니까?”
승상의 질문과 얼핏 비슷하지만 실상은 아주 다른 질문에 시영이 장광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친구가 없는 사람도 있는가?”
“아니, 제 말뜻은…… 제가 모르는 친구도 있으신가 해서요.”
장광윤이 급히 둘러대며 일없이 명령서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시영과 장광윤은 상서령과 그 시랑으로 궁 안에서는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며 중요한 일이거나 사소한 일이거나 일일이 의견을 나누는 긴밀한 사이였다. 하지만 그 의견 교환 과정이 노상 날카로운 말다툼이라 두 사람이 서로를 실쭉한 눈길로 흘겨보며 입술을 실룩거릴 때엔 주변 사람들이 먼저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출병 건이 대강 마무리되었으니 폐하의 생신 연회와 화산 행차 이야기를 하시지요. 황후께서는 동행치 못하실 것이니…… 후궁의 마마님들께서도 다 가시기는 어렵겠습니다.”
승상이 얼른 화제를 이제 목전에 닥친 황제의 생일잔치 쪽으로 돌렸다.
“이번엔 우화원 귀인과 공비만 데려갈 생각이오.”
욱의 대답에 승상 이하 다른 중신들이 서로 미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황후가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동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굳이 화산 원행을 고집할 때엔 누구를 데리고 가려고 그러는지 빤한 일이었지만, 평소 관심도 없던 공비만 덜렁 붙여 가는 것은 너무 속 보이는 처사였던 것이다.
“대현성에서 처남이 왔으니 공비와 함께 데려가서 며칠 사냥이나 같이 한 후에 돌려보내면 공비의 서운함도 다소 누그러지지 않겠소?”
“하오나 폐하…… 우화원 귀인은 지금 근신 중이 아닙니까? 요즘 도성에 귀인에 관한 흉흉한 말들이 돌고 있는데 이런 때에 그를 원행에 데려가시는 것은…….”
허연을 화산 별궁에 동행시키는 것에 대한 갑작스러운 반대에 좌중의 시선이 말소리가 들려온 회의실 말석으로 향했다. 반론의 주인공은 중대부 이경이었다.
“귀인을…… 지나치게 편애하시는 처사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욱의 눈총에 이경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조정의 중신이란 때론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이라도 그것이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는 원칙을 떠올리며 어렵사리 마음을 가다듬었다.
“과인은 실제로 귀인을 편애하네.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욱의 대담한 반격에 중신들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폐, 폐하…….”
귀인을 화산에 데려가는 것은 사생활인데 그것을 두고 가하니 불가하니 참견하는 것은 욱으로서는 대단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조정의 고위 중신들을 상대로 너무 언사가 과격해질까 걱정스러워서 시영이 슬그머니 주의를 주었다.
“또한 과인이 귀인에게 금족령을 내린 것은 잠시 궁 밖 나들이를 나갔다가 검상에 고뿔에 몸살까지 얻어 왔기에 조용히 쉬며 몸조리나 하라는 뜻이었지, 그 사람에게 죄가 있어 벌을 내린 것이 아니었네.”
욱의 단호한 입장 정리에 중신들이 기가 눌려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궐 밖에서 돌고 있는 허연에 관한 얘기를 황제만 모르고 있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번엔 승상 조양이 입을 열었다.
“우화원의 일을 입에 담은 것은 중대부가 경솔했습니다. 하지만 폐하, 도성 안팎에 그에 관한 좋지 않은 말이 떠도는 것은 사실입니다.”
“귀인이 살면서 잘못한 일이라곤 과인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다 두고 내게 돌아온 것뿐입니다. 내도록 작은 섬에 틀어박혀서 숨도 크게 못 쉬고 숨은 듯 지내는 사람에게 무슨 트집거리가 있어 뒷말이 떠돈단 말입니까?”
욱이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러곤 후딱 회의를 마치고 사신각에 가서 승주를 볼 생각에 들떠 있던 시영을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형님?”
“저는…….”
시영도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 대흥루 앞에서 벌어졌던 소란 중에 귀인이 끼어 있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사실입니다.”
“백성들이 귀인을 어찌 알아보고 그런 소리를 지껄인단 말입니까?”
“대흥루 주변에 귀인을 아는 자는 적어도 고 내관을 아는 자는 적지 않으니 둘이 같이 다니는 것을 보고 추측을 했을 수도 있고, 어명으로 소란 피운 자를 다 잡아들여 금부의 옥에 하옥시키시고 사흘이 되도록 어찌하겠다 처분이 없으시니…… 이맘때면 노상 벌어지는 소동에 처벌이 전과 같지 않은 것은 귀인이 연관되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말이 더욱 성해지고 있습니다. 귀인에 관한 소문 중 제가 아는 것은 그 정도입니다.”
시영의 대답에 욱이 이경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 외에 또 어떤 헛소문이 있는가? 자네가 들었다는 흉흉한 소문이란 대체 무엇인가?”
욱의 서슬 퍼런 추궁에 평소 배짱 좋고 입바른 소리 잘한다는 평가를 듣고 있던 이경이 긴장해서 어깨를 달달 떨었다.
“과인이 묻질 않느냐? 어찌 대답이 없는가?”
욱이 탁자를 두드리며 벌컥 화를 내자 이경이 딸꾹질을 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민망하오나…… 폐하께서 귀인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귀인이 그 총애를 믿고 폐하께 불경한 행동을 일삼고, 내명부의 마마님들을 투기하여 폐하께서 아기씨들을 보러 후궁에 가시는 것도 불평하며 출입을 막는 등 행패가 자심하다고…….”
이경의 말에 욱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불경이며 투기며…… 모두 허연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모함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욕심이 많고 사치스러워서 같은 옷을 두 번 입는 일이 없고, 황궁에 진상되는 비단과 패물이 모두 우화원으로 가는데 그것으로도 만족치 못해서 황후께 올린 진주까지 가로채서 자신의 의복을 꾸미는 데 쓸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또…….”
“더는 없느냐?”
“황후께 문후 올린다는 핑계를 대고 무시로 칠궁을 드나들며 궁녀와 나이 어린 마마님들을 희롱하여 궐 안의 풍기를 어지럽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이경을 노려보는 욱의 눈빛이 노여움을 지나쳐 점점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황제가 영민하니 내명부에 문제가 있으면 얼마든지 알아서 단속을 하련만 어쩌다 함부로 입을 놀려 화를 자초했단 말인가? 내가 뭣에 씌었나 보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두려움에 이경의 관복이 식은땀으로 젖어들었다.
“황후께서 황자를 생산하신 이후 귀인이 바로 궐 밖으로 쫓겨났었던 것이 모두 그간의 전횡으로 황후께 노여움을 산 탓이었는데, 환궁 이후에도 방자한 행실은 여전하고 이젠 무시로 출궁하여 번화가에서 패싸움까지 벌이고 다닌다고…….”
“저런 고연!”
욱이 더는 화를 참지 못하고 옥좌를 박차고 일어섰다.
“귀인은 과인이 지난날 태황태후 일가에게 에워싸여 죽을 날만 기다리던 불우한 때에 유일한 의지처가 되어주었던 은인이다. 귀인에게서 무예를 배워 조가들의 변란이 일어났던 밤에 황제의 숲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고 그가 권한 학문으로 오늘까지 나라를 다스리고 있거늘…… 어찌 있지도 않은 참혹한 말을 지어내 귀인을 욕보인단 말이냐? 불경이며 투기며 사치며 모두 가당치 않지만, 궁녀와 후궁을 희롱하다니? 대체 귀인을 어찌 보고 그런 망언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이경을 한 대 후려칠 듯 흥분한 욱을 시영이 급히 잡아 말렸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시정의 잡인들이야 저희들끼리 모여서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중대부는 들은 소문을 고해 올린 것뿐이니 이리 쳐 죽일 듯 달려들지 마십시오.”
“놓으십시오! 궐 밖 출입도 과인이 허락한 것이고, 진주도 과인이 내린 것이며, 대흥루 앞에선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지 못한 것뿐인데 어찌 그 사람이 이런 더러운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입니까? 나를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귀인을 모함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지어 퍼뜨리는 것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무고와 모욕의 죄를 엄히 물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리 하셔야지요. 하지만 우선은 찬물 한 잔 드시고 성심을 가라앉히십시오.”
욱을 붙들어 다시 자리에 앉힌 시영이 장광윤에게 눈짓을 해서 우선 중대부를 욱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했다. 그러곤 정 내관이 급히 대령한 찬물 한 사발을 욱의 손에 쥐여주었다.
마치 급한 불 끄는 사람처럼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욱이 그릇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회의 중에 중대부를 때리거나 하옥시키는 것은 중신들을 크게 겁주는 일입니다. 벌을 내리시려 해도 절차에 따라 차분히 하셔야지, 성질대로 엎어버리시면 이번엔 폐하께서 더 큰 구설에 오르실 겁니다.”
시영의 만류에 욱이 더 듣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자리를 떨치고 회의실을 나섰다.
“어딜 가십니까?”
“청량전에 갑니다. 가서 귀인을 봐야겠습니다.”
검을 쥔 채 마당을 서성이던 허연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검을 집에서 빼 들었다. 어느새 서쪽으로 많이 넘어간 늦가을 햇살을 받은 검 날이 그 빛을 받아서 한층 더 차가운 광채를 뿜어냈다.
이 아름다운 검은 본래 황실의 보고 깊은 곳에서 백 년도 넘게 잠들어 있던 월국의 보물이었다. 손잡이에 박힌 붉은 보석이 마치 용의 피 같다고 해서 황실 보고의 물목에는 용혈신검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고, 한 번 빼 들면 사람의 피로 안개가 피어오를 정도의 살기가 깃들었다고 해서 홍무, 혹은 무정검이라는 별호까지 붙은 유서 깊은 명검의 예리한 날을 허연이 새삼 감탄의 눈길로 들여다보았다.
용혈신검이 허연의 수중에 들어온 것은 지난 4월의 일이었다. 대국의 주인답게 손이 큰데다 허연에게라면 뭐든 퍼주지 못해 안달을 하던 욱이 4년 만에 환궁한 그의 생일을 맞아 황실 보고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을 꺼내서 안겨주었던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닌데다 고 내관이 읊어주는 검의 내력을 듣고는 놀라서 그것을 물리며 사내들 간에 주고받는 생일 선물이란 술 한 잔이면 족한 것인데 왜 자꾸 창고는 뒤지느냐고 면박을 주었지만, 욱도 한 번 꺼낸 말이나 물건을 고분고분 거둬들이는 성품이 아니었다.
어차피 백 년째 창고에서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던 물건이 아니냐, 그대가 이제 다시 전장에 나가 이 검을 휘두를 것도 아니고, 급전이 필요하다고 내다 팔 것도 아니고…… 그저 선반 위에 두고 감상이나 할 것이니 어디 놓인들 무슨 상관이냐. 사람 무안하게 하지 말고 그냥 받아두라고 제법 의젓하게 권하는 것을 더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받은 검은 그날부터 허연이 지닌 물건 중 가장 귀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욱의 말대로 황궁 안에서 검의 쓰임새란 그저 장식품일 뿐이었다. 때문에 용혈신검은 쌓인 먼지를 털기 위해 내릴 때 이외엔 우화원 침궁의 선반 위를 벗어날 일이 없었고, 허연이 궐 밖에 나갈 때에 지니고 다니기는 했지만 그 검 날이 빛을 본 일도, 사람의 피를 맛볼 일도 일절 없었다. 실제로 허연이 사람을 상대로 용혈신검을 뽑아 든 것은 며칠 전 수룡천변에서 시비가 붙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창백한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하게 빛나던 검 날, 공기를 가를 때의 미묘한 떨림, 음산한 검 울음…… 소싯적부터 병영에서 지내며 좋은 검도 많이 잡아본 허연이었지만 이토록 날렵하면서도 예민하고, 동시에 사나운 검은 처음이었다. 달밤이라 그랬던가? 무술 대회 때문에 덩달아 흥분해서 느낀 살기를 이 검 때문이라고 착각했던 것인가? 드물게 아름다운 검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날 밤에 느꼈던 섬뜩함은 흔적도 없는 것이 아쉬운 한편 마음이 놓인 허연이 검으로 허공을 크게 갈랐다.
“뭘 하고 있는가?”
마당 건너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허연이 돌아섰다.
“아침까지만 해도 열이 있지 않았나? 복통도 있다면서?”
“폐하…….”
“몸이 안 좋으면 쉬면서 몸을 보살펴야지, 어찌 나와서 허공에 칼질인가?”
“크게 아픈 것도 아닌데 어찌 종일 누워 있겠습니까? 나와서 움직이는 편이 기력을 찾는 데는 더 좋습니다.”
허연이 검을 집에 꽂아 넣고는 태경이에게 건넸다. 그러곤 어딘지 침울해 보이는 욱의 안색을 살피며 곁으로 다가갔다.
“오후엔 중신 회의가 있지 않았습니까? 대현성에 보낼 원군 파병안을 마무리하신다더니요?”
“마무리하고 왔네.”
퉁명스레 대답하면서 욱이 허연을 끌어안았다.
“폐하…….”
마당 한복판에서 끌어안긴 허연이 욱의 등을 토닥거렸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마음이 상해서 꼬리가 축 늘어졌는데 아무 일도 아니기는…… 허연이 욱의 어깨 너머로 윤 내관을 쳐다보았다. 허연과 시선이 마주친 윤 내관이 얼른 눈을 내리깔면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미리 연통도 없이 들이닥친 황제의 행차로 고 내관이 신나게 꿰매고 있던 허연의 예복을 버들고리에 던져 넣고 바쁘게 다과상을 차렸다. 하지만 생과청에서 올린 달콤한 과자와 떡이 탁자 위에 놓이고 허연이 직접 화로에 올린 찻물이 끓을 때까지도 욱은 침상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고개도 한 번 들지 않았다.
“폐하께서 대체 무슨 일로 저토록 심기가 상하셨습니까? 회의 중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다과상을 다 보고 문 옆으로 물러서 있던 고 내관이 곁에 선 윤 내관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욱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예복을 벗어 던지고 속저고리 차림으로 침상에 기어 들어가서 꼼짝을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얘긴 좀 있다가 하세. 나도 나대로 알아볼 일이 있으니…….”
“예?”
눈치 없이 자꾸만 연유를 캐는 고 내관에게 윤 내관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폐하, 좋아하시는 약과와 경단입니다. 일어나 맛이라도 보십시오.”
딱 알맞게 우려진 차를 잔에 따른 후 허연이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욱이 뒤집어쓴 이불을 조심스럽게 눈 밑까지 내렸다.
“차가 식습니다.”
“…….”
“환이 편에 보내신 제안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욱을 달래며 허연이 이번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내렸다.
“공연한 술수 부리지 말고 확답을 하게.”
“원행길에 제가 폐하의 어차에 오르는 것은……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음탕한 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건 아십니까?”
“백성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은 그보다 더 음탕할 것이네. 그건 내가 보장하지.”
욱의 대꾸에 허연이 끌어내렸던 이불을 다시 그 얼굴에 푹 덮었다.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보겠다면서?”
욱이 이불 밑에서 웅얼거렸다.
“수룡천변에서 잡아들인 사냥꾼들과 다른 백성들을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죽은 자도, 크게 다친 자도 없는데 혐의도 분명치 않은 백성 수십 명을 잡아들여 옥살이를 시키는 것은 공연한 화풀이입니다.”
“사람 다니는 큰길에서 시비를 걸고 패싸움 벌인 자들을 잡아 가둔 것이 공연한 화풀이인가?”
“제가 연루되어 과한 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황제의 정인에게 칼질을 했는데 며칠 옥살이가 과한가? 내 성질 같아서는…….”
“그 정도 소란엔 사흘 정도의 구금이 적당한 벌입니다. 허니 내일 아침엔 모두 풀어주십시오.”
“우리 협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네.”
욱의 집요한 채근에 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환궁하는 길에 같은 차로 움직이시지요. 대신 점잖게 경치 구경이나 하시는 겁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이 이불을 냉큼 걷었다.
“갈 때 같이 가세. 그리고 점잖게 경치 구경이나 하자니…… 내가 언제 점잖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양심도 없는 뺀질한 대답에 허연이 욱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곤 욱의 멱살을 잡아서 일으켜 앉혔다.
“내려오십시오. 차나 같이 드시지요.”
허연의 손에 붙들려서 침상에서 내려온 욱이 푸시시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약과를 한 참에 세 개나 찍어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찌 밖에 나와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가? 도성 밤나들이도 해보니 재미가 나서 자주 나가려고 그러는가?”
“도성 밤나들이도 즐거웠으나…… 그보다는 그간 너무 게으름을 피운 것 같아서요. 종일 책이나 보며 빈둥거리는 것도 지겨우니 이제부터라도 다시 수련을 시작할까 합니다.”
“그러다 몸이 더 축나면 어쩌려고?”
“먹는 양을 조금 늘려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공비마마와 어깨너비가 비슷하다는데 여기서 더 빈약해지는 것은 저도 원치 않습니다.”
허연의 말에 욱이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비와 어깨너비가 비슷하다니,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고 내관이…….”
허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 내관을 힐끔 돌아보았다.
“공비께서 이번 원행에 입으실 나들이옷과 사냥복을 몇 벌 지었는데, 그분 옷 치수가 저하고 똑같답니다.”
“공비에게 옷을 지어 보냈는가?”
욱의 물음에 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보내도 과인이 보내야지, 그대가 왜?”
욱이 뚱한 표정으로 따지고 들자 허연이 당황해서 눈을 끔뻑였다.
“폐하?”
“아닐세.”
욱이 더욱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번엔 경단을 접시째 들고 입안에 밀어 넣었다.
욱이 탁자 위에 쌓인 과자를 다 집어 먹고 차를 석 잔째 비우는 것을 지켜보던 허연이 손을 들어 그 입가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아주었다.
“폐하.”
“응?”
“무슨 일인지 말씀 안 하실 겁니까?”
“아무 일 없네. 회의가 순조롭게 끝나서 일찍 돌아온 것뿐일세.”
“그러십니까?”
허연이 손을 들어서 십 리는 앞으로 빠진 욱의 입술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핏줄이 도드라진 그 마른 손을 욱이 움켜잡았다. 그러곤 손등과 손바닥에 거칠게 입을 맞췄다.
“과자하고 떡을 세 접시나 드시고도 속이 안 차십니까? 제 손도 드시겠습니다.”
“나는 평생 굶주려본 적이 없네.”
투덜거리듯 말하며 욱이 허연의 손등을 꾹 깨물었다.
“황손이시니…… 그러셨겠지요.”
“하지만 늘 배 속 한구석이 빈 것 같았지. 궁에 들어오고 나선 더욱 그랬었네.”
“왜 그렇지 않으셨겠습니까? 그토록 외롭고 또한 위태로우셨으니…….”
“그런데 그대를 알고 난 후엔 그 허기를 거짓말처럼 잊었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수년간 나를 괴롭혔던 고통이 공허함이란 것을 알았지.”
“…….”
처음 욱을 만났던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허연에게도 편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고통을 되새기는 일도 힘들었고 욱의 처지와 심경을 헤아리자면 마음에 안타까움만 가득했다. 비록 신분은 패전국의 장수와 승전국의 황제였지만 실상은 둘 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밀려서 있던 그때의 일을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큰해진 허연이 깊은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그대에게도 물론 고통이 있겠지. 내게로 오는 걸음이 마냥 가볍지도 않았을 것이고, 후궁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과히 즐겁지는 않을 것이네. 겨울은 밤이 길어 괴로울 것이고, 여름엔 작은 정원을 걷고 또 걸어도 긴 하루해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허연이 손을 들어 욱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 말은…… 어쨌든…….”
욱이 좀 전에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되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내 곁에 있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은 잘 아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얼마나 고맙게 여기고 있는지……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압니다.”
“귀인.”
“굳이 말씀을 않으셔도 무슨 말을 하시는지 다 압니다.”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허연이 욱의 얼굴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그러곤 어느 틈에 열아홉 살, 혹은 더 어린아이로 돌아가 자신을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는 욱을 끌어당겨서 품에 안았다.
욱이 허연을 마주 안고 옷섶에 얼굴을 파묻는 것까지 지켜보던 윤 내관과 고 내관이 조용히 침전에서 물러나왔다. 욱이야 조정 중신들이 다 모인 어전에서라도 얼마든지 허연에게 치댈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가졌으나 허연은 부끄러운 일은 마땅히 부끄러워할 줄 아는 성품이라서 적당한 시기에 침전을 비우는 것 또한 지밀 내관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제도 밤이 길어서 고생하셨는데 이러다 몸이라도 축나지 않으실까 걱정입니다.”
고 내관이 히죽 웃으며 마음에도 없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바느질감을 침전에 두고 나온 것이 생각나서 혼자 혀를 끌끌 찼다.
“왜 그러는가?”
“일감을 침전에 두고 나왔지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하면 오늘 안에 끝낼 일이었는데 폐하께서 초저녁에 납신 덕에 일이 지체되겠습니다.”
“일이라면…… 요 며칠 계속 주무르던 귀인의 예복 말인가?”
“예, 어깨에 진주 몇 개만 더 꿰매면 완성인데…… 귀인께서 쓰실 머리 장식도 홍옥과 흑진주로 꾸몄으니 그것을 머리에 꽂으시면 비록 장식이 크고 요란하지는 않아도 마마의 귀한 지체를 드러내는 데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놈의 진주 때문에 허연이 황후조차 업신여길 정도로 궐 안에서 행패가 자심하다는 유언비어가 돌고 돌아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왔는데, 너는 참 태평도 하다 생각하며 윤 내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폐하와 귀인의 저녁 수라는 자네가 잘 챙겨 올리게.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네.”
고 내관에게 잠시 상선의 책무를 넘긴 윤 내관이 방을 나섰다.
“아니, 어딜 가십니까?”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올 것이니 찾지 말게. 폐하께서 나를 찾으셔도 그리 여쭙게.”
대강 이른 후 영문을 몰라서 갸웃거리는 고 내관을 방에 두고 윤 내관이 청량전을 나왔다. 그러곤 마당에 대기하고 있던 이 내관을 곁으로 불렀다. 이 내관은 그간 옆구리에 붙은 혹처럼 달고 있던 조 내관을 궁내청으로 보낸 후, 윤 내관이 집중적으로 키우고 있는 측근이었다.
“예, 상선 영감.”
조 내관과는 달리 발 빠르고 밤눈 밝은 이 내관이 얼른 다가와 윤 내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 길로 육궁에 가서 감찰부의 서 상궁과 안 상궁을 찾아오너라. 그리고 태화궁 왕 상궁도 불러오고…… 부용정 별채에서 기다릴 것이니 데리고 그리로 오너라.”
“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조용조용, 티 나지 않게…… 알겠느냐?”
“예, 상선 영감.”
청량전 궁문 앞에서 이 내관을 등 두드려 보낸 후 윤 내관도 부용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 세월 주인 없이 버려져 있던 육궁이 영악하고 드센 여주인들을 맞은 이후 지난 3~4년간 황궁엔 크고 작은 사건과 분란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깔만 기승스러울 뿐, 아직은 어리고 술수에도 서툰 소녀들이 일으키는 말썽은 말 그대로 자잘한 소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그 소녀들도 나이를 먹어 여인이 되었으니, 그에 따라 배포가 커지고 술수도 늘어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후인지, 향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엔 일을 지나치게 키웠구나, 우화원 귀인을 건드렸으니 황제가 이 일을 지난날의 허튼 소동처럼 대강 덮고 넘어갈 일은 절대로 없을 터…… 대체 이 일이 어디까지 밝혀지고 어찌 수습이 될꼬? 황후도, 향비도 슬하에 황자를 둔 암호랑이들이니 그녀들의 막강한 배후와 황손들의 입지를 생각하면 황제에게도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가 냉정함을 잃고 서툴게 덤볐다간 고약한 소문에 휘말린 허연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궁중의 암투란 것이 젊은 여인들의 시기와 모략이라 해서 자칫 가볍고 우습게도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명운과 천하 대권을 두고 벌이는 한판 전쟁이니 그에 비하면 국경 수십 리를 두고 다투는 변방 오랑캐들의 도발은 오히려 하찮고 우스운 일이었다. 이미 분란은 피할 수 없는 일, 이번엔 그 상대가 처자식이니 자칫 황제 자신이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윤 내관이 걸음을 멈추고 등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점심도 거른 채 서화에 몰두하던 승주가 수월당에서 나온 것은 저물어가는 저녁 햇살에 서쪽 하늘이 불이라도 난 듯 붉게 타오를 무렵이었다. 해는 매일같이 뜨고 지지만 보기 드물게 장렬한 석양을 잠시 홀린 듯 올려다보던 승주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쇳소리에 이끌려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검과 검이 섞이고 부딪치는 날카로운 굉음이 들려오는 곳은 사신각의 후원이었다. 앞뜰보다 넓은 사신각의 후원은 보통 때에는 체류하고 있는 귀빈들의 환영 연회나 고관들의 야유회 장소로 자주 쓰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무호 일행이 사신각을 통으로 차지하고부터는 별다른 쓰임새 없이 버려져 있었는데 부장들이 앞을 다퉈 대흥루 주최 무술 대회에 참가한 이후엔 그들의 훈련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신각 후원에서 검을 겨루는 이는 검술 부문에서 예선을 통과하고 8강에 들어서 내일모레 있을 검술 대회 결선에 참가하게 된 영재와 그 훈련 상대로 나선 무호였다. 승주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지나 후원 어귀에 들어섰을 때엔 무호와 영재는 이미 한창 대련 중이라 둘 다 서로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무호의 빈틈을 탐색하던 영재가 그 어깨를 노리고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무호는 공격 방향을 예상하고 날렵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허공에 칼질을 한 영재가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에 그 옆구리를 검 날로 후려갈겼다. 비록 목검이지만 각을 예리하게 깎은 날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영재가 캑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대련을 해달라고 했지, 죽여달라고 했습니까? 제가 뭐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을 하십시오!”
옆구리를 움켜쥐고 죽는소리를 하며 구르던 영재가 간신히 일어나 앉으며 무호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시끄럽다. 내 그토록 일렀거늘 어찌 상대의 다음 수를 가늠치 않고 번번이 검을 도끼처럼 휘두르며 덤비느냐? 네놈도 실력이 특출한 것이 아니라 대진 운이 좋아서 8강에 든 것이니 주제를 알고 매순간 신중하게 상대방의 움직임을 살펴야 할 것이다.”
“대진운이 좋아서 8강에 들었다니요? 저는 왕쾌 장군의 부장들 중에서도 무식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범수란 자를 이기고 8강에 든 것입니다!”
무호의 훈계에 영재가 발끈해서 대들었다. 하지만 무호는 영재의 항변 따위 귓등으로 들어 넘기며 비웃음을 날렸다.
“왕 장군 휘하의 부장 하나 이긴 것을 가지고 자랑은…… 내가 가만 보니 진짜 고수들은 그런 대회엔 나가지도 않고 저자거리 구경이나 다니더구나.”
“또 그 폐하의 위병 말씀이십니까?”
“물론 그자의 검술도 인상적이었지만 황성에 고수가 어찌 그자뿐이겠느냐? 내가 듣기론 황성 백성들이 천하 제일검으로 치는 자는 휘명전의 호위대장인 정 내관이고, 위사령 진관우도 대등한 실력을 가진 절정 고수라고 들었다. 이름도 없는 위병의 검술이 그 정도라면 무관으로서 최고의 직을 가진 그자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이겠느냐?”
“그야 뭐…….”
며칠 전 밤, 십여 명의 사냥꾼들 틈을 날듯이 헤집고 다니며 혼을 쏙 빼놓던 검객의 모습을 영재가 눈앞에 다시 그렸다. 영재 자신도 평생 검을 쥐고 산 무인으로서, 잠시 잠깐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만한 안목은 있었는데, 정 내관이나 진관우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보다 더 절묘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자도 폐하의 위병이 아닙니까? 소문이 안 나서 그렇지, 그 정도면 실력은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영재가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주무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다 연못을 돌아서 다가오는 승주를 발견하고는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머리를 대고 벌렁 누웠다.
“나왔느냐?”
무호가 승주를 향해 돌아서며 혀를 끌끌 찼다. 승주는 며칠째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혀서 서화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두 손은 먹물이 들어서 까마귀 발처럼 새까맸고 걸치고 있는 옷 역시 본래 색깔이 회색인지 검정인지 구분도 안 갈 정도였다. 게다가 여기저기 먹물이 튄 얼굴은 퀭하니 말라서 다시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무술 대회 준비를 하고 계셨나 봅니다?”
무호의 곱지 않은 시선을 슬쩍 피하며 승주가 영재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영재가 걸친 가죽 보호대를 풀고 옷자락을 들쳤다. 영재의 옆구리와 등엔 지난 며칠간 무호에게서 호되게 훈련을 받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슨 훈련을 이렇게 인정사정없이 하십니까? 이러다 대회엔 참가도 못하고 의원에 실려 가겠습니다.”
그놈의 무술 대회 우승이 뭐고 대현성 출신 사내의 체면이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초주검을 만드나 싶어서 승주도 무호를 못마땅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승주를 마주 보는 무호의 눈길은 당당하고 덤덤했다.
“무술 대회는 진검으로 승부를 가른다. 어떤 귀신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허술하게 나갔다가 칼에 맞는 것보단 좀 고되더라도 제대로 준비를 하고 나서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수룡천변에서 마주쳤던 그런 귀신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승주가 딱 잘라 말하고 영재를 부축해 일으켰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장담을 하느냐?”
무호가 엄살을 피우며 승주에게 들러붙는 영재를 떼어내며 물었다.
“그자는 평범한 검객도 아니고 폐하의 위병도 아닙니다. 제아무리 도성이 넓고 사람이 많아도 그 같은 고수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마치 그자가 누군지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장군께서도 짐작은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승주의 반문에 무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가 정말…….”
“장군의 환영 연회 때에 그자가 바로 폐하의 등 뒤에 서 있었다면서요? 폐하와 귓속말을 주고받고, 술도 한 잔 얻어 마셨다면 상당히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까?”
“휘하 병사와 가깝게 지내는 주군은 많다.”
무호의 떨떠름한 대꾸에 승주가 피식 웃었다.
“그런 자라면 누구든 가깝게 지내고 싶겠지요. 외모도 아름답고 태도도 정중하고…… 얼핏 봤을 뿐이지만 무척 사람을 끌던데요.”
“남첩 노릇을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곱상하게 생긴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성이 허가라 했고, 위사령 진관우를 매부라고 이르지 않았습니까? 위사령에게는 두 명의 정부인이 있는데 둘 다 연주국의 공주입니다. 그러니 위사령을 매부라고 부르는 자는 누구겠습니까?”
“…….”
“이국적인 외모에, 절품의 칼솜씨에, 밖을 나다닐 때에 지밀 내관을 대동하고, 그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해서 위사령이 군사를 이끌고 찾아다니고…… 정황상 아니라는 게 더 말이 되질 않습니다.”
말투에 얼핏 연주국 억양이 있고 위사령이 형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챙기기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의심은 무호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수룡천변에서 만난 검객의 인상은 그가 짐작해온 허연의 모습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부유하고 여유로우며 풍류 또한 넘치는 도성과는 달리 대현성 일대의 척박한 국경 지방은 기풍이 엄하고 건조했다. 남녀 간의 정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릴 정도이니 남색이라면 눈살부터 찌푸렸고, 거기에 남첩이라면 천박하고 탐욕스럽고 사내이기를 포기한 비굴한 자들이라 하여 창기보다 못한 천민으로 여겼다.
더구나 도성에 온 이후 무호의 귀에 들어온 허연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부정적인 것뿐이었다. 황제가 남첩을 아예 후궁에 들여앉힌 것부터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판인데 그가 비빈들을 핍박하고 황궁에서도 마차를 타고 활보할 정도라니, 후궁에 하나뿐인 누이동생을 들여보낸 무호의 입장에선 그 모든 소문이 언짢고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황궁 보고의 귀한 물건은 모두 실어내 자신의 전각을 치장하는 데 쓰고 천금을 들여 지은 비단옷도 한 번 입으면 그뿐, 두 번 다시 걸치지 않을 정도로 사치스럽다는 자가 무명 도포 차림으로 저자를 돌아다녔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 젊은 황제가 혹시 다른 후궁의 전각으로 발길을 돌릴까 두려워서 여인보다 몸치장이 더 유별나다는 자가 맨손으로 날아드는 검을 잡아내고 십여 명의 무뢰배들을 칼등으로만 두들겨서 물리칠 정도로 검술이 일품이란 사실이 도무지 연결이 되질 않아서 무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끙끙거렸다.
옆구리를 움켜잡은 채 오가는 대화를 듣던 영재가 두 사람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지금 누구 얘기를 하는 겁니까?”
영재의 눈치 없는 물음에 승주가 대답 대신 그를 다시 부축했다.
“가서 씻고 누우십시오, 형님. 내관에게서 더운물과 쑥을 받아서 찜질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내 몸 생각해주는 것은 너밖에 없구나. 친구란 것들은 모두 처먹고 놀기에 바빠서 내가 형님에게 타작을 당해 바닥을 기어 다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영재가 툴툴거리며 승주에게 어리광 피우듯 매달렸다. 그 바람에 승주가 두어 걸음 옆으로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 꼴을 본 무호가 영재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 바람에 목이 졸린 영재가 컥컥거리며 거친 기침을 내뱉었다.
“거 참…… 왜 이러십니까, 형님?”
갑작스러운 폭행에 영재가 진짜로 성질을 내며 무호에게 따졌다.
“네놈 반절밖에 안 되는 녀석에게 왜 그렇게 매달려 가느냐? 승주를 힘들게 하지 마라.”
무호가 타박을 하며 영재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승주를 곁으로 끌어당겼다.
“너는 온종일 방구석에 박혀서 무슨 서화를 몸이 다 상하도록 그리고 있느냐? 옷이며 손이며, 꼴이 마치 어디서 탄이라도 나르다 온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이제 그만하고 쉬면서 몸이나 간수해라. 곧 먼 길 떠날 것인데 이 꼴로 어찌 버티겠느냐?”
수월당이 자신의 거처와 뚝 떨어져 있으니 하루 종일 저 하고 싶은 짓만 하며 말라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무호가 승주를 연원정 쪽으로 떠밀었다.
“가서 저녁이나 먹자.”
도성 관광을 나갔던 춘수와 다른 부장들이 돌아온 것은 승주가 영재의 허리와 등에 뜨겁게 데운 약쑥을 올려두고 나서 저녁상 차려지기를 기다릴 때였다. 아침상 물리자마자 도성 구경 나간다고 사신각을 뛰쳐나가면 자정을 알리는 인경이 울리고서야 겨우 돌아오는 것이 부장들이 보인 그간의 행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른 귀가에 세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부장들 중 서너 명의 옷섶과 소매가 뜯기고 군데군데 핏자국이 얼룩진 것을 본 무호가 대뜸 눈을 부라렸다.
“무슨 일이냐?”
무호의 추궁에 춘수가 앞으로 나섰다.
“별일 아닙니다.”
“별일이 아니라니? 옷이며 얼굴 꼴을 보니 분명 밖에서 싸움질을 한 것이 아니냐?”
며칠 전 수룡천변에서 그 소란이 있은 후, 도성에는 노상에서의 난동을 금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보통 때 두 배의 형으로 다스린다는 특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무호도 부장들이 밖에 나갈 때엔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놀다 들어오라고 주의 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비록 본거지에서 멀리 떠나왔으나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군영에 속한 무장들이었고, 사소한 말썽도 황제의 후비인 누이동생에게 큰 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있느냐? 황명이 지엄하거늘 어찌 네놈들이…….”
“노상에서 다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객잔에서 소란이 좀 있었습니다. 크게 다친 자도 없고, 그냥 밀고 당긴 정도이니 심려하실 것 없으십니다.”
춘수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어이가 없어서 무호가 눈을 끔벅거렸다. 춘수의 표정이나 태도에는 황명과 자신의 당부를 어긴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죄의 기미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부장들에 비하면 신중한 성격이고 누구보다도 자신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던 춘수의 무례한 태도에 순간 당황했던 무호의 눈길에 슬슬 노기가 치밀었다. 그러자 다른 부장들이 얼른 그를 뒤로 끌어내고 앞 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형님, 천변 객잔에서 싸움이 벌어지긴 했으나 저희들이 황명과 형님의 당부를 잊고 경거망동하여 그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객잔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흉악한 말을 떠드는 자가 있어서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명을 어기고 저자에서 소란을 피웠으니 마땅히 백배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부장들이 도리어 목청을 높이며 대들자 무호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승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승주가 무호 옆으로 다가와 부장들과 마주 섰다.
“무슨 일입니까? 또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흉악한 말이란 무엇입니까?”
부장들이 씩씩거리며 눈치만 주고받을 뿐 얼른 입을 열지 않자 승주가 춘수를 쳐다보았다.
“형님이 말씀을 해보십시오. 연유가 있다면 장군께서도 아셔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도성에 말도 안 되는 흉악한 소문이 돌고 있다. 더러워서 그 소리를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구나.”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질 않느냐?”
연유가 있다고 우기면서 정작 본론은 꺼내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는 부장들에게 무호가 벼락같이 고함을 쳤다. 무호의 성질과 기세에 눌린 춘수가 더 머뭇거리지도 못하고, 늦은 점심을 먹다가 시비가 붙어서 수십 명의 사내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제법 규모가 큰 객잔 하나를 다 때려 엎은 사정을 띄엄띄엄 털어놓았다.
“도성에 공비마마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고 있습니다.”
공비의 이름이 잠시 거론된 것만으로도 승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유언비어…… 라니요?”
“그게…….”
춘수가 두려운 눈길로 무호를 힐끔 살폈다.
“공비께서 본시 성격이 거칠고 분별없는 성품이라 황제께서 아무 정을 주지 않아 입궁한 지 3년째 머리도 올리지 못하고 계시는데…….”
“뭣이라?”
춘수가 어렵사리 털어놓은 첫마디에 무호가 울컥해서 거칠게 되물었다. 하지만 춘수는 도리어 답답한 눈길로 무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 부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형님! 아씨께서 소박을 맞고 한창 젊으신 때를 빈 전각만 지키고 계시다가 요즘 들어 우화원 귀인이란 자의 처소에 남몰래 드나들고 계신답니다. 아씨께서 그자의 전각에 들어 주변을 다 물리고 둘만 단둘이 방 안에 머물러 있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고, 그 귀인이란 자는 공비마마께 남몰래 비단옷이며 패물을 선물로 보내는가 하면 궁내청 내관에게 명을 내려 마마의 전각을 새로 짓다시피 꾸며주기도 했답니다.”
“그게 대체…….”
귓가에 무슨 말이 스쳐 지나가긴 한 것 같은데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무호가 말을 더듬었다.
“우화원 귀인이란 자와 아씨가 정분이 났답니다. 어떤 놈들이 객잔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이며 시시덕거리고 있던데……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다시 생각하기도 치욕스럽고 두려워서 춘수가 치를 떨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사신각의 궁녀들이 바삐 오가며 한상 가득 차린 진수성찬이 처음 놓인 그대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무호를 비롯한 부장들 중 누구도 상에 다가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입맛을 잃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는 모함입니다. 누군가가 아씨를 해치려고 허황한 말을 지어서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참 입술을 꾹 깨문 채 바닥만 내려다보며 숨 쉬는 기척조차 없던 승주가 혼잣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이를 말이냐? 우리 아씨께서 무엇이 부족해 그런 말도 안 되는…….”
내도록 씩씩거리고만 있던 영재가 이를 빠드득 갈며 으르렁거렸다. 무호의 부장들에게 공비는 단순한 영주의 딸, 주군의 누이동생이 아니었다. 공비는 열 살 어린 나이부터 그들과 함께 활 쏘고 말 달리며 산천을 누빈 동료이자 모두의 누이였다. 그런 까닭으로 다소간의 곡절은 있었지만 그녀가 황제의 후비로 간택되어 황성으로 떠나던 때엔 모두가 서운함에 눈물을 글썽였고, 황제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신분이 되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리리라 의심치 않으며 그녀의 행복을 기원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소중한 누이가 황제와는 하룻밤도 지내지 못하고 소박을 맞은데다 다른 사내와 정분이 나다니, 게다가 그 상대는 황제의 남첩으로 온갖 뒷말이 무성한 우화원 귀인이라니…… 이는 말짱 헛소리임을 알고 들어도 도무지 분을 삭일 수 없는 망언이었다.
“하지만 저자에 그런 말이 이미 사실인 양 퍼져 떠돌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황제의 후비께서 그렇게 흉한 소문에 휘말리셨으니, 이것이 그저 뜬소문이라 해도 아씨께서 무탈하시겠느냐?”
춘수의 걱정에 승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횃대에서 아무 도포나 꺼내서 먹물 얼룩이 잔뜩 든 저고리 위에 껴입었다.
“어딜 가려고?”
제 것도 아닌 도포를 대강 두르고 경황없이 방을 나가는 승주를 무호가 붙들어 세웠다.
“나가서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
“이는 누군가가 의도를 갖고 퍼뜨린 모함입니다. 분명 출처가 있을 터, 어떤 놈이 무슨 이유로 아씨를 해치려고 하는지 알아내야지요.”
“이미 성 안에 소문이 다 퍼졌다면 소문 퍼뜨린 자를 어찌 잡는단 말이냐? 여기는 손바닥만 한 대현성 읍내가 아니다.”
“도성의 객잔을 다 뒤져서라도 알아낼 것입니다. 그것으로도 어렵다면 가가호호를 돌며 도성 사람들을 모두 붙들고 다그쳐서라도 기필코 범인을 밝혀서 아씨의 누명을 벗겨드릴 것입니다.”
승주가 무호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비틀어 뺐다. 그러곤 어둑한 복도를 향해 곧 쓰러질 듯 불안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연원정을 나선 승주가 안마당을 지나서 사신각 정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호와 춘수, 영재도 한 걸음 늦게 승주의 뒤를 따랐다. 공비에 관한 소문이 생각 없는 자들이 장난으로 떠들어대는 풍문이라도 큰일이지만, 승주의 말대로 누군가가 공비를 노리고 계획적으로 퍼뜨린 것이라면 이는 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지난 3년간 대체 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도성에선 무명의 방문객에 불과하지만 국경에선 맹장으로 소문이 나서 어딜 가든 관등성명만 대면 고개부터 숙이고 보는 오라비가 지척에 와 있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일가 하나 없는 먼 도성에 홀로 남겨진 누이의 처지란 거친 폭풍에 시달리는 풀꽃과 다를 것이 없었겠구나 하는 비애감에 무호가 들고 있던 검을 더욱 움켜쥐었다. 그때 누군가가 사신각 정문 안으로 들어서다가 승주와 딱 마주쳤다.
“아니, 승주 아닌가? 어딜 가는 길인가?”
시영이 먼저 승주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나리…….”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어딜…….”
그냥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반은 공무로 왔는데 하마터면 길이 어긋날 뻔했다 생각하며 다가서던 시영이 승주를 뒤따라온 무호와 부장들의 굳은 얼굴을 보고는 그 기에 눌려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대감께서 이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갑작스러운 시영의 등장에 승주도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자네를 보러 왔지. 내일 어전 회의에 무호 장군도 참석하라는 어명이 있어 명도 전할 겸…….”
“아…….”
“왜? 무슨 일이 있는가? 자네나 장군의 표정을 보니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일세.”
“대감…….”
승주가 허파를 토해낼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시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과 무호가 무작정 도성을 돌며 소문의 출처를 추적하는 것보다는 상서령인 시영의 힘을 빌리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대감, 소인을…… 공비마마를 좀 도와주십시오.”
승주가 시영을 간절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허허…….”
시영이 연거푸 탄식을 토해내며 마시지도 않을 찻잔만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궐 밖에 허연에 관한 고약한 소문이 도는 것은 시영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추문의 상대가 공비인 것까지는 미처 몰랐던 터라 시영의 당혹감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지어 퍼뜨린 헛소문이외다. 지금 도성에 떠도는 풍문 중에는 어느 하나도 사실인 것이 없으니 장군과 부장들은 동요할 것 없습니다.”
시영의 단호한 대답에 춘수와 영재가 다소나마 마음을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무호의 표정은 돌로 깎은 듯 굳어 있었고 승주의 눈동자도 불안함에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네도 그만 마음을 놓게. 폐하께서는 시중에 떠도는 헛소문 따위가 노여워 당신이 사랑하는 후궁을 핍박하실 분이 아닐세.”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후궁이라 함은…… 저희 아씨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우화원 귀인을 이르는 말씀이십니까?”
날카로운 가시가 든 승주의 질문에 시영이 순간 당황해서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두 분 다일세. 귀인에게 죄가 없다면 공비마마께도 죄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더러운 소문에 같이 엮였는데 두 분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금처럼 궁에 같이 계실 수 있겠습니까? 이 일로 해서 폐하께서 양자택일을 하게 되신다면 두 분 중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내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두 사람을 음해한 자를 밝혀 그자를 벌하실 것이네.”
시영의 확신에 찬 대답에 승주의 마른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일이 그렇게 순리대로 되겠습니까? 저희 아씨께서 이 일로 고초를 겪지는 않으실지요?”
지금의 황제가 어떤 성품인지, 황실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지 못해도 승주가 그간 봐온 수많은 나라의 역사책에는 지아비인 황제의 미움을 받거나, 지나친 총애가 화근이 되어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후궁이란 황제의 정원에서 앞을 다투어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 한순간 찬란하게 피었다가도 다음 순간 버려지고, 또 다음 순간엔 이보다 훨씬 사소한 일로도 크나큰 화를 당할 수 있는 것이 그녀들의 운명이었다. 황족이나 권신과의 추문에 휘말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후궁의 일화는 월국의 역사에도 없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승주는 공비에 대한 걱정으로 입술이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다.
“지금의 황제께서는 소싯적에 조 씨 일문이 계획적으로 퍼뜨린 헛소문으로 모함을 당해 황제의 위엄을 위협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셨네. 패악하다는 둥, 불효하다는 둥, 주색잡기 외엔 아무것도 못하는 반편이라는 둥…… 당신께서 연소하실 때부터 당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근거 없는 헛소문을 쉽게 믿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그런 소문 자체를 매우 언짢아하시네. 더군다나 이는 누구보다도 폐하와 가까운 분들에 관한 일이 아닌가? 절대 일을 소홀히 다루시거나 공명함을 잃지 않으실 것이니 걱정 말게. 그렇지 않아도 벌써 대전 지밀에서 소문에 관한 조사에 착수했으니 곧 전말이 드러날 것이네.”
시영이 가늘게 떨리는 승주의 손을 잡아 다독거리며 재차 안심시켰다.
“대감, 혹시라도 저희 아씨께서 이 일로 자칫 험한 일이라도 겪게 되신다면…… 그때 폐하께 말씀을 잘 올려 아씨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시면 죽어서도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나는 어떤 경우라도 죄 없는 자가 무고로 인해 화를 당하는 것을 구경만 하지는 않을 것이네.”
시영의 거듭된 장담에 승주가 비로소 다소간 마음을 놓으며 의자에 축 늘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한창 아플 때에 비해 안색이 딱히 나아 보이지도 않는 승주가 주인댁 아씨의 일로 사색이 되도록 놀란 것이 딱해서 시영이 혀를 끌끌 찼다.
“헌데 자네 손이 어찌 이런가? 살색이 거의 뵈질 않네그려.”
“방금 전까지 서화를 그리다 나왔습니다.”
방금 전까지 서화에 몰두했다는 대답에 시영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내일 어전 회의에 참석하라는 명도 전했겠다, 허연과 공비의 추문도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충분히 설명을 했으니…… 가서 서화나 좀 보자고 보채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았던 것이다. 하지만 승주도 아직은 경황이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 무호가 아까부터 굳은 얼굴로 장승처럼 앉아 있는 것이 두려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승주의 손만 잡아 연신 주물럭거렸다.
“무슨 서화를 어찌 그렸기에 손이 먹물에 푹 담근 형상인가? 몸조심하며 살살 하게. 자네…… 저녁은 들었는가?”
도성에 떠도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으로 욱의 심기만 먹구름인 줄 알았는데 여기는 완전히 초상집이라 시영이 연신 혀를 끌끌 차며 승주를 달랬다. 그때 접객실에 든 이후 말 한 마디 없이 귀만 열어놓고 있던 무호가 입을 열었다.
“정안군 대감.”
“예?”
“떠도는 소문 중에…….”
“소문은 염려할 것이 없다는데도 그러십니다. 내가 후궁 마마님들은 뵐 일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귀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아는데, 절대로 그렇게 허튼짓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 말까지 하기 참 그렇지만…… 폐하께서 아침저녁 귀인만 찾으셔서 그 사람이 생으로 몸살을 앓을 지경인데 무슨 기력이 남아서 한눈을 판단 말입니까? 이는 무엇보다 폐하께서 잘 아시는 일입니다.”
“공비께서 폐하와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소박을 당하셨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무호의 나직한 질문에 시영이 숨을 몰아쉬었다.
“음…… 저…….”
“사실입니까?”
붙들려 온 장족 포로 심문하듯 무호가 시영을 한 번 더 다그쳤다.
공비가 입궁한 첫날부터 황제의 눈 밖에 나서 소박을 맞았다는 것은 궁 안에서는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승사자처럼 음습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의 오라비에게 차마 그 일을 사실대로 일러줄 수는 없어서 시영이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고개를 저었다.
“육궁은 황궁 안에서도 깊고 비밀스러운 곳이니 그곳의 일을 외부인이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육궁이 그렇게 깊고 비밀스러운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도는 것입니까?”
“그러니 모두 헛소문이란 것입니다. 육궁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곳의 높은 담장을 넘지 못하는데 저자의 백성들이 후궁 깊은 곳의 일을 어찌 알고 떠들어댄단 말입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변명에도 무호가 상처 입은 맹수 같은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자 시영이 잔뜩 주눅이 들어서 그 눈길을 피했다.
“그렇게 걱정되고 언짢으면 내일 어전 회의를 마치고 폐하께 직접 여쭈어보시지요. 허면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호의 주의를 소문의 당사자인 욱에게로 돌리고서 시영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한 일이면 사촌 형으로서, 그리고 신하로서 황제를 보호하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상대가 워낙 만만치 않은데다 수천 리 밖에서 사람을 불러놓고 소박을 놓은 것은 전적으로 욱의 잘못이었다. 이는 네 녀석의 죄업이니 죽어도 나를 원망치 마라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영이 다시 승주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내일 장군이 어전에 들 때, 자네도 따라오게.”
“예?”
“폐하께서 자네를 보고 싶어하시네.”
갑작스러운 시영의 전언에 승주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앉았다. 살짝 풀렸던 무호의 표정도 바싹 얼었고, 부장들도 두려움에 숨을 몰아쉬었다. 가뜩이나 공비에 관해 안 좋은 말이 돌고 있는데, 이런 때에 황제가 승주를 보자고 하는 것이 예삿일로 여겨지질 않았던 것이다. 혹, 황제가 예전의 일을 어찌 알고서 승주를 잡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어 부장들이 자기네들끼리 불안한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본 시영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폐하께서 자네가 쓴 <칠 부족 풍속기>를 친히 보셨다네. 특히 장족에 관한 부분이 자세하고 그들의 풍속이나 습성에 관해 박식하다고 칭찬을 하시며 마침 자네가 도성에 있다니 직접 장족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다 하시며…… 장군과 함께 입궁토록 하라고 명을 내리셨네.”
“하, 하지만…… 미천한 소인이 어떻게…….”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황제의 얼굴을 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승주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냉담하고 차분해서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을 것 같던 승주가 허둥거리는 것을 본 시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허, 이 사람…… 어명이라니까? 폐하께서는 국경의 정세를 염려하셔서 되도록 많은 정보와 의견을 구하고 계시네.”
“소인은 군영에서 부장들 수발이나 드는 노비입니다. 조정에는 존귀한 귀족들과 식견 높은 학자들이 이미 많으실 터, 폐하께서 어찌 천한 노비의 의견을 들으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자네 신분을 이미 알고 계시네. 또한 신료들의 의견은 이미 충분히 들으셨고…….”
저승사자가 보자고 해도 그럼 봅시다 하고 나설 것 같았던 승주가 아연실색을 해서 자꾸만 몸을 사리는 것이 안쓰러워서 시영이 그 어깨를 다독거렸다.
“자네는 변방의 백성으로 이족들에 대해 도성의 학자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학자가 아닌가? 폐하께서 보시는 것은 자네의 신분이 아니라 식견일세. 또한 그 자리엔 무호 장군도 있을 것이고 나도 있을 것이니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네.”
황제도 사람 보는 눈이 있고 인재를 아끼는 성군의 자질이 충분하니 승주를 보면 마음에 들어 하리라 의심치 않으며 시영이 재차 승주를 안심시켰다.
황제의 탄신일을 이틀 앞두고 시행된 이른 아침의 조회는 보통 때보다 규모가 훨씬 커서 넓은 황룡전 앞뜰이 비좁을 정도였다.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각지에서 올라온 수십 명의 영주와 제후들이 참석해서 앞자리를 차지했고, 변방으로의 출병을 앞둔 대장군과 그 휘하 장수들 백여 명도 각자의 품계석 옆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천 명이나 되는 신료들 역시 여느 때처럼 각자의 자리에 서서 황제의 행차를 기다렸다.
드넓은 황룡전 마당을 가득 채운 신료들 앞에 눈부신 황의를 입고 금빛 면류관을 높이 쓴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 햇살을 받은 그 모습은 고개를 들어서 바로 보지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빛났고, 풍채며 위엄은 하늘의 아들이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크나큰 시련을 이기고 옥새를 움켜쥔 젊은 황제에 대한 신료들과 백성들의 기대는 자칫 위험할 정도로 높은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비범한 자질과 과감한 통치술로 신료들을 압도했고 태황태후의 섭정 치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명함으로 나라를 다스려, 월국은 실로 오랜만에 황금과도 같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오랜 세도 정치에 시달리다 기적처럼 새로운 시절을 맞은 신료들 중엔 지금도 조회에 나온 황제에게 사배를 올릴 때면 울컥해서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동북의 변방에 5만의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한 직후의 조회라 황제의 연설은 원군과 그를 통솔하는 장군들에게 내리는 격려와 치하가 주된 내용이었다. 회의도, 조회도 길게 끄는 것을 싫어하는 성품답게 연설은 짧고 간략했으나 차가운 가을 아침의 공기를 뒤흔드는 그 음성엔 천자의 위엄이 엄연했다.
“폐하의 결단이 참으로 전광석화와 같으시네. 원군 파병에 관해서는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가닥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황자마마 탄신 축하 사절로 온 무호가 귀향하는 길에 원병을 딸려 보내시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승상 대감. 폐하께서 막중한 국사를 어찌나 시원시원하게 처결하시는지…… 이렇게 영명하신 현군을 뫼시는 것이야말로 신하 된 자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말인가? 자잘한 일 하나 처리하는 데에도 석 달 열흘은 걸리던 섭정 치세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요즘은 녹봉을 거저먹는 격일세.”
조회를 마치고 곧바로 이어지는 어전 회의에 들기 위해 휘명전으로 걸음을 옮기던 승상 조양이 역시 휘명전으로 향하던 무호 일행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위병대나 근위대에도 거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호는 체격과 인상이 워낙 압도적이라서 그를 보고 걸음을 멈춘 조정 대신은 비단 승상뿐이 아니었다.
“승상 대감을 뵙습니다.”
승상과 눈길이 마주친 무호가 그 앞에 다가와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휘명전에 가는 길이구먼.”
“예, 대감.”
“폐하의 생신 축하연이 끝나면 5만의 원군이 대현성으로 향할 것이니 마땅히 당부의 말씀이 있으시겠지. 그나저나, 이제 몸은 괜찮은가?”
승상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무호의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송구는 무슨…… 그런데…….”
조양이 뒤늦게 무호 뒤쪽에 숨은 듯 조용히 붙어 있는 젊은이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젊은이의 복색은 관복 차림도 아니고 군복 차림도 아니었다. 그저 무명의 도포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관직에 있는 자는 아닐 터, 데리고 온 부장들도 외궁에 두고 어전에 들면서 이자는 누구이기에 달고 가는가 궁금했던 것이다.
“동행인가?”
“아, 이 아이는…….”
그때 휘명전 측문 쪽에서 시영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주 왔는가?”
아주 급한 일이 아니고는 뛰는 일이 없는 시영이 후다닥 달려와 승주 앞에 섰다. 평소 흠모하던 예인이자 걸출한 문장가인 승주가 어전에 들어 황제를 알현하게 된 것은 시영으로서도 상당히 들뜨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황제의 성품이 화끈하고 거침없으니 그 마음에만 들면 면천은 당연지사요, 벼슬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월국은 엄격한 신분 질서를 근간으로 삼는 보수적인 나라였지만 지금의 황제는 파격을 심히 즐기는 성품으로 속국의 대장군을 후궁에 두고서 세상이 다 알도록 요란하게 연애를 하고 있었고, 한때 도성에서 가장 잘나가던 기녀 곽여화를 진무왕가의 세자빈으로 봉한 전력이 있었다. 그 외에도 수시로 별시를 치러 재주가 있는 자라면 신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뽑아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도성의 말단 관원이나 그 보좌진들 중에는 본시 천민이었던 자들이 이미 적지 않았다.
뭐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있는 일은 아니라서 승주 앞에서 말을 아끼기는 했지만, 시영은 어렵사리 만난 승주를 노비의 신분 그대로 대현성으로 돌려보낼 마음이 없었다. 때문에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자신의 직권으로라도 그렇게 하든가, 무호를 잘 설득해서 승주로 하여금 최소한 종살이는 면하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터였다.
“잠은 좀 잤는가? 아침은 들었고?”
“예, 나리.”
지난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아침도 굶고 나온 승주가 시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회의 마치고 나오면 점심은 나하고 같이 드세. 오후엔 만승전 구경도 하고, 정원도 보고…… 그렇게 한 바퀴 돌고 같이 퇴궐하면 되겠구먼.”
그렇게 승주를 살뜰히 챙긴 연후에 시영이 무호를 돌아보았다.
“장군, 오셨습니까?”
“예, 대감.”
그렇지 않아도 그간의 편지질과 선물 공세로 철모르는 아이에게 바람을 잔뜩 불어 넣은 것이 책임 없는 처사로 여겨져 마땅치 않았는데 이젠 대놓고 점심을 같이 먹자는 둥, 황궁 구경을 시켜준다는 둥 수선 떨며 살갑게 대하는 것이 값싼 호의로 느껴져서 무호가 시영을 떫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조양이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시영을 쳐다보았다.
“상서령께서 아시는 자입니까?”
그 물음에 시영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승상도 아는 사람입니다.”
“예?”
“그간 대현성에서 온 장계 말입니다. 그것을 쓴 문사입니다.”
“아…….”
시영의 소개에 조양도 놀라서 승주를 다시 돌아보았다. 조양도 대현성발 장계를 보며 그 문체와 글씨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씨만 아름답게 쓰는 것이 아니라 총명함과 통찰력이 뛰어나 장족의 풍속에 관한 책도 한 권 저술했는데 폐하께서 그것을 보시고 저자를 만났으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궁에 든 것입니다.”
“저런…… 무호 장군이 도성에 온 지 꽤 되었으니 진즉에 알았으면 나도 자리를 한 번 만들었을 것을, 떠날 때가 다 되어서 알게 되었습니다그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안 지 며칠 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승상과 상서령이 갑자기 승주에 관한 치사를 늘어놓으며 갓 구운 통오리 보듯 입맛을 다시자 무호가 승주를 끌어서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몹시 긴장이 되는지 무호의 그림자 속에 숨은 듯 몸을 움츠리고 있는 승주를 힐끔 돌아본 시영이 승상에게 앞서갈 것을 권했다.
“얘기는 천천히 하고 일단 가십시다. 폐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조회 때 걸쳤던 무거운 예복과 면류관은 벗어 치우고 그보다는 좀 더 간소한 황의로 옷을 갈아입은 욱이 회의실에 들어서다가 초입에서 걸음을 멈췄다. 보통 어전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은 30여 명 내외로 정해져 있었는데 오늘은 그보다 대여섯 명 정도 수가 늘어난데다 모두 기골이 장대한 장수들이라 항시 휑하던 회의실이 갑자기 좁아진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것은 역시 무호의 키와 덩치라 반가운 마음에 피식 웃던 욱의 표정이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그 옆구리에 찰싹 붙어 서 있는 아담한 체격의 사내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다들 들었습니까?”
욱이 옥좌에 앉아 좌중을 다시 한 번 슥 훑었다.
“예, 폐하.”
승상 조양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허면 대장군 왕쾌에게 임명장을 내리십시오.”
“분부 받들겠습니다, 폐하.”
어명을 받은 승상이 황제의 임명장을 낭독하고 왕쾌를 원정군의 대장군에, 무호를 원정군의 상장군에 임명한다는 명령서를 두 사람에게 각각 내렸다. 황제의 탄신일과 화산 행차가 있기 전에 굵직한 사안은 다 처결을 하려고 지난 한 달간 일을 바짝 당겨서 한 덕에 오늘 휘명전에서 처리할 큰일은 두 장군에게 임명장을 내리는 것이 전부였다.
“남동쪽 여덟 개 성에서 보내온 원군 3만은 이미 도성 밖에 집결해 있으니 사흘간 막사에 머물며 쉬도록 하고 과인의 생일 다음 날인 섣달 초하루에 대장군이 직접 인솔하여 출발하도록 하라. 그리고 소집이 늦어진 서북의 병력 2만은 섣달 열이틀이나 되어야 집결이 가능하다니 상장군은 그들을 기다렸다가 데리고 출병토록 하라.”
“예, 폐하.”
서북쪽 여섯 개 성의 병력 소집이 순탄치 않아서 다소 시차를 두고 대장군과 상장군이 따로 출발하게 될 것은 이미 지난번 참석했던 회의에서 나왔던 얘기였다.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열흘 넘는 시간이 더 생겼으니 그간 누이를 한 번은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무호가 황제 앞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상장군은 건강이 어떤가? 몸은 많이 나았는가?”
“예, 폐하. 미천한 무장의 안위를 걱정해주시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간 도성은 좀 돌아보았는가?”
“예, 폐하. 도성의 부유함과 번화함이 천하의 중심이며 천자의 도시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무호의 대답에 욱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성엔 사람도 많고 그런 만큼 구경거리도 많지. 그대도 며칠 전 천변에서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면서?”
“구경이라 하심은…….”
황제의 성품이 직설적이고 거침없다는 말은 많이 들었고 이전의 알현에서도 그 성격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전 회의에서 남첩의 일을 언급하는 대담함에 무호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과인이 아끼는 사람이 천변 나들이를 하다가 곤경에 처한 것을 그대가 도와주었다고 들었다. 내 마땅히 사례를 해야 할 터, 무엇으로 그 신세를 갚을꼬?”
“사례라니, 천만부당하십니다. 소인이 그분께 큰 도움을 드린 것도 없고, 또한 그렇다 한들 곤란에 처한 사람을 잠시 잠깐 도운 일로 어찌 사례를 바라겠습니까?”
“그것은 자네 입장이고,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 내 입장이니…….”
“대현성처럼 멀고 궁벽한 변방에 큰 변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원군을 5만이나 보내 백성들의 안위를 살펴주시니 소인은 이미 폐하께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냈으니 가벼운 청이라도 슬쩍 붙여서 넣으면 좋으련만 펄쩍 뛰며 거듭 거절하는 그 우직함에 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면 그 일은 과인이 생각을 좀 더 해보도록 하고…… 아까부터 자네 등 뒤에 숨어 있는 그 사람 좀 나와보라고 이르게.”
어명을 받고서야 승주가 무호의 등 뒤에서 나와 어전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얼굴은 낯설지만 동그랗게 엎드린 저 등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욱이 흠…… 하고 낮은 기침을 했다.
“어디 사는 백성인지 직접 고하라.”
“폐하, 소인은 무호 장군을 따라 온 하인으로…… 이름은 승주라고 합니다.”
“성은 없느냐?”
“아비는 성이 없고 어미의 성이 한가인데…… 영주님께서 어미의 성씨를 따르는 것을 허락해주셔서 성명 쓸 일이 있을 때엔 한승주라고 쓰기도 합니다.”
어전에 꿇어 엎드린 모습도 참하지만 목소리도 곱고 침착하니, 욱으로서는 공비 같은 대장부와 이 풀꽃같이 여린 사내가 사귀며 서로 좋아하는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고개를 들어라. 네가 비록 몸은 궁벽한 변방에 머물고 있으나 천하의 명필이며 명문이라 황궁 안에까지 명성이 자자할 정도이니 그 대단한 천재의 얼굴을 제대로 봐야겠다.”
거역할 수 없는 그 명령에 승주가 주저하며 고개를 들고 허리를 바로 폈다. 그리고 그간 무던히도 원망하고 동시에 부러워했던 사내, 크나큰 제국의 주인이자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어줄 만큼 사랑했던 여인의 지아비 되는 자를 떨리는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곱게 생겼구나.”
욱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시영이 험…… 헛기침을 했다. 전체적인 선이 곱고, 낯빛도 희고, 어딘지 냉랭해 보이는 것이 공비와는 완전 반대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차던 욱이 시영을 돌아보았다.
“왜요?”
“어찌 사내대장부에게 곱게 생겼다며 희롱을 하십니까? 잘생겼다고 하셔야지요.”
“곱게 잘생겼습니다.”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욱이 다시 승주를 내려다보았다. 욱도 며칠 전 허연의 닦달로 <칠 부족 풍속기>를 읽었기 때문에 승주의 외모 외에도 궁금한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네가 처지 불민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혀 수년간 조정에 장계도 올리고, 또 동북쪽 성 밖에 사는 이민족들의 풍속을 관찰해서 책까지 한 권 썼으니 공이 적지 않구나. 책을 보니 특히 장족에 관한 설명이 자세하던데 그런 것을 어찌 알고 있으며 책으로까지 쓰게 되었느냐?”
“대현성 읍내에서 7일에 한 번 열리는 장이 인근에선 가장 커서 성 밖의 사람들도 장을 보러 오고, 이민족들도 많이 드나듭니다. 또한 소인도 어렸을 적부터 어미의 약을 구하려고 장에 자주 나갔었고, 성 밖의 약초꾼들도 빈번히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는 모습을 알게 되어…… 몇 년간 들은 얘기, 소인이 직접 본 일 등을 정리하다 보니 책 한 권 분량이 되었습니다.”
“혹, 장족의 족장인 충민이란 자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
“그자를 직접 본 적은 없고, 그 휘하의 파륭이란 측근은 여러 번 만난 일이 있습니다.”
“측근이라…….”
“해마다 대현성에 구휼미를 얻으러 오는 자인데 소인이 장족의 말을 좀 할 줄 알아서 그때마다 통역을 하고 곡식 출납에 관한 문서를 써주었습니다.”
승주의 대답에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 군영의 노비라는 낮은 신분으로 어전에 나왔으니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고 공비에게 사사로운 연심이 있으면 더더욱 자신이 어려울 텐데도, 묻는 말에 주저함 없이 따박따박 대답도 잘하고 몇 마디 되지 않는 그 언중에도 총명함과 배짱이 엿보이니 이놈도 보통은 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욱이 승주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명필에 명문에 장족의 말도 할 줄 안다니, 참으로 총명하구나.”
“부끄럽습니다, 폐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네게 뭔가 선물을 내리고 싶은데, 무엇이 좋겠느냐? 원하는 바가 있으면 얘기를 하거라.”
“천하디천한 변방의 백성이 어전에 들어서 용안을 뵌 것만으로도 이미 평생의 광영이니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소인은 필요한 것도, 원하는 것도 없습니다.”
“성격이 우직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것이 네 주인을 많이 닮았구나.”
“…….”
그만한 총기와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천한 노비의 신분에 몸이 묶여 옴짝도 할 수 없다면 분명 갖고 싶은 것이 있을 텐데도 체면 때문인지 필요한 것 없다고 딱 잡아떼는 승주를 내려다보며 욱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그때 승주가 고개를 들고 욱을 바로 올려다보았다. 생각지 않게 승주와 눈길이 마주친 욱이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콜록 기침을 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일전에 수룡천변에서 우화원 귀인을 뵈었을 때에, 그분께서 꼭 한 번 사신각에 들러 인사를 하겠다고 약조를 하셨으나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청컨대 귀인을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생각지도 못했던 당돌한 요청에 욱이 옥좌에 삐딱하게 앉아서 승주를 잠시 노려보았다. 심기 불편함이 살짝 묻어나는 그 눈길에 시영이 당황해서 앞으로 나섰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 사람이 궁중 예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니 언짢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뭐……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 언짢을 일은 아니지요. 내가 먼저 원하는 바를 말해보라고 하여 청을 한 것이니 실례라 할 수도 없고…….”
“너그럽게 보아주시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욱을 다독여놓고 나서 시영이 승주를 돌아보았다.
“자네도 참으로 실없네. 폐하께서 선물을 내리겠다고 하셨으면 뭔가 실속 있는 청을 올리지 않고, 어찌 갑자기 귀인을 찾는가? 그 사람은 황궁의 귀한 손님으로 폐하께서도 쉽게 오라 가라 하지 않으시고 볼일이 있으면 그 처소로 직접 거동을 하신다네.”
“송구하옵니다. 그런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승주가 잠긴 음성으로 사죄를 하며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시영이 슬쩍 욱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멀리 있는 사람을 불러달라는 것도 아니니 잠시 만나도록 해주시지요. 귀인도 이 사람의 장계와 저서를 보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까? 승주와 만날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하면 흔쾌히 응할 것입니다.”
“지척에 있는 사람을 보게 해주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욱이 시영에게 나서지 말고 가만있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인 승주의 정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귀인만 보면 되겠느냐? 달리 보고 싶은 사람은 없느냐?”
욱의 물음에 승주가 평정심을 잃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인 하문이십니까? 달리 보고 싶은 사람이라니…….”
“무호도 들었겠다, 공비를 불러서 향원궁에서 점심이나 같이 들게 하려고 했었지. 듣기로는 공비가 입궁하기 전에 오라비의 부장들과 사냥도 다니며 동기간처럼 지냈었다니, 너하고도 잘 알았을 터…… 떠나기 전에 한 번 보면 좋지 않겠느냐?”
“…….”
“귀인만 보고 가겠느냐?”
승주가 숨을 가다듬느라 얼른 대답을 못하고 지체하는 사이 시영이 욱을 흘겨보았다.
“폐하도 참 쓰잘 데 없이 짓궂으십니다. 향원궁에 귀인도 불러 같이 보게 하시면 되지, 뭐 어려운 일이라고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십니까?”
욱에게 핀잔을 날린 시영이 승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되었네. 공비마마 걱정을 그리 하더니…… 이참에 마마를 직접 뵙고 가면 마음이 좀 놓이지 않겠는가? 마마도 뵙고, 귀인도 만나게.”
“아, 아니옵니다. 소인이 마마를 뵈어 무엇을 하겠습니까? 마마께서는 소인을 잘 모르십니다.”
시영의 권유에 승주가 극구 사양을 하며 큰 죄라도 지은 듯 연거푸 고개를 조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분하고 분명하던 승주의 목소리가 그새 꽉 잠겨서 말조차 어눌해지자 욱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라.”
욱의 명에 승주가 몸을 더 움츠리고 어깨를 덜덜 떨었다.
“무엇을 하느냐? 고개를 들어보라는데?”
욱의 재촉에 승주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얼른 훔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본시 창백할 정도로 희던 얼굴빛이 얼룩이라도 진 듯 군데군데 붉은데다 차분하고 깊던 눈동자가 푹 젖어서 일렁이는 것을 본 욱이 마땅찮은 기색이 역력한 눈길로 승주를 노려보았다. 황제의 입에서 공비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정신이 혼미하던 승주가 그 사나운 눈길에 바닥이 아래로 푹 꺼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황제가 자신에게 달리 보고 싶은 사람이 없느냐 물었을 때부터 승주는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뒤이어 떠나기 전에 공비를 한 번 보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떠보는 것이며 지금 자신을 노려보는 싸늘한 눈길을 보니, 이는 다른 희망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자명한 상황이었다. 황제는 자신과 공비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보게, 승주. 자네 왜 이러는가? 어지러운가? 어디가 아픈가?”
승주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옆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리자 시영이 놀라서 달려 나와 승주를 끌어안았다.
“괜찮습니다, 대감. 소인은…….”
“괜찮기는? 이제 보았더니 몸이 하나도 낫질 않은 게로구먼. 어째 얼굴에 핏기가 없고 기운도 없어 보인다 싶더니만…….”
수선스럽게 승주를 걱정하며 학질에라도 걸린 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의 등을 쓸어내리던 시영이 욱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이 사람이 전에 앓던 몸살이 아직 다 낫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만 어전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시영이 승주의 재능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은 이미 아는 일이었지만 아예 그쪽에 가서 형님 노릇을 하는 것이 기가 차서 욱이 한숨 쉬듯 헛웃음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연신 혀를 끌끌 차고 있는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상선은 상장군 일행을 향원궁으로 안내하라. 오늘 점심은 향원궁에서 들 것이니 준비를 시키고…… 영운궁과 청량전에도 기별을 넣으라.”
“두 분을 다 향원궁으로 모시는 것입니까?”
“왜? 문제라도 있는가?”
욱의 하문에 윤 내관이 곁으로 다가서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사람이 저렇게 까부라져 있는데, 삼자대면은 좀 심한 처사가 아닐는지요?”
“귀인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은 저자가 아니냐? 또한 나는 먼 길 떠나기 전에 공비를 한 번 만나게 해주려고 인정을 베풀고 있는 것이고…….”
욱의 대답에 윤 내관이 시영에게 안긴 채 사색이 되어 있는 승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잠시 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그…… 귀인께나 조심스러우시지, 딴 데 가서는 참으로 인정사정없으시옵니다.”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듣겠구나.”
욱이 시치미를 딱 떼고는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무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향원궁에 가 있게. 조회에 참석하느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을 것이니 가서 좀 쉬고, 승주도 데려가서 돌보게. 시각이 되면 과인도 향원궁으로 내려갈 것이니…… 함께 점심이나 드세.”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는 점심 약속을 잡은 욱이 회의실에서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책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칠 부족 풍속기>를 찾아들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허연의 권유로 들쳐보기는 했지만 실상 장족에 관한 부분만 건성으로 한 번 훑어보고 던져둔 책이었다. 시중에 도는 필사본도 아니고, 제목부터 마지막 한 자까지 저자가 직접 쓰고 제본까지 한 친필 저서로 시영이 선물을 받아서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책의 표지를 욱이 손끝으로 슬쩍 쓰다듬었다.
향원궁에 준연회급의 점심상을 보도록 하고 승주에게 어의를 보내고, 영운궁과 청량전에 내관을 보내 황제의 점심 초대를 알리고…… 그 외 몇 가지 일을 더 처리한 윤 내관이 간식을 챙겨 들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근래 드물게 독서에 몰입해 있는 황제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엇이냐?”
“태화궁에서 대추차와 인삼정과를 보내왔습니다. 점심 수라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싶으니 우선 간식을 드십시오.”
“거기 두게.”
“서책을 보고 계셨습니까?”
윤 내관이 작은 탁자 위에 간식을 올려놓으며 욱이 보고 있는 책을 넘겨다보았다.
“<칠 부족 풍속기>가 아닙니까? 한 번 보신 책을 다시 들쳐보시는 일은 좀처럼 없으시더니…….”
“저자를 직접 만나고 나니 필체도, 내용도 전과는 좀 다르게 보이는구나.”
장족에 관한 부분만 읽으며 정보 수집에 집중했을 때엔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욱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보았을 때엔 관찰력이며 세세한 묘사가 제법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겼던 부분은 다시 보니 초원에서 거친 환경에 시달리며 어렵게 살아가는 이민족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엿보였다.
험한 벼랑을 타서 목숨을 걸고 구한 석청이며 약초 따위를 들고 성 안에 들어와 곡식과 바꿔 돌아가는 강족의 사내, 봄이면 겨울 내내 사냥한 여우와 너구리 가죽을 말 잔등에 잔뜩 싣고 들어와 며칠씩 성 안에 머물며 조금이라도 좋은 값을 받으려고 흥정을 하고 돌아다니는 오족의 사냥꾼들, 부족들마다 쓰는 말이 달라서 장터에서 종종 벌어지곤 하는 실랑이의 묘사는 눈앞에서 본 듯 세세했고, 그들 풍속에 관한 설명도 그 서술이 정중하고 품위가 있어서 저자의 성품까지도 짐작할 만했다.
“너는 어찌 보았느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대현성에서 온 한 선생 말이다.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더냐?”
머리 좋고, 인물 좋고, 어전에서도 따박따박 할 말 다 할 정도로 뱃심 좋고…… 그런데 또 한편 어딘지 냉랭하고 건조한 분위기가 있는 것이 공비뿐 아니라 대현성 여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폭발적이었겠다는 것이 승주에 관한 윤 내관의 총평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질문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확실치 않아서 윤 내관도 두리뭉실하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눈빛에 총기가 가득한 것이…… 딱 봐도 똑똑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미천한 신분으로 어전에 들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것을 보니 자신감이며 배짱도 상당한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한마디에 아연실색하여 주저앉는 것을 보면…… 예민하고 눈치도 빠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
윤 내관이 얼른 대답을 못하자 욱이 그제야 책에서 눈을 들어 윤 내관을 쳐다보았다.
“딱 집어서 궁금하신 바가 있으십니까?”
윤 내관의 물음에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과인의 한마디에 아연실색을 하며 주저앉았는데, 그것이 자신이 걱정되어 그런 것 같더냐? 아니면 공비가 걱정되어 그런 것 같더냐?”
“그것은…….”
“그자가 여전히 공비를 사랑하는 것 같더냐?”
“폐하, 그리 물으시면 소인이 뭐라 답을 올리겠습니까?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황제가 공비와 금슬 좋게 잘 지낸 것도 아니고, 지난 3년간 그야말로 닭 소 보듯 데면데면하였으면서 승주가 나타나자 이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다소 쪼잔하지 않은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윤 내관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너는 과인의 상선이다. 과인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는 대로, 느낀 대로 대답하는 것이 네 소임이 아니냐?”
욱의 재촉에 윤 내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에 젖은 승주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 처지가 측은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어전에서 그렇게 딱 걸렸으니 앞일이 어찌 되어도 제 팔자라 생각을 하며 윤 내관이 입을 열었다.
“환관인 소인이 남녀 간의 정에 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하오나…… 첫정이란 본시 오래가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폐하.”
“첫정이라…….”
“또한 폐하께서 공비마마를 보고 가라고 인정을 베푸셨음에도 도리어 볼 필요 없다며 정색하는 것을 보면…… 남은 마음이 없다면 어찌 그리 했겠습니까?”
“거 참…….”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뭔가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보던 책을 탁 덮었다. 그때, 청량전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태경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보통 내관들은 황제의 부름이 없거나 상선의 허락 없이 어전에 들 수 없었고, 태경이는 더욱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어린 나이임에도 경솔하게 행동하는 일이 없었기에 욱과 윤 내관이 동시에 태경이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어찌 어전에 이리 불쑥 들어오느냐? 청량전에 무슨 일이 있느냐?”
그 물음에 그제야 태경이 청량전에서 오는 길이란 것을 깨달은 욱이 윤 내관을 옆으로 밀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실은 귀인께서 오늘 점심에 향원궁에 나가기 어렵다시며…… 폐하께 사죄의 말을 대신 올리라 하셨습니다.”
“아니, 무슨 소리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 향원궁이거늘 나오질 못하다니?”
“저, 그것이…….”
태경이 대답을 못하고 꾸물거리자 욱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자 윤 내관이 나서서 태경이를 다시 한 번 채근했다.
“폐하께서 하문하시는데 어찌 대답을 못하느냐? 어서 고하지 못할까?”
“귀인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으나, 아마도 세간에 돌고 있는 흉한 소문이 청량전에 들어간 듯싶었습니다. 고 내관은 훌쩍이며 그간 예복에 꿰매던 진주를 뜯고 있었고, 귀인께서는 연신 한숨만 내쉬고 계셨습니다.”
태경의 대답에 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 청량전만 피해 갈 리 없으니 어찌 들어도 듣게 되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이 연루된 고약한 추문을 듣는 심정이 어떨까 생각하니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저녁에라도 직접 일러줄 것을…… 내가 무심했구나.”
“폐하…….”
“청량전으로 가자. 그냥 두면 점심도 거르고 자책을 할 터…… 가서 안심을 시켜줘야 마음을 놓지 않겠느냐?”
소맷자락에 꿰맸던 진주를 다 뜯어낸 고 내관이 옷깃과 가슴에 붙인 진주를 어루만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차마 옷깃엔 칼을 대지 못하고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아이들에게 하라 이르고 자네는 방에 돌아가 쉬게.”
끝도 없는 고 내관의 한숨과 울먹임에 신경이 곤두선 허연이 슬쩍 인상을 썼다. 하지만 고 내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에게 맡겼다가 옷이라도 뜯으면 어쩝니까? 폐하의 생신 연회에 입고 나가실 예복은 있어야지요.”
“그 옷이 아니면 내게 옷이 없는가?”
“이 옷은 예복입니다. 마마께서는 항시 예복이 백 벌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작년 이맘때에 돌아오셨으니 중추절, 폐하의 생신연, 설날, 황후마마의 생신연에 입으신 것을 다 합쳐도 예복이라곤 달랑 네 벌이 아닙니까?”고 내관이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허연에게 까칠하게 대들었다.
“고 내관…….”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고 내관이 달달 떨리는 손으로 옷깃에 붙은 진주를 몇 개 떼어내고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느라 끅끅거렸다.
“마마께서 태화궁에 갈 진주를 가로채고, 공비마마와 사통을 하셨다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이는 명백하게 마마를 노리고 계획적으로 모함을 하는 것입니다. 대체 어떤 흉악한 것들이 그런 말을 지어 퍼뜨렸는지 소인이 궁을 다 뒤지고 털어서라도 기필코 찾아내고 말 것입니다!”
“진정하게.”
“하긴, 찾아내고 말고 할 것이나 있습니까? 미향궁, 아니면 태화궁 둘 중 한 곳이겠지요.”
“고 내관!”
허연의 엄한 꾸중에 고 내관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히끅히끅 딸꾹질을 하면서도 허연을 원망 어린 눈길로 노려볼 뿐 좀 전의 실언을 사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증좌도 없이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는가? 일국의 국모와 황손들의 생모를 모함하는 것은 크나큰 불충이 되네.”
“폐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분을 모함하는 것은 불충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마마에 관해서 아무런 근거 없는 흉언을 떠들고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소인도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 것입니다!”
“어허…….”
“이 진주는 소인이 폐하께 청을 올려서 당당하게 받아낸 마마의 진주입니다. 황후마마의 것을 훔쳐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공비마마는…… 궁 안을 돌아다니다 제 발로 찾아온 것이지 마마께서 놀러오라고 청을 넣은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마마께서는 폐하가 그리워 세상을 다 버리고 돌아오셔서 혹 구설이라도 있을까 하여 좁은 별궁에서 숨조차 크게 못 쉬고 사셨거늘, 사통이라니…… 이 무슨 경우 없는 개소리란 말입니까? 폐하께서 마마를 지극히 아끼시니, 그것이 분해서 친정은 제일 한미하고 성깔은 제일 만만치 않은 후궁을 엮어서 한 방에 보내려는 수작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봇물처럼 터진 고 내관의 성토에 허연이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만하게.”
“대체 어떻게 마마를…… 소인이 이날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으나 마마처럼 성정이 곧고 사리분별 뚜렷한 분은 뵌 적이 없거늘, 어찌 이렇게까지 욕을 보일 수 있는지…… 향비는 정말 사람도 아닙니다.”
“…….”
이제 거의 정신이 나가서 아예 실명을 거론하고 나서는 고 내관을 허연이 난감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때 문밖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황제의 행차에 고 내관이 움켜쥐고 있던 예복을 얼른 버들고리에 던져 넣고 앞으로 나와서 허리를 굽혔다.
“폐하…….”
“향비가 범인이란 증좌가 있느냐?”
욱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허연이 놀라서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욱이 틈을 주지 않고 손을 들어 그 입을 막았다. 허연이 당한 봉변에 있는 대로 화가 치밀어 있던 고 내관이 또 울컥해서 소맷자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냈다.
“증좌가 있으면 여기서 넋두리나 늘어놓고 있겠습니까? 당장 미향궁에 쫓아가서 궁을 다 엎었을 것입니다.”
고 내관의 막말에 혼비백산한 허연이 얼른 그 뒷덜미를 잡아서 뒤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욱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고 내관이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허연의 사죄에 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허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게. 내게 중요한 것은 고 내관의 정신 상태가 아닐세.”
허연을 잡아 일으킨 욱이 그 어깨를 토닥거리며 눈을 맞췄다. 욱을 마주 보는 허연의 눈동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했다. 하지만 그 깊은 갈색 눈동자 이면에 깃든 울적함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떠도는 소문 따위는 마음에 담지 말게. 백성들이 과인과 그대의 일을 안주 삼아 떠들어댄 것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인가? 내가 알아서 다 처결할 것이니 가서 점심이나 같이 드세.”
“저는…….”
“승주가 오늘 편전에 들어 그대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을 했네. 그대도 그자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었나? 내가 직접 보니 똘똘하고 제법 강단도 있어 보이는 것이 자네 이야기 상대로 부족함이 없겠더구먼.”
욱의 거듭된 권유에 허연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 경솔한 처신으로 폐하와 공비마마께 누를 끼쳤는데 어찌 얼굴을 들고 바깥 출입을 하겠습니까? 저는 지금 나가 공비마마와 무호 장군을 볼 낯이 없습니다.”
“경솔한 처신이라니?”
“공비께서 청량전에 오셨기에 잠시 그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허연의 고백에 욱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저는…….”
“귀인.”
“그분의 심사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정도는…… 아주 잠깐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공비가 청량전에 와서 잠시 허연과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는 말에 욱의 표정이 점점 시무룩해졌다. 욱의 입술이 앞으로 슬슬 나오는 것을 본 고 내관이 두려움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욱의 표정은 대단히 심기가 불편함을 나타내는 것인데 허연과 함께 있을 때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네 대체 무슨 뜻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폐하, 저는…….”
“자네와 공비가 만나서 차 한 잔 마신 일을 내가 문제 삼을까 봐 그러는가? 내가 그대를 의심하여 공비와 통정이라도 했다고 몰아붙일까 두려운가? 나는 공비가 매일 청량전에 놀러 와서 자네하고 제기를 차고 놀았다고 해도 상관없네!”
욱이 허연을 노려보며 벌컥 언성을 높였다. 욱이 자신과 공비가 잠시 만난 일을 문제 삼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화를 낼 줄은 몰랐기 때문에 허연이 당황해서 눈을 끔뻑였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됐고, 시간 맞춰서 제일 예쁜 옷 차려입고 향원궁으로 나오게. 이는 어명일세.”
딱 잘라 말하고 쿵쾅거리며 청량전을 나서던 욱이 고 내관이 급히 구석에 밀어놓은 버들고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뚜껑이 어설프게 덮인 바구니 틈으로 군데군데 진주가 뜯겨나간 허연의 예복이 삐죽 나와 있었다.
“저것이 귀인의 예복이냐?”
욱의 물음에 고 내관이 바닥에 코가 닿을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폐하.”
“진주를 다시 붙여라.”
“예?”
“이것은 과인이 내린 귀인의 진주다. 과인이 다시 거두어들인 바 없거늘, 대체 누가 두려워서 이미 붙였던 진주를 뜯어내고 있느냐? 제대로 고쳐서 내 생일 연회에 귀인이 완벽한 예복을 입고 참석할 수 있도록 하라.”
그 명령에 좀 전까지 얼어 있던 고 내관이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욱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하지만 우선 급한 것은 오늘 점심이니 귀인이 향원궁에 늦지 않도록 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바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고 내관에게서 반드시 허연을 향원궁으로 데리고 나오겠다는 다짐을 받은 욱이 청량전을 나서다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러곤 허연을 시무룩한 눈길로 슥 한 번 노려보고는 이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위로를 하신다더니, 어찌 귀인께 그리 화를 내고 나오셨습니까?”
휘명전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씩씩거리며 대청마루를 뱅뱅 도는 욱을 보다 못한 윤 내관이 슬쩍 그 의중을 떴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단 말이냐?”
“공비께서 청량전에 다녀가셨던 일을 귀인이 고하자, 사람을 어찌 보고 그런 소리 하느냐고 벌컥 성을 내지 않으셨습니까?”
“고작 그따위 사소한 일을 혹시 죄가 될까 싶어 일일이 내게 고하는 것이 싫어서 한 소리 한 것이지, 화를 낸 것이 아니다.”
곁에 있던 사람의 간을 발등까지 떨어지게 만들어놓고 화낸 적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것이 어이가 없어서 윤 내관이 뚱한 눈길로 욱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때 욱이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기습적으로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소문의 출처를 알아본다더니, 그 일은 어찌 되어가느냐?”
“이미 도성 안에 쫙 퍼져서 너나할 것 없이 떠들고 다니는 소문의 출처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것이 누군가 계획적으로 퍼뜨린 것이라면…….”
“쉽지 않아서, 못하겠단 말이냐?”
“소인을 어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폐하, 소인 윤 내관이옵니다.”
윤 내관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욱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는 대로 고하라는 욱의 눈빛에 윤 내관이 얼른 그 곁으로 다가갔다.
“도성을 뒤져서 소문의 출처를 밝히는 일은 이미 어렵게 되었기에, 이런 때엔 유력하게 혐의가 가는 쪽에 미끼를 던져 역으로 추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유력하게 혐의가 가는 태화궁과 미향궁에 미끼를 던졌단 말이냐?”
“아뢰옵기 매우 송구하오나…… 그 소문은 애초에 궁인이 퍼뜨린 것입니다. 귀인의 진주 건이나, 공비께서 청량전에 출입하셨던 것은 없는 일이 아니질 않습니까? 그 일은 궁에 있는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인데, 사실을 악의적으로 변질시켜서 소문을 퍼뜨린 것이니…… 범인은 집 안 사람이 확실합니다.”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치미는 울화를 가라앉히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그런 것이었더냐?”
“소인이 며칠 전 태화궁과 미향궁의 상궁들을 각각 만나서 태화궁 상궁에게는 폐하의 명으로 청량전을 싹 새로 꾸미게 되었는데 귀인께서 특히 흑단과 자단을 좋아하셔서 경비가 꽤나 들게 생겼다고 말을 넣었고, 미향궁 상궁에게는 이번 생신 원행에서 폐하와 귀인이 환궁하시기 전에 청량전의 가구를 모두 바꾸라는 명을 받았는데 귀인께서 황칠로 마감한 책상과 의자를 원하시니 구하기 쉽지 않겠다고 슬쩍 푸념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나왔느냐?”
욱의 하문에 윤 내관이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궁 밖에 풀어둔 자들에게서 오늘 아침에 보고가 들어왔사온데…… 귀인께서 휘명전 지척의 별궁인 청량전에 아예 눌러살면서 전각이 낡았다 하여 폐하를 졸라서 멀쩡한 전각을 뜯어 고치며 천금을 버려 안팎을 황칠로 싸 바르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윤 내관의 보고에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문이 퍼지면서 살이라도 붙은 것이냐? 네가 각각의 전각에 흘린 말이 섞여 있질 않느냐?”
“하여 소인의 판단에는 두 궁이 모두 연관이 있는 듯…….”
“저런, 고연…….”
욱이 이를 빠드득 갈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책상 가장자리에 올려두었던 유리 필통과 연적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고, 필통에 꽂혀 있던 붓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어째 집구석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했더니…… 경박하고 음흉한 모리배, 협잡꾼이 모두 다 칠궁에 모여 있었구나! 명문가 출신의 현숙한 요조숙녀라며 궁 하나씩을 꿰차고 고상하고 우아한 척은 있는 대로 하더니, 정작 하는 짓은 저자의 천민들보다 더욱 천박하질 않느냐?”
“폐하, 고정하십시오. 둘 중 어느 쪽이 주모자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누가 주동을 했든 황후의 죄가 더욱 크다! 향비는 일개 후궁이지만 황후는 국모가 아니냐? 어찌 그 자리에 앉아서 과인의 정인과 어린 후궁을 해칠 궁리를 할 수가 있느냐?”
욱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러다 황제가 태화궁으로 달려가기라도 할까 봐 겁을 먹은 윤 내관이 욱의 앞을 막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 두 궁이 모두 사건과 연관은 있으나 두 분 궁주께서 직접 명을 내린 일인지, 궁인들이 어리석은 충심으로 저지른 일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더구나 황후께서는 지난달에 출산을 하신 후 몸조리도 아직 다 못하셨는데 어찌 이런 일을 소상히 계획하고 지시하셨겠습니까? 실제 그리하셨다면 황후마마야말로 하늘이 내린 책략가이자 모사꾼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노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모두 죄가 있다, 황후께서는 국모이니 죄가 더 크다 하시지만 주범과 종범은 그 죄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상황을 좀 더 주시하며 면밀히 살피심이…….”
“이 일을 더 끌면 내 생일 잔칫상에 올랐던 음식에 김도 나가기 전에 중신들이 떼로 몰려와 귀인과 공비가 실제로 사통이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며 두 사람을 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칠 것인데 뭘 언제까지 주시하라는 것인가? 일이 그렇게 되면 저들이 아무런 소득 없이 조용히 물러날 리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폐하, 그렇기에 더욱더 명백하고 확실한 증좌가 필요한 것입니다. 태화궁과 미향궁에 줄을 댄 중신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폐하를 압박한다고 해도, 그들 앞에 확실한 음모의 정황과 증거를 내보이면 더 이상 뭘 어찌하겠습니까? 다들 글줄이나 읽은 식자들이니 더욱더 뻘쭘하여 뒷목이나 긁으며 돌아갈 것입니다.”
윤 내관의 정보 청취력과 그 정보를 토대로 한 판단이 정확한 것은 욱도 익히 아는 일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시영이나 진관우처럼 사리 밝고 점잖은 자들은 못하는 일을 윤 내관은 아무 거리낌 없이 해치우며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욱도 그를 환관이라 무시하지 않고 여러 중신들과 마찬가지로 그 의견을 존중하며 중요한 국사를 함께 꾸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윤 내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장 황후와 향비를 불러다가 족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욱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폐하, 고정하시고 이만 향원궁으로 드시지요. 공비마마도 지금쯤 향원궁에 드셨을 것이고…… 귀인께서도 청량전을 나서셨을 것입니다.”
“점심이고 뭐고…… 다 귀찮구나.”
“이러실까 봐 소인이 이따 밤에나 보고를 올리려고 말을 아끼고 있었던 것이옵니다.”
“후궁도 괜히 들이고 장가도 괜히 갔다. 그냥 귀인이나 끌어안고 살았어야 했는데…….”
욱이 장탄식을 내뱉으며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씀 하셔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본래 후궁이란 살벌하고 무정한 곳…… 그래도 지금은 마마님들이 어리고 서툴러서 이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더욱더 큰일 났다는 절망감에 욱이 아예 책상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어리고 서툰데 벌써부터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덤빈단 말이냐?”
“지금이야 폐하께서 워낙 표나게 귀인을 싸고도시니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 공론을 얻고자 소란을 피우는 것이지, 한 10년쯤 지나면 후궁에서 벌어지는 일은 쥐도 모르고 새도 모를 정도로 은밀해질 것입니다.”
“그때는 아주 대놓고 자네 세상이 닥치겠구먼.”
“어인 말씀이십니까? 소인은 폐하의 신하입니다.”
눈치껏 비위를 맞추며 윤 내관이 욱의 어깨를 잡아서 바로 앉혔다. 그러고는 빗을 가져와 엉클어진 머리를 다시 빗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허기가 지셔서 더욱더 괴로우신 듯싶으니 일단 점심을 든든히 드시고 성심을 평안히 가지십시오. 소인이 오늘 내일 중으로 두 궁의 상궁들을 잡아다 어느 궁이 어느 만큼 일에 간여했는지, 황후께서 이 일과 연관이 있으신지 확인해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상대가 황후라 하여 겁을 먹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듯 덮을 요량이면 아주 잘해야 할 것이네. 내게 들키는 날엔 남은 평생을 남해 바다에서 조개나 캐 먹으며 살게 될 것이니…….”
욱의 살벌한 위협에 윤 내관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소인에게 주인은 오직 폐하 한 분뿐이십니다. 미천한 환관에게 자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두려워 폐하께 불충의 죄를 짓겠습니까?”
눈치껏 비위를 맞추며 윤 내관이 욱의 상투를 다시 조였다. 그러고는 빗을 내려놓고 어서 향원궁으로 가시자고 한 번 더 재촉을 했다.
무호가 궁에 들었으니 향원궁으로 와서 함께 점심 드시라는 대전 내관의 전언에 오랜만에 제대로 몸치장을 한 공비가 한달음에 달려와 향원궁 궁문을 넘어섰다. 지난번 만남에서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제 내일모레 황제의 생일 축하연이 끝나면 오라비도 대현성으로 돌아갈 터, 이번엔 3년 만에 만났으나 다음엔 또 언제 볼지 기약조차 없는 형편이었기에 공비는 오라비가 도성을 떠나기 전에 만날 기회가 더 있을까 싶어서 아침부터 휘명전 방향만 목이 빠지게 쳐다보던 참이었다.
향원궁의 넓고 아름다운 안뜰을 가로질러 정전으로 향하던 공비가 전각 옆 누마루 아래 연못가에 모여 있는 부장들을 발견하고 우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떼어놓지도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부장들 틈에 끼어 서 있는 승주의 뒷모습을 한눈에 알아본 때문이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다가 공비와 눈이 마주친 영재가 승주의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승주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그 어떤 모습보다 예쁘게 차린 공비를 발견하고는 아련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씨…….”
“너도 들었더냐? 오라버니가 너를 데리고 입궁하신 것은 미처 몰랐구나.”
공비가 반가운 내색을 감추며 애써 담담하게 승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인도 이리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인사에 답을 하며 승주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어찌 이리 여위었느냐? 얼굴이 반쪽이 되질 않았느냐?”
그리움과 걱정으로 자꾸만 몸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참느라 공비가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눈길은 좀처럼 승주에게서 떼지 못하고 눈에 담기라도 할 듯 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간…… 어찌 지냈느냐?”
“하고 싶은 것 하며 별고 없이 잘 지냈습니다.”
승주의 대답에 공비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비의 일상이란 어디라도 만만할 리 없지만, 대현성처럼 척박하고 전란도 잦은 변방에서는 한층 더 고달픈 것이었다. 병영에서는 부장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고 성 안에서는 각종 심부름과 문서 수발까지 처리하는 것이 승주의 일상이었고, 병영에 비상이라도 걸릴 때면 성 밖 상황을 살펴 보고서를 쓰고 협상을 주선하며, 때로는 목숨을 걸고 장족의 본거지까지 들어가야 하는 모든 일이 그의 임무였다.
이제 다시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대현성으로 돌아가면 그나마 장족의 말을 유창하게 잘하고 그들과 안면이 있다 하여 빈번히 성 밖으로 내몰릴 터…… 그러다 혹 무슨 변고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에 아까부터 승주에게 붙박여 있던 공비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씨께는 승주만 보이고 저희는 보이지도 않으십니까?”
공비와 승주가 마주 서서 인사 주고받는 모습을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춘수가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춘수 오라버니…….”
“오늘은 더욱 어여쁘십니다, 아씨. 지난날 대현성에서 바지저고리 걸치고 말 잔등에서 살다시피 하실 때엔 아씨가 이토록 미인이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오라버니, 승주를 잘 좀 돌봐주십시오.”
공비의 당부에 춘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승주를 힐끔 돌아보았다. 바깥에서 돌고 있는 소문도 흉악하기 그지없는데 둘 사이는 아직도 이렇게 애틋하니, 그것도 큰일이다 싶었던 것이다.
“나잇살 먹은 사내 녀석을 돌봐주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제 일 제가 알아서 하고, 우리도 우리 일 알아서 하면 그뿐인 것을…….”
“다들 그렇게 무심하니 승주의 몰골이 저 지경이 아닙니까? 앞으론 승주를 험한 곳에 데리고 다니지도 말고, 위험한 일도 시키지 마십시오!”
춘수의 심드렁한 대꾸에 공비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공비는 어렸을 적부터 부장들 틈바구니에서 지내며 익힌 격투의 수준도 상당했고 성질이 한 번 터지면 무호가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기세가 사납기도 했고, 불과 보름 전엔 3년 만에 만난 오라비를 돌려차기 한 방으로 때려눕힌 전적도 있었기 때문에 춘수와 부장들이 슬금슬금 승주 뒤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저희들이 승주에게 뭘 어쨌다고…….”
“승주가 노비라 하여 병영의 온갖 잡일을 다 떠넘기고, 글줄이나 읽고 쓴다 하여 문서 수발도 다 몰아서 맡기고, 이족의 말을 좀 배웠다는 죄로 걸핏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적장의 근거지로 들여보내고…… 그렇게 야무지게 등골을 뽑아먹지 않았습니까? 승주가 노비면 노비가 할 일만 시키든가, 오라버니들이 해야 할 일과 위험까지 떠넘길 양이면 마땅히 면천을 시켜서 직책을 주든가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러고도 승주에게 너무한 것이 없다고 발뺌입니까? 대체 오라버니들에게 양심이란 것이 있기는 합니까?”
애달프기 그지없는 눈망울로 승주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호랑이로 돌변해서 으르렁거리는 공비의 기세에 그녀를 모셔온 영운궁의 내관과 부장들이 동시에 겁을 먹고 눈을 내리깔았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사정을 헤아려주는 이는 공비뿐이라서 승주가 뭉클한 심정으로 이제는 영영 남이 되어버린 정인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마, 고정하십시오. 형님들은 모두 마마를 뵙고 점심 한 끼라도 같이 들게 된 것이 반가워 여태 기다리고 계셨는데 어찌 이렇게 벌컥 화부터 내십니까? 저는 최근에 몸살을 앓는 바람에 기력이 좀 떨어졌을 뿐, 그 외엔 불편한 것 없이 잘 지냈습니다.”
“몸살을 앓았더냐?”
“예, 며칠…….”
“아픈 동안 오라버니들이 죽이라도 한 그릇 쑤어서 들여주더냐?”
“사신각 내관들이 잘 돌봐주었습니다.”
승주의 대답에 공비가 다시 한 번 부장들을 송곳처럼 날카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때 다시 승주가 나서서 공비를 달랬다.
“아씨, 고정하시고 안으로 드시지요. 상장군께서 기다리십니다.”
좀 전까지는 오라비를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막상 3년 전, 생살을 찢어내듯 아프게 이별했던 정인을 보니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서 공비가 고개를 저었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았으면, 여윈 얼굴이라도 한 번 어루만졌으면, 이대로 시간이 딱 멈췄으면…… 그런 안타까움에 공비의 눈시울이 뜨끈하게 젖어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뭐하십니까? 왔으면 안으로 드시지 않고?”
무호가 곱지 않은 눈길로 공비를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호가 공비를 데려간 곳은 오찬이 마련된 대청이 아니라 그 곁에 있는 작은 접객실이었다. 무호는 이전에 향원궁에서 며칠 머물다 나간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전각의 구조를 대강은 알고 있었다. 공비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은 무호가 뒤따라 들어오려는 승주의 면전에서 방문을 거칠게 닫았다.
“왜 이러십니까?”
승주를 문짝으로 후려갈길 듯 거친 무호의 행동에 공비가 날을 바짝 세웠다.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뭐가 말입니까?”
“지금 도성에 마마에 관한 흉악한 말이 파다하게 퍼져 있는 것을 아십니까?”
3년 만에 만난 누이, 넓은 천하를 제집처럼 활개치고 다니다가 황명과 가족들의 성화 때문에 황궁 구석의 좁디좁은 별궁에 붙들린 듯 갇혀 사는 애처로운 누이에게 무호가 버럭 호통을 쳤다. 아침에 입궁할 때까지만 해도 근거 없는 헛말이니 누이에게는 눈도 한 번 사납게 뜨지 말자, 그저 앞일을 의논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누이를 안심이나 시켜주자고 생각했지만 막상 당사자를 보니 기가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서 저도 모르게 고성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대현성 근처에서는 호랑이도 움찔한다는 무호의 노성에 공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저하고 우화원 귀인이 정분이 났다는 그 정신 나간 소리 말입니까?”
“마마도 알고 계셨습니까?”
“비록 후미진 별궁에 붙들린 몸이지만 그곳에도 떠도는 소문을 실어 나르는 입과 귀는 있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대체 그간 궁 안에서 어찌하고 다니셨기에 저자에 그런 흉언이 떠도는 것입니까?”
성 안에 침입한 장족의 첩자를 문초할 때보다 더욱 거친 무호의 추궁에 공비의 눈길이 슬슬 사나워졌다.
“궁 안에서 어찌하고 다녔느냐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마마께서 어떤 빌미도 주지 않았는데 그런 말이 나도는 것입니까?”
“빌미라 함은 제가 정말 우화원 귀인과 정이라도 통했다는 뜻입니까?”
공비의 거침없는 말대꾸에 무호가 발끈해서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곧 치미는 화를 꾹 누르고 손을 내렸다.
“마마께서 아무런 말썽 없이 조신하게 지내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이 퍼졌단 말입니까? 허면 궁 안에 마마를 해치려는 자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마마께서 떠나오실 때에 아버지께서 제발 성질 죽이고 행동거지 조심하여 주변에 적을 만들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하셨거늘…….”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들이 저 따위를 해치고자 그런 소문을 지어 퍼뜨리는 수고를 하겠습니까? 폐하께서 우화원 귀인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칠궁의 궁문에 거미줄이 칠 지경이라 누군가가 그 사람을 멀찍이 치우고자 일을 꾸미면서 만만한 후궁을 하나 엮고자 하니, 친정도 한미하고 폐하께서 별반 관심도 두지 않는 제가 걸려든 것입니다.”
공비의 태평한 대답에 무호가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마마, 어찌 이다지도 한가하십니까? 이는 마마의 목숨과 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그러니 어쩌란 말입니까? 저자를 돌며 이는 사실이 아니고 누군가가 나를 음해하여 퍼뜨린 헛소문이라고 일일이 변명이라도 하고 다니란 말입니까? 저는 폐하의 허락 없이는 칠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공비의 말대꾸에 무호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굳어졌다. 자신의 일을 마치 아무 상관 없는 남 얘기 하듯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언중에 심히 신경 거슬리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마께서 저자에 직접 나갈 수는 없으시겠으나, 폐하를 뵙고 무고함과 억울함을 고해 올리셨어야 하질 않습니까? 그리 하셨습니까?”
“폐하께서 귀인을 아끼시니 그런 소문 따위에 휘둘려 어리석은 처분을 내리시기야 하겠습니까?”
공비의 심드렁한 대꾸에 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허면 마마는요?”
“무슨…….”
“폐하께서 귀인만 아끼고 마마는 사랑치 않으십니까? 방금 전에 폐하께서 마마께 별반 관심도 두지 않으신다 하셨는데, 혹…… 폐하께 홀대를 당하고 계십니까?”
무호의 물음에 공비가 울컥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수백 마디 원망의 말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찔러서 무호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저자에 떠도는 망극한 소문 중에 마마께서 폐하와 초야도 지내지 못하고 소박을 당하셨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
“마마!”
자신이 한 마디 지르면 열 마디 대꾸로 받아치던 공비가 숨만 쌕쌕 내쉴 뿐 대답을 못하자 무호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벌컥 언성을 높였다.
“허면 오라버니께서는 제가 황궁에 들어서 폐하께 사랑받으며 만고 편하게 잘 지낼 줄 아셨습니까?”
“마마…….”
“미인이 들판에 핀 꽃처럼 넘쳐나는 곳이 궁입니다. 또한 그 모든 여인들이 폐하의 환심을 사고 총애를 얻기 위해서 밤낮으로 단장을 하고 진심이건 아니건 입가에 미소가 떠날 때가 없는데, 성격도 용렬하고 미색도 없는 제가 무슨 수로 폐하께 사랑을 받겠습니까?”
“허면…… 정말로 지난 3년간 폐하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하고 홀로 지내셨단 말입니까?”
누이를 황궁에 떼어놓고 돌아선 그날 이후 그녀가 편안히 잘 지내기를, 누구보다도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건만…… 남편에게 버림받은 채 한창 곱고 아름다웠던 때를 홀로 서글프게 보낸 것을 안 무호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이제 와서 뭐가 걱정이십니까? 제 일은 걱정치 마시고 돌아가서 성문이나 잘 지키십시오.”
고향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도성에 자신을 데려와서 유모 하나 덜렁 붙여서 버리고 가버린 오라비가 새삼 원망스러워서 공비가 더욱 싸늘히 말을 받았다.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저는 궁궐 구석에 처박혀서 늙어 꼬부라져도 그만이고, 누명을 쓰고 목을 매도 그만입니다. 애초에 싫다는 사람을 끌고 와서 이런 형옥에 던져놓고서 이젠 폐하와 잠자리를 않으니 그것이 불만입니까?”
“이런 못된…….”
주먹을 쥐고 서서 부들부들 떨던 무호가 순간 이성을 잃고 공비의 뺨을 후려쳤다.
고개가 꺾일 정도로 호되게 따귀를 얻어맞은 공비가 놀라서 파르르 떨며 무호를 노려보았다. 공비의 얼굴이 한순간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것을 본 무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사과의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공비가 무호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러곤 바로 다음 순간, 정강이가 부러지는 듯 격심한 고통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무호의 가슴팍을 공비가 온몸을 날려 들이받았다.
공비의 역습과 이어진 기습에 무호가 속수무책으로 비틀거리다 공비를 끌어안은 채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접객실 문짝이 빡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고 둘은 그대로 향원궁의 복도를 뒹굴었다.
공비에게 명치를 받혀서 숨도 못 쉬고 컥컥거리던 무호가 정신이 없는 중에도 뭔가 쎄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 부장들과 내관들이 모여 있었으니 형님, 아씨, 떠들며 몰려들어야 맞는 상황인데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했던 것이다. 뒤로 자빠지면서 뒤통수를 바닥에 된통 박아서 통 뵈는 것이 없는 무호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무호를 타고 앉았던 공비가 얼른 옆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눈앞의 형체가 두 개 세 개로 겹치고 번져 보이는 눈을 손등으로 세게 비비고는 다시 앞을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복도의 상황을 깨달은 무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 한가운데엔 황제가 버티고 서 있었고 그 어깨 너머엔 우화원 귀인이, 그리고 그 뒤로는 휘명전과 우화원의 내관들 수십 명이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