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가을비
문밖에서 내관과 의관들이 분주히 다니며 일하는 소리에 무호가 눈을 떴다. 그러곤 오늘은 좀 움직일 만한지 알아보기 위해 팔다리를 움직여보고 고개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목은 그럭저럭 나은 것 같은데 어찌 몸에 통 힘이 들어가질 않는가? 게다가 누워 있는데도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가물가물하니 혹, 내가 정말 큰 병을 얻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무호가 한숨을 쉬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향원궁에서 자리보전을 하게 된 이후 편안한 밤을 보낸 적은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지난밤은 무호에게는 유독 길고 괴로웠다. 어제 오후에 향원궁에 온 공비가 자신 앞에서 꼬박 한 시진을 울다가 돌아간 일이 무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것이다. 그저 흐느끼기만 할 뿐 한 마디 푸념도 없었지만 공비의 눈물과 한숨에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둘이 붙어서 소꿉놀이하며 싹튼 정이니 철들면 잊겠거니, 서로의 처지를 알면 자연히 멀어질 줄 알았는데…… 둘의 마음이 그렇게 깊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떼어놓는 것인데, 어쩌다 승주에게 수진이의 글공부까지 맡기며 지척에 붙여놓았던고? 이제 와선 아무런 소용도 없는 후회를 거듭 하며 무호가 끝도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싶더니 화려한 꽃 창살의 장지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무호가 문틈으로 고개를 쏙 들이민 영재와 춘수를 발견하고는 대뜸 눈을 부라렸다. 영재와 춘수는 무호의 좌장과 우장으로 험한 전장에서 선봉에 서는 것을 마다한 적이 없으며, 주군의 명이라면 지옥불에라도 뛰어들 정도로 충성스러운 부하들이었다. 하지만 도성에 와서는 사신각의 호화로운 접대와 번화한 도시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무호가 옴짝 못하고 누워 있는 향원궁엔 코빼기도 들이밀지 않다가 이제야 주뼛거리며 나타난 것이었다.
“형님, 우리 왔소.”
“몸은 좀 어떠십니까?”
영재와 춘수가 서로를 툭툭 떠밀며 침상으로 다가왔다.
“이놈들!”
무호가 호통을 치며 아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서슬에 두 부장이 겁을 집어먹고 후다닥 뒷걸음질을 쳤다.
“고연 것들!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야 슬금슬금 기어 들어오는 것이냐? 네놈들이 이러고도 나의 의형제며 수족이란 말이냐?”
그렇지 않아도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처럼 심사가 어지럽던 무호가 영재와 춘수를 잡아먹을 듯 언성을 높였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포효하는 산중의 호랑이라서 두 부장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형님! 고정하십시오!”
“그간은 승주가 들어서 잘 보살펴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간병도 서툴고 황궁에서 어찌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닥쳐라! 그간 술 퍼마시고 도성 구경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형님!”
금방이라도 침상에서 뛰어 내려와 두 부장을 덮칠 듯 펄펄 뛰던 무호가 순간적으로 밀어닥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침상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에 놀란 영재와 춘수가 침상으로 달려와서 무호의 팔다리를 경황없이 주물렀다.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형님!”
“시끄럽다! 내 그간 너희 같은 놈들을 믿고 전장을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다!”
무호가 두 부장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싹 돌아누웠다.
“저희는 형님께서 하루 이틀이면 툭툭 털고 일어나실 줄 알고…….”
“승주에게 물어봐도 그만그만하시다고 하기에…… 이렇게 얼굴이 반쪽이 나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두 부장의 시끄러운 변명과 사죄에 무호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희 같은 촌것들이 언제 또 도성에 와서 사신각 같은 별천지에서 손님 대접을 받아보겠습니까? 게다가 도성의 번잡함이 대현성 저자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서 저희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앞으로는 매일 와서 병구완도 하고 말동무도 해드릴 것이니 이만 마음을 푸십시오.”
부장들의 거듭된 사죄에 무호가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승주는 어찌하고 있느냐?”
무호가 무뚝뚝한 어조로 승주의 안부를 물었다.
“어제 일찌감치 사신각에 돌아와서는 피곤하다며 침상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오늘 아침까지도 방에서 나오질 않았습니다.”
영재의 대답에 무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니냐?”
“그런 말은 없던데요?”
영재와 무호의 대화에 곁에 있던 춘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가 아팠나?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도 생각 없다고 거르고 오늘 아침 먹는 것도 못 본 것 같긴 한데…….”
춘수의 혼잣말에 무호가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영재의 옆통수를 한 대 갈겼다. 그 일격에 영재가 춘수까지 잡아끌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영재와 춘수도 만만치 않은 거한들이지만, 동북부 최고의 장사인 무호의 완력은 비록 부상 중이라도 보통 사람과는 급이 다른 것이었다.
“이런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
“혀, 형님…….”
무호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고 생각하고 방심하다가 곰발바닥에 차이듯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영재가 얼굴을 감싸 쥐고 놀란 눈으로 무호를 쳐다보았다.
“승주도 내게는 아우나 다름없거늘, 그놈이 밥도 마다하고 쓰러져 있는데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단 말이냐?”
“아프다는 말은 없던데요…….”
영재가 아린 뺨을 잡고는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 맹한 말대답에 이놈들은 전쟁터 아니면 정말 쓸 데도 없는 것들이구나 싶어서 무호가 이번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무호는 침상에 누워서 씩씩거리고 영재와 춘수는 방구석에 붙어 서서 그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에 향원궁 태감과 그 수하의 내관들이 침실로 들어왔다.
“점심을 가져왔습니다, 장군.”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네.”
무호가 손을 저으며 점심을 마다했다. 머리도 어지럽고 마음도 심란해서 배고픈 것도 모르겠고, 점심이라고 해봐야 멀건 죽 한 사발일 터, 그따위 것 먹자고 일어나 앉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장군, 이 또한 처방입니다. 끼니를 거르시면 회복이 더욱 더딜 것이니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일어나서 한술 뜨십시오.”
거듭 권하며 태감이 직접 무호를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죽 한 그릇과 간간한 짠지 한 종지가 담긴 소반을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
태감의 권유를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무호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밥알 건더기도 귀한 묽디묽은 미음을 휘휘 휘저었다. 목이며 허리 아픈 것은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왜 이리 어지럽고 기력이 없는고? 이젠 밥숟가락도 무겁게 느껴질 정도이니…… 수진이에게 걷어차인 것이 문제가 아니고 혹, 내가 다른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며칠째 황궁에 자리 펴고 누워 있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심하고 서글퍼서 무호가 숟가락을 그냥 내려놓았다.
“장군…….”
“지금은 못 먹을 것 같으니 치워주게. 점심 한 끼 거른다고 내 몸이 지금보다 더 못해지겠는가?”
무호의 명령에 태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반을 들어 내관에게 건넸다. 그러곤 들여온 밥상까지 입맛 없다며 물릴 정도로 기분이 저조한 무호를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두 부장들에게로 다가갔다.
“두 분 점심은 곁방에 차려놓았습니다. 비록 소찬이지만 식기 전에 드시지요.”
아침을 느지막이 먹고 나와서 아직도 배가 부르지만 차려놓은 밥상을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라, 두 부장이 무호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옆걸음질을 쳤다. 그러곤 슬쩍 열린 장지문 틈으로 상 위에 차려진 점심을 넘겨다보고는 우와…… 하고 조그맣게 탄성을 내뱉었다. 태감이 소찬이라고 이른 점심은 사신각의 그것보다 더 부장들의 입맛에 맞을 법한 진수성찬이었던 것이다.
“형님, 그럼 저희는 점심을 좀…….”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여 허기가 진 터라…….”
지난 며칠간 얼마나 잘 먹고 잘 놀았는지 얼굴에 피둥피둥 살이 오른 두 부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홀린 듯 곁방으로 건너갔다. 그 모습을 흘겨보던 무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야…… 이 돼지고기는 대체 어찌 삶았기에 이렇게 부드럽단 말이냐? 씹을 것도 없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구나.”
“이 오리고기는 또 어떻고? 껍데기가 과자처럼 바삭한 것이 어찌 이렇게까지 고소한지…… 사신각에서 먹어본 요리들도 다 맛은 있었지만 우리 입엔 좀 달고 밍밍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여기 있는 쇠고기, 돼지고기, 오리고기, 닭고기, 사슴 고기는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입에 딱 맞는구나.”
“모두가 우리가 매일같이 먹던 그 고기인데 어찌하여 이런 맛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지 모르겠구나. 고기라 하면 끓는 물에 푹 삶거나 장작불에 구워 소금이나 뿌려 먹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동안 우리가 헛살았다.”
얇은 비단 한 장을 바른 장지문 너머에서 끝도 없이 들려오는 수다에 무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잠이나 자려고 해도 영재와 춘수가 쉬지도 않고 떠들며 쩝쩝거리고, 한편으론 온갖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문틈으로 스며들어 후각을 자극하니 그것도 짜증이 나서 더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몹쓸 놈들! 저것들이 이제 보니 나를 간병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궁궐 밥을 얻어먹으려고 온 것이 아닌가? 나흘 만에 슬그머니 나타나서 잘못했다, 미안하다 싹싹 빌더니…… 내게는 물 한 대접 안 떠다 주고 저희들끼리 옆방에서 잔치를 벌여? 승주가 곁에서 얼쩡거릴 때엔 안쓰럽고 조마조마할 뿐 사람이 밉고 싫은 것은 아니었는데, 저놈들은 어찌 저리도 밉상일꼬?
“춘수야, 이 완자탕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내관으로 변복을 하고서라도 반드시 알아 가야겠다. 이런 맛을 모르면 몰랐지, 어찌 평생 한 번만 먹고 말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럴 거면 이 돼지고기 찜은 어떻게 만든 것인지도 좀 알아 오너라. 간간하고 향긋하니 잡냄새도 전혀 없고 육질은 또 어찌 이렇게 야들야들한지…….”
영재와 춘수가 식도락 삼매경에 빠져서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침실 쪽 장지문이 덜컹 흔들렸다. 어디서 바람이 부나, 문이 왜 저렇게 들썩이나 싶어서 두 부장이 잠시 놀리던 입과 손을 멈췄다. 그 순간, 푸른 비단을 바른 장지문이 빡 소리를 내며 앞으로 떨어져 나갔다.
“형님…….”
문을 박차고 들어선 무호의 모습에 두 부장이 혼비백산을 해서 후다닥 일어섰다. 머리는 산발인데다 두 눈은 퀭하니 쑥 들어간 것이 안광만으로도 사람의 폐부를 찌를 듯했고, 무엇보다도 그 표정이 음습한 것이 마치 저승사자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호가 비틀거리며 다가서자 두 부장이 속절없이 뒤로 밀리다 벽에 바짝 붙어 섰다. 무호는 타고난 장사인데다 열 받으면 말도 집어던질 정도로 무지막지한 성격이라 잘못 걸리면 아무리 동기간 같은 부장들이라도 심히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형님, 왜 이러십니까?”
“저희가 뭐, 뭘 잘못했습니까?”
“승주가 아픈 데가 있는지는 돌아가면 바로 물어보겠습니다.”
“앞으론 그 녀석에게 신경도 더 쓰고 잘하겠습니다.”
두 부장의 사죄와 변명은 들은 척도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던 무호가 방금 전까지 영재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음식이 아직 반 넘게 남아 있는 탁자를 멍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무호에게는 이미 춘수도, 영재도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호가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셨다. 그렇게 앞에 놓인 음식 냄새를 음미한 무호가 젓가락을 집어 좀 전에 영재가 감탄의 감탄을 거듭하던 돼지고기를 꾹 찍었다.
시영이 향원궁의 궁문을 넘어선 것은 미시가 거의 지난 시각이었다. 시영은 오전에 시강원에 출강을 나갔다가 느지막이 입궁을 해서 승상들과 함께 오찬을 나누던 중, 윤 내관으로부터 무호가 승주의 부탁으로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마시던 차도 그냥 내려놓고 향원궁으로 건너온 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향원궁이 작은 전각이 아닌데 어찌 이리 궁 안이 허하고 휑한고? 돌아다니는 내관 하나 보이질 않고, 전각의 침전에 환자가 누워 있는데 의관도 없고, 궁 주변을 지키는 위병도 없고…… 의아하게 여기며 향원궁 복도를 돌아서던 시영이 걸음을 멈췄다. 향원궁 침전 문밖에 내관과 의관, 위병까지 몰려와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오리탕이 두 그릇째인가? 세 그릇째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고, 저 완자탕은 확실히 네 그릇째일세. 돼지고기 뱃살 찜은 두 접시째고…… 쇠고기 안심 숯불 화로구이는 좀 전에 들어간 그것이 다섯 접시째일세.”
“장사는 장사일세. 병중에 어찌 저렇게 음식을 끝도 없이 먹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깻잎 한 장 섞이지 않은 육류로만…….”
“그러게 말일세. 고기 좋아하기로는 우리 폐하도 만만치 않으시지만, 무 장군에 비하면 폐하께서는 정말 소식하는 편이셨구먼.”
“그리 먹고도 빵 조각으로 접시까지 싹싹 닦아 먹는 것을 좀 보게. 정말, 앉은자리에서 소도 한 마리 잡아먹겠네.”
자기네들끼리 소곤거리느라 곁에 시영이 온 것도 모르는 내관들 사이로 시영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뭘 그리 들여다보고 있는가?”
시영의 물음에 향원궁과 부속 전각의 살림살이 관리와 청소 상태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우 내관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무호 장군 밥 먹는 거 구경하네.”
“사람 밥 먹는 것이 무슨 구경거리가 되는가?”
“늦게 왔으면 일단 보고 얘기하게. 구경거리가 되는지, 아니 되는지…….”
퉁명스레 대꾸하며 힐끔 곁눈질을 하던 우 내관이 그제야 옆에 선 자가 상서령임을 깨닫고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대, 대감…….”
침실 문 앞에 붙어 서 있던 내관과 의관, 위병들이 주르륵 벽에 붙어 서서 시영에게 깊이 허리를 굽혔다.
“상서령 대감 오셨습니까?”
“자네들은 이곳에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소인들은 무호 장군께서 다소나마 기력을 차리셨는지 일어나서 점심을 드신다기에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각자의 소임도 잊고 달려와서 장군이 밥 먹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단 말인가?”
시영의 추궁에 내관들이 달리 변명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관과 의관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황궁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위병까지 근무처를 이탈해서 남의 침실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 위사령에게 일러 위병들의 기강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영이 우 내관에게 물었다.
“태감은 어딜 갔는가?”
“안 내관은 쇠고기 숯불 화로구이 두 접시와 완자탕 한 그릇, 통오리 구이 한 마리 이후로 더는 음식이 들어오지 않아서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러 외궁 조리각에 갔습니다.”
“그렇게 사소한 일은 수하 내관에게 시켜도 될 것을…….”
“송구하옵니다.”
무호가 홀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열흘 굶은 호랑이처럼 음식을 닥치는 대로 입안에 밀어 넣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공급이 끊긴 것은 절대로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궁내청에 남은 육류 식재료는 황제의 저녁 수라 거리뿐이라는 외궁 조리각의 기별을 받은 향원궁 태감 안 내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릴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것이 자신의 일인 듯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무호의 식탁에 빈 접시만 남기 전에 생선찜이나 하다못해 두부탕이라도 만들어 올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태감이 들거든 나 좀 보자 하고, 자네들은 이만 자리로 돌아가 할 일들 하게.”
“예, 대감. 분부 받들겠습니다.”
내관들이 시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슬슬 옆걸음을 쳐서 얼른 문 앞에서 사라졌다. 할 일도 많은 내관들이 무슨 일만 났다 하면 정신 놓고 몰려다니는 것이 마땅찮아서 언짢았던 마음을 다스리느라 시영이 짧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어쨌든…… 장군이 기운을 차린 듯싶으니 큰 다행이구먼.”
“이를 말씀이옵니까? 안에다 아뢸까요?”
우 내관이 시영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럴 것 없네. 들어가서 직접 인사를 할 것이니 문이나 열게.”
침실 안으로 한 발짝 들여놓던 시영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며칠간이나 누워 있던 무호가 기운을 차려 음식을 먹는 중이란 얘기는 문밖에서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평범한 식사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장정 서너 명이 둘러앉을 만한 크기의 탁자 위엔 음식 접시가 빈틈없이 놓여 있었다. 그중 빈 접시 몇 개는 층층이 쌓여 있었는데, 대강 헤아려도 접시의 개수가 스물은 넘어 보였다. 그 많은 접시 중에서 음식이 남은 것은 불과 서너 개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빠른 속도로 비어가는 중이었다.
팔뚝만 한 오리 다리를 들고 거침없이 뜯어 먹던 무호가 방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려 음습한 눈길로 시영을 노려보았다.
“뉘시오?”
내관이 음식을 더 들여오나 싶어서 고개를 돌렸던 무호가 당상관의 복색을 보고는 실망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굶주린 야수의 눈빛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이 많은 음식을 다 먹고도 아직도 허기를 면치 못하다니…… 대현성이 항시 양곡이 부족하다며 동북쪽 변방의 성읍 중 가장 많은 군량과 구휼미를 받아 가는 게 혹시 이자 때문이 아닌가 하는 허튼 생각을 하며 시영이 말을 더듬었다. 그때, 뒤따라 들어온 우 내관이 앞으로 나서서 시영의 신분을 고했다.
“이분은 상서령의 직을 맡고 계신 정안군 대감이십니다, 장군.”
사흘을 쫄쫄 굶다가 고기 맛을 본 무호의 귓전에 상서령이니, 정안군이니 하는 호칭이 아무 의미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곁에 서 있던 부장들은, 상서령이란 승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높은 벼슬이고 정안군은 황제의 사촌 형이란 사실을 깨닫고 얼른 허리를 굽혔다.
“대감마님!”
“상서령 대감께서 어찌 이곳에…….”
“무 장군이 나를 찾는다고 하기에…….”
영재가 대령한 의자에 앉으며 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장기는 대강 속였으니 오리 한 마리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무호가 시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말입니까?”
살짝 나갔던 정신이 뒤늦게 돌아와 그제야 상서령이 어떤 직책이며 정안군은 누구인지가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른 무호가 오리 다리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자기가 언제 정안군을 찾았던가 생각하며 지난 며칠간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비슷한 헛소리를 지껄인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아서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가 말을 잘못 전한 것 같습니다. 저는 대감을 뵙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내게 장군의 말을 전한 자는 대전 상선인 윤 내관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은 사람이지만 공연히 없는 말을 만들어내거나 전갈을 잘못 전할 사람은 아니지요.”
“…….”
무호가 등을 의자에 붙이고 불안한 눈길로 시영을 응시했다. 시영의 입에서 윤 내관 얘기가 나오자 얼핏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댁에서 일하는 하인 중에 한승주라는 자가 있지 않습니까?”
승상에 버금가는 높은 관직에, 고위 종친으로 황제와 함께 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유력자의 입에서 느닷없이 승주의 이름이 나오자 영재와 춘수가 흠칫 놀라서 숨을 몰아쉬었다. 무호의 부장들은 모두 다 십수 년째 의형제로 지내오며 영주 집안의 일을 자기 집 일보다 더 소상히 아는 처지였다. 게다가 그들은 3년 전, 후비로 들라는 어명을 받은 공비가 죽었으면 죽었지 황궁엔 들지 못하겠다며 극한 반발 끝에 결국 한밤에 짐 보따리 꾸려서 장성을 넘어 도망친 것을 꼬박 사흘의 추적 끝에 잡아서 데려온 당사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황제의 최측근이 승주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 집 하인 중에 그런 자가 있기는 있습니다만…….”
“승주와 서신을 주고받은 상서부의 이시영을 찾으셨다면서요? 제가 그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영이 상선으로부터 전갈을 받았다고 했을 때부터 예감이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간 승주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자가 황제의 사촌 형일까 싶었던 무호가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승주와 서신을 주고받던 자는 상서부의 시랑이라고 했는데…….”
“직함을 상서령이라 적어 보내면 나를 너무 어려워하여 교류를 거절할까 걱정이 되어서 조금 낮춰서 적었습니다. 나쁜 마음을 품고 신분을 속인 것은 아니니 이해해주십시오.”
시영의 태도는 초야에서 글이나 읽는 선비처럼 솔직하고 담백할 뿐, 어디를 봐도 자신의 지위와 지체를 뽐내는 거만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무호는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서 좀 전에 먹은 스무 접시의 각종 요리가 몽땅 명치에 얹힌 느낌이었다.
“정안군 대감처럼 지체가 높으신 분이 어찌 남의 집 하인과 교류를 하셨단 말입니까? 혹시라도 세간에 알려지면 대감의 체면이 크게 깎일 일이며, 승주 또한 주제넘었다 하여 비난을 살 일이 아닙니까?”
무호가 승주와 서신을 주고받던 상서부 시랑을 찾는다는 전언에 혹 자신에게 전하는 승주의 편지라도 한 장 가지고 왔나 싶어 한달음에 향원궁까지 달려온 시영이 생각지도 않았던 책망에 당황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내가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학자로서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가진 인재에게 반해서 교류를 청한 일이 어찌 체면이 깎이는 일이며 승주가 비난을 받을 일이란 말입니까? 사람의 재능과 인품은 출신과 무관할 때가 적지 않으니, 그런 이치를 아는 자라면 나와 승주의 교류를 비웃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안군께서는 지체가 하늘같은 분이시니 누가 감히 대감을 비웃고 비난하겠습니까? 하지만 승주처럼 신분이 천한 자에게는 세상의 인심이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
“송구합니다. 그간 서신을 주고받던 자가 상서부 시랑이라고 해도 혹 천한 종놈이 지체 높으신 분과 편지 왕래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던 참이었는데, 상서령 대감께서 승주와 이 친구 저 친구 하며 지내셨다니…… 놀라서 헛말이 나왔습니다.”
무호가 꽉 막힌 가슴을 주먹으로 퍽 치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자신이 신분을 밝히면 무호가 다소 놀랄 것은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투덜거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시영이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무호의 태도에 정말 놀란 것은 영재와 춘수였다.
시영은 그냥 높은 벼슬아치, 황제의 지친이 아니었다. 시영은 황제가 불우하던 시절부터 그 곁을 지킨 충신이며 높은 학식과 인덕으로 백성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자였다. 또한 황제가 친형님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와 의논하여 결정을 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자를 앞에 두고서 신분을 속이고 승주와 편지질 한 것을 나무라며 투덜거리니 우리 형님이 그때 쓰러지며 머리를 심히 다쳤구나 싶은 생각에 두 부장은 눈앞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저 승주의 필체와 문장이 아름다워서 흠모하는 마음에…….”
“그래도 대감의 신분은 분명히 밝히셨어야 하질 않습니까? 이 나라는 신분의 귀천이 분명한 곳이니, 그 아이가 들뜬 마음에 무례한 말이라도 적어 보냈다면 종친에 대한 결례로 언제든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고 그때 가서는 대감의 신분을 몰랐다는 사실이 변명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느닷없이 무호에게 야단을 맞는 것이 심히 불쾌하고 언짢기는 했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라서 시영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에 두 부장이 손끝을 덜덜 떨며 무호를 가로막고 나섰다.
“송구합니다, 대감마님. 저희 형님, 아니…… 장군께서 요즘 심신이 두루 불편하셔서…….”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편지 몇 번 주고받은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리 트집이신지…… 승주가 그 편지를 벽에 붙여 공고를 하겠습니까? 나리께서 주변 분들과 돌려 보시겠습니까? 당사자들만 보고 넣어두는 것이 편지가 아닙니까?”
“그것은 그렇네만…….”
사실은 나중에라도 서간집을 하나 만들 생각으로 승주의 편지를 곱게 모아두고 있었던 시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도성에서 편지가 한 장씩 당도할 때마다 승주가 얼마나 반기며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나리.”
“그렇습니다. 대현성은 궁벽한 촌구석이라, 지체 있는 집안 자손이거나 벼슬아치가 아니면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무식한 놈들만 버글거리니…… 글씨 잘 쓰는 것은 재주로 쳐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던 차, 먼 곳에서 일면식도 없는 분이 이런저런 칭찬과 함께 서평도 보내시고 선물도 보내시니, 최근 몇 년간 승주에게는 도성에서 온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을 것입니다.”
승주가 자신이 보낸 편지를 기다리며 즐겁게 받았다는 부장들의 말에 시영의 안색이 다시 밝아졌다.
“그런가?”
“그렇고말고요. 또한 대감마님처럼 지체 높은 분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제놈 처지에 광영이면 광영이지, 해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저희 형님께서 아파서 헛소리를 하고 계신 것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아파서 헛소리한다는 영재의 막말에 무호가 발끈했다. 하지만 춘수가 얼른 오리 다리를 집어서 무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혹, 승주가 내게 보낸 서신이 있습니까? 아니면 전언이라도…….”
시영의 기대에 부푼 물음에 무호가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아…….”
편지도, 서화도 없다는 무호의 대답에 시영이 실망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난번에 온 전령도 달랑 장계만 들고 왔는데 이번에 온 사절도 빈손이니…… 다음 편지는 그럼 한 달 후에나 오겠구나. 요즘 그 사람이 일이 바쁜가, 아니면 몸이 아픈가? 어찌 이리 소식이 뜸한고?
“승주는 잘 있습니까?”
“그냥저냥 있습니다.”
무호의 무뚝뚝한 대꾸에 영재와 춘수가 대경실색을 해서 그 어깨와 등을 쥐어박았다. 그러곤 아직 식사가 덜 끝난 무호를 일으켜 침상으로 몰고 가서는 이불 속에 묻어버렸다.
명문 귀족이 미천한 하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것은 월국과 같이 큰 나라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예로부터 뛰어난 예인들이 귀족들에게서 지원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수많은 명작을 세상에 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교류라기보다는 형편을 살펴주고 작품을 얻어내는 거래에 가까웠다.
귀족과 평민의 교류도 드문 판에 황족과 천민이 편지 왕래를 하며 친구로 지내는 것은 신분 질서가 분명한 월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간에 알려진다면 저자의 백성들도 수군거리며 뒷말을 할 일이니, 비록 변방의 무장이지만 명문가의 후계자인 무호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욱도 마땅치 않게 여겨서 주의를 준 일이니 무호가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시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프신데 불쑥 찾아와 실례가 많았습니다, 장군. 그럼 몸조리 잘하시고, 속히 쾌차하십시오.”
무호가 인사에 답을 하려고 들썩이는 것을 춘수가 이불을 덮어씌우고 온몸으로 덮쳐눌렀다. 그리고 인사는 영재가 대신 받아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지체 높으신 대감께서 이리 찾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감께서도 살펴 가십시오.”
“장군이 몸이 아파 자네들이 고생을 하는구먼. 그럼 나는 이만…….”
“승주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 장군께서 말은 저렇게 하셔도 승주를 동생처럼 여기며 잘 보살펴주십니다.”
막 나가려는 시영의 곁을 따라 붙으며 영재가 말을 붙였다. 무호의 태도가 거칠고 무례하니 시영이 심히 마음이 상했거나, 승주를 구박한다고 오해를 할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런가?”
“그럼요. 지난 20년간 대현성의 공문서를 작성하던 태사부 영감이 노환으로 직에서 물러난 후, 영주님께 청을 올려 승주에게 문서와 장계 작성을 맡기신 분이 저희 형님이십니다. 그때에도 성 안의 벼슬아치와 유생들의 반대가 빗발쳤었는데, 형님께서 능력도 쥐뿔 없는 것들이 말만 많다며 잡아먹을 듯 호통을 쳐서 다 물리치시고 승주를 지켜주셨습니다.”
“아…… 그러셨는가?”
영재의 말에 좀 전에 불쾌하고 언짢았던 기분이 다소 풀린 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배려가 있었기에 그 친구가 그 같은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무 장군 같은 주인을 모시는 것도 승주의 복일세.”
“복일 때도 있고, 복장이 터질 때도 있고…… 그렇지요, 뭐…….”
한숨을 푹 내쉬며 영재가 얼른 장지문을 밀어 열었다.
향원궁의 궁문 앞까지 시영을 배웅한 영재가 한 번 더 허리를 깊이 굽혔다.
“살펴 가십시오, 나리. 형님께서 몸을 좀 추스르고 제정신이 돌아오면 나리를 뵙고 오늘의 무례를 사죄드릴 것입니다.”
“사죄라니, 무 장군의 말투가 거칠어서 그렇지 틀린 말을 한 것은 없네. 교류를 청할 때엔 신분을 정확히 밝혀야 하는 것인데 그러지 않았으니 내게도 잘못이 있네.”
“멀고 먼 변방에까지 정안군께서 학식이 뛰어나시고 덕이 있으시다 칭송이 자자하더니, 오늘 대감을 직접 뵈오니 과연 헛말이 아닌 것을 알겠습니다.”
덩치는 산만 한 장수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연신 굽실거리는 것이 딱해서 시영이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만 들어가보게. 내 승주에게 보내려고 준비해둔 벼루가 있는데, 하인 편에 보낼 것이니 돌아가면 그거나 승주에게 전해주게.”
“그거야…….”
“한동안 소식이 뜸해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는데,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별일 없다는 말을 들으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구먼. 황성과 대현성이 비록 멀지만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직접 만나 술 한 잔 기울일 날이 오겠지.”
“…….”
영재가 뭔가 말을 꺼낼 듯 머뭇거리자 시영이 돌아서려던 발길을 멈추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잠시 더 끙끙거리던 영재가 엄청난 기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대폭 낮췄다.
“대감마님, 승주는 지금 황성에 와 있습니다.”
“응?”
뜻밖의 소식에 시영이 뛸 듯이 놀라서 영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영재가 침전 쪽을 한 번 힐끔거리고는 말소리를 더욱 낮췄다.
“승주는 저희들과 함께 와서…… 지금 사신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구름이 많고 바람이 촉촉하다 싶더니 시각이 오후로 접어들 즈음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만추로 접어드는 계절이니 이 비가 지나가고 나면 날씨가 한층 더 추워지겠구나 생각하며 허연이 책 보던 것도 잊고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낙수를 쳐다보았다.
“마마, 책은 좀 쉬었다 보시고 차 한 잔 드십시오.”
고 내관이 책상 위에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녹차와 함께 들여온 것이 국화 모양으로 무늬를 찍은 약과라 허연이 피식 웃었다.
“대전 수라청에서 방금 만들어 보낸 과자입니다. 맛을 보시지요.”
“마침 속이 좀 허전하던 참이었는데, 고맙네.”
그렇게 말하며 허연이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창 밖을 내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이 비가 지나가면 가을은 더 깊어지고 마당에 가득한 국화도 점차 시들겠거니…… 그런 생각을 했네.”
허연의 대답에 고 내관도 목을 빼고는 마당에 가득 깔린 국화 화분을 넘겨다보았다.
“하긴, 폐하의 생신이 보름 남짓 남았으니 그럴 때가 되긴 했습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지 않은가? 어느새 가을도 끝 무렵이니…….”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국화라서 시들어가는 것이 더욱 안타까우신가 봅니다.”
“허허…….”
불시에 고 내관에게 허를 찔린 허연이 슬쩍 눈을 흘겼다.
“이젠 자네까지 나를 놀리는가?”
“놀리다니요? 요즘 들어 두 분 사이가 더욱 각별하시니 좋아서 그러지요.”
고 내관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책상 옆에 수북이 쌓인 장계와 허연이 읽던 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난 며칠간 잠시 쉬지도 못하고 장계만 보시더니 이젠 서책까지 구해서 보십니까?”
“동북쪽 변방의 정세가 다급하니 뭐라도 해야지. 어찌 폐하의 어깨에만 그 큰 짐을 지워드리겠는가?”
“환궁하실 때엔 점심만 드시고 바로 나가실 것처럼 하시더니…… 꼼짝없이 붙들리셨습니다.”
고 내관의 말에 허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곤 서재 선반에서 찻잔 하나를 더 가져와서 고 내관에게도 차 한 잔을 따라 건넸다.
“한 번 들어오니 다시 나가기가 쉽지 않네그려.”
“애초에 폐하가 보기 싫어 나가신 것도 아니고, 폐하께서도 저녁때면 이리로 후다닥 달려오셔서 마마가 계신지부터 확인을 하시니 어찌 다시 출궁을 하시겠습니까? 당분간은 이대로 지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면 거처를 우화원으로 옮겨야겠구먼.”
청량전은 휘명전의 부속 전각으로 황명 없이는 후궁들이 함부로 들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상궁과 궁녀들은 전각 앞길을 무시로 지나다니다 보니 허연이 오래 머물기에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래야겠지만, 며칠 더 청량전에서 지내시지요. 아담하고 조용하고…… 무엇보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국화가 아깝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국화가 다 시들도록 여기서 지내겠는가?”
“비가 그칠 때까지만 머무십시오. 폐하께서도 바로 담장 너머에 마마를 두고 정무를 보시는 것이 즐거우신 듯 보였습니다.”
허연이 겸연쩍게 웃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서 가을비에 촉촉하게 젖어가는 국화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궁문 근처에서 누군가가 서성이는 것을 깨닫고는 일어나 창 쪽으로 다가갔다.
“어찌 그러십니까?”
“문 밖에서 누가 서성이는 것 같네.”
“아니, 또요?”
고 내관이 덩달아 창 밖을 넘겨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허연이 청량전에 머물면서부터 일없이 전각 근처를 얼쩡거리다 상궁에게 덜미를 잡혀 끌려간 궁녀가 대여섯 명에 이르니 또 어느 철없는 궁녀가 허연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볼까 싶어 주변을 서성이는 것이려니 싶었던 것이다.
“계십시오. 제가 나가서 타일러 보내겠습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종종종 달려가는 고 내관을 보니 아무래도 내일은 우화원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서 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가을비에 고즈넉이 젖어가는 만추의 정원과 그 너머로 보이는 휘명전의 거대한 지붕을 쳐다보았다.
허연 역시 욱을 두고 굳이 궐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서둘러 우화원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이른 단풍에 활짝 핀 국화, 거기에 제법 세찬 비까지 더해진 아름답고도 쓸쓸한 가을날의 정경이 감성을 자극해서, 지척에 있는 욱이 울컥 그리웠고 이 길로 휘명전으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였다.
강아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 치고, 나는 이 나이를 먹고도 무슨 주책인고? 처첩을 일곱이나 거느린 황제를 온통 차지하고도 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안달이 나다니…… 그런 생각에 혼자 씁쓸히 웃으며 찻잔을 마저 비우던 허연이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녀를 쫓아 보내겠다며 달려 나간 고 내관이 나갈 때와 비슷한 속도로 뒷걸음질을 쳐서 마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이 무엇에 놀라서 저리 쫓기듯 들어오나 싶어 밖을 내다보던 허연이 누군가가 궁문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궁문을 넘어 마당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여인은 어느 전각의 철없는 궁녀가 아니라 공비였던 것이다.
“귀, 귀인마마…… 공비마마께서…….”
문밖에서 들려온 고 내관의 다급한 외침에 허연이 혀를 끌끌 찼다. 공비의 방문이 갑작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뭘 저렇게까지 호들갑인가 싶었던 것이다.
“안으로 뫼시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걸음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고 내관의 수선에 공비가 민망해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허연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공비가 안으로 쑥 들어섰다. 그 순간, 허연도 부지불식간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처음엔 조용한 가을비로 시작했으나 점차 빗방울이 굵어져 좀 전부터는 장대비가 된 빗속을 가마도, 우산도 없이 지나온 공비는 머리끝까지 물에 푹 잠겼다가 나온 행색이었다. 가채도 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만 틀어 올린 머리엔 은비녀 하나 꽂은 것이 없었고, 항상 입고 다니는 옥색 비단 저고리는 빗물에 젖어 짙은 초록색이 되어 있었다.
“마마…….”
온몸에서 물을 툭툭 뿌리며 들어온 공비의 행색에 놀란 허연이 헛기침을 했다.
“홀로 오셨습니까? 어찌 이 우중에 우산도 들지 않으시고…….”
“불쑥 찾아와 송구합니다. 바쁘신 중에 제가 방해가 되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바쁜 일은 무슨…….”
허연이 공비에게 의자를 권했다. 하지만 곧 공비의 젖은 옷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정도인 것을 깨닫고 고 내관을 돌아보았다.
“자네, 마마를 뫼시고 침실에 가서 옷을 다시 입혀드리게. 의복이 온통 다 젖었으니 이리 오래 계시면 고뿔에 걸리시겠네.”
“예?”
멍하니 서 있던 고 내관이 혼이 나간 듯 놀란 표정으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물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는 공비의 상태를 깨닫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잠시 옆방으로 드시지요, 마마. 소인이 마른 옷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고 내관의 권유에 공비가 고개를 저었다.
“곧 갈 것이니 그렇게까지 할 것 없네.”
“오늘처럼 쌀쌀한 날에 비까지 맞으셨으니 이렇게 계시면 고뿔에 걸리십니다. 마침 입으실 만한 누비 외투가 있으니 그것으로 갈아입으시고 젖은 머리카락도 말리십시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듭 권하며 고 내관이 공비를 침실 쪽으로 몰았다.
공비가 침실로 들어간 후,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달래던 허연이 화로에 찻물을 얹었다. 황궁에 든 이후, 우화원의 방문객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딱 정해져 있었다. 시영이 이따금 찾아와 점심을 같이 먹고 바둑을 두거나 서책 이야기를 하다 돌아가곤 했고, 두 공주와 진관우가 한 달이면 한두 번씩 우화원에 들어서 외롭게 지내는 허연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 외에 왕쾌와 부장들이 황궁에 들 때면 우화원에 몰려와 술판을 벌이곤 했지만, 지난 1년 사이 딱 두 번 있었던 일이었다.
후궁의 방문이라…… 환궁한 이후 허연은 매달 초하루에 태화궁에 인사를 갈 때에만 우화원을 나왔을 뿐, 칩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궁이든 궁녀든, 여인들이 배를 타고 우화원을 드나드는 것은 딱히 황명이 아니라도 궁인들이 알아서 금기시하는 일이었기에 공비의 방문은 놀랍고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는 공비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는데 이런 돌출 행동이 그 귀에 들어가면 더욱 밉게 보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고, 한편으론 어린 나이에 얼마나 심사가 괴롭고 힘들었으면 저렇게 온몸이 다 젖도록 비를 맞고 다니다가 자신을 찾아올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답답해서 한숨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허연이 다 끓은 찻물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기를 꺼내 탁자 위에 차리고 있을 때에 공비가 침실에서 나왔다. 젖은 옷 대신 허연이 지난가을에 자주 입었던 흑자색 도포를 걸치고, 젖은 머리는 풀어서 수건으로 대강 털면서 서재로 들어서는 공비의 모습은 황제의 후궁이라기보다는 아직 덜 자라서 반항기가 뚝뚝 떨어지는 고집 센 사내아이 같아 보였다.
“앉으십시오, 마마.”
“고맙습니다.”
공비가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앞에 놓인 찻잔과 찻잎을 망에 덜어 담는 허연의 손길을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몸이 떨리거나 머리가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먹었습니다.”
허연이 며칠 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초췌하고 지쳐 보이는 공비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제대로 먹고 자는 사람의 안색이 아니었다.
“고 내관.”
“예, 마마.”
“아까 내왔던 과자가 남았으면 마저 내오게.”
“예?”
공비가 무슨 일로 허연을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건만 간단히 하고 후딱 내보냈으면 싶던 고 내관이 허연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공비께서 오셨는데 차 한 잔뿐이니 대접이 너무 소홀하지 않은가?”
“아, 예…….”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공비를 따끔히 타일러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고 전각에 들여서 젖은 옷 갈아입히고 이렇게 마주 앉은 것만 해도 트집거리가 이미 산더미인데, 뭘 어쩌려고 저러시나 걱정을 하며 고 내관이 터덜터덜 서재를 나섰다.
고 내관이 방에서 나가자 그때 비로소 공비가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대신 뜨거운 찻잔을 꼭 쥐고 가을비와 찬바람에 싸늘하게 식은 손을 녹였다.
“산책을 하셨습니까?”
“처소에 틀어박혀 있기 답답해서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길이나 자주 가보시는 곳이 있으십니까?”
“어차피 좁아터진 궁 안인데 특별히 좋아서 자주 가는 곳이 있겠습니까? 하루 종일 다니다 보면 한 번 갔던 곳을 두 번, 세 번 다시 가게 됩니다.”
공비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허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처음 궁에 왔을 때 마음이 답답해서 우화원 이곳저곳을 일없이 돌아다니곤 했었습니다. 아마 마마의 지금 심정이 그때의 저와 비슷한가 봅니다.”
허연의 얘기에 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인께서는 폐하가 그리워 자청하여 궁에 드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지난가을의 일이고…… 제가 처음 궁에 든 것은 7년 전입니다.”
7년이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구나 싶어서 허연이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포로로 끌려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패전지장으로 죽을 자리를 찾아 만 리 길을 왔고, 폐하께서는 사방이 적인 황궁에서 어느 바람에 꺼질지 모를 등불처럼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계셨습니다. 본래는 연주국 정벌의 승장인 왕쾌 장군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죽을 목숨이었는데, 폐하께서 무슨 마음이 드셨는지 저를 살려 우화원에서 지내라고 명을 내리셨고…… 그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또한 들어서 알고는 있습니다.”
“그 당시 우화원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폐궁이었습니다. 마당엔 허리까지 솟은 잡풀과 잡목만 무성하고, 전각은 반이나 허물어져 제 한 몸 눕힐 곳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때 우화원의 정경이 제 마음과 같아서 처음 며칠은 음식을 넘기는 것은 고사하고, 잠을 잘 수도 없고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
허연의 말투는 시종 아무 상관 없는 남의 얘기를 전하듯 조용하고 담담했다. 하지만 진실과 진심이란 돌처럼 굳은 마음도 흔드는 것이기에 그 짧은 몇 마디 말에 공비의 코끝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잘 지내시니, 귀인께서는 복이 많으십니다.”
“살다 보면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되기도 합니다. 공비마마, 비록 폐하의 후비가 되어 입궁한 것은 마마의 뜻이 아니었지만 폐하께서는 공명하고 어진 분이십니다. 마마께서는 고향에 그리운 사람들을 다 두고 홀로 외롭게 오셨으나 부부의 인연 또한 보통 인연이 아니질 않습니까? 이제라도 폐하와 잘 지내시면서 정을 붙이시고 슬하에 황손을 두시면, 저의 복을 마마의 복에 비하겠습니까?”
허연의 다정한 위로와 설득에도 공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번 생은 그냥 날렸습니다.”
“마마…….”
공비가 여태 쥐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가 공연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으셨을 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십시오.”
황궁에 든 지 3년 만에 들어보는 다정한 위로에 공비의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곧 표정을 고치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만추라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에 등이 시릴 정도인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오늘따라 고향 생각이 간절하지 무엇입니까? 며칠째 산에라도 깔린 듯 마음은 무겁기만 하고, 그 울적함을 달랠 길이 없어서 결례인 줄 알면서도 찾아뵈었습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어서 오신 게 아닙니까?”
허연의 물음에 공비가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불청객을 박대치 않으시고 친절히 맞아 위로해주시니…… 인사를 어찌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마, 저는 곧 우화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차 한 잔 앞에 두고 마주 앉기가 더욱 어려울 터…… 무슨 일이든 들어드리고 제가 도움을 드릴 일이 있다면 도와드릴 것이니 말씀을 해보십시오.”
곧 일어날 것처럼 들썩이던 공비가 허연의 다정한 권유에 마음이 누그러져서 아직 열기가 남은 찻잔을 다시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제가 귀인께 무슨 용무며 부탁이 있겠습니까? 그저 귀인께서도 고향에서 멀리 떠나오셨으니 제가 느끼는 그리움이라든지 외로운 마음을 이해해주실 것 같아서 온 것입니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던 공비가 탁자 가장자리에 밀어놓은 장계와 서책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곤 서책의 겉표지에 쓰인 제목이 누구의 글씨인지 한눈에 알아보고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토해냈다.
비록 거친 변방의 소읍이긴 해도 영주의 딸인 공비가 과년하도록 집안의 노비인 승주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집안 가풍이 유별나게 개방적이거나 그 지방 풍기가 개판이라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대현성의 무 씨 가문은 수 대째 변방의 안정을 책임지고 있는 무인 가문답게 사소한 말썽도 군율로 다스릴 만큼 엄격함과 강직함으로 숨이 막히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공비가 승주와 하루에 한 시진씩 꼬박꼬박 만나고 이따금 사냥도 같이 아니며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승주가 공비의 글 선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현성의 무 씨 집안은 대대로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한 장사를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다. 본시 산골에서 밭이나 일궈먹던 그 집안이 변란이 잦은 변방에서 공을 세우며 뼈대 있는 무인의 가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탕은 좌중을 압도하는 그 힘과 뛰어난 무공 덕분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명성이 높아지고, 급기야는 외적에게 살해당한 영주를 대신해 무영준이 대현성을 다스리게 되면서부터 그에게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과 자식들의 문재가 너무 바닥이라는 사실이었다.
우선 무영준 자신이 글자는 제 이름 석 자 쓰고 읽을 정도면 충분하다는 가풍과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크고 작은 전란으로 글공부할 경황이 없었던 탓에 병서 한 권을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로 아는 글자가 적었다. 하지만 비록 작은 소읍이라도 성을 다스리는 것은 전장에 나가 지형지세를 파악하고 적병의 머리를 깨부수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었다.
성읍을 관장하는 영주의 자리에 앉아보니, 큰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간에 죄다 문서로 작성되어 보고가 올라오는데 그것을 주변에 일일이 물어보고 다닐 수도 없고 못 읽는다고 할 수도 없어서 수년간 마음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고 중요한 결정에 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성에서 파견된 벼슬아치들을 상대할 때에도 무식한 무장이라 은연중에 무시와 조롱을 당한 일이 많아서 나이가 들수록 어렸을 적에 글공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무영준은 장차 자신의 대를 이어 성을 다스릴 아들들의 글공부엔 각별히 신경을 쓰며 병영의 병사들 닦달하듯 거칠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웬만한 일은 찍소리도 내지 않고 아비에게 복종하던 아들들도 천자문 한 권씩을 겨우 뗀 다음부터는 글공부에 넌더리를 내며 볼멘소리를 했고, 좀 크고 나서는 아비를 피해 산으로 들로 사냥을 다니거나 이웃 성의 군막으로 도망을 칠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결국 아비가 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아들들의 공부머리가 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무영준도 그 부분은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을 꾹 참고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영준이 집안의 하인인 승주가 아들들의 공부방을 기웃거리며 익힌 글이 몇 년 가지 않아 성 안의 문서를 다 읽고 외울 정도인 것을 알고 기특히 여겨 공부를 작파한 아들놈들 때문에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부에게서 공부를 더 하도록 배려해준 것도 심중에 그런 안타까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공비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로 여보 당신 하며 부엌에서 들고 나온 떡이며 과자를 챙겨 먹이던 승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글공부를 하게 되었고, 좀 자라서는 그에게서 글씨 쓰는 것을 배우며 애틋한 첫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공비가 떨리는 손으로 서책을 집어서 책장을 펼쳤다. 그러곤 어렸을 때부터 봐온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글씨가 가득한 책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무슨 책이기에, 어찌 여기에…….”
“장성 밖 여러 부족의 생활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대현성에 사는 학자의 저서인데…… 요즘 변방의 정세가 다소 불안하다기에 구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아…….”
공비가 책장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책을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입궁하기 전엔 수백 장이나 가지고 있던 글씨도, 그림도 하나도 가지고 오질 못한 탓에 공비는 승주의 글씨도 3년 만에 보는 것이었다.
“관심이 있으시면 가져가서 보시겠습니까? 저는 이미 다 보았습니다.”
그 권유에 공비가 한참 울고 난 사람처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보시고 좋으실 때에 돌려주십시오.”
안타까움 가득한 허연의 눈길에 공비가 그제야 의아한 듯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허연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안다 한들 뭐 어떠랴 생각하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인.”
“예, 마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어떤 기분입니까?”
“…….”
“귀인께서는 폐하와 한 번 이별했다가 만 리 길을 돌아와 다시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와 다시 만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입니까?”
“마마…….”
공비가 눈물이 차올라서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승주의 서책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더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영의 마차가 사신각 앞에 당도한 것은 해 질 녘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승주에게서 온 편지라도 있을까 싶어 향원궁에 들렀다가 승주 본인이 상경해서 사신각에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 시영은 그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을 뛰쳐나왔다. 일단 집으로 간 시영은 승주에게 신년 선물로 보내려고 마련해두었던 매화나무가 정교하게 새겨진 벼루와 욱이 형님 쓰시라고 넉넉하게 보내준 먹 두 상자, 화선지 한 묶음을 우선 챙겼다. 그리고 관복을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는 비 내리는 궂은 날에 어딜 또 나가느냐고 붙잡는 곽여화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마차에 올랐던 것이다.
“아니, 정안군께서 어찌 이 시각에…….”
정안군이 행차하셨다는 전갈에 사신각의 태감과 내관들이 몰려나와서 큰문 앞에 좌르륵 늘어섰다. 그러고는 시영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빗방울이라도 들이칠세라 몰려들어서 우산을 받치고 별궁 안으로 모셨다.
“사신각에서 며칠 지내고자 하시옵니까? 명을 내려주시면 지금 바로 처소를 준비하겠습니다.”
“지척에 내 집을 두고서 무엇 때문에 사신각에 머물겠는가?”
“하오시면…….”
“대현성에서 온 사절들이 사신각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네. 어디에 있는가?”
“그분들은 영춘당과 연원정에 묵고 계십니다.”
“안내하게. 만날 사람이 있네.”
시영의 명에 태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분들은 모두 아침나절에 출타를 하셔서 지금은 처소가 비어 있습니다.”
“출타라니? 어딜 갔는데?”
“다들 도성이 처음이니 며칠째 나들이를 하며 이곳저곳 구경을 다니고 계십니다. 그중 두 분은 오늘 향원궁에 간다고 하시기에 아이를 하나 달려서 보냈습니다.”
“흠…….”
먼 변방에서 왔으니 번화한 도성 풍경이 신기하기도 할 터…… 구경할 것도 많고 구해 갈 물건도 있을 것인데 내가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미리 연통을 하고 약속을 잡을 것을, 승주가 왔다는 소리에 앞뒤 없이 나온 것이 분별없었다 싶어서 시영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시영이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태감이 얼른 말을 이었다.
“급한 용무가 있으십니까? 하오시면 소인이 아랫것들을 풀어 그분들을 찾을 동안 정안군께서는 수월당 접객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소인이 뫼시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우중이고 이제 해도 다 넘어갔으니 곧 돌아오겠지.”
“그분들은 아침을 드시고 출타하시면 밤늦은 시각에나 돌아오십니다. 비록 날이 궂기는 하지만 언제 돌아올 줄 알고 기약도 없이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태감이 사신각의 별채 중에서 가장 크고 접객실 또한 화려하게 꾸며진 수월당으로 길을 잡았다.
“부장들을 모두 찾아올 것은 없고, 일행 중 승주라는 자가 있을 것이네.”
시영의 말에 태감이 걸음을 멈췄다.
“승주…… 라고 하셨습니까? 소인이 알기론 무호 장군의 부장들 중엔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없고, 장군의 수발을 드는 젊은 하인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들었습니다만…….”
태감의 대답에 승주가 도성에 온 것이 사실이구나 싶어서 시영의 얼굴에 미소가 확 번졌다.
“그자가 맞네. 그자를 찾아서 상서부의 이시영이란 사람이 찾아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네.”
승주는 그 말을 알아들을지 몰라도 태감 자신은 영문을 몰라서 시영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정안군께서 무호 장군의 하인을 보시고자 이 시각에 빗길을 헤치고 오셨단 말입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연통을 주셨으면 그자를 댁으로 보내드렸을 텐데요?”
태감의 물음에 시영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허, 사람을 초장부터 그렇게 오라 가라 해서야 쓰겠는가? 내가 한 번 찾아오면 그쪽에서 한 번 찾아오고…… 그렇게 천천히 얼굴을 익히는 것이지.”
“예?”
“뭘 그렇게 멀뚱히 섰는가? 수월당인가 어딘가로 안내를 한다더니?”
“아…… 예.”
갑작스러운 시영의 방문에 당황해 있던 차, 시영이 무호 장군의 휘하 부장도 아니고 하인을 찾는다는 사실이 더욱 혼란스러워서 허둥거리던 태감이 수월당을 향해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멈춰 섰다.
“왜 또?”
자신이 승주를 찾는 것이 이렇게 정신 놓고 허둥거릴 정도로 놀라운 일인가 싶어서 시영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태감을 쳐다보았다. 그 눈총에 태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대감께서 찾으시는 그자는 지금 연원정에 있습니다.”
“다들 도성 구경을 나갔다면서?”
“그자는 지난 며칠간 향원궁을 드나들며 무호 장군의 시중을 들었는데, 오늘은 피곤해서 그런지 종일 연원정 작은 방에 누워 꼼짝을 않는답니다.”
“뭐시라?”
“대감께서는 우선 수월당에 드십시오. 소인이 가서 그자를 불러오겠습니다.”
태감의 말에 시영이 언짢은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종일 방에 누워 꼼짝을 않는다면 필경 어딘가 탈이 난 것이 아닌가? 연원정이 어디인가? 내가 가봐야겠네.”
온기도 불기도 없는 골방에서 얕은 잠을 자다 깨다 하며 뒤척이던 승주가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눈을 떴다. 그러곤 침상 가에 앉아 있는 낯선 사람의 그림자에 놀라서 일어나 앉았다.
“깼는가?”
“뉘십니까?”
“미안하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시영이 침상 가장자리로 옮겨 앉았다. 시영은 잠시 전 방에 들어와서 침상이 다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고 있는 승주를 보고는 의관을 불러오라 명을 내린 후, 깨울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어디 아픈 곳이 있는가?”
“뉘시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시영이 승주를 마주 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조금 주저하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자네와 종종 서신을 주고받던 사람일세. 상서부에 있는 이시영이라 하네.”
“아…….”
그제야 승주가 땀에 젖은 얼굴을 손으로 부비며 멍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어지러운 것을 꾹 참고 침상에서 내려섰다.
“우선 소인의 인사를 받으십시오, 나리.”
승주가 불빛도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시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자신에게 절을 올리는 승주의 행동에 시영이 당황해서 그 곁으로 다가갔다.
“인사가 뭐가 급하다고 보자마자 무릎부터 꿇는가? 되었으니…….”
한눈에도 기력이 없어 보이는 승주를 부축해 일으키던 시영이 허허…… 하고 탄식을 토해냈다. 승주의 온몸이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푹 젖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 탈이 나도 크게 난 모양일세. 무슨 땀을 이렇게 흘린단 말인가?”
시영의 명으로 수월당 큰방으로 침실을 옮긴 승주가 내관들이 가져다준 마른 옷을 갈아입고 나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의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의원에서 당직을 서던 의관은 정안군 대감의 명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내관들에게 멱살을 잡히듯 붙들려 와서 아직까지도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승주의 맥을 한참이나 짚어보고 몸에 열은 있는지, 종일 뭘 먹었는지, 말투를 보니 황성 토박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왔는지 따위를 포청의 관원이 범인 심문하듯 꼬치꼬치 캐묻고 나서 의관이 시영을 향해 돌아섰다.
“상태가 어떤가? 중한 병은 아니겠지?”
“딱히 병증이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대감.”
“내관의 말을 듣자하니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하고, 또한 자면서 식은땀을 비처럼 흘렸는데 병증이 아니라니? 아픈 데가 없어도 그런 경우가 있는가?”
“대현성은 멀고 먼 곳인데, 그곳에서 보름간 밤낮없이 말을 달려 왔다고 하니 여독이 쌓일 대로 쌓였을 것입니다. 또한 와서도 제대로 쉬질 못해서 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맥이 빠르며 호흡이 거칠고,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식은땀을 쏟는 것을 보면 기가 많이 허한 상태라 이대로 방치하면 큰 몸살이 왔을 것입니다.”
의관의 진단에 시영이 혀를 끌끌 차며 승주를 쳐다보았다.
“병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몸살 초입이구먼.”
“공자께서 젊으시니 소인이 처방하여 올리는 탕약을 사흘 정도 드시고 푹 쉬시면 곧 기력을 찾으실 것입니다.”
의관의 대답에 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바로 약을 들이게. 귀한 손님이니 내 약을 짓듯 성의를 다해야 할 것이네.”
“예, 대감. 분부 받들겠습니다.”
의관이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시영이 중병부터 잔병까지 두루 섭렵하며 1년 중 아픈 날과 멀쩡한 날이 비슷할 정도로 부실한 중에도 특히 고뿔과 몸살은 친한 친구처럼 자주 그의 몸을 드나드는 병이었다. 그 덕에 몸살에 관한 처방은 의관보다 더 밝은 터라 시영이 내관에게 화로를 들여 방을 덥히되 물 주전자를 올려서 방 안 공기가 너무 건조하지 않도록 하고, 탕약 들여오기 전에 따뜻한 박하차를 한 잔 내오라고 일렀다. 그렇게 승주를 위한 몇 가지 조치를 더 취한 후 시영이 침상 옆에 다가앉았다.
“큰 병이 아니라니 천만 다행일세. 몸살은 며칠 잘 쉬면 낫는 병이니 무리하지 말고 몸조리를 하도록 하게.”
“미천한 소인을 이렇게 보살펴주시니…… 뭐라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승주가 약간 불안한 눈길로 시영을 보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만한 일에 인사는 무슨…….”
“그렇지 않아도 도성에 온 길에 나리를 한 번 찾아뵈려 했었는데, 직함과 성함만으로는 찾기가 어려워서 어찌해야 하나 생각 중이었습니다.”
승주도 자신을 찾았다는 말에 시영이 환하게 웃었다.
“그랬는가? 나도 자네가 무호 장군의 수행원으로 같이 온 것을 우연히 알았으니…… 하마터면 어렵사리 도성에 오고도 어긋나서 만나지 못할 뻔하지 않았나?”
한숨을 돌린 시영이 그제야 비로소 승주의 외모를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3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학식이 어느 정도인지, 인품이 어떤지는 대강 알고 있었지만 외모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대현성이 변방의 성읍이고 그곳 사내들은 거칠기로 정평이 나 있으니 그도 어느 정도 투박하게 생기지 않았을까, 더구나 때론 궂은일도 해야 하는 낮은 신분이니 외양은 다소 초라하고 왜소하지 않을까 싶은 짐작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보니 승주는 도성의 귀공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차분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가진 미청년이었다. 반쯤 내리뜬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총기가 엿보였고 꼭 다문 얇은 입술은 그의 고집과 심지를 내보이는 것 같았다. 3천 명이나 되는 시강원의 유생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총명함과 예술적인 재능을 갖춘데다 얼굴까지도 이토록 잘난 젊은이가 미천한 신분에 묶여서 옴짝을 못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고 슬픈 일이란 생각도 들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안타까운데 본인의 심정은 어떨까 싶어서 시영이 짠한 눈길로 승주를 쳐다보았다.
“소인 역시 평생에 두 번 오기 어려운 이곳까지 와서 나리를 뵙지도 못하고 가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랬는가? 나는 나만 몸이 달아서 자네에게 보채듯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나 싶어 속으로 민망할 때가 많았었네.”
시영의 농담 섞인 대답에 승주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천한 자의 하잘것없는 재주를 눈여겨 봐주시고 서신으로나마 많은 가르침을 주셨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본래 모시던 스승님께서 이제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 하시고 이웃 성으로 떠나신 후, 아무도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는 이가 없어서 방향도 없이 잡서나 뒤적이며 지내길 몇 년이었는데…… 나리께서 서찰과 서책을 보내 칭찬도 해주시고 공부하는 법도 가르쳐주신 것이 제게 얼마나 큰 위안과 도움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간 승주의 뛰어난 재주를 흠모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챙겨 보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에 시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승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상 머리에 등을 기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움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도성에 왔다는 소식에 만나서 술이나 한잔 나눌까 싶었는데, 몸이 아프니 오늘은 아니 되겠구먼.”
“송구합니다.”
“워낙 먼 길 오느라 지쳐서 그런 것을…… 내가 오래 버티고 있으면 편히 쉬지도 못할 것이니 오늘은 이만 일어나야겠네.”
시영이 일어서자 승주도 당황해서 침상에서 내려섰다.
“송구합니다, 나리. 제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제 몸이 불민하여 걱정만 끼쳤습니다.”
“고작 몸살 기운에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몸이 불민해서 주변에 폐를 끼치려면 나 정도는 되어야지.”
“…….”
“쌓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하세. 내 좋은 술 한 병 구해서 다시 올 것이니…….”
그렇게 말하며 시영이 승주의 어깨를 다독였다. 지난 몇 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초면인 시영이 마침 아플 때에 찾아와 보살펴주고 따듯한 위로를 건네자 그렇지 않아도 괴로움과 번민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승주의 목이 울컥 매어왔다.
“탁자 위에 선물을 두었으니 나중에 풀어보게. 사실은 내년에 신년 선물로 보낼까 해서 구해둔 것인데 한두 달 일찍 전할 수 있어서 좋구먼. 자네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네.”
“나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없어선 안 될 물건들이 몇 가지 있지 않은가?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그런 것들일세.”
승주는 그간 몇 차례나 시영에게서 지필묵을 선물로 받아왔고, 그중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이라든지, 비단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결이 고운 화선지 같은 것은 대현성처럼 궁벽한 변방에선 구경도 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여태 받은 선물도 갚을 길이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는데, 또 빚을 지게 되는구나 싶어서 승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몸이 나아지면 소인이 댁을 찾아뵙겠습니다.”
승주의 인사에 시영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우리 집 후원 정자에 오랜만에 손님이 들겠구먼.”
시영이 몸조리 잘하라고 거듭 당부를 하고 돌아간 후, 잠시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승주가 탁자 위에 놓인 비단 보따리의 매듭을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오동나무로 말끔하게 깎은 함이 들어 있었다. 그 상자만 봐도 안에 든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겠구나 생각하며 뚜껑을 열어본 승주가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자 안에는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향이 짙은 먹과 족히 백 장은 될 것 같은 화선지 뭉치, 그리고 뚜껑에 둥치 굵은 매화나무가 새겨진 큰 벼루가 들어 있었다. 화선지와 먹도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지만 벼루는 이런 것을 돈을 주고 사자면 얼마를 치러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물건이었다.
상서부의 시랑이 낮은 벼슬은 아니지만, 이런 물건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척척 내어줄 정도로 고관이었던가? 게다가 사신각은 황족, 아니면 큰 나라의 사신이나 되어야 묵을 수 있는 황궁의 부속 별궁인데 그런 곳에서 일하는 내관들이 일개 시랑의 뒤를 구름처럼 쫓아다니며 말 한 마디 떨어지기 무섭게 무엇이든 바로바로 시행을 하니…… 승주는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승주가 좀 전에 내관이나 의관이 시영을 대하던 태도를 곰곰이 되짚으며 자신이 놓친 것을 더듬어가고 있을 때 내관이 쟁반에 죽 한 그릇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의관께서 탕약을 들기 전에 요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셔서 먼저 들여왔네. 전복과 새우를 다져서 쌀과 함께 푹 끓인 죽이니 먹으면 기력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네.”
“내관 나리께 이런 수고를 끼쳐 송구합니다.”
평생 무호와 그 주변의 거친 부장들 뒤치다꺼리만 했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밥을 가져다주고 약을 달여주는 일이라곤 없었던 승주가 익숙지 않은 대접에 주눅이 들어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수고는 무슨…… 이제 보니 자네 아주 굉장한 인맥을 가졌더구먼.”
내관이 죽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열려 있는 상자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정안군께서 무엇을 두고 가셨나 궁금하더니 정말 좋은 것을 받았구먼. 먹이며 화선지며…… 황제께서나 쓰시는 진상품이 아닌가?”
내관의 말에 승주가 놀라서 덩달아 상자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것들이 진상품이란 말입니까?”
“진상품의 표식은 없지만 상자를 보니 이 먹은 진목성에서 올린 진상품으로 휘명전에서나 쓰는 것이 맞네. 폐하께서는 예전부터 진상 올라온 문방사우 중 가장 좋은 것은 따로 빼두었다가 정안군께 내리시는데, 아마 그것을 자네에게 선물하신 것 같구먼.”
“지금…… 정안군이라고 하셨습니까?”
승주의 물음에 내관이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자네, 그 어른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네만…….”
“그분께 서찰을 몇 차례 올린 일이 있고, 성함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정안군이라 하시면 혹시…….”
그렇지 않아도 머나먼 변방에서 온 무호 장군의 하인 되는 자가 정안군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그토록 친근한 것인지가 내심 궁금했던 내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안군이 어떻게 승주를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자가 정안군을 아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긴 하늘같은 종친과 변방에서 온 장수의 종복 따위가 무슨 친분이 있겠나 생각하며 내관이 입을 열었다.
“정안군 대감은 황제 폐하의 사촌 형님이 되시는 분일세. 폐하의 최측근 중 한 분으로 그 신임이 두터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강원의 교수들도 그분의 강론을 들으며 한수 배워 가는 나라 안 최고의 석학이시네.”
“그분이…… 그분이란 말입니까?”
승주가 망연자실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보내온 편지의 행간에서 얼핏 느껴지는 학문의 깊이도 예사롭지 않았고 보내오는 선물도 모두 귀한 것이란 생각은 일찍부터 하고 있었지만, 종친이었다니…… 그것도 황제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정안군이었다는 사실은 매사 냉담하고 무덤덤한 성격의 승주로서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놀랍고 두려운 일이었다.
“어허, 이제 보니 이 벼루가 또 예사 물건이 아니구먼. 이것은 장영의 작품이 아닌가?”
“이게…… 뭐라고요?”
“장영이라고, 희종 대왕 때에 진상 벼루를 도맡아 제작하던 장인의 작품으로 벼루 중엔 대단한 명품이라네. 그자의 작품은 성 안에서 행세깨나 하는 고관대작과 부호들의 수집 품목 중 하나인데,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이면 못해도 도성 외곽의 아담한 기와집 한 채와도 바꿀 수 있을 것일세.”
“…….”
승주가 눈만 끔뻑이며 거친 숨을 내쉬는 모습에 내관이 선물 구경을 그치고 다가와 그 손에 직접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우선 요기부터 하게. 좀 있으면 탕약이 들어올 테니 약도 들고…… 정안군께서 자네를 우리에게 맡기고 가셨으니 회복이 더디면 병구완이 소홀한 탓이라고 책망을 하시지 않겠나?”
날이 저물자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거의 한여름 빗소리만큼이나 요란한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청량전의 회랑을 왔다 갔다 하는 허연 때문에 덩달아 비바람을 맞던 고 내관이 들이친 빗물에 마루가 흥건히 젖을 지경이 되자 그 등 뒤에 바짝 붙었다.
“이만 안으로 드시지요. 옷도 얇은데 찬바람을 너무 오래 맞으셨습니다.”
“괜찮네. 오히려 시원하니 좋구먼.”
“하지만 무릎도 안 좋으신데…….”
그리고 사슴 가죽으로 지은 신이 젖어 얼룩이 지면 안 되는데 싶어서 고 내관이 다시 한 번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허연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약주를 괜히 하셨나 봅니다. 그것이 약한 술이 아닌데…….”
“그러게 말일세. 술이 좀 깰까 싶어서 나왔는데, 어째 점점 더 술기운이 오르는 것 같네.”
“빈속에 독한 술을 반병이나 드셨으니 밤바람이 차다 한들 어찌 술기운을 이기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들어가셔서 저녁을 드시지요. 따끈한 탕국이라도 한 그릇 드시면 속이 다소 편해지실 겁니다.”
“폐하께서 오늘은 좀 늦으시네.”
그렇게 말을 돌리며 허연이 담장 너머 휘명전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한참 울먹이던 공비를 처소로 돌려보내고 난 후, 답이 없는 그 처지가 안타깝기도 하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도 답답해서 빈속에 술을 몇 잔 마셨는데 그 바람에 마음만 더 심란해져서 허연은 좀처럼 진정을 못하고 있었다.
“소인이 휘명전에 가서 언제쯤 오실지 알아보고 올까요?”
평소와 달리 허연이 욱을 찾는 눈치가 확연해서 고 내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되었네. 저녁때가 지났으니 곧 오시겠지. 다른 전각에 드시게 되었으면 기별을 주실 것이고…….”
“마마께서 지척에 계시는데 폐하께서 달리 어디엘 가시겠습니까?”
황제가 일과 마치자마자 바로 뛰어 들어올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공연한 소리 한다고 생각하며 고 내관이 손수건을 꺼내서 허연의 젖은 얼굴을 어루만지듯 닦았다.
“공비마마의 일에 마음이 많이 쓰이시나 봅니다.”
“그야…….”
“공비마마의 사정이야 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추스르시겠지요. 그것밖에는 해결책이 없는 일이고요.”
“그렇네만…….”
“그러니 오늘 이후론 그분을 전각에 들이지도 마시고, 아는 척도 마십시오. 공연히 헛된 말이 나돌까 두렵습니다.”
“자네 말이 다 맞지만…… 아무래도 그분의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네.”
고 내관이 영문을 몰라서 허연을 말똥히 쳐다보았다. 남의 일 같지 않다니…… 첫정을 못 잊어서 끙끙 앓는 공비의 처지와 황제의 정인으로 서로서로 넘치게 사랑을 주고받는 허연 간엔 전혀 비슷한 구석도 없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했던 것이다.
“나도 지난날, 먼 곳에 있는 사람을 그리며 밤을 지낸 날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공비마마의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것 같네.”
“마마…….”
“사랑했던 사람이 그리 쉽게 잊히겠는가? 산전수전 남부럽지 않게 겪은 나조차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 이러고 있으니…… 아직 어리고 연약한 분이 저러다 마음의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스럽네.”
공비가 어리긴 하지만 어느 구석이 연약하다는 걸까 의아해하던 고 내관이 마당 건너편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폐하께서 오셨나 봅니다.”
휘명전에서 청량전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우산 쓰고 가라고 귀찮게 보채는 윤 내관과 실랑이를 벌여가며 청량전 마당으로 들어선 욱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허연이 우산도 없이 빗속을 성큼성큼 걸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인…….”
“폐하.”
“내가 곧 들어갈 것인데 뭣 하러 나왔는가? 비 맞지 말고 어서…….”
“폐하!”
허연이 깊은 탄식을 토해내듯 욱을 불렀다. 그러고는 멀뚱히 서 있는 욱을 덥석 끌어안았다.
허연의 마중과 갑작스러운 포옹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욱이 굳은 채 멈춰 섰다. 허연이 전각 앞에 나와 자신을 맞아주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달려 나와서 좌중의 이목도 개의치 않고 자신을 끌어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잠시 생각하던 욱이 빗발을 피하듯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허연의 행동이 애틋해서 그 젖은 어깨를 푹 감싸 안았다.
“내가 오늘 좀 늦었네. 많이 기다렸는가?”
“예.”
오늘따라 적극적인데다 튕기지도 않고 순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 허연의 태도에 가슴이 두근거려서 욱이 그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더욱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고개를 들고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 이제 보니 술 한 잔 했구먼.”
허연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온 욱이 직접 젖은 옷을 벗기고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주었다. 그러곤 약간 풀린 눈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허연의 얼굴을 들어 눈을 맞췄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가?”
“많이 안 마셨습니다.”
“초저녁부터 독작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종일 서재에 앉아 서책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제게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무 일 없었습니다.”
욱이 더는 캐묻지 않고 귀한 구슬을 어루만지듯 허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곤 기력이 없어 보이는 정인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보고 싶으면 휘명전으로 오면 되지. 배를 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담장 하나만 넘으면 나 있는 곳이 아닌가?”
허연의 등을 다독이며 욱이 그 어깨 너머로 고 내관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너 이따가 나 좀 보자는 의미가 담긴 눈길에 고 내관이 고개를 외로 꼬며 그 시선을 피했다.
“제가 어떻게 소풍 다니듯 일없이 휘명전을 드나들겠습니까?”
“오면 어때서? 와서 차 한 잔 같이 하고, 과인이 일하는 것도 지켜보다가 같이 돌아오면 그것도 그날이 그날 같은 일과에 큰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나이 들어 주책이라고 욕먹고 구설만 잔뜩 낳을 것입니다.”
“어허! 감히 어떤 놈들이?”
내가 술에 취해서 어린아이 붙들고 실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싶어서 허연이 욱을 밀어내고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러고는 지치고 멍한 눈으로 욱을 올려다보았다.
“저녁을 드셔야지요. 때가 지났으니 허기가 지시겠습니다.”
“그대는?”
“저는 밥 생각이 없습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이 다시 고 내관을 쳐다보았다.
“귀인이 저녁을 들었느냐?”
“아닙니다. 한 시진쯤 전에 국화주만 깡으로 반병 정도 드셨습니다.”
“저런…….”
욱이 혀를 끌끌 차며 허연의 옆에 몸을 눕혔다. 그러곤 손으로 턱을 괴고는 허연과 눈을 맞췄다.
“뭐하십니까? 나가서 씻고 저녁 드십시오.”
“그대가 술 취한 사슴처럼 이렇게 축 늘어져서 뭔가 바라는 듯 애틋한 눈길로 나를 보고 있는데, 지금 밥이 넘어가겠는가?”
“폐하께서 밥이 안 넘어가실 때도 있었습니까?”
“이 사람, 나를 밥밖에 모르는 먹깨비 취급일세? 내가 이래 봬도 얼마나 섬세하고 세심하고…… 알고 보면 소식하는데?”
욱의 너스레에 허연이 기력이 없는 중에도 숨을 헐떡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지금 말씀하신 소식이란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소처럼 드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소를 한 마리 드신다는 것입니까?”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지, 나 정도면 무척 적게 먹는 편일세.”
욱이 허연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며 한 번 더 우겼다.
“어디 가서 코끼리 밥 먹는 것이라도 보고 오셨습니까?”
“오늘 향원궁에 있는 처남이 기력이 좀 돌아왔는지 일어나서 점심을 들었다네.”
“그렇습니까? 장군이 기력을 찾았다니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상했던 것보다 향원궁 체류가 길어지고 있는 무호의 안부도 궁금하던 참이라 허연이 반짝 기운을 차려 고개를 들었다.
“그렇기는 한데…… 궁내청 태감인 조 내관 입장에선 마냥 좋게만 볼 일도 아니었을 것이네.”
욱의 대답에 허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무호가 점심 한 끼에 먹어치운 각종 육류가 후궁의 전각에서 하루 식재료로 받아 가는 양과 맞먹었다네. 그 바람에 외궁 조리각에 남아 있는 식재료가 부족해서 향원궁 태감이 궁내청에 쳐들어가서 각 궁의 아침 식재료로 장만해놓은 꿩을 여섯 마리나 빼앗아 갔다는구먼.”
“허허…….”
전쟁의 무용담만큼이나 흥미로운 무호의 기행에 허연이 탄성을 토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참 드문 사람을 처남으로 얻은 듯싶네. 그간 자주 왕래를 했으면 재미있는 사건도 많았을 텐데, 그렇게 호방한 처남은 본거지가 너무 멀어서 3년에 한 번도 겨우 보고, 너구리처럼 음흉한 처남들만 뻔질나게 황궁을 드나드니…… 휘명전에서는 당최 웃을 일이 없구먼.”
그렇게 투덜거리며 욱이 허연을 끌어당겼다. 그러곤 스쳐 지나가는 서늘한 밤바람 때문에 살짝 소름이 돋은 그 어깨에 입을 맞췄다.
“무호가 맘에 드셨나 봅니다?”
“무척. 하지만 궐 안의 식재료를 다 쓸어 먹은 무호보다 술 반병에 이렇게 녹아떨어진 자네가 더 재미있네.”
“제가 무슨…….”
짓궂은 욱의 말투에 허연이 발끈해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욱은 오히려 허연을 옴짝도 못하게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이불을 끌어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씌웠다.
“왜 이러십니까? 기운도 없는데 귀찮게 마시고 가서 저녁이나 드십시오.”
허연이 욱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손길에 도통 힘이라곤 없고, 말투도 취기로 인해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술 한 잔씩 들고 잠자리에 드는 날도 종종 있지만, 이렇게까지 취해서 해롱해롱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 욱이 두말없이 허연을 깔고 앉았다. 그러곤 술내가 풀풀 풍기는 그 입술을 슥 핥았다.
“거 참…… 귀찮다는데…….”
술에 취해 투덜투덜하는 것도 귀여워서 욱이 허연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배도 고프지만 눈앞에 차려진 이 저녁을 먼저 먹어야겠다 싶어서 허연의 옷고름을 입으로 물어서 풀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옷섶은 다 헤쳐지고 바지는 무릎에 걸린 한심한 몰골이라 허연이 손을 들어 욱의 옆통수를 갈겼다.
“아야…….”
허연의 다리를 어깨에 척 걸치고는 허벅지 안쪽을 쪽쪽거리던 욱이 고개를 들었다.
“자는 사람 붙들고……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깨웠는가?”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욱이 더욱 민감한 곳을 혀끝으로 슥 핥았다. 그 바람에 허연이 조그맣게 교성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폐하…….”
한두 번 더 꿈틀거리던 허연이 더듬더듬 욱의 멱살을 찾아 쥐었다. 이렇게까지 되었으면 못 이기는 척 받아줘도 좋을 텐데, 뭘 이렇게까지 버티나 싶어서 욱이 안타까운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그런 욱을 마땅치 않은 눈길로 노려보던 허연이 꼬물꼬물 손을 놀려 욱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장포에 저고리에 속적삼까지…… 뭐 이렇게 옷이 겹겹인가 속으로 툴툴거리며 헛손질을 하던 허연이 결국 속적삼은 포기하고 그대로 손을 떨궜다. 비에 젖고 술에 취한 허연이 아련한 눈길로 자신을 올려다보자 그렇지 않아도 잔뜩 들떠 있던 욱이 기름을 끼얹은 모닥불처럼 화르륵 불타올랐다.
욱이 허연의 어깨에 팔을 감고는 품 안에 바싹 안았다. 그러고는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깨물었다. 오늘따라 욱의 입맞춤은, 거칠게 덤비고 조급하게 덤벙거려서 허연을 겁먹게 만들거나 잔뜩 올랐던 흥분마저 꺼뜨리던 보통 때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깊이 들어오는가 싶다가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서 자신의 반응을 보고, 또다시 가볍게 건드리며 희롱하는 제법 능수능란한 그 입맞춤에 허연이 오히려 조급증을 내며 욱의 목에 팔을 감았다.
오늘따라 심사가 어수선한데다 초저녁부터 애가 탈 정도로 욱이 보고 싶었던 터라 허연이 그 속적삼을 되는대로 잡아 뜯고는 욱의 목덜미와 어깨에 사납게 입을 맞췄다. 그러곤 욱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 손을 잡아 자신의 은밀한 곳으로 이끌었다. 전에 없이 조급하고 적극적인 반응에 욱이 헤벌쭉 웃으며 허연의 귓불을 깨물었다.
“그대는 한 번씩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누구 좋으라고요?”
“내게 좋으면 그대에게도 좋은 것이지. 부부는 한 몸이 아닌가?”
부부 운운하는 욱의 수작이 취중에도 민망해서 허연이 팔꿈치를 크게 휘둘렀다. 욱이 얼른 몸을 틀어서 그 위협적인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비록 취해서 몸을 못 가눌 정도이기는 해도 이런저런 필살기를 많이 갖추고 있는 무서운 마나님이라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 허연과의 관계에서 욱이 느끼는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하마터면 한 방에 갈 뻔했다고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욱이 허연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은밀한 곳 깊숙이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으…….”
허연이 안타까운 신음을 흘리며 한껏 허리를 비틀었다. 그간 어지간해서는 볼 수 없었던 색기 넘치는 신음과 눈길이 단순히 술 탓인가 의아해서 욱이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응?”
생각이라니…… 침상에 들어 한창 정을 나누는 중에, 그것도 손가락이 몸 안에 두 개나 들어온 상황에서 생각은 무슨 생각인가 싶어서 허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뭔가 다른 생각을 하던데?”
욱이 손가락을 더욱 깊이 찔러 넣고는 한껏 휘저었다. 그 바람에 놀란 허연이 흠칫 몸을 떨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허연이 그렇게 항의하며 멋대로 자신을 희롱하는 욱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완력 대 완력으로는 욱이 한참 우위였다.
“내 눈은 못 속이지. 침상 위에서, 그것도 황제의 침상에서 감히 딴생각을 하다니…….”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아…….”
“자네가 거짓말은 진짜 못하는 거 알고 있는가?”
욱이 한층 더 싸늘한 눈길로 허연을 노려보았다. 그 서슬에 허연이 저도 모르게 눈길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욱의 표정도 싹 굳었다. 딴생각 어쩌고 한 것은 허연이 과음으로 전에 없이 허술해진 김에 곤란하게 만들어서 어쩌는지도 보고, 색다른 재미도 볼까 싶어서 지어낸 트집거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허연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던 것이다.
“뭔가? 자네, 정말로 나를 두고 딴 놈을 생각했던 것인가?”
역시 저자거리를 그렇게 좋을 대로 드나들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었구나, 재자와 가인이 넘쳐나는 곳이 황성이니, 근 보름이나 나가 돌아다니는 사이 어떤 놈을 만났나 보다. 아니면 여인이라도…….
“어떤 놈이냐?”
욱이 허연의 몸에서 손을 거두고 으르렁거렸다. 그 물음에 허연이 취기가 싹 가신 눈길로 욱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 제가 생각할 놈이 폐하 외에 또 있겠습니까?”
“내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낯선 자를 보듯 표정이 아련하고 안타까웠단 말인가?”
이미 심중에 의심이 자리 잡은 욱이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그러곤 벌써부터 잔뜩 흥분해 있던 자신의 것을 허연의 입구에 위협하듯 들이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다른 놈과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겁니까?”
“어떤 놈이냐고 물었다.”
욱이 살벌한 표정으로 허연을 다그쳤다. 욱의 추궁이 너무 불쾌하고 억울해서 허연이 그 가슴팍을 세게 밀었다. 하지만 욱은 오히려 허연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는 그 몸을 함부로 비집어 열었다.
“악…….”
배려 없는 거친 삽입에 허연이 마른 비명을 내질렀다. 본래 욱과 허연은 궁합이 그렇게 잘 맞는 편이 아니었다. 허연의 성적 취향이 단정하고 담백한 데 비해 욱은 혈기가 지나치게 왕성한데다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게다가 허연이 감당하기엔 욱의 크기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껏 몸을 풀고 조심스럽게 삽입을 해도 거북하고 아파서 싫을 때가 많은데 하물며 이렇게 거친 침입은 허연에게는 행패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라도 한 대 쥐어박아서 침전에서 쫓아낼까 어쩔까 잠시 망설이던 허연이 오히려 다리를 욱의 허리에 감고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러곤 욱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폐하께서 잘 보셨습니다. 실은…… 잠시 딴생각을 했었습니다.”
허연의 도발적인 대답에 이번엔 욱이 겁을 집어먹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실은…….”
“됐네. 아무 말 말게.”
맘 상할 것이 빤한 일 따위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마음에 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밖을 싸돌아다니며 누굴 만났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따위 것은 굳이 알고 싶지 않네. 대신 앞으로 평생 외출은 금지일세.”
“예전에 저를 찾아왔었던 어떤 사내아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딴 놈이 있었구나 싶어서 욱이 막막한 눈길로 허연을 노려보았다.
“희망도 없고 감정도 마르고……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하루하루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던 때에, 아무런 기별도 없이 낡은 침실에 들어와서 들이치는 햇살을 맞으며 서 있던 그 아이 말입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
“백마를 타고, 미인을 거느리고…… 독한 술을 깡으로 퍼마시며 한참을 횡설수설하다가 돌아간…….”
그제야 허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욱의 표정이 울컥 흔들렸다. 허연이 욱을 올려다보며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 녀석이 얼마나 예쁘고 귀여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저녁 내내 그때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내게 관심도 전혀 없었으면서…….”
자신에게는 눈길도 제대로 안 주고 내도록 그때 데리고 갔던 곽여화만 힐끔거리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그때부터는 백운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기억이 떠올라서 욱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사랑스러웠는데…….”
허연이 욱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그 목을 꽉 끌어안았다.
처음 우화원으로 허연을 보러 갔던 그날의 일이라면 욱은 한순간 한순간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허연을 처음 가까이서 보았던 그때, 단둘이 한 방에 머물렀던 그 짧은 순간에 평생을 이어갈 긴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저는 폐하와 함께했던 때라면 한순간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있었던 4년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제가 하고 있는 일이란, 폐하와 함께했던 순간을 되새기는 것뿐이었습니다.”
부끄러운 듯 머뭇거리며 속삭인 허연의 고백에 욱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칠게 두근거렸다.
허연이 욱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들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좀 더 욕심을 내서 욱을 더욱 바싹 끌어당겼다. 욱이 너무 깊이 들어오거나, 정사 후에 너무 오래 안에 머무르는 것을 질색하던 그였지만 오늘따라 애가 타고 허탈한 마음에 보채듯 욱을 졸랐다.
가슴 뭉클한 고백에, 다른 날과는 달리 들뜬 숨을 내뱉고 자신을 더욱 안으로 끌어들이며 유혹하는 그 몸짓에 욱도 잔뜩 흥분해서 허연을 끌어안고 그 깊고 뜨거운 곳을 한껏 더듬었다.
“아…… 아…….”
욱이 절정의 순간을 맞아 허연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그 아픔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허연이 깍지 낀 욱의 손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어떤 운명이 있어서 이 아이와 만났으며,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되었을까? 헤어져 있을 때엔 마음이 다 타는 것처럼 아프고, 함께 있는 순간에마저 그리워서 허겁지겁 품을 찾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욱아…….”
허연이 낮은 신음을 토해내며 울먹였다. 그러곤 자신의 마른 배 속을 적시는 뜨거운 기운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며 침상 위에 털썩 쓰러졌다.
밤새 장맛비처럼 세차게 내리던 가을비는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빗발이 다소 가늘어졌다. 가을이 한창 깊어가는 시기에 내린 폭우라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밤새 떨어진 이른 낙엽이 색깔 고운 깔개처럼 폭신하게 깔린 마당을 내다보던 시영이 문 열리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윤 내관이었다.
“아직도 보고서를 보고 계십니까? 이제 곧 점심때인데 좀 쉬시지요?”
“마저 읽고 폐하께도 보고를 올려야지. 헌데 폐하께서는 휘명전에 나오셨는가?”
시영의 물음에 윤 내관이 시선을 마룻바닥으로 떨궜다. 점심때가 다 지나도록 황제가 청량전의 침전에서 나올 생각을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청량전에 계십니다.”
“혹시 고뿔이라도 드셨는가?”
“여느 때처럼 강건하시옵니다.”
“허면 어째서 아직까지 등청을 아니 하시는가?”
“폐하께서는 요즘 들어 하루도 쉬실 틈 없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셨습니까? 그간의 피로가 쌓여 오늘 하루는 쉬고자 하십니다.”
“허허…….”
욱이 최근 한 달간 제대로 쉰 적이 없으니 하루 정도 통으로 빼서 쉰다고 해도 그것을 두고 정무를 소홀히 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북쪽 변방의 병력 충원 문제도 의논을 해야 하고, 남동쪽 해안에 출몰하는 해적 소탕을 위한 군선 건조가 책정된 예산을 훌쩍 초과하는 바람에 공부와 해남성에서 모자란 돈을 해결해달라는 재촉이 득달같아서 오후엔 그 일을 논의하려고 관련 부서의 책임자들을 소집해놓았는데, 결정권자가 별궁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으니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 전에라도 말씀을 하셨으면 일정을 빼놓았을 텐데, 어찌 이리 돌발적으로 농땡이를 치신단 말인가? 사람 곤란하게시리…….”
“어쨌든 그리 되었으니 오후에 있을 회의는 정안군께서 주관을 하시지요.”
크고 작은 실무 회의를 주관하는 것이 상서령의 일이니 그거야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변방의 병력을 이동시키는 일이나 큰 예산이 쓰이는 일은 욱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안이라서 시영이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삐죽였다.
“폐하는 게으름이 나서 그러신다 치고, 귀인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구먼. 폐하를 좀 다독거려서 내보내지 않고…….”
“귀인께서 어찌 그러지 않으셨겠습니까? 오전에 여러 차례 권유하셨으나 폐하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않으십니다.”
“에잇!”
기왕 반나절은 날아갔으니 오늘 하루는 그냥 놀게 둘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청량전에 쳐들어가서 욱을 끌고 나올까 궁리를 하며 시영이 씩씩거렸다. 예정도 없이 황제가 등청하지 않은 것이 언짢아서 지금은 저러지만 곧 포기하고 그 일정을 대신 처리해줄 것이라 윤 내관이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시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 점심부터 드시지요. 곁방에 상을 차릴까요? 아니면 장경각에서 승상 대감들과 함께 드시겠습니까?”
“내 점심이야 충의당 내관들이 알아서 챙길 것이니 자네는 그만 나가서 일 보게.”
“하오시면 대감만 믿고 소인은 이만 물러갑니다.”
시영에게 성공적으로 일을 떠넘기고 상서령의 집무실을 나온 윤 내관이 복도에서 지 내관과 마주쳤다.
“상선이 아니십니까?”
충의당의 태감인 지 내관이 윤 내관에게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다.
“정안군을 뵙고 가십니까?”
“그렇네만…… 자네는 어디 나갔다 오는가?"
지 내관이 관복이 아니라 평복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윤 내관이 물었다.
“예, 정안군 대감의 심부름으로 사신각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사신각엔 왜?”
“사신각에 대감의 친구분이 와 계신데 지금 몸이 편찮으시니 대신 들여다보고 오라고 하셔서 인사를 드리고, 담당 의관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아…….”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던 윤 내관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영의 친구가 사신각에 있다니…… 얼핏 듣기엔 전혀 이상하거나 의심스러운 말이 아니지만 현재 사신각엔 머물고 있는 종친이 없었고, 시영에게는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시영은 그 자신이 황위 후보로 거론될 만큼 지위가 높은 종친이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바깥출입도 어려울 때가 많았던 탓에 그 인간관계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거기에 열두세 살 때부터 또래들과 어울리는 대신 시강원에서 숙부뻘은 족히 되는 유생들과 같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주변엔 시강원 선후배들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시영이 그나마 나이 들어서 사귄 친구가 허연과 진관우, 그리고 상서시랑으로 휘하에 데리고 있으면서 눈만 마주치면 말싸움과 눈싸움으로 아르릉거리는 장광윤 정도인 것은 궁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흘 전에 향비의 처가 식솔들이 본가로 돌아가고 제후들도 그저께 황성을 떠났기 때문에 지금 사신각에 머무는 자들은 무호 장군의 부장들뿐인데 친구라…… 시영에게 자신이 모르는 친구가 있는 것도 놀랍고, 대체 어떤 자이기에 아침부터 상서청 집무실인 충의각의 태감을 보내 안부를 확인할 정도인지도 궁금해서 윤 내관이 주변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집무실 문 앞을 두 명의 내관이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한 윤 내관이 일단 전각을 나와서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침 점심때라 오가는 사람이 적은 틈을 타서 전각 뒤편으로 후다닥 돌아들어 갔다.
“소인이 갔을 때엔 공자님은 의관이 들인 탕약을 들고 계셨습니다. 사신각 태감이 수월당에 담당 내관 세 명을 붙여서 공자님의 잠자리며 음식이며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일세. 그래, 의관은 만나봤는가?”
일정대로라면 오후 회의만 참석한 후 일찍 퇴궐해서 사신각에 들렀을 텐데, 욱의 일이 몽땅 자신에게 밀려온 탓에 시영은 제시간에 퇴궐은커녕 야근도 각오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필 평생에 한두 번 만나기도 어려운 지기가 찾아왔을 때 자기 놀자고 몸도 허약한 사촌 형에게 일 보따리를 안겨주니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을 정도라서 시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의관이 전하기를 몸살은 큰 병이 아니니 하루 이틀 몸조리를 더 하면 기력을 찾겠다고 했습니다. 하오나…….”
“왜? 다른 문제가 있는가?”
“그 공자께서 숨을 시원하게 내쉬지 못하고 자주 헐떡이는 증상을 보이며 깊은 잠도 이루지 못하니 이는 몸살의 증상이 아니라 다른 병증이 있는 것 같다고…….”
“다른 병증이라니?”
시영이 놀라서 되물었다.
“공자께서 과묵하여 많은 말씀을 않으셔서 확실치는 않지만 심중에 화증이 좀 있으신 것 같답니다.”
“허허…….”
“때문에 몸살에 듣는 탕약은 오늘까지만 처방을 하고, 내일부터는 울증에 효험이 있는 탕약을 처방하겠다고 의관이 말씀을 올렸는데 공자께서 그럴 필요 없다고, 약으로 나을 병이 아니니 애쓰지 말라며 거절을 하셨답니다.”
지 내관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시영이 안타까움에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 사람 처지에 화증이 없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내가 일간 사신각에 다시 들러 얘기를 좀 나눠봐야겠구먼.”
“그렇지 않아도 제가 정안군 대감의 인사를 전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거듭 인사를 하시며 좋으신 날과 장소를 정해주시면 찾아뵙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 내관이 소맷자락을 뒤적여 곱게 접은 서신 한 통을 꺼내서 시영에게 올렸다.
“그 자리에서 지필묵을 청해 서찰을 적어주셨습니다. 서신으로 인사를 대신 올리니 송구스럽다 하시며…….”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뭐 이런 것을…….”
두 달 만에 받아보는 승주의 편지에 시영이 반색을 했다. 그러곤 정안군전 상서라고 적힌 봉투의 글씨부터 음미하듯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대감, 점심은 드셨습니까?”
“아직일세.”
“하오시면 옆방에 점심을 차리라 이르겠습니다. 잠시만…….”
“이 글씨만 봐도 설레는 것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구먼.”
“예?”
시영의 혼잣말에 점심을 먹겠다는 건지, 거르겠다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아서 지 내관이 다시 한 번 의중을 물었다. 그제야 시영이 지 내관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하게.”
“예, 대감. 그럼 소인은 나가 있을 것이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지 내관이 그렇게 대답하며 시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창 밖엔 가을비가 촉촉이 내려 세상을 적시는 중에 욱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허연을 음습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욱을 노려보는 허연의 눈길도 만만치 않게 매서웠다. 그렇게 서로를 깊이 탐색하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욱이었다.
“어쩔 텐가? 이쯤에서 접겠는가? 아니면 받겠는가?”
욱의 물음에 허연이 한 번 더 욱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곧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렸다.
“받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허연이 탁자에 쌓인 패 한 장을 집었다. 그것을 본 욱이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손에 쥔 패가 시원찮구먼?”
“본시 궁지에 몰린 개가 짖는다고 했는데, 이리 쫑알쫑알 말이 많으신 것을 보니 폐하 수중에도 별다른 패는 없는 듯싶습니다.”
침상에서 있는 대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느지막이 일어난 두 사람은 아침 겸 점심을 대강 먹고 서재로 나와서 한창 투전 삼매경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허연은 본시 투전은 즐기지도, 잘하지도 못했지만 욱과 같이 시간을 보낼 만한 놀이가 마땅치 않았고 내기에 걸린 벌칙도 만만치 않아서 모처럼 집중해서 패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이제 그만 패를 보이게. 아니면 판을 더 키워서 계속 하든가…….”
“판을 더 키우다니…… 뭘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가령…… 화산 원행을 갈 때에 나하고 같은 마차를 타고 간다든가…….”
욱의 속 들여다보이는 수작에 허연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패를 깠다.
“호패가 석 장, 작약이 석 장입니다.”
허연의 패를 본 욱이 키득키득 웃었다.
“자네, 전장에서는 그토록 술수가 신묘했다더니…… 투전은 영 허당일세.”
“저는 어렸을 때부터 투전패나 만지고 놀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또한…… 투전목 여섯 장 중에 호패가 석 장이면 패가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질 않습니까?”
점심 먹고 시작한 투전이 이번으로 네 번째 판인데 두 판 연속 지고 있는 상황이라 허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그런 허연을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던 욱이 여유만만하게 자기 패를 탁자 위에 펼쳤다.
“호패 석 장이 낮은 패는 아니지만 낙승을 하기엔 한참 부족하지. 호패 넉 장, 작약 두 장일세.”
“…….”
1승 3패라는 치욕적인 결과에 허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투전이라지만 이처럼 일방적인 패배는 그의 인생에서는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그럼 이것으로…… 다음 내 생일 전까지 휘명전에 두 번 놀러 오고, 입맞춤 포함한 마중이 세 번에…… 내 생일 연회에서 왼쪽에 앉는 것까지 확정이구먼.”
“설마 그것을 다 받아내실 작정이십니까? 제가 이긴 판에선 고작 딱밤 한 대 때린 것뿐인데요?”
“딱밤 한 대 때린 것뿐이라니? 자네한테 맞을 때 두개골 쪼개지는 줄 알았네.”
욱이 투덜거리며 아직도 벌건 이마를 손끝으로 긁적였다. 그러곤 탁자에 흐트러진 패를 모아서 척척 섞기 시작했다.
“한 판 더 하겠는가? 내가 이기면 화산에 오가는 내내 같은 마차로 움직이는 것이고, 자네가 이기면 마중 한 번 까주는 것으로 하고…….”
허연이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눈길로 욱을 슥 훑었다. 그러곤 욱이 움찔 몸을 사리는 순간, 그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았다.
“왜 이러는가?”
“소맷자락을 좀 봐야겠습니다.”
“어허! 지금 과인을 의심하는 것인가?”
욱이 벌컥 화를 내며 허연에게 잡힌 손목을 확 비틀어 뺐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허연이 왼손으로 욱의 멱살을 잡아서 탁자에 엎어버렸다. 그러곤 욱의 등을 무릎으로 누르고 팔을 사정없이 꺾어 올렸다.
“으악!”
“엄살 피우지 마십시오!”
“엄살이 아니라 팔이 빠질 것 같네! 투전에 지고 나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다니…… 자네, 저자에서 이러면 상종 못할 망나니로 찍혀서 투전장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되네!”
“허면, 패를 속이는 자는 어찌 됩니까?”
“내가 언제…… 무슨…….”
허연이 들은 척도 않고 욱의 소맷자락을 더듬었다. 그러곤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호패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이런 순 사기…….”
“어허!”
욱이 짐짓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적반하장으로 툴툴거렸다.
“패는 숨겼으나 그것을 써먹은 적은 없네. 애초에 자네 같은 하수를 상대로 내가 속임수를 썼겠는가?”
욱의 변명에 허연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투전패를 들어 보였다.
“오늘 투전에서 난 승부는 다 무효입니다.”
허연의 경기 몰수 선언에 욱이 펄쩍 뛰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는가? 자네는 이겨서 때릴 것 다 때려놓고, 내 포상은 무효란 말인가?”
욱의 반발에 허연이 고개를 저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폐하, 저자의 투전판에서 이런 짓을 하셨다간 큰일을 당하십니다. 저자의 주막에 앉아 있으면 손 한쪽 잃은 걸인들이 가게에 구걸을 하러 들어오는 것을 가끔 보는데, 대부분 투전판에서 얕은 속임수를 쓰다 된통 혼이 났던 자들입니다.”
“어허! 서방님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먼!”
더는 말 섞기도 지쳐서 허연이 투전장을 탁자에 픽 던졌다. 그러곤 일부러 욱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서방님께 정말 실망이 큽니다.”
허연이 별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에 욱이 등골이 오싹한 전율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허연도 자신이 말실수한 것을 깨닫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방 안에 어색하고 민망하고 긴장감 넘치는 침묵이 흘렀다. 이는 지난밤, 새벽까지 욱에게 시달렸던 허연으로서는 심히 부담이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여차하면 밖으로 뛰어나갈 심산으로 허연이 문 쪽으로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란 허연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욱의 가슴팍을 들이받고 말았다. 그런 허연을 욱이 이때다 싶어서 얼른 끌어안았다. 그러곤 힘에 부치는 전력질주로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고 있는 윤 내관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안에 고하지도 않고 이리 뛰어 들어오느냐? 내가 부르기 전엔 아무도 안에 들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거늘…….”
“폐, 폐하…….”
“황제의 침전을 함부로 범한 죄가 얼마나 큰지 몰라서 이러느냐? 너 때문에 귀인이 놀라지 않았느냐?”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폐하…….”
힘겹게 숨을 가다듬던 윤 내관이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허허…… 한숨을 토해냈다. 그때 금방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중에도 윤 내관이 바짝 마른 목을 쥐어짜서 방금 알아 온 따끈하고 긴급한 정보를 전했다.
“폐하, 승주가…… 승주가 도성에 있습니다.”
“승주가 누구냐?”
온 정신이 허연의 뒷덜미에 팔린 욱이 건성으로 물었다.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은 것 같은 그 무심함에 윤 내관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승주…… 왜, 공비마마의 그…….”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허연이 욱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허연이 윤 내관을 일으켜 의자에 앉히고 찬물 한 잔을 따라서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아서 윤 내관이 한숨 돌리기를 기다렸다.
“소인이…… 방금 전에 사신각에 수하를 보내 확인을 했습니다. 그 승주라는 자가 무호 장군의 수행인으로 따라와서 지금 사신각에 머물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켠 윤 내관이 맥 빠진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근래에 얻어 걸린 정보 중에서 가장 요긴한 알짜배기를 욱과 허연에게 고해 올렸다.
“허허…… 지척에 있는 사람을 수천 리 밖에서 찾고 있었으니, 참으로 등잔 밑이 어두웠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하마터면 사람 하나 찾는 데 몇 달이 걸릴 뻔했습니다. 휘명전에 인사를 들었을 때 늑대 무리 같은 부장들만 잔뜩 데리고 왔기에 그자들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헌데 자네는 그자가 도성에 있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허연의 물음에 윤 내관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보의 출처는 고해 올리기 곤란합니다. 용서하십시오.”
“…….”
윤 내관이 종일 이 전각, 저 전각 기웃거리며 온갖 얘기를 다 엿듣고 다니는 것은 황궁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인데, 새삼스럽게 정보의 출처 운운하며 대단한 정보통이라도 있는 것처럼 둘러대는 것이 웃겨서 욱이 킥 웃었다.
“어쨌든 그자가 사신각에 있다니 잘되었구나. 정안군 형님은 그자가 천하의 명필이고 명문장가라며 서화 한 점을 더 못 얻어서 안달을 하고, 공비는 3년이 지나도록 그자를 못 잊어 잠결에 이름까지 부를 정도니…… 얼마나 잘난 놈인지 궁금했었는데 궁금증은 신속히 풀게 되질 않았느냐? 당장 사신각에 사람을 보내서 데려오너라.”
“당장…… 말이옵니까?”
윤 내관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욱의 표정도 덩달아 뚱해졌다.
“왜? 당장은 안 되느냐?”
“지금 그자는 몸이 아파서 누워 있답니다.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기력을 좀 회복한 다음에 불러보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아니, 그럴 거면 뭣 때문에 이 시각에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왔단 말이냐? 며칠 있다가 그자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다음에나 고할 것이지?”
욱의 역정에 윤 내관이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인은 그저…… 폐하와 귀인께서 찾으시는 자가 이미 도성이 와 있다 하기에 한시라도 빨리 소식을 고해 올리고자…….”
“됐다! 그만 나가거라!”
욱의 신경질에 윤 내관이 호랑이한테 몰린 여우처럼 비실비실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허연이 욱에게 그러지 마시라고 눈짓을 하며 윤 내관에게 다가갔다.
“몸이 아프다니…… 어디가 안 좋은지는 알아봤는가?”
“긴 원행에 기력이 떨어져서 몸살이 났다고 합니다.”
몸살이란 말에 욱이 헹, 콧방귀를 날렸다.
“형님 친구 아니랄까 봐 골골하기는…….”
욱이 투덜거리며 침상에 털썩 누웠다. 그 모습을 마땅치 않은 눈길로 슬쩍 흘기던 허연이 다시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안되었구먼. 객지에 와서 몸이 아프면 마음도 덩달아 울적할 터…… 자네가 사신각 책임자에게 일러 그자를 잘 보살펴주게.”
“정안군께서 어제 사신각에 직접 드셔서 명을 내리신 터라 그곳 내관들이 이미 각별히 신경을 써서 보살피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가?”
윤 내관의 대답이 허연이 다소 마음이 놓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윤 내관이 방에서 나간 후, 창가에 기대서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잠시 바라보던 허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가 도성에 와 있다니, 그것도 궁에서 지척인 사신각에…… 이 사실을 공비가 알면 그 심정이 어떨까? 그토록 그리워하던 정인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아픈 마음에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안다고 해도 어차피 만날 방도라곤 없을 터, 오히려 안타까움만 더할 것인데…… 어제 이맘때 자신을 찾아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기분은 어떤 것이냐고 묻던 공비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해서 허연이 고개를 한 번 세게 저었다. 그러고는 침상에 누워서 밉살맞게 빈둥거리고 있는 욱을 힐끔 훔쳐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가?”
자신을 쳐다보는 허연의 눈길이 전에 없이 복잡해 보여서 욱이 물었다.
“그냥 봤습니다.”
무심하게 대꾸하며 허연이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 밖에 뭐 볼 것이 그리 많다고 아까부터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가? 이리 오게.”
“그러시는 폐하께서는 침상에 꿀단지라도 감춰놓으셨습니까? 어찌 종일 침상에서만 뒹굴거리십니까?”
허연의 핀잔에 욱이 힝……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내가 허구한 날 이렇게 노는가? 근 한 달 만에 어렵사리 시간을 빼서 하루 쉬는 것인데, 좀 뒹굴거리면 어때서?”
“허면 계속 그리 계십시오.”
“그러지 말고…….”
“그냥 주무시든가, 딴 거 하고 노십시오. 저는 생각할 일이 좀 있습니다.”
“귀인…….”
“거참!”
허연이 벌컥 짜증을 내며 욱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공비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심란한데, 정작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노닥거리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거슬렸던 것이다.
“귀인?”
갑작스러운 역정에 놀란 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연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는가? 갑자기…….”
“…….”
점차 시무룩해지는 욱의 표정에 허연도 민망한 기분이 들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침상으로 다가가 그 곁에 앉았다.
공비의 일은 욱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승주의 신분이 평민도 못 되는 영주 가문의 노비이니, 공비가 후궁에 들지 않고 대현성에 그대로 있었다고 해도 두 사람이 부부지연을 맺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두 해 더 같이 지낼 수는 있었겠지만 욱이 말한 대로 결국 공비는 신분이 비슷한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갔을 것이고 그 아픈 이별을 피할 방법은 없었을 터, 둘은 애초에 만난 것이 불운이고 서로에게 마음을 준 것이 잘못이었다.
“죄송합니다. 놀라셨습니까?”
“갑자기 정색을 하니까…….”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사과를 하면서 허연이 몸을 굽혀 욱을 꽉 끌어안았다.
허연이 까닭 없이 버럭 화를 내는 것도, 이렇게 바로 사과를 하며 안아주는 것도 처음이라서 욱이 허연에게 안겨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를 마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자네, 요즘 뭔가 심란한 일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아니기는? 그 승주라는 자와 공비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워서 이러는 것이 아닌가?”
허연이 고개를 들어 욱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어찌…….”
허연에게 욱은 언제나 처음 만났던 열아홉, 스물 즈음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덜 자란 어린아이였다. 물론 머릿속으론 이제 욱도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고 월국처럼 큰 나라를 무리 없이 이끌어갈 만큼 역량 있는 황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지난 7년의 세월은 어느 사이 사라져버리고 앞에 있는 것은 항상 처음 만난 그 즈음의 어린 욱이었다.
어리광에 생떼에…… 머릿속엔 먹을 궁리와 자신의 옷고름 풀 궁리밖에 없던 철없는 아이가 언제 자라서 자신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볼 정도가 되었나 싶어 허연이 낯선 사람을 보는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어찌 알기는? 얼굴에 다 나타나는데 뭘…….”
“그랬습니까?”
“귀인.”
욱이 허연을 옆에 눕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일은 내가 전에 말했듯, 어찌할 방도가 없는 일일세. 이제 와서 내가 공비를 사가로 돌려보낼 수도 없지만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무 씨 가문에서 공비를 노비와 맺어주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쓰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니?”
욱이 몸을 반쯤 일으켜 허연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상대의 신분이나 처지를 일일이 따져가며 하는 일은 아니질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폐하와 저의 관계는 공비마마와 승주의 그것보다 더 난감하질 않습니까? 그렇게 어려운 사람을 사랑한 것도, 다시 만날 방도도 없는데 잊지 못하고 애를 태우는 것도…… 고향에 있을 때 제 모습과 별반 다르질 않습니다.”
“…….”
허연의 말에 문득 그를 보내고 배 속이 텅 빈 듯 괴롭고 허전하게 보낸 4년이 떠올라서 욱의 표정도 덩달아 울적해졌다. 그때 내가 괴로웠던 만큼 이 사람도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지금은 기억도 희미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길고 힘든 시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싶고, 공비의 마음이 그 당시 내 심정과 같다면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그대는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가?”
“폐하께 없는 방도가 제게 있겠습니까?”
“자네 같은 사람에게도 방도가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
욱이 몸을 굽혀 허연에게 입을 맞췄다. 마음을 달래고 위로해주는 다정한 입맞춤에 허연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세상이라도 다 품을 것처럼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끔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나야 좋지. 그대가 가끔 서방님이라고 불러주면 더 좋고…….”
욱의 짓궂은 놀림에 허연이 그 가슴팍을 이마로 꿍 받았다.
“꿈 깨십시오. 그런 실수는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단둘이 있을 때라면 뭐 어떤가? 아까 자네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등골이 오싹 떨렸네.”
욱이 허연의 눈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서방님 소리 한 번 더 해보라는 듯 반짝이는 욱의 눈동자에 허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욱의 얼굴을 거칠게 밀었다.
“무슨 말만 하면 흥분해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시니, 무서워서 입이나 벙긋하겠습니까?”
신 내관이 미향궁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막 저물어서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즈음이었다. 신 내관은 오후부터 영운궁과 휘명전에 심어놓은 궁녀와 내관을 만나 지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오는 길이었다.
본시 황궁의 내관과 궁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궁 안에서 생활하면서 수십 년을 함께하는 자들이라 다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물론이요,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미향궁처럼 위세 있는 전각의 태감인 신 내관 정도라면 그간 돌봐주며 친하게 지내던 궁녀나 내관을 특정 전각에 심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로부터 각궁의 내밀한 일을 알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마, 소인 신 내관이옵니다.”
“종일 무엇을 하다 이제 오느냐?”
술잔을 기울이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던 향비가 신 내관을 힐끔 노려보고는 술잔을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어제 오늘 궁 안에서 있었던 일을 좀 알아봤습니다.”
신 내관의 대답에 향비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술이 몇 잔 들어가다 보니 만사 심드렁해져서 고작 공비 따위를 없애서 뭣하랴 하는 자괴감이 들었던 것이다.
“폐하께서는 오늘도 우화원 그자의 처소에 드셨더냐?”
“예, 마마…….”
“참으로 무정하신 분이 아니냐? 고작 남첩 하나 때문에 처자도 다 버리고 나 몰라라 하시니…… 하긴, 그자도 처자를 버리고 왔으니 통하는 바가 많으시겠지.”
“마마…….”
“그자가 궐밖에 나가 있을 때엔 가끔 들러 점심은 들고 가시더니…… 이젠 며칠이 지나도록 그림자도 아니 비치시는구나. 한때는 제2황자의 어미로 폐하의 총애와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내 처지가 이젠 촌구석 무부의 딸년인 공비의 그것과 다르질 않구나.”
향비가 한탄을 하며 빈 잔에 다시 술을 부었다. 어제 오후 인비와 현비가 일없이 놀러온 척 찾아와서 향비의 처가 식구들이 공비의 오라비에게 밀려 사신각에서 쫓겨난 일을 두고 슬그머니 비꼬고 돌아간 이후, 향비는 심사가 말도 못하게 틀어져서 눈길이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마마, 고정하십시오. 어찌 존귀하신 마마의 지체를 공비에 비하겠습니까? 듣기 참으로 민망하옵니다.”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후궁에게 무슨 지체가 있단 말이냐? 내 신세가 그늘에서 시들어가는 풀꽃보다 나을 것이 없질 않느냐?”
“폐하께서 지금은 옛정이 남아 저리 하시지만, 언제까지 그토록 애틋하시겠습니까? 우화원 귀인이 꽃 같은 미소년도 아니고, 해가 바뀌면 그 나이가 마흔이 아니옵니까? 곧 스스로도 민망해 멀리하시고 다시 마마를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
신 내관의 위로에 마음이 살짝 풀린 공비가 술 한 잔을 따라 상궁에게 전했다. 향비에게서 술 한 잔을 받아 마신 신 내관이 다시 한 번 향비에게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마마, 실은 소인이 오늘 영운궁의 궁녀에게서 해괴한 말을 들었습니다.”
“해괴한 말이라니? 그 경망스러운 계집이 또 무슨 사고라도 쳤다더냐?”
“공비가 어제 오후에 수발드는 궁인들도 다 떼어놓고 홀로 산책을 간다고 궁을 나서는 것이 수상쩍어 궁녀가 뒤를 밟았는데…….”
“지가 궐 안에서 가봐야 어딜 갔겠느냐? 왜? 황궁의 담장이라도 넘었다더냐?”
“한동안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척하다가 칠궁 밖으로 나가 청량전으로 가더랍니다.”
향비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신 내관을 쳐다보았다.
“청량전이라면…… 지금 그자가 머물고 있는 전각이 아니냐?”
“예, 마마.”
“공비가 궁녀 하나 없이 그자의 처소로 들어갔단 말이냐?”
“예, 미행하던 궁녀의 말로는 공비가 청량전에서 한 시진이나 있다가 우화원 귀인의 가마를 타고 영운궁으로 돌아갔답니다.”
“아니, 대체 공비가 무엇 때문에 그자를 찾아갔단 말이냐?”
최근 들어서는 황후보다도 더 신경을 거스르던 두 사람이 만났다는 얘기에 잔뜩 호기심이 동한 향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청량전 안은 온통 고 내관의 수하들이라 미행하던 궁녀가 그것까지는 알아보지 못한 듯싶습니다만…… 마마, 폐하의 후비가 사사롭게 사내를 만났다면 그것만으로도 보통 일은 아니질 않습니까?”
신 내관의 말에 향비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황제의 태도가 워낙 강경한 탓에 중신들도 입을 다물고 있지만, 황궁 안에 황제 이외의 사내가 눌러사는 것은 선대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화원은 배가 없으면 드나들지 못하는 섬이라 논외라고는 하지만, 그가 한 달에 한 번 칠궁에 들 때마다 온 황궁의 궁녀들이 다 튀어나와서 태화궁 주변을 배회하는 형국이니 풍기문란의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고, 중신들 중에서도 그것을 걱정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일개 궁녀와 염문이 돌아도 조정이 들고 일어날 판국에 황제의 후비를 처소에 들여 한 시진이나 사담을 나누다니, 이는 신 내관의 말대로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문제를 삼을 수 있는 일이었다.
“공비 그것이 날더러 사내 구경을 못해 환장을 했느냐고 욕을 퍼붓더니만, 정작 제년이 남몰래 사내의 처소를 들락거렸단 말이냐? 참으로 맹랑한 년이로다.”
향비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이 일을 빌미로 꼴도 보기 싫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호가 궐을 나온 것은 다음 날 이른 아침의 일이었다. 어제 점심, 저녁 두 끼를 든든히 먹고 기운을 차린 무호는 바로 의관과 향원궁 태감에게 퇴궐을 청했다. 하지만 황제께서 모처에서 쉬고 계셔서 바로 말씀을 올릴 수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와 향원궁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서야 궁에서 나올 수 있었다.
출궁 전에 누이를 한 번 더 보았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황제도 아침 일찍 조회에 들어가 직접 인사를 하지 못한 채 향원궁 마당에서 휘명전을 향해 큰절만 올리고 나온 터라 사신각에 들어서는 무호의 마음은 한편 섭섭하고, 한편 무거웠다.
“폐하께서 중신들과 변방의 병력 지원 문제를 의논하실 때에 형님도 부르겠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때 아씨를 한 번 더 만나 뵐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돌아오는 길 내내 무호의 표정이 침울해 있자 춘수가 눈치껏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무호는 귓등으로 듣는 기색도 없이 부장들이 숙소로 쓰고 있는 영춘당 내실의 문을 거칠게 밀었다.
“승주는 어찌 보이질 않느냐?”
내실의 침상이 비어 있는 것을 본 무호가 춘수를 돌아보았다.
“그 녀석은 저기 연못 건너편에 있는 수월당이란 별채에 있습니다.”
춘수의 대답에 무호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아프다면서? 아픈 놈을 뚝 떨어진 별채에 홀로 던져놓았단 말이냐?”
무호의 수하 부장들은 전장에 풀어놓으면 일당십의 용맹을 자랑하는 늑대 같은 무사들이었지만 평상시엔 먹고 노는 것이나 할 줄 알았지, 달리 요긴한 구석이라곤 없는 거칠고 무심한 사내들이었다. 전장에선 주군이며 사석에선 큰형인 자신이 다쳐서 쓰러져도 며칠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안 뵈는 무정한 놈들이니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글쟁이니, 약골이니 놀리기 바빴던 승주를 제대로 보살폈을 리 만무했다.
“아픈 아이를 골방에 던져두고서 네놈들은 그간에도 밖으로만 돌아다녔더냐? 승주는 네놈들이 어딜 다치거나 몸이 아프면 힘들거나 귀찮은 내색 한 번 없이 곁을 지키고 수발을 들었거늘, 열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도성 구경이 그렇게 바쁘고 급했단 말이냐?”
“혀, 형님…….”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 그렇게 도성이 좋고 구경이 신나면 도성에 눌러살아라! 내 당장 군적에서 네놈들 이름을 빼줄 것이니!”
무호의 앞뒤 없는 호통에 춘수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승주는…… 여기 내관들이 잘 보살피고 있습니다.”
“사신각 내관들이 그 녀석의 동료고 형제냐? 생면부지의 내관들이 승주를 돌보는 동안 네놈들은 그 녀석에게 찬물 한 잔 떠다 준 적이 있었느냐?”
“…….”
무호의 꾸지람에 말문이 막힌 춘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수월당이 어디냐? 앞장을 서라!”
무호가 버럭 소리치며 춘수의 어깨를 떠밀었다.
수월당은 사신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별당이었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넘칠 듯 흐르는 수로를 건너 작은 벚나무 숲을 지나야 수월당의 꽃담을 볼 수 있었고, 그 담 안쪽으론 황궁의 정원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사신각의 전각이 모두 번듯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중에서도 수월당은 종친과 고관들의 모임이나 연회도 자주 치러지는 곳이라서 사신각의 내관들이 각별히 신경을 써서 관리를 하며 고위 종친과 제후가 아니면 거처로 내어주지도 않는 특실이었다.
춘수를 앞장세우고 수월당의 담장 안으로 들어선 무호가 걸음을 멈추고 정원을 슥 훑었다.
“승주가 여기에 있느냐?”
“아, 글쎄, 그간 승주와 편지질을 하던 도성 샌님이 진짜 높은 분이었답니다. 정안군이라고…… 직함은 상서령에, 황제 폐하의 사촌 형님에, 그 부인은 나라 안 최고 미인이라는 그 어른 말입니다.”
“…….”
“승주 그놈이 노상 글이나 끼적이고 낙서나 하고 뻑하면 넋 놓고 하늘이나 쳐다보기에 영 허술하게 봤는데, 이제 보니 수완이 보통이 아니지 뭡니까? 언제 그렇게 굵은 연줄을 잡았는지…….”
사신각 별채인 수월당에 승주가 머물게 된 연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사이 전각을 청소하던 궁녀 둘이 그 앞으로 달려 나왔다.
“부장님 드셨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장님들을 뫼셔 올까 어쩔까…… 망설이던 참이었습니다.”
궁녀들의 말에 춘수가 힐끔 무호의 눈치를 살폈다.
“왜? 승주가 뭐, 어디…… 안 좋은가?”
“의관 나리들께서 푹 쉬며 안정을 취하라고 그렇게 이르고 가셨는데 통 눕질 않고 아침부터 서화만 그리고 있습니다. 약도, 점심도 두고 가라며 붓을 놓지 않으니…… 저리하다가 정신이라도 잃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허, 저런…….”
이러면 승주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또 자신에게 불벼락이 떨어지겠다 싶어서 춘수가 허둥거렸다. 그런 춘수를 옆으로 밀고 무호가 전각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수월당의 큰 방은 어지간한 전각을 하나 다 튼 정도의 넓이였다. 침상과 창에는 단풍잎 무늬가 들어간 아름다운 비단 휘장이 드리워 있었고, 하얀 비단을 바른 사면의 벽엔 황실 소장품인 진귀한 고서화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기름을 바른 듯 반짝이는 마룻바닥엔 수십 장의 화선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방 안에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에 승주가 붓을 쥔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문가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무호를 보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퇴궐을 하셨습니까?”
승주가 일어나려다가 비틀거리며 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뭘 하고 있느냐?”
무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화선지가 생겨서 소일 겸……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승주의 대답에 무호가 널려 있는 화선지를 슥 훑었다. 가지가 부러진 노송, 바람에 휘날리는 버드나무, 무주공산에 홀로 뜬 조각달, 어딘가로 떠나는 철새…… 금방 쓰러질 것처럼 헐떡거리면서 이따위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구나 싶어서 무호가 승주에게 눈을 부라렸다.
“의관이 약 먹고 푹 쉬라고 했다던데, 이걸 꼭 지금 해야 되느냐?”
무호의 꾸지람에 승주가 그제야 들었던 붓을 내려놓고 흩어진 그림을 대강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한숨 한 번 쉬고 그림 한 장 집어 들고, 앓는 소리 한 번 하고는 그림을 곱게 접어 탁자에 얹어놓는 승주를 못마땅한 눈길로 지켜보던 무호가 다가가서 그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곤 대역죄인 끌고 가듯 거칠게 침상으로 잡아끌었다.
“왜 이러십니까?”
침상 위에 거의 던져진 승주가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끙끙거리자 보다 못한 춘수가 그 곁으로 다가가서 승주를 막아섰다. 그간 무호가 별것 아닌 일로도 승주를 윽박질러서 주변 사람들까지 얼어붙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잡아 흔들거나 손찌검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춘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죄 없는 애한테 화풀이를 하십니까? 승주한테 맞아서 자리보전하고 누워 계셨습니까?”
춘수가 오랜만에 무호에게 말대꾸를 하며 덤볐다. 하지만 무호는 춘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승주만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형님!”
“넌 바닥에 어질러진 것 치우고 나가서 약이나 받아 오너라.”
무호가 그렇게 말하며 춘수의 멱살을 잡아 저만치 밀어버렸다. 그러곤 침상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사람만 남은 침실에 침묵과 함께 침울하고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승주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아픈 마음을 움켜쥔 채 잔뜩 웅크리고는 거친 숨만 내쉬었고 무호도 기분이 언짢아서 춘수가 대강 뭉쳐서 탁자에 올려놓고 간 그림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지난 몇 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던 상대가 정안군이었느냐?”
“그런가 봅니다.”
“상서부의 직급 낮은 시랑이라더니?”
“그분이 그렇게 적어 보내시니, 저야 믿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시무룩하게 대꾸하며 승주가 허파를 토해낼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끊어라.”
“…….”
“네 처지에 어찌 황족과 글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하겠느냐? 잘못하면 공연한 구설에 휘말릴 것이고, 주제를 모르는 종놈이라 하여 너만 죽어날 것이다.”
무호의 무심한 충고에 승주가 벽에 붙어 앉아서 몸을 더욱 웅크렸다. 그 모습을 본 무호가 땀에 젖어 어지러운 승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니…… 그림이나 몇 장 던져주고 그만둬라.”
“장군, 저는…….”
“싫으냐? 못하겠느냐?”
“아닙니다…….”
신음하듯 대답하며 승주가 기력을 잃고 자리에 누웠다.
탕약 시중을 드는 내관과 함께 큰방으로 들어서던 춘수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채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무호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잠시 허둥거리다가 내관을 먼저 앞으로 밀어 보냈다.
탕약 쟁반을 들고 주춤주춤 다가오는 내관을 본 무호가 승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좀 전부터 벽을 보고 돌아누워 미동도 없는 승주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일어나 약이나 먹어라.”
“…….”
“말이 들리질 않느냐?”
무호가 짜증을 내며 승주의 옷깃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제야 승주의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은 것을 깨닫고는 당황해서 움켜잡았던 옷깃을 놓고 말았다.
“송구합니다만 지금은…….”
승주가 젖은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문질러 닦으며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겠습니다. 약은 뒀다 먹을 것이니 두고 가라고 하시고 장군께서도 그만 돌아가…… 쉬십시오.”
“뭣 때문에 탕약도 못 먹을 지경이란 말이냐? 정안군과 편지질 하지 말라 했다고,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이렇게 눈물바람이냐?”
무호의 인정머리 없는 타박에 승주가 새빨갛게 부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맹수 같은 무호의 눈빛에 밀려서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그분께는…… 돌아가기 전에 인사를 올리고 그간의 무례도 사죄드리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떨리는 승주의 음성에 무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는 내관에게서 직접 탕약을 받아 들었다.
“마셔라.”
“…….”
“내가 먹여주랴?”
무호의 강권에 못 이겨 승주가 약사발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사약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힘겹게 약을 넘겼다.
“형님, 승주는 제가 돌볼 것이니 형님도 그만 처소로 돌아가 쉬십시오. 퇴궐을 하셨지만 형님도 몸이 완전히 회복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약 먹고 돌아누운 승주를 여전히 곱지 않은 눈길로 노려보는 무호를 춘수가 조심스럽게 설득했다. 무호는 심기가 잔뜩 불편한데, 승주는 또 그렇게 싹싹한 성격이 아니니 저러다 환자에게 손찌검이나 하지 않을까 겁이 났던 것이다. 부장들이야 무호에게 한두 대 얻어맞아도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었지만 싸움질과 거리가 한참 먼 승주는 빗맞아도 중상을 면할 길이 없었다.
“넌 나가거라. 승주와 할 말이 있다.”
“나중에 하십시오. 애가 지금 파김치가 되어 쓰러졌는데 또 무슨…….”
“나가라니까!”
호통을 쳐서 춘수와 내관들을 쫓아낸 무호가 힘없이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승주를 돌아보았다.
“네 마음이 어떤지는 짐작이 간다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제 마음이 어떤지 짐작이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
“장군께서는 영주님의 장자이며 후계자로 장차 대현성을 물려받을 분이십니다. 헌데 술주정뱅이 마부의 자식인 제 심정을 어찌 짐작하신단 말입니까?”
승주의 날 선 반문에 무호가 흠……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께서는 약관에 호서성 영주의 따님과 혼인하셔서 금슬 좋기가 한 쌍의 원앙과 같으신데, 사랑하는 여인을 수천 리 밖으로 떠나보내며 배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제 심정을 어찌 아시겠습니까?”
“…….”
“또한 장군께서는 주변이 모두 형님, 아우님 하는 절친한 친구들로 전장에서 장군을 위해 목숨을 버릴 자가 수백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렵사리 하나 얻은 친구마저 버려야 하는 제 마음을 어찌 아신단 말입니까? 위로하고자 하시는 뜻은 고맙지만…… 그런 말씀이 저를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승주가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치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막으며 간신히 말을 맺었다. 승주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서글픈 한탄에 말문이 막힌 무호가 답답한 마음에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평생에……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원망스럽고 밉습니다. 죄인의 딸자식이라 하여 노비가 되어 끌려왔으면 그냥 그대로 사실 일이지, 무엇 때문에 천한 사내와 인연을 맺었으며 자식은 보았는지…….”
“네 이놈!”
무호가 엄한 눈길로 승주를 내려다보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승주는 이미 설움이 목까지 차올라서 결국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멋모를 때엔 내가 노비의 자식이고 죄인의 자손이라도 가진 재주가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지려니…… 보고 싶은 책이나 보고, 그림이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나 가끔 볼 수 있으면 그것도 내게는 복이려니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미천한 신분에 묶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이렇게 태어났는가 싶을 뿐이니…… 이번 생은 더는 살고 싶지도 않고, 살 자신도 없습니다.”
승주는 생각이 깊고 신중한 성품이었다. 게다가 노비의 자식이라 어려서부터 상처가 많아서 사람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도 않았고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승주를 봐왔지만, 이렇게 통곡을 하며 제 신세를 한탄하고 살고 싶지 않다고까지 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호의 당혹스러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약 먹는 것만 보고 그만 나갈 것을…… 내가 아픈 놈을 너무 심히 다그쳤나 보다 싶어서 무호가 흐느끼고 있는 승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승주야…….”
“…….”
“울지 마라. 내가…… 말이 좀 심했다.”
무호가 땀에 젖은 승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전에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랬다. 흐느껴 우는 승주의 모습이 예전에 가끔 광이나 부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서럽게 울곤 하던 제 어미의 모습과 똑같아서 무호의 마음도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가 설마 너를 평생 노비로 살게 두겠느냐? 아버지께서는 나라에 죄 지은 자의 자손이니 사사롭게 면천시켜줄 수 없다고 하시지만, 이번에 돌아가면 말씀을 잘 드려서 네 이름을 노비 문적에서 빼주마. 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다면 혼인도 시켜줄 것이고 살 만한 집도 한 채 내어줄 것이다. 여태 하던 대로 성 안의 문서 관리를 담당하면 녹봉도 같은 일을 하는 벼슬아치만큼은 쳐줄 것이고…… 이것저것 다 싫으면 대현성을 떠난다고 해도 붙잡지 않으마.”
승주가 퉁퉁 부은 눈을 뜨고 무호를 올려다보았다.
“장군…….”
“그러니 어미가 원망스럽다는 둥, 살고 싶지 않다는 둥……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네 어미가 숨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네 걱정으로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거늘,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슬퍼하겠느냐?”
무호의 묵직한 꾸짖음에 승주가 면목이 없어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호는 예전부터 승주 모자를 지켜보며 보살피고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곤 했다. 어미의 무거운 물 항아리를 슬쩍 들어주기도 하고, 성 안 아낙들과 함께 궂은일을 할 때면 따로 불러내 내당에서 편한 일을 하도록 해준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주정뱅이 아비에게 승주 모자가 고초를 당할 때면 달려와 크게 꾸짖으며 아비를 만류하고 종국엔 이웃 성읍의 군마장으로 쫓아 보낸 이도 무호였다. 어려서부터 귀한 종이며 먹과 붓을 마음껏 쓰도록 해준 이도 무호였고 좀 커서는 조정에 보내는 장계를 쓰도록 해준 이도 무호였으니, 비록 서운하고 두려울 때도 많았지만 무호는 승주에게는 믿음직한 큰형님이며 동시에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서른인데, 살면서 괴롭거나 슬픈 일이 한 번도 없었겠느냐?”
“장군께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네 어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많이 쓰였었다.”
“…….”
“죄인의 딸이라 아비는 참형을 당하고 어미는 목을 매 자결하고…… 열여섯 어린 나이에 멀고 험한 변방에 노비로 끌려왔으니 그 심경이 얼마나 참혹했겠느냐? 그래도 네 어미는 꾹 참고, 견디며 살았다.”
“송구합니다.”
승주가 눈물이 끝없이 흐르는 눈을 팔로 가렸다.
“아파도 어찌하겠느냐? 살다 보면 다 다치게 되어 있는 것을…… 내가 어리고 어리석어서 네 어미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지만, 너는 지켜주마.”
그렇게 말하며 무호가 군데군데 먹물이 든 승주의 마른 손을 하염없이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