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외출 (7/16)

제6장

외출

며칠 전에 내린 가을비로 공기는 금방 씻어낸 듯 맑았고 수룡천에는 맑은 물이 넘칠 듯 풍족하게 흘러내렸다. 또한 나라 안에서 연중 가장 큰 행사인 황제의 탄신일이 불과 이레 남짓 남은 때라 수룡천변의 상가는 설이나 중추절만큼 인파가 넘치고 활기가 가득했다. 특히 이번 황제의 생일은 황후의 황자 출산과 그 경사가 겹쳤기 때문에 황궁 앞 광장에는 백성들을 위한 창극과 기예 무대를 설치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여느 때보다 훨씬 풍족한 술과 곡식이 백성들에게 내려질 것이란 소문이 돌아서 황성 인근은 늦가을의 정취와 큰 잔치에 대한 기대로 한껏 술렁이고 있었다. 

“자네, 어제 저녁에 대흥루 안마당에서 벌어진 검술 대회 예선을 보았는가?”

“나는 그저께 있었던 격투기 예선만 봤네. 중걸 그자의 힘이며 기술이 참으로 대단하더구먼. 큰 이변이 없으면 격투 경기에선 이번에도 그자가 금 거북이를 가져갈 듯싶었네.”

천변의 객잔에 모여 떠들던 한량들의 대화가 요즘 한창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대흥루 주최 무술 대회 이야기로 넘어갔다. 대흥루 주최 무술 대회는 3년 전부터 황제의 생일 전날을 결승전으로 잡아놓고 큰 잔치의 흥을 한껏 돋우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그 예선이 한창이었던 것이다.

“에그…… 어제 예선을 보지 못하다니, 참으로 아까운 구경을 놓쳤네. 천운상단 수석 무사로 지난해 검술 대회에서 3위를 했던 길명이 이름 없는 변방의 촌놈에게 패해서 예선 탈락을 했는데, 그 대결이 정말 볼 만했었네.”

“나도 얘기는 들었네. 길명이를 꺾은 그자가 대현성에서 온 사절단의 일원이라며?”

“영재라고…… 대현성 상장군 무호의 부장이라더군.”

대현성에서 온 장사들 얘기에 한량들의 눈이 총총하게 반짝였다.

“허허…… 대현성이 험한 변방인데다 예로부터 장사와 장수가 많은 곳이니, 비록 이름 없는 무사라도 고수가 많은 모양일세.”

“내가 들은 말로는 천운상단의 단주가 무호에게 대회 참가를 직접 권유했는데, 나라의 녹을 먹는 장수가 잡인들의 여흥에 참가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며 거절을 했다는구먼. 대신 우승 상금이 황금 닷 냥이란 말에 그 부장들이 떼로 몰려나와 대회를 온통 휘젓고 있다네.”

“대현성이 한 번 오고 가기가 힘든 곳이라 그런가…… 무호 일행이 도성에 꽤 오래 머물 모양이네.”

“광윤이에게서 들은 말로는 폐하께서 당신의 탄신일까지는 도성에 머물라고 무호에게 직접 권유를 하셨다네.”

“거 참, 덕분에 올해 대흥루 주최 무술 대회에 구경거리가 넘쳐나니, 이 또한 황은이로구먼.”

건너건너 자리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허연이 허허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그러곤 맞은편에 앉은 고 내관의 빈 잔에 맑은 죽순주를 가득 따랐다.

“어딜 가나 무술 대회 얘기뿐이군. 그 대회가 꽤나 구경거리가 되는 모양일세.”

“말도 마십시오. 대흥루 무술 대회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꾼들은 모두 모여드는 행사인데다 종목도 격투, 검술, 궁술로 다양하고 예선만 거의 열흘이라, 이맘때면 저자의 관심은 온통 그쪽으로 쏠립니다. 그러고 보니 귀인…… 아니, 나리께서는 아직 한 번도 구경을 하신 적이 없으시겠습니다?”

“그렇구먼. 내가 황성에 머문 것도 짧은 시간은 아니었는데…….”

“하오시면 요번에 결승전을 보시지요. 소인이 천운상단 포목부의 꽤 중요한 고객이니 부탁을 하면 결승전 날 경기가 한눈에 보이는 좋은 자리를 내어줄 것입니다.”

“그날이 폐하의 생신 전야인데 내가 황궁 밖으로 나올 수 있겠는가?”

허연이 명경같이 맑은 물이 발치에 닿을 듯 찰랑찰랑 흐르는 수룡천으로 눈길을 돌렸다. 무술 대회라…… 점잖은 궁중 예악이나 궁녀들의 화관무 따위보다는 격투나 검투 경기 쪽이 훨씬 욱의 취향일 터, 잠시 시간을 내서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허연이 혼자 고개를 저었다.

“결승전이 대화문 앞으로 옮겨온 후부터는 폐하께서도 문루에 오르셔서 친견을 하시긴 하십니다.”

“그런가?”

“하지만 문루와 경기장이 멀고, 진짜 결승전은 밤늦은 시각에 벌어지니…… 현장감은 개뿔, 제대로 뵈는 것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작년, 재작년은 안개가 몰려와서 시작도 못한 채 파장이 났고…….”

그렇게 툴툴거리며 고 내관이 앞에 놓인 죽순주를 홀짝 들이켰다.

황제의 생일이 불과 이래 남짓 남은 터라 황궁 안팎은 잔치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내관들은 많고 많은 황궁 내의 전각을 광이 나도록 공들여 청소하고 새로 단장했고, 구석진 곳의 작은 정원까지 흐트러짐 없이 매만졌다. 큰 연회가 열리는 황룡전과 대조전엔 새로운 비단 휘장이 걸렸고, 옥좌 아래엔 커다란 호랑이 가죽이 깔렸으며 화려한 야회를 위한 꽃등과 종이꽃이 하루에도 몇 수레씩 실려 와 큰 마당에 부려졌다.

잔치 준비로 번잡한 와중에 휘명전에서는 지난 엿새 사이에 두 차례나 긴급한 회의가 열려서 동북부 변방에 5만 규모의 병사를 증원하기로 결정을 했고, 이후로는 전국의 성읍에서 군사와 비용을 각출하는 일로 논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어느 성에서 몇 명의 군사를 차출할지, 군비의 분배는 어떻게 할지, 5만 대군을 통솔할 총장군엔 누구를 임명할지를 놓고 휘명전의 회의실에선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길고 격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허연도 그간 대현성에서 보내온 3년간의 장계를 살펴보고 장성 밖 이민족들에 관한 저술을 찾아보다가 머리도 아프고 답답하기도 해서 잠시 궁 밖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이었다. 

“하오시면…… 오늘 구경을 하시지요. 오늘도 날이 저물면 대흥루 안마당에서 예선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날 저물기 전에 환궁하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나왔으니…….”

“점심때도 지나서 느지막이 나오셨는데 벌써 들어가시려고요? 하늘도 청명하고 바람도 이렇게 선선한데 날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간 황룡전과 대조전 등 주 연회장의 장식을 감독하느라 업무가 과했던데다 향비와 연비로부터 새로운 예복을 지어내라는 닦달에 시달리며 한편으로 허연의 예복까지 짓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던 고 내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격투나 검투 경기가 딱히 고 내관이 열중하는 종목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궐 밖에 나왔으니 뭐라도 재미있는 일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폐하께서는 종일 휘명전의 회의실에 붙들려 계신데 나 혼자 나와서 재미있는 구경을 하고 다니자니 좀 죄송스럽네.”

“소인도 그것이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고 내관이 허연의 빈 잔을 채우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어느새 빈병이라 허연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손짓으로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술 한 병 더 가져오게. 민어구이와 볶은 국수도 내오고…….”

추가로 술과 음식을 주문한 고 내관이 허연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아직은 환궁하기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볶은 국수가 유명한 집이니 맛이나 보시지요.”

고 내관의 권유에 허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승주라는 자는 아니 부르십니까? 폐하께서도 그러시지만 어떤 자인지 궁금해서 저도 몸살이 나겠습니다.”

“나 또한 진즉에 불러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었으나…… 몸살이 악화되어 잠결에 헛소리를 할 정도라니 어찌하겠는가? 지금쯤은 다소 회복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먼.”

“거 참…… 얼마나 영민한 자인지는 모르겠으나 몸은 영 시원찮은가 봅니다.”

고 내관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볶은 국수를 작은 접시에 덜어서 허연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민어구이도 살집 두툼한 부분을 골라 접시에 덜어 담았다.

“공비마마의 정인이라니 소인은…….”

“어허!”

허연이 낮은 음성으로 고 내관을 꾸짖었다. 그제야 고 내관이 자신이 우화원이나 청량전의 한적한 정자에 나와 앉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득한 수룡천변 객잔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술이 좀 과했나 봅니다.”

“항시 조심하고, 특히나 그 일은 절대로 입에 다시 올리지 말게.”

“예, 마마…… 아니, 나리.”

말실수를 하고 다소 풀이 죽은 고 내관에게 허연이 다시 술 한 잔을 건넸다. 고 내관이 각 전각의 단장을 맡아서 얼굴 볼 틈도 없이 바쁘게 다니는 것이며 새 옷을 지어 내라는 후궁들 성화에 시달리는 것은 허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숨이나 돌리게 해주려고 일부러 데리고 나온 것인데 자신의 꾸지람에 황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이 보기 딱해서 허연이 고 내관이 좋아할 만한 일로 화제를 돌렸다.

“영운궁의 예복은 어찌 되어가는가? 또한 화산의 사냥터에서 입으실 만한 의복도 필요할 것인데…….”

허연의 물음에 고 내관이 갑자기 생기를 되찾아 얼른 고개를 들었다.

“예복은 이미 완성이 되었고, 사냥복도 두 벌을 준비 중인데 오늘 내일 중으로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약소하나마 그것이라도 그분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군.”

“그분이 안팎으로 장군감이시지만 소인이 지어 올린 예복은 틀림없이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아주 자신만만일세?”

“소인이 지난봄에 아주 아름다운 푸른 비단을 구해두었는데, 그것이면 공비께 잘 어울릴 듯싶지 무엇입니까? 하여 그것으로 옷을 짓고 은실로 소매와 옷깃에 빗살무늬를 넣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기품 있고 아름다운 작품이 나왔습니다. 제가 만들어놓고도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은 걷어 마마께 올리고 공비께는 다른 예복을 지어 올리고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기운을 되찾은 고 내관의 너스레에 허연이 허허 웃었다.

“사람 싱겁기는…… 마마의 예복이 내게 맞을 리 있는가?”

허연의 말에 고 내관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깨 넓이며 기장이며…… 공비마마와 마마께서는 치수가 거의 같으십니다.”

“…….”

그러고 보니 일전에 공비가 청량전으로 찾아왔을 때 눈높이가 거의 비슷했던 것이 떠올라 허연이 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욱은 워낙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서 그 앞에선 자신이 왜소하고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았지만, 공비와 치수가 같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공비는 여인인데 어깨너비가 비슷하다니…… 그간 정원 산책이나 하며 게으름을 피워서 몸이 부실해진 것인가 생각하며 허연이 자신의 어깨를 슬쩍 더듬었다.

“하오나 역시 소인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마마의 예복이지요. 올해 예복은 짙은 청색 비단에 백은으로 수를 놓고 소매와 어깨는 은여우 털로 장식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옷입니다.”

“자네 실력과 안목은 나도 잘 알지만…… 너무 요란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요란이라니요? 이번 예복엔 꽃무늬도 없고, 울긋불긋한 색조도 없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지만…….”

고 내관이 자신의 예복 얘기를 하면서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이 수상쩍어서 허연이 술 한 잔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거기에 일전에 폐하께 하사받은 흑진주로 깃과 가슴에 장식을 넣으면 마치 목걸이를 하신 듯 보일 것입니다. 아, 비녀는 마노와 흑진주를 주재료로 해서 벌써 제작이 끝났습니다.”

이번 황제의 생일 축하연에서 입을 예복에 화산 행차 때 입을 나들이복, 거기에 실내복, 거기에 침의…… 고 내관의 끝없는 의복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보름 행차에 옷을 백 벌은 챙겨 갈 기세라 허연은 그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숨만 폭폭 내쉴 뿐이었다.

“어이쿠, 벌써 시각이 이리 되었네. 가서 좋은 자리 잡으려면 이만 일어나야겠구먼.”

“그런가? 내 대흥루 지배인에게서 들으니 오늘은 지한이가 선수로 나설 차례라더군. 지한이라면 단주의 호위대장으로 대흥루 무사들 중에선 실력이 다섯 손가락 안쪽이 아닌가?”

“그런가? 그간 감춰두고 통 내놓질 않던 단주의 호위대장까지 대회에 나선다니…… 이번에 대흥루에서 작정하고 바람몰이를 하는구먼.”

술과 저녁을 함께 들면서 날 저물기만 기다리던 한량들이 어느새 어둑한 하늘을 보고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 출전하는 대현성 무사는 없다던가? 검 쓰는 것이 투박하지만 군더더기 없고 힘이 넘치는 것이, 내 맘에는 딱 들더구먼.”

“대현성 수행 무사들 중에 이번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한 자가 대여섯 명은 된다니 오늘도 나서는 자가 있겠지. 무호 그자가 대회에 나섰으면 참으로 볼 만했을 텐데…… 어제 그자도 예선을 구경하러 나왔었는데 덩치가 산만 하고 눈동자가 부리부리한 것이 영락없이 사람으로 둔갑한 호랑이의 형상이었네.”

“그런가? 허면 어서 가보세. 늦으면 대흥루 문 안에도 못 들어가고 밀려날 것이니…….”

탁자 두 개를 붙여놓고 연신 떠들어대던 대여섯 명의 한량들이 그렇게 떠들며 객잔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객잔의 손님 반이 그들을 따라 우르르 몰려 나갔다.

아무리 무술 대회가 큰 구경거리라고 해도 고작 예선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 나가는 것을 보니 화제는 화제인가 보다 생각하며 허연이 고 내관의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그때, 잠깐 딴생각에 잠겨 있던 고 내관이 고개를 들었다.

“슬슬 날이 저물어가니 이만 환궁을 하시겠습니까?”

“이 병만 비우고 일어나세.”

“그리하시지요. 하온데…… 여기서 제 가게가 멀지 않으니 잠시만 들렀다가 가면 아니 되올지…….”

“그야…….”

수룡천을 따라 한 식경만 걸어 올라가면 나진옥이고 어차피 궁에 가는 길이라 허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가게에 볼일이 있는가?”

“향비와 연비께서 예복 독촉을 득달같이 하시니 나온 김에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지 확인을 좀 했으면 해서요.”

“아…….”

“그리고 마마의 나들이복과 침의가 얼추 완성이 되었을 것이니 가셔서 한 번씩 쫙 입어보십시오.”

고 내관의 말에 허연이 마시던 술에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고 내관은 자긍심 높은 의복 장인으로 의복을 자신의 작품으로 여기는 만큼 그 마무리에 있어서 여간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새로 제작하는 예복은 그 정도가 심해서 완성되기 며칠 전부터는 허연까지 덩달아 시달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자네가 이미 내 치수를 환히 알고 있거늘 뭘 굳이…….”

“나들이복과 사냥복은 소인이 전에 지어 올린 일이 없으니 입어보셔야 옷이 제대로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침의도 세 벌을 새로 지었는데…….”

“아니, 대체 옷을 몇 벌이나 지었는가? 그냥 예복이나 한 벌 새로 하지 뭘 그렇게까지…….”

“그것이 될 말이옵니까? 마마의 첫 원행인데 나들이복도 아름다워야 하고, 사냥을 하실 때에도 누구보다 돋보이셔야지요. 그래봐야 다 합쳐서 스무 벌 남짓입니다.”

새로 지은 옷이 모두 스무 벌 남짓이란 말에 허연이 숨을 몰아쉬었다. 고 내관이 지금은 잠깐 들렀다 가자고 자신을 꼬드기지만, 이대로 나진옥에 끌려 들어갔다간 예정에도 없는 외박을 하게 될 것이 거의 기정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네만 고 내관, 옷은 다음에 입어보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우리 대흥루에나 가세.”

이대로 나진옥에 끌려 들어가면 끝장이란 생각에 허연이 얼른 말을 돌렸다.

“아니, 좀 전엔…….”

“대회에 대현성의 무사도 참가를 한다고 하고…… 무호도 온다니 갑자기 궁금하구먼. 내가 매일같이 나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나온 김에 보고 갔으면 싶네. 혹, 지금 가도 자리가 있겠는가?”

가게에 가서 옷 좀 입어보자니까 싫어서 이러는구나 싶어서 다소 서운하기는 했지만, 허연과 함께 무술 대회 구경을 하는 것도 처음이라 고 내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소인이 그간 천운상단에서 팔아준 비단이 얼마인데요? 자리가 없으면 단주라도 밀어내고 마련해줄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허연과 고 내관이 천운상단의 본거지인 대흥루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대흥루의 큰 마당은 인파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사람이 꽉 들어차서 종이 한 장도 더는 끼워 넣을 틈이 없는 문 앞에서 허연이 걸음을 멈추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 우리가 너무 늦게 온 모양일세.”

“늦다니요? 아직 첫 번째 경기도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요?”

고 내관이 마당이 미어터질 정도로 몰려든 구경꾼들을 넌지시 넘겨다보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래갖고서야 문 안으로 한 발 들여놓지도 못하겠구먼. 예선도 이 지경이면 결승전은 엄청나겠네그려.”

“그러니 결승은 대화문 앞으로 옮겨 온 것이지요. 도성 백성들이 다 몰려나오다시피 난리 북새통이니 비록 넓다고는 하지만 객잔 앞마당에서 어찌 그 큰 대회를 치르겠습니까?”

고 내관이 허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객잔의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십시오. 객잔을 통해 들어가는 관계자 전용 출입구가 따로 있습니다.”

대흥루 객잔 1층은 바깥만큼이나 북적이고 있었다. 객잔 1층은 바닥보다 반 층 정도 높아서 마당 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서도 경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객잔에 들어선 고 내관이 창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 모퉁이를 돌아 성큼성큼 걷더니 복도 막다른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방문 양옆에 거한의 문지기가 둘이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문지가 하나가 고 내관을 으르듯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어떻게든 안마당으로 들어가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구경꾼들 때문에 그들도 며칠째 시달려서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지기의 거친 태도에 전혀 주눅 든 기색 없이 고 내관이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안에 포목부 주 대인이 있는가?”

“주 대인은 어찌 찾으십니까?”

“그것은 주 대인에게 직접 말할 것이니 일단 찾아오게. 나진옥의 고 내관이 왔다 하면 군소리 없이 나올 것이네.”

나진옥의 고 내관이란 말에 문지기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황성 안에서 소요되는 각종 물품을 유통하는 천운상단에서도 비단을 비롯한 각종 옷감을 취급하는 포목부는 가장 중요하고 덩치가 큰 부서였다. 게다가 나진옥은 천운상단에서 들여오는 비단 중 가장 비싸고 귀한 것이 최우선으로 들어가는 곳으로 도성 안에서 제일 중요한 거래처 중 한 곳이었던 것이다.

상단에서 허드렛일을 돕는 하인들치고 나진옥에 비단 심부름 한두 번 다녀보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들도 나진옥의 위상을 익히 알고 있었고, 직접 본 적은 없었어도 고 내관이 상단의 중요한 고객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허면 잠시만…… 아니,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한 걸음 물러서며 문지기가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슬쩍 열었다.

두 사람이 들어선 방은 꽤 넓은 크기에 한복판에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었다. 놓여 있는 탁자나 의자가 어전에 놓인 것만큼이나 크고 화려한데다 벽을 따라 줄지어 놓인 사방탁자엔 문서로 보이는 두루마리와 서책이 가득 놓인 것으로 봐서 방의 용도는 상단 중역들의 회의실인 것이 분명했다.

“이리 앉으시지요. 주 대인은 친구분들과 식사 중이시니 곧 오실 겁니다.”

문지기가 의자를 하나 빼서 고 내관에게 권했다. 문지기가 허연은 본 척도 않고 자신에게만 대접이 깍듯한 것이 민망해서 고 내관이 허연을 힐끔 쳐다보았다. 고 내관이 올가을 유행인 심청색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도포를 입고 있는 것에 비해 허연은 아무런 장식도 없는 암갈색 무명 도포 차림에 긴 머리는 무명 끈으로 묶고 허리엔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런 소박한 차림새가 허연의 비범한 외모를 가리지는 못했지만 세인들의 눈엔 고 내관이 행세깨나 하는 부유층의 젊은이고 허연은 그를 호위하는 무사 정도로 보일 터였다.

“나는 괜찮으니 앉게.”

그렇게 말하고 허연이 창가로 다가섰다. 그러곤 마당 복판에 마련된 경기장과 그 주변을 빈틈없이 가득 채운 구경꾼들을 내려다보았다. 도성이 번화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한곳에 몇 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바글거리는 모습은 이전엔 본 적이 없던 터라 그 떠들썩하고 활기찬 기운에 허연도 들떠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천운상단 포목부의 책임자인 주 부장이 방에 들어온 것은 상단의 무사들이 마당에 질서 없이 몰려 있는 구경꾼들을 경기장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막 오늘 격투 경기를 벌일 참가자를 소개할 즈음이었다.

“아니, 고 내관께서 이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작고 통통하고 셈이 빨라 보이는 사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고 내관의 손을 맞잡고 10년 지기라도 만난 듯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항주와 소주에서 내년 봄, 여름 비단이 들어오기 시작한 터라 고 내관을 모셔서 감수도 받고 내년 봄 유행에 대한 고견도 듣고 싶던 참이었습니다.”

“아, 내년 봄, 여름 비단이 벌써…….”

비단 얘기에 혹해서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던 고 내관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 부장의 손을 뿌리쳤다.

“비단도 비단이지만, 오늘은 그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시면…….”

“오랜만에 말미를 얻어 궐 밖에 나왔으니 환궁 전에 무술 대회 구경이나 하고 갈까 합니다. 자리를 좀 마련해주시지요.”

고 내관의 단도직입적인 용건에 주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회 구경을 오셨습니까? 고 내관께서 무술 대회에 흥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예전에 정 내관이 대회에 출전해서 금 사발을 맡아놓고 가져올 때엔 나도 짬을 내어 구경을 다녔었습니다. 그 형님이 은퇴한 이후로 덩달아 시들해진 것이지…… 게다가 대회 일정이 폐하의 생신 목전으로 바뀌고부터는 어디 짬을 낼 수가 있어야지요. 폐하의 생신은 설이나 중추절보다 더 큰 행사가 아닙니까?”

“하긴, 그렇지요.”

주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연에게로 힐끔 눈길을 돌렸다.

“헌데, 같이 오신 분은…….”

검을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무사가 분명하지만 고 내관이 호위 무사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본 적이 없었던 주 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고 내관이 대흥루에 올 때 동행했던 자들은 나진옥의 지배인, 아니면 궁에서 함께 나온 견습 내관들 정도였던 것이다.

“이분은 내 외가의 먼 친척으로…… 오랜만에 황성에 오셨기에 좋은 구경이나 시켜드리려고 모시고 왔습니다.”

고 내관의 소개에 주 부장이 허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천운상단 포목부의 주 필상이라고 합니다.”

“나는 고 내관의 친구, 아니, 일가인…… 허가입니다.”

“아주 좋은 검을 갖고 계십니다.”

“아, 예…….”

주 부장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자신과 손에 들린 검을 번갈아 보자 허연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 내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고 내관이 허연의 앞을 쓱 막아섰다.

“경기가 이제 시작이 된 것 같으니 안내를 해주시겠습니까?”

주 부장이 두 사람을 안내한 곳은 경기장을 빙 둘러서 임시로 설치한 관중석 중, 천운상단의 고위 관계자나 특별한 손님을 위해 마련한 귀빈석이었다. 물론 다른 관중석과 마찬가지로 귀빈석도 이미 만원이었지만 주 부장은 그 틈새를 헤집고 들어가서 직급 낮고 만만한 부장 셋을 거침없이 끌어냈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고 내관.”

“아니, 뭘 이렇게까지…… 이리 밀고 들어와도 되는 것인지…….”

빈말로 체면을 차리며 고 내관이 가운데 자리에 허연을 얼른 밀어 앉혔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고 내관이 안 계셨다면 천운상단 포목부가 이처럼 크지도 못했을 것이고, 저도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 부장이 깍듯이 대답하며 고 내관에게 한 번 더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는 앉아 있던 자리를 강탈당하고 영 표정이 개운치 않은 부장들에게 가서 술과 안주거리를 챙겨 오라고 심부름까지 시킨 후,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

천운상단에서 주최하는 연례 무술 대회는 본래 상단 무사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겨뤄서 그 등위에 따라 중요한 보직을 받고 무사단의 위계도 세우던 상단의 내부 행사였다. 그러던 것이 점차 바깥에 소문이 나고 구경꾼들이 몰리면서 규모가 커졌고 전국에서 검 좀 휘두른다고 자부하는 검객들이 덩달아 몰리면서 아예 상금을 걸어놓고 각 부분의 최강자를 가리는 떠들썩한 행사가 되었던 것이다.

상단에서 내건 포상이 부문별로 황금 닷 냥이란 거금인데다 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상단의 고용 무사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대회 각 부문의 신청자는 이제 그 수가 수백에 이르렀다. 또한 결승전 참가자 여덟 명을 걸러내기 위한 예선만 열흘이 소요될 정도라서 무술 대회는 도성 안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행사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회 기간 동안 도성은 각지에서 몰려온 거구의 장정들과 그들을 가까이서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어딜 가나 떠들썩했고 경기가 끝난 이후 야심한 시간까지도 승자의 흥분과 패자의 분함이 가시지 않아 천변 큰길가에서는 종종 패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험악한 소란조차도 흥겨운 뒤풀이인 양 백성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고, 이튿날이면 정황이 터무니없이 부풀어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회자되곤 했다.

“오늘은 격투 경기만 합니까? 검술 경기도 좀 보았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허연의 관심사는 검술 부문일 것이라 막 시작된 격투 경기를 잠깐 지켜보던 고 내관이 주 부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검투는 격투 경기가 끝난 이후에 합니다. 오늘 예정된 격투 경기는 네 판뿐이니 보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갈 것입니다.”

“허면 시각은…….”

“술시는 넘어야 시작될 듯싶습니다.”

술시면…… 경기 한 판만 보고 일어나도 꽤 늦겠구나, 요즘 들어 과중한 나랏일로 쌓인 피로와 짜증을 귀인에게 치대는 것으로 다 푸는 황제께서 꽤나 툴툴거리실 터…… 얼른 들어와서 한두 경기만 보고 일어나면 술시 전에는 환궁할 수 있을 줄 알고 왔는데 시간이 애매하게 되었다 생각하며 고 내관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고 내관이 슬쩍 눈치를 살피니 허연은 환궁 시간에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두 장사가 맞붙어 잔 주먹을 툭툭 주고받는 격투 경기에 벌써 열중하고 있었다. 모처럼 만의 여흥인데다 어렵게 얻은 자리이기도 하고…… 허연이 그간 황제의 어리광과 투정을 귀찮은 내색 한 번 없이 받아주기만 했으니 이제쯤 슬쩍 긴장을 시키는 것도 나쁠 것 없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고 내관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경기장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전국 각지에서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이 맨주먹으로 맞붙어 바닥을 뒹굴고 서로를 사정없이 쥐어박는 모습에 고 내관이 놀라서 혀를 끌끌 찼다. 고 내관도 소싯적에는 정 내관을 따라다니며 무술 대회 구경을 적잖이 했었지만 이런 소싸움 같은 드잡이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격투를 저렇게 바닥을 뒹굴면서 합니까? 예전엔 격투라고 해도 격식을 갖춘 권법이 주류였던 것 같은데…….”

“참가자들 중엔 따로 권법을 연마하지 못한 자들도 상당수입니다. 또한 격투에는 무기를 쓰지 못한다는 것 외에 다른 금지 조항이 없으니 다들 가장 자신 있는 특기를 살려서 이기면 그만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무작스럽습니다.”

“무작스러운 것으로 치면 황궁 문지기 중걸을 당할 자가 달리 있겠습니까?”

주 부장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중걸이 최근 3년간 이 대회 격투 부문 우승자인 것은 고 내관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주 부장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듣자 신기한 기분이 들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걸 그자가 그렇게 싸움을 잘합니까?”

“전국에서 주먹깨나 쓴다는 자들이 모두 모인 대회가 아닙니까? 이런 대회에서 3년째 금송아지를 맡아놓다시피 가져가고 있으니…… 그 기운이며 실력이 어떻겠습니까? 저자들이 이렇게 보면 실력이나 체격이 비슷해서 대단한 장사인 듯 보이지만 둘 다 중걸에게는 한참 못 미칩니다.”

“허허…….”

“결승전까지는 시일이 좀 남았으니 지켜볼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중걸을 위협할 만한 실력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주 부장의 극찬에 고 내관이 거듭 감탄을 하며 허연을 돌아보았다. 지난날 영산으로 쫓겨 가서 고초를 겪던 허연이 천신만고 끝에 환궁하면서 혹처럼 달고 온 자가 중걸이라 고 내관도 개인적으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화원에 드나들며 허연을 돌볼 때에도 중걸은 휘명전 정 내관이나 윤 내관과는 마음이 맞아 가깝게 지냈으나 고 내관과는 오며가며 인사나 나누는 사이였을 뿐, 친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저도 얼핏 얘기는 들었지만 저런 자들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라니…… 힘이며 기술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혹 나리…… 아니, 형님께서는 그자가 누구랑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한참 경기에 열중해 있던 허연이 고 내관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중걸이 영산의 노역장에 있을 때에 수천 명이나 되는 죄수들의 우두머리였는데, 그 자리를 거저 얻었겠는가?”

“그야 그렇겠습니다만…….”

“내가 갔을 때엔 이미 중걸의 자리가 확고해서 감히 덤비는 자가 많지 않았네. 그래서 정말 험악한 싸움은 본 적이 없으나…….”

그때 서로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뒹굴던 두 장사가 그만 경기장을 이탈해 관중석으로 날아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경기장 바로 곁에 붙어 서서 싸워라 죽여라 떠들던 한량들 서너 명이 깔려서 한순간 경기장에 곡소리가 울려 퍼졌고, 곳곳을 지키고 서 있던 대흥루 무사와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와 사고 현장을 수습했다.

대흥루 하인들이 장사들에게 깔린 자들을 부축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고 내관이 좀 전에 하던 얘기가 생각나서 다시 허연을 쳐다보았다.

“정말 험악한 싸움은 본 적이 없으시다면, 소소한 다툼 같은 것은 보셨습니까?”

그 물음에 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고…… 중걸이 노역장에 끌려왔을 때 그 죄목이 폭행치사였네.”

첫 번째 격투 경기가 기련성에서 온 장사의 승리로 마무리가 될 즈음 주 부장의 수하들이 술과 육포, 견과류 따위의 간단한 안주거리를 들고 와 세 사람 앞에 차리기 시작했다.

“자리를 내주신 것만 해도 큰 신세를 졌는데 뭘 이런 대접까지…….”

“대접이라니 민망합니다. 구경하시는 데 혹 궁금하실까 싶어 준비한 것이니 소홀하다 책망 마시고 가볍게 드시지요.”

주 부장이 허연에게 먼저 술 한 잔을 따라 권했다. 소란스러운 경기장의 분위기에다 오랜만에 사내들의 거친 다툼을 본 탓에 다소 흥분한 허연이 사양 않고 잔을 받아 들었다.

“요번에 상단에 들어온 머루주입니다. 독한 술은 아니니 마음 놓으십시오.”

“고맙습니다, 주 부장.”

“뒤로 갈수록 더 실력 좋은 자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검술 경기 마지막 순서가 우리 상단의 수석 무사인 지한이와 대현성에서 온 춘수라는 자의 대결이니 꼭 끝까지 보고 가십시오.”

주 부장의 당부에 허연이 다소 놀란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한이가 대현성에서 온 부장과 대결을 합니까?”

“지한이를 아십니까?”

주 부장의 물음에 허연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 여기 객잔에 며칠 묵었던 일이 있는데, 그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으셨습니까? 허면 오늘 정말 잘 오셨습니다.”

고 내관의 잔에서 술 한 잔을 따른 주 부장이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허연을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십니까?”

“송구합니다만, 좀 전에 두 분 하시는 말씀을 얼핏 들으니 중걸과도 친분이 있으신 듯싶어서…….”

주 부장의 호기심 어린 물음에 고 내관이 바로 경계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허연은 뭐 꺼릴 것이 있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걸은 제 오랜 친구입니다. 서로 성격도 잘 맞고, 그 사람이 제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었습니다.”

허연의 대답에 주 부장이 허허…… 감탄사를 토해냈다. 사실 허연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주 부장은 그 태도며 몸가짐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게다가 지니고 있는 검 역시 집은 뱀가죽으로 덮고 손잡이 부분은 귀갑을 두른데다 장식 술엔 피보다 붉은 홍옥이 매달려 있는 흔치 않은 물건이라 계속 허연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고 내관이 계속 허연을 나리라고 부르다가 또 형님이라고 부르며 횡설수설하니 그 정체가 몹시 궁금하던 참이었다.

“지한이야 대흥루를 오고 가다 보면 얼굴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아이이지만, 중걸 같은 자와는 어찌 사귀셨습니까? 목숨을 여러 번 구했다니, 혹 변방의 전장에라도 같이 계셨습니까?”

주 부장의 물음에 허연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훌쩍 술잔을 비웠다.

“같은 전쟁터에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곳에서 만난 것은 아닙니다.”

“허면 이후에 다른 곳에서 만나셨던 겁니까? 살다 보면 그렇게 인연이 닿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주 부장이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한 번 더 허연을 떴다. 주 부장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뭘 또 그렇게까지 궁금해하나 싶어서 허연이 씩 웃었다.

“중걸과 저는 노역장 동기입니다. 중걸이 죄를 짓고 영산에서 노역을 하고 있을 때에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사에 주 부장이 당황해서 자기 술을 홀짝 들이켰다. 그러고는 곧바로 사레가 들려서 거칠게 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첫 번째 격투 경기는 선수들이 두 번이나 관중석을 덮치는 난투극 끝에 청색 허리띠를 맨 장사가 홍색 허리띠를 맨 장사를 조르기로 거의 실신을 시키고 우승을 차지했다. 두 번째 경기는 시작하자마자 청색 띠를 맨 선수의 비호같은 돌려차기 한판으로 승패가 갈렸고, 세 번째 판은 지리한 눈싸움과 신경전 끝에 관중의 야유와 심판의 경고가 이어졌는데, 그러고도 경기가 진행되지 않아서 결국은 두 선수가 몰수패를 당한 채 경기장에서 내려가고 말았다.

“허허…… 저리 쫓겨 내려갈 양이면 애초에 경기장에 오르질 말 것이지, 공연히 시간만 지체되었습니다.”

고 내관이 어느새 중천에 오른 달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주 부장이 잘못도 없이 얼굴을 붉히며 고 내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런 일이 잘 없는데…… 송구합니다.”

허연이 고 내관에게 눈치를 한 번 주고는 주 부장을 돌아보았다.

“어찌 주 부장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보다 보면 명승부도 있고 졸전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 내관은 이런 경기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곧 시작될 검투는 훨씬 볼 만하실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공연히 미안해하는 주 부장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고 같이 잔을 들던 허연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흠칫 놀라서 잔을 그냥 내려놓았다.

“왜 그러십니까?”

자기 앞의 접시는 이미 바닥이라 허연의 접시에서 강정을 집어 가던 고 내관이 뭐가 있나 싶어서 금줄 바깥쪽 자리를 건성으로 넘겨다보았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은데다 경기가 잠시 중단된 틈을 타서 이동하는 자들도 여럿이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뒷간에라도 갔다 왔는지 우르르 몰려온 서너 명의 사내들이 자리를 찾아 앉았고, 그들 틈으로 머리 하나는 불쑥 올라온 장정의 옆모습이 눈에 딱 들어왔다.

“아니, 저자는…….”

그 모습을 얼핏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라서 고 내관이 헉, 숨을 몰아쉬었다. 귀빈석에서 몇 자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호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 무호 장군 말씀이십니까? 경기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으나 그 휘하의 부장들이 여섯 명이나 참가 신청을 하는 바람에 경기장에 구경은 매일 나옵니다. 묵고 있는 사신각이 얼마 멀지 않고, 도성에 있는 동안은 그렇게 바쁜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아…….”

고 내관이 강정을 하나 더 집어서 오도독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격투의 마지막 경기는 월국 최남단의 성읍인 해남성 출신으로 하루에 소금 가마니 수백 개를 나른다는 소금 장수와 녹림성 출신으로 맨주먹으로 곰도 때려잡은 적이 있다는 사냥꾼의 대결이었다.

그 출신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외모도 우악스럽게 생긴 두 사람은 좀 전의 맥 빠진 경기와는 달리 심판이 경기 시작의 깃발을 들자마자 잠시 잠깐의 탐색조차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산중에서 마주친 호랑이와 곰처럼 한데 뒤엉켜 경기장을 나뒹굴었다.

“저 두 사람은 본래 원수지간이었나 봅니다. 저러다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치겠습니다.”

거칠게 치고받다가 경기장 밖까지 튕겨 나간 두 사람이 거기서도 서로를 놓지 않고 씩씩거리는 것을 본 승주가 혀를 끌끌 찼다. 대현성은 성읍 자체가 큰 병영이나 다름없는 곳이라서 사내들 간의 다툼이 잦았고, 사람이 크게 다치는 험악한 싸움판이 벌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막나가는 주먹질, 드잡이, 박치기는 대현성에서도 좀처럼 보지 못하던 것이라 승주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둘 다 권법이라곤 배워본 적이 없는 자들이구나. 힘도 좋고 의욕도 넘친다만…… 저래가지곤 누가 이기든 2차전 이상은 가기 어렵겠다. 하긴, 금 거북이인지, 금송아지인지를 손에 넣기가 그리 쉽겠느냐?”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무호가 흘러내린 승주의 외투를 끌어올려 꼭꼭 여며주었다. 승주는 별것 아닌 몸살을 근 닷새나 앓고는 기력이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몸살이 나은 후에도 계속 사신각에서만 지내다가 갑갑증도 생기고, 오늘 마침 춘수가 무술 대회에 참가를 한다고 해서 다들 몰려 나가는 틈에 끼어 같이 나온 것이었다.

“피곤하지는 않으냐?”

“괜찮습니다.”

“힘들면 바로 얘기를 해라. 공연히 참다가 또 탈이라도 나면 도성에 버리고 갈 것이다.”

무호의 퉁명스러운 걱정에 승주가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춘수 형님과 맞붙는 자가 이 상단의 수석 무사라니, 그 승부가 어찌 될지도 궁금합니다.”

“춘수가 설마 장사치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상단 고용인에게 패하겠느냐?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망신스러워서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느냐?”

“천운상단이라면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상단이 아닙니까? 무사들의 기강도 상당히 엄하고, 무술 대회의 우승자가 상단의 무사로 고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상단 무사들의 기강이 엄해봐야 군율보다 더 하겠느냐? 만일 춘수가 이번 승부에서 패한다면 내 그놈도 여기다 버리고 갈 것이다.”

무호의 으름장에 승주가 다시 한 번 실소를 터뜨렸다.

“영재 형님도 어제 있었던 1차전에서 간신히 이겼다면서요?”

“영재의 상대는 주월성에서 온 무장이었다. 왕쾌 장군 밑에 있는 부장이라니, 그런 상대라면 이기든 지든 체면과 무슨 상관이냐?”

“나라의 녹을 먹는 무장에 대한 장군의 자부심은 저도 잘 알지만, 세상은 넓고 숨은 고수는 많으니…… 과연 그 신분만으로 실력이 보장되겠습니까?”

“병영에서 먹고 자는 무장이라면 마땅히 돈에 팔려 이리저리 떠도는 잡인들보다는 실력이 나아야지. 다른 곳의 사정은 모르겠다만 내 밑에서 부장 노릇을 하려면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무호의 호언장담에 승주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경기장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경기장 안에선 소금 장수가 사냥꾼을 타고 앉아 한창 주먹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돈에 팔려 떠돌아도 그들 역시 검 날에 명운을 건 무사들인데 그렇게 만만하겠습니까? 춘수 형님이 술고래인데다 심히 덤벙거리는 성품이라 그간 뒤치다꺼리할 일이 산 같았는데, 이참에 도성에라도 떨구고 갈 수 있으면 귀향하는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볍겠습니다.”

승주의 비아냥에 무호가 무심코 그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하지만 아직도 몸에 미열이 남은 승주가 신음을 하며 머리를 감싸 쥐자 흠칫 놀라서 때린 자리를 얼른 어루만졌다.

초반부터 무작스러운 몸싸움으로 대흥루 안마당을 뜨겁게 달궜던 두 장사의 승부는 결국 해남성 소금 장수의 승리로 결판이 났다. 비록 어떤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겨룬 승부였지만 결코 검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격렬한 다툼이었고, 두 장사가 내려간 경기장 언저리엔 두 사람이 입과 코로 토해낸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주먹 싸움이라고 하기에 검투 경기 전에 흥이나 돋우는 곁다리라고 여겼는데, 보면 볼수록 나름대로 묘미가 있구나.”

무호가 비틀거리며 경기장을 나가는 두 장사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또한 매일 보는 게 병영에서 형님들끼리 주먹질하는 것이라 새삼 무슨 구경거리가 될까 싶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도성 사람들이 이렇게 구름처럼 모인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떠들썩한 주변의 분위기와 온 정신을 빼앗을 정도로 격렬한 격투에 그간의 시름을 잠시 잊은 승주가 오랜만에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호 일행 앞에 낯선 사내가 나타난 것은 상단의 하인들이 검투 경기를 위해 경기장을 정리하고 경기장 주변 경계를 넘을 정도로 가까이 둘러서 있던 자들을 뒤쪽으로 밀어내려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실례지만…… 대현성에서 오신 무호 장군 되십니까?”

“그렇소만, 뉘시오?”

“저는 천운상단 포목부의 부장인 주필상입니다. 평소 장군님의 위명을 흠모하던 차, 마침 경기장에 나오셨기에 인사라도 드리고자 나왔습니다.”

주 부장의 인사에 무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변방에서 성벽이나 지키는 무부에게 무슨 위명이 있겠소? 부끄럽소이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도성 안엔 벌써부터 장군님과 휘하 부장들의 무용담이 마치 유행가처럼 퍼져서 이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인 것을요.”

“허허…….”

생판 처음 보는 자가 갑자기 앞을 막고 서서 중언부언 찬사를 늘어놓으며 좀처럼 비킬 기미를 보이질 않자 무호의 표정이 차츰 뚱해졌다. 그제야 주 부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온 까닭을 고했다.

“비좁고 복잡한 곳에 이리 계실 것이 아니라 귀빈석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장군. 제가 자리를 준비해놓았습니다.”

“호의는 고맙소만, 이 자리도 괜찮소. 또 부하들이 다 여기 있는데 나 혼자 좋은 자리에 앉을 마음도 없고…….”

무호의 거절에 주 부장이 순간 당황해서 귀빈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귀빈석에서 고개를 빼고 주 부장이 하는 것을 보고 있던 고 내관이 한 번 더 권해보라고 바쁘게 손짓을 보냈다. 애초에 무호를 귀빈석으로 불렀으면 해서 말을 꺼낸 이는 허연이었고, 그 입에서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 내관이 주 부장을 닦달해서 무호에게로 내려 보낸 것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제 성의를 받아주십시오. 여기보다 조금 윗자리이니 경기도 더 잘 보일 것이고, 술과 간단한 안주거리도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주 부장의 거듭된 설득에 호의도 호의지만 사람 참 질기다고 생각하며 무호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무호의 왼쪽 옆자리에 앉아 있던 영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술이 있단 말이오?”

“아, 예…….”

주 부장의 대답에 영재가 지체 없이 무구와 외투를 챙겼다. 그러곤 무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가십시다. 귀빈석에 술상까지 봐놓았다는데 이 좁은 자리에서 웬 궁상입니까?”

상단의 관계자들이나 특별히 초대받은 손님들만 들어가 앉는다는 귀빈석으로 들어선 영재가 비단 방석이 깔린 편한 의자와 그 앞 탁자 위에 놓인 술과 안주에 환호성을 지르며 냉큼 자리에 앉았다.

“우리 같은 깡촌 촌놈들이 도성까지 와서 황족들이나 머문다는 별궁에 여장을 풀질 않나, 이런 귀빈석에 앉아보질 않나…… 하여튼 형님 덕분에 저희들 팔자가 늘어졌습니다.”

그렇게 떠들며 영재가 접시에 수북이 쌓인 튀긴 닭다리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닭다리를 한입 물어뜯기도 전에 무호에게 귀를 잡혀 자리에서 끌려 나오고 말았다.

“아니, 형님!”

“보아하니 빈자리라곤 두 개뿐인데 네놈이 한 자리를 차지하면 우리는 어디에 앉으란 말이냐?”

무호가 승주를 영재가 앉았던 자리에 밀어 앉혔다. 그리고 그 자신은 옆자리에 앉아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귀빈석은 좀 전에 앉았던 자리보다 위치도 높고, 좀 더 앞으로 돌출된 자리라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게다가 제일 앞자리라서 오고 가며 앞을 가로막는 사람도 없으니 좀 전에 앉았던 일반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관람 조건이 쾌적했다.

“허면 승주는 귀빈석에 앉히고, 저는 서서 경기를 보란 말씀이십니까? 저는 이 대회 예선을 가뿐하게 통과한 참가자로 결승전에서 닷 냥짜리 금 거북이를 타 갈 몸이란 말입니다!”

“허면 멀쩡한 너를 앉히고 아픈 아이를 세워두랴? 승주는 아직 환자다.”

귀빈석이란 말에 얼씨구나 싶어 앞장을 섰다가 자리를 승주에게 빼앗겨 투덜거리는 영재를 무호가 옆으로 밀쳤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는 주 부장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확실히 이 자리가 경기 관전엔 더 나은 것 같소, 주 부장.”

“그리 말씀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장군. 술과 안주는 얼마든지 더 올릴 것이니 필요하시면 시중드는 아이를 부르십시오.”

“일면식도 없는 분에게서 이런 호의를 받아도 될지 모르겠소.”

“그런 말씀 마시고 편하게 즐기다 가십시오. 위명 높으신 장군을 이리 뫼실 수 있게 된 것이 제게는 큰 광영입니다.”

주 부장이 더할 수 없이 공손하게 대답을 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 내관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혹자는 도성이 엎어지면 신 벗겨 가고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이라 하더니 이만하면 인심이 그렇게 나쁘진 않구나.”

무호가 잔에 술을 따라 훌쩍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경기장에서는 지금 막 오늘의 첫 번째 검투 경기가 시작되고 있는 참이었다.

“글쎄요…….”

승주가 건너건너 자리에 떨어져 앉은 주 부장을 힐끔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왜? 뭐 수상한 구석이라도 있느냐?”

“도성에서 장군의 위명이 얼마나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장사꾼이 아무런 이득도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것은 그렇다만, 저자가 내게서 무엇을 얻어 가겠느냐? 나는 폐하의 생신이 지나면 대현성으로 돌아갈 것이고 언제 다시 도성에 올지 기약도 없는 사람이 아니냐?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 이리 하는 것이라면 헛다리를 짚은 것이지.”

무호의 대꾸에 승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장군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고작 이런 자리와 술 몇 병으로 선심을 쓰겠습니까? 저자는 장군을 진심으로 흠모하는 것인데, 제가 공연한 의심을 했나 봅니다.”

여전히 까칠한 승주의 태도에 무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역시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 부장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하필 그때 무호 쪽으로 고개를 돌린 허연과 눈길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눈길이 정면으로 마주쳐 잠시 뻘쭘하게 서로를 보던 중 허연이 먼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넸다. 무호 역시 가벼운 목례로 그 인사를 받았고, 경기장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검 날이 섞이는 날카로운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는 사람입니까?”

무호가 경기는 보는 둥 마는 둥 자꾸 귀빈석 가장자리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눈치 챈 승주가 물었다.

“아는 것은 아니고…… 어디선가 본 듯해서 그런다.”

“머리 색깔이 옅고 얼굴이 유독 흰 것을 보니 월국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글쎄다…….”

“장군께서도 지난 며칠 다른 형님들과 함께 도성을 싸돌아다니셨으니 어디선가 마주친 일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궐에서 나와 사신각에서 지내며 지난 며칠간 부장들과 어울려 도성 이곳저곳을 돌며 번잡한 거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고 스쳐 지나갔으니 그들 중 한 사람이겠거니 생각하며 무호가 다시 경기장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무술 대회의 여러 종목 중 검투는 가장 인기가 높은 종목이었다. 체격 좋고 기운만 세면 누구든 참가 욕심을 내볼 수 있는 격투와는 달리 검투는 상당한 훈련과 기술이 요구되는 종목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검투 대회의 참가자들은 각 성읍에서 자기네들끼리 실력을 겨뤄서 우승한 후 상경한 장수들이 상당수였고 그 외엔 상단이나 개인에게 고용된 전업 칼잡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서툰 솜씨만 믿고 대회에 참가하는 하룻강아지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참가 신청 단계에서 경력이 없다고 퇴짜를 맞거나 1차전에서 망신만 당하고 떨려나기 일쑤였다.

그렇듯 기본적인 경력과 실력을 갖춘 선수들만 엄선된 경기는 비록 예선이라도 수준이 상당했고 어떤 경기는 결승전보다 더욱 위태롭고 박진감이 넘쳤다. 선수들의 예리한 탐색, 거친 몸놀림, 날카롭게 울리는 쇳소리…… 모든 것이 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 자극했고 흥분시켰다.

격투에 이어 벌어진 첫 번째 검투 경기는 진목성에서 온 최집의 비교적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최집은 진목성 상장군 민영의 좌장으로 최근 3년간 꾸준히 대회 4강에 든 실력자인데다 작년 검술 대회 우승자이기도 했다. 또한 검술 부문에서 눈에 확 띄는 새로운 고수가 나타나지 않은 현재까지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자였다.

“저자도 체격이 크고 검 날이 묵직하긴 하지만 한창때의 정 내관에 비하면 약간 심심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던 주 부장이 경기 평을 내리며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하긴, 정 내관 형님이 장검을 들고 경기장에 들어서면 그 많은 관중들이 숨도 크게 쉬질 못했었지요.”

고 내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 내관은 약관의 나이부터 황성 최고, 나라 안 최고의 검객으로 자타가 공인한 실력자였다. 워낙 힘도 장사인데다 장검을 제 몸처럼 부리는 그 기술도 일품이었고, 그가 경기장에서 보여준 살기와 투지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그런 분이 그렇게 일찍 경기에서 은퇴를 하시다니…… 참으로 아쉽습니다.”

“달도 차면 곧 기우는 법, 그 형님도 나이가 내일모레 마흔이니 아무리 장사라 한들 펄펄 뛰는 젊은이들을 어찌 당하겠습니까? 심한 부상을 당한 탓도 있지만, 그때 잘 그만두었습니다.”

“부상이 심했다고는 하지만 정 내관은 여전히 휘명전의 호위대장이 아닙니까? 힘과 기량은 여전할 터…… 검투 경기 애호가들은 아직도 정 내관만큼 출중한 검객은 없었다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서 형님께 그 얘기를 전하면 되게 뿌듯해하겠습니다.”

고 내관이 히죽 웃으며 허연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고 보니 나리께서는 그런 정 내관 형님을 너끈히 이기셨었지요. 허면 천하제일 검은 바로 나리가 아니십니까?”

“어허, 그 무슨…….”

“하긴, 그 형님이 신검이니 귀검이니 해봐야 실제 경력이라곤 위병대 연병장에서 만만한 병사들이나 두들기고 요런 대회에나 들락거린 것이 전부이니…… 진짜 전쟁터를 휩쓸고 다니신 나리께 비하겠습니까?”

그간 형님, 형님 부르며 친동기간처럼 따르던 정 내관을 확 깎아내리는 고 내관의 언사에 허연이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정 내관은 그간 내가 상대해본 무인들 중 단연 빼어난 실력을 가진 고수였네.”

“형님 실력은 저도 잘 압니다. 단지 마마…… 아니, 나리께서 그런 정 내관 형님을 이겼으니 더 대단하시다는 말이지요. 이는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까?”

“한 번 승부로 누가 더 낫다, 못하다 단정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지. 그때도 운이 좋아서 어렵게 이긴 것이었고, 한 번 더 정 내관과 대검을 한다 해도 내가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네.”

허연의 말에 고 내관이 건성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난번 그것이 진검 승부였다면 두 번째 기회 같은 것은 없었겠지요.”

오늘의 대회 예선 마지막 검투의 출전자는 대현성에서 온 무호의 우 부장 춘수와 천운상단의 수석 무사이며 단주의 경호 책임자인 지한이었다. 둘 다 이번이 대회 첫 참가였고 대외적으로 그 실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들이었으나, 춘수는 험하고 거친 변방의 장수인데다 무공 높기로 유명한 무호의 최측근이었고, 지한은 고수들 많기로 유명한 천운상단 무사단에서도 최고수들로만 구성된 단주의 경호 책임자였기 때문에 대진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이 경기는 세간의 큰 관심사로 떠올랐었다.

두 사람이 진행자의 소개와 함께 경기장에 올라섰다. 춘수는 무호의 부장들이 대부분 그렇듯 기골이 장대하고 인상부터 거친 사내였다. 또한 소년 시절부터 병영에서 지내며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모든 훈련을 받았고 변방 이민족들과의 전투를 수없이 겪은 장수라, 무구를 갖추고 장검을 든 채 일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순간, 그 감출 수 없는 관록이 온몸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지한은 도성 토박이로 외모도 깔끔했고, 체격은 오히려 보통 사내들보다 더 마르고 날렵한 편이었다. 그가 그 또래 사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싸늘한 눈빛과 어떤 상대 앞에서도 겁먹거나 주눅 들지 않는 침착한 태도였다.

이 경기는 변방 호랑이와 도성 늑대의 대결이며 춘수의 어깨엔 나라 안에서 거칠고 사납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대현성 사내들의 자존심이, 지한에게는 월국 최고의 고수들만 모인 천운상단 무사단의 명예가 걸려 있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경기장에 올라선 두 사람은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서로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날 선 장검을 빼 들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상대방의 빈틈을 찾는 둘의 탐색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서로를 노려보며 움직임과 호흡을 읽고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 동안 넓은 경기장도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이전에 어떤 경기에서도 없었던 조용하면서도 위협적인 분위기에 관중들도 몰입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길고도 짧은 탐색 끝에 숨 막힐 듯 가라앉은 공기를 뒤흔들며 먼저 검을 휘두른 쪽은 춘수였다. 춘수가 지한을 향해 달려들며 힘을 실어서 내리친 검 날을 지한이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치면서 날카로운 굉음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쇳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춘수의 검이 연거푸 지한의 옆구리를 노리며 한 번 더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도 지한의 날렵한 몸놀림과 빈틈없는 방어에 막혔고,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섰다.

“이제 시작을 했느냐? 오늘따라 퇴궐이 늦어 경기를 다 놓치나 싶었는데, 그래도 제일 볼 만한 마지막 경기는 아직 남아서 다행이다.”

마당에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을 비집고 경기장 울타리 바로 앞까지 들어온 장광윤이 바짝 긴장해서 두 주먹 꼭 쥐고 경기를 지켜보던 여 부장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장 시랑 왔는가?”

혹시라도 경기 중에 무슨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여 부장이 장광윤을 시무룩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저자가 무호의 부장이라는 그자냐? 어제 그 영재라는 자도 그렇게 기골이 장대하더니, 저자도 만만치 않구나.”

“저 망할 놈! 좀 전에 한 번 붙었다 떨어졌는데, 애를 아주 토막을 낼 기세였네.”

여 부장이 춘수를 노려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여 부장과 지한이 이번 경기 참가를 놓고서 한동안 심히 다투다가 요즘은 아예 각방을 쓰는 것까지 알고 있는 장광윤이 쓴웃음을 지으며 경기장 안의 두 사람을 다시 돌아보았다.

“경기장에 마주 서 있으니 둘이 체격 차이가 너무 두드러지는구나. 대체 어떤 놈이 대진을 이렇게 붙였단 말이냐? 아무리 검투가 몸무게하고는 상관없는 경기라지만, 어깨너비가 거의 두 배 차이가 나는데 저래가지고서야 어디 승산이 있겠느냐?”

“승산이고 뭐고, 몸이나 성히 내려왔으면 좋겠네. 좀 전에 끝난 경기에서 패한 놈은 보호대가 없었으면 손목이 날아갔을 것이네.”

“그리 걱정이 되면 좀 더 말려보지 그랬는가?”

“단주 영감이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는데 내가 말려서 될 일인가? 아예 집안에 들여앉히든지 해야지, 저놈 때문에 간 떨리고 살 떨려서 살 수가 없네.”

여 부장의 탄식에 장광윤이 별꼴 다 보겠다는 듯 눈길을 흘겼다.

“그럴 것이면 애초에 고분고분하고 아무 재주 없는 참한 여인과 연을 맺었어야지. 네놈이 뭣에 씌어 상단 무사를 죽자 사자 쫓아다녀놓고는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냐?”

“내가 처음 봤을 때, 저놈은 대흥루 투전장에서 궂은일이나 하는 심부름꾼이었네. 그 비리비리하던 놈이 어느새 실력이 늘어서 상단 단주의 호위대장이 될 줄 꿈엔들 알았겠는가?”

장광윤에게 푸념을 늘어놓던 여 부장이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춘수가 검을 고쳐 잡고는 지한에게 달려들어 아예 소나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춘수의 우악스럽고 인정사정없는 공격을 막아내던 지한이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해 한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지한이 빈틈을 보이자 춘수가 그 기회를 놓칠세라 상대방의 가슴을 노리고 깊숙이 검으로 찌르려 했다. 아무리 보호구를 갖추고 임하는 경기라도 진검을 들고 겨루는 이상, 모든 공격은 자칫 치명상으로 이어질 위험이 다분했다. 그런데다 체격이 상대적으로 큰 춘수가 지한을 힘대로 두드리다가 검 끝으로 가슴을 찌르고 들어가니 그 위협적인 공격에 관중들은 모두 숨을 몰아쉬었고, 비명을 삼키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자도 적지 않았다. 지한이 중심을 잃어 꼼짝없이 당할 위기였기 때문이었다.

지한이 춘수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억지로 중심을 잡으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몸을 던진 덕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춘수의 칼끝을 피한 지한이 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제비처럼 날렵하게 한 바퀴를 구르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회심의 공격이 불발로 끝나 자세가 크게 흐트러진 춘수의 등을 노리고 검을 내리쳤다.

화급히 돌아선 춘수가 지한의 기습을 간신히 막아냈다. 하지만 기회를 잡은 지한의 공격이 지체 없이 이어졌고, 자세를 미처 갖추기도 전에 역습을 당한 춘수가 도리어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하지만 춘수 역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장이라 지한의 맹공을 어렵사리 막아내고는 다시 중심을 잡았고, 최근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숨 막히는 접전에 관중석에서는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아직 젊고 체격도 왜소해 보이는 자가 제법 강단이 있습니다.”

전에 없이 몰입해서 경기를 지켜보던 승주가 조그맣게 감탄을 토해냈다. 춘수는 무호의 부장들 중에서도 최측근이었고, 아무리 험한 전장에서도 그림자처럼 무호를 수행해온 대현성 최고의 무사였다. 춘수의 거친 성격과 무작한 칼솜씨를 익히 아는 승주라 그 상대로 비리비리한 상단의 무사가 나섰을 때만 해도 이 승부는 볼 것도 없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춘수의 난폭한 공격을 다 막아내고 오히려 역습을 가해 춘수를 경기장 가장자리로 밀어냈을 때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을 정도였다.

“제법이구나. 춘수가 그렇게 몰아붙이는데도 겁먹은 기색이 없으니…… 또한 자세에 빈틈이 없고, 공수 전환도 빠르고,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검 날도 날카롭고…… 하긴, 저만하니 상단 단주의 경호를 맡고 있는 것이겠지.”

“춘수 형님의 대진운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앞 경기에 나섰던 자들이라면 누굴 만났든 손쉽게 이기고 1차전을 통과했을 텐데요.”

“네가 보기엔 춘수가 질 것 같으냐?”

“힘은 춘수 형님이 월등하지만 검술은 저자가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또한 춘수 형님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데 반해 저자는 눈빛도, 자세도 전혀 흐트러진 곳이 없으니…… 제가 보기엔 이미 승패는 결판이 났습니다.”

“두고 보자. 춘수도 죽을 위기에 몰렸다가 사생결단으로 적에게 달려들어 살아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그리 호락호락 물러 나오진 않을 것이다.”

무호가 승주의 뒤통수를 슬슬 쓰다듬었다. 지난 며칠간 풀이 확 죽어서 온종일 자리보전하고 누워만 있던 승주의 얼굴에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무거웠던 무호의 마음도 다소 놓였다.

지한은 춘수가 호흡을 가다듬고 반격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 역시 수년간 검술을 연마해 온 검객으로 춘수처럼 만만치 않은 상대에게 흐트러진 심신을 수습할 시간을 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춘수의 옆구리를 노린 지한의 검 날이 예리한 호를 그렸다. 그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막아내기 까다로운 공격을 춘수가 몸을 크게 비틀어 가까스로 막아냈다.

지한이 나라 안 최고의 무사들로 이루어진 천운상단 무사단에서 수석 무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빼어난 검술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냉정함 덕분이었다. 무사들 중엔 힘이 좋은 자들도 많고 검을 귀신같이 다루는 자들도 많았으나 약점이 없는 자는 없었는데, 지한은 상황이 불리할수록 침착함을 잃지 않고 상대의 약점을 파악해서 기회를 만들어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던 것이다.

춘수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실전 경험까지 만만치 않은 장수는 누구에게든 힘에 부치는 상대였다. 하지만 성품이 우직한데다 약은 구석이 별로 없는 춘수는 자신의 공세가 생각처럼 먹히지 않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해 있었다. 그런 춘수의 상태를 읽은 지한이 더욱 틈을 주지 않고 그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월국의 무장들은 상단에 고용된 무사를 얕은 재주로 밥벌이나 하는 잡인들로 여길 뿐 제대로 된 무인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더구나 지한은 몸도 홀쭉하니 마르고 나이도 어려 보여서 그를 처음 본 순간 춘수는 배 속에서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얕보았던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문제없이 막아낼 뿐 아니라 번번이 까다로운 곳을 파고들어오니, 춘수는 이미 자신감을 많이 잃어서 지한에게 기선을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였다.

정수리로 들이치는 검 날을 받아서 거칠게 밀어낸 춘수가 씩씩거리며 지한을 노려보았다. 상대는 이미 자신의 수를 다 읽었고, 빈틈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동작이 제비처럼 빠르고 민첩해서 공격을 제때 막아내기도, 그다음 공격 방향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한마디로 우승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깨달은 춘수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어제 이맘때 주월성에서 온 왕쾌의 부장을 누르고 2차전에 올라간 영재의 득의만면한 얼굴도 눈앞을 스쳐 지나갔고, 장사꾼들 수발이나 드는 상단 칼잡이 따위에게 맥없이 패했다고 자신을 조롱할 다른 부장들의 비웃음도 귓가에 쟁쟁했다. 이는 앞으로 자신을 평생 따라다닐 치욕이었다. 저렇게 비리비리하고 약아빠진 놈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할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춘수가 어깨를 노리고 달려드는 지한의 검 날을 받아냈다. 그러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중심이 크게 흔들린 채 지한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거의 동시에 지한도 춘수의 온 힘과 무게가 실린 검을 사력을 다해 올려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춘수의 검이 커다란 호를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검투 경기 중에 참가자가 검을 놓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격한 칼부림 중에 어느 한쪽이 심하게 다쳐서 검을 놓치는 경우도 있었고, 검이 부러져 그 날카로운 조각이 관중석으로 날아드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또한 그로 인해 관중이 큰 부상을 입는 사고도 몇 년에 한 번은 꼭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검이 크게 튕겨나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고, 더구나 그 검이 귀빈석 쪽으로 날아가는 일은 전에 없던 불상사라 검의 궤적을 지켜보던 이들이 다들 놀라서 숨을 멈췄다.

“히익…….”

춘수의 손아귀에서 튕겨나간 검이 곧바로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것을 깨달은 고 내관이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종류의 위험엔 아무런 내성도, 대비도 없는 고 내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뿐이기 때문이었다. 불시에 날아든 검이 고 내관의 어깨나 목 언저리에 떨어질 것은 자명해 보였고, 그 횡액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허연이 고 내관의 멱살을 잡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날아오는 검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한 팔로 고 내관을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론 검을 낚아챈 허연이 한순간 자신에게 쏠린 좌중의 이목에 당황해서 바싹 굳었다. 하지만 곧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귀빈석을 오가며 손님들의 시중을 들던 어린 심부름꾼을 손짓으로 불렀다.

“이 검을 주인에게 돌려주어라. 위험한 물건이니 조심해서 가져가거라.”

차분하게 이르며 허연이 검을 심부름꾼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 안에서 아직껏 눈을 꼭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고 내관을 들여다보았다.

“고 내관, 정신 차리게.”

“어으으…….”

간신히 눈을 뜬 고 내관이 말도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뒤늦게 억눌린 비명을 토해냈다. 

“이 사람, 많이 놀랐구먼.”

허연이 혀를 끌끌 차며 다리가 풀려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고 내관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주 부장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고 내관과 비슷한 정도로 혼이 나갔던 주 부장이 그 눈짓에 화들짝 놀라서 일어섰다.

“우선 안으로…… 안으로 드시지요. 이게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경황없이 더듬거리며 주 부장이 대흥루 본관 쪽으로 길을 잡았다.

“까딱 잘못했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구먼.”

서 있는 자리가 경기장 바로 옆인데다 귀빈석과도 그렇게 멀지 않은 덕에 검이 날아가는 그 순간부터 누군가가 사람을 하나 살리고 맨손으로 날아드는 장검을 잡아내는 것까지, 사건의 전말을 비교적 소상히 지켜본 장광윤이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게 말일세. 헌데 그 속도로 날아든 장검을 잡아채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기백이며 내공이 아닌가?”

“네놈들이 모이기만 하면 노상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다고 떠들기에 그냥 염불인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이제 보니 헛소리가 아니었구나. 검을 잡아채는 몸놀림만 봐도 예사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대꾸하며 장광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귀빈석 쪽을 노려보았다. 경기장 주변은 곳곳에 횃불을 밝혀서 훤했지만 관중석 쪽은 어두컴컴한데다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귀빈석에 앉은 것을 보니 유력자의 개인 경호 무사 정도 되는 모양일세.”

“무술 대회라더니, 경기장에서 칼부림을 하는 것은 촌구석 어중이떠중이들이고 정작 저런 고수는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진 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구나. 어쩐지, 정 내관이 은퇴한 이후론 경기가 날이 갈수록 시들하다 싶었다.”

장광윤이 귀빈석의 무림 고수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경기장 울타리를 타고 넘을 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다 돌아서는 무사의 옆모습이 그 순간 크게 타오른 횃불에 비친 것을 보고는 헉 하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니, 저분은…….”

“왜? 아는 사람인가?”

“알다 뿐인가? 허허, 저 양반…… 궁문 닫힐 시간이 지나도록 환궁을 아니 하셨다고 위사령이 크게 걱정을 하더니, 여기서 놀고 계셨구먼.”

방금 전에 끝난 검투와 날아드는 검을 대뜸 잡아챈 귀빈석 무사의 신공에 흥분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관중들을 밀치고 장광윤이 귀빈석 쪽으로 다가갔다.

“황성은 세상의 진귀한 물건과 인재가 다 모인 곳이라더니, 헛말이 아닌가 봅니다.”

고 내관을 안고 귀빈석 중앙으로 난 통로를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허연을 지켜보던 승주가 무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자 말이냐?”

무호의 물음에 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아드는 검을 잡아낸 것뿐이지만, 보통의 내공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것은 그렇지.”

“보아하니 저자는 안겨 가는 사내의 경호 무사인 듯싶습니다, 장군의 오른팔이며 무공도 바로 아래인 춘수 형님은 상단의 호위 무사에게 패했고, 한낱 개인의 경호 무사도 저 정도 호신강기를 갖추었으니 이곳에선 상대를 가늠해보려고 공연히 시비를 걸거나 무공을 자랑하는 치기는 자제를 해야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무호가 귀빈석을 내려가는 허연의 뒷모습을 눈길로 좇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께서는 그간 군영에 속한 무장이 아니면 검을 든 잡인 정도로 내려 보셨는데, 이젠 생각을 다시 하셔야겠습니다.”

“저자는 개인 경호 무사가 아니다.”

그 대답에 승주가 무호를 다시 돌아보았다.

“저자를 어디선가 본 듯싶다 하시더니, 기억이 나셨습니까?”

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는 황제 폐하의 위병이다. 일전에 입궁했을 때에 황제께서 황궁 후원의 부용정이라는 정자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셨는데, 그때 폐하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자다.”

무호의 말에 곁에 있던 영재도 그제야 뭔가 떠오른 듯 무릎을 쳤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폐하의 바로 뒤에 서서 술도 한 잔 받아 마시고, 변방 정세도 물어보던…….”

“그리고 이제 보니 안겨 나간 자도 그때 공비마마를 뫼시고 왔던 그 내관이구나.”

승주가 허연이 사라진 쪽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그자가 폐하의 위병이었습니까? 외모가 이국적이라 먼 곳에서 온 무사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황제의 위병이라면 그만한 무공을 갖춘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고, 내관과 함께 무술 대회 구경을 다니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서 승주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 예쁘장하고 체격 아담한 사내가 공비를 뫼시고 왔다면 공비 처소의 내관인가 싶어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주 부장이 허연을 안내한 곳은 본관 1층에 있는 부장들의 휴게실이었다. 천운상단의 부장들이 차를 들며 쉬기도 하고 손님을 접대하기도 하는 넓은 방에 들어선 허연이 푹신한 방석이 놓인 긴 의자에 고 내관을 내려놓았다.

“마마…….”

여태 평정을 찾지 못한 고 내관이 허연의 팔을 붙들고 훌쩍거렸다.

“진정하게. 자칫 위험할 뻔했으나 다행히 다친 곳 없이 무사하지 않은가?”

“마마께서 아니 계셨으면 소인은…… 소인은…….”

“자네가 있는 곳에 내가 없을 리 있는가? 허니 마음을 놓게.”

허연이 손등으로 고 내관의 눈물을 씻어주며 다정하게 그를 달랬다.

고 내관이 허연의 품에 안겨서 그 옷섶에 눈물 콧물을 찍어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주 부장은 망연자실 문가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 내관은 상단 포목부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자 황궁 내관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연소한 나이부터 대전 지밀에서 10년 넘게 휘명전의 의복 담당으로 일해온 황제의 최측근 중 하나였고 이제는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우화원의 태감직을 맡고 있었으니, 그는 실제로 궁 안에서 상선에 버금가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런 자가 상단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인 무술 대회 구경을 왔는데 하필 그 앞에 검이 날아든 것만 해도 상단이 휘청거릴 정도로 아찔한 일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 그가 동행한 무사를 마마라고 부르며 훌쩍이고 있으니, 주 부장은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싶을 뿐이었다.

고개 빳빳하고 성질 깐깐하기로 유명한 고 내관이 형님, 나리 번갈아 부르며 그렇게 싹싹하게 모시더라니…… 이 사람이 우화원 귀인이었구나. 처음 보는 순간부터 외모며 태도가 범상치 않다 싶었지만 설마하니 황제의 정인으로 그 성심을 한 손에 넣고 주무른다는 자가 저렇게 허술한 차림새로 검 한 자루 덜렁 들고 성 안을 돌아다닐까 싶어서 깊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인데…….

“주 부장.”

“예, 예!”

허연과 대면한 이후 자신에게 뭔가 책잡힐 만한 언동이 없었나 재빨리 되짚어보던 주 부장이 화들짝 놀라서 바늘에 찔린 듯 벌떡 일어섰다.

“고 내관이 이 상태로는 움직이기 어려울 듯싶으니 마차나 가마를 한 대만 구해주시오.”

“아…… 예, 바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얼른 대답을 하고는 주 부장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돌아섰다.

“저…….”

“왜 그러시오?”

“참으로 송구합니다. 대회 중엔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귀빈석으로 검이 날아드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도 하필 오늘…… 저도 이 일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습니다.”

주 부장이 사죄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겠습니까? 사고란 부지불식간에 벌어지는 것인데…… 이 일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니 그렇게 죄스러워할 것 없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더욱 뵐 낯이 없습니다.”

주 부장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소맷자락으로 문질러 닦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밖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난다 싶더니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귀인, 괜찮으십니까?”

장광윤이 문 앞을 막고 서 있던 주 부장을 옆으로 밀치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허연에게 달려들어 그 두 손을 살피고, 달리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나서야 의자에 축 늘어진 채 걸쳐져 있는 고 내관을 돌아보았다.

“자넨 어찌 이리 다 죽어가는가?”

“좀…… 놀라서요.”

고 내관의 맥없는 대답에 장광윤이 혀를 끌끌 찼다.

“환궁은 아니 할 작정인가? 폐하께는 궁문 닫히기 전에 환궁할 것이라 고해 올리고 나왔다면서?”

“이제 일어날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팔다리만 버둥거릴 뿐 좀처럼 일어나 앉질 못하는 고 내관을 허연이 만류했다.

“아무래도 바로 환궁하기는 어려울 듯싶구먼. 일단은 자네 사가로 데려다줄 테니 오늘은 집에서 쉬고 내일 입궁하게.”

“마마는 어찌하시려고요?”

“어찌하기는? 여기서 궁이 지척이니 그냥 가면 되지. 설마하니 내가 가다가 길을 잃겠는가?”

허연의 대답에 고 내관이 고개를 저었다.

“홀로 환궁하시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마땅히 소인이 마마를 뫼셔야지요.”

고 내관이 기를 쓰고 일어나 앉았다. 아직도 안색이 허옇게 질린데다 눈두덩은 벌겋게 부어오른 고 내관이 일어서려고 비틀거리는 것을 허연이 만류하며 등을 다독거렸다.

“허면 자네 집으로 같이 가세. 그간 자네가 내 곁에서 간병을 하며 밤을 새운 날이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 자네가 힘들 때엔 내가 마땅히 곁을 지켜야지.”

허연의 다정한 위로에 감격한 고 내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져 흘렀다. 하지만 장광윤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폐하의 윤허도 없이 외박을 하려고 하십니까? 큰일 나십니다.”

“궁에는 사람을 보내 연통을 하겠네.”

“귀인, 소인이 퇴궐할 때에 벌써 휘명전에서 귀인의 환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보낸 내관들로 대화문이 분주했고, 그 때문에 위사령이 직접 휘하의 부장 몇 명을 모아 궁문을 나서던 참이었습니다.”

“허허…….”

시각이 많이 늦기는 했지만 밖에 나와 다니다 보면 사정에 따라 늦을 수도 있는 일이지, 뭘 그렇게까지 재촉을 하나 싶어서 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 내관은 제가 사가로 데려갈 것이니 귀인께서는 여 부장과 함께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귀인께서 환궁하시지 않으면 위사령이 밤새 폐하께 볶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잔치가 목전이라 일이 많은 사람에게 내가 공연한 폐를 끼쳤구먼.”

진관우 얘기에 마음이 약해진 허연이 다시 고 내관을 내려다보았다. 환궁이 좀 늦는 것과 아예 외박을 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서 고 내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허연을 밀어냈다.

“허면 먼저 환궁을 하시지요. 소인은 기운 좀 차려서 바로 뒤를 따르겠습니다.”

“놀라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자네를 두고 가려니 내가 참…… 사람 도리를 못하는 듯싶네.”

“어인 말씀이십니까? 마마께서는 소인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제가 그간 마마를 소소히 돌봐드린 것이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와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소인이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라니, 자네는 나의 둘도 없는 친우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허연이 자신을 친우라 부르는 것에 감동한 고 내관이 헝……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소맷자락으로 눈물 콧물을 훔치며 한 번 더 허연을 밀어냈다.

“어서 가십시오, 마마. 가셔서 소인이 이 일로 불벼락을 맞지 않도록 폐하께 말씀이나 잘 올려주십시오.”

대흥루 밖 대로변은 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오후의 가장 번잡한 한때인 양 북적이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밖으로 몰려나온 관중들은 방금 전에 경기장에서 느낀 흥분이 가시질 않아서 그대로 노천 주막의 탁자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술잔을 돌리며 한껏 격앙된 음성으로 관전평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취기가 한껏 오르면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공연한 시비를 만들어서 다투기도 하고, 몇몇 검객들은 핑계 김에 마치 자신들이 경기에 참가라도 한 것처럼 검을 빼 들고 살벌한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다. 대흥루 안마당에서 무술 대회 예선이 시작된 이후 대흥루 주변의 밤풍경은 매일이 오늘과 같이 떠들썩했다.

“천운상단 무사단의 수준이 듣던 대로 대단하더구먼. 덩치가 제 두 배는 될 것 같은 장수의 검을 그렇게 쳐서 날려버리다니…….”

“그러게 말일세. 처음에 둘이 마주 섰을 때엔 어른과 어린 아이를 맞붙여놓은 것 같아서 이번 경기는 영 싱겁겠다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승전만큼이나 흥미진진했네. 허긴,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 천운상단 수석 무사에 단주의 경호대장직을 맡고 있겠지.”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제일 볼 만했던 것은 역시 날아드는 검을 맨손으로 낚아챈 그 묘기가 아니겠는가?”

천변 주막의 탁자에 둘러앉은 한량들이 탁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좀 전에 본 경기에 관해 목청을 높였다. 

“그러게 말일세. 그자가 아니었으면 오늘 귀빈석에서 송장을 치울 뻔하지 않았나?”

“몸놀림이나 과감함으로 보면 그자도 무사가 분명한데, 실력은 어떨지 궁금하구먼. 혹, 경기에 참가를 하는 자인가?”

“얼핏 보니 외지인 같던데,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온 자일 수도 있겠구먼.”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뇌리에 확 와서 박히던 귀빈석 무사의 날렵한 몸놀림을 떠올리던 한량 중 하나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친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확 찔렀다.

“아니, 이 사람이…….”

“보게. 그자가 아닌가?”

“그자라니?”

옆구리를 찔린 자가 툴툴거리며 친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곧 천변을 따라 황궁 방향으로 바삐 걸어가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허허…… 감탄사를 토해냈다.

“이제 보니 인물도 좋고 헌칠하니 키도 크구나. 황성에 저런 자가 있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는데…….”

“옆에 붙어 가는 놈은 여 부장이 아니냐?”

“여 부장과 아는 자라면 나중에 만나서 누군지 캐보면 되겠구나.”

호기심 어린 눈길로 멀어져가는 귀빈석 무사와 여 부장의 뒷모습을 좇던 한량들이 한순간 숨을 멈췄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칼잡이 대여섯 명이 그 두 사람을 삽시간에 에워쌌기 때문이었다.

사내들은 얼핏 보기에도 황성 밖 외지인들이었다. 투박하고 낡은 무명 저고리 위로 늑대 털가죽 망토를 걸친 것이나, 역시 털이 긴 짐승의 가죽으로 지은 신을 신고 무릎 바로 아래까지 각반을 만들어 묶은 것도 황성이나 인근 백성들의 행색은 아니었다.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사납게 번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산중을 헤매 다니는 사냥꾼들이거나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무사들이겠구나 생각하며 허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좀 전에 경기장에서 날아드는 검을 잡아챈 그 용자가 아니신가?”

사내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껄렁거리며 다가섰다.

“그렇네만…… 무엇하는 자들이기에 사람의 앞길을 막는가?”

“우리는 녹림성에서 온 사냥패들이외다. 요즘이 황성에선 제일 시절이 좋을 때라 먼 길 와서 그간 모아둔 사슴 가죽도 팔고, 황성 구경도 하고…….”

“허면 하던 일 계속 하게.”

허연이 잘라 말하며 앞을 막아선 사내의 어깨를 밀쳤다. 허연에게 밀려 두어 걸음 뒷걸음을 친 사내의 눈길이 실쭉 날카로워졌다. 

“황성 깍쟁이 아니랄까 봐 까다롭기는…… 검에 명운을 건 사내들끼리 좋게 교류나 하자는 것인데, 뭘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는가? 내가 잡아먹을까 봐 겁이라도 나는가?”

“나와 교류를 하고 싶어 이렇게 앞길을 막고 시비를 건단 말인가?”

“무슨 대회를 한다기에 넘겨다봤더니 경기장에서 노는 놈들은 죄다 열 살짜리 어린애들이 막대기 휘두르듯 서툴고 유치하기 짝이 없더구먼. 그 와중에 자네는 몸놀림이 제법 빠르던데…… 진짜 칼잡이들이 마주쳤으면 그에 합당한 인사가 있어야 하는 법, 내가 술 한 잔 살 테니 같이 가세.”

“제안은 고맙지만 나는 갈 곳이 있네.”

허연이 사내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사내들의 태도며 언동이 진짜로 술 한 잔 하자는 투도 아니고, 위사령까지 저자를 돌며 자신을 찾아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환궁을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연의 명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길을 비킬 기미가 전혀 없었다.

“아직 초저녁인데 뭐가 그렇게 바쁘신가?”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네.”

허연의 대답에 사내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집에 가서 마누라 엉덩이 주무르는 일이 사내대장부들 간에 교류하며 천하대의를 논하는 것보다 더 중하단 말이냐?”

“좀 늦게 들어가면 네놈의 마누라를 누가 업어 가느냐?”

사내들이 한층 더 거칠게 을러대며 허연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하지만 허연도 그 기세에 밀리지 않고 사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조용히 길 가는 사람을 붙들어 세워서 꼭 말썽을 만들어야겠는가? 그만하고 물러서게.”

“술 한 잔 대접하겠다고 점잖게 청하는데 이리 하는 것은 예가 아니지. 실력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인사성은 통 없구먼.”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사내가 장작이라도 능히 팰 듯 크고 무거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거의 동시에 여 부장이 검을 빼 들고 허연을 막아섰다.

“이런 무엄한 놈을 보았나? 어느 안전이라고 앞을 막고 검을 빼 드는 것이냐? 이분이 뉘신 줄 알고?”

“뉘신지 좀 알고 지낼까 싶어서 교류를 청한 것이 아니냐?”

사내가 으르렁거리며 검을 치켜들더니 여 부장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굉음이 휘영청 달 밝은 천변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위협적인 쇳소리에 천변을 오가던 행인들이 놀라서 걸음을 멈췄고, 주막에서 탁주를 들며 떠들던 자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술잔을 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내의 선공은 바위라도 쪼갤 듯 위협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그런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낸 여 부장이 한순간 휘청거렸다. 하지만 나라 안 최고의 무인들로만 구성된 황궁 위병대의 부장이자 위사령의 오른팔인 여 부장의 무공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기에 곧 사내의 검을 밀쳐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 검을 받아내다니, 제법이구나.”

생각지도 않았던 상대에게 공격이 막히자 사내가 다소 놀란 눈길로 여 부장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여 부장이 사내를 노려보며 히죽 웃었다.

“손에 검만 들면 검객이고 휘두르면 다 검술이냐? 산골짜기에서 장작이나 패다 온 촌놈 아니랄까 봐 검 쓰는 방법이 상스럽기 이를 데 없구나.”

대강 밀치고 가던 길 가면 될 것을, 굳이 시비를 받아서 오히려 상대를 도발하는 여 부장의 대응에 허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촌놈이란 소리에 열 받아서 달려든 다른 사냥꾼의 검을 가볍게 막아내고 그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검을 집에서 빼지도 않은 상태라 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 격심한 고통에 사내가 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당황한 사냥꾼의 무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 모두가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애초에 대여섯 명으로 보았던 사냥꾼의 무리가 사실은 십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 부장이 허연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환궁하시는 길이 다소 지체될 듯싶습니다.”

“그럴 것 같구먼.”

허연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꾼 무리의 우두머리가 다시 한 번 여 부장에게 험악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여 부장이 그 실력을 두고 장작이나 패다 온 촌놈이라고 조롱을 하기는 했지만 힘이 실린 거한의 일격이란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여 부장의 방어에 공격이 막힌 후에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연속으로 그의 검 날이 여 부장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이쳤다. 두 번째 공격을 막아낸 여 부장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곧이어 정수리를 노리고 들이친 세 번째 공격을 막아내고는 검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두 장사가 검을 맞대고 힘을 겨루는 사이 허연은 밀려드는 그 나머지 사냥꾼들을 한 번에 둘, 혹은 셋씩 맞아 처리했다. 상대가 휘두르는 검 날을 피하는 몸놀림은 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제비처럼 날렵했고, 상대의 무릎이나 옆구리, 목덜미를 후려치는 반격은 우아하면서도 난폭했다. 사냥패들 중 반수가 허연의 검에 맞아 쓰러지거나 맞은 자리를 움켜쥐고 물러섰다. 비록 상대방을 압도할 정도로 체격이 우람하지도 않고 위협적인 선제공격을 가하지도 않았지만, 잠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천변에서 그와 검을 섞어서 이길 자는 없으리라는 것이 가까이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자들의 공통된 관전평이었다. 심지어 그는 사냥패들 중 반을 때려눕힐 때까지 검을 집에서 뽑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간 다른 형님들이 도성 밤거리를 쏘다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오기에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나 궁금했었는데…… 밤마다 이런 구경거리가 벌어지는 줄 알았으면 저도 같이 다닐 걸 그랬습니다.”

대흥루를 나와서 사신각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로변에서 벌어진 칼부림을 목격하고 걸음을 멈췄던 승주가 조그맣게 탄성을 토하며 뒤에 선 무호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럴 걸 그랬구나.”

“폐하의 위병이라더니, 과연 그간 병영에서 보았던 포악하고 거친 칼부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닙니까? 실력이야 어찌 되었든 검 든 자들이 한꺼번에 서너 명이 달려들면 겁을 먹거나 긴장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텐데, 저자는 거친 검객들을 상대로 대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달빛 아래에서 홀로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다음 순간, 승주가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달려든 사냥패의 손등을 쳐서 검을 털어버리고 따귀를 후려갈긴 허연의 등 뒤로 검을 든 두 명의 사냥패가 한꺼번에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허연이 몸을 돌리는 그 순간, 날카로운 검 날이 그의 가슴팍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옷고름이 잘리고 검 날이 가슴을 스쳐 저고리 앞섶이 붉게 젖어들자, 허연도 더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집에서 뽑아 들었다.

“고연 것들! 진검을 들고서 이리 달려들다니…… 얄팍한 무공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도 능히 해치겠구나.”

은회색 검 날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그리고 사냥패를 노려보는 허연의 눈길은 그보다 더 냉정했다. 그 서늘한 살기에 위기감을 느낀 사냥패들이 갑자기 겁을 집어먹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한 번 더 덤벼볼까, 아니면 이쯤에서 줄행랑을 칠까……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눈치를 살피던 그때, 여태 여 부장과 묵직하게 검을 섞으며 실력을 겨루던 우두머리가 여 부장의 일격에 그만 검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녹림성 일대에선 자신들 패거리가 성읍에 들어서면 감히 누구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거나 뒷길로 피해 다니기 바빴고 자신들의 우두머리는 그 일대 최고의 장사로 누구와 겨루든 평생 패한 적이라곤 없었는데, 도성에서는 양상이 사뭇 다르니 그들도 당혹스러워서 점점 자신감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런 참에 우두머리가 검을 놓치고 수세에 몰리니 그들도 덩달아 하염없이 뒷걸음질만 쳤다.

하지만 검을 놓치고도 사냥패 우두머리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이제 이겼다 싶어 잠시 방심한 여 부장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덮쳤다. 두 장사 간의 검투는 이제 더욱 거친 맨주먹 싸움으로 바뀌었고, 그 바람에 천변의 주막 한 채가 폭풍이라도 만난 듯 삽시간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자신들의 두목이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기세로 천변 주막을 다 부숴가며 여 부장과 대결하는 것을 본 패거리들이 다시 기세를 얻어 허연과 마주 섰다. 검술이 뛰어나봐야 고작 하나이니 열 명이 넘는 우리가 당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아무리 사나운 늑대라도 사방에서 포위를 하며 조여들면 당황해서 빈틈을 보일 것이고, 날뛰다가 결국은 제풀에 지칠 터…… 평생 산중에서 맹수를 사냥하며 생계를 이어온 교활한 사냥꾼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허연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하지만 그들이 허연에게 달려들기 위해 검을 치켜드는 순간, 어떤 커다란 그림자가 그 뒤쪽에서 불쑥 솟아났다.

천변에 늘어선 수백 년 된 버드나무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가 검을 든 사냥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팔을 뒤로 꺾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냥꾼은 그 손에 멱살을 잡혀서 둥치 굵은 가로수에 머리부터 처박혀 쓰러졌고, 또 다른 하나는 아예 허공을 날아 수룡천에 던져지고 말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거한의 무시무시한 힘과 기세에 사냥꾼들도 놀라고 허연도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때, 거한의 바로 옆에서 검을 쥔 채 부들부들 떨던 사냥꾼이 헛발을 디뎌 비틀거리다 그만 앞으로 한 걸음 나서고 말았다. 검을 쥔 사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위협으로 간주한 거한이 그 손목을 잡아 꺾고는 팔꿈치로 사냥꾼의 콧잔등을 냅다 갈겼다. 그 일격에 사냥꾼이 온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거한의 정체가 무호인 것을 깨달은 허연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무호가 사냥패들 중 네 명을 때려눕혀 대강 상황을 정리한 연후, 부장들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그 옆에 버티고 섰다. 새로 등장한 상대가 무호 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패거리와 얼추 숫자가 비슷한 무장들이란 사실을 깨달은 사냥패들이 그제야 검을 내리고 주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 와중에 아직까지도 서로 엉켜서 굴러다니던 여 부장과 사냥패 우두머리가 주막 울타리를 다 무너뜨리며 수룡천 쪽으로 거칠게 넘어졌다.

“네놈들은 어디서 몰려온 비적 떼들이냐?”

영재가 앞으로 나서며 사냥패들을 추궁했다.

“비, 비적 떼라니? 우리는 녹림성에서 온 사냥꾼들이외다.”

“사냥이란 짐승을 몰아서 잡는 것이고, 사람을 그렇게 몰아서 잡으려 들면 그것은 비적이 아니냐?”

“우린 그저 인사나 하자고 했을 뿐인데 저자가 우리 형님을…….”

멀찍이서 일의 전말을 대강 지켜보았던 영재가 콧방귀를 날렸다.

“인사라…… 무척이나 인사성이 밝은 놈들인가 본데, 허면 우리하고도 인사를 한 번 나눠보려느냐?”

영재가 사냥패들과 말장난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무호가 허연에게로 다가섰다. 무호가 다가오는 것을 본 허연이 검을 다시 집에 꽂아 넣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친 곳은 없소?”

“덕분에…… 큰 곤란을 면했습니다.”

“대협이 검을 빼 들었으니 큰 곤란에 처한 것은 저자들이 아니었소? 내가 나선 것은 대협이 곤란해 보여서가 아니라 비록 무도한 놈들이라고 해도 사람을 잘못 건드린 죄로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횡액은 면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외다.”

“부끄럽습니다. 내 생각이 용렬하고 행동이 경솔해서 자칫 백성들에게 험한 모습을 보일 뻔했습니다.”

한밤중에 허공을 날고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기고 있는 사냥꾼들을 보면 횡액을 아주 면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이런 사소한 시비에 검을 빼 든 것은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며 허연이 무호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막무가내로 걸어오는 시비를 대협이 어찌했겠소? 어쨌든 내 소싯적부터 병영에서 먹고 자며 수많은 무장과 협객을 보아왔으나 그 같은 경지의 무예는 처음 보았소.”

“과찬이십니다. 저 또한…….”

이렇게 무작스레 사람을 집어 던지는 광경은 처음 보았지만, 무호에게 맞아 쓰러진 채 일어날 기미도 안 보이는 사냥꾼들을 한 번 더 훑어본 허연이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대현성에서 온 무호라고 하오.”

“나는…….”

자신을 소개할 만한 말이 마땅치 않아서 허연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러곤 방금 전까지 사냥패의 우두머리를 타고 앉아 주먹질을 하다가 이제 위치가 바뀌어 그 아래 깔린 여 부장을 안타까운 눈길로 돌아보았다.

“옥화정 근처에 사는 허가라고 합니다.”

“괜찮소? 부상을 입은 듯싶은데…….”

무호가 손을 뻗어 허연의 옷섶을 헤쳤다. 허연은 진검을 들고 달려드는 열 명 남짓의 무뢰배들을 상대한 것치곤 말짱한 편이었다. 하지만 격한 검투의 흔적은 그의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소맷자락도 검에 베여 너덜거렸고, 상대의 안면을 후려갈겼던 손등도 벌겋게 부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옷섶도 잘려나가서 가슴 부분이 벌어진데다 안에 입은 회색 속저고리엔 벌겋게 핏자국이 번져가고 있었다.

“검 날이 살짝 스친 것뿐, 부상이라 할 만한 상처는 아닙니다.”

허연이 한 걸음 물러서서 옷섶을 대강 여몄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원에게 보이는 게 좋겠소. 검상이란 비록 얕다고 해도 덧나는 일이 다반사이니…….”

큰 불상사 없이 시비도 마무리가 되었겠다, 여 부장을 사냥꾼 우두머리에게서 떼어내서 데리고 갈까, 혼자 환궁할까 궁리를 하면서 허연이 여태 사생결단으로 붙어 싸우는 둘을 돌아보았다.

“저 둘은 조금 더 두고 봅시다. 체격도, 실력도 막상막하라 지난 며칠 지켜본 어떤 격투보다 더 볼 만하구려.”

“저러다 물에 빠지겠습니다.”

“그것도 재미는 있겠소.”

대흥루 주변에 관군과 한 무리의 위병들이 당도한 것은 위태롭게 천변을 굴러다니던 여 부장과 사냥패 우두머리가 기어이 수룡천으로 떨어진 직후였다. 관군들은 대흥루 앞에서 큰 소란이 벌어졌다는 백성들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길이고, 위병들은 점심 무렵에 궁을 나가서 여태 소식이 감감한 우화원 귀인을 찾아다니다 관군들과 합류한 것이었다.

하지만 큰 소란이 벌어졌다는 전언과는 달리 막상 와보니 현장은 소동이 대강 마무리되어 평정을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천변의 주막이 난장판이 되고, 서너 명의 사내들이 신음을 하며 버둥거리고, 수백 명의 백성들이 그 주변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긴 했지만 더는 어떤 위협적인 움직임도 없었다.

“외지에서 온 칼잡이들 간에 시비가 붙어서 제법 큰 칼부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자들이 그자들인가?”

진관우가 쓰러져서 끙끙거리고 있는 사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도망친 자들도 몇 명 있는 것 같습니다.”

진관우가 바닥에 번진 핏자국과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장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맘때 대흥루 근처나 황성 대로변의 번화가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연중 어느 때보다 외지인이 넘쳐나는 시기였고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의 대목인 만큼 저자엔 돈과 술, 여흥이 넘쳐났다. 더구나 무술 대회의 열기가 늦은 밤까지도 잦아들지 않아서 황제의 탄신일이 다가오는 이즈음엔 황성 곳곳에서 소란이 끊이질 않았다.

아무리 그런 시기라고 해도 오가는 사람도 많은 대로변에서 칼부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불쾌해서 진관우가 곁에 있는 이 부장을 돌아보았다.

“소란 피운 자들을 모두 붙들어 포청으로 압송하라. 이런 소란은 더는 좌시하지 않을 터, 내일부터 대흥루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고 치안군의 수를 배로 늘려 잡인들이 더는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단속하라.”

“예, 대장님. 치안감에게 그리 이르겠습니다.”

사건 현장을 훑어본 진관우가 수룡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변에서 뭔가 소란한 기척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니 늦가을의 얼음처럼 찬 수룡천에서 누군가가 커다란 덩어리를 끌어내고 있었다.

“누가 물에 빠졌었나 봅니다.”

“가서 확인해보게. 소란을 일으킨 범인들일 수도 있으니…….”

진관우의 명령에 이 부장이 휘하의 위병과 포졸 서너 명을 거느리고 천변으로 다가갔다. 수룡천은 깊이가 한 길이나 되는 하천으로 아주 가물 때를 제외하고는 수량이 일정했고, 상류는 유속도 빨라서 자칫 다리에서 실족이라도 하는 날엔 목숨도 잃을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된 늦은 시각에 대로변에선 칼부림이 벌어지고, 어떤 머저리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게다가 허연은 어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하니 진관우가 눈앞이 캄캄해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볐다.

이달 들어서 도성을 드나드는 인마가 중추절 대목의 숫자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였고, 말썽과 소란도 보통 때의 두 배라서 진관우에게 요즘은 과로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덮쳐서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온다던 허연이 기별도 없이 환궁을 하지 않아서 휘명전으로부터 빨리 찾아서 데려오라는 독촉이 빗발치니, 더는 못해먹겠다고 사직 상소라도 올리고 싶은 것이 지금 진관우의 심정이었다. 허연이 여기에도 없으면 이젠 어딜 뒤져야 하나 생각하며 진관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 천변에서 이 부장의 숨넘어갈 듯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형님! 형님이 대체 어쩌다가…… 이게 무슨…….”

위병대 부장들 중에서도 성품이 조용하고 침착한 이 부장이 정신 나간 듯 횡설수설하는 것에 놀란 진관우가 위병들을 이끌고 천변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잠시 후, 그 자신도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 부장과 웬 덩치 큰 사내가 푹 젖은 채 천변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그 곁엔 허연이 반쯤 젖은 채 주저앉아서 여 부장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진관우의 목소리에 허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지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사령 왔는가? 마침 잘…….”

“형님!”

진관우가 버럭 소리를 치자 허연이 깜짝 놀라서 주춤 물러앉았다.

“대체 이 늦은 시각에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제가 저녁 내내 형님을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십니까?”

씩씩거리며 허연에게 다가선 진관우가 바닥에 뻗어 있는 여 부장을 보고는 다시 한 번 펄쩍 뛰었다. 여 부장의 얼굴이 거의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으로 터지고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고…… 이 사람들을 우선 의원에게 데려가야 할 듯싶네.”

허연이 진관우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연의 행색을 가까이에서 살핀 진관우가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허연이 걸치고 있는 도포 여기저기엔 위태로웠던 검투의 흔적이 역력했고, 왼손은 손등이 다 까진 채 부어오르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검 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것이 분명한 가슴 언저리에선 아직도 피가 배어나고 있었으니, 이 꼴을 황제가 보는 날엔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생각하기도 두려웠다.

진관우가 터져 나오려는 잔소리를 꿀꺽 삼키고 우선 망토를 벗어 허연의 어깨에 둘렀다. 그러고는 곁에 선 박 부장을 불러 마차라도 한 대 구해서 여 부장과 함께 물에 빠진 사내를 의원에게 실어 보내라고 이른 후 허연에게 말고삐를 넘겼다.

“오르십시오. 빨리 돌아가서 치료도 받고 옷도 갈아입으셔야지요. 이리 오래 계시다간 고뿔에 걸리시겠습니다.”

“잠시 있게. 인사를 할 사람이 있으니…….”

진관우에게 그렇게 이른 허연이 자신과 함께 여 부장과 사냥패 우두머리를 물에서 끌어내느라 비슷하게 젖은 무호에게 다가갔다.

“누가 대협을 모시러 왔나 봅니다.”

아까부터 진관우와 그가 이끌고 다니는 부장들의 행색을 살피던 무호가 허연을 수상쩍은 눈길로 훑어보았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궁에 들었던 날, 진관우가 대화문 앞까지 나와서 무호 일행을 인솔했었기 때문에 무호는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은 내 매부입니다. 늦은 시각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번화가엔 사고도 많으니 걱정이 되어 찾아다녔던 모양입니다.”

“대협과 같은 절정 고수가 늦게 다니는 것이 걱정이 되어…… 매부가 찾으러 다닌단 말입니까?”

아무리 봐도 정황이 수상쩍은데 벽촌에서 왔다고 사람을 너무 물로 본다 생각하며 무호가 허연을 슥 노려보았다.

“걱정이야 집에 있는 강아지가…… 아니, 안사람이 했겠지요.”

“허면 바삐 들어가보셔야겠습니다.”

“장군께 큰 신세를 졌습니다.”

허연이 무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듯싶으니 인사도 모르는 무례한 자라 언짢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일간 묵고 계시는 곳으로 한 번 찾아가겠습니다.”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무호가 얼결에 마주 고개를 숙이며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대흥루 앞에서 대화문까지는 말을 달리면 불과 한 식경 거리였다. 하지만 워낙 시각이 늦은 터라 허연 일행이 대화문 앞에 당도했을 때엔 이미 자정을 알리는 인경이 울리고 있었다.

“형님께선 날이 갈수록 더 과감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대화문 안으로 들어서며 진관우가 허연을 힐끔 돌아보았다.

“나도 이렇게까지 환궁이 늦어질 줄은 몰랐네.”

진관우의 까칠한 타박에 허연이 변명을 하며 말에서 내렸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젖은 옷을 입은 채 찬바람 맞으며 말을 달린 터라 허연의 얼굴엔 살짝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진관우가 휘명전으로 향하는 허연을 붙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러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당분간 외출은 못하실 겁니다.”

“이 정도 고뿔이야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낫겠지.”

“고뿔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자신의 늦은 환궁으로 애꿎은 진관우가 황제에게 어지간히 닦달을 당했구나 싶어서 허연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우선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명우당에 제가 숙직할 때 갈아입으려고 가져다놓은 옷이 있으니 같이 가시지요.”

“다 왔는데 뭘 그리 번거롭게…… 청량전에 가서 갈아입겠네.”

허연이 고개를 저었다.

청량전에 가면 옷 갈아입을 시간 따위는 없을 것이고 허연의 행색에 황제가 기절초풍할 것도 불을 보듯 뻔했지만, 어차피 오늘 밤 허연의 행적과 부상은 황제에게 감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관우도 그럼 그렇게 하시라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휘명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량전 문 안으로 들어선 허연이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청량전 마당 안은 수십 개의 횃불로 대낮처럼 밝았고 전각안의 모든 방에서도 마치 불이라도 난 듯 날카로운 불빛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욱과 함께 지낸 기간이 햇수로 3년이 넘었지만 이런 횃불 시위는 처음이라 허연도 다소 당황해서 걸음을 더는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전각 앞에서 지친 얼굴로 오락가락하고 있던 윤 내관이 허연을 발견하고는 귀인마마를 목 놓아 외치며 바람처럼 달려왔다.

“헉! 마마…….”

대체 어디 갔다 이제 오시느냐고 대판 따지려고 달려들던 윤 내관이 휘청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마마…… 이게 무슨……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하셨습니까? 머리는 봉두난발에, 이 옷은 대체…….”

대강 여민 외투 밖으로 삐져나온 허연의 도포 자락이 푹 젖은 것을 깨달은 윤 내관이 더듬거리며 사연을 캐다가 대뜸 허연의 등 뒤를 넘겨다보았다. 하지만 허연이 어딜 가든 종종거리며 붙어 다니던 고 내관은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허연이 고 내관을 어디다 버리고 왔을 리 없고, 고 내관도 제 주인이 이렇게 젖은 옷을 입은 채 돌아다니게 버려둘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윤 내관이 우선 급한 일을 떠올리고 허연을 전각 쪽으로 잡아끌었다.

“우선 안으로 드셔서 의관부터 갈아입으십시오. 어차피 자정 넘어 환궁하시는 거, 아무 데서라도 옷부터 갈아입으시지 이 늦은 가을밤에 어찌 젖은 옷을 입고 계십니까? 고뿔에라도 걸리시면 폐하께서 더욱…….”

잔소리를 하던 윤 내관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눈이 부실 정도로 불빛이 밝은 전각 앞에 다 와서야 허연의 옷섶이 날카롭게 베이고, 그 가슴 언저리에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마마! 이게 어인 검상입니까? 어느 놈의 칼에라도 맞으셨습니까?”

윤 내관의 비명 소리 같은 추궁에 허연이 놀라서 얼른 옷섶을 여몄다.

“큰일은 아니니 언성을 낮추게. 이러다 폐하께서…….”

바로 그때, 전각 안에서 배고픈 호랑이 울음소리 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왔으면 후딱 안으로 들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떠들고 있는가? 놀러 나갔다가 연통도 없이 오밤중에 환궁한 주제에 과인이 마중이라도 나가야 하는가?”

마른벼락 내리치듯 사나운 욱의 호통에 윤 내관이 화들짝 놀라서 허둥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들여보내면 안 될 것 같기는 한데, 또 당장 들어오라는 독촉이 빗발치니 지체할 수도 없고…… 이 일을 어쩌나 싶어서 윤 내관이 핼쑥해진 얼굴로 전각 문지방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섰다.

“이만한 일에 뭘 이렇게까지 떠는가? 자네답지 않구먼.”

“폐하께서 초저녁부터 얼마나 걱정을 하셨는데요? 멀쩡히 들어오셨어도 큰 책망을 피하지 못하셨을 텐데, 이리 상해서 오셨으니…….”

허연이 겁을 집어먹고 바짝 굳은 윤 내관을 붙들어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러곤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욱은 청량전 큰방 의자에 버티고 앉아서 허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처소에 들어오자마자 벗어 던졌을 용포를 그대로 입은 채, 팔짱을 끼고는 들어오는 허연을 잔뜩 노려보던 욱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가 중문을 넘어 방에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어…….”

잔뜩 굳어 있던 욱의 얼굴에 점점 금이 가더니 이내 경악의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오다가 물에라도 빠졌나, 옷이 어찌 다 젖었는고…… 의아해하던 욱이 다음 순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연의 옷섶이 잘리고 속저고리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자네…… 가슴이 왜…….”

“별일 아닙니다.”

허연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욱에게 들려주고 젖은 도포와 저고리는 벗어서 방구석에 던졌다. 그러곤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허연의 망토를 쥐고 그 모양을 멍하니 쳐다보던 욱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중문 밖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소인도 어찌 된 정황인지 통……. 곧 조사해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

“그리고 어의도 곧…….”

“아, 어의…… 어의를 불러야겠구나.”

욱이 여태 들고 있던 망토를 의자에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뒤늦게 침실로 달려 들어갔다.

욱이 침실에 들어섰을 때 허연은 젖은 바지도 벗어 던지고 침상에 들어가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덮고 있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가슴에 그 상처는 검상이 아닌가? 감히 어떤 놈이…….”

“아무래도 고뿔에 걸린 것 같습니다.”

허연이 어느새 잠긴 꽉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욱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허연의 늦은 환궁으로 마음이 상해 있던 욱이 울컥해서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곧 어의가 들 것이네.”

“제게 필요한 것은 어의가 아닙니다.”

“어찌 된 일이냐고…….”

허연이 손을 뻗어 욱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곤 지친 미소를 지으며 욱을 잡아끌었다.

“오늘 외출에 관해서 해드릴 얘기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

“우선은 제 몸을 좀 녹여주십시오. 깊은 가을이라 그런지 이불 밑이 선듯합니다.”

“깊은 가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물에 빠졌다 나와서 몸이 언 것 아닌가?”

아직 화가 덜 풀리기는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에 허연이 돌아오기만 하면 몰아치려고 준비했던 모든 말을 다 까먹은 욱이 퉁퉁 부어서 투덜거렸다. 그런 욱을 허연이 다시 한 번 끌어당겨 침상 모서리에 주저앉혔다. 그러곤 씨익 웃으며 한 번 더 욱을 졸랐다.

“낭군님…….”

온몸의 뼈가 다 녹을 듯 은근하고 다정한 한 마디에 욱이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갈수록 아주…… 술수만 느는구먼.”

별수 없이 용포의 고름을 풀며 욱이 툴툴거렸다.

허연의 가슴에 난 검상은 면도를 하다가 살짝 베인 정도의 가벼운 상처로 이미 출혈도 멎었고, 달리 처치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욱이 끌어안은 허연의 몸은 막 오르기 시작한 열로 뜨끈하게 달아 있었다. 거기에 길고 피곤했던 하루가 지나고 이제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에 허연이 축 늘어진 채 욱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천변에서 칼부림을 하다가 물에라도 빠졌는가?”

욱이 허연을 품에 꽉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짐짓 엄하게 추궁을 했다. 허연이 밀려오는 졸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과인은 산적한 나랏일로 인해 종일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못한 채 과로에 시달리고 있건만, 자네는 이제 노는 것도 곱게 안 놀고 이리 사고를 치는가?”

“송구합니다…….”

“다른 명이 있을 때까지 근신일세. 근신이 풀릴 때까지는 청량전 담장 밖으로 나갈 생각도 말게!”

“…….”

이제는 대꾸도 안 하는구나 생각하며 욱이 허연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허연은 근신령이 못마땅해서 씩씩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친 숨을 내쉬며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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