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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정인 (10/16)

제9장

정인

한낮에도 완전히 걷히질 않고 어디서 낙엽이라도 태우는 것처럼 부옇게 공기를 흐리던 안개는 오후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더 짙어졌다. 이제 계절은 아침저녁으론 서리가 내리는 완연한 초겨울이었다. 

길고 사나운 겨울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황성에서 시영처럼 겨울이 달갑지 않은 이도 딱히 없을 터였다. 초겨울에 고뿔이라도 걸리면 좀 더하다 덜하다를 반복하며 이듬해 봄까지 꼬박 고뿔을 달고 사는 일이 다반사인데다, 고뿔이 심할 때면 자리보전하고 열흘이고 보름이고 누워 지내는 일도 잦은 시영에게 겨울은 명줄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계절이었다. 때문에 시영은 이맘때부터는 환절기 감기를 피하기 위해 일 없으면 방 밖으로도 잘 안 나가는 긴 칩거에 들어가곤 했고, 그러면 상서부의 중신들도 덩달아 황궁이 아닌 진무왕부의 사랑채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고개를 들어서 안개로 조금 흐린 창 밖을 잠시 내다보던 시영이 다시 서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황제의 생일 전날은 상서령에게는 한가한 날이 아니었지만 그간의 과로가 겹쳐서 몸살 기운이 살살 도는 바람에 시영은 아침 일찍 장광윤을 불러 업무를 대행하도록 하고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좀 피곤하긴 했지만 아예 자리 깔고 누울 정도는 아니라서 시영은 서재에 나와 그간 저자의 책방을 돌며 모아놓은 신간 서적을 꺼내 뒤적이며 승주에게 선물할 만한 책을 골라내던 중이었다. 대현성은 궁벽한 곳이라 구할 수 있는 서책도 한정이 되어 있을 것이고, 승주의 형편에 갖고 싶은 서책을 다 사들일 수도 없을 것이니 서책은 무엇보다 좋은 선물이 될 터였다.

문 열리는 소리에 시영이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는 오늘따라 한껏 멋을 낸 곽여화가 쟁반에 다과를 받쳐 들고 서 있었다. 

“부인…….”

“독서 중이셨습니까? 다과 드시면서 좀 쉬십시오.”

오늘따라 녹을 듯 부드러운 목소리와 애교가 똑똑 떨어지는 눈길에 시영이 긴장해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곽여화는 천품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인인데다 전직 천하제일의 기녀답게 접대와 청탁에 대단한 재능과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시영에게 붙들려서 졸지에 세자빈 자리에 오른 이후로는 그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데라곤 오직 시영뿐이라 가끔 이렇게 작정을 하고 나타나 시영을 조물조물 어루만져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곤 했던 것이다.

“좋아하시는 운남의 홍차입니다. 내일이 폐하의 생신이라 황궁 생과청에서 귀한 과자와 떡을 한 수레나 보내왔기에 양전께 먼저 올리고 오는 길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시영이 딱 알맞게 우러난 홍차로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곽여화가 접시 위에 있는 감떡을 하나 꼭 찍어서 시영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살살 녹는 감떡을 입으로 받은 시영이 저도 모르게 흐물흐물 풀어져 곽여화를 넋 놓고 쳐다보았다.

한때 천하제일의 미인이란 찬사를 받으며 도성 안 사내들을 떡처럼 주무르던 곽여화의 미모와 매력은 세자빈이 되었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나이를 좀 더 먹고 두 아이의 어미가 된 지금은 더 요염해지고 여유 만만해져서 그녀의 전성기엔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시영이 오히려 요즘 들어서 그 미모에 깜빡깜빡 정신을 놓곤 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내일 폐하의 생신 연회엔 참석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가야지요. 내일 연회에 가려고 오늘 쉬고 있는 것입니다.”

“몸이 그만하시니 다행입니다.”

곽여화가 이번엔 백옥으로 깎은 듯 희고 고운 손으로 시영의 이마를 짚었다. 이제쯤 본론이 나올 때가 되었다 싶어서 시영이 마음을 다잡고 곽여화를 쳐다보았다.

나진옥에 턱이 빠질 만큼 비싼 노리개라도 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기방에서 알고 지내던 화공이나 악공 중 어화원이나 예악원에 추천할 만한 자가 아직도 남았는가? 뭐가 되었든 되도록 들어주자고 생각하며 시영이 홍차를 한 모금 꿀꺽 삼켰다. 

“대감…….”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시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뭡니까?”

“폐하께서 내일 생신연을 치르시고 다음 날 화산으로 행차를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요즘처럼 정세가 위태롭고 당면 과제가 산적한 때에 보름이나 단풍놀이 겸 온천욕을 하며 노시겠다고…… 대체 폐하께서는 언제쯤 철이 드시려는지, 내가 올겨울에 감기몸살로 몸져누우면 그것은 다 폐하 탓입니다.”

“대감, 저도 거기 따라가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곽여화의 청에 시영이 당황해서 잠시 숨을 멈췄다.

“그, 그것은…….”

“대감. 제가 대감과 합환주를 나눠 마신 그날 이후 오늘까지 성 밖 구경을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소싯적엔 내키는 대로 산 좋고 물 좋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기러기처럼 자유롭게 살았는데 이제는 제 신세가 조롱에 든 암탉과 다를 바 없으니…… 갑갑증과 울화증이 한번 치밀면 다스리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대감, 화산이 그리 먼 곳도 아니지 않습니까? 요번에 대감께서도 바깥구경 한 번 하시고, 저도 좀 데려가주십시오.”

곽여화의 푸념 섞인 부탁에 시영이 안타까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실 이것은 ‘여보, 갑시다’ 한마디면 그냥 가는 것이지 다과상 들고 와서 이렇게 간청을 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영에게는 지금처럼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왕복 엿새 거리의 원행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부인이 그렇게 답답해하는 줄은…… 내 미처 몰랐소.”

몸도 약하고, 본래 일이 없으면 몇 날 며칠 방구석에서 서책만 파고드는 골방 서생인 시영에게 갑갑증이란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혼례를 올린 이후 곽여화를 좋은 곳에 한 번 데려가주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갑작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시영이 고개를 푹 떨궜다. 마음 같아선 ‘국경까지도 다녀온 나인데 그까짓 원행, 갑시다. 부인!’ 하고 호기를 부리고 싶었지만 시영에게는 고뿔이 저승사자라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허면, 내 폐하께 말씀을 올려놓을 것이니 부인만이라도 다녀오시겠소?”

시영의 절충안에 곽여화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과부도 아니고, 온천 행궁에 대감 없이 홀로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폐하 부재중에 대행할 일도 있어서…….”

시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하지만 황제의 원행이란 본시 조정의 중신들과 측근들도 많이 따르는 것이고, 관례대로라면 상서령인 자신 역시 최측근에서 황제를 수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곽여화가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턱없는 변명을 들이대는 것이 민망해서 시영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차피 크게 기대를 하고 꺼낸 말은 아니라서 곽여화가 더는 따지지 않고 약과를 집어서 시영에게도 먹여주고 자신도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제가 공연한 말을 꺼냈습니다. 대감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말은 그렇게 해도 곽여화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해서 시영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원행에 같이 가자고 할까…… 어가의 행차 속도라면 사흘이야 못 갈 것도 없고, 화산에 당도한 후엔 온천욕 하고 책이나 보면 그뿐이니…… 하지만 이 시기엔 숨만 깊이 들이마셔도 고뿔인데…… 시영이 속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밖에서 심부름하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문밖에 웬 사내가 와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마침 곤란하던 참이라 시영이 얼른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웬 사내라니? 찾아온 자의 직함도 물어보지 않았더냐?”

“그게…… 벼슬을 하는 자는 아닌 듯싶고, 그냥 자기 이름이 승주라고 하면서 그리 여쭈면 만나는 주실 거라고…….”

하인의 대답에 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승주라니? 승주는 분명 어제 향원궁에서 여차저차 사고를 당해 내관에게 업혀서 퇴궐을 했는데 어찌 운신을 해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지금 승주라고 했느냐?”

“예, 그리 들었습니다.”

“어허…… 안 그래도 떠나기 전에 내가 사신각에 한 번 갔을 것인데…….”

시영이 하인에게 당장 손님을 서재로 모시라 이르고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승주라면 대현성에 사는 대감의 편지 친구가 아닙니까?”

시영이 갑자기 허둥거리기 시작하자 곽여화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그간 시영이 편지며 서화며 오는 족족 곽여화에게 보이며 평론도 주고받았기 때문에 그녀도 승주에 대해서는 시영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자가 도성에 왔습니까?”

“공비의 오라비 되는 무호 장군이 요번에 4황자 탄생 축하 사절로 입경을 했는데, 그 수행인으로 따라왔답니다.”

“허면 온 지 여러 날 되었을 터, 진즉에 부르시지 않고요?”

“그 사람의 입경을 안 것이 불과 며칠 전입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나도 얼굴 볼 기회가 별로 없었고…….”

시영이 갑자기 들떠서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았다. 그러고는 승주에게 주려고 빼놓았던 서책을 서둘러 정리하다가 곽여화를 휙 돌아보았다.

“부인. 다과상 다시 좀 봐다 주시오. 집안 어른들 오셨을 때 급으로 푸짐하게…… 귀한 손님이 왔으니 대접을 제대로 해야겠소.”

하인의 안내를 받아 사랑채 앞에 당도한 승주가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시영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들고 온 꾸러미를 같이 온 춘수에게 맡기고 마당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나리,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마당에서 어찌 이러는가? 일어나게.”

신분이 노비라 항상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는 것도 보기 불편해서 시영이 나무라며 승주를 일으켰다. 문밖 저만치에서 보일 때부터 걸음새도 좀 휘청거리는 듯싶고 안색도 백짓장 같더라니, 가까이서 본 승주의 얼굴은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더 축이 나 있었다. 

“이런 몸으로 어찌 여기까지 왔는가? 사신각에서 내 집까지는 십여 리나 떨어져 있어서 빠른 걸음으로도 족히 반 시진은 걸리는데…….”

“소인에겐 하루에 수십 리를 걷는 일도 예사입니다. 아무리 몸이 시원치 않아도 사신각 지척에 있는 이 댁에 오지 못하겠습니까?”

승주의 차분한 대답에 춘수가 흠 하고 못마땅한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러다 의아한 듯 자신을 쳐다보는 시영과 눈이 마주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감마님, 소인은 상장군 군영의 부장 춘수입니다.”

“상장군의 부장이로구먼. 같이 왔는가?”

“예, 승주가 몸도 시원치 않은데 자꾸 나리를 찾아뵙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이 몸으로 혼자 도성을 돌아다닌 게 아니라니 마음이 놓여서 시영이 춘수를 반겼다.

“그랬구먼. 같이 안으로 들게.”

“아니, 저는…….”

둘이 무슨 얘기를 할지 몰라도 보나마나 재미는 없겠다 싶어서 춘수가 손을 저었다. 하지만 곧 시영의 뒤편으로 미인도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아름다운 귀부인이 다과를 받쳐 든 시녀 서너 명을 데리고 서재로 드는 것을 보고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술보다는 차를 훨씬 즐기는 가풍 때문에 진무왕가의 다과상은 다과의 종류가 다양했고 그 차림새가 꽃밭처럼 화려해서 지체 비슷한 황족들이나 명문가에서도 본을 받아 따라 할 정도였다. 더구나 황제의 생신을 맞아 황궁에서 화려한 떡과 과자를 아낌없이 내린 터라 곽여화가 탁자 위에 곱게 차린 다과상은 쳐다만 봐도 눈이 환해질 정도였다.

“이분이 한 선생이십니까? 필체와 화풍이 성숙하고 기품이 넘쳐서 연배가 좀 있으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젊은 분이라 놀랐습니다.”

곽여화가 승주와 춘수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매끈하게 접대 인사를 했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멋이 철철 넘치는 곽여화의 자태에 대현성의 두 촌놈이 혼이 나가서 눈만 끔뻑였다.

“아내도 자네 그림과 글씨를 아주 좋아한다네. 이 사람도 예악과 서화에 조예가 깊거든.”

“아…….”

그제야 시영이 도성 최고의 미녀로 이름 날리던 기녀와 혼인한 사실을 떠올리며 승주와 춘수가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1년쯤 전에 보내준 여름 풍경화 두 점은 이 사람이 내게서 빼앗아 자기 내실에 걸어두었지.”

1년 전에 자신이 어떤 그림을 보냈던가 생각하며 승주가 찻잔을 들었다. 승주가 곤란해하는 눈치를 딱 잡아챈 곽여화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나뭇가지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는 참새 두 마리와 연잎 위에 올라앉은 작은 개구리 두 마리 그림말입니다. 최근엔 그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변변치 않은 그림을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미천한 제게는 큰 광영입니다.”

승주의 얌전한 답례에 곽여화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변변치 않다니,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요즘 황성의 화가들은 거창하고 화려한 모양새만 중시하여 참새나 개구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답니다. 하지만 한 선생의 서화는 작고 귀여운 것을 주제로 하면서도 어딘지 애틋하고 가련한 정서가 느껴집니다. 꽁지깃을 활짝 편 공작이나 꿩을 사냥하는 매, 들판을 짓밟으며 질주하는 군마도 따위에선 느낄 수 없는 감흥이지요. 비록 방에 걸어놓고 늘 보는 그림이지만 저는 요즘도 이따금 선생의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그 앞을 떠나지 못할 때가 있답니다.”

시영이 어지간한 평론가들 왼뺨, 오른뺨 다 후려치는 곽여화의 안목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곽여화의 미모와 더불어 어떤 명문가 부인들과 맞붙어도 꿀리지 않는 지성과 식견은 시영에게도 큰 자랑이었다. 또한 총각 시절엔 오가면서 듣는 소리라야 뼈다귀, 약골, 책벌레라는 비웃음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온 도성의 사내들이 자신을 두고 주제에 곽여화를 가로챈 양심도 없는 도둑놈이라 욕을 한다니, 시영에게는 그보다 더 흡족한 찬사가 없을 정도였다.

시영의 선물에 답례할 만한 것이 만만치 않아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보낸 소품에 대해 곽여화가 칭찬을 아끼지 않자 승주가 얼굴을 붉히며 연거푸 찻잔만 홀짝였다. 그사이 춘수는 곽여화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려고 애쓰며 앞에 놓인 과자와 떡을 바쁘게 쓸어 먹었다.

“헌데 한 선생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혹 몸이 불편하십니까?”

승주의 숨이 약간 거친 것이며 진득이 있질 못하고 몸을 살짝살짝 고쳐 앉는 것을 유심히 보던 곽여화가 넌지시 물었다.

“아닙니다, 마님.”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했는데 뭔가 티가 났나 보다 생각하며 승주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정을 대강은 아는 시영이 조그맣게 혀를 찼다.

“어제 일행과 함께 향원궁에 들었다가 몸을 다쳤답니다.”

시영의 설명에 곽여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에 들었다가…… 다치다니요? 대전 호위대장 정 내관과 부딪치기라도 했습니까?”

“자세한 내막은 아무도 말을 안 해줘서 나도 모릅니다.”

시영이 울적하게 대답하며 승주와 춘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누가 주리를 튼다고 해도 어제 있었던 일을 발설할 수 없는 것이 두 사람의 입장이라 네 사람이 둘러앉은 서재엔 한동안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리, 실은 오늘이 아니면 나리를 뵙기 어려울 것 같아서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직 인사도 드려야 하고, 꼭 드리고 싶은 것도 있어서…….”

“오늘이 아니면 시간이 없다니 무슨 말인가? 동북의 후발 군사들이 호서성에 집결하자면 시일이 보름은 더 걸릴 텐데…… 왜? 어딜 급히 가는가?”

시영이 놀라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무호 일행이 집결지에 며칠 먼저 가서 기다린다고 해도 사나흘 전에만 출발하면 넉넉할 터, 열흘 남짓 여유가 있으니 승주에게 만승전 구경도 시켜주고, 같이 수룡천변 책방 거리 탐방도 하고, 시강원에 데려가 교수들에게 인사도 시키고, 오늘처럼 집으로 불러 그간 수집해놓은 서화도 보여주며 서로의 식견을 나누려던 계획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상장군이 폐하의 화산 행차에 동행하라는 명을 받았기에 일부는 모레 화산으로 떠나고, 나머지는 호서성에 미리 가서 대기하라는 영이 떨어졌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저도 내일모레 황성을 떠납니다.”

“아니, 그런…….”

시영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빡 쓰면서 거친 콧바람을 내뿜었다. 황제의 화산 행차라 함은 단풍 구경이나 하며 놀자고 공연히 화산까지 먼 길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인데, 그런 영양가 없는 행차 때문에 승주를 위해 준비해놓았던 여러 일정이 다 날아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후발 군사들의 집결은 아직 시일이 충분한데 그곳에 열흘이나 먼저 가서 일없이 노닥거리느라 천금 같은 시간을 버리는 것은 더욱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폐하의 단풍놀이에 자네가 꼭 동행을 해야 하는가? 또한 집결지로 가는 것이면…… 며칠 내 집에서 머물다가 출병 날짜에 맞춰서 나중에 가도 안 될 것은 없지 않은가?”

“송구하옵니다, 나리. 소인은 주인에게 매인 몸이라…… 명을 내리시면 따를 뿐이지, 어찌 사정이 이만저만하니 먼저 가겠다, 후에 가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놈의 화산 행차, 처음부터 도무지 내키질 않더니 하나뿐인 친우와의 중요한 교류에 이렇게 초를 치는구나 싶어서 시영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대감…….”

시영이 너무 드러내놓고 언짢아하는 것이 민망해서 곽여화가 얼른 시영의 소맷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자극이 되어 시영이 대놓고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폐하께서는 온천에 가시려거든 귀인이나 잘 챙겨 가시지,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무호 장군까지 달고 가시는고? 그 바람에 이 사람만 죽어나게 생기질 않았습니까?”

“대감, 고정하십시오. 화산도 경치 좋기로 나라 안에서 소문 난 곳이니 원행에 따르게 된다면 서화에 능한 한 선생에게는 의미 있는 여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 같아도 도성에 죽치고 앉아 책이나 들여다보느니 화산에 따라가겠다 생각하며 곽여화가 점잖게 시영을 타일렀다. 하지만 시영이 모르는 소리 한다는 투로 도리어 언성을 높였다.

“그것도 팔자 좋은 사람들에게나 여행이고 구경이지요. 이 사람이 원행길에 따라 나서면 마차를 타겠습니까? 말 잔등에 오르겠습니까? 사흘을 꼼짝없이 걸어가야 하는데, 이 몸으로 화산에 당도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영의 진심 어린 걱정에 승주가 고개를 푹 떨궜다. 자신과 헤어지는 것을 크게 서운해하며 집에 며칠 더 있다 가라고 잡는 것이며, 원행이 고생스러울까 걱정해주는 것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원행을 따라 경치 좋은 산길을 사흘 정도 걷는 것을 어찌 고생이라 하겠습니까? 미천한 소인이 도성에 와서 나리를 뵌 것도 황은이고, 돌아가는 길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화산도 들러보게 된다면 그 또한 황은이옵니다.”

“황은은 무슨…… 폐하께서 자네를 위해 뭘 해주신 게 있다고…….”

시영이 계속 툴툴거리다 결국 곽여화에게 옆구리를 된통 찍히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시영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다음엔 시영의 서재를 눈에 담아 가기라도 할 듯 찬찬히 살펴보던 승주가 바닥에 두었던 꾸러미를 집어 탁자 위에 올렸다.

“나리, 소인이 그간 나리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만분지일이라도 보답을 드리고 싶어 미천한 재주로 서화를 몇 장 그려보았습니다. 당대의 석학이시며 안목 또한 높으신 나리께 감히 올리기 부끄러운 졸작이지만, 부디 받아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무엇을 가져왔나 궁금하더니, 작별 선물이었구나. 이제 이 꾸러미만 덜렁 남기고 가려는구나 싶어서 시영이 뭐라 대답도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제 가면 자네가 언제 또 도성엘 오겠는가? 동북은 이 나라 국경 중에도 험하고 험한 곳,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어 짐승도 한번 들면 돌아 나오기 어려운 곳이라 했으니…….”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간 베풀어주신 은혜를 어찌 하루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평생에 한 번이라도 존안을 뵙고 가르침을 들었으니, 그것만 해도 소인에겐 과분한 복입니다.”

승주가 다시 한 번 시영에게 큰절을 올렸다. 자신의 천한 신분도 개의치 않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저 호의만 베풀어준 이는 평생에 손에 꼽을 정도였고 시영만큼 학문적으로 큰 감명을 준 이도 없었으니, 이 이별은 승주에게도 말할 수 없이 섭섭하고 아픈 일이었다.

“어렵게 먼 길을 왔는데 변변한 대접도 못하고, 담소도 한 번 길게 나누질 못했네그려. 에잇! 그놈의 원행만 아니었어도…….”

생각할수록 욱이 밉상이라 계속 투덜거리던 시영이 안타까움 가득한 눈길로 승주를 쳐다보았다.

“하긴, 이별이 꼭 오늘이라 서글프겠는가? 언제라도 헤어지는 그날이면 오늘과 같았겠지. 이제 또다시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 전령이 가져오는 서찰이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겠구먼.”

“나리…….”

“내 자네 처지를 폐하께 말씀 올려 지금보다는 좀 더 자유로이 살 수 있도록…….”

“나리,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제 더는 대현성으로 편지를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일견 담담한 그 한마디에 시영이 놀라서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승주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더는 대현성으로 편지를 보내지 말라니…….

“이보게, 승주…….”

“나리, 소인은 천한 자입니다. 소인의 처지로 어찌 감히 나리와 같이 존귀하신 분과 서신 따위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 나리의 지체와 위명에 큰 누가 될 터, 모른 척 내려주시는 호의를 계속 받기가 어렵습니다. 모를 때엔 몰랐다는 것이 어설프나마 핑계는 되겠으나 알고도 그리하는 것은 불경스럽고 염치도 없는 처신이니, 어떤 사정도 변명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대체 무슨 말인가? 서신조차 보내지 말라는 것은…… 이대로 우리 인연을 끊어버리자는 것인가?”

망연자실한 시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또한 우리의 교류가 나의 지체와 위명에 누가 되다니…… 누가 그런 말을 자네에게 하던가?”

“꼭 누가 말을 해야 아는 일이겠습니까?”

“내가 뭔가 자네에게 크게 실례되는 행동이나 말을 해서 마음이 심히 상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고?”

크게 섭섭해하며 그간 베풀어준 은혜도 모른다고 화를 낼 줄 알았던 시영이 너무나 조심스러운 어조로 묻자 승주가 맺혔던 신음을 울컥 토해냈다.

“나리, 어찌 그런 말씀으로 소인을 부끄럽게 만드십니까? 나리께서 소인에게 보여주신 호의와 우정에 한 치의 위선이나 가식이 없었던 것은 누구보다 소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

“허면 어찌 이러는가? 최근 몇 년간 내게는 대현성에서 오는 자네의 편지와 서화를 받아보는 것보다 더 큰 낙이 없었거늘…… 우리의 교류가 내게 누가 되다니, 그래서 편지도 주고받지 못하겠다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여태 들어본 적도 없네.”

“나리…….”

승주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만 더욱 깊이 숙였다. 지난 몇 년 서신을 주고받았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시영은 초면이니 이는 작별이란 말도 어불성설, 그간 밤낮을 잊고 그린 서화로 지난날의 호의에 감사를 전하고 돌아 나오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번 맺은 인연을 끊는 것은 어떻게 해도 그렇게 쉽고 만만하질 않았다.

언제부터 알고 지냈다고 이렇게 답답하고, 뭐 그렇게 정이 깊었다고 이렇게까지 서글픈가 스스로를 달래며 승주가 고개를 들어 시영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모르는 사이 이미 눈물에 푹 젖은 눈에는 바로 앞에 있는 시영조차 보이질 않았다. 

“나리, 더는 올릴 말씀이 없으니…… 소인을 이만 보내주십시오.”

승주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고는 긴 한숨과 함께 조용한 흐느낌을 토해냈다.

춘수가 승주를 먼저 말 잔등에 올리고 몇 걸음을 걸렸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힘들어하는 모습에 함께 말에 올라 그 허리에 팔을 둘렀다.

“힘들어도 조금만 버텨라. 숙소까지만 가면 오늘은 아무 일도 더 하지 말고 그냥 쉬자.”

“저녁에 영재 형님이 무술 대회 결승에 나가시는데 쉬어지겠습니까?”

“영재가 무술 대회 결승에 나가건, 저세상에 가건 무슨 상관이냐? 너는 자리 펴고 누워 꼼짝도 마라. 계속 이렇게 뺑뺑 돌다가 큰 병이라도 얻을까 걱정이다.”

승주가 한숨을 내쉬며 춘수의 가슴에 몸을 푹 기댔다. 승주가 이렇게 기진맥진한 것은 좀처럼 본 적이 없어서 춘수가 말의 걸음을 좀 더 늦췄다.

“이번 도성행이 너한테는 온통 힘든 일뿐이구나. 난데없는 큰형님 병수발에, 큰형님하고 아씨 다툼에 껴서 등이 터질 뻔하질 않나…… 게다가 이젠 여태 잘하던 편지질까지 못하게 되고 말았으니…….”

평상시엔 새초롬하니 성격도 맞는 구석이 없고, 또 노비 주제에 노상 서책을 끼고 사는 것도 유별나 보여서 소 닭 보듯 멀찍이 보던 승주였지만 오늘 시영에게 하직 인사를 하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춘수의 무딘 성품까지도 울릴 정도로 애처로운 것이었다.

“아닙니다. 도성에 와서 아씨도 뵙고 정안군 나리도 직접 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저는 소원을 다 풀고 가는 것 같습니다.”

소원을 풀었다는 놈이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이는 것이 안쓰러워서 춘수가 승주의 뒤통수를 투박하게 어루만졌다.

“큰형님도 참 성격 별나지. 그깟 편지가 뭐라고…… 수천 리 밖에서 안부 인사 주고받는 것도 기어이 못하게 막는단 말이냐? 네가 다른 속셈이 있어서 그 어른께 먼저 줄을 댄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먼저 서책이며 지필묵이며 갖다 안기며 청한 교류가 아니냐?”

“그 또한 상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 주제에 어찌 황제 폐하의 사촌 형님 되는 분과 글을 섞을 수 있겠습니까? 황족과 노비의 교분이라니…… 자칫 소문이라도 나면 세간의 큰 비웃음을 살 일입니다.”

“기녀하고 혼인도 한 분이 아니냐? 거기에 비하면 너하고 편지 몇 장 주고받는 것이 뭐 그렇게 큰 흉이 되겠느냐?”

춘수의 시큰둥한 대꾸에 승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겉보기보다 강단이 있으십니다. 황족이라 하면 세상에 못 이룰 것이 없는 지체이기는 하지만, 기녀를 정실로 맞이하는 것은 그래서 더 말도 많고 반대도 많았을 것인데…….”

“그만한 미인이면 뭐…… 반대가 대수였겠느냐? 나는 그 부인이 옆으로 슥 지나가는데, 숨이 턱 막히더라.”

춘수의 감탄에 승주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곧 허파를 토해낼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춘수에게 다시 몸을 기댔다.

“복이 많은 분이십니다. 하긴, 그렇게 인품이 높고 인정 또한 많으시니 복이란 것이 있다면 당연히 그런 분께 가야겠지요.”

빨리 숙소로 돌아갔으면, 가서 세상일은 다 잊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승주가 자꾸만 젖어드는 눈시울을 소맷자락으로 꾹 눌렀다.

안채에 저녁상을 봐놓고 직접 시영을 데려가려고 사랑채에 든 곽여화가 서재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영이 사방에 그림을 걸어놓고 넋 나간 듯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감.”

“부인…….”

“이 그림이 모두 한 선생이 놓고 간 그 선물입니까?”

꾸러미가 제법 묵직하기에 무엇인가 궁금하긴 했지만 승주를 막 보내놓고서 시영의 낙심이 이루 말할 수 없어서 곽여화는 차마 보따리 풀어보자는 말도 못 꺼내고 안채로 돌아갔었다. 그림은 모두 열두 장, 단아하고 간결한 수묵으로 묘사한 겨울 풍경이었다.

“누가 작별 선물 아니랄까 봐, 그림 열두 장이 온통 이별이구려. 병풍이라도 만들라고 숫자를 그렇게 맞춘 모양인데, 마음이 서글퍼서 어찌 이것들로 병풍을 만들어놓고 노상 쳐다볼 수 있겠소?”

시영이 가지가 부러진 노송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울적하게 대답했다.

“한 선생도 속이 말이 아닌가 봅니다. 작품이 죄다 쓸쓸하고 스산한 것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곽여화가 시영에게 다가가 그 옆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시영과 같은 눈높이로 승주의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허공에 구름 한 점 없이 외롭게 뜬 조각달, 홀로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가지가 부러진 노송, 바위틈에서 시들어버린 난초, 짝은 어디로 갔는지 눈 쌓인 가지에 홀로 앉은 작은 산새…….

“내가 황족이라서 편지도 주고받질 못하겠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시영이 바람 빠진 가죽 주머니처럼 푸시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위험할 수도 있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시영이 곽여화를 쳐다보았다.

“예전에 대감께서 저를 정실로 맞겠다고 종친과 유생들을 온통 적으로 돌리고 싸우실 때에 저도 사실은 굉장히 무서웠었습니다. 종실에선 대감을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고, 상소는 빗발치고, 주변의 눈총은 따갑고…… 상황이 그렇게 험악하다 보니 혹 과격한 자들이 나를 해치러 오지 않을까, 배 속의 아이까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혼인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 가져서 힘들 때에 그런 고초까지 겪게 만들어서 나도 많이 미안했습니다.”

곽여화를 정실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겪은 난리가 다시 떠올라서 그렇지 않아도 무겁던 시영의 마음이 아예 바닥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담벼락과 대문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낙서를 하거나 벽서를 붙이고 가는 자들도 많았고…… 담 밖에서 들으라는 듯 욕을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저런 고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대감께서는 황제의 지친으로 폐하로부터 친형님보다 더 극진한 사랑을 받고 계시니 무슨 일을 하시든 감히 누가 대감을 해코지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나 한 선생 같은 천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고, 그때 가서는 어떤 도움이나 보호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알아서 몸조심을 할 밖에요.”

“…….”

새삼 서글프고 목이 메어 시영이 콧물을 훌쩍이며 다시 그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허면 이것이…… 가지 부러진 처량한 노송이며 구름 한 자락 걸치지 못한 조각달이 승주 자신의 모습인가 보다. 처지가 그토록 불민한 중에도 품위가 있고 언행이 정갈한 것이 기특하기만 했는데, 그 내면은 이토록 춥고 외로웠구나 싶어서 승주를 보내며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볼 때보다 시영의 마음이 더 아릿해졌다.

“그러니 그 사람을 신의 없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그때 폐하께서 다들 입 닥치라며 세자빈 첩지 한 방으로 해결을 해주지 않으셨으면 저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겁니다.”

“내 어찌 그 불쌍한 사람을 신의 없다고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몇 날 며칠 바닥에 주저앉아 이 그림을 그렸을 승주의 심정을 생각하면…….”

시영이 가슴에 꽉 찬 슬픔을 더는 참지 못하고 곽여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힝…… 하고 낮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도 나를 버리기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림 한 폭 한 폭이 이토록 절절하겠소? 마치 눈물에 먹을 푼 듯 획마다 애통이 묻어나니…… 차마 오래 쳐다보지도 못하겠구려.”

“글쎄요?”

곽여화가 시영의 뒤통수를 슬슬 쓰다듬으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무슨 뜻입니까? 글쎄요…… 라니?”

“대감과의 이별이 힘들어서 그림 한 폭, 한 폭 이토록 비애가 깊겠습니까? 제가 볼 때 이것은 다른 슬픔입니다.”

곽여화의 냉정한 평가에 시영이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아니, 부인…… 나와 승주는…… 사내들 간의 우정이란 것도…….”

“저 몰래 그 사람과 정이라도 통하셨습니까?”

곽여화의 물음에 시영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부인!”

“눈 내리는 가지 위에 홀로 떨고 있는 박새, 북으로 날아가는 외기러기, 들판에 덜렁 혼자 선 소나무, 이른 추위에 시들기도 전에 얼어버린 난 꽃…… 이것은 애가 끊어지고 가슴이 타는 서러움입니다. 한 선생은 정인과 헤어진 것입니다.”

땅콩과 해바라기 씨를 꿀에 졸여서 굳힌 과자를 뽀작뽀작 깨물어 먹으며 욱이 허연을 힐끔거렸다. 정신없고 언짢은 하루를 보낸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청량전을 찾았건만 욱을 맞이하는 허연의 눈길도 영 곱질 않았다.

오늘 미향궁에서 벌어진 소란은 허연도 엄연히 그 당사자였다. 허연이 직접 미향궁으로 뛰어가서 공비를 들쳐 메고 나왔고, 그 와중에 향비와 언쟁까지 벌어졌었다니 그 일에 관한 책망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욱은 청량전 초입에서부터 꼬리를 착 말아 넣고 허연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귀인…….”

“드시던 과자나 마저 드십시오. 말씀은 좀 있다가 나누시지요.”

허연의 싸늘한 대꾸에 욱이 씹고 있던 과자를 힘겹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오늘은 자신의 생일 전야로 온 나라 안이 생신 감축드린다고 난리가 났는데 정작 집구석은 여기나 저기나 할 것 없이 바늘방석이라 욱이 입을 삐죽거리다가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상선은 미향궁에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너라. 갑자기 보고 싶구나.”

“아기씨들을…… 이리로요?”

태화궁에서 돌아 나오며 별다른 언질이 없기에 2황자와 공주의 양육권을 황후에게 넘기지는 않을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윤 내관이 욱을 쳐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향비가 지금 무슨 정신이 있어서 아이들을 돌보겠느냐? 게다가 딸자식이라고 공주를 그리 소홀히 했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가서 과인이 며칠 데리고 있을 것이라 이르고 보모상궁들도 다 같이 데려오너라.”

“예, 폐하. 하오시면 당장…….”

“그리고 오는 길에 수 대인을 만나서 내가 좀 전에 이른 일을 전하도록 하라.”

윤 내관이 내실을 나서자마자 허연이 의아한 눈길로 욱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향궁의 아기씨들을 며칠 데리고 계시겠다니…….”

원자와 4황자는 그간 태화궁에 인사 갈 때마다 만났고, 특히 원자는 욱이 간간이 휘명전으로 불러서 놀린 덕분에 더 자주 보았었지만 미향궁의 2황자와 공주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던 허연이 욱에게 한 바가지 퍼부으려고 별렀던 잔소리도 잊은 채 다그쳐 물었다.

“들은 그대로일세. 내가 4황자 나고 나서 태화궁엔 자주 가서 아기도 보고 원자도 보았으나 미향궁엔 그러질 못해서, 아예 휘명전에 데리고 있으면서 정을 붙일까 싶네.”

“하지만…….”

욱이 아이들을 데려오면 그 덕에 자신도 자주 보고 놀아줄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향비가 순순히 그러자고 할까 싶어서 허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향비에게 내리는 벌이 아닌가, 아이들을 아예 향비에게서 떼어버리려는 것인가 싶어서 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폐하…….”

“뭘 그렇게 놀라는가? 그대도 아침에 있었던 소동에 관해서 잘 알고 있을 터…… 향비의 사람됨이 부덕하고 매정하여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네. 하여 향비의 거취를 결정하기 전까지 황자와 공주는 내가 데리고 있으려고 하네.”

“향비마마의 거취를 결정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허연의 물음에 욱이 어깨를 으쓱하며 찻잔을 들었다.

“그야 뭐…….”

“폐하!”

미향궁에서 돌아온 이후 허연은 내도록 마음이 무겁고 불쾌감이 가시질 않아서 점심도 거른 채 욱이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향비의 행패도 한참 도를 넘었지만 후궁이 이토록 난장판이 된 것은 욱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향비가 아무리 어리석고 성품이 교만하다고 해도 아직은 20대 초반의 어린 부인일 뿐이었다. 욱에게 시집왔을 때엔 그 나이가 열일곱, 여덟에 불과했으니 그간 잘 타이르고 가르쳤다면 언감생심 이런 일까지는 벌이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 오늘 공비가 겪은 횡액과 향비의 잔악한 행실은 모두가 욱이 그간 후궁을 무심히 방치한 탓이었다.

그 때문에 욱이 돌아오면 이제부터라도 부인들을 잘 보살펴 다시는 오늘 같은 불상사가 없도록 다짐을 받아야겠다고 벼르던 중이었는데…… 욱의 머릿속은 후궁을 잘 보살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궁리로 가득해 보여서 허연의 눈초리가 부쩍 더 날카로워졌다. 

“허면 자네는 내가 이 일을 그냥 덮을 줄 알았는가? 향비는 그대와 공비에게 사통의 죄를 씌워서 해치려고 했네.”

“출궁은 안 됩니다.”

“사실, 출궁만으론 어림도 없지.”

“폐하!”

허연이 놀라서 숨을 몰아쉬었다. 욱의 눈길이며 말투가 한순간 얼음처럼 싸늘하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허연이 정색을 하고 눈을 부릅뜨자 욱도 얼른 표정을 고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생각이야 이것저것…….”“향비는 2황자의 생모입니다.”

“내가 이미 아는 일을 일일이 깨우쳐줄 필요는 없네.”

“향비의 행실이 도를 넘은 데엔 폐하의 책임도 있습니다.”

이번에 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연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가? 내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정인에게 사통의 죄를 씌워 궐 밖으로 끌어내고자 꾸민 흉계에 내 책임이 있다니?”

“향비의 방자한 행실이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내도록 모른 척 버려만 두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갈수록 기세가 등등해지다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것입니다. 폐하께서 미리미리 단속하고 도리를 가르치셨어도 향비가 그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허연의 꾸지람에 욱이 일없이 만지작거리던 찻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러곤 섭섭함이 가득한 눈길로 허연을 노려보았다.

“그 무슨 억지인가? 향비의 사람됨이 교만하고 음흉한 것은 타고난 천품이거늘, 어찌 그것조차 내 탓이란 말인가? 내가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면, 세상 일이 모조리 내 탓인가?”

“이 일은 폐하께서 모르는 세상 어느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폐하의 처자가 모여 사는 칠궁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책임이 없다고 이리 당당히 발뺌을 하십니까?”

“내가 향비의 선생님인가? 나이 스물이 넘고 슬하에 자식까지 두었으면 좋은 책 찾아서 보든가, 주변에 본받을 만한 사람들 두든가 하여 알아서 처신을 해야지, 내가 일일이 쫓아다니며 이런 일은 하고 저런 일은 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저는 이 나이 먹도록 그러고 있질 않습니까?”

욱이 말문이 막혀서 씩씩거렸다. 욱의 생각에 향비가 이런 중범죄를 저지른 것은 향비 자신의 책임이었다. 자신은 후궁 여섯에게 모두 같은 품계를 내리고 궁도 하나씩 내려서 자기네들끼리 위아래 따지며 분란 만드는 것을 막으려고 신경도 썼고, 그 와중에 다른 후궁들은 나름대로 본분을 지키며 그냥저냥 지내고 있는데 향비만 이토록 천방지축이니 이는 전적으로 향비의 개인적인 자질이 부족한 탓일 뿐, 자신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참, 어이가 없어서…….”

찻잔도 비었고, 더 집어 먹을 과자도 없어서 욱이 탁자만 한 번 어루만지고는 다시 팔짱을 꼈다.

“이번 일은 사안이 중하니 합당한 벌을 내리시더라도 출궁은 안 됩니다. 부부지연도 하늘이 내린 것인데, 어찌 한 번 잘못으로 부인을 그토록 쉽게 버리려 하십니까?”

“나는 향비와 내 인연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줄은 잘 모르겠네.”

“어허…….”

논리적으론 분명 자신이 맞는데, 말싸움으론 이상하게 허연을 이길 수가 없어서 약이 바짝 오른 욱이 입술을 삐죽였다.

분위기는 영 서먹하고, 향비 얘기는 더 이상 허연과 나누고 싶지 않아서 슬금슬금 눈 둘 곳을 찾던 욱이 침상 옆 횃대에 걸린 허연의 암갈색 예복을 힐끔 쳐다보았다.

“오늘 야회에서 입을 옷인가?”

“고 내관이 입으라고 갖다놓기는 했는데, 마음이 심란하여 바깥출입할 마음이 통 나질 않습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무슨 소린가? 지금 과인의 생일잔치에 나오지 않겠다는 것인가?”

뭐든 잘못된 일이면 다 자기 탓이라고 덮어씌우는 것도 못마땅한데, 향비의 거취에 대해 당장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는다고 자신의 생일 연회 참석을 할까 말까 재는 것이 어이가 없어서 욱이 거칠게 따졌다.

“생신은 내일이 아닙니까?”

“잔치는 오늘 저녁부터일세!”

소리를 빽 지르고 씩씩거리던 욱이 닫혀 있던 중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 내관 있느냐?”

그렇지 않아도 미향궁에서의 일로 허연의 심기가 영 불편했고, 궁 안의 큰 사건을 모른 척 넘길 리 만무해서 황제가 오면 말다툼이 나겠다 생각하며 문밖에서 마음을 졸이던 고 내관이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불러 계시옵니까?”

“횃대에 걸린 저 옷이 귀인이 오늘 야회에서 입을 예복이냐?”

“예, 폐하…….”

“실망이다.”

“예?”

허연과의 말다툼으로 심기가 단단히 상한 욱이 어찌 나올까 싶어 마음을 졸이던 고 내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의복에 문제가 있사옵니까?”

“색상이 너무 우중충하고 어둡지 않느냐? 게다가 장식도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으니……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정인의 연회복이 아니라 떠돌이 무사의 외출복 같구나.”

“허…….”

손에 비단과 바늘을 쥔 이후 자신이 제작한 의복에 관해 이런 악평을 듣는 것은 처음이라서 고 내관이 어전인 것도 잊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니, 싸움은 두 분이 하시고서 어찌 남의 작품에 생트집을 잡으시는고? 저 예복이 눈에 띄는 장식이 없어 일견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일단 걸치면 옷태가 장난이 아닌데다 색상도 깊은 가을에 걸맞아 오랜만에 허연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수작이거늘…….

“본시 너의 장기는 눈이 아플 정도로 현란한 색상의 조합과 번쩍거리는 보석과 자수 장식이 아니냐? 나이가 들어 취향이 바뀐 것이냐? 아니면 내서고에서 내어준 귀인의 의상비가 부족했느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일전에 과인이 내린 진주로 옷깃을 장식한 그 예복은 어디다 치웠느냐?”

“그 옷은 내일 열릴 주 연회 때에 입으셔야지요. 오늘 연회는 밤에 열리는 야회인데다 대화문루에 오르실 때엔 모피 외투를 걸치실 터라 차분하고 태가 고운 도포로 준비를 했습니다. 귀인께서도 백성들 앞에 너무 눈에 띄는 의복을 걸치고 나서기를 거리끼십니다.”

고 내관의 대답에 욱이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백성들이 무슨 상관이냐? 내 눈엔 너무 심심하고 없어 보이는구나. 이번에 마련한 귀인의 옷이 저뿐이냐?”

“폐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소인 고 내관이옵니다.”

냉큼 대답하고는 고 내관이 후다닥 곁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허연이 어이가 없어서 욱을 노려보는 사이 고 내관이 곁방에서 옷을 한 보따리 안고 나와서 두 사람 앞에 펼쳤다. 흔히 보던 붉은색이나 비취색에서부터 듣도 보도 못한 강렬한 조합의 색까지…… 만춘에 백화가 흐드러진 들판에 온 듯 눈이 시린 색채의 향연에 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실력이 준 것은 아니었구나.”

“폐하, 소인은 아직 30대 초중반이옵니다. 실력이 줄다니요? 아직 전성기는 오지도 않았습니다.”

둘의 웃기지도 않는 만담을 듣고 있던 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이것은 색이 흔하고, 저것은 자수가 심심하고…… 이러며 수룡천변 노점에서 짚신 고르듯 옷을 뒤적이는 욱을 뒤로 끌어냈다.

“무엇을 하십니까? 저는 연회에 갈지 말지도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안 가면 오늘 저녁 연회는 없네.”

“…….”

“그대가 안 가면 나도 안 갈 것이고, 생일 연회인데 생일 맞은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연회는 파장이 아닌가?”

“폐하!”

“연회에 입고 나갈 옷은 이게 좋겠네.”

욱이 보기만 해도 눈이 아릴 정도로 현란한 도포를 골라서 허연에게 내밀었다. 공작새를 백 마리는 때려잡아서 꼬리 깃털을 뽑아 붙인 듯 옷깃과 소맷자락의 자수가 화려하고 정신없는 이 도포는 허연이 제대로 보지도 않고 퇴짜를 놓았던 고 내관의 문제작이었다.

“야, 이건…….”

“백성들이 붙인 자네 별호가 ‘우화원 황귀비’인데, 서방님 생일 연회에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어림도 없습니다.”

“허면 둘이 오붓하게 저녁 먹고 긴 밤을 보내면 되겠구먼. 그것도 좋지.”

두 사람의 날 선 신경전에 청량전의 아담한 내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때, 문밖에서 휘명전 큰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미향궁에서 아기씨들을 뫼셔 왔습니다.”

큰 상궁의 손을 잡고 내실로 들어온 2황자 후가 욱 앞에 다가와 제법 의젓하게 큰절을 올렸다. 2황자는 이제 세 살로 물고기 밥 주는 것과 후원에서 숨바꼭질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얼굴형이며 눈매가 향비를 많이 닮아서 예쁘장한 인상이었고, 지난여름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참을성도 있고 총기도 좋아서 벌써 읽을 줄 아는 글자가 제법 많았다.

“아바마마, 소자를 부르셨습니까?”

2황자가 고개를 들고는 욱에게 또박또박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한참을 운 것처럼 눈도 발갛게 부어 있었고 목소리도 아직 울음에 잠겨 있었다.

“후야, 울었느냐?”

“아니…… 옵니다.”

2황자가 울먹울먹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욱이 손짓으로 황자를 부르며 상궁을 넘겨다보았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기씨들을 모셔 나오는 중에 향비께서 하늘이 무너질 듯 대성통곡을 하시며 궁문 밖까지 쫓아 나오시는 바람에 황자 아기씨도 소인에게 업혀 오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못하셨습니다.”

“그리 귀한 자식이면 있을 때나 잘하지, 아비가 자식 좀 불러 보겠다는데 그 소란을 피워 아이를 울려서 보냈단 말이냐?”

욱이 혀를 끌끌 차며 투덜거렸다. 그러곤 2황자를 품에 안고 등을 다독거렸다.

“울지 마라, 후야.”

“아바마마…….”

“아비가 보고 싶어서 오라고 했느니라. 맛있는 것 먹으면서 아비랑 같이 노는 것이 싫으냐?”

욱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래자 마음이 놓인 2황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과 같이 있을 때엔 강아지 같기만 하던 욱이 아들에게는 제법 의젓하게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허연이 비단 강보를 끌어안고 있는 상궁에게로 다가갔다.

황궁 안엔 본래 어린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기 내관들은 이르면 대여섯 살에 입궁해서 황실 법도를 익히고 선배 내관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기 때문에 청량전 중문 밖에만 나가도 관복을 끌고 종종거리는 어린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강보에 싸인 진짜 아기는 볼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욱이 상궁을 미향궁에 보냈을 때부터 허연은 공주를 내심 기다리던 참이었다.

허연이 얼굴까지 푹 덮은 아기 보자기를 들추고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공주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왜 내 딸을 보고 그렇게 웃는가? 공주가 웃기게 생겼는가?”

공주의 백일에 그 잔치 자리에서 아기를 처음 보았을 때도 허연이 똑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던 것이 기억나서 욱이 퉁명스럽게 따졌다.

“예쁘고 귀여워서 웃었습니다.”

욱의 시비를 귓등으로 넘기며 허연이 상궁에게서 아기를 넘겨받아 품에 안았다.

허연은 본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수년 전, 고 내관이 어린아이들만 잔뜩 데리고 우화원에 들었을 때엔 아이들에게서 시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며 키우다시피 했고, 환궁한 이후에도 휘명전에서 아이들을 다 돌려받아 아들처럼 돌보고 있었다. 게다가 청량전으로 나온 이후엔 오가는 아기 내관들을 보면 전각으로 불러다 간식도 먹이고 낮잠도 재워서 보내는 일이 종종 있을 정도로 허연은 아이들에 대해 관심과 정이 깊었다.

“공주님이 많이 무거워졌습니다. 백일 때엔 무게도 느껴지질 않았는데 이젠 제법 묵직합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아기 살 냄새에 허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욱이 녹아내릴 것 같은 그 미소를 넋 놓고 쳐다보는데, 아기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허연이 또다시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허…… 이 사람이…….”

욱이 2황자를 안고 일어나서 허연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곤 강보에 싸인 채 곤히 자고 있는 공주의 얼굴을 넘겨다보았다.

“피부는 백옥 같고, 이목구비는 뚜렷뚜렷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따로 없거늘…….”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어쩜 이렇게 폐하를 닮았는지…….”

아들들은 다 외탁을 하거나 누굴 닮았는지 아직은 확실치 않은데, 유독 공주는 아빠를 쏙 빼다 박아서 갈데없는 호랑이 상이었다. 그 때문에 종친 일가들이 공주를 볼 때마다 말로는 예쁘다 하면서도 피식피식 수상쩍은 웃음을 날렸고, 처음엔 예사롭게 들어 넘기던 욱도 요즘은 그 소리만 들으면 절로 신경이 곤두섰던 것이다.

“과인을 닮았으면 미인이지. 두고 보게. 열서너 살만 되면 나라 안팎에서 몰려온 구혼자로 대화문 앞에부터 시작된 길고 긴 줄이 수룡천 끝까지 이어질 것이니.”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위사령의 장남도 눈여겨보시지요. 외모는 위사령을 닮아서 준수하고 머리 좋은 것은 금란 공주를 닮았으니 분명 나라 안 최고의 신랑감이 될 것입니다.”

허연의 제안에 욱이 탐탁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은혜 공주의 딸이 제 어미처럼 예쁘고 귀여우면 황태자비를 삼으려고 생각 중인데, 겹사돈은 좀 그렇지 않은가?”

은혜 공주가 지난봄에 해산하러 영산에 갔다가 예쁜 딸을 낳고는 시어머니에게 붙들려 여태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정황을 떠올린 허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 되었든 이 따님 덕분에 장차 사윗감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시겠습니다.”

허연이 잠에서 깰 듯 칭얼거리는 공주를 다독이며 얼렀다. 금방이라도 깨서 울 것 같던 공주가 능숙한 다독임과 부드러운 음성에 힝…… 하고 다시 잠에 빠지는 것을 지켜본 욱이 존경의 눈빛으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어린아이를 그냥 좋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여럿 키워본 실력일세?”

“저도 고향에 아들들이 있지 않습니까? 목욕도 시켜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아기 때 많이 놀아주었습니다.”

“바깥일이 공사다망했을 텐데, 어찌 자네가 아이들 뒤치다꺼리까지 했는가?”

“아이들 어렸을 때엔 관직이 없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아…….”

허연이 허락 없이 기녀와 혼인한 죄로 관직도 빼앗기고 집에서도 쫓겨나 야인으로 보낸 시절이 꽤 길었던 사실이 떠올라서 욱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때는 친구들은 모두 출사해서 나랏일을 하고 있는데 나만 외따로 떨어져 허송세월을 하는구나 싶어서 초조하고 걱정도 많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 평생에 그때만큼 편하고 좋았던 시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지금은 뭐…… 편하고 좋지 않단 말인가?”

별생각 없이 한 말에 욱이 꼬투리를 잡고 들어오자 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편한 게 다 뭡니까? 아들 둘을 키우는 것보다 폐하 한 분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더 신경 쓰이고 피곤합니다.”

“아니…….”

욱이 욱해서 시비를 걸려고 덤비자 허연이 얼른 돌아서서 공주를 어르기 시작했다.

“우리 공주님, 성품은 아바마마보다 차분하셔야 될 텐데…….”

허연이 공주를 눈에 넣을 듯 다정하게 들여다보며 보살피는 것을 잠시 쳐다보던 욱이 경쟁이라도 하듯 품에 안은 2황자를 토닥거렸다. 2황자는 청량전까지 오는 내내 운 탓에 기운이 딸려서 욱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상궁은 우선 휘명전의 내실에 방 하나씩을 마련해서 황자와 공주를 지내게 하라. 그리고 윤 내관이 돌아오는 대로 의논을 하여 황자와 공주가 머물 별궁을 정해서 보고를 올리도록 하고…….”

아이들이 지낼 별궁을 알아보라는 명에 허연이 놀라서 욱을 돌아보았다.

“아기씨들을 미향궁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향비의 사람됨을 알고 보니 아이들을 맡기는 것도 마음이 놓이질 않네. 그래서 내가 당분간 데리고 있을까 싶네.”

욱의 대답에 허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향비의 죄가 무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생모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내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며칠 데리고 계시다가 미향궁으로 돌려보내시지요. 생모와 오래 떨어지는 것은 아기씨들에게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출궁도 시키지 마라, 아이들도 돌려보내라…… 허면 내가 향비를 어떻게 벌해야 하는가? 향비가 공비와 자네를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모른 척 버려두어야 한단 말인가?”

욱이 벌컥 언성을 높이자 그 품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던 2황자가 놀라서 잉…… 하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조심성이라곤 없는 탓에 품 안에서 잠든 아이를 깨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허연이 욱을 슬쩍 노려보았다. 그러곤 안고 있던 공주를 보모상궁에게 넘겨주고 이번엔 2황자를 안아 들었다.

“품계를 낮춘다든가, 녹봉을 삭감한다든가, 몇 달 연금을 시킨다든가…… 보통 많이 내리는 그런 처분은 평범해서 싫으십니까?”

“그런 처분은 황후에게 불손하게 굴었다거나 후궁들끼리 서로 뜯고 싸웠다거나, 친정 식구를 동원해 정사에 간여를 했다거나 했을 때 내리는 벌일세. 향비의 죄는 살인 미수인데 어찌 그 정도 처분으로 법도를 세웠다고 하겠는가?”

욱의 단호한 대답에 이번엔 허연이 말문이 막혀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미 잠든 아이들을 썰렁한 휘명전의 내실로 다시 옮기는 것이 내키질 않아서 허연이 자신의 침실을 내놓고 곁방으로 나왔다. 어차피 이제 대화문으로 나갈 준비도 해야 하고, 연회는 자정 가까운 시각에나 끝이 날 터였다.

“허면, 아기씨들을 원행에도 데려가시는 겁니까?”

애초에 점찍어뒀던 짙은 갈색 예복을 슬쩍 집어 들면서 허연이 욱에게 물었다. 허연의 질문에 욱이 펄쩍 뛰었다.

“저리 어린 것들을 어찌 가는 데 사흘이나 걸리는 먼 곳에 데려가겠는가? 애들 몸살 나네!”

욱이 단호하게 반대 의견을 내며 허연의 손에서 갈색 예복을 낚아챘다. 그러곤 고 내관에게 눈짓을 해서 아까 골랐던 공작새 꼬리 깃털 예복을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허면 아기씨들을 미향궁에서 데리고 와서 보름이나 버려두시겠다는 겁니까?”

“버려두다니? 보모상궁과 태감들이 있지 않나? 어차피 여태 아이들의 양육을 도맡아 하던 자들이니 황자와 공주도 불편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고 내관이 들이민 눈 아프게 현란한 예복에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서며 허연이 딱 잘라 말했다. 그 엄한 꾸지람에 욱이 찔끔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그러면…… 황후에게 맡기고 가면 되겠구먼. 어차피 황후도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했으니까…….”

“태화궁에도 젖먹이가 있습니다. 원자마마와 4황자를 돌보는 것만 해도 힘드실 텐데 어찌 황후께 아기씨를 둘이나 떠넘길 궁리를 하십니까?”

“아니, 이 일은 황후가 먼저…….”

“참으로 대책이라곤 없으십니다.”

“일단 예복이나 걸치게. 눈치 살살 보면서 주물럭거리지만 말고…….”

욱이 하는 일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허연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사이에 고 내관이 얼른 허연의 팔에 예복 소매를 꿰었다.

대화문 앞에 도착한 허연이 외투의 옷섶을 최대한 올려 채우고 마차에서 내렸다. 고 내관이 봄부터 온 나라 안의 모피상들을 달달 볶아서 끌어 모은 여우 털로 만든 모피 외투는 너무 사치스럽고 과해서 아주 추운 날이 아니고는 걸칠 생각이 없었던 의복이었지만, 지금은 안에 입은 공작새 깃털 예복을 가릴 수만 있다면 침상 주변에 둘러친 장막이라도 뜯어다 걸칠 판이었다.

“마마께서 이 공작 꼬리 깃털 무늬 예복을 입고 그 위에 모피 외투를 걸치시다니…… 마치 오늘이 소인의 생일인 것 같습니다.”

허연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고 내관이 감격에 겨워 콧물을 훌쩍였다. 그 말에 욱을 따라 문루에 오르려던 허연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아니, 예복이 보이는가?”

옷섶도 꽁꽁 감싸 맸고, 소매도 최대한 외투 소매 안에 밀어 넣었는데…… 외투 길이가 예복보다 조금 짧은 탓에 옷단이 보이는 것도 신경이 쓰여서 허연이 옷매무새를 한 번 더 가다듬었다.

“소인은 마마께서 이 예복을 입으실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 화려한 예복을 걸쳤던 허연의 눈부신 모습이 눈앞에 선해서 고 내관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전부터 자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는데…….”

“하문하시지요.”

“내가 절대로 입지 않을 것을 알면서 어찌 번번이 이런 옷을 지어 오는가?”

울컥 치미는 짜증을 꾹 누르며 허연이 차분하게 물었다.

“마마, 예술이란 본시 그런 것입니다. 영감이 떠오르고 창작욕이 솟구치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딱히 쓰일 곳이 없어도 만들고 싶은 것은 만들어야지요.”

“아…….”

“날이 그렇게 쌀쌀하진 않고, 문루에 화로도 충분히 두었으니 자리에 앉으시면 외투는 벗으셔도 될 것입니다.”

고 내관의 말에 허연이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미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내가…… 고뿔 기운이 좀 있네.”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루에 오른 욱이 대화문 앞 너른 광장을 내려다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초저녁인데 벌써부터 대기가 부연 것이 영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욱의 생일 즈음은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경계였고 연중 일교차가 가장 큰 때였다. 때문에 황성을 둘러싼 크고 작은 호수에선 시도 때도 없이 안개가 피어올랐고, 심할 때엔 몇 발짝 앞도 분간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에 온 도성이 며칠이고 에워싸이곤 했다.

“연중 좋은 시절을 다 두고 어머니는 왜 하필 이런 때에 나를 낳으셨는지 모르겠구먼.”

“그 무슨 실없는 말씀이십니까? 이 정도는 안개라고 부르기도 뭣한 박무가 아닙니까?”

욱의 곁에 다가와 광장에 설치된 경기장과 구름처럼 몰려든 백성들을 내려다보면서 허연이 타박을 했다.

“모르는 소리 하는구먼. 초저녁에 이런 식으로 안개가 피어오르면 한두 시진 지나지 않아서 코를 베어 가도 모를 정도로 짙은 안개가 들이닥치기 십상일세.”

욱의 대답에 허연이 흠…… 하면서 다시 광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안개 때문에 대회가 취소된 적이 있었습니까?”

“말이라고 하는가? 재작년과 작년엔 안개 때문에 파투가 나서 결승전은 대흥루 마당으로 옮겨 가버리고 일껏 설치한 경기장은 며칠 도성 아이들의 놀이터로나 썼네.”

“아…….”

재작년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작년 욱의 생일엔 며칠 전부터 온 도성이 오리무중 안개 속이라 대화문 앞에서 뭘 해볼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허연은 대화문 앞 광장에서 이런 행사가 벌어지는 것조차 최근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생일이라 좋은 구경 시켜주겠다며 백성들을 구름같이 모아놓고는 3년 연속으로 떡이나 한 꾸러미씩 들려서 돌려보내게 생겼으니……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도 백성들이 어찌 불평이 없겠으며 나는 또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싶어서 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이맘때 황성의 안개가 대단하기는 했었습니다. 예전 그때에도 안개가 짙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허연이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오히려 욱은 귓바퀴를 발딱 세우고 허연을 돌아보았다.

“예전 그때라니…… 언제?”

“황성에 안개 낀 날이 하루 이틀입니까? 그냥…….”

허연이 자신을 슬쩍 노려보며 말을 돌리자 욱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황성에 안개 자욱한 날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과인은 짙은 안개가 몰려올 때면 스무 살 생일날이 떠오르는구먼. 그야말로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드문 농무라서 내관들이 우화원 가는 길도 못 찾아서 갈팡질팡했었지.”

“그날 안개 속에서 영 길을 잃으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까칠하게 한마디 받아치고는 허연이 욱을 피해 문루에 마련된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대화문은 대제국 황궁의 정문답게 웅장해서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3백 명 정도는 너끈히 그 문루에 올라서 행사를 참관할 수 있었다. 황제의 생일은 연중 가장 큰 나라의 축일이었고, 무술 대회 친견은 중요한 전야 행사였기 때문에 문루에는 이미 황후를 비롯한 비빈들과 종친, 고관들이 그들의 지위와 품계 순으로 자리를 잡고서 황제의 행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폐하, 이제 나오시옵니까?”

황후가 후궁들을 이끌고 나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욱을 맞았다.

“날이 좀 춥고 쌀쌀한데, 나와 있어도 괜찮겠소?”

“바람도 세지 않고, 내관들이 곳곳에 화로를 두어 조금도 춥지 않습니다.”

“혹시 모르니 조금이라도 춥고 피곤하면 바로 말을 하시오. 바깥바람 쐬는 것도 오랜만일 터, 고뿔이라도 얻으면 황후와 4황자가 동시에 고생이오.”

황제가 내외명부와 종친 고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자신을 다정히 대하고 건강을 걱정 해주자 그간 알게 모르게 서운했던 마음이 많이 누그러져서 황후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대화문의 누각엔 정가운데에 황제의 용상이 놓여 있었고 그 오른쪽엔 황후의 옥좌가, 그리고 양옆으로 비빈들을 위한 자리가 놓여 있었다. 욱의 심정으로는 자신의 왼편은 허연의 자리였지만 그간은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향비가 후다닥 쫓아와 그 자리를 선점해버리니 비키라고 할 수도 없고, 허연도 대연회에서 굳이 욱의 옆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그의 자리는 주로 시영의 옆이나 금란, 은혜 공주의 근처였다.

하지만 오늘은 바로 몇 시진 전에 향비가 황제에게서 크게 야단을 맞고 아이들까지 휘명전에 빼앗겨서 잔치는커녕 궁문도 어명이 없이는 넘지 못하게 된 까닭으로 황제의 왼쪽 자리는 빈 채로 남아 있었고 다른 비빈들은 지금까지처럼 자리를 잡고서 황제가 용상에 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자리엔 자네가 앉으면 되겠구먼.”

욱이 허연을 빈자리로 툭 밀었다.

“저는 지금까지처럼 종친석에 앉을 것이니…….”

허연이 비빈석 오른쪽 귀퉁이에 서서 목을 길게 뺀 채 광장을 넘겨다보고 있는 공비를 슬쩍 쳐다보았다.

“공비마마를 곁으로 불러 위로를 하시지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불기도 얼마 없는 곳에 오래 있다가 탈나시겠습니다.”

“자네 걱정이나 하게. 이제 나이도 적지 않은데, 바깥쪽에서 바람 맞다가 고뿔이라도 덜컥 걸리면 모레 원행은 나 혼자 가란 말인가?”

요즘은 뭔가 마음에 안 들 때마다 나이를 걸고 넘어가는 것이 새로운 버릇이라 허연이 입술을 꾹 깨물고 욱을 노려보았다.

“저는 두꺼운 예복에 모피 외투까지 껴입어서 지금 등에 땀이 찰 지경입니다.”

“허면 외투를 벗으면 되지.”

“거 참…….”

하마터면 둘이 있을 때 하던 대로 벌컥 소리를 지를 뻔한 허연이 흠칫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곤 말 안 듣는 욱 대신 곁에 선 고 내관을 돌아보았다. 

“가서 공비마마를 뫼시고 오게.”

“아…….”

“어서!”

“예…….”

내심 허연이 욱의 곁에 앉았으면 싶었던 고 내관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고 내관에게 불려와 욱 앞에 선 공비는 걱정했던 대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무호에게 얻어맞은 얼굴은 아직도 멍과 부기가 그대로였고, 어깨를 살짝 떨고 있는 것을 보면 열도 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바로 어제 오라비에게 그렇게 얻어맞고 오늘 낮엔 미향궁에 끌려가 그 고초를 당했으니 아무리 칠궁 호랑이라도 멀쩡할 리 없었다. 그러고도 무술 대회 구경을 하겠다고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장사는 장사라고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욱과 허연이 동시에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안 좋으면 무리하지 말라고 했거늘…… 어찌 나와서 떨고 있느냐?”

“아닙니다. 소인은 괜찮습니다. 나오면서 탕약도 먹었습니다.”

혹시 궁으로 돌아가라고 할까 싶어서 공비가 급히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잔치가 있을 때면 늘 억지로 끌려 나온 것처럼 시큰둥하며 환궁할 궁리만 하더니 오늘은 유난하구나.”

“영재 부장은 고향에 있을 때부터 저하고 동기간처럼 지내던 사이입니다. 그 오라버니가 큰 대회 결승에 올랐다니 그것은 봐야지요.”

아직 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영재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목을 빼고 있었던 것이냐고 한마디 쏘고 싶은 것을 어렵게 참으며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허연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가늘게 떨리는 공비의 어깨에 푹 덮어 씌웠다.

“우선 이거라도 걸치시고…… 조금이라도 열이 더 오른다 싶으면 바로 환궁을 하십시오.”

치수가 얼추 비슷하다더니 정말 어깨며 품이며…… 길이가 조금 긴 것을 빼고는 똑같구나 싶어서 허연이 새삼 놀라운 눈길로 공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공비도 비슷한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예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귀인.”

저녁 바람에 떨고 있는 공비가 안쓰러워서 부지불식간에 외투를 벗었던 허연이 그 한마디에 딱 굳어버렸다. 아, 예복…… 안에 이딴 걸 입고 있었지.

생각 없이 외투를 벗어버리는 바람에 문루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허연이 더는 뭐라 말도 못하고 욱이 찍어준 옆자리에 가서 섰다. 욱이 자신의 왼쪽에 허연, 공비를 차례로 앉히고는 오랜만에 자리 배열이 마음에 들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른 일 보느라 좀 늦게 문루에 오른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과인이 이른 일은 처리했느냐?”

“예, 폐하.”

윤 내관은 어명을 받아 향비의 친정 아비인 수 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비가 칠궁 안에서 말썽이라면 요즘 조정의 관원들을 들쑤셔서 허연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것은 수 대인과 그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알아듣도록 단단히 일렀느냐?”

욱의 하문에 윤 내관이 한껏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사옵니까? 이 시각 이후로 조정에서 귀인과 공비마마를 두고서 말이 나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애썼다.”

“망극하옵니다.”

“허면 경기장에 알려 속히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라. 안개가 몰려오기 전에 한 경기라도 제대로 봐야지.”

무술 대회 결승의 순서는 본래 활쏘기부터 시작이었으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격투기와 검투 경기였기 때문에 안개가 언제 덮칠지 모를 대화문 앞 광장에서의 무술 대회는 격투 경기 준결승으로 그 서막을 열었다.

첫 번째 준결승의 선수는 중걸과 해남성에서 온 소금 장수였다. 해남성 출신 장사는 비록 기술은 단순하지만 예선에서 걸리는 상대는 모조리 떡실신을 시키고 준결승에 올라와 벌써부터 격투기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호기심과 기대를 얻고 있었다. 반면 그 상대인 중걸은 대회 3연패의 관록을 자랑하는 자타 공인 월국 최고의 장사였다.

중걸이 진행자의 소개를 받아 경기장으로 나오자 백성들이 환성과 박수로 이름 높은 장사를 맞았다. 그리고 욱도 기대에 찬 눈길로 경기장을 응시했다.

“요즘 백성들 사이에서 중걸의 인기가 전성기의 정 내관과 비슷한 듯싶네.”

“중걸은 격투가 전문이고 정 내관은 검을 든 무사인데 설마 그렇겠습니까? 대회에선 격투보다는 검투의 인기가 훨씬 높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렇지만 검투에선 지난 몇 년 동안 고만고만한 무사들이 나와 힘들게 승패를 갈랐을 뿐, 압도적인 승자는 없었네. 반면 자네 친구는…….”

욱이 중걸과 처음 마주친 것은 영산의 노역장, 썩은 내가 풀풀 풍기던 죄수들의 움막에서였다. 마치 도깨비처럼 눈을 부라리며 허연의 곁을 지키던 중걸의 모습과 자신을 노려보던 눈빛이 불현듯 떠올라서 욱이 잠시 말을 잊었다.

“경기 내용이 화끈할 뿐 아니라, 지난 3년간 그 상대가 걸어서 경기장을 내려간 적이 없으니 백성들이 저리 열광을 하는 것이지.”

“하지만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로 나온 저 소금 장수도 만만치 않게 거칠고 포악한 자입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자를 아는가? 언제 보았는가?”

“일전에 대흥루에서 열린 무술 대회 예선을 구경했는데, 그때 보았습니다.”

“아…… 나가 놀다가 칼에 맞고 오밤중에 환궁했던 그날 말이구먼.”

같이 살면서 딱 한 번 늦게 들어온 것을 갖고 두고두고 트집이라 허연이 욱을 슬쩍 노려보았다. 그때 광장에서 갑자기 우어…… 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중걸의 상대로 나선 해남성의 소금 장수는 마주 선 중걸이 왜소해 보일 정도의 거구였다. 대화문 문지기인 중걸의 체격도 만만치는 않았는데 소금 장수는 어깨너비가 중걸의 두 배는 되어 보일 정도였던 것이다. 때문에 중걸의 실력을 익히 보아온 도성의 한량들도 선뜻 중걸의 낙승을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체격은 소금 장수가 압도적이고 실력과 근성은 중걸이 현재 월국 제일이니 경기가 어떻게 될까 싶은 기대감에 관중들이 숨을 꼴딱꼴딱 삼키는 사이, 마주 선 두 장사는 지체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첫 합에 중걸이 소금 장수를 번쩍 들어서 경기장 밖으로 내던져버리고 말았다.

중걸의 엄청난 기운과 사나움에 욱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초에 격투엔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 오늘 경기에 승주가 왔나 싶어서 애가 타던 공비까지도 흥분해서 우와…… 하는 탄성을 토해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중걸에게 들려 경기장 밖으로 패대기쳐진 소금 장수는 쉽게 일어나질 못했고, 격투 부문 준결승 첫 번째 경기는 그렇게 중걸의 승리로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중걸이 정말 장사는 장사일세. 저만은 해야 영산의 노역장 같은 곳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모양이구먼.”

“그런가 봅니다.”

허연이 대답을 하고는 곁에 앉은 공비를 돌아보았다.

“경기가 재미있으십니까?”

허연의 물음에 공비가 겸연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향에 있을 때 병영에서 병사들이 자주 이 같은 대결을 벌이곤 했는데…… 보고 있자니 그때 생각이 납니다.”

“다행입니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귀인께서 주신 외투 덕분에 화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연이 뒤에 선 고 내관을 불러서 공비에게 따뜻한 탕국이라도 올리라고 이르는 사이 욱이 몸을 앞으로 쑥 빼고는 공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헌데 너는 아까부터 무엇을 그리 두리번거리고 있느냐?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아, 오라버니가 계신가 하여…….”

공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눈길을 바닥으로 깔았다.

“네 오라비는 경기장 바로 옆 상석에 부장들과 함께 나와 있지 않느냐? 한눈에 딱 보이는구먼…….”

욱의 공연한 참견에 허연이 그러지 마시라며 눈치를 주었다. 공비가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나와서 애타게 찾는 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따지고 드는 것이 너무 짓궂다 싶었던 것이다. 허연의 눈총에 욱이 어깨를 으쓱이며 두 번째 준결승을 준비 중인 경기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는구먼. 이래가지고서야 검투 경기까지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격투 부문 준결승 두 번째 경기는 천축국에서 온 향료상과 주월성 문지기의 대결이었다. 연중 큰 대목인 황제의 생일 즈음엔 외국에서 온 상인들도 황성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개중엔 옛날이야기 속에 나올 법한 거인들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외국의 상인이 무술 대회 준결승까지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라서 대화문 앞에 모인 백성들의 모든 관심과 시선이 천축국의 상인에게로 쏠렸다.

“고향에 있을 때엔 언젠가 천축에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습니다. 향신료도 독특하고, 장신구도 정교하고…….”

“향신료나 장신구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네. 당장 수라청에 천축국 음식을 올리라고 해야겠구먼. 고 내관에게도 일러 천축국 장신구도 있는 대로 긁어 모아보고…….”

욱의 짓궂은 대답에 허연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천축의 음식은 가끔 별식으로 한 번씩 먹는 것으로 족했고 장신구는 이미 차고 넘쳤다.

“천축국은 아름다운 말이 많이 나는 곳입니다. 고향을 지나쳐서 월국으로 가는 천축국의 말들 중에는 정말 탐나는 놈들이 많았습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이 피식 웃었다.

“우화원에 아직 동물이 부족한가? 말 한 마리, 개 여섯 마리, 앵무새 백여 마리, 거기다 잉어는 천 마리 정도 되지 않는가?”

“저는 그저 천축국에 좋은 말이 많다는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말이라…… 그대는 항상 말을 좋아했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욱이 술잔을 들었다. 그때, 문루 아래 광장에서 우와…… 하는 백성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욱이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고서 목을 쑥 빼고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꽤나 자욱해진 안개 때문에 선수들의 움직임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탁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아, 진짜…….”

생일을 날씨 좋고 해도 긴 초가을쯤으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욱이 앉은 자리에서 발을 거칠게 굴렀다. 뭐가 좀 보일까 싶어서 아까부터 엉거주춤 일어선 채 경기장을 내려다보던 공비도 긴 한숨과 함께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짜증 나서 정말…….”

양옆에서 경기 구경을 못해 생으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자 허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승부가 나긴 난 모양입니다.”

“승부가 나면 뭐하는가? 내가 못 보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성문이 너무 높은 것도 불리할 때가 다 있습니다.”

해가 바뀌면 욱의 나이도 스물여덟이고, 이젠 어떻게 봐도 어린 나이가 아닌데 이럴 때엔 웬만한 여덟 살짜리 옆에 갖다놓아도 표가 안 날 지경이라서 허연이 옆에 놓인 과자를 욱에게 권했다.

“환호성이 긴 것을 보니 어지간히 볼 만한 승부였나 봅니다.”

“그래도 경기장 주변은 뭐가 보이는 모양인데, 우리는 문 위에 올라앉아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먼.”

욱이 체면도 잊고 성질나는 대로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허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공비를 돌아보았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오셨는데 날씨가 좋지 않습니다. 영재 부장의 시합은 보셔야 할 텐데…….”

허연의 인사 겸 위로에 공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제가 황궁에 든 이후로 폐하 생신에 날씨 좋은 꼴을 본 일이 없으니…… 애초에 큰 기대도 없었습니다.”

아직은 안개가 그렇게까지 짙지 않으니 바람 한 번 불면 혹시 시야가 좀 트일까 싶어서 밤하늘만 쳐다보던 욱이 검투 경기 첫 번째 준결승전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에 용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윤 내관을 도끼눈으로 노려보았다.

“눈에 뵈는 것도 없으니 이 추운 밤에 바람 맞아가며 여기 더 앉아 있을 까닭이 없구나.”

“그렇기는 하옵니다.”

“연회는 어느 전각에 마련했느냐?”

“황룡전이옵니다.”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황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구경거리도 마땅치 않고 바람은 더욱 차니 황후는 후비들을 데리고 먼저 황룡전으로 드시오.”

그렇지 않아도 어깨가 선듯하던 참이라 황후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오시면 폐하께서는…….”

“과인은 휘명전에 잠깐 들렀다 연회장으로 가겠소. 그러니 그동안은 황후가 과인 대신 연회 손님들을 대접해주시오.”

“예, 폐하.”

황후와 후궁, 종친과 고관들을 먼저 문루에서 내려 보낸 욱이 계속 광장을 내다보며 자리를 떠날 줄 모르는 공비를 돌아보았다.

“거기 그렇게 서 있으면 뭐라도 보이느냐? 이만 황룡전으로 가서 몸 녹이고 저녁이나 들자.”

“소인은…….”

오라비와 다른 부장들은 분명 경기장 주변에 마련된 관중석 중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승주는 안 보이는가? 오늘 대회에 참가하는 영재의 시중을 드느라 다른 곳에 있는가, 아니면 오라비에게 행패를 당해 다친 몸이 아직 낫질 않아서 홀로 숙소에 누워 있는가? 먼발치에서라도 승주의 모습을 한 번 더 보려고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문루에 올랐건만 보이는 것이라곤 안개에 에워싸인 희미한 그림자뿐이라 공비의 눈앞도 안타까움에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이만 영운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갑자기 왜? 몸도 괜찮고 춥지도 않다며?”

“저는 본시 예악이나 가무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지라…….”

무엇보다도 연회석에 앉아서 무희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 지켜볼 기분이 아니라서 공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꾹 찍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경기가 끝나면 오라비와 부장들을 황룡전으로 불러서 술 한 잔 내리려고 하는데, 그래도 싫으냐?”

오라비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면 또 언제 볼까, 국경은 곧 전란이 터질 듯 위태로워서 황제가 오라비에게 원군을 5만이나 딸려서 돌려보내는 판국인데, 오라비가 아무리 장사라도 전화에 휘말리면 그 안전을 어찌 장담할까 싶은 마음에 공비가 잠시 망설였다. 그런 공비를 잠시 쳐다보던 욱이 쓰고 있던 면류관을 벗어서 윤 내관에게 툭 넘겼다.

“폐하?”

“뭐…… 생각해보니 기다릴 것도 없구나. 문만 나서면 경기장이 아니냐? 같이 나가서 무호도 만나고 남은 경기도 보면 되겠구나.”

“폐하…….”

어쩐지, 휘명전엔 더 할 일도 없는데 굳이 들렀다 가겠다며 황후를 따돌리고 뒤로 빠지더라니…… 처음부터 문밖으로 놀러 나가려는 꼼수였구나 생각하며 윤 내관이 들고 있던 면류관을 곁에 서 있던 이 내관에게 조심스럽게 넘겼다.

“폐하, 지금 성문밖엔 도성 백성이 몽땅 몰려와 있습니다. 이리 혼잡한 중에 궁을 나가셔도 폐하의 안위에 문제가 없을지…….”

“그런 얘기를 왜 귀인을 빤히 쳐다보면서 하느냐?”

“바로 곁에 계시는데 어딜 보면서 말씀을 올린들 귀인께서 못 들으시겠습니까?”

욱의 충동적인 광장 나들이를 말릴 이는 한 사람뿐이라서 윤 내관이 꿋꿋하게 허연을 붙들고 늘어졌다. 광장엔 무술 대회의 열기로 잔뜩 흥분한 백성들이 가득한데다 안개는 시간이 흐르면 더욱 짙어질 텐데 이런 날, 이런 때에 황제가 궁을 나가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윤 내관의 말이 맞습니다. 백성들이 모처럼 좋은 구경 하며 한껏 즐기고 있는데 어가가 나가면 흥만 깰 것이니 폐하께서 참으십시오.”

자신이 뭐만 하자고 하면 참아라, 마라 하며 손부터 내젓는 것이 허연의 버릇이라 욱은 이제 이런 반응이 서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누가 어가를 끌고 나간다고 했는가? 우리 셋이 외투나 하나씩 걸치고 단출하게 나가자는 것이지.”

욱이 공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황제의 제안에 공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화문을 돌아보았다. 3년 전에 입궁한 이후 온천 행궁에도 한 번 따라가보지 못했던 공비에겐 궁 밖은 영 인연이 끊어진 딴 세상이었다. 정말 저 문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인가? 사람들 속에 섞이고 인파에 휩쓸리고…… 승주가 저 밖에 있다면 한 번 더 만나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단 말인가?

“저는…….”

“마침 예쁘게 차려입었으니 이대로 나가면 되겠구나.”

“놀리지 마십시오. 제 꼴이 어떤지는 저도 잘 압니다.”

공비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다시 한 번 대화문을 힐끔 돌아보았다. 조롱에 갇혀 있는 새가 열린 창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처로운 그 눈길에 허연이 욱을 한 대 쥐어박을 듯 사납게 노려보았다.

황제의 탄신일 전야. 한 해에 황성에서 열리는 행사 중 설날의 불꽃놀이 다음으로 큰 구경거리인 무술 대회가 열리는 대화문 앞 광장은 한꺼번에 백 개의 장이 선 듯 번잡하고 흥이 넘쳤다.

경기장 주변은 수십 개의 횃불을 놓아서 마치 대낮처럼 밝았고, 광장 곳곳에 피운 모닥불도 차가운 초겨울의 한기를 이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횃불과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뒤섞이는 바람에 밤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이제는 경기장 가까운 관중석이 아니고는 경기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흐려져 있었다.

검투 경기 준결승의 첫 번째 경기는 천운상단의 호위대장인 지한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었고, 오랜만에 보는 격렬한 검투로 관중들이 후끈 달아오른 중에 이제 막 두 번째 준결승이 시작될 참이었다.

“제가 뭐랬습니까? 형님. 저놈이 보기엔 별것 없어 보여도 몸놀림도 빠르고 상대방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예리함이 있다니까요.”

경기장 바로 옆 자리에서 지한의 경기를 지켜본 춘수가 며칠 전 그와 한판 붙었던 경기를 떠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다. 내 맘 같아선 너하고 영재를 상단에 넘기고 저 지한이란 놈을 바꿔서 데려가고 싶구나.”

“아니, 형님! 아무리 농담이라도…….”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느냐? 단주가 제정신이면 그렇게 손해나는 거래에 응할 리 없으니 그게 안타깝다.”

“자꾸 그런 말씀 하시면 서운합니다.”

춘수가 삐져서 볼멘소리를 하며 옆으로 돌아앉았다. 춘수는 지난 경기에서 지한에게 패한 이후 다른 부장들의 비웃음에 시달리며 울적하고 암울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지금 당장만 해도 다른 부장들은 영재의 대회 준비를 돕는다고 경기장 뒤편에 마련된 장막으로 몰려 들어갔는데 춘수만 마음이 상해서 무호의 곁을 지키는 중이었다.

영재가 대회에서 이기는 꼴을 보느니 이대로 안개가 몰아닥쳐서 경기가 싹 취소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던 춘수가 누군가가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승주야…….”

“머리털 나고 한곳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 봅니다. 사람들 헤집고 여기까지 들어오는 데만 반 시진은 걸린 것 같습니다.”

승주가 들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술 대여섯 병과 육포, 과자 같은 주전부리가 들어 있었다.

“사신각 부엌에 부탁해서 마련해 온 것입니다. 밤바람 오래 맞고 앉아 있으려면 뭐라도 몸을 덥힐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타고 입이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역시 너밖에 없다.”

승주가 내민 술병을 반색을 하고 받으며 춘수가 히죽 웃었다. 그러곤 술병을 따서 무호에게 먼저 권했다.

“내가 꼼짝 말고 침상에 누워서 몸조리하고 있으라고 일렀거늘, 어찌 나왔느냐?”

무호가 술병을 밀어 치우며 마땅치 않은 눈길로 승주를 쳐다보았다. 

“혼자 있어봐야 마음만 심란해서…… 그냥 나왔습니다.”

“잘했다. 좀 있으면 영재가 나와서 진목성 무사에게 박살이 날 것이니 그거나 같이 보자.”

무호가 요즘 들어 부쩍 승주를 못 잡아서 안달이라 춘수가 너스레를 떨며 얼른 그를 끌어다 옆구리에 붙였다.

무호의 눈치를 살피던 승주가 높이 솟은 대화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대화문의 문루와 아름다운 지붕은 부옇게 흐린 안개에 가려서 크고 컴컴한 장벽처럼 보일 뿐이었다.

“오늘 경기는 폐하께서도 친견을 하신다던데…….”

“좀 전까지는 문루에 불을 대낮처럼 밝혀놓고 폐하와 비빈들이 모두 나와 앉아 계셨는데 이제 다 내려가신 모양이다. 하긴, 여기 앉아 있어도 눈앞이 흐릿흐릿한데 저 위에서 뭐 뵈는 것이 있겠느냐?”

춘수의 대답에 승주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몰려온 짙은 안개로 영재와 진목성 무사의 준결승전은 좀처럼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검을 들고 경기장 중앙까지 나갔었으나 몰려오는 안개에 놀란 진행자가 다급하게 경기를 중단시키고 선수들을 내려 보낸 터라 좀 더 기다렸다가 안개가 바람에 흩어지면 경기를 하는 것이고, 안개가 더 짙어지면 오늘의 대회는 이것으로 파장이 나는 것이었다.

주최 측에서 경기를 이제라도 시작할지, 좀 더 기다려볼지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뒤쪽에 있던 구경꾼들은 한 발짝이라도 더 앞쪽에서 경기를 보려고 경기장 코앞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이런 대회를 하기엔 날씨가 좋지 않구나.”

맨주먹으로 붙어서 싸우는 격투기라면 모를까 진검 대결을 하기엔 시야가 너무 좋지 않아서 무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것이 장족과의 전투라면 안개가 아니라 천지가 뒤집어져도 결판을 내야만 하겠으나, 고작 유흥이 아닙니까? 아무리 영재라도 이렇게 죽기는 좀 아깝습니다.”

요즘 들어 다른 부장들에게서 당하는 조롱과 설움을 영재를 물어뜯는 것으로 푸는 것이 춘수의 버릇이라서 무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술이나 한 모금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춘수 옆에 앉은 승주를 넘겨다보다가 이제 완전히 안개에 휩싸여 높은 담처럼 보이는 문루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처량맞은 그 뒤통수를 보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이런 날이면 예전에 삼호봉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갔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춘수가 흐릿한 안개 속을 쳐다보면서 몇 년 전 부장들과 함께 떠났던 떠들썩한 사냥 여행을 떠올렸다.

삼호봉은 대현성 초입에 있는 드넓은 산지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였고 그 산을 지나려면 호랑이를 세 번은 마주쳐야 한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근 10여 년 큰 전란이 뜸한 덕에 백성들도 시름을 덜었지만, 그 때문에 산짐승도 늘어서 본래부터 호환으로 악명이 높았던 대현성 근처의 고갯길은 전에 비할 바 없이 호랑이의 출몰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그해 봄부터 가을까지 산에서 나무하던 나무꾼 두 명이 사라지고, 장사패들이 호랑이와 마주쳐서 들었던 것을 다 던지고 줄행랑을 치는 사건까지 생기자 대현성 인근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무호도 더는 산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뒷짐만 지고 있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열 일을 던져두고 휘하 부장들을 모두 이끌고 나선 호랑이 사냥은 초장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산에 들어간 첫 이틀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거센 폭우가 쏟아져서 산중의 사찰에서 발이 묶였고, 비가 그치자 이내 기온이 확 떨어져서 온 산에 서리가 눈처럼 두껍게 내렸다.

며칠 사이에 급변한 날씨와 부실한 섭생으로 부장들 절반이 고뿔과 몸살에 걸려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버리는 바람에 고작 열 명 남짓만 남아서 근 열흘간 높고 깊은 산을 헤매며 호랑이를 쫓았는데, 결국 호랑이는 꼬리도 못 보고 멧돼지하고 사슴만 대여섯 마리 잡아서 돌아오고 말았었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라니…… 시간이 정말 시위를 떠난 화살 같습니다.”

“그렇구나.”

“화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 아씨의 활 솜씨는 가히 신궁이 아닙니까?”

“또 그 얘기냐?”

무호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춘수의 손에서 술병을 낚아챘다.

탈도 많고 곡절도 많았던 그 사냥 여행에서 가장 무호의 골치를 썩였던 것은 여행 일정이 잡히자마자 그날부터 부모를 달달 볶아서 기어이 일행에 한자리를 차지한 여동생이었다. 방년 15세, 영주의 고명딸로 대현성 일대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규수였지만 공비는 침선이나 서화에 열중하는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병장기를 갖고 놀며 부장들과 어울려 말 달리는 것을 즐겼고, 이미 인근에 명궁이라고 칭송이 자자할 정도로 활 솜씨가 뛰어났었다.

절대 일행에 짐이 되지 않겠다고, 부장 한 사람 몫은 해내겠다고 장담한 대로 공비는 그 궂은 날씨에도 잔기침 한 번 하지 않고 거친 숲을 헤치고 높은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러곤 불과 며칠 사이에 산이 제집인 듯 익숙해져서 멧돼지 발자국도 가려내고, 호랑이 지나간 흔적도 찾아내고…… 저녁엔 모닥불 옆에서 노래하고 춤도 추면서 흥을 돋워 부장들의 인기를 온통 독차지했었다.

“그날 안개는 오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었는데…….”

춘수가 승주의 어깨를 툭 쳤다. 

“너도 기억이 나느냐? 사냥 여행 마지막 날 말이다.”

그제야 승주가 문루에서 눈을 떼고 춘수를 돌아보았다.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날 일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사냥의 마지막 이틀간은 산길에 어지간히 익숙한 무호와 부장들도 등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날씨가 위험천만했다. 잠깐 훤해지는 듯싶다가도 다음 순간엔 한 치 앞도 분간을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가 몰려와서 한 발짝 내딛기도 힘든 상황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돌아갈 날짜는 임박하고 성과는 없어서 마음이 조급해진 무호와 부장들은 안개가 더 짙어지면 바로 철수를 하기로 하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른 아침부터 산에 올라 호랑이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동틀 무렵의 박무는 점심때엔 코를 베어 가도 모를 정도로 짙어졌고 이러다간 호랑이를 만나도 사냥은커녕 오히려 그 배만 불릴 판국이었다. 결국 무호와 부장들은 더 이상 산에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지난 며칠 머물던 사냥꾼들의 움막으로 서둘러 길을 잡았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산을 얼마쯤 내려오다 어느 깊은 골에서 길잡이조차 길을 잃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그 산에서 20년간 사냥하고 버섯 따며 돌멩이 하나 놓인 위치까지 제 손금 보듯 환하게 알고 있다고 장담을 하던 길잡이가 걸음을 늦추고는 무호의 눈치만 힐끔힐끔 살피며 한숨만 내쉬었고, 그 때문에 부장들이 뭔가 잘못되었구나 싶어서 불안감에 휩싸였다. 바로 그때, 안개 속에서 덤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다음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일행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기습에는 평소 성난 늑대처럼 전장을 휘젓던 부장들도 기겁을 하고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집채만 한 것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대체 무엇인지 분간도 가질 않고, 여기저기서 윽! 아! 하는 비명 소리가 울리고…… 혹시 지난번 장사치들을 덮쳤던 그 백호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부장들은 검을 움켜쥔 채 바싹 얼어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누구보다 혼비백산한 것은 무호였다. 짐승의 동태를 살피느라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늘 옆에 붙어 다니던 누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때문이었다. 지난 열흘간 단 한 번도 누이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는데, 하필 이렇게 위태로운 때에 금쪽같은 여동생이 오간 곳이 없으니 무호는 순간 눈앞이 아득하고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때, 골짜기에 거친 바람이 한 차례 불어서 안개를 날려 보냈고 그제야 무호와 부장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골짜기의 좁은 틈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서 미친 듯 날뛰고 있는 것은 어지간한 황소 정도 크기의 수사슴이었다. 비록 육식을 하는 맹수는 아니지만 다 자란 수사슴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이었다. 덩치도 워낙 큰데다 바짝 벼린 창처럼 날카로운 뿔을 머리에 인 사슴에게 받히고 밟힌 부장들과 사냥꾼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서 신음을 하고 있었고 사슴은 그 한복판에서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무호의 시야가 트인 것처럼 사슴의 시야도 트였고, 하필 그가 서 있는 곳은 사슴의 코앞이었다. 놀란 무호가 다급하게 검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사슴이 먼저 뛰어 올랐고, 다음 순간엔 무호를 향해 뿔을 겨눈 채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그 모든 것이 불과 한 호흡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사슴의 기세가 거칠어서 무호가 그 뿔에 꿰이는 참사는 어찌해도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무호의 귓전에 무엇인가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고, 거의 동시에 코앞까지 들이닥친 사슴이 무릎을 꺾으며 옆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정확하게 사슴의 목을 꿰뚫었던 것이다.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무호가 맥이 탁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 상황을 지켜만 보던 부장들도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이게 대체 누구의 솜씨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몇 걸음 떨어진 비탈에서 그때까지도 활을 움켜쥔 채 울먹이고 있는 공비를 발견하고는 감탄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 사슴이 여태 우리 성읍 근처에서 잡힌 사슴 중엔 가장 컸을 것이다.”

급박했던 그때의 일이 방금 전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 춘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씨가 사내로 태어났으면 장족이 지금처럼 우리를 만만히 보고 저리 껄떡거리지는 못했을 텐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형님.”

춘수의 농 섞인 시비에 무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 말은 그러니까, 내가 만만해서 장족이 그리 들썩이는 것이란 뜻이냐?”

“여인의 몸으로도 그 커다란 사슴을 한 방에 쓰러뜨렸으니 만일 사내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대단했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지요. 아닌 말로다, 아씨가 안 계셨으면 그날이 형님 제삿날이 아니었습니까?”

무호의 눈치를 살피며 춘수가 승주의 어깨를 툭 쳤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춘수의 물음에 승주가 또다시 울적한 눈길로 문루를 올려다보았다. 공비가 사내였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그것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씨가 사내였다면 이 먼 곳까지 떠나올 일도 없었을 터, 지금도 대현성에서 말 달리고 활 쏘며 자유롭게 사셨을 것이니……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내지 않았겠습니까?”

승주의 시무룩한 대답에 무호가 춘수의 어깨를 거칠게 쥐어박았다.

“승주에게 쓸데없는 소리 마라.”

“저는 그냥…….”

그때, 누군가가 춘수를 거칠게 밀며 옆자리로 파고들었다. 이 자리는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상석으로 출정을 앞둔 상장군과 그 부장들을 위한 자리인데 어느 무엄한 백성이 이렇게 밀고 들어오나 싶어서 춘수가 인상을 쓰며 옆을 돌아보았다.

“어허! 이 자리는 임자가 있소!”

“아무 데나 엉덩이 붙이고 앉으면 그만이지, 빈자리에 임자가 어디 있는가? 사람, 빡빡하기는…….”

사내가 넉살 좋게 말을 받으며 춘수와 승주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러곤 흡족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쳐다보았다.

“자리 좋구먼. 여기라면 좀 뵈는 것이 있겠네.”

사내가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이쪽일세! 여기 앉을 자리가 있네!”

사방이 송곳 하나 꽂을 틈도 없이 빡빡한데 무호의 근처에만 대여섯 명 앉을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은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이 자리는 영재와 다른 부장들이 대회 준비를 하기 위해 잠시 비우고 간 자리였던 것이다.

“어허, 이 사람, 귀가 어두운가? 여기는 빈자리가 아니라 내 일행이 잠시 비운 자리일세! 더구나 여기는 이번에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시는 상장군 일행을 위해 천운상단에서 내준 특석인데 어딜 제멋대로 밀고 들어와서 엉덩이를 붙이는가?”

그때 느닷없이 끼어 앉은 사내 때문에 일행과 떨어져 앉게 된 승주가 사색이 되어 춘수를 향해 두 손을 마구 내저었다. 사내는 두꺼운 외투를 두르고 두건을 깊이 내려쓰고 있었지만 승주는 사내를 보자마자 그 뚜렷하고 준수한 이목구비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챘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분이…… 안개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욱의 모습에 놀란 승주가 급히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황궁 바로 앞이지만 이 혼란 중에 황제가 단신으로 나온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호위병으로 보이는 무사들 몇 명이 인파를 헤치고 급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여서 승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이놈! 좋게 말로 할 때 벌떡 일어서지 못할까? 대현성에선 천한 백성은 감히 상장군 근처에 범접조차 못했거늘…….”

욱이 걸친 위병의 검은 외투 아래로 언뜻언뜻 황의가 드러나 있는데도 춘수가 눈치 없이 자리를 다투며 드디어 막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싯적에 저자를 휩쓸고 다니며 싸움질도 많이 해보았던 욱에게 이 정도는 막말도 아니고 시비도 아니었다.

“대현성에는 그런 법이 있는지 몰라도 황성에선 내가 엉덩이 붙이고 앉는 자리가 내 자리일세.”

능청스럽게 대꾸를 하며 욱이 일행을 단상으로 끌어올려 줄줄이 옆에 앉혔다.

다른 부장들의 자리에 멋대로 밀고 들어온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젠 일행까지 끌고 와 자리를 다 차지하자 춘수가 발끈해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일행 중에 끼어 있는 젊은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얼어붙은 듯 굳어버리고 말았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서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실랑이를 무심히 들어 넘기던 무호도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아씨…….”

“수진아…….”

“또 뵙습니다, 오라버니.”

살짝 잠긴 음성으로 나직하게 인사를 한 공비가 잠시 머뭇거리다 욱 바로 옆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승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때 욱이 공비의 손목을 잡아 바로 옆에 끌어 앉혔다.

“이리 앉게. 경기장도 가깝고 불빛도 환하니…… 성문 위하고는 비교도 못할 명당일세.”

“아, 저는…….”

어쩌다 보니 욱과 승주 사이에 끼어 앉게 된 공비가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허둥거렸다. 승주는 공비가 오랜 세월 사랑하며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정인이었지만 대현성에 있을 때조차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적은 없었다.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공비와 바싹 붙어 앉게 된 승주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와 공비의 행차도 놀라운데 공비와 몸을 붙이고 앉다니…… 이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틈에 바로 곁에 자리를 잡은 사내가 승주의 팔을 잡아 앉았던 자리에 다시 주저앉히고 말았다.

“달리 자리도 없는데 어딜 가려고 일어나는가?”

“저는…….”

황제와 마찬가지로 이쪽 또한 초면이 아니라 연속으로 놀란 승주가 말조차 더듬었다. 자신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는 사내는 일전에 있었던 무술 대회 준결승에서 경기 우승자들보다 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끌었던 그 사람, 외모도 몸가짐도 범상치 않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우화원 귀인이었던 것이다.

“이리 혼잡한 곳에서 남의 자리를 차지한 것도 미안한 일인데 어찌 앉아 있던 사람까지 쫓아내겠는가? 그냥 앉아 있게.”

허연이 승주의 굳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욱이 성 밖으로 데리고 나온 일행은 허연, 공비, 윤 내관, 고 내관, 정 내관 그리고 진관우까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중 정 내관은 성문 밖에 백성들이 수만 명이나 몰려와서 뛰고 구르고 난리가 났는데 어딜 나가려고 하느냐며 펄쩍 뛰었고, 진관우는 최소한 백 명의 호위병 없이는 절대 성문을 열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욱이 변복하고 궐 밖 출입을 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이냐며 바득바득 고집을 피우고, 허연도 자신과 정 내관, 진관우가 모두 무공이 뛰어난 칼잡이이고 공비도 손에 검 하나 쥐면 위병이나 마찬가지이니 집 앞 마당에 잠깐 나갔다 오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거드는 바람에 진관우까지 끌려나온 것이었다.

“고작 무술 대회 몇 경기 보자고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진관우가 황제 바로 곁에 정신을 반쯤 내보낸 채 앉아 있던 춘수를 아예 뒤로 끌어내고 그 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내 생일 축하해준다며 벌인 잔치인데 지난 몇 년간 안개 때문에 문루 위에서 한숨만 쉬다가 내려가질 않았나? 좋은 구경은 백성들만 하고 나는 황룡전에서 지겨운 악곡이나 들으란 법이 있는가? 올해는 귀인도 있으니 좀 더 색다르고 재미있게 보낼 생각일세.”

수만 명이나 되는 흥분한 백성들에게 완전히 포위가 된 형국인데도 욱이 걱정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히죽거렸다. 역시 황제의 전에 없는 돌출 행동은 형님이 원인이었구나 싶어서 진관우가 입을 삐죽이며 건너 건너에 앉은 허연을 슬쩍 노려보았다.

다행히 몇 차례 불어온 거친 바람에 안개가 다소 흩어져서 영재와 진목성 무사 간의 준결승전은 더 지체 없이 속개되었다. 영재도 장사가 많은 대현성 대표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인상이 험했지만, 진목성에서 온 무사도 자신의 병영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대표 선수로 결코 영재에게 그 기세가 뒤떨어지지 않았다.

안개가 오락가락하는 사이에서 경기장 끄트머리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전의를 불태우던 두 사람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붉은 수건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검을 움켜쥐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옷 갈아입고 나오느라 첫 번째 준결승을 통으로 놓친 욱이 두 장사의 통쾌한 대결과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짜릿한 검 울림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이렇게 실감나고 흥분되는 것을…… 그동안 뚝 떨어진 성문 위에서 목을 빼고 넘겨다보느라 진짜 재미를 다 놓쳤구먼!”

영재와 진목성 장수가 연속 세 번이나 검을 섞고는 떨어지자 욱이 그제야 무릎을 치며 탄식을 했다. 어쩐지 그간 경기가 그저 그렇고 심심하더라. 경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리가 너무 멀어서 감흥이 없었던 것이었구나. 내년부터는 자리를 성문 위가 아니라 이쯤에 잡아야겠네…… 생각하며 욱이 곁에 앉은 공비를 돌아보았다.

“어떠냐? 따라 나오니 훨씬 재미있고 좋지 않으냐?”

“예, 뭐…….”

승주와 어깨를 딱 붙이고 앉아 있다니, 게다가 황제가 바로 옆에 있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섭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안 갈 정도로 이상해서 공비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검투 경기에 눈을 돌릴 경황도 없었다. 그때 욱이 승주의 발치에 놓인 보따리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그 보따리에 삐죽 나와 있는 그것이 술이냐?”

“예? 아, 예…….”

욱의 물음에 승주가 황급히 술병을 꺼내 욱에게 올렸다.

“형님 친구라 하여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재주가 다인 줄 알았는데, 제법 준비성도 있구나.”

술병을 받아 든 욱이 피식 웃으며 승주를 칭찬했다.

“황송하옵니다.”

“위에서 보았을 때엔 네가 뵈질 않아서 몸이 아파 못 나온 줄 알았다.”

욱의 물음에 승주가 바짝 긴장을 해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황제가 문루에서 나를 찾다니……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소인은…… 좀 늦게 나왔습니다.”

“몸은 괜찮으냐?”

“…….”

“어제 상장군에게 덤볐다가 등이 터질 뻔하지 않았느냐?”

“아…….”

“보통 사람 같았으면 골병이 들었을 텐데 벌써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보기보다는 강단이 있구나.”

욱의 말이 길어질수록 승주는 긴장이 지나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무릎이 떨려왔다. 황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공비를 바로 옆자리에 밀어 앉힌 것도 그렇고, 한낱 노비에 불과한 자신을 붙들고 이것저것 묻는 것도 분명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정작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가늠할 도리가 없는데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는 공비에게 이로운 상황이 아니니 승주는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듯 몸과 마음이 동시에 무거웠다. 그때 허연이 다시 승주를 끌어다 자리에 앉혔다. 그러곤 욱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경기나 보십시오. 한눈팔면 부지불식간에 끝나는 것이 검투입니다.”

그때 잠시 떨어져 서서 상대의 약점과 빈틈을 노리던 두 장수가 다시 한 번 들판에서 마주친 맹수들처럼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세 번, 네 번 전광석화처럼 검을 섞던 중, 진목성의 장수가 영재의 기운에 밀려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상대방의 실력이며 기운이 만만치 않아서 통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영재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으아악! 하는 기합과 함께 더욱 거친 소나기 공격을 퍼부었다. 두 번, 세 번 도끼로 장작 패듯 무작스럽게 내려치는 영재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한 진목성 무사가 결국 검을 놓치고 영재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모든 과정이 숨 한 번 길게 내쉴 동안 벌어진 일이라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 외엔 경기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관중들은 모두 주먹을 움켜쥐고 대결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결국 진목성 무사의 검이 바닥에 떨어져 퉁그러지자 모두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성을 질렀다.

“정말 대단하구먼!”

펄쩍 뛰어 올라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환성을 올린 욱이 석상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는 무호를 돌아보았다.

“자네 부장 정말 대단하네. 검 쓰는 솜씨며 몸놀림은 다소 투박하지만 한 번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주 제대로 상대를 두들겨 패네그려. 단순하면서도 호쾌한 것이 내 맘에 쏙 드는구먼.”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눈으론 경기장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지만 실상 어깨를 딱 붙이고 앉은 공비와 승주가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던 무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자네도 저 부장만큼 검을 쓰는가? 아니면 그냥…….”

“그냥…… 이라니요?”

무호의 반문이 성난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들려서 욱과 무호 사이에 앉아 있던 진관우가 바짝 긴장을 하고 말았다. 애초엔 흥분한 군중들의 난동이나 무례가 걱정스러워 황제의 출궁을 막았던 것인데……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무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진관우가 슬며시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아니, 뭐…… 그대는 영주의 장자이자 후계자이니 진짜 무사들만큼 무예에 능하지 않아도 지금의 지위에 올랐을 것이 아닌가?”

“지금 진짜 무사들만큼…… 이라고 하셨습니까?”

“허면 자네도 자네 부장들만큼 무예에 능한가?”

욱의 물음에 무호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서 움찔했다. 무예가 부하들만큼은 되느냐니…… 무호는 한평생 어디 가서도 이렇게 모욕적인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영재 정도는 한두 합이면 검은 성벽 너머로 날려버리고 그 목덜미를 움켜잡을 수 있습니다.”

열 받은 무호가 어전이고 뭐고 안중에 없이 벌컥 성질을 냈다. 그 바람에 중간에 끼어 있는 진관우가 더욱 긴장해서 뒤로 물러앉았다. 하지만 욱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술병을 기울였다.

“그런가? 나는 소문만 들었지, 그대가 검 다루는 것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긴가민가했네.”

무호라고 하면 실제 본 사람은 얼마 없어도 대현성 호랑이라는 그 별호는 모르는 자가 없는 나라 안 최고의 장사이자 장수인데, 그런 자를 면전에 앉혀놓고 이 무슨 막말인가? 진관우가 심호흡을 하며 욱에게 그러지 마시라고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해맑은 표정으로 진관우를 마주 보았다.

“사람의 능력이 반드시 출신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질 않나? 작금의 조정만 봐도 집안의 후광으로 출사해서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자들은 많지만, 정작 충직함이나 총명함이 두드러지는 자들은 궁벽한 시골, 한미한 가문 출신들이 더욱 많으니…….”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무호 장군은 이미 지난 10년간 국경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에서 그 실력을 넘치도록 증명한 용장입니다.”

무호에게 들리길 바라면서 진관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욱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소곤거렸다.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무호에게 달리 하실 말이 있으시면 공연히 성질 돋우지 마시고 그냥 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진관우의 통사정에도 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나? 처남매부 간에 격의 없이 몇 마디 주고받은 것을 가지고…….”

그렇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 들을 리 없지…… 마음 같아선 황제를 버리고 이 길로 집에 가버리고 싶지만, 일단은 형님하고 자리부터 바꿔 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진관우가 저만치에 떨어져 앉은 허연을 넘겨다보았다. 하지만 허연은 자꾸만 무호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황제 쪽으론 눈길도 안 주고서 곁에 앉은 사내를 붙들고 조곤조곤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바깥출입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어 다행일세. 자네가 부장들에게 업혀서 향원궁을 나갔을 때엔 걱정을 많이 했었네.”

“제…… 걱정을요?”

이분은 또 왜 이러나 싶어서 승주가 바싹 얼어붙었다.

“뼈라도 부러졌으면 어쩔 뻔했나? 화산 행궁까지는 꼬박 사흘길인데 자칫했으면 동행을 못할 뻔했네.”

내도록 돌부처처럼 앉아서 눈알만 굴리고 있던 공비가 화산 동행이란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승주가 안타까운 눈길로 공비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리, 저는 화산에 안 갑니다.”

“무슨 말인가? 후발 군사가 집결할 때까지는 시일이 좀 남아서 무호 장군이 화산까지 폐하를 뫼시기로 되었다고 들었는데, 허면 자네도 같이 가는 것이 아닌가?”

“화산엔 장군과 부장 대여섯 명만 가고, 저는 다른 부장들과 집결지에 먼저 가서 행군 준비를 돕게 되었습니다.”

승주의 대답에 허연과 욱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긴, 무호도 둘 사이를 아는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여행길, 온 계곡에 더운 김이 풀풀 솟는 온천 별궁에 승주를 곱게 데리고 갈 리 없지.

“군영의 병사도 아닌 자네가 꼭 집결지에 먼저 가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귀인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대군이 두 달 가까이 행군을 하는 데엔 많은 물자가 필요한데, 그것을 모두 조달하고 예산을 집행하려면 제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다른 부장들은 그런 일을 못하는가?”

허연의 물음에 승주가 무호 진영의 부장들 중 누가 군량미를 비롯해 수백 대의 짐수레를 가득 채울 군수품을 빠짐없이 사들이고 수백만 냥의 예산을 실수 없이 집행할 수 있을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말았다. 무호의 부장들은 무사로서는 용맹하고 사내로서는 호탕하며 친구로서는 의리가 넘쳤지만, 붓을 쥐여주면 머저리도 그런 머저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는 있지만, 큰돈이 쓰이는 일일수록 꼼꼼하고 실수가 없어야 하겠기에…….”

“하지만 나라의 중대사인 만큼 조정에서도 재무를 담당하는 관리들 수십 명을 보낼 터, 자네가 꼭 서둘러서 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도 그렇지만, 무호가 자신을 콕 집어서 너는 다른 부장들하고 먼저 집결지에 가서 준비 싹 해놓고 기다리라는데, 거기다 대고 재무 담당 관원들이 수두룩이 따라 붙을 텐데 그걸 왜 내가 하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것이 승주의 입장이었다.

“소인이야 장군님의 종복이니 명을 내리시면 따를 밖에요.”

승주의 대답에 허연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두 자리 건너편에 앉은 욱의 귀에도 또렷이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그것 참 아깝게 되었네. 나는 자네가 꼭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허연의 언질을 접수한 욱이 곧바로 무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무호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으며 절대 불가의 입장을 밝혔다.

“승주는 할 일이 있습니다.”

“직책도 없는 노비에게 공문서 쓰게 하고, 2만 명이나 되는 대군의 행군 치다꺼리도 시키고…… 참으로 알뜰하게도 부려먹네그려.”

욱의 명백한 시비에 무호가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승주는 그냥 노비가 아닙니다.”

“물론 그렇지. 나라 안에서 가장 혹사당하는 노비가 아닌가?”

“승주는 제 아우나 다름없는 아이입니다!”

“조금만 거슬리면 등이 터져라 벽에다 갖다 박던데…… 아우들한테도 그리하는가?”

욱의 반박에 말문이 턱 막힌 무호가 폭풍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보다 못한 공비가 욱의 옷자락을 잡아 다툼을 말렸다. 공비가 느끼기에도 아까부터 욱이 공연히 무호의 약을 바짝바짝 올리고 있는데, 이런 대화가 길어지는 것은 오라비에게도, 황제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소인의 오라비들은 실제로 거칠게 다툽니다. 한번 열 받으면 손에 잡히는 병장기는 무엇이든 다 집어서 휘둘러대는 통에 집 안엔 성한 기둥이 없고, 창문은 늘 새것입니다.”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거친 장수라는 네 오라비들과 승주가 같으냐?”

욱의 반문에 어제 벌어진 그 무작한 폭행 장면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라서 공비가 무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 눈길에 지은 죄가 엄연한 무호가 움찔해서 시선을 발치로 떨궜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이번에 황성에 와서 입궁할 때마다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냥저냥 다른 후궁들처럼 무난하게 지내는 줄 알았던 누이는 황제를 침소에서 쫓아내는 무례를 범하고 지난 3년간 궁분만 축내고 있었으니, 자신이 황제 앞에서 바득바득 주장을 내세울 입장이 아닌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승주를 공비 곁에 가까이 두는 것은 화약고 옆에 횃불을 두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짓이었고 두 사람 모두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차라리 저놈을 데려오지 말걸……. 이번에 황성에 와서 원군을 5만이나 얻어 가는 것은 크나큰 수확이지만 그 외 개인적인 일은 몽땅 실수와 망신의 연속이라 무호는 요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벽에다 머리를 박을 지경이었다.

“춥지는 않은가?”

곁에서 공비가 어깨를 살짝 떠는 것을 깨달은 욱이 그녀의 옷깃을 바싹 올려서 다시 여며주었다.

“괜찮습니다.”

“비록 궁문 바로 앞이지만, 3년 만에 바깥바람 쐬는데 몰골이 이게 뭐냐?”

타박을 하며 욱이 쥐고 있던 술병을 공비에게 넘겼다. 자신의 손찌검으로 얼굴 반쪽이 보라색인 누이를 착잡한 눈길로 지켜보던 무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욱을 돌아보았다.

“불민한 누이를 이리 아껴주시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일곱 명이나 되는 다른 부인들을 다 두고 별로 예쁜 구석도 없는 누이를 데리고 나와 곁에 앉히고 보살펴주는 것이 경황 중에도 고마워서 무호가 인사를 올렸다. 그사이 풀이 많이 죽어서 목소리조차 기어 들어가는 무호를 보고는 욱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굳히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고마우면 승주를 원행에 동행하도록 하게.”

언제 안개가 다시 몰려올지 몰라 주최 측도, 관중들도 조마조마한 가운데 검투 경기 준결승이 끝나자마자 지체 없이 격투 경기의 결승 진출자들이 경기장에 올랐다. 격투 경기의 결승은 황궁 문지기 중걸과 주월성의 성문지기 장사의 한판 대결이었다.

백성들은 지난 몇 년간 황궁 문지기 중걸의 모진 근성과 살인적인 기술을 봐왔기 때문에 그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문지기 대 문지기 대결도 색다른 조합인데다 새로운 도전자인 주월성의 문지기는 중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였다. 게다가 둘이 맞붙으면 뭔가 사달이 나겠구나 싶을 정도로 서로를 노려보는 눈길에 투지와 적대감이 가득했으니, 곧 벌어질 한판 대결에 대한 기대로 관중들이 한껏 흥분해서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어 올렸다.

경기장을 돌며 잠시 서로의 약점과 빈틈을 노리던 두 장사가 시간을 길게 끌지 않고 잔 주먹을 툭툭 던지며 서로를 도발했다. 잠시 흩어졌던 안개가 밤바람을 따라 또다시 슬슬 짙어지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두 장사가 허술하고 가볍게 주고받는 것 같은 주먹도 정작 상대방의 얼굴이나 어깨에 가서 맞을 때엔 퍽, 퍽 살벌한 타격성이 울려 퍼졌다. 멀리서 보았을 때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현장감에 욱이 내년부터 이 자리는 내 자리라고 한 번 더 마음을 굳히며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술병을 옆으로 넘겼다.

“이걸 왜 제게 주십니까?”

얼결에 술병을 받아 든 공비가 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 모금 들어라. 바람이 차지 않느냐?”

“저는 술 생각이 별로…….”

“네가 술 생각이 없을 때도 있었느냐? 일전엔 소홍주 여섯 병을 앉은자리에서 까고 대취해서 쓰러진 일도 있지 않았느냐?”

욱이 세상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떠들자 공비가 화들짝 놀라서 승주를 돌아보았다. 소홍주 여섯 병이란 말에 승주도 놀라서 공비를 쳐다보았다.

“아씨, 아직도 그렇게 폭음을 하십니까?”

승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공비가 욱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런 적 없다. 폐하께서 농을 하시는 것이다.”

공비가 고개를 저으며 딱 잡아뗐다. 그러자 욱이 어이가 없어서 어흥……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날 보낸 해장국은 잘 먹었느냐? 선대에 후궁에게 해장국을 끓여 보낸 황제가 과인 외에 또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폐하…….”

이젠 오라비까지 황제의 어깨 너머로 목을 빼고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자 공비가 당황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곤 자신을 걱정 어린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승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전에…… 입궁한 이후 딱 한 번 그랬다. 그 정도야 큰일도 아니질 않느냐?”

“약주를 즐기시는 것은 알지만, 그리 폭음하시면 건강을 해치십니다.”

“…….”

“가까운 곳에 일가붙이 한 사람 없으신데 몸이라도 아프면 어찌하시려고요? 항상 조심하십시오.”

승주의 걱정에 공비가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황제와 오라비 사이에 오가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으니 승주가 어찌어찌 화산 행궁까지 동행을 할 것 같기는 한데…… 그 며칠은 꿈인 듯 설레겠지만 결국 열흘 남짓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터, 그 이후엔 또 어찌 살까 싶어서 심사가 어지러워진 공비가 들고 있던 술병을 기울여 꿀꺽꿀꺽 병나발을 불었다.

눈 둘 곳도 마땅치 않아서 안개가 오락가락하는 경기장을 멍하니 쳐다보던 승주가 갑작스러운 공비의 음주에 놀라서 술병을 움켜잡았다.

“아씨, 독한 술입니다. 이렇게 드시면…….”

“그냥 맹맹하구먼, 뭐가 그리 독하다고…….”

술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공비도 병을 꽉 움켜쥐고 버텼다. 그러다 둘이 손을 움켜잡은 것이나 진배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소스라치게 놀라서 공비는 욱 쪽으로 바싹 붙었고 승주는 허연의 옆구리에 파고들 듯 몸을 기댔다.

처음엔 같이 앉은 게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더니 그 잠깐 사이에 말 트고, 걱정하고, 이제 손까지 붙잡는 공비와 승주를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던 욱이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퍽! 소리와 윽…… 하는 낮은 신음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떨어져서 주먹을 날리던 중걸과 그 상대는 드디어 서로에게 달려들어 경기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개 속에 얼핏 드러난 중걸의 얼굴은 주월성 문지기에게 언제 그렇게 맞았는지 코피가 터져 입 언저리가 온통 피 칠갑이었다.

키와 몸무게에서 단연 유리한 주월성 장사가 중걸을 타고 앉아서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보통 사람은 한 대 맞으면 죽든가, 최소한 기절은 하겠다 싶을 만치 주월성 장사의 주먹은 크고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 주먹에 연거푸 석 대를 얻어맞고도 얕은 신음 한 번 지르지 않고 반격을 노리던 중걸이 기어이 상대의 목에 다리를 걸어서 뒤로 넘기자 관중석에서는 다시 한 번 단상이 무너질 듯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월성 장사의 주먹질에 눈도 못 뜰 지경으로 얼굴이 부은 채 몸을 일으킨 중걸이 지체 없이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곰에게 달려드는 호랑이 같아서 평소 격투 따위는 검투에 비하면 심심하고 수준도 떨어진다고 생각하던 무호까지 탄성을 토해내며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장사가 또다시 한 덩어리가 되어 경기장을 굴렀다. 그리고 잠시 엎치락뒤치락 끝에 이번엔 중걸이 주월성 장사를 깔고 앉아 주먹을 내리꽂았다. 좀 전에 얻어맞은 것을 복수라도 하듯 가차 없는 주먹질에 퍽 하는 타격성이 얼마나 크게 울리는지 공비가 차마 그 광경을 못 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고향에 있을 때엔 사냥도 꽤나 즐겼다던데, 이런 것은 취향에 안 맞느냐?”

욱이 공비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었다.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사냥을 따라다니며 산짐승을 몇 마리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때려죽이진 않았습니다.”

공비의 야무진 대꾸에 욱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사냥은 이런 격투하고는 또 다르지.”

갑자기 확 몰려온 안개 때문에 코앞의 경기도 잘 뵈질 않아서 욱이 연기 날리듯 손을 내저었다. 하얀 장막이 쳐진 듯 선수들의 그림자만 비치다가 그마저도 곧 안개에 가려 경기장 안에선 윽! 퍽! 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라 선수 당사자들과 심판 외엔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경기장 바로 곁에서도 알 길이 없었다.

아, 이놈의 안개…… 결국 올해도 검투 경기 결승은 못 보겠구나 싶어서 다들 시무룩한 표정으로 안개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을 때에 경기장 안에서 심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람들, 좀 올라와서 말리게! 중걸이 사람을 잡네!”

결국 격투 경기의 결승도 제대로 본 사람 없이 그렇게 끝이 나고, 몰려들었던 관중들은 아쉬움에 혀를 끌끌 차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에잇, 올해도 진짜 좋은 구경은 다 놓쳤네그려.”

“그래도 작년, 재작년에 비하면 양반일세. 작년엔 좁아터진 대흥루 앞마당에서 밟혀 죽을 뻔하지 않았나?”

“허긴, 올해가 요행수지. 광장에 통으로 천막이라도 둘러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경기 구경 제대로 하기는 글렀네.”

다들 아쉬움에 투덜거리며 수룡천 쪽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진관우가 욱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도 이만 환궁을 하시지요.”

“있어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렵사리 나왔건만, 제대로 본 경기는 좀 전에 치러진 검투 경기 준결승이 전부 아닌가? 이대로 들어가기는 좀 아쉽구먼.”

욱의 대답에 진관우와 정 내관의 눈길이 동시에 사나워졌다.

“어렵사리 나오시다니요? 그냥 문 열고 궁문 앞으로 몇 걸음 나오신 게 전부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관우가 대뜸 따지고 들자 욱도 만만찮은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네들이 안 된다, 못 간다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나? 그렇게만 안 했어도 준결승 한 경기는 더 보았겠네.”

“그래서 지금, 환궁을 못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언제 못하겠다고 했는가?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람 좀 쐬겠다는 것이지…….”

“불가합니다, 폐하. 안개에 군중에…… 지금 같은 상황이 가장 위험합니다.”

진관우의 말에 틀린 곳이 없어서 허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황룡전에서 주연이 한창일 터…… 옥좌를 너무 오래 비우시는 것도 중신들에게 결례입니다.”

허연의 설득에 욱이 아쉬운 듯 안개가 가득한 광장을 슥 둘러보았다. 그러곤 공비의 손목을 꽉 잡고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너는 수룡천변 구경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겠구나.”

“예?”

욱의 수상쩍은 속삭임에 공비가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욱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공비를 데리고 관중석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곤 진관우와 정 내관이 대화문 방향을 확인하느라 한눈을 판 사이에 안개 속으로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아, 진짜…….”

황제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자 진관우가 속이 터져서 발을 꽝 굴렀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게 타일러도 어찌 알아먹지를 못한단 말인가? 일국의 황제가 일없이 놀러나 다니자고 이 오리무중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버렸으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을꼬?

“형님!”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선 진관우가 흐릿한 안개 속에 승주를 잡고 서 있는 허연을 노려보았다.

“고정하게, 아우님. 폐하께서 홀로 사라지신 것도 아니고, 공비께서 함께 계시니 별일이야 있겠는가?”

나오기 전 공비가 욱에게서 위병의 검을 건네받아 그 자리에서 훌쩍 뽑아 몇 번 휘둘러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던 허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위병들을 준비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던 진관우는 허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도리어 인상을 썼다. 혼자 사라진 것도 아니고 후궁까지 동행한 것이 더욱 철없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오시기 전에 폐하와 뭔가 의논한 바가 있으십니까?”

곁에 서 있던 윤 내관이 몸이 바싹 달아서 허연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챙겨 가셔야지, 공비만 데리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버린 욱의 처사가 윤 내관도 섭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논은 없었으나…… 폐하께서 가실 만한 곳이야 빤하지 않나? 천변을 좀 돌아다니시다 대흥루로 가시겠지.”

허연의 대답에 욱의 측근들이 그것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욱은 소싯적에 대흥루 죽돌이 생활을 꽤 길게 했었고, 오늘 같은 날은 지하부터 2층까지 발 디딜 틈 없이 붐빌 것이니 오히려 남의 이목 끌지 않고 놀기엔 좋을 터였다.

“그러면 일단…….”

주변에 위병을 풀어서 황제를 찾아보고, 성과가 없으면 대흥루에 진을 쳐서라도 황제를 잡아 갈 것이니 형님은 먼저 들어가 계시라고 이르려던 진관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틈에 허연도 안개 속으로 사라져 흔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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