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정인-2 (11/16)

저녁 내내 바람 따라 오락가락하던 안개는 이제 말 그대로 코를 베어 가도 모를 정도로 짙은 덩어리로 밀려와서 대화문 앞 광장을 벗어나는 것도 쉽지가 않을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경기장 주변을 배회하다가 구경이고 뭐고 다 틀린 것을 깨닫고 집이나 숙소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린 백성들도 안개 속에서 길을 잃거나 툭툭 부딪혀,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리, 길을 알고 가십니까?”

안개 속에서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은 승주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채 성큼성큼 깊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허연을 붙들어 세웠다.

“어지간히 정신없을 때가 아니고는 동서남북 분별은 하네.”

“…….”

“괜찮은가?”

허연이 승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깨닫고 보니 승주는 자신에게 잡힌 손부터 어깨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 성치도 않은 몸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탈이 난 것이 아닌가?”

허연의 걱정에 승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고민 가득한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나리,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무엇이 궁금한가?”

“폐하께서 공비마마와 소인을 의심하고 계십니까?”

승주의 물음에 허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네.”

“정말입니까?”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겠나?”

“허면 오늘 아씨를 뫼시고 나와 제 옆에 밀어 앉히고 어찌 하나 보신 것이 그냥 우연이란 말입니까?”

의심과 원망, 두려움이 가득한 승주의 눈길에 허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는 자네와 공비마마 사이를 의심하고 계신 게 아닐세. 그저…….”

“…….”

“어떤 사이인지 알고 계신 것뿐일세.”

황궁을 나오기 전, 위병들의 외투를 가져다 하나씩 나눠 입던 중에 혹 나가서 인파에 휩쓸리거나 안개가 짙어서 일행을 놓치면 거북다리 앞에서 보자고 속삭이던 욱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떠올린 허연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디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집 앞 마당에 나가서 경기나 잠깐 보고 들어오는 것인데 아이처럼 들떠서는…… 욱이 나이도 더 먹지 말고, 철도 더 들지 말고 딱 이대로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허연이 수룡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 그리 서 있는가? 이쪽일세.”

앞장서서 걷다가 승주가 쫓아오는 기척이 없는 걸 깨달은 허연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어깨를 덜덜 떠는 것이 추워서 그런 것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가엾고 불쌍하단 생각이 들어서 허연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외투의 매듭을 풀었다. 이 외투는 절대 안 벗으려고 했는데…….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승주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딱 잘라 말했다.

“어찌 알고 계시건 잘못 아신 것이고, 오해를 하고 계신 겁니다. 저와 공비마마 사이라니요? 천한 종놈과 영주님의 따님 간에 사이라고 할 만한 인연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진정하게. 이러다 병나겠네.”

승주를 달래며 허연이 외투를 벗어 그 어깨에 푹 뒤집어씌웠다.

“나리…….”

“내가 공연한 말을 했네. 자네와 공비마마 간의 사연을 폐하나 내가 어찌 알겠는가?”

승주가 복잡한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한때 적국의 장수였다가 이제는 구중궁궐 깊은 곳에 들어 숨은 듯 살아가고 있는 허연에 대해서 승주가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사치스럽고 교활하며 술수가 교묘해서 젊은 황제를 손안에 넣고 떡처럼 주무른다는 비판도 있고, 지난날 대군을 지휘하며 풍전등화의 조국을 우직하게 지켰던 대장군답게 크고 어려운 나랏일에 관해서는 적절한 조언도 하며 황제의 무거운 짐과 시름을 많은 부분 나누어 지고 있다는 말도 있고…… 그처럼 평가가 극단적이라서 소문만으로 허연의 사람됨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당장 승주가 허연에 관해 확인한 것은 황제와 함께 번잡한 광장에 나와서 경기 구경을 할 정도로 둘 사이가 친밀하다는 것과, 하찮은 노비를 대하는 태도조차 품위 있고 진중하다는 것뿐이었다. 승주가 보기에 허연은 황제에게 해를 끼치거나 어린 후궁을 해코지할 사람이 아니었다.

“나리, 아씨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으십니다. 입궁하시기 전 한두 해 정도 소인이 아씨의 공부를 봐드린 일은 있지만 그것도 멀찍이 떨어져 앉아 책 읽는 것을 듣거나 글 쓰는 것을 도와드린 정도였고, 항상 유모와 여종이 방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허연이 어떤 사람이든, 황제가 어떤 의심을 갖고 있든 공비의 살길은 터줘야 한다는 절박함에 승주가 고개를 푹 숙이고 통사정을 했다.

“공비께 잘못이 없음은 잘 아네. 또한 자네에게는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러니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네.”

“나리, 제발…….”

“또한 공비께서 입궁하셨을 때 나이가 고작 열일곱이셨는데, 그 이전에 고향에서 자네와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들 그 일을 트집 잡아 죄를 물으시겠는가? 폐하는 그렇게 용렬한 분이 아니시네.”

“허면 폐하께서는 대체 마마와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승주가 울컥해서 대들 듯 따지자 허연이 움찔해서 한 걸음 물러섰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네.”

뭐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표정이나 태도만 봐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이 그 속마음이라서 허연이 궁색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했다.

“하지만, 뭐 나쁜 일이야 있겠는가? 폐하께서도 비슷한 문제로 오래 애를 태운 적이 있으시니…… 그저 안타까워서 그러시는 것이겠지.”

그저 안타까워서라는 한 마디에 비위가 있는 대로 상한 승주가 어려운 것도 잠시 잊고 허연을 노려보았다. 내게는 숨이 막히고 애가 끊어지는 것 같은 슬픔이 남 보기엔 그저 구경거리로구나. 단지 안타까운 마음에 경기장에 아씨를 데리고 나와서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같이 온천 별궁에 놀러 가자고 그 장난질을 쳤단 말인가? 권력자의 인정이란 참으로 얄팍한 것이로구나 싶어서 승주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곤 막말이 터져 나가려는 걸 어렵사리 참으며 어깨에 걸쳤던 외투를 걷어서 허연에게 내밀었다.

“살펴 가십시오. 저는 몸이 안 좋아서 이만 숙소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안개가 이리 짙은데, 혼자 잘 찾아갈 수 있겠는가?”

“어린애도 아닌데 여기서 사신각을 못 찾아가겠습니까? 변방에서 종노릇을 하다 보면 망망대해 같은 초원에서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는 유목민을 찾아내야 할 때도 있고, 처음 가보는 낯선 성읍에서 이름 석 자만 들고 사람을 찾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몸살이 오려는지 몸도 여기저기 쿡쿡 쑤시고 마음도 있는 대로 상한 승주가 싸늘하게 대꾸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갑자기 거칠어진 승주의 태도에 허연이 뻘쭘해져서 낮은 헛기침을 했다.

“그것도 그렇네만, 거북다리가 여기서 멀지 않으니…….”

“가시는 곳까지 뫼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허면, 살펴 가십시오.”

더는 말 붙이기도 힘들 정도로 쌀쌀하게 인사를 하고 승주가 발길을 싹 돌렸다. 그러자 허연이 그 뒤통수에 대고 들으라는 듯 언성을 높여 중얼거렸다.

“가서 차라도 한 잔 같이 하면 좋을 텐데…… 거북다리 앞에 가면 공비마마도 와 계실 것이고…….”

천변에 내걸린 색등을 따라서 짙은 안개 속을 걷고 걷던 공비가 돌다리 난간머리에 놓인 작은 돌 거북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아이처럼 웃었다.

“이 다리가 거북다리인가 봅니다. 거북이가 더 클 줄 알았는데…….”

고작 돌 거북을 보고도 굉장히 특별한 것을 본 듯 즐거워하는 공비의 모습에 욱도 피식 웃었다. 

“수룡천변이 그렇게 아름답고 번화하다더니…… 이리 안개가 짙은 날에도 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너도 황성 생활 3년 차인데 거북다리도 한 번 못 보고, 대흥루에서 주사위 한 번 던져보질 못하다니…… 후궁이 포로보다 나을 것이 없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공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은 지방 영주의 딸로 태어나 후비가 되었다 하면 늘어진 팔자라 부러워하겠지만…… 저는 차라리 천변 장사치의 딸로 태어나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든가…….”

욱의 혼잣말에 공비가 짙은 안개가 다 흩어지도록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더라면 고향에서 수천 리나 멀리 떨어진 황성까지 억지로 끌려올 일도 없었겠지요. 가족들과 생이별에, 손바닥만 한 별궁에 갇혀서 여우같은 여편네들과 뜯고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고…….”

“생각할수록 아깝구나. 네가 사내로 태어났으면 나도 지난 3년간 후궁의 소란으로 골치를 앓지 않았을 것이고, 장족은 감히 국경을 넘보지 못했을 것이니…….”

공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북이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잠시 공비를 쳐다보던 욱이 그 축 처진 어깨를 툭 쳤다.

“다리 건너편에 볶은 국수 잘하는 주막이 있는데, 가서 요기나 하자. 탁주도 한잔씩 들고…….”

수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한꺼번에 몰려 나왔다가 기대했던 구경거리가 시간도 어중간하게 파장이 나는 바람에 수룡천변의 술집과 요릿집은 발 디딜 틈도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욱이 공비를 데리고 간 주막은 번화가 복판인데다 술맛 좋고 안주 푸짐하기로 소문난 집이라 더욱 붐벼서 종업원이 문 앞에서 번호표를 나눠주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위병대 외투에 은화 한 닢으로 2층에 너른 자리를 얻어낸 욱은 의기양양하게 공비를 전망 좋은 창가에 밀어 앉혔다.

“날이 좀 맑았으면 좋았을 것을…… 색등도 밝고 단풍도 꽤 들고, 수룡천엔 맑은 물이 넘칠 듯 흐르는 밤풍경이 꽤나 운치가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이 하나도 보이질 않으니 아쉽습니다.”

“네가 그런 풍류도 즐기는 줄은 몰랐구나.”

“저라고 날마다 사냥만 다녔겠습니까? 서책도 보고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일상은 나름대로 고상했습니다.”

“좋은 선생이 있었으니 그것도 즐거웠겠지.”

욱의 가시가 든 한마디에 공비의 눈길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말실수한 것을 깨달은 욱이 얼른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볶은 국수 하나, 돼지 뱃살구이 한 접시, 탁주 한 되 가져오게.”

“예, 나리.”

“귀부인 드실 만한 떡이나 정과 같은 것 있으면 그것도 한 접시…….”

“저는 단것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욱의 주문을 딱 자른 공비가 종업원을 돌아보았다.

“정신 번쩍 나게 맵고 칼칼한 것 있으면 한 접시 내 오게.”

“저희 가게에서 쓰는 고추가 좀 매운 편이라…… 여자분들은 드시기 힘드실 텐데요.”

“사내들이 먹는 것이면 뭐든 나도 먹을 수 있네.”

주문을 마무리 지은 공비가 욱을 돌아보았다.

“폐하.”

“왜……?”

“술이라도 한잔 들고 얘기를 했다간 혹, 술김에 주정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실까 봐 미리 한 말씀 올릴까 합니다.”

뭔가 위협적인 분위기라 욱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공비는 보면 볼수록 무호와 닮았는데, 이렇게 노려보는 눈길은 여인들 특유의 싸늘함이 더해져서 배까지 슬슬 아파올 정도였다.

“말하라, 아니…… 하시게.”

“가만 보니 소인과 승주 사이를 오해하고 계신 듯싶은데…….”

“내가 뭘 알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오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좀 성급하지 않으냐?”

“사실은 폐하께서 뭘 알고 계시든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대화는 오랜만이라 욱이 확 몰입해서 공비를 쳐다보았다. 이토록 반짝이는 눈동자에 두려움이라곤 모르는 듯 당당한 태도라니…… 관심이 없을 때엔 철딱서니 없는 천둥벌거숭이라고만 여겼는데, 이제 보니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

“뭘 알고 계시건, 혹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든, 그로 인해 승주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집구석이 절단 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절절히 깨닫게 되실 겁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어찌 받아들이셔도 상관없지만, 저는 허언을 하지 않습니다.”

공비가 의자 옆에 세웠던 검을 움켜쥐더니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 태도며 기세가 전장에서 적장과 담판을 짓는 장수의 그것처럼 거칠고도 단호해서 욱이 입을 딱 벌리고 공비를 쳐다보았다. 그때 종업원이 주문한 국수와 돼지 뱃살, 그리고 시뻘건 해물탕을 가져와서 식탁에 올렸다.

“이게 사람 먹는 것이 맞느냐?”

훅 올라오는 매운 냄새에 욱이 기침을 하며 종업원에게 인상을 썼다. 

“이래 봬도 꽤 잘나가는 요리입니다. 먹고 죽은 손님도 아직 없고요.”

사람의 명이 생각보다 질긴 것이로구나 여기며 욱이 공비의 잔에 탁주를 가득 따랐다. 그러고는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비리비리한 샌님, 쫌팽이가 그렇게 좋으냐?”

“승주는 비리비리한 샌님, 쫌팽이가 아닙니다.”

“아니기는…… 딱 봐도 잘 삐지게 생겼더구먼…….”

욱이 자기 잔에도 탁주를 찰랑거리게 부으며 투덜거렸다.

욱과 공비가 마주 앉아 탁주를 몇 잔 비우는 사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안개가 흩어졌다. 허옇기만 하던 시야가 다소 트이자 길거리에 사람 다니는 것과 수룡천의 물 흐르는 것이 어렴풋이나마 보였고, 공비는 홀린 듯 거리 풍경을 내다보았다.

“저, 저…… 저것은 낙타가 아닙니까?”

공비가 천변으로 지나가는 낙타 행렬을 보고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낙타를 처음 보느냐? 황성에선 말만큼이나 흔한 것이 낙타와 외국의 상인들이거늘…….”

“낙타를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대현성은 대상들이 지나다니는 곳이 아니질 않습니까? 정말 이 거리엔 수십 마리나 되는 낙타가 늘 이렇게 돌아다닙니까?”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아련한 눈길로 천변을 구경하다가 고작 낙타 몇 마리에 흥분해서 어린애처럼 들뜬 공비의 모습에 속이 켕긴 욱이 별생각 없이 해물탕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곤 덩달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께서는 낙타를 타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한 번도 못 타보았습니다.”

“나도 아직 낙타는…….”

욱이 헐떡거리면서 탁주를 벌컥벌컥 퍼마셨다. 이런 것을 먹으라고 주는데도 주막 주인을 포청에 발고한 자가 없었다니…… 참으로 어진 백성들이로다. 욱이 지나가는 종업원을 붙잡아서 찬물 한 사발 가져오라고 신경질을 내고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내, 낙타를 한 마리 사줄 테니까 영운궁 마당에서 키우는 것은 어떠냐? 심심하면 타고도 다니고…….”

“좁은 별궁,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사는 것은 제 한 몸으로 족합니다. 저 낙타는 저렇게 제 발로 터벅터벅 걸어서 천축국도 가고, 서역도 가고…… 온 세상을 다 보고 다닐 텐데, 어찌 잠깐의 재미를 위해 좁은 마당에 붙들어둘 수 있겠습니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그냥…… 낙타 얘기를 한 겁니다.”

공비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낙타는 좋겠습니다. 너른 초원도 지나고, 사막도 건너고, 높은 산도 넘고…….”

“허리가 휘도록 등짐을 지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데, 퍽도 좋겠다.”

틱틱거리며 욱이 볶은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저는 누가 큰 선심 쓰듯 데리고 나와주지 않으면 문밖으로도 한 걸음 나올 수 없는 신세이니, 낙타보다 낫다고 하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원망스러우냐?”

공비가 탁주 한 잔을 한입에 털어 마시고는 잠잠히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변명이 되지는 않겠지만, 나도 잠깐 재미나 보자고 후궁을 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특히나 너는 뭐…… 너 들어오고 나서는 내도록 골치만 아팠지 재미있는 일도 없었고…….”

“폐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망한다고 해도 너를 나무라겠느냐? 괜찮으니 속에 있는 말 너무 참지 마라.”

“저는 그저…… 제 신세가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창 밖을 내다보던 공비가 창턱 바깥으로 몸을 불쑥 내밀었다.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니 밖에 낙타보다 더 괜찮은 것이 있나 보다 싶어서 욱도 덩달아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욱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게 앞에 허연과 승주가 와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잘 맞춰 왔구먼. 금방 요리가 나왔으니 식기 전에 한술 뜨게.”

욱이 허연을 반기며 얼른 옆자리에 끌어 앉혔다. 허연이 당연히 제 자리라는 듯 황제 옆자리를 차지하자 승주가 몸 둘 바를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두 손에 큰 접시를 들고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떠밀려서 공비 옆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왔느냐?”

공비가 옷매무새를 고치는 척, 승주의 얼굴이 와서 닿은 어깨를 슬쩍 만졌다.

“아씨…….”

“네가 귀인과 함께 올 줄은 몰랐구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승주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끄트머리로 물러앉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공비를 연거푸 만나고,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앉아보고…… 대현성에 있을 때에도 성에 큰 잔치가 벌어지거나 사냥을 나갈 때 외엔 이렇게 길게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생각하며 승주가 팔짱을 꽉 끼고 몸을 움츠렸다.

“어디가 아프냐?”

“아닙니다. 그냥 좀 한기가 들어서…….”

들릴 듯 말듯 대답하면서 승주가 힐끔 욱의 눈치를 살폈다. 허연에게 이끌려 거북다리 앞까지 오는 동안 승주의 머릿속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복잡했고 마음은 천근 바위에 눌린 듯 무겁고 암담했다. 공비가 기다릴 것이란 꼬임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볼 수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보자 싶어서 홀린 듯 따라나서긴 했지만, 승주의 솔직한 심정이란 이대로 안개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면 그러고 싶고 아예 안개가 되어 새벽빛에 흔적 없이 스러져도 이번 생이 아깝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다.

황제가 공비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이고, 대체 앞으로 뭘 어찌하겠단 의미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후비로 맞아 별궁에 들인 여인이 이미 마음에 둔 사내가 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황제가 있을까? 재물도 없고 위세도 없는 벽촌의 범부라도 그러기는 어려운 일인데, 세상을 손안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이 사내가 무엇이 두렵고 아쉬워서 다른 데 정신이 팔린 후비를 곁에 두고 보겠는가?

“한기가 들면 거기 그 해물탕이라도 한술 뜨게. 속이 확 풀릴 것이니…….”

욱의 심술궂은 권유에 공비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승주는 매운 것은 입에도 못 댑니다.”

“아니, 내가 먹고 펄펄 뛸 때엔 본 척도 않더니…….”

이젠 보란 듯 승주를 싸고도는 공비의 태도가 기막혀서 욱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과거지사는 어차피 들통이 났고, 욱이 그런 일로 자신이나 승주를 해코지할 정도로 음흉한 성격도 아니고 그럴 의도도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공비의 태도는 씩씩하기만 했다.

“제가 드시라고 권했습니까? 폐하께서 말릴 틈도 없이 훌쩍 떠서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욱에게 면박을 주고는 공비가 주문 받으러 돌아다니는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여기 생선 요리도 있는가?”

“그럼요. 태평호에서 올라오는 잉어나 붕어로 매운탕도 끓이고, 찜도 합니다.”

종업원의 설명에 공비가 두 눈을 끔뻑이며 욱의 눈치만 보고 앉아 있는 승주를 돌아보았다.

“몸에 한기가 있으면 아무래도 탕이 낫지 않겠느냐?”

“아, 아씨…….”

지아비가 탁자 건너편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그 앞에서 한가하게 차림표 뒤지며 저녁거리 고르고 있는 공비는 더 무서워서 승주가 말을 더듬었다. 승주가 얼른 대답을 못하자 공비가 알아서 결정을 내리고 종업원에게 주문을 넣었다.

“잉어탕 한 그릇 맵지 않게 끓여서 내오게. 그리고 탁주도 한 되 더 가져오고…….”

“예, 마님.”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저만치 멀어지자 잠시 거친 숨을 씩씩 내쉬던 욱이 허연을 돌아보았다.

“묻지도 않고 대뜸 잉어탕 대령하라 이르는 것을 보니 한 선생이 생선 요리를 좋아하는 모양일세.”

욱의 가시 돋친 한마디에 승주가 움찔하며 눈길을 아래로 떨궜다. 자신이 어려서부터 입이 짧아서 즐기는 음식이 별로 없는 중에 주제넘게 대현성 같은 산골에선 구하기도 힘든 생선을 유독 좋아했고, 공비가 그것을 알고부터는 하녀나 유모 편에 여러 번 좋은 생선을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봅니다.”

허연이 욱의 술잔을 가져다 목을 축이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뭐 먹고 싶은 거 없는가? 요즘 보니 닭조림을 꽤 맛있게 먹던데…….”

“저는 여기 있는 국수와 돼지고기면 됐습니다.”

“사준다는데도 빼기는…….”

오랜만에 내관들까지 다 따돌리고 홀가분하게 궁을 나와서 마음껏 기분을 내고 싶어하는 욱을 허연이 마냥 귀여운 아기 내관 보듯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우선 나온 것부터 먹고 모자라면 주문을 더 하시지요.”

그렇게 대답하며 허연이 무심코 해물탕에 떠 있는 두부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욱이 미처 알아챌 틈도 없이 두부 한 조각을 삼킨 허연이 한발 늦게 올라온 엄청난 화기에 놀라서 입을 틀어막고 끙끙거렸다. 허연은 본래 매운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고, 황궁의 수라상에는 지나치게 맵거나 짠 음식은 아예 오르지 않기 때문에 이 해물탕은 그가 처음 경험하는 강도의 매운 맛이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내가 시킨 거 아닐세. 공비가…….”

두부 한 조각을 먹고 쩔쩔매는 허연의 모습에 욱이 대뜸 공비에게 눈을 부라렸다.

“해물탕 한 그릇으로 사람 여럿 잡는구나. 네 앞으로 싹 끌어가든가, 아예 치우든가 해라.”

“송구하옵니다.”

공비가 고분고분 사과하며 해물탕을 앞으로 당겨 갔다. 그러고는 그렇게 매운가? 하면서 해물탕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불붙은 숯을 삼킨 것처럼 입안이며 목이 뜨겁고 아픈데, 찬물 한 잔으로 그 매운 기를 가시게 하기엔 어림도 없어서 허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허연에게 계속 물 따라주고 등 쓸어주고 괜찮으냐고 묻고 또 묻는 욱을 승주가 멍하니 쳐다보았다.

황제가 우화원 귀인을 지극히 아껴서 칠궁의 궁문에 거미줄이 칠 지경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서 이렇게까지 물고 빨고 하는구나. 대현성은 풍조가 유난히 엄격하고 건조해서 부부지간에도 밖에 나오면 남처럼 데면데면 다니고, 남색은 아예 구경도 못해보았는데…… 도성의 기풍이 파격적으로 자유분방한 것인가? 아니면 황제가 유독 별난 것인가?

“마마, 괜찮으십니까?”

찬물 한 주전자를 다 마시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허연이 해물탕 사발에 얼굴을 박고 탕국을 아예 벌컥벌컥 마시는 공비를 보고는 놀라서 눈을 끔뻑였다.

“아니, 뭐가 그렇게 맵다고 유난이십니까? 그냥 먹을 만하구먼…….”

공비의 무뚝뚝한 대꾸에 욱이 콧바람을 거칠게 내뿜었다.

“저, 저…… 아버지뻘 되는 어른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아버지뻘이라는 말에 허연이 이번엔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으로 욱을 쳐다보았다. 순간 실언한 것을 깨달은 욱이 당황해서 험, 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공비의 나이가 스물이고 귀인이 내일모레 마흔이니 아버지뻘이란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지만…… 내가 정신이 나갔나? 어쩌자고 그런 말을 내뱉었던고?

잠시 허둥거리던 욱이 다시 만만한 공비를 노려보았다.

“성질머리만 별스럽고 거친 줄 알았더니 입맛까지 유별나구나. 알면 알수록 얌전하고 참한 구석이라곤 없으니…….”

투덜거리던 욱이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살짝 걸친 채 얼어 있는 승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너는 대체 이 뿔난 망아지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고 좋았더냐?”

“뿔난 망아지라니요? 저희 아씨는…….”

욱에게 말려서 순간 발끈했던 승주가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털었다.

“아씨는 다정하고 총명한 분이십니다. 또한 사리분별 명확하고, 옳지 않은 일을 보면 상대가 누구든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는 용기까지 갖추셨으니…….”

“무엇 하나 여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아니구나.”

“선한 본성과 기품 있고 곧은 성격이 사내에게 덕이라면, 여인에게도 덕입니다.”

“눈에 콩깍지가 열 겹은 덮였구먼.”

욱의 핀잔에 승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황제가 말을 시키니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고, 몇 마디 하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공비의 처지만 더 악화되는 것 같고……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인데 마땅히 빠져나갈 구멍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종업원이 잉어탕과 탁주 한 병을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렸다.

“너무 어려워 말고…… 술 한 잔 받게.”

승주가 굳은 표정으로 잉어탕만 노려보며 입을 딱 다물어버리자 허연이 잔에 탁주를 가득 부어 승주에게 건넸다.

“저자거리 주막에 마주 앉아서 허물없이 몇 마디 주고받은 것을 가지고 설마 우리가 나중에라도 무슨 문제를 삼을까 봐 그러는가?”

“그야, 순전히…….”

승주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입술을 꾹 깨물자 이번엔 욱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마는가? 사람 조바심 나게…….”

욱이 계속 짓궂게 말꼬리를 잡으며 시비를 걸자 승주도 슬그머니 빈정이 상해서 허연이 건넨 술잔을 조용히 들었다.

“순전히 폐하의 마음에 달린 일이 아닙니까? 문제를 삼고 싶으면 삼으실 것이고, 귀찮으면 그냥 넘어가시겠지요.”

속에서 올라오는 불을 식히기라도 하듯 탁주 한 사발을 꿀꺽꿀꺽 들이켠 승주가 잔을 내려놓으며 욱의 물음에 날카롭게 대답했다.

“어쭈…….”

살짝 긁었더니 이제 제 성질이 나오는구나 싶어서 욱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폐하.”

“탁주 한 사발에 말문이 터진 모양이구나. 할 말이 있으면 하라.”

“저희 아씨를 아껴주십시오.”

생각지 못했던 승주의 청에 욱이 입을 삐죽이며 앞에 놓인 국수를 뒤적였다. 그간 빈말로도 공비를 후궁으로 존중하고 여인으로 아꼈다고 할 수 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정인으로부터 그 같은 말을 듣고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찜찜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저희 아씨가 명문가의 다른 규수들처럼 곱고 다소곳한 면은 다소 부족하시지만…….”

“다소 부족이라…….”

“그 때문에 지금 당장은 지존의 짝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여겨지실지 몰라도, 오래도록 같이 지내시다 보면 결국 가까이 둘 사람은 속이 깊고 우직하여 한번 먹은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헌데 공비는 그 우직한 마음을 고향 어느 곳에 두고 왔더구나.”

욱의 직설에 허연이 당황해서 그 옆구리를 팔꿈치로 쥐어박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허공에 흩어진 후라 승주의 표정도 굳었고, 해물탕을 휘젓던 공비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올 게 왔구나 생각하면서도 승주가 침착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어린 시절 마음껏 뛰어놀던 그리운 고향을 쉽게 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허나 마음이란 늘 그 몸과 함께인 것…… 이곳에도 소중한 사람, 좋은 기억이 생기면 고향에서의 일은 이따금 떠오르는 좋은 추억으로만 남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폐하께서는 천하의 주인으로 그에 걸맞은 품위와 호방한 성품을 갖추셨을 뿐 아니라 보기 드문 미장부이시니, 폐하와 같으신 낭군을 맞는 것은 어떤 여인에게나 크나큰 복입니다. 폐하께서 아씨의 총명함과 강직한 성품을 이해하고 아껴주시면, 아씨께서 어찌 어렸을 적 잠시 알고 지냈던 하찮은 종복 따위를 기억하시겠습니까?”

공비가 울컥해서 승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승주는 공비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종복의 팔자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달린 것처럼, 여인도 어떤 지아비를 만나느냐에 그 일생이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애정과 신의를 보이시면 아씨도 결코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공비의 성품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 좁은 별궁에 갇혀서 손바닥만 한 하늘만 쳐다보며 사는 것을 공비가 견디겠느냐?”

욱의 물음에 승주의 표정이 다소 복잡해졌다. 하지만 곧 난감한 기색을 감추고 고개를 들었다.

“아씨께서 천복을 받아 궁에 드셨으나, 혹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인근의 어느 지체 높은 가문으로 시집을 가셨을 터…… 대현성에서 오라버니들과 함께 말 달리고 사냥 다닐 때처럼 거침없고 자유롭게 살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좁은 내당에서 지내는 것은 여인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없는 일이니 아씨도 받아들일 일은 받아들이셔야지요.”

자신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비에게 다짐을 받으려는 듯 말투가 비장해서 욱이 한 젓가락 집어 입으로 가져가던 국수를 도로 접시에 내려놓고 말았다.

오가던 말이 잠시 끊겨서 탁자에 둘러앉은 네 사람 간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승주는 아까부터 감정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덤덤하게 말을 잇고 있었지만, 사정을 알 만큼은 아는 욱과 허연에게는 그 조용한 한 마디 한 마디가 통곡보다 오히려 더 서글프게 들렸다. 이제 뭐,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고 두 사람이 서로 눈길만 주고받을 때 그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공비였다.

“너는 앞으로 어찌하려느냐?”

“저야, 뭐…….”

공비가 무슨 말을 꺼낼까 싶어 승주가 바짝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가만 보니 황제나 허연은 지체가 높아도 교만하거나 편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처럼 천한 백성을 앞에 앉혀놓고는 술 따라주고 사정 얘기도 들어줄 만큼 너그러운데, 그 반면에 공비는 화약고나 다름없어서 언제 뭘 터뜨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하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

“이제 곧 대현성으로 돌아가면…… 그곳에서 더 좋은 사람, 좋은 일이 생기면 나를 잊겠구나.”

공비의 원망, 혹은 푸념에 승주가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자리에 다시 앉았다.

“말씀을 가려서 하십시오, 아씨. 비록 여기가 저자거리 주막이라고는 하지만, 어전이 아닙니까? 폐하께서는 아씨의 지아비가 되십니다.”

승주가 벌컥 언성을 높여 공비를 나무랐다. 공비가 이렇게 나오면 아까부터 자신과 공비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황제를 설득한 것이 모두 허사고, 공비가 총명하고 속이 깊다고 한 것도 말짱 허언이 될 뿐 아니라…… 아니, 그보다 남편 앞에서 이러는 법이 있는가? 이는 사가에서도 얼마든지 소박의 사유가 될 언행인데, 대체 어쩌자고…….

승주가 낯빛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서 욱을 힐끔 쳐다보았다. 다행히 욱은 매운탕 퍼먹고 실성을 했구나 하는 눈길로 공비를 쳐다볼 뿐, 딱히 놀라거나 노여운 빛은 없었다.

“폐하, 아씨께서 방금 하신 말씀은…….”

“본시 공비는 과인을 지아비로 여긴 적이 없느니라.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니 마음 쓰지 마라.”

욱의 대답에 승주가 대경실색을 해서 앉은자리에서 비틀거렸다. 하지만 욱은 공비가 사람만 안 때리면 뭘 해도 신경이 쓰이지 않은 지 이미 오래라 어깨를 으쓱이며 반쯤 남은 잔을 비웠다.

“나도 궁금하구나. 넌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욱이 빈 잔을 내려놓으며 승주에게 물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너도 혼인할 나이가 지나지 않았느냐? 처지가 불민하다고 하지만 얼굴도 곱상하고 재주도 뛰어나고, 대현성의 대장군이자 후계자인 무호의 최측근이니 혼담이 아주 없지는 않을 터…… 아니면, 이미 혼인을 했느냐?”

혼인 여부를 묻는 욱의 물음에 공비가 긴장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대현성을 떠나 온 지 3년이고 승주와 집안의 여종들 간의 혼담은 진즉부터 있어왔으니, 그사이에 승주가 혼인을 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소인은 아직…….”

승주가 공비의 안색을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네 나이가 몇이냐?”

“해가 지나면 스물넷이 됩니다.”

승주의 대답에 욱이 대뜸 인상을 썼다. 

“그렇게 뼛골 빠지게 부려먹으면서 여태 장가도 보내주질 않았단 말이냐? 처남을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참으로 야박한 사람이로구나.”

욱이 언성을 높여 무호를 책망하자 승주가 당황해서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장군께서는 몇 번이나 혼인을 권하셨는데, 제가 거절을 한 것입니다.”

“어째서? 평생 장가를 아니 들 생각이냐?”

욱의 물음에 승주가 뭐라 대답을 못하고 다시 술잔을 들었다.

“너희 아씨 때문이냐?”

“…….”

“공비는 이미 첩지를 받고 후궁에 들었으니 너와의 인연은 영영 끊어진 것이 아니냐? 공비와의 의리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너무 어리석지 않으냐?”

“폐하, 소인은…….”

승주가 탁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깊고 서글픈 눈동자로 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현성 군영에 매인 관노입니다. 성 안에서 가장 험한 일은 도맡아 해야 하고, 가축처럼 팔리고, 자식을 낳아도 그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소인은 나이가 들어 제 처지를 깨닫고부터는 어느 하루 마음이 괴롭지 않은 날이 없었고, 부모를 원망하지 않은 날 또한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또 다른 노비와 혼인을 하여 슬하에 자식을 두고 살겠습니까? 제게는 그것이 가장 두렵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입니다.”

“만약에 공비와 혼인할 길이 생겨도…….”

“만약에 제가 그저 농사로 먹고사는 촌부의 아들만 되었어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만약에 아씨께서 후비의 첩지를 받는 일 없이 그냥 대현성에 머물러 계셨다면 또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시간이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인데…… ‘만약’이란 허망한 말장난일 뿐입니다.”

승주가 더는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상대가 좀 세게 나온다고 해서 주눅 드는 성격도 아니라서 욱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상장군이 너를 면천시켜줄 수도 있지 않느냐? 네가 재주가 뛰어나고 그간 공이 많았으니…….”

“상장군께서는…… 제가 노비 신분에서 놓여나면 대현성을 떠날까 두려워하십니다.”

승주의 대답에 욱과 허연이 동시에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공비는 아예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옆에 두었던 검집을 손톱으로 깔짝깔짝 긁었다.

“만일 면천이 된다면 저 역시 더는 대현성에 머물 생각이 없으니…… 상장군의 생각이 아주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고작 그런 이유로 너 같은 인재를 노비의 신분에 계속 묶어두다니, 상장군의 처신이 당당하지 못하구나. 그토록 놓치기가 아까우면 대접을 후하게 하고, 넘어올 때까지 설득을 하여 곁에 두면 될 것을…… 나라의 상장군씩이나 되어서 처신이 어찌 그리 쫌스러운고? 산만 한 덩치가 아깝고 대현성 호랑이라는 별호가 아깝구나.”

오라비고 뭐고 당장 달려가서 담판을 지을 듯 어둡고 험한 공비의 눈길에 욱이 잔기침을 몇 번 하고는 얼른 선수를 쳐서 무호를 깠다. 하지만 승주가 오히려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장군은 그렇게 용렬한 분이 아닙니다, 폐하. 상장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다른 성읍으로 떠나 잘 먹고 잘 살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아주 버리고 어디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풀뿌리나 뜯어 먹으며 인생과 재주를 허망하게 버리지는 않을까, 홀로 외롭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뜨지는 않을까…… 뭐 그런 것입니다.”

어지간해서는 깊은 속을 드러내지 않는 승주가 생판 초면인데다 두렵기 이를 데 없는 상대 앞에서 오래전부터 품어온 속마음을 툭 털었다. 어차피 두 번 볼 사람들도 아니고,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아니니 이는 고백이라기보다는 잡담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곁에 앉은 공비는 심장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당혹스러운 눈길로 승주를 쳐다보았다.

“승주야, 설마…… 정말 그럴 생각이냐?”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씨. 장군께서는 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하시니 면천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걱정을 말라니,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승주의 자조적인 대답에 공비가 버럭 소리를 쳤다. 그 목소리가 전군을 호령하는 대장군의 그것만큼이나 쩌렁쩌렁하고 위압적이라 주막 안의 손님들이 모두 놀라서 먹던 것을 멈추고 공비를 쳐다보았다.

“나이 젊겠다, 재주 있겠다…… 노비 신분을 면하면 온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면 되지, 네가 뭐가 부족하고 무슨 죄를 지었기에 산속에 틀어박혀서 풀뿌리를 캐 먹고 산단 말이냐?”

“아씨, 고정하십시오. 사람들이…… 봅니다.”

공비의 고성에 승주가 놀라서 진정을 시키려고 했지만 공비에게는 때와 장소를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헤어진 이후 하루도 잊어본 적 없었던 정인이 종살이를 면해도 산에 들어가 혼자 살다가 죽겠다는데 낯선 자들의 이목 따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승주가 불쌍해서, 그리고 원망스러워서 공비의 눈에 한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

“네가 노비의 신분을 면하고 비록 화전민의 딸이라도 참한 여인을 만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소식을 들어도 내 속이 불에 덴 듯 쓰리고 아플 텐데…… 뭐라? 산에 들어가서 풀뿌리를 뜯어 먹어? 네 정녕 내가 화병으로 죽는 꼴을 보고 싶으냐?”

“아씨…….”

“긴말 필요 없다. 내 이 길로 오라버니를 만나 네 면천 문제를 확실히 마무리 짓고 말단 관직도 한 자리 얻어줄 것이니,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고개 들고 당당히 녹봉을 받으며 살아라.”

“…….”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혼인도 하고…….”

“…….”

“정말로 산속 같은 데에 기어 들어가서 숨어버리면 내 황궁의 담장을 뛰어 넘어서라도 기필코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나 죽는 꼴을 보고 싶으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든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작작 하십시오.”

승주가 낮은 목소리로 공비를 꾸짖었다. 그러곤 조심스러운 눈길로 욱을 돌아보았다.

“아씨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약주가 과하셨나 봅니다.”

공비가 탁주 두 잔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변명이었지만 지금 욱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공비가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온 말은 어떤 것이든 이후에 다시 들먹이며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공비는 걱정할 것 없고…….”

“참으로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도 공비가 복이 없지는 않아서 어진 지아비를 만났구나, 비록 그 연심은 옆에 앉은 사내에게 온통 쏠려 있지만 이만해도 큰 다행이라 생각하며 승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욱이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승주에게 물었다.

“너는 어떠냐? 천한 신분을 면하면 낮은 벼슬이라도 하며 처자식 거느리고 살 마음이 정녕 없느냐?”

“…….”

승주가 뭐라 대답을 못하고 묵묵부답 술잔만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욱이 혀를 끌끌 찼다.

“거참 이해를 못하겠구먼. 일단 면천만 하면 인생을 새로 사는 것이지, 공비 말대로 나이 젊겠다, 재능 있겠다……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느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쓸 만하고 괜찮은 놈인 줄 알았는데, 얘가 이제 보니 문제가 많구나 싶어서 욱이 당황스러운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허연은 잠잠히 술잔만 들었다 놓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가끔, 모든 것이 다 허망하고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면 몇 날 며칠 몸은 천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겁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 하루를 또 버틸 생각에 눈앞이 캄캄할 정도입니다. 그런 날이면 상장군께서 유독 사납게 다그치고 몰아세우니 간신히 정신을 차려서 할 일을 하는 것일 뿐, 세상일에 흥미를 잃은 지는 꽤 되었습니다.”

승주의 아픈 속사정에 공비가 결국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탁주에 취해 헛소리하는 것은 공비가 아니라 나였구나. 어쩌자고 이 사람들 앞에서 주절주절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나 싶어서 승주가 뒤늦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보고는 어딜 가도 못 살겠느냐며 마음 다잡고 잘 살라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아씨, 고정하십시오. 아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는 오래된 고질병 같은 것입니다.”

어깨라도 한 번 다독여주고 싶어 손을 들었다가 머쓱하게 다시 내려놓으며 승주가 낮은 목소리로 공비를 달랬다.

승주가 이리저리 달래고, 욱이 자꾸 이러면 화산에 안 데려간다고 을러도 공비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헤어진 그날 이후 하루도 잊어본 적 없었던 연인을 꿈인 듯 만났지만, 이렇게 곁에 앉아 고향에 있을 때에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아픈 속내를 듣고 보니 그 안타까움은 차라리 보지 못할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승주를 위해서라면 해주지 못할 것이 없고 목숨도 아깝지 않을 것 같지만 그저 마음뿐, 실제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서 공비가 긴 한숨을 섞어 지치도록 울었다.

“자네 이제 보니 울화병이 있네그려.”

공비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허연이 승주에게 술 한 잔을 더 따라주며 입을 열었다.

“다소…… 그런 듯합니다.”

승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수긍을 했다. 그때 욱이 헹 하고 세찬 콧바람을 날렸다.

“요즘 울화병이 없는 사람도 있는가?”

“폐하…….”

허연이 탁자 아래로 욱의 허벅지를 꽉 잡으며 가만 좀 계시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면천이 되어도 입산을 하겠다는 둥, 세상일에 흥미가 없다는 둥 여리고 기가 꺾인 승주의 모습이 영 마음에 안 차서 욱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 사람과 같은 총명함과 재주를 갖고도 남의 집 종살이나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겠으며, 이런 자리에서 심정을 토로하겠습니까? 너그럽게 살피십시오.”

“사는 게 다 고생이지, 저만 힘들고 저만 서러운가?”

뭔가 막말이 터져 나올 기세라 허연이 이번엔 욱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그 바람에 욱이 막말 대신 낮은 비명을 토해내고 말았다. 욱이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벅벅 긁는 사이 허연이 다시 승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폐하께서 천민으로 사는 서러움을 어찌 아시겠나? 방금 그 말씀은 마음에 두지 말게.”

그 위로에 욱이 발끈해서 언성을 높였다.

“뭐, 옥좌에 앉으면 세상의 괴로운 일이 다 비켜가는 줄 아는가? 나도 열 살 어린 나이에 황궁에 붙들려 가서 한창 예민한 시절을 고스란히 태후마마의 볼모로 살았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위태로웠고, 결국은 아무 죄 없는 처자도 덧없이 잃고…… 그때 내 나이가 갓 열여덟이었는데 그런 참상을 당하고도 괴로움이 없었겠는가? 귀찮게 산에는 뭐 하러 들어가나? 그냥 그 자리에서 세상을 버리고만 싶었네.”

욱이 투덜투덜 지난 이야기를 끄집어내자 이번엔 허연의 심정이 울컥 서글퍼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그런 일을 겪으셨지요.”

“또한 나이 스물에 수백 명의 자객들에게 쫓겨 숲을 헤매 다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왔고, 이후엔 좀 심신이 좀 편할까 했더니 그대가 울화병을 얻는 바람에 생으로 이별을 하고는 4년간 서쪽 하늘만 쳐다보고 살았네. 내가 천민의 설움은 몰라도 그간 겪은 몸 고생, 마음고생은 나라 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네.”

허연이 울먹해져서 뭐라 말을 못하자 욱이 의기양양하게 승주를 쳐다보았다.

“또한 여기 있는 귀인은 전란을 당해 제 나라를 지키고자 5년이나 죽을 고생을 하고도 왕세자의 흉계로 적진에 버려지고, 결국 조국이 점령당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그런 일을 겪고 패전지장이 되어 죽을 자리를 찾아 황성까지 끌려서 왔으니…… 그 괴로움이 너의 것만 못하겠느냐? 네 신세만 처량하고 온 세상 고생이 너한테만 덮쳤느냐? 약해 빠져가지고, 면천을 시켜준다는데도 어디서 초근목피 타령을 하며 죽는소리를…… 악!”

허연에게 옆구리를 잡아 뜯긴 욱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다시 한 번 주막의 모든 이목이 욱에게 쏠리고 말았다.

“자네, 좀 지나치지 않는가? 자꾸 이런 식으로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은 죄가 되네.”

욱이 최대한 허연과 거리를 두려고 창가에 바싹 붙어 앉았다.

“많이 아프십니까?”

허연이 이번엔 욱의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말이라고 하는가? 옆구리 뜯겨 나가는 줄 알았네.”

“그러게 왜 말을 그렇게 안 들으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고달픈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시는 게 아닙니다.”

“턱도 없는 소리를 하며 칭얼거리는 게 듣기 싫어서 그랬네. 하다못해 공비도 열일곱에 집을 떠나 후궁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악으로 버티고 있거늘…….”

욱이 또다시 승주를 사납게 흘겨보며 으르렁거렸다.

욱에게 된통 야단을 맞고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승주가 고개를 들었다. 소리를 내어 흐느끼거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한참 운 사람처럼 그 눈자위가 붉은 것을 본 허연이 조그맣게 혀를 찼다.

“폐하께서는 자네에게 역정을 내신 게 아니라 걱정이 되어 그러시네. 허니 초면에 막말을 들었다고 너무 서러워하지 말게.”

“아닙니다. 소인은 그저 황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승주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면서 손바닥으로 눈시울을 꾹 눌렀다.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은 닥치고 또 닥치는 것…… 하지만 어떻게든 견디고 이겨내야 하지 않겠나?”

“두 분은 천하의 영웅호걸이십니다. 소인처럼 어리석고 미천한 자가 어찌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승주가 빈말이라도 가르침을 얻었다거나 생각을 고쳐보겠다거나 하지 못하고 풀 죽은 음성으로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또 한소리 하려고 들썩이는 욱을 허연이 잡아 말렸다. 그러곤 부드러운 눈길로 승주를 쳐다보았다.

“주막에 마주 앉아 술 한 잔 나누면서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구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인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윤 내관이 주막 2층으로 올라온 것은 공비가 주문한 탁주를 혼자 다 퍼마시다시피 하고도 술이 모자라서 종업원을 불러 탁주 두 되를 더 주문하다가 욱에게서 아예 독째 가져다놓고 마시지 그러느냐고 타박을 듣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계신 것을 모르고 저희는 대흥루 주변만 뒤지고 다녔습니다.”

윤 내관이 자리로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슬그머니 투덜거렸다.

“잠깐 나와 놀다가 알아서 들어갈 텐데 뭐하러 그렇게 찾아다녔느냐?”

“허면 주인께서 안개 속에서 종적이 묘연하신데 소인들이 화롯가에 붙어 앉아서 떡이나 구워 먹을 줄 아셨습니까?”

“차라리 좀 그러지. 귀찮아 죽겠구나.”

욱이 툴툴거리며 접시에 남아 있던 국수를 긁어서 한입에 털어 넣었다.

욱이 얼른 일어날 생각을 않고 앞에 남은 음식을 싹싹 긁어 먹는 동안 윤 내관이 같이 온 이 내관을 돌아보았다.

“너는 나가서 위사령에게 폐하를 찾았다고 전해라. 금방 뫼시고 나갈 것이니 요 앞에서 기다리라고…….”

“예.”

이 내관을 내보낸 다음, 윤 내관이 탁자에 둘러앉은 네 사람을 찬찬히 살폈다. 황제와 귀인이 시간차를 두고서 안개 속으로 사라졌을 때엔 노상 붙어살면서 뭘 또 궐 밖 나들이까지 같이 다니나, 참 유난도 떤다 싶었는데 공비와 승주라…… 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회동이 아닌가? 게다가 두 사람이 한참 울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푸석하고 눈이 붉으니, 대체 이 네 사람 간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갔을꼬?

“이만 일어나시지요. 생신잔치에 사람들 불러놓고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윤 내관이 정신을 차리고 욱을 재촉했다.

욱과 허연이 주막을 나왔을 때엔 벌써 주막 주변을 위병들이 두 겹 세 겹 에워싸고 있었다. 때문에 별생각 없이 주막을 나서다가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고, 무슨 일이 났나 싶어서 주변을 얼쩡거리는 자들도 여럿이었다. 아무리 큰 행사가 있어서 인파가 몰리고 안개가 짙어도 이건 좀 과하다는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는 허연 앞으로 진관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들이는 즐거우셨습니까, 형님?”

진관우의 시무룩한 물음에 허연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 탁주 한잔 마시며 얘기 좀 했네.”

“아니…….”

허구한 날 찰떡처럼 붙어 다니면서 무슨 얘기를 여기까지 나와서 또 하느냐고 버럭 쏘아주고 싶은 것을 진관우가 어렵사리 눌러 참았다. 자신도 이따금 은혜 공주를 데리고 저자에 나와 거리 구경도 하고 차도 마시며 시간을 보낼 때가 있으니까 두 사람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은 이해하자면 못할 일도 아닌데…… 왜 하필 이런 난리 북새통이며, 오리무중 안개 속이란 말인가?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조용히 주변을 호위하며 기다렸을 텐데, 어찌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아무리 사사롭게는 처남매부간이라도 허연에게 대놓고 불평을 하는 것이 언짢아서 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욱을 상대로 떠들어봐야 입 아프고 기운만 빠질 뿐이라 진관우가 허연에게 기어이 볼멘소리를 한마디 더 보탰다.

“부부는 닮는다지만, 폐하께서 형님을 닮아도 모자랄 판에 어찌 형님이 폐하를 닮아가십니까?”

진관우의 짜증에 허연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반대로 언짢았던 욱의 표정은 환하게 풀어지고 말았다. 부부라서 닮는다니…… 이는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비난인데 어쩐지 자극적이고 마음에 훅 꽂혔던 것이다.

“위사령은 귀인을 너무 원망치 말게. 오늘 일은 모두 내가 귀인을 설득하여 이리 하자고 한 것이니…….”

욱이 키득거리며 진관우에게 사과를 했다. 그 고분고분한 태도와 음흉한 미소에 진관우가 내가 뭐 실언한 것이 있나 싶어서 자신의 언행을 얼른 되짚었다. 그때 무호가 진관우 곁으로 다가서며 욱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남도 와 있었는가?”

“예, 위사령께서 폐하를 찾는다기에 저도 부장들과 함께 거들어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병사가 많아 보였구먼.”

무호가 긴 한숨을 내쉬며 욱의 뒤에 서 있는 공비와 승주를 넘겨다보았다. 황제가 공비만 데리고 안개 속으로 몸을 감췄다면 걱정은커녕 후비들 중에서도 사랑받고 사는구나, 누이가 미색은 아니어도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총명해서 황제와도 잘 지낸다 싶어 내심 뿌듯했을 텐데, 바로 뒤이어 허연이 승주를 데리고 사라지는 바람에 대흥루와 그 주변 주막을 뒤지는 무호의 심정은 울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결국 걱정했던 대로 네 사람이 한 주막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보니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아찔함에 무릎이 꺾일 지경이었다.

“처남도 궁으로 같이 가세. 우리도 술 한 잔 해야지.”

“저, 저는…….”

어깨가 닿을 듯 붙어 서 있는 공비와 승주를 망연자실한 눈길로 보던 무호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무호가 겁에 질린 것을 눈치 챈 허연이 욱의 곁으로 다가섰다.

“장군도 피곤할 것입니다, 폐하. 오늘은 그만 숙소로 돌아가 쉬도록 하고 내일 진연에서 보시지요.”

허연의 설득에 욱이 다시 무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그 잠깐 사이에 다시 넋을 놓아버린 무호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그리 하든가…….”

“예? 예…… 폐하.”

“부장들도 모두 데리고 들게. 그대는 나의 처남이자 국경을 수비하는 상장군이니 어찌 대접을 소홀히 하겠는가?”

그렇게 이르고는 욱이 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허연이 황룡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회에 참석했다가 청량전으로 돌아온 것은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저녁 내내 욱에게 끌려 다닌 허연은 침전에 들어서자마자 입고 있던 예복을 벗어 던지고 침상으로 기어 올라갔다. 하지만 고 내관이 허연의 발목을 잡아서 다시 침상 밖으로 끌어냈다.

“씻고 침의로 갈아 입으셔야지요. 목욕물 따끈하게 데워놓았으니 일어나십시오.”

“나 피곤하네.”

“바깥바람 오래 쐬셔서 한기가 들어 그러신 겁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시면 피곤이 풀리실 겁니다.”

“거, 참…….”

힘들어도 고 내관을 당할 재간이 없는 허연이 짜증을 내며 일어나 앉았다.

“폐하께서도 금방 쫓아 들어오실 텐데. 단장은 못하셔도 목욕은 하셔야지요.”

“폐하께서는 얼굴에 물칠도 않고 침상에 드실 텐데 왜 나만…….”

“마마께서 폐하와 같으십니까? 닮더라도 좋은 것을 닮으셔야지, 어찌 그렇게 게으르고 더러운 것을 닮으려고 하십니까?”

야무지게 야단을 치며 고 내관이 허연의 등을 한 대 갈겼다.

고 내관의 성화를 못 이기고 욕실로 끌려 들어온 허연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환궁해서 바로 황룡전 연회장에 든 허연은 갑작스럽게 몰려온 피로감 때문에 저도 모르게 깜빡 졸다가 민망해서 바람 쐬러 잠시 나가는 척 빠져나와 바로 청량전으로 돌아온 길이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네.”

고 내관 말대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피곤과 한기가 한 방에 풀리는 느낌이라 허연이 욕조에 몸을 편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별로 한 것이 없으시긴요? 아침나절부터 한바탕 난리에 오후부터는 연회 참석 준비로 바쁘셨고, 뜬금없이 궁 밖 나들이까지 하고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그 정도가 무슨 일이라고…….”

예전엔 사나흘 내내 말을 달리거나 2~3일 잠을 못 자도 반나절만 쉬고 일어나면 거뜬했는데, 요즘은 대체 무슨 고된 일을 했다고 이렇게 피곤이 떨어지질 않는고? 정말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생각하며 허연이 물을 움켜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자네가 피곤하겠네. 나를 찾느라 거북다리 인근을 다 뒤지고 다녔다면서?”

“마마가 홀로 나가신 것도 아니고 폐하와 함께 사라지신 것인데 소인이야 무슨 걱정이 있었겠습니까? 위사령이 하도 걱정을 하며 조급증을 내기에 저는 근처에서 찾는 시늉만 했습니다.”

“그랬는가?”

허연이 피식 웃으며 고 내관에게 물을 튕겨 보냈다.

황궁에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자신이야 주는 옷 걸치고 연회장 상석에 앉아 진수성찬 먹으며 노는 게 일이지만, 고 내관은 자신과 다른 후궁들의 예복과 새로운 장신구를 준비하고 우화원 안팎도 쓸고 닦느라 꼬박 한 달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게다가 이번엔 화산 원행 일정까지 챙기고 나들이옷 준비하느라 눈 밑이 거무죽죽할 정도로 지쳐 있으니 이번에 원행을 다녀오면 고 내관에게 휴가를 좀 길게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허연이 다시 눈을 감고 욕조에 등을 기댔다.

“헌데…….”

고 내관이 욕실 안에서 알짱거리는 내관 아이들을 침실로 내보내고는 욕조로 다가와서 은근히 운을 뗐다.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꿍꿍이시랍니까?”

“…….”

“공비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나게 해주시다니, 두 사람의 사정이 딱하니 그저 선심을 한 번 쓰신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고 내관이 허연의 목덜미와 어깨를 젖은 수건으로 살살 문지르며 더욱 은근하게 욱의 의중을 캐물었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공비를 챙기는 것이나 승주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무래도 그냥 호기심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대체 뭘 어쩔 생각인지 숨이 넘어가게 궁금했던 것이다.

“뭔가 계획이 있으신 듯싶네.”

“어떤…… 계획이요?”

“그걸 모르겠네.”

“슬쩍 물어나 보시지 그러셨습니까? 마마께서는 궁금치 않으십니까?”

허연이 졸음에 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다 풀렸는데 거기에 고 내관이 어깨와 팔을 주무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살거리기까지 하니 본격적으로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궁금하다기보다…… 참으로 안되었더구먼.”

“공비마마와 그 사람 말씀이십니까?”

“그리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을 보니…… 예전에 내가 저랬었나 싶고, 폐하께서 저러셨을까 싶기도 하고…….”

허연이 잠꼬대하듯 노곤하게 중얼거렸다. 이만 허연을 일으켜 침상으로 모셔야겠다 생각하며 고 내관이 옆에 걸쳐놓았던 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때, 욕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욱이 안으로 쑥 들어섰다.

“폐하 드셨습니까?”

고 내관이 얼른 문 앞으로 달려 나가 고개를 숙었다. 하지만 허연은 졸린 눈을 힘겹게 떠서 욱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곤 욕조에 기댄 채 그대로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니, 마마…….”

허연이 욱을 힐끔 보고는 그대로 잠들어버리자 고 내관이 당황해서 욕조로 다가갔다. 하지만 욱이 고 내관을 옆으로 밀고는 허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졸리면 그냥 자지, 목욕은 매일 무슨…… 하여튼 유난스럽기는…….”

욱이 투덜거리며 허연을 물에서 건져 올렸다. 그러곤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욱이 허연을 침상에 눕히고 고 내관에게서 수건을 받아 그 젖은 머리카락을 손수 닦았다.

“이 사람이 어찌 이리 기진을 했을꼬? 혹 어디가 아프다는 말을 하더냐?”

자신에게 안겨 침실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이리저리 몸을 뒤적여가며 물기를 닦아주는 동안에도 귀찮아하는 기척조차 없으니 어디 아픈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워서 욱이 허연의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욱의 물음에 고 내관이 놀라서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그냥 피곤하다고만 하셨습니다. 마마께 열이 있으십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잠시 허연의 안색을 살피고 숨소리를 듣던 욱이 고개를 들어 고 내관을 쳐다보았다.

“내의원에 일러 아침 일찍 어의를 들도록 하라. 전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걱정이 되는구나.”

“예, 폐하. 바로 내의원에 연통을 하겠습니다.”

고 내관이 침상의 장막을 내리고 침실에서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정을 알리는 인경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때까지도 욱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침상 머리에 앉아서 허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허연이 돌아온 지 이제 1년,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정을 나누지만 욱에게 그는 아직까지도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이었다.

욱이 손을 뻗어 허연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상하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이제 평생을 함께 지낼 사람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한편으론 불안할꼬? 머물고 있는 우화원도 별천지처럼 꾸며주고, 들고 나는 것도 크게 간섭하지 않고…… 거의 매일을 같이 지내며 내가 이 사람의 눈치만 살피고 있거늘, 어찌 이렇게 가엾고 안되어 보이는고?

욱이 서글픈 감상에 빠져서 허연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긴 한숨에 혼절한 듯 잠들어 있던 허연이 눈을 떴다.

“폐하……?”

“깼는가? 그야말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더니…….”

허연이 팔을 뻗어서 욱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러곤 그 배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한숨 소리가 사막의 바람 소리 같습니다.”

“아닐세. 걱정은 무슨…….”

욱이 자리에 누워 허연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조심성이 없어서 자는 것을 깨웠구먼.”

“자정이 지났습니까?”

“방금 전에 인경이 울렸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반쯤 잠든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허연이 욱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췄다.

“처음 뵈었을 때엔 언제 키워서 사람 만들까 아득하더니…… 그래도 한 살, 한 살 착실히 찾아 드십니다.”

잠결에도 허연이 농담을 하며 욱의 등을 다독거렸다.

“좋구먼. 생일날 첫 인사를 그대에게서 받으니…….”

“주무십시오. 아침에 늦잠 주무시겠습니다.”

허연이 욱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다시 단잠을 청하던 허연이 연거푸 들려온 욱의 한숨에 다시 눈을 떴다.

“욱아…….”

“모르겠네. 그냥 오늘따라 마음이 심란하구먼. 옛날 생각도 나고, 그대도 안쓰럽고…….”

“…….”

좋은 날 새벽부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허연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욱이 허연을 다시 붙들어서 결박하듯 품에 안았다. 그러곤 그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끙…… 하고 한 번 앓았다.

“그 화상들이 눈앞에서 온갖 청승을 떨며 죽는소리를 하는 바람에 울화병이 옮은 것 같네.”

“공비와 승주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달리 누구겠는가?”

“면전에선 그렇게 버럭버럭 호통을 치시더니…….”

“…….”

허연이 욱의 반듯한 이마를, 아직도 홍조가 남은 고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입을 맞췄다. 그러곤 어느 틈엔가 위엄 넘치는 젊은 황제에서 끝도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시달리던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버린 그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서리 맞은 꽃처럼 시들시들한 그 꼴도 보기 싫고, 칭얼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어서 그랬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내 꼬라지가 저랬겠지 싶고, 지난 몇 년간 힘들었던 기억이 갑자기 확 몰려와서…….”

“마음이 아프셨습니까?”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사실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일세.”

욱이 부끄러운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제가 폐하의 성격을 모를 리 있습니까?”

허연이 씁쓸하게 웃으며 욱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안개 속의 밤 나들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설렘이 있었다. 천변의 나뭇가지에 달려 흔들리는 색등, 대목을 맞아 혼잡한 거리, 주점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정해진 일과대로 빡빡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수많은 내관과 신하들에게 에워싸여 지내던 두 사람에게는 그 짧은 일탈, 지극히 개인적인 외출도 서로를 위한 위로였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고 인파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좋았지만, 끊어진 인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젊은 연인을 마주하는 것은 느낌이 또 달랐다. 처음엔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귀여워 보이고 마음이 흡족했지만 점차 그들의 그리움이, 고통이…… 그리고 깊은 절망이 옷깃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욱과 허연의 마음에 젖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갑자기 시간이 1년 전의 어느 날, 혹은 그 이전의 어디쯤으로 돌아가서 서로를 꿈에서 만나고 있는 것 같고 여전히 가슴을 잡아 뜯으며 그리워하는 것 같고…… 그렇게 길고 서글픈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생각하면 또 아득하고…… 그런 감상에 푹 빠지는 바람에 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욱은 움켜잡은 허연의 손을 놓지 않았고 허연 역시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혼자 있는 걸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홀로 남을까 봐 얼마나 두려워하시는지…… 어려서부터 휘명전에 버려진 채 홀로 자라셔서 외로움이 골수에 사무치신 것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연의 위로에 새삼 가슴이 뭉클해진 욱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그 눈물을 멋쩍게 문질러 닦으며 욱이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이젠 나이도 어리지 않고 그대도 곁에 있는데 그게 쉽게 고쳐지질 않는구먼.”

“그런 것은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가?”

“그것은 이미 폐하의 성격입니다. 성격을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게다가…….”

허연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꼬리를 흘리자 욱이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말을 하다가 마는가? 게다가…… 뭐?”

솔직하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허연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것이 폐하의 그런 성품인데 그걸 왜 고칩니까? 고칠 수 있다고 해도 그러지 마십시오.”

허연이 이제는 많이 의뭉스러워져서 처음보다는 애정 표현을 스스럼없이 하는 편이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입에 올리는 것은 드문 일이라 욱이 헤벌쭉 웃었다.

“아니, 내 잘생긴 얼굴과 어디다 내놔도 빠지지 않는 듬직한 체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그 너스레에 허연이 피식 웃었다.

“이 근처에 그런 사람도 있었습니까? 저는 발발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밖에 못 보았는데요?”

“어허! 강아지라니? 서방님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구먼.”

욱이 허연을 밀어 넘어뜨리고 냉큼 올라탔다. 기대에 가득 찬 눈길이며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영락없이 꼬리 없는 강아지라 허연이 나른한 눈길로 욱을 올려다보았다.

“흐…… 윽…….”

허연이 신음하며 고개를 젖혔다. 자신의 어깨에 감겨드는 희고 긴 목에 욱이 몇 번째인지도 모를 입맞춤을 했다. 이미 곳곳에 반흔이 생긴 목덜미에 또다시 욱이 이를 세우자 허연이 등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기진한 탓에 욱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밤이 깊도록 이어진 정사에 허연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온몸을 녹여버릴 듯 노골적이고 음탕한 전희가 끝도 없이 이어졌고, 힘에 부치는 삽입과 거친 정사도 이미 두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이만큼 날뛰었으면 들짐승도 지쳐서 풀숲에 웅크리고 잠을 청하련만, 욱은 염치도 없이 허연의 허리를 다시 안아 올렸다.

얼굴은 베개에 처박힌 채 엉덩이만 높이 들어 올린 꼴사나운 자신의 몰골에 허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욱은 허연을 상대로는 무엇이든 대환영이고 어떤 짓이든 해보고 싶어했지만, 허연은 영 내키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욱이 구음 끝에 자신의 정액을 삼키는 것도 질색이었고 야외에서 뒹구는 것도 절대 사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엎어진 채 엉덩이만 잔뜩 치켜든 체위도 심히 꺼리는 것이었다. 어쩐지 모욕적이고 다른 체위보다 더욱 음탕하게 느껴지는데다 본래 이런 자세를 즐기는지, 아니면 자신이 꺼리는 것을 알고 더 그러는지…… 욱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욱이 어둠 속에서 동그랗게 드러난 허연의 엉덩이를 쳐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허연의 몸은 어디나 아름다웠지만 작고 단단한 엉덩이와 길고 곧은 다리만큼 욱의 음심을 자극하는 곳도 달리 없었다. 욱이 허연의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거친 정사에 시달려서 발갛게 부은 항문을 슬쩍 건드렸다. 그 자극에 허연이 허리를 한껏 비틀며 작게 신음했다.

“아픈가? 괴로운가?”

욱이 잔뜩 쉰 음성으로 물었다.

“그만 쉬고 싶은가?”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그 물음에 허연이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소 미진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기진해 있는 사람을 너무 괴롭혔구나 싶어서 욱이 땀에 젖은 허연의 등에 입을 맞췄다. 그때 허연이 등 뒤를 더듬어 욱의 손을 찾아 쥐었다.

“괜찮습니다.”

“귀인…….”

허연은 욱이 아는 한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그런 만큼 허튼짓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고, 남부끄러운 일은 아는 자가 있거나 없거나 행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이었다. 그런 허연이 자신에게만은 사내로서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부끄러운 것도 꾹 참으며 무엇이든 허락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욱이 그 허리를 옥죄듯 꽉 끌어안았다.

“뭐든 원하시는 대로…… 저도 하고 싶습니다.”

“연아…….”

“그렇게 부르는 것만 빼고요.”

욱이 킥 웃으며 허연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타고 갈라지는 목마름을 해소하기라도 하려는 듯 길고 집요했다. 욱의 난폭한 입맞춤을 달게 받아들인 허연이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아…….”

무리하게 지속된 정사로 그렇지 않아도 쓰라린 곳을 욱이 거침없이 비집어 열었다. 몸의 중심이 뜨겁고 단단한 창에 꿰뚫리는 고통에 허연이 베개를 움켜쥐며 긴 울음소리를 냈다.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색스러운 교성에 욱의 등골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처음 얼마간은 조심스럽게 허연을 더듬어 가던 욱이 더해가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 엉덩이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러곤 한계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난폭한 삽입을 거듭했다. 욱의 거친 침입을 견디지 못한 허연이 쾌감인지 고통인지 분명치 않은 신음을 흘리며 헝겊인형처럼 맥없이 흔들렸다. 처음부터 기진해 있던 터라 무리한 정사를 버티지 못한 허연이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 허연이 극심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놓을 무렵, 맹수처럼 거칠게 날뛰던 욱도 절정을 맞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연을 끌어안은 채 침상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허연이 눈을 뜬 것은 해가 훤하게 뜬 늦은 아침이었다. 늦잠 잔 것을 깨달은 허연이 놀라서 몸을 일으키다가 끙…… 하고 신음을 하며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그 소리에 문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화산 원행에 챙겨 갈 물품 목록을 한 번 더 점검하던 고 내관이 일어나 침상으로 다가왔다.

“마마, 기침을 하셨습니까?”

“시각이 어찌 되었는가?”

잔뜩 쉰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서 허연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정오가 다 되어갑니다.”

“이런…….”

허연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깨우지 않고?”

“폐하께서 깨우지 말고 푹 주무시도록 하라고 소인에게 단단히 당부를 하고 나가셨습니다.”

혹시 허연이 깰까 싶어서 침상에서 살금살금 기어 내려오던 욱의 모습이 떠올라서 고 내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폐하의 생신이 아닌가?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 이런 날에 늦잠을 자다니…….”

침상에 축 늘어져 있던 허연이 다시 버둥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고 내관이 그를 붙들어 다시 침상에 눕혔다.

“힘들면 누워 쉬십시오. 간단하게 조반을 차려 올릴 것이니 편하게 드시고…….”

황제의 생일이 연중 가장 큰 잔치이긴 하지만 이번엔 생일 다음 날 원행이 일정이 잡혀 있어서 대연회는 어제 저녁 야회로 대신했고, 오늘은 황룡전에서 종친들을 대접하는 오찬이 전부였다. 그 때문에 욱도 굳이 허연을 깨우지도 않고 혼자 연회에 나간 것이었다.

“내가 정말 나이가 들었나……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지 모르겠네.”

“나이가 드시다니요? 폐하께 새벽까지 시달려서 이리 되신 것을…… 나이 탓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고 내관이 정색을 하고는 중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관들에게 조반을 차려 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폐하께서 한동안 자중을 하시더니, 지난밤엔 많이 들떠 계셨나 봅니다. 하긴, 무술 대회에 밤나들이까지 하신데다 폐하의 생신은 두 분께는 기념일이기도 하니…….”

고 내관의 음흉한 미소에 허연이 팔로 두 눈을 가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내 무덤을 팠네.”

“예?”

“아닐세…….”

허연이 고개를 저으며 울적하게 대꾸했다. 어젯밤, 잠든 김에 내처 잤어야 했는데 공연히 욱에게 말 붙이고, 달래고…… 그러다 세 번이나 깔린 것이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부아가 났다.

“내의원에서 인삼탕을 달여 보냈으니 조반 드시고, 인삼탕도 챙겨 드십시오.”

고 내관이 키 높이 정도 되는 물목을 돌돌 말아서 소맷자락에 챙겨 넣으며 당부했다.

“어딜 가는가?”

“상선이 내일 원행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해서요. 물목도 한 번 더 맞춰보고, 일정도 변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출발 직전까지 준비할 일이 많습니다.”

“아…….”

“출발은 내일 동틀 무렵이 될 것이니 무리하여 어디 나갈 생각 마시고 그냥 쉬십시오. 폐하께서도 점심까지만 황룡전에서 드시고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고 내관이 한 번 더 당부를 하고는 청량전을 나섰다.

윤 내관이 원행 일정을 의논하자며 고 내관을 불러낸 곳은 황룡전 부속 별궁 중 가장 작고 외진 전각인 양심헌이었다. 큰 잔치가 벌어져서 모든 전각이 수천 명의 축하객으로 가득 찬 때이기는 하지만 궁내청 전용 전각인 사용원은 본시 외부인 접근이 엄격히 금지되는 곳이니 그냥 거기서 모이면 되지, 뭐 이렇게 구석진 곳의 좁아터진 별채로 사람을 부르는가 싶어서 그렇지 않아도 의아해하던 고 내관이 양심헌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각이라기보다는 정자에 더 가까운 조그만 별궁을 수십 명의 위병들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심헌을 지키고 있는 위병들이 정 내관의 최측근 병사들인 것을 깨달은 고 내관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휘명전 호위대장인 정 내관이 수족처럼 부리는 3백여 명의 궁내청 소속 위병들은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일 없이 황제를 호위하는 그림자 같은 자들이었다. 얼핏 봐도 전각 주변의 인원이 20~30명은 되어 보이는데, 이자들이 잔치가 한창인 황룡전을 두고 뭣 때문에 여기 와서 버티고 서 있는고?

뭔가 범상치 않은 상황에 고 내관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원행 일정을 논의하자면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수십 명의 내관들로 복작거려야 할 전각의 큰방에 사람이라곤 달랑 윤 내관과 정 내관 둘뿐이었다.

“왔는가?”

손수 대전 조리각에서 가져온 다과를 차리고 차를 달이던 윤 내관이 고 내관에게 와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왔느냐?”

고 내관이 탁자 가까이 다가서서 흠 하고 헛기침을 하자 웬 두루마리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정 내관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아는 체를 했다.

“원행의 준비 상황을 의논하자더니…… 뭔가 다른 일이 있습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간 바빠서 우리 셋이 차 한 잔 나눠본 지도 오래라…….”

윤 내관이 잔에 차를 따라서 정 내관과 고 내관에게 한 잔씩 돌렸다. 

“우리가 뭐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밖에 위병들을 대나무처럼 빽빽이 세워놓고 차를 마신단 말입니까?”

아직도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질 않아서 고 내관이 찻잔을 들며 투덜거렸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가 중요하니 그렇지.”

“…….”

그 은근한 대답에 고 내관이 윤 내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정 내관이 들여다보고 있던 문서를 고 내관 앞으로 밀어 보냈다. 

“이게 뭡니까?”

“대화록이다.”

“대화록…… 이라니요?

고 내관이 문서를 들쳐보며 다시 물었다. 그러다 다음 순간,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닫고는 숨을 훅 몰아쉬었다. 

“상선, 이것은…….”

“어제 거북다리 옆 주막에서 폐하와 귀인, 공비와 승주 간에 오고 간 대화를 취재하여 작성한 것일세. 일단 읽어보게.”

황궁엔 아주 오래전부터 낮말은 윤 내관이 듣고, 밤말도 윤 내관이 듣는다는 격언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윤 내관은 당하관들의 집무실인 숭문각에서 관리들이 작성한 문서 꾸러미를 들고 이 전각, 저 전각으로 종종걸음을 치던 견습 내관 시절부터 궐 안에 떠도는 소문 캐묻고 다니기 좋아하고, 남의 사담을 엿듣느라 시간 가는 것을 모르는 별난 아이였다.

윤 내관의 그런 행동을 천박하고 위험한 것으로 여긴 전각의 태감과 선배 내관들이 여러 차례 혼을 내고 벌을 내려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는 버릇을 고치려고 했지만 그것도 혼쭐이 난 그때 잠시뿐, 소문과 비밀에 관한 윤 내관의 타고난 호기심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출입문보다는 개구멍으로 다니기를 좋아하고, 10대 내관들의 옷장과 이불 밑에서 돌고 도는 야설과 춘화집보다 태황태후전을 오가는 기밀 문서나 사적인 편지 엿보기를 더 즐기던 아이는 자라면서 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내관이라는 다소 독특한 평판을 얻게 되었고, 그 덕분에 태황태후의 눈에 들어서 휘명전 상선의 직책을 얻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제 저녁 천변의 주막에 황제와 귀인, 공비와 그 정인이 탁주를 기울이며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기에, 그 네 사람이 마주 앉은 자리에서는 대체 무슨 말이 오고 갔을까 고 내관도 몸살이 날 정도로 궁금하긴 했었다. 하지만 허연에게 물어봐야 대답을 해줄 리 없어서 그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는데…… 귀신도 저런 귀신이 없구나. 어떻게 하루도 안 되어 대화 청취록을 완성했을꼬?

고 내관이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며 대화록을 펼쳐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그 눈엔 곧 촉촉한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에그, 딱하기도 하지…….”

대화록을 끝까지 정독한 고 내관이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두덩을 꾹 눌렀다.

“웬 눈물 바람이냐? 거기 뭐 그럴 만한 것이 있다고…….”

고 내관이 대화록을 보는 동안 말없이 앞에 놓인 과자만 와작와작 씹어 먹던 정 내관이 퉁명스럽게 타박을 했다.

“불쌍하지 않습니까? 젊은 사람이 그간 얼마나 심신이 고달팠으면 산에 들어가 초근목피나 뜯어 먹다 죽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공비나 그놈이나…… 어전에서 감히 그런 말을 늘어놓다니, 실성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걱정은 되더라.”

“폐하께서 살살 낚으시니 넘어간 것을 가지고…….”

정 내관을 노려보던 고 내관이 마음을 추스르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들이마신 숨을 내뱉기도 전에 또다시 울컥해서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렸다.

“차도 다 마셨고, 과자도 다 먹었고, 울 사람도 다 울었으면…… 이제 얘기를 좀 하세.”

윤 내관이 운을 떼며 정 내관과 고 내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요?”

고 내관이 빨갛게 부은 눈으로 윤 내관을 쳐다보았다.

“이 대화록을 보고 뭐 느껴지는 것이 없는가? 승주가 불쌍하다든가, 공비가 딱하다든가…… 그런 것 말고.”

“폐하도 안되셨고, 저희 마마도…….”

“여기 폐하와 귀인의 과거지사를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윤 내관이 한숨을 쉬며 정 내관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뭘요?”

“내가 수하를 열두 명이나 풀고 밤을 새워서 완성한 저 대화록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껴지는 바가 없는가?”

윤 내관의 채근에 정 내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상선이 이렇게 사적인 시간, 사적인 대화까지 캐고 다니는 것을 폐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폐하께서 어떻게 아시겠는가? 자네 둘이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제 주군은 폐하십니다. 상선이 아니고요.”

정 내관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번뜩이는 눈으로 노려보면 그 앞에서 떨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정 내관을 이 으슥한 곳까지 불러서 대화록을 보여줄 때엔 이만한 비난도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기에 윤 내관이 떨리는 손끝을 소맷자락으로 감추며 목소리를 최대한 깔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두 번 다시 내 비밀 얘기에 끼워주지 않겠네.”

“저는 상선과 달라서 이런 비밀 얘기에 큰 흥미가 없습니다.”

정 내관의 철벽같은 태도에 윤 내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건 큰 비밀도 아니지. 저자거리 주막에서 오고 간 이야기가 아닌가? 주막 2층엔 수십 명이 앉아 있었고, 언성을 낮춘다던가 가명을 쓴다든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주의도 없었네.”

“상선이 궁궐 어느 벽에 귀를 붙이고 살건, 어떤 편지를 뜯어 보건 그런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시고, 얼마든지 하십시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폐하를 캐고 다니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건 모두 폐하를 위한 일일세.”

“물론 그러시겠지만, 폐하께서 윤허하시지 않는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에그, 답답하기는……. 자네는 폐하의 옥체나 잘 지키게. 어제처럼 안개 속에서 폐하를 잃어버리고 허둥거리는 일은 다신 없었으면 좋겠구먼.”

윤 내관의 핀잔에 정 내관이 언짢은 표정으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러곤 공연히 만만한 고 내관을 노려보았다. 고 내관은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것은 신경도 안 쓰고 앞에 놓인 대화록만 보고 또 보는 중이었다. 윤 내관과 정 내관은 본래 성격이 맞지 않았고 마주칠 때마다 투닥거리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소설책이냐? 뭘 그렇게 줄창 보느냐?”

정 내관의 트집도 귓등으로 들어 넘기며 고 내관이 코를 훌쩍였다.

“보면 볼수록 이 승주라는 자가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 앞에서 제 할 말 다 하고, 공비마마와의 관계를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고…….”

“미쳤거나 돌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또한 자기는 상심에 지쳐 세상 살 의욕조차 잃었음에도 공비마마를 때론 야단치고, 때론 비호하는 걸 보면 성격도 괜찮고 사내다운 면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격이 괜찮고 사내다우면 뭘 하느냐? 정신이 나갔는데…… 종놈 주제에 영주 댁 아씨에게 연정을 품다니, 제 주제를 몰라도 정도가 있지…….”

정 내관이 상을 들어 엎어버릴 듯 혼자 열을 내며 투덜거렸다. 그런 정 내관의 태도에 윤 내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나서 다시 화로에 물주전자를 올렸다. 그러고는 진정에 효과가 있거나 아예 반나절 정도 사람을 재워버리는 차가 없나 싶어서 차 항아리를 뒤적거렸다.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일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제 마음 다스리는 일이 아닙니까?”

“맘대로 안 되면? 어렸을 때엔 철이 없어 그랬다고 하더라도 한쪽이 시집을 가서 다른 사내의 여인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이지, 이제 와서 이리 얼쩡거리며 아쉬운 티를 내면, 뭐? 어쩌자는 것이냐?”

“정황상, 이자가 작정하고 나타나서 얼쩡거리는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폐하께서 멍석을 깔아주고 자꾸만 부추기시니…… 사람이 너무 조심성 많고 소심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제도 모르는 등신이란 것이지. 폐하께서 탁주 한잔 따라주며 괜찮다, 괜찮다 받아주시니 진짜로 제 놈의 친구라도 된다더냐? 종놈 주제에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에, 신세타령에…….”

점점 더 거칠어지는 정 내관의 반응에 윤 내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견습 내관 시절부터 같은 방에서 먹고 자며 친형제처럼 지내온 고 내관은 도리어 애잔한 표정으로 정 내관을 쳐다보았다.

“굳이 귀천을 따지자면 세상에 우리들보다 더 천한 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분이 천하다 해서 연심까지 천한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

고 내관의 한마디에 정 내관의 표정이 딱 굳어버렸다. 찻물이 끓기를 기다리던 윤 내관이 갑작스러운 분위기 반전에 말똥말똥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정 내관이 고 내관을 노려보며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은 무슨…….”

고 내관이 정 내관의 시선을 피해 다시 대화록으로 눈길을 돌렸다.

세 사람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잠잠히 앉아 있는 사이, 바람결에 희미한 비파 소리가 실려 와서 귓전을 간질였다. 시절은 천변의 나뭇잎까지 서서히 붉은 물이 들어가는 늦은 가을, 청년 황제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맞아 온 황성이 흥에 겨워 들떠 있는 평온하고 한가한 때였다.

곳곳에서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공물이 들어오고, 한 해의 마지막 대목을 보려는 장사치들과 겨우살이 물품을 장만하려는 백성들로 이즈음의 황성은 몇 날 며칠 불야성을 이룰 정도로 떠들썩하고 활기 또한 넘쳤다.

하지만 그런 평온함을 한 꺼풀 들추고 속내를 살피면 황궁은 황제가 태황태후 일가를 몰아내고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전쟁터로 변해버릴 수 있는 나라의 동북쪽 국경에 대군을 급파하느라 국고는 위험할 정도로 비어버렸고, 훗날 원자와 황위를 다툴 2황자의 생모는 연금을 당해 그 앞날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처했으니 그 두 가지만으로도 윤 내관은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그간 존재감도 없던 공비가 고향에서 온 정인과 밤나들이를 하고 돌아온 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후비의 사통이란 자칫 황제의 위엄을 크게 손상시킬 수도 있는 큰 사건인데다, 공비가 며칠 전에 상장군에 임명된 무호의 누이이자 국경 수비의 선봉장인 것까지 감안하면 이는 국경 지역의 사기와 안전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윤 내관이 녹차 한 잔을 더 우려서 정 내관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진정하라는 뜻으로 그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사적인 얘기는 일과 마치고 아무 때나 하도록 하고…… 이제 중요한 얘기를 좀 하세.”

윤 내관의 제안에 고 내관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골골거리고 계신 마마를 애들 손에 맡기고 나와서 전각을 오래 비울 수가 없습니다.”

“대체 폐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리 하시는 것 같은가?”

윤 내관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고 내관과 정 내관이 눈길을 한 번 교환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저희에게 폐하의 의중을 물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일이 없고 심심해서, 폐하의 사담을 캐고 자네들을 불러다 수다를 떨고 있는 줄 알았는가?”

“열 길 물속보다 알기 어려운 것이 한 길 사람 속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폐하의 속마음은 그중에서도 오리무중이니…… 폐하께서 말씀을 안 하시면 소인들이 어찌 그 유별난 성심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고 내관의 대답에 윤 내관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들은 폐하께서 용상에 오르신 그날부터 지금까지 폐하를 보필해온 최측근들이 아닌가? 허면 꼭 말씀을 안 하셔도 뭔가 감이 올 것이 아닌가?”

윤 내관의 하소연에도 두 내관은 묵묵부답으로 버텼다. 황제가 그간 나랏일은 법도와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를 했지만 사적인 일은 다소 충동적으로, 갑자기 터뜨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에서 보아온 결과, 황제의 성격이 초여름 개구리 같아서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으니 그 의중을 섣불리 짐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결론이었다.

“그러지 말고 나 좀 살려주게. 대현성에 지원군을 보내느라 텅 빈 금고를 다시 채울 일만 해도 막막한데, 미향궁의 일로 수 대인은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보내 향비의 처분 문제를 폐하께 잘 아뢰어달라고 나를 달달 볶아치는 판일세.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런 중대사에 관해서는 한 말씀도 없으실 뿐 아니라 공비를 데리고 나가 옛 정인을 만나도록 주선까지 하고 계시니…… 대체 이게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조만간 천둥벼락이 내려칠 것은 자명한데 이게 어디쯤, 어떤 강도로 떨어질지 예측은 하고 있어야 대비를 하지, 넋 놓고 있다가 다 같이 나자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어찌 감히 폐하의 의중을 짐작으로 떠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짐작 가는 바도 전혀 없습니다.”

고 내관의 반듯한 대답에 윤 내관이 끙…… 하고 크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윤 내관을 가만히 쳐다보던 정 내관이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더 보탰다.

“상선도 폐하를 뫼신 지 7년차가 아닙니까? 우리한테 뭐라 할 것 없이 상선께서 폐하의 의중을 대강 짐작하여 대처를 하시지요.”

이런 고연 것들! 차려 먹인 과자가 아깝고, 귀하디귀한 운남의 차가 아깝구먼. 영 비협조적인 두 내관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노려보던 윤 내관이 탁자 위에 떨어져 있던 고 내관의 손수건을 집어다가 자신의 눈두덩을 박박 문질렀다.

“남들은 날더러 태황태후전에서 편지 심부름이나 하다가 운발 하나로 벼락출세하여 상선 노릇 하며 거들먹거린다고 욕을 하지만, 자네들은 알 것이네. 폐하 곁에서 그 심술, 그 변덕 다 받아내며 버티는 것이 얼마나 진 빠지는 일인지…….”

“아, 뭐…… 그야…….”

고 내관이 별생각 없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 내관의 눈총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지난날 귀인께서 환궁을 하셨을 때만 해도 귀인께서 우화원에 드시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는가? 폐하께서야 우화원 다시 치우고 주인 맞을 준비 하라고 한마디 딱 내리시고 편전으로 드시면 그만이지. 궐 안에 비빈이 일곱이나 되는데 그 틈새에 어찌 사내를 두느냐며 중신, 종친, 외척 할 것 없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을 때에 충의당으로, 숭문각으로, 시강원으로…… 그리고 궐 밖 진무왕 사저로 종종걸음을 치고 다니며 여기저기 틀어막고, 약 치고, 사정사정해서 그 소란을 조용히 무마시키는 모든 과정이 다 내 차지가 아니었는가? 또한 귀인께서 황후께 문후 드는 문제도 중신들은 입을 모아 다른 후궁의 예와 같이 해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떠들고, 폐하께서는 문후는 무슨 얼어 죽을 문후냐고 성질만 내시는 중에 그 절충안을 마련하기까지 두 달간 휘명전과 충의당을 중재하는 것 또한 내 일이었고…….”

윤 내관의 인정사정없는 신세타령에 고 내관이 한숨을 내쉬며 대화록을 다시 뒤적거렸다. 허연이 다시 궁에 들 때에 윤 내관이 궂은일을 많이 해결해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서 이렇게 대놓고 그때 진 신세를 갚으라는 식으로 나오면 영 모른 척할 수도 없는 것이 고 내관의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제 짐작을 말씀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최대한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앞일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네.”

“제 생각엔…… 아무래도 폐하께서…….”

고 내관이 대화록을 다시 한 번 눈으로 쫙 훑고 나서 윤 내관을 쳐다보았다.

“공비마마를 출궁시켜 이자와 짝을 지워주실 듯싶습니다.”

고 내관의 대답에 윤 내관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혹시 그렇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역시나 그런 것이었구나. 이번에야말로 큰 것이 왔구나 싶어서 윤 내관이 어지러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굳이 공비마마를 대동하여 이자를 만나신 것도 그렇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어떤 자인지 가늠해보신 것도 그렇고…… 폐하께서 그저 장난으로 이런 일을 하실 정도로 실없는 분은 아니질 않습니까?”

“하지만, 대체 어떻게…….”

지방 명문가 출신의 후궁을 출궁시켜 노비와 맺어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서 윤 내관이 멍한 눈길로 고 내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고 내관의 대답은 그런 거 알 게 뭐냐는 듯 간단하고 가벼웠다.

“폐하께서 명을 내리시면 요번에도 방법은 상선께서 찾아보셔야겠지요.”

“에잇!”

윤 내관이 울컥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참으로 못해먹겠구먼. 다 때려치우고 구석진 전각에 죽은 듯 박혀 살든가 해야지…….”

윤 내관의 거친 한탄에 정 내관이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폐하의 명을 제대로 이행치 못하시면 싫어도 그리 되시지 않겠습니까?”

다과도 다 들었겠다, 윤 내관이 궁금히 여기는 일도 대답해주었겠다…… 이제 그만 각자 전각으로 돌아가려고 정 내관과 고 내관이 주섬주섬 자리를 접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공연히 일을 키우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공비가 아무리 성격이 거칠고 씩씩하다고 해도 실상 풍파라곤 모르고 자란 온실의 꽃인 것을…… 앞으로 닥칠 일이 감당이 되겠느냐?”

정 내관이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궁의 천덕꾸러기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게 험한 일입니다. 당장 향비를 보십시오. 집안의 세도가 없고 총애가 없으니 사람을 만만히 보고 아주 잡아 죽이려고 들질 않습니까?”

“그야 뭐…….”

그도 그렇다는 듯 정 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 퍼뜩 떠올라서 윤 내관이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뭐가 또 남았습니까?”

정 내관의 물음에 윤 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향비 말일세.”

“…….”

“향비의 소행과 폐하의 성정과 2황자 아기씨의 앞날을 따져보았을 때…… 폐하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실 것 같은가?”

그 물음에 두 내관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희가 황제 폐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공연한 지레짐작이 일을 더 키우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속 시원히 의견을 말해보게. 나도 머리 맞대고 의논할 사람이 있어야 무슨 일을 하지. 폐하께서 지난 일을 덮고 향비를 용서하실 가능성은 전혀 없겠는가? 무엇보다도 향비는 2황자의 생모가 아닌가?”

윤 내관의 물음에 고 내관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향비가 후궁의 사통 운운하며 걸고 넘어간 상대는 저희 마마이십니다. 이는 저희 마마의 순정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도 아닌 폐하의 손으로 마마를 해치게 하려는 흉계가 아닙니까? 폐하께서 그 더러운 죄를 덮고 향비를 용서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고 내관이 파르르 떨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고 향비를 죽이시겠는가? 만일 일이 그렇게 되면 나라 안팎에 큰 분란이 일어날 것이네.”

“폐하께서 천성이 모질지 못하시니 일이 그리 극한 상황에까지야 이르겠습니까? 하지만 폐하의 성심이 이미 미향궁에 한 조각도 남아 있질 않으니 그 흉악한 여인을 궐 안에 오래 두지는 않으실 겁니다.”

향비를 용서하느니, 죄를 덮느니 하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어이가 없어서 고 내관이 치를 떨며 전각을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정 내관이 윤 내관을 슬쩍 노려보았다.

“왜 애를 그렇게 푹 찌르십니까? 살살 건드리기만 해도 제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을 텐데…….”

“시간이 없어서 그랬네. 이제 황룡전 오찬도 거의 끝나갈 것이니 서둘러 가봐야지.”

어차피 둘 다 가야 할 곳은 황제가 있는 황룡전이라 정 내관이 앞장서서 전각을 나섰다. 지난 며칠 안개가 오락가락하던 날씨는 아침부터 구름이 많다 싶더니 어느새 하늘엔 비구름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자네도 고 내관과 생각이 같은가?”

정 내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당을 가로지던 윤 내관이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정 내관이 자신도 이견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향비는 목숨을 보전한 것만으로도 아기씨들께 큰 신세를 진 것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향비를 폐비하여 내치는 일이 간단치 않을 텐데…….”

“그야 뭐…… 그렇겠지요.”

윤 내관이 이마에 톡 떨어진 빗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국경이 위태로운 때에 남서쪽의 유력자인 수 씨 가문까지 들고 일어나는 것은 황제에게는 전쟁을 두 번 치르는 것만큼이나 불리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향비의 친정 아비인 수 대인이 중신과 종친들을 찾아다니며 향비의 구명을 청하고 있으니 곧 향비를 위한 탄원 상소가 올라올 것이고, 황제가 그에 맞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한다면 큰 충돌을 피할 길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아까 자네는 대화록을 보고서 왜 그렇게 버럭버럭 화를 냈는가?”

“제가 그랬습니까?”

“신경질에 짜증에…… 자네가 그러는 거 오랜만에 보았네.”

“세상에 후궁의 재혼을 주선하는 황제가 어디 있나…… 기가 막혀서 그랬습니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난 건 아니고?”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은근한 그 물음에 정 내관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잔뜩 언짢은 눈길로 윤 내관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제 황룡전 권역이라 주변에 오가는 궁인들도 많고 정원을 구경하는 손님들도 많았기 때문에 윤 내관이 별로 겁내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어쩐지 영서 아씨와 자네가 어렸을 적이 생각나더구먼. 태황태후전에 친척 아가씨들이 많이도 머물렀었지만, 영서 아씨처럼 곱고 다정한 분도 드물었지.”

“상선!”

“그 아씨가 자네보다 두 살인가 더 위가 아니었나? 자네가 연병장에서 구르고 터져서 절뚝이며 다니는 걸 볼 때마다 불러서 상처에 약도 발라주고, 먹고 기운 내라며 견습 내관은 입에도 못 대던 귀한 과자도 예쁜 바구니에 담아서 들려주고…….”

“어떤 일은 굳이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이 귀신이 그 일은 어찌 알고 있으며 어떻게 여태 기억을 하고 있나 어이가 없어서 정 내관이 거친 숨을 씩씩거렸다.

“아, 뭐 어때서?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 아닌가? 게다가 자네만 아씨께 연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때 태황태후전을 드나들던 고관의 자제들이나 위병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꽤 있었거든.”

너스레를 떨며 윤 내관이 정 내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만하십시오. 저는 주변이나 한 바퀴 돌아볼 것이니 상선께서는 연회장에 들어가보시지요.”

윤 내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정 내관이 황룡전의 중문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윤 내관이 그 뒤통수에 대고는 주변에 다 들릴 듯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 시집을 가신 후에도 태황태후마마 생신이나 큰 연회 때엔 종종 입궁을 하셨는데, 그때마다 진 내관을 불러서 자네 안부를 묻곤 하셨다네.”

“그래서요?”

정 내관이 주변을 지나치던 궁녀들이 놀라서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큰 소리로 대들며 윤 내관에게 바짝 다가섰다. 이러다 정 내관이 상선을 한 대 쥐어박지나 않을까 싶어서 근위병들도 슬그머니 정 내관 옆으로 붙어 섰다. 여차하면 정 내관을 붙들고 상선을 피신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 내관이 단순히 화가 나서 이렇게 펄쩍 뛰는 게 아니란 것을 아는 윤 내관은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아씨께서 4년 전에 부군을 여의고 홀로 되신 것은 알고 있나?”

“항주성은 나라에서 손꼽을 정도로 크고 번화한 성읍인데 그곳의 영주가 바뀐 것을 제가 모르겠습니까?”

“그럼 그분이 요양차 작년부터 친정이 있는 진목성에 머물고 계신 것은?”

“…….”

“먼 곳도 아닌데 편지라도 한 장 띄워보지 그러나? 며칠 휴가를 내서 한 번 뵙고 오든가…….”

“그만하십시오!”

“누구는 팔자를 고칠 판인데 안부나 좀 묻고 지내는 것이 뭐 어때서…….”

“아, 진짜…….”

정 내관이 얼굴을 붉히며 윤 내관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항시 대비가 되어 있던 위병들이 즉시 달려들어 정 내관을 말려준 덕에 윤 내관은 옷섶만 좀 뜯긴 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천천히 생각해보게. 시간은 넉넉하니…….”

정 내관이 위병들에게 붙들려 투레질을 하는 사이, 윤 내관이 한마디를 더 보태고는 얼른 황룡전의 중문을 넘어섰다.

시영이 황룡전에 들어선 것은 오찬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몸이 아프다든가 다른 일이 있어서 못 나온다는 전갈도 없이 계속 정안군 부처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자택에 사람을 보내 괜찮은지 알아보려던 참에 시영의 얼굴이 보이자, 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후다닥 달려 나갔다.

“형님!”

“폐하.”

“어제 야회에도 참석지 않으셨는데 오늘도 안 오시기에 고뿔이라도 걸리신 줄 알았습니다.”

“아픈 데 없습니다. 공연한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시영이 사과를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 시영을 보고는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소리에 기력이라곤 없고 눈빛도 울적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시영이 금방 몸살이라도 앓을 듯 창백한 얼굴로 다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풀이 죽은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형님?”

“앉으십시오, 폐하. 좌정을 하셔야 소신이 생신 축하의 예를 갖추지 않겠습니까?”

시무룩하게 대꾸하며 시영이 욱의 가슴팍을 슬쩍 떠밀었다. 시영의 태도가 평상시와는 사뭇 다른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어서 욱이 시영의 곁에 선 곽여화를 쳐다보았다.

“형님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형수님?”

“별일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곽여화가 손을 내저으며 짧게 대답했다. 별일 아니라…… 욱이 손을 뻗어서 시영의 얼굴을 감싸고는 그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뭔가 큰 걱정이 있는 게 아닙니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서리 맞은 풀처럼 시들시들하십니까?”

“…….”

시영이 욱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표정에 욱이 시영의 어깨를 잡고 재차 다그쳤다.

“어느 놈입니까? 무슨 일입니까?”

욱의 다정한 손길과 눈빛에 시영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욱에게 이끌려 연회장의 곁방으로 들어온 시영이 힝……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욱의 품에 폭 안겼다.

“폐하…….”

“형님?”

“그 사람이…… 이제 만나지 말잡니다. 편지도 싫고 선물도 싫고…… 아예 인연을…… 인연을…… 끊어버리잡니다. 어허헝…….”

욱이 한 품에 쏙 들어오는 시영의 여윈 어깨를 다독이며 문 안으로 고개를 넣고 둘을 들여다보고 있던 곽여화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형님이 바람이라도 피웠습니까?”

욱의 물음에 곽여화가 그렇게 되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바람도 피우고, 실연도 당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서 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영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시영과 곽여화는 비록 그 신분과 성격은 하늘과 땅 차이였어도 뜻이 잘 맞고 관심사도 통하는, 의좋은 친구 같은 부부였다. 혼인 4년차에 슬하엔 그 어미를 닮아 벌써부터 미공자로 명성이 자자한 아들 둘을 두고 조용조용 잘 살기에 둘을 보면서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는 생각도 이따금 했었는데, 바람이라니…….

“형님이 바람을 피웠단 말입니까? 형수님이 아니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인은 서방님과 백년가약을 맺은 이후 줄곧 일편단심이었습니다.”

곽여화의 너스레에 시영이 소맷자락으로 젖은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쉰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만하시오, 부인. 나는 지금 속이 쓰리고 아픈데 부인은 그걸로 사람을 놀립니까?”

시영의 항의에도 곽여화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놀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서방님 모습이 갈데없이 죽고 못 살도록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사내의 형상입니다. 어제 오후부터 계속 이러시니 저도 이젠 서방님이 의심스럽고 속이 상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간 어렵사리 교류해온 귀한 친구를 불시에 잃었는데 위로는커녕 놀리고 타박하고…… 참으로 서운합니다.”

시영이 섭섭함을 토로하며 다시 욱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곽여화로부터 어제 점심 무렵에 승주가 시영의 자택으로 찾아와 그림 열두 장을 던져주고는 일방적인 절교 선언을 하고 돌아간 일을 전해 들은 욱이 울다 지쳐서 축 늘어진 시영을 짠한 눈길로 바라다보았다.

“형님은 제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형제이자 이 나라의 상서령이십니다. 그런데 겨우 그런 아이한테 바람을 맞고 이토록 상심해 계십니까?”

욱의 타박에 시영이 황룡전 돌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폐하의 사촌이자 상서령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뭔가 사심이 있는 자들만 안면이라도 익힐 욕심에 뻔질나게 내 집 사랑채를 드나들고, 정작 인품과 재능에 끌려 교류하고자 하는 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는 것을…….”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친구 하지 말자고 하면 형님은 고분고분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조정의 중대사를 맡아 보시는 분이 물정 어두운 어린아이 하나를 다루지 못해 낙심에 탄식에 눈물 바람이라니…… 저도 실망입니다.”

그렇게 서운하고 안타까우면 더 붙들고 설득을 해서 마음을 돌리면 그뿐이지, 맥없이 차이고 훌쩍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욱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어느 놈이 천한 노비가 종친과 친구 먹는다고 시비라도 걸면 승주가 다친다질 않습니까? 그 사람이 가까운 곳에 사는 것도 아니고, 멀고먼 대현성에서 봉변이라도 당하면 제가 어찌 알고 그 사람을 돕겠습니까?”

“그건…….”

“마음 같아선 무호를 불러다 당장 승주를 면천시키고 작은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해서 도성에 머물도록 하고 싶지만…… 그것도 쉽질 않습니다. 저는 승주와 사실상 초면이고, 승주는 상장군과 주종 관계 이상의 뭔가가 있는 듯싶으니 섣불리 그리 했다간 종친이 위세를 부려 자신을 휘두르려 한다 여기지 않겠습니까?”

현재 시영의 위세로는 못할 일이 없건만, 자잘한 일에 신경 쓰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 한심해서 욱이 눈살을 찌푸렸다. 승주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다가 다시 서글퍼진 시영이 그 앞에서 또다시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거렸다.

“내가 승주처럼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면 지금 이 심정을 담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스물네 폭 병풍을 만들고도 그림이 서너 장은 남을 것이고, 그 사람이 내게 호감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그 병풍을 보고는 마음이 무거워서 한 걸음도 고향 쪽으로 떼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더니 이젠 시를 지어가며 찡찡거리는구나, 이러려고 평생 그렇게 책을 들고 팠나 속으로 투덜거리며 욱이 시영을 끌어다가 그 등을 톡톡 다독거렸다.

“사람의 마음이 일견 굳은 것 같아도 실은 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며, 저 좋다는 사람을 뿌리치는 것은 바위를 옮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형님, 울지 마시고……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방법이라 하시면…….”

“이번 화산 원행엔 형님 친구도 동행을 할 것입니다.”

욱의 언질에 시영이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대강 닦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승주도 같이 가는 게 확실합니까? 확실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호서성으로 갈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화산에 같이 갈 겁니다. 무호에게 일러뒀습니다.”

늦가을에 집을 떠나는 상황은 평생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는 시영이 그럼 갈까? 싶어서 힐끔 곽여화의 눈치를 살폈다.

“때마침 예술가의 감수성을 뒤흔드는 만추가 아닙니까? 화산의 단풍은 피처럼 붉을 것이고, 온천에서 피어나는 더운 김으로 깊은 골짜기는 구름 속인 듯 아련할 터, 어느 조용한 정자에 그 녀석을 불러내서 술도 먹이고 글씨나 그림에 대해 아부도 잔뜩 하고, 네가 정말 마음에 들어 도저히 못 놓겠다고 칡넝쿨처럼 엉겨 붙으면 어디 마음만 돌리겠습니까? 운 좋으면 옷고름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진짜…….”

시영이 욱을 밀치고 바로 앉았다. 방금 전까지 훌쩍거리다가 농담 한마디 들었다고 삐져서 씩씩거리는 시영을 보고는 욱이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형님의 원행 준비는 휘명전에서 모두 알아서 할 것이니 형님은 서책이나 몇 권 챙겨서 오십시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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