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원행
화산은 황성에서 남서쪽으로 4백 리 가량 떨어진 아름다운 산이었다. 산세가 수려하고 단풍나무, 벚나무가 가득 들어찬 화산은 그 수려함으로도 유명했지만 산골짜기 곳곳에서 솟아나는 펄펄 끓는 온천수로 더욱 명성이 높았다.
그처럼 산세가 아름답고,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더운물에서 즐기는 온천욕이 신선놀음이라서 화산 골짜기 곳곳에는 세력가들의 별장이 들어서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돌 틈마다 온천수가 펑펑 솟는 용천 대계곡 중턱엔 황제의 별궁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월국이 태평할 때엔 선대 황제들은 해마다 늦은 가을이면 춥고 삭막한 황성을 벗어나 아예 겨울 한철을 아늑하고 따뜻한 화산에서 보내곤 했었다. 하지만 지난날 30년간 나라를 쥐고 흔들던 태황태후가 산골짝에 박힌 겨울 별궁보다는 번화한 진목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산의 별궁을 더 선호하는 바람에 화산 별궁은 오랫동안 빈집으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다 욱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산적한 나랏일에 치이고 매사에 심드렁하다 보니 화산 나들이는 이번이 고작 세 번째였다.
지난 두 번의 원행은 비빈들을 데리고 바깥나들이도 좀 하시라는 중신들의 권유로 아무 감흥 없이 몸만 왔다 갔다 했을 뿐, 욱은 화산에 가서도 중신들과 회의하고, 강론하고, 중요한 나랏일 처리하며 황궁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일에 파묻혀 지냈었다. 때문에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서 푹 쉬었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고, 공연히 먼 길 오가며 길바닥에 버린 막대한 비용만 아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원행은 지난 두 번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누가 권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한 나들이였고, 온천욕이며 사냥이며 주변 오솔길 산책이며 모든 일정도 직접 궁리해서 짜 넣고, 지난봄부터 명절날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레며 기대해온 진짜 소풍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허연과 함께하는 별궁 나들이라서 욱에게 이번 가을 화산 행차는 이전의 어떤 원행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행의 모든 것이 욱이 기대했던 그대로는 아니었다. 우선 출발일의 날씨부터가 청명한 가을날의 그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아, 진짜…….”
마차 지붕을 뚫을 듯 거칠게 쏟아지는 장대비에 욱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모레면 황성에도 서리가 내리고 곧이어 겨울이 닥칠 텐데, 이 무슨 경우 없는 폭우란 말인가? 과인이 팔자가 좋아서 해마다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참으로 하늘이 야속하구먼.”
“무슨…… 이만한 비에 하늘을 다 원망하십니까?”
허연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품에 안긴 채 꼬박꼬박 졸고 있는 2황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본 욱이 또다시 푸시시 김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더욱 원망스럽네.”
“제가요? 그토록 바라시던 대로 어차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허연이 보란 듯 2황자를 토닥토닥 어르며 욱을 약올렸다.
화산에 우리끼리 놀러 가면서 태화궁엔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를 넷이나 맡기고 가는 것은 심히 양심 없는 짓이라며 젖먹이와 돌잡이는 못 데려가도 다섯 살, 세 살 된 원자와 2황자는 데려가자는 매우 위험한 의견을 허연이 냈을 때, 욱은 재고의 가치도 없다며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비에, 무호에, 승주에…… 정안군 부부까지 덮쳐서 행차가 번잡해졌는데 거기에 한창 말 안 듣고 고집만 피우는 사내아이들까지 달고 가자니…… 이는 나들이가 아니라 작심하고 고생길을 나서는 것이었으며, 욱은 그럴 바엔 차라리 우화원에 들어가서 열이틀을 버티지, 궐 밖으론 한 발짝도 나갈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 욱이 태화궁에 들어 황후와 저녁을 먹으며 미리 인사를 나누고 자신이 없는 동안 궁을 잘 살펴달라고 당부하는 자리에서 그 결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밥상머리에 앉아서 욱이 입에 넣어주는 쇠고기며 생선살을 새끼 제비처럼 부지런히 받아먹던 원자가 아바마마 어딜 가시느냐고 해맑게 묻더니만 며칠 화산에 다녀올 테니 어마마마 말씀 잘 듣고 동생들 잘 보살피라는 욱의 당부에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자기도 같이 가면 안 되느냐고 되묻고 나섰던 것이다.
황후가 당황해서 어미가 어린 동생 때문에 궁에 남아 있어야 하니 원자도 어미와 같이 있자고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원자의 표정은 점점 부어가기만 했다. 그러곤 갑자기 아바마마, 소자도…… 소자도…… 하면서 전에 없던 어거지 생떼에 대성통곡에, 종국엔 다리를 끌어안고 떨어지질 않으니 욱도 혼이 나가서 원자를 안고 달래며 그럼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다.
황후는 오랜만에 머리 식히러 가는데 어린 원자를 데려가봐야 번거롭기만 할 것이니 그냥 가시라고 권했지만 이미 같이 가자는 말을 입 밖에 내버린 후였고, 황후도 속으론 반기는 눈치가 완연했다. 그 바람에 분위기에 휩쓸려서 2황자도 데려갈 것이니 황후는 젖먹이와 어린 공주를 잘 돌보라고 당부를 하고 그길로 원자와 2황자를 청량전으로 데리고 돌아왔던 것이다.
내가 귀신에 씌었나, 애초에 이번 원행에서 바란 것은 가을 정취 가득한 귀인과의 오붓한 나들이였건만 공비에 형님 내외에, 이젠 한창 미운 짓만 하는 다섯 살, 세 살짜리 녀석들까지 자청해서 달고 가다니…… 내가 봄부터 고대했던 원행은 절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원자를 몸소 들쳐 업고 청량전으로 돌아오는 내내 욱의 마음은 이젠 나도 모르겠다는 자포자기뿐이었다.
“자네는 아이들이 그렇게 좋은가?”
찬바람 들세라 품에 안은 2황자의 이불깃을 여며주는 허연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던 욱이 툭 던지듯 물었다. 허연이 아이들을 아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예쁠까 의아하기도 하고,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그렇게 미묘한 것이 욱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제 저녁만 해도, 얼떨결에 두 아들을 데리고 청량전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폐하 오셨느냐며 별로 반가운 기색도 없이 설렁설렁 마중을 나오던 허연이 아이들을 보고는 눈을 반짝이며 후다닥 다가왔다. 그러곤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상궁에게 안겨 온 2황자를 넘겨받아 저녁 내내 내려놓지를 않더니, 기어이 원행 떠나는 어차에까지 아이를 안고 오른 것이었다.
“귀엽지 않습니까? 또한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버리니 이렇게 작고 귀여울 때 많이 봐둬야 합니다.”
“애들은 자고 있을 때가 제일 귀엽긴 하지.”
“뭘 그렇게 투덜거리십니까? 어차피 아기씨들은 보모상궁들이 돌보는 것이고, 폐하는 가끔 불러 재롱이나 보시면서요?”
허연의 타박에 욱의 입술이 오리 주둥이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아이들 때문에 보모상궁이 열둘이나 따라붙었는데, 자네가 왜 그 녀석을 끌어안고 내려놓질 않는가? 어차 합승 건으로 그렇게 사람 애를 태우더니만, 후를 안고 어차에 오르다니…… 이는 명백한 협정 위반일세.”
깊은 원망이 묻어나는 욱의 투정에 허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폭우가 쏟아지고는 있으나, 사랑하는 분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차에 올라 한가롭게 단풍놀이를 떠나는 것만 해도 큰 기쁨인데, 거기에 더해 귀여운 아기씨까지 무릎위에서 잠들었으니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원행락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시를 읊조리듯 나직하고 조용한 허연의 변명에 욱의 표정이 더욱더 퉁퉁 부어갔다.
“내가 책에서 본 원행락은 이런 것이 아니었네.”
그렇게 투덜거리며 욱이 창 밖으로 쌩하니 고개를 돌렸다.
비록 보름간의 짧은 휴식을 위한 나들이였지만 어가의 행렬은 족히 5리는 이어질 정도로 길고 길었다. 어차를 뒤따르는 종친과 중신들의 화려한 마차가 30여 대, 그 뒤로 보름 원행에 쓰일 세간과 비품, 식량을 실은 짐수레가 백여 대. 궁녀 3백 명, 내관 5백 명, 호위는 기병, 보병 합쳐서 천오백이라 그 행차만 해도 백성들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이 우중에도 길가에 나와서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이 있네그려.”
세찬 빗발이 들이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창을 활짝 열고는 추수가 끝난 너른 들판을 내다보던 공비가 길옆 진흙탕에 꿇어 엎드린 백성들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백성들에게는 본시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습니다, 마마. 또한 백성들이 모두 폐하의 성덕을 흠모하는 마음이 깊다 보니 이렇게 나와서 원행을 배웅하는 것이겠지요.”
고 내관이 공비의 어깨 너머로 창 밖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고 내관은 시작부터 눈앞이 뵈지 않을 정도로 쏟아 붓는 폭우에 환이, 명이, 준이, 선이 등등…… 우화원의 어린 내관들을 허연의 빈 마차에 몰아넣고 자신은 끼어 탈 자리가 없어서 허둥거리다가 마침 곁을 지나던 공비의 권유로 그 마차에 올라 비를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긴…… 폐하께선 덕이 높으신 분이지.”
“아무렴요. 곁에서 비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서 탈이지, 태황태후마마 치세에 비하면 요즘은 요순 시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금도 그때에 비하면 반절이요, 가난한 백성들에게도 구휼미가 넉넉하게 돌아가니, 폐하께서 친정을 시작하신 이후엔 흉작에도 굶어 죽은 백성이 없었습니다.”
고 내관의 호들갑스러운 황제 찬양에 공비가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진 행렬의 뒷줄을 아련한 눈길로 돌아보았다.
“청명하고 맑은 날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오랜만에 궐 밖에 나오시는 날이 너무 궂어서 안타깝습니다.”
“나야 뭐…… 좋은 마차에 편하게 앉아 가는데 날씨가 무슨 상관인가? 밖에서 이 비를 고스란히 맞고 가는 사람들이 고생이지.”
“한 선생의 일이라면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마마. 한 선생은 궁문 앞에서 정안군께 붙들려 진즉에 그 마차에 올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승주가 저 뒤쪽 어디쯤에 따라오고 있을 텐데, 성치도 않은 몸으로 이 폭우를 맞으면 어찌 버틸까 싶어 걱정으로 입이 마르던 공비가 그 말을 듣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안군께서도 참으로 자상하고 너그러운 분이시구먼. 그분이 승주를 어찌 아시고…….”
“정안군께서는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석학이시니 한 선생의 재능을 진즉에 알아보셨던 모양입니다.”
고 내관이 바로 곁에 붙어 오는 시영의 마차를 가리켰다. 시영의 진청색 마차는 지체 높은 종친의 마차라서 처음부터 공비의 마차 바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고 자란 대현성에서는 승주의 사람됨과 재능을 알아주는 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수천 리 떨어진 황성에 그런 분이 계셨다니…… 승주가 아주 박복하지는 않네.”
공비가 머리가 다 젖는 것도 모르고 고개를 내밀어 시영의 마차를 돌아보았다. 그런 공비를 보다 못한 고 내관이 곁에 앉은 권 상궁에게 눈치를 주었다. 권 상궁의 만류로 창을 닫고 바로 앉은 공비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강 닦고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 내관을 쳐다보았다.
“한 선생은 복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마. 그처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것도 복이고, 소싯적에 마마 같은 분을 알고 지낸 것도 복이니…… 한 선생은 큰 복을 두 가지나 받은 사람입니다.”
“자네 말도 맞네. 그런 재주가 있어 오늘은 이 억수같은 비를 피하니 그것은 그 사람의 복이지. 하지만 사는 동안 때도 없이 불어 닥칠 비바람은 또 어느 처마 밑에서 피하겠는가?”
“마마…….”
공비가 또 뭔가 위험한 말을 꺼낼까 싶어서 곁에 앉은 권 상궁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 소맷자락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황제와 우화원 귀인이 이미 내막을 다 알고 있으니 고 내관과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랴 하며 공비가 권 상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마마, 한 선생은 수천 리 밖에서도 자신의 뜻과 재주를 알아주는 분을 만났는데 설마 주변에 그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복이란 하늘이 내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선생은 심성이 곧고 바른 사람이니 오늘같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엔 곁에 있는 누구라도 그 사람의 기둥이 되어주고, 담벼락이 되어주고, 비를 피할 처마가 되어줄 것입니다.”
고 내관의 위로에 공비가 울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이 놓이네.”
새벽부터 쏟아진 비는 그저 지나가는 소나기려니, 한두 시진 지나면 그치거나 최소한 빗발은 가늘어졌으면 하던 윤 내관의 바람도 부질없어서 빗발은 정오가 다 되어가도록 처음 기세 그대로 이어졌다.
기름종이로 해 입은 우비 위에 두툼한 도롱이까지 걸쳤지만 이처럼 세찬 폭우엔 모두가 무용지물이라 벌써 온몸이 다 젖어서 말 잔등에서 달달 떨고 있는 윤 내관 옆으로 어가의 수비를 맡고 있는 정 내관, 행렬 전체의 위병을 이끄는 진관우, 그리고 부장들과 함께 어차와 공비의 마차 중간쯤을 오가던 무호가 동시에 다가왔다.
“아무래도 일단 주월성에서 어가를 멈추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겠소.”
진관우가 빗길에 행군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윤 내관에게 의견을 전했다. 산길 초입에 들어선 이후엔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바퀴가 자꾸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그것을 끌어내느라 후미의 행렬이 흐트러지고 있었는데 이런 어수선함은 어가의 호위에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초겨울에 이게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습니다. 폐하의 생신 전후로 이렇게 큰비가 내린 적이 없었는데…….”
윤 내관이 한탄을 하며 정 내관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정해진 기착지까지만 가면 오늘은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렵겠지만 속수무책 비 그치기만 기다리기엔 너무 빠듯한 일정이라 선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정 내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일단 출발을 미루자는 의견을 냈었고, 지금은 당연히 그때보다 더 부정적인 입장이 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길이 험해도 별 상관없지만 궁녀와 내관들이 벌써 지쳤습니다. 이러다 행렬에 고뿔이라도 돌면 더 큰 낭패이니 위사령의 말씀대로 하시지요.”
행차의 호위를 맡고 있는 두 장군의 의견이 그러니 따를 수밖에 없겠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윤 내관이 이번엔 무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무호는 조금 앞서가고 있는 정안군의 마차를 뚫어지게 노려보느라 다른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출발 시간에 맞춰 도착한 궁문 앞에서 시영에게 불려간 승주가 그와 얘기를 몇 마디 주고받다가 무엇에 홀린 듯 마차에 오른 뒤로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통 알 길이 없었다. 창문에 덧문까지 꼭 닫아놓고 대체 둘이 마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고? 종친의 마차라 함부로 두들겨볼 수도 없고…… 답답해서 돌겠구먼.
“상장군?”
이 사람이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넋을 놓았나 싶어 정 내관이 무호의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무호가 정 내관을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이 언덕만 넘어서면 주월성이고 오늘은 거기서 쉬어갈 것입니다. 고생이 되더라도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그렇게 이르며 윤 내관도 시영의 마차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이고, 허리야…….”
시영이 멀미와 요통을 견디지 못하고 마차에 대자로 눕고 말았다. 시영이 멀리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까닭은 본래 경치 구경이나 하러 돌아다니는 일에 흥미가 없기도 했거니와 멀미가 심해서 마차를 오래 타는 것이 큰 고역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폭우에 길이 뻘밭으로 변한 까닭으로 마차의 요동이 유독 심했다.
“많이 불편하십니까, 나리? 소인이 좀 주물러드릴까요?”
그렇지 않아도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던 시영이 에구구…… 앓는 소리를 하며 옆으로 넘어가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승주가 걱정을 하며 그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네. 누워 가면 좀 낫겠지. 그보다 자네가 불편하겠구먼. 나 때문에 창문도 못 열고, 등이 흔들려 서책도 보질 못하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덕분에 소인은 팔자가 늘어졌습니다.”
승주가 고개를 저으며 마차 안쪽에 가득 쌓인 서책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시영의 마차는 화려하기만 한 다른 귀족이며 중신들의 마차와는 달리 자단으로 짜 넣은 아름다운 책장이 안쪽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장은 시영이 평생 수집한 희귀본, 작품성을 인정받은 고전, 최근에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화제작 등…… 2백 권도 넘는 값진 서책으로 가득했다.
사실 승주는 그간 시영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가 있으니 아주 모른 척할 수 없어서 인사나 올리려고 그 마차로 다가간 것이었을 뿐, 폭우가 아니라 당장 물에 쓸려 떠내려간다고 해도 시영과 합승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 때문에 시영이 마차에 올라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권했을 때에도 자신은 감히 마차에 오를 지체가 아니니 허락하신다면 마차 옆에서 뫼시겠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 뒤로 물러섰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영이 오며가며 심심할까 싶어서 책을 몇 권 가져왔는데 구경이나 하지 않겠느냐며 마차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이미 시영의 마차에 올라 앉아 홀린 듯 서고를 뒤적이고 있었다.
“이런 여행은 마님과 함께 가시는 것이 더 즐겁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 즐겁지.”
누워 있어도 속이 울렁거리고 허리가 지끈거려서 시영이 끙끙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면 지금이라도 마님을 청하여 함께하시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나와 합승하는 것이 뭐 그렇게 좋겠나? 길이 좋으면 책이나 꺼내 보고, 길이 험하면 이렇게 앓아눕는 것을…… 그 사람은 평상시에도 내 병수발을 신물 나도록 들고 있으니 이런 날엔 자기 취향대로 꾸민 마차에 올라 수금이나 타며 가는 것이 더 편할 것이네.”
“그렇다면 더 걱정치 않으시겠습니까?”
승주의 계속된 설득에 시영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그러곤 곽여화가 따로 마차를 마련해서 뚝 떨어져 오고 있는 진짜 이유를 뒤늦게 밝혔다.
“그 사람은 요즘 나한테 화가 나 있네. 내가 좀 서운하게 한 일이 있어서…….”
“아…….”
“본래 성품이 너그러워서 화를 잘 안 내는데, 한 번 삐지면 오래간다네.”
“뭔가 큰 잘못을 하셨나 봅니다.”
“잘못이라기엔 좀 애매한 일일세. 그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한 일도 아니고, 도의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으니…….”
시영의 대답에 승주가 피식 웃었다. 일국의 석학이며 지체가 하늘같은 종친이나, 변방에서 흙바람 맞아가며 성벽을 지키는 군졸이나 안사람 비위 거스르고 나서 늘어놓는 변명은 맞춘 듯 똑같았던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착지에 닿으면 마님을 뵙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십시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그것도 생각을 잘해두셔야 할 겁니다. 나리께서 잘못했다고 하시면 마님께서는 분명 뭘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대라고 다그치실 것이니…….”
“허허, 이 사람…… 이제 보니 책사가 따로 없구먼.”
시영이 울렁거리는 속을 어렵사리 누르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차분한 눈길로 승주를 쳐다보았다. 시영이 자신을 주머니에 넣어 갈 듯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자 승주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바짝 물러앉았다.
“허면 내가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하며 용서를 빌어야겠는가? 그것도 좀 일러주게.”
“그야 마님께서 서운히 여기시는 그 일을 사과하셔야지요. 나리께서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셔도 마님께서 큰일로 여기시면 큰일인 것입니다.”
승주의 충고에 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집안이 조용하려면 안주인의 비위를 맞춰가며 살아야겠지.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았고…….”
“정쟁이든 전쟁이든 어차피 사내들은 밖에서는 누군가와 다투는 것이 업입니다. 그런데 집안까지 전쟁터로 만들면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쉴 곳을 찾겠습니까?”
“자네 말이 다 맞네. 하지만 말일세……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이 그렇게 토라진 것은 지나치단 생각이 드는군.”
승주가 곤란한 표정으로 시영을 쳐다보았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부부싸움에 끼어서 어느 쪽 편을 들어봐야 양쪽에게서 원망이나 듣지, 좋은 일이라곤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영은 그런 사정 따위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아내는 이번 여행을 무척이나 가고 싶어했었네. 본시 산 좋고 물 좋은 곳 다니기를 좋아하는 호방한 사람이었는데 내게로 시집을 온 후론 집안 건사하고 병약한 신랑 돌보느라 변변한 나들이 한 번 하지 못했으니 갑갑증이 난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몸도 약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사랑채 밖으로 나가는 것도 귀찮아서……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고 거절을 했었네.”
“그러셨습니까? 허면 어찌 마음을 바꾸셨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벗이 어명으로 화산에 같이 가게 되었다고 하기에…….”
“나리…….”
승주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시영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화산에 아니 가겠다고 했던 것도 그대가 도성에 좀 더 머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네. 만승전에 데려가서 귀한 서책도 보여주고, 수룡천변 책방이나 화랑도 구경하고, 시강원 교수들과 인사도 시키고…… 내가 그대와 함께 하고 싶었던 일이 몇 가지 있었거든. 그런데 자네가 엊그제 내 집에 찾아와 작별 인사 한마디 던져놓고는 도망치듯 가버린 일로 마음이 무겁고 아프던 차, 무호 장군을 따라 어가를 뫼시게 되었단 소식을 들었지. 하여…… 작별을 할 때 하더라도 가는 곳까지 배웅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른 아침에 마차에 몸을 싣게 된 것이네.”
“…….”
시영도, 승주도 더는 말이 없어서 빗길을 헤치며 가는 마차 안엔 한동안 어색한 침묵만 감돌았다. 찌그덕, 찌그덕,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게 울리던 중, 승주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그렇네.”
“그 일을 마님께 감추지도 않으셨단 말입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감추는 것이 없네.”
시영의 대답에 승주가 이번엔 하염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말로만 사죄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겠습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마님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선물을 마련하십시오.”
그 정도로 큰일인가 생각하며 시영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그때, 마차 바퀴가 깊은 웅덩이에 박히는 바람에 시영이 그만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책장의 문이 열려서 그 위로 수십 권의 책이 쏟아져 내렸다.
시영의 마차가 웅덩이에 빠졌다는 소리에 욱이 어가를 세우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허연은 2황자 때문에 따라 내리지는 못하고 창으로 머리만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하마터면 마차가 아예 넘어갈 뻔했습니다. 정안군이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심하게 옆으로 기울어진 시영의 마차를 본 허연이 걱정을 했다. 하지만 갑자기 들려온 소란과 정안군의 마차가 엎어졌다는 고함 소리에 놀라서 어가를 박차고 나갔던 욱은 헹 하고 콧바람을 날렸다.
“조금 기운 것을 가지고 호들갑은…… 나는 마차가 길옆으로 구르기라도 한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영이 괜찮은가 걱정스러워서 욱이 목을 빼고 마차를 넘겨다보았다. 그때 시영이 승주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머리카락은 엉클어지고 옷차림도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채 휘청거리는 시영의 모습에 욱이 허연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보니 원행락은 형님 마차에 있었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기씨 들을까 무섭습니다.”
“승주는 공비보다는 형님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자네 보기엔 어떤가?”
“싱거운 말씀 작작 하시고 정안군을 모셔 오십시오. 정안군이 고뿔에라도 걸리면 원행이고 뭐고 다 끝장입니다.”
허연이 욱을 다그치며 등을 떠밀었다.
잠깐 사이에 빗물에 푹 젖은 시영이 욱의 권유로 어차에 올랐다. 그러곤 줄곧 자신을 부축하고 온 승주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뭘 그렇게 서 있는가? 어서 오르지 않고?”
시영의 재촉에 승주가 어이가 없어서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소인은 일행과 함께 가야지요…….”
“어허, 말도 안 되는 소리! 몸도 안 좋은데 이런 날씨에 비 맞으면 탈나네.”
“하지만 저는…….”
얼떨결에 시영의 마차에 올라타긴 했지만 황제와 얼굴 마주 보며 화산까지 가는 불상사만은 피하고 싶어서 승주가 두 손을 내저으며 자꾸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시영이 마차 안쪽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폐하께서 말씀을 좀 하십시오. 저 사람이 아직은 몸이 성치 않습니다.”
시영의 다급한 재촉에 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러곤 시영을 끌어다 허연 옆에 밀어 앉히고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심기 불편한 호랑이 같은 황제의 얼굴이 불쑥 나타나자 승주가 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탈 거면 타든가…….”
욱의 퉁명스러운 권유에 승주가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조아렸다.
“천만부당하옵니다, 폐하. 소인처럼 천한 자가 어찌 폐하의 어차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뒤를 따르며 뫼시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입니다.”
“비 맞아서 탈나면 형님 등쌀에 내가 죽는다.”
“소인도 대현성 출신이고, 반은 군졸이나 마찬가지인데 고작 이만한 비에 탈이 나겠습니까?”
말은 괜찮다고 하면서 극구 사양을 하지만 승주는 누가 봐도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안색도 창백하고 자세도 구부정했으며 벌써부터 몸에 오한이 드는지 어깨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불과 사흘 전에 무호에게 대들다가 무작스럽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터라 욱도 승주를 빗속에 버려두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잠시 승주의 등을 내려다보던 욱이 고개를 들어 뒤따라오는 행렬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마차 창 밖으로 몸을 반이나 내밀고는 승주를 쳐다보고 있는 공비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상선.”
“예, 폐하.”
어차 바로 옆에 붙어 오던 윤 내관이 얼른 말에서 내려 승주 옆에 섰다.
“한 선생을 승상에게 데려가게. 그간 대현성발 장계를 쓰던 문사라 하면 승상도 동행을 반길 것이네.”
“예, 폐하.”
그냥 걸어가는 게 몸은 고되더라도 마음은 편할 텐데 이번엔 승상의 마차라니…… 승상은 더 어려운 사람이라 승주가 애처로운 눈길로 욱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소인은 정말…….”
“기착지가 멀지 않으니 오늘은 그렇게 하라. 또한, 너는 뛰어난 문재로 정안군과도 사귀었는데 승상은 못 사귀겠느냐? 승상도 글깨나 하는 사람이니 말도 잘 통할 것이다.”
승주가 더는 물러설 틈을 주지 않고 욱이 어명으로 못을 딱 박았다. 그러곤 윤 내관에게 승주를 데려가라고 손짓을 하고는 마차 문을 닫았다.
“아니, 승주는 제 사람인데 어찌 승상에게 넘기십니까?”
승주를 승상의 마차로 보내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영이 투덜거렸다. 어차는 넓어서 장정 대여섯 명도 너끈히 탈 수 있을 정도인데 체격도 아담하고 성품도 얌전한 친구 하나 더 태워주지 않는 처사가 심히 야속했던 것이다. 승주에게 넋이 나가서 도무지 분별이라곤 없는 시영의 항의에 욱이 혀를 끌끌 찼다.
“승주가 형님의 사람이라니. 후원에 별당 지어놓고 첩실로라도 들이실 참입니까?”
욱의 막말에 시영이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승주와 저는 순수한 우정입니다. 뭐,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폐하처럼 음흉한 줄 아십니까?”
시영의 대꾸에 욱이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단둘이 마차에 올라 창문도 꼭꼭 닫아놓고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게 뭡니까?”
“폐하!”
“제가 본 것이라곤 형님이 머리카락이며 의복이 다 흐트러진 채 비틀거리면서 마차에서 내리신 것뿐입니다.”
“야, 이…….”
시영이 흥분해서 벌컥 언성을 높였다. 그 바람에 곤히 자던 2황자가 놀라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허연이 2황자를 다독여 다시 재우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욱이 곱지 않은 눈길로 시영을 노려보았다.
“정신 좀 차리십시오. 이 마차가 동전 한 닢이면 아무나 올라탈 수 있는 저자의 삯마차입니까? 형님이나 되니까 태워드리는 것이지, 그 녀석을 무슨 명분으로 어차에 태운단 말입니까?”
나름대로 타당한 욱의 주장에 시영이 더욱 삐져서 눈을 착 내리깔았다.
“뭐 이런 날만 그렇게 법도를 알뜰히 찾으십니까? 이처럼 궂은 날에 승주가 어가에 올라 비 잠깐 피해 가는 것을 문제 삼아 폐하께 떽떽거릴 신하가 어디 있다고…….”
“마음 푸십시오, 정안군. 그 사람도 폐하와 마주 앉아 가는 것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곁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허연이 부드러운 말로 시영을 달랬다. 허연의 중재에 시영이 푸시시 한숨을 내쉬었다.
“승상도 만만치 않게 서화를 좋아하고 젊은 선비들과 사귀는 것을 즐기는데…… 내일 승주를 선선히 돌려줄까 걱정스럽습니다.”
시영의 걱정에 욱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저만치 뒤따라오는 승상의 마차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긴, 형님조차 넋이 나갈 정도이니, 그 정도 매력이면 승상은 아주 뼈째 녹이고도 남겠구먼…….”
“폐하?”
무슨 말을 중얼거리나 싶어서 허연이 욱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욱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날이 습하고 싸늘하니 저녁엔 사골국이나 먹었으면 싶구먼.”
본래 어가의 행차란 그 규모가 웅장한 만큼 기동성은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다. 황제의 위엄도 있고 앞뒤로 따르는 행렬도 많으니, 어차가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하루에 50리 안팎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격 느긋한 선대의 규정 속도였고, 성미가 급해서 뭐든 후다닥 해치우길 좋아하는 욱은 하루에 백 리도 답답하다며 어지간한 외출은 기병 수백 기만 거느린 채 흙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갔다가 달려오곤 했었다. 하지만 황제의 조급증도 날씨 앞에선 무용이라 어차가 첫날 기착지인 주월성에 도착한 것은 해가 다 넘어갈 무렵이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폐하. 시장하실 것이니 바로 저녁 수라를 올리겠습니다.”
첫날 묵어갈 숙소로 준비된 주월성의 행궁 앞에 어차가 멈추자 윤 내관이 말에서 내려 도착을 알렸다. 종일 비를 맞으며 익숙하지도 않은 말 잔등에 올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진이 다 빠진 탓에 윤 내관의 목소리엔 기침과 앓는 소리가 반이나 섞여 있었다.
“궂은 날에 어가를 따르느라 다들 애썼다.”
어차에서 내린 욱이 물에 빠졌다 막 걸어 나온 행색의 수행원들을 돌아보고는 뚱한 말투로 그 수고를 위로했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아직 빗발이 거칠고 바람이 차니 속히 안으로 드십시오.”
윤 내관의 거듭된 권유에 욱이 먼저 어차에서 내려 시영과 허연이 내리는 것을 직접 거들었다. 특히 허연은 다리도 불편한데다 어린 황자를 품에 안은 상태라서 욱이 그 허리를 끌어안고는 번쩍 들어서 마당에 내려놓았다.
“이 녀석은 어찌 하루 종일 자는가? 혹,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종일 자다 깨다 하는 2황자가 걱정스러워서 욱이 비단 포대기를 들추고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멀미를 하나 봅니다. 어서 들어가 침상에 눕혀야지요.”
“자네도 종일 어린것 보살피느라 고생했네.”
욱이 한나절 사이에 눈에 띄게 축이 난 허연의 얼굴을 손등으로 살짝 쓸었다.
중신과 위병들, 어가를 마중 나온 주월성 대신들이 수백 명이나 모여 선 마당에서 욱이 허연을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애정 행각을 벌이자 두려움을 느낀 시영이 비틀비틀 둘 사이에 몸을 던졌다.
“그만하시고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폐하께서 버티고 계시니 다들 비를 맞으며 기다리질 않습니까?”조그만 목소리로 타박을 하면서 시영이 얼른 허연의 등을 떠밀어 안으로 들여보냈다.
주월성의 영주는 월국 최고의 장군이자 황제의 공신, 그리고 최측근이기도 한 전승 대장군 왕쾌였다. 그러니 보통 때라면 어가의 행차를 맞아 그가 직접 수하 부장들과 문관들을 대동하고 성 밖으로 10리는 나와서 마중을 했겠지만, 왕쾌는 대현성에 파병하기로 한 지원군 5만 명 중 먼저 소집된 절반을 이끌고 이미 길을 떠난 터라 현재 성 안에 남은 자들은 행정을 담당하는 문관들과 최소한의 병력뿐이었다.
“안타깝구먼. 왕쾌와 부장들이 있었으면 오늘도 거하게 술판을 벌였을 텐데…….”
원자의 손을 잡고 연회장이 마련된 행궁의 대청으로 향하던 욱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생신 핑계로 요즘 늘 과음이신데 오늘도 약주 타령이십니까?”
“생일을 맞아서 온천 별궁으로 놀러 가는 길인데, 이런 때 술을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는가?”
생일 전날부터는 눈치도 안 보고 폭음 중인 욱을 허연이 짜릿하게 노려보았다.
“연이어 사흘은 어림도 없습니다. 오늘은 밥만 드시고 곱게 주무십시오.”
“아니, 귀인…….”
“어허!”
허연이 욱의 투정을 한마디로 딱 잘랐다. 두어 걸음 떨어져서 걷던 시영이 그 모습을 보고는 귀인이 저런 것은 참 잘한다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긴 회랑을 돌아 대청 앞에 닿은 허연이 막 대청을 나서던 현무와 딱 마주쳤다. 현무는 왕쾌가 자리를 비운 동안 수비 책임자로 성에 남아 수비와 치안을 총괄하고 있었다. 주월성은 본래 치안에 큰 문제가 없는 곳이지만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는 것은 막중한 일이라서 현무는 새벽부터 성 안팎과 행궁 주변을 돌며 경계 상태를 거듭 확인하는 중이었다.
“현무야.”
“장군!”
허연을 발견한 현무가 한달음에 다가서다가 뭔가에 놀라서 흠칫 걸음을 멈췄다.
“네가 성에 남았느냐? 당연히 대장군을 따라 대현성으로 간 줄 알았다.”
“아, 예…….”
현무가 하려던 말도 까먹을 정도로 허둥거리자 허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허연의 물음에 현무가 부산스럽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것도 평소에 보던 태도가 아니라서 허연이 현무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 압박에 현무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허연이 끌어안고 있는 포대기를 가리켰다.
“장군께서 어찌 아이를 안고 계신가 하여…….”
자신이 아이를 안고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생각하며 허연이 피식 웃었다.
“2황자 아기씨다. 이번 원행엔 원자마마와 2황자도 같이 오셨다.”
“아…….”
허연의 설명에 현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허연 곁에 선 욱과 그 손을 잡고 있는 원자를 돌아보았다.
“이제야 내가 보이느냐?”
욱이 현무를 삐딱하게 노려보며 시비를 걸었다. 욱은 처음부터 현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현무가 허연만 보면 강아지처럼 달려와서 치대는 것도 싫었고, 허연이 그를 동생처럼 아끼며 온갖 어리광을 다 받아주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소인이 새벽부터 잠시 앉아 쉴 틈도 없이 성 안팎을 돌아다니다 보니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현무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수비대장이 그래서야 쓰나? 어떤 순간이든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있어야지.”
딱히 나쁜 짓도 안 하는데 신경 쓰이고 미운 것은 진관우와 막상막하라서 욱이 공연한 잔소리를 한마디 더 붙이고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욱이 현무만 보면 대놓고, 혹은 은근히 구박이라 허연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현무를 돌아보았다.
“어가를 맞이하느라 종일 고생이 많았구나. 피곤하면 간혹 머리가 멍하고 아무 생각도 안 날 때가 있다.”
허연의 위로에 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이 안 난 것이면 놀라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는 장군께서 아기씨를 안고 계시기에 그사이에 아이를 낳으셨나 싶어서 주저앉을 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주절주절 털어버린 현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서 앞서가던 욱이 입을 딱 벌리고는 현무를 돌아보았다. 시영도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서 현무를 빤히 쳐다보았고, 상황 파악이 다 끝난 허연은 화산의 단풍만큼이나 새빨갛게 타오른 얼굴로 현무를 노려보았다.
“너, 너…….”
“그래서…… 스스로 생각해도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현무가 뒷걸음질을 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이런 실없는…….”
어이가 없어서 씩씩거리던 허연이 현무의 정강이를 가차 없이 깠다. 그 사정없는 일격에 현무가 악!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아 정강이를 움켜잡았다.
“용서하십시오, 장군.”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정강이가 부러질 뻔한 현무가 황급히 용서를 빌었다.
간단히 저녁을 들고 행궁 별채에 들러 원자와 2황자가 잠자리에 든 것까지 보고 돌아온 허연이 침상에 걸터앉아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겉옷도 벗지 않은 채 침상에 털썩 누웠다.
“왜, 또?”
저녁 내내 허연의 심기가 불편한 바람에 그 곁에서 숨도 크게 못 쉬고 눈치만 보던 욱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침상으로 다가갔다.
“종일 덜컹거리는 마차에 실려 와서 그런지 좀 피곤합니다.”
“아까 어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쌩쌩하더구먼 뭘…….”
허연에게 갑자기 피곤이 몰아닥친 이유가 빤해서 욱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허연의 어깨를 잡아서 꽉꽉 주무르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픈가? 아니면 여긴가?”
욱이 빨래 쥐어짜듯 어깨며 허리를 움켜잡자 허연이 진저리를 치며 일어나 앉았다.
“왜 이러십니까? 쉬게 좀 두십시오!”
허연이 벌컥 화를 내자 욱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폐하!”
“뭐 그런 헛소리를 마음에 담아두고 이렇게 속을 끓이나? 자네 말대로 사람이 피곤하면 헛것도 보이고 헛소리도 하는 것이지.”
“헛소리도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애를 낳았느냐니…… 예전에 연주국을 지킬 때 성 밖에 몰려온 월국 병사들에게서 별의별 상소리를 다 들어보았지만, 그런 막말은 처음입니다.”
“제 말대로 넋이 나가서 지껄인 소리가 아닌가? 한 번 봐주게.”
“그게 더 마음 상합니다.”
허연이 욱을 밀치고는 뚝 떨어져 앉았다. 하지만 욱은 본래 그 정도 구박에 기죽거나 주춤거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얼른 쫓아가서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가 살펴보니 현무가 저녁 먹는 내내 대청 끄트머리에서 자네 눈치만 보고 서 있더구먼. 평소 동기간처럼 아끼던 자가 아닌가? 불러서 앞으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한마디 이르고 그만 용서하게.”
욱이 허연의 어깨를 다독이며 의젓하게 타일렀다. 하지만 욱을 쳐다보는 허연의 눈빛은 아까 현무를 노려볼 때의 그것만큼이나 싸늘했다.
“평소 현무를 못 잡아먹어서 그렇게 아르릉거리시더니, 오늘따라 어찌 이리 인정이 넘치십니까?”
“내가 뭘 그렇게 아르릉거렸다고…….”
“제가 폐하 속을 모를 줄 아십니까? 폐하는 제가 그런 소리 들은 것이 마냥 재미나고 좋으시지요?”
허연이 느닷없이 자신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자 욱이 시침 뚝 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나도 어이가 없었네.”
“저녁 내내 저를 힐끔거리며 키득거리시던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음…….”
허연의 거친 공세에 말문이 막힌 욱이 시선을 바닥으로 깔았다. 예전에 허연이 울화병으로 고생할 때에 눈치도 없이 그 증상이 여인이 회임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했다가 방석이 터지도록 얻어맞았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원행락이 물 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침전에서 쫓겨나 곁방에서 베개나 끌어안고 자겠구나 싶어서 욱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내가 언제 그대를 보고 웃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본시 사랑하면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는 것이네.”
“폐하의 춘추 아직 약관이신데 이렇게 능구렁이처럼 유들유들하신 것도 맘에 안 듭니다.”
“언제는 강아지처럼 발발거린다고 뭐라 하더니…….”
욱의 반발에 허연의 표정이 한층 더 시무룩해졌다. 아까 현무에게서 들은 말이 너무 충격적이고 남부끄러워서 허연은 욱과 이런 얘기를 길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리 좀 비키십시오. 피곤해서 누워야겠습니다.”
허연이 욱을 밀고 돌아누웠다. 처음 만났을 때엔 외모는 아름답고 언행엔 빈틈이 없을 뿐 아니라 사소한 손놀림 하나까지 지극히 우아해서 마치 구름을 타고 내려온 신선인 것 같았는데, 이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빈틈이 많아지고 귀여운 구석도 늘어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욱이 그 뒤통수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아까 현무의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말 알고 싶은가?”
욱이 손을 뻗어 허연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또 무슨 실없는 말씀을 하시려고요? 자꾸 이러시면 저 정말 화냅니다.”
“그대가…… 종종 후를 오늘처럼 돌봐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네.”
“…….”
“이제 그 녀석도 슬슬 글공부를 할 나이가 아닌가? 자네가 좋은 글도 일러주고, 더 크면 검술도 가르치고, 바둑도 같이 두고…….”
허연이 고개를 돌려서 욱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서 수상쩍은 눈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허연의 얼굴을 욱이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 녀석을 아주 거둬달란 말은 아닐세.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황후에겐 젖먹이가 딸렸으니 어찌 후궁 소생의 황자까지 소홀함 없이 보살피겠는가? 그것은 황후에게도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그렇다고 아직 어린 것을 상궁 내관에게만 맡겨 키울 수도 없는 일이고…….”
“폐하…….”
허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나 앉았다.
“향비를 정말 내치실 작정이십니까?”
“그 일은 일전에 답을 한 것으로 아네.”
“심사숙고하십시오, 폐하. 향비를 내치는 것은 2황자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입니다.”
허연의 설득에 욱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황궁의 번잡함을 잠시 잊으려고 원행에 나섰는데, 첫날부터 그 일로 허연과 긴 다툼을 벌이는 것은 욱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후궁의 일만은 그대와 논의하지 않겠네.”
“폐하…….”
“나는 그대에게 너절한 누명을 씌워서 해치려고 한 간특한 여인과 한 지붕을 이고 살 생각도 없고, 내 자식을 때론 보도로, 때론 방패로 저 편할 대로 이용하게 두지도 않을 것이네. 2황자는 향비의 소생이지만 그 이전에 나의 아들인데 내게 그만한 권리가 없는가?”
“아주 용서를 하라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그만하게. 향비 얘기로 밤을 새울 작정인가?”
“폐하…….”
“누구도 그대를 해칠 수 없네. 내게서 떼어놓을 수도 없고…… 이 얘기는 몇 번이라도 되풀이하지. 그런 짓을 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네.”
그 강경한 태도에 허연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욱을 쳐다보았다.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졌구나 싶어서 욱이 얼른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폐하.”
“2황자의 일은 당장 답을 할 필요는 없네. 시간은 충분하니 천천히 생각을 해보게.”
“예…….”
욱의 권유에 허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현무의 망측스러운 실언으로 마음 상했던 것도 잠시 잊고 욱의 목을 끌어안았다.
황제의 행차가 화산 어귀에 도착한 것은 황성을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본래 계획했던 일정은 하루에 120리를 움직여 사흘 안에 화산 행궁에 도착하는 것이었지만 첫날 쏟아진 폭우로 기착지인 주월성에서 하루를 더 머무는 바람에 그만큼 도착이 늦어진 것이었다.
이틀이나 쏟아진 늦가을 폭우로 걸음이 더뎌지기는 했지만 비로 인해 이로운 점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가 갠 후부터는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가 이어져서 원행길이 더할 수 없이 쾌적해진 덕에 걸어서 어가를 따르는 보병과 직급 낮은 내관 궁녀들도 답답한 황궁을 벗어나 멀리 나들이 가는 즐거움에 표정이 밝았다. 거기에 대기의 먼지는 깨끗하게 씻기고 나무는 물기를 잔뜩 머금어서 한창 절정에 이른 단풍은 봄날의 꽃보다 더 고운 빛을 뿜어냈다.
“화산이 명산이라고 하더니 절경은 절경입니다, 형님.”
대현성 일대의 높고 험악한 산맥과는 전혀 딴판인 산세를 올려다보며 영재가 감탄사를 토해냈다.
화산은 그렇게 높고 깊은 산은 아니었다. 제일 높은 봉우리도 한나절이면 오를 만했고, 능선은 둥글둥글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렇게 아기자기하면서도 산길을 따라갈수록 산세는 기묘했으며, 제대로 물 오른 절정의 단풍으로 온 산은 거센 불길에 휩싸인 듯 그 경치가 강렬했다.
“뭐 이런 산이 다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통 소나무 아니면 잣나무뿐인 대현성 인근하고는 한 세상 같지도 않습니다.”
춘수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영재와 춘수가 음식과 술 이외의 것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은 평생 본 적이 없는 무호가 둘을 빤히 쳐다보다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행궁이 있는 골짜기는 돌 틈에서 뜨거운 물이 콸콸 솟구친다면서요? 그 더운 김이 온 골짜기에 자욱해서 구름 속에 들어앉은 듯 정취가 묘하기 이를 데 없답니다.”
“도착하면 저희도 오랜만에 목욕이나 해야겠습니다. 옷도 좀 빨고, 술도 데워 마시고…….”
“이런 날씨에, 이런 경치에…… 거기다 돼지 뱃살찜에 소홍주 한 잔이면 신선이 부럽지 않겠습니다.”
처음 길을 나설 때만 해도 온천 행궁이라니, 그럼 고작 목욕을 하자고 3박 4일에 걸쳐서 4백 리 길을 가는 것이냐며 어이없어하던 둘이 화산 초입에 들어서는 누구보다 들떠서 조잘거리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무호가 말을 몰아 공비에게로 다가갔다.
공비는 어제 아침부터 마차에서 뛰쳐나와서 황제의 어마 중 가장 덩치 크고 기운도 좋은 진풍을 얻어 타고 행렬을 멋대로 헤집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후비의 예복과 장신구도 다 벗어버리고 이번 원행을 위해 고 내관이 새로 지어 보낸 짙은 감색 사냥복을 떨쳐입은 공비는 혈기 넘치는 어느 대가의 공자로 보일 뿐, 그 겉모습만 봐서는 황제의 후비임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제도 종일 말을 타셨는데,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무호가 곁으로 다가와 말을 붙이자 공비의 표정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무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서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평지나 다름없는 얕은 언덕길을 말 등에 올라 슬슬 가는데 피곤할 까닭이 있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어지간하면 마차로 가시지요.”
무호의 권유에 공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차피 경치 구경 하자고 먼 길 나선 것이 아닙니까? 말을 타고 가면 온 산이 한눈에 뵈는데, 마차에 올라 조그만 창으로 머리 내밀고 궁색하게 두리번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공비가 얼른 말을 몰아서 앞서가는 어가를 바짝 쫓았다.
“마마께서는 사냥하러 나온 무사가 아니라 황제를 모시고 나온 후비이십니다. 매사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도 헛된 말이 나도는 것이 후궁이거늘, 어찌 이리 경거망동이십니까?”
“경거망동이라니요?”
이제라도 자신을 마차에 밀어 넣으려는 무호의 압박에 공비의 표정이 점점 부어가기 시작했다.
“후비 된 몸으로 어찌 어마에 올라서 어가의 행렬을 이리 헤집고 다니십니까? 게다가 입고 계신 옷은 그게 또 무슨 꼴이고…….”
“폐하께서 괜찮다고 하시는데 오라버니께서 왜 딴지이십니까? 게다가 진풍도 폐하께서 타라고 내어주신 것이지 제가 멋대로 끌고 와서 타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도무지 고분고분한 구석이라곤 없이 한 마디를 이르면 두 마디로 따지고 덤비는 누이동생이 못마땅해서 무호의 숨소리도 슬슬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황제가 공비에게 어마를 내어준 것도 좋은 시절에 좋은 곳에 가면서도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연회석 분위기를 흐리는 공비를 달래려고 어쩔 수 없이 선심을 쓴 것일 뿐,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다.
“중신들이 다 보는 앞에서 허리 아프고 갑갑해서 마차는 더 못 타겠다고 투덜거리시니 폐하께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까? 허면 말 등에 올라 잠시 바람이나 쐬시고 눈치껏 다시 마차로 돌아가셔야지, 온 산의 멧돼지를 다 때려잡을 기세로 설치고 다니시면 폐하 눈에 마마가 어찌 뵈겠습니까?”
정작 사내인 우화원 귀인은 날마다 때깔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고 어가에 올라서 원자와 2황자를 번갈아 끌어안고 곱게 가는데, 누이는 제가 후궁인지 위병인지 분간도 못하고 말 잔등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을 뿐 아니라 잠깐 한눈만 팔면 어느새 승주가 타고 있는 승상의 마차에 은근슬쩍 붙어 가는지라 무호도 치미는 울화를 참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공비는 오라비의 심기가 불편하건 말건 답답한 마차에 올라탈 마음이 전혀 없어서 그대로 박차를 가해 어가를 에워싼 기병들 쪽으로 말머리를 붙였다.
“어차피 이 등성이만 넘어가면 행궁이 있는 용천 대계곡이라니 저는 그냥 이대로 가렵니다.”
“거 참!”
무호가 더는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벌컥 언성을 높였다. 그때, 어차 안에서 남매간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욱이 창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상장군.”
“예, 폐하.”
욱의 울적한 부름에 무호가 얼른 어가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 반나절만 더 가면 목적지인 화산 행궁이지만 욱의 마음은 공허하고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연과 어차 합승에는 성공했으나 그가 첫날엔 2황자를, 둘째 날엔 원자를, 그리고 어제 오늘은 두 아들을 모두 데리고 어차에 오르는 바람에 원행락은 무슨 얼어 죽을……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려서 혼이 다 나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불러 계시옵니까?”
“내가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고, 마차 안까지 소리가 들려서 그러는데…….”
욱이 창턱을 움켜쥐고는 무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제야 무호도 어가 옆에서 너무 언성을 높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폐하.”
“심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대는 대체 어쩌자고 자꾸 공비에게 시비를 걸고 성미를 돋우는가?”
“예?”
“여태 당한 발길질과 손찌검이 부족한가? 자네도 알다시피 공비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나도 도울 방법이 없네.”
“…….”
“말 등에 올라 제 맘대로 왔다 갔다 하면서 표정도 전에 없이 밝고 좋구먼, 왜 마차에 타라 마라 훈계를 하여 심기를 건드리는가? 과인은 공비가 말을 타고 가건, 말을 메고 가건 아무 상관 없으니 그냥 두게.”
이게 공비를 두둔하는 것인지, 아예 내놓은 것인지 분간이 안 가서 무호가 찜찜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무호를 마주 보는 욱의 눈길은 단호했다.
“한 번만 더 공비에게 얻어 터져서 몸져눕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상장군의 병부를 공비에게 들려 대현성에 보낼 것이니 그리 알게.”
원자에게 글자가 새겨진 옥돌을 쥐여주며 글자 맞추기 놀이를 하던 허연이 욱과 무호의 대화를 곁에서 듣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려 어가를 호위하는 기병들 틈에 표도 안 나게 끼어 가고 있는 공비를 쳐다보았다.
입고 있는 사냥복도 궁중 예복보다 훨씬 더 잘 어울렸고, 아무 장식 없이 틀어 올려 끈으로만 묶은 머리도 후궁의 큰 머리 장식보다 훨씬 그녀다웠다. 하지만 공비에게 무엇보다도 잘 어울리는 것은 거칠지만 제 나름대로 생긴 바깥 풍경이었다. 정교하게 꾸민 정원과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황궁의 전각 사이를 아무 생기도 없이 오가던 공비의 모습과, 능숙하게 말을 부리며 험한 산길을 지나는 지금의 그것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연히 달랐다.
“공비께서는 어제보다 오늘 더욱 생기가 도시는 것 같습니다.”
“뭐든 저 좋을 대로 하게 버려두는데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 촌놈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으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공비마마에게 말 타는 것을 허락하시고 손수 어마를 내리신 것은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허연의 칭찬에 욱이 황제의 근위병만큼이나 위풍당당한 공비의 뒤태를 힐끔 내다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병들 틈에 끼어 있어도 덩치며 기세가 전혀 꿀리질 않는구먼.”
욱의 불평에 허연이 피식 웃었다.
“공비마마의 승마 실력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풍이 어마 중에서도 아직은 어리고 사나워서 마부들도 다루는 데 애를 먹는다고 들었는데, 마치 몇 년을 타고 다닌 말처럼 수월하게 부리고 계시질 않습니까?”
“저놈도 공비가 얼마나 무서우면 저렇게 고분고분하겠나? 내가 가만 보니 저 성질 못된 망아지가 다가오는 공비를 보고는 겁을 집어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구먼.”
“설마요?”
“설마요라니? 내가 없는 말을 지어서 공비를 헐뜯겠는가?”
욱의 반발에 허연이 다시 공비와 진풍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간 재갈이며 안장이 익숙지 않고 거추장스러워서 사람만 타면 거친 투레질과 쾅쾅거리는 발 구름으로 위협을 하던 진풍이 오늘따라 다소곳하게 눈을 내리깔고 얌전하게 걷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짐승도 무섭고 만만치 않은 자는 알아보는 게지. 헌데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공비를 후궁으로 맞았으니, 내 안목은 말만도 못하네.”
“폐하…….”
욱의 넋두리를 듣다 못한 허연이 원자와 2황자를 위해 마차에 두었던 과자 상자에서 약과를 하나 꺼내서 그 입에 물렸다. 그리고 약과를 하나 더 집어서 아까부터 글자가 새겨진 옥돌 상자를 뒤적이며 놀고 있는 원자의 입에도 넣어주었다.
“우화원 마마, 이건 무슨 글자입니까?”
약과를 오물오물 씹던 원자가 상자에서 붉은색과 흰색이 물결처럼 뒤섞인 옥돌을 꺼내 허연에게 물었다.
“이것은…….”
허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곤 원자가 쥐여준 옥돌의 글자를 손끝으로 가만히 매만졌다.
“어질 인입니다.”
“어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남의 사정을 잘 헤아리고 보살펴주는 것을 어질다고 합니다.”
허연의 대답에 원자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보니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우선 아…… 하고 보는 것이 원자의 버릇이라 그 귀여움에 허연이 원자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남을 보살펴주는 것이 어진 것이면…… 음…… 서 상궁이 제일 어진 것입니까?”
“서 상궁은 원자마마의 보모로 늘 마마를 보살피니 어진 것이 맞습니다.”
“아…….”
원자가 마치 큰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연의 손에서 다시 옥돌을 받아 갔다. 그러곤 조그만 손끝으로 글자를 만지고 손바닥에 꾹꾹 찍어보며 놓지를 않았다.
“어질 인자가 마음에 드십니까?”
“예, 서 상궁 글자라서 좋습니다.”
원자의 반듯한 대답에 허연이 다시 약과를 원자의 입에 넣어주었다.
허연과 제법 의젓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원자가 대견하기도 하고, 집을 떠나 이 좋은 곳까지 왔는데 바깥 경치도 제대로 못 보고 옥돌이나 만지작거리며 노는 것이 안타깝기도 해서 욱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게다가 어질 인자가 보모상궁을 뜻하는 글자라서 좋다니…… 어미 아비가 보모보다 못하구나 싶어서 뚱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저런…….”
좀 전까지 어가를 조금 앞서가던 공비가 보이질 않자 어딜 갔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던 욱이 혀를 끌끌 찼다. 그사이 공비가 또 승상의 마차 쪽으로 내려가 그 옆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맘 같아서는 오늘 당장 첩지를 무르고 입은 옷 그대로 국경으로 쫓아 보내면 딱 좋겠구먼…….”
욱의 혼잣말에 허연이 깜짝 놀라서 원자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곤 엄한 눈길로 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욱도 지지 않고 뭐 어떠냐는 표정으로 허연을 마주 보았다.
“뭐? 그대 역시 공비가 출궁해서 한세상 제 성질대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가?”
“저 역시 가련한 작은 새가 새장에서 놓여나 자유로워지길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비마마의 명예를 해쳐서는 안 됩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이 힝…… 하고 콧바람을 날렸다.
“가련한 작은 새라니, 비유를 하려면 좀 비슷한 것으로 갖다 대게. 공비를 굳이 새에 비유한다면 천산의 독수리 정도는 쳐줘야지.”
“거 참…….”
사소한 일로 욱과 길게 말씨름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천산의 독수리라니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허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와 명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공비는 기꺼이 자유를 택할 것이네. 그 자유에 정인까지 포함이라면 길게 망설이지도 않겠지.”
“공비께서는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비를 쫒아내듯 출궁시켜서 그 품위와 명예를 깎는 것은 의도가 어떻든 하수 중의 하수입니다. 폐하께서는 대제국의 황제이시자 제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분이니 일처리가 그보다는 낫기를 바랍니다.”
가볍게 들어 넘길 수 없는 허연의 압박에 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출궁에 재가에, 품위와 명예까지 지키라니…… 차라리 전쟁이 쉽겠네.”
욱의 불평을 못 들은 척 허연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모르는 사이 꿈결처럼 아름다워진 바깥 경치에 놀라서 허…… 하는 탄성을 토해냈다. 마차는 어느새 용천 대계곡으로 접어들어 행궁으로 향하는 마지막 고개를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