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1장 사냥 (13/16)

제11장

사냥

다음 날 황제의 사냥 행차가 행궁을 나선 것은 동도 트기 전이었다. 사냥터인 화산의 숲까지 이동하는 데 반 시진이고, 전날 세워놓은 사냥 막사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좀 쉬다가 늦지 않게 사냥에 나서려면 이른 시각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깜깜한 새벽에 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달도 저물어서 칠흑처럼 어두운 깊은 새벽길을 더듬어 가는 사냥 행렬은 마치 야습을 나가는 병사들의 행군처럼 빠르고 조용하게 목적지로 향했다. 

“상선, 폐하께서는 지난밤에 편안히 수침 드셨습니까?”

고 내관이 말 머리를 윤 내관 곁으로 슬금슬금 붙이며 조심스럽게 휘명전 분위기를 살폈다. 고 내관은 어제 허연과 함께 사냥터에 나갔다가 파김치가 되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나서야 지난밤에 욱과 허연이 크게 다툰 경위를 전해 듣고는 크게 당황해서 계속 어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편안히 수침을 드셨겠는가? 밤새 중문 밖으로 폭풍 같은 한숨 소리만 들렸네.”

덩달아 중문 밖에서 전전긍긍하며 잠을 설친 윤 내관이 공연히 고 내관에게 짜증을 냈다.

“에그, 저런…….”

“자네 마마께서는 어떠신가?”

“저희 마마께서도 밤새 한잠도 못 주무셔서 얼굴이 까칠하십니다. 잠을 못 주무셨으니 지난밤에 드신 약주도 덜 깨셔서 이 새벽에 어서 가시자고 재촉해서 뫼시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고 내관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껏 엄살을 부렸다. 연유야 어찌 되었든 허연이 노심초사한다고 하면 욱의 노여움도 누그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귀인께서는 폐하께 사죄하시고 성심을 풀어드릴 의사가 전혀 없으시던가?”

윤 내관의 사죄 운운에 고 내관이 순간 울컥해서 입을 다물었다. 고 내관도 허연이 무호의 부장들과 노천탕에 들어갔었던 것은 다소 경솔하지 않았나 싶던 참이었다. 하지만 온천에 놀러 와서 친구들과 놀다가 내친김에 목욕 잠깐 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나 하는 허연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갔고, 고 내관은 언제나처럼 전적으로 허연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에 화를 내고 침전을 뛰쳐나간 것은 허연이 아니라 황제이니, 윤 내관이 잘 고해서 아침상에서라도 두 사람이 마주 앉도록 하는 것이 우선 급한 일이었다.

“저희 마마께서도 지난밤의 일을 후회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마치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듯 마마를 몰아치셨다니, 그런 상황에서 순순히 잘못했다고 하시면 마마의 입장이 더욱 이상해지지 않았겠습니까?”

고 내관의 변명에 윤 내관이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마마께서도 한잠 못 주무셨고, 이른 새벽에 올린 꿀물 한 잔 들이켜고 빈속으로 나오셨습니다. 저리 속이 상해 계신데 혼자서 아침진지인들 챙겨 드시겠습니까? 상선께서 폐하께 말씀을 올려 아침 수라라도 같이 드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폐하께서도 내심 마마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고 내관의 청에 윤 내관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허연이 심히 다투었다고 해봐야 결국은 사랑싸움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식어서 난 다툼이 아니라 황제가 왜 나만 봐주지 않느냐고 투정부리고 치대느라 벌어진 다툼이니 이번에도 결국 황제가 굽히고 들어갈 것이 빤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 공연히 냉전이 길어져봐야 자신을 비롯한 지밀 내관들만 진 빠지는 일이니 두 사람의 조속한 화해는 윤 내관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행궁을 출발한 황제의 사냥 행렬이 사냥터에 도착한 것은 동녘이 벌겋게 밝아올 즈음이었다. 숲 어귀엔 어제 세운 사냥용 천막 수십 채가 늘어서 있었고, 일행의 아침을 준비하는 모닥불이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사 앞에 도착한 욱이 말에서 내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피곤이 잔뜩 묻은 얼굴로 막 말에서 내려서는 허연을 힐끔 보고는 천막 안으로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폐하…….”

윤 내관이 얼른 욱의 뒤에 따라붙었다.

“시장하시겠습니다. 바로 아침 수라를 준비하겠습니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배가 고픈 것도 잘 모르겠구나. 간단하게 탕이나 한 그릇 들여라.”

욱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난밤 허연과 싸우고 용화루를 뛰쳐나온 후, 멀리도 못 가고 홍운궁 내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욱은 사냥이고 뭐고 다 귀찮기만 해서 처소에서 한 발짝 나설 기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냥 행사도 일단 정해지면 공식적인 일정이라서 마음대로 취소하거나 빠질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번 사냥은 허연도 내심 많이 기대하던 일정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불참이나 취소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싸운 것은 싸운 것이고, 이번 원행은 그 자체가 허연을 위한 것이었으니 실컷 말도 타고 바람도 쐬게 해주고 싶다는 욱의 바람엔 변함이 없었다.

“폐하, 소인이 고 내관에게서 들으니 귀인께서도 밤새 잠을 못 주무시고 빈속으로 나오셨다고 합니다. 귀인을 청하여 아침 수라를 함께 드시지요.”

윤 내관의 권유에 욱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청한다고 그 사람이 선선히 오겠느냐?”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귀인께서도 내심 폐하께서 청해주시길 기다리고…….”

천막 입구에 쳐놓은 늑대 가죽이 들썩이는 기척에 윤 내관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안에 든다는 전언도 없이 누가 황제의 천막에 함부로 들어오나 싶었던 것이다.

“귀인…….”

입구의 장막을 들추고 안으로 성큼 들어선 자는 허연이었다. 욱이 허연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바로 앉았다.

허연은 울적하고 지쳐 보였다. 지난밤 한잠 못 자고 뒤척인 탓에 눈자위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과음했던 술이 깨지 않아서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욱과 크게 다툰 것도 한심했고 욱이 그렇게 나가버린 것도 마음이 쓰여서, 지난밤 내내 허연의 심사는 전에 없이 심란했다.

“잠시 뵈러 왔습니다.”

허연이 졸음에 겨운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툭 던지듯 말했다.

“아, 뭐…….”

욱이 얼떨결에 일어서다가 얼빠진 표정을 얼른 고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순간, 어젯밤 열서너 명이나 되는 사내들 틈에 위태로운 모습으로 끼어 있던 허연의 모습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화산에 와서 나하고도 한 번 안 해본 노천욕을 무호의 부장들과 먼저 한 것도 섭섭한데,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활짝 웃고…….

“앉게.”

욱이 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허연이 그런 욱을 더욱 피곤에 찌든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사이 윤 내관이 재빠르게 욱의 맞은편에 의자를 대령하고는 두툼한 여우 가죽을 탁탁 털어서 깔았다.

“과인에게 뭐 할 말이 있는가?”

“…….”

한동안 잠잠히 앉아만 있던 허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입을 가리고 긴 하품을 했다.

“폐하께서는 제게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반성의 기미라곤 없는 허연의 반문에 욱이 투레질하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이는 열두 살이나 더 먹고서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그 한마디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단 말인가? 내가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분명히 본인에게 과실이 있는 사안이건만…….

“두 분 말씀하시는데 송구하오나 아침 수라를 곧 들일 것인데…….”

귀찮게 부르러 가지 않아도 허연이 시간 딱 맞춰서 찾아들기에 그럼 그렇지, 뭐 별로 걱정할 일도 아니었는데 공연히 겁먹었었다 싶었던 윤 내관이 천막 안에 몰아친 갑작스러운 냉기에 당황해서 더듬더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윤 내관이 예상했던 것은 밤새 떨어져 있다가 만난 둘이 몇 달은 못 본 듯 애틋한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닐세, 내가 심했네…… 이렇게 간질간질하게 화해를 하고, 그러면서 상선은 좀 나가 있게 눈치도 주면서 화해의 시간을 갖는…… 빤하다면 빤한 그런 전개였었다. 헌데 이게 어인 찬바람인가? 초반엔 분명 화해를 모색하는 잔잔한 기류가 흘렀건만…….

“아침은 들었는가?”

“아직입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이 잠깐 갈등에 빠졌다. 다툼은 다툼이고 아침은 같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허면 아침은 여기서 들게.”

“실은 밥 생각이 통 없습니다.”

허연의 거절에 욱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허연의 안색을 살폈다.

“허면 잠시 눈을 붙이겠는가? 뒤에 침상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네.”

욱의 권유에 허연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허연이 사냥터에 도착하자마자 욱의 막사를 찾은 것은 지난밤 자신의 경솔했던 행동을 사죄하고 이만 신경전을 마무리 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호의 부장들과 같이 목욕 좀 한 것이 그렇게 비난을 살 만한 일이 아니란 허연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욱과의 다툼은 허연에게는 과거에 겪었던 어떤 전투보다 힘들고 심란한 일이라서 뭐든 원하는 대로 해주고 그 상한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욱의 태도도 다소 고압적이고, 함께 있기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린 진심은 다 잊고 마치 다른 사내와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듯 자신을 몰았던 것이 새삼 괘씸해서 사과의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이겨보려다가도, 아침 같이 먹자고 슬그머니 손을 내미는 것이나 자신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하는 것은 그것대로 고맙고 또 귀여워서 슬며시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준비 잘하고 오셨나 궁금해서 잠시 든 것입니다. 아침 든든히 드시고 잠시 쉬다가 나오십시오. 저도 시각에 맞춰 나가겠습니다.”

이른 아침에 이 정도 마음이 풀렸으니 잘하면 저녁엔 사과도 받을 수 있겠다 생각하며 허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연의 여유 넘치는 태도에 욱이 당황해서 따라 일어났다.

“잠도 못 자고 아침도 굶은 채 무슨 사냥을 한단 말인가? 무리하지 말고 피곤하면 그냥 쉬게.”

“전란 중엔 사나흘간 눈 한 번 못 붙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일이 일상다반사였습니다. 고작 한 끼 굶고 하룻밤 설친 것이 무슨 대수라고 막사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그땐 젊었을 때고…….”

툭하면 자신의 나이를 걸고 넘어가는 욱의 언사에 허연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허면 좀 있다 뵙겠습니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허연이 쌩하니 막사를 나가버렸다.

사냥터의 아침은 분주했다. 사냥에 참여하는 장수들은 창과 단검을 벼리며 사냥에 필요한 무기를 점검했고, 몇몇은 야영지 옆에 빈터에 준비된 과녁에 화살을 쏘아보며 몸을 풀었다. 또한 화산에 도착한 이후 바쁜 일 없이 잘 먹고 푹 쉬던 말들도 너른 빈터에 나와서 투레질을 하고 앞발을 구르며 곧 시작될 사냥에 기대를 더했다.

“너는 어쩔 테냐? 우리와 함께 숲에 가겠느냐? 아니면 막사에 남겠느냐?”

춘수가 부장들의 말 서너 마리를 한꺼번에 끌고 와서 안장을 얹고 발굽을 살펴보며 준비를 돕고 있는 승주에게 다가가 의향을 물었다.

“저는…….”

승주가 잠시 머뭇거렸다. 지난 며칠 끼니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다 깨다 하며 밤잠도 설친 터라 승주의 몸은 말에 올라 숲을 돌아다닐 상태가 아니었다. 당장 아침에만 해도 무호의 아침을 나르다가 막사 턱에 발이 걸려서 들었던 소반을 엎어버렸고, 늘 돌보던 말을 데리고 오면서도 잠시 넋을 놓았다가 말 머리에 떠밀려서 무릎을 된통 찍고 말았으니, 이렇게 희미한 정신으로 말에 올랐다간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달리 맡길 일이 없으시면 형님들과 함께 사냥에 끼고 싶습니다.”

“괜찮겠느냐?”

요 며칠 승주의 태도가 영 어수선한 것이 신경 쓰여서 춘수가 다짐을 받듯 물었다.

“괜찮습니다. 아침 바람 맞으며 달리다 보면 잠도 깨고 정신도 맑아지겠지요.”

자꾸만 콧등으로 등을 툭툭 들이받으며 장난을 거는 말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승주가 대답했다.

승주는 화산에 온 이후, 숙소에 박혀서 책을 뒤적이거나 숲길을 거닐며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었다. 시영이나 승상의 부름도 성가실 정도로 깊은 우울감이 몰려와서 도무지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황성으로 향하는 무호 일행에 끼어 대현성을 떠나 올 때엔 혹 공비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고, 실제로 만날 수는 없어도 어찌 지내는지 근황 정도는 전해 들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승주는 보름간의 강행군도 힘든 줄 모르고 견뎌냈었다. 그렇게 신기루를 좇는 심정으로 찾아온 황성에서 우여곡절 끝에 공비를 만나 안부를 확인하고 황제의 배려로 저자의 주막에 마주 앉아 술잔도 기울일 수 있었으나, 이제 이별과 귀향만을 남겨놓고 돌이켜 생각하면 모두가 부질없고 허망할 뿐이었다.

승주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코앞에 닥친 이별뿐이 아니었다. 공비가 천한 마부의 자식인 자신은 잊고 그토록 늠름하고 기세가 대단한 황제와 여느 금슬 좋은 부부처럼 잘 지내기를 바라는 승주의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한편엔 공비에게 자신을 그리워하는 정이 조금은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막상 좀처럼 마음을 바꿀 줄 모르는 그녀의 우직한 성품과 그로 인해 처한 곤란을 확인하고 나니 자신의 바람이 얼마나 철없고 이기적인 것이었나 싶어서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조차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제 며칠 후면 공비를 홀로 남겨두고 대현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닥친 현실이라 승주는 화산에서의 하루하루를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었다.

애초에 우려했던 대로 황궁은 공비에게 맞는 세상이 아니었다.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공비가 지금처럼 황궁에서 지내는 것은 천 길 낭떠러지를 눈을 가린 채 서성이는 형국이었다. 다행히 황제의 성품이 공명하고 우화원 귀인에 대한 사랑이 깊어서, 발을 헛디디고도 천길 아래로 떨어지는 참사는 면했지만 비슷한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공비가 여염집 여인들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곧아서 어떤 상황에서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그런 것은 황궁 같은 곳에서 살아남는 데 어떤 도움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오히려 기가 약하고 눈치가 빨라서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세력의 판도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붙는 얕은 재주만 못하니, 그런 공비를 궁에 두고 떠나는 것은 그녀를 사지에 버리고 가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승주가 황제의 크고 아름다운 황색 천막 곁에 자리 잡은 연녹색 천막을 안타까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3년 전, 공비가 후궁으로 낙점을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궁에 들기도 전에 비라는 높은 첩지부터 받고 황궁으로 떠나갈 때엔 그 이별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서러워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 하지만 지금 닥친 두려움에 비하면 그때의 슬픔은 한낱 유희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뭘 보고 섰느냐?”

어느새 곁에 다가온 무호가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공비의 천막을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던 것을 다 아는데 서툴게 잡아떼는 것이 못마땅해서 무호가 뚱한 표정으로 승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승주의 옷자락과 무릎에 흙물이 든 것을 발견하고는 그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옷 꼴이 그게 뭐냐? 또 어디에서 넘어지기라도 했느냐?”

“남풍이 뒤에서 미는 바람에…….”

“대체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느냐?”

무호가 버럭 호통을 쳤다. 불과 반 시진 전에 승주가 막사 문턱에 걸려 소반을 든 채 요란하게 엎어지는 것을 보았던 터라 그사이 또 어디서 헛발을 디뎠다는 말에 짜증이 확 솟구쳤던 것이다.

“송구합니다.”

“되었으니 넌 막사에 남아라.”

“장군…….”

“멀쩡한 바닥에서도 퍽퍽 엎어지는데 어찌 말 잔등에 오른단 말이냐? 남아서 아침 제대로 먹고 잠이나 자거라.”

막사에 남아서 잠이나 자라는 무호의 명령에 승주가 고개를 발딱 치켜들었다. 이제 승주에게는 공비의 얼굴을 볼 날도 고작 오늘 내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사냥터를 돌며 공비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종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인데 막사에서 잠이나 자라는 것은 아무리 무호의 명이라도 곱게 따를 수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따라 뫼시게 해주십시오.”

“말에서 떨어져서 목이라도 부러지면 그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해서 돌 것 같은데, 내가 그 꼴까지 봐야 하느냐?”

“부러져도 제 목입니다.”

“어허!”

무호가 있는 대로 역정을 내며 승주를 한 대 칠 듯 으르렁거렸다. 그때, 천막에서 아침을 먹고 막 밖으로 나오던 욱이 그 모습을 보고는 두 사람 쪽으로 슬슬 다가왔다.

“폐하!”

욱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무호와 부장들이 얼른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리고 승주는 더욱 몸을 낮춰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일어나게.”

욱이 무호를 일으켜 세우고는 잔뜩 부은 그 안색을 살폈다. 천성이 우직하고 직설적인 무호는 황제 앞에서도 불편한 심기를 얼른 감추지 못해서 아직까지 얼굴을 붉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은가?”

“소장이야 뭐…….”

“어찌 아침 댓바람부터 한 선생을 쥐 잡듯 잡는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호의 대답에 욱의 눈길도 실쭉 날카로워졌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그리 볶아쳤는가? 아무리 아랫사람이라도 그러는 것이 아닐세.”

무호를 따끔히 타이른 욱이 승주에게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곤 얼결에 비실비실 다가온 승주를 위아래로 한 번 슥 훑었다. 안색은 창백하고 총기가 가득하던 눈동자조차 탁한 것이, 승주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영 시원찮았다.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구나. 어디 아픈 곳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폐하.”

아니기는…… 보아하니 확 곯았구먼. 이제 곧 공비는 궁으로, 저는 고향으로 각각 돌아가야 하니 그 생각을 하면 입맛도 없고 잠도 안 오겠지. 허연이 떠날 날을 잡아놓고서 시간 흐르는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던 그때의 내 심정과 비슷하겠다 싶어서 욱이 짠한 눈길로 승주를 내려다보았다.

“피곤하면 아무것도 못하겠다 하고 들어가 쉬든가, 주변에 내관도 많고 하인도 많은데 어찌 네가 이런 허드렛일까지 맡아서 하느냐?”

전에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어조에 승주가 더욱 당황해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소인의 아비가 대현성 군영의 마부였던지라, 상장군과 부장들의 말은 예전부터 소인이 돌보고 있습니다.”

“조정에 올리는 장계 쓰고, 장족이 말썽을 일으키면 달려가서 중재하고, 상장군 수발들고, 거기에 십여 마리 말까지 돌보고 있었느냐? 이제 보니 나랏일 절반을 네가 하고 있었구나.”

“폐하, 그 어인…….”

“몸이 안 좋으면 굳이 따라나설 필요는 없다. 어찌하겠느냐?”

욱의 물음에 승주가 저도 모르게 공비의 천막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때 천막의 옥색 장막이 흔들리더니 공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 맞춘 푸른색 사냥복에 각반 차고, 전통 메고, 손에 활까지 움켜쥔 공비의 모습은 후궁은커녕 여인이란 단서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청년, 혹은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그런 공비를 넋을 잃은 채 쳐다보는 승주의 모습이 같잖아서 욱이 콧바람을 뿜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위사령의 천막에서 막 나오는 허연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온 정신과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은 싹 빗어 올려서 붉은 비단 끈으로 묶고, 단풍나무 숲에 서 있으면 잘 구별도 안 될 것 같은 짙은 황색 상의에 역시 화산의 붉은 단풍 같은 긴 조끼를 걸치고 가죽 띠로 허리를 단단히 조인 허연의 모습은 욱의 눈에는 더하고 뺄 것도 없는 한 폭의 미인도였다.

밝은 아침 햇살 아래 서 있으니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고, 길고 아름다운 목덜미는 눈이 부실 지경이고…… 저토록 아름다우니 어느 놈이 흑심을 품지 않을꼬? 그러니 같이 술 마시자, 목욕하자고 꼬여서 슬쩍슬쩍 만지고 끌어안고…… 하지만 그것이 어찌 귀인의 잘못이겠는가? 사람이 본시 허술하여 더 저 같은 줄로만 알고 통 경계심이라곤 없는 것을…….

허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며 다툴 것 없이 앞으로는 자신이 더욱 철통같이 지켜서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겠다고 결심하며 욱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러곤 여전히 애달픈 표정으로 공비를 힐끔거리고 있는 승주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예쁘냐?”

“예?”

승주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욱은 공비가 곱다거나 예쁘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지만, 자신의 눈에 허연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것과 비슷한 증세라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폐하, 그 무슨 황망한 하문이시옵니까? 소인은 공비마마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승주의 변명에 욱이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승주의 어깨를 붙들어 곁으로 끌어당겼다.

“막사에서 쉴 게 아니면 오늘은 내 곁에 붙어 다녀라. 아니면 상장군에게 시달려 더욱 축이 날 것이니…….”

화산 일대는 월국이 선 직후부터 황실의 영지와 사냥터로 정해져서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그 안으로는 한 발 들이밀 수도 없고,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꺾어 갈 수 없는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그 때문에 화산의 숲은 월국 안에 있는 어떤 숲보다 울창했고 종류도 다 셀 수 없는 온갖 동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 보존되어오던 화산에도 시련은 있어서 태황태후 조 씨의 섭정 치세에는 그 일가가 특혜를 받아서 골짜기 아래에 자신들의 별장을 빽빽이 짓고 날마다 사슴과 멧돼지 사냥을 벌이는 바람에 한때 산짐승의 씨가 말라서 며칠 숲을 뒤져도 토끼 한 마리 볼 수 없는 빈 숲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욱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로는 황족들의 휴양 정도만 허락했을 뿐 사사로운 사냥은 일절 금했고 그 자신이 화산에 행차한 것도 이번이 겨우 세 번째라서, 숲은 예전의 풍요로움을 되찾아 토끼 따위는 발에 차일 정도고 멧돼지, 사슴은 대강 몇 마리나 되는지 어림하는 것도 힘들 정도가 되어 있었다.

3년 전에 화산에 와서 한 달 넘게 머물며 숲을 꽤 돌아다닌 적이 있었던 욱이 측근들과 무호 일행을 이끌고 앞장서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너른 들판을 지나 이름도 알 수 없는 관목이 꽉 들어차서 하늘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가던 욱이 어느 지점에서 말을 멈추고 허연을 돌아보았다.

“저 앞에 가지가 부러지고 껍질이 죄다 벗겨진 나무가 보이는가?”

“보입니다.”

“큰 뿔 사슴이 뿔을 갈아댄 흔적이라네. 껍질이 벗겨진 높이며 나무가 파인 깊이를 보면 상당히 크고 거친 놈일 듯싶구먼.”

욱이 어깨에 힘을 주며 사슴의 생태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뽐냈다. 열서너 살 어린아이 같은 욱의 모습에 허연이 아침까지 다퉜던 것도 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슴 사냥을 꽤 해보셨나 봅니다. 흔적만 보시고도 사슴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니…….”

“좀 했지. 한 번 나오면 아침에 한 마리, 저녁에 한 마리…… 과인이 잡은 사슴으로 말단 내관과 행궁의 하인들까지 고깃국을 먹었다네.”

“허면 오늘도 실력 발휘를 해보시지요. 저는 사슴 사냥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슴 사냥을 해본 적이 없는가?”

“연주국은 사막 복판에 자리 잡은 나라가 아닙니까? 연주대호 주변에 넓은 숲이 있긴 하지만 큰 사슴이 무리지어 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

욱이 놀란 표정으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허면 사막에 달리 사냥할 만한 짐승이 있었는가?”

“소싯적엔 친구들과 놀이 삼아 여우 사냥을 나가곤 했었는데, 대부분은 종일 말이나 달리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었습니다.”

허연이라면 워낙 무공이 출중하니 호랑이도 능히 잡았을 것 같은데, 정작 여우도 몇 마리 잡아본 적이 없단 사실이 의외라 몇 발짝 뒤에 있던 무호의 부장들도 자기네들끼리 술렁거렸다.

“허면 형님은 언제 대현성에 한 번 오셔야겠습니다.”

영재가 욱과의 대화를 툭 끊고 들어오자 허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현성 인근엔 사냥감이 그렇게 많은가?”

“많다 뿐입니까? 사슴이며 멧돼지는 온 산에 깔렸고 그 바람에 호랑이도 바글바글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한 번 사냥을 나갔다 하면 기본이 열흘에서 보름이라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가는 것은 사냥으로 치지도 않습니다.”

“허허…… 그런가?”

허연이 잠깐 실례하겠다는 뜻으로 욱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말머리를 휙 돌려서 부장들 틈으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서 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연을 쳐다보았다. 황제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중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허연이 그 무례에 대해 사과를 하기는커녕 아예 저쪽으로 싹 옮겨 가버린 것이 불쾌하기도 했고, 새로 사귄 친구한테 밀린 기분이라 섭섭하기도 했다. 그때 좀 떨어져서 따라오던 공비가 욱의 곁으로 다가왔다.

“송구합니다, 폐하. 오라버니들이 눈치도 없고 법도에도 어두워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다. 귀인과 부장들은 다 같이 취하도록 마시며 이미 볼 것도 다 본 사이이니 무슨 격의가 있겠느냐?”

욱이 이를 꽉 깨물면서 대꾸했다.

“귀인께서도 오라비들이 자꾸 그리 하면 문제가 되겠기에 아예 자리를 옮기신 듯합니다. 제가 틈을 보아 이를 것이니 그 또한 통촉해주십시오.”

욱이 오늘따라 의젓한 공비를 시무룩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됐다. 부장들도 들떠서 저러는 것이고, 이제 대현성으로 돌아가면 언제 또 황성에 올 것이라고 다 늦게 법도를 가르치겠느냐? 또한 나도 사슴 사냥 한 번 못해본 초짜와 다니느니 호랑이 사냥도 다녀본 전문가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든든하겠구나.”

욱의 퉁명스러운 치하에 공비가 고개를 숙였다.

“너그러운 성심으로 이해해주시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숲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잡목은 더욱 빽빽이 우거졌고, 가지가 하늘을 가려 음습하고 어두웠다. 낙엽이 반이나 져서 말의 발목이 빠질 지경인데도 이렇게 울창하면 한여름의 숲은 더욱 장관이겠구나, 새삼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공비의 시선이 습관처럼 승주에게로 옮겨 갔다.

황제의 어마 뒤편에 바짝 붙어서 내내 말 궁둥이만 쳐다보던 승주가 슬쩍 눈을 들었다가 공비와 눈길이 마주치자 당황해서 말고삐를 옆으로 잡아챘다. 그러다 어지럽게 뻗은 나뭇가지에 뺨과 목덜미를 긁히고 말았다.

“아…….”

승주의 얕은 신음에 욱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걸음을 멈추고 승주를 곁으로 불렀다.

“다쳤느냐?”

“아닙니다.”

승주가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대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욱이 그 손을 치우고 살펴보니 승주의 얼굴과 목덜미는 그사이 회초리에라도 맞은 것처럼 붉게 부풀어 있었다.

“워낙 우거진 숲이라 잠시만 딴생각을 해도 이런 일이 생긴다.”

욱이 손등으로 부어오른 승주의 목덜미와 뺨을 어루만지며 타이르듯 말했다. 그 목소리와 눈길이 여간 다정한 것이 아니라 뒤를 따르던 중신들이 바짝 긴장해서 서로 의아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과인이 사냥을 나온다 하여 길을 어지간히 낸 것인데도 이리 되었구나. 이 숲만 빠져나가면 도랑이 흐르는 넓은 들판이다. 얼마 멀지 않으니 조심해서 따라오너라.”

욱이 내친김에 승주의 어깨에 붙은 낙엽까지 털어주며 녹아내릴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바람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친 승주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황제의 사냥은, 직접 짐승의 흔적을 찾아서 뒤쫓고 넓은 숲을 종일 뒤지고 다니는 사냥꾼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황족과 귀족들에게 사냥이란 유흥의 연장이고 산과 들을 쏘다니며 놀다가 들어가는 사교 모임이지, 짐승을 잡아서 배를 채우거나 생계를 꾸리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한 번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는 수행원과 위병의 수가 수백에 이르니 이런 대규모의 행사는 안전 문제도 있고, 높은 분들이 사냥터에 나왔다가 허탕치고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십 명의 몰이꾼과 수백 마리의 사냥개가 동원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가 직접 사냥감을 몰아서 잡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주변에 산짐승이 다니는 오솔길과 그 흔적이 지천인데 황제는 그것들을 본 척도 않고 앞으로만 나가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던 공비가 윤 내관에게서 황실의 사냥 방식을 전해 듣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허면, 과인이 몇 날 며칠 이 너른 숲을 뒤지며 사슴이며 멧돼지를 찾아다닐 줄 알았느냐?”

“사냥은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공비의 대답에 욱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주변을 한 번 둘러봐라. 중신이며 위병이며 수행 내관까지…… 눈에 뵈는 자들만 헤아려도 족히 백 명은 넘을 터, 이렇게 사람과 말이 미어터지는데 귀 밝고 예민한 산짐승이 이 근처에 얼씬인들 하겠느냐? 몰이꾼들이 숲 반대편에서부터 몰아오지 않으면 사슴은 무슨…… 생쥐 한 마리 구경 못하고 수풀만 뒤지다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도 그렇겠다 싶어서 공비가 별다른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미심쩍은 눈길로 다시 욱을 쳐다보았다.

“하오시면, 몰이꾼들이 코앞까지 몰아다 준 사슴 몇 마리 잡은 것으로 그렇게 자랑이 늘어지셨던 것입니까?”

“아니…….”

이런 종류의 타박은 머리털 나고 처음 당하는 것이라서 욱이 입을 딱 벌렸다.

“코앞까지 몰아다 준 사슴이라니…… 큰 뿔 사슴이 얼마나 사납고 난폭한데…….”

“큰 뿔 사슴이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는 저도 잘 압니다. 예전에 사슴 사냥도 여러 번 했었으니까요.”

공비의 담담한 대꾸에 이번엔 말문도 막힌 욱이 잠시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하긴, 소싯적에 호랑이 사냥도 다녔었다니, 사슴 따위가 대수이겠느냐? 과연 장군의 딸이요, 장군의 누이로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장군의 직책을 내렸어야 할 호걸에게 후궁의 첩지를 내렸구나, 그냥 고향에서 사냥이나 다니도록 내버려뒀으면 나 좋고 너 좋고 두루두루 좋았을 것을…… 새삼 후회를 하며 욱이 고개를 돌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허연은 부장들과 오느라 뚝 떨어진 바람에 잡목에 가려서 잘 뵈지도 않고, 주변엔 정 내관, 윤 내관, 위사령 진관우, 그 뒤쪽으로 승상 이하 소싯적에 말 좀 달려본 중신들, 그리고 무호…… 욱이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그나마 만만한 승주를 손짓으로 불렀다.

“한 선생은 왜 이리 처지느냐? 곁에 바싹 붙어오지 않고…….”

“송구하옵니다, 폐하.”

승주가 얼른 욱의 곁으로 말머리를 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오나 소인이 어찌 폐하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겠습니까? 이리 가까이 불러주시는 것도 두렵고 민망합니다.”

“과인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것이다.”

승주를 안심시키며 욱이 그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간 상장군을 모셨으면 사냥터도 어지간히 쫓아다녔을 터, 너도 사냥을 좀 하느냐?”

말 잔등에만 달랑 올랐지 허리춤에 단검 하나 찬 것이 없는 승주의 허전한 행색을 살피며 욱이 물었다.

“소인은 사냥은 못합니다.”

“아니, 공비는 소녀 시절부터 활을 쏘면서 사슴이며 멧돼지를 척척 잡았다는데…….”

“소인은 형님들 심부름 하고, 불 피워서 차 끓이고, 사냥해 온 고기와 같이 먹을 밑반찬이나 만들고…… 그런 허드렛일을 주로 했습니다.”

“아…….”

여인은 멧돼지 잡고 사내는 반찬 만들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조합이라 욱이 얼빠진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욱이 자꾸만 자신을 대놓고 훑어보는데 그 눈길이 상당히 음험하게 느껴져서 승주가 저도 모르게 말을 모로 몰아서 욱과 슬그머니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욱이 팔을 뻗어 승주의 말고삐를 잡아채더니 바로 옆구리에 찰싹 붙였다.

“반찬은 무엇을 특히 잘 만드느냐?”

“형님들이 주로 육식을 하니 곁들여 먹을 산채나 탕국 같은 것을 주로…….”

승주의 대답에 욱이 오호……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할 줄 아는 것이 많구나. 언제 네가 끓인 탕국 한 그릇 맛을 봐야겠다.”

“폐하, 소인은 어디서 음식 하는 것을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자꾸 왜 이러시나 부담스러워서 승주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욱이 허허 웃으며 그 등을 툭툭 두드렸다.

“내 너에게 당장 탕국을 끓여 올리라 하겠느냐? 나중에 차나 한 잔 끓여다오.”

황제와 승주의 친밀한 모습에 어마를 뒤따르던 중신들이 슬쩍슬쩍 조심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좌승상의 주도로 슬그머니 말의 걸음을 늦춰서 어마를 따르던 위병들과 자리를 바꿨다. 

“거참…… 이젠 공비와 한 선생 중 어느 쪽이 후궁인지 슬슬 헛갈립니다그려.”

“그러게 말이오. 폐하께서 한 선생을 저리 아끼시는 것을 보면 저대로 대현성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으실 듯싶은데…….”

좌승상이 운을 떼며 조양을 힐끔 쳐다보았다. 중신들은 황제의 지나친 파격 인사에 수차례 놀란 터라 욱이 승주를 가까이 불러 관심을 보일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불안 증세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본래 황제와 성격이 잘 맞는데다 이미 딸들을 모두 출가시킨 조양은 강 건너 불 보듯 여유가 넘쳤다.

황제가 승주에게 벼슬을 한자리 내어준다고 해도 직급 낮은 당하관일 터,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고 신분 상승을 위해 중신들 중 누군가의 데릴사위로 들여보낸다고 해도 자신은 남은 딸이 없으니 걱정이 없었다.

“좌승상과 우승상은 무엇이 걱정인가? 저만한 인재면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서 그 식견과 재능을 널리 쓰이도록 하는 것이 폐하와 나라를 위해 두루 좋은 일이지.”

“폐하께서 지난 3년간 별시를 치러 벼슬을 내리신 천민이 무려 3천 명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종놈들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서 글공부를 하네, 전차를 고안하네, 헛짓거리나 하며 밥만 축내고 있으니, 이러다간 얼마 안 가서 우리가 직접 물 길고 아궁이에 군불을 때야 할지도 모릅니다.”

“부리는 노비만큼도 똑똑지 못하면 그것도 할 수 없지.”

“대감!”

좌승상의 불평에 조양이 눈을 실쭉이 내리깔며 눈치를 주었다.

“저 아이가 폐하 눈에 들어 벼슬을 한다고 해봐야 종9품 기술직이 고작이지, 승지가 되겠는가? 대부를 하겠는가? 자네 말대로 이미 도성에 폐하의 성덕으로 종살이를 면한 천민이 수천에 이르거늘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리 엄살인가?”

“혹시 압니까? 후궁으로 들이실지…….”

조양에게서 면박을 당한 좌승상이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조양은 그 또한 가소롭다는 듯 콧바람을 날렸다.

“그렇다 한들 놀랄 일인가? 폐하께서는 당신보다 열두 살 많은 적국의 장수도 별궁에 들여앉힌 전력이 있으시거늘, 변방에서 올라온 순하고 얌전한 노비 한 명 정도 더 곁에 두신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라고…….”

세상사 통달한 것 같은 조양의 느긋한 대꾸에 좌우 승상이 입을 삐죽거렸다.

“승상께서 충신인 것은 세상이 다 알지만 폐하 편을 너무 드십니다.”

“이런 가정은 불경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승상께 폐하 같은 아드님이 계시면 걱정이 안 되시겠습니까?”

승상들의 반격에 조양의 표정이 갑자기 심란해졌다. 태황태후의 먼 일가로 젊은 날 하급 무관부터 벼슬길을 시작해서 20년 가까이 일가에게조차 배척을 당하며 외직을 돌다가 천운을 만나 승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조양에게도 평생의 아쉬움이 있었으니, 슬하에 아들 없는 허전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게 폐하 같은 아드님이 있었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성품 어질고 총명하고 귀엽고 엉뚱하고 거기에 인물까지 옥골선풍이시니…… 업고 다니며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분이 내 아드님이라고 목이 쉬게 자랑을 했을 것이네.”

조양의 대답에 좌승상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승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양이 황제에게 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그 성격에 아들놈이 열두 살 많은 적국 장수와 눈이 맞아서 찰싹 붙어 다니는 꼴을 잘도 두고 보았겠다 싶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 우거진 숲을 헤치고 나가자 일행의 눈앞에 넓은 개활지가 펼쳐졌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어두운 숲을 빠져나온 무호와 부장들이 눈앞이 탁 트이는 넓은 들판에 도착하자 앞을 다퉈 탄성을 토해냈다.

제법 수량이 풍부한 큰 도랑이 복판을 가로지르는 들판엔 아직 지지 않은 가을꽃이 꽤 남아 있어서 꼭 사냥이 아니라 그냥 말을 달리며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 이게 웬 별천지, 꽃천지냐? 대현성은 벌써 눈보라가 몰아치고 난리가 났을 것인데, 여긴 아직도 여름이구나.”

무호의 부장들 중에는 그래도 감성이 살아 있는 영재가 시원스레 펼쳐진 들판과 등성이를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게 말이다. 아씨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 사냥을 다 해보고…….”

맞장구를 치던 춘수가 고개를 돌려 허연을 보다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허연이 말 등에 앉아서 까무룩 졸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러다 말에서 떨어지시겠습니다.”

“아…….”

춘수 덕분에 졸다 깬 허연이 손바닥으로 눈을 부비며 겸연쩍게 웃었다.

“지난밤에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잠은 좀 잤는데, 술이 덜 깼네.”

“그래가지고 사냥을 하시겠습니까? 다소 피곤하신 줄은 알았지만 말 등에서 졸고 계실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춘수의 걱정에 허연이 고개를 저었다.

“내 걱정은 할 것 없네. 나도 소싯적부터 말 잔등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설마하니 사냥터에서 낙마를 하겠는가? 이 숲에 호랑이가 사는 것도 아니고…….”

허연의 대꾸에 춘수가 무슨 말씀 하시느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생 동물은 다 사납습니다. 게다가 한창 나이의 큰 뿔 사슴은 소보다 더 크고 뿔은 벼린 창과 같으니, 그 뿔에 한 번 받히면 말과 사람이 크게 상합니다.”

춘수의 설명에 허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슴이라면 황궁 뒤편 황제의 숲에도 수십 마리가 뛰노는 터라 허연에게도 친숙한 동물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숲에 사는 사슴은 체구도 아담하고 성격도 순한 꽃사슴이라서 젊은 수컷이라도 대부분 송아지만 한 크기였고 인기척이 나면 오히려 먼저 다가와서 자신의 손에 들린 과일 조각이나 배추 이파리 따위를 받아먹곤 했기 때문에 허연은 사슴에게서 사납고 위험하다는 인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숲에 사는 사슴은 종이 많이 다른 모양일세. 어제 보았던 놈들도 그렇게까지 크고 위험해 보이진 않았는데…….”

허연이 하품을 섞어가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춘수가 혀를 끌끌 차며 허연의 말고삐를 붙들어 옆구리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자기 물주머니를 허연에게 턱 안겼다.

“형님은 오늘 저랑 같이 다니십시다. 물 한 모금 들고 정신을 차리십시오.”

들판 너머 우거진 수풀에서 뿔 나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황제의 사냥 행사에 동원된 백여 명의 몰이꾼과 사냥꾼들은 며칠 전부터 큰 사슴과 멧돼지가 다니는 길목과 은신처를 파악해두었고, 지난밤부터 숲을 뒤져서 사슴의 무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황제가 들판에 도착할 시각에 맞춰서 수백 마리의 사냥개를 풀어 짐승들을 몰아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나와 본 탁 트인 사냥터, 아침 공기를 찢어놓을 듯 기세등등한 사냥개들의 노호, 지축을 흔들며 달려오는 산짐승들의 거칠고 묵직한 질주…… 욱이 오랜만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떨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곤 으쓱한 표정으로 허연을 돌아보았다.

소싯적에 사냥을 다녔다고 해봐야 친구들과 여우 몇 마리 쫓아다닌 것이 전부라니 허연은 이전에 이런 규모의 사냥은 경험해본 적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 당연히 흥분과 기대감에 들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한 눈길로 쳐다본 허연의 표정은 욱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졸음을 털어내느라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손으로 눈두덩을 비비던 허연이 욱과 눈길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새벽에 막사에 찾아왔다가 쌩하니 나가버렸을 때 느낀 서운함이 다 녹아내릴 듯 다정한 미소였지만, 그 표정이나 태도 어디에도 수백 명이 동원된 사냥 행사의 규모에 놀라거나 흥분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허연의 심드렁한 태도에 한껏 고조되었던 욱의 흥분도 푸시시 식어버리고 말았다.

“폐하, 이제 곧 수풀 언저리에서 사슴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활을 쓰시겠습니까? 아니면 전처럼 장창을…….”

이제 곧 사냥이 시작될 텐데 허연을 힐끔거리며 하염없이 한눈을 팔고 있는 욱을 보다 못한 윤 내관이 곁으로 다가와 주의를 주었다.

“창으로 하겠다.”

“예, 폐하.”

윤 내관이 무구를 담당하는 내관에게서 장창을 받아서 욱에게 건넸다. 흑룡이 수놓인 검은 사냥복을 입고 흑마에 오른 욱의 모습은 영웅호걸의 풍모가 완연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나라 안 최고의 대장장이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아름다운 창을 움켜쥐고 심기 불편한 눈길로 들판 저 너머를 노려보고 있으니, 남자를 상대로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해본 적 없는 윤 내관조차도 참으로 잘났다는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폐하, 참으로…….”

윤 내관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아부를 떨기 위해 욱의 곁에 바짝 붙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전방만 주시하던 욱이 그때 갑자기 말머리를 휙 돌렸다. 그러곤 곧바로 허연에게로 달려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안장에서 미끄러질 뻔한 윤 내관을 승주가 얼른 붙들어서 바로 앉혔다.

“별로 재미가 없는가?”

훌쩍 말을 몰아 허연에게 다가간 욱이 따지듯 아르릉거렸다. 이건 또 무슨 맥락 없는 시비인가 싶어서 허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욱을 쳐다보았다.

“예?”

“하늘은 청명하고 아침 바람은 향긋하고 이제 막 들판으로 수십 마리의 사슴이 몰려나올 텐데, 그대는 기대라든가 흥분이라든가…… 그런 것이 전혀 없어 보여서 하는 말일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여기 이렇게 나온 것만으로도 즐겁고, 사슴 사냥도 기대가…… 큽니다.”

허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턱이 빠지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욱이 참았던 분통을 터뜨렸다.

“내가 누구 때문에 요즘처럼 시국이 어수선할 때에 중신들의 원성을 무릅써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자네는 온천욕도 엉뚱한 놈들과 즐기고, 사냥엔 전혀 관심도 없고…….”

“폐하?”

“나하고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재미가 없는가? 뭘 해도 심심하고 지겨운가? 그대에겐 내가 엊그제 새로 사귄 친구만도 못한가?”

“…….”

내가 졸다가 꿈을 꾸나 싶어서 허연이 뭐라 대꾸도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자신은 서운하고 속상해서 사냥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환궁을 하고 싶은 지경인데 허연은 여전히 잠이 덜 깬 기색이라 더욱 울화가 치민 욱이 묻어놓았던 속내를 속 시원히 깠다.

“이젠 과인에 대한 정이 식었는가?”

“폐하…….”

정황상 이게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한탄을 하며 허연이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두 사람의 주변엔 이런 다툼엔 미립이 난 내관과 위병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골에서 온 순박한 부장들이 갑작스러운 황제의 난입과 시비에 놀라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정하십시오, 폐하. 중신들과 부장들 앞에서 어찌 이러십니까? 폐하께서는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이젠 내가 부끄러운가?”

“…….”

욱의 억지에 허연이 어이가 없어 허…… 탄식을 토했다. 평생 험한 국경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도 숱하게 겪어보았으니 더는 두려운 것이 없다던 부장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사태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나보다 친구가 좋으냐, 이제 내게 정이 식었느냐…… 황제와 전직 대장군이 이런 식으로 사랑싸움을 하는구나. 대현성에선 부부간이라도 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서 이리 다투면 큰 흉이 되고 두고두고 뒷말을 들을 텐데…… 여기는 사내들 간이라도 통 조심하고 감추는 것이 없네그려.

황제의 성품이 뻔뻔하고 유별난 것인가, 황성의 기풍이 본래 개방적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산골 촌놈들이라 꽉 막히고 고리타분한 것인가 분간이 되질 않아서 부장들이 흠, 흠 헛기침을 하며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그때, 몰이꾼들의 나팔 소리가 바로 곁에서 울리는 듯 요란하더니 사냥개들에게 쫓겨 온 산짐승들의 질주로 들판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몰이꾼과 사냥개들이 거의 숲 어귀에 닿아서 그들에게 몰린 산짐승들이 들판 저쪽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폐하, 사슴이…… 사슴이 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말라는 어명도 있었고, 허연보다는 부장들이 걱정스러워서 쫓아와 근처를 맴돌던 승주가 다급하게 사냥터의 상황을 전했다. 하지만 허연의 무신경함에 잔뜩 화가 난 욱에겐 사냥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사슴이 문제냐?”

욱이 승주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그때 허연이 욱의 말고삐를 움켜잡더니 거칠게 앞으로 돌려세웠다.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를 향해 바로 달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몰이꾼과 사냥개들에게 쫓겨서 들판으로 달려 나온 사슴은 어림잡아 30여 마리에 달했다. 그 외에 고만고만한 멧돼지나 토끼 같은 것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바글바글했지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큰 뿔을 머리에 인 수사슴이었다. 그중 노련한 사냥꾼의 피를 들끓게 만들 만큼 늠름한 놈은 대여섯 마리 남짓이었는데 가장 앞서 달려오는 두 마리가 특히 크고 빨랐다.

욱이 장창을 움켜쥐고 가장 앞서 달려오는 사슴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허연에게 비장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자네, 내 물음에 아직 답을 하지 않았네.”

이렇게 조급할 때에 또 엉뚱한 소리라 허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좀 전에 욱이 지껄인 헛소리를 곱씹었다.

“솔직히 폐하가 부끄럽습니다. 부장들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만큼 창피하고 민망하고…….”

제일 앞에서 달려오는 수사슴을 눈여겨보던 욱이 그 대답에 사슴을 잠시 잊고 으르렁거렸다.

“그거 말고! 과인에 대한 정이 식었는가? 이젠 과인과 함께하는 것이 전처럼 즐겁지 않은가?”

그 한심한 억지에 허연도 울컥한 눈길로 욱을 노려보았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폐하께 뭔가 크게 실언을 하거나 실수한 일이 있습니까?”

“어제 일도 그렇고, 오늘 아침 일도 그렇고, 당장만 봐도…… 사슴이 떼로 몰려오는데도 전혀 놀라거나 흥분한 기색이 없지 않은가?”

“저는 예전에 연주국의 성벽 위에 서서 지평선을 까맣게 뒤덮으며 몰려오는 왕쾌의 30만 대군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 제가 숲에서 뛰쳐나오는 사슴 몇 마리를 보고 놀라겠습니까?”

허연의 대답에 욱이 말문이 막혀서 입을 삐죽였다. 그때 허연이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큰 뿔 사슴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사냥개에게 쫓겨 들판을 질주하던 사슴들은 대부분 인마를 피해 방향을 바꿔가며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앞서 달려오던 건장한 수놈만은 창처럼 날카로운 뿔을 겨눈 채 곧바로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욱과 허연이 있는 방향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건 들이받을 기세로 거칠게 달려들던 사슴이 갑작스레 무릎을 꺾으며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러곤 질주하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충돌이 얼마나 거칠었는지 사슴의 한쪽 뿔이 부러져 허공을 날았고, 사슴은 욱의 발치 바로 앞까지 굴러 와서 마지막 경련을 일으켰다. 허연이 쏜 화살은 사슴의 목을 관통해서 그 촉이 목덜미를 뚫고 나와 있었다.

“이놈은 내가 찍었었는데…….”

욱이 툴툴거리며 허연의 눈치를 살폈다.

“좀 서두르지 그러셨습니까?”

허연이 싸늘하게 대꾸하며 몇 년 만에 제 손으로 사냥한 짐승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사슴은 허연이 아니라도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욱의 주변엔 위병만 수십 명인데다, 무호와 그 부장들도 활과 창을 들고 달려드는 사슴을 주시하고 있었으니 욱이 사슴뿔에 찔리거나 들이받혀서 화를 당할 위험은 거의 없었다. 허연은 단지 그들보다 조금 빨리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

“형님……, 과연 듣던 대로 무공이 대단하십니다.”

좀 전에 허연에게 찬물 마시고 정신 차리라고 타박을 했던 춘수가 민망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자신들도 그간 사냥깨나 다녀보았다고 자신을 했지만 곧바로 돌진해오는 큰 뿔 사슴을 화살 한 대로 잡는 것은 보통 실력과 배짱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화살을 시위에 걸자마자 조준도 없이 바로 놓은 것 같았는데, 동맥을 제대로 뚫고 들어갔나 봅니다.”

“이놈 달려드는 기세로는 여러 사람 다치고 말도 몇 마리 상할 줄 알았는데…….”

중신과 위병들이 허연의 귀신같은 활 솜씨에 홀려서 슬금슬금 죽은 사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허연의 지략과 무공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일 뿐 실제로 확인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정 내관이나 진관우 등,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들이 더욱 놀라서 허연과 사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뭘 그렇게 보고 섰는가?”

몰이꾼들이 기껏 몰아온 사냥감이 다 흩어져 달아나도록 이미 사냥한 사슴만 들여다보고 있던 무호의 부장들을 허연이 대뜸 다그쳤다.

“저희는…….”

예기치 못했던 황제와 허연의 사랑싸움에, 떼를 지어 몰려나온 들짐승에, 허연의 귀신같은 활 솜씨까지 코앞에서 목격하고는 정신을 반쯤 놓고 있던 부장들이 일제히 허연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이번 사냥에서 가장 큰 사슴을 잡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신다고 했거늘, 어찌 이리 정신을 놓고 있는가?”

“보아하니 폐하의 상을 받을 사냥꾼은 이미 결정이 난 듯싶습니다.”

춘수의 시무룩한 대답에 허연이 엄한 눈길로 부장들을 슥 훑었다.

“이놈은 그 크기가 덜 자란 망아지에 불과한데 이 정도가 이 숲에서 가장 큰 사슴이란 말인가? 큰 뿔 사슴은 소보다 더 크고 사납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냥은 이제 시작이고, 자네들은 대현성의 험준한 산맥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호랑이도 잡았던 진짜 사냥꾼들일세! 정신 차리고 어서 실력을 발휘해보게!”

허연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잡고 부장들의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러곤 곁에 서 있던 흑마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놀란 흑마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아니…….”

때려놓고 보니 말 잔등에 올라앉은 이가 공비라서 허연이 헛기침을 했다. 다행히 승마에 능숙한 공비는 놀란 기색은커녕 허연을 향해 씨익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아직까지도 사냥개에 쫓겨 갈팡질팡 도망을 다니고 있는 멧돼지를 쫓아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너른 들판에 나와서 저 좋을 대로 말을 달리며 사냥감을 쫓는 공비의 모습엔 생기가 넘쳤고 그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무심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칠궁을 겉돌 때엔 뭘 해도 곱게 보이질 않더니, 바깥에 나와선 얼굴까지 환하고 예뻐 보이는 공비의 뒷모습을 잠시 시선으로 좇던 욱이 곁에 있던 승주를 돌아보았다.

“뭘 하느냐? 따라 뫼시지 않고?”

“예?”

“숲이 넓고 울창하니 사냥감을 쫓다가 잘못하면 길을 잃을라, 안전하게 모시고 다니다가 때가 되면 집결지로 오너라.”

욱의 명령에 승주가 지척에서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무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번엔 욱이 말 궁둥이를 채찍으로 한 대 갈겨서 승주를 공비 쪽으로 쫓아 보냈다.

멧돼지를 쫓다가 곁에 승주가 따라 붙은 것을 깨달은 공비가 놀라서 말고삐를 당겼다. 하지만 곧 이것이 자신을 위한 황제의 배려임을 알고는 박차를 가해 더욱 빠르게 말을 몰았다.

사냥을 한다더니, 뒤쫓던 멧돼지를 앞질러서 숲으로 달려 들어가버린 공비와 승주를 보고는 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바로 등 뒤에서 성난 황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무호를 돌아보았다.

“상장군은 과인을 따르게.”

“폐하…….”

무호가 욱을 막막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공비와 승주를 단둘만 붙여서 숲에 들여보내다니…….

무호로서는 황제의 의도가 심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누이는 제가 아무 짓을 하지 않아도 허연과 사통을 했다고 모함을 당하는 판국인데, 사냥터에서 사가의 하인과 단둘이 사라졌었던 일을 후일 누군가가 트집거리로 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귀인이 이렇게 큰 사슴을 화살 한 대로 잡았으니, 과인 또한 뭐라도 잡아서 체면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 이는 어명이니 군말 말고 따라오게!”

딱 잘라 말하고는 욱이 앞장서서 공비와 승주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그 뒤를 허연과 정 내관을 비롯한 호위 무사들이 그림자처럼 쫓았지만 무호는 공비와 승주가 사라진 방향을 걱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했다.

“아씨, 어딜 가십니까?”

숲 속 깊은 곳으로 하염없이 들어가는 공비를 보다 못한 승주가 말을 달려서 그 고삐를 붙들었다.

“꼭 어디랄 것이 있느냐?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보는 것이지.”

“넓고 울창한 숲입니다. 이러다 길이라도 잃으시면…….”

“걱정 마라. 설마하니 내가 이 손바닥만 한 숲에서 길을 잃겠느냐? 혹, 길을 잃는다 한들 오라버니가 나를 찾아내지 못하겠느냐?”

“아씨…….”

공비가 걸음을 멈추고 승주를 돌아보았다. 자신은 황궁의 담장 밖으로 나온 것만 해도 숨이 트여서 잘 먹고 잘 자고…… 지난 며칠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승주는 오히려 그사이에 더 얼굴이 상해 있었다.

“어디 끌려가서 노역이라도 했느냐? 다들 잘 먹고 잘 논 덕에 얼굴이 훤한데 너만 왜 이리 여위었느냐?”

“일 없이 놀다 보니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져서…….”

“이래가지고 고향까지 그 먼 길을 어찌 가려고?”

“대현성에야 어찌 가도 가지 않겠습니까?”

승주가 자신을 바라보는 공비의 애틋한 눈길을 애써 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아무리 폐하의 허락을 얻었다고는 해도 이리 오래 나와 계시는 것은 현명한 처신이 아닙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냥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바보짓이지. 폐하께서도 한심히 여기실 것이다.”

“아씨!”

승주의 만류도 아랑곳없이 공비가 다시 말을 몰아 낙엽 진 숲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한참을 길도 없는 숲으로 들어가던 공비가 작은 공터, 호젓한 옹달샘 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제 함께 사냥터에 나왔던 부장들과 지나갔던 곳으로 단풍나무에 에워싸인 옹달샘의 정취가 좋아서 유심히 보아두었던 곳이었다.

“대현성은 벌써 겨울이겠구나. 서리는 진즉에 내렸을 것이고, 심심치 않게 눈발도 날릴 때가 아니냐?”

공비가 말에서 내려 옹달샘 옆의 너럭바위에 걸터앉았다.

“작년과 재작년엔 눈도 유난히 많이 내려서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 눈에 덮여서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다들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씨께서 입궁하신 이후엔 도성에서 곡식과 은자도 배나 더 보내오고, 인근 성읍에서도 부족한 양곡과 인력을 대주는 일에 전처럼 야박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백성들이 큰 곤란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었습니다.”

승주의 대답에 공비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래, 그런 것을 바라고 나를 황궁에 밀어 넣었겠지.”

“아씨…….”

“내 신세가 겨울 한철 날 양식을 위해 장터에 내다 팔린 암소보다 나을 것이 없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모 형제에게서 그런 취급을 당한 심정을 네가 아느냐?”

“살면서 겪은 억울함과 고단함에 관해서 저하고 얘기를 하고 싶으십니까?”

승주의 물음에 공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승주에게 곁에 앉을 것을 권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승주가 바위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살짝 걸쳤다.

“사흘 후면 가느냐?”

“모레 새벽에 선발대와 먼저 갑니다.”

“이제 헤어지면 우리가 이번 생애에 다시 볼 수 있겠느냐?”

얼핏 담담한 물음에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승주의 가슴이 울컥 메었다.

“제 처지로 어찌 다음을 기약하겠습니까? 저는…… 이번에 와서 아씨를 뵌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승주의 아픈 대답에 공비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승주도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흘러가는 물줄기만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어디선가 싸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붉디붉은 단풍잎이 허공에 휘날리다가 옹달샘에 떨어져 내렸고, 시간도 가을바람처럼 차갑고 무심하게 둘을 스쳐 지나갔다.

“이 숲은 정말 좋구나. 조용하고 아늑한 것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평생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공비의 넋두리 같은 혼잣말에 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로부터 시인 문사들의 칭송이 자자한 숲이라 그 경치가 궁금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과연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폐하께 청을 올려서 나는 환궁을 하지 말고 그냥 여기 눌러앉을까 보다.”

“…….”

“어차피 폐하께 정인은 귀인뿐이고 나는 궁에서 없느니만 못한 후궁이니…….”

“아씨!”

승주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그 바람에 공비가 놀라서 뒤로 물러앉았다. 하지만 곧 어깨를 으쓱이며 낙엽 한 장을 집어서 샘물에 띄워 보냈다.

“새삼 놀랄 것이 있느냐? 폐하께 내가 어떤 존재고 궁에서 내 처지가 어떤지 너도 대강 짐작은 했을 것이 아니냐?”

“아씨께서 지금 궁에서 그토록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책임입니다.”

“…….”

성질 같아서는 그게 왜 내 탓이냐고, 싫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와서 황궁에 내다 버린 부모님과 오라비들 때문이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승주와의 마지막 시간을 말다툼으로 보내기는 싫어서 공비가 입술을 꾹 깨물고 애꿎은 옹달샘에 자갈만 연거푸 던져 넣었다.

“아씨께서 먼저 마음을 여시면 폐하께서 어찌 모른 척하시겠습니까? 사리가 분명하고 너그러운 분이시니…….”

“그만하자.”

“아씨…….”

“내가 실언을 했다. 폐하께서 나를 여기에 버리고 간다고 하셔도 찰떡처럼 붙어 갈 것이니 그런 얘기는 더 하지 말자.”

잠시 머뭇거리던 공비가 승주의 손을 잡았다. 철들기 전부터 한 마당에서 자라며 숨바꼭질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공비가 다른 여종들과 소꿉놀이 할 때면 불려나가서 서방님 노릇 하느라 꽃 이파리 띄운 맹물 차에 모래 밥 얻어먹던 승주지만 이렇게 손을 잡아본 적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승주가 공비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더욱 힘주어 그 손을 잡았다. 안 되는 일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손을 다시 놓는 것도, 공비를 두고 대현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승주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돌아가면…… 무엇보다도 몸조심하거라.”

“아씨.”

“시킨다고 위험한 일 도맡지 말고, 추운 날에 밖에 오래 나가 있지 말고, 내 생각도 너무 하지 말고…….”

“…….”

“내 오라버니께 단단히 말씀을 올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노비 문적에서 네 이름을 제할 것이니 당당하게 관직도 달라 하고, 쓰고 싶은 책도 마음껏 쓰면서 살아라.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고, 좋은 사람 있으면 혼인도 하고…….”

공비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고여서 흐릿해진 눈길을 옹달샘 쪽으로 돌렸다.

“아씨도…….”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숲을 뒤져서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 가야 군소리들이 없을 터…….”

공비가 한 손으로 얼굴을 마구 부비며 다른 생각을 떨치려고 애썼다. 하지만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움켜잡은 승주의 손을 놓지도 못한 채 한없이 머뭇거리기만 했다.

화산의 숲 곳곳에서 황제가 사냥을 중단하고 야영지로 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틀 무렵 시작된 사냥이라 휴식도 필요했고, 점심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보통 정오부터 한 시진은 막사로 돌아가 쉬는 것이 정해진 일정이었다.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숲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사냥감을 쫓던 중신들도 말머리를 돌려서 사냥 막사로 향했다.

“에잇!”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욱이 들고 있던 장창을 풀숲에 거칠게 박았다. 그러곤 씩씩거리며 말에서 내려 천막 안으로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연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고삐를 고 내관에게 맡겼다.

“시장하신 듯싶으니 바로 점심을 들이게.”

“시장하셔서 심기가 저리 불편하신 게 아니질 않습니까?”

“어쨌든 지금 폐하의 심기를 가라앉힐 약은 점심뿐일세. 입에 맞는 것으로 배부르게 드시면 마음이 좀 풀리시겠지.”

허연의 대답에 고 내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보통 때에는 사냥을 곧잘 하시더니 오늘따라 왜 그리 허둥거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코앞까지 몰아다 드린 사슴도 번번이 놓치시고, 종국엔 사슴 대신 사냥꾼을 잡을 뻔하셨으니…….”

“그러니 놀라셔서 더욱 화가 나신 게지.”

욱의 지난 반나절 사냥은 허탕과 실수의 연속이었다. 오랜만에 사냥터에 나온 황제의 즐거움을 위해 온 산의 몰이꾼들이 오전 내내 큰 뿔 사슴, 멧돼지, 갈색 여우 등등 숲에 사는 짐승이란 짐승은 모조리 찾아서 욱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수십 명의 사냥꾼과 사냥개들이 산짐승을 몰아다 주고, 그렇게 쫓겨 와서 갈팡질팡하는 짐승을 잡는 것은 사실 허연과 무호, 그 외 부장들에게는 사냥도 아니었다.

큰 뿔 사슴을 몇 마리나 잡아보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이런 것이었나, 이게 저자거리 식육점에서 장을 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 입 밖에 말을 내지는 않았지만 허연과 무호 일행은 그런 생각을 하며 살길을 찾아 사납게 날뛰는 사슴과 멧돼지를 시큰둥한 눈길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황제의 사냥은 저자의 식육점에서 돈 내고 고기 몇 근을 사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산짐승이 버글거리는 와중에 욱이 호기롭게 휘두른 창이 기가 막히게 빗나가서 토끼 한 마리 못 건지고 그 많은 짐승들을 다 놓쳐버렸던 것이다.

욱의 실수와 수난은 그뿐이 아니었다. 날뛰는 멧돼지가 달려드는 바람에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하고, 부러진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고, 급기야는 달리는 사슴을 조준해서 던진 장창이 사슴을 비껴서 옆에 얼쩡거리던 사냥꾼의 넓적다리를 베고 지나가는 아찔한 사고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허연과 무호 일행이 지켜보는 앞에서 새끼 돼지 한 마리 못 잡고 허둥거린 것만 해도 이런 망신이 없는데, 거기에 실수라고는 해도 사냥꾼이 자신의 창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넘어가는 것을 본 욱의 심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했다.

대체 뭐하려고 사냥은 나와서 이 망신을 자초했나 싶고, 오늘 일이 두고두고 중신들의 술자리 안주거리로 오르내릴 것 같고, 자신을 위해 두 번이나 큰 사슴을 몰아왔다가 도리어 창에 맞은 사냥꾼에게도 미안하고…… 마음 같아선 사냥이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이 길로 환궁해서 아무도 모르는 별궁에라도 틀어박히고 싶은 것이 욱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냥이 오랜만이라고는 해도 장창은 꽤 능숙하게 다루시는데, 오늘따라 어쩐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윤 내관이 이 내관에게 후딱 폐하 점심 수라 들이라고 재촉을 해서 보내고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천막 안을 힐끔거렸다.

“그런 날도 있는 것이지. 너무 걱정치 말게.”

“그래도 귀인께서 계셔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릅니다. 귀인께서 안 계셨을 때엔 폐하께서 저리 부어 계시면 소인들이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릅니다.”

후딱 들어가서 황제를 좀 얼러주었으면 싶어서 윤 내관이 허연을 사냥감 몰듯 천막 쪽으로 슬슬 몰았다.

“내가 들어가 볼 것이니 걱정치 말고, 자네는 상장군과 부장들을 좀 챙겨주게. 폐하를 호위하느라 사냥도 못하고 따라만 다녔으니 별 재미도 없이 힘만 들었을 것이네.”

“상장군의 막사에도 수라상 버금가는 진수성찬을 보내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귀인께서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시고…….”

황궁 큰 애기나 잘 돌봐달라는 푸념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오는 것을 윤 내관이 힘겹게 꿀꺽 삼켰다.

하루, 혹은 이틀간의 짧은 휴식을 위해 세워진 막사였지만 천막은 호화로웠다. 황제의 천막은 우선 그 크기부터 주변의 다른 천막을 압도할 정도여서 같이 온 모든 중신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 수 있을 정도로 넓고, 높이도 배는 더 높았다.

거기에 바깥쪽은 다른 천막과 마찬가지로 두툼한 무명이었지만 그 안쪽은 옅은 비취색 비단이 한 겹 더 둘러쳐져 있었고, 올라오는 한기와 습기를 막기 위해 바닥엔 복슬복슬한 양털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날이 추워지거나 하룻밤 숙영할 경우를 대비해서 천막의 네 귀퉁이엔 용이 떠받들고 있는 형상의 큰 화로도 놓여 있었는데, 화로에 불기라곤 없는 지금도 천막 안은 충분히 아늑하고 훈훈했다.

숙취에 불면에…… 이른 아침부터 찬바람을 맞으며 서너 시진이나 말을 달린 탓에 곧 쓰러질 지경이었던 허연이 그 아늑함에 몸이 풀려서 휘청거렸다. 이대로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서 내일 저녁때까지라도 죽은 듯 뻗어 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풀이 죽은 강아지를 달래서 식탁으로 끌어내는 것이 우선 급한 일이라 허연이 좌대 뒤편에 있는 별실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욱은 허연이 예상했던 그곳에, 예상했던 모습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다. 본인은 오늘 사냥터에서 중신들에게 보인 모습이 큰 망신이라 심란하고 울적하고 세상이 다 무너진 것 같겠지만, 덩치는 산만 한 사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워 끙끙거리는 모습이 웃기고 귀여워서 허연이 저도 모르게 킥 하고 웃었다.

“내가 우스운가?”

두꺼운 모피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거리는 중에도 허연의 발소리와 웃음소리는 귀신같이 알아챈 욱이 이불 밑에서 웅얼거렸다.

“하긴, 오늘 하루 종일 헛짓거리만 한 내 꼴이 우습기도 하겠지.”

“폐하.”

허연이 욱의 등 뒤에 앉아서 머리와 어깨로 추정되는 부분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긴 갈색 여우 가죽을 수십 장이나 이어서 만든 모피 이불의 감촉이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것이 진짜 강아지를 어루만지는 느낌이라서, 허연이 내친김에 욱을 뒤에서 끌어안고는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시장하시겠습니다. 우선 점심부터 드시고…….”

“밥 생각 없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육류로만 한 상 꽉 채워서 올릴 텐데요.”

“내가 돼진가? 이 마당에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밥이나 밀어 넣고 앉아 있게…….”

우리 강아지가 마음이 단단히 상했구나 생각하며 허연이 욱을 밀고는 그 곁에 몸을 눕혔다. 종일 말 잔등에 앉아 있다가 폭신한 침상에 허리를 펴고 누우니 어찌나 편하고 좋은지, 몸이 그대로 침상 아래로 푹 꺼지는 것만 같았다.

“의자에 앉아만 계시면 제가 다 떠먹여드릴 텐데…… 그래도 싫으십니까?”

등 뒤로 파고드는 허연의 따뜻한 체온과 달콤한 제안에 욱의 마음이 큰 파도를 만난 듯 술렁 흔들렸다.

욱은 애초에 사냥을 그렇게까지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실 욱이 사슴과 관련해서 재미를 느끼는 쪽은 사냥보다는 후원을 거닐 때면 눈치를 살피며 다가오는 사슴에게 배추 이파리라도 한 입 먹여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냥은 황제의 다른 공식 일정과 마찬가지로 중신과 백성들에게 황제의 위엄을 보이는 중요한 행사였다, 무엇보다도 여타 큰 행사에서 다소 뒤로 밀려 있던 무관들을 배려하고 사기를 돋우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욱은 봄가을에 꼭 한 번은 황성의 인근 숲에라도 나가서 무관들을 격려하며 사냥을 주관했었다. 그렇게 문무의 균형을 잡는 것도 황제의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욱에게도 오늘만은 숲에서 가장 큰 사슴을 잡아서 자랑을 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무엇보다 허연과 함께 먼 곳까지 원행을 나와서 하는 사냥이었고, 거기에 이른 아침부터 허연이 기세 사납게 달려드는 수사슴을 화살 한 대로 잡아 좌중을 압도하는 무공을 보인 탓에 잔뜩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무공으로 허연을 능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이 그의 활 솜씨와 민첩함에 놀랐듯, 허연도 자신을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여겨주길 바라는 것은 욱에게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욕심 때문에 몸은 경직되고 판단도 늦어져서 창은 번번이 빗나가고, 멧돼지와 부딪히고, 사냥꾼을 사냥할 뻔한 한심한 하루가 되고 만 것이었다.

“폐하…….”

허연이 짜릿할 정도로 은근한 음성으로 다시 한 번 욱을 설득했다. 그 음성이 어찌나 나른하고 유혹적인지 욱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리고 동시에 비록 악몽 같은 반나절이었지만 이 사람이 이렇게 곁에 붙어서 위로를 해주고, 밥도 먹여주고…… 잠시 짬을 내서 더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울적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니 이 좋은 곳에 와서 어제도, 그제도 독수공방을 하지 않았나? 이러려면 무엇 때문에 수백 명이나 되는 중신들을 이끌고 화산까지 왔단 말인가? 원행락은커녕 오는 내내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허연과는 전각이 떠나가도록 말다툼이나 하고, 사냥터에 나와선 망신살만 하늘 끝까지 뻗치고…… 원행이고 사냥이고 다 걷어치우고 당장 환궁을 할 판이었는데, 이것은 또 예상치도 못한 반전이구먼.

허연이 직접 먹여주는 점심도 점심이지만, 오후 사냥은 무호와 부장들이나 하러 나가라 이르고 우리는 여기서 좋은 시간을 갖는 것까지 추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욱이 조그맣게 헛기침을 했다. 지금 너무 티를 내면 보나마나 정색을 하고 빠져나갈 것이니 좀 더 엄살을 피워서 측은지심을 한껏 자극한 후에…….

큰 전쟁에서 패하기라도 한 것처럼 극심하던 우울증과 절망감이 허연을 잘 구워 삶아볼 궁리에 밀려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사냥 막사에서의 은밀하고 음란한 잠자리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원행락도 원행락이지만, 천막은 또 처음이 아닌가? 오늘이 이대로 지나간다면 두고두고 망신과 치욕의 하루로 남을 것이지만, 잘하면 처음으로 귀인과 천막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낸 뜻깊은 날로 기억될 터, 숲에서는 수십 마리나 되는 사슴을 죄다 놓쳤지만 이 기회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히며 욱이 슬그머니 등 뒤를 더듬었다.

“귀인이 그렇게까지 말을 해주니…….”

사냥터에서는 허탕의 연속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과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까탈스러운 수사슴을 사로잡은 최고의 사냥꾼이 아닌가? 그에 비하면 숲에서 뛰노는 자잘한 산짐승 따위야 잡아도 그만, 놓쳐도 그만이지 그 무슨 대수라고…… 그렇게 잃었던 자신감을 끌어 모으며 욱이 뒤집어썼던 이불을 슬그머니 걷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찌 반응이 없는고? 이쯤에서 얼른 일어나 점심 먹자고 재촉을 해야 밥 생각 없다고 빼면서 작업에 들어갈 것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욱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욱이 접시에서 송아지 안심 큰 조각을 집어서 허연에게 내밀었다.

“아…… 하게.”

“폐하.”

“같이 사냥 나가자고 보채지 않을 것이니 우선 들게. 쉬더라도 뭘 먹고 쉬어야 기력이 돌아오지.”

점잖게 타이르며 욱이 허연의 입안에 송아지 고기를 밀어 넣었다. 그러곤 송아지 찜에 곁들여진 밤과 새알을 건져서 접시에 담아놓고 허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직 잠이 덜 깬 허연도 멍한 눈으로 욱을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자네 몸이 많이 허해진 모양일세. 어의에게 일러 보약과 보양식을 제대로 올리라고 해야겠구먼.”

“제가 피곤한 것은 몸이 허해져서가 아니라 어젯밤에 잠을 설친 때문입니다. 어젯밤 잠을 설친 것은 폐하께서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거셨기 때문이고요.”

허연이 입안에 든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말 등에서 졸고, 침상에 잠깐 누웠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진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자라탕이 원기 회복에 그렇게 좋다던데…….”

바닥이 깊은 탕기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밑에 깔린 새알을 찾으며 욱이 중얼거렸다. 자라탕이란 말에 허연이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그런 거 비려서 못 먹습니다.”

“누가 약을 맛으로 먹는가?”

욱이 제법 의젓하게 타이르며 새알을 집어서 허연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이 점심 먹는 모습을 윤 내관이 의아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간 밥상머리에서 온갖 응석을 피우며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집어주는 음식으로만 배를 채우는 쪽은 언제나 욱이었고, 그런 욱을 달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싫은 기색 없이 몸에 좋은 찬으로만 골라서 입에 물려주는 쪽은 허연이었는데 지금은 역할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 잠깐 사이에 대체 천막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더군다나 폐하는 사냥터에서의 각종 사고로 속이 상해서 주둥이가 한 발이나 빠져 계셨는데…….

“저는 이제 많이 먹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점심을 드셔야지요.”

허연이 손을 저으며 욱이 내민 새알을 사양했다.

“많이 먹기는…… 겨우 장어구이 한 접시, 꿩 반 마리, 전복 죽 한 그릇, 송아지 안심 몇 조각 먹어놓고는…….”

비몽사몽간에 집어주는 대로 받아먹기는 했는데 그렇게 많이 먹었구나, 어쩐지 앉아 있는데도 숨이 차더라 생각하며 허연이 옆에 놓인 물 잔을 집었다. 그때, 두 손을 모으고 두 사람이 점심 먹는 것을 마냥 뿌듯한 눈길로 바라보던 고 내관이 얼른 허연의 곁에 붙어 섰다.

“마마, 그러지 마시고 새알 한 개만 더 드시지요. 먹어서 배부른 것도 아니고, 폐하께서 이리 권하시는데…….”

고 내관의 은근한 압력에 허연이 흠…… 하고 기침을 하고는 욱이 내민 새알을 입으로 받았다.

“정말 그만 먹어도 되겠는가?”

장어 한 마리만 더 먹지, 뭐 먹은 게 있다고 벌써 상을 물리나 싶어서 욱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도 점심을 드셔야지요.”

“나는 상 들이자마자 먼저 먹었네. 그대가 워낙 곤히 자기에 그냥 둘까도 싶었지만, 나가기 전에 뭐라도 좀 먹이고 싶어서 깨운 것이네.”

“오후에 다시 사냥터에 나가실 겁니까?”

허연의 물음에 욱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 중일세. 나가서 한바탕 망신을 더 당할까, 아니면 그대를 끌어안고 모자란 잠이나 채울까…….”

욱의 풀 죽은 대답에 허연이 피식 웃었다. 이대로 침상으로 돌아간들 모자란 잠을 채우게 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시지요. 화산이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아침에 보니 숲에 사냥감도 가득하던데요.”

“사냥감이 가득하면 뭘 하나? 내 손에 잡히질 않는데…….”

“오랜만이라 익숙질 않아서 그러셨을 겁니다. 오후엔 나아지시겠지요.”

허연의 설득에 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로…… 그럴 것 같질 않네.”

반나절 삽질 끝에 완전히 풀이 죽은 욱의 모습이 귀여워서 허연이 큭큭거렸다. 그러곤 욱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니면 그냥 숲길 산책이라도 같이 하시든가요. 상장군과 부장들은 마음껏 놀라고 풀어주고, 폐하와 저는 위병들을 몇 명 데리고 한가롭게 숲을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숲 속 산책이라. 단풍잎이 비처럼 내리는 가을 숲을 단둘이 거닐다가 호젓한 샘가에서 물도 나눠 마시고, 산짐승이 지나간 흔적도 찾아보고, 탁 트인 들판이 나타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도 달리고……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서 욱이 아웅…… 콧소리를 냈다. 그러곤 허연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나야 뭐든 좋지만, 괜찮겠는가? 아직도 많이 피곤해 보이네.”

“저는 좀 피곤한 것이지 아픈 게 아닙니다. 이제 해도 많이 짧아져서 두 시진만 지나면 해가 저물 터, 대낮부터 천막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남은 햇살이 아깝습니다.”

“그럼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가깝고 경치 좋은 곳으로만 데리고 다니다가 피곤한 기색이 보이면 바로 데리고 돌아오면 되겠다 싶어서 욱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은 다 먹었으니 차 한 잔 들면서 한 식경 정도 쉬다가 나가는 걸로 합의를 본 욱이 잠깐이라도 누워 쉬라며 허연을 침상 쪽으로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대로 끌려가면 휴식은 개뿔, 자신이 사냥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허연이 얘기나 하면서 앉아 있다가 나가자고 버텼다. 둘이 실랑이를 멈춘 것은 천막 밖에서 들려온 소란 때문이었다.

“밖에 무슨 일 있느냐?”

욱의 물음에 그렇지 않아도 장막을 들추고 야영지 앞마당을 내다보던 윤 내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여기서는 잘 안 보입니다. 소인이 얼른 가서 알아보고 고해 올리겠습니다.”

이제 자잘한 일은 수하들에게 알아 오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아직도 현장을 직접 발로 뛰는 그 열정에 욱이 흠……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윤 내관이 천막 밖으로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환이와 명이가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폐하!”

“마마!”

고 내관이 무례하게 어전에 뛰어 들어온 두 아이들에게 대뜸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윤 내관도 장막 바로 앞에서 두 아이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아이들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공비마마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명이의 대답에 윤 내관이 미심쩍다는 눈길로 다시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비록 황제의 윤허를 받았다고 하지만 승주와 단둘이 숲으로 들어가서는 실컷 놀다가 점심때도 다 지나서 돌아오다니…… 참으로 배짱은 대장군감이로다. 하지만 공비가 돌아온 것이 이렇게 온 야영지가 소란스러울 일인가? 조용히 들어와서 늦은 것을 사죄하고 자숙을 해도 부족할 판에…….

욱도 윤 내관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 거면 진즉 오든가, 아니면 아예 더 놀다가 저녁때나 나타나든가…… 어찌 딱 어정쩡할 때에 나타나서 과인의 중요한 작업을 방해하는고? 참으로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화상이로다.

“왔으면 온 것이지,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우냐? 공비가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이라도 했다더냐?”

욱의 타박에 두 아이들이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손을 마구 내저었다.

“폐하, 공비께서 멧돼지를 잡아 오셨습니다!”

“멧돼지가…… 소만 합니다!”

“이빨도 소인의 팔뚝만 한데, 거기다 이만큼 길고…… 이렇게 휘었습니다!”

“소인은 평생 그렇게 크고 무섭게 생긴 돼지는 처음 보았습니다!”

공비가 멧돼지를 잡아 왔다는 소식에 놀란 욱이 야영지 입구까지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야영지 입구는 공비가 잡은 멧돼지를 구경하러 나온 중신과 위병들, 그리고 내관 및 인근에서 동원된 사냥꾼들로 추석대목의 대흥루 앞마당만큼이나 복작거리고 있었다.

“저 엄니 좀 보게. 이빨이 아주 하늘로 치솟았구먼!”

“내가 사냥을 20년간 다녔어도 저렇게 큰 멧돼지는 처음 보았네. 아침에 온 숲을 다 뒤졌어도 보지 못했던 놈인데,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왔을꼬?”

사냥꾼과 하인들이 먼발치에서 바닥에 부려놓은 멧돼지를 구경하며 연신 감탄을 토해냈다.

“게다가 엄청난 실력이 아닌가? 화살이 바로 심장에 명중을 했구먼.”

“이런 놈은 일격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사냥꾼이 화를 당하기 십상이지. 대체 저 공자님이 뉘신가? 귀한 댁 도련님인 듯싶은데 실력과 배짱이 보통이 아닐세.”

대체 뭘 잡았다고 이렇게 몰려와서 호들갑인가? 뭐, 용이라도 한 마리 잡아 왔는가? 전문 사냥꾼들까지 몰려와서 감탄을 거듭하자 까닭 모를 불안감을 느낀 욱이 모여든 자들을 거칠게 밀어내고 앞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풀숲에 턱 떨어져 있는 크고 시커먼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언저리에 화살 한 대가 꽂힌 채 절명해 있는 멧돼지는 그 크기가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게다가 엄니는 하늘로 치솟았으며 시커먼 터럭은 철사처럼 거칠고 눈은 아직까지도 흰자위를 드러낸 채 부릅뜨고 있어서 그 형상이 멧돼지라기보다는 꿈에 볼까 무서운 괴수에 더 가까웠다.

“아니, 이런…….”

한없이 아늑하고 평화로워만 보이던 화산의 숲에 이런 괴물이 살고 있었다니, 여기가 보기보다 위험한 곳이 아닌가? 아침에 실수 몇 번 하고 오늘이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만 여겼는데, 숲에서 이런 놈을 만나지 않은 것만 해도 운이 좋았던 것이구나…… 망연자실 멧돼지를 쳐다보며 두서없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욱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친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가 정신이 있느냐? 대체 숲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고성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욱이 더욱 대경실색을 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멧돼지 건너편에서 무호가 공비를 잡아먹을 듯 윽박지르고 있었고, 그 앞에서는 공비가 어디서 천둥이 치나 하는 표정으로 옷을 툭툭 털고 있었는데 그 옷이 온통 진흙과 피투성이였던 것이다.

“뭘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풀숲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튀어나오기에 잡아 왔습니다.”

풀밭에 떨어진 도토리 몇 개 주워 왔다는 듯 덤덤한 공비의 태도에 무호가 휘청거리다가 춘수의 부축을 받고서야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

“오라비도 없는데 너 혼자 숲에서 산짐승을 쫓았단 말이냐? 멧돼지가 얼마나 거칠고 위험한 짐승인데, 게다가 이 정도 크기면 위험하기가 호랑이나 마찬가진데 대체 어쩌자고…….”

“사냥하러 숲에 들어갔으면 뭐라도 한 마리 잡아 와야지, 그럼 빈손으로 옵니까? 다행히 워낙 풍족한 숲이라서 사냥감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무호가 더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진즉에 이런 사태를 염려하며 무호의 곁을 지키던 부장들이 후다닥 달려들어 그를 붙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호는 승주와 단둘이 숲으로 들어간 후 점심때가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공비 때문에 속이 숯덩이가 되어가던 참이었다. 황제의 후비가 외간 사내와 단둘이 깊은 숲에 들어간 것만 해도 나중에 무슨 말이 나돌지 모를 일인데, 사냥터에 나갔던 모든 사람들이 야영지로 돌아온 후에도 둘만 종적이 묘연하니 이것은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소문도 걱정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숲에서 둘이 사고라도 친 것은 아닌가, 덤불이 울창한 곳을 겁도 없이 내달리다가 낙마라도 한 것은 아닌가, 들짐승이 바글바글한 곳이니 큰 뿔 사슴이라도 만나 그 뿔에 받힌 것은 아닌가…… 오만 걱정으로 얼굴이 노랗게 떠가던 참에 집채만 한 멧돼지를 사냥해서 나타난 공비를 본 무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는데, 그중 압도적인 감정은 역시 분노였다.

“이 망할 것아! 누가 너한테 멧돼지를 잡아 오라더냐? 그렇게 좋아 죽던 놈하고 단둘이 숲에 갔으면 조용히 다니며 정담이나 주고받을 일이지…….”

무호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울부짖었다. 무호를 붙들고 있던 부장들이 그의 다리를 걸고 등을 짓눌러 바닥에 엎어버렸다. 그러고는 황급히 그 입을 틀어막았다. 지척에 황제가 와 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마주치기만 하면 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무호와 공비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욱이 쏟아지는 좌중의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 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멧돼지를 멀리 돌아서 예를 갖추고 꿇어앉은 공비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친 데는 없느냐?”

“예, 폐하.”

“다행이구나. 옷이 온통 피투성이라…… 깜짝 놀랐다.”

욱이 한숨을 쉬며 공비를 일으켰다. 

“옷은 멧돼지를 말 잔등에 올리느라 그 피가 묻은 것입니다. 놀라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저만한 돼지를 잡은 것도 놀랍지만 그것을 들어 말 잔등에 올린 기운도 경악스러워서 욱이 심호흡을 했다.

“숲에 이런 놈이 돌아다니는 줄 알았으면 덜렁 한 선생만 붙여서 숲에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을…… 모든 것이 과인의 불찰이다.”

욱이 무호를 힐끔 돌아보면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무호는 아직까지도 부장들에게 깔려서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굳이 무호를 지금 일으켜 세우고 싶지는 않아서 욱이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저쪽 끄트머리에 말고삐를 붙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승주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너도 옷에 피가 많이 묻었구나. 다친 데는 없느냐?”

이젠 승주를 보기만 해도 애잔한 마음이 솟구쳐서 욱이 그 마른 손을 덥석 잡았다.

“저, 저는…… 저도 아씨와 함께 멧돼지를 옮기느라…….”

“딱하기도 하지. 그래, 얼마나 놀랐느냐?”

“다소 놀라기는 했으나 부지불식간이라…….”

욱이 갑자기 손을 잡는 바람에 숲에서 멧돼지를 보았을 때보다 더 놀란 승주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욱은 승주의 손을 놓기는커녕 휙 끌어당겨서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과인도 그 심정 잘 안다. 지난 3년간 크고 작은 일에 어찌나 놀랐던지…….”

“예?”

“과인의 천막으로 가자. 바로 상을 차리게 할 것이니 점심도 먹고, 어의에게 진맥도 받고…….”

승주를 다독여서 윤 내관 쪽으로 밀어 보낸 욱이 다시 공비를 돌아보았다.

“뭘 보고 섰느냐? 따라오지 않고? 너도 점심은 먹어야 할 게 아니냐?”

귀인은 아침나절에 화살 한 대로 달려드는 사슴을 잡고, 후궁은 혼자 숲을 뒤적이고 다니다가 집채만 한 멧돼지를 잡아 오고…… 그런데 정작 자신은 오전 내내 코앞에 몰아다 주는 사냥감도 다 놓치고 빈손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황제이자 사냥 대회의 주최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인과 공비의 지아비로서 체면이 심히 깎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포상을 걸어놓고 하는 사냥 대회에서 우승은 활쏘기나 창던지기에 특기가 있는 무장들이 도맡다시피 했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큰 이변이 없다면 허연과 공비가 상금으로 내건 금 열 냥과 지난 설에 왕쾌가 주월성 최고의 장인에게서 천금을 주고 구했다며 선물로 바친 단검을 나눠 갖게 생겼으니 생각할수록 심란해서 욱이 심호흡을 하는 척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못 먹느냐? 음식이 안 맞느냐?”

일껏 차려준 점심상을 앞에 놓고도 한동안 넋을 놓고 앉아만 있던 승주가 겨우 꿩 삶은 국물을 몇 술 떠먹고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자 욱이 호들갑을 떨며 그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아닙니다. 많이 먹었습니다.”

“많이 먹는 것은 저 정도가 많이 먹는 것이고…….”

욱이 맞은편에 앉은 공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공비는 이른 아침부터 말 달리고 사냥하느라 어지간히 허기가 졌었는지 식탁에 앉자마자 소맷자락을 걷어붙이고 소갈비부터 뜯기 시작했다.

찬물 한 잔 마시는 것까지 격식을 갖추고 법도를 따지는 지엄한 황실에서 품계 높은 후궁이, 그것도 어전에서 맨손으로 소갈비를 뜯어 먹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현재 황제의 천막 안에 공비를 상대로 식사 예절을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마당에 부려져 있는 흉악한 형상의 멧돼지를 보고 온데다, 황제조차 아무 말 없이 공비가 점심으로 소 한 마리를 다 뜯어 먹다시피 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으니 굳이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만한 크기의 멧돼지를 잡아 왔으면 점심 한 끼 정도는 어떻게 먹든 문제 삼지 말자는 공감대가 은연중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욱이 공비의 옆에 수북이 쌓인 갈비뼈를 눈대중으로 헤아리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러곤 다시 승주를 돌아보았다.

“멀건 국물 몇 숟가락 떠먹고 요기가 되겠느냐?”

“폐하, 소인은…….”

승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욱의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수풀에서 튀어나온 멧돼지 때문에 놀라기도 했고 지난 며칠 피곤이 쌓여서 애초에 식욕이라곤 없었는데, 거기에 황제가 코앞에서 턱을 받치고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승주는 그 앞에서 밥은커녕 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도 고역이었다.

“왜? 갈비나 백숙이 입에 안 맞느냐? 달리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양치 말고 얘기를 하거라. 혹, 너도 나물 반찬이 취향이냐?”

“아닙니다. 소인은 본시 아무것이나 다 잘 먹습니다. 게다가 꿩이며 쇠고기며…… 모두 귀한 음식이 아닙니까?”

욱의 계속된 권유에 승주가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탕국에서 제법 큰 고깃덩어리를 건져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승주는 생선을 좋아합니다.”

승주가 쇠고기 한 조각을 좀처럼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씹고만 있는 것을 쳐다보던 공비가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툭 뱉었다. 그러곤 자신을 돌아보는 욱과 허연의 눈길에 당황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들고 있던 소갈비를 다시 맹렬한 기세로 뜯기 시작했다.

승주는 얌전하게 앉아서 한없이 조용하고 우아하게 음식을 먹는 데 반해 공비는 앉은자리에서 소 한 마리를 다 먹어치울 기세라 욱이 혀를 끌끌 찼다. 성품도 그렇고 행동거지도 그렇고…… 어쩌면 이렇게까지도 극과 극인고?

“한 선생이 생선 좋아하는 것을 네가 어찌 아느냐?”

욱이 짓궂은 표정으로 공비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승주는 방금 삼킨 고깃덩어리가 명치에 얹혀서 콜록 기침을 했다. 하지만 공비는 여상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입궁하기 전까지 한 집에서 지내며 글도 배우고 사냥도 같이 다녔는데 그 정도도 모르겠습니까?”

“허면 과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아느냐?”

공비가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느냐는 듯 욱을 쳐다보았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셨습니까? 폐하께서는 아무거나 다 잘 드시지 않습니까?”

공비의 성의 없는 대답에 욱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러자 공비가 도리어 의아한 표정으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마마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폐하께서는 고기 종류라면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시고 잘 드십니다.”

허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상 가운데에 놓였던 갈비찜을 공비 앞으로 옮겼다.

“마마께서는 마음 쓰지 마시고 점심을 마저 드십시오. 갈비를 더 드시겠습니까?”

허연의 권유에 욱이 짐짓 놀란 척하며 탕기를 다시 있던 자리로 밀었다. 

“여기서 뭘 더 먹으라고 권하는가? 이미 공비 옆에 갈비뼈가 산같이 쌓였거늘…… 돼지 한 마리 잡아서 던져놓고 소 한 마리 갖다 먹는 것은 내가 너무 손해일세.”

“폐하…….”

욱의 짓궂은 농담에 허연이 슬쩍 눈총을 보냈다. 하지만 욱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윤 내관을 찾았다.

“예, 폐하.”

“한 선생이 생선을 좋아한다니 몇 가지 들여오게. 아까 먹었던 장어도 고소하니 먹을 만하더구먼.”

“예, 폐하. 바로 준비하여 올리겠습니다.”

황제가 자신이 좋아하는 생선 요리를 만들어 오라고 상선을 재촉하는 것을 본 승주가 다시 입맛을 잃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승주도 그간 일하고 책 쓰면서 나름대로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을 겪어보았고, 총명하고 관찰력도 뛰어난 덕에 사람의 내심을 잘 파악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승주에게도 황제처럼 파악이 안 되는 상대는 보다보다 처음이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승주가 울컥한 눈길로 욱을 슬쩍 노려보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자신을 그윽하게 쳐다보고 있던 욱과 눈길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자신과 눈길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바싹 얼어서 뒤로 물러앉는 승주를 보고는 욱이 씨익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곤 은근하게 속삭였다.

“생선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잉어? 민어? 가물치?”

“소, 소인은…….”

“특별히 즐기는 음식이 있으면 어려워 말고 얘기를 하거라. 처소로 보내줄 것이니…… 뭐든 든든히 먹어야 기력이 생기지.”

황제가 승주 옆에 붙어서 치근덕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공비가 뼈만 남은 갈빗대를 접시 위에 툭 던졌다.

“승주는 물에서 건진 것이라면 다 좋아합니다.”

공비의 시비 섞인 참견에 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대는 갈비나 더 드시게.”

“다 먹었습니다.”

공비가 얼른 식탁에서 물러앉았다.

“겨우 갈비…… 열두 대 뜯고 배가 부른가?”

“너무 많이 먹으면 이따가 말 탈 때 부대낍니다.”

소 갈비뼈로 식탁 위에 산을 만들고도 많이 안 먹었다고 잡아떼는 공비의 겸손함에 욱이 요것 봐라? 하는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을 타다니? 어딜 가느냐?”

욱의 물음에 공비가 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딜 가다니요? 사냥하러 안 가십니까?”

“…….”

사냥 얘기에 욱이 급작스럽게 기가 죽어서 공비의 눈길을 피했다. 오후 사냥 얘기를 꺼낸 것뿐인데 욱의 표정이 떨떠름해지는 것을 본 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먹는 데 정신이 팔려서 대화가 통 없었던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흠…… 헛기침을 했다.

“사냥은 어떠셨습니까? 사슴은 많이 잡으셨습니까?”

“…….”

“잡은 사슴은 밖에 있습니까?”

“…….”

오늘 있었던 일은 아예 기억에서 싹 지우고 싶기만 한 욱의 표정이 점점 썩어갔다. 그것을 보다 못한 허연이 차 주전자를 들고는 직접 차 한 잔을 따라서 공비에게 건넸다. 그러곤 슬쩍 고개를 저어 보였다. 허연의 표정과 조심스러운 몸짓을 보고는 이게 무슨 의미인가 잠시 고민하던 공비가 설마 아니겠지 싶은 표정으로 욱을 쳐다보았다.

“혹, 사슴을 한 마리도 못 잡으셨습니까?”

“…….”

“아니, 어떻게…….”

“어허!”

욱이 얼굴을 붉히며 벌컥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공비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숲에 사슴이 그렇게 바글바글한데, 정말 빈손으로 돌아오셨습니까?”

“과인의 업이 사냥꾼이냐? 허탕을 칠 때도 있는 것이지!”

욱의 구차한 변명에 공비가 피식 웃었다.

“여기 사냥이 업인 사람도 있습니까?”

“아, 진짜…….”

욱이 창피함과 무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불이 일 것 같은 눈길로 뒤에 서 있던 윤 내관을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오전 내내 욱의 신경질에 시달린 윤 내관이 딸꾹질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폐하…… 제가 뭘…….”

공비한테 깨지고서 왜 나를 잡으려고 드시는고? 참으로 만만한 것이 상선이로다…… 윤 내관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애처로운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부당한 상황에서 바른말로 황제를 타이르고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허연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연이 입을 떼기도 전에 욱이 상처 입은 호랑이처럼 거칠게 울부짖었다.

“당장 사냥터로 나갈 것이다. 차비를 하라!”

욱이 휘하에 중신과 위병들을 이끌고 아침에 사냥을 시작했던 들판에 도착한 것은 이미 신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보통 때라면 정오를 조금 지난 이른 시각이지만 초겨울의 숲 속으로 사냥을 하러 들어가기엔 늦은 감이 있는 때였다. 들판으로 나온 욱이 어느새 서편으로 확 기울어버린 해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냥꾼들이 남쪽 숲에서부터 이미 몰이를 시작했으니 반 시진 정도만 기다리시면 들판이 사슴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윤 내관이 허연의 등 뒤에서 고개만 삐죽 내밀고는 사냥의 진행 상황을 전했다.

“반 시진이면 날이 저물겠구나.”

“송구합니다, 폐하. 혹시 오후에 사냥을 하실까 싶어 몰이꾼들을 대기시켜놓기는 했지만, 이리 급히 뛰쳐나오실 줄은 예상치 못한 탓에…….”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욱의 뒤에서 바짝 붙어 오던 공비도 덩달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뭐…… 날이 저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코앞까지 몰아오는 사슴인데, 눈을 감고 창을 던져도 한 마리는 맞지 않겠습니까?”

공비의 거침없는 도발에 욱이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곤 고개를 휙 돌려서 공비를 노려보았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깟 돼지 한 마리 잡은 것이 무슨 대수라고…….”

“그런 말씀은 우선 토끼라도 한 마리 잡고 난 후에 하시지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공비의 말대꾸에 욱이 약이 올라서 씩씩거렸다. 욱과 공비가 아옹다옹 다투는 것을 지켜보며 킥킥거리던 허연이 욱의 눈총에 얼른 표정을 고쳤다. 그러곤 심술보가 터지기 전에 틀어막으려고 얼른 그 옆으로 다가갔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이젠 몸도 어지간히 풀리셨을 터, 아침 같은 실수는 없으실 겁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네. 두고 보게. 내 기필코 공비가 잡은 것보다 더 크고 못생긴 멧돼지를 잡고 말 것이니!”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허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멧돼지면 어떻고 사슴이면 어떻습니까? 그런 부담 갖지 마시고 사냥감에…….”

“왜? 내가 못할 것 같은가?”

허연마저도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욱이 울컥 분통을 터뜨렸다. 욱이 벌써부터 긴장해서 신경이 바짝 곤두선 것을 눈치 챈 허연이 그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집중하십시오.”

“노력 중일세.”

욱이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내색을 않으려고 애쓰고는 있었지만 들판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욱은 창을 잡은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전업 사냥꾼이나 다름없는 무호와 그 부장들이 보는 앞에서 또다시 아침처럼 실수 연발이면 어쩌나 겁도 났고, 거기에 혼자서 호랑이급 멧돼지 한 마리를 사냥하고는 기세가 등등한 공비까지 옆에 붙어 있으니 그 부담감이 아침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욱의 뻣뻣한 어깨를 어루만지던 허연이 핏기가 가실 정도로 창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 손등을 살짝 긁었다. 그 바람에 욱이 등을 부르르 떨면서 허연을 노려보았다.

“집중하라면서?”

“긴장도 좀 푸십시오. 전쟁터에 나오셨습니까?”

“내가 무슨 긴장을 했다고…….”

욱이 투덜거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입술을 달달 떨고 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아침에 있었던 몇몇 실수를 떨치지 못하고 잔뜩 얼어 있는 욱을 안쓰러운 눈길로 잠시 지켜보던 허연이 윤 내관을 가까이 불렀다.

“예, 귀인.”

“시각이 이미 늦었는데 여기서 몰이꾼들을 기다리며 반 시진을 더 지체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싶네.”

“하오시면…….”

“내가 정 내관과 함께 폐하를 뫼시고 숲으로 들어가서 직접 사냥감을 찾겠네. 위사령에게는 부장들 대여섯 명만 데리고 뒤를 따르라 이르게.”

“하오나 두 분만 숲에 드시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는지요?”

어떤 경우든 황제의 주변에 백여 명의 위병들이 따라다니는 것은 다 까닭이 있는 일이라서 윤 내관이 난색을 표했다. 그때 곁에 있던 공비가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나도 폐하를 따라 뫼시겠네. 거기에 위병들 서너 명만 더 붙이면 괜찮지 않겠는가?”

허연과 정 내관, 그리고 진관우는 윤 내관이 아는 한 당대 최고의 무인들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고수임은 분명한데 그 무공을 가늠할 길이 없는, 그래서 더 두려움을 자아내는 공비까지 가세를 한다면 이는 위병 백 명이 따라다니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전력이었다. 

“아, 뭐 그러시면…….”

윤 내관이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욱은 못마땅한 눈길로 공비를 흘겼다.

“너는 뭘 굳이 따라오려고 하느냐? 오라비와 다니는 편이 더 재미있지 않겠느냐?”

자신을 어떻게든 떼어내려는 빤한 수작에 공비가 피식 웃었다.

“오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재미로만 따지면 오라버니와 다니는 것보다는 폐하와 함께 다니는 편이 만 배 낫겠던데요.”

숲 속은 어두웠다. 낙엽송이 우거진 숲의 동편은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아서 나무 둥치엔 시퍼런 이끼가 사람의 허리 높이까지 두껍게 타고 올라와 있었다. 낙엽이 많이 졌다고는 해도 워낙 울창한 숲인데다 초겨울의 짧은 해가 이미 해가 서편으로 많이 기운 터라 숲은 음산한 느낌이 들 정도로 컴컴한 한편 조용했다.

“아니, 뭐…… 이렇게 정처 없이 헤매면 어디서 사슴이 나오는 것인가?”

반 시진 넘게 숲 속을 뒤졌지만 사슴뿔 끄트머리도 볼 수가 없자 욱이 슬그머니 투덜거렸다. 들판에 그대로 있었으면 지금쯤 사냥꾼들이 사슴을 몰아 왔을 텐데 괜히 숲에 들어왔나 싶기도 하고, 또 달리 생각하면 아침처럼 코앞에서 뛰는 놈들도 못 잡아서 망신을 사느니 그냥 산짐승을 못 찾아서 못 잡았다고 하는 게 나을까 싶기도 하고…… 어쨌든 심사가 편치 않아서 욱이 무성한 덤불을 창끝으로 툭툭 치며 앞으로 나갔다.

“조금만 더 찾아보시지요. 분명 이 근처에 큰 놈이 있을 것입니다.”

허연이 껍질이 벗겨지다 못해 도끼질을 당한 듯 심하게 파인 나무를 가리켜 말했다.

“흠…….”

그제야 사슴의 흔적을 본 욱이 뻘쭘한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진즉부터 곁에 바짝 붙어서 오던 공비가 허연을 거들었다.

“군데군데 오디나무도 많고 머루넝쿨도 지천이니, 근처에 사슴이나 멧돼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런 거 하나도 못 보았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욱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토했다.

“아침에 몰이꾼들이 한바탕 쓸고 갔는데 그놈들이 아직도 이 근처에 있겠느냐? 놀라서 어디 먼 곳으로 달아났겠지.”

“이제 초겨울이라 먹이도 귀할 때가 아닙니까? 뭐라도 먹고 몸을 불려야 겨울을 날 터…… 아무리 위험해도 산짐승은 먹이 근처를 떠나지 못합니다.”

나무는 나무고 풀은 풀이라…… 그간 사슴 사냥을 여러 번 했다고 해도 몰이꾼들이 코앞까지 몰아다 준 사슴을 향해 창이나 던졌을 뿐, 야생 동물의 습성이나 추적 방법에 관해선 쥐뿔도 아는 게 없던 욱이 아침보다 더 마음 상하고 기가 죽어서 입술을 삐죽였다.

“너는 출궁하여 오갈 곳이 없어도 사냥을 해서 충분히 먹고살겠구나.”

욱의 심술궂은 타박에 공비가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좀 떨어져서 따라오던 승주도 핏기 가신 얼굴로 욱을 쳐다보았다. 

“폐하!”

보는 눈도 얼마 없겠다, 허연이 욱의 어깨를 거칠게 쥐어박으며 좀 전의 실언을 나무랐다.

“낮술을 드셨습니까? 그 무슨 황망한…….”

“나는 뭐…… 말도 못하는가? 그리고 좀 전에 한 말은 엄연히 칭찬이었네.”

말을 내놓고 스스로도 아차 싶었던 욱이 얻어맞은 어깨를 긁적이며 변명을 했다. 그러곤 공연히 못마땅한 눈초리로 공비를 돌아보았다.

“홀가분하게 다니자고 위병들도 떨구고 왔거늘, 한 선생은 뭐하려고 붙여 왔느냐?”

“굳이 따라오는 것을 어찌합니까?”

공비가 욱의 시선을 피하며 보일 듯 말듯 미소를 지었다. 공비에게서 그렇게까지 고운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지라 욱이 잠시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잡목이 울창하고 곳곳이 덤불인데 낙마라도 하면 어쩌려고?”

“승주가 승마에 서툴다는 것은 오라버니나 다른 부장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아무 데서나 말에서 툭툭 떨어질 정도는 아닙니다. 저는 승주보다는 폐하가 걱정입니다.”

“과인이?”

“사냥꾼이 드나들지 못하는 숲이라서 그런지 대현성에서조차 보지 못한 큰 짐승들이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잡은 멧돼지도 그렇고…… 숲 곳곳에 남은 흔적이나 발자국을 봐도 그렇고…… 전문적인 사냥꾼들도 사슴뿔에 찔리거나 발굽에 밟혀서 크게 다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공비의 염려에 욱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공비도 욱을 비슷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왜요?”

“네가 내 걱정을 다 해주는구나 싶어서 그런다.”

“그야 뭐, 사냥 실력은 되게 변변치 않으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퉁명스레 한마디를 던지고는 공비가 말 옆구리를 툭 찼다.

“저런…….”

욱이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러곤 말에서 내려 사슴 발자국을 뒤적거리고 있는 정 내관을 불렀다.

“뭘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느냐?”

“여기저기 들짐승들이 돌아다닌 흔적이 지천이라 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곧 날이 저물 텐데, 돼지 새끼라도 한 마리 잡아 가셔야지요.”

“빈손으로 돌아가면 좀 어떠냐? 나는 황제인데.”

“그야 뭐…….”

정 내관이 씩 웃으면서 다시 말 잔등에 올랐다.

“허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저기 한 선생에게 위병을 하나 붙여라.”

욱의 명령에 정 내관이 의아한 눈길로 승주를 돌아보았다.

“저자에게 위병을…… 왜요?”

“좀 전에 공비가 한 말을 듣지 못했느냐? 숲에 크고 사나운 짐승들이 많다니 혹 뭐가 튀어나와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니냐?”

욱의 대답에 정 내관이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승주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욱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정 내관의 눈길엔 경계와 의심의 빛이 역력했다.

황제가 변방에서 온 장수의 노비를 한 선생이라고 꼬박꼬박 높이 부르고, 주변의 눈길도 아랑곳없이 밥은 먹었는가, 아픈 곳은 없는가 하며 정작 후궁인 공비에게조차 한 번 보이지 않았던 다정함을 과시한 여파로 중신들 사이에선 조만간 우화원에 별궁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 아니냐는 푸념 섞인 우스갯소리가 돌고 있었다.

사실 최측근인 정 내관이 보기에도 욱이 승주를 대하는 태도는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물론 승주가 외모도 곱고 언행도 단정하고 정안군과 승상을 감동시킬 만큼 문재도 뛰어난, 여러모로 비범한 청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것은 욱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떻게 허연을 두고…… 게다가 승주는 공비의 옛 정인인데…….

“폐하, 저 잠시만 따로 보시지요.”

정 내관이 욱의 말고삐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허연과 일행에게 잠시 급한 볼일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곤 욱을 숲 속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소피가 급하냐? 나는 괜찮은데…….”

사냥할 시간도 촉박한데 나를 어디로 데려가나 싶어서 욱이 정 내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정 내관이 욱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따졌다.

“폐하, 설마…… 정말…….”

허연이 고향으로 떠난 후 4년간, 힘들고 암울했던 것은 욱 혼자가 아니었다. 한창 혈기 넘칠 나이에 곁에 처첩을 일곱이나 두고도 욱의 청승이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라서 윤 내관을 비롯한 지밀 내관들은 곁에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고, 그중에서도 정 내관은 당장 연주국으로 달려가 허연을 잡아오겠다며 말 잔등에 안장을 얹었다가 주변의 만류로 마구간에서 끌려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바싹 말리며 그리워하던 허연이 제 발로 돌아와 우화원에 다시 든 것은 하늘이 내린 복이거늘, 겨우 1년 만에 다른 놈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성격 우직한 정 내관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폐하, 설마 그자를 마음에 두신 겁니까?”

“응?”

“한 선생인가 승주인가 하는 그놈 말입니다!”

“아니, 한 선생이 뭘…….”

“폐하께서 한눈파시는 것을 알면 귀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겁니다. 이미 궁에 계신 마마님들을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꼴도 참고 봐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제야 정 내관의 말뜻을 이해한 욱이 정색을 했다.

“어허! 무엄하다. 과인을 어찌 보고?”

욱의 나직한 호통에 정 내관이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니면…… 왜 그렇게까지 저자에게 마음을 쓰십니까?”

“한 선생은 장차 과인을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니라.”

“벼슬이라도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정 내관이 아직도 미심쩍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렇게 총명하고 재주가 많다니 곁에 두는 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그럼 면천시키고 벼슬을 내린다는 성지나 한 장 날려줄 것이지 뭘 그렇게 물고 빨고 유난인가 싶었던 것이다.

“벼슬은 사소한 일이다. 벼슬이야 자리가 비면 그 자리를 채울 자가 수천이지만, 한 선생이 할 일은 한 선생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 일이다.”

정 내관이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일단 승주에게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가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 일이라…….

“그런 일도 있습니까? 뭡니까? 그게?”

“너도 줄곧 내 주변에 있었는데 아직도 감을 못 잡았느냐?”

“뭘요?”

정 내관의 반문에 욱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 일이 있다.”

“아, 그럼 정말로…….”

무심코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욱을 돌아보던 정 내관이 저 혼자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욱이 큰 소리 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며 그 어깨를 툭 쥐어박았다.

“그러니 자칫 다치거나 상하지 않게 간수를 잘해야지. 생각해보니 위병 하나로는 안 되겠구나. 오늘은 네가 직접 한 선생을 보호하도록 해라.”

오후의 사냥은 아침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실망스러웠다. 아침엔 근처 성읍에서 동원된 사냥꾼과 사냥개들이 온 숲을 뒤집어엎은 덕에 펄펄 뛰는 산짐승은 원 없이 구경을 했었다. 하지만 일행 대여섯 명만 데리고 직접 숲 속으로 들어와보니 큰 숲이 온통 텅 빈 듯 적막했고, 움직이는 것이라곤 바람결에 떨어져 내리는 낙엽뿐이었다.

아니, 그 많던 사슴과 멧돼지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사슴이며 멧돼지는 고사하고 토끼도 한 마리 뵈질 않으니…… 이는 방향 선정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욱이 창끝으로 일없이 덤불을 푹푹 쑤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시무룩하십니까?”

집에 굶고 있는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우 놀러 나와서 퉁퉁 부어 성질을 피우는 욱을 보다 못한 공비가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사냥이 이렇게까지 힘들고 심심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구나.”

“사냥이 업인 사냥꾼들도 사슴이나 멧돼지 한 마리를 잡으려고 몇 날 며칠 숲을 헤매고 다니기 일쑤입니다.”

“그러냐? 그나마 사냥꾼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욱이 투덜거리며 말의 무릎까지 뒤엉켜 있는 덤불숲을 창으로 툭 내리쳤다.

숲 속으로 들어온 지 한 시진도 넘은 때라서 이젠 정말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좀 전부터는 사냥 천막 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숲을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긴 했지만, 울창하고 빡빡한 산중이라 걸음이 늦어져서 길을 반도 못 가서 날이 저물게 된 것이었다.

“오늘은 운이 없으신 듯싶습니다. 그러니 천막에서 하루 주무시고 내일 다시 나오시지요.”

허연이 욱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천막에서 잠이나 잘 것을…… 괜히 나왔네.”

허연이 뭐든 너그럽게 받아줄 태세를 보이자 욱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껏 칭얼거렸다.

“잠시 나와서 산책을 한 셈 치시지요. 저는 폐하와 함께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좋은데요.”

돌아가면 맛있는 거 먹이고 잘 달래서 일찍 재워버려야겠다고 작전을 짜면서 허연이 계속 욱을 어르고 달랬다. 그때, 정 내관 때문에 승주 근처에도 못 가고 적적하게 덤불만 뒤지던 공비가 툭 끼어들었다.

“이상합니다. 주변이 온통 머루덤불인데 어찌 새끼 돼지 한 마리가 뵈질 않는지…….”

승주를 잘 지키라고 했더니 눈치 없이 전쟁터에서 붙잡은 포로 끌고 다니듯 옆구리에 철썩 붙이고 철통처럼 지키는 정 내관 때문에 아까부터 공비도 심기가 편치 않던 참이었다.

“이렇게 산짐승 만나기가 어려운데 넌 아까 그 돼지는 어떻게 잡았느냐?”

욱이 만만치 않게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꼭 이렇게 너른 덤불숲이 있기에 뭐가 나오겠다 싶어서 툭툭 치며 들어갔더니 그놈이 불시에 튀어나왔습니다.”

공비는 별로 고생도 않고 그 커다란 멧돼지를 잡았는데, 나는 오늘따라 왜 이리 운도 없는고? 그깟 돼지 한 마리, 잡아도 그만 못 잡아도 그만이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연거푸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도 속 편한 일은 아니라서 욱이 엉킨 덤불을 신경질적으로 끊었다. 그때, 덤불이 들썩이는가 싶더니 뭔가가 욱의 곁을 휙 스쳐 지나갔다.

“돼지다!”

공비가 수풀 밑에서 튀어나온 아담한 크기의 멧돼지를 발견하고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섰다. 말굽에 길이 막힌 멧돼지가 급하게 방향을 틀어서 옆으로 도망치자 이번엔 허연이 수풀을 훌쩍 뛰어넘어 멧돼지의 도주를 막았다.

“뭐하십니까? 그쪽으로 갑니다!”

“폐하! 지금입니다!”

공비가 빨리 창을 던지라고 성화를 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야생동물은 바람처럼 빨랐다. 게다가 갈지자로 방향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통에 욱은 그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잡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욱이 창을 잡은 채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이 돼지가 욱의 옆으로 빠져나가서 뒤에서 따라오던 위병들 쪽으로 냅다 달렸다. 하지만 이번엔 위병 몇 명이 그 앞을 막고 검으로 덤불을 두드려 돼지를 다시 욱이 있는 쪽으로 쫓아 보냈다. 황제께서 아무거나 한 마리 잡으셔서 체면치레도 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갔으면 싶은 마음은 다 같았던 것이다.

사방이 막혀서 갈 곳을 잃은 돼지가 다시 욱을 향해 달려왔다. 여전히 빠르고 정신없이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이번에야말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욱이 창을 움켜잡았다. 그러곤 달려오는 돼지를 향해 있는 힘껏 창을 던졌다.

“에잇!”

돼지가 갑자기 방향을 트는 바람에 욱이 던진 창은 돼지의 엉덩이를 스쳐 수풀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돼지는 진풍의 다리 사이로 쏜살같이 빠져 나가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장창을 움켜잡고 흑마에 오른 욱의 모습은 호랑이라도 능히 잡겠다 싶을 정도로 그 풍모가 대단했다. 그런데 정작 실력은 코앞에서 얼쩡거리는 새끼 돼지 한 마리 어쩌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을 확인한 공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공비가 대놓고 타박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욱의 자존심은 땅에 털썩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허연이 수풀에 꽂힌 창을 뽑아서 욱에게 휙 던졌다.

“뭘 하십니까? 저녁거리가 도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란 말인가?”

“쫓으십시오!”

욱에게 버럭 소리를 치고는 허연이 말을 달려 돼지가 사라진 덤불숲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이 잡목으로 우거진 숲 속에서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작은 돼지를 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방이 장애물이니 사냥감만 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날랜 사냥감에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우거진 덤불이 천하제일의 명마인 진풍의 발목을 번번이 휘감는 통에 숲을 달리던 중 몇 번이나 낙마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놓친 것 같네.”

욱이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허연에게 소리쳤다. 얼마나 정신 놓고 돼지만 보고 달렸는지, 고개를 들었을 때 욱의 곁에 남은 이는 허연뿐이었다. 우거진 숲 속을 거침없이 달리고 돌면서 수풀을 수색하는 허연의 모습은 마치 화산의 숲에서 나고 자란 여우처럼 날렵하고 우아했다.

“이쪽입니다!”

허연이 욱에게 손짓을 한 번 하고는 덤불 너머로 휙 사라졌다. 나무에 두 번이나 부딪힐 뻔하고, 고삐를 거칠게 잡아채는 통에 입을 다쳐서 성질이 잔뜩 오른 진풍의 거친 투레질을 견디면서 욱이 허연의 곁을 바짝 따라붙었다.

숨차고 어지럽고, 그 와중에 해는 거의 져서 눈앞에 뵈는 것도 없는데 허연이 허리까지 자란 잡목 숲을 활로 후려쳤다. 그러자 덤불 속에서 돼지가 꽥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아까부터 저놈의 돼지를 꼭 잡아야 되나 싶은 회의감이 들던 터라 욱이 되는대로 창을 내던졌다.

당연히 그 성의 없는 창질에 돼지가 와서 맞아줄 리 없어서 이번에도 나라 안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들어 바친 아름다운 창은 낙엽더미에 깊이 박혔고, 돼지는 창 옆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실력이 정말 형편없으십니다.”

실력은 그렇다 쳐도 뭔가 잡으려는 의지조차 없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 허연이 대놓고 욱을 나무랐다.

“뭐 어떤가? 저놈 아니면 저녁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냥감 없다고 그렇게 투덜거리실 때는 언제고요?”

“저런 새끼 돼지 한 마리 잡는다고 내 체면이 서겠는가? 다 귀찮네.”

욱이 헐떡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 대꾸에 허연이 눈을 실쭉이 뜨고 욱을 노려보았다.

“어쩌란 말인가? 하도 숲 속을 빙빙 돌았더니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네.”

“저 새끼 돼지도 못 잡으면 오늘 저녁은 없습니다.”

허연의 으름장에 욱이 발끈했다.

“아니, 못 잡을 수도 있지, 그렇다고 밥을 굶으란 말인가?”

욱의 반발에 허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무심하게 한마디를 더 붙였다.

“잠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돼지가 사라진 방향으로 앞장서서 뛰어든 욱이 눈에 불을 켜고 수풀을 들쑤셨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돼지는 어디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종일 고생만 하고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만도 짜증 나는 일인데 사냥 천막에서조차 독수공방이라니…… 이제 화산 일정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럴 거면 무엇 때문에 화산 원행을 위해 중신들과 그토록 실랑이를 벌였으며 그 많은 수행인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그놈도 살겠다고 그렇게 내달렸는데 굳이 찾아내서 저녁거리로 삼는 것은 너무 비정하지 않은가?”

멧돼지를 완전히 놓쳐버린 것을 깨달은 욱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허연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인정이 넘치시니 저녁엔 찬물 한 잔 드시고 베개나 끌어안고 주무셔도 개의치 않으시겠습니다.”

“아니, 그건…….”

“허면 사냥은 접고 이만 돌아가시지요.”

허연의 냉랭하고 매정한 태도에 욱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창날로 곁에 선 나무 등걸을 거칠게 내리쳤다. 그때, 숲이 크게 들썩인다 싶더니 꽤액…… 하는 괴성과 함께 시커먼 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으악…….”

생각지도 않았던 멧돼지의 출몰에 욱이 혼비백산을 해서 고삐를 당겼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돼지는 좀 전까지 쫓아다니던 새끼 돼지가 아니라 덩치가 그 두 배도 넘어 보이는 완전히 다 자란 수퇘지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말 등에서 나자빠질 뻔한 욱이 간신히 중심을 잡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것이 오늘 밤 독수공방을 면할 마지막 기회라는 깨달음이 퍼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욱과 허연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달려 멧돼지를 쫓았다. 날은 어두웠고 숲은 잡목이 빽빽했지만 이제 우거진 숲을 달리는 일에는 욱도, 진풍도 어지간히 익숙해져서 어렵지 않게 그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때론 서로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고, 때론 은근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어두운 숲을 날듯이 달렸다.

온 숲을 헤집으며 날뛰는 멧돼지를 쫓아 달리던 두 사람이 달빛이 쏟아지는 작은 들판으로 뛰어나왔다. 보름도 아니었고 반쯤 구름에 가린 미미한 빛이었지만, 숲 속에서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욱에게는 달빛조차 눈이 부셨다.

달빛을 머금은 숲의 풍경은 밝은 낮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낙엽도 반이나 지고 군데군데 풀도 시들어서 물이 빠진 듯 빛이 바래 있던 숲은 창백한 달빛 아래에선 차가우면서도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밤바람은 속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대기는 온통 나무와 풀의 향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달빛과 별빛이 가득한 들판은 그 전체가 은박을 뿌려놓은 듯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숲을 달리다가 모르는 사이에 선계로 뛰어든 것 같은 신비로움과 이질감에 욱이 잠시 숨을 멈췄다. 이상하다. 그간 이 숲에서 사냥도 여러 번 했었고, 밤에 나와본 것도 처음이 아닌데 오늘따라 어찌 이런 신선경을 만났을꼬?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숨을 돌리던 욱이 저만치 떨어진 풀숲에서 자유자재로 말을 달리고 있는 허연을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기운과 반짝임으로 가득한 들판에서 옷자락을 휘날리며 백마와 한 몸이 되어 달리고 있는 허연의 모습은 달빛을 타고 내려온 신선인 듯 아름다워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쪽입니다!”

들판의 키 큰 풀숲을 뒤지던 허연이 욱에게 소리치며 말굽을 크게 굴렀다. 허연의 위협에 돼지가 방향을 틀어 사선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연에게 정신이 팔려서 사냥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욱이 말에 박차를 가해 그 뒤를 바싹 쫓았다. 그리고 돼지가 짧은 풀숲으로 뛰어나온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등을 향해 창을 던졌다. 다음 순간, 멧돼지가 내지른 단말마의 울부짖음이 밤공기를 날카롭게 흔들었다.

“그것 보십시오. 맘먹고 집중하시면 뭐든 제대로 하시지 않습니까?”

허연이 욱의 곁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섰다. 그러곤 창이 정확히 돼지의 척추에 박힌 것을 확인하고 욱을 돌아보았다.

“돼지를 못 잡으면 저녁을 굶기겠다고 바가지 긁는 엄처가 지척에 버티고 있으니 별수 있는가? 어떻게든 수를 내야지.”

공비가 잡은 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크고 거칠어 보이는 멧돼지를 내려다보며 욱이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걸로 체면치레는 하겠구나, 독수공방은 면했구나, 돼지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나도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고생하셨습니다.”

허연이 욱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다가 멱살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잘하셨습니다.”

나직하게 속삭이며 허연이 욱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허연의 입맞춤은 길고 진했다. 달밤인데다 들판엔 단둘뿐이긴 했지만, 이런 순간에 허연이 입을 맞춰올 줄은 예상도 못했던 터라 욱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술을 맡긴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사이 찬바람이 한차례 들판을 휘감았고, 긴 들풀이 일시에 들판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섰다.

“왜 이렇게 굳어 계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욱의 턱을 움켜잡고 한참이나 입술을 깨물고 혀를 섞던 허연이 입술을 떼고는 피식 웃었다.

“멧돼지 한 마리에 이렇게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이 붙어 있는 줄 알았으면 아침부터 죽기 살기로 사냥에 임해 돼지며 사슴이며 닥치는 대로 잡았을 텐데…… 참 아쉽구먼.”

“저도 이럴 기회가 영 없을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허연이 손등으로 욱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도발적인 말대꾸와 손길에 욱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몸과 마음이 전에 없이 후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귀인…….”

욱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허연의 뒷목을 감싸듯 움켜잡았다. 그리고 허연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여유롭고 유혹적이었던 허연의 입맞춤과 욱의 입맞춤은 많이 달랐다. 조급하고 거칠고, 덤벙거리고…… 처음 만났던 그 즈음의 서툰 입맞춤이 떠올라서 허연이 침착하게 욱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입맞춤이야 풋풋하고 귀엽지만 욱의 실체는 어디까지나 음심이 가득한 짐승이었다. 더구나 그 짐승은 수치심 따위는 없고, 야외에서의 정사에 굉장한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적당한 때에 저지하지 않으면 말 잔등에서 끌려 내려가 풀밭에 엎어질 위험이 있었다.

“정 내관과 위사령이 곧 이쪽으로 올 겁니다.”

“오면 뭐 어떤가? 우리 사이는 세상이 다 아는데?”

그 뺀질한 대꾸에 허연이 발끈해서 욱의 얼굴을 거칠게 밀었다.

“세상이 다 알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음행을 해도 되는 줄 아십니까?”

허연의 단호한 거절에 욱이 입을 삐죽였다. 좀 더 은근하게 여유를 갖고 분위기를 이끌었어야 했는데 덤벙거리다가 일을 그르쳤네. 에그, 이놈의 조급증…….

“무슨 세상 사람들씩이나…… 그래봐야 지밀 내관 몇 명, 위병 몇 명…….”

“폐하!”

“이런 시각에, 이런 달밤에, 이런 들판에…… 우리가 또 언제 나와보겠는가? 나온다고 해도 어떻게 지금처럼 둘만 뚝 떨어져 나올 수 있겠는가? 이는 하늘이 내린 기회이니…….”

이대로 놓치기엔 달빛과 고즈넉한 분위기가 너무 아까워서 욱이 인정에 호소하며 징징거렸다.

“시끄럽습니다!”

되도 않는 하늘 타령에 허연이 벌컥 언성을 높였다. 그러곤 욱과 거리를 두려고 말고삐를 획 잡아챘다.

허연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말을 몰아 안전거리 밖으로 몸을 피하자, 들판에서의 오붓한 시간은 물 건너간 것을 깨달은 욱이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오늘의 유일한 수확인 수퇘지를 잠깐 들여다보다가 그 등에 박힌 창을 뽑아냈다.

공비의 멧돼지에는 댈 것도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크기는 그간 욱이 사냥했던 돼지 중에서는 최대였다. 게다가 한 살도 안 돼 보이는 새끼 돼지를 쫓다가 운 좋게 건진 번듯한 수확물이라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서 욱이 창을 풀숲에 박아놓고 뿌듯한 표정으로 돼지 뒷다리를 들어 올렸다.

“뭘 하십니까?”

허연이 돼지 뒷다리를 붙들고 낑낑거리는 욱을 먼발치에서 넘겨다보며 물었다.

“보면 모르는가? 이놈을 말 잔등에 얹어야 돌아가지.”

“허면 번쩍 들어서 말 등에 올리시지 왜 그렇게 끌어안고만 계십니까?”

“…….”

욱이 뭐라고 대답은 못하고 원망스러운 눈길로 허연을 돌아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욱의 표정만은 유난히 선명해서 허연이 피식 웃었다.

“왜요? 너무 무겁습니까?”

이번엔 앞다리와 뒷다리를 동시에 들어보려고 용을 쓰던 욱이 낑…… 하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살짝 공중에 떴던 돼지를 도로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그 모습에 허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큭큭 웃었다.

“폐하, 공비마마는 그 돼지의 두 배도 더 되는 놈을 잡아서 말 등에 얹어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내가 그 말을 하려던 참일세. 공비는 대체 그놈을 어떻게 들어 올렸단 말인가? 무호가 기분 나쁘면 말도 집어 던진다기에 그냥 웃자고 하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공비는 소도 집어 던지겠네.”

사냥도 순조롭지 않았는데 사냥한 돼지를 들어 옮기는 것도 생각지 못한 난관이라 욱이 죄 없는 공비를 들먹이며 짜증을 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별로 크지도 않은 돼지 한 마리를 번쩍 못 드십니까? 산만 한 덩치가 아깝습니다.”

허연의 조롱에 욱이 발끈했다.

“자네가 이리 와서 한 번 들어보게. 얼마나 무거운지…….”

욱의 투정에 허연이 여전히 먼발치에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까이 갔다가 공연히 붙들리면 또 한바탕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데 시간도 늦고 피곤하기도 했던 것이다.

“기운 딸리면 그냥 두십시오. 위병들에게 옮기라고 해도 되고, 공비마마가 오시면 좀 얹어달라고 부탁을 드려도 되고…….”

“거 참…….”

허연이 키득거리며 자꾸만 놀리는 것이 섭섭해서 욱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달빛 아래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그 표정이 너무 환하고 아름다워서 또 한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아, 저 사람도 많이 들떴구나. 나와 단둘이 숲을 달리고 사냥을 하고, 달빛 가득한 들판에 있는 것이 좋아서 자꾸만 농을 건네고, 저렇게 환하게 웃는구나. 표정만 봐도 허연이 얼마나 즐거워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욱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숲 속 어귀에서 폐하와 귀인을 목 놓아 부르는 위병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이제 오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숲에서 헤맸나 보다, 정 내관과 진관우에게서 잔소리깨나 듣겠다고 생각하며 허연이 소리 나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수풀에서 둔탁한 기척을 내며 튀어나온 것은 정 내관이나 진관우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크고 위협적인 어떤 것이었다. 뭐지? 하필 그때 구름이 달을 덮어서 들판이 한치 앞도 분간을 못할 정도로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라곤 풀숲 저편에 버티고 선 거대한 짐승이 내뿜는 안광뿐이었다.

“폐하……?”

허연이 욱을 나직이 불렀다. 이놈의 돼지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들어서 눈높이는 족히 되는 말 잔등에 올릴 수 있을까 궁리하며 이번엔 그 옆구리를 끌어안고 낑낑거리던 욱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건너편 숲 속에서 황제를 찾아다니던 일군의 위병들이 뛰어나왔고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짐승이 욱과 허연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얼핏 드러난 짐승의 실체는 거대한 수사슴이었다. 수십 개의 창을 머리에 인 것 같은 위협적인 뿔과 물소만큼이나 거대한 덩치의 사슴은 실존하는 짐승이 아니라 숲의 제왕, 혹은 숲을 지키는 신령 같았다. 사슴의 돌진과 거의 동시에 허연이 화살을 빼서 시위에 걸었다.

“폐하! 피하십시오!”

다급하게 외치며 허연이 사슴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화살은 덤불처럼 빽빽한 사슴의 뿔에 맞아 맥없이 튕겨나가고 말았다. 바로 뒤이어 허연의 두 번째 화살이 밤바람을 가르고 사슴의 등에 박혔다. 하지만 그것도 거대한 사슴을 한 방에 쓰러뜨릴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었다. 허연이 지체 없이 전통에서 세 번째 화살을 꺼내 들었다. 

“귀인! 피하게!”

욱이 창을 움켜쥔 채 소리쳤다. 이미 사슴은 목전에 닿아 허연을 들이받기 직전이었다. 세 번째 화살을 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허연은 미동도 없이 버티고 선 채 세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첫 번째 화살이 사슴의 뿔에 맞아서 튕겼을 때, 허연은 오늘이 운수 사나운 날인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비켜설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막아서지 않으면 말도 없이 바닥에 내려와 있는 욱이 사슴의 발굽에 짓밟힐 터였다. 허연이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시위를 힘껏 당겼다. 하지만 사슴은 폭풍처럼 달려서 이미 지척에 닥쳤고, 시위를 미처 놓기도 전에 허연은 그 뿔에 들이받히고 말았다.

사슴의 일격과 거친 충돌로 허연이 말과 함께 풀숲에 나뒹굴었다. 벼린 창처럼 날카로운 사슴의 뿔에 허연이 타고 있던 말의 배가 마치 수십 개의 창에 찔린 것처럼 참혹하게 찢어졌다. 불과 한 호흡 사이에 벌어진 참사를 눈앞에서 지켜본 욱이 벼락을 맞은 듯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바로 다음 순간, 몸을 일으키려고 꿈틀거리는 허연을 향해 사슴이 발굽을 높이 치켜들었다.

허연이 사슴뿔에 받혀서 말과 함께 나동그라지고 말의 배에서 피가 솟구쳐 가을 들판의 마른 풀을 검붉게 적시는 그 모든 광경이 욱의 눈에는 느릿한 그림자놀이처럼 보였다. 욱에게는 사슴의 뿔에 받혀 배가 찢어진 채 떨고 있는 것도 허연의 몸이었고, 들판을 적신 붉은 피 역시 온통 허연의 것이었다. 이는 욱이 그동안 꿨던 어떤 악몽에서도 본 적 없는 참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들판을 밝혔고, 정황이 좀 더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슴에게 일격을 당해 절명한 것은 허연이 탔던 말이었고, 허연은 말의 몸통에 깔린 다리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덩치 큰 말 한 마리를 받아 죽인 사슴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거친 투레질을 하며 허연마저 짓밟아 버릴 듯 난폭하게 발굽을 굴러대고 있었다.

사슴이 온 힘을 실어서 말의 배를 밟았다. 그렇지 않아도 박차에 끼인 다리가 틀어진데다 말의 무게 때문에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던 허연이 다리가 끊어질 듯 격심한 고통에 한 차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사슴이 이번엔 허연을 노리고 다시 한 번 발굽을 치켜들었다. 그 광경에 욱이 본능적으로 쥐고 있던 창을 온 힘을 다해 사슴에게로 던졌다.

금방이라도 허연의 머리를 짓밟아 버릴 듯 기세등등하던 사슴이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욱의 창이 사슴의 옆구리를 꿰뚫은 것이었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 제대로 조준도 못하고 던진 창에 맞아서 사슴이 비틀거리는 것을 본 욱이 그제야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이제 살았구나 싶은 안도감도 잠깐…… 창에 맞아 비틀비틀 주저앉는가 싶었던 사슴이 다시 중심을 잡고는 네 다리로 바닥을 버티고 섰다. 욱이 사슴의 옆구리에 입힌 창상은 중상이 분명했지만 급소에 제대로 박힌 치명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사슴의 체구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보통 크기의 사슴이라면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 일격을 당하고도 너끈히 버티는 것이었다.

짐승은 급소를 노려 한 방에 제압하지 못하면 더욱 난폭하게 날뛰어서 그 뒤처리가 한층 위험해지기 마련이었다. 이제 허연은 버려두고 욱에게로 돌아선 사슴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발굽으로 풀숲을 긁었다. 어쨌든 사슴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린 욱이 역시 만만치 않게 사나운 눈길로 사슴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사냥칼을 빼 들고 사슴과 마주 섰다.

사냥칼 한 자루를 들고 근거리에서 물소만 한 사슴과 맞서는 것은 무모함을 지나쳐서 그냥 목숨을 버리는 짓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덩치 크고 사나운 놈이라도 옆구리에 창이 박힌 채 멀쩡한 듯 날뛸 수는 없을 터였다. 또한 이는 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비록 사슴뿔에 받히는 불상사를 당하더라도 놈이 허연을 짓밟도록 버려둘 수는 없었다.

비틀거리며 욱에게 달려드는 사슴의 기세는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위태로웠다. 하지만 단검 한 자루로 상대하기엔 여전히 위험한 상대였다. 놈이 바싹 다가왔을 때 옆으로 몸을 날려서 피할까, 아니면 달려들어서 목에다 단검을 박을까…… 지축을 쿵쿵 울리면서 달려오는 사슴을 노려보며 욱이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저 빌어먹을 놈이 허연을 뿔로 들이받아 바닥에 처박고는 발굽으로 밟아 짓이기려고 했었던 사실을 되새기고 이를 꽉 물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네놈이 이 숲의 주인이냐? 나는 황제다! 불쑥 튀어나와서 감히 누구에게 행패냐? 오늘 죽는 것은 네놈이 자초한 횡액이니 나를 원망치 마라! 욱이 이제 지척에 닿은 사슴의 목을 노리며 단검을 더욱 힘껏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그러면서도 섬뜩함을 불러일으키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욱을 밟아버릴 기세로 달려들던 사슴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꺾으며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정 내관이 황급히 말에서 내려 욱에게 달려왔다. 진관우는 아직까지도 말에 깔려서 꼼짝을 못하고 있는 허연을 발견하고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뒤이어 달려온 공비도 이미 벌어진 사태에 놀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폐하…….”

혹시 어딜 다쳤나 싶어서 욱의 몸을 거칠게 더듬던 정 내관이 달리 상처나 핏자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러곤 목이 떨어져라 욱을 앞뒤로 흔들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그깟 돼지 새끼가 뭐라고 혼자 숲으로 뛰어들어서…….”

욱과 허연이 돼지를 쫓아 숲 속으로 사라져버린 이후 정 내관은 위병들을 이끌고 숲을 뒤지고 다니면서도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었다. 욱은 허연과 함께였고 사라진 시각도 오래지 않으니 주변을 뒤져서 둘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것이라면 숲이 어두워진 탓에 구덩이나 벼랑을 보지 못하고 실족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것과 공비가 잡아 온 것 같은 위험한 산짐승과 마주치지나 않을까 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슬슬 걱정이 되던 차, 멀지 않은 들판에서 두 사람을 찾아낸 것까지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허연은 정체가 뭔지 감도 안 잡히는 커다란 그림자에 받혀서 저만치 나가떨어졌고, 뒤이어 욱이 놈과 대치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활을 쏘거나 창을 던지자니 어두운 밤이라서 조준에 실패하거나 자칫 황제가 다칠 위험이 컸고, 직접 달려가 황제를 구하기엔 거리가 턱없이 멀었다. 진관우 역시 자신이 뭘 어찌하기엔 이미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들판에 나오자마자 상황을 깨닫고 지체 없이 시위에 화살을 메긴 이는 다름 아닌 공비였다.

달빛도 희미한 어두운 밤에 이처럼 먼 거리에서 사람에게 달려드는 들짐승을 향해 활을 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사람이 황제라면 그것은 어지간한 자신감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법도 이 한 가지뿐이며 지체할 시간도 더는 없었고, 고향에 있을 때엔 훨씬 먼 거리에서 날아가는 새도 여러 번 떨군 적이 있었던 공비는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검은 그림자를 향해 화살을 날렸던 것이다.

욱이 정 내관을 거칠게 밀쳤다. 정 내관이 잡아 흔드는 바람에 잠시 나갔던 정신이 되돌아온 탓이었다. 정 내관을 밀어낸 욱이 지척에 나동그라져 있는 사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은 사슴의 목, 정확히는 턱 바로 아래쪽에 박혀 있었다. 자신의 창에 맞고도 끄떡없었던 사슴이 화살에 동맥이 꿰뚫리는 치명상을 입고 그 순간에 주저앉은 것이었다.

“귀, 귀인…… 귀인…….”

멍하니 사슴을 내려다보던 욱이 허우적거리며 허연에게로 달려갔다. 귀인이 분명 의식이 있었는데, 사슴뿔에 찔리거나 발굽에 밟히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욱이 허연에게 달려갔을 때엔 진관우와 공비, 그리고 위병 대여섯 명의 위병이 말의 사체를 치우고 허연의 부상 정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허연은 얼핏 봐서는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날은 어두웠고 허리 아래로는 온통 피투성이인데다 의식도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몸을 더듬어 살펴본 결과 확실한 것은 말 아래 깔렸던 종아리가 부러졌다는 것 정도였다.

“귀인…….”

욱이 허연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실신을 한 듯 늘어져 있던 허연이 목이 막혀서 간신히 쥐어짠 욱의 목소리에 움찔하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폐하…….”

허연이 눈을 뜨자 욱이 그제야 긴 한숨을 토해냈다.

“연아…….”

그때 허연이 살벌한 눈길로 욱을 노려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언짢은 기색에 경황이 없는 중에도 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그 한마디를 하고 허연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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