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장 출궁 (14/16)

제12장

출궁

윤 내관이 탕약을 들고 와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폐하, 탕약 드십시오.”

“…….”

“폐하…….”

“과인은 다친 곳도 없거늘 무슨 탕약을 하루에 세 번씩이나 들여오느냐?”

욱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곤 창가 기둥에 기대서서 가랑비에 젖어드는 용천 대계곡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한창때를 이미 지난 단풍은 태반 낙엽이 되어 떨어질 것이고,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 터였다.

“심신 안정에 효험이 있는 탕약입니다. 폐하께서도 심히 놀라셨으니 속히 안정을 찾으셔야지요.”

“나는 되었으니 자네나 들게.”

욱의 퉁명스러운 거절에 윤 내관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약사발 채우고 남는 탕약은 소인이 갖다 먹고 있습니다. 그나마 약발이 받아서 이렇게라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 아니었으면 소인도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이틀 전, 멀쩡하게 사냥을 나갔던 황제 일행이 초주검이 된 허연을 들것에 싣고 나타났을 때 사냥 천막에서 그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았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대전 상선인 윤 내관과 고 내관은 대경실색,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냥이란 말 타고 활 쏘며 산으로 들로 거친 짐승을 쫓는 일이라 사냥 중의 낙마나 부상은 그렇게 드문 사고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허연이 사슴에게 받혀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 오는 일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불상사였다. 다행히 허연의 온몸을 적시고 있던 피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고 있던 말의 피였고, 오른쪽 종아리 골절과 전신 타박상, 가벼운 뇌진탕이라는, 당한 일에 비해선 경미한 진단이 나와서 한숨 돌리기는 했지만 소스라치게 놀란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일군의 사냥꾼과 위병들이 숲으로 들어가서 문제의 큰 뿔 사슴과 허연이 탔던 말의 사체를 끌고 나온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그들이 숲 속에 들어간 것은 아침 이른 시각이었지만, 사슴의 사체가 너무 커서 말 잔등엔 도저히 실을 수 없을 정도라 수레를 마련한 후 오솔길을 넓혀가며 오고 가느라 꼬박 한나절이 걸렸던 것이다.

사냥꾼들이 막사 안마당에 내려놓은 큰 뿔 사슴은 윤 내관이 평생 구경했던 짐승들 중에선 코끼리와 낙타 다음으로 덩치가 컸다. 게다가 머리에 돋은 뿔은 어떤 성질 고약한 대장장이가 일부러 만들어서 붙여준 것처럼 사방으로 날카롭게 뻗어서 흉기도 그런 흉기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다 바로 옆에 그 뿔에 찔려서 뱃가죽이 종잇장처럼 찢어진 백마의 사체가 같이 놓이니 전날 숲에서 벌어진 참사가 마치 눈앞의 일인 듯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도 주무시다가 두 번이나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나지 않으셨습니까? 그 일을 아시면 귀인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실 겁니다.”

윤 내관이 한 번 더 탕약을 권했다. 허연까지 들먹이며 약 먹으라고 성화를 하자 욱이 더는 군소리 없이 약사발을 집어 들었다.

시영이 곽여화를 대동하고 홍운궁을 찾은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사냥터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시영은 그길로 익숙지도 않은 말을 타고서 사냥터까지 냅다 달렸던 여파로 몸살을 얻는 바람에 늦게까지 누워 있다가, 허연의 문병 겸, 욱과 의논할 일도 있어서 시원찮은 몸을 일으켜 홍운궁까지 올라온 길이었다.

“왜 이리 울적하게 계십니까? 아직도 심기가 많이 불편하십니까?”

시영이 일찌감치 꺼낸 여우털 외투를 턱밑까지 끌어 올리며 안부를 물었다.

“아닙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욱이 부부에게 의자를 권했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뭐 그냥…….”

어지간한 난리가 나도 밥때는 놓치지 않던 욱이 입맛조차 잃을 정도로 맥이 빠진 것을 본 시영이 안타까움에 혀를 끌끌 찼다.

“귀인이 불운하여 아찔한 사고를 만나기는 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지 않았습니까? 부러진 자리가 맞추기 어려운 부위도 아니고, 의관들이 잘 처치를 했으니 몸조리 하며 기다리면 귀인의 부상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야 뭐…… 그렇겠지요.”

욱이 건성으로 대꾸하며 고개도 그저 건성으로 끄덕였다. 넋 나간 그 모습에 시영의 눈길이 실쭉 사나워졌다.

“그러게 대체 무슨 배짱으로 위병들을 다 따돌리고 귀인과 단둘이 숲을 돌아다녔단 말입니까? 내 폐하는 믿지 못해도 귀인은 철석같이 믿었거늘…… 그 사람이 점점 폐하를 닮아가니 큰일입니다.”

시영이 또 분통을 터뜨리며 욱과 허연을 싸잡아 나무라기 시작하자 곽여화가 그 팔을 잡아서 꾹 꼬집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나리. 그렇지 않아도 심란하여 끼니도 거르고 계신 분에게 자꾸 화를 내시면 어쩝니까?”

곽여화의 만류에 시영이 오늘은 고운 말로 문안 인사만 하기로 했던 결심을 떠올리며 눈을 꼭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했던 말 하고 또 하는 것 같아서 민망하지만, 이번 원행에서 잘한 일은 공비를 데리고 온 것뿐인 듯싶습니다. 공비가 아니었으면 폐하께서 어떤 화를 당하셨을지…… 생각하기도 무섭습니다.”

시영이 공비 쪽으로 화제를 돌리자 곽여화도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공비마마께서는 참으로 영웅호걸이십니다. 그 급박한 순간에 화살 한 대로 폐하께 달려드는 사슴을 명중시키다니…… 저도 소싯적에 사냥터깨나 쫓아 다녔으나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고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공비는 공신 중의 공신입니다. 이번에 돌아가면 즉시 중론을 모아 공비에게 큰 상을 내리시라고 정식으로 주청을 올릴 것이니, 폐하께서도 준비를 해두십시오.”

“준비라니요?”

그새 딴생각에 빠져 있던 욱이 멍한 눈길로 시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공비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품계를 올리고, 거처도 좀 더 번듯한 곳으로 옮기도록 해야지요. 그리고 대현성에도 이번 일을 알리고 무영준에게 공호와 함께 포상금을 넉넉하게 내리심이 가할 것으로…….”

“대현성에 원군 5만 명을 긁어 보내느라 내서고가 도둑을 맞은 것보다 더 깨끗하게 비었는데 돈이 어디 있다고 대현성에 포상금을 더 보냅니까?”

욱의 시큰둥한 대꾸에 시영이 멈칫했다. 그러곤 이번 원군 파병이 거의 황제 개인의 사재로 성사된 것임을 떠올리고는 이마를 긁적였다.

“하오시면…….”

“그리고 품계를 올려 귀비나 황귀비를 삼는다 한들 공비에게 무슨 상이 되겠습니까? 이러나저러나 궁 안에 갇혀 사는 신세는 매일반인데 거처는 옮겨서 또 뭐하겠습니까?”

성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욱의 반응에 시영이 흥분해서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대현성에 은자도 못 보내겠다, 품계도 못 올리겠다, 새 거처도 못 내리겠다 하심은 목숨을 빚지고도 입을 싹 닦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공비가 아니었어도 그 사슴은 제가 잡았을 겁니다.”

“퍽이나요!”

시영의 콧방귀에 욱이 언짢은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귀인을 들이받고, 그것도 모자라 밟아 짓이기려고 했던 놈을 제가 살려뒀을 것 같습니까?”

욱이 그 밤의 일을 떠올리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놈은 이미 내 창에 맞아 피거품을 물고 있었거늘…… 창상으로 움직임이 느려지고 금방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으니 공비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충분히 그 목에 단검을 박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시영이 욱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두 손과 고개를 동시에 내저었다.

“이런 일에 상상력 발휘하지 마십시오. 그 사슴을 한 방에 보낸 것은 공비입니다. 그 덕에 폐하께서는 긁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신 것이고요.”

“…….”

“그러니 환궁하시면 공비를 바로 귀비에 봉하시고, 크고 번듯한 궁을 거처로 내려 생명의 은인 대접을 제대로 하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은혜는 갚을 겁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오랜만에 의견 일치를 보았건만 어쩐지 찜찜해서 시영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터에서 큰 사고가 난 지 이제 사흘인데도 아직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행궁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그런 중에도 시영은 욱을 보기만 하면 걱정을 했다가, 화를 냈다가, 공비에게 잘해주라고 당부도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는 그 심사를 건드려서 다툼을 만들곤 했다. 그 때문에 언제라도 둘 사이를 조정할 채비를 갖추고 있던 곽여화가 이번에도 적절한 때를 골라 대화에 끼어들었다.

“귀인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허연은 부상을 당해 정신을 잃은 이후 꼬박 이틀간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욱의 애를 새까맣게 태웠다. 그 때문에 의관이 허연을 진료하고는 귀인은 정신을 잃으신 게 아니라 그냥 주무시는 것이라고 고했을 때엔 조금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밀린 잠을 몰아 자고 있는 것일 뿐 달리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정신은 차리셨습니까?”

어제 문병을 왔다가 허연이 잠에서 깨질 않는 바람에 반 시진쯤 기다리다 돌아갔던 곽여화가 오늘은 얼굴이나 잠깐 보고 갔으면 해서 넌지시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약도 먹고 죽도 먹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잠들어서 여태 일어나질 않고 있습니다.”

“저런…….”

욱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올라가시지요. 두 분 오셨는데 뵙지 못했다고 그 사람도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쉬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올라가서 깨우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단하고 몸이 아파도 밥은 제때 먹어야 뼈가 붙지요.”

욱이 시영 부부를 데리고 용화루로 올라갔을 때 허연은 고 내관의 성화에 벌써 일어나서 점심을 먹은 후, 원자와 2황자를 불러서 양옆에 끌어안고는 숲에서 만난 호랑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숲에서 만난 호랑이가 여기를 이렇게 꽉…….”

하면서 허연이 2황자의 엉덩이를 한입 물었다. 그러자 2황자가 바동거리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리고 또 여기를 이렇게 앙…….”

허연이 어흥 하며 이번엔 곁에 있는 원자의 팔을 물었다. 그러자 원자도 꺄르륵 웃으며 베개 위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보모상궁과 궁녀들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내관 아이들도 앙, 앙 하고 서로를 슬쩍슬쩍 물면서 같이 놀고 있었다.

조용하고 울적할 줄 알았던 용화루가 뜻밖에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하고 활기가 넘치는 것을 본 욱이 문가에 멈춰 서서 맥이 탁 풀린 얼굴로 방 안 정경을 지켜보았다. 그때 환이와 명이가 먼저 욱을 발견하고 문 앞으로 달려 나왔다.

“폐하, 드셨습니까?”

“마마!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2황자를 끌어안고 등에 마구 입을 맞추던 허연이 그제야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욱과 시선이 마주치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이제 정신이 좀 드는가?”

허연이 2황자를 바로 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시영과 곽여화가 욱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보모상궁에게 아기를 맡기고 바로 앉았다.

“오셨습니까?”

허연이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시영과 곽여화를 맞았다. 허연이 부상 이후 기력을 찾지 못하고 계속 잠만 잔다는 소식을 듣고서 걱정이 많았던 시영이 예상외로 말짱한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인…….”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이만하길 천만 다행입니다. 까딱 잘못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시영이 막사 앞마당에서 보았던 사슴과 말의 사체를 떠올리며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다.

창 밖에는 초겨울 비가 제법 거칠게 내리는 중에, 용화루의 침전엔 훈기가 넘쳤다. 허연은 한잠 잘 자고 일어난 듯 말간 얼굴로 시영 내외를 맞아 문안에 답례를 하며 사냥터에서 돼지를 쫓다가 일행과 떨어진 것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사죄를 했고, 시영은 다시 한 번 공비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느냐며 그녀의 활 솜씨와 결단력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고작 품계 하나 올리는 것도 아깝다며 인색을 떠시니…….”

시영이 욱을 힐끔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원자를 안고 일없이 방 안을 오가던 욱이 또 그 소리냐는 듯 시영을 피곤한 눈길로 마주 보았다.

“폐하와 귀인을 구한 공비의 공로를 생각하면 귀비가 뭡니까? 황귀비로 봉하고 날마다 업고 다녀도 과하지 않습니다.”

“공비를 업고 돌아다니라니…… 제 허리가 부러지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욱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시영이 새삼 발끈했다. 이런 은혜도 모르는 고연 놈…… 시영이 평소 의견 충돌이 잦은 좌우승상이나 상서부 시랑들 잡던 실력으로 욱을 잡으려고 입술을 실룩였다. 그때 허연이 손을 뻗어 그 팔을 잡았다.

“염려 거두십시오, 정안군. 폐하께서는 공비께 합당한 보답을 하실 겁니다.”

합당한 보답이라……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합당한 보답이란 대체 뭘까? 품계를 올리거나 더 크고 아름다운 거처를 내리는 것 외에 후궁에게 내릴 수 있는 상이 뭐란 말인가?

의관들이 떼로 몰려와 허연을 시료하는 통에 대화의 결론을 짓지 못하고 물러나온 시영이 처소로 돌아가는 다리 위에서 홍운궁을 돌아보았다.

“거 참…….”

“어찌 걸음을 멈추십니까?”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알 길이 없으니…….”

“다리 위에서 찬바람 맞지 마시고 생각할 일이 있으시면 처소에 가서 마저 하십시오.”

어제 오늘, 시영의 몸살이 더 도질까 봐 마음을 졸이던 곽여화가 재촉하며 등을 밀었다. 곽여화에게 떠밀려서 걸음을 옮기던 시영이 다리 끄트머리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계곡 아래에서 올라오던 조양과 마주친 때문이었다.

“정안군 아니십니까? 동부인하여 홍운궁에 다녀오십니까?”

조양이 시영과 곽여화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승상께서는…….”

이 다리를 건너면 갈 곳이라곤 홍운궁뿐이었다. 게다가 그 곁에는 윤 내관의 직속 수하인 이 내관이 붙어서 우산을 받쳐 들고 있으니 승상은 황제에게 불려가는 것이 분명했다.

“저 아래 정자에서 좌우 승상과 더불어 술 한 잔 나누며 비 구경도 하고 환송연에 관한 의논도 나누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폐하께서 잠시 올라와 차 한 잔 하자고 하시기에 뵈러 가는 길입니다.”

“환송연이라시면…….”

“모레 아침이면 상장군이 부장들을 이끌고 호서성으로 떠나는데 조촐한 환송연이라도 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귀인의 부상으로 경황이 없으시니 의중을 여쭈어보고 저라도 나서서 연회를 베풀어 장군 일행과 술 한 잔 나눌까 합니다.”

“아…….”

본래 무호와 부장들은 어제 아침에 집결지인 호서성으로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냥터에서의 큰 사고로 황제의 호위에 비상이 걸려서 무호의 출발을 일단 보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군을 언제까지나 지휘관 없이 버려둘 수는 없는 일, 승상과 시영이 급히 논의를 해서 정한 최종 출정일이 사흘 후였다.

“처남이 대군을 이끌고 변방으로 떠나는데 아무리 경황이 없으셔도 환송연은 폐하께서 열어주셔야지요. 게다가 보통 처남입니까? 공비의 오라비가 아닙니까?”

“지당하십니다. 선대의 어느 후궁이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화살 한 대로 황제의 목숨을 구했겠습니까? 마땅히 그 오라비 되는 무호에게 술 석 잔을 내리고, 처갓집 말뚝에 대고 큰절도 하셔야지요.”

조양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날이 차니 어서 들어가보시라고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대감, 어찌 그렇게 승상의 뒷모습을 보고 또 보고 하십니까? 뭐 잊으신 말씀이라도 잊으십니까?”

시영이 승상을 보내고도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계곡 건너편을 넘겨다보자 곽여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까닭을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그냥이라니요?”

“좀 불안해서 그럽니다.”

시영의 대답에 곽여화가 더욱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폐하를 뵈러 갔다가 날벼락을 맞은 중신들이 한둘이 아닌데, 오늘은 승상 차례인가 싶어서요.”

곽여화가 고개를 돌려 이미 저만치 멀어진 조양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뭐……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혀 없습니다.”

“별일 있겠습니까? 승상 대감이야 폐하의 둘도 없는 충신이자 추종자인데…….”

“그것은 그런데…….”

곽여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여전히 뭔가 미심쩍어서 머뭇거리는 시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빨리 오십시오. 바람도 찬데 밖에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의관들이 시료를 마치고 물러간 후, 허연이 보모상궁을 불러서 다시 2황자를 안아 들었다. 허연의 품이 이제는 어지간히 익숙해진 2황자도 스스럼없이 그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금방 바른 고약이며 탕약 냄새가 어지간히 고약할 텐데도 숨을 꾹 참아가며 자신의 목을 꽉 끌어안는 아기가 사랑스러워서 허연도 그 어깨에 입을 맞추고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그만 쉬지, 뭘 또 아이를 데려다 어르는가?”

이제 세 살이라 힘도 부쩍 세지고 움직임도 거칠어진 2황자의 몸부림을 이기지 못한 허연이 뒤로 털썩 누우며 악 하고 낮은 신음을 하자 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사흘간이나 아기씨들을 보지 못해서 그간 아기씨들도 많이 울적해하셨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많이 놀아드려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전신 타박상을 입은 몸에 아이가 가슴을 타고 앉는 것은 좋을 게 없어서 욱이 다가와 2황자를 안아 올렸다. 그러곤 다시 보모상궁에게 아이를 안겼다.

“아이들 밥 먹일 때가 되지 않았느냐?”

“예, 폐하. 이제 곧 점심 드시고 한잠 주무실 시각입니다.”

“허면 처소로 데려가서 밥 먹이고 재워라.”

그렇게 이르고는 욱이 아이들을 처소에서 내보냈다.

아이들이 쫓겨나듯 침전에서 물러나가자 허연이 아쉬운 대로 베개를 끌어안고는 욱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엔 그 웃음소리와 온기로 넓은 침전이 번잡하고도 훈훈했는데 한순간 전각이 빈집처럼 휑하고 방 안엔 빗소리만 가득했다.

“왜 그렇게 뚝 떨어져 계십니까?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방 한복판에서 팔짱을 낀 채 허연을 노려보는 욱의 눈길은 어둡고 울적했다. 그런 욱을 바라보는 허연의 눈길도 어느새 뜨끈하게 젖어들었다. 지축을 울리며 미친 듯 날뛰던 사슴을 향해 창을 던지고, 고작 단검 한 자루를 들고서 달려드는 사슴과 맞서던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허연이 무엇 때문에 가망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세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는지 욱이 알고 있는 것처럼, 허연도 욱이 무엇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좋게 말로 할 때 오십시오. 저는 뭐 폐하께 화낼 일이 없는 줄 아십니까?”

허연의 재촉에 욱이 터덜터덜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침상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여전히 퉁퉁 부은 눈길로 허연을 노려보았다.

“몸은 좀 어떤가? 부러진 다리가 많이 아픈가?”

“온몸이 다 쑤시고 아픕니다. 머리도 깨질 것 같고…….”

“왜 안 그렇겠는가? 어깨와 등이 온통 피멍인데…… 그래도 넘어진 자리가 풀숲이라 그만한 것이지 맨땅이나 돌밭이었으면 부상이 이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네.”

욱이 허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곤 잠시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몸을 굽혀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폐하.”

“제발 부탁인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게. 내게 닥친 일은 얼마든지 내가 감당하고 이겨낼 것이니 공연히 막아서서 대신 다치고, 위험해지고…… 그런 짓 하지 말게.”

욱의 당부에 허연의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 베개를 적셨다.

“폐하…….”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예전, 영산의 노역장에서 생사 불명인 그대를 보았을 때 내 가슴이 다 무너졌었거늘……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어찌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게 만드는가? 내가 그깟 사슴 한 마리를 어쩌지 못할 줄 알았단 말인가?”

“그 사슴은…… 공비마마께서 잡으셨다면서요?”

진지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허연의 무정한 언사에 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다 잡은 놈이었네! 공비는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갖다 얹었지!”

욱의 완강한 부정에 허연이 큭큭 웃다가 갈비뼈가 아파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은 속상하고 심각한데 허연이 자꾸 말장난으로 본론을 흐리고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것이 화가 나서 욱이 쌩하니 돌아앉았다. 하지만 멀리 간 것도 아니고 바로 옆구리에 붙어 앉아서 몸만 돌린 것이라 허연이 아무 거리낌 없이 그 허리를 끌어안았다.

“폐하.”

“그래, 공비가 사슴을 잡았네! 나는 창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것을 공비가 화살 한 대로…….”

“지난밤 늦게까지 서재에서 비단 한 필을 다 버려가며 성지를 쓰셨다면서요? 무엇을 쓰셨는지 제게 안 보여주실 겁니까?”

그 은근한 청에 욱이 고개를 돌려 허연을 돌아보았다.

“그것을 어찌 알았는가?”

“홍운궁은 바로 아래층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뭘 하고 계신지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

“공비마마와 관련된 성지라면 어떤 내용인지 저도 알고 싶습니다.”

“아직 다 쓰질 못했네.”

욱이 허리에 감긴 허연의 팔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허연의 눈길을 이기지 못하고 중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선 있는가?”

“예, 폐하. 불러 계시옵니까?”

욱의 부름에 윤 내관이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서재에 가서 내가 새벽에 써놓은 성지를 가져오게.”

말 떨어지기 무섭게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간 윤 내관이 반짝거리는 오동나무 함을 들고 바람처럼 돌아왔다. 욱이 날밤을 새우다시피 끙끙거리며 쓴 성지는 아직 윤 내관도 보지 못한 것이라 그 내용이 몸살이 날 정도로 궁금하던 참이었다.

“몸을 일으키기 불편하시면 소인이 읽어 올리겠습니다.”

윤 내관이 탁자에 올린 오동나무 상자의 뚜껑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며 욱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닐세. 이리…….”

허연이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욱이 그를 다시 자리에 눕히고 한 손으로 어깨를 꾹 눌렀다.

“허면 문밖에 서성거리는 아이들은 멀리 물러가 있으라 하고 자네가 조용조용 읽어보게.”

욱의 허락에 윤 내관이 얼른 중문 밖을 살폈다. 항시 허연의 곁을 떠나지 않던 우화원 아이들은 벌써 1층으로 쫓겨 내려간 후였고, 정 내관과 고 내관만 문짝에 귀를 붙이고 서 있었다.

“뭣들 하는가? 저만치 물러가 있게.”

윤 내관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둘을 쫓았다. 하지만 두 내관은 그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며 강력하게 맞섰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폐하의 호위대장입니다!”

“저는 귀인마마의 태감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물러설 수 있는 최대 거리입니다!”

“폐하께서 문밖에 서 있는 애 녀석들 물리라고 명을 내리셨네.”

애 녀석들이란 말에 정 내관이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곤 윤 내관을 밀어내고 쿵쾅거리며 침전으로 들어갔다. 그 틈에 고 내관도 정 내관에게 묻어서 재빨리 방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뭐냐?”

문밖의 소란에 귀를 기울이며 쓴웃음을 짓고 있던 욱이 얼른 표정을 고쳤다. 하지만 정 내관은 거침없이 성지가 놓인 탁자로 다가가 그 뚜껑을 열어젖혔다.

“소인이 성지를 대신 읽어드리겠습니다.”

한마디 툭 던지고는 정 내관이 상자에서 돌돌 말린 비단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경악의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아니, 폐하…….”

“왜? 무슨 문제가 있느냐?”

성품 우직하고 꽉 막힌 정 내관이 보기엔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일 수도 있어서 욱이 저도 모르게 그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정 내관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욱을 돌아보았다.

“글씨 꼬라지가 이게 뭡니까? 황제의 친서는 수장고에 들어가서 대대로 전해지는 것인데, 이렇게 괴발개발 그려놓으시면 후세 사람들이 폐하를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정 내관의 옆구리로 고개를 빼고 있던 고 내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수선한 악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은 글씨라기보다는 해초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모래밭에 갈매기 몇 마리가 놀다 간 형상에 더 가깝습니다. 형님, 읽을 수는 있겠습니까?”

밤을 새워 대여섯 번은 고쳐서 쓴 성지를 펼쳐보고는 대뜸 글씨부터 물고 늘어지는 두 내관을 욱이 사나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무엄하다. 못 읽겠으면 두고 나가면 그만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비록 글씨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졸필이지만 내용도 다 못 보고 쫓겨 나가는 것은 안 될 일이라서 정 내관이 성지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읽어보겠습니다.”

[과인의 후비이자 영운궁의 궁주인 공비는 어려서부터 현숙한 자태와 단정한 언행으로 나라 안 귀공녀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 같은 평판이 황실에도 전해져서 나이 열일곱에 비에 책봉되어 영운궁의 궁주가 되었으며, 이후 빼어난 숙녀의 자질로 과인을 내조하였으니 조정에 세운 공이 적지 않다.

후궁에 든 이후 황후를 지극히 공경하고 다른 후궁들과도 돈독한 자매의 정으로 지내며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법도에 어긋날 때가 없어 여인 중의 군자라 불렸고 그런 까닭으로 모든 중신과 궁인들이 그를 경애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또한 공비는 고문과 서화에 능하고 침선은 그 솜씨가 귀신같으며 말 타기, 활쏘기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이토록 다재다능한 현처를 얻은 것은 과인의 복 중에서도 큰 복이며 나라의 길운으로, 그녀를 향한 과인의 정과 신뢰는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비는 지극한 효심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에 병을 얻어 더는 궁에서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바, 과인의 욕심으로 그녀를 곁에 두는 것은 낭군의 도리가 아니게 되고 말았다. 하여 과인은 오랜 심사숙고 끝에 공비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자 한다.

과인은 진심으로 이별을 애통히 여기며 그녀가 그간 과인과 나라에 세운 공을 기려 우영공에 봉하는 바이다, 또한 황성과 대현성에 각각 집 한 채씩을 내려서 원하는 곳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무엇을 하든 원하는 대로 사는 것 또한 허락한다.]

군데군데 알아보기 힘들게 갈겨쓴 글자를 어렵게 풀어가며 정 내관이 성지를 읽어 내렸다. 공비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원하는 대로 살게끔 하겠다는 마지막 부분에서 고 내관이 더듬더듬 소맷자락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윤 내관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참으로 명문입니다, 폐하. 공비마마께 이 이상의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고 내관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수건으로 꾹꾹 찍으며 정 내관이 탁자에 내려놓은 성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하긴, 공비마마라면 이만한 선물을 받을 만하십니다. 폐하의 목숨을 구한 충신이 아닙니까?”

윤 내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고 내관에게 동조의 뜻을 보였다. 하지만 정 내관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지는 다시 쓰십시오. 필체는 놔두고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대여섯 개는 되고, 여기 이건 점입니까? 획입니까?”

정 내관의 타박은 들은 척 만 척 욱이 허연 옆에 털썩 누웠다. 공비의 출궁은 이미 전부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사냥터에서의 사고로 다소 급박하게 추진을 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막상 실행을 하려니 예상과는 달리 여러모로 심사가 복잡했다.

“잘 쓰셨는데 웬 한숨이십니까? 공비마마를 보내려니 서운하십니까?”

허연이 욱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 물음에 욱이 헹…… 하고 콧바람을 날렸다.

“성지는 엄연한 공문서인데 저렇게 허위로 작성하려니 마음 편치 않아서 그러네.”

욱의 투정 어린 대답에 허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탁자 주변에 빙 둘러선 내관들의 눈길도 아랑곳없이 욱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아, 저분들 또 시작이시네 생각하며 윤 내관이 침상 쪽으로 슬쩍 눈을 흘겼다. 그러곤 험……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하온데 폐하…… 공비마마의 출궁은 성지 한 장으로 성사를 시키신다고 해도, 한 선생과 맺어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한 선생의 신분은 여전히 대현성 관노가 아닙니까? 아무리 폐하께서 궁 밖에 나가서 네 맘대로 살라고 하락을 하셨다 해도 어찌 공비께서 노비와 연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무 장군 집안뿐 아니라 조정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윤 내관의 지적에 고 내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한 선생의 경우는 면천만으로는 조건이 많이 부족합니다. 공비마마의 재가에 군소리가 없도록 하려면 어지간한 벼슬 한자리는 내려야 할 텐데, 그것만으로도 중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윙윙거리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싶습니다.”

고 내관의 의견에 정 내관이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쑤셔서 인상을 썼다.

“어찌한들 이런 일에 군소리가 없겠느냐? 둘이 인연을 맺어 조용히 살고 싶으면 어디 깡촌에라도 들어가서 조용히 숨어 살아야지 다른 수가 있겠느냐?”

공비의 출궁만 해도 큰 사건으로 앞으로 3년은 세간의 입방아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거기에 승주의 출사 역시 황제가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는 성사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은혜를 갚는 것도 좋고 후궁이 심히 적성에 맞지 않는 공비에게 살길을 터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자면 모든 것이 욱의 정치적 부담이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침상 쪽을 돌아보던 정 내관이 몸이 아파서 제대로 저항도 못하는 허연을 찍어 누르고는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는 욱을 발견하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폐하!”

“응?”

정 내관의 벼락같은 호통에 욱이 바늘에 찔린 듯 후다닥 일어나 앉았다.

“한창 중요한 얘기 중에 그러지 좀 마십시오!”

“아니…….”

“그리고 방 안에 사람들 있을 때엔 눈치를 좀 보십시오! 환관이면 앞도 못 보는 줄 아십니까?”

정 내관의 거듭된 훈계와 신경질에 욱도 대뜸 눈을 부라렸다.

“내 침실에서 내 사람 붙들고 입맞춤 좀 했거늘, 그 꼴이 보기 싫으면 네가 나가면 그만이지, 왜 나한테 역정을…… 악…….”

정 내관과 한판 붙을 기세로 언성을 높이던 욱이 옆구리를 움켜잡고 옆으로 푹 거꾸러졌다. 허연이 남은 기운을 다 끌어 모아 욱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던 것이다.

허연이 욱을 밀치고 일어나 침상에 기대앉았다. 그러고는 성한 다리를 움직여서 욱을 침상에서 밀어버렸다. 정 내관에게서 잔소리를 듣고 침상에서도 쫓겨난 욱이 씩씩거리며 침상 옆 의자로 물러앉았다.

“과인이 공비를 출궁시킬 궁리를 하면서 한 선생의 일을 생각지 않았을 것 같은가? 내 그간 크건 작건 나랏일을 소홀하거나 서툴게 처리한 일이 없거늘, 주변에서 어찌 이리 나를 허술히 보는지 모르겠구먼.”

욱이 목에 힘을 빡 주고 언짢은 심사를 내비쳤다.

“허면 공비마마가 소원대로 팔자를 고치는 일에 무리가 없을 좋은 방도가 있으십니까?”

윤 내관이 이끌리듯 욱에게로 다가섰다. 공비의 출궁과 승주의 출사로 황제가 중신들과 한판 붙는 날엔 그 중재와 해결이 모두 자신의 짐으로 떨어질 터, 때문에 제발 황제의 방책이란 것이 뜬구름 잡는 헛소리가 아니길 바라면서 윤 내관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애절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한 선생이 면천을 하고 출사를 한다고 한들 그 신분으로는 낮은 직급의 기술직이나 전문직이 고작일 터, 그 정도로 어찌 지방 영주의 딸이며 과인의 후비였던 공비와 지체를 맞추겠느냐? 황제의 후비였던 여인이 재가를 한다면 말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큰 소리는 못 낼 만큼 만만치 않은 상대여야 할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윤 내관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 내관 역시 미덥지 않다는 듯 욱을 슬쩍 노려보았다.

“그것은 종친이나 다른 나라 왕자 정도 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한 선생을 환생이라도 시키실 작정이십니까?”

“뭘 또 환생씩이나…… 신분을 윗물에 살짝 헹구면 그만인 것을…….”

신분이 입던 속옷도 아닌데 어디다 뭘 헹구겠다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허연과 세 내관이 서로 분주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결론이 오리무중이라 윤 내관이 나서서 좀 더 구체적인 사항을 캐물었다.

“하오시면 어디서 족보라도 하나 구해다가 신분을 새로 꾸며주려고 하시옵니까?”

윤 내관의 물음에 욱이 당치않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족보를 사고팔거나 허위로 조작하는 일은 국법으로 금하는 일인데 과인이 나서서 나랏법을 어기랴? 또한 족보가 팔릴 정도면 이미 가세가 기울어 볼 장 다 본 집구석일 터, 한 선생이 어려운 지경을 당했을 때 어떻게 도움을 바랄 수 있겠느냐?”

허면 어느 만만한 집안을 골라서 양자로 들여보낼 작정인가 보다 싶어서 세 내관이 또 한 번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문재가 뛰어나고 황제의 비호가 있다고 해도 본시 노비였던 자를 양자로 들일 만큼 호락호락한 집안은 없었고, 명문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하려고 마음먹은 일이면 길은 있는 법이라서 윤 내관이 마음 약한 조정 중신들과 지방의 허술한 가문을 머릿속으로 쫙 한 번 훑었다. 그때 명이와 환이가 중문을 삐끔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허, 이놈들! 허락이 있을 때까지는 2층엔 얼씬도 말라 일렀거늘!”

고 내관이 내관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엄한 눈길로 꾸중을 했다. 지금 침전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는 대외적으로 공표가 되기 전엔 특급 기밀에 속하는 일이라서 혹 그전에 말이 샐까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도 공무로 올라온 것이라 고 내관의 호통에 밀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다. 

“아래층에 승상 대감 와 계시옵니다. 이 내관 나리가 고해 올리라 하여 올라왔습니다.”

승상 대감 오셨다는 전언에 욱이 기다렸다는 듯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허연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꿍꿍이 가득한 수상쩍은 그 미소에 허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쉬고 있게. 승상과 몇 마디 나누고 후딱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욱이 가벼운 걸음으로 나풀나풀 침전을 나섰다.

윤 내관이 욱을 따라 나서는 것도 잊고 망연자실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딘지 음흉한 미소며 흥에 겨운 저 발걸음은 중신들이 뒷목 잡고 넘어갈 만한 일을 꾸밀 때면 으레 보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욱이 용상에 앉은 그날부터 곁을 지켜왔던 정 내관과 고 내관도 벌써 감을 잡고 겁먹은 표정으로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설마 승상이겠습니까?”

공비가 재가를 해도 중신들이 감히 덤비지 못할 정도의 가문이란 나라를 털어도 많지 않았는데, 승상 조양이라면 분명 그만한 위세를 갖춘 당대의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런 만큼 황제의 위세에 밀려서 어물쩍 노비를 호적에 올려줄 정도로 무르고 만만한 성품은 절대 아니었다. 조양이 어쩐 일로 황제를 무척 예쁘게 보아서 그 앞에서는 뼈도 없이 흐물거리는 지경이긴 해도 실상은 여타 노신들을 압도할 정도로 깐깐하고 매서운 성격이었던 것이다.

“잘못 건드렸다간 낙향도 불사할 텐데…….”

고 내관도 걱정스러워서 윤 내관을 쳐다보았다. 조정에 신하도 많고 충신도 많지만 승상만큼 대놓고 친황제파도 귀한데 어쩌자고 그쪽을 들쑤시나 싶었던 것이다.

고 내관의 낙향 운운에 윤 내관이 찬물을 맞은 듯 등을 부르르 떨었다. 조양은 황제에게도 충신이지만 상선인 윤 내관에게도 천금 같은 조력자였다. 그간 황제가 중신들과 갈등을 빚을 때면 조양이 적극적으로 중신들을 설득하고 중재해서 수차례 고비를 넘겼었는데 낙향이라니…… 나는 어쩌라고…….

윤 내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위허위 침전을 나섰다. 내려가서 상황을 살피다가 황제가 큰일 저지르기 전에 막든가, 그게 어려우면 큰일 저지른 직후에라도 들어가 수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윤 내관의 뒤를 정 내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고 내관 역시 보이지 않는 실에라도 매인 듯 둘에게 이끌려 나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침상을 향해 돌아섰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마마.”

“이보게…….”

허연이 당황해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하지만 고 내관도 이미 바람처럼 침전을 나가버린 후였다.

나도 강아지하고 승상이 무슨 말을 주고받을지 궁금한데…… 허연이 시무룩한 눈길로 부목을 대고 붕대로 휘감아놓은 오른쪽 다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어느새 슬금슬금 방 안으로 들어와서 탁자 위에 놓인 성지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이 좋은 비단을 누가 이리 버려놓았나, 이게 글씨인가 개 발자국인가 고민에 빠져 있는 내관 아이들과 눈길이 딱 마주쳤다.

홍운궁 내실의 서재에서 비에 젖은 계곡 풍경을 내다보던 조양이 쿵쾅쿵쾅 마루 울리는 소리에 돌아섰다. 그러자 바로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욱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승상 오셨습니까?”

“예, 폐하. 불러 계시옵니까?”

욱이 명절에 찾아온 친척 아저씨 반기듯 조양을 반갑게 맞으며 절도 마다하고 의자를 권했다. 그러고는 직접 화로에 숯을 옮기고 다기를 차리기 시작했다. 그간에도 욱이 조양을 친밀히 대하며 높이 대접하기는 했지만 손수 차를 달일 정도는 아니었다. 보통 때의 그것을 훨씬 웃도는 환대에 조양이 영문을 몰라서 허허 웃었다.

“어찌 폐하께서 직접 찻물을 데우고 다기를 차리십니까? 이런 일은 내관이나 궁녀에게 맡기시지요?”

“과인이 승상에게 직접 차 한 잔 드리고 싶어 그럽니다.”

“소신이 오래 살다 보니 폐하께서 손수 달이신 차를 다 마셔봅니다.”

조양이 껄껄 웃으며 생각보다 섬세한 욱의 손놀림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귀인은 어떻습니까? 윤 내관에게서 들으니 기력이 떨어져서 종일 잠을 떨치지 못한다고 하던데…… 아직도 그렇습니까?”“많이 좋아졌습니다. 점심때엔 일어나서 죽도 먹고, 약도 들고…… 아이들과도 잠시 놀았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귀인의 일로 소신들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승상께 걱정을 끼쳐 면구스럽습니다. 좀 더 주의를 했어야 했는데, 모든 것이 과인의 불찰입니다.”

욱의 의젓한 답례에 조양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난 사흘간 행궁과 사냥터는 어딜 가도 며칠 전의 사고로 웅성북적 소란스러웠다. 허연의 부상, 공비의 활 솜씨, 죽은 사슴의 엄청난 덩치…… 그날 밤의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고 한껏 부풀어져서 끝도 없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호사가들이 유독 열중하고 있는 부분은 황제와 사슴의 맞대결이었다. 사슴을 쓰러뜨린 것은 신궁에 가까운 공비의 솜씨였으나 정작 사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은 그 직전에 사슴의 배에 창을 박아 넣고 단검을 움켜쥔 채 일전을 불사했던 황제의 대담함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스무 살 어린 나이에 황제의 숲에서 수백 명의 자객과 사투를 벌이며 구원병이 올 때까지 버틴 일은 이미 월국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화산의 숲에서 낙타만 한 사슴을 단검 한 자루로 대적했으니, 이는 저자의 백성들이 멋대로 지어서 떠드는 허무맹랑한 무용담과는 수준이 다른 영웅담이었다.

조양은 황제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호쾌하고 직설적인 성품이며 사내아이다운 엉뚱함이 마음에 쏙 들었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이제 청년이 되어 제왕의 풍모와 영웅호걸의 자질을 한 몸에 갖추었으니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따금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그것은 늙은 아비가 장성한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사고란 것이 본래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때에 덮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귀인처럼 출중한 무인이 어찌 달려드는 사슴을 피하지 못했는지…….”

“귀인은 사슴을 못 피한 것이 아니라 안 피한 것입니다.”

“예?”

“자신이 사슴을 피해 옆으로 비키기라도 하면 바로 뒤에 있던 제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서 그대로 버티고 서서 달려드는 놈을 몸으로 막은 것입니다. 실제로 귀인이 거기서 겁을 먹고 비켜섰다면 제가 그놈의 날카로운 뿔에 찍혔을 것입니다.”

“허…….”

다른 사람도 아닌 허연이 사슴에게 받혀서 타고 있던 말은 그 자리에서 죽고 그 자신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정황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어찌 그런 일이 생겼나 의아했는데, 이제야 그 의구심이 풀린 조양이 연거푸 탄식을 토해냈다.

“그런 내막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들 그 부분이 석연치 않아 설왕설래하던 중이었는데…… 하긴, 귀인이라면 어찌 자신의 안위를 위해 폐하를 위험에 버려두었겠습니까?”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모골이 송연합니다.”

공연히 죽는소리를 하며 욱이 짐짓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시겠습니까? 많이 놀라셨을 것이니 앞으로 며칠간 다른 일은 생각 마시고 편히 쉬시며 마음을 추스르십시오. 조정의 잡다한 일은 신이 정안군과 의논하여 처리하겠습니다.”

조양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성심껏 욱을 위로했다.

“고맙습니다. 조정에 중신이 많다고는 하지만 승상과 같은 충신이 또 있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그 무슨 겸양의 말씀이십니까? 나는 항상 승상을 일가의 아저씨처럼, 혹은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아비로 여긴다는 말에 울컥 감동이 솟구쳐서 조양이 한없이 아련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신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승상…….”

손수 차도 한 잔 대접하고, 내게는 승상밖에 없다고 아버지와 같다고까지 아양을 떨며 조양을 뼈까지 녹여놓은 후, 욱이 지체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여, 그간의 충심에 보답하는 뜻으로 과인이 좋은 선물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선물…… 이라니요?”

그제야 뭔가 수상쩍음을 깨달은 조양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앉았다. 하지만 욱이 조양의 곁에 더욱 바싹 다가앉으며 그 손을 움켜잡았다.

“인물 좋고, 성격 점잖고, 총명하고,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나서 장차 가문에 큰 버팀목이 될 아들은 어떻습니까?”

“예?”

분명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조양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들이라니…… 내 평생 그렇게 바랐어도 얻지 못했던 아들을 폐하께서 어떻게 선물로 주신단 말인가? 내게 농을 건네시는 건가? 아니면 혹시…… 황제가 자신에게 양부를 청하는 것인가 싶어서 승상이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폐하, 소신의 평생소원이 폐하와 같은 아드님을 얻는 것이었으나, 어찌 감히 그 같은 일을 현실에서 바랄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저 지금처럼 마음으로만 폐하를…….”

승상이 너무 앞서나가는 것이 당황스러워서 욱이 속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겉으론 그런 내색 전혀 없이 밑밥을 더욱 두텁게 깔았다.

“과인은 이미 승상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승상과 과인 사이의 정은 오래전부터 부자간의 그것과 진배없었거늘 새삼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오시면…….”

“대현성의 한 선생 말입니다.”

“응?”

조양이 이미 식어서 미지근해진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곤 송곳 같은 눈초리로 욱을 노려보았다. 이것이 다른 중신들을 바짝 얼어붙게 만든다던 조양의 살벌한 눈길이구나 싶어서 욱이 한층 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승상.”

“불가합니다.”

“아버지…….”

“어허!”

조양이 벌떡 일어나서 금방이라도 어전을 박차고 나갈 듯 씩씩거렸다.

“뭘 그렇게 노여워하십니까? 승상에게는 아들이 없고, 한 선생에게는 믿고 기댈 가문이 없으니 이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입니다.”

“폐하, 제게는 이미 양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둘이나요.”

슬하에 자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딸뿐인 경우에 양자를 들여서 집안을 잇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명문가일수록 혈연을 중시하는 경향이 심해서 양자를 들이는 일도 까다롭기 이를 데 없었다. 때문에 일가의 조카나 먼 친척의 자손 중에 적당한 아이를 고르고 골라서 호적에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아이가 똑똑하다든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양자를 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씨가 다르거나 신분이 분명치 않은 경우조차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판국에 노비를 양자로 삼아 호적에 올리라니…… 이는 저자에서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무례한 권유였다.

“시강원에 든 지 7~8년이 지나도록 출사조차 못하고 저자거리 한량들과 몰려다니는 그 조카들 말입니까?”

“아직은 어려서 철이 없는 것뿐입니다. 차차 나아지겠지요.”

조양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욱이 혀를 끌끌 찼다. 조양은 양자들이 열서너 살 먹은 아이들인 듯 말하지만 실상 그들은 이제 20대 중후반의 나이로 진즉에 장가를 들어 자식까지 둔 성인들이었다.

“한 선생은 그 어떤 명문가의 자손보다 선비의 자질이 뛰어난 자입니다.”

“소신도 승주의 처지가 딱하고 그 재주가 아깝습니다. 하지만…… 어찌 신에게 그런 일을 강요하십니까? 신의 문중에서 절대로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승상.”

노여워서 이젠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조양을 욱이 나직하게 불렀다.

“…….”

“승상은 가문의 후광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소싯적부터 나라의 험한 곳을 두루 다니며 전쟁도 치르고, 성읍도 다스리고…… 조 씨 일문의 다른 세력가들에게 치이고 밀리는 와중에도 식견과 경험을 쌓고 백성을 다스리는 옳은 도리를 찾으려고 애썼기에 오늘날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며 모두가 승상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또 사람 갖고 놀려고 붕붕 띄우는구나 싶어서 승상이 곱지 않은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조양의 눈앞에는 장난기라곤 그림자도 없는 의젓한 젊은 황제가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승상의 아들은 최소한 승상과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총명하고 심지 굳고 부지런하고, 어려운 백성의 사정을 자신의 일로 여겨 보살필 줄 아는…… 그 정도는 되어야 아비의 이름과 가문을 높이고 후일 승상의 자리 또한 이어받지 않겠습니까?”

변방에서 종살이 하던 젊은이를 두고 승상의 자리를 논하는 그 대담함이 놀라워서 조양이 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폐하…….”

욱이 다시 한 번 조양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곤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청을 거듭 했다.

“과인이 비록 황제이기는 하지만, 이 큰 나라를 혼자 다스리고 혼자 이끌 수는 없습니다. 승주는 내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승상이 이번에도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조양이 원망 가득한 눈길로 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더는 어떤 거절의 말도 하지 못한 채 속이 타는 것 같은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전각 앞까지 나가서 조양을 배웅한 욱이 개운한 얼굴로 용화루의 침전으로 돌아왔다. 욱이 침전의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허연은 침상에 상을 얹고 비단을 펼쳐서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욱이 의아한 표정으로 허연에게 다가갔다.

“성지를 옮겨 쓰고 있었습니다.”

허연이 붓을 옆에 내려놓고 아픈 어깨를 주물렀다. 말과 함께 바닥에 처박힐 때 오른쪽부터 떨어진 탓에 그쪽 어깨며 등에 입은 부상도 가볍지 않았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찌 이런 일을 하고 있었는가? 성지야 형님께 다시 써달라고 부탁을 드려도 되고, 내용만 맞으면 그냥 내려도 되는 것을…….”

공문서를 이렇게 되는대로 갈겨놓고는 그냥 공비에게 내리겠다는 말에 허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폐하께 검술만 가르쳐드릴 게 아니라 글씨도 봐드렸어야 했는데, 저의 불찰입니다.”

허연이 다시 붓을 들어 이별을 진심으로 애통히 여긴다는 마지막 부분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허연이 검을 휘두르듯 날렵하게 붓을 놀려 자신의 성지를 한 자 한 자 아름답게 다시 쓰는 모습을 욱이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대는 글씨도 단정하고 아름답게 잘 쓰네그려.”

“어렸을 때부터 엄한 선생님 밑에서 배운 덕입니다.”

“장인어른께 배웠는가?”

짧은 한마디에 뭔가 아련함이 묻어 있어서 욱이 무심코 물었다. 그러다 허연의 송곳 같은 눈초리에 험……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니까, 아버님께 배웠느냐는…… 뜻이었네.”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욱의 능글능글함에 치를 떨면서 허연이 다시 붓을 들었다.

성지를 모두 옮겨 적은 허연이 조그맣게 신음을 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다리가 부러졌을 뿐, 타박상 정도는 가벼운 부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상이 다리 골절보다 심각해서 글 몇 자 쓴 것만으로도 허연의 몸은 땀으로 푹 젖었다.

“사람, 미련하기는…….”

욱이 고 내관에게 침상 위에 놓인 지필묵을 치우도록 하고 그 곁에 다가앉았다. 그러고는 허연의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승상에게 아들을 하나 내려주셨다고요?”

허연이 욱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승주의 거취 이야기를 꺼냈다.

“윤 내관에게서 참 좋은 거 배웠네. 이젠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는구먼.”

“승상이 그렇게 무던한 성품이 아닌데, 그런 부탁까지 선뜻 들어주는 것을 보면 폐하를 정말 아끼나 봅니다.”

“그 바람에 내가 앞으로 사석에선 승상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생겼네.”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지금은 섭섭하겠지만, 승주를 아들로 얻은 것이 큰 복임을 승상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공비를 며느리로 들인 후에도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구먼.”

욱의 너스레에 허연이 그 허벅지를 한 대 쥐어박았다. 보통 때라면 온몸이 비틀릴 정도로 짜릿하게 아팠을 텐데, 지금은 기력이 떨어져서 주먹질도 그냥 어루만지는 정도라 욱이 뚱한 표정으로 허벅지를 긁었다.

“어쨌든 이만큼 했으면 과인이 목숨 빚을 허술히 갚았다고 시비 걸 놈은 없을 터…… 자네도 다른 일 생각하지 말고 편히 쉬며 몸조리나 하게.”

“성지는 언제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그대가 예쁘게 새로 써두었으니 옥새를 찍어서 지금이라도 내리면 그만이지.”

“공비마마께서 무척 좋아하시겠습니다.”

“지난 3년간 내 속을 그렇게 뒤집었으니, 공비도 이제 험한 세상에 나가서 고생 좀 할 때가 되었지.”

공비가 한창 말썽이고 밉상일 때엔 저걸 어떻게 표시 안 나게 쫓아낼까 조석으로 그 궁리만 하던 날도 있었는데, 막상 궁에서 내보내려니 마음이 무거워서 욱이 시무룩한 눈길로 성지를 한 번 슥 훑었다.

공비에게 황제의 성지가 내려진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조회가 있을 것이니 입조하라는 통지를 받은 조정 중신들은 아마 오늘 공비에게 큰 상이 내리려니, 최소한 귀비의 품계에다 번듯한 새 궁전에 그 친정에 내려지는 포상도 엄청나겠거니 자기들끼리 설왕설래하며 홍운궁의 대청에 올랐다.

역시 입조하여 대기하라는 명을 받은 공비는 중신들보다 조금 늦게 대청에 들어서 용상 바로 앞에 섰다. 중신들은 여느 무장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그 늠름하고 의젓한 모습에 새삼 탄복을 하며 요즘처럼 변방이 어수선한 때에 공비에게 장군 벼슬을 내릴 수 없는 현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황제가 황의에 면류관을 갖추고 나와서 옥좌에 앉았고, 대전 상선 윤 내관이 그 곁에서 느닷없이 성지를 펼쳐 들고는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비의 정숙, 단정한 행실과 그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태도를 칭찬하는 대목에선, 우리도 공비마마의 성격을 알 만큼 아는데 황제께서 너무 인심을 쓰셨다며 눈웃음을 주고받던 중신들의 표정은 성지 말미에서 곧 경악의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우리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가 의아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비는 지극한 효심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에 병을 얻어 더는 궁에서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바, 과인의 욕심으로 그녀를 곁에 두는 것은 낭군의 도리가 아니게 되고 말았다. 하여 과인은 오랜 심사숙고 끝에 공비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자 한다.

과인은 진심으로 이별을 애통히 여기며 공비가 그간 과인과 나라에 세운 공을 기려 우영공에 봉하는 바이다, 또한 황성과 대현성에 각각 집 한 채씩을 내려 원하는 곳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무엇을 하든 원하는 대로 사는 것 또한 허락한다.] 

윤 내관이 황제의 성지를 다 읽고는 문서를 돌돌 말아서 손에 쥐었다. 그러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대청을 슥 한 번 돌아보았다.

그간 공비에 관해 별별 소문이 다 돌았으나 몸 아프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며, 멀리 떠나 살다 보면 고향이 그리울 수도 있지, 그렇다고 부인을 고향으로 쫓아 보내는 경우가 있는가?

게다가 공비는 바로 엊그제 황제의 목숨을 구해준 충신이자 열녀인데 크게 칭찬하고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없는 병을 만들어서 쫓아내다니…….

중신들이 모두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서 지금 공비가 폐출을 당한 것이냐? 우리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냐고 서로 묻느라 훙운궁의 대청이 뒤늦게 술렁였다. 그때, 내도록 묵묵히 앉아 있던 욱이 입을 열었다.

“공비는 앞으로 나와서 성지를 받으라.”

“폐하…….”

사냥터에서 돌아온 이후 지난 사흘간, 공비를 둘러싼 주변의 호들갑은 한여름 밤의 개구리 울음소리만큼이나 정신 사나운 것이었다.

화산에서 제일 큰 사슴을 잡고 폐하와 우화원 귀인을 동시에 구했으니 이는 전쟁에 나가 대승을 거둔 것만큼이나 큰 공이라는 치하에, 앞으로는 누구도 그녀를 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 소박데기라 비웃으며 무시하지 못하리라는 위로에, 이제 귀비나 황귀비의 품계를 받는 것은 시간문제요, 폐하의 총애도 한 몸에 받을 것이라며 이 기세로 아들만 낳으면 사람 팔자 어찌 될지 누가 알겠느냐는 부추김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높은 품계나 호화로운 처소, 친정 아비의 승차 따위는 공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또한 자신이 위기의 순간에 화살 한 발로 사슴을 잡아 황제를 위험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 상황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었다. 사슴에게 받힐 위기에 처한 자가 황제가 아니라 사냥꾼의 아이라도 공비는 주저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터였다.

단지 너무 늦지 않게 현장에 도착한 것과, 다소 먼 거리인데다 어두운 밤이었는데 조준에 실수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큰 다행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조회에 불려 나와서도 한없이 심드렁하던 공비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황망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폐하, 방금 상선이 전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소인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공비가 어깨를 덜덜 떨며 욱에게 물었다.

“출궁을 허락한다고 했느니라. 이는 죄를 지어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파서 피치 못하게 그리 된 것이니, 그대의 신분과 지위는 이전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홀로 된 다른 귀부인들의 전례를 따라 재혼을 하는 것도 허락한다.”

공비와의 인연을 단칼에 끊어내는 황제의 발언에 홍운궁의 대청은 경악의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 어이가 없어서 황제를 빤히 쳐다보던 중신들이 이번엔 대청 복판에 버티고 선 무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내일모레면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전장으로 떠나갈 대장군, 그 성질이며 기운이 영락없이 산중의 호랑이인 무호가 황제의 전횡을 가만 두고 볼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폐하께서는 염치도 없으시지, 공비를 출궁시킬 작정이면 무호나 떠나 보내놓고 조용히 진행을 하실 일이지 뭐 잘하는 짓이라고 친정 오라비며 중신들 다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이리하시는고?

잘못하면 어전에서 큰 난리가 나겠다 싶어서 중신들이 바짝 얼어붙은 채 황제 한 번, 무호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호랑이가 포효하듯 황제의 경우 없음을 나무라고, 이러면 나도 전쟁터에 안 나가는 수가 있다며 노발대발할 줄 알았던 무호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장승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진심이십니까?”

공비가 황제에게 물었다. 후비가 되어 황궁에 한 번 발을 들인 여인은 죽어서 상여에 실려 나가기 전엔 그 높은 궁장을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혹은 죄인이 되어 쫓겨나거나, 모시던 황제가 붕어한 후에 황궁에 계속 머물 처지도 못 되어 머리를 깎고 절에 들거나…… 생존한 후궁의 출궁이란 대부분 그처럼 비참하고 서글픈 일이었다. 그런데 출궁이라니, 이토록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궁에서 나갈 수 있다니…… 도무지 믿기질 않아서 공비가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폐하, 정말로…….”

“과인이 그대와 깊은 인연이 있어서 부부지연을 맺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연이 길지 않아 이리 되었구나. 오늘로써 과인과 그대의 부부지연이 다했으니 그대는 과인을 따라 다시 궁에 들 필요가 없다.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는 정안군의 사저에서 지내도록 하고, 황후에게는 하직을 고하는 편지나 한 장 써서 부치도록 하라.”

욱이 말을 맺고는 윤 내관에게 성지를 공비에게 내리라고 눈치를 주었다. 출궁령이 적힌 성지를 받아 쥐고 눈물 가득한 눈길로 그 내용을 확인하던 공비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는 성지를 품에 안고 소리를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승상 대감!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대감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계셨습니까?”

조회가 파하고, 황제가 자리를 뜨자마자 좌우 승상과 각 부처의 수장들이 승상에게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무 죄 없는 후궁을 폐출시키다니요? 그것도 없는 병증을 만들어 씌워서…… 세상에 이런 법이 있습니까?”

“게다가 공비는 엊그제 폐하의 목숨을 구한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품계를 올리고 천금을 하사해도 부족한 판에, 아무리 예쁜 구석이라곤 없는 후궁이라도 이런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적인 일로 밤을 꼬박 새우고 어수선한 정신으로 나와 있던 조양이 멍한 눈길로 허허…… 탄식만 토해내자 중신들이 더욱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공비께서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으면 중신들이 다 모인 조회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그리 서럽게 우셨겠습니까? 한낱 상인의 집에서도 죄 없는 안사람을 이리 느닷없이 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승상 대감, 뭐라고 말을 좀 해보십시오. 중신들이 모두 모여서 출궁령을 거두시라고 주청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의 무정함을 성토하던 중신들이 뒤늦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시영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처사를 나무라고 일을 바로잡을 이는 시영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영은 어제 낮에 잠깐 찬바람 쐰 것이 탈이 나서 고뿔이 확 오른 탓에 오늘 조회는 불참이었다.

“상서령은 다 좋은데, 꼭 이런 때 몸살 아니면 고뿔입니다.”

“어쨌든 이 사태가 우리들끼리 떠들어서 해결 날 일이 아닙니다. 가서 정안군을 뵙고 의논을 합시다.”

“승상께서 앞장을 서시지요.”

좌우 승상이 조양의 등을 떠밀며 대청을 나섰다.

어제오늘 연달아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제는 승주를 내게 떠넘기시더니 오늘은 아무 이유 없이 공비를 내쫓으시니…… 항시 황상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노래를 불렀던 조양이 오늘은 무자식 상팔자란 옛말을 곱씹으며 대청마루 끄트머리에서 신을 찾아 신었다.

시영이 산발에 바지저고리 바람으로 용화루의 침전으로 달려 들어온 것은 중신들이 허둥거리며 홍운궁에서 물러난 지 채 반시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봉두난발에 장포도 걸치지 않은 시영의 행색은 황제를 배알하기엔 심히 부적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지친인데다 윤 내관을 비롯한 지밀 내관들은 다들 시영이 이제쯤 들이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예법이나 절차를 들먹이며 그 앞길을 막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알아서 물러서고 착착 문을 열어준 덕에 시영은 용화루의 가장 안쪽 방인 침전까지 한 번 멈추지도 않고 단걸음에 달려 들어올 수 있었다.

“폐하!”

“오셨습니까?”

수중에 딱 용패가 들어왔는데, 형님은 내 손에 좋은 패가 들어온 것을 어찌 알고 이때에 달려 들어오시는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욱이 투전패를 내려놓았다.

욱은 조회를 마치고 용화루에 돌아온 후, 시원하고 섭섭하고 찜찜한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방 안을 쓸고 다니다가 허연에게 붙들려서 투전목을 잡고 앉아 있던 참이었다. 첫판은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바람에 참패를 하고, 두 번째 판부터는 끗발이 붙던 참이었는데…….

“공비를 쫓아내셨습니까?”

시영이 비명을 지르듯 욱에게 소리쳤다.

“쫓아낸 것이 아니라 놓아준 것입니다.”

욱의 대답에 시영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시영은 어젯밤부터 간당간당하던 고뿔이 도져서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바람에 솜이불을 두 채나 뒤집어쓰고 몸조리를 하던 중이었다. 다행히 이번 고뿔은 증상이 순해서 하루 정도 약 먹고 찬바람을 피하면 밀린 정무도 해결하고 모레 대현성으로 떠나는 승주를 산 아래까지 배웅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회에 참석을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공비의 귀비 책봉이며 그 친정에 대한 포상은 이른 대로 잘 알아서 했으려니 믿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이불 밑에서 잡서를 뒤적이던 시영에게 벌 떼처럼 몰려온 중신들이 윙윙거리며 전한 소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야, 이…… 배은망덕한 놈아…….”

형님이 내게 어지간해서는 저런 말을 안 하는데, 놀라긴 놀랐다 보다 싶어서 욱이 한숨을 쉬며 침상에서 내려섰다. 그러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헐떡거리는 시영을 잡아 일으켰다.

“형님, 고정하십시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정도가 있지, 출궁이라니…… 공비가 대역죄라도 지었습니까? 남의 귀한 딸을 열일곱에 데려다 후궁을 삼고는 내도록 팽개쳐두다가 스무 살에 쫓아내다니요?”

욱이 땀에 젖은 시영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훔쳤다. 하지만 시영은 앙상한 팔을 들어서 욱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선대에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설혹 그리 무정한 황제가 있었다고 해도, 폐하께서는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당장 명을 거두십시오!”

“형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아무도 없는 데서 공비에게 뺨이라도 한 대 맞으셨습니까?”

“출궁은 공비가 가장 바라던 것입니다.”

“…….”

“품계를 올려주고 새 전각을 내려주는 것으로 보은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공비를 공귀비로 올려서 부르도록 하고, 이미 있는 전각에 세간이나 새로 들여서 내려주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쉽고 간단합니까? 또한 그리하면 형님도 흡족하실 테고, 무호와 부장들도 기분 좋게 대현성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중신들도 짹짹거릴 일이 없었을 것이니…… 형님, 믿어주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얘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어서 시영이 욱을 잔뜩 찌푸린 눈길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공비는 저와 귀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 은혜를 갚으려면 제대로 갚아야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통 못 알아듣겠습니다.”

분위기가 전에 없이 진중한 것을 보니 말장난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시영의 눈길이 다소 누그러졌다. 하지만 후궁을 쫓아내고서 은혜를 갚았다고 우기는 건 또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저는 제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공비에게 주었습니다. 공비는 궁 밖에서 훨씬 잘 살 겁니다.”

욱이 시영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정을 시켰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쿵쿵거리는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시만…… 장군…….”

“고정하십시오. 소인들이 폐하께 아뢸 것이니…….”

지밀 내관들이 허둥거리며 무호와 부장들 앞을 막아섰다.

“비키게. 폐하께 인사를 올리려고 하네.”

저리 비키라며 툭 밀치는 무호의 손길에 연약한 내관들이 추풍낙엽처럼 이리저리 나부꼈다.

“폐하! 피하십시오! 무호가…… 왔습니다.”

장지문 밖 상황을 넘겨다보던 윤 내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장지문 너머에 정 내관과 근위병들이 버티고 서 있기는 하지만, 무호와 그 부장들의 표정이 너무나 어둡고 살벌하니 이런 상황에선 일단 몸을 피하는 것도 하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욱은 별반 당황한 기색 없이 횃대에 걸어놓았던 황의를 걷어서 걸쳤다.

“왔으면 온 것이지, 무슨 큰일이라고…… 안으로 들라 하라.”

“하지만 폐하, 현재 상장군의 심사가 몹시 거칠어져 있을 것이니 우선은 물리시고…… 시간이 좀 지난 연후에…….”

“여기가 제일 막다른 방인데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이 성화냐? 창 밖으로 뛰랴?”

“곁방에 아래채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이 있지 않습니까?”

윤 내관의 거듭되는 대피 권유에 욱이 눈살을 찌푸렸다.

“채신머리없이…….”

그때 경황없이 앉아 있던 시영이 욱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누이가 큰 공을 세우고도 오히려 폐출을 당했으니 그 오라비가 잔뜩 열 받았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내막은 모르겠지만 일단 살고는 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 시영이 간절한 눈길로 욱을 올려다보았다.

“잘한 것도 하나 없으시면서 어찌 이리 당당하십니까? 지금은 못 만난다 하시고 물러가게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호에게 이를 말이 있었는데 잘되었습니다. 잠깐 만나고 올 것이니 형님은 여기서 쉬고 계십시오.”

욱이 의젓하게 시영을 안심시키고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정 내관은 비켜 있게 하고, 상장군과 부장들을 접객실에 들게 하라.”

그렇게 이른 후, 욱이 용포의 매듭을 매며 접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처남 왔는가?”

욱이 접객실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무호를 맞아 먼저 인사를 건넸다. 부장들을 문 앞에 세워놓고 혼자 안으로 들어온 무호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그러고는 유감이 가득한 눈길로 욱을 올려다보았다.

“소신이 아직도 폐하의 처남입니까?”

“그것은…… 과인도 유감일세.”

욱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무호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무호는 욱과 길게 얼굴 마주할 마음이 없어서 의자를 마다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신은 하직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 든 것입니다.”

“…….”

“소신과 부장들은 이 길로 행궁을 떠나 원군이 집결해 있는 호서성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이미 시일이 늦어서 2만 명의 군사가 소장을 기다리며 군량미만 축내고 있으니 출정이 더 늦어지는 것은 군의 사기에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화가 많이 났구먼.”

“그것을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울컥해서 한마디 내지른 무호가 거친 숨을 내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호가 아무리 눈치 없고 무심해도 황제와 누이동생 사이에 부부지정이 없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에게는 이미 온 마음을 다 쏟고 있는 연인이 따로 있었고, 누이에게는 궁중 귀부인의 자질이라곤 도통 없으니 둘은 초장부터 볼 장 다 본 사이였다.

게다가 궁중 생활이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평온해 보여도 실상은 천 길 낭떠러지에 난 잔도를 지나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미 누이는 얼토당토않은 추문에 엮여서 큰 곤욕을 치른 바 있고 황제와의 관계가 앞으로 잘 풀릴 가능성도 전혀 없어 보여서, 며칠 후면 대현성으로 돌아가야 할 무호의 마음은 무겁고 암울하기만 했다. 그런 까닭으로 방법만 있으면 혼인을 물리고 누이를 다시 고향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했었지만…… 속으로 생각을 하는 것과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하긴, 자네 입장이면 그렇겠구먼.”

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한 눈길로 무호를 응시했다.

“소신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간 황제의 행적과 태도가 심히 수상쩍은 것이긴 했지만 한낱 궁녀도 아니고 절차대로 첩지를 내려서 맞은 후비를 이렇게 한 방에 쫓아내다니, 황제면 이래도 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무호는 하마터면 조금 전 조회에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뻔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만 나가 살라는 한마디에 죽을 목숨 구한 것처럼 기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누이를 보면 잘된 건가 싶기도 하고, 재가를 허락한다는 것이 설마 승주를 염두에 둔 처분인가 의아하기도 해서…… 사실은 무호도 자기 기분이 어떤지 정확히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이야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하겠으나, 시일이 좀 지나면 오늘의 처분이 자네 누이를 위해 과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

“우리가 더 이상은 처남과 매부 사이가 아니지만, 그대는 여전히 과인의 충신이요 나라의 가장 위험한 국경을 지키는 맹장이 아닌가? 언제든 황성에 오면 내 그대를 버선발로 맞을 것이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게.”

욱의 해명과 설득에 무호가 더는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무호의 화가 다소 누그러진 듯 보이자 욱이 용기를 내서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곤 내친김에 손을 뻗어서 그 어깨를 두드렸다. 욱이 겁도 없이 무호에게 다가가서 툭툭 건드리자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 내관이 덜덜 떨면서 소맷자락을 쥐어짰다.

“과인도 내일 아침에 황성으로 출발할 것이네. 그러니 하루 더 있다가 과인과 동행하여 갈림길까지 같이 가세.”

이제 간다고 말 한마디 던지고 당장 산을 내려갈 생각이었던 무호가 그 친근한 권유에 싫다는 말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틈에 욱이 얼른 긴한 용건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승주는 두고 가게.”

“승주…… 를요?”

무호가 욱의 손길을 뿌리치고 물러섰다. 그러고는 또다시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욱을 노려보았다.

“과인이 어렵사리 승주의 아비를 찾았네. 같이 지내며 조석으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야 부자간의 정이 돈독해지지 않겠는가? 대현성에 승주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바로 보내줄 것이니 우선은 여기 두고 가게.”

승주의 아비는 대현성 이웃 성읍의 군마장에서 말을 치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무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욱이 무호를 돌려보내고 다시 침전으로 돌아왔을 때, 침상은 시영의 차지가 되어 있었고 허연은 침상에서 내려와서 탕약을 들고 있었다. 시영이 침상에 누워 기진한 모습으로 끙끙거리는 것을 본 욱이 혀를 끌끌 찼다.

“조정엔 항시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데 이만한 일로 이렇게 놀라셔서야…….”

욱이 시영을 들여다보며 툭 핀잔을 날렸다.

“제가 지금…… 머릿속이 심히 복잡합니다.”

시영이 기운 없는 눈초리로 욱을 노려보며 성난 고양이처럼 아르릉거렸다.

사흘 전, 사냥터에서 벌어진 사고로 1차로 크게 놀란 시영은 사전 예고도 없었던 공비의 출궁령으로 한 번 더 기함을 한데다, 좀 전에 허연으로부터 욱이 승주를 조양의 양자로 밀어 넣은 정황까지 전해 듣고는 더는 앉아 있을 기운도 없어서 염치불구하고 허연을 밀어내고 침상을 차지한 것이었다.

“대체 승주는 어찌 승상에게 떠넘기신 겁니까? 그 사람이 정말 순순히 폐하의 명에 따르겠다고 했습니까?”

꼬장꼬장하고 보수적인 조양이 승주를 아들로 삼다니…… 이는 공비의 출궁보다 더욱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처음엔 다소 난색을 표하긴 했지만, 죽어도 안 된다고 펄쩍 뛰거나…… 그러진 않던데요? 머저리 같은 아들은 이미 둘이나 있으니 똑똑한 아들도 하나 있으면 승상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

“폐하, 정말 공비와 승주를 맺어주시려고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시영이 그 일은 어찌 아는가 싶어서 욱과 허연이 서로 의아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 표정과 눈길만으로도 욱의 꿍꿍이를 알 것 같아서 시영이 에고…… 앓는 소리를 했다.

“대체 어쩌자고…… 자꾸 이런 식으로 중신들을 들쑤시는 것은 폐하의 전정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형님은 너무 걱정 마십시오. 최대한 잡소리 안 나도록 잘 틀어막을 것이니…….”

“참…….”

너도 대단하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영이 눈을 감았다. 더는 눈꺼풀을 들고 있을 기력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승상의 아들이라니…… 조 씨 집안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사당에 큰절 두 번만 하면 승주도 명문가의 자손이란 생각에 그 입가엔 흡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시영이 가물가물 잠에 빠져드는 것을 지켜보던 욱이 침상에서 물러나 허연에게로 다가갔다.

“형님께서 침상을 차지했으니, 자네는 내가 업고 월성정으로 올라가야겠구먼.”

은근한 농을 건네며 욱이 허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약사발 옆에 놓인 당과를 집어 허연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건넌방도 있고, 홍운궁 내실도 있는데 월성정엔 왜요?”

“그대와 오붓하게 달구경이나 하려고 그러지.”

“내일 아침에 환궁을 하신다고요?”

허연이 울적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열이틀 일정으로 떠나 온 원행이었으니 환궁할 때가 지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허연은 자신이 사고를 당해서 당분간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당연히 환궁도 며칠 늦추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화산 별궁이 비록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승상을 비롯한 각 부처의 중신들도 다 같이 와 있고, 선대의 황제들은 몇 달씩 행궁에 머물며 나랏일을 보기도 했다니 부족한 인원이나 물자가 있다면 보충을 하면 될 텐데 이토록 부리나케 돌아가다니, 그것도 내게는 말도 않고 있다가…….

“돌아가서 급히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네.”

“하긴, 궁을 오래 비우셨으니…….”

허연이 흠…… 하고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렇게 휑하니 가버리면, 그럼 나는 이 골짜기에 혼자 남아서 멍 빠지고 다리뼈 붙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터덜터덜 돌아가는 건가? 이럴 줄 몰랐는데, 강아지 너 좀 변했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네. 그동안 자네는 우리 말썽꾸러기들을 잘 좀 봐주게.”

욱의 당부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허연이 고개를 들었다.

“아기씨들을 안 데리고 가십니까? 게다가…… 돌아오시다니요?”

욱이 도리어 무슨 소리냐는 듯 허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갔다 와야지. 그대의 부러진 종아리뼈가 붙어서 환궁할 정도가 되자면 한 달은 족히 걸릴 터, 나 혼자 황궁에서 자네 오기를 기다리며 베개나 끌어안고 자란 말인가? 나는 그런 참을성은 없네.”

“…….”

“또한 기병 백 기 정도만 이끌고 후딱 달려가려는데 아이들을 데리고서야 어찌 그렇게 가겠는가?”

이쯤 되면 몸도 성치 않은 자신을 팽개쳐두고 훌쩍 환궁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궁에 그렇게까지 시급한 일이 뭐가 있나 의심스러워서 허연이 수상쩍은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욱이 최측근인 윤 내관과 정 내관, 진관우, 그리고 기병 150을 이끌고 황성에 도착한 것은 화산에서 출발한 이튿날 오후였다. 전날 동틀 녘에 행궁을 출발한 일행은 점심도 주먹밥으로 간단히 때운 채 종일 말을 달려서 밤늦은 시각에 주월성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무호 일행과 작별을 하고 황성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불과 보름 남짓 떠나 있는 사이, 황성은 어느덧 완연한 겨울이었다. 때 이른 추위가 닥치는 바람에 단풍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졌고, 수룡천 가장자리엔 살얼음이 얼어서 이제 길고 혹독한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폐하, 급히 처결할 일이 있다고 하셔서 따라 모시긴 했사오나…… 정승 판서에 상서령까지 모두 화산에 떨궈놓으시고 홀로 궁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옵니까?”

불과 보름 만의 환궁인데도 그사이 휘명전이 낯설게 느껴져서 집무실을 슥 훑어보던 윤 내관이 지난 이틀간 몇 번이나 했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허연이 부상을 입는 바람에 환궁 일정이 다소 늦춰지긴 했지만, 5만의 원군을 대현성에 파견하는 국가 중대사도 깔끔하게 마무리된 마당에 필마단기로 내달릴 만큼 시급한 나랏일이 뭐가 남았는지는 윤 내관으로서도 짚이는 바가 전혀 없었다.

“차나 한 잔 들이라 하게. 나 돌아왔다고 태화궁에도 전하고…….”

“대화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내관 하나를 태화궁에 보냈습니다. 지금쯤 연통이 갔을 것입니다.”

“허면 바로 태화궁으로 가면 되겠구먼. 차도 거기서 얻어 마시고…….”

그때 복도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내관이 미처 안에 고할 틈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이닥친 이는 황후였다. 황후는 황제가 환궁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길로 달려오느라 화장기라곤 없는 맨얼굴에 의복 역시 간소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폐하!”

욱을 보자마자 황후가 화난 사람처럼 벌컥 소리를 치며 다가섰다. 아플 때가 아니고는 태화궁의 내실에서도 웬만해선 볼 수 없는 휑한 행색으로 달려온 황후의 모습에 놀라서 욱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렇지 않아도 막 태화궁으로 가려던 참이었소. 그간 별고 없이…….”

“공비에게 출궁령을 내리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황후의 거친 추궁에 욱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공비의 출궁이 칠궁에 알려진 것은 어제 오후의 일이었다. 사흘 전, 뜬금없는 공비의 출궁령에 놀란 중신들이 앞 다투어 황성으로 전서구를 날리거나 파발을 띄웠고, 그 소식을 접한 중신들이 황후와 후궁의 일가에게 상황을 전했으며, 그들이 곧바로 입궁하여 그 놀라운 소식을 각 전각에 두루 알렸던 것이다.

공비의 출궁 소식은 황후를 비롯한 비빈과 궁인들에게 놀라움과 동시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소식이기도 했다. 그들이 예상하고 있었던 출궁 1순위는 공비가 아니라 황제의 생일 직전에 공비와 허연을 엮어서 추문을 퍼뜨렸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아이들까지 빼앗긴 향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향비의 처분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던 황제가 공비를 원행 갔던 별궁에서 그대로 내쳤다는 것은 여러 가지 불길한 정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공비의 출궁은 그 자체로도 큰 사건이었지만, 그녀가 행궁에서 허연과의 사이에 뭔가 오해를 살 만한 일을 벌여서 폐출을 당한 것이라면 그것은 황후에게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간신히 기세를 눌렀던 향비는 다시 제 세상 만난 듯 설칠 것이고, 지난날 공비를 두둔하고 향비를 몰아붙인 자신은 편협하고 무능한 황후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공비의 출궁이 큰 사건이긴 하지만, 여기서 화산이 4백 리 거리인데 소식 한 번 빠르다고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욱이 어깨를 으쓱했다. 공비의 출궁 소식에 대경실색해서 어제부터 밥 한술 뜨지 못하고 속만 태우던 황후가 당사자에게서 사실을 확인하고는 곧 주저앉을 듯 비틀거렸다.

“공비가 화산에서 대역죄라도 지었습니까? 울적한 심사를 달래주겠다며 단풍놀이에 데리고 가셨던 후비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아이를 별궁에서 쫓아내시다니요? 그것도 소인과 의논 한 마디 없이…….”

“진정하십시오, 황후. 내 그 일은 차차 설명을 하리다.”

“귀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청량전에 있습니까? 아니면 우화원에…….”

뭔가 허전하고, 있을 것이 없다는 불안감에 잠시 그 원인을 더듬던 황후가 급히 허연을 찾았다.

“그 사람은 화산에 있습니다.”

“아니…….”

욱의 대답에 황후가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가까운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공비는 폐출에, 주머니에라도 넣어 다닐 듯 유난떨며 사랑하던 허연은 별궁에 버리고 오다니…… 대체 화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사달이 났단 말인가? 황후가 머리를 감싸 쥐고 끙…… 앓는 소리를 했다.

“급히 오느라 아이들도 귀인에게 맡겨두고 왔습니다. 그 사람이 어지간한 보모상궁보다 아이들을 더 잘 돌보는지라…….”

“예?”

욱의 태평한 설명에 황후가 고개를 들어 멍한 눈으로 욱을 쳐다보았다. 허연이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면 원자와 2황자를 그 손에 맡기고 왔을 리 없는데 이건 무슨 소린가 싶었던 것이다. 황후의 최측근인 두 상궁 역시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

수백 리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정확한 상황도 알 길이 없고, 상황 파악이 안 되니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서 황후가 거친 숨만 들이쉬고 내쉬었다. 욱이 황후의 어깨를 먼지라도 털듯 툭툭 두드렸다.

“그 얘기는 천천히 합시다. 그보다 먼저 과인이 이를 말이 있으니, 비빈들 모두를 태화궁에 불러주시오.”

“모두라 하심은 향비도 말씀이십니까?”

그 물음에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누구보다도 향비가 들어야 할 얘기가 있소.”

후궁들이 다 함께 태화궁의 대청에 모인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황후가 출산을 한 이후 사흘에 한 번으로 정해진 정기적인 문후 외엔 비빈들이 모두 모이는 일이 드물었고, 특히 황제가 화산으로 떠난 후엔 영운궁도 비고 미향궁의 금족령도 그대로라서 태화궁에 자주 드나드는 후궁은 현비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황제의 특명으로 향비도 오랜만에 태화궁 궁문을 넘었고, 덩달아 눈치를 살피며 칩거에 들어갔던 연비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향비 옆자리를 차지하고 섰다.

황제가 느닷없이 공비를 궁에서 내보내고 다음 날 필마단기로 회궁한 것은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황후를 비롯해 평소 향비를 꺼리던 후궁들의 표정엔 수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반면 향비와 연비는 공비의 폐출과 허연이 화산에 홀로 남은 정황이 자신들에게 하등 불리할 것 없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얼굴이 활짝 피어 있었다.

“폐하께서 공비 그것을 내치시더니, 이젠 허연도 화산에 버리고 오셨답니다. 이는 필시 그 둘이 별궁에서 뭔가 방자한 행실을 일삼았기에 폐하께 노여움을 산 것이 아닙니까?”

연비가 영 떨떠름한 안색의 황후와 현비를 힐끔거리며 향비에게 속삭였다.

“뭐…… 그런 모양이지.”

향비가 한껏 여유롭게 대꾸했다.

공비와 허연을 엮어서 추문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아이들까지 휘명전에 빼앗긴 향비는 그날 이후 미향궁에 갇힌 채 원망과 두려움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공비와 허연이 뭐라고 자식을 둘이나 낳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나 싶은 원망으로 밤엔 잠도 오지 않았고, 혹 이대로 영영 아이들을 못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궁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입맛조차 잃어서 며칠 사이 향비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런 향비에게 공비가 폐출을 당했다는 소식은 먹구름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 서광과도 같은 희소식이었다.

어제 저녁 내내 신 내관을 붙들고 그게 사실이냐,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더냐, 다른 소식은 더 없느냐 묻고 다그치며 공비가 기어이 사냥터에서 큰 사고를 쳤구나 쾌재를 부르다가도 이것이 모두 헛소문이요, 잘못된 소식이면 어쩌나 싶어서 향비는 지난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뒤척였었다. 그런데 오후 늦게 환궁한 황제가 허연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다니, 향비는 둘이 사통을 했다는 자신의 고변이 무슨 예언이라도 되었던 듯 느껴질 지경이었다.

“폐하께서 아마도 그 둘의 행실을 명백히 밝히고 내명부의 기강을 다잡으실 듯싶은데, 그리 되면 일전에 두 사람을 두둔하고 마마를 핍박했던 황후께서 참으로 난감해지시겠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네. 폐하께서 오해를 푸시고 내 아드님을 돌려만 주시면 그만이지.”

싸늘하게 대꾸하며 향비가 황후를 매서운 눈길로 힐끔 흘겼다. 그때 문밖에서 황제 폐하 드셨다는 내관의 고언이 울려 퍼졌다.

태화궁의 옥좌에 앉은 욱이 양옆으로 다소곳이 늘어선 후비들을 차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황제의 눈길이 특히 향비에게 오래 머물렀다가 곁에 선 연비에게로 옮겨 가는 것을 본 황후가 속으로 불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무탈히 잘 지냈는가?”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입장이 다른 탓에 각자 딴생각을 하고 있던 후궁들이 입을 맞춰서 대답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과인이 없는 중에도 황후를 공경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니, 기특하구나.”

“어인 말씀이십니까? 그 또한 당연한 일인 것을요.”

향비가 불쑥 나서서 답례를 올렸다. 공비도 내쫓겼고 허연도 종적이 묘연한데다 태화궁에 오라는 전갈을 받았으니 이제 근신령도 풀린 것이겠다, 향비는 더는 조심하고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눈치는커녕 자신은 그간의 부당한 대접을 보상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폐하, 2황자는…… 소인의 아드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떨어져 지낸 지 너무 오래라 한시바삐 보고 싶습니다.”

“2황자는 화산에 있다. 귀인이 친아들처럼 예뻐하며 잘 돌보고 있으니 걱정치 마라.”

“…….”

생각해보니 그간 원자는 한 번씩 어마마마 보고 싶다며 칭얼거렸는데, 2황자는 이 품 저 품으로 옮겨 다니며 잘 놀다가 잠투정을 할 때면 보모상궁이나 한 번씩 찾았던 게 떠올라서 욱이 새삼 마땅찮은 눈길로 향비를 노려보았다.

2황자가 아직 화산에 있다는 대답에 향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욱을 올려다보았다. 귀인은 공비와 함께 방자한 행실을 일삼다가 내쳐진 것이 아니었던가? 어찌 그런 자가 내 귀한 아드님을 돌보고 있단 말인가?

“폐하…….”

“과인이 그대들 모두에게 하명할 일이 있다.”

욱의 음성은 근엄하고 진중했다. 중신 회의에 모인 노신들도 떨게 만드는 그 위엄에 후궁들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뭔가 하나 또 터뜨리려나 보다 마음을 졸이며 황후가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그대들이 후비의 첩지를 받아 입궁할 때에 칠궁에 웃전은 황후뿐이었다. 과인이 복이 없어 어려서 모후를 잃었고, 선대의 황제들께서도 젊은 나이에 흉서하신 탓에 태후도 황태후도 안 계셨기에 그리 되었던 것이다. 들판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필부도 아래로는 처자를 거느리고 위로는 부모와 조부모를 모시며 그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효를 다하는데, 만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황실에 그 같은 효심과 화목함이 없으니 과인이 백성들 보기 민망할 때가 많았다.”

황제가 갑자기 있었던 적도 없는 태후와 황태후를 들먹이며 일장 연설을 시작하자 황후를 비롯한 후궁들이 모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체가 높거나 낮거나 간에 여인들에게 시집 식구란 밥에 섞인 모래처럼 까끌까끌한 존재였던 것이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과인에게는 할머니가 한 분 계시니…… 다들 영산의 태황태후마마에 대해 알고는 있을 것이다. 그분으로 말하자면 30년간 실질적으로 이 큰 나라를 다스리셨던 여걸이시며, 수많은 황손 중 하나에 불과했던 과인을 황제로 낙점해 옥좌에 앉히고 물심양면으로 보살펴 오늘에 있게 해주신 은인이다.”

월국의 백성이라면, 그리고 인접한 외국의 백성들까지도 영산의 태황태후를 모르는 이는 없을 터였다. 태황태후 조 씨는 월국을 30년간 주무르며 전횡을 일삼고, 바른말 하는 선비들을 죽이고, 아들과 조카였던 두 명의 황제를 시해한, 동서고금에도 그 악행을 견줄 자 없는 악후였다.

게다가 태황태후는 지금의 황제에게까지 수백 명의 자객을 보내서 해치려다가 실패한 후 가문은 멸문의 화를 당하고 본인은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영산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그녀는 명목상으로는 황실의 어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역 죄인이었다.

황제가 태황태후로 인해 겪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나들이 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녀를 두고 할머니라고 부르질 않나, 은인이라고 치켜세우질 않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황제의 언동에 황후와 후궁들은 모두 뜨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

어제부터 연속으로 여러 차례 놀란데다 진짜 큰 게 아직 남았다는 불안감으로 진이 다 빠진 황후가 어전인 것도 잊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욱이 안절부절못하는 황후를 힐끔 한 번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 어른께서 과인에게 나라를 넘겨주시고 영산으로 물러나신 지 햇수로 8년에 접어드니, 요즘 들어 태황태후마마 생각이 자주 나는구나.”

“예?”

내가 헛소리를 들었나 싶어서 황후가 저도 모르게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욱이 손을 들어 후궁들의 술렁임을 잠재웠다. 

“그대들이 내게 시집온 지 길게는 7년에서 짧게는 3년인데 그간 생존해 계신 할머니를 찾아뵙고 따뜻한 진지 한 번 올린 일이 없으니, 이런 불효가 또 있겠는가? 사가에서도 일곱이나 되는 며느리가 멀리 떨어져 살고 계신 할머니를 한 번 찾아뵙지도 않는다면 막되어 먹은 집구석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터, 백성들 보기에도 심히 민망한 일이다.”

거기까지 대강 주워섬긴 욱이 한층 더 엄격한 눈길로 후궁들을 슥 훑었다. 그리고 그간 속에 품고만 있었던 처분을 결행했다.

“그러니 다들 지체 없이 행장을 꾸려서 영산으로 떠나거라. 가서 태황태후께 인사를 올리고 성심껏 효를 다하여 과인의 불효를 씻고, 백성들에게도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

당장 영산으로 떠나라는 어명에 평소 얌전하던 현비와 기비까지 눈을 부릅뜨고 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정도는 예상치 못했던 반응도 아니라서 욱이 한층 더 엄한 눈길로 후궁들을 노려보았다.

“폐하, 어인 하명이시옵니까? 갑자기 소인들에게 영산으로 떠나라시니…….”

“왜? 시할머니 찾아뵙고 얼마간 보살펴드리라는데, 싫으냐? 못하겠느냐?”

산전수전 다 겪은 노신들도 흠칫 놀라게 만드는 욱의 호통에 후궁들이 얼른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후궁들의 반발을 호통 한마디로 잠재운 욱이 황후를 돌아보았다. 황후는 놀란 정도가 아니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폐하…….”

지금 이게 귀양인가, 폐출인가? 화산에서 공비를 쫓아냈다더니…… 이제 보니 부인들을 싹 다 쫓아낼 심산인가 보다. 이러려고 귀인과 중신들을 모조리 화산에 떨궈놓고 홀로 돌아온 것이구나…… 비로소 황제의 의중을 짐작한 황후가 말문이 막혀서 헐떡였다.

향비와 연비 역시 갑작스러운 어명에 영산의 태황태후에게 인사만 올리고 돌아오라는 것인가, 한동안 가 있으라는 것인가 갈피를 못 잡고 당혹스러운 눈길만 주고받았다. 두려움에 질린 후궁들의 눈길을 모른 척, 욱이 황후를 돌아보았다.

“황후는 4황자를 낳은 지 아직 백일도 지나지 않았고 날씨 또한 이토록 싸늘하니 어찌 먼 길을 떠날 것이며, 4황자는 누가 돌보겠소? 문안 편지 한 장 적어서 향비 편에 보내고 궁에 남아 몸이나 잘 추스르시오.”

황후가 차 한 잔을 따라서 욱에게 건넸다. 영산으로 떠나라는 어명을 받은 후, 혹은 놀라고 혹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던 후궁들이 각자의 궁으로 돌아간 후, 욱은 태화궁의 내실에 들어서 오랜만에 만난 공주를 어르는 중이었다.

“어이쿠, 우리 공주. 아비가 화산에 있는 사이에 걸음마를 했느냐? 이제 좀 있으면 뜀박질도 하고 아비와 같이 사냥도 다니겠구나.”

욱이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공주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딸이 궁중의 금지옥엽으로 얌전하고 차분하게 크는 것도 좋지만, 공비처럼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리거나 화살 한 대로 멧돼지며 사슴이며 척척 잡으면 아비는 더 좋을 텐데…… 그때, 같이 사냥 가자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공주가 까르르 웃으며 정신없이 짝짜꿍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 기특해서 욱이 크게 웃으며 공주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사냥터에서 그런 사고가 난 것은 몰랐습니다.”

찻물이 끓는 동안 사냥터에서의 사건을 대강 전해 들은 황후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잔에도 직접 차를 따랐다.

“과인의 일신상의 사고이기도 하고, 또 일이 전해지면 걱정만 끼칠 것이기에 밖에는 알리지 말라 일렀소.”

“귀인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한동안 할 말을 잊고 찻잔만 들었다 놓았다 하던 황후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폐하.”

“말씀하십시오.”

“후궁들을 지금 영산으로 보내면…… 언제쯤 다시 불러들이려 하시옵니까?”

“꼭 다시 불러야 합니까?”

욱의 반문에 황후가 역시 그런 것이었구나 싶어서 찻잔을 내려놓고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다들 내로라하는 명문세가의 여식들인데…… 그 가문에서 가만히 두고만 보겠습니까?”

“후궁들이 별궁에 가서 시할머니 좀 돌봐드리는 것이 중신들이 왈가왈부할 일입니까?”

후궁들을 이렇게 궁 밖으로 내보내고 다시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폐출이었다. 하지만 첩지도 건드리지 않았고, 명분도 번듯하고…… 이 정도는 사사로운 집안일로 가장의 재량에 따른 처분이니 중신들이 명을 거두시라 주청을 올리거나 시위를 하기도 애매한 사안이었다. 생각해보니 묘수는 묘수로구나 싶어서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만하고 음험해서 앞으로 무슨 일을 또 저지를지 알 수 없는 향비를 그대로 한 담장 안에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죄인을 만들어서 쫓아내자니 2황자와 공주가 걸릴 뿐 아니라 그 집안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을 터…… 같이 날벼락을 맞게 된 후궁들에겐 딱한 일이었으나 이 정도면 문제도 해결하고 조정의 소란도 모면할 수 있는 최상책이라고 할 만했다.

“뭘 그리 빤히 보시오?”

하지만 이렇게 교묘한 수를 마누라들을 내쫓는 데 써먹다니, 내 남편이지만 참 못돼 처먹었다고 생각하던 황후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왕 상궁을 찾았다.

“예, 마마.”

“각 전각에 내관들을 보내 영산으로 떠날 채비를 돕도록 하라.”

“예, 마마!”

그간 향비며 연비며 눈엣가시 같아서 어찌 황제께서 속 시원히 처분을 내려주시지 않나 속을 끓이던 황후의 측근들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향비 하나만 치워줘도 휘명전을 향해 날마다 백배를 올릴 판인데 육궁을 싹 비우게 되다니…… 황은이 이토록 망극할 데가 있나? 이 기쁜 소식을 온 궁에 알리고 후궁들 보따리 싸는 것을 재촉할 마음에 날 듯이 달려 나가는 왕상궁을 황후가 불러 세웠다.

“분부가 더 있으십니까?”

“현비에게는 출행 준비 할 것 없다고 일러라.”

“예?”

요즘 들어 현비가 3황자를 데리고 자주 태화궁에 들어서 황후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4황자와 공주와도 잘 놀아주었던 일을 떠올리며 왕 상궁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는 모든 후궁들에게 출행을 명했는데 황후가 독단으로 이리해도 될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후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3황자의 고뿔이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아픈 아이를 두고서 어미가 어딜 갈 수 있겠느냐?”

상궁들에게 이르고 나서 황후가 욱을 돌아보았다.

“3황자의 고뿔이 심해서 그간 현비가 병구완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어른을 모시는 일도 중하지만 아픈 아이를 보살피는 일도 중하니, 현비는 궁에 남도록 해주십시오.”

황후의 청에 욱이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은 황후의 재량에 맡기겠소.”

후궁들의 마차가 대화문을 나선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동틀 녘도 먼 이른 시각이라 후궁들의 출행을 목격한 백성들은 많지 않았다. 새벽 이른 시각에 수룡천변에 나왔다가 호화로운 넉 대의 마차와 수십 대의 짐차, 그 뒤를 따르는 궁인 수백 명의 행렬을 본 백성들은 어느 부잣집이 이사라도 가는가?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토록 이른 시각에 도망치듯 황성 밖으로 나가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 폐하께서도 참…….”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던 윤 내관이 중얼거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윤 내관은 영산 출행의 총책임자로 후궁들을 태황태후에게 확실히 인계하고 돌아오라는 황명을 받아 여독도 풀지 못한 채 또다시 황성을 나선 참이었다.

“아까부터 뭘 그리 한숨 한 번, 웃음 한 번 끝도 없이 되풀이하십니까?”

출행의 호위 책임자로 후궁들을 황강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아 백 명의 위병을 이끌고 동행한 정 내관이 윤 내관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기가 차서 그러네.”

“설마하니…….”

정 내관이 가장 앞에선 향비의 마차를 힐끔 돌아보며 언성을 대폭 낮췄다.

“폐하께서 마마님들을 영산에 영 버리시겠습니까? 노여움이 풀리면 다시 부르시겠지요.”

“이제 보니 자네가 나보다 폐하를 더 모르는구먼.”

윤 내관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향비를 대체 어쩌면 좋을지 아무리 궁리를 해도 마땅한 수가 없어서 머리가 셀 지경이었는데, 아직 젊으신 분이 어찌 이토록 절묘하고 음흉하신지 모르겠네.”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윤 내관의 감탄에 정 내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밤보다 더 어두운 새벽길을 조용히 따라오는 후궁의 행렬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후궁의 출궁은 간단히 하자면 간단한 일이었다. 선대에는 후궁이 대수롭지 않은 잘못으로도 내쳐지거나 형옥에 갇히거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미한 가문의 딸이거나 미천한 궁녀 출신으로 운이 좋아 황제의 눈에 띈 경우의 일이었다. 같은 후궁이라도 기세등등한 세도가의 딸이거나 황위 계승이 유력한 황손의 생모라면 육궁 안에서의 대접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어지간한 대죄를 짓지 않은 다음에는 출궁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현 황제에게는 향비가 딱 그렇게 처치 곤란한 후궁이었다. 향비는 월국에서도 비옥한 남서부를 다스리고 있는 대토호의 딸로 그 가문이 조정에 영향력이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향비 자신이 2황자의 생모라서 모든 조건이 면책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역모를 꾀하거나 음행을 한 것도 아니요, 원자를 음해하려고 방자를 일삼은 것도 아닌 이상, 향비를 폐하는 것은 황제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우선 수 씨 가문에서 중신과 유생들을 동원해서 읍소에 탄원이 빗발쳤을 것이고, 출궁령을 거두기 전까지는 시위도 끊이지 않을 것이 빤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경이 위태로운 때에 황성까지 소란스러운 것은 바로 내우외환이라 황제에게 불리하고 또 불리한 일이었다.

“출행이라니…… 나는 폐하께서 이렇게 표도 안 나게 육궁을 정리하실 줄은 정말 몰랐네. 공비마마의 경우는 당당한 출궁이지만, 이분들이야말로 실질적으로 폐출을 당한 것이 아닌가?”

“폐하께서 첩지를 거두신 것도 아닌데 폐출이라 하는 것은 지나치십니다.”

“그게 절묘한 부분이지. 첩지도 거두신 바 없고 마마님들께 다른 질책을 하신 적도 없고, 그저 그간 격조했던 시할머니께 인사드리고 당분간 돌봐드리라는 명분으로 내보낸 것이니 겉보기엔 얼마나 떳떳하고 온건하신가? 당장 보게. 쫓겨나는 당사자들도 자신들이 쫓겨나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윤 내관의 조곤조곤한 설명에 정 내관이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상선이 그리 말씀하시니 폐하께서 너무 나쁜 놈인 것 같습니다.”

정 내관의 시무룩한 대꾸에 윤 내관이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그냥저냥 봐주고 후궁 대접을 해주실 때에 알아서 모셨어야지. 폐하께서 어떤 분이신데 그 앞에서 겁도 없이…… 제 자식 거두는 것도 귀찮아서 노상 상궁들에게만 맡겨놓고 얼굴도 보지 않던 분이 평생 여제로 사신 시할머니 모시고 시집살이 하려면 눈물 바람 좀 하시겠구먼.”

태황태후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윤 내관의 눈앞에 장차 후궁들에게 닥칠 시집살이가 열두 폭 병풍도처럼 쫙 펼쳐졌다. 이번 대 후궁들은 대운을 만나서 시집 식구 없는 빈집에 시집와서 그간 만고 편하게 지냈었는데, 이제 성질 칼칼한 어른 모시고 그간 면했던 시집살이를 몰아서 하게 되었으니…… 사람 앞일 참으로 모르는 것이로구나 생각하며 윤 내관이 또다시 허허 실소를 토해냈다.

“어쨌든 나는 큰 시름 덜었네. 폐하께서 앞뒤 없이 성질대로 덜컥 일을 벌이시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었는데 이리 조용히 처결을 하시니, 참으로 황은이 망극할 뿐이네.”

승주의 양자 입적도 그렇고, 후궁들의 단체 출행도 그렇고…… 황제가 장성할수록 중신들 앞통수 뒤통수를 자유자재로 후려치니 다소 조마조마하기는 해도 상선 노릇은 앞으로 더욱 수월해질 터, 이는 윤 내관에게도 불리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황강으로 향하는 고갯마루에 올라선 윤 내관이 서늘한 아침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자네도 나하고 같이 영산까지 가세.”

윤 내관이 정 내관에게 슬쩍 권했다. 영산까지는 이렇게 행렬을 거느리고 슬슬 가면 사흘이지만, 말을 달리면 하루 반나절 길이었다. 어차피 황제는 궁에 며칠 더 머물 터…….

궁에는 진관우가 남아 있으니 정 내관이 2~3일 정도 곁을 못 비울 까닭도 없었고, 후궁을 넷이나 출행 보내는데 호위대장이 덜렁 나루터까지만 호위를 하는 것도 남들 보기엔 모양새가 심히 빠지는 일이었다.

“제가 영산엔 왜요?”

“어차피 황강까지도 꽉 찬 하룻길이 아닌가? 기왕 떠난 길, 하루 더 가서 진목성도 돌아보고 영서 아씨도 만나면…….”

“거, 참…….”

정 내관이 벌컥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한두 번 더 권하면 못 이기는 척 황강을 건너는 배에 오를 것 같아서 윤 내관이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평생 갈 일이라곤 없을 줄 알았던 영산에 이렇게 갑작스레 가는구나. 간 길에 민 상궁도 볼 수 있을 터…… 못 본지 벌써 7년이니 민 상궁도 많이 변했겠지.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를 반겨는 주겠거니 생각하며 윤 내관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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