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장 첫눈 (15/16)

제13장

첫눈

금방이라도 큰 눈이 퍼부을 듯 묵직한 회색 구름이 잔뜩 내려앉은 오후였다. 엿새 전에 큰비가 한 차례 지나간 후, 북쪽에서 불어온 찬바람으로 인해 그 아름답던 단풍잎은 다 떨어지고 덩달아 기온 역시 수직으로 내려앉은 탓에 화산도 이젠 겨울 풍경이 완연했다. 계절이 참 삽시간에 바뀌는구나 생각하며 시영이 청풍헌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풍헌은 홍운궁 아래쪽에 자리 잡은 수십 채의 별채 중 하나였는데, 규모도 제일 크고 별채 중엔 가장 윗자리라서 황제가 화산으로 원행을 나올 때마다 승상의 차지가 되는 곳이었다.

“대감마님 오셨습니까?”

아랫동네에서 구해 온 식재료를 광으로 옮기던 하인이 문 앞으로 달려 나와 시영을 맞았다.

“승상 대감 계신가?”

“예, 안채에 계십니다.”

“승주도 같이?”

“예, 대감마님께서는 도련님과 바둑을 두고 계십니다.”

도련님이라…… 참 아름다운 호칭이로고. 시영이 흐뭇하게 웃으며 앞장서라고 손짓을 했다.

시영이 안채의 서재에 들어섰을 때 조양은 승주의 대마를 다 잡아놓고서 오전에 심부름꾼에게서 받아놓은 서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바둑 초보인 승주는 사방이 막힌 자신의 흑돌을 구할 길이 없을까 싶어서 바둑판을 앞에 놓고 고심 중이었다.

“정안군 드셨습니까?”

방 안으로 들어오는 시영을 본 승주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아버님께 바둑을 배우고 있었는가?”

“아…… 예.”

아버지란 호칭이 아직은 쑥스러워서 승주가 귓불을 붉히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얼결에 승주를 양자로 떠안은 조양은 황제의 술수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간 것이 속상하고 어처구니없어서 몸 아프다고 들어앉아 이튿날 환궁하는 황제를 배웅조차 하지 않았었다.

본시 노인은 한번 삐지면 그 노여움이 오래가는 법, 조양이 계속 고집을 피우며 승주를 애먹이면 어쩌나, 욱도 불에 덴 망아지처럼 성질이 급하니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도 조양이 꽁해 있으면 그것을 곱게 보지 않을 텐데 그렇게 되면 결국 둘 사이에서 등이 터져나가는 것은 승주였다. 그 때문에 시영은 그 며칠간 고뿔도 잊은 채 청풍헌만 쳐다보며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족히 3년은 갈 듯싶었던 조양의 화는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시영이 승상 대감 마음 푸시라며 쓸어 보낸 승주의 서화도 눈이 번쩍 뜨이도록 인상적이었고, 청풍헌 앞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고 사죄를 하며 황제가 돌아오면 청을 올려 어명을 거두도록 하고 자신은 대현성으로 돌아가겠다고 거듭 약조하는 승주의 모습도 애처로웠고, 황제가 명을 거두긴 개뿔, 승상 그렇게 안 보았는데 옹졸하고 꽉 막혔다고 타박이나 들을 것이 빤했으니 에라, 나도 모르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승주에 대한 조양의 감정도 급물살을 타서 사흘째 되는 날엔 불러서 그 부모와 외가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그다음 날엔 청풍헌에 들어와 지내라며 승주에게 사랑채 건넌방을 내주고, 바로 그 저녁에 문중의 가장 연장자이며 종손인 오촌 당숙에게 여차저차하여 양자를 하나 더 들이게 되었으니 그리 알라고 서찰을 써서 보내고, 급기야 어제 아침엔 하인들을 모아놓고서 승주를 도련님으로 높여서 부르라는 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바둑돌 잡은 지 며칠 되지도 않는 아드님을 호되게도 몰아붙이셨습니다.”

시영이 온통 허연 바둑판을 넘겨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승주에게 슬며시 빠져나갈 수를 일러주었다.

“아…….”

승주가 힐끔 조양의 눈치를 살피고는 얼른 흑돌을 시영이 짚어준 자리에 두었다. 시영의 참견을 눈치챈 조양이 서찰에서 눈을 떼고는 혀를 끌끌 찼다.

“어허, 다 이겨놓은 판이었는데…….”

“겨우 한 수 거든 것으로 판세가 달라지겠습니까?”

“정안군께서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보통을 훨씬 웃돌아서 한 수를 가르치면 두세 수 앞을 넘겨다보니, 지금이 아니고는 바둑에서 이길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아들 자랑을 하며 조양이 서찰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 잡아놓은 흑마가 줄행랑을 놓았으니 이걸 또 어디서 몰아 잡을까 궁리하며 바둑판을 노려보았다.

“황성에서 온 서찰입니까?”

시영이 물었다.

“예.”

“여러 통 되는 것 같은데, 폐하나 상선으로부터 온 것은 없습니까? 언제쯤 오신다거나, 아니면 오라거나…….”

“폐하께서 서찰을 보내시면 귀인이나 정안군께 보내시지 제게 보내시겠습니까?”

“그 무슨 말씀을…… 폐하께서 승상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시는데요?”

“한 통은 당숙에게서 온 서찰입니다. 며칠 전 승주의 입적에 관해 몇 자 적어서 보냈는데, 그 답장을 받았습니다.”

승주의 입적에 관한 서신이라니 귀가 솔깃해서 시영이 조양을 돌아보았다.

“문중에서 허락이 났습니까?”

시영의 물음에 조양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양자가 셋이나 필요하냐고 잔소리는 좀 붙이셨으나…… 네 맘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양자를 하나 더 들이게 되었다고만 써서 보냈으니 아직까지는 문중에서 들고 일어날 거리가 없었다. 승주의 신분이 집안에 알려지면 다소 시끄럽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나중 일, 정 못 견딜 지경에 이르면 어명이니 어쩔 수 없었노라 황제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그뿐이었다.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서 상서부에 시랑이 부족해서 충원이 시급했는데, 승상댁 사당에 고하고 정식으로 호적에 이름을 올리면 바로 상서시랑의 직을 내리면 되겠습니다.”

양자 입적에 벼슬까지 숨이 차도록 일사천리라 승주가 당황해서 시영을 쳐다보았다.

“나리, 소인은…….”

“돌아가면 한 달 정도는 푹 쉬면서 식솔들과 낯도 익히고 성 안 구경도 하게. 내가 상서부 시랑들을 소개해줄 테니 친구도 사귀고…… 일은 신년부터 시작하도록 하고, 어떤가?”

“나리, 소인은 아무래도 대현성이 걱정이라…… 전란이 나더라도 오고 가며 장족과 협상하고 중재할 자는 필요할 터, 서툰 관원들이나 성정이 불같은 상장군이 직접 나섰다가 도리어 큰일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흑돌의 퇴로를 막고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던 조양이 백돌을 움켜쥔 채 승주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양자 입적이며 출사며 죄다 자신에게 이로운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고향의 전란을 걱정하며 가장 위험한 일을 자청하는 것이 빈말로 들리지도 않았고 예사로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조양이 승주를 바라보는 눈길이 이미 자랑스러운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그것이라서 시영의 입가에도 스멀스멀 미소가 피어올랐다.

“대현성에 돌아가더라도 정식으로 벼슬을 받은 후 폐하의 관원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그런 걱정 말고…….”

승상이 도망가던 흑돌의 퇴로를 막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판을 어찌할지 그 걱정이나 하거라.”

아, 이러면 또 어느 길로 가야 하나. 바둑의 세계란 참으로 인정사정없는 것이로구나……. 진퇴양난에 빠진 승주가 다시 이마를 긁적였다.

“황성에서 편지가 온 것을 보면 막혔던 고갯길이 이제 뚫렸나 봅니다.”

며칠 전 황성 일대에 올겨울 첫눈이 내렸는데, 첫눈치곤 엄청난 폭설이라 황성과 주월성을 잇는 십여 리 고갯길이 막혀서 화산의 중신들은 닷새째 황성과의 연락 일체가 끊긴 채 고립되어 있었다. 겨울마다 폭설에 고갯길이 막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서 아마도 황제의 환궁도 그 때문에 늦어지는 것이리라 여기며 화산에 남은 중신들은 잠시 세상일을 잊고 한가로운 때를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뚫렸다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억지로 넘어 다닐 정도는 되는 모양입니다.”

“무슨 첫눈에 길이 다 막히는지…… 날씨도 참 유난스럽습니다.”

시영이 조양의 눈치를 살피며 승주에게 백돌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를 일러주었다. 이제 보니 바둑을 두 사람 상대로 두는 격이라 조양이 시영을 매섭게 흘겼다. 그러고는 탁자 위를 더듬어 서찰 한 장을 시영에게 내밀었다.

“제가 봐도 되는 서찰입니까?”

“승상부에서 보낸 것입니다. 빈 국고는 각 성읍의 제후와 영주들에게서 특별세를 징수해서 일단 봄까지 버틸 정도는 채웠답니다. 대신 해적 소탕은 가을로 미뤄야 할 듯싶고……. 그 외엔 소소한 소식입니다. 황후께서도 평안하시고, 아기씨들도 무탈하시고…… 후궁들이 모두 영산으로 떠난 탓에 황궁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답니다.”

“아…….”

하긴, 그 며칠 사이에 별일이야 있었으랴 하며 시영이 서찰을 뒤적였다. 그러다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 하셨습니까? 후궁들이…… 떠났다고요?”

“거기 서찰 말미에…… 후궁들이 모두 태황태후께 문후 올리려고 영산에 갔답니다. 황후께서는 아직 옥체 미령하셔서 동행치 못하시고, 현비도 3황자가 갑자기 고뿔에 걸려서 궁에 남고…… 나머지 분들은 모두 지금 영산에 계신가 봅니다.”

“아니, 갑자기 무슨 문후를…… 지난 7년간 황궁과 영산은 일체 왕래가 없었는데…….”

시영이 까닭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서 서찰의 마지막 장을 들여다보았다. 승상부의 관원이 적어 보낸 내용은 황제가 환궁한 다음 날 후궁들의 마차가 영산으로 출행했다는 사실 관계만 간략히, 마치 그것이 연례 행사라도 되는 듯 무심하게 적혀 있었다.

“벌써 가시게요? 차도 한 잔 안 드시고…….”

시영이 서찰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서자 조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 된 일인지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광윤이 이놈은 대체 뭘 하느라 이런 수상한 사안에 관해 보고서 한 장이 없는지…….”

시영이 바삐 처소로 돌아간 후, 한동안 이어진 바둑은 결국 조양의 불계승으로 끝났다. 몰입해서 바둑판을 들여다보는 중에 어느새 시각은 점심때를 훌쩍 넘겼고, 창 밖엔 서설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황성엔 며칠 전에 큰 눈이 왔다더니, 이제 여기도 눈발이 날리는구나.”

“이 골짜기는 눈에 덮이면 더욱 아름답겠습니다.”

“아무렴. 월국이 넓다고는 하지만 이만한 신선경도 드물지.”

조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깨나 퍼부을 듯 묵직하게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이 좋아서 올해 눈 쌓인 용천 대계곡을 다시 보는구나. 그 경치를 잘 봐두었다가 나중에 내게 그림 한 장 그려주겠느냐?”

“부끄럽습니다. 소인의 재주가 미천하여…….”

조양이 다정한 눈길로 승주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 속이 뭉클해진 승주가 고개를 숙였다.

“예.”

“…….”

“아버님.”

승주의 대답에 조양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흑돌 백돌을 나누며 승주와 함께 바둑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희끗희끗 날리던 서설은 그쳤다 내렸다를 몇 차례 되풀이하다가 해가 저물 무렵 본격적인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단풍으로 붉디붉었던 계곡이 하얀 눈에 덮이자 그 급작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변화에 별궁의 궁인들도 들떠서 한동안 일손을 놓고 창 밖을 보거나 계곡 주변을 거닐며 첫눈을 반겼다.

“물이 너무 뜨겁지는 않으십니까?”고 내관이 목욕물에 손을 넣어 휘휘 저으며 물었다.

“바람은 차고 눈은 펄펄 날리는데 온천에 몸을 담그고 앉아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허연이 나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눈앞을 가릴 정도로 퍼붓는 눈을 맞았다.

나라 안에서도 유명한 온천 휴양지에 왔건만,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그간 더운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며칠에 한 번 머리나 헹구며 찝찝하게 지내던 허연은 오늘 드디어 부목을 풀고 온천에 들어서 그간의 묵은 때를 씻어내고 있었다.

“의관이 아직은 부목을 풀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목욕 시중을 들던 고 내관이 아무래도 걱정스러워서 허연이 풀어 던진 부목을 쳐다보았다.

“보름간이나 꼼짝 않고 지냈으니 이제 얼추 붙었겠지. 씻고 나와서 다시 매면 큰 탈이나 나겠는가?”

허연이 고 내관에게 물을 튕기며 대꾸했다. 그러곤 눈이 소복소복 쌓여가는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욱이 환궁한 이후 계속 용화루에서 머물던 허연은 이틀 전부터는 월성정으로 옮겨 와서 지내고 있었다. 월성정은 행궁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전각으로 다소 협소하고 오르내리기도 불편했지만 용천 대계곡의 절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명당이었다. 거기에 전각 뒤편엔 항시 온천수가 넘쳐흐르는 돌 욕조가 놓여 있어서 노천 온천의 정취를 즐기기엔 이보다 더 좋은 곳도 없었다.

“마마!”

“마마! 이것 보십시오.”

계곡 아래에서 월성정까지 한달음에 내달린 환이와 명이가 들고 온 토끼를 허연 앞에 흔들어 보였다.

“아니, 이게 웬 토끼냐?”

“방금 전에 공비마마, 아니…… 우영공께서 사냥터에서 돌아오셨는데 사슴 한 마리, 멧돼지 한 마리, 그리고 토끼를 여섯 마리나 잡아 오셨습니다!”

“소인들을 보시고는 토끼고기 맛이나 보라며 한 마리씩 주셨습니다!”

“우영공께서 오늘도 사냥터에 나가셨더냐?”

허연이 허허 웃으며 명이가 내민 토끼를 받아 들었다. 화산은 숲이 풍족해서 토끼도 어지간한 강아지만큼이나 크고 통통했다.

“제법 묵직한 것이 먹을 것이 있겠구나. 조리각 상궁에게 맛있게 구워달라고 해서 다른 아이들과 나눠 먹어라.”

“예, 마마.”

저녁으로 고소한 토끼 구이를 먹을 생각에 환이와 명이가 군침을 삼키며 토끼를 다시 받아 들었다.

“헌데, 이제 다리가 다 나으셨습니까?”

“부목을 풀고 계셔도 됩니까?”

두 아이가 욕조 턱을 넘어 허연의 다친 다리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얼추 나았다.”

“하오시면 곧 소인들과 눈싸움도 하실 수 있겠습니다.”

“오냐. 그래야지.”

허연이 젖은 손으로 두 아이의 얼굴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이와 명이가 토끼를 들고 신이 나서 퉁탕거리며 계단에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고 내관이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섰다.

“공비마마께서 행궁 식구들을 다 먹여 살리십니다. 매일같이 사냥터에 나가서 사슴이며 멧돼지며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시니…….”

“그러게 말일세. 숲에 위험한 짐승도 많은데 위병 몇 명만 데리고 그렇게 다니시는 것이 걱정도 되는구먼. 내가 다리만 다치지 않았으면 따라 뫼셨을 텐데…….”

허연이 물을 움켜서 얼굴을 문지르다가 고 내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 내관이 정면에서 헹 하고 콧방귀를 날린 때문이었다.

“소인 생각엔 숲에 호랑이가 바글거린다고 해도 공비께서는 무탈하실 겁니다. 마마나 폐하가 걱정이지요.”

“허허, 사람도 참…….”

“참말로, 저는 그날 마마께서 피투성이가 된 채 축 늘어져서 오시는 걸 보았을 때 정신을 놓을 뻔했습니다.”

요즘 들어서 고 내관은 대화가 좀 길어졌다 하면 어김없이 지난날의 사고를 되새기며 푸념에 한탄이었다. 그 때문에 허연이 얼른 계곡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환궁하신 지 이제 열흘인데, 폐하께서는 어찌 바람결에 편지 한 장이 없으신지 모르겠구먼.”

“황성에서 주월성 넘어가는 고갯길이 황성 인근에선 제법 높고 험한데, 큰 눈이 내릴 때면 며칠씩 대책 없이 막히곤 합니다.”

고 내관이 수건으로 허연의 등을 박박 문지르며 대꾸했다.

“사나흘이면 돌아오실 것처럼 하고 가시더니…… 이 눈에 행궁 올라오는 길이 막히면 자칫 폐하는 내년 봄에나 뵙겠구먼.”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밤에 홀로 노천욕이라니, 강아지가 있었으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싶어서 허연이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폐하가 그리우십니까?”

“한 열흘 못 보니, 좀 그렇구먼.”

“그러게 사냥터에서 조심을 하셨으면 이런 일이 없으셨을 텐데요.”

앙칼지게 허연을 몰아치며 고 내관이 이번엔 허연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고 내관, 살살 하게. 피부 벗겨지겠네.”

“가만 계십시오. 목욕도 오랜만이라 땟국물이 졸졸 흐르십니다.”

“아…… 아…….”

한동안 고 내관에게 시달리던 허연이 결국 그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곤 마치 대치라도 하듯 고 내관을 마주 보았다.

“수건 이리 주십시오. 아직 몸을 반도 못 닦았습니다.”

고 내관이 수건 내놓으라며 강경하게 허연을 압박했다. 하지만 나도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허연이 수건을 등 뒤로 감췄다.

“따뜻한 물에 오래 들어앉아 있으니 허기가 지는구먼. 가서 차 한 잔하고 과자 몇 개만 가져다주겠는가?”

“시장하십니까?”

배고프다는 말에 곧바로 전의를 상실한 고 내관이 얼른 곁에 뒀던 수건을 집어 들었다.

“허면 이만 물에서 나오십시오. 안에 드셔서 몸 말리고 저녁 드셔야지요.”

고 내관의 권유에 허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랜만의 목욕이고 마침 분위기도 좋으니 벌써 나가긴 아쉽네. 그냥 간단하게 요기할 만한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하오시면…….”

조리각에 내려가서 만두라도 쪄 오라 할까 싶어서 고 내관이 전각 안을 들여다보며 아이들을 찾았다. 하지만 우화원 아이들 중 한패는 눈 맞으러, 나머지는 환이와 명이가 얻어 온 토끼 구이를 얻어먹으러 아예 홍운궁을 뛰쳐나간 후였다. 아이들 덕을 보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고 내관이 푸시시 한숨을 쉬며 젖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잠시만 계십시오. 소인이 내려가서 간단히 드실 것을 챙겨 오겠습니다.”

고 내관을 내보내고 한숨을 돌린 허연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긴 입김을 뿜어냈다. 좀 전부터 쏟아진 눈은 불과 며칠 전에 잎새를 모두 떨구어버린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쌓여서 설야의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짙은 눈구름이 내려앉아서 달빛도 별빛도 없는 골짜기는 설광만으로도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났다. 거기에 홍운궁의 각 별궁엔 푸른 등이 내걸리고, 그 아래 중신들의 거처에 호롱불이 켜지고, 저녁을 준비하는 연기가 굴뚝마다 피어올라서 계곡의 운치와 평온함을 더했다.

지난봄부터 화산이 그렇게 좋다며 입만 열면 자랑에, 이것저것 같이 하자며 들떠서 보채더니…… 과연 경관이며 정취가 신선경이로구나. 이런 곳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서 모든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길을 재촉했었구나 생각하며 허연이 욕조 턱에 몸을 기댔다.

따뜻한 물 밖으로 얼굴만 내놓고 쏟아지는 눈을 맞던 허연의 눈앞에 갑자기 사냥터에서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기의 큰 뿔 사슴과 마주쳤던 그 밤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을 들이받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밟아 짓이기려고 덤비던 사슴에게 창을 던지고, 바로 다음 순간 형형한 눈길로 상처를 입어서 더욱 흉포해진 사슴과 맞섰던 욱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최근에 새로 생긴 버릇 같은 것이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섬뜩한 기억과 울컥 치미는 그리움 때문에 허연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거렸다. 사고 당시의 일은 다시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라서 얼른 지워버리고만 싶었고, 생각 말미에 욱이 보고 싶어지는 것도 한심해서 싫었다.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막중한 나랏일이 있어서 잠시 환궁한 강아지가 이토록 보고 싶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나도 나이를 헛먹었구나, 자책을 하며 허연이 물속에 머리를 확 박았다.

타박상도 얼추 나았고, 다리도 그만그만하고…… 눈이 그치면 환궁을 할까? 어차피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고, 하루에 백여 리 정도 슬슬 움직이면 큰 무리도 없을 터…… 욱이 이놈은 궁에서 뭘 하고 있는지, 오면 언제쯤 오는지 연통이라도 좀 하지, 뭐가 그리 바빠서…… 아, 맞다. 고갯길이 막혔다고 했지…….

숨이 막히도록 물속에 잠겨 있던 허연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 드리워져 있는 커다란 그림자에 놀라서 후다닥 뒤로 물러앉았다.

“아니…….”

“과인이 없는 동안 잘 지냈는가? 이제 좀 살 만한가?”

허연이 눈을 비비고는 앞에 버티고 선 그림자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고 있는 사내는 틀림없이 욱이었다.

“어떻게…… 고갯길이 눈에 막혀서 파발조차 끊겼다고 들었는데…….”

욱이 말도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 망할 여우고개를 거의 기어서 넘었네. 상선하고 정 내관이 피난을 가는 것도 아니데 이렇게까지 가야 되느냐고 등 뒤에서 어찌나 투덜대던지…… 아직도 귀가 따갑구먼.”

욱이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는 욕조 턱에 걸터앉았다.

“그 정도면 며칠 더 궁에 계시다가 천천히 오시지…….”

“진풍의 머리까지 빠질 정도로 눈구덩이가 깊어서 중간에 회궁을 할까 좀 망설이기도 했네만…… 그대를 보니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드는군.”

욱이 장갑을 벗고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며 히죽 웃었다.

“눈 내리는 밤의 노천욕이라……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따로 없구먼.”

“야!”

허연이 발끈해서 더운물을 욱에게 한 바가지나 튕겨 보냈다.

조리각에 가서 방금 쪄낸 만두와 사슴 고기 산적을 들고 월성정으로 돌아온 고 내관이 전각 초입에서 걸음을 멈췄다. 눈구덩이에서 굴러다니다 온 곰 같은 형상의 사내들이 전각 앞을 가득 메운 채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고 있는 그거, 만두냐?”

개중 작은 축에 속하는 곰 한 마리가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서 다짜고짜 고 내관이 든 만두통 뚜껑을 열어젖혔다.

“상선…… 아니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춥고 허기져서 주저앉을 판이었는데, 따끈한 만두라니…… 이리 고마울 데가 있나?”

홀린 듯 중얼거리며 윤 내관이 한 참에 만두를 세 개나 움켜쥐었다.

“어찌 오셨습니까? 연통도 없이…….”

“연통은 그간 계속 보냈었네. 파발이 여우고개를 못 넘어서 탈이었지.”

그때, 이번엔 큰 곰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아예 만두를 통째 낚아 갔다. 그러곤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만두를 허겁지겁 입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형님!”

작은 곰, 큰 곰에게 만두를 통째 강탈당한 고 내관이 산적이라도 지켜볼 요량으로 쟁반을 품에 안고 뒤로 물러섰다.

“배가 고프시면 방에 가 계십시오. 마침 조리각에서 저녁을 짓는 중이니 곧 상을 들여가겠습니다.”

“여기 이건 산적인가?”

갑자기 옆에서 불쑥 나타난 그림자가 고 내관이 품고 있는 산적 접시의 뚜껑을 젖히더니 한 손에 꼬치를 다 움켜쥐었다.

“위사령 대감까지 어찌 이러십니까? 이것은 귀인께 올릴 간식입니다.”

“지금 가져가봐야 어차피 형님께서는 못 드시네.”

어제 공비가 사냥해 온 사슴의 갈빗살로 만든 산적 꼬치를 부장들과 나누며 진관우가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아, 그럼 폐하께서 월성정에…….”

명색이 황제 폐하 행차인데, 뭐 이렇게 도둑떼처럼 소리 없이 들이닥치나 싶어서 고 내관이 빈 쟁반을 들고 피곤과 허기에 지친 세 사람과 위병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가서 먹을 거나 좀 더 갖고 오너라. 우리들 모두 새벽부터 지금까지 쫄쫄 굶었다.”

삽시간에 만두 한 통을 다 삼킨 정 내관이 여전히 속이 허해서 짜증을 냈다.

“아, 뭐…… 예.”

세 사람 저녁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위병들이 다 굶었는데 그 와중에 황제만 요기를 했을 리 없으니 제대로 한상 차려서 올려 보내야겠다 싶어서 고 내관이 뒷걸음을 살살 쳤다. 그러다 마침 구운 토끼 뒷다리를 하나씩 물고 올라오던 환이와 명이를 발견하고는 불러 세웠다.

“얼른 조리각에 내려가서 마당에 장작불 피우고 어제 공비께서 보내신 멧돼지를 통으로 올리라고 전해라. 술독도 새로 따고…… 그리고 폐하와 귀인께서 드실 요깃거리를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해서 받아 오너라.”

“폐하께서 오셨습니까?”

황제의 급작스러운 환궁 소식에 아이들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냐. 많이 시장하신 듯싶으니 서두르라고 전해라.”

“허면 우선 이것이라도…….”

명이가 들고 있던 옹기 찬합을 고 내관에게 내밀었다. 토끼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허연의 몫으로 따로 담아달라고 해서 가져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고 내관이 금방 구운 토끼 요리를 흡족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이젠 일일이 시키고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고마운 분을 위할 줄 아니, 이놈들도 다 컸다 싶어서 이만저만 대견하고 뿌듯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종종거리며 조리각으로 내려간 후, 고 내관이 아직 따끈한 옹기 찬합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선과 정 내관, 위사령에게 앞이 막히고 말았다.

“이건 안 됩니다.”

고 내관이 찬합을 노리는 촉수들을 탁탁 쳐내며 단호하게 맞섰다. 고소한 토끼 구이 향기에 홀렸던 윤 내관이 고 내관을 향해 눈을 실쭉 흘겨 떴다.

“황궁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자네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가 보이?”

“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하긴, 환궁하면 자연히 알게 될 일. 자네에겐 구운 고기 한 접시가 더 중요하겠지. 중요한 소식은 깡통인 채로 귀인께 고기나 한 접시 올리고서 귀여움 많이 받아보게.”

토끼 구이를 노리고 고 내관을 살살 낚는 윤 내관의 작전에 정 내관과 진관우도 군침을 삼키며 거들고 나섰다.

“어차피 폐하께서 당분간 귀인께는 비밀로 하라고 당부를 하셨으니, 너는 모르고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뭘요?”

“고 내관은 오직 형님 한 분만 지극히 모실 뿐, 육궁의 다른 후궁들에게는 관심도 없으니…… 우리는 방에 들어가서 저녁상이나 기다리세.”

“후궁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3대1로 수세에 몰린 고 내관이 결국 울적한 표정으로 옹기 찬합을 윤 내관에게 넘기고 말았다. 정보가 곧 밥이요, 돈이라고 노상 읊조리던 윤 내관이 정보로 토끼 고기까지 얻어내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정 내관과 진관우가 한편 감탄스럽고, 한편 만족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러곤 앞 다퉈서 토끼 구이에 손을 뻗었다.

“……그렇게 종일 달려서 지금에야 당도한 것이네. 여기는 이제야 눈발이 날리지만, 주월성도 이미 눈구덩이로 변한 터라 그 지역을 빠져나올 즈음엔 말도 사람도 이미 기진맥진이었네.”

갈 때에는 하루 반나절에 달렸던 길이 돌아올 땐 꽉 채운 사흘길이 된 사정을 털어놓으며 욱이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셨습니까? 이제 몸도 다 나았고, 다리도 얼추 아물었으니 2~3일쯤 후에 제가 중신들과 함께 돌아갔을 텐데요.”

반가운 마음만큼이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커서 허연이 젖은 손으로 욱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욱이 그 따듯한 손을 잡아서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여기도 이렇게 폭설이 쏟아지는데 무슨 수로? 내가 무리해서라도 돌아오지 않았으면 내년에나 다시 보았겠지.”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말이라고 하는가? 침상에 누워서 꼼짝 못하는 자네를 두고 떠나왔는데 첫눈이 양심도 없이 사흘이나 퍼붓는 통에 길은 꽉 막혔지, 그 바람에 소식도 끊겼지…… 답답해서 몸살이 날 뻔했네.”

“떠나신 지 열흘 만에 어렵게 돌아오셨는데, 이런 모습으로 맞아 송구스럽습니다.”

“사람, 겸손하기는…… 자네가 반가워할 줄은 알았지만 이런 환대는 꿈도 못 꿨네.”

욱의 너스레에 허연이 이번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바가지를 찾았다. 허연이 튕겨 보낸 물벼락에 벌써 앞섶이 다 젖은 욱이 한 번 봐달라고 손을 내저으며 껄껄 웃었다. 욱을 밉지 않은 눈길로 잠시 노려보던 허연이 물에서 나오려고 욕조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왜 벌써 일어나는가? 잠시만 더 이대로 있었으면 싶은데…….”

욱이 허연을 붙들어 만류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만 들어가서 뭐라도 드시고 쉬셔야지요.”

“방금 전까지는 한 걸음도 더 못 떼어놓겠다 싶게 피곤했는데 이렇게 있으니 피곤한 것도, 배고픈 것도 모르겠네.”

“…….”

욱이 그 잠깐 사이에 허연의 정수리에 하얗게 내려앉은 눈을 더운물로 씻어냈다. 허연도 욱의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 날렸다. 초장부터 폭설의 기미가 보이는 첫눈은 이대로 서너 시진만 계속되어도 행궁까지 오르는 언덕길을 막아버릴 터였다.

“잘못하면 이번엔 행궁에서 며칠 갇혀 지내시겠습니다.”

잠시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던 허연이 멋쩍게 웃으며 욱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초롱 아래 내려쌓인 눈만큼이나 하얗게 빛나는 허연의 얼굴과 젖은 어깨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이 눈에 푹 묻혀서 겨울을 나는 것도 괜찮겠구먼.”

황궁에 있을 때엔 끝도 없이 퍼붓는 눈이 지겹고 언제 그칠까 조바심만 나더니, 계곡을 덮어버릴 듯 쏟아지는 지금의 눈은 포근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사흘 내리 쏟아진 폭설 때문에 초장부터 눈이라면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막상 화산에 도착해서 허연과 마주하고 보니 기왕 내리는 거, 환궁하는 길이나 며칠 지체시켜주면 고맙겠다고 생각하며 욱이 하얗게 빛나는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허연이 욕조 턱에 어깨를 기대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가?”

“그냥…… 좋아서요.”

이번엔 욱이 허연에게 물을 튕겨 보냈다.

“무슨 생각을 하던데?”

“눈이 좀 더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욱이 큭큭 웃었다.

“폭설의 조짐이 보여서 방금 전까지도 걱정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폐하가 못 오시면 내가 가야 하는데, 이 눈 때문에 산에서 내려가는 길이 막히면 어쩌나…….”

“이 몸을 해가지고 하산을 할 궁리를 하고 있었는가?”

욱이 애틋한 눈길로 허연을 응시했다.

“그런데 막상 폐하를 뵙고 나니 이젠 눈 내리는 게 걱정이 아니라 이대로 뚝 그쳐버리면 섭섭할 것 같아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 마음이 너무 간사스러워 부끄럽습니다.”

“자네가 그런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

욱이 짐짓 나무라며 눈길을 슥 깔았다. 그러자 허연이 울컥 욱을 노려보았다.

“제가 이렇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지. 나도 아네.”

욱이 손을 뻗어서 허연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러곤 붉게 젖어 있는 입술에 오래 참았던 입맞춤을 했다. 주춤 몸을 뒤로 빼던 허연도 어느새 젖은 팔로 욱의 몸을 감았고, 둘은 한 몸인 듯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색등이 월성정 뒷마당을 푸른빛으로 가득 채웠다. 절벽 사이 돌 틈에서는 뜨거운 물이 솟구쳐 돌확에 담겼다가 계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그 더운 김은 마치 안개처럼 발아래에 자욱하게 깔렸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 외엔 시간조차 멈춘 듯 평온한 밤에 함박눈만 욱의 어깨 위로 소복소복 내려 쌓였다.

-대현성에서 온 남자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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