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장 첫눈-2 (16/16)

화산의 별궁은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의 너른 중턱에 웅장하고 수려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산중이라는 지형을 감안하면 터가 넓기는 해도 황제와 많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수행인들이 머물 거처를 짓기엔 아무래도 평지가 부족한데다 가파른 계곡이라는 지형적인 특이함도 장인들을 자극한 덕에 별궁은 평지에 지어진 평범한 궁전과는 확연히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화산 별궁의 본궁은 경사면을 따라 지어진 3층 건물이었는데, 1층은 웅장했고 2층은 그 절반 크기로 아담하고 아름다웠으며 3층은 마치 절벽에서 솟은 소나무처럼 벽에 붙박여 누각과 전각, 그리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거기에 맞은편 계곡에도 대여섯 개의 크고 작은 별채가 경사를 따라 지어져 있었고, 그 각각의 전각은 아름다운 회랑과 다리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

마차에서 내려선 허연이 바위에서 뻗어난 단풍나무에 에워싸여서 마치 붉은 구름 속에 들어앉은 듯 황홀한 별궁의 자태에 잠시 넋을 잃었다.

“별궁이 마음에 드는가?”

어지간히 좋은 것을 봐도 그저 덤덤하게 ‘좋습니다’ 한 마디 하고 말 뿐, 별다른 내색이 없던 허연이 취한 듯, 홀린 듯 기암괴석 틈에 교묘하게 자리 잡은 별궁을 올려다보자 욱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화산 행궁을 일러 수많은 시인 문객들이 지상으로 올라온 용궁 같다며 앞 다투어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칭송했다더니, 그 명성이 공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보니 과연 그렇구먼. 지난번 왔을 때엔 별로 좋은 것도 모르겠더니…….”

“그때도 별궁은 이 자리에 이 모습으로 있었을 것인데 어찌 좋은 것을 모르셨습니까? 심중에 근심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허연의 물음에 욱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심드렁하고 귀찮고…… 그랬었네. 흉작에 변란에, 온 나라 안엔 탐관오리가 버글버글하고……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고 시간과 방책은 부족한데 형님 성화에 떠밀려서 몸만 왔다 갔다 했으니 무슨 흥이 났겠는가?”

욱의 대답에 허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갸웃거렸다.

“요즘은 동북의 정세가 금방 전쟁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운데, 그때엔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까?”

허연의 물음에 욱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 당시에 여러 가지 악재가 덮치긴 했지만 지금의 동북 정세와 비교할 만큼 심각한 사안은 아니었다. 흉작이 심했다고는 해도 구휼미를 풀어서 구제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변란이라고 해봐야 먼 지방의 소소한 소란에 불과했다. 그리고 탐관오리 문제도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조사해서 처결을 했으니 일이 많았을 뿐, 크게 근심할 일은 아니었다. 허면 지금과 무엇이 달라서 그때엔 이런 절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울적하고 심사가 어지러웠나 생각하던 욱이 곧 그 까닭을 알아내고는 혼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대가 내 곁에 없었구먼.”

어가를 뒤따라 속속 종친과 대신들의 마차가 별궁 앞에 닿았다. 이번 행차는 후궁 중엔 공비만 동행을 했고, 종친 중엔 시영 부부만 따라온 터라 전에 비해 그 규모가 한결 단출했다. 거기에 중신들의 마차라고 해봐야 겨우 서른 대 남짓이라서 전엔 명절 대목장처럼 북적이던 별궁 마당에도 여유가 넘쳤다.

“언제 화산에 당도하나 싶어 처음엔 막막하더니, 고명한 벗들과 더불어 학문과 예술을 논하다 보니 어느새 오긴 왔습니다…….”

시영이 내관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서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안색은 창백하고 눈 밑은 시커멓게 내려앉아서 누가 봐도 시영에겐 고단한 원행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윤 내관을 비롯한 대전 내관들이 황제는 팽개쳐두고 시영에게 먼저 달려가 상태를 살피고 서둘러 처소에 들 것을 권했다.

“폐하를 먼저 뫼셔야지, 내 어찌 홍운궁의 옥교를 먼저 밟겠는가?”

시영이 승주에게 기대 헐떡거리면서도 체면을 차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욱이 한숨을 쉬며 시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곤 시영과 그를 곁에서 부축을 하고 있는 승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님이 잔손이 많이 가는 분인데 지난 며칠간 모시고 오느라 고생했다.”

욱이 먼저 승주를 보며 그간의 고생을 위로했다. 시영과 승상 틈에 끼어 오는 것은 어지간히 간 큰 선비에게도 만만한 일이 아닐 터였다.

“고생이라니요? 동행하는 내내 당금의 대학자이신 정안군과 승상께서 천금 같은 가르침을 주셔서 소인에겐 지난 사흘이 반나절 같았습니다.”

“아, 그래서 너도 얼굴이 그렇게 퀭하구나.”

욱의 핀잔에 허연이 험 하고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었다. 허연의 눈치에 욱이 남은 타박을 접어 넣고 시영을 쳐다보았다.

“형님 먼저 처소에 들어가 쉬십시오. 의관에게 일러 탕약 한 그릇 달여 보낼 것이니 드시고 기운 차리셔서 형수님과…….”

그러고 보니 곽여화가 여태 안 보인다 싶어서 욱이 차례로 들어오는 마차의 행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곽여화는 막 궁문 앞에 도착해 단풍잎처럼 붉디붉은 치맛자락을 살포시 움켜쥐고는 우아하게 마차에서 내려선 참이었다. 한때 황성의 유행을 선도하던 유명인답게 곽여화의 옷차림과 태도는 흠잡을 곳 없이 화사하고 멋이 철철 넘쳐흘렀다.

나이 서른이 넘고 아이를 둘이나 낳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미모와 자태는 월국 최고의 미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예전에 비해 변한 것이 없었고 여염의 여인들과는 비교 불가, 칠궁의 비빈들도 그 곁에 서면 잘 차려입은 촌닭으로 보일 정도였다. 욱이 보기에 나라 안에서 곽여화와 미모와 재기로 엎치락뒤치락할 만한 미인은 위사령의 두 부인들뿐이었다.

마침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치맛자락을 날리며 사뿐사뿐 다가오는 곽여화를 넋 놓고 쳐다보던 욱이 어지럽게 늘어선 마차 틈새에서 또 다른 여인을 발견하고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덕 중턱에서 늦장을 피우다가 이제 도착해서 마부에게 진풍을 넘겨주고 터벅터벅 다가오는 공비의 모습이 너무나 위풍당당해 보였던 것이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날에, 이런 신선경을 보게 되니 참으로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욱에게로 다가온 곽여화가 곁에 선 시영에게는 눈길도 한 번 주지 않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형수님도 원행이 고단했을 텐데, 형님 모시고 처소에 들어 쉬십시오.”

“형님이야 한 선생이 잘 모시겠지요. 소인은 공비마마와 숲길 산책이나 하다가 천천히 들어가겠습니다.”

곽여화의 까칠한 대꾸에 시영이 눈을 착 내리깔고 수비 태세에 들어갔다. 그간 승주와 한 마차에 몸을 싣고 시와 문장, 역사와 철학을 논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웠지만 처소에선 노상 곽여화에게 내쫓겨 침실 곁방에서 웅크리고 잤던 터라 마음 한구석은 내도록 조마조마했었는데, 오늘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었던 것이다.

예전, 태황태후의 서슬이 시퍼렇게 날 선 검과 같았을 때에도 그 앞에서 할 말 다 하며 덤비던 시영이 엄처에게 주눅이 들어 땅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욱이 안타까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산엔 이제 막 도착했고 앞으로 이레는 머물 텐데 산책이며 경치 구경이 뭐 그리 급합니까? 또한 지아비가 골골하여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데 부인이 이를 돌보지 않고 경치 구경이나 다니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잘잘못은 두 분이 조용히 따지더라도 일단 모시고 처소로 드십시오.”

혼인한 이후 처음 나선 원행길에 마누라는 제쳐두고 새로 사귄 친구만 쳐다보는 것은 합당한 도리냐고 되묻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주변에 시선이 많은 탓에 곽여화가 입술을 깨물고 일단 한 걸음 물러섰다.

“송구합니다, 폐하.”

시영의 집안 불화를 대강 틀어막은 욱이 그 곁에 서 있는 승주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지척에 와 있는 공비를 힐끔거리던 승주가 욱의 눈총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형님은 그만 형수님께 돌려드리고 너도 가서 쉬어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승주가 고개를 깊이 조아리고는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주변을 정리한 욱이 허연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허연은 손을 마주 잡아주기는커녕 뒷짐을 지고 한 걸음 물러섰다. 주변이 온통 위병과 궁인들, 속속 도착하는 중신들로 바글거리는데, 허연은 여기서 욱과 손잡고 돌아다닐 마음은 전혀 없었다.

“공비마마, 며칠 승마를 하셔서 피곤하시겠습니다. 마마께서도 처소로 드시지요.”

허연이 욱의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외면하며 공비를 붙들고 인사를 건넸다.

“처소에 드는 것은 급할 것이 없으니 저도 오라버니들을 좀 보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어디 묵는지도 궁금하고, 차 한 잔 나누며 얘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공비의 청에 욱이 피식 웃었다. 오는 길에 내도록 투닥거린 오라비와 얘기는 무슨…… 승주를 따라가고 싶으니 턱도 없는 핑계를 대는 것이 빤히 보였던 것이다. 

“왜? 이번에야말로 무호와 제대로 한판 붙어서 강호의 진짜 강자가 누구인지 가려보려느냐? 내일모레면 전쟁터로 떠나는 오라비를 기어이 어디 한 군데 분질러서 보내고 싶으냐?”

“폐하!”

욱의 폭언에 공비가 발끈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순간 불꽃이 확 일어나는 것 같은 공비의 눈길에 겁을 집어먹은 허연이 얼른 욱을 끌어다 등 뒤에 세웠다. 하지만 자신에게까지 도끼눈을 뜨고 대드는 공비가 괘씸해서 욱도 여차하면 달려 나갈 듯 움찔거렸다.

“노려보면 뭐? 잘하면 과인도 돌려차기로 보내겠구나?”

“아, 좀…….”

허연이 버럭 야단을 치고는 욱을 정 내관 쪽으로 밀어 보냈다. 공비의 격투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정 내관, 윤 내관, 그리고 고 내관이 욱을 넘겨받아서 고정하시라고, 무호도 혼절시킨 발차기인데 거기에 걸리면 폐하께서는 그냥 세상 버리시는 수가 있다고 달래는 사이 허연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공비를 쳐다보았다.

“마마께서는 우선 처소에 드십시오. 해 넘어갈 즈음 연회가 열릴 터, 무호 장군과 부장들은 그때 보시지요. 또한 일정이 이레이니 산책도 하시고, 사냥도 하시고…… 장군 일행과 함께할 시간은 넉넉하실 겁니다.”

허연이 그렇게 권하며 요즘 영운궁의 일을 맡아보고 있는 양 내관에게 어서 공비를 처소로 모셔가라고 손짓을 했다. 하지만 욱에게서 모진 소리를 들은 공비의 표정이 여전히 시무룩하자 목소리를 낮춰 다시 그녀를 달랬다.

“연회엔 정안군과 승상 대감도 참석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 선생도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로 처소에 드셔도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곱게 꾸미시려면 시간이 넉넉지 않을 것입니다.”

허연의 설득에 공비의 마음이 급작스레 바뀌었다. 승주가 가까이 앉는다니, 그럼 들어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허면, 좀 있다 뵙겠습니다.”

공비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공비가 내관들을 따라 처소로 향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허연이 돌아서서 욱을 슬쩍 노려보았다. 그러곤 성큼성큼 다가가서 입이 한 발이나 빠져 있는 욱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왜? 방금 전엔 손목에 땀띠라도 난 것처럼 뒤로 싹 감추더니?”

욱이 허연에게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며 입으로만 투덜거렸다.

“둘 중 하나라도 부끄러운 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면, 지금은 부끄럽지 않은가?”

욱의 공연한 시비를 못 들은 척, 허연이 그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처소가 어딥니까? 가서 좀 쉬어야겠습니다.”

화산 별궁에서 황제가 개인 처소로 쓰는 곳은 정전인 홍운궁의 뒤쪽 내실과 2층인 용화루 전체, 그리고 건너편 별궁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월성정이었다. 그중 욱이 허연을 데려간 곳은 호화로운 침실 옆에 아담한 다실이 붙어 있고, 누각 밖으로는 계곡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용화루였다.

오는 길도 어디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계곡 중턱의 높은 누각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화산의 경치는 절경 중에도 절경이었다. 지난 1년간 우화원과 청량전의 좁은 마당만 서성이며 지내다가 먼 곳까지 나와서 불이 붙은 듯 새빨간 계곡을 내다보니 그간 쌓였던 갑갑증이 일시에 풀리는 느낌이라 허연이 연신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렇게 좋은가? 계곡 풍경에서 눈을 못 떼는구먼.”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침상에 누워 꼼지락거리던 욱이 슬그머니 곁에 다가와서 귓속말을 하는 척 허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서 내다보는 경치는 밑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허연이 욱의 이마에 손가락을 탁 튕기고는 한 걸음 떨어져 섰다.

“맞은편 월성정은 더욱 전망이 좋네. 때문에 선대부터 저곳을 달맞이궁이라고 불렀지. 게다가 전각 바로 뒤에 작은 폭포가 있는데 위쪽에 있는 온천수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라 한겨울에도 물이 따끈따끈하다네. 때문에 당대의 바람둥이 희종께서는 폭포 바로 아래 돌 욕조를 두고 그곳에서 밤이 깊도록 미인들과 놀아나셨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네.”

“저는 피곤해서…… 오늘은 저기까지 못 올라갈 듯싶습니다.”

허연이 슬쩍 튕기자 욱이 키득거리며 그 팔을 꽉 끌어안았다.

“뭐 그런 걱정을 하고 그러나? 내가 안고 올라가면 되지.”

허연이 찰떡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욱을 끌고 다과가 마련된 탁자로 다가갔다. 준비해 온 차와 과자를 탁자에 차려놓고 기다리던 환이와 명이가 둘의 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너희도 피곤할 테니 이만 처소에 가서 쉬어라.”

“고맙습니다, 마마.”

“헌데 고 내관은 뭘 하고 있기에 너희가 다과를 준비했느냐?”

“태감 나리는 아래층에서 이번 원행 중에 마마께서 입으실 의복을 날짜별로 정리하고 계십니다. 의복이 족히 스무 벌도 넘어 보이니 시간이 좀 걸리나 봅니다.”

환이의 대답에 허연이 좀 전 바깥 경치를 내려다볼 때보다 더 깊은 심호흡을 했다. 허연의 난감한 표정에 욱이 그거 잘코사니라는 듯 큭큭거렸다. 욱에게 눈총을 한 번 준 허연이 다기를 정리하고 물러갈 준비를 하는 두 아이를 불러 세웠다.

“남은 과자는 갖고 가서 아이들과 나눠 먹어라.”

“예, 마마.”

그렇지 않아도 남은 과자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환이와 명이가 환한 표정으로 과자 바구니를 집어 들고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허연의 흐뭇한 표정에 욱이 또다시 입을 삐죽였다.

“자네는 다른 이들에게는 두루두루 다정하면서 어찌 내게는 그렇게 까칠한가?”

“그러시는 폐하께서는 어찌 공비마마만 보시면 도끼눈을 뜨고 그렇게 막말을 하십니까?”

“그야 공비가…….”

“공비마마와 허물없이 지내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까는 말씀이 지나치셨습니다.”

허연의 말에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비와 허물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사사건건 밉상이 아닌가?”

“두 분을 보고 있으면 마치 사이 나쁜 남매간 같아 보입니다. 우애는 깊지만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 보통 남매간의 다툼엔 큰 불상사가 없지만 공비는 무공이 남다른 분이니 그리 겁 없이 건드리지 마십시오. 무호가 당한 일을 폐하께서도 당하실까 걱정스럽습니다.”

허연의 충고에 욱이 말도 안 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공비가 아예 실성을 하지 않고서야 내게까지 발길질을 하겠는가? 게다가 내게 누이가 있었다면 금란 공주나 은혜 공주처럼 예쁘고 귀여웠겠지, 공비는…… 공비는 아닐세.”

욱의 강력한 부인에 허연이 가소롭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의 외가도 서북쪽 변방을 지키던 장군 집안이라면서요? 외삼촌들도 모두 거구의 장수들이고, 모후께서도 여장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친정을 시작한 이듬해에 큰 외숙이 하례차 황궁에 들면서 세 명의 사촌 누이를 데리고 왔는데, 셋 다 하나같이 아비를 쏙 빼닮았고 더욱이 그 장녀는 자신과 키가 비슷했던 것이 떠올라서 욱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심각해졌다. 그 표정이 귀여워서 허연이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권 상궁이 저녁 연회에 입을 예복을 버들고리에서 꺼내 횃대에 걸고 남은 옷은 곁방에 가져다 정리하는 동안, 공비는 가져온 서책을 꺼내 접객실 구석의 사방탁자와 반닫이 위에 좋아하는 순서대로 올려놓고 탁자 한 옆엔 지필묵이 담긴 함을 내려놓았다. 함에는 공비가 대현성에 있을 때부터 쓰던 벼루와 연적, 필통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고 한 옆에는 그간 틈틈이 연습한 글씨를 모은 화선지도 수십 장이 들어 있었다.

별궁의 내관과 궁녀들이 이미 다 치우고 꾸며놓은 곳이라 그렇게 책 몇 권을 꺼내놓은 후, 더는 할 일이 없어진 공비가 계곡 쪽으로 난 누마루에 나가 기둥에 기대섰다. 그러곤 하얀 바위와 붉은 단풍, 계곡 틈에서 올라오는 더운 김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계곡을 내다보았다.

공비가 처소로 받은 곳은 본궁의 2층인 용화루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딱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한 단학정이었다. 단학정은 계곡 오른편에 위치한 별궁 중에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전각으로 본래는 황후나 태후의 거처로 쓰이던 곳이었다. 황후나 태후가 없을 때라도 최소한 황귀비나 귀비가 아니면 발도 들일 수 없는 곳이지만, 그런 것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황제가 좋은 처소를 내주라고 명을 내려서 공비가 단학정에 여장을 풀게 된 것이었다.

“침실에서 내다보는 경치가 정말 절경입니다. 아씨, 이런 처소를 아씨께 내리시다니…… 폐하께서는 참으로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의복 정리를 마치고 나온 권 상궁이 잔뜩 들떠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계곡 풍경을 내다보며 소녀처럼 탄성을 질렀다. 자신 때문에 덩달아 황궁에 갇혀서 지난 3년간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하던 권 상궁의 밝은 표정이 도리어 측은해서 공비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 좋은가?”

“아씨 얼굴에 오랜만에 화색이 도시니, 저는 바깥 경치보다 아씨 얼굴 보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나 때문에 자네까지 고생일세.”

“아씨께서 폐하께 사랑을 받으시고 궁 안에서도 처지가 평안해지신다면 제게 고생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허면 앞으로도 고생 좀 하겠구먼.”

“아씨!”

권 상궁이 정색을 하고 공비를 노려보았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입궁한 이후 아씨께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마음 여린 권 상궁이 울먹울먹하며 신세타령을 겸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공비가 얼른 그녀를 다시 끌어안고는 등을 다독였다.

“울지 말고…… 좋은 곳에 놀러 와서 첫날부터 어찌 이러는가? 내 앞으론 말조심을 할 것이니 마음을 풀게.”

“말조심이 문제가 아니라, 아씨께서도 이만 고집을 꺾으십시오. 향비나 현비가 아기씨들 데리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면 아씨는 부럽지도 않으십니까?”

“나는 뭐 별로…….”

그 무덤덤한 대꾸에 권 상궁이 흑……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공비의 듬직한 어깨에 눈물을 꾹 찍었다.

“가뜩이나 친정도 멀고, 다른 후궁들에 비하면 집안도 위세가 없어서 궁녀나 내관들까지 무시하는데 거기에 폐하까지 아씨께 데면데면하시니…… 저는 아씨를 따라 궁에 든 후 지난 3년간 하루도 깊은 잠을 자본 적이 없습니다.”

“유모…….”

“아씨도 이제 스무 살이십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갓 난 아씨를 제 품에 안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20년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눈 한 번 깜빡하면 서른이고, 한숨 한 번 쉴 사이면 마흔입니다. 세월은 한 번 가면 그뿐,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데 아씨는 대체 어쩌자고 헛된 미련으로 한창 좋은 시절을 이렇게 흘려보내십니까?”

잠깐 방심한 사이 권 상궁이 눈물 공세를 퍼붓자 공비가 난감해져서 뭐라고 달래지도 못하고 그 등만 툭툭 두드렸다. 그때 다행히 문밖에서 정안군 부인 드셨다는 궁녀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곽여화는 황제의 사촌 형인 정안군의 정부인으로 외명부에서는 진무왕비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귀부인이었다. 때문에 그간 크고 작은 궁중 연회와 태화궁의 다과연 등에 참석할 일이 잦았고, 후궁들과도 두루 알고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로 태화궁에서 만나 안부를 주고받았을 뿐 후궁의 전각까지 찾아가 개인적으로 사담을 나눈 적은 거의 없었고, 그중에서도 공비는 태화궁 행사에조차 불참할 때가 많아서 그냥 얼굴이나 알고 지내는 정도였다.

곽여화가 일부러 공비를 찾은 것은 자신의 처소가 단학정 바로 아래인 정희당이었고, 원행 기간 중에 본 공비의 모습이 지난 3년간 봐왔던 그것과 확연히 달라서 호감과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시영은 탕약을 먹여서 이불 밑에 묻어놓고 새 친구나 사귀어볼까 해서 올라온 길이었다.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될 텐데, 아직 예복도 입지 않으셨습니까?”

곽여화가 내실로 들어서다가 소맷자락에 눈물 콧물 닦으며 훌쩍이고 있는 권 상궁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제가…… 안 좋을 때에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공비가 고개를 저으며 곽여화를 접객실로 안내했다.

화사하게 꾸며진 접객실에 들어선 곽여화가 절벽 쪽으로 난 창 밖에 우거진 단풍나무를 보고는 조그맣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벼랑 틈으로 뿌리를 낸 단풍나무가 제법 둥치가 굵어서 멋이 나는데다 하얗게 드러난 바위를 타고 작은 폭포가 흐르는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마치 대가의 풍경화 한 폭이 벽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전각 뒤편의 풍경에 곽여화가 감탄의 감탄을 거듭하자 공비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세자빈께서는 듣던 대로 안목이 높으십니다.”

“경치를 보는 데 안목은 무슨…… 각자 끌리고, 좋아하는 풍경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 말씀하시니 더 부끄럽습니다.”

평소엔 태도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매사에 시큰둥, 무뚝뚝, 심드렁하던 공비가 오늘따라 고분고분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말을 받자 마음이 놓인 곽여화도 활짝 웃었다.

“풍경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저런 풍경이랍니다.”

농을 걸며 곽여화가 접객실 너머 침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공비의 예복을 가리켰다. 치자색의 풍성한 치마와 붉은색에 가까운 짙은 주황색에 은실로 섬세하게 단풍잎을 수놓은 저고리는 먼발치에서 봐도 고 내관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황성에 널리고 깔린 것이 의상점이고 의복 장인이지만, 고 내관만큼 색상을 자유자재로 쓰고 태가 날렵한 옷을 만드는 이는 없으니…… 저 옷을 입고 오늘 저녁 연회에 나가시면 다들 마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리 있습니까? 세자빈께서도 연회에 참석하실 터인데…….”

“저는 서른이 훌쩍 넘은 아이들 어미입니다. 이제는 비실비실한 서방님도 영 건성으로 보는 제게 어느 눈 나쁜 사내가 눈길을 주겠습니까?”

곽여화의 푸념이 진심인지, 겸손인지 분간이 가질 않아서 공비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어린애 붙들고 공연한 소리를 했구나 싶어서 곽여화가 일어나 공비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옷을 어찌 횃대에 걸어놓고 구경만 하십니까? 입으면 또 얼마나 예쁜지 보고 머리도 아름답게 꾸며야지요. 옷 입고 머리 만지는 것이 간단히 하자면 간단한 일이지만, 제대로 하자면 반나절도 짧으니 슬슬 준비를 하시지요.”

고 내관이 선물한 연회복은 여태 공비가 입었던 어떤 의복보다 아름다웠고, 몸에 잘 맞았다. 단풍이 든 듯 미묘한 색깔도 잘 어울렸고, 단풍잎이 여러 장 겹쳐진 듯 그려진 자수는 실제로 그 어깨에 반짝이는 단풍잎이 떨어져 놓인 듯 보였다. 거기에 호박 장식을 붙인 은색 허리띠는 허리선을 날렵하게 보이게 할 뿐 아니라 불쑥 큰 그 키까지도 좀 아담해 보이게 했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사냥복을 입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곱고 예뻐진 공비를 보며 곽여화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곤 공비를 경대 앞에 밀어 앉히고 숙련된 솜씨로 얼굴을 꾸미고 머리를 빗어 올렸다.

“마마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피부와 혈색이 좋으시니 분을 두껍게 바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분은 가볍게 바르시고, 눈썹만 곱게 그려도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진답니다. 또한 궁중에서는 가채를 더 써서 머리를 더욱 풍성하게 올리지만 이곳은 행궁이고 지금 입으신 옷도 가벼운 편이니 이 정도로 하시고, 가만있자, 비녀가…….”

여기서 머리를 더 크게 올려봐야 키만 불쑥 커 보일 뿐이고, 황성의 최근 유행은 자기 머리만으로 가볍게 틀어 올리고 거기에 비녀를 화려하게 꽂는 것이라 곽여화가 적당한 비녀를 찾아 공비의 패물함을 뒤적였다.

“고 내관이 옷을 보내면서 적당한 비녀는 보내지 않았습니까? 이 옷에는 크고 눈에 확 띄는 호박과 홍옥이 제격일 것 같은데…….”

“패물함에 든 비녀와 노리개 대부분이 고 내관이 보내온 것입니다. 비녀만 해도 대여섯 개는 되는데…… 적당한 것이 없습니까?”

그 대답에 곽여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궁과 공비를 쳐다보았다.

“지니고 계신 패물이 이뿐입니까?”

“본래는 입궁할 때 사가에서 마련해 온 패물도 좀 있었고, 입궁하면서 폐하께 하사받은 비녀며 노리개도 제법 큰 상자에 가득할 정도였는데…….”

“그런데요?”

“지난봄부터 형편이 좋지 않아서 모두 팔아서 썼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공비가 고개를 돌려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자신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처럼 잠시 넋을 잃었다. 그저 잠깐 곽여화에게 얼굴을 맡기고 있었을 뿐인데 화사한 새 옷에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공비의 얼굴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이렇게 말갛고 고와 보인 적도 없었고, 올린 머리가 이렇게까지 우아하게 어울린 적도 없어서 한동안 거울을 멍하니 쳐다보던 공비가 곽여화를 돌아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세자빈의 비파 연주와 노래가 천하 절품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화장이며 머리 꾸미는 솜씨도 이렇게 뛰어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소싯적부터 거울 앞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요?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몸치장은 여염집 부인들보다 여러 수 위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공비는 정안군이 원행 첫날부터 승주를 자신의 마차에 태워 비를 피하게 해주고 그 후에도 승상의 마차로 따라다니며 발에 흙 묻을 겨를 없이 돌봐주는 것이 고마웠지만, 나서서 인사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깝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부인이 찾아와 말동무를 해주고 서툰 화장을 도와주니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친근감에 마음이 다 녹을 정도였다. 여자 형제도 없고 친정 어미도 성격이 살갑지 않아서 공비는 여자이면서도 자매간이나 모녀간의 아기자기한 정 같은 것은 잘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건 너무 작고, 이건 색이 영 안 어울리고…… 하며 패물함을 뒤적이며 비녀를 들었다 놓던 곽여화가 자신이 데리고 온 시녀를 돌아보았다.

“너 바로 가서 내 패물함을 가져오너라. 옷의 색상이 미묘하니 뒤꽂이를 여러 개 맞춰봐야겠다.”

“예, 마님.”

비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녀를 처소로 내려 보내는 것이 고마운 한편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잠시 망설이던 공비가 권 상궁을 돌아보았다.

“내 옥비녀를 가져왔는가?”

“예, 아씨. 곁방에 옷궤와 함께 두었습니다.”

“가져오게. 어느 옷에나 얼추 어울리는 것이니 그거면 될 듯싶네.”

“하지만 아씨, 폐하께서도 참석하시는 연회에 어찌 다 깨진 비녀를…….”

모처럼 새 옷 입고 예쁘게 꾸몄으니 비녀도 좋은 것을 하고 나갔으면 싶어 권 상궁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국 공비의 눈총을 못 이기고 곁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곁방으로 건너갔던 권 상궁이 들고 나온 것은 하얀 비단 주머니였다. 권 상궁에게서 주머니를 건네받은 공비가 그 안에서 비녀 하나를 꺼내 곽여화에게 건넸다.

“너무 따로 놀지만 않으면…… 이 비녀는 어떻습니까?”

공비가 비단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투명할 정도로 하얀 백옥 비녀였다. 티 없이 하얀 옥비녀는 머리 부분이 갓 피어난 목련으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아직 단단한 목련 봉오리에서 꽃잎 하나만 살짝 벌어진 형상이 지극히 사실적이었고 크기도 꼭 목련 한 송이 정도라 멀리서 보면 머리에 생화를 꽂은 듯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오래되어 그런지, 아니면 주인이 험하게 다뤘는지 비녀의 목 부분과 꽃잎에는 깨진 것을 다시 붙인 흔적이 역력했다.

“어려서부터 봐온 옥비녀가 족히 천 개는 넘을 듯싶지만, 이렇게 고운 백옥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사가에서부터 지니던 것인데, 제가 가진 물건 중엔 가장 아끼는 것입니다.”

비녀 좋다는 곽여화의 말에 공비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 자체도 상품이지만 비녀를 깎은 솜씨가 놀랍습니다. 어지간한 명문가에서도 가보로 물릴 만한 명품인데…… 상처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어디 하고 나가셨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셨습니까?”

백옥도 귀한 것이니 사가에서라면 깨진 비녀도 다시 붙여서 쓰겠지만 궁중의 연회에 후비가 하고 나가기엔 무리가 있어 보여서 곽여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물음에 공비가 처마 밑에 내다 건 등불이라도 불어 꺼뜨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비녀는 고향에서 떠나올 때에 오래 알던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인데, 거기 목 부분은 그때부터 그렇게 부러진 것을 다시 붙인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꽃잎이 떨어져 나간 것은…….”

비녀를 들여다보는 눈빛이며 어루만지는 손길이 애틋한 것이 딱 보기에도 공비에게는 뭔가 사연이 있는 물건이 분명했다. 비녀를 준 것이 오래 알던 사람이라니, 허면 친정 어미가 마련해준 것은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곽여화가 공비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은혜 공주가…….”

“예?”

갑자기 은혜 공주 얘기가 나오자 곽여화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의자에 바싹 붙어 앉았다. 지난봄, 공비와 은혜 공주가 다투다가 공주의 옷섶이 다 뜯긴 일은 내외명부뿐 아니라 도성 안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은혜 공주가 당시 임신 중이라 그 일로 황제가 크게 노해서 공비를 불러다 성질 포악하다고 나무란 일은 그간 큰 소란이라곤 없던 후궁에선 대단히 심각한 사건이었고, 그 며칠간은 공비가 궁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나돌 정도였다.

“은혜 공주님이 이걸 깨셨습니까?”

“은혜 공주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마음이 복잡하고 답답해서 공비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그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에 담아만 두었던 그날의 일을 털어놓았다.

“지난봄에 이 비녀를 하고 후원을 거닐던 중에 우연히 은혜 공주와 마주쳤는데…… 공주와 제가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도 오며가며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라, 그날도 근처 정자로 들어가 차 한 잔 앞에 두고 잠시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공주가 제 비녀를 보더니 잠깐 보여줄 수 없겠느냐고 해서 빼 주었는데…….”

싸웠다는 말만 무성할 뿐, 성질 만만치 않은 두 말썽꾸러기들이 무슨 일로 한판 붙었는지 구체적인 정황은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이 비녀가 원인이었구나 싶어서 곽여화가 비녀를 들여다보며 그 깨진 꽃잎을 살짝 어루만졌다.

“비녀 자체는 티도 없고 조각도 아름답지만 목이 한 번 떨어졌던 것을 어찌 하고 다니느냐며, 옷도 늘 입는 그 옷에 깨진 비녀를 붙여서 꽂고 다니니 향비가 더 비웃고 함부로 하는 거라고 일장 잔소리를 늘어놓지 뭡니까?”

“은혜 공주가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긴 있습니다.”

“공주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저를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제 입장에서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질 않습니까? 그래서 어차피 누구 보여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몸치장은 해서 뭐하겠느냐고, 비녀 내놓고 가던 길 가시라고 쏘아붙이니 공주도 부아가 나서 조심성 없이 비녀를 탁자에 내려놓다가 그만 꽃잎이 깨져서 떨어져나가고 말았습니다.”

“저런…….”

“옷이며 장신구며 전각을 하나 채울 정도라는 은혜 공주가 보기엔 하찮은 물건이었겠으나, 저는 늘 머리맡에 두고 고향 생각 날 때마다 어루만지던 것이 깨져서 날아가니 울화통이 터져서 그만…….”

“그래서 멱살을 잡으셨습니까?”

갑자기 그날의 일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 공비가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권 상궁이 공비를 두둔하고 나섰다.

“변명 같지만, 저희 마마께서는 그때 은혜 공주가 회임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저 옷섶 한 번 움켜쥔 것뿐인데 얇은 갑사 저고리라서 맥없이 터진 것이었고…… 곁에 있던 시녀가 어찌나 빽빽거리며 비명을 질러대는지, 공주께서는 그 소리에 더 놀라셨습니다.”

굳이 권 상궁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어찌 된 일인지 알 것 같아서 곽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황태후가 영산으로 옮겨 간 이후, 시어른이라곤 그림자도 없는 황궁에서 비빈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각자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 그녀들에게 유일하게 거슬리는 존재가 금란 공주와 은혜 공주였다.

본래 연주국에서 볼모로 끌려와 위사령 진관우와 혼례를 올린 두 사람은 황실에는 어떤 공식적인 지위도 없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진관우가 태황태후의 친자인데다 황제의 최측근이었으니 그 영향력을 가볍게 볼 수 없었고, 누구보다도 황제가 두 공주를 친누이처럼 아끼며 궁 안 대소사엔 꼬박꼬박 불러서 상석에 앉히고는 황녀에 준하는 대접을 하니 후궁들에게는 족보에도 없는 시누이가 둘이나 생긴 격이었다.

거기에 금란 공주는 위엄과 품위가 황후를 압도할 정도라서 어린 후궁들과 시비를 만드는 일이 일체 없었던 반면, 은혜 공주는 또래의 부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그렇게 어울리다 시비가 붙으면 대거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다 시누이 노릇 할 일이 있으면 거침없이 태황태후의 며느리라는 패를 꺼내서 휘둘렀기 때문에 그간 칠궁에 분란을 일으키는 주범 노릇을 톡톡히 했었다. 그 때문에 공비와 은혜 공주 간에 격한 몸싸움이 있었다는 소식에도 칠궁 사정을 아는 이들은 올 것이 왔는데 시기가 좋지 않았다 싶었을 뿐, 별스럽게 놀라지도 않았었다.

“은혜 공주의 회임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커질 일도 아니었는데…… 마마께서도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곽여화의 위로에 공비가 고개를 저었다.

“다 제가 용렬한 탓입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비녀는 그저 구실이었을 뿐입니다. 그날따라 봄바람은 따뜻하고, 공주는 뭐에 들떴는지 잔뜩 신이 났는데…… 저는 도리어 봄바람 때문에 울화증이 도져서 아무 기둥이라도 들이받고 싶던 차에 공주와 마주쳐서 화풀이를 한 것입니다.”

“마마, 그 일은 마마께서 은혜 공주께 사과하고 마무리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만 털어버리십시오.”

곽여화의 다정한 위로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공비가 울적한 표정으로 비녀를 집어 어루만졌다.

“저는 궁 안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저 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공비의 목련 비녀는 우윳빛에 가까운 백옥이라 그 자체로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예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목련은 이른 봄에 피는 꽃인데 지금은 깊은 가을이었고, 곱게 물든 가을 단풍 같은 연회복과는 모양도, 색상도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하지만 곽여화는 선뜻 곱게 틀어 올린 공비의 머리에 목련 비녀를 비스듬히 꽂았다. 그리고 자신의 패물함을 뒤져 노란 호박과 홍옥이 자잘하게 박힌 뒤꽂이를 여러 개 꽂아서 가을 목련의 어색함을 가려주었다.

“단풍놀이에 목련이라…… 다소 생뚱맞기는 합니다.”

마치 꽃밭인 듯 화사하게 빛나는 뒤꽂이와 비녀를 거울에 비추어 보며 공비가 얼굴을 붉혔다. 그간은 뭘 어떻게 해도 사내가 여장한 것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럽기만 해서 거울 가까이 가는 것도 꺼렸었는데, 오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만하면 괜찮다 싶을 정도라서 공비가 자꾸만 거울을 힐끔거렸다.

“단풍이면 어떻고 목련이면 어떻습니까? 꽃은 어느 계절에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도 본래 자잘한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닌데, 따지는 것 많고 말 많은 궁에 오래 있다 보니…….”

“하긴, 궁중이 그런 곳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곽여화가 공비의 저고리 깃을 반듯하게 매만졌다.

공비의 연회 준비를 다 마친 곽여화가 본궁에서 연통이 오길 기다리며 접객실을 서성이다가 탁자 위에 놓인 지필묵과 화선지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귀여운 개구리 한 마리가 손잡이로 달린 벼루 뚜껑을 발견하고는 빙긋 웃었다.

보통 비빈들이 쓰는 벼루는 그 장식도 화려해서 고운 옥석을 골라 친정의 문장을 넣거나 공작이나 꽃이 흐드러진 매화가지 따위를 조각해서 쓰는데, 공비의 벼루는 맷돌처럼 투박한 돌에 장식이라곤 고작 작은 개구리 한 마리라서 어딜 봐도 황실의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면 소박하고 귀여워서 곽여화가 손가락 끝으로 개구리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글씨도 직접 쓰신 겁니까?”

“아, 예…….”

거울에서 눈을 못 뗀 채 비녀도 만져보고 연지 바른 입술도 유심히 들여다보던 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심심할 때 시간이나 보낼까 싶어서 끼적였던 것이라 보여드리기 부끄럽습니다.”

“마마께서 서예에도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공비라 하면 입궁 직후부터 막말에 주먹질에…… 한번 성미가 틀어지면 아무도 말릴 자 없는 칠궁 왈패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그간 곽여화가 봐온 공비의 울적하고 무례한 모습도 그런 평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황궁의 높은 담장 밖으로 놓여난 공비는 밝고 씩씩했으며, 작은 일에도 크게 고마워하는 경우 바른 젊은이였다. 거기다 탁자 한 옆에 놓인 지필묵이며 손때 묻은 서책을 보니 뜻밖에 지적인 면모도 있어서 곽여화가 속으로 감탄을 하며 지필묵 상자 한 옆에 말아놓은 화선지를 들어 펼쳤다.

여러 가지 필체를 연습 중인지 스무 장 정도 되는 화선지에 적힌 글씨는 모두 조금씩 달랐다. 어떤 것은 그림에 가까운 예서였고, 또 어떤 것은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흘려 썼고, 어떤 것은 마음이 어지러울 때 적었는지 날카롭고 거칠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이제 갓 스무 살 된 젊은이의 것으로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何事西風動林野

一聲寒雁淚長天

[무슨 일로 서풍은 잠든 숲을 깨우고

 기러기는 장천을 울면서 날아가는고.]

글씨를 한 장씩 차분히 넘겨가며 보던 곽여화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곱게 쓰인 시를 나직하게 읽었다.

“시집이나 서책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글귀가 있으면 그렇게 따라서 써봅니다.”

“시귀도 좋지만, 글씨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글깨나 쓴다는 시강원이나 숭문각의 유생들의 글씨도 꽤 많이 보았는데, 이처럼 아름다우면서도 기운 넘치는 글씨는 못 보았습니다. 제가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뛰어났던 필체는…….”

문득 엊그제 보았던 승주의 서화를 떠올린 곽여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공비의 필체가 승주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틀린 글자라도 있습니까?”

갑자기 심각해진 곽여화의 표정에 공비가 글씨를 넘겨다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며칠 전에 마마와 동향인 한 선생의 글씨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와 조금 닮은 듯싶어서…….”

곽여화의 입에서 승주의 이야기가 나오자 공비의 눈빛이 반짝였다.

“부인께서 승주의 글씨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공비의 목소리에 곽여화가 더욱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안군이 지난 몇 년간 한 선생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했고, 몇 차례 서화도 선물받은 일이 있어서 저도 그 서체를 잘 압니다.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명필이 아닙니까?”

“그 사람은 저의 글 선생님이었습니다. 열두 살 때부터 황성으로 떠나오기 전까지 거의 5년간 그 사람에게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우고 세상사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

공비의 대답에 곽여화가 비로소 마음이 놓여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인연이 있었다면 공비가 승주의 이름만 들어도 눈에 띌 정도로 안색이 밝아지는 것이나 필체가 흡사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마마께서 참 훌륭한 스승을 두셨습니다. 내외명부를 털어 흔들어도 이 같은 명필은 없을 터, 폐하께서 아시면 크게 놀라시겠습니다.”

곽여화의 거듭된 칭찬에도 공비가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폐하께서는 이미 저로 인해 수차례 놀라셔서 이 정도로는 눈도 깜짝 않으실 겁니다.”

화산 행궁의 정전인 홍운궁에서 연회가 열린 것은 늦가을의 짧은 해가 계곡 너머로 지고 각 전각의 처마 밑에 푸른 등이 내걸려서 온통 붉게 물든 가을 산에 운치를 한층 더할 무렵이었다.

2층인 용화루에서 허연을 붙들고 신혼 기분을 내다가 좀 늦게 내려온 욱이 대청 초입에서 걸음을 멈췄다. 연회장 상석에 앉아 있는 저 준수한 공자는 누구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잘 차려입은 공자가 공비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허연을 돌아보았다.

“바깥 공기가 좋긴 좋구먼. 노상 시무룩하던 공비가 아주 활짝 피었네.”

빛깔 고운 연회복을 입고 전에 없이 곱게 꾸민 공비의 모습에 허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오늘따라 아름다운 것은 그대지. 공비는 노상 구기고 다니던 인상이 좀 펴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초저녁부터 난행을 당해 공연히 남의 눈이 부끄럽던 차, 욱이 싱거운 소리를 지껄이자 허연의 눈길이 싸늘해졌다.

“사람들 듣는 앞에서 그런 식언을 하시면, 2층에 있는 넓고 아름다운 침실은 혼자 쓰시게 될 겁니다.”

“어허…….”

“온천도 혼자서 하시고, 환궁하실 때 어차도 혼자 타고 가십시오.”

허연이 으름장을 놓으며 욱을 앞으로 밀어 보냈다.

주 연회장인 홍운궁의 대청에 모인 참석자들은 승상 이하 중신들과 수행 무관들로 인원은 70여 명 남짓이었다. 이는 황실 연회로는 그 규모가 심히 단출한 편이었다. 이번 원행의 일정이 불과 열이틀 남짓이라 애초부터 수행 인원이 많지 않았고, 황제가 황후와 후궁들을 모두 떼어놓고 공비만 덜렁 데리고 오는 바람에 중신들도 대부분 부인을 두고 홀몸으로 어가를 쫓아온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홍운궁의 대청에 모인 70명의 참석자들 중 여인이라곤 공비와 곽여화 둘뿐이고, 그 외엔 나이와 직급이 다양한 사내들만 바글바글했다.

월국에서는 크든 작든 공식적인 행사에는 부인을 대동하는 것이 오랜 관행이었다. 때문에 어떤 자리든 여인이 참석자의 절반이었고 덕분에 그 분위기도 화려하고 우아했는데, 이번 원행은 모였다 하면 다 사내들인데다 그중 절반이 인상 험악한 무장들이라 얼핏 보면 이것이 단풍놀이 풍경인지, 큰 전투를 목전에 둔 전장의 막사 풍경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토록 좋은 날에 아름다운 화산에 와서 온 산에 가득한 단풍과 골짜기마다 피어오르는 온천의 더운 김을 보니 가을 정취가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보잘것없는 늙은이를 원행에 청하여 이 같은 신선경을 보여주시니, 참으로 황은이 망극, 또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제가 내려와 옥좌에 앉자 승상이 모든 참석자들을 대표해서 인사를 올렸다.

“과인 또한 경들과 더불어 이렇게 좋은 시간을 갖게 되어 기쁘기 이를 데 없소. 모처럼 먼 곳까지 나왔으니 복잡한 일은 추수에 흘려보내고 마음껏 즐겨봅시다.”

황제가 답례를 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이어서 참석자들도 술잔을 들고 다시 한 번 황제의 덕을 칭송했다.

연회는 지난 사흘간 기착지에서도 그랬듯 초장부터 술판이었다. 진관우와 무호가 데리고 온 부장들 중에는 애초부터 술고래가 적지 않았지만, 중신들 역시 곁에 눈치를 살펴야 할 부인이 없는 자리라 마음이 한껏 풀려서 부지런히 술잔을 비웠다.

원행이 처음부터 그렇긴 했지만, 목적지인 홍운궁에 도착해서 열린 연회는 어쩐지 더욱 삭막하기만 해서 허연이 들었던 술잔에 한숨을 섞어서 내려놓았다. 이건 단풍놀이 하자고 시커먼 사내들만 4백 리를 달려와서 초장부터 말도 없이 술만 퍼마시고 있으니 가을 정취는 개뿔…… 이럴 거면 대흥루 2층에 큰 방 하나 잡아두고 거기서 놀지, 뭐하려고 이 먼 곳까지 왔나 싶은 회의감이 몰려왔던 것이다.

“오늘따라 안색이 무척 밝으십니다. 제가 궁에 있으면서 마마를 여러 번 뵈었는데 오늘처럼 화사하셨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허연이 욱의 왼편에 앉아 술을 물처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공비를 건너다보며 말을 붙였다. 허연의 칭찬에 공비가 어느새 발그레 붉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끄럽습니다. 볼품없는 제 얼굴이 하루 만에 바뀌었겠습니까? 귀인께서 보내신 연회복이 아름답고, 정안군 부인께서 꾸미는 것을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볼품이 없다니, 그 무슨 겸양이십니까? 그간 꾸미질 않으셔서 수수해 보이셨던 것일 뿐, 마마의 미모는 다른 마마님들에 비해 못하지 않으십니다.”

허연의 말에 둘 사이에 앉아 있던 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다들 고만고만하긴 하지.”

“폐하!”

갑자기 자신과 공비의 대화에 끼어들어서 부인들의 외모를 한참이나 깎아 내리는 욱의 언사에 허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벌써 술을 큰 잔으로 다섯 잔이나 걸친 욱이 눈치도 없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과인이 후비를 낙점할 때엔 그 출신 지역과 가문의 영향력만 고려했을 뿐, 화상 한 점 받아 본 것이 없었다네. 사실 황후도…….”

그렇게 지난날의 무모함을 후회하던 욱이 갑자기 악!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오른쪽 다리를 끌어안고는 정강이를 벅벅 긁었다. 욱이 콧잔등을 한 대 얻어맞은 강아지처럼 원망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거나 말거나 허연이 고개를 싹 돌려서 아랫자리에 앉은 곽여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안군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바깥양반이야 늘 그렇지요. 뭐…… 다른 탈이 난 것은 아니니 탕약 먹고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바로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경치 구경에…….”

허연이 욱을 힐끔 노려보고는 다시 곽여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신 팔려서 이제야 안부를 묻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인사야 언제 하시면 어떻습니까?”

곽여화가 잔을 들어 허연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곤 어느새 술에 취해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아랫자리 무관들을 돌아보다가 제일 말석에 있는 듯 없는 듯 끼어 앉은 승주를 발견하고는 유심히 쳐다보았다. 곽여화의 시선을 따르다가 승주에게 눈길이 꽂힌 욱이 윤 내관을 곁으로 불렀다.

“예, 폐하.”

“한 선생의 자리가 너무 멀구나. 오는 내내 승상과 함께 왔으니 가까운 곳에 자리를 마련하라.”

욱의 명에 윤 내관이 그래도 되나 싶어서 승상을 흘끔 돌아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문제라기보다…… 승상 바로 옆자리엔 좌승상이, 그 옆엔 우승상이 앉아 있는데, 누굴 밀어내야 할지…….”

비록 행궁에서 저녁밥이나 같이 드는 간소한 자리라지만 그래도 황실의 공식적인 연회인데 정 2품의 고관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노비를 앉히는 것은 지나친 파격이 아닌가 싶어서 윤 내관이 다시 생각해보십사 슬쩍 재고를 권했다. 하지만 욱은 알 게 뭐냐는 투로 고집을 부렸다.

“황궁에서 뚝 떨어진 산골짜기까지 와서 술이나 한잔씩 하자고 모인 자리에 까다롭게 격식 차릴 것이 있느냐? 아무나 비키라고 해라.”

생각하기에 아무리 황제라도 이건 아니다 싶은 일이 있으면 한 번 정도 의견은 내보지만, 그 이상 버티지는 않는 윤 내관이 그쯤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섰다.

“예, 폐하, 분부 받잡겠습니다.”

윤 내관을 승주에게 보낸 욱이 허연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이 강아지가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이러나 싶어 긴장한 허연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술만 깡으로 들지 말고, 거기 양 갈비라도 좀 뜯게. 그러다 속 버리네.”

윤 내관이 보낸 두 명의 지밀 내관들에게 붙들려서 옥좌 바로 앞까지 끌려온 승주가 좌승상이 비워준 자리를 앞에 두고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이유도 모른 채 자리를 내려앉은 좌승상은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어서 황제와 승상을 번갈아 보며 눈만 끔뻑였다. 하지만 황제는 오른편 아랫자리에 앉은 진관우를 붙들고 은혜 공주를 데려왔으면 신나게 잘 놀았을 텐데 아깝다며 다음에 영산에 가면 은혜 공주와 아기를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중이었다.

항상 예쁜 여동생 한두 명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욱에게 금란 공주와 은혜 공주는 어느 날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나 다름없었다. 둘은 허연의 사촌 누이들이니 욱에게도 더없이 소중했고, 금란 공주는 똑똑하고 매사 빈틈이 없어서 좀 어려운 면이 있는 반면 은혜 공주는 어디로 봐도 그간 머릿속에 그리던 귀엽고 만만한 여동생이었다.

성격이 거침없는 것이며 취미가 유별난 것, 예쁜 옷과 장신구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거기에 시샘 많은 것까지도 귀엽기만 한 은혜 공주가 5년이나 태기가 없어 애태웠던 것은 욱에게도 마음 쓰이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어느 날 전해진 공주의 회임 소식에 정작 남편인 진관우보다 더욱 기뻐하며 비단을 50필이나 내려서 경사를 축하했고, 공주가 영산에서 어여쁜 딸을 낳은 후에는 언제쯤 돌아와서 아기를 보여줄까 하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승주가 좌우 승상들의 눈총을 받으며 불편하게 서 있는 것이 언짢아서 공비가 아예 저쪽으로 비스듬히 돌아앉은 황제의 뒤통수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때 은혜 공주 얘기에 같이 정신이 팔려 있던 허연이 뭔가 따끔한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다가 뚱한 공비의 눈길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승주를 보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한 선생은 어려워 말고 자리에 앉게. 지난 이틀간 승상과 같이 왔으니 못한 말 있으면 마저 하라고 폐하께서 자리를 마련해주셨네.”

“참으로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소인의 천한 신분으로 어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제일 구석진 자리도 소인에게는 과분하오니,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승주가 자리를 사양하며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에 허연이 욱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욱이 입을 떼기도 전에 조양이 승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앉게. 정안군이 참석을 했으면 어차피 여기 어디쯤이 자네 자리였을 것이네.”

조양이 서슴없이 승주를 끌어 옆에 앉혔다.

“그리고 나 또한 자네와 자리가 너무 먼 것이 섭섭해서 연회가 일찍 끝나면 따로 만나 차라도 한 잔 할까 싶던 참이었네. 좌우 승상도 점잖고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지만, 수십 년 보던 얼굴이라 통 신선한 맛이 없고 대화나 논쟁도 늘 같은 말뿐이라네.”

조양이 너그러운 눈길로 승주를 보며 손수 술 한 잔을 따라서 권했다.

조양은 본래 무관 출신으로 조정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깐깐하고 앙칼진 성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진엽 장군 휘하에서 십수 년간 변방의 군막을 떠돌아다닌 전력이 있어서 화려한 저택에서 나고 자라 평생 성문 밖으로는 몇 발짝 나가보지도 않은 명문가 출신의 고관들보다는 백성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대할 때엔 고슴도치, 가시밤톨이라는 별호가 무색할 정도로 너그러운 편이었다.

조양이 별로 꺼리는 기색 없이 승주를 옆에 앉히고는 술도 따라주고 농담도 하며 긴장 풀라고 다독이는 것을 잠깐 지켜보던 욱이 그에게 어주를 내렸다.

“승상도 한 선생이 꽤나 마음에 드나 보오.”

“마음에 들다 뿐입니까? 폐하께서 한 선생을 소신의 마차로 보내주신 덕분에 지난 이틀간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그 정도였소?”

“한 선생은 서화에만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에도 능하고 시문도 절묘하고…… 변방의 정세와 백성들의 형편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어느새 기착지에 도착이라 하루가 짧은 것이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승상의 칭찬에 욱이 고개를 끄덕끄덕 끄덕였다.

“한 선생이 참으로 인재는 인재인가 보오.”

“소신의 편협한 견해로는…… 작금의 시강원의 수재들 중에서는 한 선생의 문재와 식견을 따라올 자가 없어 보였습니다.”

“허허…….”

욱이 짐짓 놀라는 척하며 손수 옥배를 채워서 이번엔 승주에게 잔을 내렸다.

“형님도, 승상도 마냥 느긋하고 편안한 성품은 아닌데 며칠간 모시고 오느라 네가 고생이 많았다.”

“고명하신 두 분 대감을 뫼실 수 있었던 것은 소인에게도 다시없을 일생의 광영이었습니다. 고생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옥배를 받아 든 승주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의문의 눈길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곤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침착하게 잔을 비웠다.

“술이 쓰냐?”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어딘지 더 울적하고 굳어 있는 승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욱이 물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소인이 술을 잘 못하는지라…….”

“대현성에 술을 못하는 자도 있었느냐?”

욱이 공비를 힐끔 돌아보며 짓궂게 물었다. 그러곤 공비가 내도록 승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는 다시 조양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참으로 기특하지 않소? 그토록 총명하고 재능이 넘치는데다 성품까지 침착하니…….”

“그렇습니다.”

“거기에 용모도 단정하고 곱상하니…… 딸 가진 자라면 누구든 사위로 삼고 싶지 않겠소?”

슬쩍 던진 한마디에 중신들이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용안을 올려다보았다. 신하 된 자들이 황제를 그렇게 노려보는 것은 크게 불경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간 황제가 기상천외한 사건을 벌여 노신들의 뒷목을 움켜잡게 만들고, 그중 적지 않은 신하들이 폐하의 기세를 감당치 못하겠다며 벼슬을 물리고 낙향, 혹은 칩거에 들어간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신들이 바짝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안군이 승주라는 자를 마음에 들어 하며 상객으로 대접하더니, 이젠 황제가 고관들이 모인 연회석에서 그를 두고 사위 운운이라 혹, 이중 만만한 누군가를 찍어서 딸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혼인 적령기의 여식을 둔 중신들은 술이 확 깬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살폈다.

노비와 고관의 딸은 월국의 신분 질서로는 서로 쳐다볼 수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사촌 형과 기녀의 혼인을 명령해서 나라를 홀랑 뒤집은 전적이 있고, 진관우에게는 속국의 공주를 둘이나 정실로 맞이하게 한데다 그 자신은 그 속국의 대장군이었던 자를 후궁에 들여 한창 깨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황제가 총명하고 과감한데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 또한 지극해서 성군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일이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별난 면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모든 중신들이 겁먹은 얼굴로 황제를 쳐다보고 있을 때, 정작 하문을 받은 조양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딸 가진 부모라면 어느 누가 한 선생 같은 인재를 욕심 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양은 슬하에 딸을 여섯이나 둔 딸부자였지만, 그들 모두 진즉에 출가해서 슬하를 떠난 후였던 것이다.

다행히 욱은 더는 승주를 두고 사윗감 운운하지도 않았고, 조양에게 없는 딸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조양을 느긋하게 쳐다보다가 잔을 들어서 중신들에게 건배를 권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잔을 비운 후, 문관들에게는 내일 오후까지 화산의 단풍을 주제로 시를 지어 올리면 그중 가장 뛰어난 작품을 골라 장원에게 비단 세 필을 내릴 것이고, 모레 사냥 대회에서 가장 큰 사슴을 잡는 자에게는 자신이 지니고 다니는 단검을 포상으로 내리겠다고 제안해서 연회 분위기를 후끈 달궜다.

무희도, 악사도 다 두고 달려온 삭막한 단풍놀이에 부족한 풍류와 여흥은 우화원의 견습 내관들이 그간 연습했던 연극과 연주, 검무, 그리고 기녀로 분장하고 나와서 시치미 뚝 떼고 춘 화관무로 넘치도록 가득 채우니 삭막한 중에도 홍운궁의 대청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형수님은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내관 아이들의 화관무가 생각보다 그럴듯해서 연신 키득거리던 욱이 곽여화에게 물었다. 곽여화의 표정이 뭔가에 놀란 듯 경황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아닙니다. 걱정은…… 이렇게 좋은 곳에 놀러 와서 무슨…….”

“형님이 계셨으면 형수님께도 비파 연주를 한 곡 청했을 텐데요.”

곽여화의 시선을 따라가던 욱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술만 홀짝이고 있는 승주를 확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폐하께서 원하시면 형님이야 있든 없든 무슨 상관입니까? 처소에 아이를 보내 비파를 가져오라 이르겠습니다.”

“그것은 황실의 지체 높은 귀부인에 대한 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사가의 형수님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렇게 예의 차리는 성격도 아니면서 자신에게는 유독 깍듯한 욱을 보며 곽여화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긴, 우화원 아이들의 춤과 노래가 이토록 흥겨우니 여기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공연히 제 가락을 섞어봐야 흥만 깨질 것입니다.”

“아이들의 어설픈 재주를 10년이 넘도록 황성의 연회석을 뒤흔들었던 형수님의 실력에 어찌 비하겠습니까? 저 아랫자리에 몰려 앉은 대현성 장수들도 먼 길 떠나기 전에 형수님의 노래 한 곡은 듣고 떠나야 할 터, 다음 연회엔 꼭 형님을 모시고 나오십시오.”

“어느 분의 명이라고 감히 거역을 하겠습니까? 다음엔 형님을 업어서라도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곽여화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또다시 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 깊도록 홍운궁의 연회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먼 곳에 나와서 한가하게 둘러앉은 중신들은 시간 가는 것이 아깝다는 듯 더욱 빈번히 술잔을 돌렸고, 개중 술이 과한 몇몇은 어전이라는 것도 잊고 술주정을 시작했다. 곽여화가 조용히 자리를 물리고 홍운궁을 나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깊은 산골짜기의 밤바람은 손발이 시릴 정도로 찼고, 중천에 뜬 반달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그런 중에 군데군데 솟아오르는 뜨거운 샘에서 더운 김이 피어올라 마치 안개처럼 발아래에 흐르니 젊었을 때에 나라 안에서 좋다는 곳은 얼추 다 다녀본 곽여화에게도 이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절경이었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로구나. 사랑하는 서방님과 이런 곳에 왔으니…… 비록 서방님은 이 경치를 함께 못 보고 처소에 뻗어 계시지만…….”

처소로 향하는 구름다리를 건너며 곽여화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등을 들고 발밑을 비추던 여종이 의아한 얼굴로 곽여화를 돌아보았다.

“마님, 기분이 울적하시옵니까?”

“아니다. 오히려 내 팔자가 너무 편해서 남들에게 미안할 지경이구나.”

한숨을 섞어 대답하고는 곽여화가 처소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초저녁부터 탕약을 먹고 나른하게 뻗어 있던 시영은 막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아서 죽이라도 한 그릇 먹을까, 아니면 서책을 볼까 궁리 중이었다. 하지만 곧 이도저도 다 귀찮고 심드렁해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고작 사흘의 원행도 버티질 못하고 몸져누운 자신의 체력이 오늘따라 원망스럽고 한심했던 것이다.

이런 곳에 와서까지 부인을 홀로 연회에 참석토록 만들다니…… 참말로 이놈의 몸뚱이가 원수로다. 오늘 연회엔 위병대 부장들과 대현성의 장수들도 모두 참석을 했을 텐데, 그들에게 비교하면 내가 얼마나 더 한심스러워 보일꼬? 그렇지 않아도 승주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던 일로 미움을 사서 화해할 일이 막막했는데…… 그런 후회와 걱정으로 끙끙 앓던 시영이 문가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곽여화가 조용히 문을 닫으며 물었다.

“아, 아니오. 좀 전부터 깨어 있었소.”

“어설픈 시각에 깨셨으니 오늘 밤은 다 주무셨습니다.”

“이런 날이 하루 이틀입니까? 책을 보든가, 생각을 하든가…….”

“하긴, 나리께서 나라 안 최고의 학자가 되신 데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겠지요.”

곽여화가 시영의 홀쭉한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연회에서 돌아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곽여화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걸어주고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주는 것이 의외라 시영이 몸을 일으켰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이 아니질 않소?”

“…….”

자신의 추궁에도 곽여화가 묵묵부답 대꾸가 없자 시영이 후다닥 침상에서 내려섰다.

“어느 놈이 부인에게 무례한 수작이라도 걸었소? 부인이 과거에 기녀였다 하여…….”

“조정의 중신들과 저는 예전부터 술자리에서 취한 척 서로 반말을 하며 친구 먹던 사이인데 이제 와서 그럴 리가 있습니까?”

“허면 무슨 일입니까?”

“나리…….”

곽여화가 아까부터 참았던 긴 한숨을 내쉬며 시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으면 당장 폐하께 달려가서 연유를 물을 것입니다.”

전에 보지 못했던 수심이며 한숨이라 더욱 수상쩍어서 시영이 엄한 음성으로 곽여화를 다그쳤다.

혹 곽여화가 그 미천한 출신으로 인해 다른 황친들이나 내외명부 부인들에게서 설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혼인한 이후 시영이 가장 마음 쓰며 걱정하던 일이었다. 그 때문에 지난 수년간 곽여화와 동행한 연회며 다과연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버텼었고, 참석이 어려울 때엔 금란 공주나 은혜 공주에게 따로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었는데…… 잠시 잠깐 경계를 늦춘 사이에 어느 놈에게 봉변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에 시영이 거친 콧바람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그런 일이 아닙니다, 나리.”

“허면 왜 말을 못합니까?”

시영의 거듭된 추궁에 곽여화가 고개를 들었다.

“말이 돌면 누구에게도 좋을 것이 없는 일이기에…… 입에 담기가 망설여집니다.”

“부인!”

곽여화가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가시처럼 마른 시영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제가 얼마 전에…… 한 선생이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것 같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납니다. 오래된 일도 아니질 않습니까?”

“그 상대가 누군지 오늘 알았습니다.”

연인과의 이별이란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은 겪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가슴이 막히고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니, 시영도 지난날 선녀처럼 홀연히 눈앞에 나타난 비파의 명인에게 한눈에 반한 죄로 독하게 가슴앓이를 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승주가 실연을 겪은 것 같다는 곽여화의 귀띔이 있은 후, 시영에게는 그가 이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전에는 승주의 타고난 성품이 조용하고 차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울적하고 풀이 죽어 있는 것이었고, 문장이 간략하고 예리한 것은 그 마음이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현성은 전란이 잦고 풍토가 거칠어서 그냥 백성으로 살기도 만만치 않은 곳인데 하물며 종살이는 그 고단함이 더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승주의 처지로는 누군가를 만나서 마음을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거기에 실연까지 했으면 마음에 상처가 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여인이었으며 어찌 만났을까? 어쩌다 헤어졌기에 그 서글픔이 열두 폭 병풍을 채우고도 넘쳐서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휑하게 만드는 것일까……. 화산에 오는 내내 사연을 한 번 물어볼까 싶기도 했었지만, 실연을 했다 함은 그 여인이 애초에 연을 맺기 어려운 상대였거나 이미 다른 이에게로 가버렸다는 뜻이었다. 이는 면천이나 출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며 시영도 어찌하지 못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아픈 사연을 굳이 캐서 뭐하랴, 살다 보면 또 다른 인연이 있을 테고 그러면 상처도 아물겠거니 싶어서 말을 아꼈었는데…….

“공비였습니다.”

뜬금없는 한마디에 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비가 또 무슨 사고라도 쳤습니까?”

“한 선생의 작품 속에 오간 곳이 없던 암기러기, 바람에 날아간 구름, 개구리 암컷…….”

“부인,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시영이 도대체 갈피를 잡지 못하자 곽여화가 에효……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때에는 그리도 총명하신 분이 어찌 이런 일엔 눈치가 한밤중이십니까? 한 선생이 잃은 정인이 공비란 말입니다.”

곽여화가 목소리를 대폭 낮춰서 정황을 있는 그대로 일러주었다. 하지만 시영은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였다.

“부인, 약주를 하셨습니까?”

“좀 했습니다.”

“아니, 무슨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서방님!”

곽여화가 버럭 소리를 쳐서 시영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곧 이 일이 지체는 하늘과 같고,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그 이해도가 백지에 가까운 시영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깨닫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곽여화가 비녀며 머리꽂이를 빼서 침상 옆 탁자에 수북하게 쌓아놓고 예복 저고리는 벗어서 바닥에 휙 던졌다. 그러곤 이불을 들추고 침상에 들어 시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지난 며칠간 심사가 단단히 틀어져서 화해를 하자면 고생 좀 하겠구나 싶던 차, 곽여화가 아무 말 없이 곁으로 다가와 자신을 끌어안자 비로소 시영이 이게 예삿일이 아니란 느낌에 말똥말똥한 눈길로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 구체적인 정황이 있는 일입니까?”

“연회에 참석하기 전에 단학정에 들러 공비가 치장하는 것을 돕다가 그간 써놓았던 글씨를 보았는데…… 한 선생의 필체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어…….”

일부러 흉내를 내지 않고서는 사람의 필체가 서로 닮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필체가 비슷하다고 해서 둘이 연애를 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싶어 시영이 입만 뻐끔거렸다.

“또한 연회석에 들어서는 대청 끄트머리만 쳐다보고 있더니, 한 선생이 승상 옆으로 옮겨 앉고부터는 또 그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랑에 빠진 사람은 보면 압니다.”

“그야 그렇지만 설마…….”

곽여화가 뭔가 오해한 것이기를 바라며 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승주와 공비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비는 대현성 영주의 외동딸이고, 승주는 노비가 아닌가? 게다가 둘은 외모가 좀…… 그리고 성격도 너무……. 

“승주도 그렇더란 말입니까?”

아무리 사람 인연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어도 설마 승주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이가 공비일까 싶어서 시영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한 선생은 공비가 그렇게 차려입고 지척에 앉아 있는데도 공비 쪽으로는 눈길 한 번 돌리지 않더이다.”

“허면 승주는 아무런 마음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마음이 없었다면 그토록 경계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5년간이나 매일 마주하고 글을 가르쳤으면 아끼는 마음이 혈육 간의 정 못지않을 터, 오늘따라 정말 아름다우시다 인사도 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난 이야기도 주고받았겠지요.”

“허…….”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 생각하며 이마를 긁적이던 시영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곽여화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게 보통 큰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싸늘하고 향기로운 아침 바람에 코를 큼큼거리던 욱이 몸을 뒤집어 곁을 더듬었다. 눈도 뜨기 전에 옆자리부터 더듬어보는 것은 언젠가부터 생긴 욱의 버릇이었다. 그러곤 아무것도 만져지는 것이 없고 옆구리가 썰렁한 것을 깨달으면 짜증을 내며 일어나는 것도 비슷한 시기에 생긴 버릇이었다.

“에잇!”

욱이 투덜거리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곧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자리에 털썩 눕고 말았다. 지난 며칠 계속된 부어라 마셔라에 이제 욱도 어지간히 지쳐서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늦잠을 자고도 숙취가 풀리질 않았던 것이다.

“폐하, 이제 기침하셨사옵니까?”

욱이 잠에서 깨어 끙끙거리는 소리를 들은 태경이가 침전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곤 아까부터 준비해서 차게 식혀놓았던 꿀물을 들고 침상으로 다가왔다.

“꿀물이냐?”

“예, 폐하. 귀인께서 차게 식혀놓았다가 폐하께서 기침하시면 바로 올리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구멍이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질 지경이라 욱이 우선 꿀물 사발을 움켜잡았다.

“귀인은 어딜 갔느냐?”

달고 시원한 꿀물 한 주전자를 다 퍼마시고 나서야 욱이 태경이에게 물었다. 

“귀인께서는 위사령과 위병들을 이끌고 사냥터를 살펴보러 나가셨습니다.”

태경이의 대답에 욱이 콧김을 내뿜으며 사발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사냥터를 살피러 나간 것이 아니고 놀러 간 것이겠지. 과인을 침상에 던져두고서 아침 댓바람부터 아주 신이 났구나.”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점심때도 좀 전에 지났습니다.”

“…….”

그 대답에 욱이 놀라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산 그림자가 길고 바람이 청량하여 이른 아침인 줄 알았는데…… 내가 온종일 뻗어 있었단 말인가? 

“귀인께서 폐하께서 그동안 퍼마신…… 아니, 다소 과음하신 것에 비해 많이 버티신 것이라며 배고프면 알아서 깨실 것이니 방해 말라고 명을 내리고 가셨습니다.”

태경이의 전언에 욱이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가뜩이나 원행도 짧은데 잠으로 하루를 다 보내다니, 이렇게 허망할 데가 있나? 그나저나…… 지금 이렇게 속이 아픈 것이 그럼 과음으로 쓰린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픈 것이었구먼.

“상궁들이 이미 수라를 다 준비해놓았으니 곧 올리겠습니다, 폐하.”

아직 어린데도 싹싹하고 일처리 능숙한 것이 마음에 들어서 욱이 부드러운 눈길로 태경이를 쳐다보았다. 

“헌데 상선은 어디 가고 네가 대리를 하느냐?”

“상선도 귀인을 따라 사냥터에 갔습니다.”

“위사령과 상선 외엔 또 누가 갔느냐?”

“공비께서도 말에 오르셨고, 무호 장군과 그 부장들도 다 따라 나섰습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만 싹 따돌리고 다들 숲으로 놀러 나간 형국이라 새삼 괘씸해서 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숙취로 인한 두통이 도져서 머리를 감싸 쥐고는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폐하, 어의를 들라 할까요?”

“술병에 침을 맞겠느냐? 뜸을 뜨겠느냐? 수라 상궁에게 일러 갈비탕이나 오리탕 같은 것 있으면 먼저 들이라고 해라. 뭐라도 먹고 속부터 달래야겠다.”

“예, 폐하.”

허연이 용화루로 돌아온 것은 해가 거의 저물 무렵이었다. 갈비탕도 몇 숟가락 못 뜬 채 상을 물리고 누워서 울렁이는 속과 지끈거리는 두통을 다스리던 욱이 고개를 돌려서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허연을 돌아보았다.

“왔는가?”

“속은 좀 어떠십니까?”

“안 좋네.”

“그러게 술을 작작 좀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뾰족하게 쏘아붙이며 허연이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종일 밖에 있다가 들어온 허연의 도포 자락에선 짙은 나무 향기, 풀 향기가 풍겨 나왔다. 몸이 안 좋아서 늘어져 있는 자신을 두고 종일 나돌아 다니다가 해가 다 저물어서야 돌아온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퉁퉁 부어 있던 욱이 그 향기에 이끌려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재미있게 놀다 왔는가?”

“놀다 온 것이 아니라 위사령이 사냥터 시찰을 간다기에 같이 갔었습니다. 지형도 파악하고 혹 매복지는 없는지, 또 다른 위험 요소는 없는지 확인을 해야겠기에…….”

허연이 고작 한나절 만에 핼쑥해진 욱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화산의 사냥터는 나도 잘 아네. 지난번 왔을 때에 한 달도 넘게 머물렀었는데 달리 할 일도 없어서 하루걸러 한 번씩 사냥터에 나갔었네.”

“숲이 넓고 울창해서 정말 좋았습니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청명하고, 붉고 노란 낙엽이 발치에 툭툭 떨어져 내릴 때엔 좀 쓸쓸하기도 하고…… 그리고 굳이 찾아다닌 것도 아닌데 사슴을 세 마리나 보았습니다.”

“화산의 숲이 넓긴 하지만…… 시찰에 온 종일이 걸렸는가?”

“숲 어귀에 빈터에 사냥 막사 세우는 것도 보고, 일행과 점심 먹고…… 무호의 부장들이 화살 과녁판을 준비해 왔기에 오랜만에 활시위도 몇 번 당겨보았습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의 입술이 점점 앞으로 튀어나왔다. 숲에서 말 달리고 사슴을 찾아다니고 사냥 천막 세우는 것 구경하고, 부장들과 점심 먹고…… 거기에 활쏘기까지 했다니 하루 종일 정말 알차게 놀았구나 싶었던 것이다. 나를 좀 깨우지, 깨워서 같이 가지…….

“진지는 좀 드셨습니까?”

허연이 삐져서 돌아누운 욱을 다시 돌려 눕히고는 다정하게 물었다.

“못 먹었네. 속이 쓰리고 아파서…… 종일 물만 마셨네.”

욱이 허연을 노려보며 칭얼거렸다.

“과인이 아파 누워 있는데 그대는 온종일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그렇게 재미있게 놀았는가? 자네가 누워 앓고 있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네.”

“폐하는 아파서 누워 계신 게 아니라 어제 자정이 넘도록 술을 물처럼 퍼 드시고 완전히 뻗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놀러 갔다 온 게 아니라 현장 시찰을 다녀온 것이고요.”

“술병도 분명히 병일세.”

욱의 대꾸에 허연이 문 앞에 서 있는 태경이를 돌아보았다.

“불러 계시옵니까?”“가서 어의를 불러오너라.”

허연의 명에 욱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 앉았다.

“어의는 왜?”

“병환이 있으시니 시료를 받으셔야지요. 술병에 달리 약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의에게는 뭔가 처방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어찌 걸핏하면 과인에게 쓴 탕약을 못 먹여서 안달인가?”

“어의를 부르는 김에 그 어리광에도 무슨 약이 있는지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허연의 핀잔에 욱이 그를 사납게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내 어리광에 무슨 약이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가?”

“이거 말입니까?”

담담하게 대꾸하면서 허연이 욱의 입술에 턱 입을 맞췄다.

허연의 입맞춤은 그 성격과 비슷해서 보통은 담백하고 짧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 입맞춤은 욱을 정신 번쩍 나게 하거나, 후끈 달아오르게 하거나, 정신이 몽롱할 지경으로 취하게 만드는 데에 어떤 탕약보다 즉각적이고 강렬한 효과가 있었다.

허연에게 입술을 맡긴 욱의 손이 그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이내 옷섶을 파고들었다. 종일 그리웠던 체향과 체온, 그리고 혀끝을 농락하는 입맞춤에 흥분한 욱이 허연의 옷고름을 잡아 뜯을 듯 거칠게 움켜잡았다. 하지만 낌새를 챈 허연이 입술을 떼고 뒤로 물러앉았다.

“왜, 또?”

종일 늘어져 있던 몸에 이제 막 뜨거운 피가 돌던 참이었는데, 허연이 제동을 걸고 물러앉자 욱이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항의를 했다.

“아직 병환 중이 아니십니까?”

“다 나았네. 아무렇지도 않네.”

“일단 요기부터 하시지요.”

허연이 달려드는 욱을 밀어냈다. 그러곤 그 짧은 사이에 문밖에 피해 있던 태경이를 다시 불렀다.

“수라 상궁에게 죽 한 그릇 들여오라고 일러라. 뭐라도 드셔야 기운을 차리시지.”

“예, 마마.”

허연은 욱의 눈 밑이 퀭하니 들어간 것이 마음에 걸려서 우선 뭐라도 먹여야겠다 싶었지만 욱에게 급한 것은 밥이 아니었다.

“왜? 왜애……? 내가 중간에 배가 고파서 제풀에 뻗을까 봐 그러는가? 내가 지금까지 침상에서 그대를 단 한 번이라도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가?”

욱이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다시 한 번 허연을 설득하며 그 팔을 끌어당겼다. 그 생떼를 못 이긴 허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욱의 품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허면, 그동안 제가 매번 대만족이었는지 아십니까?”

그 반문에 욱이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허연을 노려보았다.

“농담이라도 신중히 하게. 자칫 큰 고생을 초래하는 수가 있으니…….”

“언제나 자신만만하신 것은 정말 마음에 듭니다.”

허연이 욱을 어르며 등을 다독거렸다. 욱도 허연이 누그러진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입술을 대고 은근한 제안을 흘렸다.

“지금이라도 월성정으로 올라가는 것이 어떤가? 종일 말을 달렸으면 피곤도 할 테고, 땀도 많이 흘렸을 것이니 월성정 노천탕에서 몸도 씻고…….”

“오늘 저녁엔 선약이 있습니다.”

그 점잖은 거절에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약이라니?

“무호 장군의 초대가 있어서 저녁엔 그와 술 한 잔 하기로 했습니다.”

“뭐시라?”

“낮에 사냥터를 같이 다니며 그 휘하 부장들과도 안면을 트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무척 유쾌하고 재미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여 저녁 초대를 흔쾌히 받아들였는데, 이제 와서 안 간다고 하면 저를 얼마나 실없는 사람으로 보겠습니까?”

“아니, 하지만…….”

하루를 통으로 혼자 나가 논 것도 모자라서 다시 나가서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겠다는 허연의 통보에 욱이 기가 차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허연이 오리 주둥이처럼 앞으로 삐죽 나온 그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얼굴만 비추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무호와 부장들이 단풍놀이 장소로 찍은 곳은 별궁에서 한 식경 정도 내려온 계곡 아래쪽의 자갈밭이었다. 머물고 있는 별궁의 전각도 넓고 편안했지만 평소 하던 대로 진탕 마시고 떠들기엔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마침 별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20~30명 정도 나와 놀기 적당한 터도 있고 뜨끈한 물이 솟는 샘도 있어서, 무호의 부장들은 사냥터에서 돌아오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터를 고르며 단풍놀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차려놓고 보니 여기가 다시없는 명당입니다, 형님.”

대강 바닥을 고르고 들고 온 평상을 붙여 자리를 만들고 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위치가 좋아서 영재가 무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앞에는 맑은 계곡물이 콸콸 흐르고, 머리 위론 수백 년 된 단풍나무의 큰 가지가 드리워져 새빨간 주렴을 내린 형상인데다 금상첨화, 바로 곁에는 뜨거운 물이 솟는 온천까지 있으니 술 마시고 단풍 보고, 술 마시고 온천을 하기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화산 인근의 숲은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낙엽송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곳곳에 자리 잡은 낙엽송의 군락은 한낮의 햇빛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했다.

가지가 사방으로 구름처럼 뻗은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가득한 숲은 그 안에 들어가 숲길을 거닐 때엔 마치 이불을 덮은 듯 포근했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눈앞을 가리며 떨어질 때엔 거칠고 메마른 사내들의 심장조차 만추의 정취에 젖어들었다.

“숲에 나간 김에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 올 걸 그랬습니다. 단풍놀이에 통돼지 구이가 없다니…….”

춘수가 막 피운 모닥불을 들여다보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홍운궁 조리각에서 안주거리를 산같이 보내왔는데 뭐가 또 부족하냐? 그냥 있는 대로 차려놓고 대강 먹자.”

그간 성벽 위에서 흙바람 맞으며 고생만 하다가 난생처음 이런 별천지에 와서 맛있는 음식에 좋은 술, 뜨끈한 온천까지 눈앞에 두고는 일곱 살짜리 어린 아이처럼 들떠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장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무호가 퉁명스레 한마디를 던졌다.

“하긴, 이렇게 좋은 곳에 형님 계시고 딴 놈들도 있는데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여기서라면 계곡 물만 퍼 마셔도 취하겠습니다.”

춘수가 너스레를 떨면서 옆에 놓인 술동이에서 술을 한 바가지 떴다. 그러곤 별생각 없이 제 입으로 가져가다가 무호의 눈치를 보고는 표주박을 얼른 내밀었다.

“먼저 한잔 하십시오.”

“손님을 청해놓고 먼저 술잔을 들어서야 쓰겠느냐?”

무호가 계곡 위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러곤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춘수가 제 입으로 가져가려던 표주박을 낚아챘다.

“손님을 기다린다면서요?”

무호가 잔뜩 목이 탔던 것처럼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자 춘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해보니 못 올 수도 있겠구나.”

“온다고 했으니 오겠지요. 저희들이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평상을 들고 와서 펴고, 반나절이나 삽질을 해서 노천탕을 만들었는데…….”

춘수가 대현성에서 참호 파고 성벽 쌓던 실력을 십분 발휘해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놓은 노천탕을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계곡 옆에 뜨거운 물이 솟아나고는 있었지만 그 앞에는 장정 대여섯 명 들어가면 꽉 찰 만한 작은 구덩이뿐이라서 춘수와 다른 부장들이 꼬박 반나절간 삽질을 하고 주변에서 넓적한 돌을 가져다 마감까지 곱게 해서 노천탕 하나를 새로 만들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웅덩이는 스무 명 정도 한꺼번에 들어가 물장구를 쳐도 될 정도로 넓고 번듯했다.

“네놈들 들어가서 놀자고 그 수선을 떨었던 것이 아니었느냐?”

무호의 물음에 춘수가 손을 내저었다.

“귀찮게 무슨……. 저희야 씻고 싶으면 그냥 계곡에 들어가면 그만이지, 고작 따뜻한 물에 몸 좀 담그자고 그 삽질을 했겠습니까?”

“그자가 온다고 해도 술이나 한 잔 들고 돌아가겠지, 네놈들과 함께 목욕을 하겠느냐?”

무호의 말에 춘수가 모르는 말씀 하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 오면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노천탕에 앉아서 별 구경도 하며 밤새 놀아야지, 겨우 술 한 잔 먹여서 보내는 것은 손님 대접이 아닙니다.”

춘수의 대답에 무호가 수상쩍다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별로 달가워하지도 않는 사람을 붙들고 저녁에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그렇게 보채더니…… 무슨 꿍꿍이가 있었더냐?”

무호의 은근한 추궁에 춘수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듣던 얘기하고는 달리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오래 병영에 있던 자라 말도 잘 통하기에 마음에 들어서 그럽니다.”

“데려다가 못된 장난이라도 칠 생각이면 접어라. 네놈들이 만만히 보고 덤빌 자가 아니다.”

“아니라니까요?”

춘수가 너스레를 떨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쪽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기척에 무호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계곡 모퉁이를 돌아 내려온 사람은 허연이 아니라 술동이와 음식 바구니를 든 내관들이었다.

평상 위에 술상을 차리던 부장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술과 안주에 반색을 하며 달려 나가 내관들을 맞았다.

“아니, 저건 통돼지와 통오리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피워놓은 모닥불이 아깝던 참인데, 참으로 황은이 망극도…….”

공연히 수선을 피우며 춘수가 얼른 자리를 떴다. 하지만 무호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그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아니라니까요?”

“귀신을 속이지, 네놈들이 나를 속이려 드느냐?”

“골탕을 먹이려는 게 아니라 저희는 그냥…….”

춘수가 무호의 손아귀에서 옷깃을 잡아 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 형님을 하룻밤 정도 폐하 옆구리에서 떼어놓았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춘수의 대답에 무호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귀인은 우리하고 하룻저녁 재미있게 놀고, 수진 아씨는 폐하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면…….”

“…….”

“그 형님이 아는 것도 많고, 성격도 점잖고…… 참 좋은 사람인 것은 확실하지만 본시 수성전의 귀재라 궁에 들어서도 예전 버릇을 못 버리고 폐하 주변을 철통같이 방어하는 통에 황후비빈이 모두 독수공방 신세가 아닙니까? 그저 소문으로 들었을 때엔 그 심각성을 잘 몰랐는데 여기까지 오는 내내 어가에 붙어 앉아서 폐하께서 한눈파실 틈을 안 주니…… 이 좋은 곳까지 와서 폐하와 하룻밤 지내지도 못한다면 아씨 입장은 뭐가 됩니까? 우화원 형님도 양심이 있으면 이런 데 와서는 모른 척 며칠 비켜주는 것이…….”

“네 생각엔 수진이가 황궁의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 그자 때문인 것 같으냐?”

무호의 울적한 물음에 춘수가 발끝으로 자갈을 툭툭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이유는 따져 뭘 합니까? 어차피 아씨는 첩지를 받아 후궁에 드셨으니 어떻게든 그 안에서 잘 지낼 방도를 찾아야지요. 다행히 폐하께서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이시고, 슬하에 황손을 두고 잘 지내는 후궁들도 없지 않으니…… 아씨도 최소한 그렇게는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춘수는 영재와 더불어 무호의 오랜 측근이었고 공비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꼭 제 오라비를 닮아 솔직하고, 겁 없고, 거칠고, 고집 세기는 늙은 황소가 고개를 내저을 정도라서 승주를 잊고 황제에게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공비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난번 무호를 따라 궁에 들었다가 공비가 황제를 거절하고 독수공방을 자청한 사정까지 알게 되었을 때엔 춘수뿐 아니라 모든 부장들이 당황했고, 그녀를 두고 다시 대현성으로 돌아갈 걱정에 마치 납덩이를 얹은 듯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 때문에 마침 좋은 곳에 나왔으니 허연을 며칠 빼돌려 공비가 황제와 같이 있을 시간을 마련해주자고 의논을 모은 것이었다.

“지난 며칠간 가만 살펴보니 수진이도 황제께 마음이 없고, 황제께서도 수진이에게 아무 관심이 없으시더구나. 너희들 마음은 고맙지만…… 이런다고 수진이 팔자가 나아지겠느냐?”

“형님…….”

무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어둡고 울적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의 풀 죽은 모습에 춘수가 당황해서 흠, 흠 헛기침했다.

“어제 저녁 연회에 나온 수진이의 모습을 너도 보지 않았느냐?”

“보다 뿐입니까? 얼마나 곱고 예쁘시던지, 저는 잠시 아씨를 못 알아보았었습니다.”

춘수의 호들갑스러운 대답에 무호가 더욱 착잡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고 있는 옷도 곱고, 올린 머리도 전에 없이 잘 어울리고……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어 그런가, 아니면 어제따라 화장을 잘해서 그런가,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어찌나 예쁘던지, 나는 수진이에게서 눈길도 떼어지질 않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여자는 좀 가꾸고 꾸며야…….”

“헌데 폐하께서 수진이를 보는 눈길은 강가에 굴러다니는 자갈을 쳐다보듯 무심하기 이를 데 없으셨다. 내도록 뭐에 홀린 분처럼 우화원 귀인만 힐끔거리셨지, 수진이는 안중에도 없으시더구나.”

얼핏 담담한 듯, 실은 한없이 울적한 무호의 한탄에 춘수가 뭐라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주변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화산으로 오는 내내 무호는 황제와 공비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황제는 이번 원행에 후궁 중에선 공비만 동행을 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사내의 복색으로 종일 말을 타고 돌아다녀도 한 마디 주의나 만류가 없었다. 좋게 생각하면 황제가 공비를 사랑하고 아끼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호가 보기에 이는 그저 무관심일 뿐이었다.

그래도 무호는 황제와 누이의 사이가 아주 가망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공비가 궁에 들어서 한 짓이 있으니, 게다가 최근 들어서 연거푸 험한 꼴을 보였으니 황제께서 저 천둥벌거숭이의 어느 구석을 예쁘게 보실까 속으로 한탄하며 이제라도 철이 들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무호가 그간 공비를 붙들고 잔소리도 하고 야단도 쳤던 것은 그녀가 여염집 부인들처럼 차분해지면 황제의 태도도 바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일로 그녀가 궁에서 살아남는 길은, 여인으로서 행복해지는 길은 오직 그뿐이었다. 하지만 무호의 그런 희망은 공교롭게도 공비가 평생 본 중 가장 곱게 차리고 나왔던 지난밤 연회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황제는 결코 공비에게 예를 잃지 않았었다. 오늘따라 예쁘다고 칭찬도 하고 술도 한 잔 직접 따라서 건네고, 하고 싶은 일은 뭐든 눈치 볼 것 없이 하라고 배려하면서 중신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후도, 다른 비빈도 없는 연회석에서 공비는 황제의 유일한 아내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황제가 공비에게 보여준 것은 오직 예의뿐이었다.

황제가 애정이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는 이는 공비가 아니었다. 일거수일투족 신경을 쓰며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눈치를 살피는 이도 공비가 아니었고, 거나하게 취해서 얼굴이며 목덜미를 더듬으며 수작을 건넨 이도 공비가 아니었다.

어차피 나라 안에 황제와 허연 사이를 모르는 백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와중에 총애를 받는 후궁도 있고 자식을 둔 후궁도 여럿이니 누이도 그렇게는 살겠거니 생각하며 무호도 처음엔 담담히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취기가 오를수록 그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착잡해지기만 했다. 황제 옆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생뚱맞게 앉아서 연신 승주만 힐끔거리는 그 모습이 마치 누이의 지난 3년을 보는 것 같았고, 한없이 서글프고 쓸쓸할 앞으로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변방에서 성벽이나 지키는 무부의 딸이 황제의 후비로 낙점을 받았다 했을 때엔, 그것이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 일신의 광영이라 궁에만 들면 평생 귀한 신분으로 대접받고 살 줄만 알았는데…… 참으로 쉽지 않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씨의 나이 이제 스물입니다. 한창 꽃 같은 때이니 이제라도 폐하의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다 구차하고 싫다.”

“형님…….”

공비의 일로 마음이 단단히 상해서 끙끙거리는 무호를 앞에 두고 춘수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무호가 벼락같이 화를 내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사람을 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낙심한 모습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제라도 첩지를 물리고 수진이를 집으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으면 좋겠구나.”

맥없이 중얼거리며 무호가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춘수가 화들짝 놀라서 무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혀, 형님…….”

춘수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본 무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다가온 허연이 지척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 늦었습니다. 저 때문에 저녁이 많이 늦어지셨습니까?”

무호에게로 다가서며 허연이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딱 시간 맞춰서 오셨습니다.”

무호의 무뚝뚝한 대꾸에 춘수가 얼른 그를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형님, 이제 오셨습니까? 저는 형님이 폐하께 붙들려서 못 나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온다고 했으면 오는 것이지, 길이 먼 것도 아닌데 못 올 까닭이 있겠는가? 단지…… 종일 전각을 비웠더니 이것저것 밀린 일이 있어서 정리를 하고 나오느라 좀 늦었네.”

욱이 속 쓰리고 아프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침상 옆에 붙들려서 죽 한 사발을 다 떠먹이고 오느라 늦은 것이지만 일일이 설명하기엔 남부끄러운 일이라서 허연이 대강 얼버무리고 모닥불이 활활 피어오르는 평상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모닥불도 이제 막 피웠고, 폐하께서 특별히 내려주신 통돼지와 오리도 당도했으니 뭐 그렇게 늦으신 것도 아닙니다.”

춘수가 허연을 저녁상 차려놓은 평상 쪽으로 안내했다. 부장들이 차린 저녁상은 홍운궁 수라청에서 보낸 황궁의 연회 음식과 부장들이 주변에서 구한 재료로 직접 만든 투박한 산골 음식이 뒤섞여서 산만하고 어수선했다. 하지만 삼시 세 때 올라오는 부드럽고 섬세한 요리에 다소 질려 있던 허연은 연회 음식 중간중간에 섞여 있는 거친 산채와 얼큰해 보이는 찌개가 반가워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형님께서 노상 데리고 다니던 그 귀엽고 인상 까칠해 보이는 내관은 어딜 갔습니까?”

어린 내관들 서너 명만 뒤를 따르고 있을 뿐, 바늘귀에 꿰인 실처럼 항상 허연 곁을 졸졸 따라다니던 고 내관이 보이질 않자 춘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은 낮에 말을 탔던 것이 힘들었는지 피곤해하기에 처소에서 쉬라고 일렀네.”

“아, 그렇습니까?”

그것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춘수가 히죽 웃었다. 허연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고 내관이 그 곁에 찰싹 붙어서 만만치 않게 구는 것이 거슬렸고, 자신들과 허연이 길게 노는 것을 훼방 놓을 공산이 커서 만일 같이 와도 수를 써서 따돌릴 궁리를 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춘수가 허연에게 머리 위로는 새빨간 단풍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앞은 탁 트여서 계곡이 시원스레 내다보이는 좋은 자리를 권했다. 그사이 영재는 무호를 잡아끌어서, 개울을 등졌으며 계곡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은 정통으로 맞고 뵈는 것이라곤 허연의 얼굴밖에 없는 맞은편 자리에 밀어 앉혔다.

“형님처럼 귀하신 분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춘수가 큰 대접에 술 한 잔을 가득 따라서 허연에게 깍듯이 올렸다.

“듣기 민망하니 자꾸 그러지 말게.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겸손하시기는…… 대현성 같은 촌구석에도 연주국 대장군 허연이라 하면 천하에 당할 자 없는 명장에 지략가로 명성이 높아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제 나라를 지키며 그만한 명성을 얻었으면 대단한 것이지, 무슨 명예를 더 바라겠습니까?”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춘수의 아부에 허연이 술 한 잔 들기도 전에 얼굴을 붉히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명성이 진짜 그렇게 번듯하고 명예롭기만 한 것인가? 최근엔 다른 일로 더 구설이 많을 듯싶은데…….”

허연의 반문에 술자리 분위기가 일순 싸늘하게 식었다. 허연의 말대로 요즘 연주국에서 돌고 있는 그에 관한 소문이라곤 온통 부정적이고 음험한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어…… 저, 그것은…….”

오늘 밤 어떻게든 허연의 비위를 맞춰서 밤새 붙들어놓을 계획을 세워놓기는 했지만 실상 대화에 있어 재치와 순발력은 다소 떨어지는 춘수가 말문이 막혀서 눈만 끔뻑거렸다. 그때, 저녁 내내 별말 없이 상만 차리던 영재가 갑자기 손을 들어 허연의 등짝을 빡 소리가 나도록 내갈겼다.

“형님도 참…….”

영재가 허연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으며 들으라는 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것들이 심심해서 지껄이는 헛소리를 저도 듣기는 들었습니다만…… 형님 같은 대인께서 뭐 그런 일에 신경을 쓰고 그러십니까?”

“아니, 나는 뭐 그렇게 신경을 쓴다기보다…….”

“저희도 형님을 직접 뵙기 전까지 오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소문으로 듣던 그자는 형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형님의 인품과 진면목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폐하가 아시고 또 저희가 알면 그만이지 쥐뿔도 모르는 놈들이 뭐라 지껄이건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허연이 허허 웃으며 불시에 얻어맞아 화끈거리는 등을 긁적였다.

허연과 부장들의 술자리는 처음엔 다소 점잖고 서먹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술이 사발로 몇 차례 돌고, 화제가 이런저런 세상사를 거쳐 지난번에 있었던 천운상단 주최 무술 대회로 넘어가자 비로소 술자리에 생기가 돌고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구름조차 고갯마루를 수월히 못 넘어 몇 날 며칠 머뭇거리는 깊은 산골에서 나고 자란 제가 보고 들은 것이 뭐 그리 변변하겠습니까? 그 산골에서 우리 큰형님의 부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나도 칼 좀 휘두른다고 자신을 했었는데, 지난번 그 대회에서 여러 가지로 참 많이 배웠습니다.”

지난 무술 대회를 생각하면 아직도 입맛이 쓴 춘수가 술잔을 훌쩍 비우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지난 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실력이 비슷한 무사들 간에 검을 겨루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이지.”

허연이 춘수를 위로하며 그 빈 잔을 채웠다. 그때 영재가 옆에서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형님 눈에는 이놈과 그자의 실력이 비슷해 보이셨습니까?”

영재의 물음에 허연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엇비슷해 보이더구먼.”

“이제 보니 마음에 없는 말씀도 천연덕스럽게 잘하십니다.”

영재의 핀잔에 연회석에 둘러앉은 부장들이 일시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 비웃음에 춘수가 씩씩거리며 부장들을 노려보았다.

춘수는 자타공인 무호의 오른팔인데다 기운과 무공에서도 왼팔을 자처하는 영재와 엎치락뒤치락했고 대현성과 그 인근에서는 당할 자 없는 무사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 까닭으로 춘수도 스스로의 무공과 경력을 믿고 우승을 맡아놓은 양 자신만만하게 무술 대회에 참가를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천하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 새파랗게 젊고 체격도 자신의 반절인 상단 호위 무사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한 이후 동료들은 시도 없이 그 일을 들먹이며 춘수를 놀리고 갈구기에 바빴고, 그로 인해 춘수 자신도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춘수 아우님의 상대였던 자는 지한이라고…… 천운상단의 단주가 몇 년간 개인 경호 무사로 데리고 다녔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자라네. 천운상단에 소속된 무사가 3천에서 5천이라는데 그들 중 수석 무사의 자리에 올랐으니, 잘은 모르겠으나 실력대로 줄을 세워도 그 무공이 나라 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지 않겠는가?”

허연이 춘수의 등을 툭툭 다독거리며 언짢은 그 심사를 위로했다.

“그자의 실력이 그 정도입니까?”

검객이나 무용담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영재가 허허 감탄을 토해내며 몸을 허연 쪽으로 바싹 기울였다.

“내가 보고 들은 바로는 그렇지 않을까 싶네. 또한, 비슷한 실력을 가진 무사들 간에 한 번 승부로 어찌 누가 더 낫고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졌어도, 내일 또다시 검을 섞으면 누가 이긴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승부일세.”

허연의 계속된 다독임에 춘수가 살짝 기운을 얻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영재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 경기를 두 눈 부릅뜨고 보았는데,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허, 아무리 허물이 없다고 해도 친구를 그렇게 놀리는 것이 아닐세.”

계속된 딴지에 허연이 눈치를 주며 영재를 나무랐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무술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은 아니라서 영재가 그쯤에 춘수 놀려먹기를 중단하고 자신의 관심사로 화제를 돌렸다.

“형님께서는 그 지한이란 자가 나라 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사라고 하셨는데, 허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사는 누가 있습니까?”

영재의 물음에 허연이 머릿속으로 몇몇을 떠올리며 줄을 세워보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좁은 곳에 틀어박혀 세상을 잊고 사는 사람인데 그런 것을 어찌 알겠는가?”

“아무리 궁에만 계신다고 해도 형님은 황성 복판에 계시질 않습니까? 수천 리 밖 변방에서 성벽 너머 들판만 쳐다보며 사는 저희들보다는 보고 듣는 것이 많으실 터…….”

“그런 일이라면 휘명전 상선 윤 내관이 소상히 알 것이네. 폐하의 호위대장인 정 내관도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지 수년 지났지만 관심은 여전하니 많이 알 것이고…….”

그도 그렇겠지만, 지금 부장들의 목적은 나라 안 최고의 무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허연을 자신들의 술자리에 되도록 오래 붙들어두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영재가 더욱 허연 쪽으로 몸을 붙이며 친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전 호위대장 정 내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자가 정말 그렇게 엄청난 실력자입니까? 한창때엔 5~6년간 검술 대회를 쓸고 다녔다던데…… 그자가 폐하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호위대장이니 형님과도 친하고 그 실력도 잘 아시겠습니다.”

영재의 물음에 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지. 그 사람이 황성 안에서는 손꼽히는 거구인데, 체격이 그렇게 커도 움직임이 제비처럼 날렵하고 힘은 단칼에 바위를 능히 쪼개고도 남을 정도라네. 정 내관이 장터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지는 수년이 지났으나 그것은 이제 나이가 들어 성격이 차분해진 탓이지 무공과 기운이 전 같지 않아 그런 것은 아닐세.”

허연의 대답에 부장들이 입을 맞춰 오우……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형님께서는 정 내관이 검술 대회에 참가한 것을 직접 보셨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와 대결하는 것이라도…….”

“휘명전 근위대의 훈련은 상당히 엄격하고 거친 편일세. 정 내관도 병사들과 같이 훈련을 하며 대검을 종종 하고, 나도 구경은 몇 번 했네.”

“허면 정말 세간에 알려진 대로 무적무패의 실력입니까? 위병대도 걸출한 무사들만 추리고 추려 모아놓은 곳이 아닙니까?”

이어진 부장들의 물음에 허연이 고개를 저었다.

“정 내관이 휘하 부장들과의 대결에서 패하는 것은 본 적이 없네.”

그토록 경쟁이 치열한 무술 대회 5연패라는 경력부터 범상치 않은데 위병대 무사들과의 대검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말에 부장들이 다시 한 번 진심에서 우러나는 탄성을 올렸다. 부장들 모두가 검깨나 휘두른다는 무사들인데다 호기심도 강하고 승부욕도 남다른 성품이었다. 게다가 모두 지난 대흥루 주최 무술 대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목격한 터라 정 내관의 경력과 실력이 더욱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걸출한 무인이 지척에 있는데 그 실력을 한 번 보고 가지 못해서 아쉽다, 우리 큰형님하고 덩치도 비슷하던데, 한 번 붙여보면 승부가 어찌 될지 궁금하다, 큰형님도 대현성 일대에선 산중호라고 불리며 위명이 떠르르하지만 실상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냐, 그렇게 큰 대회 5연패에 부장들과의 대결에서도 전승이면 그야말로 천하제일 검이 아닌가…… 술기운과 흥분이 더해져서 술자리가 대번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부장들 틈에 끼어 고기 안주를 부지런히 집어 먹던 환이와 명이가 어수선한 대화에 톡 끼어들었다.

“정 내관 나리께서 무예가 출중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맞습니다. 위사령으로 계신 진관우 대장님과도 엎치락뒤치락하시고, 저희 마마께서도 정 내관 나리와 대결해서 이기신 적이 있습니다.”

두 아이들의 자랑 섞인 참견에 술자리가 일순 찬물을 부은 듯 조용해졌다.

갑작스레 자신에게로 부장들의 번뜩이는 시선이 쏠리자 허연이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며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공연한 말을 꺼낸 환이와 명이에게 슬쩍 눈총을 보냈다. 하지만 두 아이들은 우리가 없는 소리 했느냐, 틀린 말 했느냐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시 바삭한 오리 껍질을 벗기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형님…….”

영재와 춘수가 양옆에서 무릎을 꿇고는 초롱초롱한 눈길로 허연을 쳐다보았다.

“20년 가까이 폐하의 호위대장을 지내고 있으며, 무술 대회 5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는 정 내관을 정말 형님께서…….”

“그날 운이 좀 따랐던 것뿐일세.”

허연의 대답에 부장들이 이젠 거의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기셨단 말입니까? 그게 정말 사실이란 말입니까?”

“딱 한 번 이겼네.”

“허면, 그다음엔 지셨습니까?”

“그 한 번밖에는 기회가 없었네.”

허연의 대답에 춘수와 영재가 꺄악 하고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허면 전승이 아닙니까?”

“…….”

“형님, 그 얘기 좀 자세히 해주십시오. 그날 무술 대회에서 날아드는 검을 잡아챘을 때부터 보통 분이 아니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이셨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있었으면 말씀을 좀 하시지, 어찌 그렇게 조가비처럼 입을 꽉 다물고 계신단 말입니까? 형님은 겸손도 지나치고 과묵도 지나치십니다.”

부장들의 호들갑에 말문이 막힌 허연이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웅덩이 쪽으로 무심히 눈길을 던졌다.

아직까지도 얼얼한 속을 달래기 위해 더운 고깃국물을 홀짝홀짝 마시던 욱이 문밖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밤나들이 나갔던 허연이 돌아왔나 하는 기대와는 달리 문밖에서 들려온 것은 공비마마 드셨다는 전언이었다.

“아니…….”

욱이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공비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이 시각에 네가 어쩐 일이냐?”

“그냥…… 옥체는 좀 어떠신가 하여 들렀습니다.”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공비도 욱을 멀뚱히 마주 보았다. 

“네가 언제부터 과인의 옥체에 관심을 가졌더냐?”

“딱히 관심은 없습니다.”

공비의 시원스러운 대꾸에 마음이 놓인 욱이 공비에게 의자를 권했다.

공비가 후궁에 든 것이 3년도 전의 일이었지만 둘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같은 방에 있었던 적은 없었다. 굳이 기억을 더듬자면 공비가 입궁한 직후 초야를 위해 그녀의 궁을 찾았다가 처음으로 소박을 당하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린 그날 정도가 날 저문 이후 둘이 마주 앉았던 유일한 때였다.

“상선 밖에 있는가?”

어쩐지 둘만 한 방에 있는 것이 어색해서 욱이 공연히 윤 내관을 불러들였다. 공비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여느 때처럼 문가에 귀를 바싹 붙이고 있던 윤 내관이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불러 계시옵니까?”

“공비께 차 한 잔 올리게.”

“예, 폐하.”

윤 내관이 대답을 하고는 냉큼 방을 나갔다. 침실 옆 서재 선반에 다구가 다 있으니 물만 데워서 차 한 잔 내오면 될 것을 눈치도 없다 생각하며 욱이 또다시 국그릇을 집어 들었다.

“오늘 오라비와 사냥터에 같이 나갔었더냐?”

“예.”

“한 선생도 보았느냐?”

“…….”

“못 보았느냐?”

“어찌 자꾸 승주의 일을 거론하십니까? 폐하께서 무심히 한마디 하시는 것만으로도 승주는 목숨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승주의 신분은 미천하지만 인명은 중한 것이니 그러지 마십시오.”

공비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욱이 뻘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궁금한 걸 물어보지도 못하느냐? 그놈이 뭐라고…….”

“같이 가기는 했으나 승주는 내도록 뒤에 뚝 떨어져서 일행을 따라왔고, 오라버니 눈치가 보여서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놈이 그리 좋으냐?”

욱의 직설적인 물음에 공비의 눈길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 눈빛만으로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욱이 흠…… 헛기침을 했다. 성품이 제아무리 대담하고 두려움을 모른다고 해도 이렇게 나오면 욱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 공비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왜?”

“소인이 앞으론 성질 죽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잠잠히 살면서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일절 만들지 않겠습니다. 또한 소인이 승주를 마음에 두었다고 해봐야 이제 다시는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다를 것이 없질 않습니까? 허니 그 일은 그만 덮어주십시오.”

“그 말을 하려고 왔느냐?”

그간도 칠궁에서 가장 후미진 전각에 갇혀 갑갑하게 지냈는데, 앞으론 성질까지 누르고 아예 죽은 척 살겠다는 말이 전에 없이 처연하게 들려서 욱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폐하께서 편찮으신데 유일하게 동행한 후궁이 되어 어찌 곁에서 옥체를 보살피지 않느냐고 주변에서 하도 성화를 해서 떠밀려 들어왔습니다. 말씀은 폐하께서 먼저 꺼내신 것이고요.”

“그렇구나.”

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용히 쉬시는 데 소인이 방해가 되었습니까?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차나 한 잔 들고 가거라. 서둘러 돌아가봐야 빈 처소가 아니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라비 떠날 날이 이제 코앞이니 너도 속이 말이 아니겠구나.”

욱의 언급에 이제 불과 며칠 후면 오라비도, 부장들도, 그리고 승주도 까마득히 먼 고향으로 가버리고 자신은 또다시 덩그러니 홀로 남는 현실이 실감이 나서 공비가 울컥 치미는 울음을 힘들게 삼켰다.

그런 공비의 모습에 덩달아 싱숭생숭해진 욱이 빈 국그릇을 공연히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예전에 허연을 고향으로 보내주기로 약조한 후, 떠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자작자작 타들어가던 그때의 심정도 새삼 생생하고, 생살을 베어내듯 아프게 그를 보내고 나서 몇 달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마당을 서성이며 달구경 하는 척 서쪽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던 일도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 한 울타리 안에 같은 고통을 겪으며 가슴을 잡아 뜯던 이가 또 있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성질 사납다, 난폭하다 못마땅히 여기며 나무라기만 했으니…….

욱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공비를 힐끔거리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마침 공비에게 대접할 차를 소반에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오던 윤 내관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어딜 가시옵니까? 공비마마는…… 그리고 차는…….”

윤 내관의 물음에 욱이 공비를 돌아보았다.

“같이 나가자. 나가서 바람도 쐬고, 네 오라비가 차린 술판이 지금쯤 한창일 터, 거기 가서 목이나 축이자.”

산골짜기에서 불어온 바람이 계곡을 거칠게 쓸고 내려갔다. 깊은 가을의 밤바람은 제법 차서 어깨가 시릴 정도였지만 허연은 오히려 긴 숨을 몰아쉬며 차고 맑은 가을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술도 어지간히 오른데다 약간 뜨끈하다 싶을 정도의 온천물에 온몸을 담그고 있던 그에게는 밤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허면 형님, 위사령 진관우와는 한 번도 검을 겨루어본 적이 없으십니까?”

춘수가 빈 잔에 술을 채워 허연에게 건네며 물었다. 술도 여러 순배 돌아서 분위기도 느긋하게 풀리고, 밤바람도 어지간히 차가워진 후라서 허연과 부장들은 옷을 훌훌 벗고 노천탕에 들어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같이 온천욕이나 하자는 춘수와 영재의 권유에 허연은 처음엔 다소 망설였었다. 하지만 정작 옷을 벗고 물에 들고 보니 어렸을 적, 친구들과 사막을 쏘다니며 낮에는 말 달리고 밤에는 더운물이 솟는 샘을 찾아 멱 감고 놀던 기억도 떠오르고, 무호의 부장들이 그 시절 친구들 같아서 마음은 오랜만에 추억에 잠겨 아련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큰일 날 소리! 진 대장은 내 소중한 누이들을 둘이나 모시고 사는 매부일세. 그런 사람과 어찌 장난으로라도 검을 섞겠는가?”

허연의 대답에 춘수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춘수와 영재는 처음엔 공비를 위해 시간을 빼줄 요량으로 허연을 청해 대접을 했지만, 이제는 그 무공과 점잖으면서도 호방한 성품에 마음이 동해서 진심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형님은 그런 자와 겨뤄서 형님의 무공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없으십니까? 저희 큰형님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문 앞을 큰 검 차고 지나가는 자만 보면 불러 세워서 시비를 걸곤 했었습니다.”

춘수의 고자질에 허연이 허허 웃으며 무호를 쳐다보았다. 무호는 부장들의 강권을 못 이겨 바지를 걷고 발만 담근 채 웅덩이 턱에 앉아서 별로 말도 없이 술잔만 연거푸 비우고 있었다.

“우리 큰형님은 영주 아들에, 덩치 크고 검 좀 휘두른다고 자랑에 유세가 눈꼴이 실 지경인데, 형님께서는 왕족에 대장군까지 지내신 분이 참으로 점잖고 너그러우십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이지, 젊었을 때엔 실수도 많이 했네.”

“또, 또 없는 말씀 하신다…….”

춘수가 허연의 벗은 등을 철썩 갈겼다. 솥뚜껑만 한 손바닥에 차지게 얻어맞은 허연이 윽…… 하는 신음을 입안으로 삼켰다.

“실은 우리 큰형님도 검으로든 맨주먹으로든 누구와 붙어 진 적이 아직 없으니, 저는 형님과 우리 큰형님이 대결을 하면 누가 이길지 그것도 무척 궁금합니다.”

영재의 은근한 도발에 허연이 당황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 말게. 내가 어떻게 상장군을 상대로 검을 겨뤄서 이기겠는가?”

“정 내관도 이기셨으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 큰형님이야말로 덩치만 산 같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는 산골 무사입니다.”

“어허…….”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언짢은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어두운 얼굴로 술만 들이붓고 있는 무호의 눈치를 살피며 허연이 영재에게 물을 튕겨 보냈다. 하지만 영재는 도리어 허연 곁으로 다가와서 얼굴을 바짝 붙였다.

“그러지 마시고 형님, 내일 사냥이 끝나면 여흥으로 검도 한 번 겨뤄보시지요. 상대는 꼭 저희 형님이 아니라도 신청자들 중에 제비뽑기로 정하고…….”

“그건 아우님들끼리 그렇게 하시게. 나는 구경이나 하겠네.”

“아이, 형님…… 그러지 마시고…….”

거듭 보채며 춘수가 허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연주국 대장군 허연의 지략과 무공은 병영의 장수들과 무인들 사이에서 전설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그 실력을 직접 확인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우님, 내 나이가 이제 마흔일세. 이 나이에 대결은 무슨…….”

한 번 더 거절의 뜻을 명확히 하며 허연이 슬그머니 몸을 뺐다. 하지만 그 바람에 바로 등 뒤에 있던 영재와 부딪혀서 그 무릎에 주저앉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허연은 10대 때부터 병영에서 자라다시피 한 까닭에 동료들과 같이 목욕을 한다든가 몸을 부딪치는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연유로 같이 노천욕이나 하자는 부장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물에 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욱과의 관계로 사내들 간에도 얼마든지 음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라 비록 실수라도 이런 접촉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가시에라도 찔린 듯 몸을 일으켰지만 고르지 않은 돌바닥을 딛고 미끄러져서 이번엔 앞에 있던 춘수를 덮치고 말았다.

“형님, 왜 이렇게 허둥거리십니까? 진정하십시오.”

앞으로 넘어지는 허연을 받아 안은 춘수가 그 등을 다독거리며 허허 웃었다.

“아, 나는…… 내가 술이 좀 과했던 모양일세.”

공연히 이 사람 저 사람 치고 혼자 허우적거린 것이 민망해서 허연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곤 이제 그만 물에서 나가야겠다 싶어서 옷을 벗어놓았던 나무 밑동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딱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언저리에 욱이 버티고 서서 입을 딱 벌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화루로 돌아온 허연이 외투를 벗어 던지고는 곧바로 침상으로 기어들었다. 그러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덮었다. 하지만 욱이 그 이불을 훌렁 벗기고는 허연을 언짢은 눈길로 노려보았다.

욱은 무호와 부장들 앞에서는 당황스러운 내색을 비치지도, 허연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처음 내비친 경악의 표정을 얼른 수습한 후, 허연이 옷을 걸치고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을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무호와 부장들에게는 내일 사냥을 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할 것이니 그만 자리를 접고 들어가라고 한마디 점잖게 이른 것이 전부였다.

무호 일행과 술자리가 길어진데다 노천탕에 같이 들었던 것을 욱이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것은 허연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는 내내 별말이 없기에 조용히 넘어가나 보다 생각했던 허연이 지친 한숨을 내쉬며 욱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러십니까? 저는 피곤해서 그만 자야겠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

자신은 어이가 없어서 숨이 막힐 지경인데 허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자 욱이 으르렁거리며 그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폐하…….”

마지못해 일어나 앉은 허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욱을 노려보았다.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묻는가?”

“부장들과 술 몇 잔 들다가 마침 바로 곁에 좋은 웅덩이도 있고 바람도 서늘해서 온천에 잠시 몸을 담갔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게 잘못입니까? 그러자고 떠나 온 원행이 아닙니까?”

“시커먼 사내놈들 틈에 홀랑 벗고 앉아서 이놈 저놈 품에 안기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욱의 거침없는 비난에 허연이 발끈해서 욱을 노려보았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이놈 저놈 품에 안기다니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뭐 잘한 것이 있다고 도리어 악을 쓰고 눈을 부릅뜨는가?”

“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입니까?”

“시커먼 사내놈들 틈에 벌거벗고 앉아서…….”

“어허!”

부장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신이 너무 긴장을 풀었던 것은 사실이니, 어지간한 잔소리를 들어도 참아 넘기려던 허연이 파르르 떨며 버럭 호통을 쳤다.

“지금 폐하의 말씀은 제가 무슨 부정한 짓이라도 저질렀단 뜻입니까?”

“세상에 어느 황제의 후궁이 사내들과 어울려 같이 멱을 감고 놀았다던가? 나는 그 비슷한 얘기도 들어본 바가 없네!”

“저는 사내입니다! 또한 지난날 병영에 있을 때엔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 잔 하다 가까운 개울을 찾아 멱을 감는 일은 일상이었는데, 어찌 그런 일로 저를 책망하고 행실 가벼운 여인이라도 되는 듯 몰아붙이십니까?”

“그대는 과인과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일세!”

욱이 침상 문틀이 덜컹거리도록 언성을 높였다. 욱과 같이한 시간이 길다면 긴데, 자신에게 이렇게 성을 내며 대드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서 허연이 당황해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허연이 당황해서 얼른 대응을 못하는 사이, 욱이 더욱 기세를 얻어서 그를 몰아쳤다.

“헌데 그렇게 다 벗어부치고 그 늑대 같은 놈들 틈에 끼어 앉아서 여기저기 주무르도록 버려두다니…… 자네 제정신인가? 나는 두 눈 뜨고 헛것을 보는 줄 알았네!”

욱이 거칠게 허연을 나무라며 손으로 눈앞을 마구 까불었다. 좀 전에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춘수의 품 안으로 뛰어드는 허연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알몸으로 다른 사내 품에 안기다니, 게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리 수줍게 웃다니, 내가 살면서 그런 꼴을 보다니……. 

“내가 콧구멍이 두 개라서 숨을 쉬는 것이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사람이 진중하고 분별이 있는 줄 알았더니…….”

욱이 숨을 헐떡이며 횡설수설했다. 변방에 전란이 났을 때에도 본 적 없는 욱의 야단스러운 반응에 허연의 표정도 점점 썩어갔다.

“저야말로 어이가 없습니다. 사내들끼리 멱 한 번 감은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큰일이지! 어느 놈이 자네한테 흑심이라도 품었으면 어쩌려고? 게다가 무호와 그 부장들은 하나같이 장승같은 거인들이 아닌가? 겁도 없지, 어떻게 그 틈에서…….”

“제 평생 저한테 흑심을 품었던 놈은 폐하뿐입니다!”

허연의 거친 반격에 욱이 한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는 거친 콧바람을 날렸다.

“그럴 리 있는가? 주변에 늑대가 바글바글해도 눈치가 한밤중이라 그대가 모르고 지나간 것이겠지.”

“세상 사내들이 모두 폐하 같은 줄 아십니까? 무호와 부장들은 점잖은 자들입니다.”

“점잖아서 뒤에서 끌어안고, 앞에서 끌어안고…….”

“거참!”

듣다 못한 허연이 버럭 소리치며 욱과 마주 섰다. 보통 허연이 이렇게까지 나오면 이유가 무엇이건 욱이 그 기세에 눌려서 한수 접고 다툼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욱도 물러서지 않고 허연과 맞섰다.

“내가 그간은 먼저 반하고 더 많이 사랑한 죄로 어지간히 거슬리는 일도 모른 척 넘기고 번번이나 져주었으나, 이번 일은 어림없네. 황제의 연인이 외간 사내들과 함께 멱을 감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허연의 온천욕에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것은 욱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험악한 사내들에게 벗은 몸을 보이고 좁은 웅덩이에 함께 들어가 그들과 몸을 부딪친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황제의 정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경솔한 행동이니 단단히 주의를 주고 그런 경거망동이 다시는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욱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새로 사귄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고 가벼운 마음으로 어울려 논 것을 두고 자신이 무슨 부정이라도 저지른 듯 펄펄 뛰는 욱의 태도는 허연도 절대 수긍할 수 없었다.

“고작 그런 일로 이토록 화를 내고 사람을 무안하게 하시니, 저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작 그런 일이라고 했는가?”

“허면 저는 폐하께 찍힌 죄로 마음이 통하는 자들과 술도 마실 수 없고, 마음 편히 어울려 놀 수도 없는 것입니까?”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제대로 놀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옷을 입듯 벗든 무슨 문제입니까? 저한테는 같은 일입니다.”

“그게 어떻게 같은 일인가?”

욱이 숨을 헐떡이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허연도 짜증이 잔뜩 오른 얼굴로 욱을 밀쳤다.

“여인들만 바글바글한 궐 안에서 혹시 궁녀들과 무슨 구설이라도 날까 조심하며 지내는 것도 충분히 힘들고 숨 막힙니다. 그런데 이젠 궐 밖에 나와 장수들과 어울리는 것까지 눈치를 봐야 합니까? 저한테 정말 너무하십니다!”

허연의 항의에 욱이 움찔했다. 환궁한 이후 허연이 우화원 밖 출입도 거의 삼가며 조심스럽게 지냈었던 것은 사실이라서 순간, 내가 심했나 싶었던 것이다.

욱을 밀어낸 허연이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월성정이든, 아이들 처소든 아무 데나 욱의 꼴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발 내딛기도 전에 주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문 앞에는 윤 내관과 정 내관을 비롯한 지밀 내관과 상궁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 틈에 끼어 선 환이와 명이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마마…….”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거칠게 다투는 것을 전에 본 적이 없는 환이와 명이가 어흑…… 울음을 터뜨리며 허연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마마, 폐하와 다투지 마십시오.”

“어딜 가시려고요?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때 욱이 허연을 따라 나와서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곤 두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점잖게 일렀다.

“울지 마라. 별일 아니다.”

“폐하…….”

“그리고 마마는 아무 데도 안 간다. 그러니 걱정 말고 이만 물러가서 자거라.”

아이들을 안심시킨 후 욱이 허연의 팔목을 움켜잡고는 다시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

욱이 데리고 들어온 허연을 일단 침상에 밀어 앉혔다.

“자네는 어찌 나하고 다투기만 하면 각방 쓰자고 겁박을 하며 뛰쳐나가는가?”

욱이 팔짱을 끼고 딱 버티고 서서 의젓하게 허연을 나무랐다.

“허면, 여기 앉아서 밤새도록 폐하의 억지와 트집을 다 듣고 있어야 합니까?”

욱과 다툰 것보다 아이들을 놀라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허연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자신의 정당한 노여움을 억지와 트집으로 치부하는 허연의 태도에 욱의 혈압이 또다시 울컥 치솟았다. 하지만 다툼이 길어지면 허연은 또다시 각방 쓰자며 침전을 박차고 나갈 것이고, 그러면 결국 자신만 독수공방이라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성질을 다스렸다.

“그대가 어찌 생각하건 상관없네. 이후론 나 아닌 다른 이들 앞에서 도포 이상 벗어서는 안 되고, 술잔을 부딪치는 것 이상의 접촉도 안 되네. 집단 목욕, 어떤 자세로든 끌어안거나 안기는 것…… 앞으로 영원히 절대 불가일세!”

“제 처신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아이 가르치듯 폐하께서 일일이 해도 되는 일, 안 되는 일 가르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은 충분히 참고 양보할 만큼 양보했다고 생각했는데 허연의 반응이 싸늘하기 이를 데 없자 욱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곤 잠시 잡아먹을 듯 허연을 노려보다가 발길을 돌려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딜 가십니까?”

욱이 자신을 남겨두고 침실을 나가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 이번엔 허연이 당황해서 그 뒤를 쫓았다.

“아무 잘못도 없는 그대는 침전에서 편히 수침 들게. 나는 아무 데나 자네 없는 곳에서 마음을 좀 가라앉혀야겠네.”

욱이 냅다 소리치고는 쿵쾅거리며 용화루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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