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황자
본대까지 무사 복귀한 뒤, 태자의 환궁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율은 으레 제 자리를 없는 셈 쳤으나 예상을 뒤엎고 참석하라는 전언을 받았다. 누구의 입김이 닿았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
무척 오랜만의 연회였다. 허름한 일황자, 연회에 입고 갈 옷 따위 전무하다. 그 사정 아는 태자궁에서 모든 물품이며 시중들 인원마저 지원했다. 연회 날 아침. 율은 새벽같이 깨워져 종일 광내다, 지쳐 쓰러질 즈음 본식에 참여했다.
비록 껄끄러운 일이 있었지만 율은 눈으로 연신 태자를 쫓았다. 태자는 태양처럼 빛났다. 내가 키운 아이가 늠름히 성장한 모습을 확인하니 하릴없이 뿌듯했다.
‘자식을 키워 독립시키는 심정이 이럴 테지.’
훗날 이 태에 오롯한 제 핏줄 잉태해도 첫 아이는 금후 태자, 빛나는 아우님이리라.
그리고 실제로 배 속에 아이 담을 뻔한 날…….
결론부터 말하면 율은 그날 각인에 실패했다. 자궁 통로가 충분히 열리지 않아 양물을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쯤 하면 서방 맞을 준비 되었을 터인데 어찌 이러오? 응? 정녕 씹보지가 사람 흉내 내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인가?”
“하앙!”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했지, 한 개만 먹었다고는 안 했다…….
매섭게 타박한 작자는 보지에 두 개를 처넣고 뒷구멍에도 하나를 꽂았다. 원래 목적은 보지에 세 개인지라 용 신랑 심기, 매우 뒤틀렸다.
“후, 후야아! 배, 배 터지, 우욱!”
보지에서 느끼는 지점과 뒷구멍으로 느끼는 지점은 다르다. 앞에선 자궁 퍽퍽 찧는 작열감과 통로 긁는 근지러움에 몸서리쳤고, 뒷문은 유독 스칠 때 몸 오그라드는 부분이 있어 그마다 자지러졌다.
두 쾌감이 동시에 몸통을 짓이겨 대는데 제정신으로 버티겠나.
애를 밴 양 배가 불룩했다. 금원후가 부른 배를 지적하며 또 놀렸다.
“이거 보아. 색시 보지가 서방 솔찬히 부려 먹고 있소. 속집에 못질하랴, 벽 다져 주랴. 마님 명대로 기껏 방구들 넓혀 놨더니 실컷 일한 서방 내치고 다른 새끼 들이련다지 뭔가. 응?”
“아! 앗, 하, 흐윽.”
“이 갈보년, 허리 쌩쌩 돌리지 못할까!”
철썩!
분풀이처럼 좆 세 개 받는 것도 억울해 죽을 판이다. 불시에 궁둥이까지 얻어맞자 율은 서러움이 폭발해 목 놓아 울었다.
허어엉……. 어어엉.
“그, 그만해애. 나, 난 너밖에 어, 없단 말얏!”
“나밖에 없다는 사람이 굴 못 여는 이유가 무엇이오? 흥! 내심 서방 내외하는 게지. 아니었으면 진작 아기 담는 굴에 서방 씨 받아 우리 아기 모셔 오지 않았겠어?”
“하앙! 아, 아니, 흑! 아니라니까아!”
제발 사람 말 좀 들어!
빼액 소리쳐도 귓구멍에 좆 박힌 서방 놈은 들어 처먹질 않았다.
하여튼 저놈의 패악질.
더러운 성질머리 감내하느라 율은 그 새벽 내내 보지를 따이고, 젖통으로 좆 받고, 심지어는 겨드랑이와 허벅지, 팔과 무릎이 접히는 곳으로도 좆 무더기를 달래야 했다.
밥 먹고 색사만 했던 우기의 도래였다.
그때에 비하면 물리적으로 짧은 시간이 그나마 율을 구해 주었다.
그날로부터 시작된 미열이 아직 남아 있었다.
미열뿐이냐. 피부도 따끔따끔하고 구멍도 벌어져 있는 것 같다.
서방의 예고대로 언젠가 대물 좆 세 개를 한 구멍에 받는 날이 오긴 할 테지. 율도 마음 같아선 얼른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앵돌아진 서방은 통 안 믿는 눈치였지만.
“하아…….”
그래도.
그리 얄미워도 내 서방이다. 고작 한나절 떨어져 있었다고 보고 싶은 사람이다.
게다가 그 사람, 색시 따먹을 대로 따먹었다고 그냥 가지 않았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제약이 생기자 그는 분신을 뚝딱 꺼냈다.
“본신과 멀리 떨어지면 인형처럼 움직임이 다소 부자연스러워질 것이오. 허나 이것에게 전하는 말, 본신이 모두 듣고 있으니 하고픈 말 하고 구멍 닫히게 두지 마시오.”
요컨대 살아 있는 모형 좆이라.
적어도 생김새는 서방과 같아 거부감이 덜했다. 아랫도리도 서방 따라 세 개다. 허벌 보지 만드는 연습 충분히 할 수 있겠다.
율은 아닌 척 분신에게 흥미가 갔다. 솔직히 이때 아니면 언제 서방 놈을 마음대로 다뤄 보겠는가.
이참에 고놈 젖통도 갉작대서 수치심 느끼게 해 주어야지. 단단한 근육질이면 어디 젖알이 없다던가? 흉통이 커서 그렇지 젖 크기만 비교하면 놈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무슨 재미난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헉!”
화들짝 놀란 율이 허둥지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른쪽 어깨를 사붓이 잡은 이가 율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 후야? 앗, 아니…… 태자마마.”
“태자마마, 라……. 썩 듣기 나쁘지 않군요, 형님.”
“……?”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지 못해 율은 작게 갸웃거렸다.
금후는 슬쩍 웃으며 황가 식구들을 쭉 훑었다. 못마땅한 낯의 황제 폐하, 무표정한 황후마마. 단출한 직계혈족 아래로 소수의 친족.
본래 태자의 자리는 황제의 오른쪽 아랫단이다. 같은 황자이나 율은 태자와 같은 선상이 아니라 거기서 한 단 내려와야 했다.
즉, 율은 방계 친족들과 나란히 자리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잠깐 앉았다 해도 태자가 아예 궁둥이를 붙이고 있을 만한 곳은 못 되었다.
“폐하.”
태자,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황제를 찾는다.
율에겐 스치는 시선 한 톨조차 주지 않던 황제였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율이 있는 쪽을 바라보게 되어 황제는 심히 유감스러운 기색이었다.
“네 자리로 오르거라, 태자.”
“예. 마땅히 해야 할 일만 마치거든 돌아가겠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둘이서 대화하는데 왜 내가 조마조마하단 말이냐.
율은 어깨를 움츠리고서 이 상황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태자가 손바닥을 펴 율의 등허리를 받쳤다.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이 미묘했다.
“예. 일전에 소자에게 하신 약조 말입니다.”
“약조라……. 그랬지. 태자가 의무를 훌륭히 마친 터, 짐이 신뢰하는 아들에게 그가 바라는 일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하였다.”
황제가 순순히 인정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사관이 황제와 태자의 대화를 재빠르게 기록했다.
태자가 율을 힐끗 곁눈질했다. 그러곤 결심한 듯 힘주어 말한다.
“거두절미하고 고하겠습니다. 소자, 오늘날 무탈히 장성할 수 있었던 바탕엔 형님의 헌신이 적지 않았습니다.”
입을 꾹 다문 황제와 턱을 떨어뜨린 율. 두 사람의 대비가 확연했다.
태자가 신중히 용건을 이었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지지와 희생, 도움을 받았나이다. 다만 꼭 한 사람을 꼽으라 하면 형님의 헌신이 가장 앞에 선다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태자가 황제를 향해 공손히 자세를 취했다. 완전히 각 세운 태도는 아니라 분위기가 너무 깍듯하게 변하진 않았다.
의젓한 아들이 특별한 날을 맞아 귀엽게 조르는 듯도 하고, 어린 아들이 어른인 척 뽐내는 것 같기도 한 모습. 태자는 그 오묘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자는 형님께서 이제나마 성혼하시어 가정을 이룬 기쁨을 누리셨으면 합니다.”
황실의 치부를 겉으로 드러내라. 태자의 바람은 황제에게 삼키기 싫은 고약으로 다가갔다. 황제의 일그러진 형상을 보노라면 누구나 그리 여길 터였다.
“저 모자란 것을 성혼시켜라?”
“소자를 키워 낸 분입니다. 가정을 이룩하거든 반려 되는 분 공경하며 오순도순 잘 지내실 겁니다.”
톡. 톡. 톡. 황제가 검지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톡.
“그래……. 태자가 구태여 언급할 정도면 염두에 둔 이가 있으렷다? 모자라고 심약한 것도 제 핏줄이라 챙기는 효심이 어찌 갸륵하지 아니한가. 저것을 누구와 짝지어 주면 마땅하겠는지 아뢰라. 고려해 볼 것이다.”
죄인처럼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율은 일순 시야 아래로 끼어드는 손을 발견했다. 곳곳에 못 보던 상처가 생긴, 익숙하면서도 낯선 손.
제 주먹을 덮어 쥔 손은 알던 것보다 크고 따뜻했다.
율이 슬그머니 눈을 굴려 힐끔, 태자를 올려다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사내, 태자 금후입니다.”
“……뭐라?”
분을 이기지 못한 황제가 언성을 높였다. 태자는 감히 잘못을 빌지 않고 형님만을 주시했다.
“형님을 제 울타리에 두고 키워 주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말했다. 말해 버렸다.
황제도, 이곳에 자리한 그 누구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할 이야기.
그러나 모든 이의 당혹감을 합쳐도 율이 느끼는 바에는 못 미치리라.
“아, 아니, 나는…….”
나는 분명 정인이 있다고 했는데?
황제가 기어코 의자 손잡이를 부순 후 자리를 떴다. 연회 첫날이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그날 밤, 율은 동생이 찾아오리라 예상하며 거처로 돌아갔다. 충격적인 발언을 던졌으니 당연히 와야 했다. 해명이든 아니든 율은 그가 왜 그랬는지 들을 권리가 있었다.
“연회는 잘 다녀왔소?”
반가운 음성에 율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금원후였다. 색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지 그는 편한 자리옷 차림이었다.
율은 서둘러 달려가 서방 품에 꼭 안겼다.
“나 아직 화 안 풀렸는데.”
“응. 네가 내 정인이야.”
이어지는 듯하면서 어그러진 대답이었다. 서방은 잠자코 색시를 토닥토닥 보듬어 주었다. 새벽부터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던 율은 안락한 품에서 그만 까무룩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밤이 한참 깊은 새벽.
훌쩍 큰 사내가 밤의 그림자를 타고 납시었다. 화려한 연회복 복장 그대로였다.
끙끙거리며 잠든 색시 연신 토닥이던 남자가 슬며시 시선을 들었다.
“오셨군.”
“……형님은.”
“보시다시피. 누구 덕인지 악몽 장히 꿀 낌새라 서방이 타이르고 있었소.”
태자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닥쳐라.”
“어찌하여?”
어째서 닥쳐야 하냐고, 대리 황자는 당돌하게 물었다. 솔직히 그는 화가 난 상태였다. 제깟 놈이 뭐기에 명령질인가? 피조물의 사명 짊어져 그림자 목숨 꼴로 존재한다 하여도 용신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용은 경고했다.
“어리석은 태자여, 네 눈에 본신이 한낱 그림자로 비칠지 모르나 명심하라. 너는 본신께서 반려 발견하기 전에 그이를 보호할 대리인일 뿐이었다.”
“……뭐? 지금 무슨 헛소―.”
“경고하건대, 분수에 넘치는 것을 감히 욕심내지 말라. 네가 지금이라도 너 주어진 길 가고자 한다면 본신은 여기서 눈감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될지 네 눈으로 확인해도 좋겠지.
서룡은 심지어 색시 품은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해서 태자에겐 서룡의 코 위쪽만 보였다.
금안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활활 타오르듯 빛났다. 찰나,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것도 같았다.
태자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다시 본 눈동자는 인간의 동그란 눈이 맞았다. 허나 기묘한 섬찟함은 가시지 않았다.
“넌…… 누구지?”
용이 인심 쓰듯 대답했다.
“대리 황자. 그리만 알아 두시오.”
***
사흘간의 대연회에 이어 사냥 대회가 펼쳐졌다. 태자가 없을 적에는 간소하게 실력을 겨루며 능력을 선보였던 자리가 올해는 사냥 대회로 발전했다.
대회가 열리는 황궁 후원은 율도 처음 와 보는 장소였다. 수많은 사내 속, 율은 유일하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다들 무기며 말이며 익숙하게 다루는데 율 혼자 모든 것이 어색했다.
‘이딴 곳 누가 가자고 해도 빠졌을 텐데.’
“……좋다. 태자가 그리 여긴다면 짐이어도 왈가왈부할 수 없을 터. 다가올 사냥 대회에 황자도 참석하라. 마땅히 능력을 선보인다면 원하는 상을 내리겠다.”
황제가 직접 율을 지목하지만 않았다면.
연회가 끝나도록 답을 보류하기에 이대로 묻히나 보다, 율은 내심 안도했었다. 헌데 황제의 발언은 연회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다다라서야 터졌다.
율은 두 가지 부분에서 놀랐다. 하나는 태자의 말도 안 되는 바람을 들어주려는 듯한 황제의 반응이었고, 또 하나는 율더러 공식석상에 나서라는 명령이었다.
여태껏 그 어디에도 율을 내놓고 싶어 하지 않았던 황제였다. 태자의 부추김이라곤 하나 황제가 율보고 흔쾌히 사내들 무리에 끼어라 호언한 건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덕분에 율은 어색한 사냥복을 입고 말고삐를 쥔 채 이곳에 서 있었다. 물론 사냥복과 말 또한 태자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적어도 겉보기로는 썩 그럴싸한 사냥꾼이었다.
킥킥…….
“저기 아녀자가 길을 잘못 든 모양인데 알려 주어야 하지 않사옵니까?”
“내버려 두어라. 딴엔 사내라고 치마 두르기 싫다지 않느냐.”
“흐응. 치마 둘러 귀한 몸 아방궁에 들어앉으면 연꽃보다 사랑받을 텐데 말입니다.”
연꽃은 태자의 정혼자인 연희의 별칭이다. 요컨대 태자에게 안겨 뒷구멍으로 권력 누리리라, 비꼬는 웃음이었다.
사내들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아하니 말도 못 타는 모양인데 잘못 떨어져 목 꺾일까 내가 다 조마조마하구먼.”
“그럼 대인께서 도와주시구려. 행여 알까. 사내 늠름함에 반하여 품에 안길지. 물론 대인 몫의 사냥감은 사이좋게 나눠 가지리다.”
“거 사람도. 짓궂은 소리 마시오. 태자 전하 꽃 꺾을 만큼 담 큰 사내는 아니니.”
들으려면 들으라는 듯 작은 음성도 아니었다. 율은 점점 위축되어 도망가고만 싶었다. 제가 이곳에 왜 있는지 저만큼 의문인 자도 없으리라.
설상가상 해가 뜨거웠다.
우기가 지나고 서룡국은 한여름에 접어들었다. 기본적으로 사철이 온화한 곳이라 여름이면 특히 햇살이 타는 듯 뜨거워지곤 했다. 율은 습관적으로 팔을 문질렀다. 이 햇빛을 종일 받았다간 살갗이 죄다 익어 고생할 그림이 그려졌다.
“대회를 시작하겠다.”
뿌우우―.
저 앞에서 연설하던 것이 끝난 모양이다. 황제의 선언 직후 사냥 대회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렸다.
황제가 덕담을 빙자한 태자 자랑을 하는 동안 율은 일부러 구석에 숨어 있었다. 괜히 눈에 띄어 구박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참석했으니…… 토끼라도 잡아야겠지?’
천천히 말에 올라탄 그는 숲으로 향했다. 성과에 관심 없는 몇몇 사내를 제외하곤 순식간에 공터가 텅 비었다.
터벅터벅, 말이 느릿하게 걸었다. 그나마 순한 말이어서 율은 안심했다.
“말 타는 법은 아십니까?”
이름 모를 말을 건네줄 때 태자가 물었었다. 율은 고개를 저으려다 다급히 끄덕였다.
“으, 응. 나도 어릴 적에는 이것저것 익혔잖니. 오랜만에 타는 거지만 방법은 기억하고 있어.”
“따로 봐 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입은 허락을 구하면서 태자의 손은 벌써 허리를 잡고 있었다.
“아우가 봐 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올랐다가 다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까지 하는데 한사코 거절하기도 난처했다. 말을 탈 수 있을까 걱정 또한 되었기에 율은 대충 자세를 취해 보려 했다.
“앗!”
율이 발걸이에 발을 거는 순간, 자세를 봐 준다던 아우가 그를 들어 말 등에 앉혔다. 그러고는 형님이 뭐라 하기 전 재빨리 율의 뒤에 올라타 말고삐를 쥐었다.
“어떠십니까?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습니까?”
“이건…… 말 타는 법이 아니잖아.”
율이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누가 말을 이렇게 타.
그러자 동생이 피식 웃었다. 형님 몸통 제게 딱 붙이고서 그가 속삭인다.
“아뇨. 말 타는 법이 맞습니다.”
“뭐라구?”
“사냥 대회가 시작되거든 제게 오십시오. 이 손으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올려 드린다는 어감이 묘하게 길고 짙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여운이 남았으나 율은 기분 탓이려니 넘겼다.
그 밤이 지났다. 진정 말 타는 법을 익혀 준 이는 서방이었다.
“사냥 대회에 참석하여야 한다고? 말을 타야 해?”
어처구니없다는 빛이 어린 면상은 황제와 태자를 욕하고 있었다. 미간이 심상치 않게 구겨졌다.
율은 한결 편한 품에 안겨 한숨을 내쉬었다.
“응. 폐하 명이셔.”
“조만간 쓸어 버려야지, 원.”
태자가 나타난 이후 서방의 심기가 줄곧 저조하다는 건 색시도 눈치챘다. 율은 그의 등을 껴안고 토닥였다. 화내지 말아라, 서방아. 함께 있는 동안 기쁨만 가져가오.
“안 되겠소. 말을 보아야겠어.”
“응?”
이건 또 무어냐.
“뭐 하시오. 말 있는 곳까지 앞장서야지.”
홀딱 벗고 배 맞춘 여운 느끼다 뜬금없이 말 보자 하면 사람이 황당하지 않겠니?
못 들은 척, 피곤한 척 율이 애교를 부려도 원후는 완고했다. 그러더니 기어이 두 눈 앞에 말을 데려다 놓는다. 이번엔 율이 기가 막혀 팔짱을 꼈다.
“옜다. 만족해?”
“흠……. 성질 괴팍한 놈은 아니구먼.”
용신의 눈엔 동물이 어찌 보이는 것인지 그가 턱주가리를 문지르며 품평을 해 댔다.
“다리도 이만하면 쓸 만하고. 몸통도 커.”
“그래, 그래…….”
“다 좋은데, 색시에겐 너무 높소.”
금원후……, 아니 그때는 서룡의 눈빛이었다. 용신이 말의 콧잔등을 톡톡 두드리며 명령했다.
“주인이 네 등 빌리고자 할 때 몸 낮추거라.”
신기한 일이었다. 용의 말을 알아들은 듯 말이 그 자리에서 다리를 접어 엎드렸다. 율은 손쉽게 말 등에 앉아 말이 스스로 일어나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말에 타고도 얼떨떨했다.
한참 큰 사내가 눈높이 아래에 있었다. 호선을 그린 서방 입술, 입꼬리가 삐뚜름하지 않고 고루 올라간 모양새다. 요즘 원후는 제 앞에서 찬웃음을 흘리는 빈도가 부쩍 줄었다.
율은 사내의 변화가 드문드문 가슴에 박힐 때마다 마음이 얼얼했다. 사랑스럽고, 기쁘다 못해 저렸다.
고통스러울 만치 이 사내에게 정을 주어 버렸다.
율이 팔을 뻗어 사내를 안았다. 자연히 상체가 아래로 쏠려 원후가 냅다 받았다.
“어이쿠. 우리 울보가 보지로 실컷 울어 놓고 또 우네.”
“너, 넌 그 입이…….”
색시를 완전히 제 팔 위에 올려 안은 신랑이 쫑알거리는 입술을 잡아먹었다. 머지않아 율이 빨개진 얼굴을 신랑 목덜미에 툭 박았다.
금원후는 율을 안고서 사박사박 걸었다. 말이 알아서 둘을 뒤따랐다.
“아니 좋았소?”
“…….”
“흠. 이거 좀 섭섭하군. 갈보 아내 둔 죄, 우리 색시는 보지 빨아 주는 것만 좋―.”
“조, 좋았어! 좋았으니까 조용히 해.”
누가 보지 달고 있는 거 모르남? 하여튼 이 상놈 때문에 속 조용할 날이 없다.
서방이 낮게 웃었다. 확연히 즐거운 기색이었다. 해서 율도 마음이 녹진녹진 녹았다. 서방 품은 따뜻했고,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조용히 걷는 길은 평화로웠다.
그리고 율은 그 가만한 옆모습에서 ‘금원후’가 아닌 ‘서룡’을 보았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용 신랑.
꿈속이 아니어도 그대 또한 내 곁에 있었군요.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두 모습이 차츰차츰 하나로 겹치고 있음을 알게 된 밤. 인간 색시는 그 사실이 무척 설레더랬다.
퍽!
“……!”
그때, 웬 화살 박히는 인기척이 달콤한 회상을 깨뜨렸다.
율은 소스라치게 놀라 말고삐를 힘껏 쥐었다.
현실은 그날의 평온한 길이 아니라 쫓고 쫓기는 사냥터.
화살 박힌 소리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곁에 선 나무 기둥. 그곳에 대가 긴 화살이 깊게 박혀 있었다. 율은 그보다도 화살 깃에 시선이 갔다.
“이건…….”
뭘 모르는 황자도 붉은 깃 달린 화살이 누구의 것인지 정도는 안다.
황제의 화살이었다.
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래……. 어찌하여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굳이 불러내시는가 했다. 이럴 작정이었구나.’
연회 날 그 난리가 있었는데도 불러서 손찌검하지 않았다. 사냥 대회까지 그저 고요했다. 평소 황제답지 않은 행보였다.
‘내가 더는 참아 줄 수 없는 흠이 된 거야. 태자의 앞날에 검댕 묻히는 흠이.’
태자는 완벽히 우뚝 선 존재. 그게 더럽혀질 위기에 처하자 황제의 인내심이 극에 달한 것이다.
율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늘,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후야…….”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만 보여 주련. 갈 때 가더라도 네 품에서 가련다.
퍽!
화살이 재차 날아왔다. 저 화살의 사냥감은 율이다. 명백한 겨냥에 율은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서룡!”
용신이시여, 서방이시여. 색시 목청 듣거든 답해 주오. 그대 거기 있노라고…….
***
서룡…….
문득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서룡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잘못 들었나. 분명 색시 음성 들은 것 같은데.
겁 많은 울보가 숲 헤매며 울음 터뜨린 건 너무 있을 법한 일이라 서룡은 초조해졌다. 그는 속내를 숨기고 입꼬리를 한쪽만 삐뚜름히 기울였다.
태자, 금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정당히 겨루는 거다. 이 사냥터에서 네가 잡은 것이 많다 하면 내 맹세코 너를 풀어 주고 형님과 성혼시켜 주겠다.”
사냥터 구석. 그들이 어울리지 않는 밀회를 가지게 된 까닭은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연회 첫날, 두 사내가 맞닥뜨렸을 적에 태자가 제안했다.
“며칠 뒤 사냥 대회가 열린다. 네 본 신분으로 참석하여 솜씨를 보여라. 형님이 내 울타리에서 보호받길 원치 않는다 하여도 동생 된 도리로서 형수……, 아니, 형님의 반려 될 자를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비슷한 생김새여도 뼛속까지 다른 두 사람이다. 서로 무슨 의도를 감추고 있는지 알 길이 있나. 다만 한 가지, 저이와 한 하늘 지고 살 수 없다 본능적으로 감지할 따름이다.
서룡은 저더러 능력 증명하라 하는 인간이 같잖았다. 그러는 금후는 용의 기운 물려받고서 어떤 힘을 개화하였나? 뭔들 본신에 비할 깜냥 되겠냐만.
“알았으니 그만 보내 주시오. 형수 닳겠소.”
너 열받으렴. 속 절절 끓으렴. 그럴 의도로 픽 비웃은 사내가 먼저 말에 올랐다.
열받으라 긁은 쪽은 저인데 어찌 이리 초조하냔 말이야.
이제 와 정히 후회된다. 율이 울어도 그날 각인할걸. 어여쁜 것이 계속 펑펑 우니까 마음 약해져서…… 칫.
“이랴!”
서룡은 남은 자에게 눈길 허비하지 않고 쌩하니 달렸다. 거듭 초조하고 불안한 까닭 어딘가에 있으리라. 이유는 필시 내 색시, 고 멍청하고 덜 자란 토끼 같은 것이 헛짓하다 다칠까 마음 쓰이는 탓일 게다.
다 큰 주제에 여태껏 손바닥, 발바닥 말랑한 놈이 말 탄다고 할 때부터 불안했다. 임시방편으로 말에게 용언을 걸어 놓았으나 어디 안심할 수 있는 놈인가. 혼자서도 자빠져 아앙 우는 인간인데.
“본신을 애타게 한 벌 톡톡히 내릴 것이다.”
괜히 색시 탓하며 서룡은 숲을 뒤졌다. 태자와 겨루기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어차피 이 땅의 미물, 모두 용신의 것이므로.
그리고 금원후가 모습을 감춘 그 자리.
금후는 느긋이 움직였다. 화살통 어깨에 잘 메여 있는지 두 번 확인하고 활도 다시 고정한다.
이날을 위해 공들여 화살촉 다듬었다. 목표물이 한낱 짐승이 아닌 탓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무섭도록 타오르던 금안.
“너는 본신께서 반려 발견하기 전에 그이를 보호할 대리인일 뿐이었다.”
그 눈이 태자를 모욕하고 짓이겼다.
형형하게 빛나던 금안은 인간의 것 같지 않았다. 태자도 차마 저것이 나보다 못하다 할 수 없었다. 대리 목숨이라며? 그림자 주제에 진짜보다 빛나면 어찌해.
게다가 대놓고 비웃던 모욕. 모욕. 모욕.
고고한 태자 전하, 이날 이때껏 그 누구에게도 모욕당한 역사가 없었다. 형님이 핍박받을 때 그 현장 고스란히 겪었다 한들 그것은 제게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하도 귀한 아들이라 천자께서도 위대하다, 떠받들기만 했다. 실제로 금후는 칭찬이 아깝지 않을 만큼 무엇이든 훌륭히 해냈다. 그리 높은 곳에 자리함이 당연한 삶에 하찮은 것의 모욕은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만 했더라면 어떻게든 참아 냈을 것이다.
‘……형님.’
나밖에 모르던 우리 형님. 꽃처럼 고운 이.
다른 이의 물뿌리개는 받지 않을래. 내겐 우리 후야만 있으면 돼. 애달픈 얘길 헤헤 웃으며 하던 내 형님.
그랬던 형님이 그 무례한 치의 손에 꺾이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왜 하필 그자인가?’
하고많은 이들 놔두고 저와 비슷하게 생긴, 그러나 천박하기 짝이 없는 사내.
율이 태자를 오래 본 만큼 태자도 율을 오래 겪었다. 그는 철들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형님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저뿐이라 믿었다. 그리고 이제 그 힘을 얻었다.
진짜가 왔으니 가짜는 사라져야지.
그 과정에 대리 황자는 필요치 않았다. 태자가 손수 가짜를 없애 버리기로 한 사정이다.
“……곧 바로잡겠습니다.”
금후 또한 이내 말고삐를 크게 휘둘렀다. 무성한 나무숲에 그늘진 금안이 탁했다.
콱!
화살이 바위에 박혔다. 어떤 나무도, 돌도 뚫어 버리는 화살이다.
“헉……, 헉.”
턱 끝까지 숨이 찬 율이 비틀거렸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화살이 황제의 것임을 알아본 후, 율은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도망 다녔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움직였으나 점점 거리가 좁혀지기만 해서 직접 뛰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가, 황자.”
헉.
몰아쉬던 숨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방이 푸른 잎뿐인 곳에서 울린 황제의 음성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퍽 즐거운 기색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무서웠다.
후원은 넓었다. 가도 가도 율이 모르는 길이었다. 제 궁 뒤편 산길은 아는데 이곳에선 어디로 가는지, 같은 곳을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분간이 안 갔다.
“황자여, 아비가 찾고 있지 않느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율은 찰나 다리가 풀릴 뻔했다.
단 한 번도 아비란 호칭으로 칭한 적 없으면서. 아비였던 적도 없으면서.
아들을 죽이려 할 때에야 비로소 아비 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어떻게 따돌리지.’
여기서 죽고픈 마음, 한 톨도 없다.
“서룡, 룡아…….”
익숙한 ‘금원후’라는 이름 놔두고 본신 부르는 이유 역시 까딱하다간 다른 후야를 불러들일 성싶어서였다. 어서 서방에게 가야 하는데 행여나 장애물 만날까 봐.
서방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지하 전각이라고 하였는데 어느 궁 근처랬더라?
아, 아니다. 지금은 황궁 사내들 모두 여기 있을 테니 제 궁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색시가 언제 올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면서.
사사삭.
주변 풀숲에서 무언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율은 더럭 겁이 나 수선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무엇이 지나간 것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흡!”
짐승인가, 사람인가. 허둥대며 도피하던 율이 인근 나무를 부여잡았다. 휘청휘청, 불안하게 내딛던 다리가 종내 풀리고 만 것이다.
발치에 꽂힌 화살. 까딱 한 걸음만 더 나갔으면 발등을 꿰뚫렸을 위치였다.
여태 구박데기도 이런 구박데기가 없다 했었다. 허구한 날 흠씬 두들겨 맞고 갇히기 일쑤여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게 진정한 밑바닥이라 믿어선 안 됐는데.
“윽……. 움직여. 어서 움직여…… 제발.”
정녕 용 앞의 미물이구나. 저가 어디로 도망치든 황제는 결국 이 걸음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린다. 무인인 황제를 따돌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었다.
율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일으켜 세웠다. 도망치는 중이라 몰랐는데, 신발 한 짝이 없었다. 엎어지고 구를 때 어디선가 벗겨진 모양이었다.
잘 다듬어 묶었던 머리도 치렁치렁 흘러내려 망나니 산발이다. 이 꼴로 어머니 찾아가면 낳아 주신 모후 폐하마저도 황자 사칭하지 말라며 쫓아내실 듯했다.
“계속…… 계속 이러는 건 답이 없어.”
체력은 고갈된 지 오래고, 더는 이 다리로 뛰어다닐 자신도 없다. 황제가 작금까지 저를 살려 둔 이유는 사냥감 몰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려면 여기서 결정해야 한다.
완벽히 숨든가, 제대로 도망치든가.
“후우.”
율은 우선 깊게 심호흡했다. 그런 다음 저를 둘러싼 숲을 쭉 훑었다. 나무가 빽빽하고 숲이 우거져 숨죽인 채 잘 숨으면 시야 속일 수 있을 법도 했다.
‘……아냐. 그냥 숨는 걸로는 안 돼.’
쉬운 방법 택해 봤자 황제에게 목을 스스로 갖다 바치는 셈이다. 그렇다고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율은 가늘게 경련하는 몸을 감쌌다. 양팔을 껴안아 팔뚝을 슥슥 문지른다.
사고가 경직되니 두려움이 심해졌다. 지금도 화살이 제 심장 꿰뚫을까 겁나 죽을 것 같다. 한 번이라도 칼 만지고 사냥터 나와 봤다면 이리 두렵진 않았을까.
‘……칼?’
순간 무엇에 홀렸는지, 율은 옆구리에 찬 단검을 빼 들었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니 팔꿈치 길이만 한 칼을 챙겨 왔었다. 잡은 사냥감을 엮을 노끈도 있고, 물 담은 수통, 그 외 소도구를 꾸린 가방도 옆구리에 매달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계획이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칼과 수통, 화살과 노끈.
사람이 한계에 달하면 때론 이성보다 행동이 앞서곤 한다. 현재 율의 상태가 그러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수통과 노끈을 바닥에 풀어 놓았다. 직후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아 어깨쯤에서 칼을 댔다.
그대로 힘주어 자르기 전, 멈칫한다.
“이걸로 되나……?”
율의 머리칼은 발치에 닿을 만큼 길었다. 누구도 저주받은 신체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신체에 닿거든 으레 그이의 행 또는 불행이 옮는다고 믿었다. 머리카락도 당연히 신체의 일부. 하물며 자른다는 건 신체를 해하는 셈이니 더더욱 만지길 꺼려 했다. 사내 주제에 율이 여느 규수보다 긴 머리 타래를 짊어지게 된 이유다.
‘어중간하게 자르면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
“이 정도?”
칼날이 귀밑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율은 눈을 질끈 감고 바깥쪽으로 칼을 밀었다.
“읏…….”
서늘하다. 그리고 허전하다.
잘린 은발이 율의 손아귀에 맥없이 늘어졌다. 잠시 머리칼을 응시한 율은 노끈 일부를 끊어 절단된 타래를 모아 묶었다. 이리 보니 새삼 긴 머리였다.
아쉬워할 겨를 없이 다음 할 일에 돌입했다. 수통에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작업이었다. 이 일체가 율의 머리 부분이 될 터였다.
매듭 조인 머리 뭉치를 수통 입구에 거꾸로 넣어 엮는다. 수통 몸체가 안 보이게끔 머리칼을 적당히 뒤집어 흐트러뜨리자 멀리서 보기엔 그럴싸했다.
“머리 됐고…… 화살, 화살.”
무의식중에 중얼대며 율이 흙바닥에서 화살을 주워 왔다. 그것을 세로로 놓은 뒤 단검 뺀 검집을 가로로 교차해 고정한다. 노끈 길이가 충분하여 천만다행이었다.
큰 과정은 여기서 끝이었다. 율은 팔 안쪽으로 식은땀 어린 이마를 대충 훔치곤 겉옷을 벗었다. 그다음 잠시나마 황자 전하로 둔갑할 모형에게 조심히 걸쳐 준다.
자, 이로써 머리와 몸통이 준비됐다.
수통과 화살촉을 겹쳐 끈으로 고정해 주면 버러지 전하 완성이다.
“그것도 경험이라고, 그놈이 분신질 하던 걸 이리 써먹는구나.”
피식. 때아닌 미소가 율의 입가를 스쳤다. 짓궂은 내 서방.
“보고 싶다…….”
어서 가자. 어서어서 도망가 서방 품에 안기자. 그러고 나서 펑펑 울며 서방 탓하는 거다. 이참에 고 능글맞은 놈 말문이 딱 막혀 쩔쩔매는 꼴 좀 보자꾸나.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을 매달 나무만 찾으면 된다.
율의 계획은 단순했다. 급조한 분신을 이용해 아비의 시선을 잠깐이나마 붙들어 놓을 심산이었다.
한 짝 남은 신발을 마저 벗어 던지고 겉에 입은 바지를 칼로 찢는다. 가능한 길게 이어 목 넣을 구멍과 묶을 매듭을 만든다.
구멍에 미리 분신 목 빼어 조이고서 끈을 손목에 감았다. 나무에 올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장난질 심한 서방에게 장소 불문하고 보지 따먹힌 지 3년. 그 ‘장소’엔 나무도 포함되었다. 기막힐 노릇이지만, 덕분에 키 작은 나무쯤은 율도 탈 줄 알게 되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인간으로서 서당 개 학습 능력보단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법 수월히 올라 목 매단 황자 인형을 가지에 고정했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은발 타래로 인해 아주 잠시 눈길 붙들 정도는 되어 보임 직했다.
“황자여―.”
때마침 황제가 인간 사냥을 재개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단순히 신경 분산시킬 만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율 대신 다른 짐승을 잡기라도 했던지.
율은 조용히 뒷걸음질 치다 흙바닥에 널브러진 칼과 부스러기처럼 떨어진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곤혹스러웠다. 나무에 매달린 분신을 발견하기 전에 밑바닥에서부터 눈치채면 곤란한데.
망설임은 짧았다. 서둘러 흙 파헤쳐 머리카락 덮고 칼을 들었다.
“이건 어쩌지.”
칼집을 써 버려 넣을 데도 없고 들고 다니자니 짐이다. 칼도 바닥에 묻을까 고민하던 율은 결심했다.
“……으…….”
날카로운 칼날이 왼쪽 손바닥을 깊게 눌렀다. 붉은 피가 금세 굵은 선을 만들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율은 손에 고인 피를 나무에 발랐다. 제 피 냄새로 황제를 유인할 참이었다. 그럼 도망칠 때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피 냄새 때문에 한 번은 이곳 땅을 밟겠지.
거리를 벌릴 기회였다.
“아파…….”
저절로 비집고 나온 눈물이 뚝뚝 낙하했다. 율은 애써 울음을 삼키며 나무에 피를 묻히고 그 밑에 칼을 묻었다.
“서룡……, 아, 아니 용신이시여, 서룡이시여. 위대한 서룡의 대제시여, 부디 폐하의 눈을 가려 주십시오. 내 서방에게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짧게 비는 동안에도 멎지 않는 피가 바닥에 고였다. 율은 혹여 스스로 낸 피가 제 방향을 밝힐까 봐 손바닥에 흙을 문질러 발랐다. 이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숲속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금율 황자는 모르는 일이다.
쿠르릉…….
묵직한 진동과 함께 나무에 묻은 피가 기둥으로 스며들었다. 율은 자각이 없으나 그가 저지른 행위, 본신을 깨우는 호명 의식이었다.
용의 사랑을 받는 이가 피와 살을 바치고 용의 진명을 세 번 호명했다.
용신의 진명과 나라 이름이 동일하기에 벌어진 우연이었다. 하물며 용신이 대제의 묘를 벗어나 이 대지에 자리한 바, 율은 누구보다 피 진한 순혈로서 그의 귓가에 속삭인 셈이었다.
내 서방을 찾노라고.
나무와 잎, 가지와 흙. 살아 있는 숲이 용에게 색시의 움직임을 알렸다. 바보 색시는 아마 이것도 모를 터였다. 피 고인 금씨 일가, 본디 나무에서 비롯되었음을. 제게도 누구보다 진한 나무 씨의 힘이 웅크리고 있다는 걸.
비로소 발현한 힘이 서방 찾는 데서 나온 것이, 서룡은 무척이나 흡족했다.
만족스러운 점은 또 있었다. 과거, 용은 네 씨족의 후예를 앉혀 놓고 가르쳤었다.
“화마가 난동을 부리면 비로 덮고 땅이 진노하면 바람으로 달래라. 하늘이 고집을 부리면 나무로 버티되 나무가 괴로워하거든 구름이 지켜 주어야 한다.”
나무가 괴로워하면 구름이 지킬 것.
“내 어쩐지 연씨 놈 사명 들어주고 싶더라.”
구름이 나무를 도와 재앙 무찌르매, 비로소 순리대로 돌아가리라. 어여쁜 색시 덕에 비틀린 사명을 바로잡을 계기까지 얻었다.
용의 나무. 그이가 재앙으로 꼽은 것은…….
“호오. 저거, 버러지의 머리통으로 봄 직하지 않더냐?”
같은 나무 씨.
자신의 썩은 뿌리였다.
황제가 발길 붙들린 곳은 다행히 멀지 않은 장소였다. 율도 인근을 맴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친애하는 내 나무가 뿌리를 솎아 달라는 데 못 들은 척할 수 없지. 암, 그렇고말고.”
서룡은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꼭 누구 들으라는 듯한 목청이었다.
그저 짐작이 아니라 서룡은 출발선에서부터 줄곧 제 뒤를 노리는 미친 나무 씨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꼴에 활을 쓸 모양인데 해 보려면 해 보라지. 그 화살 잡아다가 도로 꽂아 주마, 그리 마음먹은 터였다.
“…….”
몇십 보 뒤에서 쫓던 금후가 멈칫했다. 그는 드디어 적수가 멈춘 틈을 타 활을 겨눈 참이었다. 그랬건만 대뜸 오만방자한 소릴 지껄인 놈은 나무가 더 우거진 데로 냅다 가 버렸다.
텅, 목표 놓친 화살이 애꿎은 나무 기둥에 꽂혔다. 그 결에 떨어진 꽃잎이 소담한 흰 빛이라 태자는 못내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
기묘하다.
무엇이 기묘하냐고 하면 딱 잘라 짚어 내기 어렵지만, 율은 그 장소에서 벗어난 이후 줄곧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숲이 길을 내어 준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나무가 가지를 치워 주는 것 같고, 땅이 평평하게 다져져 율이 달리기 쉽도록 만드는 듯했다.
나무와 땅이 눈앞에서 대놓고 움직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도와주는 게 아니고서야 지나치게 깨끗해진 시야를 무엇으로 이해한단 말인가. 심지어 율은 직선 길로 뛰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건 숲을 헤매지 않고 밖으로 나가거나, 길을 아는 곳으로 접어들거나, 서방을 찾는 것이었다.
“앗!”
율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바라자마자 저 멀리 보이는 연못, 바로 제 궁 뒤편의 비밀 장소였다!
사냥터로 채택된 후원은 요현궁과 전혀 가깝지 않았다. 도망치느라 종일 뛰었다곤 하나 이리 달려 당도할 거리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작 도착했겠지.
아무래도 이상해.
숲이 도와주어 고마운 마음 반, 떨떠름함 반. 율은 일단 고마움을 챙기기로 했다. 후원에서 벗어나게 해 줬으므로.
연못이 보인다면 제 궁까지도 금방이다.
율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마저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다 왔다는 기쁨에 젖어 잘린 머리칼은 어느새 잊혔다.
더한 기쁨은 연못을 코앞에 두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영에 놀란 율은 허둥지둥 숨으려 했다.
그자가 모습을 드러낸 게 더 일렀지만.
“율!”
세상에…… 서방, 내 서방이다.
그리워 마지않던 내 용 서방.
어찌 이곳에 있느냐고, 내가 빈 소원을 들었느냐고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니, 실은 제일 먼저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룡아, 서룡……!”
율이 달리는 것보다 서방이 가까워지는 속도가 빨랐다. 서방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휘청대는 율을 받아 안으려 했다.
색시가 그 자리에 멈칫하지만 않았다면.
‘저게…… 뭐지?’
무려 서방을 앞에 두고, 율은 저 멀리서 인위적으로 빛나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무언가가 햇살에 비쳐 유독 그곳만 반짝였다. 반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뭔가가 있어.
‘숲이 알려 주는 경고인가?’
길을 내어 주었듯 저 또한 같은 맥락의 알림인지도. 주의력 부족한 자신이 저 안에 숨은 걸 단번에 의식한 걸 보면 말이다.
‘설마, 황제?’
아쉽게도 ‘그것’의 정체까지는 미궁이었다. 결국 서방이 먼저 도달해 두 팔을 벌렸다.
“찾았다, 내 색시.”
마침내 이루어진 재회.
율은 내심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도망치면서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품에 안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서방아!”
하여간 나 챙기는 사람은 내 서방밖에 없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서방 놈 각시 할 맛 난다.
죽을 만치 힘들었던 위기감이 허무할 정도로 싹 씻겨 내려갔다. 율이 서방 가슴에 눈 코 입 파묻은 채 안락함 만끽하고 있을 때, 서룡이 잊고 있던 것을 지적했다.
“이 머리는 어찌 된 게요?”
“아, 이건…….”
황제 따돌리느라 너 따라서 분신 만들고 튀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
자신이 서방 찾았던 만큼 서방도 저 찾아 헤맨 낌새였다. 율은 머쓱한 낯으로 짧아진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어, 어울려?”
“…….”
서방아, 내 서방아. 나도 이 변명이 허술한 줄 안다. 왜 모르겠니. 하지만 그리 눈살 찌푸릴 것도 없지 않아. 색시 머쓱하게.
반가운 마음 한가득이건만, 서방의 딱딱한 미간에 율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했다. 마침 신경 쓰이는 점도 있어 서방 팔 밖으로 빼꼼 고개 내민다.
“응……?”
조금 전까지 햇빛에 반짝이기만 했던 것. 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들에게서 수십여 걸음 떨어진 숲속.
우거진 풀숲 사이의…….
“……!”
서방과 똑 닮은 사내.
금후 태자가 서방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숲이 바람을 타고 가지 열어 율이 알고자 했던 곳을 보여 주었다.
안심하기도 잠시. 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서, 서방아.”
네 뒤에 화살이 있다. 네 등 노리는 이, 착하디착한 동생 전하야.
곱게 키운 녀석이 무슨 연유로 저러는고? 진작 활시위를 당겨 홱 놓을 시기만 가늠하고 있다. 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 버렸다. 황제가 저를 죽이려 할 때보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한편, 색시 질린 연유가 등 뒤의 같잖은 것 때문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서방이다. 그도 그럴 게 서룡은 금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제깟 것이 화살 쏘면 뭐 어쩔 테냐. 설령 맞아 봤자 가렵고 말지, 별일도 아니다.
그보다 겨우 찾은 색시 몰골이 심상치 않다. 용언 걸어 준 말은커녕 옷과 신발, 머리카락까지 죄다 강도 맞았는지 성한 곳이 없다.
‘이거 원, 보지만 안 털렸지 한참 굴렀구나.’
틀렸으면 했던 예상이다. 서룡― 하고, 어쩐지 본신 이름 부르는 소리 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색시가 험한 길 뒹굴며 서방 찾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모르는 작자, 또 있다.
태자는 숲에 숨긴 제 모습을 율에게 들켰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동시에 율은 서방이 태자를 같잖아하여 내버려 둔 사실을 몰랐다.
휘익―.
막을 수 없는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다.
지긋지긋한 활. 온종일 사람 괴롭히더니 결국 이리 되는구나.
율은 제 서방이 이 땅에서 가장 강한 존재임을 알았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아니었나 싶다.
제 머리 만지작거리며 사색에 잠긴 서방. 율은 죽을힘 다해 은애하는 이를 밀쳤다.
딱 한 걸음.
뒤로 주춤한 그 한 걸음이 상황을 바꿨다.
“어…….”
율은 제 가슴에 꽂힌 화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형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율이 고꾸라졌다. 용이 옆으로 쓰러지는 각시 몸을 받았다. 드물게 질린 기색인 그가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호통쳤다.
“이 어리석은 색시야! 본신이 누구인 줄 알면서 이런 짓을 하는고?”
“서…….”
서룡…….
뻐끔대는 입 모양을 봤는지 아닌지 용 서방이 심히 타박했다.
“이……, 이 바보 같은.”
분명 심각한 상황이다. 율도 용이 이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어쩐지 즐거워 율은 스스로 미쳤구나, 판단했다.
그래도 화내지 마라, 서방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강인한 서방. 당신 강한 것 내 어찌 모르나. 그래도 내 사랑아, 사람 맘이 딱 그렇게 생각대로 떨어지지가 않어.
당신 다치는 것 보고 싶지 않어.
비웃을 거니? 약한 버러지 주제에 나섰다고……. 그래서 그리 화난 얼굴만 보여 줄 거니?
흥……. 말문은 막힌 듯하구나. 속 시원하다.
가물가물 깜빡이던 눈이 사락 감겼다. 희미한 웃음기가 어린 것 같은 입술은 기분 탓이리라.
“…….”
그래, 막판에 색시 바라던 바 이루어졌구나.
서룡은 율의 가슴에서 조심스럽게 화살을 빼냈다. 맥을 가늠해 보니 매우 약하지만 아직 멈추진 않았다.
그러잖아도 핏기 옅은 아내, 송장이 친구 하자 하겠다.
폭풍 전이 가장 평화롭다던가. 서룡은 문득 단내를 맡았다. 채 가시지 않은 사랑 단내. 매일 안아서 그에게 밴 달큼한 색시 향기가 용신의 코를 녹였다.
“내…… 너무 많이 취했구나.”
겨우 입 밖에 낸 음성은 심하게 잠겨 거칠했다.
“어리석게도…….”
네 향기가 너무 좋아 쓰레기 소굴에 핀 꽃인 줄 알면서도 너를 파내 옮기지 않았지. 그저 네 곁에 잠시 앉는 걸 택했을 뿐.
“혀, 형님……. 형님.”
그새 달려온 태자가 사색이 되어 율 전하 곁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거기 무슨 소란인가!”
어찌저찌 쫓아온 황제와 그 무리도 섞였다.
서룡은 율을 안아 든 채 종내 빛 잃은 태자의 금안을 내려다보았다.
“……더러운 것들.”
미친 것들이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 줄 알고 있었지.
쿠르릉……. 용의 심기에 동조한 하늘이 심상찮게 진동했다. 쨍하니 맑은 하늘이건만 소리만 들으면 폭우 속 천둥번개가 내리기 직전이었다.
“나무가 괴로워하거든 구름이 거둬 줘야지…….”
더러운 놈들 눈치 까고 피하랴, 불안하게 울던 하늘에서 곧장 벼락이 떨어졌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세찬 벼락 세례, 고작 한두 번이 아니다. 우르르쾅! 이 땅을 멸할 듯 요란하고도 우렁차게 내리친다. 땅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벼락 맞아 주변이 삽시간에 지옥으로 탈바꿈했다.
“폐하!”
와중에 황제가 벼락에 맞은 모양이었다.
엄살은……. 어차피 이런 거론 죽지도 않는데.
용의 분노에 동조한 하늘이 내린 자연재해다. 황제를 짓이긴 건 하늘의 짓이지, 용이 저이를 죽이라 명령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목숨 앗아 갈 수준 역시 아니었다.
“율아, 율아. 어여쁜 내 색시…….”
그러거나 말거나 서룡은 내내 율을 보듬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눈 돌릴 의지조차 없었다. 호흡이 너무 약하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맥이 멈춰 버릴까 두렵다.
널 잃을까 두렵다.
상처 입은 피조물을 온전한 상태로 돌리는 힘은 본신의 것이었다. 특히나 밖에서 당한 횡액을 정화하고 생기를 불어 넣으려면 본체의 모습이어야 했다.
그것은 오직 용의 힘. 다른 것을 덧입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힘이다.
그리고 ‘한 목숨 대신하여 그림자 황자로 살아 달라’는 사명이 끊어지기 전에는 본체로 현신해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다. 서룡이 구태여 율을 꿈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있었다.
본체로 돌아가기만 하면…….
“서…….”
너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네 서방을 부르려 했을까.
내리감은 눈. 그 찰나 네게서 후련함이 보이는 듯했다. 고생스런 삶, 이제 끝나는구나. 수고하였다. 그러한 의미였니?
“……아니야.”
너는 살 거다. 내 곁에서 오래오래 살 거야.
절대 나 홀로 두고 죽지 못해.
이 인간이 없으면 초조하다. 어여쁘다 했던 것, 실상 이미 홀로 맺은 각인이었으매 종국엔 그이의 결핍에 들어가고팠음을, 서룡은 이제 와 깨달았다.
착하고 욕심 없는 사람. 저는 그런 이의 욕심이 되고 싶었다. 지엄한 사명 가진 용으로 태어나 진정 은애함을 몰랐었다. 만물을 고루 살피되 은연중 무시하고 깔봤던 용이었다.
그랬으나 신부를 잃어버릴 뻔하고서야 소중한 감각을 깨우쳤다.
“……각인했어야 했어.”
네가 나의 여의주였다면 이대로 모든 걸 부순 뒤 날개옷 입혀 하늘로 돌아갔을 텐데.
서룡이 색시를 품으로 욱여넣었다. 저에 비하면 작디작은 몸이다. 겁 많은 울보다, 멍청이다 하였는데 바보 같은 것이 어째 살 맞을 생각을 다 했을꼬.
머리와 손은 또…….
세상 무너뜨릴 듯 벼락 치는 땅에서, 서룡이 신부를 안고 있는 곳만 유리되었다. 분노는 전연 가라앉지 않아 끝내 황제와 무리들을 모조리 짓이겼다.
고요한 숲.
서룡은 방향을 돌렸다. 사박사박. 그 걸음이 향하는 곳, 신부의 거처였다. 허름하지만 아늑한 보금자리.
기이한 일이다.
용이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머리꼭지부터 검은 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직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온전한 은발과 두 개의 뿔이었다.
본신이 본체를 되찾았다.
“……하.”
사명이 끊겼다.
벼락이 목숨은 저버리지 못하더라도 반복하여 쥐어 팬 인간을 의식불명으로 만들 순 있었다. 황제를 보필하던 연씨 또한 그에 휩쓸려 화를 입었다. 그로 인해 계약을 유지할 근원이 유명무실해졌으니 그림자 목숨 노릇 할 이유도 사라진 것이었다.
힘을 되찾았다. 서룡은 그 자리에 율을 내려놓았다. 거처까지 갈 여유도 없었다.
그는 관자놀이부터 이어진 뿔의 뿌리를 감싸 쥐었다. 그대로 힘을 주어 왼쪽 뿔을 뚝 부러뜨린다.
“나를 포기하지 말아라.”
네가 없으면 안 된다.
본신을 포기하지 말아라. 체념하지도 말아라. 울고 웃으며 투정 부려라. 그리하여 온 마음으로 본신을 은애하라. 그러면 본신 또한 만물이 아닌 너만의 신이자 대지가 되어 줄 테니.
지금부터 네가 나의 역린이다. 가장 아프고도 여린 비늘. 그것이 내 은애함이다. 모두에게 강해도 네겐 약할 것이고, 네 앞에선 한낱 사랑에 눈먼 어리석은 이일 것이다.
용의 뿔은 순수한 정기가 담긴 힘이었다. 땅을 다지고 생기를 불어 넣을 때 쓰는 거대한 힘이다.
용은 망설이지 않고 짝에게 뿔을 흡수시켰다.
과연, 옅었던 호흡이 편안해졌다. 긁히고 베였던 상처가 사라지며 잘렸던 머리 타래도 쑥쑥 자랐다.
두 뺨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색시가 낭군의 품에서 색색 곤한 숨을 내쉬었다. 용은 신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좋은 꿈 꾸거라.”
곤히 자거라. 내 너를 위해 비 내리겠다. 꿈에서 깨면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지.
쿠르릉, 우르릉. 방금까지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었다. 천둥번개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건 투둑,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
쏴아아아―.
비가 내린다. 고운 신부 자장자장 재우는 신랑의 비였다.
***
율을 궁에 데려다 놓은 서룡은 즉시 구름으로 결계를 쳤다. 본신을 막는 것은 이제 무엇도 없으니 피조물을 죽이는 게 아닌 이상 힘을 가려야 할 이유 또한 전무했다.
그런 다음 그는 숲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처리를 미루지 않을 참이었다.
예상대로 황제와 귀족들은 벼락에 당해 널브러져 있었다. 와중에 몸 부지한 놈이 있긴 하였는지 발 동동 구르며 이 느림보들 언제 오느냐 욕을 하였다.
저것들 모두 산 채로 묻어 버릴까…….
방법은 쉽다. 그러나 묘하게 아쉬웠다. 서룡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다 무릎 꿇은 채 기절한 태자를 발견했다.
“흐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태자의 멱을 잡아채 신나게 이동했다. 목적지는 익숙하디익숙한―.
‘대리 황자’의 궁.
사시사철 밤낮으로 침침한 궁에 등불이 밝았다. 전각 자체가 요요한 붉은빛이라 보기만 해도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서룡은 주먹을 말아 쥐고 태자의 뺨을 갈겼다.
“일어나라, 무엄한 것.”
“윽…….”
벼락이 칠 당시 용 근처에 있었던 터라 태자의 부상은 심하지 않았다. 청년은 정신이 번쩍 드는 통증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여긴…….”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화르륵, 등잔의 불길이 일시에 커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서룡을 살피던 태자가 멈칫했다.
은발, 금안, 뿔. 그리고 인외의 동공.
“……서룡대제?”
“그래. 그 이름도 내 것이지.”
용은 재미난 놀잇감을 둔 사람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곤 아예 태자를 놓아주더니 그 앞에서 서서히 모습을 바꿨다.
“아…….”
“한동안은 이 모습으로 지냈다만.”
금원후.
마치 태자가 스스로를 내려다보는 장면 같았다.
금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림자가 저보다 못하다 여겨지지 않았던 이유. 자꾸 저 존재가 거슬리고 자존심이 긁혔던 이유. 같은 금안이되 다르게 빛났던 이유.
저 사내가 진실로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룡은 까마득히 어린 인간을 굽어보았다.
“내 인간의 사명에 엮여 지금껏 본신을 취하지 못했으나 오늘로 힘을 되찾은 터, 잘못된 줄기를 바로잡을 것이다.”
경고하는 어조는 내용과 달리 퍽 상냥했다.
“염려 말거라. 본신은 네 하찮은 목숨 따위 가져갈 뜻이 없다. 너는 다만 성숙한 어른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기거하며 본신의 사소한 버릇 하나, 말투 하나 옮겨 익히거라. 어른이 되었다 판단되면 내 알아서 풀어 줄 터이니.”
흥……. 빡빡한 도련님이 상스런 입버릇을 얼마나 버틸지 궁금한걸.
“이른바 너는 이 황가의 마지막 대리 황자다. 존경하는 형님은 이 모습으로 취할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대리 만족이라도 하렴. 그쯤은 막지 않으마.”
겉으로는 상냥하디상냥한 형수의 자세이다. 실상 용의 속내는 비웃음과 차가운 불로 펄펄 끓었다.
배은망덕한 것. 어리석은 것. 네 잘못을 네가 알렷다. 너는 그이의 기둥으로서 너 키워 준 부모를 보듬었어야 했다. 한 몸 바쳐 보필했더니 은혜를 이리 갚아?
‘그이가 헛 키웠구나, 헛 키웠어.’
율의 손에 자란 기억으로 평생 되새길 좋은 추억은 충분히 얻었을 터다. 서룡이 내린 벌은 제 손으로 내버린 행복을 되새기며 괴로워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네가 놓친 게 무엇인지 곱씹도록 하렴, 어리석은 사내야.
서룡은 할 말을 마친 뒤 분신을 꺼냈다.
“죽지 않게 살펴.”
‘금원후’에게 착실히 명령한 다음, 호위의 기억을 지워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서룡이 허락하지 않는 한 아무도 이곳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할 터였다.
도련님이 얼마나 버틸까? 사흘? 일주일? 저 잘났다 믿고 있던 놈이 회까닥 미쳐 자결하려 들기까진 짐작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서룡은 즐겁게 웃었다.
아니, 넌 못 죽어.
네겐 너희들이 자초한 몰락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으니.
제 나름대로는 호의다. 형님에게 집착하지만 않았다면 올곧게 나아갈 수도 있었을 아이였다. 근본부터 잘못된 이는 따로 있고 말이다.
서룡은 황제의 거처인 양오전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황제는 침전에 누워 오락가락하고 있을 터였다.
“…….”
그러다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오셨군요, 태자.”
황후.
금율, 금후 형제를 세상에 배출한 여인은 유달리 작고 가녀린 사람이었다. 장성한 두 아들을 둔 만큼 적지 않은 나이일 텐데, 눈동자가 투명하고 묘하게 말간 빛이 돌아 소녀 같은 인상이었다.
‘색시가 누굴 닮았는가 하였더니 여기서 왔구먼.’
서룡이 궁에 들어온 지 수 년이 지났지만 황후를 목전에 둔 적은 손에 꼽았다. 그마저도 대리 목숨 역할인지라 몰래 스쳐 지나간 게 전부였다.
먼저 말문을 연 쪽은 황후였다.
“내 아드님이 아니군요.”
서룡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알맹이를 쉽게 들킬 만치 허술하게 둔갑하지 않았는데?
가운데엔 시름시름 신음하는 황제가 있고, 황후와 서룡은 각기 양쪽에 나누어 앉아 서로를 관찰했다.
“뒷방에 앉아 하는 일 없어도 이 몸으로 낳은 아드님 알아볼 줄은 안답니다.”
“……그렇군. 실로 신묘한 눈이오.”
“그렇지도 않습니다. 단지 확연히 달라 알아보기 쉬웠을 뿐입니다.”
“확연히 다르다?”
지아비 쓰러진 모습을 힐끗 곁눈질한 이가 이내 서룡을 똑바로 응시했다.
“예.”
“어떤 점이 그렇소?”
“광증 없이 맑은 빛이시지요.”
예고 없이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서룡은 오늘 벌써 두 번째로 얼이 빠졌다. 색시가 이따금 본신을 놀라게 하는 점 또한 어미에게서 받은 모양이었다.
“오래되고 오래된 것은 새 통에 담아도 묵은 흔적을 가릴 수 없더랍니다. 하물며 그것이 사람의 피라, 고인 물에서 풍기는 썩은 내를 한낱 평범한 인간이 어찌 가리겠습니까?”
같은 피에 이끌리는 광증. 곧게 가다가도 어느 순간 미치는 증상이 썩은 내가 아니고 무어야.
서룡은 침전에 들어설 때만 해도 ‘금후’의 모습으로 황제를 벌할 작정이었다. 이 나라에 내렸던 가호를 거둬들이고 스스로 폐태자 선언한 뒤 황제의 숨통을 끊으면 썩 재미있는 결말이리라.
“귀인께선 광인을 벌하러 오셨습니까?”
황후가 덤덤히 물었다. 서룡은 수긍했다.
“그렇소. 본신이 내린 힘, 거두는 것도 본신이 하여야 마땅하지.”
“그리되면 힘이 가신 광인의 몸뚱어리는 어찌 됩니까?”
바라는 대답이 있는 건가? 이번엔 서룡이 물었다.
“어찌 되었으면 하는데?”
“살아 있으면 산 채로 묻을 것이요, 황천길 건넌다 하면 그 또한 묻을 것입니다.”
여인에게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담담하고 덤덤하여 ‘내일 낮것상에 이 반찬 올리거라’ 하는 투로도 들림 직했다.
그녀는 피로해 보였다.
이건 서룡도 얼추 익숙한 감정이다. 미친 아비에게 처맞은 율이 숨죽여 울고 나면 이런 얼굴로 곯아떨어지곤 했으니까.
그리고 체념, 포기.
모두 피로함에서 온 무리다.
서룡은 둔갑을 풀었다. 속일 사람이 없는 이상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황후는 서룡을 마주한 순간조차도 평연했다. 서룡은 그 반응이 퍽 흥미로웠다.
“말마따나 본신이 힘을 거두어도 신체는 살아 숨 쉴 것이다. 네 뜻대로 하렴. 본신의 신부 품고 낳아 준 대가로 네겐 관심 두지 않으마.”
황제의 아내, 태자의 어미가 가솔을 단속하고 마침내 썩은 핏줄의 몰락을 선언하는 방법도 좋겠지. 사람 목숨에 직접 손대지 않았으니 서룡이 감내해야 할 업보도 없고.
서룡은 다만 궁금했다.
“짐작할지 모르겠다만 네가 낳은 금율 황자, 본신이 신부 삼았음이다. 기껏 사내로 키워 낸 것이 계집처럼 신부 되어 억울하진 않더냐?”
황후가 답했다.
“무엇이 억울하겠습니까? 그 아이에겐 본디 어미도, 아비도 없습니다. 방관자와 폭군만이 존재할 따름이지요. 세상이 그러했듯 그 아이도 세상에 관심 두지 않고 지아비 품에서 행복하면 될 것입니다.”
흠……. 차갑군, 차가워.
내 신부는 저리 차가워지지 않도록 잘하여야겠다.
***
투둑, 툭.
빗소리가 창을 뚫고 들어왔다. 서룡이 일을 일단락 짓고 돌아왔을 때도 색시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서룡은 보드라운 숨소리를 즐기며 저 역시 색시 곁에 붙어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으로 들이닥치는 노호성.
「룡이, 네 이놈! 썩 나타나지 못할까!」
하늘의 군주.
옥황상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