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지금 선우재덕과 전준호는 대부분의 천군이 그렇듯 전통 조선의 복식이 아닌 천군
특유의 얼룩무늬 전투복에 국방색 항공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상투와 망건, 갓
등이 없는 특유의 짧은 머리는 조선사람들과 대비되어 쉽게 구분이 되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양새는 그만큼 쉽게 백성들의 눈에 띠였다.
점심참이 되어 국밥 한 사발 먹을 생각으로, 두 사람이 근처의 한 주막 앞에 말을
매고 안으로 들어가자 주막 안에 있던 손님들이 분분히 일어나 그들에게 인사를 한다.
"아이구, 안녕하신가요? 천군 나으리들 아닌가벼요?"
"참말로 천군 나으리들 인갑네요잉.. 점심 드시게요? 이쪽으로...어여 이쪽으로..."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백성들은 대부분이 허름한 차림의 일반 상민인 경우가 많았다.
두 사람은 조선 백성들의 그런 환대가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주모(酒母)로 보이는 아낙이 와서는,
"뭘 드릴깝쇼? 나으리들."
하며 묻는다. 약간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에 정겨운 웃음을 띄고 말하는 모양이
밉지가 않다.
"난 뜨끈한 선지국밥이나 한 그릇 말아 주시오."
선우재덕이 이렇게 주문하자 옆에 앉은 전준호는,
"나는 라면 있으면 하나 끓여주시오. 아! 그리고 식은 밥도 있으면 한 덩이 주시구려.
"
군에 있을 때도 어지간히 먹던 라면이 물리지도 않는지 대뜸 라면을 주문하는
전준호였다.
신기도감에서 나온 라면은 처음 시장에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길가의 허름한 주막에서도 팔리는,
만 백성의 사랑을 받는 물건이 되었다.
"탁배기도 한 사발씩 올릴깝쇼?"
주모가 주문을 받으며 이렇게 묻자 선우재덕은 입맛이 당기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말을 타야한다는 생각에 거절한다.
"탁배기는 됐소. 말을 타야하기에..."
잠시후 주문한 선지국밥과 라면이 나오는데, 상 한쪽에 탁배기 두 사발이 곁들여져
있다.
"탁배기는 놔두라 하였거늘...?"
선우재덕이 약간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자, 옆자리에 앉자 있던 촌로(村老)가,
"그냥 드십시오, 나으리들. 이 늙은이의 성의올습니다요..."
이렇게 말하자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선우재덕과 전준호는 촌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허겁지겁 선지국밥과 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종로를 떠나서 광주로 향하면서 숨가쁘게 말을 몰아서 그런지 말도 못하게 시장했다.
그리고 아직 한 겨울이라 상당히 추운, 이런 날에 말을 모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두 사람이었으니 뜨거운 국물이 가득 들어 있는 음식을 보자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릇을 비우기 시작한다.
주모가 인심을 썼는지 뜨끈한 선지국밥에는 선지와 우거지가 그득했고, 라면도
맛있었다. 거기에 얼음이 사각사각 씹히는 탁배기의 맛도 감질나게 달았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운 선우재덕이 주모를 청하여 국밥과 라면 값을 계산하려고
하자,
"아이고, 이미 아까 그 영감님이 셈을 하셨습니다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새삼스럽게 조선의 후박(厚朴)한 인심에 절로 기분이 훈훈해 졌는데, 그런
훈훈한 기분을 느낀 사람은 두 사람말고도 주변의 일반 조선 백성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백성들에게 있어 섭정공 김영훈과 천군의 등장은 눈먼 소경이
광명을 얻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크나큰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