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78화 (76/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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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1864년) 운현궁 안에 설립된 대정원은 한상덕을 원장으로 하여 상주하는

인원만 80명이 넘고 조선 팔도 방방곡곡으로 파견한 인원만 800명이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와 인원을 자랑한다.

대정원에서는 외국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청국과 왜국에까지 정보원을

파견하였으니 겨우 생긴지 1년밖에 안된 대정원으로서는 실로 여러 가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중신회의가 끝나자 몇몇 대신들은 김영훈이 지시한 몇 가지 명(命)에 대한 세부적인

실천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그 대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원래부터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최한기와 김정호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운현궁에 들어온 김정호는 걸음을 옮기는 사이사이에 운현궁을 둘러보면서 불쑥,

"내가 그렇게 운현궁에 자주 온 것은 아니지만 올 때마다 놀라는 것은 과연 운현궁이

진실로 크구나 하는 것이라네."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최한기는 김정호의 그와 같은 말을 듣자,

"허-어, 그게 어디 고산자, 자네뿐이던가? 나도 그렇게 운현궁을 자주 오지는

아니하였기에 그 참다운 면목(面目)을 다 알 수 없으나 담장의 둘레가 수 리(理)에

달하고 대문의 숫자만 네 개에 이르는 것으로 봐서는 그 크기가 상당하리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라네."

"허허...자네도 그런가? 나는 나만 운현궁의 크기에 압도당한 줄 알았네 그려."

"하하하, 사람 참..."

두 사람은 영로당을 나와 대정원으로 향하면서 이렇게 운현궁의 크기를 화제로

담소를 하고 있었으니, 실제로 운현궁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 줄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여기서 운현궁의 실제 크기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신분에 따라 가옥의 대지 규모는 물론 건물의 규모에

대하여도 크기를 규제하였다.

경국대전 호전 급조가지조(給造家地條)에 의하면 대지 규모에 대하여 대군, 공주는

30부(負, 1,170평), 왕자군, 옹주는 25부(975평), 1, 2품은 15부(585평), 3, 4품은

10부(390평), 5, 6품은 8부(312평), 7품 이하 및 유음자손(有蔭子孫)은 4부(156평),

서인(庶人)은 2부(78평)를 넘지 않도록 하였다.

원래 흥선대원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직계 손이니

경국대전에 기록된 것으로 봐서는 최소한 1170평은 되는 집에 살고 있었으리라, 어디

그뿐인가. 흥선의 둘째 아들이 왕으로 등극하고 나서 증축된 부분까지 합하며 그

크기는 어마어마했으리라.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럼 과연 운현궁은 얼마큼 컸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흥선의 둘째 아들 명복이 임금-고종-으로 등극하자 대왕대비 조씨의 하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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