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93화 (9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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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두에게 간단히 할 일을 지시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전준호는 침대위로 쓰러

질 듯 몸을 날린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두고 온 가족들과 한국에 대한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왔기 때문에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대로 침대에 쓰러진 전준호는 그 상태로 어깨를 들썩이는 게 아무래도 우는

모양이다.

전준호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아왔던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가듯 떠오르는데 미칠 것만 같았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고, 거의 미치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다.

잠시 쓰러져 울던 전준호는 벌떡 일어나더니 벽장에 진열되어 있는 술을 꺼내든다.

애주가(愛酒家)인 전준호의 취향에 맞게 술은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전준호는 이름 모를 술을 한 병 따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벌컥벌컥 들이킨다.

이렇게 몇 병의 술을 비웠을까.

이미 전준호가 주저앉아 있는 바닥에는 몇 병인지 모를 많은 숫자의 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술은 취하지도 않는다.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는 전준호는 우---왁--- 하고 울부짖다가 갑자기 꺼이꺼이

통곡을 한다.

"어머니...엄마------ 보고 싶어요. 정말로 보고 싶어요----엉엉엉---"

매사에 당당했던 전준호의 모습은 어디를 가고, 이렇게 엄마를 부르면서 통곡하는

모습이 꼭 가출한 아들이 엄마가 그리워서 울부짖는 것 같다.

전준호가 이렇게 엉엉 울며 통곡을 하자 아래층에 있던 정운두와 토마스는 영문을

몰라하는데, 그래도 상관이라고 정운두가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급하게

전준호의 방이 있는 이층으로 뛰어 올라온다.

"지점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전준호의 방문을 차마 열지는 못하고 이렇게 묻는 정운우였으나,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엉엉 울고 있는 전준호의 통곡소리 뿐이 없다.

정운두는 다시 소리친다.

"지점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이렇게 소리치고 문을 열려고 하자 안에서 전준호의 호통소리가 들린다.

"아무 일 아니라구욧!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내려가서 일 보세요!!!"

전준호의 호통에 움찔하고 놀란 정운두는 잠시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아래층에는 토마스를 비롯한 왜인 종업원 몇이 무슨 일이 있기에 지점장이 저렇게

통곡을 할까 하는 주제를 가지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정운두는 왜인 종업원들에게 아무 일도 아니니 나가서 일들 보라고 지시를 하며,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선 공사관에 좀 다녀올 테니 그동안 토마스 네가 가게 좀 보고 있어라."

하고는 토마스가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듣지도 않고 횅하니 쥬신상사를 나선다.

눈치 빠른 정운두가 생각하기에 전준호에게 무슨 큰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말못할 사정이라면, 같은 천군이라면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미 나가사끼에 처음 온 날 밤 정운두도 묵도한 바와 같이 전준호와 공사관 소속의

천군은 그 친분이 돈독해 보였기 때문이다.

쥬신상사를 나온 정운두는 조선공사관이 있는 미나미야테 언덕으로 뛰기 시작한다.

한참을 달리자 멀리로 미나미야테 언덕이 보이고 조선공사관의 건물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조선공사관에 도착한 정운두는 공사관의 문고리를 두드린다.

쇠로 된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의 문고리는 탕탕탕 하고 소리를 내는데 잠시

후 누군가가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박지현이다.

"정운두 부 지점장님 아니십니까?"

"안녕하시오. 박지현씨. 혹시 공사님이나 경비중대장님 안에 계십니까?"

턱에 차 오른 숨을 고르며 간신히 이렇게 말한 정운두의 모습에 박지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리고 먼저 한수길에게 달려가 정운두가 온 것을 알린다.

잠시 후 한성호가 나오면서,

"안녕하십니까? 정운두씨."

"안녕하세요. 중대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나요?"

자리에 안지가 무섭게 찾아온 용무부터 묻는 한성호였으나, 정운두에게는 오히려

그런 급한 성정(性情)의 한성호가 더 좋았다. 물론 지금 같은 경우에만...

"실은 우리 지점장님께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 기장님, 아니 지점장님이요?"

"그렇습니다."

정운두는 지금의 전준호의 상태를 소상하게 한성호에게 얘기를 하는데, 한성호로서는

도무지 전준호가 왜 그렇게 통곡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쥬신상사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안 좋은 일이 있을 게 무에 있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출장 갔다 온 결과는 대

성공이었는데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일단 정운두씨는 먼저 쥬신상사로 돌아가세요. 제가 공사님

모시고 바로 뒤따라서 가겠습니다."

"빨리 오셔야 합니다. 우리 지점장님께 뭔 일이라고 생긴다면..."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돌아가 계세요. 우리가 바로 뒤따라 갈 테니..."

정운두는 한성호가 이렇게 말하자 정운두는 한성호에게 제발 빨리 오라는 말을

남기고 조선공사관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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