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97화 (95/318)

92.

소만(小滿)도 지나 망종(芒種)으로 접어드는 음력 5월 말이 되면 전국은 바야흐로 한

여름의 더위가 시작된다.

이때가 되면 전국의 논에서는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고 밭에서는 김매기에 분주할

때다.

또 이때가 되면 보리가 패기 시작해서 전국의 보리농사 짓는 농가에서는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 보리와 함께 밀도 수확을 하여 우리네

여름철을 대표하는 주식으로써 그 몫을 다하게 된다.

봄부터 조선백성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었던 각종 봄나물이 들어가고 씀바귀 순이

뻗어 오르며 꽃을 피우는 때가 바로 이때다.

일년 중 어느 때가 한가하랴마는 농사를 업으로 삼는 일반 백성들이 가장 분주할

때가 바로 요즘이기도 했다.

"기장님, 건교부에서 보낸다는 광부(鑛夫)는 왔습니까?"

"아, 광부로 갈 사람들 말이지. 그 사람들은 지금 이미 준비되어 있네, 다행히

쓸만한 사람들로 모집을 한 모양이야."

"잘 됐군요."

전준호는 선우재덕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5월 중순께 풍백함의 문정을 받고 김종완을 비롯한 이순신함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과 잠시의 회포를 풀고 서울로 온 전준호는 쥬신상사에 오자마자 바쁘게

지내야 했다.

나가사끼에 수출할 몇 몇 상품들은 쥬신호 편으로 이미 보냈으며 이제 막부에서

주문한 총탄 이백만 발과 하지마 섬의 다카지마 탄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데리고

나가사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막부가 주문한 이백만 발의 총탄은 신기도감에서 지금 밤낮으로 생산해내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수량을 맞추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이제 광부들의 모집이

끝났으니 부산포에서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고 있을 쥬신호를 타고 나가사끼에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사실 쥬신호가 풍백함의 문정을 받고 나서 서울로 돌아온 후에 좀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아직까지 경상도 일대를 제외한 나라 안에서 왜인들을 접해 본 경험이 없는

조선사람들이쥬신호의 왜인 선원들을 보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런 걱정을 한 전준호는 쥬신호의 왜인 선원들에게 다시 나가사끼로 출발하기 전

까지는 하선하지 말 것을 단단히 지시하였다.

그리고 왜국에서 수입한 물건들을 하역한 전준호는 쥬신상사가 있는 종로로 돌아왔다.

잠시 선우재덕에게 그동안의 일과 회계장부를 보여준 전준호는 그 길로 보습곶이

집으로 달려가 자신을 애가 닳도록 기다리고 있는 아내 오씨와 반갑게 해후한 것은

물론이고 뜨거운 밤을 보내기를 몇 일이나 지났을까.

왜국으로 수출할 상품들의 준비와 막부에서 주문한 총탄의 수급문제 때문에 정신

없이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던 전준호에게 난데없이 경무청 소속의 경무관이 찾아 온

것은 쥬신호가 마포나루에 정박한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내가 쥬신호의 선주 전준호이오만, 무슨 일이오?"

"안녕하십니까요? 나으리, 혹시 쥬신호의 선원들 중에 왜인 선원이 있지 않사옵니까?"

자신을 찾아온 경무관의 용무가 쥬신호의 왜인 선원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전준호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사람들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왜인선원들의 상투 모습과 복식

등으로 인해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하선하지 못하게 하고 서둘러

상품을 준비해온 전준호였다.

의복이야 어떻게 조선 사람의 옷을 입으면 된다지만 머리에 튼 상투만큼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지라 하선시키지 못하고 배에 머물게 한 것에 대해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전준호였기에 그들의 얘기를 하는 경무관의 방문이 예사롭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왜요?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실은 어젯밤 칠패시장 뒤에 있는 색주가에서 좀 골치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전준호의 질문을 받은 경무관은 차근차근 왜인 선원들이 일으킨 일을 설명하는데,

난생 처음으로 서울 땅에 발을 들여놓은 쥬신호의 왜인 선원들은 전준호의 겁을 주는

말과 당부에 꼼짝없이 선상에서 죄수 아닌 죄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마포나루에 정박한 쥬신호의 사십여 명이 넘는 왜인 선원들은 어서 빨리 전준호가

돌아와 상품을 싣고 나가사끼로 돌아갈 날만 생각하며 며칠을 보냈는데, 낮에는

뱃전에 나와 조선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나루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소일을

하였고, 밤에는 술 한잔 걸치고 그저 잠을 자는 일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전준호의 당부기 있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모르는 지역에 왔다는 두려움에 호기심을

억누르며 지내기를 사흘 째.

아무리 전준호의 당부와 낯모를 땅에 왔다는 두려움을 간직하고 숨죽이고 있던 왜인

선원들이었지만, 어느 집단에서든지 내가 잘났네 하는 식의 모험심과 가당찮은

배짱을 가지고 있는 놈이 꼭 한 두 놈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쥬신호의 왜인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쥬신호의 모든 왜인 선원들은 대부분이 조선에 오면 동래의 초량 왜관에

머물면서 밤에는 조선 기생집에서 거나하게 걸치고 조선기생들의 살 냄새를 맡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기에 남정네들 끼리만의 맨송맨송한 술자리가 흥이 날리

없었으며, 아련하게 생각나는 조선기생들의 분 냄새와 살 냄새에 사추리 안의 물건이

난리를 부리니 도저히 참지 못한 몇 놈이 함께 기거하던 친한 조선인 선원 몇 명을

꼬드겨 밤에 몰래 하선하여 칠패시장 뒷골목의 색주가(色酒家)로 잠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칠패시장 뒤의 색주가야 마포나루에서 가까운 곳이기도 했고, 도성의 성문이 모두

잠긴 밤에 갈 곳은 거기 밖에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그곳으로 가긴 했지만, 원래 서울

장안에서 색주가로 유명한 곳은 따로 있었다.

그곳은 바로 지금의 파고다 공원 뒤의 낙원동 익선동 돈의동 통의동 일대였는데

그곳은 색주가가 많고 시중드는 여인들의 자태가 빼어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색주가가 원래 그렇듯이 단지 술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시중드는 아낙을 두어 술과

여자를 함께 파는 것으로 장안의 젊은 총각들과 시골에서 올라오는 상인들을

유혹하였다고 한다.

이런 종로 일대의 색주가다 보니 원래의 역사에서 왜놈들에 의해 들여온 공창(公娼)

제도가 서울에 자리잡은 최대의 윤락가 종삼(鍾三)으로 발전하는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각설하고, 이렇게 칠패시장 뒷골목의 허름한 색주가를 물어물어 찾아간 왜인 선원 몇

명과 조선인 선원 몇 명은 술 한잔 걸치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게 되니

바야흐로 목구멍의 때가 벗겨지고 사타구니가 흐물흐물 해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역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오입질하고 나서 그 오입 값이 아까운 놈들은 꼭

있게 마련이었으니 왜인 선원 한 놈이 지 물건 작은 것은 탓하지 않고 계집 구멍 큰

것을 물고늘어지면서,

"나는 돈 없다, 아니 못 주겠다. 내 살면서 오입질로 날 샌 적도 많고, 여러 계집의

허다한 구멍을 다 파 보았지만 이렇게 큰 구멍은 난생 처음이다. 무슨 구멍이 그렇게

큰가? 이것은 사람 좆은 말할 것도 없고, 말 좆이 들어가도 헐렁하겠다."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왜국 말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땡깡을 부리기 시작하니,

그 왜인 선원을 상대했던 조선 아낙의 악머구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똥물에 튀겨 죽일 왜놈 같으니, 그것도 물건이라고 달고 다니냐! 이 왜놈의

새끼야. 열 살 먹은 내 새끼 물건만도 못한 것을 달고 다니는 놈이 무슨 사내라고,

그리고 구멍을 팠으면 당연히 구멍 값을 내놓아야지 어디서 큰 소리야 큰 소리가."

일이 이렇게 돼 버리자 으레 있기 마련인 색주가의 힘께나 쓰는 기둥서방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소란을 듣고 튀어나온 왜인 선원들과 그만 패싸움이 붙고

말았다.

원래부터 거칠기 짝이 없고 힘께나 쓰던 선원들이랑 또한 왈패 짓으로 먹고살던

색주가의 기둥서방들이랑 패싸움이 붙자 자못 볼만하였다.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며 싸우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나가 떨어져 뒹구는 놈도

생기고, 어디가 부러졌는지 쓰러져서 신음하는 놈도 생겼다.

이쯤 되면 난감한 것은 조선인 선원들이다.

그래도 한솥밥을 먹는 처지였으니 왜인 선원들을 돋는 것이 마땅할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왜인 선원들을 돕자니 그들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바로 조선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조선인 선원들이 갈등을 하고 있는데, 이웃 주민의 신고로 달려온 경무관 십

여명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들어온 경무관들은 쌍절곤(雙絶棍)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붕붕 휘두르며 왜인

선원이건 조선인 기둥서방이건 사정없이 후려치며 제압을 해버렸으니, 경무관들이

휘두르던 무기가 바로 쇠좆매다. 아따 오늘은 왜이리 좆이 많이 나온다냐...?

쇠좆매는 수소의 좆을 잘라 말린 것 두 개를 끈으로 이은 것인데, 그 쇠좆매에 한 방

맞으면 어지간한 장정이라도 순식간에 쓰러트리는 위력적인 조선 포졸의

비밀병기였다.

포도청을 계승한 경무청에서 그 위력적인 쇠좆매를 그냥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무청의 경무관들은 육모방망이와 함께 쇠좆매를 항상 소지하고 다녔으니

난전이 벌어지면 쇠좆매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었다.

결국 왜인 선원들과 기둥서방들 그리고, 참고인으로 조선인 선원들까지 줄줄이

경무청으로 끌려가기에 이르렀고 쥬신상사 소속의 쥬신호 선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무관들이 쥬신상사로 전준호를 찾아오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전준호의 도움으로 왜인 선원들과 조선인 선원들은 풀려나게

되었지만, 쥬신호 왜인 선원들의 하선만큼은 앞으로 어떻게든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전준호는 더욱 굳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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