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00화 (9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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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호가 정운두의 누이동생을 만나고 있을 때, 운현궁에서는 지난해(1864년) 동지사(

冬至使)로 청국의 북경에 갔다가 지금 귀국한 전준호의 처남(妻男)인 오경석이

김영훈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오경석은 중인의 신분으로 사역원(司譯院)에서 역관으로 있으면서 청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면 항상 따라가서 통역을 할 정도로 유창한 청국말과 당시로서는 드물게

개화(開化)한 조선의 대표적 개화사상가였으니, 이러한 오경석에 의해 훗날의

역사에서 개화파의 지도자들인 김옥균과 박영효, 홍영식 등이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오경석이었으나, 그동안 중인이라는 신분상의 한계로 인하여 한낱 역관의

소임을 위하여 청국을 왕래하였던 것이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파견된 동지사의 사행에서는 당당히 부사(副使)라는 직분으로 청국에 다녀오기에

이르니, 이미 오경석의 절친한 친구인 중인 출신의 의원인 유홍기가 보위부의 대신을

역임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오경석의 출세(出世)는 오히려 늦어도 한참 늦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김영훈은 오경석의 보고와 건의를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그럼 진재(鎭齋) 영감께서는 청국의 수도인 북경에도 우리 조선의 외교관을

상주시켜야 한다는 말씀이시오?"

오경석은 김영훈에게 그동안의 청국 사정과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는데, 그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청국의 수도인 북경에도 우리 조선의 외교관이 상주하는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설립하여 적극적으로 청국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서양 제국(諸國)의

움직임까지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정에서는 왜국에도 공사관을 설립한 마당에 청국에도 당연히 격식에

맞는 외교관을 상주시키고 공관(公館)을 설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매년 한 두 차례, 또는 서너 차례에 이르는 사신을 청국에 파견하는

마당에 따로 공관을 설립한다는 것은 막대한 재정의 낭비만 초래할 뿐이라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기에 섭정공 김영훈도 그의 실행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당에 다시 오경석이 그런 주청(奏請)을 올린 것이니 김영훈은 신중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경석은 김영훈의 이러한 반문(反問)에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피력하기 시작한다.

"그렇사옵니다. 합하. 신(臣)은 이번에 북경에 가서 실로 놀라운 것을 보고 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옵니까?"

은근히 김영훈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오경석의 말이었으니, 한편으로는 오경석이

저렇게 자신하며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을 김영훈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그것은 바로 화차(火車)라는 것이옵니다."

오경석의 대답에 잠시 생각하던 김영훈은 오경석이 말한 화차라는 것이 기차(汽車)

임을 깨닫고 깜짝 놀라며 이렇게 다시 묻는다.

"화차라면 기차를 말하는 것이오?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운행하는...?"

"그렇사옵니다. 합하. 바로 그 기차가 북경에 등장하였사옵니다."

김영훈은 오경석의 말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청국 철도의 역사에 따르면 1874년에 영국의 이화양행에서 상해(

上海)-오송(吳淞) 간 오송 철도 36리를 부설한 것이 최초였다. 그러나 다음해

인명사고가 발생하여 마침내는 청국 조정에서 28.5만 량을 이화양행에 지불하고

철거하기에 이르니, 그것이 김영훈이 알고 있던 청국에 놓여진 최초의 철도였다.

그런데 오경석은 이번 사행길에서 북경에 놓여진 철도와 기차를 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오경석이 보았다는 기차와 철도는 청국 최초의 철도가 틀림없다.

청국의 철도는 오송 철도가 놓여지기 이전인 1865년에 이미 첫 선을 보이는데, 영국(

英國) 상인 듀란트리(W. Durantly)가 북경 선성문(宣成門) 밖에 약 1km의 작은

철도를 시험적으로 건설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수구 보수파들이 해괴하다고

하여 곧 철거하여 버렸다. 아마도 오경석은 듀란트리가 선성문 밖에 놓은 철도를 본

것이리라.

사실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에는 청국의 관리들은 철도의 건설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자연을 파괴하고 조상의 분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적을 유인하고 농작물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외국인의

이권요구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현대 미국의 세계적인 청국 전문가인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로이드 E. 이스트만

교수는 자신의 저서 "청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에서 그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청국인이 철도를 받아들인 것은 쉽지 않았다. 1876년 6월 영국이 건설한 오송(吳淞)

철도는 개통 5개월만에 철거당했다. 철도 부설에 대한 당시 청국 내 분위기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 배경에는 군사적·경제적·사상적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경석은 김영훈이 생각할 수 있도록 잠시의 시간을 주다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만이 아니옵니다., 합하. 신이 이번 사행길에 파악한 바로는 이미 청국에서는

조정의 실력자인 공친왕(恭親王) 혁흔과 문상(文祥),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 좌종당(左宗棠) 등의 양무파(洋務派)들이 서양오랑캐의 장점을 배워서 그 힘으로

서양을 제압하자(師夷長技以制夷)라는 주장을 하면서 서양의 우수한 군사기술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각지에 무기의 생산공장들을 속속 건설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실상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출발점은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서양의 군사적인 장점을 배워 서양을 물리치고 청국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목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공친왕을 비롯한 양무파들은 양무운동을

전개하는데 조정에 있는 기존의 완고한 수구 보수파들을 설득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앞에서 언급했던 서양오랑캐의 장점을 배워서 그 힘으로 서양을

제압하자(師夷長技以制夷論)는 논리였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서학래출중원설(西學來出中源說)을 제기하면서 보수파의

반발을 무마시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발전하여 중체서용론(

中體西用論)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양무운동은 그 출발에서 언급하였듯이 군사적인 기술과 무기의 생산을

위한 여러 기관과 공장의 설립이 추진되는데, 제일 먼저 생기는 군수공장(軍需工場)

이, 이홍장에 의한 설립된 상해의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 총포. 탄약. 기선 제조)과

남경의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 대포. 화약), 상군 출신의 민절총독( 浙總督) 좌종당(

左宗棠)에 의해 세워진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 조선소), 만주족의 귀족으로

북양삼구통상대신(北洋三口通商大臣)인 숭후(崇厚)에 의해 설립된 천진기기국(

天津機器局 화약, 포탄)의 4대 공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청국 조정에서는

각지에 대소(大小)의 군수공장이 건설하게 된다.(*1)

양무운동이 진행되던 19세기 말 청국에 건설된 군수공장의 이름과 설립연도, 소재지,

생산품은 아래의 표와 같다.

여기에서 양무파에서는 근대 해군으로의 발전도 모색하는데, 그동안 변변한 해군이

없이 그저 수사(水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동양 삼국 중에서 가장 낙후된 해군을

보유하고 있던 청국으로서는 당연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청국 조정에서는 총세무사(總稅務司)로 근무하던 영국인 레이(Horatio Nelson

Lay)에게 그 문제를 일임하여 근대적인 해군 건설을 위한 군함을 구입할 것을

지시하였고, 레이는 군함의 구입은 물론 자의로 영국 해군소령 오스본(S. Osborn)

에게 중국인을 모집하게 하여 청영함대(淸英艦隊)를 편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레이의 시도는 군권(軍權)이 외국에 넘어갈 것을 염려한 이홍장(李鴻章),

증국번(曾國藩) 등의 반대로 좌절되고 마는데, 이렇게 해서 청국은 군함의

구입대금으로 엄청난 돈만 날리고 근대해군 창설의 꿈은 사라지고 만다.

양무파의 근대 해군 건설의 노력은 나중에 결실을 맺는데, 바로 1872년에 있었던

왜국의 대만(臺灣) 침공 때문이다. 왜국의 대만 침공으로 수면 하(水面下)에

가라앉아 있던 근대 해군 건설의 기치는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浮上)하여 유명한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창설로 이어지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이런 과정을 겪는 청국의 양무운동을 잘 알고 있는 김영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오경석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재 영감의 뜻은 잘 알겠소. 내 그것을 공론에 부쳐 처결할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리고 진재 영감께서는 다가올 동지사의 정사로 가셨다가 북경이나 천진에

공관을 설립하고 그곳의 책임자로 부임할 마음의 준비를 하시오. 아직 상당한 시일이

남았지만 그동안 단단히 준비하도록 하시오."

김영훈이 이렇게 말한 이상 공론에 부친다고 하는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을

오경석은 잘 알고 있었다. 뭐 지가 섭정공이니 뭐든지 지 맘대로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김영훈은 어린 임금의 두터운 신임과 신진 관료들과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자신의 권력욕과 치부의 수단으로 정권을 움직이지 않았고,

모든 일을 광명정대(光明正大)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처리하고 있는 한 어린

임금의 신임과 백성들의 지지가 한 순간에 사라질 물거품이 아닌 것을 오경석도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하옵니다, 합하. 정말 감사하옵니다."

오경석은 몇 번씩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는데 자신의 뜻을 김영훈이

받아들여서 기쁜 것도 있었지만 조선의 앞날을 위한 현명한 결단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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