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25화 (122/318)

5.

경기평야의 논이란 논은 모두 수확을 끝내고 탈곡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너른

들판에 가득 쌓여 있는 나락 더미는 보는 사람을 그저 행복하게 해 주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이 눈에 띠였는데

바로 지난번 역모에 연루된 죄수들이었다. 서울에서 남양으로 가는 길은 죄수들을

이용한 도로망 정비사업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를 비롯해서

검계의 졸자들, 이유원의 사병 졸개들을 주축으로 하는 죄수들의 무리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뤄 길을 넓히고, 지난 여름에 무너진 하천 제방을 복구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파란 죄수옷을 입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확연하게 눈에 띠었다.

그들은 손과 발에 두꺼운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곡괭이나, 삽을 이용하여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누구하나 그들에게 동정을 보내는 이가 없었으니, 감히

김영훈 섭정공 합하와 천군에게 반역한 무린 줄 알고 있는 일반 백성들이 그들에게

고운 시선을 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에는 한식보총을

들고 있는 경기지방 경무청 소속의 경무관들이 엄중히 경계를 하고 있었기에 일반

백성들은 가까이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관(官)에 대한 인식이 쉽게 바뀔 리는 만무하였고,

그렇다고 조선의 관헌들의 의식이 백성들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의식으로

전환하기에는 아직까지는 요원한 일이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운현궁을 출발한 김영훈과 한상덕은 그들을 호위하는 군사들 열

둘을 이끌고 지난번에 최현필이 가져온 러시아 총독이 선물한 군마(軍馬)를 타고

수원을 거쳐 남양으로 오고 있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는 이미 널찍한 도로가 완공되었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지난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로 인해 상당히 넓은 도로가 있었던 터라 비교적 쉽게

수원까지의 길은 넓힐 수 있었는데 아직 한강에 제대로 된 다리가 없는 관계로 노들

강변에서 한강을 도강할 때는 큰배를 세내어 건너야 했던 것이 유일하게 시간을

잡아먹었던 이유였다.

그렇다고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에서처럼 배다리(舟橋)를 건설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사실 그것이 더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였기에 바로 큰 배를 이용해서 도강을 해서

이제는 남양의 지척인 화성에 이를 수 있었다.

죄수들의 노역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경기지방 경무청 소속의 종사관 이필은

멀리서 먼지 구름이 일면서 한 무리의 군마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필이 그렇게 넋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필은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하고 자신의 수하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모두 경계를 철저히 해라. 앞쪽에서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

이필의 명령이 떨어지자 죄수들을 감시하던 경무관들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며

경계를 서는 동안 한 무리의 군마는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필은 한식보총을 꼬나 쥐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추어라! 어서 말을 멈추지 못할까?"

이필의 호통을 알아들었는지 한 무리의 군마를 탄 사내들은 말의 고삐를 죄면서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는데 이필이 그 사람들을 자세히 보니 알록달록한

바지에 역시 국방색의 옷을 위에 걸친 것이 영락없는 천군이었다. 더구나 머리까지

짧음에야...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었다. 직접 확인을 하기 전에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누구요? 어디서 오는 누군지 소속을 밝히시오!"

이필의 이런 서슬에 천천히 말의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던 김영훈과 한상덕은 웃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방의 이름 없는 경무관에 불과한 자가 이렇게

완벽한 경계태세를 보여준다는 것에 대해서 흐뭇한 마음이 어찌 들지 않을쏜가...

행여 저들의 경계가 지나친 나머지 우발적인 총질을 할 우려가 있었기에 항상덕은

서둘러 말을 한다.

"멈추시오! 우리는 섭정공 합하를 모시고 남양으로 가고 있는 천군이오이다."

"응...?"

"엥...?"

이필의 수하들이 이렇게 놀라고 있는데 이필이 다시 말한다.

"정말로 섭정공 합하시옵니까? 그렇사옵니까?"

"그렇소. 이분이 바로 섭정공 합하시오. 그리고 나는 대정원장 한상덕이라고 하오."

순간 이필과 그의 수하들은 얼어붙었다.

살아 생전에 높은 사람이라고는 소속된 관아의 수령과 감사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오늘은 무슨 복이 터졌기에 이렇게 높은 사람들을 무더기로 만난다는 말인가? 잠시

정신이 나간 이필은 한상덕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이내 정신을 차리며 수하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전체--- 차리엇!"

"... 착... 착... 착..."

"섭종공 합하께 받들어 총!"

"충-성!"

"충성!"

"충성."

이필의 지휘와 경무관들의 받들어 총은 의외로 훌륭했다.

일개 지방 경무청 소속의 경무관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절도가 있었으며,

경무관들의 동작도 나무랄 데 없었다. 이것만 미루어 보더라도 그동안 각 지방에

파견된 천군 출신 병마사와 지방관헌들이 지방군 소속의 군사들과 경무관들을 어떻게

훈련시켰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김영훈은 흡족한 마음에 말에 내렸다.

김영훈의 말에서 내리자 한상덕과 호위하던 군사들도 함께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린 김영훈은 성큼성큼 걸으면서 이필에게로 가더니,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한다.

"정말 고생이 많소. 정말 장하오."

"하... 합하..."

이필은 감격해서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설마 섭정공 합하께서 직접 자신의 손을 잡아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며,

이렇게 분에 넘치는 칭찬까지 할 줄은 더더군다나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 해야 했기에, 이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황.. 황공하옵니다, 합하... 소... 소인들 같은 놈에게 이런... 아..."

"무슨 말이시오? 그대들 같은 분들이 있어 우리 조선의 앞날이 밝은 것 아니겠소?"

"..."

"이런! 내가 너무 그대를 붙잡고 있었구려, 그럼 우리는 가던 길을 갈 터이니 계속

수고해 주시오."

이렇게 말하고 뒤에 있는 한상덕에게 뭐라고 지시를 하는데, 김영훈의 지시를 받은

한상덕은 품속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더니 이필에게 다가와서 소속 관청과 이름을

물었다.

이필은 혹시나 섭정공 합하께 불경스럽게 총을 들이댄 것에 대한 죄를 묻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완벽한 경계태세와 잘 훈련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치하를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한상덕의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하고 자신의 소속 관청과 이름을 말하였다.

이필과 그의 수하 경무관들은 김영훈과 한상덕 일행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직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김영훈 일행이 지나가자

일순간에 긴장이 풀리고, 맥이 탁 풀어진 이필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는데 그

다음 이어진 그의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어메, 죽겄는 것, 아이고 나 죽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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