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39화 (136/318)

2.

청명(淸明)이 지나 곡우가 가까이 오면 조선의 농사짓는 백성들은 한 해의 농사를

지을 준비로 분주하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는 때가 바로 이때였다.

논과 밭의 무너진 둑을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모내기를 할 못자리를 설치하기

위해 볍씨를 담가야 했고, 행여 그렇게 담근 볍씨가 부정을 타, 한 해의 농사를

망칠까 저어하여 솔가지로 볍씨를 담근 가마니를 잘 덮어둔다.

그리고 이렇게 볍씨를 담그고 못자리를 준비한 후에는 써레질을 해야만 했다.

써레질은 모내기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하는 준비작업인데 이 일이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모내기 전에 논에 물을 대고 갈아놓은 논바닥을 고르고 평평하게 작업 해

놓지 않으면 뭉쳐진 흙덩어리로 인해 모내기가 어려울뿐더러 평평하지 못한 논바닥은

벼의 균일한 생장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써레질까지 끝나면 모내기 시작 전까지 며칠의 시간이 남는다.

이때가 바로 곡우 즈음이다.

이때가 되면 전라도나 경상도, 강원도의 농사짓는 백성들은 잠시 짬을 내어 산으로

올라가는데 바로 곡우물을 마시기 위해서다.

흔히들 봄이 되면 나무에 물이 오른다는 표현을 하곤 하는데, 바로 나무에 오른 물을

마시기 위해 산에 오르는 풍습이 바로 곡우물 마시는 풍습이다.

전라도 해남 땅에는 두륜산이라는 명산이 있고 그 두륜산에는 대흥사(大興寺)라는

유서 깊은 고찰이 있다. 주로 전라도 해안 가의 강진, 해남, 장흥 등지에 사는

백성들은 이 곡우물을 마시기 위해 두륜산 대흥사까지 걸음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대흥사 입구에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의 부도탑이 있고 그

부도탑을 뒤로하고 일단의 사람들이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늙고 젊은 남녀가 섞인 예닐곱 명의 사람들은 양반이 아닌 상사람이 분명해 보였는데,

너도나도 손에손에 나무로 된 물동이를 들고 가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엄니, 힘들어도 쪼깨만 참으쑈. 이제 거진 다 왔구만요."

"내 걱정은 하덜 말고 어여 싸게싸게 가기나 혀. 어여 퍼뜩 가랑께..."

"헌디, 참말로 엄니는 한양까정 곡우물을 들고 가실라요?"

"허면...? 니 눈에는 시방 이 늙은 에미가 장난허는 것 맹키로 보이냐?"

"고것이 아니고라... 한양이라 천리길이 어디라고, 그 먼길을 곡무물을 이고 갈

생각을 혀냐 깝깝혀서 하는 말이지라..."

자식이 분명해 보이는 젊은 사내가 이렇게 말을 하며 산길을 올라가자 어머니라고

불린 늙은 아낙이 짚고 있던 지팡이로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며 이렇게 말한다.

"이눔아! 이 천하에 고얀 눔아. 우리 같은 농투성이들이 올 봄부터 제 논을 가지고

농사를 질 수 있는 것이 누구 땜시 비롯됐는지 아는 놈이 그런 소리를 허는 거여

시방! 이런 천하의 고얀 눔 같으니..."

"아이구, 왜 자꾸 때리는 것씨요, 참말로... 내는 엄니가 걱정이 된께 허는 소리

아니요... 참말로, 아덜 말도 안 듣는 엄니는 세상천지에 울 엄니뿐이 없을꺼구만유."

일이 이쯤 돌아가자 동행한 장년의 사내가 뒤에서 뭐라고 말리는 소리를 한다.

"아짐씨도 고만 허쑈. 글구 복동이 자네도 고만허드라고잉... 자네 엄니가

주상전하와 섭정공 합하께 귀한 곡우물을 드리러 한양에 가신다고 허는디 어쩔

것이냐. 우덜이 이해혀야지. 글구 아짐씨 말도 맞고. 우리 같은 농투성이들이 우리

땅을 가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섭정공 합하 덕분 아니 것냐. 복동이 자네가

이해허드라고...잉..."

"아저씨는 시방 지가 그걸 뭐라고 허는 게 아니잔여요... 내는 엄니가 그 먼

한양꺼정 어찌케 갈지 그 걱정을 허는 것이 아니오... 시방."

복동이라 불린 청년은 어머니가 한양 천리 길을 어떻게 올라갈지 그게 걱정이었다.

자신도 농사일만 아니라면 어머니를 보시고 한양까지 가고 싶고, 그래서 주상전하의

가례(嘉禮)도 구경하고 싶고, 또 주상전하와 섭정공 합하께 대흥사의 유명한 고로쇠

약수도 드시라고 진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비록 십 년 동안 분할해서 토지

대금을 납부해야 하지만 올해 처음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마당에 한양까지

왔다갔다 최소한 두 달은 족히 걸리는 그 길을 어떻게 갈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강진에서 배를 타고 한양까지 올라간다고 하지만 쉰이 넘은 노친네가 어찌 그 뱃길을

견딜 것인가. 그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도, 참 ... 걱정허덜 말게. 우리 골 원님께서 수운선을 대 주신다고 혔고, 또

관아의 관헌들이 주상전하의 가례를 보기 위해 상경하는 노인들을 잘 돌봐준다고

혔응께 너무 걱정허덜 말드라고... 그나저나, 아직 멀었능가...?"

"다 왔구먼요, 바로 쩌그 있구먼요..."

복동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동그란 나무 물동이가 곳곳의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있었으며, 얇은 대나무 관을 통해 한 방울 두 방울의 고로쇠 물이 나무 물동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복동이는 가장 큰 나무 밑에 있는 물동이로 가더니 갈증이 나는지 표주박 하나를

꺼내며 대나무 관에 들이대려는데, 갑자기 딱하는 소리와 함께 별이 반짝한다.

"이 눔아. 여기 있는 것은 섭정공 합하께 드릴 물잉께 니눔은 쩌그 가서 목을 축이든

지랄을 허든 니눔 맘대로 혀!"

복동이는 투덜대며 바로 옆의 물동이로 가려고 하는데 다시 어머니의 호통이 들린다.

"이눔아! 그것은 주상전하께 드릴 물여! 딴데로 가봐!"

"알었구먼요... 엄니는 나만 미워허고 그려요."

"아니... 이눔이 그려도 지랄을 허네."

복동이와 어미니의 이런 실랑이에 따라온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너도나도

자신이 가져다 놓은 물동이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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