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166화 (163/318)

14.

섭정공 김영훈을 비롯한 조정의 모든 중신들은 지금 창덕궁 희정당에 모여 있었다.

날은 벌써 어두워져 저녁으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이제는 장가를 들어 어린

임금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소년왕(少年王)의 임어(臨御) 아래 중신회의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왕의 바로 앞에 자리한 김영훈은 좌중을 굽어보며 말한다.

"방금 통진부에 주둔하고 있는 친위천군 2연대장으로부터 장계가 올라왔기에 이렇게

여러 중신들을 모이라고 한 것이오. 친위천군 2연대장의 장계에 의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양의 함대가 지금 염하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고 하오, 아마도 지금쯤은

강화도에 상륙한 것으로 보이오"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양의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한 것 같다는 김영훈의 말이 있자,

삽시간에 좌중은 소란스러워졌다. 김영훈은 좌중의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여(余)는 이번에 염하에 진입하여 강화도에 상륙한 서양의 함대가 법국의 함대 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이미 지난 8월에 한 차례 우리 조선을 침공한 경력이 있는

저들이 다시 한 번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오."

"신(臣) 국무대신 정원용 아뢰옵니다, 합하."

"말씀하세요."

"지난 8월에도 한 차례 우리 조선을 침공한 법국함대가, 우리 조선을 재침(再侵)한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옵니다. 합하."

정원용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신들은 법국함대가 이렇게 조선을 침공한 연유를 모르고

있었다. 처음 법국함대가 침공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냥

넘어갔지만, 법국함대가 재침을 하자 필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물었던 것이다.

"저들 법국함대는 우리 조정에서 저들의 천주교 선교사들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 8000여 명을 학살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소. 그래서 이렇게 재침한 것이오."

"하오면, 저들에게 선교사들이 죽지 않음을 알리고 퇴거를 요청하면 되는 것이

아니옵니까? 저들도 생각이 있고 이성이 있는 사람일진데, 사실을 밝히고, 저들

선교사들과 대면시킨다면 오해는 어렵지 않게 풀릴 것으로 생각하옵니다만..."

정원용은 김영훈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에 말꼬리를 흐렸다. 처세에 능한 노회(

老獪)한 정원용의 모습에 김영훈은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회한 모습을

보이는 정원용일지라도 그에게는 개혁의 충실한 동반자의 한 사람으로써 미더운 노신(

老臣)임은 분명했다.

"국무대신 대감의 말씀이 맞소. 법국의 군대와 지금 살아서 여러 가지 국책사업에

동원되고 있는 법국 선교사들을 대면시킨다면 저들은 오해를 풀지도 모르는 일이오.

허나, 과연 그것으로 끝일 것 같소? 아닙니다, 아니에요. 여가 언젠가 말했듯이 서양

제국(諸國)은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후안무치한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족속들이오. 설령 저들이 곱게 물러간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힘으로

우리 조선을 강제 개항시킬 생각을 흉중(胸中)에 품고 있는 족속들이 바로 저들이란

말이오. 하여 여는 저들 선교사들과 법국의 군대와의 대면은 시키지 않을 생각이오.

아니 대면시키기는 하되 모든 상황이 종결된 뒤에 대면시킬 생각이오. 이번에 확실히

우리 조선의 힘을 보여주어, 차제(此際)에 그와 같은 가당찮은 짓거리를 다시는 할

수 없도록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오. 그리고 이번 일을 기화로 우리 조선은 더 이상

청국에 사대(事大)하지 않을 생각이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힘이 없어서, 아니

못나서, 잃어버렸던 우리의 옛 땅을 고스란히 수복할 생각이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이러한 여의 뜻을 헤아려 모든 일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 주시오. 모두들 아시겠소이까?"

"합하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김영훈의 자신감이 넘치는 소리에 좌중의 중신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대답하면서도 '과연 우리 조선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중신들도 있었고, '과연 섭정공은 무서운 사람이구나,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중신들도 있었다.

실상 법국의 선교사 일부는 이미 강화부성에 가 있었다. 김영훈은 이미 보위대신

유홍기에게 명해 외과 시술에 뛰어난 의료진을 이미 강화도에 보낸 상태였으며, 따로

선교사중에서 의학을 전공한 경력이 있는 몇 명을 가려내어 딸려보낸 상태였다.

부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고, 그 부상자를 최대한 많이 살려내는 것은

당연한 인이었다. 아무래도 강화도에 있는 한의학을 업으로 삼아 온 의원들보다는,

천군 의료진에게 교육받은 외과 시술에 능통한 의료진이 활약할 일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내린 조치였다. 물론 충분한 수량의 의약품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학을 전공한 경력으로 강화도에 보내진 선교사들은 아직까지 정식으로 법국군대와

대면시키지는 않았다. 그저 의사로서의 임무를 맡기기 위해 보낸 것이다. 물론

나중에 대면하겠지만, 당장은 대면하지 못할 것이다.

"국방대신 대감은 들으시오."

"합하, 신 김병국 대령했사옵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도성을 비롯한 기호(畿湖)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할 것이니

대감께서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시오."

"합하의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국방대신 김병국의 대답이 있자 이번에는 대정원장 한상덕을 부르는 김영훈이다.

"대정원장 대감께서는 대정원 소속의 가능한 모든 요원들을 동원하여 사회불안

요인을 제거토록 하시오. 예를 들어 지난번 침공 때처럼 난리가 났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者)와 저 혼자 살겠다고 피난 보따리를 꾸리고 도성을 빠져나가는 자,

등을 색출하여 엄벌에 처하도록 하시오."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합하."

"경무청장 이경하 영감은 어디 있소?"

"경무청장 이경하. 예, 대령했사옵니다, 합하."

"영감께서는 경무청의 수사관과 경무관들을 동원하여 난리를 틈타 준동(蠢動)할

소지가 다분한 물가(物價)를 올리는 행위를 하는 상인들과 쌀을 비롯한 생필품의

매점매석(買占賣惜)과 같은 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동태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엄벌에

처하도록 하시오. 아울러 그러한 상인들을 적발했을 시에는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시오."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합하."

"재정대신은 들이세요."

"하교(下敎) 하시옵소서."

"염하가 막혀 수운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아도 문제가 없겠소?"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과거 같으면 당장에 큰 일이 벌어졌을 것이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옵니다, 합하. 이미 육상운송 수단이 상당히 발달한 상태이고, 수운이

주를 이루던 물류도 상당 부분 육상운송으로 전환하였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리고 전국의 도로망도 많이 개선되었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

"좋군요. 모두 들으세요.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라면, 여를 비롯한 이 자리에 계신 중신들께서 단합된 모습을 우리

백성들이나 법국의 군대에게 보여주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솔선수범(率先垂範)

하여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도록 하십시다. 아시겠습니까?"

"합하의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한결같은 중신들의 대답이 있자 김영훈은 뒤에 자리잡고 있는 소년왕을 한 번

쳐다보았다.

김영훈이 자신을 쳐다보자 소녕왕은 빙그레 웃으며 모두에게 말한다. 이미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약조(約條)가 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신료들은 들으세요. 과인(寡人)이 요즘 수학(修學)하고 있는 신학문 중에

서양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한 마디 말이 있었어요. 과인은 그 말에 참으로 많은

감명을 받았어요. 그 말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에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바로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라는 뜻이에요. 서양의 전통에서 나라가 위급할 때는 스스로 나라의 어려움을

돌보기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人)하는 전통이 있다고 하네요. 그것은 평화로울 때라고

다르지 않더군요. 평화로울 때는 사회의 약한 자들이나 소외 받는 자들, 또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여러 가지 기부(寄附)나 사회봉사를 통해서 사회지도층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고 하네요. 그럼 우리 조선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여러 중신들과 같은 양반 사대부들이에요. 양반 사대부들이

바로 우리 조선의 사회지도층 인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서양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처럼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였나요? 아니지요. 아니에요. 부끄럽게도 과거 우리 조선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제 한 몸 돌보겠다고 약자들의 금품을 갈취하거나, 제 한 몸

살겠다고 난리가 일어나자마자 줄행랑을 치는 인사들이 바로 우리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었어요. 과인은 만 백성들의 어버이로써 힘없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고, 여러 중신들과 같은 양반 사대부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 한 몸

받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일반 백성들은, 여러 중신들 같이

살신성인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며, 공공에 봉사하는 양반 사대부들을 본받아

건전하고 모범적인 기풍(氣風)을 진작한다면, 우리 조선은 한결 나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과인은 생각하고 있어요. 부디 여러 중신들은 과인과 섭정공 숙부의 이러한

뜻을 잘 받들어 우리 조선이 조금 더 나은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주시길 바라겠어요. 모두들

아시겠습니까?"

"망극하옵니다, 전-하."

"망극하옵니다, 전-하."

소년왕은 흡족하다는 듯이 좌중을 굽어보았다. 김영훈은 그런 소년왕이 자랑스러웠다.

겨우 2년 반 정도에 불과한 학습과 훈육으로 이 정도의 효과를 보여준 소년왕이

한없이 미더웠다. 김영훈을 바라보는 소년왕의 눈빛도 뭔가를 얘기하는 것 같았고,

그런 소년왕의 눈빛을 받은 김영훈도 소년왕에게 눈빛으로 뭔가를 얘기하는 듯 했다.

이렇게 서로 얽힌 두 사람의 눈은 뭔가 알 수 없는 교감 같은 것이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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