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가사키의 조선 공사관 회의실에는 한 떼의 왜인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막부
행정관을 포함해서 나가사키에 주재하고 있는 제번(諸藩)의 인사들이었다. 모두들
자신들이 왜 이곳에 불려왔는지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조선 공사 신철균은 아직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참다 못한 막부의 나가사키 행정관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좌중을 대표해서 말문을 열었다.
"공사각하. 도대체 우리를 왜 부르신 것인지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궁금하십니까?"
신철균은 웃으며 답했고, 그의 비웃는 듯한 표정에서 하나부사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기분이 상한 하나부사가 막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데 신철균의 입이 다시
열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후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으음..."
이때, 밖에서 조선말이 들려왔다.
"공사님. 파크스 영국 공사와 블라디미르 아라사 영사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온 말에 신철균은 함박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기다리던 시간이
도래했다는 뜻이었다.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서양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코하마
주재 영국 공사 파크스와 나가사키 주재 아라사 영사 블라디미르가 그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반갑습니다. 신 공사."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사각하."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신철균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모두들 왜국 말에 상당히
익숙했기에 대화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리고 서로 안면이 있었기에 어색한 모습도
아니었다. 신철균과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하나부사 행정관을 비롯하여 먼저 도착해
있던 왜인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모두들 모르는 사이가 아닌지라 인사를 나누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다만 하나부사를 비롯한 왜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이 조금
어색할 뿐이었다.
"모두들 바쁘신 와중에도 우리 조선 공사관을 방문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우리 공사관으로 초청한 것은 한 가지 전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철균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기에 모두들 그의 입만 주시하고 있었다. 왜인들은
물론이고 파크스 영국 공사와 블라디미르 아라사 영사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공사관
입구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상당히 어색해 했었다. 무슨 일로 자신들을 초청한지도
모르고 온 것인데, 거기에서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신철균의 입이 다시 열렸다.
"어제 본인은 아국 조정으로부터 한 통의 전문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조선의
영토를 무단으로 공격한 함대에 관한 전문이었습니다."
좌중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동아시아 최강자인 조선의 영토를 무단으로 공격한
함대라니! 모두들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중에서도 하나부사의 얼굴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가사키 주재 조선 공사가 이렇게
말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나가사키 주재
조선 공사가 자신들을 불렀을까? 하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색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쓰마번 출신을 대표해서 불려온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부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사각하. 귀국의 영토를 누가 무단으로 공격했다는
것입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겝니까? 바로 귀국의 해군이 우리 조선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예-에?"
신철균은 일부러 사쓰마번 해군이 아닌 왜국 해군이라고 말했다. 구주 정벌전의
목적이 일개 번을 상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에 선택한 말이었다.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신철균의 말이 떨어지자 좌중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처음의 소란은
비길 것도 아니었다. 하나부사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고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정말입니까? 우리 일본의 해군이 귀국의 영토를 공격했다는 것이 진정 사실입니까?"
"그럼, 본 공사가 지어내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 그것은 아니지만..."
"본국에서 온 전문에 의하면 귀국의 국기인 일장기(日章旗)를 게양한 여덟 척
전투함과 일단의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우리 조선의 영토인 유구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래도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까?"
"잠깐만요. 지금 공사각하께서는 류큐가 귀국의 영토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유구는 엄연히 우리 조선의 영토입니다."
"공사각하께서 무엇을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어느새 하나부사는 안정을 찾고 있었다. 류큐가 조선의 영토라니?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 아닌가?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의 의중을 꿰뚫은
신철균은 한 장의 문서를 공개했다.
"이것을 보시오! 하나부사 공(公). 이것은 몇 년 전에 귀국의 도쿠가와 요시노부
장군과 오구리 다다마사 공이 전임 조선 공사이신 윤정우 공과 체결한 영토 할양에
관한 양해각서입니다. 이래도 유구가 우리 조선의 영토가 아니란 말이오?"
"꺼억!"
누군가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나부사는
떨리는 손을 뻗어 신철균이 내민 영토 할양에 관한 양해각서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틀림없었다. 신철균의 말에 한치의 그른 점도 없었다. 병인년(丙寅年 1866년) 죠슈번
정벌을 도와주는 대가로 북해도와 대마도, 류큐를 할양하는 것으로 각서는 체결되어
있었다. 거기에 찍힌 직인도 틀림없는 장군의 직인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하나부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가만히 돌아가는 사정을 살펴보던 파크스 영국
공사가 입을 열었다.
"신 공사. 귀국의 영토를 공격한 일본의 함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귀국의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파크스 영국 공사도 허둥대고 있었다. 지난달 사쓰마번의 중신 하나가 급한 일로
보자고 해서 나가사키에 왔던 터였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일로 어영부영 머물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조선의 영토가 일본 해군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어떻게 놀라지 않겠는가. 조선은 이미 동아시아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가장
신경 써야할 나라였기에 이런 그의 반응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우리 조선의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일본 해군은 어떻게 되었답니까?"
"왜국 해군이 우리 영토를 공격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당연히
전멸이지요."
"그렇군요."
"꺼어억!"
파크스 영국 공사의 대답과 동시에 숨넘어가는 소리가 디시 들렸다. 이번 숨넘어가는
소리는 더욱 컸다. 모두들 짜증 섞인 눈빛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그는 다름 아닌
사쓰마번에서 나가사키에 투자한 사업체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모리였다.
모리는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급히 숨을 멈췄다. 모리는 죽을 맛이었다.
조선 공사 신철균이 말한 함대는 사쓰마번에서 파견한 함대가 틀림없었다. 여덟 척에
이르는 대 함대와 여러 척의 수송선에 승선하고 있던 1개 사단의 군사들이 모조리
수장 당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는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했었다. 더구나 조선이 그에
따른 보복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기에 더욱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럴 수는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말도 안 된다. 우리 번의 함대가 출발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격침시키고 그
소식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날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는데 모리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다소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류큐는 자신들이 넘볼 수 없는 대상이 되고 말았기에, 그런 류큐를
점령하러 출병한 함대와 병사들이 어떻게 됐을까? 그의 뇌리를 근심 어린 걱정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나부사는 모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준 다음 신철균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공사각하. 제가 알기로는 우리 일본 함대가 류큐로 출동한 일이 없습니다. 이곳
나가사키에도 겨우 몇 척의 연락선이 있을 뿐인데, 어떻게 여덟 척이나 되는 대
함대가 류큐에 출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우리 조정에서 억지로 트집을 잡는다 이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럼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드리죠."
신철균은 이번에는 사진 몇 장을 꺼내놓았다. 유구를 공격한 함대가 수장되는 사진과
시신이 둥둥 떠다니는 사진들이었다. 돛대의 일장기가 선명한 것이 틀림없는 일본
해군이었다. 그리고 일본식 상투를 튼 군사도 보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래도 발뺌을 하시겠습니까?"
"끄응..."
"여러 말 할 것 없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건을 포함해서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불행한 사태에 대한
책임도 귀국에게 있음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 조정에서는 가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귀국을 응징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좌중에
자리한 모든 왜인들의 가슴에 한가지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죠슈번의 막강한 병력도 일순간에 휩쓸어버린 조선군이었다. 영·법·미
3국의 60여 척에 이르는 대 함대도 순식간에 몰살시킨 조선군이었다. 바야흐로
자타가 공인하는 동아시아의 강국이 조선이었다. 그런 조선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일본을 응징한단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모든 왜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
이러했다. 어안이 벙벙한 왜인들의 가슴에 신철균이 비수를 꽂았다.
"그렇게 알고 다들 돌아가 주십시오."
축객령이었다. 이제 돌아가서 상부에 알리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던지 아니면
발버둥을 치던지 마음대로 하라는 소리였다. 하나부사를 비롯한 왜인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크스 영국 공사와 블라디미르 아라사
영사가 그들을 따라서 일어나려는데 신철균이 두 사람을 붙잡았다.
"두 분께는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저 좀 보시고 가시지요."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심으로는 왜인들과 같이 홀대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던 차에 조선 공사라는 자가 자신들만 따로 보자고 했으니 어찌 우쭐한
기분이 들지 않을 것인가. 두 사람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