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제국기-302화 (302/318)

9.

이수현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거의 1개 연대 정도로 보이는 적이 자신의 소대가

담당하고 있는 외곽 방어진지로 몰려들었고, 철조망 지대에 가까이 근접했던 수백

명의 적이 한꺼번에 지향식지뢰의 밥이 되었다. 이쯤 되면 사기가 꺾일 만도 하건만

적은 손실에 무감각한 것 같았다. 지향식지뢰가 준 충격은 잠시뿐이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려온 순간 적은 다시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더불어서

적 포병의 포화도 한층 거세졌다. 처음 터무니없게 빗나가던 포탄도 이제는 제법

3소대 진지에 근접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어느새 다시 철조망 지대로

접근한 적의 대응사격도 있었다.

[쿠콰콰쾅! 쿠콰콰콰쾅! 콰르르쾅!]

[빵! 빠방! 빠바바방! 빵! 빵!]

"고개를 들어라! 적을 똑바로 보고 쏘란 말이다!"

이수현은 진지 안을 뛰어다니며 적의 포화에 움츠려드는 부하들을 독려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진지를 돌아다니는 게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3소대 병사들도 이수현의 독려에 차분히 응사했다.

[빵! 빠바방! 빵! 빵! 빠바바방!]

[투타타타타탕! 투타타타타타타타탕!]

[펑! 퍼벙! 펑! 펑!]

그렇지만 몰려드는 적이 너무 많았다. 적은 3소대 외곽 방어진지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4분대 방면으로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미 3소대가 담당하던 모든

지향식지뢰는 터트리고 없었다. 철조망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단은

분대원들이 보유한 개인화기와 공용화기 정도였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4분대 담당

구역을 응시하던 이수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 저런 미친놈들이!"

변변한 철조망 절단 도구가 없는 적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덮고 자던 이불을

둘러메고 와서 그대로 철조망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불을 둘러메고 달려들던

적병이 죽으면 다른 적병이 그 이불을 악착같이 둘러메고 철조망 지대로 접근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막 철조망을 넘으려다 사살 당한 적들은 어떻게 해서든 철조망에

몸을 걸치고 죽어갔다. 자신의 몸을 밟고 철조망을 건너라는 소리였다.

"선임부사관님! 선임부사관님!"

"왜 그러십니까? 소대장님."

3소대 선임부사관 박기창 중사가 진지에 고인 물을 철벅거리며 다가왔다.

"저길 보십시오. 선임부사관님."

"아니!"

박기창은 적병이 죽어가면서도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보다

더 놀란 것은 벌써 철조망을 타넘고 있는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철조망 지대와

외곽 방어진지는 겨우 30여 미터의 차이를 두고 있었다. 말 그대로 지척인 거리였다.

"소대장님. 당장 4분대를 지원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선임부사관님이 1개 분대를 이끌고 4분대를 지원해 주십시오.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중대 지휘소에는 제가 따로 전령을 보내 이곳의

상황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소대장님. 걱정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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