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회귀과거(回歸過去)
「기묘(己卯)년, 제주도 남안(南岸)에 이인 한 명이 바닷바람에 배를 잃고 몸만 떠내려 왔다. 제주는 아조의 오랜 속방으로, 원조(元朝) 고려총관부가 물러간 이래 섬이 전조[高麗]에 환속되었으나 위에서 다스림이 잘 미치지 않아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대로 탐라국왕의 말예(末裔)인 성주, 왕자, 도내라 불리는 자들이 섬에 다스림을 펴고 있었다. 이에 이 사람이 성주 고봉례에게 구명을 받아 그 밑에서 일하게 되니 본관 김해 김의 세훈이란 이름을 쓰는 경상도 진량 사람이었다.」
―해동속기(海東俗記) 3권
2110년 5월 6일
대한민국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나로우주센터.
우주는 멀었다. 21세기가 밝아 올 무렵에도 인공위성을 독자적으로 쏘아 올릴 능력도 없었던 한국이 우주 개발에 덤벼든 것은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가가린(Y. A. Gagarin)이 보스토크 1호에 올라 인류 최초로 유인 비행에 성공한 것이 1961년,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해군 비행사 출신 암스트롱(N. A. Armstrong)이 달 표면을 밟은 것이 1969년의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2028년에 이르러서야 자력으로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데 성공했고, 2040년에야 처음으로 달에 유인 착륙에 성공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술력이 축적되기 시작하자 21세기 중반에 들어서서는 본격적으로 우주 개발 경쟁에 뛰어들 여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2054년에는 세계에서 10번째로 월면 유인 기지 「을지」를 준공하여 연구원을 상주시키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화성에 유인 착륙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2070년에 이르러서는 화성에도 미국, EU,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에 이어 8번째로 유인 기지 「다산」을 건설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2110년 현재에 이르러 태양계 행성 간(行星間) 우주 항로를 구축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미국에 비할 바는 못되었으나, 지구 궤도에 독자적인 정거장을 가지고 있고 달에 소규모 정착지를 포함한 기지 5개, 화성에 2개 그리고 목성까지 정기적인 유인 탐사선을 쏘아 올리는 한국은 2110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우주 개발의 후진국은 아니었다.
김세훈(金世勳)은 올해 나이 스물여섯의 미래가 촉망받는 우주 비행사였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두뇌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던 그는 10살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는 기염을 토한 뒤로,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 전공을 섭렵하며 수학, 생물학, 화학 등의 학위도 취득하고 17살에 물리학 석사까지 마쳤다.
여기까지만 해도 촉망받는 물리학자로서의 인생이 펼쳐져 있을 텐데, 뜬금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프리스턴 대학 학부에서 역사학, 국제관계학, 언어학, 심리학으로 전공을 늘여 가며 공부하고서는 역사학과 심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따고서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그것이 재작년의 일이었다.
서울대와 프리스턴을 오가며 학사 학위만 8개에 석사 학위 3개를 가진 그는 가히 한국에서 최고 두뇌에 속하는 사람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선택한 것은 우주공학이었다. 우주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독립 부처로 설치된 우주청(宇宙廳) 5급 공무원 공채에 합격한 그는 스물넷에 화성 개발 계획실의 사무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뛰어난 두뇌를 높이 산 상부에 의해 근무지가 나로우주센터의 실무 부서로 바뀌었고, 그 와중에 우주 비행사 훈련까지 마쳐 본래의 직무와는 상관없이 이번 제1차 토성 유인 탐사 계획의 일원으로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5월 6일. 오늘은 그 토성으로 가는 탐사선인 「고흥―13」이 하늘로 쏘아지는 날이다. 김세훈을 포함한 네 명의 비행사는 앞으로 370일간의 우주 항로를 거쳐 토성의 궤도권에 닿게 될 것이다.
이번 탐사의 주 목적은 행성 간 운항 기술의 점검과 간단한 토성권 위성들의 구성 성분 분석으로서, 김세훈은 부함장으로서 항로를 점검하고 심리학 석사 학위 소지자로서 장기간 밀폐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항행 도중에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불상사에 대비해 팀원들 간의 의견을 조율하고 전체적인 협동심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김세훈 부함장. 기분이 어떤가?”
탑승을 완료하고 자리에 앉아 중력 탈출에서 오는 거대한 압력을 견디기 위한 안전장치를 몸에 부착하고 나자, 사선으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고흥―13」호의 함장 이승찬이 물어 왔다.
고작 네 명이 타는 탐사선에 함장이 있고 부함장이 있는 것이 웃기다고 세훈은 생각했지만, 함장인 이승찬은 정말로 함장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멋진 사람이었다.
항공우주군(구 공군)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300차례에 가까운 전투기 출격과 78회에 이르는 유인 우주 비행 실적을 인정받아, 5년 전부터 지구―화성 간 정기 연락선의 함장을 역임해 온 말 그대로 우주에 몸을 바쳐 온 사람이었다.
이제 50줄에 들어서 2110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창 전성기로 접어든 그는 시원시원한 외모와 믿음직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였다.
“조금 긴장되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화성을 한 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이런 장기간 승선은 처음이나 다름없어서요.”
세훈의 목소리는 정말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 비행에는 베테랑인 이승찬 함장은 그저 조그만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우주에서의 커리어를 토성 탐사로 시작하는 뛰어난 두뇌도 아드레날린을 뿜어내긴 하나 보구먼. 하하! 긴장하지 말게. 왕복 2년간 토성을 다녀오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많이 바뀌고 무슨 일에도 자신감이 생길 거네.”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무슨, 나도 생도 시절 처음으로 훈련기를 몰았을 때의 그 떨리는 기분을 잊을 수가 없네. 비행기가 뜨자마자 구토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빨리 내리고 싶었지. 옆에 비행 교수도 탑승해 있고 겨우 비행장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것뿐인데도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첫 비행이 토성이라니 떨릴 만도 하지.”
함장은 이내 기지와 연결된 계기판으로 눈을 돌렸다. 호흡기를 착용하고 충격 흡수 장치 위로 머리를 누이자 이내 발사 센터로부터 전송되는 음성이 들려왔다. 발사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곧 이륙하겠습니다. 10, 9, 8, 7, …….
하나하나 숫자가 줄어 갈수록 음성도 멀어지고, 어느새 위로부터 몸을 향해 강하게 충격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땅을 떠나 발사된 것이다. 기술적으로 충격을 흡수해도 중력의 몇 배나 되는 강한 힘이다. 1G의 지구 중력을 뚫고 나가려면 그 이상의 고통이 수반된다.
‘이제 지구를 떠나는구나.’
대기권을 벗어날 때까지는 이 고통을 참고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중력 가속으로 인한 의식 상실, 즉 G―LOC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훈련을 지난 수 개월간 받아 왔지만, 세훈은 온몸의 피부가 벗겨져 밀려 나갈 듯하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흐린 의식으로 어렵게 앞을 보니 함장은 꿋꿋이 그 충격을 잘 받아내고 있었다. 세훈은 그가 역시 베테랑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력 가속으로 인한 충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듯했다.
정밀하게 계산된 시뮬레이터로 받았던 훈련의 적어도 2배는 가까운 느낌이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렵사리 떠오를 즈음에 세훈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때 얼핏 함장의 목도 고꾸라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1399년 중하(仲夏)
조선국(朝鮮國) 전라도 제주목(濟州牧).
그해 여름의 태풍은 유난히도 드셌다. 바다로 집어(集魚) 나갔던 나무배들이 몇 채나 사람도 고기도 없이 부서진 채로 바닷가로 떠밀려 들어왔다. 원래 제주의 바람이란 거칠기 짝이 없는데 태풍까지 몰아치니 성난 파도에 제 갈 길을 잃고 꼼짝없이 수장당하고 만 것이다.
이런 계절에는 원래 먼 바다를 다니는 외인들이 난파당해 떠밀려 오기도 했다. 조선 내륙의 어선들은 물론이고, 왜구나 명나라 사람에 저 멀리 유구(琉球)에서도 제주 바다로 표류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에 서귀(西歸) 앞바다에서 발견된 사내는 도무지 출신이 어딘지 가늠되지 않는 자였다.
제주도에서는 큰 마을인 대정(大靜)으로 볼일을 보고 돌아오던 양노인이 섬 바닷가에 하얗고 검은색이 섞인 독특한 매끄러운 질감의 옷을 걸치고 누워 있는 그를 발견한 것은 8월 닷새의 저녁 무렵이었다.
6척 장신의 튼튼한 몸의 남자는 숨은 붙어 있으나 바닷물에 몸이 반쯤 잠겨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은 마을에서 사람을 불러다가 사내를 구명한 다음에 집에 눕혔다.
사내는 키가 크고 몸이 군살 없이 튼튼했다. 머리는 중머리는 아니었지만 상투도 틀지 않은 짧은 머리였고, 얼굴은 젊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형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장수감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바다에서 밀려온 사람을 보러 온 동네 사람들은 죄다 그 헌헌함에 감탄하곤 했다.
그러나 문제는 사내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부터였다.
“날 봅서. 어디서 옵데까?”
양노인이 정신을 차린 사내에게 물었을 때 사내는 의뭉스럽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주 바깥 사람이라면 말이 통하지 않아야 할 텐데, 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도리어 노인이 그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디라니요. 여기 한국 아닙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토성 발사선은 어떻게 됐습니까?”
“호꼼만 이십서게. 무신 거예 고람신디 몰르쿠겐. 귀가 왁왁하우다.”
양노인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육지에 몇 년 나갔다 온 적이 있는 옆집 상복이를 불러다가 데려다 앉혔다. 상복이는 제주 사투리를 쓰지 않고 밖에서 배워 온 육지말로 사내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해서 오셨나이까?”
“여기 어딥니까? 제주입니까? 다들 말씀 하시는 것이……. 표준말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닐오는 말이 쾌 닿지 아니하나이다. 차제 계샤는 곳이 제주 맞사온 종체 말이 닿지 아니 하여서……. 오 이브신 것을 보암도 짐작이 이르지 아니하고 말하시는 것을 보아도 어느 나라해서 오신 것인지. 륙지 말과도 맞지 아니 한.”
“…….”
청년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양노인이 차려 온 조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감사하다고 말하며 상을 물렸다. 청년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서 집안을 둘러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이 몇 년인지 알 수 있습니까?”
“몇 년이라 하옵면 금년은 기묘(己卯)년 이옵. 년호는 홍무(洪武)에서 금년 들어 건문(建文)이 되았이다.”
“도대체 어디로 와 버린 거야.”
“여기는 됴션국 제주이이다. 예전에는 탐나국(耽羅國)이라 하여 원조(元朝)에서 총관부 있샀나이다.”
“그렇습니까?”
양노인이 듣기에도 사내가 하는 말이 육지의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복이와 대화가 주고받고 이어지는 것이 신기하다고 여겨졌다.
분명히 왜구들이 하는 말과는 달랐고, 양노인이 젊은 시절 많이 보았던 몽골 사람이 하는 말과도 달랐다. 분명히 조선말이 맞기는 한데, 말이 참 신기하다고 양노인은 생각했다.
청년은 한참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한숨을 푹 쉬고서는 죄송하지만 옷가지를 좀 갖출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섬이라 옷이 귀하기는 매한가지라서 급한 대로 상복이의 낡아 헤어진 갈옷을 가져다 입혔다. 덩치가 워낙에 커서 겨우 5척을 조금 넘는 상복이의 갈옷을 입은 청년은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조밥도 해 먹이고 옷도 입혀 주었지만 이 정체불명의 외지인을 계속 데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떻게든 온 곳을 알아 돌려보내든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양노인은 생각했다.
다음날 청년을 데리고서는 한라산의 언저리를 돌아 제주목이 설치된 큰 읍으로 나섰다. 동이 트기 전에 길을 나섰는데도 산등성이를 따라 멀리 솟은 오름들과 초지를 쉬엄쉬엄 건너는데 꼬박 하루가 지났다. 먼 바다 가까이 제주의 읍성이 보일 때는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양노인은 허겁지겁 성내에 들어가 탐라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의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뵙기를 청했다.
탐라의 성주라는 것은 옛날 신라왕에게 받아 온 칭호로 탐라국의 군주가 누리던 칭명이었다. 내지로부터 먼 바다에 떨어진 이 탐라는 고려에 제주군이 설치되고 나중에 원나라 총관부가 들어서 다루가치가 다스릴 때에도 그 혈통의 귀함을 인정받아 실질적으로 탐라국의 으뜸으로서 섬의 대소사에 대해 결정하고 다스리는 자리로 남아 있었다.
성주에 이어 왕자(王子), 도내(徒內)라 칭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성주라 하면 곧 탐라국 왕이나 마찬가지인 자리였다.
양노인은 그래도 옛 양을나(良乙那)의 적손 가계에서 멀지 않은 후손으로 산 남쪽에 꽤 많은 전답과 그럴듯한 물이 나오는 용혈도 하나 가지고 있는 유지였기에 성주 고봉례와는 면식이 있었다. 그렇기에 늦은 시간에 무례를 무릅쓰고, 사안이 급하기도 하여 이렇게나마 뵙기를 청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나라 총관부도 물러가고 전조인 고려도 문을 닫은 지 몇 년 째인 지금, 제주목에는 목사가 부임해 오지 않고 있었고 탐라의 대소사는 일단 이렇게 성주인 고봉례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성품이 박하지 않은 고봉례는 양노인과 표류했다는 청년을 불러다가 제주에서는 구하기 힘든 쌀밥으로 저녁을 든든히 먹이고서는 따로 일러 양노인을 하루 유숙시킨 뒤 돌려보내고, 청년만 남겨 별채에 일단 머무르게 했다.
1399년 계하(季夏)
조선국(朝鮮國) 전라도 제주목(濟州牧).
세훈은 지난 3일간 겪은 일들에 도무지 당황스러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토성으로 가는 탐사선이 발사되었을 때 중력 가속으로 인해 의식을 잃은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전설 속의 탐라국이란 말인가. 도무지 납득도 되지 않고 꿈인가 싶었다.
처음에 양씨라 불리는 노인에게 구함을 받았을 때, 그는 민속촌에서나 보던 제주의 전통가옥에 누워 있었다. 그때만 해도 뭔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어이없는 지경에 처하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22세기인 지금 정말로 사람이 살 것 같지도 않은, 말 그대로 민속촌에나 남아 있는 집에서 상투를 틀고 갈옷을 입은 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제주 사투리라고만 생각되는) 말로 뭔가를 물어오는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는 상복이라는 사내가 들어와 뭔가 말을 통해 보겠다고 말을 시작했을 때는 더욱 질겁했다. 세상에, 중세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라니.
세훈은 순간적으로 지금 자신을 놀리나 싶어 기가 막혔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이렇게 그럴싸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퍽퍽한 조밥을 먹고 갈옷을 받아 입었을 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분명히 중국 명의 연호를 쓰고 있었고, 홍무에서 건문으로 바뀐 해라면 홍무제(洪武帝)의 주원장(朱元璋)의 손자이자 두 번째 황제인 주윤문이 등극한 해였다. 건문 원년으로 연호를 쓰기 시작한 1399년임이 분명했다. 원나라 탐라 총관부가 멀지 않은 이야기고 고려를 일러 전조 운운하는 것이 바로 지척인 일인 것이다.
그때까지도 사실 긴가민가한 일이었으나 세훈은 다음날 한라산을 넘어가며 이게 사실이구나 하고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우뚝 솟은 한라산은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해 주고 있으나, 그 주변 풍경은 자신이 알던 22세기의 것이 아니었다.
철근 콘크리트나 유리창은 아무리 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고, 억새풀을 엮어 바람이 날리지 않게 돌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토막 같은 집들만이 돌담을 줄줄이 끼고 바다를 향해 서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제주읍성에 들어서 처음으로 보는 기와집에 들어가 탐라 성주라 하는 사람을 대면했을 때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착용하던 원나라풍의 흑립(黑笠)을 입은 남자가 나왔을 때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싶었던 것이다.
‘도대체 1399년이라니. 과학적으로 시간 여행이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거였나. 토성으로 가려다가 7백년을 거슬러 올라오다니.’
세훈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도무지 사흘이 지나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체 모를 외지인이라고 성주라는 남자가 잡아 가두지 않고 별채에 데려다 놓고 입을 만한 옷도 주고 쌀밥이라도 먹여 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이리 앉으시오.”
하루를 그렇게 쉬엄쉬엄 보내고 나서야 성주는 세훈을 불러다 앉혔다.
며칠간 이곳에서 머무르다 보니 역사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이력도 있고 중세국어에 관한 짧은 논문을 쓴 적도 있는 세훈의 귀에는 이제 마치 현대어처럼 들릴 정도로 쉽게 귀에 익었다. 물론 아직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지만 대충 말이 통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불러 계셨나이까.”
지금 세훈의 입장에서 이 탐라 성주라는 고봉례는 이 세계와 일면식 없는 자신의 목숨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중요한 자였다. 세훈은 깍듯이 몸을 낮추며 복배했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이 남자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귀인에게는 마땅히 돌아가야 할 대접뿐이었다.
“이제 말이 많이 익으신 것 같구려.”
“원래 쓰던 말이 크게 다르지 않아 쉬이 익혔나이다.”
“손을 앉혀 놓고 인사가 늦었소이다. 나는 옛 탐라국왕의 사손(嗣孫)으로 성주라 불리는 고가의 봉례라 하오이다.”
“귀한 분께서는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김해 김의 세훈이라 하나이다. 경상도 진량 사람이나이다.”
세훈은 일단 원래 세계에서 알고 있던 본관 본적을 대었다. 일단 조선 사람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 앞으로 편할 노릇이었다. 고봉례는 일단 크게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던 것은 그저 지역 간의 말이 크게 달라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표준어라는 것이 없고 미디어가 없는 지금 시대에는 말의 전범(典範)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었고, 당연히 방언이 제각기 융성하는 때인 것이다.
“공도 품을 보아하니 공경대부(公卿大夫)의 후손이라 하여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데 어찌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외지에서 사고를 당해 온 손에게 함부로 대하겠소. 이 탐라도의 성주래야 다 옛것을 못 잊어 칠칠치 못하게 아직 달고 사는 직책이지.”
고봉례는 약간 씁쓸하다는 투로 말했다. 세훈은 뭔가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어차피 과거로 떨어진 마당에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차피 돌아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몸을 비벼 살아남기로 결심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같은 토성 탐사선에 타 있던 다른 세 명의 행방이었다. 특히 이승찬 함장이 곁에 있다면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거라고 세훈은 생각했다.
“혹시 저를 제외하고 바다에 떠내려 온 이를 발견하지 못하셨나이까?”
“근래에 표류한 사람은 김 공이 다이외다. 이 섬의 크고 작은 일들이 본인의 귀에 다 모이게 되는 일이오만, 아마 김 공이 쓸려 온 날 태풍이 천지를 진동하고 파도가 드셌으니, 그런 날 난파를 당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오. 김 공이 특별히 운이 좋았었다고 생각하시오. 산 사람이라도 살아 나가는 것이 세상사는 묘리 아니겠소이까.”
세훈은 고봉례의 말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주도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런 아는 이 없이, 더군다나 도움 될 만한 미래의 물건 하나 없이, 그저 미래에 대한 지식만 있는 좀 쓸 만한 머리랑 튼튼한 몸뚱어리밖에는 지금 세훈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탐라 성주 고봉례의 마음에 차야 했다.
“저를 어찌 처분하실 요량이나이까.”
“뭘 처분씩이나 하겠소이까. 여름 태풍도 슬슬 지나갈 무렵이니 곧 육지로 나가는 배가 하나쯤은 뜰게요. 배 가는 길로 모실 터이니 뜻하는 곳으로 가시면 될 것이오. 배가 뜰 때까진 이곳에 머물러 계시오. 이 성주가 섭섭하지 않게 대접하리다.”
고봉례는 호의를 베푼다는 양 껄껄대며 웃었지만 세훈에게는 생각보다 좋지 않은 제안이었다. 경상도 진량 사람이라 둘러대긴 했지만, 21세기의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세훈에게 경상도로 가 보아야 아무런 비빌 연고가 없었다.
물론 그렇기는 이곳 제주도 매한가지였지만, 왕조 교체기의 권력 공백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이 외딴 섬에서라면 뭔가 제약 없이 앞으로 행동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남아야만 했다.
“염치없지만 섬에 흘러들어 온 자들은 추쇄(推刷)토록 되어 있나이까.”
“그렇지는 않소. 섬의 인구가 늘어나고는 있으나 밖에서 외지인이 흘러들어 올 정도로 가까운 섬은 아니외다.”
“그렇다면 소인이 이곳에 근거를 잡고 살아도 되겠나이까.”
“왜 돌아가시잖고.”
고봉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느긋이 세훈을 바라보았다. 뭔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는 투였다.
“본인은 원래 전조의 척신(戚臣)의 후손으로 조부가 일찍 죽어 가산이 몰락한 후에 태어났나이다. 어릴 적에는 어렵게 문리를 틔우려 공부했으나 갑작스레 나라가 바뀌어 붓을 꺾고 출사치 않기로 맹세하였나이다. 그 뒤로는 부끄럽사오나 장사를 조금 배워 경상, 전라를 오가며 미곡(米穀)을 매매하는 일을 했나이다. 이번에도 이곳 제주에 쌀을 좀 팔아 볼까 하여 가진 것을 정리하여 바다를 건너는 와중에 모든 걸 잃고 이렇게 떠내려 왔으니 돌아가 보아야 부모도 없고 가산도 없는 땅에 무슨 애착이 있겠나이까. 어차피 이리되어 목숨만 건짐 받아 홀로 여기 남게 된 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새롭게 이곳에서 살아보려 하나이다. 그러니 귀한 어르신께옵서는 조금 은혜를 베푸셔서 이 못난이를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러나 나도 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집이나 땅, 장사할 밑천을 내어 줄 수는 없소이다. 공부를 하셨다니 글은 아시오?”
세훈은 한숨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제주를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성주이다 보니 섬의 대소사를 혼자 처리하기는 버거움이 있을 것이다. 밑에서 보좌를 봐 줄 머리가 하나 있으면 좀 든든하긴 할 터였다.
혹시나 그런 사람이 필요치 않을까 싶어 버텨 보았던 것인데, 역시 글을 아냐 물어보니 예상이 얼추 맞아 들은 듯싶었다.
세훈은 이때만큼은 진심으로 자신의 머리가 좋은 것에 감사했다. 한문이라면 당률(唐律)에 맞춰 한시를 척척 뽑아낼 정도는 아니라도 전적(典籍)을 읽고 사무를 보는 데는 지장 없을 정도였다.
22세기의 컴퓨터공학과 심리학 그리고 교육학의 융합 수준은 놀라워 직접 뇌에 자극을 하는 방법으로 학습 시간은 기존의 1/5가량으로 단축되어 있었다. 가장 효율적인 커리큘럼에 효과 있는 교수 방법으로도 모자라 뇌가 잘 잊지 않게 뇌파로 시청각적인 자극을 줘 가면서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거기에 세훈처럼 머리가 좋은 이는 의지만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한 배움의 길이 쉽게 열려 있는 셈이었다. 어쨌든 교양 삼아 배워 둔 한문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해서 두보나 이백처럼 시 좀 뽑아낼 정도로 만들었을 것이다.
“문자라면 읽고 쓰는 데는 지장 없나이다.”
“역시 김 공은 선비시구려. 이 섬에는 글을 아는 이가 많지 않아 내 밑에서 일을 돌봐 주던 늙은이도 이두문(吏讀文) 나절만 쓸 따름이었소. 이제 그 노인도 나이가 차 뒷방에 들어가 앉으니 일을 돌봐줄 사람이 없구려. 김 공이 정 이곳에 머무르고 싶으시다면 내 일을 좀 도와주시구려. 먹고 자는 것은 내 해결해 드리리다.”
섬에 인재가 부족하겠지만 이렇게 쉽게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세훈은 조금 놀랐다. 하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맡기는 것도 아니긴 했다. 현대로 치면 문서 기안을 할 줄 아는 행정 보조 정도의 의미랄까. 이두문을 쓰는 요령도 곁다리로 알고는 있었기에 크게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정 안 되면 아직 정종 즉위년이니 내가 수십 년 앞서서 한글을 만들어다가 보급시켜 버리던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세훈은 우선 이 고봉례 밑에서 일을 좀 거들기로 결심했다. 우선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고, 살아남아 기반을 다지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그리하겠나이다. 잘 봐 주시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