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탐라여일(耽羅麗日) (2/82)

제1장 탐라여일(耽羅麗日)

「제주 성주(星主) 고봉례가 철괴 300근, 비누 800포, 양마(良馬) 100필, 발화기 100개를 가져다 바쳤다. 고봉례가 말하기를 제주의 토산이 근시에 풍족해져 진상을 늘였으니 이 모든 것이 도내(都內), 제주만호(濟州萬戶) 김세훈의 공이라 하였다. 김세훈은 경상도 진량 사람으로 제주로 표랑했으나 그 기재가 탁월하여 고봉례가 사위를 삼았다. 주상이 그 물품들에 탄복하고 고봉례에게 쌀 백 섬과 콩 백 섬, 비단과 술을 주어 내려 보냈다.

○濟州星主高鳳禮貢 鐵塊三百斤, 石H八百, 良馬一百頭, 發火器一白. 鳳禮曰:“至近日, 土産於東瀛, 此以成豊, 屬邦增貢, 其是都內濟州萬戶金世勳之功也.” 世勳是慶尙津梁人, 前日漂浪於濟州, 其奇才卓越, 鳳禮以世勳爲壻. 上歎, 賜鳳禮米豆各白石, 繭, 酎等.」

―태종실록 제1권 2년 11월 8일

1400년 맹춘(孟春)

조선국 전라도 제주목.

세훈이 제주에 흘러들어 와 탐라 성주 고봉례 밑에서 일을 한 지도 어느덧 반년 가까이 흘러 새해의 정월이 되었다.

전조 고려 때에 제주가 본토에 복속되면서 기존의 지배층은 토관(土官)의 지위를 인정받아 바다 바깥에서 부임해 오는 명목상의 외관(外官)을 도와 실질상으로 제주를 지배해 왔는데 제주를 본관으로 삼고 있는 고(高)·양(梁)·부(夫) 세 성씨는 여말선초 제주 지역에서 강력한 토착 세력 집단이었다.

여기에 복성현의 향리였던 문씨(文氏)가 제주 고씨 집안의 사위로 들어온 것을 계기로 제주 지역에서 삼성(三姓) 다음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때의 고씨 가문의 당주(堂主)인 고봉례가 성주의 자리 외에도 여말에 받은 제주축마 겸 안무별감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고, 문충세(文忠世)가 왕자의 자리를 지니고 있었다. 원래 양씨에게 돌아가야 할 왕자의 자리가 문씨에게 세습되고 있는 것은 이즈음 들어서 제주에서 고씨 다음으로 힘을 떨치고 있는 것이 문씨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성주와 왕자, 그리고 유명무실한 도내의 자리 아래에는 몽골 지배 이래 내려오는 도천호(都千戶), 상천호(上千戶), 부천호(副千戶)라는 직위가 있었고 그 아래에 백호(百戶)들이 있었는데, 처음 세훈이 받게 된 자리는 그런 백호의 자리 중 하나로 힘이 있거나 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고봉례의 뒤를 봐 주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세훈 같이 출신도 불분명한 외지인에게 그 정도 토관직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세훈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덜컥 자리를 받아 놓고 보니 일이 생각만큼 잘 돌아가지 않았다.

외관, 그러니까 제주목사가 부임해 오지 않은 지도 꽤 되어서 육지로 나가는 공물을 모두 고봉례가 전담해 왔기 때문에 말고기 따위를 올려 보낼 때 진상문을 짓거나 제주도의 읍향(邑鄕)들에서 처결을 바란다고 올라오는 일들에 대해 문서를 쓰거나 하는 일이 전부였다.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럭저럭 잘해 보이고 있는데 머릿속에 든 지식으로 뭔가 원대한 일을 추진해 보겠다는 소기의 성과는 전혀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8개의 학사와 3개의 석사 학위를 지니고 있었던 22세기의 우수 인재라고 하더라도, 산업혁명을 거치며 수세기를 거듭해 발전해 온 현대 과학의 성과를 처음부터 혼자서 일궈 나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공. 장사에 한 번 손대 보지 않겠나?”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되나 세훈이 고민을 거듭할 즈음에 고봉례가 해 온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다.

행정 잡무를 시켜 세훈의 됨됨이를 지켜보던 고봉례가 신뢰를 준 것이다.

실제로는 장사꾼이 아니라 우주 비행사였던 세훈이지만, 전에 고봉례에게 이력이라고 소개했던 것이 장사인지라 고봉례는 그런 줄 알고 장사를 한 번 맡겨 보려 했던 것이다.

“장사라 하옵시면?”

“이 제주 땅에서 나오는 산품에 대해 수매권(收買權)을 내가 줌세. 나를 대신해서 이 물건을 받아다가 육지에 내다 팔아 주게. 일이 좀 편하도록 내 자리도 부천호로 올려 주겠네. 마침 부씨가 도내의 자리를 청했으니 그리로 올려 주고 자네가 부천호를 맡으면 되겠지. 말총이나 귤, 해산물들이 넉넉하니 그걸 가져다가 육지에 팔고 육지 물건을 사들여 오는 일이니 어렵지 않을 것일세. 가끔 조정에 보내는 진상품을 전라도 감사에게 보내는 일도 해 주고. 육지와 거래가 드문드문해진 지 벌써 여러 해니 장사로 겨룰 사람도 없고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으이.”

고봉례가 흰 수염을 쓸며 말했다. 이제 슬슬 인생의 만년(晩年)에 접어드는 노인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세훈은 감읍하고 일을 받아들였다.

“맡겨만 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일을 하겠나이다.”

“그럼 부탁함세. 장사 밑천으로 내가 쌀 백 석을 내어 줄 테이니 그것으로 먼저 물건을 구하도록 하게.”

고봉례는 다음날 쌀 백 석을 내어 주었다. 화폐가 아직 공통되지 않는 시대였다. 쌀이나 면직물은 그래서 주요한 화폐 대용이었고, 백 석이라면 쌀이 귀한 제주에서는 아주 큰돈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돈을 고봉례는 세훈에게 믿고 맡겨 준 것이다.

세훈은 우선 제주 읍내에다가 처마 올린 창고를 하나 들여놓고서 제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육지에 나가면 돈이 될 것 같은 물건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말은 큰 재산에 국가에 헌납되는 물건이라 함부로 매매할 수는 없었지만, 말총은 육지에서 고급 갓을 짜는데 사용되기에 육지로 나가면 비싼 값에 팔리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한랭한 육지에서 나지 않는 제주의 귤과 유자, 그리고 잠녀(潛女)들이 잡아오는 해산물 또한 잘 말려서 소금 간을 한 뒤 육지에 팔았다.

부패하기 쉬워 해산물의 유통이 어렵고, 그것을 부득이 오래 저장하기 위해서는 소금을 간하는 수밖에 없는데 소금도 비싸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육지로 나가면 그 값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야말로 세훈에게는 힘들이지 않고 그저 주워 먹는 장사나 다름없는 노릇이었다. 대보름이 지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전라도 나주며 경상도 진주 같은 좀 큰 성읍으로 나가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여러 달에 걸쳐 서너 번을 오고 가니 백 석이 삼천 석으로 불어나 있었다.

“부천호가 장사에 참 소질이 있구만.”

삼천 석 중에 이천 석을 고봉례에게 올려 바치니 고봉례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이렇게 세훈의 객주(客主) 노릇이 시작된 셈이었다.

“무얼 그리 열심히 하시나이까?”

“아, 오 서방 왔는가?”

세훈이 장사를 시작한 뒤 슬슬 돈이 쌓이자 처음 한 일은 예전 목숨을 구해 준 인연이 있는 서귀포의 양노인에게 쌀 오십 석으로 은혜를 갚고, 오상복을 불러다가 일을 돕게 한 것이다.

제주의 토호 집안 출신도 아니고 그저 외지에서 흘러들어 온 양인인 오상복은, 나이가 거의 열 살은 어린 세훈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썼다. 세훈은 그것이 내심 불편했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야 자신도 오상복도 불편하지 않을 일이었다.

“비누를 만들고 있네.”

“비누라는 것이 뭡니까?”

오상복에게는 비누라는 이름 자체가 엄청 생소한 것이었다. 세훈과 지내면서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산에서 잡아온 염소 가죽을 헤집어다가 지방을 꺼내 끓이고 있는 모습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비누라는 것은 몸을 단장하기 위해 씻거나 옷가지를 세탁할 때, 때를 지우는 물건이네.”

“그게 염소 지방에서 나온답니까?”

“두고 보면 알 걸세. 하하!”

제주의 물건을 받아다가 육지에 팔고, 제주에 필요한 물건을 다시 육지에 사오는 장사는 말 그대로 쉬운 장사였지만, 세훈은 그걸 반복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올해가 1400년, 명나라 연호로 건문 2년, 곧 정종은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게 될 것이었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시도하게 되고, 1402년이 되면 자신이 지금 의탁하고 있는 성주 고봉례는 한성으로 올라가 그 지위를 반납하고 좌도지관(左都知官)이라는 유명무실한 관직을 받아 오고 제주목에 목사가 부임해 오면서 제주의 독립성도 차츰 사라지게 될 시기였다.

세훈은 그전에 중앙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제주에서 키워서 세력을 구축할 생각이었다. 이왕 과거로 떨어진 것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부평초처럼 떠밀려 다니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저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단순한 장사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처음 시도하는 것이 이 비누였다. 예전에 화학을 배울 때 간단한 알칼리성 비누를 만들던 과정을 떠올려 보니 여기서도 복잡한 설비 없이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중세에도 자연 성분으로 만든 비누를 널리 쓰고 있었다. 만들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자네에게도 일러 주겠네. 옆에서 잘 보아 두었다가 나중에는 직접 사람을 부려서 만들어야 할 것이야.”

세훈의 말에 오상복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선 옆에 와서 들여다봤다.

먼저 수산화나트륨이나 수산화칼륨을 써서 양잿물을 만들어야 하지만 그런 화학 결정체를 지금 대량으로 구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냥 잿물로 넉넉하게 만든 다음에, 말만큼이나 제주에 많은 염소를 잡아다가 지방을 끓여 불순물 없이 거른 다음 잿물을 천천히 붓는다. 지금 막 하려던 작업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만 만들어도 때를 벗겨 내는 데는 일품이지만, 이렇게 녹두 빻은 것을 같이 넣어 향을 내게 할 수도 있네.”

아침부터 열심히 빻아 둔 녹두 가루를 잿물과 함께 뿌려 지방에 흡수시켰다. 지방이 염기성이 강한 잿물과 만나면 덩어리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저어 준 다음에 이레간 말리면 비누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만 해도 되지만 세훈은 그냥 비누를 아무렇게나 만들어다 팔 생각은 없었다. 이것을 위해 만들어 둔 사각으로 칸이 나뉘어진 판에다가 저어낸 지방을 넣어 말렸다.

칸마다 아래쪽에는 제주의 옛 이름인 동영(東瀛)이라는 한자 두 자가 마르면서 찍혀 나오도록 전각을 파 두었다. 처음부터 녹두를 넣어 향을 내고 상표라고 할 만한 것까지 찍어 팔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레가 지나고 비누가 마루는 것을 지켜보던 오상복이 달려와 다 말라 쓸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고하자, 세훈은 버선발로 달려 나가 비누의 상태를 보았다.

비록 22세기에는 각종 효과 좋은 화학 세제에 밀려 아무도 쓰지 않는 원시적인 비누이건만, 여기서 이것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샤워는커녕 대충 멱 감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15세기 초의 삶이 세훈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상품으로서도 상품이지만 우선 자신부터 이 비누를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세훈은 들떴다.

“오 서방, 자네 손 좀 줘 보게.”

비누를 만들기 위해 세훈을 거들어 재를 가져다가 잿물을 게속 만들던 오상복의 손은 검댕이 잔뜩 묻어 얼룩덜룩했다. 세훈은 물을 한 동이 받아 오게 한 다음 오상복에게 비누를 쥐어 주며 말했다.

“손을 물에 조금 적신 다음에 손에 쥔 비누를 힘차게 문질러 보게.”

“어, 어, 이런 거품이 납니다요.”

오상복은 정말로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생전 이런 괴상한 물건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그 거품이 나야 때가 벗겨지는 것이네. 손에 검댕이 묻은 곳마다 힘 줘서 빡빡 문지른 다음에 물로 헹궈 보게나.”

오상복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한참을 문지르더니 물에 손을 헹궈 보았다.

그랬더니 그 검댕이 물에 다 씻겨 나가면서 깨끗한 손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손에는 기분 좋은 녹두향까지 나고 있었다.

“어어? 이게 다 뭐답니까, 정말 기묘합니다. 손이 이렇게 쉽게 깨끗해집니까, 어째.”

“그것 보세. 내가 쓸모 있는 물건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하! 어서 그걸 열댓 개만 추려 보도록 하게. 성주 어르신께 보여 드리고 물건을 팔 상담(商談)을 해 보야 하지 않겠나.”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

오상복은 아직도 신기한지 녹두 냄새가 나는 손에 코를 가져다대고 킁킁거리며 비누를 주섬주섬 챙겨 세훈을 따라나섰다.

“성주 어르신, 세훈입니다.”

“어서 들어오게.”

세훈을 맞이하는 고봉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세훈이 장사를 잘해 준 덕분에 고봉례의 창고에는 쌀이 계속해서 쌓여 가고 있었다.

처음에 그를 거둬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부쩍 하고 있던 차였다. 한 번 찾아올 때마다 쌀을 몇 백 석씩 가져오니 고봉례는 그저 세훈의 얼굴만 봐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보여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나이다.”

“우선 들어오게. 때마침 딸아이가 차를 달이고 있으니 함께 들도록 합세.”

세훈은 웬 딸인가 싶어 의아했지만 이내 별로 개의치 않고 사랑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고봉례에게는 맏아들인 고상온(高尙溫) 외에도 여러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딸도 둘이 있었다. 그중 열여섯 된 둘째 딸 고상희(高尙喜)가 아버지의 예쁨을 독차지하고 그 수발을 모시고 있었는데, 아마 그녀가 차를 달이고 있다는 것일 터였다.

“그래, 보여 주겠다는 것이 뭔가?”

“비누라는 것이온데, 앞으로 제주의 산품 삼아서 팔아 볼 생각이나이다.”

“비누라. 무엇하는데 쓰는 물건인고?”

세훈에게 건네받은 비누를 이모저모 살펴본 고봉례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네모나고 미끌거리는 덩어리에 동영이라는 두 자가 찍혀 있는 것 외에는 도무지 그 용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나 옷의 때를 벗기는 물건이나이다.”

“이것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흠, 냄새는 좋구만.”

오상복이 그랬던 것처럼 냄새가 신기한지 고봉례도 비누를 코에 가져다가 킁킁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딸 고상희가 차를 달여서 들어오길 청했다.

“아버님. 손님과 함께 드실 차를 달여 왔나이다.”

“그래, 어서 들어오거라.”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온 것은 묘령의 여자였다. 고봉례의 딸인 고상희가 틀림없었다. 크고 망울진 눈과 그림같이 휘어진 눈썹을 보니 재색을 겸비했다 소문난 것이 과장이 아닌 듯싶었다.

세훈은 잠시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열여섯이면 현대의 기준으로는 아직 미성년인 학생이지만 지금의 조선에서는 한창의 결혼 적령기였다. 그녀는 풋풋한 매력이 한창이었고, 키는 160cm가 넘어 보여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는 큰 편이었으나, 22세기의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자신의 키도 187cm에 가까운 세훈이 보기에는 전혀 크지 않은 키였다.

세훈이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끼자 고상희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새치름하게 붉히고서는 시선을 피했다. 그런 고상희의 모습을 보자 세훈은 잠시 장난기가 돌았다.

“따님이 미인이시라는 소문을 들었사온대, 그 말이 허언이 아닌가 봅니다.”

“그래, 그래. 내 딸이지만 참 참하긴 하지. 허허!”

고봉례는 딸 칭찬에 얼굴에 화색이 돌며 껄껄 웃었다.

제 자식 자랑하는데 좋아하지 않을 부모가 있으랴. 다만 고상희는 외간 남자의 미색 칭찬에 괜히 얼굴이 더 붉어져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세훈은 그 모습을 보고선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는 놀림은 그만두고 찾아온 목적을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따님이 오셨으니 물 한 동이 부탁드려도 되겠나이까?”

“그래. 뭐 어려울 것이 있는가. 상희야, 손님께 물 한 동이 가져다 드려라.”

“예, 알겠사옵니다.”

고상희는 이내 밖으로 나가 물을 한 접시 받아 왔다.

세훈은 그 접시를 고봉례에게 내밀어 아까 오상복에게 시켜 보았던 것처럼 한 번 사용해 보게 했다. 이내 고봉례와 고상희의 눈이 활짝 놀랐다. 특히 여자인 고상희는 그 진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이게 정말 김 공께옵서 만드신 것입니까?”

“예, 아가씨. 그렇나이다. 앞으로 제주에서 이것을 많이 만들어 육지에다 내다 팔 생각이나이다.”

“아녀자들이 참으로 좋아할 물건 같사옵니다. 몸단장은 물론이거니와 빨래하는 데도 요긴하겠지요.”

“앞으로 필요하신 대로 보내드릴 터이니 얼마든지 부탁하십시오.”

고상희는 정말로 순순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좋아하는 그녀를 보니 왠지 모르게 세훈은 계면쩍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봉례는 짐짓 비누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웃고 있었다. 고상희가 물러나고 나서 고봉례는 거두절미하고 세훈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내 딸 어떤가? 색시감으로 부족하지 않은가 모르겠네.”

한마디로 혼담을 제의하는 이야기였다.

세훈이 살던 현대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고봉례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고 능력도 있는 청년을 자신의 아래에 잡아 두기 위해서 가장 유용한 수단을 제시한 것이다.

때마침 고상희도 혼사를 치를 나이가 되었고 당시의 풍습대로 결혼은 나이가 차면 미루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원래 제주의 호족들 사이에는 서로 간의 혼사를 치르는 일이 빈번했고, 고봉례도 작년까지만 해도 양씨나 부씨, 아니면 문씨 집안으로 택일해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세훈이 오고 난 뒤로 그 생각이 바뀐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조금 당황스럽긴 했으나 세훈의 입장에서도 거절할 처지는 아니었다. 과거에 홀로 떨어진 뒤로 결혼 같은 것은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있었는데, 어쩌면 정착하기로 결심한 이상 언젠가는 치러야 할 관문이었다.

어차피 연애혼이 힘든 시기이니 중매를 맺어 결혼하는 수밖에 없는데, 크게 신세를 지고 있는 고봉례가 직접 딸을 내어 주겠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몸을 맡기고 있는 처지라 거절하는 것은 결례일 뿐더러, 방금 본 고상희의 자태도 15세기의 조선 여자에게서 느끼기 힘든 현대적인 매력까지 느껴져서 마음이 이내 동했다.

그러나 세훈은 잠시간의 유예를 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적어도 고상희라는 여자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신변이 정리가 되는 대로 확답을 드리겠나이다. 거절코자 하는 말은 아니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훈의 말에 고봉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윗감이니, 이 정도 기다려 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1400년 맹하(孟夏)

조선국 전라도 제주목.

멀리서 밀려오는 바닷바람에 곱게 흔들리던 버들잎이 때 아닌 소나기에 쓸려 갔다.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릿한 구름이 한라산을 넘어 쏟아지듯 몰려왔다. 봄비였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습기가 얼굴을 간질였다.

세훈은 마루로 난 문을 닫고 아랫목에 누웠다. 방 안에는 정적 위로 비가 땅을 때리는 소리만 남았다. 조금 있으면 여름이 저 남쪽에서 너울거리며 밀려올 것이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가까워져 가는 것이다.

세훈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자신의 존재로 인해 역사가 달라지기 시작했으니, 그가 원래 있었던 22세기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 같이만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기에 이제는 홀로 있으면 그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미래의 물건이라고 처음 남아 있었던 것은 세훈 자신이 입고 있던 우주복뿐이었다. 그나마도 고봉례의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정리해 바다에 떠내려 보냈다. 그렇게 해류를 따라 떠다니다 보면 언젠가 그 질긴 우주복도 미래의 물건이란 것을 알아볼 수 없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람이란 것이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가. 처음에는 낯선 세상에 떨어져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고 도무지 살아 나갈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지만, 운 좋게 고봉례를 만나 일을 시작하고 이곳의 생활이 적응되자 그냥저냥 지낼 만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슬슬 생존의 문제는 조금 뒤로 물러나고,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굳이 그런 딴생각이 동한 원인을 따지자면, 비누를 바치러 고봉례의 집에 들어갔다 보게 된 그 여식이 문제긴 했다.

그녀가 눈에 들어와 쉬 잊혀지지가 않았고, 거기에 고봉례가 혼사를 제안했으니 세훈은 도무지 그녀를 생각지 않을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지런히 집안의 일을 돕고 있었다.

본래 주인집 딸이니 규방(閨房)에서 물레나 돌려도 족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직접 마당으로 나서 몸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직접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얗고 깨끗했을 손에 굳은살이 붙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별로 아랑곳 않는 듯 보였다.

굳은 제주의 바람을 아무리 맞아도 어딘가 모르게 청아하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가진 예쁜 얼굴은 색을 바래지 않았다.

괜스레 혼사 이야기가 오고 간 뒤로는 말 한 줄 붙여 보기가 되레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봄이 지나가기 전에 세훈은 어렵사리 그녀와 말을 텄다. 의외로 수줍음을 잘 타고 말이 없는 여자였다. 녹두향이 진한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면 한 가닥 풀어져 나와 곱게 흔들렸다.

세훈은 애써 말을 시키려 하진 않았다. 그냥 한 발짝 떨어져 앉아 그녀가 부엌에서 차려 나온 주안상 하나 객상 위에 걸쳐 놓고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혼자 물끄러미 보고 있다 가끔 고상희가 자신에게 시선을 줄 때면 왠지 모를 따뜻함에 마음이 편해졌다.

“일전 주신 비누를 잘 사용하고 있나이다. 향이 좋아 몸을 단장하는데 쓰니 좋기만 합니다.”

고상희도 세훈이 마음에 없지만은 않았다.

괜스레 비누를 핑계 삼아 세훈에게 와서 말을 걸거나 좋은 술을 내다가 주안상을 차려 주거나, 이래저래 핑계 삼아 얼굴을 곱게 붉히고서는 부끄러운 듯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녀도 아버지가 세훈을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고, 세훈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은 것을 들어서 알고 있는 터라 내심 남편감으로 생각하고 나니 괜히 한 번 더 눈이 가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 옆에 자꾸 붙어만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둘의 연애 아닌 연애에 서로 간의 생각하는 마음은 점차 깊어져 갔다. 더 이상 고봉례의 제안을 미뤄 둘 수도 없고 고상희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제는 진실된 것이라고 느껴지자 세훈은 더 이상 혼례를 미루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청혼만큼은 스스로 할 생각이었다. 가문의 이름을 빌어 중매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사랑해서 이뤄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터였다.

세훈은 늦은 밤, 몰래 월장(越牆)해 고상희가 지내는 규방의 마루에 걸터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고상희는 그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서 새된 목소리로 다그쳤다.

“어쩌자고 이 야심한 밤에 이리 넘어오셨습니까?”

아무리 혼사를 치르기로 약조된 사이지만 남이 보면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훈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를 생각하니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아서 말이오. 내 꼭 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렇게 찾아오고야 말았소.”

“무슨 말씀이시기에…….”

세훈의 말에 짐작이 가는지 고상희가 약간 기대하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세훈은 말없이 웃음을 지어 보이고서는 안 입는 속치마와 지필묵을 내어달라 청했다.

고상희가 부끄러운 듯 그것을 내오자 세훈은 주저 하지 않고 칼로 팔을 따 피를 내어 벼루에 풀어냈다. 핏물이 발갛게 물을 타고 번지자 달빛을 등잔 삼아 그는 시 한 구절을 적었다.

蘇州滿月夜 소주에 만월이 걸린 밤에

소주만월야

春花落長江 봄 꽃은 장강에 떨어지고

춘화락장강

心愰於汝項 마음은 네 목덜미에서 들뜬다.

심황어여항

薄鏡映戀糖 엷은 거울은 사랑의 달콤함을 비추누나

박경영연당

“내 마음이 이러하오. 집안에서 중신을 세워서가 아니라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을 꼭 직접 전하고 싶었소. 나와 결혼해 주시오.”

속치마를 건네받은 고상희는 그저 수줍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한서(漢書)를 읽을 줄 알았지만 그 뜻을 알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혼이라니, 직접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터에 가슴이 뛰었다.

세훈은 그녀의 귓가에 시의 뜻을 속삭여 주었다. 한시를 짓기에는 부족한 실력이나마 밤을 세워 가며 궁리한 시구였다. 자신의 숨결이 얄밉게 그녀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는 것이 세훈에게도 느껴졌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고, 고봉례에게 중신을 받아들일 것을 말해 결정이 내려지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4월이 되어 여름이 시작일 때 길일을 잡아 김세훈과 고상희의 혼례가 치러졌다.

신방은 김세훈이 고봉례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결정하고 데릴사위처럼 들어와 살게 되었다. 명실상부하게 제주의 거족(巨族)인 고씨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이다.

세훈은 고봉례 한 사람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될 수 없었기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혈혈단신인 그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것이다.

가족을 꾸리고 나니 다른 일도 술술 잘 풀리기 시작했다.

여름 들어 처음 육지에 내다 팔기 시작한 비누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기생들과 양반가를 위주로 크게 팔리기 시작했고, 좀 더 지방을 많이 얻기 위해 염소를 많이 들여와서 한라산 중턱에 목장을 만들고 키우기 시작했다. 부수적으로 염소 젖을 짜다가 제주 민간에 돌려 먹이기도 했는데, 염소젖은 소젖보다 영양분이 많고 어린아이들의 발육을 돕는데도 좋았다.

다만 동양인은 선천적으로 나이가 들면 유당 분해 효소가 유전적으로 나오지 않아 유당을 많이 섭취하게 되면 설사가 나오고 흡수를 하지 못하게 되는데, 예전에 몽골인이 들어와 있을 때의 영향으로 제주도 사람들의 유당 섭취는 괜찮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제주 특산품과 비누의 판매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세훈은 다른 것을 계획했다.

바로 라이터였다. 처음에는 성냥을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 기술로는 원료가 되는 염소산칼륨을 전기 분해로 얻어내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오히려 라이터가 더욱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상에 소요되는 기술력은 오히려 이쪽이 경제성이 있었다.

1400년인 지금으로부터 먼 이야기지만 22세기에서 보았을 때 큰 기술적 차이가 없는 1772년의 일본에서도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가 기초적인 라이터를 발명했었다. 부싯돌에 용수철을 건 다음 작은 망치를 부딪쳐 점화하는, 약쑥을 연료로 사용한 것이었다.

플린트록[燧石] 방식 총의 점화 기구와 유사한 것이다. 이 기술력만 확보하면 다음에는 1600년대 초가 되어야 등장하는 플린트록 방식 총을 제조할 기술을 확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제 막 명나라에서 화승총 기술이 등장하고 유럽에서는 아직 실용화되지도 않은 점을 감안할 때 그보다 한 단계 앞선 플린트록 방식의 총을 대중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큰 유혹이었다.

총이 전장식이라는 점에서는 화승총이랑 다를 것이 없지만, 화승에 불을 당겨 점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에 비해 플린트록 방식은 설치한 격철이 방아쇠에 의해 작동되고 부싯돌이 이에 따라 철과 스쳐 불꽃을 발한다. 동시에 그 충격으로 약실 뚜껑이 열리지만 용수철에 의해 순간적으로 그 뚜껑이 닫혀져 약실 내에서 불꽃이 갇혀 점화되는 구조였다. 상대적으로 화약의 손실이 적고 우천시에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총이었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 이 라이터와 총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기술적 난제는 용수철이었다. 코일 형태의 용수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강철이 필요했는데, 지금 이곳의 제련술로 쓸 만한 강철을 얻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철광석과 숯, 그리고 공기를 용광로 안에서 섞어 선철을 뽑아내는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현대에서야 숯 대신 코크스를 사용하긴 하지만, 이 제주라는 한정된 섬에서 코크스를 구한다는 것은 무리였고, 비교적 초기 방식대로 철광석과 숯 그리고 공기를 사용하는 방식은 시도해 볼 만했다.

문제는 철광석의 수매였다. 제주도는 화산지형이라 철광석을 구할 수가 없었으니 천상 밖에서 들여오는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비누를 판 대금을 모두 철광석으로 바꾸는데 투자하여 철광석을 대량 확보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국가권력이 성장한 시기라면 말도 안 될 일이었지만, 정종이 한성에서 송도로 다시 재환도한 뒤의 정세는 어지럽기 짝이 없어서 소위 방간의 난이라 불리는 제2왕자의난이 일어나 방간과 방원이 서로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투는 골육상쟁의 난중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의 어지러움을 이용해 세훈은 철광석을 매수해서 제주도로 무사히 가져올 수 있었다. 세훈은 필요한 재료가 확보되자 오상복에게 상단의 운영을 맡기고서는 철강을 우선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철강이 개발되면 용수철을 만들 수 있고, 그 다음은 라이터와 플린트식 소총의 개발이 가능했다. 세훈은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이것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해안가 한적한 곳에 고로를 만들어 놓고 연일 실험을 거듭하는 세훈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고봉례는 독수공방하는 딸을 보니 사위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장사야 세훈에게서 배운 오상복이 의외로 상재가 있어 어떻게 굴러 가고는 있지만, 뭔가 만들어 보려는 의지에 비해서 진척이 안 나니 세훈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위 사람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사이에 송도에서는 방원이 방간을 누르고 권력을 탈취하여 왕세제(王世弟)의 자리에 올라 이내 상왕의 둘째 아들이자 지금 왕위에 올라 있는 방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있었다.

배다른 형제를 척살코자 왕자들이 난을 벌인 지가 몇 년 되지 않아, 한 때 같은 편에 섰던 왕자들끼리 다시 왕위를 놓고 골육상쟁을 하는 것에 좋은 이야기가 따라붙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먼 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중앙의 관심으로부터 한참은 벗어난 이 남해의 외딴 섬에서는 앞으로 세계의 역사를 뒤집을 중요한 발견들이 속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모두 실제보다 100여 년에서 300여 년은 빠른 기술들이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세훈은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결국 고로를 완성해 선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것을 잘 제련하면 강철이 되는 것이었다.

임시 고로에서 만들어낸 강철로 도검을 지어다 고봉례에게 갖다 바치니 고봉례의 입이 헤벌죽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 철이 귀한 탐라에서는 탐도 못내 볼 훌륭한 도검이었다.

고봉례는 이내 근심을 잊고 사위를 독려해 정의읍에서 바다 가까운 곳에 제철소를 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제철소래야 현대적 규모는 물론이고 19세기의 것들과 비교해 봐도 원시적이고 소규모에 불과했지만, 1400년의 미명 속에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시설이었다.

기와로 30칸에 가까운 규모의 공방들이 사방으로 둘러싼 형태에 중심부에는 사람 키의 네 배만한 높이의 고로 네 개가 세워졌다.

“이거 참 거대하구만. 사위 자네의 기술이 참으로 용하이.”

“여기서 뽑아져 나오는 강철들이 장인어른과 제주의 부를 늘려 줄 보물들이나이다.”

“그렇네. 그렇지.”

세훈의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고봉례가 보기에 자신의 사위는 절대 실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장을 돌리고 개발을 계속하려면, 특히 철광을 수매하려면 돈벌이를 늘려야 했고 제주 안의 대장장이란 대장장이들은 다 모아서 도검을 만들고 철괴를 주조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대로 개경으로 보내져 송상(松商)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 나갔고, 특히 강철도검은 비누와 함께 기존의 제주 특산품들을 제치고서 개경 수창궁에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즉위식에 보내졌다.

고봉례는 특별히 그 아들인 고상온을 데리고 상경하여 성주자리를 아들에게 습작(襲爵)할 것을 허락받고 제주에서 강철을 계속 생산할 수 있도록 전라, 경상 양도에서 철광석을 수매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 왔다.

기존 역사에서 공마(貢馬)며 말고기나 바치고 2년 뒤에는 스스로 성주의 자리를 폐하길 요청하는 것에 비하면 제주에서 중앙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세훈이 온 뒤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가 넘어가 이듬해가 되자 세훈은 용수철을 개발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쯤 되자 혼자서 일을 전부 추진하기엔 힘이 벅차 대장장이들을 교육시켜 가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석소(夫石所)와 정탄(鄭坦)이라는 두 대장장이가 기술이 좋고 나이도 젊어 세훈의 양팔 노릇을 하게 되었다.

특히 부석소는 용수철을 개발하는 데에 진력을 다하고 있었고, 정탄은 총기와 라이터를 만들 제련 기술 확보에 진력하고 있었다.

그 부석소가 용수철을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대충 용수철이 완성되고 나자 약쑥을 연료로 하는 라이터도 곧 발명되었다. 세훈은 기름 라이터를 만드는 것은 합금 기술이 부족해 시도하지 못하고 있지만, 제련 기술이 좀 더 안정화되는 대로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산에서 구하기 쉬운 약쑥을 연료로 하는 것은 경제성 면에서도 좋은 노릇이었다.

아직 신대륙에서 담배가 들어오기 전이라 판로는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불은 사람 사는 곳에서는 늘 사용되는 것이므로 호응은 좋았다.

발화기(發火器)라 이름 붙인 라이터는 이내 비누, 강철, 말, 해산물과 함께 제주의 5대 산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은 혁신에 가까웠는데, 제주는 물론이고 조선 전역에서 특산품이라는 것은 자연물이거나 혹은 수공업에 가까운 물건들이었는데 5대 산품 중 비누, 강철, 발화기는 공장제공업으로 진입하는 신호탄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초보적이고 이 시대의 유럽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길드공업에 비해서도 소규모였으나 생산해 내는 물품만큼은 이미 기술력에서 한참 앞서 있는 제품들이었다.

1401년은 세훈에게는 특별히 기억할 만한 해였다. 강철과 비누, 발화기의 생산을 안정화시켰을 뿐더러 작년에 혼사를 치른 고상희에게서 득남을 한 것이다. 세훈은 자신이 기술을 개발한답시고 밖에서 도는 동안 혼자 어린 나이에 애를 배어 고생했을 아내를 생각하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서방님도 참 야속하십니다. 이렇게 아내를 돌보지 않으십니까?”

고상희는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여자였지만, 아직 어렸고 산고(産苦)까지 겪은 뒤로 전에 없던 투정을 세훈에게 했다.

“미안하오. 맡은 바 일이 있다 보니 그대에게 소홀했구려. 정말 미안하게 됐소.”

“일전 치마폭에 적어 주신 시에 담긴 마음은 다 어디로 가고 밖으로만 다니시는지요.”

고상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세훈은 그저 난처한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아내를 꼭 껴안아 주며 그 등을 도닥였다.

“내 당분간 그대와 아이를 보며 집에 머무리다.”

세훈은 결국 세 달여간 집에 붙잡혀서 꼼짝하지 않고 아내와 아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냈다.

아들의 이름은 장인 고봉례에게 직접 받아 현도(賢道)라고 지음했는데, 세훈은 그럭저럭 마음에 들게 생각했다.

세훈이 집에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동안에도 플린트록식 소총의 개발은 조금씩이나마 진도가 나가고 있었는데, 이론상의 문제는 세훈이 제시해 준 대로 문제가 없었지만 기존 설계에 강선을 도입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세훈은 처음에 총열에 강선을 넣어 볼 것을 지시했지만 지금의 제련 기술로 깔끔하게 파는 데는 많은 수고가 들어가 제작 단가가 올라갔고, 기술력의 부족으로 발사 속도가 늦어지고, 총알을 담는 것이 수고로워지는 등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

이것은 원래 역사에서 100년 뒤쯤 오스트리아 빈의 야스파르트 졸러(Jaspard Zoller)가 개발하고 무구사(武具師)인 아우구스트 코터(August Kotter)가 개량을 시도했을 때도 똑같이 부딪힌 문제였다. 세훈은 결국 강선을 넣는 것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부딪힌 문제는 화약의 대량 확보였다. 국가에서는 최무선이 화약을 조제하는데 성공한 이래 화기도감 이외에서 화약을 생산하는 것을 일체 금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몰래 만드는 것은 많은 노고가 따르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중앙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제주라면 가능했다. 문제는 고봉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화약은 무엇 때문에 제조하려 하는가? 금상께서 불안정한 권력을 단속하기 위해 다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지금 지방에 대한 숙군(肅軍) 작업을 하고 계시네. 아무리 이곳 제주라지만 사병을 길렀다가 크게 당하는 수가 있어.”

고봉례는 여태까지 사위가 하는 일에 가타부타 말없이 그저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아 왔으나 화약과 총기에 관한 문제만큼은 민감했다.

팔 수도 없는 것인데 왜 만들려 하냐는 것이다. 괜히 그런 것을 확보해서 가지고 있다가 중앙에서 크게 의심받는 순간, 대대로 누려 오던 토관(土官)의 지위도 잃고 심하면 역도로 몰릴까 싶어 노심초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훈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벽이었다.

세훈은 이제 군사력을 길러 탐라의 독립성을 강화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소총이 양산되어 부대화(部隊化)시키는 데만 성공하면 지금 조선의 능력으로는 바다를 건너 제주에 산재한 소총수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일은 빨리 진행되어야 했다.

이방원의 왕위가 안정되고 지방으로 눈을 돌려 제주목에 관리를 파견하겠다고 나오면 그때부터는 일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선 중앙에 대한 공포심 절반 경외심 절반으로 억눌린 고봉례를 다른 방법으로 설득해야 했다.

“중앙에 반역하고자 함이 아니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 잘 설명하면 되나이다. 작년과 올해까지는 아직 왜구의 준동이 없었으나, 국가에서 병력을 파유해 줄 수 있는 내륙과는 달리 이곳 제주는 먼 곳에 떨어진 섬이라 스스로 힘이 없으면 왜구의 준동에 도모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겠나이까.”

“그야, 그렇지만…….”

결국 설득에 힘입어 고봉례는 몰래 화약과 총을 제조하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고봉례 스스로도 바다 바깥의 조정에 굴종하는 것이 꼭 능사만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제주 스스로 힘을 기른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결심이 더뎠었다. 게다가 고봉례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력이 있었다.

고봉례의 아버지는 고신걸(高臣傑)로, 136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제주로 내려와 서도부천호(西道副千戶)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다.

1374년에는 탐라에서 목호(牧胡), 즉 원나라가 철수한 뒤 남아 있던 말 기르는 몽골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최영(崔瑩)이 바다를 건너와 진압했으나, 이듬해에 토착민인 차현유(車玄有)가 마적(馬賊)의 무리를 이끌고 관아를 불태우고 제주안무사 임완(林完)과 제주목사 박윤청(朴允淸) 및 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 등을 살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최영의 목호의 난 평정 때 살아남은 잔존 세력까지 합세하여 반고려, 반명의 성격을 띠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이때 고신걸이 왕자 문신보(文臣輔)와 진무(鎭撫) 임언(林彦) 및 천호(千戶) 고덕우(高德羽) 등과 함께 반란을 진압했다.

그 이듬해에는 왜구 600여 척이 침입해 오자 적의 화살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신걸이 적을 대파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호조전서에 임명하고 홍정과 표리(表裏) 및 술 등의 하사품을 내렸다.

고신걸은 1384년 탐라 성주가 되었으며, 1387년에는 아들 고봉례를 데리고 우왕을 알현했었다.

고봉례는 자라 오면서 아버지의 이러한 고려 왕조에 대한 속신(贖身)과 반란의 진압을 쭉 봐 오면서 자라났는데, 때문에 고봉례는 육지 왕실의 무력시위에 민감한 편이었다.

그러나 탐라 왕족의 후손으로서 제주 스스로 힘을 기르고자 하는 의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었고, 결국 세훈이 그곳에 불을 지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결국 사위의 간곡한 청에 마음을 돌린 고봉례는 동생인 고봉지(高鳳智)를 불러다가 세훈의 일을 단속하고 뒤에서 도와주도록 했다.

고봉지는 곧 세훈의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었는데, 고봉지는 원래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훈이 하는 일에 큰 흥미를 가지고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일은 꽤나 속도가 붙어 고봉지가 구해 온 황, 초석, 숯으로 화약을 배합해 흑색 화약을 만들어내고 때마침 완성된 플린트록식 소총으로 시험 발사를 할 수 있었다.

정의읍 제련소 근처의 들판에서 이루어진 시험 사격은 성공적이었고, 세훈은 여기에다가 보총(步銃)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였다.

“아!”

세훈은 고봉지, 부석소, 정탄 등과 함께 고봉례를 찾아가 보총 5정으로 사격 시범을 보여 주었는데 300보 앞의 표적지를 거침없이 꿰뚫는 파괴력을 보고 고봉례는 놀라서 그저 감탄성만 흘릴 뿐이었다.

“사위가 정말 수고해 주었네. 몇 정까지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인력만 조금 붙여 주셔서 숙달이 되면 하루에 다섯 정은 가능하나이다. 이참에 제주 성내(城內)로 시설을 옮겨 와 직접 가까이 두고 감독하여 만들고자 하나이다.”

“그러나 성내는 외지인의 발길이 가장 닿는 곳인데 괜찮겠는가?”

“어차피 낮에 하는 일은 새가 보고 밤에 하는 말은 쥐가 듣나이다. 언젠가는 알려질 것, 그전에 힘을 길러 두는 것이 가장 우선책이라 생각하나이다.”

결국 고봉례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봉례는 세훈의 지위를 올려 도내(都內)로 하고, 위치상 성주인 그와 왕자(王子) 다음에 오게 했다.

이미 제주의 산품을 독점하고 바깥과 거래해 섬을 풍족하게 만들고 있는 세훈이 그런 지위를 지니는 것에서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선적으로 계획했던 것이 완료되자 세훈은 고봉례에게 허락받은 대로 우선 제주 성내에 그동안 비누와 강철 그리고 발화기를 팔아 모은 재산을 전부 털어 정의읍에 있던 제철소를 철수해 가져온 것을 더욱 크게 지어 동영고로(東瀛高爐)라 이름 지어 세우고, 그 아래에 제련소(製鍊所)와 제총소(製銃所)를 둬서 강철과 총, 도, 검의 무기 생산을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화학소(化學所)을 설치해서 대외적으로는 비누의 생산을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화약의 생산 및 개량을 맡겨 두었다.

고로 전체는 도내의 지위 아래에 두고 제련소에 부석소를, 제총소에 정탄을 책임자로 보내고, 화학소에는 그간 비누를 열심히 판 오상복을 책임자로 보냈다.

그러나 화학소는 대외적인 책임자인 오상복과 별도로 화학의 제조를 진두지휘하는 별감천호(別監千戶)의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세훈을 조카사위로 두고 그간 화약의 제조에 깊숙이 개입해 왔던 고봉지가 그 자리를 수임했다.

1401년, 명 건문 2년, 조선반도의 저 외딴 남쪽의 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초석이 다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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