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왜구내습(倭寇來襲) (3/82)

제2장 왜구내습(倭寇來襲)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 도총관(都摠管) 종정무(宗貞茂)가 사자를 보내어 방물(方物)과 말 9필을 바쳤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형부 시랑(刑部侍郞) 종정무(宗貞茂)는 정승(政丞) 각하(閣下)에게 삼가 글을 올립니다. 오래도록 덕화(德化)를 앙모하였으나 첨배(瞻拜)할 길이 없었습니다. 50년 전에 우리 할아비가 일찍이 이 땅의 장관(長官)이 되었는데, 말하기를, ‘감히 귀국의 큰 은혜를 저버릴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관차(官差) 오십과 혹리(酷吏)로서 탐욕스런 마음을 방자히 하여 좌우(左右)에서 죄를 얻은 자가 어찌 부월(斧鉞)의 베임을 면하였겠습니까? 이러한 무리들이 지난해에 하나도 남김없이 죽었으니 하늘이 패망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불초(不肖)로써 할아비의 직책을 맡기었으므로, 이에 저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람되이 정성을 바칩니다. 대개 관서(關西)의 강한 신하들이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함부로 날뛰는 군사를 써서 침략함이 극심하였습니다. 바다와 육지에 관(官)의 법(法)이 미치지 못하여 변방 백성들이 해마다 마음대로 적선(賊船)을 놓아 귀국(貴國) 연해(沿海)의 남녀를 노략질하고, 불사(佛寺)와 인가(人家)를 불태웠습니다. 이것은 국조(國朝)에서 시킨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국토가 통일되어 바다와 육지가 평온하고 조용하여, 조정의 명령으로 엄하게 금하고, 인민들이 법을 두려워합니다. 금후로는 귀국 사람의 배가 거리낌 없이 내왕하고, 연해의 사찰과 인가가 전처럼 아무 탈 없이 경영하게 되는 것이 배신의 마음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늘의 해가 밝으니 감히 식언(食言)하지는 못합니다. 삼가 단충(丹衷)을 다하고, 우러러 불쌍히 여기심을 바랍니다.”

○日本國對馬島都摠管宗貞茂遣使來獻方物及馬六匹. 其書曰:陪臣刑部侍郞宗貞茂拜書政丞閣下. 久仰德化, 無由瞻拜. 五十年前, 吾祖曾爲此地之宰, 曰:“不敢有負貴國鴻恩之意.” 爾後官差酷吏, 專縱貪컡之心, 獲罪於左右者, 豈免鈇鉞之誅乎? 此輩去歲, 曾無?類, 天敗之也. 今以不肖, 補祖之職, 玆者不揣己量, 叨濫納款. 蓋以關西强臣, 拒朝命, 用縱橫之兵, 侵掠旁午. 海陸無官法, 邊民每歲, 縱放賊船, 虜掠貴國沿海男女, 燒殘佛寺人屋, 此非國朝所使也. 今則國土一統, 海陸平靜, 朝命嚴禁, 人民懼法. 今後貴國人船, 來往無헆, 沿海寺宇人家, 依舊經營, 則陪臣心願也. 天日明矣, 不敢食言. 謹쪻丹衷, 仰冀憐.」

―정종실록 제1권 1년 7월 1일

1402년 계춘(季春)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집총!”

“집총!”

“견착!”

“견착!”

“목표를 향해 조준!”

“조준!”

“발사!”

타다다다다당!

1402년 봄. 제주성 밖의 한산한 들 위에서 때 아닌 사격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작년부터 꾸준히 생산하기 시작한 보총은 어느덧 천여 정 가까이 생산되었고, 이에 맞추어 제주 각지에서 장정을 모아 사병을 편성하고 훈련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부터 보충되기 시작한 인원은 봄이 되자 2천 명에 육박했는데, 인구 5만의 작은 섬인 제주에서 2천 명의 군세는 위용스러운 것이었다.

그중 천 명은 보병으로 총을 중심으로 훈련받았고 나머지 천 명은 제각기 기병과 창병, 궁병으로 나뉘어 훈련받았다.

그러나 기병과 창병, 궁병도 장기적으로는 보조 무기로 총을 활용할 수 있게 훈련을 시킬 예정이었는데, 그것은 총의 생산이 이루어진 다음으로 우선은 미루어지게 되었다.

고봉례는 요즘 그 병사들의 훈련을 자주 보러 나왔는데, 그 훈련 광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흡족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 자주 올려 보낸 진상품이 흡족해서인지 한양의 임금은 아예 제주목을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고봉례를 도호부사에 임했다.

원래 자기 출신 지역에 부임하지 못하게 하는 조선조의 관리 임관 방침으로 볼 때 변방 중의 변방인 제주의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도 이것은 전례 없는 파격적인 대우에 다름없었다.

물론 이 도호부사라는 자리가 세습직이 아니고 언제든지 임금의 명에 의해 바깥 사람이 들어와 앉을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 제주도는 우선적으로는 고봉례의 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제주가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기존의 좌도천호와 우도천호가 폐지되고 대정군, 정의군의 두 군이 도호부 아래에 설치되어 이른바 제주삼읍(濟州三邑)을 이루게 되었다.

대정군수에는 왕자(王子) 문충세, 그리고 정의군수에는 도내 김세훈이 임명되었는데, 이로서 제주도의 시정은 모두 현지 호족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도호부사라는 자리는 병권(兵權)을 함께 지닌 자리였고, 따라서 합법적으로 제재 없이 병력을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마음의 짐을 덜고 나니 날이 갈수록 강맹해지는 총병(銃兵)들이 그렇게 마음에 찰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위, 덕분에 이런 광경도 보는구려.”

“갈수록 강맹해질 군세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왜적이며 안에서 준동할지 모르는 호적(胡狄)들 또한 이로서 단단히 방비가 될 것이나이다.”

“음, 그럼, 그렇고말고.”

고봉례는 그저 감탄을 거듭했다. 사위의 지혜는 보면 볼수록 현묘하기 짝이 없었다. 한시(漢詩)도 짓고 글도 쓰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선비인데,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장군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기기묘묘한 물건이며 무기를 고안해 내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직제(職制)는 어찌한다 했는가?”

직제라는 것은 새로운 특성의 군세를 대내적으로 통괄하기 위해서 조선의 무관직과 별도로 사용하도록 준비시킨 것이었다. 이것 또한 세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인데, 세훈은 간단히 총병대(銃兵隊)와 정병대(精兵隊)로 만들어 이 두 대를 도호부사가 직접 총괄하게 하고, 그 아래에 총감(摠監)을 두어 세훈 스스로가 맡았다.

이 총감 아래에는 총병대장과 정병대장이 있었는데, 총병대장은 고봉례의 동생인 고봉지가, 정병대장은 대정군수이자 왕자의 지위인 문충세가 맡았다.

그 아래로 천부장, 백부장, 십부장을 두어 병력이 효율적으로 통솔되도록 만들었다. 세훈은 처음에는 근대군의 계급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어디까지나 지방군에 지나지 않는 정체불명의 군대에는 간단한 제도가 오히려 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훈련만큼은 20세기 군대에 버금가게 시켰는데, 일반 사병을 훈련시키기 전에 먼저 백부장과 십부장을 인선(人選)하여 세훈이 직접 대한민국 육군 훈련소 방식대로 교육 일정을 짜서 굴렸다.

그렇게 두 달간 교육받은 백부장과 십부장들은 이제 훈련병들을 대상으로 훌륭한 훈련을 시킬 수 있는 뛰어난 조교로 거듭났다.

특히 세훈의 목숨을 구해 준 양노인의 손자 양은계(梁殷啓)는 처음 십부장으로 인선되었으나, 그 기량이 출중해서 결국 훈련을 마칠 때는 천부장으로 승진시켜 내보냈다.

“이상으로 총병 훈련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필승!”

훈련이 끝난 듯 총 소리가 멎자 병력이 모두 정렬하고 총병대의 제1천부장인 양은계가 최선임자로서 앞으로 나와 보고를 마쳤다.

조선군에게 경례와 그에 붙이는 구호는 모두 생소한 것이었지만, 역시 양은계는 잘해 주었다. 그저 고봉례는 흡족해했지만, 세훈은 한 가지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병사들의 복장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그저 전립에 남의를 걸친 복장이었고 십부장이래 봐야 거기에 엄심갑을 두른 정도였다. 백부장부터는 두정갑을 착용하고 있으나 앞으로 총기를 주로 다루게 될 병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고 세훈은 생각했다.

보다 효율적이고 앞으로 다가올 화약전 시대에 어울릴 근대식 군복을 마련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통일된 외관을 갖추고 제식훈련을 병행하면 보다 제대로 된 근대군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방직(紡織)이었다. 이 군복을 잣는 데는 면만한 것이 없었는데, 목화가 고려말에 원나라로부터 들어오긴 했으나 아직 크게 보급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아쉬운 대로 기존에 쓰던 삼베, 모시, 명주 따위로 새로 군복을 만들어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선 목화를 제주에 들여와 크게 밭을 만들고 내년쯤 그것이 산출되면 바로 대량으로 면직물을 자아낼 수 있게 그동안 방적기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목표는 1767년에 등장한 하그리브스의 제니방적기였다. 이 기계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방추를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는 생산력의 면에서도 탁월한 기계였다.

지금 널리 사용되는 물레를 간단히 압도할 기계였다. 게다가 적은 인원으로 많은 양의 면직물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인구가 적은 제주에서는 사용되기 적합한 것이었다.

이제 5만 남짓한 인구에서 많은 인원을 면직공업에다가 고용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충 구상이 마무리되자 세훈은 바로 한라산 기슭에다가 드넓게 목화밭을 일구고 군사훈련이 없는 시간에 장병들로 하여금 이 목화를 돌보도록 했다.

그리고는 방적기의 구상에 들어갔는데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여름이 끝날 무렵 시제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복을 만들어내고 면직물의 산출을 더욱 크게 늘려 제주는 물론이거니와 조선 전체에 내다 팔아 복식 문화를 크게 바꿔 보려 했던 세훈의 계획은 잠시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오리라 예측했던 일이 결국, 8월이 끝나갈 무렵 제주를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1402년 맹추(孟秋)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하야다 사에몬 타로(早田左衛門太郎)는 대마도 왜구의 두령이었다.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의 조선에 대한 굴신을 못 참고 마음껏 약탈을 자행하기 위해 근해를 떠돌며 노략질을 하다 이번에 크게 한탕해 볼 생각으로 제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몸을 사리다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저 변방의 섬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야다의 꾀하는 바를 알고 있었던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가 그간 조선에 들였던 공이 전부 무너질까 두려워 하야다를 불러다가 다그쳤지만 햐아다는 코웃음 칠 뿐이었다.

“네가 내가 주는 봉록(俸祿)을 먹고사는데 어찌 내 뜻과 다른 것을 탐하려고 하느냐. 기실 우리가 가진 땅이 척박하고 물산이 없는 것이 사실이나, 조선의 조정에 몸을 굽히고 들어가 물물을 거래할 수 있도록 허락받으면 피를 흘리지 않고도 필요한 것을 얻어 오고, 재화 또한 벌어들일 수 있으니 본국과 조선 사이를 이을 다리가 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괜히 또 도적질에 나섰다가 크게 경을 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대마도주는 정말로 그것이 걱정이었다.

조선 조정에 사절을 보내 매번 방물을 바치며 몸을 사려 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략질이 아니라 안정된 교역으로 굳건한 관계를 만들기를 그는 정말로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야다를 비롯한 대마도주의 신하들이 가진 생각은 달랐다. 고려 말부터 삼남의 해안을 노략질해 얻은 세를 불려서 무사 계급에 올라 대마도의 세를 나누고 있는 이 호족들은 그간 세력을 키워 온 근간인 수적질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아직까지 그런 면에서 이들에게 대마도주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나와 나를 따르는 이들은 배를 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들입니다. 슈고다이(守護代) 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잘 알겠으나 휘하의 불만이 가득하여 이제는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습니다.”

이 당시 소 사다시게는 치쿠젠(筑前)국의 슈고다이의 직책을 받아 큐슈(九州)의 거족인 쇼니(少貳)씨의 휘하를 배종(陪從)하면서 대마도보다 본토의 일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대마도에서의 영향력 장악에 악영향을 끼친 것을 대마도주는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그동안 하야다를 비롯한 왜구로서 세력을 얻은 측신들이 조선으로 출병하지 못하게 막아 두고 자신은 큐슈에서 좀 더 큰 정치를 하는 것에 불만이 쌓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 그렇게 가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게. 그러나 나는 뒷일은 책임질 수 없네.”

하야다는 우선 출병 다음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대마도주의 엄포에도 그는 코웃음 쳤을 뿐이었다. 빠르게 치고 빠지는 데 실패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대마도에서 건너온 것인지 누가 알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대마도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대마도 왜구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60여 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이끌고 하야다는 대마도를 나왔다.

그는 고토제도(五島諸島)를 길게 돌아 서쪽 바다로 나아가 남쪽으로부터 치고 들어갈 요량이었다. 그간 조선으로 가는 약탈이 조선과의 선린통교를 원하는 소 사다시게에 의해서 많이 제약되어 오던 터라 이번의 도발에 가까운 습격은 하야다를 비롯한 많은 왜구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바람은 순풍이었고 도검은 잘 벼려져 있었다. 이제 해안에 도착하기만 하면 내려서 감히 덤비는 것들은 추살하고 여자들은 사로잡아 처첩 삼아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제주 연안에는 조선 수군도 출몰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하야다 님. 이제 곧 탐라의 해안입니다.”

“배의 속도를 빨리하도록 해라. 적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배를 대고 내려서 인근을 들쑤신다.”

“예, 알겠사옵니다.”

부장(副將)격인 카게야 마사노리(影屋政則)의 보고에 하야다는 신속히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가 관건이었다. 과연 말마따나 수평선 너머로 한라산의 산정(山頂)이 멀리서부터 떠오르고 있었다.

밤을 기다렸다가 몰래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하야다는 이곳 제주 연안에는 좀체 쪽배나 다름없는 어선 말고는 배가 뜨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주는 불비(不備)나 다름없는 노략처였다.

배가 하나둘 동쪽 해안으로 들어서 안으로 조금 굽은 만구(灣口)로 들어가 정선을 시작했다. 하나둘씩 수십의 왜선이 박료(泊了)하고 나자 거기서 다시 물상 천 명에 가까운 왜구들이 떼 지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야다는 배에 싣고 온 몇 필 안 되는 말을 타고 내려 노략을 지휘했다. 이내 주변의 어촌들은 쑥대밭이 되고 비명 소리가 하늘로 퍼졌다.

“백여 명씩 흩어져서 마을을 밤이 될 때까지 노략하도록 하라!”

하야다가 명령하자 이내 왜구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제각기 갈 길로 흩어졌다. 이런 대규모 상륙을 감행할 때는 한데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 법이다. 특히나 이렇게 방비가 허술한 곳은 무리를 나누어 내륙까지 깊숙이 털고 나오는 것이 술책이었다.

하야다는 어린 시절부터 배에 올라 옛 고려의 연안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내륙으로도 들어가서 수적질을 하기도 했다. 대마도의 사무라이들은 무사(武士)라기보다도 수적패의 우두머리들에 가까웠다.

하야다도 큐슈로 나가면 미관말직이나마 사족의 일원이었으나 바다로 나오면 다른 왜구들과 다름없는 수적이었다.

하야다는 특히 정예라고 할 수 있는 패거리 삼백을 이끌고 상륙한 해안에서 내륙으로 점점 들어섰다. 가는 길 멀리에서는 약탈을 비해 떼를 지어 도망가는 토민의 무리가 보였고, 남서쪽으로는 또 마을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이번 노략은 느낌이 좋았다. 다소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대한 건져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생각보다 많은 이득이 있으면 대마도로 돌아갔을 때 소 사다시게의 인친책(隣親策)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에 굽실거리는 것을 그만두라 청할 명분도 설 것이었다. 이래저래 하야다는 들뜨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멀리 성채가 하나 보입니다.”

선봉을 이끌고 앞서서 탐색전을 벌이던 카게야가 말을 달려 돌아와 보고했다.

“분명 성채를 열면 비축해 둔 곡식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목표는 그곳으로 한다.”

“존명!”

말을 탄 우두머리 여럿이 명을 받아 창이며 도를 제멋대로 빼어 들고 달음박질 치고 있는 왜구들을 독려해 성으로 가까이 진군시켰다.

이제 곧 성문이 열리고 저들을 토색(討索)해 쓸 만한 몸은 대마도로 끌고 가서 부리고, 재물을 약탈해 가문의 영달과 제 몸의 입신에 쓸 것이다. 적어도 그때까지 하야다는 그 계획에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야다가 그렇게 제주도 남동쪽 해안을 쓸고 다니다시피 하는 동안, 그 사실이 이내 관아에도 알려졌다.

“표선면 해안에 상륙한 왜구가 읍성(邑城)까지 임박했나이다!”

군수의 직무도 보고 천천히 방적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개량해 볼 요량으로 정의군 읍성으로 내려와 있던 세훈은 이방의 보고에 깜짝 놀랐다.

언젠가 왜구가 내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고, 또 병력을 기르는 핑계를 왜구로 대었던 세훈이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대충 닿는 대로 도포를 걸치고 전립을 쓰고 나와 성루(城樓)에 올라서니 과연 저 멀리 왜구들이 노략한 마을들이 불타고 있었고, 성루에서 훤히 보이는 거리에 왜구들이 바글거렸다.

준비가 되는 대로 성문을 때려 부수고라도 쳐들어올 기세였다.

“성안에 군사가 어느 정도 있느냐!”

세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방에게 다그쳐 묻자 이방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총병은 죄다 훈련으로 인해 도호부 성내로 들어갔사옵고, 잡병 이백이 전부이나이다.”

“내가 이곳에서 최대한 저들을 막아 볼 터이니 저들이 이곳으로 가까이 몰려오기 전에 너는 후문으로 바삐 말을 달려 나가 도호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병력을 청하라. 그들은 내가 지난 수 개월간 총을 쥐어 훈련시킨 정병들이니 오는 대로 왜구를 격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훈은 이런 당혹스러운 사태에 노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역정을 부릴 것이 아니라 냉정한 마음으로 적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부족한 병력이나마 그간 마련해 둔 보총을 든 신식 병력이 올 때까지만 버틸 수 있으면 해 볼 만한 일이었다.

“분부 받잡겠나이다.”

이방이 서둘러 뛰어 내려가자 세훈은 꽹과리를 쳐 성내에 남은 병력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새로이 훈련받은 병사들이 아니라 예로부터 제주에 있어 왔던 정병들로 군역을 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무장 상태는 형편없어서 칼이며 활에 무장도 제각기였고 훈련 상태도 엉망이었다.

이런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새로이 편성한 군대를 좀 더 훈련시킨다는 요량으로 죄다 제주 도호부성 안에다가 모아 논 것이 실책이었다.

군사들의 무예를 갈고 닦아 좋은 무기를 쥐어 준들 제때 있을 곳에 있지 아니하면 이렇게 심중한 타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하나 그것 또한 실기(失期)는 불비(不備)나 마찬가지였다.

하야다가 이끄는 왜구 떼의 공격은 해가 중천일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정의군 내의 성읍을 둘러싼 마을들을 거의 초토화시키고 나서는 성을 공략하기 위해 흩어졌던 무리들이 떼 지어 모여들었다.

천미천 개울을 따라 몰려 있던 왜구들은 어디서 마련했는지 모를 사다리를 가져와 낮은 성벽에 대어 기어오르려 했다.

세훈은 병사들에게 창이며 낫,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것을 되는 대로 들려서 그들을 막아서게 했다.

성벽 아래로 뜨겁게 끓인 물을 붓기도 하고 돌도 던지며 막아 보았으나 성벽으로 올라오는 것들을 활을 쏘고 칼로 쳐 내어 걷어내면 그렇게 죽여서 막는 것보다 뒤에서 몰려오는 기세가 더 강맹했다.

“이게 바로 왜구로구나!”

과거로 떨어진 지 3년 만에 왜구라는 존재를 처음 본 세훈은 그 포악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들이 수천수만 무리를 이루어 수륙으로 출몰하며 고려 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약탈을 일삼았다니 아무리 퇴락한 왕조라고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를 알 만했다.

세훈 그 자신만 해도 갑작스레 해변에서 올라와 순식간에 마을들을 훑으며 쳐들어오는 진격 속도에 이들이 성문 앞에 밀려올 때까지 상륙한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 않았던가. 현대전으로 치면 일종의 게릴라전이요, 유격술에 능한 이들이었다.

적의 기세는 보이는 것만 대충 어림잡아도 천여 명에 가까운데 비록 성안에서 사수하고 있다 하나 이쪽은 이백에 불과했다. 거기에 애초에 이런 교전 상황은 크게 염두에 두고 지어지 않은 정의읍성은 허술한 토성으로, 조금만 기세에 밀리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언제고 함락 위험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성루를 지켜내라! 저들이 넘어오면 아내와 딸들이 끌려가 겁간당하고 남정네들은 도륙당할 것이다!”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벌어질 비참한 일을 말하며 병정들을 자극해 보아도 이미 밀리는 기세는 어쩔 수 없었다.

왜적들이 떼로 붙어 두들겨대는 통에 허술한 성문은 이제 반파되기 직전이었고 성벽으로 기어서 올라오는데 성공하는 왜구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 성문이 열리고 세훈 자신도 성루에 갇혀 토살당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설마 과거로까지 오며 목숨을 건져 낸 나도 여기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제 시작인데!’

세훈은 아찔한 기분에 눈을 감고야 말았다.

“사또 어르신!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적의 기세가 성벽을 곧 넘을 듯하나이다!”

병졸을 지휘하던 나장이 뛰어와 세훈에게 읍하고서는 말했다.

세훈은 몸이 침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한창 신혼의 즐거움을 누리는 아내 고상희와 이제 핏덩이 같은 아들을 생각해 보았다. 차마 여기서 목숨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지방관으로서 이 성을 왜구에게 내어 주고 도망치는 것은 싫었다.

그 와중에도 왜적 몇 명이 성루의 야대(夜臺)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

타다당!

나장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묻힌 것은 그때였다.

세훈은 귀가 바짝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공을 들여 개발해 낸 보총이 쏘아지는 울음이었다.

총성(銃聲)이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하야다는 기분이 좋았다. 이제 저 성읍은 함락될 것이다. 역시나 성을 지키는 군사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제 곧 성문이 열릴 참이었다.

저 성루 위에서는 저쪽의 관리로 보이는 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든 막아 보려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하야다는 코웃음 칠 수 있었다. 이런 허술한 성채로 이만큼 버틴 것만 해도 칭찬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어서 어서 서둘러라! 성문이 곧 열……!”

타다다다당!

하야다가 소리치고 있는 와중에 어디선가 벼락 터지는 듯한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왔다.

좌우를 둘러보니 하나둘씩 가슴이며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어떤 이는 머리에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었다.

“이, 이잇! 이게 대체 무어냐!”

“저쪽 언덕 위입니다!”

카게야가 어느샌가 타고 있던 말도 잃어 버리고 거친 숨을 헐떡이며 쫓아와 손가락을 들어 동북쪽을 향해 보였다.

과연 그 손가락 끝에 병사로 보이는 자들이 거의 천 명 가까이 열을 지어 도열해 있었다. 놈들은 열을 바꾸어 가며 뭔가를 계속 쏘아대고 있었는데 바다에서 왜선을 잡을 때도 쓰기 시작했다던 포(砲)의 일종인 듯싶었다.

그러나 활도 닿지 않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사람마다 하나씩 들고 쏘아대는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하야다가 섣불리 판단을 못 내리고 있는 와중에도 왜인들은 계속해서 쓰러져 나갔다.

성벽을 타고 오르고, 성문을 부수려고 달라붙어 있던 병력들도 전부 기세를 잃고 흩어지거나 주검이 되어 있었고, 어느새 총성은 하야다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의 목숨도 앗아 갔다.

“이……! 후퇴하라!”

하야다의 명령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왜구들은 우왕자왕하더니 제멋대로 흩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괴사인가!”

하야다는 침음성을 흘렸다. 대체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일전에 바다에서 고려군이 쏘는 포에 왜구들이 수장된 이야기는 들어보았으나, 육지에서 저런 작은 포를 들고 멀리서 쏘아대는 것은 겪어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적군의 공격이 드세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면 어서 도망쳐라!”

큰소리로 휘하를 독려하며 말을 잃은 카게야를 뒤에 태우고서 하야다는 바다에 배를 매어 두었던 곳을 향해 빠르게 전장을 이탈했다. 이래서야 절반이나 살아서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이 왔던 길은 모두 초토화시키며 온 덕에 사람 하나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폐한 길이었다. 이렇게 후퇴하는 길은 역습이 두려운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내 배를 매어 둔 곳에 당도했을 때 하야다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배는 이미 나포당해 배 위에서는 조선군 병사들이 해안가로 도망 오는 왜구들을 향해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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