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자강불식(自强不息) (4/82)

제3장 자강불식(自强不息)

「태조께옵서 이때에 임금의 학정(虐政)에 견디지 못하는 민중을 굽어 살피시고, 이에 마음을 아프게 여기사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속민을 구제코자 하는 마음이 계셨다. 이때에 이를 헤아린 배신(陪臣)들이 주청하여 가로되…….」

―강재번(姜渽繁), 해동야승(海東野乘)

1402년 맹동(孟冬)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금년 중추(仲秋)에 있었던 왜노의 준동을 척결한 것을 치하하고 때 아닌 소동에 피해를 본 백성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조정에서 탐문사가 다녀간 것이 가을이 끝날 무렵이었다.

좌정승씩이나 지낸 금상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노신 하륜(河崙)이 몸소 내려왔기에 제주 일대가 잔뜩 긴장했다.

직접 전승을 보고하며 부득이하게 이번 승전에는 보총의 위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고해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방군을 양성해 왜구를 물리치고자 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므로 화약을 다루고 총포를 생산한 것에 대해 큰 질책을 사지는 않았다. 역모 운운하기에는 이번에 왜구를 천여 명이나 죽이고 사로잡은 전공이 컸다. 근래에 이런 공록이 없었던 것이다.

하륜은 한양에 진상할 총포 십여 정과 이제는 제주에서 바쳐야 할 공납(貢納)품에 들어간 비누와 발화기를 잔뜩 실어서 올라갔다.

고봉례의 동생이자 신식군의 총병대장을 맡아 이번에 승전에 큰 공을 세운 고봉지도 하륜의 일행을 수행해 따라 올라갔다. 운이 좋다면 치하를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높은 품계의 관직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주 전역이 이런저런 일로 어수선한 사이에도 세훈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비록 자신이 손수 길러낸 총으로 무장한 신식군이 왜구를 대파하긴 했지만 자신이 군수로 있는 정의군의 성읍 남쪽 지역이 왜구들에 의해 초토화되고 수백의 인명이 죽어 나간 것이 꼭 자신의 모자람에서 빚어진 일 같았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현도의 재롱도 그 가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륜 일행의 접대와 행객(行客)을 보아 주는 것은 장인 고봉례와 다른 토호(土豪)들에게 미루어 두고서는 세훈은 정의군 관내를 시찰하고 왜구의 준동에 피해를 입은 속민들을 위문하고 다니는 데에 시간을 썼다.

보면 볼수록 그것은 참상이었다. 남편과 아들이 죽어 일손을 놓은 여자, 제 부모고 가족을 죄 잃고 고아가 된 아이. 가족들은 살아남았으나 집이고 농사 지어 놓은 작물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당장 살길이 궁한 이들. 왜노에게 겁간당해 실성한 처녀. 그런 것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마음을 달래 보아도 기분은 영 가시질 않았다.

“서방님께서 이렇게 기운이 없으시니 소녀까지 생각이 복잡하나이다.”

고상희가 종종 꿀물을 내어 오며 세훈을 살살 달래 보았지만 세훈의 복잡한 심경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자네의 걱정은 고마운 일이나 시간을 좀 가지고 기다려 주게. 답답한 줄은 알지만 내 맘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어찌하나.”

“…….”

고상희는 그저 사랑하는 남편의 심신이 지치고 상할까봐 노심초사 걱정이었다. 자주 얼굴을 내비쳐 주지 않는 남편이 집안에 오래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저렇게 지친 모습으로 있으니 그저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이가 생기고 나이도 좀 더 먹어 이제는 소녀라기보다 현숙한 여인이 된 고상희는 여전히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은 작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걱정 속에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북쪽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하자 세훈은 그제야 기운을 조금 차렸다. 조정에 총을 올려 보냈으니 무언가 반응이 오겠지만, 우선 만들어내는 것을 쉴 수는 없었다.

세훈은 왜노와의 전투에서 죽거나 크게 다친 이들을 솎아내어 생계를 마련해 주고 보상을 내어 준 다음에 그 손실을 메울 장정을 선발해 다시 훈련을 시키는 일에 들어갔다.

겨울이 한창에 접어들 쯤에는 보병들뿐만 아니라 기병들에게도 총기 지급이 끝났고, 창병과 궁병들에게도 총을 주어 보병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는 기병을 좀 더 뽑고 보병의 인원도 확충해 총 보병 2천에 기병 1천을 이루는 3천의 병력을 완성했다.

구상했던 병력이 확충되자 세훈은 다시 군복을 만드는 일에 시선을 돌렸다. 지금 병사들이 입는 옷은 헤지기 쉽고 거의가 삼베나 마로 자은 옷들에 소매가 치렁치렁 넓어 전투에 과히 효율적이라 할 수는 없는 옷들이었다.

우선 내년에 수확할 목화를 기다리기 전에 세훈은 겨우내 방적기를 완성했다. 소위 말하는 제니방적기의 형태로 완성된 방적기는 세훈에 의해 다축방정기(多軸紡績機)로 이름 지어져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화가 산출되는 즉시 바로 수요에 응할 수 있도록 제주성 남문 앞에다가 널찍한 집을 올려 공장으로 삼아 방적기를 사십여 대나 들여놓았다.

한 사람이 한 번에 여덟 개 이상의 물레를 빠른 속도로 잣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기존의 집집마다 물레 돌리던 것에 비할 수 없는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역사상 발전으로 보았을 때도 몇 단계를 한 번에 뛰어넘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문제에 부딪힌 것은 목화였다. 작년에 심어 둔 목화는 중국에서 문익점이 가져온 그 목화의 종자로, 작년은 파종 시기를 놓쳐 수확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그나마 수확한 것도 종자 자체가 털이 성기게 나 솜을 만드는 데 유용할 뿐 방적에는 좀체 맞지 않았다.

세훈이 알기로 가장 방적에 알맞은 목화 품종은 신대륙에서 재배되는 것으로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리 해도 들여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품종을 개량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좋은 품질은 아니나 그나마 방적을 시도해 볼 만한 종자가 몇 개 맺혔고, 이듬해가 되었을 때 세훈은 그 씨앗을 가져다가 봄이 오자 널리 파종했다. 여름이 될 때까지 짧고 성긴 면을 좀 더 잘 짜낼 수 있도록 방적기를 손보길 거듭했고, 그해 여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면을 방적기로 자아낼 수 있었다.

품질은 현대의 것에 비하면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우선적으로 고용한 아낙들로 하여금 40대의 방적기를 쉴 새 없이 돌려 면을 자아내게 하는 동시에 합성 염료를 연구했다. 이미 화학소에서 비누와 화약을 다루며 이런 종류의 업무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이제는 이런 쪽으로 전문가가 되어 가는 오상복에게 시켜 모았다.

이들이 화학소 한쪽에다가 연구실을 차려 놓고 처음 한 일은 세훈이 일러 준 대로 산쪽풀을 잔뜩 모아다가 물을 먹여 가수분해(加水分解)시켜 인디고, 즉, 남(藍)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쪽풀로 자연 염료를 만드는 과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렇게 얻어진 남을 가져다가 공기를 차단한 곳에서 열을 가열해 가열분해(加熱分解)시키면 아닐린 (Aniline)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아닐린에 다시 묽은 황산을 섞어 내면 합성 염료인 모브(Mauve)가 얻어지는데, 이것은 바로 1856년 영국의 화학자 퍼킨이 최초의 합성 염료인 모브를 얻어낸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물론 모브는 쪽풀에서 직접 인디고를 채취하지도 않았고 퍼킨은 아닐린을 인디고가 아니라 콜타르에서 정제해 사용하는 등 다른 출발점에 있긴 했지만, 세훈은 이것을 시작으로 합성 염료의 개발을 서두를 계획이었다.

그렇게 여름을 정신없이 보내고 1803년의 가을이 되자 처음으로 뽑아낸 면직물에다가 쪽풀에서 얻어낸 남색과 모브를 합성해 얻은 적색의 염료를 착색시켜 두 종류의 옷감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군복의 개량은 주로 활동하기 편하게 기능적이면서도 군율(軍律)의 엄정함을 나타낼 수 있어야 했다. 세훈은 18세기의 유럽 군복을 참조하되 화려한 모자를 넣는 대신 기존의 전립을 착용토록 하고, 셔츠와 통이 좁은 바지 그리고 단추 달린 코트 형태의 외투를 입고 그 위에 소속을 나타내고 총이나 검을 매어둘 수 있게 하는 어깨띠를 착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신은 가죽을 가져다가 혁화(革靴)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무두질할 기술을 가진 장인이 제주에 없어 마른 말고기인 건마육을 만들던 사람과 짚신 엮던 사람을 불러다가 연구하게 만들어서 겨우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조선 최초의 방직공업, 염료공업, 군수산업은 이런 조촐한 방식으로 제주도에서 1403년 시작되었다.

1403년 맹춘(孟春)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세훈이 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다른 이들도 제각기 삶을 꾸려 가기 정신이 없었다. 다들 명쾌하게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시대의 조류가 바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는 있었다.

세훈의 처인 고상희는 뱃속에 아이를 하나 더 가졌다. 아들인 현도는 돌이 지나 이제 말을 하기 시작했고 세훈이 일로 정신없는 사이에도 탐라 성주 고봉례의 집은 아이의 웃음소리에 집안이 시끌벅적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진 와중에도 세훈에게서 방적기 한 대를 받아와 집에 두고서 직접 옷을 잣는 일에 푹 빠져 있었는데, 집안이 집안이니 만큼 밥을 짓고 빨래하는 일은 하지 않더라도 아녀자로서 옷만큼은 직접 잣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물레도 돌려 본 적이 있었는데, 방적기를 들여온 뒤로는 그 재미에 흠뻑 빠졌다. 오히려 세훈이 부족한 목화를 그만 가져가라고 할 정도였다.

고봉례는 아들 고상온과 함께 군대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봉례가 근대군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가 직접 군대를 훈련시킨다기보다는 그저 참관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반면 아들인 고상온은 달랐다. 차기 성주로서 그는 직접 천부장들과 함께 병사를 지휘하고 총을 쏘는 법도 익힐 뿐더러, 1개월간 연병장에서 뒹굴며 훈련도 받았다.

이제 서른 줄을 넘긴 그에게 있어서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매제인 세훈의 능력에 감복해 있던 터라 최소한 군무에 있어서 만큼은 그 실력을 배양하여, 아버지나 세훈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차기 성주의 능력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상업에 관해서는 세훈이 일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오상복이 제주의 상계를 이끌고 있었다.

예전 고려 시절의 개경상인들에, 조선이 들어서면서 출사를 거부하고 장사에 뛰어든 선비들까지 더해 지금 조선의 크지 않은 상계를 좌지우지 하는 송상(松商)과 함께 나상(羅商)이라 불릴 정도로 크게 성장한 제주의 상계가 내륙의 시장에 큰 영향을 행사하는 데는 오상복의 재능 덕을 보는 면이 있었다.

그는 동영주상행계(東瀛洲商行契)라는 것을 조직해 비누, 강철, 발화기 등의 제품 및 말이나 그 말총, 해산물들은 조합 명의로 직접 고봉례에게 세를 치르고 받아 와서, 그것을 가져다가 소속된 조합원들에게 팔도에 퍼져 각기 맡은 지역에서 독점권을 가지고 장사할 수 있도록 했다.

다들 귀한 물품으로 대접받고 있어 가져가기만 하면 쉬이 팔리는지라 제주 상인들은 쉽게 돈을 모았다. 거기에 대마도 왜구의 침입 후 나포한 왜선들 중 사용이 가능한 사십여 척을 고봉례가 이들 상인에게 불하(拂下)해 주어 섬 밖으로 장사 나가는 일이 더욱 용이해졌다.

오상복의 상행 규모가 커지자 자연스레 회계 장부와 어음의 발행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아직 화폐가 통용되지 않고 쌀이나 생필품으로 상행이 이루어지는 마당이니 그것을 필요한 곳으로 매번 실어 나르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상복은 제주도와 육지의 상행 거점에 있는 물상객주(物商客主)들을 모아 취체환계(取替換契)라는 것을 만들어다가 어음을 발행하고 대금(代金)의 입체(立替), 자금의 융통을 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건을 지점에서 맡아 두고 그의 가치에 상응하는 환표(換標)를 발행해 주어 현대의 환과 같은 기행을 수행하게 하는 한편, 어음의 발행이나 취인도 해 주어 그야말로 조선에 전국적이고 안정적인 상행망을 구축했다.

이에 맞선 송상의 대항도 거셌는데, 여각(旅閣)들을 모아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전국에 깔아 나상의 취체환계에 대항했다. 거기에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置簿法)같은 앞선 회계술이 있었기에 새로 떠오르는 나상이 상대하기에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제련소의 부석소와 제철소의 정탄 또한 물건을 생산하는 동시에 스스로 연구를 꾸준히 해 나갔는데, 그들이 가끔 떠올리는 발상은 실행하기 힘든 것이라 할지라도 그 창의성만큼은 세훈도 놀랄 정도였다.

특히 둘은 야금술(冶金術)을 더욱 연마하는데 공을 들여 고로를 개선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보다 크고 효율 좋은 고로를 만들기 위해 모양을 바꿔 보기도 하고, 공기의 흡입량을 조절하거나 숯 대신 다른 촉매를 넣어 보거나 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만 있는 것 같았지만 의외의 복병은 다른 데에서 나왔다.

하륜이 고봉지와 함께 포로로 잡힌 왜장 하야다와 왜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돌아갔을 때, 경복궁의 임금은 복잡 미묘하게 사건을 처결했다.

스스로 무력(武力)으로 왕위를 탈취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이기에 화약을 제멋대로 다뤄 새로운 병과(兵科)의 병력을 양성한 제주의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아직 왕자의 난을 다툰 형은 멀쩡히 살아 있고, 위로만 태상왕, 상왕에 전대왕이 둘이나 살아 있었다.

비록 조선팔도를 호령하는 용상에 앉아 있다 하나 정당성이 없고 기반이 취약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제주의 병력 양성은 지방의 군권을 지니고 있는 도호부사의 재량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또한 실제로 대규모의 왜구 침입에서 크게 대승했으니 함부로 질책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주만호 고봉지는 들으라.”

조선의 왕, 정안군 이방원. 원래 역사 속에서 태종의 시호를 받게 되는 임금의 목소리는 크게 침중했다.

“예. 전하.”

고봉지는 대답이 조금 떨려 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과인은 제주 수령 고봉례와 그 속하들이 이처럼 선견지명을 가지고 왜노의 내습을 막아낸 것에 대하여 치하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러나 과인은 함부로 나라에서 다루는 화약을 방백(方伯)이 취급하고 총포(銃砲)를 제작한 것을 우려하는 바이다. 이번에 그 덕으로 왜구를 퇴치하였기에 책을 하지는 않을 요량이나 제주는 앞으로 보총과 화약을 계속 생산하여 제주 진영(陣營)에서 필요한 양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납(貢納)할 것이오, 이를 감독하기 위해 군기시(軍器寺) 주부(注簿) 최해산(崔海山)을 전라도병선군기점고별감(全羅道兵船軍器點考別監)에 임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할 것이니 이에 한 점 거짓이 없도록 하라. 주부 최해산은 공신 최무선의 아들로 화약을 다루는 일가의 기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일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임금의 목소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따지듯이 하는 말들이 내전을 조아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임금은 잠시 좌중을 둘러보고서는 말을 이었다.

“또한 토관(土官)을 제 지역을 맡아 보는 도호부사의 자리에 임명한 것은 과인이 그 제주에게 방종하라 함은 아니었으나 이번에 왜구를 격퇴한 공이 있기에 고봉례를 비롯한 지방 군수들은 화약을 만들고 군사를 조련한 책임을 묻지 아니하고 유임(留任)하도록 하노라. 병조에서는 이를 받들어 최해산의 부임을 처결토록 하고, 고봉지는 이를 제주에 돌아가 빠지지 않고 고하도록 하여라.”

대전은 마치 서리 낀 듯 정적 속에 차가운 공기만 흘렀다. 고봉지는 얼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입을 억지로 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하명하신 일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처결하도록 하겠나이다.”

태종은 마치 호랑이 눈 같은 매서운 눈매를 부라리며 고봉지를 바라보았다. 과연 고려의 왕조를 무너뜨린 제1공신이며 형제를 도륙해 가며 용상에 오른 패자(覇者)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봉지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앞으로 제주의 행방을 점쳐 보았다.

고봉지가 화약 제조를 감독할 최해산을 대동하고 제주로 내려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화약과 총포를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쭉 지켜보았던 고봉지였기에 최해산을 공방으로 출입시켜 감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천근만근 마음이 무거운 일이었다.

최해산은 제주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그는 화학소와 제총소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본래의 생산 감독 임무보다는 화학의 개량과 총기를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여말선초의 명장 최무선이었고, 익히 아는 바대로 화약의 제조법을 들여와 화포를 생산한 인물이기도 했다. 최해산은 바로 아버지 최무선의 뒤를 이어서 배운 바대로 화약과 무기에 관해 조예가 깊었는데, 그런 그에게 제주에서 이뤄진 성과는 정말로 놀랍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화약의 안정성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용 화기로 이렇게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보총이야말로 정말 놀라운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무기에 사용하기 위해 강철을 생산하는 고로라던가, 비누, 발화기 따위도 최해산의 마음을 끌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란 사실이 그로 하여금 더욱 그 사실을 놀랍게 만들었다.

최해산은 그 사람, 정의 군수 김세훈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세훈은 그 당시 화학 염료를 고안해 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일도 바쁠 뿐더러 내심 어렵사리 일구어 놓은 것을 권력을 이용해 공짜로 낼름 할 심산인 조정에서 보낸 최해선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김세훈은 와병(臥病)이며 일이 바쁨을 핑계로 찾아온 최해산을 수차례 돌려보냈다.

“군수(軍需)에 관련한 일을 처결하느라 바쁘니 나중에 오시오.”

최해산은 김세훈을 찾아갈 때마다 이런 이야기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쯤 되자 최해산도 오기가 생겼을 뿐더러 김세훈을 한번 보고자 하는 욕심도 생겨 삼 일 걸러 한 번 김세훈을 찾아가 시위하듯이 문을 두드려댔다.

결국 모브 염료의 합성이 끝날 즈음에 와서는 김세훈도 지고서 최해산을 사랑방으로 불러들여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해산이라 합니다.”

최해산이 사랑에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그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는데, 실제로 스물셋밖에 안 된 청년이었다.

최무선이 세상을 등졌을 때 최해산은 겨우 열다섯의 나이였는데, 화약의 최무선과 목화의 문익점의 자제를 조정에 등용하여 쓰라는 권근(權近)의 주청을 받아 임금이 조정에 불러들여 군기시 주부의 자리를 내린 것이었다.

오히려 최해산이 세훈을 보고 놀랐는데, 자기와 비견해도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전생에서의 나이로부터 따져보아도 세훈은 아직 스물아홉으로, 서른에도 이르지 않은 젊은 나이었다.

“병졸들에게 면 옷을 지어 입히고 거기에 입힐 염료를 짜내는 일에 골몰하다 보니 세상 시름 잊고 손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세훈도 최해산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세훈의 처 고상희가 내온 다상을 앞에 두고서 찻잔 위로 김이 올라가는 동안 묵묵히 한참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세훈은 최해산에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단기적으로 탐라를 조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해 산업을 도모하고 바다를 경영한 다음, 그 힘으로 장기적으로 조선을 도모해 조선팔도 전체를 일신해 새로운 국가를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세훈에게, 병력을 길러 왜구를 잡았더니 기껏 돌아온 게 화약과 보총을 가져다 바치고 일개 공납이나 받아가는 변방 취급을 하는 것이 고깝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왜구를 격퇴한 공을 화약을 밀제조했다는 명목으로 상쇄시켜 버리고 치사하지 않은 것은 세훈에게 큰 배신감으로 다가왔던 터였다.

다른 이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22세기에서 건너온 세훈에게는 조선 왕조에 대해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 비슷한 느낌 외에 어떤 충정이 있을 턱이 없었고, 오히려 한양의 조정이 세훈이 갈 길을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러니 바로 그 임금이 보낸 최해산이 고까울 수밖에.

“하명받으신 대로 화약과 보총을 생산하는 것을 감독하고 공납품을 수거하는데도 바쁘실 텐데 어이 이까지 오셨습니까?”

세훈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공납품이란 명목으로 수탈해 가기도 바쁠 것인데 뭣하러 예까지 왔냐는 소리였다.

“그… 조정의 일로 저를 달가워하지 않으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루신 일들을 보고 꼭 뵙고 싶어서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최해산은 잔뜩 주눅 든 목소리였다. 세훈은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뾰족해져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어 조금 기세를 가라앉혔다.

세훈의 표정이 한층 차분해지고 나서야 최해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아버지가 자식이 늦어 막둥이로 태어난 덕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겨우 나이가 고작 열다섯이었습니다. 아직 배움이 많이 부족한 시기라 어렵사리 아버님께서 남겨 놓으신 「화약수련법(火藥手練法)」, 「화포법(火砲法)」이라는 책 두 권으로 혼자 배워 아직도 그 깨달음이 부족한데, 이제 제 배움을 이끌어 주실 분을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습니다. 마음에 좀 차지 않으시더라도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갑작스레 큰절하며 문하(門下)되기를 청하는 최해산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세훈은 그저 당황해서 혀를 차다가 안 되겠던지 최해산의 어깨를 부여잡고 일으켜 앉혔다.

“자세한 것은 나도 비전(秘傳)으로 지니고 있으니 알려 줄 수 없네. 다만 화약을 좀 더 안정화시키고 보총을 만드는 원리 정도는 알려 주겠네.”

어차피 강철을 생산하는 비법을 모르니 당장은 방법을 알려 주어도 최해산이 본토에서 보총을 생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훈이 직접 일을 추진하며 느낀 것이지만 기술의 발전은 하나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기술들이 수반되어야 했다. 보총의 설계나 원리만 가지고는 강철로 스프링을 만드는 핵심 기술이 없으면 보총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최해산은 그 정도에도 정말 뛸 듯이 좋아하는 듯했다.

그때부터 세훈은 오전에는 군복을 생산하는 일을 감독하고, 오후에는 화학소와 제총소에서 최해산에게 좀 더 안정된 형태의 화약 제조법, 관리법을 알려 주는 한편 이 시대에는 없는 기초적인 화학 상식을 에둘러 일러 주었다.

그러는 한편 보총을 직접 한 자루 가져와 분해해 가며 그 제작법과 작동 원리를 알려 주곤 했는데 일부러 용수철을 만드는데 강철 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핵심 기술이기 때문이다.

“정말 가르침이 크십니다. 배울 때마다 스승님의 그 탁월한 혜안에 놀라움이 큽니다.”

최해산은 이제 아예 김세훈을 스승님이라 불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최해산에게 김세훈은 어쩐지 그 그림자를 느끼게 해 주는 존재였다. 기술에 대한 의지와 탁월한 식견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한층 응용하고 발전시키는 태도는 쉬이 귀감 삼을 만한 일이었다.

최해산은 아버지에게서 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자라왔기에 비록 나이는 얼마 차이나지 않으나 훨씬 앞서 나가 있는 세훈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물론 이 어린 청년이 세훈에게서 얻어갈 것만 챙긴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은 보총을 만드는 기술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대장군포(大將軍砲), 이장군포(二將軍砲), 삼장군포(三將軍砲), 육화포(六花砲), 석포(石砲) 등의 제작 기술을 일러 주어 세훈에게 포를 만들어 볼 생각을 심어 주게 되었다.

비록 포의 역사로 보아 이제 걸음마 단계의 기술이었으나 여기서부터 세훈이 알고 있는 지식을 곁들어 개량해 나가면 머지않아 제대로 된 근대식 대포를 만드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세훈도 이 어린 청년이 조금씩 마음에 들어가고 있었다.

1404년 입춘(立春)

조선국 전라도 제주도호부.

해가 바뀌자 고상희가 두 번째 아이를 출산했다. 이번에도 아들이었다. 세훈은 이번엔 직접 아들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현진(玄珍)이라 하였다.

“또 이렇게 건강하게 아이를 낳아 주어 정말 고맙소.”

세훈은 그저 아내인 고상희가 예쁠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바쁜 남편을 얻어 마음이 고생일 텐데도 이렇게 아이를 둘이나 순산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아이도 아이지만 지금처럼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아이를 낳다 혹여 아내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세훈이었기에 아내의 건강한 모습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서방님을 똑 닮은 아들이에요.”

고상희가 둘째 현진을 안아들고서는 말했다. 세훈은 아이 놓을 때 상투채라도 잡게 해 줬어야 하는데 고생이 많았다 싶어 그녀를 꼭 안아 주며 말했다.

“내 꼭 그대에게 좋은 시절을 보내도록 해 주겠소. 부귀와 영화를 모두 줄 수 있도록 말이오.”

세훈의 호언장담에 고상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한테는 지금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가절(佳節)이나이다. 너무 심신을 상하게 일하지는 마세요.”

세훈이 또 득남을 하자 장인인 고봉례는 기뻐서 잔치를 열어 사람들에게 대접을 크게 하고 비누와 발화기 장사의 몫을 받아 크게 쌓인 곡식 창고를 열어 제주 전역에 인심을 풀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세훈의 득남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뒤숭숭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본토에서의 압력이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사관 권진(權軫)을 제주로 보내와 궁사(宮司), 창고(倉庫)에서 보유한 노비의 적(籍)을 만들게 해 본토로 보고하게 하고, 군병(軍兵) 및 말과 총의 상태까지 꼼꼼히 점검시켰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석명(朴錫命)을 전라도 제주 도체찰사(全羅道濟州都體察使)에 임명하여 제주도호부의 방비가 위태하니 그 기율을 일신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만들어 내려 보낸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도호부사 위에 하나의 자리를 더 만들어 감하(瞰下)하겠다는 소리에 다름없었다.

특히 권진이 시찰을 내려왔을 때 과히 색을 밝혀 기녀를 요구하고 미색이 좋은 동녀(童女) 서른을 궁중에 바칠 요량으로 진상을 하라 하여 제주 일대가 그에 대해 쑥덕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임금이 어찌하여 저런 자를 보내어 살림을 괴롭게 하느냐는 이야기들이 계속 흘러나왔다.

권진이 올라간 뒤에도 지의정부사 박석명이라는 자가 내려온다 하니 외지인이 들어오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터질 듯이 수면 위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봉지, 고상온, 문충세, 양은계, 오상복이 세훈을 찾아온 것은 대보름밤의 야심한 시각이었다. 삿갓을 쓰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여 밤을 틈타 세훈을 남몰래 찾은 이들은 측방에 모여 세훈이 오자 이야기를 꺼냈다.

“조카사위. 이제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하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고봉지였다. 결단이라는 것은 조선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습니다. 매제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이 일은 할 수가 없소. 우리는 다 매제를 믿고 벌이고자 하는 일입니다.”

처남 고상온도 거들었다. 세훈은 내심 조선의 영향권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고, 공공연히는 아니나 평소에 마음이 맞는 이들에게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비춰 보이곤 했는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이었고, 또 대대로 제주에서 특권을 누려 오던 세습층의 일원들이라 권력을 잠식해 들어오는 조정에 대해 힘이 없을 때는 복종하고 소극적인 불만만 늘어놓았을 뿐이지만, 보총의 위력을 보고 군사력이 확충되기 시작하자 충분히 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항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훈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어르신은 알고 계십니까?”

세훈의 물음에 문충세가 고개를 저었다.

“성주 어르신께는 아예 이런 일을 일절 말씀드리지 않았네. 아직까지 조정에 대한 충성심과 두려움이 마음에 크게 남아 계신 분이네. 혹여 심려하시거나 일을 그르치게 하실 것 같아 말씀 드리지 않았네.”

“휴…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세훈은 내심 힘들겠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아직까지 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참된 사람들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을 벌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 탐라에는 외지 병력이 들어와 있지 않다.

다만, 한양 조정에서 반역을 토벌한다고 병력을 보내기 시작하면 문제였다. 섬이라는 지리적 장점을 잘 살려 총포로 적군을 막아내면 될 일이긴 했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통하는 이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오, 모두 물리쳐 낸다 한들 기존의 세습 직위를 누려 오던 이들이 서로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으면 탐라를 새로운 나라로 일신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될 터였다.

세훈은 그런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조카사위. 우리는 마음을 정했네. 자네가 우리의 군주(軍主)가 되어 주게. 이미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네를 우선 탐라대도독(耽羅大都督)으로 추대하기로 했네. 누가 주인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데에 마음을 모았네.”

“매제. 자리를 가납해 주시오. 이 탐라 성주의 후계로서 부탁하오이다. 대도독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 주시오. 원한다면 칭왕(稱王)하여 나라를 세워도 좋을 일이오. 우리 중에는 논공(論功)하여 우열을 정하고자 하는 이는 없으니 믿어도 좋소이다. 다만 이제 이렇게 탐라의 거족(巨族)들이 뭍의 사람들 손에 쇠락해 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오.”

탐라의 호족들 중 가장 힘을 지니고 있는 성주의 후계자이자 세훈의 처남인 고상온까지 그렇게 이야기하자 세훈도 결심이 조금 서는 듯했다.

어차피 언젠간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세훈도 딱히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좀 더 힘 있는 자리가 필요했기에 이들이 이렇게 주청해서 그런 자리에 올라달라 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세훈은 심약한 장인 고봉례가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일이 벌어지고 나면 되돌릴 수 없게 될 일이었다. 또한 이미 제주의 유지들은 뜻이 하나로 된 듯 보였다.

세훈이 가져다 준 부와 무력이 아니었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세훈이 보여준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이들도 고려와 몽골, 조선으로 이어지는 사슬을 끊고 제 뜻을 한번 도모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좋소이다. 그 자리를 내가 가납하겠소. 나는 이 사실을 연판장(連判狀)으로 만들어 피로 이름을 써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마음을 다져 뜻을 굽히지 않게 하고자 하오.”

“대도독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고봉지가 먼저 엎드려 절하며 말하자 이내 뒤에 도열한 4인이 그 뒤를 따랐다.

“따르겠나이다.”

이렇게 늦은 밤 고씨가(家)의 한켠, 김세훈의 침소에서 시작된 연판장과 항전의 의지는 제주의 믿을 만한 유지들과 호족들 사이를 돌아 300여 명이 뜻을 함께하는 뜻이 담겨 돌아왔다. 이들 300이 동참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제주가 뜻이 하나되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제주의 행정과 군사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호족집단들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훈이 만든 신식군대의 천부장, 백부장들은 모두 연판장에 이름을 기명했고, 군율이 잘 다져진 신식군대의 병졸들은 이들 천부장과 백부장들의 명령을 의심 없이 수행할 것이다. 더욱이 전부가 제주 사람으로 구성된 군대임에야.

모든 의지가 모아지자 세훈은 일시에 병력을 동원하여 거병을 선포하였다. 제주 3읍의 성과 주요 관청을 모두 신식병력으로 점거한 뒤, 외지인을 한곳에 모아 위리안치(圍籬安置)했다.

그중에는 영문도 모른 채 밤에 끌려나와 갇힌 최해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김세훈을 찾았으나, 세훈은 안타깝지만 지금은 최해산을 돌봐줄 시기가 아니기에 우선은 다른 외지인들과 함께 꼼짝하지 못하도록 격리된 가옥에 가둬 두었다.

그렇게 제주의 전반적인 장악이 끝나자, 뭇 인중(人衆)의 추대를 받아 탐라대도독의 자리에 오르고 제주도호부와 아래의 두 군을 폐지한 다음 탐라국군정처(耽羅國軍政處)를 설치하여 정부로 삼고 이를 일방적으로 한성의 조정에 통보했다.

제주는 일시 소란했으나 이내 호족들의 노력으로 이내 잠잠해졌다.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고봉례는 깜짝 놀라 일시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나 회복한 뒤에는 아들인 고상온에게 성주자리를 물려주고는 뒤로 물러나 앉았다.

거사가 있었던 날은 1404년 음력 2월 초하루로, 한성 조정에 이 소식이 닿은 것은 보름여가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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