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풍운지절(風雲之節)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 등이 군사를 일으켜 사람을 주군(州郡)에 보내어 군사를 조련(調練)하였다. 대호군(大護軍) 안우세(安遇世)가 마침 동북면(東北面)에서 돌아와서 역마(驛馬)를 달리어 그 연유를 고하였다. 사의는 곧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족속(族屬)인데, 강씨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다.
○安邊府使趙思義等擧兵, 發人于州郡調兵. 大護軍安遇世適自東北面而還, 飛馹來告其由. 思義, 卽顯妃康氏之族屬也, 欲爲康氏報仇也.」
―태종실록 제7권 4년 2월 18일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동북면(東北面)에서 한창인 때에 제주만호(濟州萬戶) 정의군수(旌義郡守) 김세훈이 탐라대도독을 칭하여 거병하니 이때에 이르러 남북간의 변방이 모두 난중으로 시끄럽더라.
○基時, 東北面中趙思義之亂繁, 濟州萬戶, 旌義郡守金世勳, 僭稱耽羅大都督而擧兵. 至當年, 北南路邊方搖, 所以皆亂中.」
―천항로(千恒勞), 계양록(季陽錄)
1404년 중춘(仲春)
조선국 영길도(永吉道) 함주목(咸州牧).
이성계(李成桂)가 아들 정안군의 참람(僭濫)을 보지 않으려 도성에서 내려와 고래의 근거였던 동북면으로 들어온 지도 1년여가 지났다. 이 북쪽 새된 곳에도 봄이 찾아오는지 바닷바람이 한층 유순해졌으나, 태상왕(太上王)의 마음은 그저 찬바람만이 스며들 뿐이었다.
태상왕 이성계는 나라를 열었다. 공양왕이고 우왕이고 창왕이고 죄 폐하고는 개국하여 조선(朝鮮)이라 이름하고 왕의 자리에 올라 만세에 전해질 종사(宗嗣)의 반석을 올리고자 했다.
그러나 맏아들 방우는 아비의 하는 일을 비웃으며 세자의 법통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하고 고려의 망신으로 여생을 하향(下鄕)해 지내다가 나라를 개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아니해서 졸년(卒年)을 맞이하고 말았다.
넷째와 다섯째인 방간과 방원은 의붓동생이 세자가 된 것을 시기하고 그 개국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왕의 자리를 원했기에 이성계가 멀쩡히 눈 뜨고 있는 동안에 의붓동생들을 죄 쳐 죽였다.
이성계는 피눈물을 흘렸다. 결국 그 서슬퍼럼에 마음마저 심적해진 그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둘째 놈 방과에게 왕위를 습해 주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원은 왕위에 올라앉아 있는 제 형을 겁박하길 즐겨하더니 똑같이 왕세제의 자리를 탐내던 형 방간을 또 난을 일으켜 몰아내더니 결국 왕위에 올라 제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형제끼리 싸우고 다투는 가운데에 아비도 없고 가문도 없어 죄 서로 몰아서 죽이기 바쁘니 이성계의 마음은 폭풍과도 같이 가라앉지 못했다.
방원이라는 놈은 왕위를 물려받더니 죄 뒤가 불안했던지 성석린을 보내다가 늙은 몸을 환궁(還宮)시켜 뒷방에 앉혀 놓고 대접하는 척하면서 제 정통성을 세우기에 급급했으니 그 꼴이 과해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세월을 넘기다 보니 한해가 지나서야 뜻하는 바대로 함주로 다시 내려올 수 있었다.
이때에 이성계가 아끼는 후처 강씨의 척족인 조사의가 예전 왕자의 난 때에 서인으로 강등되어 전라도에서 수군으로 노역하고 있었는데, 방원이 아버지의 마음을 풀겠답시고 그 조사의를 불러다가 함주 근처의 안변(安邊) 고을의 수령으로 앉혔다.
“먼 길에 고로(苦勞)가 많았다.”
안변으로 부임하는 길에 함주에 들른 조사의는 이성계의 침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침식을 하는 일이 괴롭다.”
조사의는 그저 엎드려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조사의 또한 새 왕조의 척신(戚臣)으로 기세가 등등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간 몇 년의 괴로웠던 일들이 찬연히 대비되었다.
한때 좋았던 시절을 함께했던 임금이 여기 이렇게 늙어서 내려와 앉아 있으니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사의는 한참을 눈물을 짓다가 이내 몸을 바르게 고쳐 앉고 눈을 부릅뜨고서 태상왕에게 물었다.
“혹, 복위(復位)의 뜻이 있으시나이까?”
조사의의 물음에 이성계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약간 비뚜루 앉고서는 멀리 산의 터럭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사의는 그저 묵묵히 앉아서 대답을 기다를 따름이었다. 이성계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네가 그리해 줄 수 있느냐?”
“이 동북면의 호족들은 가히 뜻만 내려 주시면 군사를 이끌고 친위(親衛)할 것이나이다.”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다.”
“상관치 아니하나이다. 그 뜻만 회람케 하시면 될 일이나이다. 왕후마마의 종제(從弟) 강현(康顯)과는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습니다. 이곳 동북면 영길도는 원래 모두 마마의 배신(陪臣)들이오, 그 민심이 마마와 함께하는 땅이니 이곳에서 거사를 일으키면 그 실패할 일이 없을 것이나이다.”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개경 수창궁 시절부터 옆을 지키는 내시 박만을 불러들였다. 비록 고자이나 입이 무겁고 사욕도 없으며, 오로지 이성계를 위해 일을 그치지 않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박만을 네게 붙여 주도록 하겠다. 이이가 가면 내 뜻은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앞으로 연락할 사안이 있거든 박만을 통하도록 하고, 네가 거사를 치르면 나는 한성에서 올라오는 아무런 사절도 들이지 않겠다.”
“분부 받잡겠나이다.”
조사의는 재차 엎드려 부복했다. 한때의 빛나던 영화가 지척인데 여기서 이렇게 스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 태상왕도 같은 생각이리라. 목숨 하나 아까워서 이렇게 바람에 스며지듯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영달과 멀어진 지금의 인생, 태상왕이 아니면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원, 이놈! 나를 태상왕의 곁으로 보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조사의의 생각이 곧 이성계의 생각이었다.
이성계 또한 방원의 얼굴을 생각하면 심정이 복잡해 침식을 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것을 결착 지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때가 무르익었으니 어찌 움직이지 아니 하리요.
그렇게 조사의가 박만을 데리고 떠난 뒤로 한동안은 이성계에게 들려오는 소식이 없었다. 도리어 방원이 자꾸 성석린이나 무학대사를 보내어 귀찮게 할 따름이었다.
이런 이들을 차마 쳐 죽일 수 없어 돌려보내다 보니 시시때때로 한성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지닌 이름 없는 차사(差使)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이 일에 기어코 뿔이 나고야 말았다. 아비도 형제도 없이 죄 권력을 위해 내치고 죽이고 기름 부어 태울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이렇게 노기(怒氣)를 달래 보겠다고 사람을 보내는 일이 아니꼽기 짝이 없던 것이다.
“네놈들은 네 임금을 위해 나를 달래러 오나, 나는 추후도 그 작당에 응해 줄 생각이 없다!”
불같이 노한 음성으로 차사들이 오면 호통을 치고서는 한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죄 죽여 버렸다.
이성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른바 절치부심(切齒腐心)이었다.
잃은 자식들과 방원의 손에서 건져주지 못한 인재들을 생각하면 눈에선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마음에서는 울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차사들을 물리치며 봄이 지날 무렵에 결국 조사의에게서 거병(擧兵)하겠다고 전하는 인편이 왔다.
이성계는 전갈을 적은 편지를 손에 쥐고서는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러나 다시 왕위를 찾은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자식이니 방원을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방과를 후사로 잡을 수도 없고, 방간을 후사로 삼게 되면 방원을 섬기는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방의가 있으나 몸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가료(加療)는 잘하고 있는가 모르겠구나. 그러나 모든 것은 이 난이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조사의가 잘해 주어야 할 텐데…….’
모든 것은 일의 수순이 정해지면 길이 보일 터였다. 이성계는 살아오며 많은 고난을 마주했으나 길을 열어 가니 갈 곳이 보였다.
원나라 벼슬을 버리고 고려에 입조(入朝)한 아버지를 따라 되놈 취급받으며 세력을 길러오고 수신(修身)하길 여러 해였다. 그 인생의 역정 끝에 올라온 것이 나라의 주인이요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였다.
“그대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서 거병하였소이다. 두 번의 기회는 없소. 이번이 찬탈한 아들놈에게서 왕위를 돌려받을 마지막 기회요.”
그날 침전에 들어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위패를 가져다 놓고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 이렇게 위패나 모셔 놓고 말하는 수밖에 없지만, 혼이 되서라도 이 영명한 여자는 이미 이 일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상히 알고 있을 것이다. 방원이 자기의 아들들을 쳐 죽인 것부터 이렇게 지아비를 몰아낸 것까지도.
“그대의 친척들인 조사의와 강현은 용맹한 자들이나 한 번 생각할 줄 아는 자들이니 위험한 데에는 나서지 않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을 이들이오. 나는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소.”
이성계는 그게 곧 신덕왕후 강씨의 소망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도 제 아들들을 쳐 죽이고 죽은 계모를 몹쓸 악녀 취급하고 있는 정안군 이방원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성계는 왠지 눈물이 흘러나와 그치지 않았다.
“방원 이놈!”
함주 찬바람에 이불 덮고 방원에 대한 끓인 속을 다스리는 동안, 영길도의 호족들을 죄다 모으고 이성계에게 충성을 바치던 일부 여진족의 군세까지 끌어모은 조사의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을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박순(朴淳), 송류(宋琉)를 보내 회유하고자 했으나 조사의는 가차 없이 간신배 도당이라 하여 이들을 참해 버렸고, 관군의 선봉 이천우(李天佑) 또한 조사의 일당의 기세에 결국 깃발을 꺾고 겨우 목숨만 부지해 달아났다. 조사의의 군세는 이미 철령을 넘어 회안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1404년 계춘(季春)
조선국 한성부(漢城府) 경복궁(景福宮).
“전하! 진정하시옵소서!”
내관의 외침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조선의 임금인 이방원은 분노와 격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떻게 오른 용상(龍床)이던가. 아버지를 충동질해 공양왕을 밀어내고 왕의 자리로 나아가게 했다.
정몽주, 최영, 이숭인, 이색등 전조의 이름 난 명신들이 모두 그의 손에 숨을 거두었다. 이들의 목숨을 취해 왕조를 개국하게 하고 나서도 이 자리를 물려받기까지의 고난은 천 리의 가시밭길과도 같았다.
그 또한 형제들을 쳐 내며 올라오는 일이 즐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대업(大業)을 위해서였다. 명의 연왕(燕王) 주체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대업을 이루는 데에 방해가 되는 족속들은 아픈 가슴을 매어 놓고라서도 쳐 내야 할 이들이었다. 패자(覇者)가 가는 길이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네놈들이……! 조사의, 김세훈 이놈들을 내가 구족을 멸하고 말리라!”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들이 남북으로 준동하고 있었다. 북변(北邊)에서는 태상왕을 등에 업은 조사의가, 남에서는 탐라대도독을 참칭한 김세훈이 날뛰고 있었다.
피의 길을 걸어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기에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으니 이렇게 반역을 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찍어 눌러도 그 세력이 둘이 되고 넷이 되어 계속해서 왕좌(王座)를 겁박하려고 들고 일어날 것이었다.
이방원은 침전에 있는 모든 서랍이며 서안(書案)을 다 때려 부수고 자기를 깨트리고 칼로 요를 다 헤집어 놓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놈들!”
늦게까지 잠을 들지 못하고 분을 삭이지 못하던 이방원은 아침 일찍 퀭한 눈으로 대전으로 나서 대소신료들에게 번뜩이는 용안(龍眼)을 부라리며 좌중을 휘시(揮視)했다.
“북변과 남안의 일은 어찌 되었는가?”
임금의 서슬 퍼런 눈에 아무도 감히 대답을 들고 나서지 못했다.
한참을 있어서야 좌정승(左政丞) 하륜만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여말(麗末)로부터 이방원이 지금의 임금 자리에 앉기까지 필사(必死)의 각오로 보위해 온 그였기에 이런 서슬 퍼런 눈에도 입을 열 수 있는 것이었다.
“신 의정부 좌정승 하륜 아뢰오. 이천우가 이끄는 진압군이 패퇴한 이래로 역도 조가의 군대가 2만이 늘어 3만에 달해 강원도 접역으로 들어서 춘천(春川)을 에워싸고 있나이다.”
“탐라의 도적 떼들은 어찌 되었는가?”
“아직까지는 옛 탐라국의 국사(國嗣)를 되돌린다고만 할 뿐 군사를 앞세워 바다를 건너지도 아니하였나이다.”
“이 도적 떼들은 감히 과인의 유(諭)도 받지 아니하고 나라를 칭하고 분국해 나간다 하니 이 얼마나 대역무도한 패위(悖爲)인가. 그리하였으면 입공(入貢)을 해 조치를 바라든가 사직(社稷)의 위를 세우려 봉작(封爵)을 바란다고 주청해도 모자랄 판에 대도독을 참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시위하고 있으니 노여움이 가시지를 않는다.”
이방원의 목소리는 분기에 잠식되어 있었다.
혈압을 높이지 않으려 애써 삭이고 있으나 감히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노여움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씩씩거림으로 묻어 나왔다.
하륜은 그 앞에 서서 그 분기를 받고 있자니 몸이 떨려 왔지만, 이런 일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우선은 잘 다독여 넘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선 다시 군사를 내어 조사의의 패륜도당을 토벌하시옵소서. 남해의 도적들보다 이들이 더 급하나이다. 이들이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과 합심하여 준동할 경우 도성 또한 위태롭나이다. 방간을 참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변의 도당을 먼저 처결해야 하나이다.”
“이제 와서 형제의 피를 또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방간 형님은 외부와 드나들 수 없으니 역적 떼가 아무리 간악하더라도 내통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히려 사문(赦文)을 내려 안위를 보장하고 위로하도록 하라. 그리하고 군사는 얼마를 낼 수 있겠느냐?”
하륜은 임금의 말에 더 이상 토 달지 아니하고 부복했다. 회안대군 방간의 문제는 계속해서 끄집어내 봐야 지난 일의 치부만 들추는 일이었다.
“기전(畿甸)과 서해도(西海道)의 군세를 합한다면 4만을 내어 도읍에 육박하기 전에 방비할 수 있나이다.”
“조영무(趙英茂)로 동북면,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 도통사(都統使)에 임명해 군사를 최대한으로 모아 역적의 군세가 강원도를 넘지 못하도록 우선 방비토록 하고, 이빈(李彬)으로 서북면도절제사(西北面都節制使)에 임명해 동북면에서 혹여 조사의에 동조해 안주와 자성으로 넘어올지 모르는 군세를 방비토록 하라. 이천우(李天佑)로 안주도도절제사를 맡겨 이를 수행하도록 하고, 김영렬(金英烈)로 동북면·강원도도안무사(江原道都安撫使)를 삼아 조영무와 함께 반란을 진압토록 하라. 유양(柳亮)은 풍해도도절제사에 임하니 군사 1만을 내어 조영무의 군세와 합류해 역당 진압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장군들을 임하고 나니 다음 문제는 군사를 내는 것이었다. 결국 이미 반란군에 의해 궤멸된 동북면과 강원도의 군세는 제하고 서북면 또한 스스로 방비를 해야 하니 많이 낼 수 없는 노릇이라 하륜이 간언한 대로 풍해도(혹 서해도.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에서 군사 4만을 내어 춘천이 지척인 가평으로 보냈다. 여기서 일을 막지 못하면 한성까지는 백 리 안으로 지척이었다. 북변의 난에 대한 대응책이 정리되자 임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좌정승 하륜은 들으라.”
“분부 받잡겠나이다.”
“당장 북쪽의 일이 시급하여 남쪽의 도적을 척결하지 못하나 이 또한 시급을 다투는 일이다. 우선은 유귀산(庾龜山)을 제주안무진제사(濟州安撫賑濟使)로 삼아 바다 너머로 보내 역도의 하는 일을 잘 살피고 몸 성히 돌아오게 하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륜이 물러가고 대신들도 퇴청(退廳)하자 임금은 홀로 용상에 앉아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음력 3월, 계춘(季春)의 계절이라 날씨는 슬슬 무더워지나 그저 등에서는 식은땀만 흐를 따름이었다. 태상왕을 등에 업은 조사의의 군세는 100리 간의 지척이고 남해의 도적들은 존재 자체로도 성가신 일이었다. 왕좌(王座)를 지키기가 이렇게 힘든 일인 것을 이제야 이방원은 실감하고 있었다.
1404년 계춘(季春)
탐라국 제주도독부(濟州都督府).
이방원이 내려 보낸 제주안무진제사라는 유귀산은 제주도에 상륙하자마자 군사들에게 붙들려 제주읍성의 조용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는 기세등등한 신식군들의 위세에 눌려 별 말도 못하고 우선은 뭔가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가 도착하는 와중에 세훈은 거사를 일으킬 때 잠시 유폐(幽閉)시켜 두었던 최해산을 불러다가 술 한 잔을 나누고 있었다.
“스승님. 도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탐라국 대도독이라니요. 조정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최해산은 일이 이렇게 된 와중에도 세훈에게 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이 편치 않음은 얼굴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세훈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조정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있네.”
“그렇다면 어찌 되고 있는 겁니까?”
“하하! 어떠할지. 조정은 이미 이 일이 아니라도 뒤숭숭하다네. 북변(北邊)에서 태상왕을 등에 업고 조사의라는 자가 난을 일으켰네.”
“…….”
“그래서 임금도 이쪽까지는 당장 어쩌질 못하고 유귀산이라는 자를 거창한 직함을 붙여 내려 보냈더군. 사정을 시찰하고 어를 수 있으면 얼러서 잠시 붙들어 두었다가 내정이 마무리되면 팽(烹)해 버릴 생각인 게지.”
김세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최해산은 식은땀이 벌벌 나면서 몸이 오싹했지만 동시에 이 호쾌한 남자가 뭘 꾸미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런데 탐라국 국사를 잇는다 하시고서는 왜 칭왕은 하지 않으신 겁니까?”
“이 조그만한 섬에 무슨 왕인가. 그리고 나는 조선이랑 절연(絶緣)하겠다고 이 수작을 부린 게 아니네.”
“절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시면…….”
“경기도 마전군에 가면 폐주 공양왕의 조카 왕조가 작위를 습봉(襲封)해 옛 고려왕실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 하지. 처음에는 명분을 등에 업고 왕씨의 복왕을 주창하려 했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쉽지 않지. 그런데 지금 탐라는 이미 내륙과는 너무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어. 그러나 조선이 흔들리지 않으면 무슨 수로 그들이 받아들이겠나. 권세 있는 임금 아래에서는 나도 일을 추진할 수가 없네. 그래서 처음엔 일이 잘되면 왕씨를 옹립하려 했지. 그런데 지금 보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을 듯하네.”
최해산은 조금 흥미가 돋는 것을 느꼈다. 이제 스물셋의 젊은 청년이었다. 어릴 적에 왕조가 바뀌는 것을 보았고, 새로운 왕조에 나가 출사해 벼슬도 받았다. 그 와중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만, 혁명(革命)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뛰곤 하는 것이었다. 새 왕조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이미 세훈이라는 인물에 대한 종맹(從盲)함이 생긴 터였다.
“지금의 금상이나 태상왕 둘 중 하나는 이번을 계기로 날개를 꺾이게 될 것이네. 그중 이기는 쪽이 아니라 지는 쪽에 붙어서 입경(入京)할 생각이네.”
“……!”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지금 왕조의 개국건신(開國建臣)들이 주창하는 성리학의 나라가 아니네. 요지일월 순지건곤(堯之日月 舜之乾坤)의 태평성대에 주자가 있었는가? 서주(西周) 십이대(十二代)에 정호(程顥)가 어디 있었는가. 나는 상공(商工)을 크게 일으켜 백성의 의식(衣食)을 편케 하고자 하니 이들과는 함께할 수 없는 노릇이네. 이곳 탐라에서 자네가 보다시피 강한 군대를 양성하고 물재(物材)를 연구하여 많은 것을 이루었으나 이곳 탐라는 좁은 땅이라 그 한계가 있네. 그렇다고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되어 나라를 도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다면 혁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해산은 얼이 없는 듯 그저 멍한 얼굴로 세훈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게 데워 나왔던 소주도 이제 차분히 식어 있었다. 최해산은 식어서 싱숭맹숭한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서는 안주로 나온 전을 입에 구겨 넣은 다음 말했다.
“저도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어렵사리 꺼낸 말이나 도리어 세훈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최해산이 한 양으로 술이나 한 잔 더 털어 넣고 주전부리에만 젓가락이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히려 그걸 못 견디고서 최해산이 다시 주청했다.
“저도 그 대사에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이곳에 와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새롭게 눈이 많이 틔었나이다. 좀 더 가시는 세상 끝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사옵니다.”
그제서야 세훈은 대답을 주었다.
“그리하도록 하게. 난 처음부터 자네를 내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따로 부른 것이 아닌가.”
“감읍하나이다.”
“앞으로 화학(化學)이라 이름 붙인 물질의 변화와 성질을 다루는 학문과 산업을 일으키고 물재를 넉넉히 할 근간이 될 철을 뽑아내고 다루는 야금술(冶金術)을 넓게 익혀 나를 대신하여 일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네. 그 일을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좋겠네.”
“제가 원하는 바이나이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네. 한 잔 더 들도록 하지.”
이로서 고려 말의 명장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김세훈의 수하로 거두어졌다.
세훈은 이를 위해 동영고로의 제총소와 제련소를 합쳐 야금도감(冶金都監)을 만들고 화약과 염료를 연구하던 화학소도 크게 확대해 화공도감(化工都監)으로 만들고 이곳에 부설로 화학전습소(化學傳習所)를 설치해 화학 교육을 맡도록 했다. 그리고 이 세 기관의 상부에 공업료(工業寮)라는 기관을 설치해 공업료 판서(判書)자리에 최해산을 들어다 앉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훗날을 내다보고 기관의 규모를 키우고 이름만 고친 것일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실제로 야금도감과 화공도감의 감사(監司)로는 기존의 부석소와 정탄이 그대로 유임되어 직책상에도 크게 변동이 없었다. 다만 이번 조선의 정란이 가라앉고 그로써 적어도 탐라만큼은 세훈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면 이 기관들은 그때 크게 빛을 바라보게 될 것이었다.
최해산에 관련된 문제도 해결이 되자 세훈은 예전에 들여오고 남은 모든 철광석을 쏟아부어 보총 3천 정을 추가 생산하고는 군역(軍役)을 지는 모든 장정을 조사하여 추가로 병력 3천을 징집했다.
이중에는 예전에 왜구가 내입했을 때 세훈과 함께 정의읍성에서 보총대가 올 때까지 열심히 분투했던 구식군대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세훈은 이들과 함께 제주읍성, 대정읍성의 구식군도 다시 추려 모아 1천 명을 만들고 보총의 사용법과 3주일간의 간단한 제식훈련을 마친 다음에 제주에 400, 대정과 정의에 각각 300씩 나누어 배치해서 혹여 모를 내침(來侵)에 대비토록 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기존의 잘 훈련된 3천의 정병에 새롭게 훈련을 받게 된 2천의 정병까지 해서 도합 5천의 신식군이 탄생했는데, 이들을 이끌고 세훈은 도해(渡海)할 생각이었다.
그 준비를 위해 기존의 훈련을 꾸준히 받고 왜구 격퇴의 전적도 있는 3천의 병사들을 우선적으로 그간 준비해 둔 신식 군복으로 통일시켰다.
18세기 유럽 군대의 제복을 참조하여 만든 이 군복은 우선 가죽 군화에 옷은 방적기로 짠 면을 재료로 하여 일전 개발한 푸른색의 쪽염료와 붉은색의 모브 합성 염료로 염색한 질 좋은 옷이었다. 허리에는 탄약을 보관할 수 있도록 띠를 두르고 주머니를 달았으며, 어깨에서 허리로 두르는 포장(布帳)은 간단히 소속대와 계급을 알아볼 수 있게 구별된 색으로 달았다.
다만 모자는 크게 고치지 않고 기존에 사용하던 전립(戰笠)을 조금만 손봐 사용하게 했는데, 기존의 탐라 병사들에게는 이것이 모두 새로운 것이라 딱히 더 이상할 바도 없었지만 세훈이 보기에는 위는 전립에 아래는 서양풍의 군복을 착용한 것이 꽤나 재밌게 보이기도 했었다.
이렇게 총과 탄약, 군복의 지급이 끝나고 추가 훈련을 마친 새롭게 징집된 2천의 병력에게도 같은 물품이 지급되고 나자 구식군대를 재편한 1천의 제주 방위군을 제외하고도 본토에 상륙시킬 수 있는 병력 5천이 나오게 되었다.
제주의 5만 인구의 십분지 일 정도 되는 인원이었다. 더 이상 병력을 늘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세훈은 이 병력으로 무기의 우위와 근대식 훈련으로 조련(調練)된 병사의 사기를 무기 삼아서 조선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은 왕조를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라 세력을 잃은 편에 붙어서 날개를 달아주고 탐라를 조정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조선의 내정에도 개입하여 전반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일이 모두 준비되자 세훈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제주에 내려온 것을 가둬 두었던 유귀산을 불러들였다.
“유 공. 우리는 지금 난신적자들이 판치는 이런 세태를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소이다. 그래서 직접 바다를 건너 도성으로 들어가 정국을 안정시키려 하오.”
“주상 전하께서 노하셨습니다. 이제 곧 철령을 넘어온 반역도들도 철퇴를 맞고 산산이 흩어질 것이니, 이번에 확실히 엎드리지 않으시면 주상 전하의 다음 철퇴는 이곳 탐라로 올 것입니다. 김 공께서도 대도독의 칭호는 그만 버리시고 입조(入朝)하셔서 용서를 청하시옵소서.”
“이미 강을 건넜소이다. 뒤에는 물이 불어 다시 건너가지 못하겠고, 앞은 고된 산길이긴 하나 길이 보이는데 어찌 가지 않겠소. 유 공은 이번에 내륙으로 출정하는 나와 함께 건너가셔서 도성에 도착하는 대로 풀어드리리다. 사절로 온 이를 박해하지는 않을 터이니 이만 물러가 몸을 보중하고 있으시오.”
유귀산에게 통첩을 가하고 난 다음 날, 세훈은 5천의 병력을 사열하고 2천은 기병, 3천은 보병으로 나눈 연후에 이를 다시 만 명씩 편제하여 제1기병대, 제2기병대, 제1보병대, 제2보병대, 제3보병대로 나누고 각각을 고상온, 문충세, 양은계, 부상로, 고술해로 대장 삼고, 고봉지에게는 남은 1천의 병력을 통솔시켜 혹시라도 모를 외침에 대하여 탐라를 대비토록 하였다.
편제가 끝나자 세훈은 일전 징발해서 상업용으로 사용하였으나 지금 조선과의 거래가 끊겨 놀고 있는 왜선 40척을 무장시키고, 전래에 제주에 있던 규모가 있는 상선, 전선을 죄다 끌어모아 100척의 함대를 만든 다음 튼튼히 보수시키고 내륙으로 군사를 태우고 출항하니 이 출발한 날이 3월 25일의 일이요, 전라도 고창 구시포에 이 병력이 내린 것이 3월 28일의 일이었다.
1404년 맹하(孟夏)
조선국 한성부.
“전하. 적당(敵黨)이 광주까지 내려왔나이다. 몽진(蒙塵)하셔야 하옵니다.”
하륜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방원은 눈을 질끈 감고서는 신음성만 토해냈다.
설마하니 절치부심하여 모아서 보낸 군사가 궤멸당할 줄은 몰랐다. 이미 조정에 철령을 넘어서 조사의가 춘천성을 포위하고 있다는 전갈이 올라와 군사를 모으기로 결의가 되었을 때는 이미 춘천이 함락되고 원주로 군세가 돌아간 상황이었고,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던 강원도 관찰사 여칭(呂稱)이 조사의의 겁박에 못 이겨 1만의 군사로 싸워 보지도 않고 원주성문을 열어 들어다 바치니 조사의의 휘하의 반군은 이내 그 숫자가 5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군사를 징발하러 원주성으로 온 조영무는 원주성이 함락된 줄 모르고 성문을 열라 청하다 사로잡혀서 포로가 되었고, 풍해도도절제사 유양이 군사 1만 2천을 끌고 가평으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5만의 군세가 여주와 이천을 지나 광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급하게 유양이 끌고 온 풍해도 병력에다가 도성 주변을 호위하는 병력을 끌어모아 광주에서 맞섰으나, 3월 27일 결국 풍해도도절제사 유양이 이끄는 2만 5천의 군사와 물경 5만의 조사의 군의 결전은 예견된 대로 조사의 군의 압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조사의 군은 여기서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진입할 것을 결의했는데, 문제는 한강을 건너는 것이 되어 근처의 목선을 징발해다가 부교(浮橋)를 놓느라 시간을 잠시 지체하고 있었다.
“몽진을 하지 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는가?”
“적군이 이미 한강 코앞에까지 들어와 있나이다. 도성을 방비하는 2천의 병력으로는 저들의 군세를 막을 수 없나이다. 어서 나갈 채비를 하셔서 몽진을 결행하시옵소서.”
이방원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북악산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떠나면 과연 살아서 이 북악(北岳)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죄의 업보가 많았다.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몇이었던가. 형제들은 얼마나 또 괴로워했는가. 문득 지금쯤 개경 인덕궁(人德宮)에서 세파에 개의치 않고 유유자적하며 격구나 즐기고 있을 상왕 이방우가 떠올랐다.
같은 형제인데도 어쩜 이리 다를 수 있을까 하고 그의 어머니는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러나 나는 형님처럼 살 수 없었다. 내 길은 내가 뚫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했다. 한때나마 지존의 자리에 앉지 않았던가. 이렇게 잠시 후퇴하더라도 끝이 아니리라.’
마음을 가다듬은 이방원은 자신을 따르는 조정신료들을 불러 모으고 아들 양녕을 위시한 가솔들을 끌어모아 채비를 갖추게 했다.
“하륜. 그대 말대로 도읍을 다시금 옮길 때 무악 땅으로 했었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모르겠네. 아버님을 달래고자 다시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으나 아버님께서는 동북면으로 들어가시어 이렇게 군세를 일으켜 나를 괴롭히시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우선 몸을 피하시옵소서. 개경에도 상왕 전하와 방간이 있으니 불길한 지세이나이다. 우선은 강화로 들어가 항전을 준비하시옵소서. 몸을 피하고 계시는 동안 서북면의 군사들이 풍해도를 넘어 조사의를 벌하러 내려올 것이나이다.”
하륜의 말에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런 지경에 처했으나 이방원의 기세는 여전히 현현했다. 이런 일 따위에 엎드려 굴복할 그가 아니었다. 그 스스로 아버지의 모사꾼 삼아 조선을 건국했고 돌아오지 않는 왕자를 취하기 위해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제 태상왕이 물러나면서 개성으로 되돌렸던 도읍도 다시 한양으로 옮겨와 국체(國體)를 일신하고, 호족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군권을 나라에서 다스리고, 적법한 세자를 내세워 천년을 내릴 왕조의 반석을 닦는 와중에 일이 지나친 것인지 모자랐던 것인지 이런 참변이 일어나고야 말았으나 이방원은 아직까지 자신의 운과 모략을 믿고 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새 도성의 서문인 돈의문(敦義門)을 나와 강화 행궁으로 가는 몽진길은 내내 침통한 분위기였다. 하륜, 민무구, 민무질, 이숙번 등이 시종(侍從)하며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까지는 백 리 길이었다.
그리 가더라도 머물 곳이 마땅치 않을 터였으나 지금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예전의 고려행궁(高麗行宮)이 있으니 가서 보수해서 쓰면 될 것이다.
이틀을 꼬박 말을 타고 걷고 해서야 겨우 김포에 다다라 바다를 건너 강화에 들어설 수 있었다. 잠시 행장을 푸는 사이에 이방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 좋은 소식들 뿐이었다.
이방원의 총애를 받으며 왕자의 난에서 큰 몫을 하여 그 무훈(武勳)이 드높던 이숙번이 임금을 시중 보며 들려온 소식을 전해 주었다. 모두 다 가히 좋지 않았다.
“조사의가 한양에 입성하고 군사를 주둔시킨 다음 송도로 향하고 있다고 하나이다. 가서 상왕을 뫼셔 온 다음 함주에서도 태상왕을 뫼셔 와 사직을 바로잡는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하나이다.”
“서북면의 군사는 아직인가?”
“서북면도절제사 이빈(李彬)에게 파발이 도달하였나이다. 군사 2만을 끌고 풍해도로 들어섰다고 하나이다.”
“그걸로 충분하겠는가?”
“조사의의 기세가 높나이다. 군사도 5만이니 다른 병력이 필요하나이다.”
“삼남(三南)에서 병력을 모으기는 힘들겠는가?.”
“실은 탐라의 김세훈이 병력을 이끌고 전라도에 상륙해 이미 전주읍성이 함락되고 파죽지세로 진군하고 있다 하나이다. 대략 5천의 군세이나 그 병사들의 기세가 드높고 보총으로 무장하여 가는 곳마다 대항치 못하고 스러지고 있다고 하나이다.”
이방원은 갑자기 허리가 아픈 듯한 느낌에 시달렸다. 이것이 단장(斷腸)의 느낌인가 싶을 정도였다. 도무지 머리가 아파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계획이 떠오르질 않았다.
“하륜을 들라하라.”
막힌 곳이 있으면 언제나 지모로 뚫어 주던 하륜이 필요했다.
이숙번이 하륜을 불러오자 이방원은 그를 가까이 앉히고서는 꾀주머니를 열어 보라 재촉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나이다.”
“무엇인가. 말해 보아라.”
“그러나 이 방법은 지금 벌어진 난을 덮고 왕좌를 다시 되찾을 수는 있으나 앞으로 사직(社稷)에 누가 될 수도 있나이다.”
“지금은 우선 이 난국을 타개할 때다. 말해 보아라.”
“김세훈과 손을 잡으시옵소서.”
“그 역도와 말인가!”
“김세훈은 탐라국의 국사를 잇겠다고만 했을 뿐 왕실에 거역하겠다고는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나이다.”
“그러나 거병해서 지금 전라도와 충청도를 휘젓고 있다지 않느냐?”
“무력을 시위(侍衛)하는 것이나이다. 그의 군사를 이용한다면 능히 조사의는 진압이 가능하니 그에게 차사를 보내어 함께할 뜻을 전하십시오. 탐라국주 제주공(濟州公)에 봉하고 공가(公家)의 사직(社稷)을 세우게 하소서. 그리고 뜻하는 대로 하게 둔 다음에 조정으로 불러 벼슬을 시키거나 외방에 묶어 두고 대마도처럼 다루면 될 일이나이다.”
“괜찮겠는가?”
“원하신다면 일전 제주에 다녀온 연고도 있고 하니 제가 직접 김세훈에게 다녀오겠나이다.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나이다. 서북면 2만 군세만으로는 도무지 조사의를 뚫을 방법이 없나이다.”
“그럼 부탁하겠네.”
이방원은 며칠 사이 부쩍 늙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륜은 그 모습을 보며 그 범 같은 인물이 다시 기운을 찾게 해 주고 싶었다. 이방원을 용상에 올리기 위하여 함께 호종한 세월이 얼마던가. 하륜은 여기 와서 그 일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륜이 교지(敎旨)를 받아 파발을 달려 남으로 향하니 이때가 음력 4월, 맹하(孟夏)에 접어들어 열흘째의 날이었다. 이때 김세훈은 이미 충청도 공주성에서 항복을 받아 그곳에서 기거하며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1404년 맹하(孟夏)
조선국 충청남도 공주목(公州牧).
하륜이 이틀 밤낮으로 말을 달려 공주(公州)에 도달하였을 때는 이미 전라도와 충청좌도의 방백(方伯)들이 모두 기함(氣陷)하여 세훈에게 항복하거나 달아나거나 산첩(山疊)에 틀어박힌 뒤였다.
이로서 조사의의 난군(亂軍)이 영길도와 강원도를 취탈하고 경기에 들어와 도성을 점거하였고, 세훈이 전라, 충청의 양도에서 군세를 자랑하고 있으니 이미 팔도가 동북과 남서로 군세에 찢겨 있는 판국이라 하륜은 식겁하고 세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주상 전하께오서는 귀공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시오니 이제 군세를 의탁하여 조사의의 난세를 진압하신다면 숭록대부(崇祿大夫) 탐라국주(耽羅國主)에 임하고 제주공(濟州公)의 자리를 약조하리니 탐라땅에 봉작(封爵)하고 사직을 세울 수 있게 하리니 뜻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륜의 청에 세훈은 일갈했다.
“내가 지금 전라와 충청 양도를 내 권하(權下)에 놓고 주상은 강화에 틀어박혀 있으며 내가 일찍이 조정에서 벼슬을 한 연유가 없는 바, 내가 지금의 금상을 좇아서 그 하찮은 작위와 벼슬을 탐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말해 보라.”
“예로부터 나라와 사직이 위급 지경에 처했을 때 군사를 거병하여 임금을 겁박하는 일의 끝이 좋지 아니하였나이다. 옛 전한(前漢)의 적법한 황통을 끌어내린 왕망의 예가 그리하였고, 후한(後漢)의 황통을 적멸한 위(魏)의 성세도 오래가지 못했나이다. 하물며 당(唐)의 측천(則天)을 이야기하여 무엇하오리이까. 그러니 옛 주(周)나라의 예를 따르시어 역도를 토벌하는데 종군하시어 그 공을 삼아 분봉(分封)하시는 것이 가장 신하로서 아름답게 하는 도리인 줄 압니다.”
“네가 지금 나에게 근왕(勤王)의 적부(適否)를 논하고자 하나 네가 섬기는 임금 또한 고려의 왕통을 능멸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아비와 형을 겁박하고 아우는 참살하며 동복형제들을 죄다 운신조차 못하게 만들어 왕위를 탈취하였으니, 태상왕이 노여움에 조사의를 일으키고 나 또한 정안군 방원의 성정됨을 보아 왕위에 올려 두는 것이 그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군세를 일으킨 바 되었다. 그런데 나더러 고금의 무도한자들을 논하면서 어찌하여 네 주인은 왕망과 측천의 예에 함께 올려놓지 아니한가?”
세훈의 일갈에 하륜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했음은 따로 이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난 십수 년 간의 정쟁(政爭)으로 정안군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과정은 누구보다도 하륜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와 함께 꾀를 내고 지략을 짜 모은 것이 자기의 맡은 바 소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막상 왕위에 올려놓고 자신도 정승(政丞)의 대반(大盤)에 올라놓고 보니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것임에야. 내가 왕실의 적통을 뒤흔드는 것은 대의가 있기 때문이요 남이 내게 그리하는 것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패륜으로 취급하는 것은 제 눈의 티끌은 보지 못하는 탓이다. 하륜은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어 그저 땀만 삐질거리며 애꿎은 다리만 후들거리고 있었다.
세훈 또한 이런 상황을 과히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실제 역사에서 조사의는 평안도로 들어갔다가 관군 4만에 의해 쉽게 토평되었다. 그래서 때맞춰 남쪽으로 들어가 관군을 분산시켜 조사의의 명줄을 좀 늘여 준 다음에 그 기세가 쇠하면 태상왕과 조사의의 구원군이 되어 한양을 점탈(占奪)하고 태상왕이나 상왕을 보위에 돌려놓으면 그 다음은 그들을 다루기 쉬울 일이었다.
태상왕의 든든한 배신들은 이미 왕자의 난을 거치며 참살되었고, 주변에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머리는 없고 쭉정이들뿐이었다. 게다가 태상왕의 보령이 얼마 남지 않아 상왕이 그 자리를 다시 되물려 받게 된다면 세훈이 섭정공(攝政公)이니 하는 자리를 만들어 국사를 일람(一覽)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 외로 조사의가 너무 선전을 해주었고, 도리어 정안군 이방원이 쫓겨나 강화로 도망쳤으니 처음 뜻한바대로 하자니 이미 조사의와 강현등의 기세가 등등하여 다 끝난 일에 수저 하나 올리는 모양새밖에 되지 않겠다.
그렇다고 이방원을 등에 업자니 이방원 속하(屬下)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하고 이방원 자신이 큰 모사꾼이라 정략(政略)하는 데에 거침없는 인물이니 지금 구멍 나 가라앉아 가는 배를 수선해서 한양으로 올려 보내주어도 결국은 또 지루한 힘겨루기를 하여 시간을 소모하는 일밖에 남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자칫 잘못해 팽이라도 당하는 상황이 올 경우는 이 모든 것을 이방원이 좋으라고 한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니 구차할 일이다. 어찌 되었든 이제 와서 하륜의 말을 좇아 이방원에게 종군(從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 공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겠으나 나는 정안군 방원을 좇아 갈 수는 없소.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
“그럼 도대체 어찌할 요량이시나이까?”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하륜을 겁박하여 축객(逐客)해 보내 버리고서 세훈은 홀로 자작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상황에서 18세기의 플린트록 방식의 소총인 보총으로 무장한 5천 군대로 15세기 조선군을 격퇴하고 나라를 새로이 개창한다거나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왕이 되겠다고 하는 욕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무리수를 띄워 이씨 왕조의 사직을 닫게 한다면 명에서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산업을 일으키고 군사를 양병(養兵)한 뒤라면 명에서 어떤 식으로 나와도 대처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5천의 정예가 전부였다. 이들은 지금 시대의 10배에 달하는 군세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터이지만 지금 바로 이들만 가지고 나라의 팔도(八道)를 장악하고 명의 간섭을 막아내기는 힘들다는 것이 세훈의 생각이었다.
‘명분이 필요하다.’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명분이 있으면 될 일이었다. 명분만 있으면 몇 만의 군세를 등에 업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명분을 얻는다는 것은 마음대로 다를 수는 있으나 적법(適法)한 군주를 앞에 내세운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전에 최해산에게도 이른바처럼, 마전군에서 왕씨의 제사를 모시는 공양왕의 조카 왕조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고려의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니 유신들이 절멸하고 뿔뿔이 흩어진 지금 굳이 왕씨를 내세우는 것은 명분만 찬연할 뿐 국정을 장악하는 데에 실속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성계의 자손들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후처 강씨 소생의 두 아들은 왕자의 난 때 이미 죽었고, 전처 한씨 소생의 장남 진안군 방우와 덕안군 방연은 이미 유명을 달리 했으니 도리가 없었다.
진안군 방우의 적손(嫡孫)을 명분 삼아 올릴 수는 있으나 그건 이미 조사의와 태상왕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영안군 방과는 이미 왕위를 받았다가 방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앉아 있으니 이미 그 활용 가치가 다 했다고 할 수 있겠고, 남은 것은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뿐이었다.
그러나 이중 방간은 그 스스로도 욕심이 많을 뿐더러 이미 방원과 세력 다툼에서 크게 패해 명분이 좋지 않은 인물이니 결국 남은 것은 익안군 이방의뿐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올해 9월에 졸(卒)하고야 마는 인물이니 이제는 꼭 그렇게 되리라 할 수 없으나 잔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 성격이 유하고 심약한 그를 왕위에 떠밀어 올리면 정권을 장악하기도 쉬울 뿐더러 대세(對世)의 명분도 좋을 뿐더러 태상왕까지도 구슬러 볼 수 있는 노릇이었다.
익안군이 응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세훈에게는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게다가 익안군의 아들 이석근(李石根) 또한 체모가 작고 성품이 어리석으며 재능도 없고 다만 술만 좋아해서 사람들이 복인(福人)이라 부르는 인물이니 후계 또한 안전할 일이었다.
‘우선은 한성으로 들어가 익안군의 신병을 확보해야겠다. 상왕을 보필한답시고 조사의는 한성의 최소의 군병만 남기고 개경으로 올라갔으렸다!’
이제 결정을 내려졌으니 출사(出師)만이 남은 일이다. 왕자 하나가 필요하다면 구하면 될 일이다. 조사의는 태상왕을 등에 업고 있고 이방원은 스스로 법통(法統)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하니, 그 다른 핏줄인 익안군은 세훈이 등에 업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