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정족지세(鼎足之勢)
「초한의 다툰 바 오래되어 먹을 것이 내부(內府)에 떨어지고 백성들의 원망이 깊은 바 되어 천하의 성현(聖賢)이 아니고저 이런 참상을 끝낼 길이 없나이다. 지금 양주(兩主) 아래의 것이 그리하나이다. 만약 대장군께서 한나라를 돕는다면 한나라가 이길 것이오, 초나라를 돕는다면 초나라가 이길 것이외다. 혹여 저의 계책을 들어 쓰신다면 쌍방이 손해치 않고 그들로 하여금 서로를 세우게 하여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세워 놓으면 그 형세에는 감히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夫銳氣挫於險塞,而糧食竭於內府,百姓罷極怨望,容容無所倚. 以臣料之,其勢非天下之賢聖固不能息天下之禍. 當今兩主之命縣於足下. 足下爲漢則漢勝,與楚則楚勝. 臣願披腹心,輸肝膽,效愚計,恐足下不能用也. 誠能聽臣之計,莫若兩利而俱存之,參分天下,鼎足而居,其勢莫敢先動.」
―사기 92권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中
1405년 정월(正月)
조선국 한성부.
지난해의 동란은 어느샌가 가라앉아 가는 것처럼 보였다. 공주에서 파죽지세로 북상한 탐라군은 한성에 남아 있던 조사의의 1만 군세를 격파하고 한성부를 점령한 다음 익안군과 그의 가솔(家率)들을 손에 넣고 개경에 있던 조사의의 군세도 몰아내니 조사의 남은 3만의 군세는 철령을 넘어 다시 함주(咸州)로 들어가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강화도에 틀어박혀 숨을 죽이고 있던 이방원은 서북면도절제사 이빈이 끌고온 2만 5천의 군세에 편승하여 해주로 건너갔다가, 다시 평양(平壤)으로 들어가 자신이 기거하는 곳을 서경행궁(西京行宮)이라 칭하고 김세훈을 역적 모리배로 주장하며 한성으로 다시 진격할 것을 다짐하나 군세(軍勢)가 여의치 않아 서북면 일대를 점령하고 역시 조사의처럼 농성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반면 상왕(上王) 이방과와 익안군 이방의를 손에 넣은 세훈은 우선 이방과를 찾아갔다.
“상왕께서는 성정이 패륜하고 오륜을 모르는 이방원에게 겁박받아 왕위를 내놓으셨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소이다. 이에 내가 종사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니 선왕으로서 종법의 직통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익안군 이방의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대전에서 한 말씀 하시오.”
이방과는 동북면에서 눈을 시퍼렇게 부라리고 있을 아버지 이성계와 서북면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기회만 노리고 있을 아우 이방원의 사나운 눈초리가 의식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개성 수창궁에 유폐되어 지금 세훈의 보호를 빙자한 위협 아래에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부평초(浮萍草)처럼 세파가 닿는 대로 떠돌다 결국 왕위에도 올라 보고 복에 없이 젊은 나이에 아우에게 양위하고 술과 격구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 또한 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마자 이방과는 보란 듯이 익안군을 수창궁으로 불러다가 왕위를 받으라고 종용하는 시늉을 하고서는 이내 동북면도, 서북면도 가지 않고 한성과 개성으로 흩어져 남아 있던 대소신료들을 모아다가 자신이 적통의 후계자가 없는 데다, 방과와 방원은 역신(逆臣)의 죄가 있으니 그보다 형이요 자중하며 오로지 가문을 위중하던 익안군 방의가 왕위를 받아야 한다고 세훈에게 시킴받은 바 대로 하문했다.
그러나 방의는 이를 건강을 핑계로 왕위를 사양하고 드러누워 버렸는데, 이것은 그의 성품상 이런 일을 맡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실제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의 아들인 이석근(李石根)이 물망에 올랐는데, 종법이 어지러운 개국 2대째에서 왕위를 가려 뽑지 아니하고 3대째로 옮겨 가는 것이 국가를 일신하는 데에 더욱 용이하다고 판단한 세훈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에 익안군 이방의의 아들 이석근이 작년 10월에 왕위에 올랐다.
이를 똑같이 개성에서 꼼짝없이 포로로 잡히고만 이방간마저 지지하고 나서니, 그것이 겁박으로 인한 것이든 어찌하였든 이성계와 이방원을 제외한 이씨 종친들은 죄다 이석근을 지지하는 모양새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동북면에서는 이성계가, 서북면에서는 이방원이 각각 손자와 조카의 왕위 습승(襲承)을 인정치 아니하고 서로 간에 유일한 조선국왕이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평안, 영길 양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을 손에 넣은 김세훈은 이석근을 왕위에 올린 뒤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는 서로 간에도 견제를 해야 했기에 김세훈이 움직이지 않으니 둘 다 서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이른바 정족지세(鼎足之勢)가 되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 본의든 타의든 삼대(三代)가 제각기 적법한 왕통(王統)이라 주장하며 서로 땅을 잡고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한 땅에 왕이 셋이라, 그 행색이 초라하고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함주왕(咸州王), 평양왕(平壤王), 한양왕(漢陽王)이라며 국왕이 아니라 군왕(群王) 보듯이 하니 사실 진실은 이렇듯 시전에 돌아다니는 소문에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세훈이 뜻한 바 대로 움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의 국권을 장악하기 위한 노중(路中)에서 일어나는 일임에 다름 아니었다.
세훈은 풍해도까지 장악하고 나자 군세를 일으켜 서북면과 동북면을 토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불안한 형국을 유지시키며 경계에 주의만 기할 뿐, 즉각적으로 이방원과 이성계를 몰아내고자 하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내부의 불만 세력을 이미 존재하는 적으로 몰아가기 위한 계산과 함께, 이방원과 이성계가 서로 적대하므로 세훈에게 있어서는 굳이 토벌하지 않고도 바깥쪽에서 꼼짝 못하는 적들이 존재하므로 내정을 다스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속셈도 들어 있었다.
세훈은 이석근을 통해 궁중을 장악하고서는 이내 공신(功臣)의 명부를 꾸리고 이에 따라 관직을 새롭게 나누어 주었는데, 여기에는 동서북면 어디로도 가지 않고 도읍에 남아 있던 대소신료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세훈은 이들을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잘 달래어 인재로 들어다 쓸 요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새해 정월이 되자 왕에게 칙유(勅諭)를 내리게 해 이방원이 중국의 눈치를 보아 종친과 공신에게 부원군(府院君)과 군(君)을 봉하도록 전년에 고친 것을 다시 고려의 오등작(五等爵), 즉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으로 다시 돌려 새롭게 작위와 식읍, 그리고 봉토와 벼슬을 품신하니 그 대강이 다음과 같았다.
탐라국주(耽羅國主) 진량공(津梁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섭정부부사(攝政府府事) 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김세훈(金世勳).
익안대원공(益安大院公) 현록대부(縣祿大夫) 이방의(李芳毅).
정의후(旌義侯)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 고봉지(高鳳知).
제주후(濟州侯) 탐라성주(耽羅星主) 숭정대부(崇政大夫)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고상온(高尙溫).
대정후(大靜侯) 탐라왕자(耽羅王子) 가정대부(嘉靖大夫)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문충세(文忠世).
청주백(淸州伯) 자헌대부(資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탁(鄭擢).
남양백(南洋伯)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전서(兵曹典書) 양은계(梁殷季).
여산백(礪山伯) 통정대부(通政大夫) 양면토평부사(兩面討平府事) 송거신(宋居信).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도관찰사 박신(朴信).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관찰사 이서(李舒).
가정대부(嘉靖大夫) 경기도관찰사 황희(黃喜).
가정대부(嘉靖大夫) 강원도관찰사 조휴(趙休).
가의대부(嘉義大夫) 전라도관찰사 유관(柳寬).
가의대부(嘉義大夫) 풍해도관찰사 이지(李至).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전서 한상경(韓尙敬).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전서 이직(李稷).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전서 허조(許租).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전서 최해산(崔海山).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전서 심온(沈溫)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집의(執義) 윤향(尹向).
이로서 당상관(堂上官)의 대강을 정하니, 의정부와 함께 섭정부(攝政府)를 두어 양부(兩府)의 부사를 김세훈이 겸직함으로 인하여 섭정공이자 정승(政丞)으로서 국사를 일람하고 익안군은 살아서 왕의 아비가 되었으므로 익안대원공에 봉했다.
탐라국 출신의 고씨, 문씨, 양씨들이 습작(襲爵)할 수 있는 후백(侯伯)의 자리를 나눠 받았으며, 이전부터 한성에서 벼슬 살던 송거신에게는 양면토평부사의 자리를 제수하여 북방의 군사를 일괄하여 동북면의 태상왕과 서북면의 정안군 이방원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기존의 사대부들이 관찰사와 각조 전서(典書)에 두루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김세훈이 부족한 탐라의 인재를 기존의 인물들 중에서 실용적 사고를 지닌 인물들을 기용하여 보충하고자 한 결과였다. 이들은 전조 고려로부터 벼슬을 하던 인물들이 태반으로, 이런 권력의 부침(浮沈)에 일희일비할 인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있게 쓸 수 있었다.
특히 최해산은 공조전서에 임명하여 김세훈이 특별히 신경 쓰고 있는 국가의 공업 정책에 크게 쓰고자 했는데, 비록 탐라에서부터 연이 있다고는 하나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공조전서에 오른 것은 전례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김세훈의 인사는 안정성을 추구하면서도 또한 파격적이기도 했는데, 왕조의 격동기인 난세(亂世)의 권력을 움켜쥔 자가 되었기에 감히 그 정책에 대하여 왈시왈부(曰是曰否)할 수 있는 자가 없었으니, 그런 이들은 모두 동북면이며 서북면으로 옛 군주를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허수아비 왕을 세워 놓고 권력을 한 손에 쥔 세훈이 이렇게 왕의 입을 빌려 칙유를 선포하니, 이것은 1강(强) 2약(弱)의 정족지세를 당분간 안정시켜 그동안 조선에서의 개혁을 도모하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이것이 서력 1405년 을유(乙酉)년 정월 원단(元旦)의 일이었다.
1405년 중춘(仲春)
조선국 한성부.
1405년은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해였다. 나라는 하나인데 왕실은 삼분(三分)되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구설(口舌)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것은 간만에 안정된 태세이기도 했다.
족히 예전 한신에게 괴통(Ø通)이 말했던 바처럼, 천하를 솥발처럼 셋으로 나누어 놓으니 아무도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셋의 세력이 비등비등해서가 아니라 개중 강맹한 세훈이 더 이상 전란의 확대를 원하지 않고 나머지 둘을 북쪽 변방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꽉 묶어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비록 익안대군의 아들 이석근을 왕위에 올리고 선왕 이방과와 회안대군 이방간 또한 대접하고 있으나 그 권세는 섭정부부사와 영의정부사에 이르러 종친과 신료를 막론하고 왕의 다음 가는 제일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 조정의 신료들 또한 그를 따르는 도당(徒黨)의 무리처럼 되었다.
이것은 그가 예전부터 막하(幕下)에 두던 탐라 출신의 호족들뿐만이 아니라 고려로부터 조선에 걸쳐 벼슬을 해 오던 구신(舊臣)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성계나 이방원과 강하게 가신(家臣)처럼 묶여 있던 자들은 이미 변방으로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이르니 세간에서는 김세훈을 동한말년(東漢末年)의 위왕(魏王) 조조에 빗대기도 했는데, 그만큼 그 위세가 등등한 것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새해가 밝자마자 관선(官選)을 새롭게 조각(組閣)하여 생각하는 바대로 나라를 개혁하는 일을 도울 이들을 조목이 배치해 놓은 다음에, 권력이 집중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새롭게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몰두했다.
공조전서 최해산(崔海山)은 그중에서도 제일 바빠진 인물이었다.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공조(工曹) 아래의 조직을 크게 개편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공조는 영조사(營造司), 야사(攻冶司), 산택사(山澤司), 상의원(尙衣院), 선공감(繕工監),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전연사(典涓司), 장원서(掌苑署), 조지서(造紙署), 와서(瓦署)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기존의 조직을 모두 철폐하고서는 완전히 낯선 부서들을 집어 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해산 개인이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섭정공 김세훈이 가장 면밀하게 추진하는 일의 전위대로 발탁된 셈이다.
원래 이 시기 6조의 수장은 정3품의 전서(典書)였는데, 세훈은 이것의 격을 높여 최해산이 전서에 수임된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다른 조에 앞서 공조만 정2품의 판서(判書)로 올리고 그 자리에 최해산을 그대로 들어다 앉혔다.
그러고 나서 최해산은 세훈이 일러 준 대로 공조의 혁파 작업에 나섰는데, 우선 기존의 부서들을 모두 없앤 다음에 토목사(土木司), 제지사(製紙司), 제철사(製鐵司), 교통사(交通司), 화학사(化學司)의 5사로 크게 나누고 복식서(服飾署), 염료서(染料署), 조림서(稠林署)의 3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별정 부서로 탐라시무원(耽羅試務院)을 두어 5사 3서 1원의 형태로 공조의 틀을 짜게 되었다.
최해산은 세훈에게 주청하여 각 사(司)에는 정3품의 참의(參議)를 유임하고 각 서(署)에는 정5품의 정랑(正郞)을 임명케 하니 공조의 각 사(司) 수장의 품계가 다른 조(曹)의 수장인 전서의 품계와 같을 정도의 위세였다.
이중 제철사 참의에는 부석소, 화학사 참의에는 정탄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이 탐라에서 야금도감과 화공도감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제 기술이 많이 늘고 세훈에게 배운 지식 또한 상당해 세훈이 믿고 최해산에게 붙여 주어 국가의 대계를 세우게 할 만한 인재들이었다.
“그대들을 믿고 일을 맡기니 꼭 좋은 결과를 보여 주길 바라네.”
“합하(閤下)의 명을 받잡아 반드시 부족함 없이 일을 처결하겠나이다.”
이렇게 해서 가장 첫 업무로 선정된 것이 경기도 인천군(仁川郡) 연안에다가 제철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 일에는 당시 도성의 국고에 있던 나랏돈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돈이 투입되었는데, 그만큼 새 국가의 기틀을 잡는 역사(役事)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세훈의 뜻대로 아산(牙山)이나 경상도 흥해(興海:지금의 포항) 또한 그 예정지로 고려되었으나 조선의 교통망이 대체 엉망이었기에 제철소를 도성에서 너무 먼 곳에 지으면 제대로 된 발전이 힘들다는 단점이 지목되었다.
아직 세훈의 생각을 이해할 만한 자들이 없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우선은 한성을 중심으로 공업지대를 만들어서 여러 종류의 공업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한성과 개성의 두 배후지가 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거기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아 개성 근교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의 기능을 다시 크게 키워 무역항으로 만들 계획까지 고려해 볼 때, 인천에다가 제철소를 짓는 것은 그 첫 발걸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었다.
일전에 탐라에 설치한 동영고로(東瀛高爐)에서 쌓은 기술을 가져와 동영고로에 있던 4개의 고로보다 2배는 크고 튼튼한 고로를 설계하여 총 20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세계 최초의 대규모 제철소라고 해도 좋을 규모였다.
이 제철소가 착공해서 공사에 들어가는 동안 세훈은 최해산을 불러다가 기존에 탐라에 설치해 두었던 공업료(工業僚)의 기능을 공조 소속의 탐라시무원으로 이관해 기존의 동영고로와 화학소 등의 시설은 신기술을 시험해 보는 시험장으로 전용해 쓰도록 일러 두었다.
다만 전에 설치했으나 아직 교육생을 선발 못했던 화학전습소(化學傳習所)를 화학전습원(院)으로 규모를 키워 공조 산하로 한성에다 옮기고 중인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제1기 선발생을 뽑도록 하였다.
이 화학전습소에서 가르칠 교재는 세훈이 최해산과 부석소, 정탄에게 틈틈이 알려 줬던 기초 화학을 중심으로 교재를 편성했는데, 화학뿐만이 아니라 기초적인 과학 일반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육 과정이 마련되었다.
화학전습원은 총 2년제로 첫 1년에는 <기초산학(基礎算學)>, <물상(物像)>, <기초야금(基礎冶金)>, <화학일반(化學一般)>을 배웠는데, 각각 그 교재로는 원나라 주세걸(朱世傑)의 「산학계몽(算學啓蒙)」, 김세훈이 직접 편한 물리학 교재인 「물학본원(物學本源)」, 부석소가 김세훈의 도움을 받아 쓴 「야금통종(冶金統宗)」 그리고 최해산이 역시 김세훈의 도움을 받아 쓴 「화학소론(化學小論)」이 그 교재로 사용되었고, 2년차에는 실습을 겸하여 간단한 화학 실험과 화약 제조, 기계의 원리들을 배우게 되었는데 우선적인 목적은 학자의 양성보다는 당장 실무에 투입될 수 있는 지식의 전습(傳襲)이 목적이 되었으므로 우선적인 과정은 이렇게 편성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음으로 세훈이 한 일은 송상(松商)의 대방들을 불러 모으고 나상(羅商)의 동영주상행계(東瀛洲商行契)의 오상복을 비롯한 객주(客主)들도 함께 불러 모은 일이었다.
한성 숭례문(崇禮門) 밖에 도매상가를 지을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뤄지게 될 교통로의 확충과 함께 물산의 집거지라는 의미에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세훈은 숭례문 바깥, 용산(龍山)에다가 큰 장시의 터를 만들고 송상과 나상이 서로 협조하에 이권을 조정하도록 했다. 여기에 이제 막 형성되고 있던 경상(京商)들까지 출전하여 가게를 내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크게 3무리의 상행 조직이 이 도매시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자리 잡히자 경사(京師)와 삼남(三南)의 물산이 크게 모여들게 되었는데, 이내 물건을 낱개로 팔지 않고 모개로 파는 곳이라 하여 모개전(廛)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뒷날 융성하는 용산 모개시전의 전신이었다.
1405년 계춘(季春)
조선국 영길도 함주목.
이성계는 동북면의 먼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 그는 들의 아들이었다. 이 땅은 이제는 먼 북쪽의 티끌처럼 밀려간 원(元)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던 자리였고, 그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이곳에서 몽골 벼슬을 살던 천호(千戶)였다.
이성계는 말을 달리며 자랐다. 멀리서는 동해의 바닷바람이 밀려오고 위에서는 서리 치는 고원의 찬바람이 내려왔다. 그 거룩한 자연을 벗 삼아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면서 어른이 되어 갔던 것이다.
문득 이제 이곳에 다시 돌아와 이리 보니 세상사가 모두 티끌처럼 부질없는 것으로만 느껴졌다.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들어다 고려에 바치고 입조(入朝)하였다. 홍건적들의 내습을 막아내고 원나라 나하추[納哈出]의 모진 공격도 막아내었다.
최유(崔濡)도 물리치고 김삼선(金三善)과 김삼개(金三介)도 결국 그의 손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다. 삼남의 왜구를 물리치고 이인임을 몰아내고 나니 어느덧 피 끓던 젊은 시절도 지나가고 대업(大業)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회군(回軍)을 하였고 사직을 창건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봄들에 꽃 날리듯 이렇게 찬연히 사라지고야 말았다. 그리도 괴었던 강씨도 이제는 곁에 없고 자손들도 몇 번의 정변 끝에 이제 뿔뿔이 흩어져 복왕(復王)하면 무엇하리오. 물려줄 후사도 이제는 곁에 없으니 함주왕(咸州王)이라는 것이 과히 조롱은 아니렷다. 작년의 난 이래로 기력도 많이 쇠하였다.
이성계는 조용히 내관 박만과 조사의를 불러들였다. 그 지난한 세월 동안 배극렴도, 정도전도, 이지란도 모두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으니 남은 것은 이들이 전부였다.
“다들 듣게.”
박만과 조사의는 조용히 이성계의 곁에 호종(護從)하고 섰다.
이성계는 옛 쌍성총관부가 있던 영흥부가 있을 남쪽을 향해 펼쳐진 함주의 너른 들에 시선을 던지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호쾌하던 등이 이젠 많이 굽어 있었다.
“내가 지난 시절의 죄가 많아 결국 이리 못난 말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나를 좇아 이까지 온 자네들 보기 미안하게 되었네.”
“어인 말씀이신지요?”
내관 박만이 손사래 치고 나섰으나 이성계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슬슬 하늘이 준 명(命)도 다 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네. 이제 늙은이가 욕심은 그만 부릴 때가 되었지. 집안 혈족이 이리저리 다 찢겨 이제 내 곁에는 후사를 물려줄 손족(孫族)도 없으니 이게 다 하사(何事)란 말이냐. 나는 이제 이지란이 그랬던 것을 좇아 칩산(蟄山)하여 불사(佛事)를 봉양하고 살며 지난날의 죄업을 속죄하고 살 것이니 조사의는 군사를 이끌고 방원에게 쫓아가 지난날의 구원(舊怨)을 잊고 종신(從臣)하기를 청하게. 내 마지막으로 아비로서, 이 나라의 창업주로서 방원에게 자네를 부탁하는 글을 써 보내 줄 터이니 나의 신변이 정리되는 대로 방원과 함께 협력하여 한성의 김가(金家) 놈의 역적을 토평하도록 하게. 사직을 바로잡으려면 이제는 그러는 수밖에 없느니.”
“알겠나이다.”
조사의는 그저 묵묵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한때 한성과 개경을 손에 넣고 6만에 육박하던 군세는 매일같이 조련(調練)되어 강맹한데다가 먼 거리에서 쏘아대는 보총까지 지닌 김세훈의 군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다시 철령 이북으로 밀리다 보니 남은 군세는 고작 2만이었다. 이것으로는 동북면을 다독이고 버티는 것만 해도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방원에게 이 군세를 들어다 바치라니?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애초에 방원에 대한 앙심을 가지고 태상왕을 등에 업고 시작한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냥이라고 하지만 이방원만큼은 안 될 일이었다. 방원에게 태상왕은 아비인 노릇이나 자신은 그저 일개 역모배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태상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 망령이 나도 유분수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원만큼은 안 된다.’
조사의의 생각은 번잡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성계의 앞에서는 그저 고개를 조리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군세를 일으킬 수 있었던 명분은 죄다 태상왕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태상왕이 없으면 2만의 군세도 허울 좋은 병력이었다. 이내 뿔뿔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태상왕은 아들 방원과 화해하겠노라, 그곳에 군대를 들어다 바치라 한다.
그러나 조사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조사의 스스로에게 있어서만큼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상왕은 단순히 자신을 위해 조사의가 종군을 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조사의 스스로는 방원에 대한 악랄한 복수심이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잔인하게 탄압받은 과거의 기억이 원령처럼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까닭이었다.
태상왕은 부정(父精)과 사직에 대한 대의(大義)를 지니고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모르나 조사의 스스로는 방원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태상왕의 말을 어기고 방원에게 군사를 들어다 바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사의의 사병이라기보다는 동북면의 호족들이 태상왕을 위해 직접 끌고 모아서 가져다 바친 것이나 다름없는 군세였다.
태상왕이 정말로 이방원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사찰에 들어가 불사의 도나 닦고 있는 다고 하면 이 군세 중 조사의에게 남아 있을 것은 얼마 되지 않는 노릇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다.’
조사의는 그날 저녁도 들지 않고 홀로 방 안에 앉아서 칼을 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난국을 뚫어 보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보았으나 나오는 답은 한 가지였다.
그날 밤 조사의는 자신이 정말로 믿는 수하 10명을 대동하고 이성계의 거처로 난입해 들어갔다.
“조가 네놈, 이게 무슨 일이냐!”
“태상왕 전하. 소신 불민(不敏)하여 결국 이런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나이다. 소신은 도저히 방원이 놈에게 이 군세를 들어다 바치지 못하겠나이다.”
“네놈 마음에 욕심이 아직도 더럭더럭 붙어서 그것을 떼어내지도 못하는구나. 이 마당이 되어 아직도 그것 하나 버리지 못하느냐. 군신 간의 도리는 다 어디 가고 네가 어찌 이런 수작으로 나를 겁박하느냐!”
이성계는 대노하여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사의는 이미 마음을 독하게 먹고 들어온지라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말했다.
“소신은 충절(忠節)의 마음에서 이리 하는 것이니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이곳을 떠나 영흥(永興)부중의 사찰로 모시겠나이다. 거기서 뜻하시던 바대로 불사를 모시옵소서. 다만 그곳은 앞으로 봉문(封門)하여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아무도 드나들지 못할 것이나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소신을 용서하시옵소서.”
“너는 방원이 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면서 날더러는 너를 용서하라고 하느냐?”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쩔 수 없나이다. 내시 박만은 전하를 곁에서 계속해 모실 수 있도록 하겠나이다.”
밤 사이 아무도 모르게 영흥 부중의 사찰로 태상왕을 봉문하고 불사를 모시는 것을 빙자한 유폐가 조사의에 의해 자행되고, 동북면의 힘이 있으면서 조사의에게는 껄끄러운 호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고 불러 모은 자리에서 조사의는 그들을 참살(斬殺)하고야 말았다.
이로 인해 동북면의 민심이 이지러지는 것은 알지 못하고 조사의는 군세를 억지로 단속하여 스스로 태상왕의 명을 빙자하여 쌍성대장군(雙城大將軍)이라 칭하니 이 쌍성은 곧 영흥(永興)의 옛 이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세훈은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그저 최해산에게 이런 짧은 소회를 남겼을 뿐이다.
“일이 기왕에 이렇게 된 것이 다 이방원이 자초한 일이다. 그가 지나온 길에 흘린 피가 너무 많아 제 아비가 아들에게 주려는 군사조차 사지(死地)보다 더 가기 싫어하지 않는가.”
바로 송군불도(送軍不到) 혹은 조가습병(趙家拾兵)의 고사가 유래된 연유였다.
조가의는 영흥에서 방자하게 행동하고 태상왕은 고된 병을 얻어 사찰에서 중하게 앓고 있으나 주변에서 돌아보는 이 없이 난세지중(亂世之中)였다.
1405년 중하(仲夏)
조선국 한성부.
여름이 찾아왔다. 남쪽에서부터 밀려온 구름이 어느새 하늘을 덮고 습한 장맛비를 뿌려대고 있었다. 장맛비를 매우(梅雨)라 하는 것은 매실이 단단히 익을 즘이면 오는 비라 해서인데, 세훈도 장맛비 내리는 것을 보며 대청에 앉아 그 매실의 맛을 보고 있었다.
한성으로 들어온 뒤 세훈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 정안군 이방원의 옛 집을 취하여 살고 있었는데, 이 즈음으로 해서는 조정의 인사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어 경행저(慶幸底)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세훈은 경사가 들어 행복하다는 뜻이 담긴 그 이름이 맘에 족히 들어 따로 집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렇게 불리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세훈이 이 집으로 들어와서 처음 설치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수세식 변기였다. 크게 맘을 먹고 예전에 장사해 둔 돈을 털어 자기로 변기를 빚고 천장 가까운 높은 곳에 물이 내려갈 수통을 설치하여 그곳에 물을 부어 두었다 줄을 당기면 물이 내려와 변기를 씻을 수 있도록 간단한 시설을 설치했는데, 다만 하수도관이라는 것이 없으니 쓸려 내려간 찌꺼기가 땅 밑에 모아두었다가 때가 되면 퍼내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교적 단출한 살림에 비해 유일한 사치품이라면 사치품인 것이 이 수세식 변기였다. 세훈도 도무지 똥 막대만큼은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비단이니 종이를 이런 뒤처리에 사용할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지푸라기를 가져다 쓰느라 뒷문에 심심하면 생채기가 나긴 했지만 말이다.
세훈은 우선은 이 세수식 변기로 만족하기로 했다. 적당히 때가 되면 이것 때문이라도 펄프종이를 개발해 낼 생각이었다. 그 즈음 되어야 조금 돈푼 들더라도 휴지라도 써 볼 것이 아닌가.
그날도 매실을 같이 먹던 손님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이가 아니라 이제는 김세훈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나 다름없게 된 최해산이었다.
그는 전부터 이 변기 이야기를 듣고 내심 써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매실을 조금 입에 물더니 이내 배가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화장실 쓰기를 청했던 것이다.
꽤나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온 모양인지 대청으로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은 호호쾌쾌, 보무가 당당하기만 했다.
“합하께서는 이런 좋은 걸 혼자 쓰고 계셨나이까?”
“왜, 어떠한가. 냄새도 아니 나고 좋지?”
“그런데 자기를 가져다 변기를 빚으시다니, 이거 저 같은 놈은 분수에 맞지 않아 해 보지도 못하겠습니다 그려.”
“장안에 말이 많겠구만.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돈들인 곳이 뒷간이라니.”
둘은 껄껄거리며 웃고서는 남은 매실을 집어 들었다.
잘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신맛이 톡톡거리는 것이 한 입 먹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지만 또 그 맛에 계속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공조의 일은 잘 돌아가고 있는가?”
“분부하신 대로 처결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랍니다. 오늘 찾아뵌 것도 어찌어찌 시간을 내어 온 것인데…….”
“최 판서가 엄살이 심해졌구만.”
“하하! 어인 말씀을. 인천의 제철소는 이제 땅을 다지는 일에 들어가 근시일 내로 건물과 고로를 올릴 작정이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 하는 일인지라, 전례가 없어 건물의 구조를 짜고 고로의 형태를 잡는 일만해도 시간이 꽤나 걸려 다 지음하려면 내후년쯤은 바라봐야 할 일인 듯싶습니다.”
최해산의 말에 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백년대계를 보고 하나씩 하는 일이니 급하게 서두를 것은 없네. 빨리 지어 겉이 그럴싸한 집은 뿌리부터 일찍 무너지는 법이고, 천천히 공들여 지은 집은 설사 그 화려함이 못하더라도 백 년을 서 있는 법이네.”
“유념하겠나이다.”
세훈은 매실을 하나 더 먹고서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화학전습원은 어찌 잘 운영되고 있는가?”
“전에 하교하신 대로 운영하고 있나이다. 아직 가르치는 이들의 배움도 부족한 터라, 올해는 학생들은 뽑지 아니하고 예전부터 탐라에서 고로나 화약을 맡아서 일을 해 보았던 젊은 장인들 위주로 선발해 한성으로 불러와 같이 공부하며 익히고 있나이다. 내년 봄에 학생들을 선발하게 되면 이들로 하여금 교수(敎授)하게 할 작정이나이다.”
“그래. 좋은 생각이네. 내가 직접 지도해 줄 수 있으면 좋겠으나 지금 나라의 국사를 움직이느라 도무지 정신이 없으니 천천히 가르쳐 줄 시간이 없네. 하지만 내가 그리고 있는 일이 홀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 그대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네. 내가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글을 써 줄 터이니 책으로 묶든가 직접 읽어서 익히던가 하여 꼭 유용하게 써먹도록 하게.”
“당연한 분부이나이다.”
최해산은 슬며시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훈을 따르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제 나이가 서른을 넘긴 세훈은 젊은 나이에도 국정을 운영하는 일에 아무런 실수가 없었다.
최해산은 그의 사람됨이 그릇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이제 스물다섯이니 그 나이가 세훈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세훈의 가는 길을 보면 자신과는 발걸음의 품이 달랐다.
뱁새가 황새의 발걸음을 따라하려 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뒤를 쫓아가며 주어진 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최해산은 요즘 들어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주어진 일이라 하여도 하나하나 새롭기 짝이 없고 나라의 주춧돌을 닦는 기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니 부족함을 느낄 턱이 없었다.
“매실 좀 더 드시도록 해요.”
최해산이 그런저런 생각에 넋을 빼놓고 있는 사이, 세훈의 처 고상희가 매실을 또 한 접시 내어 왔다.
“부인. 감사하오이다.”
“어인 말씀을요. 최 공께서도 많이 자시도록 해요.”
“예, 이리 챙겨 주시니 여기 오면 발걸음이 죄 떨어지지 않습니다.”
최해산이 매실을 한 움큼 베어 물면서 짐짓 과장되게 턱을 놀리자 세훈과 고상희 모두 크게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최 공도 이제 혼기가 차고도 남으셨는데 어찌 혼사를 치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아무래도 세훈이 살던 22세기와는 다른 15세기의 교육을 받고 자란 여자라 그런지 고상희는 생각보다 바깥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집안의 소소한 일들과 자녀들, 그리고 이런 혼사(婚事) 같은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훈 자신도 이곳 기준으로는 장가를 늦게 든 셈이고, 고상희의 나이가 이제 스물이니 도둑장가를 간 셈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그 사이에 아이가 둘이라니. 그러고 보면 최해산도 나이가 스물다섯에 이르러서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으니 늦기는 늦은 모양이다.
“아, 저는 그게… 양친이 모두 안 계시니 따로 혼사를 챙겨 줄 사람도 없고, 그걸 또 일도 바쁜데다 제가 직접 알아다 보기도 그렇고…….”
장가들기는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세훈은 껄껄 웃고서는 고상희에게 말했다.
“최 판서도 장가가 들고 싶은 모양이니 부인이 잘 좀 알아봐 주시게.”
“그럼요. 장안의 규방을 샅샅이 훑어 가장 아름답고 조신하기로 소문난 처자와 맺어드리겠사오니 최 공도 심려 마세요.”
“…….”
갑작스러운 전개에 최해산은 매실 먹던 목이 막힌 듯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세훈은 그 모습이 짐짓 재미있어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이쯤 해 두자 싶어 그만하고서는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최 판서. 보총은 탐라에서 잘 생산해서 올려 보내고 있겠지?”
서울에 고로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지금은 철광석을 탐라로 넉넉히 보내 강철을 뽑아낸 다음 그곳에서 보총을 만들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직접 돈을 들여 어렵사리 철강석을 육지로부터 수매해 올 때에 비하면 나라의 명으로 넉넉히 내려 보내니 생산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으나, 그곳에서 보총을 만드는 일에 익숙해져있던 장인들 중 많은 이들이 제철소다 화학전습원이다 해서 새 일을 맡기 위해 한성으로 올라 와 있으니, 오히려 생산량은 일전에 비해서도 준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그 양이나 품질이 전부 다 예전 같지는 않사옵니다. 하지만 그런대로 계획한 양만큼은 차질 없이 보내주고 있나이다.”
“그렇군. 병조전서 양은계(梁殷季)에게도 일러 두었으니 보총 5천 정이 마련되면 바로 병조에 보내도록 하게. 탐라에서 올라온 5천 병력으로는 부족하네. 가능한 대로 육지의 병졸들도 보총으로 무장시키고 신식 훈련을 시켜 군대를 새롭게 일신해야 할 것이네.”
“차질 없이 시행하겠나이다.”
“그리고 포(砲)에 관한 일은 어찌 처결하고 있는가?”
“일전에 고려 말에 설치되어 선친께서 맡아 보셨던 화통도감(火桶都監)의 예가 떠올라 이번에 그렇지 않아도 공조 아래에 화통서(火桶署)를 만들어다가 보총을 제외한 포를 직접 제조하는 것이 어떨까 여쭈어 보려 했나이다.”
“그거 괜찮군. 내가 주상께 청하여 바로 교지를 내리도록 할 터이니 그리 처결하도록 하게.”
“화통서가 만들어진다면 바로 기존에 있던 대장군포, 이장군포 등을 제외하고도 천자(天字),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의 4총통과 불화살을 쏘아 올리는 주화(走火)도 올해 안으로 너끈히 주조해 낼 수 있나이다.”
“천자문의 천지현황이로구만. 들어본 기억이 있어.”
고개를 끄덕이던 세훈이 잠시 사랑채에 다녀오더니 최해산에게 종이 몇 묶음을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이나이까?”
“직접 보게.”
최해산이 종이를 펼쳐 보니 죄다 화포에 관한 설계 도면이었다. 세훈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적도 없고 게다가 화학을 전공해 화약에 관해서만 밝을 뿐, 화포에 관한 것은 그다지 자세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화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최해산에게도 이래저래 화포의 주조에 관해서 배운 바가 있어 직접 새롭게 개량하여 낼 화포를 구상해 본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완전히 혁신적인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에 당장 시도해 봄직하다고 여긴 것을 뽑아낸 것이다.
“첫 번째는 신기전(神機箭)이라 이름하였네. 주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것을 여기 도면에 있는 방식대로 한 번 개량해 보도록 하게. 두 번째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 이름 지었는데, 이것은 발사되고 나서 바로 터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었다가 갑작스레 터지면서 주변의 인마(人馬)를 예기치 못하게 살상할 수 있는 무기이네. 마지막이 소포(小砲)라는 놈이네. 두엇의 장한이 들고 다니면서 바로 설치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놈이네.”
신기전은 세종 때에 개발되었고, 비격진천뢰는 임진년의 왜란에 사용되었던 화기다. 마지막 소포는 프랑크포, 즉 불랑기포(佛狼機砲)를 약간 손대 개량한 설계였다.
실제로 1370년대경에 유럽에서 개발되어 계속해서 개량되고 있는 포이니 시대를 앞서나간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동양으로 건너오려면 한참 남은 일이니 역시 혁신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내 설계가 정확치 않으니 대충 참고만 하도록 하고 직접 안전하게 주조하여 실험해 보도록 하게. 내가 화포에 관한 지식이 일천하여 건네줄 수 있는 것이 이런 떠오르는 생각들뿐이니 자네가 보기에 괜찮다고 판단하면 직접 다시 설계하여 시도해 보도록 하게나.”
“여부가 있겠나이까.”
“그야 자네가 해 주기 나름이니. 어쨌든 어차피 정확한 것이 아니니 내가 전해 준 것이 아니라 자네 스스로 완성하도록 하여 마무리가 되거든 자네 이름으로 선친이 완성하신 포들과 새롭게 나올 포들을 망라하여 그 개발법과 제원을 꼼꼼히 하여 책으로 기록하도록 해 두게. 당분간 그것을 보고 익히고 가다듬어 포를 만들어낼 장인들을 양성하여야 하니 이것 또한 부담스럽겠으나 자네 어깨에 달린 일이네. 일손이 부족할 터이니 부석소나 정탄에게 찾아가 함께 도와달라 청하도록 하게나.”
“감사하나이다. 합하께서 주시는 은혜 어찌 갚을 길이 있겠습니까.”
최해산이 갑작스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직접 화포에 관한 것을 모두 책임지고 이것을 책으로 남길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선친으로부터 내려온 가업(家業)을 떠나서 어떤 분야에 대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것을 인정해 주고 그것을 최해산의 이름으로 만대에 전해질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최해산은 문득 어릴 적 보았던 늙은 아버지의 굽은 등이 떠올라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거, 이거. 최 판서, 왜 이러는가. 허허! 내가 장가는 꼭 보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하게.”
이 뒤 최해산이 남긴 것이 총 3권의 「화포식(火砲式)」이었다. 이 외에도 선친 최무선이 남긴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에다가 직접 보총에 사용될 화약을 만드는 법을 세훈에게 배우고 스스로 익힌 바를 추가해 「증보화약수련법(增補火藥修鍊法)」으로 개수해서 내니 두 책은 곧 화학전습원의 2년 과정에서 교재로도 사용되게 될 터였다.
1405년 계하(季夏)
조선국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안학궁(安鶴宮).
안학궁(安鶴宮)은 본래 옛 고구려의 궁성으로 이곳 평양에 있던 궁이었다. 그러나 세파에 멸실(滅失)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기가 오래였는데, 이방원이 한성에서 쫓겨 이곳 평양으로 들어오면서 대충 그 터가 있는 곳 어름에다가 서른 칸 정도의 행궁(行宮)을 짓고 나서 새로 이름 붙이기는 부끄러운 크기라 옛 고구려의 궁성 이름을 따다가 안학궁이라고 붙여 놓고서는 가솔과 배신(陪臣)들을 이끌고 기거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평양으로 밀려들어 온 뒤로 반년 가까이 앓아누웠다. 도무지 이런 상황을 그 깔깔한 성정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노릇이었다. 그렇게 심신이 진력이 다해 고생하는 동안에도, 이것을 어찌 타개하여 볼까 생각해 보았으나 앞길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어찌 할지 답이 서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어찌 보면 평양은 예전 고구려의 도읍이요, 전조(前朝)에서도 서경(西京)으로 삼아 천도하고자 했던 이력이 있는 오랜 도읍이니 하고자만 한다면 이곳을 기반 삼아 다시 일어서는데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나 이방원이 생각하기에도 이곳에서 자기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순전히 동서 양면(兩面)을 제외하고 전 조선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는 세훈이 더 이상 전선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있는 탓이었다.
그 차지한 땅이 고려 국초(國初)의 땅과 비등하니 태상왕이 있는 동북면이나 이방원 자신이 있는 서북면이나 그 땅이 변방(邊方)이나 다름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남으로는 한 치의 땅도 더 진격할 수가 없고, 북쪽으로는 3년여 전에 명나라 황제가 여진족을 일시 토평(討平)하고 벼슬을 주어 건주위(建州衛)를 두어 그 일대를 다스리고자 하니, 건드려 봐야 남을 것도 없거니와 양측으로 적을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일이라 시도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앓기를 몇 달을 하다, 올해 정초에 들어서부터는 이방원 자신이 기력을 회복하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배신(陪臣)들로 정처(政處)를 꾸며 부족하나마 평안도 전역과 대동강 너머 풍해도 일부에까지 통제권을 장악케 하고, 군적을 조사하여 징병하고, 예전 한성에서 탐라에게 진상받았던 보총 100여 정과 이래저래 노획한 50여 정을 합쳐다가 부족하나마 150총으로 보총대를 만들고 화약을 만들 수 있는 건물을 지어다가 예전 군기시에서 일하다가 몽진길에 따라선 장인들로 하여금 부족하나마 화포도 10여 포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리 군세를 확충하고자 하여도 그 한계는 자명한 일이었다. 적의 보총대는 5천이고, 뛰어난 주조술을 지닌 장인들이 많으니 포 또한 지금쯤 충분히 만들어내고 있을 터였다.
거기에 삼남(三南)만 하더라도 군적을 들어 징병할 수 있는 군세가 족히 평안도의 10배는 넘을 터이니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거기에 이렇게 혹여 궁지에 몰리면 태상왕도 결국 기를 꺾고 들어와 자신과 힘을 합쳐 주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결국 어찌된 일인지 조사의가 군권을 장악하고 태상왕은 절에 불사(佛事)를 모시러 들어간다고 하여 나오질 않으니 어찌된 형국인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이방원이 곰곰이 생각해 보기에도 이것은 조사의가 자신과는 척을 진 지 오래기에 이런 상황을 생각해서 태상왕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군권을 장악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이방원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교만한 말일지도 모르나 이방원은 자신과 같은 효웅(梟雄)은 본 일이 없었다. 그 지모와 계략 그리고 호통으로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고, 감히 분수에 맞지 않게 용좌에 덤비는 형제들과 간신배들은 모두 스스로 쳐 내어 결국 왕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날 때부터 이방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요, 일개 대신의 아들로서 처음부터 차례차례 쌓아 올려 만들어 나간 것이니 감히 어떤 이도 그에게 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지금의 상황도 실패라고는 생각지 아니하고 다만 잠시 몸을 굽혀 때를 기다릴 때라고 여기려 노력은 하였으나, 차마 남쪽에서 한성부를 장악하고 꼭두각시 같은 조카를 등에 업고 떵떵거리고 있을 김세훈을 생각하면 그만 노여움이 비집고 나오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1년여가 지날 무렵이 되니 이방원은 도무지 타개책이 나오지 않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하륜을 불러다가 상의를 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꼼짝을 할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결단이 서지 않네. 좌정승(左政丞)은 어찌 생각하는가?”
“신 하륜이 부족하나마 그간 지모를 짜 보았으나 이대로는 그저 서북면에서 버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나이다. 부끄러운 말이나 그나마도 김세훈의 용렬(庸劣)함이 하늘에 미쳐 더 이상 군세를 동원하지 않는 덕에 이렇게 있는 것이나이다.”
“함부로 말하지 말게!”
이방원이 일갈하여 쏘아붙이자 하륜이 넓적 엎드렸다.
“함부로 입을 놀린 소신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간언(諫言)한 것은 사실이나이다.”
그것은 이방원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함께 머리를 짜내어 나라를 도모해낸 하륜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마음이 상해 쏘아 붙이긴 하였으나 지금은 하륜의 죄를 질책할 때가 아니었다.
“어찌 방법이 없겠는가?”
“일전 소신이 제안한 바대로 김세훈을 이용하려다 결국은 내침 당해 결과가 이런 모양새니 감히 또 다른 계책을 상신하기가 부끄러운 일이나, 일이 참람하여 방법이 없으니 한 가지 지모를 짜 보았나이다.”
“말해 보아라.”
“전하께옵서는 대국에 주문(奏文)하여 황제 폐하께 적법한 계사(繼嗣)로 인정받아 왕위에 등극하셨으니 이를 어기고 인평군의 아들을 옹립한 김세훈은 폐하의 명을 어긴 역적이 되는 것이나이다. 지금의 대국의 황제께옵서는 황제에 이르기까지 역정이 깊었고, 지금 천하를 얻은 뒤로는 주변을 도모하여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시는 때이니 전하의 후계이신 세자 저하로 하여금 사절을 이끌고 황제 폐하께 조종(朝宗)하게 하시어 원병을 요청하시는 것이 유일한 방책일 줄 아뢰나이다.”
“천조(天朝)에 구원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예로부터 천자는 제후의 사직에 분란이 있고, 그것이 천 리에 참람된 일이면 먼 거리라도 거병주파(擧兵走破)하여 그 질서를 바로잡곤 하였으니 하늘 아래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나이다.”
“그렇다면 사절은 언제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
“일이 촉박하니 당장에라도 준비해서 보내야 할 것이나이다.”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하윤(河崙), 이거이(李居易), 성석린(成石璘), 조준(趙浚) 모두 불러다가 의론케 하니, 이것이 이방원을 따라 평양으로 몽진(蒙塵)한 대신들 중 가장 공신(功臣)들의 일파였다.
밤새 논의를 거듭한 끝에 세자 양녕을 그 필두로 삼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행(李行)을 참례시켜 경사(京師)에 보내어 상주(上奏)하게 하기로 하고, 서북면으로 들어와 예물이 빈곤하니 아쉬운 대로 말 300필을 끌고 가서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상주할 문구는 하륜이 작성하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섬긴 이래로 여러 번 고황제(高皇帝)의 조지(詔旨)를 받았사온데, 화외(化外)를 구분하지 않고 일시동인(一視同仁)하셨고, 근자에 또 칙지(勅旨)를 받들어 국조의 왕위(王位)를 습유토록 허락하여 주셨으니 만세의 은덕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소왕(小王)의 덕이 부족하여 성조(聖祖)에서 세운 소방의 왕실의 종사를 문란케 하고 그릇된 바로 천조의 칙유를 농단코자 하는 무리들이 거병하여 일시에 평양까지 쫓기게 되었으니 그 참람됨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상항(上項)의 간신들을 토벌(討伐)하도록 천병(天兵)을 내어 주시어 소방의 종사 사직을 바로잡아 예전대로 편안히 생업(生業)에 종사하게 하여 길이 성조의 은택(恩澤)을 입게 하소서.
조선국왕 (朝鮮國王)
이 방원 상주(上奏)
천자에게 아뢸 글이 완성되고, 남경행(南京行)의 행장이 완성되자 이내 갈 길이 문제가 되었다.
한성에서 사신을 보낼 때는 아직까지 바닷길을 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서북면에 변변한 선적 하나 없으며 포구도 마땅치 않은지라 요동을 경유하여 명의 도읍 응천부로 들어가는 방안을 강구하여 보았으나 그 길이 만 리 길이라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따로 대안이 없기에 고로(苦勞)를 무릅쓰고 그렇게 하길 택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평양에서 출발하여 그 사신단이 의주(義州)를 넘어선 것은 음력 7월 11일의 일이었다.
명나라의 보선단(寶船團)을 이끈 태감(太監) 정화(鄭和)가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들어 처음으로 317척의 함대와 2만 7,000명의 병사를 출항하니 이것이 바로 같은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