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전란전야(戰亂前夜)
「동으론 조선이 일어나 있고, 서로는 토번이 기거하며, 남으로는 안남을 감싸며 북으로는 대적에 이르니.
○東起朝鮮,西據吐番,南包安南,北距大?.」
―명사(明史) 지리지(地理誌) 제1권
1405년
명(明) 영락(永樂) 3년 중추(仲秋)
대명국(大明國) 경사(京師) 응천부(應天府).
명의 도읍 응천부는 옛 왕조들의 도읍이 들어섰던 육조고도(六朝古都)로, 금릉(金陵), 건업(建業)의 이름으로도 불리우다 원조(元朝)에는 집경로(集慶路)라 불리다 명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가 이곳을 국초(國初)의 도읍으로 삼으니 바로 응천부였다.
이 성읍은 홍무제에 의해 들어선 수십 리에 이르는 거대한 성곽과 화려한 황성(皇城)이 그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인구 70만의 당대 최고의 도읍이었다.
이 도읍에서 국시(國是)를 일괄하는 천자 영락제는 조선에서 들어온 사절의 내알(內謁)을 받아 이를 접견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들이 짐에게 가져온 글은 잘 읽어 보았다. 말 또한 잘 받았노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네가 조선왕의 세자이냐?”
황제가 용안(龍眼)을 부라리며 물어오자 양녕은 한순 움찔하였으나, 기백 있게 처신하리라 다짐한 대로 꼿꼿이 대답하였다.
“예, 제가 조선의 세자이나이다. 성조(聖朝)의 은택을 입어 사직을 잇도록 책봉(冊封)받았나이다.”
“그래. 네 눈과 품태(品態)가 마음에 든다. 네 아비와 나라가 감히 짐의 성지(聖旨)를 받들지 아니하고 사직을 뒤흔드는 모리배들의 손에 위태롭다 들었다.”
“옛 원나라에서 양마(養馬)하던 탐라라 하는 땅이 있사온데, 그곳 호족들이 일심하여 거병하였나이다. 그 수괴가 김세훈이라 하는 자이온대, 그 머릿속이 계모로 가득 차 뛰어난 병기를 만들고 조정과 백성의 민심을 흔들어 난중(亂中)을 틈타 도읍을 점령하고 괴뢰를 왕으로 추대하니 소신의 아비와 나라의 대신들이 부족하여 그만 요동 지척의 서변(西邊)으로 밀려나게 되었나이다.”
아홉 개의 계단 위, 높은 천좌(天座)에 앉아 있는 황제를 더 이상 감히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양녕은 엎드린 채로 조아렸다.
황제는 소문대로 그 생김새가 매섭고 강단이 있어 보였고, 성정이 패왕의 그것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듯 보였다.
황제는 양녕의 대답을 듣고서는 아무런 하교도 하지 않고 성큼 일어나 구궤의 단을 내려와 양녕 앞에 서서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깟 토족(土族)의 난 하나 어찌하지 못하여 나에게까지 병사를 빌러 온 너희의 모양이 한심하도다!”
“죽여 주시옵소서!”
영락제의 일갈에 대전에 들어선 양녕과 조선 사신들이 복배(伏拜)하며 죄를 청했다.
영락제는 건문제에게서 황위를 찬탈한 뒤 유명한 문사인 정염(宋濂)에게서 배워 뛰어난 글월을 자랑하던 건문제의 조관(朝官) 방효유(方孝孺)에게 황제 즉위를 찬양하고 그 덕을 기리는 표문을 지어 올리라 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정 곧은 방효유는 되레 순군진충(殉君盡忠), 즉 임금을 따라 죽어 충성을 다하겠노라 오히려 붓을 꺾고 등극의 조(詔)를 바쳐 올리지 않으니 영락제 주체는 이에 대노하여 구족(九族)에 더해, 방효유의 벗들과 동문(同文)들, 심지어 그의 글을 칭찬하고 자주 읽던 문사들까지 죄 잡아서 죽였던 것이다.
이른바 십족멸(十族滅)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성정이니 이 전말을 들어서 알고 있는 조선 사신들 또한 그 일갈(一喝)에 어찌 다리를 떨며 엎드리지 않겠는가.
황제는 코웃음 치며 그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용상으로 올라가 앉고서는 느긋한 목소리로 다시 하교(下敎)했다.
“그러나 조선왕은 짐의 천조(天朝)에서 표문을 내려 왕으로 삼은 나의 속신인데, 그것을 감히 겁박하여 왕위를 찬탈하고자 계책하고 아직도 물러서지 않고서 그릇된 자를 군주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있는 도당은 짐에게 대적하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 없다.”
“…….”
대전이 모두 고개를 들었으나 감히 황제의 말을 끊고 나서려는 자는 없었다. 영락제는 좌중을 일시하고서는 이내 손으로 용좌의 팔걸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딱딱거리는 소리만이 대전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부족한 제후의 잘못은 짐이 감싸 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병사를 내어 너희의 임금을 돕도록 하겠다. 너희는 상황이 이러하기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려 사직을 재건토록 하겠으니 이를 모쪼록 감사히 여겨 내가 보내는 장수와 천병을 받드는 데에 한 치 누도 없게 하라.”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양녕이 재차 부복(俯伏)하자 부사(副使) 이행(李行) 또한 드러눕고 그들을 호종하던 사신 일단이 모두 예를 갖춰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었다.
영락제는 그제야 흡족한 얼굴을 하고서는 좌우로 도열해 있던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짐은 양영(楊榮)에게 군사 십만을 내려 동쪽의 역적들을 토평하고자 하여 양영에게 동정장군(東征將軍) 토평총병관(討平總兵官)의 지위를 제수하니 내각 대학사 해진(解縉)은 이를 받들어 양영으로 하여금 역적배들을 토벌하고 조선왕으로 하여금 그 사직을 다시 수복할 수 있도록 도우라.”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명나라 중서성 승상이었던 호유용(胡惟庸)이 그 불충으로 옥(獄)을 당한 이래 승상의 지위가 폐지되고, 그 뒤로 명조의 재상에 상당하는 것이 내각 대학사의 수보(首輔)였다. 그 수보의 자리를 맡은 해진이 나와서 명을 받들자, 이내 대신들이 허리를 숙이며 만세를 삼창했다.
이리하여 내각 대학사 중 하나인 양영이 토벌군의 책임자가 되어 10만의 군세를 인계받으니, 양영은 소위 양사기등과 함께 3양(三楊)으로 불리는 고매한 관료로, 원래 이름은 자영(子榮)이고 그 자(字)는 면인(勉仁)으로 건안(建安)사람이었다.
건문 2년(1400년)에 진사가 되어 연왕 주체가 군사를 이끌고 건문제가 있는 남경 승천부를 칠 때, 이를 도와 입궁하여 그를 호종했다.
영락제가 황제에 자리에 오른 뒤에 문연각(文淵閣)에 들어가 한림원수선(翰林院修選)의 자리에 올라 황태자에게 시강(侍講)하는 자리까지 오른 뛰어난 학사였다. 문관이면서도 동시에 일래 무예에도 조예가 있어 영락제가 눈여겨 보았다가 조선에서의 난을 기하여 양영에게 군사를 맡겨 보내게 된 것이다.
이 양영이 입궁(入宮)하여 조칙을 받들고 이방원의 세자 양녕과 만난 것은 그 다음 날의 일이었다.
“조선의 일이 안타깝게 되었소. 하지만 이에 황상께서 불민하나마 나로 수장을 삼아 역적을 토평하라 하셨으니 세자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놓으시오.”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이곳 응천부에서 조선까지는 수천 리 길이라 갈 길이 머니 급히 서둘러야 하나이다.”
“세자가 하는 말은 잘 알고 있소. 군사의 조련이 곧 끝나니 황상의 명이 떨어지면 곧 출래(出來)하리다.”
세자 양녕이 보기에도 이 양영이라는 장수는 괜히 들먹이면서 군사 하나 제대로 못 다룰 위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성품이 온화해 보이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제멋대로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방원의 사신들은 이 사람만 믿고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연이어 얼굴을 비추고서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양영은 죄 거절하고서 10만 대병의 조련을 하는데만 힘썼다.
3주간의 준비를 마치자 양영이 이끄는 십만대군이 응천부 성문을 나서 먼 길을 따라 조선으로 출병하니 이것이 1405년, 명 영락 3년 음력 9월 4일의 일이었다.
1405년 계추(季秋)
조선국 한성부.
“전하. 명나라에서 양영을 동정장군으로 삼아서 정안군 이방원이 청한 바대로 정안군의 복위(復位)를 돕고자 10만 대군을 출병시켰다고 하나이다.”
익안군의 아들로 멋도 모르고 김세훈에 의해 왕위에 옹립되어 그저 내전에서 술과 여자로 시간을 소일하던 이석근(李石根)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몸을 벌벌 떨며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식을 고해 바친 김세훈은 눈을 찌푸리며 이석근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대로라면 사직이 위태로울 일이나이다. 전하께옵서는 대전으로 드시어 이 대책을 함께 논하시고 군사의 태세를 점검하시어 이에 맞설 방책을 다잡으셔야 할 줄 아옵니다.”
“그, 그러나 과인은 그런 일을 알지 못하오. 게다가 천조(天朝)에서 병력을 내어 보낸다 하니, 이 어찌하여야 좋소이까? 이제 모든 것이 끝났소. 과인은 그저 방원 삼촌에게 가서 엎드려 싹싹 빌고 왕위를 내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김세훈은 슬슬 노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그러기엔 너무 늦었나이다. 그런 허황된 말씀을 유하실 참이면 차라리 내전에 계십시오. 제가 대신들과 논의하여 이 대사(大事)를 타개하도록 해 보겠나이다.”
“저, 정말 괜찮겠소? 섭정공이 내 짐을 덜어 준다면 나는 잠시나마 천조의 병력을 잊고 자, 잠이라도 제대로 청할 수 있을 듯하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앞장서 적들을 막아낼 방법을 강구해 보겠나이다.”
“고, 고맙소.”
왕이 된 뒤로 포식을 일삼아 살이 찐 이석근을 뒤돌아보고 나오는 김세훈은 그저 한숨이 날 노릇이었다.
물론 이 무능함이 이석근을 왕으로 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 셈이었으나, 최소한 왕의 자리에 올라 있는 이상 최소한의 의연함만큼은 보여 주길 바랐다. 이방원에게 치여 있던 선왕 이방과도 이렇게 구차한 모습까지 보이지는 않았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세훈은 전시에는 왕의 처분을 따로 바라지 않고 직접 명을 내려 진두지휘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런 마당이고 보니 누가 국사를 농단하는 일이라 외칠 수도 없을 터였다. 지금 세훈을 도와 나라를 운영하는 대신들은 죄 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자들로, 세파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다 안전한 자리를 찾아 모인 이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이들이 명나라에서 이방원에게 주었다는 십만 대군의 소식에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안심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세훈은 다음 날 날이 밝자 조정대신을 모두 삼개나루[麻浦] 인근의 들판으로 불러 모았다.
그곳에는 이번에 새롭게 신식군대로 설치된 시위대(侍衛隊) 소속의 2만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2만의 병력 중 5천은 구 탐라군 소속으로 가장 강맹하고 조련이 잘되어 있는 정예였으며, 나머지 1만 5천은 작년 말부터 군적을 조사하여 선발하고, 구식 군대를 흡수하여 훈련시켜 신식군으로 거듭나게 만든 병력이었다.
이중 1만은 보병, 7천은 기병, 나머지 3천은 포병 및 취식 등을 담당하는 잡병(雜兵)이었는데, 기병, 포병, 잡병 또한 보총을 불출받아 훈련을 받고 전시에는 소지하고 있다가 필요시에 언제든지 보총을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은 무장 병력이었다.
대신들은 무슨 시위인가 하여 놀란 표정이었지만, 세훈은 개의치 않고 공조판서 최해산과 병조전서 양은계를 불러다가 조용히 이르고는 이내 이들로 하여금 도열하게 한 다음에 한강을 향해 보총의 집단 사격을 지시했다.
타다다다당!
이내 큰소리로 총알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한강 저 너머에 설치되어 있던 표적지들이 찢겨 나가는 모습이 대신들의 눈에 보였다.
그리고서는 그간 최해산을 독려하여 준비한 천자총통 50포, 지자총통 100포, 신기전 100대, 소포(小砲), 불랑기 200포, 그 외에도 비격진천뢰를 끌어와서 다시 한강 건너편을 향해 쏘기 시작했다. 이내 천지가 울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강 너머의 둔덕 하나가 쓸려 나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대신들이 그 위세에 깜짝 놀라면서도 어쩐 영문들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세훈은 병사들과 같은 신식군복을 입고 단위에 올라가 말했다.
“다들 이 무슨 영문인지 얼떨떨해 있을 줄 압니다만, 여(予)가 이런 훈련 시범을 보이게 된 것은 다 연유가 있소. 소식이 빠른 분들은 벌써 다 알고 있겠지만, 폐주(廢主) 이방원이 감히 조정을 뒤엎고자 명나라에 군세를 요청하여 십만 대군이 지금도 시시각각 조선을 향해 오고 있다 하오이다.”
좌중은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마침 한성에 있던 경기도 관찰사 황희가 침묵을 뚫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명(大明)의 십만 대군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합하, 거기에 폐주 방원의 군세 3만여가 더해진다면 지금의 태세로는 터진 둑을 막는 것과 다를 바가 없나이다.”
주변에서 그 말에 동조하는 듯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 공의 말이 그르지 않소이다. 단, 지난 폐주가 도망치고 조사의가 철령 이북으로 군대를 물릴 때 보았듯이 전쟁은 꼭 머릿수로 하는 것은 아니외다. 이에 언젠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방금 견식한 것처럼 강병들을 조련시켜 놓았소이다. 명의 십만 대군이 비록 강맹하다 하나 수천 리 길을 돌아 겨울이 되어야 이 조선 땅에 입경(入境)할 것이오. 이미 소식이 들려온 즉, 우리는 군세를 조금 더 늘리고 그 태세를 강맹히 방어하되, 이 십만 대군이 먼저 오기 전에 폐주를 공격하여 선수를 치고 압록강에서 명군을 맞이하려 하오.”
“합하께서 말씀하신 계책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서(李舒)였다. 확실히 이방원 때부터 벼슬을 하던 이들이라 더 이상 모험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말해 보시오.”
“폐주가 우리 군세에 패퇴하여 참살되고 나면 명군은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들어와 적법하게 왕사를 이을 군주가 없다 단언하고서는 천조(天朝)에 병합하겠노라 으름장을 노을 수도 있나이다. 만약에라도 패하여 실제로 그리하게 된다면 이 나라의 사직이 모두 무너지고 나라가 사라지는 일이 되니 무섭지 아니할 수 없나이다.”
이서 또한 벼슬할 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아직까지 이들은 세훈의 가신이라기보다는 그저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훈의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걱정도 달래 줄 필요가 있었다.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내게 들어온 이야기에 따르면 폐주의 아들 양녕이 사절단에 동행해 지금 명군과 함께 돌아오고 있다고 하오. 폐주가 사라진다면 명군은 양녕을 보위에 세우려고 할 것이고, 우리는 그전에 그 일을 막아서 사직을 보전할 수 있소. 경이 걱정하는 바처럼 우리가 지더라도 양녕이 왕위에 오를 테니, 사직이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경의 명줄을 구명할 방법이나 강구해 보도록 하시오.”
세훈의 쏘아붙임에 이서는 그저 땀만 비죽이 흘리고서는 뒤로 물러섰다. 세훈은 좌중을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주상께서는 이런 공전의 위기에 깊은 침통함을 느끼시고 곡기를 끊으시고 침중해 계시며 이 일을 타개하기 위해 조정신료들과 백성의 힘을 모아 난국을 이겨내라고 윤허하셨소. 이에 내게 전권이 내려졌으니 병제(兵制)를 일시 개혁하여 이 방비의 초석을 삼으려 하오.”
임금이 곡기를 끊고 침중해 있지 않은 것은 여기 모인 이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세훈이 군제를 개혁하여 전쟁에 돌입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왕지사 이런 모양새가 되었으니 우선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함께 힘을 합치는 수밖에 없었다.
황희, 이서 등도 이내 긴장한 표정으로 세훈의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논쟁하고 말 것도 없는 일이 된 것이다.
“우선, 기존의 시위대는 일시 해산하고 이를 재편하여 제1진위대(鎭衛隊)로 편성하고 풍해도 해주로 보내어 그곳을 병참으로 삼은 뒤, 이 2만의 병력으로 서북을 쳐 폐주를 처단하겠소. 그리고 해산된 시위대에 갈음하여 한성, 개성과 경기의 군적에 따라 2만의 병력을 다시 뽑아 1개월간 훈련시킨 뒤 다시 시위대를 편성하여 도성을 단단히 방비케 하고, 강원에서 1만의 군적을 뽑아 원주에 제2진위대를 설치하고, 충청, 경상, 전라에서는 2만의 군적을 뽑아 각각 공주, 대구, 전주에 진위영을 설치하고 제3, 4, 5진위대를 편성하여 주둔시키도록 하겠소. 이들은 아무래도 군적의 조사와 선별이 늦어지면 조련 또한 부족할 터이니 우선은 지방에 주둔된 바대로 각 군읍(郡邑)을 지키고 훈련을 계속하여 유사시에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겠소. 제주에는 1천의 군대가 있으니 우선은 이것으로 인원이 부족하나 제6진위대를 편성하여 방비를 하도록 하겠소.”
모두가 우선은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세훈의 말이 끝나자 병조전서 양은계가 나섰다.
“새 병력이 입을 보총과 군복 그리고 새로이 편제는 어찌하실 요량이시나이까?”
확실히 아직까지 병조를 맡고 있는 양은계와도 상의를 나눈 일은 아니었다. 이것은 세훈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편제였는데 갑작스레 명군의 출병이라는 난재를 맞아 구체화된 것이다.
세훈은 양은계를 바라보았다. 그는 세훈이 목숨을 구함받은 양노인의 손자로, 세훈이 확실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공조판서는 군수품의 생산 대강을 말씀해 주시오.”
뒤에 물러나 있던 최해산이 세훈의 말에 따라 양은계를 비롯한 좌중에 설명하기 시작했다.
“장기적으로 군세를 보총을 든 신식군으로 재편할 계획으로 꾸준히 군복과 보총을 생산해 왔소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금 생산 가능한 곳이 아직까지 탐라밖에 없는지라 지난 1년간 생산한 군복이 총 3만 장정을 입힐 수 있고, 보총은 조금 더 넉넉해 추가로 4만의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소이다.”
최해산의 말에 이어 세훈이 보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공조판서가 이른바 말해 준 대로 군복은 새롭게 편성될 시위대 병력과 강원도의 제2진위대에 우선 지급하겠소. 그 다음의 보총 역시 시위대와 제2진위대에 우선 지급하고, 남은 1만은 3천씩 삼남의 진위대로 보내어 우선적으로 보총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하고, 그러고 남은 천 개의 보총은 전방에 결손이 발생할 시 바로 보충할 수 있도록 비축해 두도록 하겠소.”
좌중은 바야흐로 전운이 감도는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세훈은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선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에 따라 기존의 서반(西班)의 관직을 일시 폐지하고 새로운 군직을 부여하겠으니 이 시간부로 설치될 비변사(備邊司)에 참예하게 될 의정부의 재상들과 육조(六曹)의 대신들, 그리고 변방 관찰사들은 남아서 이 일을 마지막으로 합의하도록 하시오.”
이에 따라 문무가 함께 모여 일을 처결할 수 있도록 비상시 국정기구인 비변사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임진과 병자의 영란을 거치면서 조선에서 실제로 설치되었던 기구였다.
이 비변사는 안 좋게 말하면 밀실 회의로 정치를 하는 기구에 다름 아니었으나, 이런 전시에는 군국(軍國)의 사무를 일통시켜서 재빠른 처결이 가능하게 한 유용한 기관이었다.
이 비변사가 설치되어 처음한 일은 병조전서 양은계의 직급을 판서로 올려 병조의 권한을 크게 하고, 서반(西班), 즉 무관직의 계급을 새롭게 개신하는 것이었는데, 김세훈의 안 대로 정했는데, 대신들은 알 수 없는 일이나 시위대, 진위대의 명칭과 군제의 계급은 바로 20세기 말의 대한제국의 계급을 빌려 온 것이었다.
가장 위에 대원수(大元帥)를 두어 명목상이나마 국왕인 이석근에게 주고, 그 아래의 원수(元帥)자리에 김세훈이 올라 비변사의 수장이 되는 동시에 군무의 총 책임을 맡는 가장 높은 계급에 올랐다.
이 아래로 대장, 부장, 참장의 장급, 대령, 부령, 참령의 영급, 정위, 부위, 참위의 위관급, 특무정교, 정교, 부교, 참교의 사관급, 상등졸, 일등졸, 이등졸의 병급으로 나누었다.
그런 다음 그간의 전방의 군무를 담당해 오던 여산백 양면토평부사 송거신으로 하여금 정1품 대장(大將)의 위를 삼아 비변사 아래에 참모부(參謀部)를 두고 휘하의 병속을 전담케 하고, 병조판서 양은계로 정2품 부장(副將)을 삼아서 사단급인 제1진위대와 앞으로 창설되게 될 시위대와 제2진위대를 합쳐 1군단을 만들고 경사군(京師軍)이라 이름하고 그 책임자로 보임시켰다.
나머지의 삼남에 설치될 후속 진위대들은 군단을 편성하지 않고, 전방의 시위대와 진위대에는 각각 사단급으로 삼아 종2품 참장(參將)을 임명하니, 기존 탐라군이었던 제1진위대는 고상온이, 새롭게 편성될 시위대는 황희가, 강원도의 제2진위대는 고봉지가 맡아 사단장이 되었다.
그 아래로 연대장에는 정3품의 정령(正領), 혹은 종3품의 부령(副領)을 보임시키고, 그 아래의 대대에는 종4품의 참령(參領), 그리고 중대에는 종5품의 정위(正尉)를 임직시켰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무관들로 충당하였으나 정식으로 사관 및 하사관의 교육을 받은 장교나 하사관이 아직까지 없었기에, 우선은 기존의 병사들 중 뛰어난 이들로 하여금 참위(參尉)에 보임시키고, 신식군에 대한 적응 능력이 뛰어나고 전투 경험이 있는 탐라군 출신의 병졸들 중에 하사관 후보생을 뽑아 1개월간 훈련시킨 후 참교(參校)에 보임시켜 소대장과 분대장을 삼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른바 전쟁의 준비는 한성에서도 이렇게 차근차근 이루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1405년 맹동(孟冬)
조선국 함주목.
조사의는 지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2만 군사가 여전하나 산중의 사찰에다 유폐시켜 놓은 태상왕의 존재는 여전히 불안하기 짝이 없고, 동북면의 호족들은 언제고 사실을 알게 되면 조사의를 뒤에서 후려치려고 덤벼들 것이 뻔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방원에 의해 안변부사로 보내지자마자 태상왕의 찾아가 계책을 꾸미고 병사를 모았던 것이기에 실제로 조사의의 사병이라고 할 만한 자들은 없다고 보아도 좋을 일이었다.
변에 쓸 만한 지장(知將)도 없으니 논해 봐야 부질인 일이었다.
시름 깊어 그저 밖에 걸린 달만 보고 있자니 이제는 겨울이라 북쪽의 바람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소매를 접고 들어가려는 차에 아래쪽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조홍(趙洪)이 조사의를 찾아온 것이다.
“홍이 왔느냐?”
“아버님. 전해드릴 소식이 있나이다.”
조사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야심한 밤에 직접 찾아와 전할 소식이라면 그렇게 만만한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조사의는 두뇌가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많지 않은 군세를 이끌고 동북면에서 살아남기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조사의는 그 정도의 판단력은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님, 폐주 이방원이 아들을 명나라로 보내어 군사를 끌어온다고 하나이다. 이미 출발한 지 한 달여가 지나 요동 경내로 들어서 압록을 넘어 들어올 채비를 하고 있다고 하나이다.”
조사의는 머리가 욱신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이 무슨 괴사란 말인가.
“군세가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이곳 동북면까지 들려오는 이야기는 거기까지이나이다. 다만 얼마 전 건주위(建州衛)로 다녀왔던 여진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족히 수만은 훨씬 넘는 숫자라고 하나이다.”
“지척까지 왔다니 안 될 일이다. 물론 방원이 놈은 김세훈을 노리고 있겠으나 우리 또한 시간문제이니라.”
“한성의 김가는 보총을 만들어다가 새로 병사를 확충하여 훈련시키고 있다고 하나이다. 보총을 쥔 5만 정병을 만들어 명에 대항한다고 하니 전란이 쉬이 끝나진 않을 듯하나이다.”
“그래, 알았다. 우선은 물러가 있거라. 명군이 당장 이 외진 동북면으로 들어오지는 않을 터이니 잠시 계책을 궁리해 보는 것이 좋겠다.”
아들 조홍이 물러가자 밤늦게 조사의는 같이 모반을 획책해 여기까지 온 강현(康顯)을 불러들여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결국 내린 결론은 동북면에서 버티며 독자적인 생존을 하긴 힘들다는 것이었다. 땅은 척박했고 고을마다 호족들이 각기 제 위신을 뽐내며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태상왕의 이름으로 일시적으로 뭉쳐져 있다고 하지만 태상왕의 뜻을 어기고 사찰에 가둔 것이 알려지게 되면 어차피 조사의는 산목숨이 아니었다.
“역시 김세훈에게 붙는 수밖에 없나…….”
“방원이 놈이 명나라 천군을 끌어들이지만 않았다면 이대로 우선 버티는 게 가능할지 모르나, 지금으로 봐서는 먼저 들어다 바치는 것이 현명하외다. 김세훈은 분명히 태상왕을 요구할 것이고, 태상왕도 이제 기력이 빠져 개경 수창궁에다 모시면 분명히 그저 불사만 도우며 여생을 보낼 것이나이다. 김세훈과 함께하여 방원에게 맞서는데 공을 세우면 혹시 아시오, 창업지공(創業之公)을 쌓게 될지.”
“자네는 괜찮겠나? 어쨌든 우리 모두 왕후마마의 은덕을 갚고자 시작한 일인데 너무 먼 길까지 와 버린 듯하오.”
“태상왕 전하께서 더 이상 무심하시니 어쩔 수 없소이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으니 더 생각해 무엇하겠소. 일이 이만큼 왔으니 되돌릴 수 없는 일이외다. 구명줄이 보였으니 잡으시오.”
강현의 말에 조사의는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책은 김세훈밖에 없었다. 두 번 말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나, 이방원과는 불구대천의 척을 졌으니 갈 곳은 한성의 김세훈뿐이다.
시기가 늦으면 군세를 들어 바친다 해도 받지 않겠으나 아직은 적절한 시기였다.
한성에서도 급하게 군사를 조련하고 대비하느라 어수선할 일이었다. 이때에 태상왕을 모시고 들어가 명분을 세우고 김세훈에게 군세를 바치겠다고 하면 적어도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맞으니 서로 의심하고 염려할 필요도 없다. 우선 명나라와 싸우면서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더라도 조사의의 존재가 확실해질 것이다.
조사의는 아들 조홍에게 백여 기의 기병을 붙여 주어 한성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한성에 도착한 조홍은 바로 대신들이 모인 비변사 회의에 동북면절도사를 대리하여 온 것으로 인정받아 참여를 허락받았다.
이미 조홍이 온 이유를 아는 김세훈은 그를 반역군 취급하지 않았다.
“태상왕의 신병은 꼭 개경으로 인도해야 한다. 자세한 연유를 동북면의 호족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면 변방이 위태롭게 된다.”
“아버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세훈의 말에 조홍은 부복했다.
과연 비범한 인물이었다. 남들보다 머리가 하나는 높아 보이는 훤칠한 키에 생긴 것 또한 헌헌장부였다. 이 사람 밑에서 미래를 도모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에게나 자신에게나 나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이미 조홍은 내리고 있었다.
“내가 주상 전하께 아뢰어 적절한 벼슬을 제수하고 동북면의 군사에 대하여 전권을 위임할 것이니, 조 공은 그것을 받아 돌아가 부친께 전하고 앞일을 잘 부탁드린단 말도 옮겨 주시게.”
“여부가 있겠나이까, 합하.”
이틀 뒤에 다시 조홍이 천 리 길을 내달려 동북면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는 조사의를 영흥공(永興公)에 봉작(封爵)하고 종2품 영길도병마절제도사(永吉道兵馬都節制使)에 임면하고, 조사의의 2만 병력에게 동북군(東北軍)이란 이름을 내리고 부장(副將)의 지위를 내렸다. 이를 추인하는 교지가 조홍의 손에 들려 있었다.
조사의뿐만 아니라 강현을 길주백(吉州伯)에, 그리고 정령(正領)에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변안렬(邊安烈)의 아들로 원주백(原州伯)이 된 변현(邊顯)를 조홍과 함께 보내며 역시 정령(正領)의 품계를 내렸다.
조홍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는다는 이유로 정위(正尉)의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조홍이 보따리를 싸안고 돌아오자 조사의는 진심으로 기뻐했는데, 자신을 공후(公侯)의 자리에 올려 주고 넉넉히 대접해, 한때 한성에 있으면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변현(邊顯)까지 함께 보내 주니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조사의는 어찌 되었든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이제는 이방원만 주살(誅殺)하면 그의 거병은 부족할 것이 없을 듯싶었다.
그러나 우선은 군세를 이끌고 서북면을 홀로 도발할 수는 없었다.
변현이 세훈에게 지시받은 대로 조사의에게 일러 준 것은 곧 병력의 조련이 끝나는 대로 명군이 서북면으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평양을 토평하여 이방원을 역적폐군(逆賊廢君)으로 징계할 것이라 하니, 그때에 함께 합세하여 덕천(德川)과 안주(安州) 방면을 맡아 이방원이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조사의가 들어보니 과연 그 계책이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조사의 스스로 마음은 앞서나 병력의 무장이나 훈련된 것이 한성의 군대에는 밀리는 것이 당연하니, 주공(主攻)은 그곳에 미뤄 두는 편이 조사의 스스로도 마음이 편안 일이었다.
대충 세훈의 그늘로 들어가 명줄을 도모하는 것이 성공했다고 생각되자, 다음 할 일은 단단히 부탁받은 바대로 태상왕을 개경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조사의 스스로도 바라는 바였다. 태상왕이 동북면에 계속 있으면 그 자신이 불안한 일이었다. 차라리 개경으로 보내 버리고 태상왕이 노욕(老欲)을 그만 세우고 살아 있는 아들들 중 맏이인 상왕 이방과와 함께 지내려 개경 수창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나머지는 세훈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그러면 조사의 자신은 동북면의 군세를 이전보다 확실히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태상왕이 없어도 이제는 한성의 정부를 등에 업고 정당하게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조사의에게 생긴 것이었다.
1405년 맹동(孟冬)
조선국 개경부.
태상왕 이성계가 개성부중으로 들어온 것은 음력 10월 17일의 일이었다.
이성계는 상왕 이방과와 이방원에게 패한 뒤로 은인자중(隱忍自重)하고 있는 회안군 이방간에게 문안을 받은 다음 수창궁으로 모시려는 이방과의 말을 거절하고서는 예전 고려에서 벼슬 살 때 기거하던 옛 집인 목청전(穆淸殿)으로 들어가길 고집했다.
왕이 기거하던 집이라 이제는 가호(家號)에 전(展)이 붙어 목청전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이제는 태상왕이 정말 돌아오게 되었으니, 진정 궁궐이 된 셈이었다.
이성계는 그곳에다가 왕후 강씨의 위패를 모셔다 놓고 뒤뜰에는 불전(佛殿)을 만들어 매일 조석으로 공양하며 죄업을 참외하며 지내고 있었다.
세훈은 태상왕이 개성부에 모셔졌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단출한 시중을 이끌고서는 목청전에 찾아가 뵙기를 청하였으나 이성계는 문 안으로 들여 주지를 않았다. 그렇게 찾아가기를 세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문안을 받아 주었다.
“명군을 막아내는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짝이 없을 요량인데 어인 일로 이 늙은이의 집까지 찾아왔는가?”
비록 이리 내몰리고 저리 내몰려 부쩍 늙은 모습이었으나 군주로서의 패위(覇威)는 여전했다.
얼굴은 주름져 이제 검버섯이 피어오르고, 근골(筋骨)이 쇠약함이 여실했으나 깊게 깔리는 목소리와 그 자용(姿容)은 여전히 용상에 앉아 있을 때 그대로인 듯 보였다.
세훈은 주눅이 들지는 않았으나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이성계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나, 역시 전해 들은 바대로의 걸물이었다.
“태상왕 전하께서 옛 도읍으로 돌아오셨다 하니 어찌 신하된 바로 찾아뵙기를 주청하지 않겠나이까.”
“나와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면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네. 차나 들게.”
“주시는 차라면 사양하지 않고 들겠나이다.”
뜨거운 물에 푹 담긴 찻잎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퍼져 오르고 있으나 세훈과 마주 앉은 이성계의 눈은 그저 매섭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자네가 밉네.”
“…….”
“얼굴을 보면 화가 나서 심신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 같아 굳이 보지 않기로 하여 몇 번을 거절했건만 끝내 이렇게 찾아와서 늙은이를 불러 세우는구만.”
이성계의 눈가에 잡힌 주름 가득히는 회한이 스멀스멀 맴돌고 있었다. 세훈은 그 행간에서 삶에 대한 무상(無常)함을 은연히 느끼고 있었다.
“나는 젊은 시절을 쉴 새 없이 보냈네. 싸우고, 부딪히고, 물리치고, 이겨내다 보니 나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고, 권세가 생기고, 어느덧 임금의 자리에 올라와 있더구만.”
이성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그저 옛 사람들이나 추억하며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노인이 되어 버렸네. 어젯밤 왕건 태조가 꿈속에 나왔네. 용포를 치렁치렁 드리우고 면류관을 쓰고서는 높은 단위의 옥좌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면서 꾸짖는데,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고 꿇어앉아서 그저 빌기만 했네. 날더러 천하의 역적질을 하였으니 이제 그 죄업의 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 하더군.”
세훈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태상왕 이성계가 했던 것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수천의 왕씨를 데려다가 남해 바다에 수장시켰으니 그 원혼이 구천을 떠돌며 내가 세운 사직을 허물기 위해 오늘도 배회하고 있을 것이네. 나이가 들수록 덧없음만 느끼니 이제는 갈 때가 다 되었나 보지. 옛말에 수신하고 제가하여 치국평천하라 하였으나, 나는 수신(修身)하여 제가(齊家)하고 나서 비로써 치국(治國)에 이르렀노라 생각했었건만 지금 보니 제 몸가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집안은 더더욱 다스리지 못했으며, 나라는 결국 건사하지 못하고 내 집안의 식솔들과 신하들이 사분오열 찢어 놓았으니 이것이 무슨 군왕의 덕치(德治)라 하겠는가.”
“사람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나이다. 어찌 그걸 헤아려 모든 일을 행하겠나이까.”
세훈의 대답에 이성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질없는 이야기네. 군자는 그저 오늘 할 일을 할 따름이라고 하나 그것은 스스로 뭘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이네. 나는 이태까지 그걸 몰랐어. 그저 욕심 가는 대로 행하다 보니 결국 이런 모습이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네도 나와 다르지 않아. 자네가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목적도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가고 있지 않은가?”
태상왕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들어가 버렸다.
세훈은 목청전을 나와 다시 한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이성계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그른 말이 아니었다. 세훈은 그의 말대로 스스로가 아무런 목적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에는 살아남고자 했고 일이 풀리다 보니 자신의 하는 일에 훼방이 되는 한성의 임금과 대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탐라를 좀 자유롭게 만들어 바다로 나가 보거나 산업을 일구어 볼 요량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한성으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섭정한다는 자리를 차지하고 이제는 명나라 군대와 맞서려고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래 왔던 것인가?
세훈은 좀체 해답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자신은 22세기에서 온 사람이다. 굳이 이런 전쟁과 전란을 선택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얼마든지 해 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자신이 민족의식이 투철해 만주며 세계를 호령하고자 하는 꿈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었다.
세훈은 21세기 초반부터 큰 흐름이었던 탈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이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흩어지고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도 어느새 세기를 건너 밀려나 역사 속의 단락이 되었다. 22세기에서 세훈은 그런 일들에 무감각한 사람이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세훈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경행저로 돌아와 자신의 두 아이를 보았을 때 세훈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세훈은 그동안 바빠 아이들을 볼 때마다 훌쩍 커 있곤 했는데, 벌써 첫째 현도는 나이가 다섯이나 되어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둘째 현진도 이미 돌이 지난 나이었던 것이다.
“아버님. 소자가 오늘 배운 것을 들어보시겠사옵니까?”
집으로 돌아온 세훈에게 아들 현도가 찾아와 혀 짧은 목소리로 자랑하듯이 물어보았다.
“그래, 도야.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천지현황, 우주홍황, 일월영측, 진숙렬장.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사옵니다.”
짐짓 배 위에 손을 가져다대고 뽐내듯이 말하는 모양새가 귀엽기 짝이 없었다. 세훈은 웃으며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뜻은 아느냐?”
“하늘은 그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하늘과 땅 사이는 넓어 끝이 없도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지니, 별들은 하늘에 넓게 벌려져 있구나, 라고 배웠사옵니다.”
“네가 총명하구나. 앞으로 집안의 홍복이 될 것이다.”
세훈은 그때서야 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다해야 될 것은 별것이 아니었다. 평천하(平天下)한다는 것도 시와 때가 맞으면 저절로 주어질 것이나 수신하고 제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앞으로 그가 해 주어야 될 가장 큰 일은 이 아이들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가장 쉬우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몰랐다.
“현도 네가 아비에게 가르침도 주는구나.”
“그렇사옵니다. 아버님, 이 천자문 안에 세상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스승님이 말씀해 주셨사옵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격식을 차리면서 말하는 것이 꽤나 맹랑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700년 너머에나 있을 부모님의 얼굴이 생각났다.
자신이 어릴 적 머리 좋음을 으스대며 부모님게 자랑하곤 했을 때 자신을 보시던 눈빛이 아마 세훈이 지금 아들을 보는 눈빛이리라.
마음이 정리가 되자 세훈은 지체하지 않고 나섰다.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은 명나라를 막아내야만 했다.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지금의 위치를 좀 더 명분상 튼튼히 하기 위해서 세훈은 종친(宗親)들과 대신(大臣)들을 모아 놓고 이석근에게 말해 왕의 이름으로 조칙을 발표하게 하였다.
그것은 폐주(廢主) 이방원을 왕자의 난을 들어 역적(逆賊), 난신(亂臣)으로 규정하고 지금의 종묘와 사직을 위협하는 도당으로 몰아세우는 내용이었다.
강씨 소실로 세자였던 방석(芳碩)을 소흥세자(昭興世子)의 시호를 내려 개성부 남쪽 수륙교 인근에 사당을 세워 그 혼을 위로케 하고, 난중에 주살당한 삼봉 정도전으로는 그 가문으로 하여금 봉화공(奉化公)의 작위를 내리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내렸다.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는데, 남은은 의령후(宜寧侯)의 작위와 강무(剛武)의 시호를, 심효생은 부유후(富有侯)와 진충(盡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삼충사(三忠祠)의 사당을 흥인지문 가까이에 지어 배향관(配享官)을 두어 그 제향을 모시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이방원의 난을 역모로 다스리고 또 폐주의 정당성을 지우는 작업이었다.
이성계는 복잡한 마음으로 일절 이 일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가장 아껴 세자로 삼았던 막내아들 방석의 사당이 개성부중에 지어지자 그곳에 들러 제문(祭文) 하나만을 놓고 쓸쓸히 돌아섰다.
아꼈던 이들은 이제 복권이 되어 사당에 배향이 되었으나, 이로서 산 아들은 역적이 되어 죽게 되었으니 그 기분이 가히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1월이 되자 명군이 압록 지척까지 진군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진위대와 시위대의 편성대강이 끝난 듯하자 세훈은 지체 없이 옛 탐라군의 맹장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제1진위대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군토록 하고, 조사의에게도 서찰을 보내어 안주로 진격토록 하였으니 모두 계획했던 대로 명군의 압박이 거세지기 전에 먼저 폐주를 처단해 적의 기세를 꺾으려는 목적이었다.
진군하는 병사들이 죄다 소흥세자 방석과 왕후 강씨, 개국공신으로 충성을 다하였으나 목숨을 잃은 정도전의 죽음을 외며 진군하고 있으니 이것이 모두 이방원의 죄업으로 그 목을 옭아매는 주문(呪文)에 다름 아니었다.
1405년 계동(季冬)
조선국 평안도 평양부.
조선군 참장(參將) 고상온은 해주 주둔의 제1진위대를 이끌고 평양성이 내다보이는 대동강변까지 진격해 있었다.
제1진위대는 한성 점령 이후에 이석근은 왕위에 옹립하고 처음에 시위대(侍衛隊)로 편제한 부대로, 총 2만의 병력 중 5천이 탐라군 출신의 정예였다.
명나라의 침입이 눈 앞으로 다가오자 이 정예 병력을 수도방위와 왕실호종(王室護從)에만 사용할 수 없다는 세훈의 판단에 의해 기존 시위대는 지금의 제1진위대로 재편되어 풍해도 해주로 전진 배치되고, 새롭게 시위대를 뽑아 편성했는데 바로 그 제1진위대가 참장 고상온의 지휘 아래에 대동강변으로 육박해 들어온 것이다.
제1진위대는 조선군 최고의 정예 부대인 만큼 그 보급도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군복은 신식군복으로 일체 통일되어 있고 보총 또한 가장 우수한 품질의 상태가 양호한 것들로 불출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한다면 탄약 및 식단의 지급도 우수한 편이었다. 제1진위대에는 군속(軍屬)의 종군(從軍) 취사인(炊事人)을 30인 편성하여 특별히 그 식사를 돌보도록 했기 때문이다.
고상온은 이번의 계급 개편에 따라 새로이 계급장을 부착한 개량 전립(戰笠)을 착용하고 신식군복에 각반(脚絆)을 매고 제1진위대장을 나타내는 휘장(徽章)을 두르고 단단한 가죽 군화를 신은 채로 전마 위에 올라 대동강 너머의 평양성을 보고 있었다.
고상온은 이 신식군복을 처음 입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단추라는 것을 어떻게 끼워서 옷을 맞춰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었다. 갖춰야 할 옷도 많고 지참해야 할 물건도 많아 도무지 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부터 고민했어야 했다.
이제 옷을 입는 것이 조금 익숙해지자 옷이 꽉 끼는 것이 불편해졌고, 옷의 모양새도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입어 버릇하면서 이 군복을 입고 군사 훈련을 받기 시작하니 그 불편하던 옷이 그렇게 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마 도포 자락을 치렁거리면서 훈련을 받았다면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라 고상온은 생각했다.
무거운 군화는 오래 달리고 뛰어도 해어지지 않았고 몸에 붙는 옷은 동작을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게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더군다나 지급된 보총과는 완연히 짝을 이루는 완전한 군장이었다.
고상온은 세훈 또한 그 군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세훈이 자신의 매제(妹弟)가 되고 나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처음에 보총을 받아 군사들과 훈련을 함께할 때만해도 세훈에 대한 경쟁심이 컸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세훈의 덕에 제주 고씨가 후작가(侯爵家)의 사직을 세우게 되었으니 오히려 감읍할 일이었다.
지방 일개 토후(土侯)가 제후(諸侯)의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군의 요직에 출사(出師)하여 제일 가는 정예병들을 이끌고 일선에 종군하게 되었으니 고상온은 문득 지난 수년간의 감회가 새롭기 짝이 없었다.
이제 나이는 삼십대 중반이나 작위는 후작(侯爵)에 계급은 참장(參將)에 이르렀으니 앞으로의 영예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세훈을 실망시키지 않고 어렵게 얻어낸 내각(內閣)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번 전투에서 먼저 선전하여 승리해야만 했다.
세훈의 조언으로 근대군의 운용 방침에 대해서 매일 밤 외우다시피 하며 공부하고, 아직 근대군에 대한 전략을 다룬 병서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기존의 제가병서(諸家兵書)를 있는 대로 모아 읽었다. 앞으로 자신의 나아갈 길은 군부(軍府)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 평양성 목전에 서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비록 천해의 요새라는 평양성이나 내부가 불안하고 외부에 근심이 쌓이면 안에서부터 무너질 터였다.
“참장 어른. 부교를 설치하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부관인 정위(正尉) 안정재(安定在)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안정재 또한 원래 제주의 호족 집안 출신으로, 원래는 군적(軍籍)에서 빠지는 신분이나 자발적으로 탐라군에 들어와 지금은 그 재능을 인정받아 소정의 훈련을 거친 뒤에 정위(正尉)의 계급을 받아 고상온과 함께 평양으로 종군해 있었다.
“우선 대동강을 건너기는 해야 하겠군.”
“어느 쪽으로 놓으시겠습니까?”
“대동강 쪽의 성은 보다시피 강변을 따라 험준한 벽이다. 상륙할 지점도 없을 뿐더러 부교를 놓고 건너가는 동안 적군의 공격에 노출되게 된다. 보통강과 마주하는 합구(合口)에 있는 쑥섬을 통해 건너가도록 한다. 부교를 쌓는 동안은 감히 이쪽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준비해 둔 천자총통과 소포(小包)를 강 너머 성벽 방향으로 쏘도록 한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쑥섬까지 포를 전개해 평양 외성에서 가장 돌출되어 있는 거피문 방향으로 쏘아대니 적들은 화살로 응전할 뿐, 부교를 쌓는 것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다.
부교가 중간쯤 전개되었을 때 성 안에서도 보총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고 나와 아래쪽으로 쏘아대니 고상온은 조금 놀랐다.
“안 정위. 적들이 쏘아대는 것이 보총 아닌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일전 개성을 공략할 때 서북면으로 피난 가던 폐주의 군세와 마주쳐 200여 명의 손실을 보고 일부 무기 또한 잃게 되었는데 그때 노획한 보총이 분명합니다. 그 숫자가 많지 않을 터이니 크게 우려하실 것은 못됩니다.”
“확실히 우리 손에 있을 때는 그만한 무기가 없지만, 남의 손에 조금만 들려 있어도 무섭구나. 전방에 있는 우리 군에서는 최대한 이 보총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야.”
“분부 받잡겠나이다.”
적은 탄(彈)이 모자란 듯 이내 사격을 멈추고 성의 요철(凹凸) 뒤에 숨어 화살과 투석전을 전개했으나, 앞마당으로 떨어지는 대포의 위력 앞에 부교가 전개되는 것을 숨죽이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내 부교가 완성되자 우선 고상온은 포를 에워싸고 보병을 전개시키고, 그 뒤를 기병이 따라오도록 했다. 먼저 포를 에워싼 보병대가 전개되자 뒤의 후속대를 기다리지 않고 가능한 빨리 포를 안정된 위치에 설치하여 바로 공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성루(城樓)로 올라오는 적은 보병들로 해서 보총으로 쏘게 하고, 그동안 설치되는 포들은 가능한 성벽을 두드려 진입로를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반면, 기병대는 가능한 늦게 투입되어 전장 전면에 내보내지 않고 안정재의 지휘하에 모란봉 가까이 있는 내성의 칠성문(七星門)으로 유격해 들어가 적군의 퇴로(退路)를 차단토록 했다.
수비군들은 기존의 납탄으로 성벽을 두드려 봐야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력을 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성벽 가까이 다가오는 군세에 퍼붓기 위해 끓는 기름 따위를 한참 준비한 모양이었으나, 일은 생각처럼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고상온이 이끌고 온 포들은 전부 근래에 공조 산하의 화통서에서 개량된 것들로, 화약의 양과 질을 가능한 개선하고 주물 기술을 개량하여 이 포가 쉽사리 깨지지 않도록 한 다음 철제 포환(砲丸)을 넣어 단단한 석벽을 깨부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었다.
평양성은 옛 고구려시대의 성곽이 고려왕조를 거쳐 오면서도 계속해서 그 형태를 유지하며 개보수되어 왔던 것이었으나, 좌로는 보통강, 우로는 대동강이 감싸 안고 주변에 대군을 전개시켜 성을 공격할 만한 자리가 없는 그야말로 요새(要塞)에 가까운 성이었으나, 신무기에 가까운 대포에는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이내 외성의 성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거피문은 이미 불타올랐다.
보총대의 호위 아래에 좀 더 가까이 진격한 포수들이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쏘아 올려 두드리기 시작하니 이내 성 안에서도 불이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수비군은 활로 저항해 보려 하나 그 사정거리 밖에서 우선 포로 두들긴 다음에 보총대를 보내 주변을 진압하니 도무지 저항할 여력이 생기질 않았다.
안주로 보낸 5천의 병력을 제하고는 평양에 남아 있는 것은 1만 7천여 명이 전부였고, 그나마 패잔군에 가까워 이내 공격할 의지를 잃고 외성을 버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쉽게 외성으로 진입한 제1진위대의 병력은 이내 외성을 점거하고 포를 전개한 뒤, 중성(中城)을 공략하려고 했으나 예기치 못한 복병과 마주쳤다.
“적군에도 포가 있다!”
중성 성벽 가까이 앞으로 다가갔던 병사가 외치며 뒤로 후퇴해 오며 외쳤다.
고상온이 보니 정말로 외성에서 중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널찍한 중양문 문루 주변에 어림잡아 10기쯤 되어 보이는 포들이 서서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아까 외성에서도 보였던 150여 명쯤 되는 보총을 쥔 사수들이 중성의 성곽 곳곳에 포진하여 성벽을 뚫지 못하게 방비하고 있었다.
“겁내지 마라! 적군의 포는 겨우 10여 문이고 보총을 쥔 사수도 채 몇 백이 안 된다! 우리는 포가 40여 문이고 보총을 가진 병력이 만을 넘지 않느냐! 적군의 포와 보총을 두려워하지 말고 중성을 공격하라!”
고상온의 외침에 사기를 얻은 듯 포의 함성이 울렸고, 적군이 포를 쏘아 응사해 오나 아무래도 사격 거리와 그 숫자에서 차이 나다 보니 이내 정양문 문루가 무너지고 1만이 넘는 병력의 집중 포화에 성곽 위의 보총 사수들도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고상온의 계책은 간단했다.
화력을 집중에서 평양성을 공격한다면 내성까지는 쉽게 뚫릴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과 그 일족, 가신들은 이미 명군의 원병이 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성을 빠져나가 목숨을 보전코자 할 것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이들을 사로잡아야만 했다. 병력이 중성을 뚫고 내성을 육박해 들어온다면 내성 칠성문이나 북성의 현무문을 나와 산길로 도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정재 정위에게 기병대를 딸려 보내 그들을 포살(捕殺)하거나 목숨만은 살린 채 잡아 오도록 한 것이다.
“내성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포연이 자욱한 중성으로 진입하니 이미 내성으로 들어가는 문인 정해문은 열려 있었다. 고상온의 생각대로 피난길에 일찌감치 오른 것이 틀림없었다.
“내성으로 진격해 적당을 빠짐없이 색출토록 하라. 그리고 기병 둘은 나를 따라 내성에서 나가는 문으로 향해 적군의 퇴로를 추적하여 안 정위와 합류할 수 있도록 한다!”
“예!”
명령을 받은 기병들이 따라붙자 고상온은 말을 달려 칠성문 방향으로 향했다.
지척의 오른쪽에 보이는 저택이 불타고 있는 것이 아마 이방원이 기거하던 거처였을 것이다. 저쪽으로도 이미 군사들이 가고 있을 터이나 아마 수색해 봐야 이미 도망치고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칠성문 나가는 길을 이 잡듯이 뒤지며 성문 밖까지 나섰지만 막상 도망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성문을 나서자마자 안정재 정위와 마주쳤을 뿐이었다.
“참장 어르신!”
안정재도 놀란 듯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역도 방원은 못 보았느냐?”
“방원은커녕 그 새끼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저희 예상과는 다르게 다른 퇴로를 택한 모양입니다.”
“남쪽으로는 우리 군이 쥐 잡듯이 들쑤시고 있고, 서로는 내가 너를 매복시켜 놓았으며 북쪽은 그 산세가 협소하고 나갈 곳도 없는데, 그럼 대동강이라도 타고 올라갔단 말인가?”
고상온은 막상 말해 놓고 보니 성벽이 공략당하는 아수라장을 틈타 공격군이 전개해 있지 않은 대동강에 주선(舟船)을 띄워 상류로 올라가 숨어 버린다면 이렇게 당하고 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에 매복병을 미리 두지 않은 것이 생각이 짧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병사 하나가 말을 허겁지겁 달려와 부복하고서는 말했다.
“모란봉 아래 전금문에서 멀리 배를 타고 달아나는 한 떼의 무리를 발견하였나이다. 이미 그 거리가 멀어져 강중(江中)으로 사라지니 쫓아갈 수 없어 우선 보고를 아뢰러 왔나이다.”
“두어라. 지금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파발병은 당장 안주성의 조사의 장군에게 연락하여 북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혹여나 이방원 일가와 그가 이끄는 간신들이 도망치는 것을 발견하거든 즉시 압송하여 달라 전하라.”
“예!”
이내 고상온의 말을 받들고 파발이 사라지자, 안정재 정위는 허탈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귀한 전공을 세울 참이었는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우선은 평양성만을 무너뜨린 것만 해도 공적일세. 고구려가 망국(亡國)할 때 이래로 무너진 적 없는 성을 우리가 무너뜨린 것이니 말이네. 거란군도 몽골군도 쉬이 무너뜨리지 못한 성이야.”
“대포의 위력이 대단하나이다.”
“그렇네. 앞으로 칼과 활의 시대는 점점 저물어 갈 것이네. 오늘 보총과 대포의 위력을 똑똑히 보았으니 앞으로 적들도 이것을 우습게 여기지 않을 테지.”
평양 을밀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좌우로 펼쳐진 넓은 들 사이로 성곽을 감싸는 대동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고, 멀리서 피어오르는 구름은 평원 저편에서 뭉쳐서 흘러 올라오니 언덕 위로 퍼져 나가는 겨울바람이 그 구름을 끌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아래의 성은 포화(砲火) 자욱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고 죽은 자들의 원혼은 달랠 길 없으니 고상온은 문득 전중의 감상이 다 부질없는 일이라 느끼고 있었다.
1405년 계동(季冬)
조선국 평안도 안주목(安州牧).
서북면도절제사 이빈과 안주도절제사 이천우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의 주재지인 안주목을 방비하기에는 걸맞지 않은 고작 5천의 군세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방원이 패퇴해 서북면으로 쫓겨 올라온 다음에는 가급적 가능한 병력은 평양부로 모았던 것이었다.
이빈과 이천우는 처음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을 때부터 혹여 서북면으로 넘어와 휘젓고 다닐지 모를 조사의군을 막기 위해 안주로 임면되어 보내졌었다.
그러나 생각 외로 탐라에서 거병한 김세훈이 파죽지세로 밀고오자 조사의에게 쫓겨 강화도로 몽진한 이방원을 군세를 끌고 직접 평양으로 모셔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는 혹여 서북면으로 넘어올지도 모르는 조사의를 방비하기 위해 안주에 있는 병사를 쪼개 덕천과 석주(石州, 지금의 강계)로 보냈다.
하나 갑작스레 명군이 도우러 온다더니 김세훈군이 평양을 두드리고 그 사이를 틈타 조사의가 서북면으로 넘어와 덕천을 쉽게 격파하고 안주로 질타하니, 청천강 하구에 있는 안주목까지 덕천을 뚫고 채 3일이 지나지 않아 육박해 2만 군세로 시위하니, 결국 이빈과 이천우는 백기를 내걸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사의는 기세등등하게 아들 조홍과 강현, 변현 등을 이끌고 안주목 읍성으로 들어와 병마 절도사의 군영을 장악하고 2만 군세를 주둔시킨 다음, 이빈과 이천우를 포승으로 묶어다가 꿇어앉히고서는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천우. 그대 나와는 악연이 깊어 오늘 또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소.”
이천우로서는 정말이지 눈앞이 깜깜한 일이었다. 처음 조사의가 난군을 일으켰을 때 처음으로 진압하러 갔던 그는 패퇴하여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도성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이방원은 크게 질책하지 않고 안주도절제사(都節制使)를 맡겨 병력을 내어 주어 여태까지 잘 버텨 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괴사인지 김세훈은 평양을 두드리고 조사의는 천리를 답파해 안주로 들어와 자신을 사로잡고 이렇게 겁박하니 그저 한숨만 나올 따름이었다.
“내가 맡은 바가 부족하여 이렇게 또 패하고 말았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수급을 탐하거든 얼른 베고, 관용을 베풀려거든 이 포박부터 풀어 주시오.”
조사의는 그저 코웃음만 치고서는 옆에 똑같이 포박되어 꿇어 앉아 있는 이빈을 바라보았다.
이천우보다는 윗줄의 사람이라 그 대우가 좀 더 좋다는 것이 병졸들이 포승줄을 꽁꽁 부여잡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라 부쩍 힘이 든 듯 표정에서는 지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이 공은 오랜만이외다. 어찌하여 폐주(廢主)를 따라 종군하여 이런 험한 꼴을 보시오.”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 조사의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그저 비꼬는 말만 던졌다.
이빈은 허실한 웃음만 짓고서는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나, 내 이미 전조에서 벼슬하다 지금의 왕가를 섬기게 되었으니 섬기는 주군을 바꾼다 하여도 더 이상 누가 될 것이 무엇 있겠소만, 나는 내가 안주로 명을 받아 올 때의 한성에 계신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아 왔으므로 그 명을 지키는 수밖에 없소이다. 따로 내게 명한 이 없으니 그것을 따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이까. 이제 목숨을 다 해 가는 나이에 내 스스로 발 벗고 나서 새 주군을 찾기라도 하리이까.”
조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빈이라는 노장은 기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전날에 동북면부원수로서 요동 정벌에 원정군으로 출전하였다가 태상왕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을 단행하자 이에 가담하여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조하고 중추원판사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많은 개국공신들이 그렇듯 기개하나로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조사의는 이빈을 존중해 더 이상 지저분하게 조롱하지 않기로 하고서는 이빈과 이천우의 포박을 풀어 주라 이르고서는 술과 음식을 조금 내어다가 함께 들기를 청했다.
이미 패장인지라 기개 좋게 목숨을 버릴 수도 있으나, 한때는 함께 조정에서 태상왕을 섬기며 벼슬하던 사이인지라 더 이상 혈기를 돋우지 않고 식사를 들었다.
“두 공에게는 안타까운 이야기이오만, 내 오늘 받은 전갈에 따르면 이미 평양부는 섭정공의 손에 함락되어 폐주(廢主)는 가솔들과 하륜 등 신하를 이끌고 도주했다 하오. 명나라 군대가 이제 압록강에 육박해 건너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니, 아마 그곳에 있는 양녕군과 합류하려 도망친 것이 아니겠소이까. 나는 이미 태상왕 전하를 개경으로 모시고 그 몸을 한성으로 의탁하여 폐주를 척결하는 일에 앞장서기로 하였소. 이렇게 된 바, 이제 평양부에서 부탁하는 전갈이 오기를 폐주의 퇴로를 수색하여 명군과 합류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오. 두 공은 과연 폐주가 어디로 갔을 것 같소이까?”
이빈과 이천우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긴 하였으나 한때 모셨던 임금을 팔아 목숨을 도모하기는 도무지 염치가 없었고, 실제로 어디로 갔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조사의는 그런 둘을 보더니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도 기대를 하고 말한 것은 아니올시다. 허허!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폐주는 이제 다시 복위할 길이 요원하다는 말씀이오. 십만의 명군이 들어온다고 하나, 전쟁의 승패를 떠나 폐주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소이다. 혹여 명의 군대가 이 조선을 샅샅이 점령한다고 한들, 그들이 돌아가면 폐주는 무슨 면목으로 나라를 다스리겠소? 귀공들도 그곳에서 벼슬을 해 봐야 무엇이 남겠소이까? 태상왕을 비롯한 종친의 일가는 폐주의 식솔을 제외하고는 전부 개성과 한성에서 익안대원공의 자제 되시는 새 상감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 이런 마당에 폐주를 받들어 봐야 남는 명분이 없소. 내가 귀공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연유는 구원(舊怨)을 잊고 조정에 함께 출사하여 정사를 일신하는 일을 새롭게 떠받치자는 것이오. 주상 전하와 섭정공께옵서도 그간의 일의 연유는 묻지 말고 새로이 출사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 연력(年歷)을 묻지 말고 받아들이라 하셨으니, 나 또한 그렇게 되어 오명을 씻고 공후(公侯)의 자리에 올라 지금 여기 있는 것이외다. 어떻소이까? 새롭게 몸을 씻어 출사하는 것 또한 나라를 위한 일이라 여기면 말이오?”
난을 일으킨 이후로 목석같이 뻣뻣했던 조사의도 변술이 늘어나 말이 청산유수였다.
이빈과 이천우 또한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음이 혹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방원은 암군(暗君)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땅 한 조각 남지 않은 그야말로 폐주(廢主) 신세에 다름 아니었다.
정당히 집권한 군주도 아니고, 그 스스로 모략과 반정으로 일어섰다가 똑같이 당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도망만 치고 있으니 조정에서 섬겼던 임금과 신하 이상의 의리가 없는 그들로서야 새로운 임금이 들어서서 그 과오를 묻지 않는다 하면 섬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외다.”
“정통(正統)을 받은 임금이 계시는데 어찌 폐주를 모시겠소. 나 또한 조정에 출사하겠소.”
처음에는 일이 그른듯하여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으름장 놓던 이들이었으나, 목숨을 구명할 뿐만 아니라 다시 벼슬을 받아 조정에 출사할 수 있다는 말에 더 이상 이방원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이성계와 함께 건국을 한 공신(功臣)들이기에 태상왕의 적법한 가손(家孫)이 왕위를 이으면 이제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우선은 3백의 병사와 군마를 조금 내어 드릴 테니 두 분은 개성으로 가서 송거신 대장을 만나시오. 비변사의 군막(軍幕)이 개성에 설치되었으니 가면 공들에게 알맞은 일을 맡겨 줄게요. 어차피 공들을 처결하려거든 내 손으로 이 자리에서 했을 터이니 추호 딴 맘을 먹지 말고 바로 개성으로 가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새롭게 공적을 쌓아 볼 궁리나 하시오.”
이렇게 이빈과 이천우, 두 장수를 개성의 군영으로 보내 놓고 나서 조사의는 이방원을 사로잡을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굳이 섭정공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이방원만큼은 자기 손으로 잡아서 직접 국문(鞠問)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방원에게 처참히 굴욕을 당해 전라도에서 노잡이로 부역하고 있을 때는 목숨을 끊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차마 그 모욕을 잊지 못해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그것을 돌려줄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 조사의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조사의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방원을 친히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서는 아들 조홍과 측근 강현, 변현의 두 사람을 불러들여서 지시했다.
“분명히 이 안주와 덕천 사이 어딘가의 임도(林道)를 따라 북쪽으로 잠행(潛行)하고 있을 것이오. 폐주 방원이 놈은 내가 병력을 움직여 이곳 안주를 손에 넣은 사실을 모르니 우선 이곳으로 피해 올 가능성이 높소이다. 그러니 나는 이곳 안주와 근방 백여 리를 맡아서 이놈들이 올 만한 길을 샅샅이 지키고 있겠소. 홍이는 개주(价州, 지금의 개천) 일대를 막아서고, 강 공과 변 공, 두 공은 덕천과 대흥 일대를 막아 감히 어느 쪽으로도 넘어가지 못하도록 샅샅이 수색하여 색출하여 주시오.”
이렇게 조사의가 끌고 온 2만의 병력이 동원되어 이 잡듯이 평안도 일대의 관도와 임도, 모든 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동강을 타고 올라가 사라졌다는 이방원 일당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