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제8장 승패결착(勝敗結着) (9/82)

제8장 승패결착(勝敗結着)

「영락 4년 봄, 정월 정미(丁未)일에 추군(酋君) 티무르가 서역에서 군세를 이끌고 섬서를 내습했다. 조선에 나가 있던 군세를 회군하도록 하였다. 5월 신묘일 초하루에 적군을 물리쳤다. 갑오일에…(후략)…….

○四年春正月丁未,西域酋君帖木兒來襲陝西.命回軍東正軍於朝鮮,五月辛卯朔,槌擊賊勢.甲午(後略).」

―명사(明史) 본기(本紀) 중

제6권 본기 제6, 영락 4년 조(條)

1406년 맹하(孟夏)

조선국 한성부.

명군이 압록강을 넘어 회군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넘게 지났다.

이주에 진을 치고 있던 1만의 명군은 영길도를 거쳐 양녕의 군세와 합세해 회군한 잔당에게 황명을 전하여 회군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주까지 올라가 있던 조선군은 이주를 치기 위해 준비를 기해 진군을 시작하였으나, 이주에 도달해 있을 때는 이미 명군의 군세가 이미 압록강을 넘어 요동 접경으로 들어간 뒤였다.

폐주 이방원과 그의 식솔, 가신들 또한 그 행렬을 따라 명나라로 넘어갔으니, 조선군은 우선 더 이상 쫓지 않기로 하고 전란으로 인한 피해를 수습하고 군세를 정비하기로 결정했다.

조선군 또한 이 전란으로 인해 피해가 많아, 우선 전쟁에서 선봉에 섰던 제1진위대와 조사의군의 피해가 컸고, 뒤늦게 투입된 시위대 또한 두 번에 걸친 합전(合戰)으로 인하여 절반에 가까운 병력 손실을 입었다.

어렵게 길러낸 군대를 유용하게 사용하였으나 이미 잃은 목숨은 되돌릴 수가 없으니 가히 전승(戰勝)이 즐겁지만은 않은 노릇이오, 그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매듭지어져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때서야 조선은 명군이 회군한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요동을 왕래하는 여진족을 통해 그 연유를 들어 조정에서 공론(公論)에 부쳐졌다.

“서역을 일통(一統)한 수장 되는 자가 수십만의 대군을 몰아 명나라에 쳐들어왔다고 하니, 혹여 이번에 양영을 몰아냈다고 하더라도 재차 병력을 모아 들어올 수도 있을 후환을 불식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천재일우(千載一遇)나 마찬가지 아니겠소이까.”

충청도 관찰사에서 우정승(右政丞)으로 직품이 올라 비변사에서 회의에 참가한 이서(李舒)가 말했다.

이제는 흰 수염이 성성한 늙은 나이로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에 소극적으로 나왔던 인물이었으나 전쟁이 일단락된 뒤로 정승의 품계에 올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여기서 진격을 멈출 것이 아니라 이 틈을 타서 병력을 개진시켜 압록강 너머의 진채를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주둔시켜 요동을 시야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이번의 전쟁을 일선에서 지휘했던 송거신답게 기세를 틈타 확전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명군이 조선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자 이내 조정은 이서를 중심으로 한 결전론(決戰論)자들과 송거신을 중심으로 한 확전론(擴戰論)자들로 나뉘어 이렇게 며칠 밤낮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세훈은 어느 쪽에도 의견을 기울이지 않고 우선은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한 판단이 서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무르가 다행히 수명이 남아 명군을 공격해 주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운이었다. 물론 이 대세를 잘 활용한다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나 자칫하다가는 힘에 부치는 일을 만들어 수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세훈은 곰곰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얼마만큼의 손익이 나오느냐를 따져 보았지만, 모두 생각일 뿐 정확히 이렇게 되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세훈이 생각하기에 명군이 전력을 집중해 본격적으로 티무르를 막아서면 티무르는 더 이상 명나라를 휘젓고 다닐 수 없을 것이었다.

일종의 전격전(電擊戰)으로 서안까지 몰아쳤다고는 하나, 본국은 멀고 병졸들은 지쳐 있을 것이다. 남의 안마당에서 싸우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명군이 결국 큰 손실을 입고 조선에서 돌아갔듯이 티무르 또한 명군에게 패하고 결국엔 물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그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 것이며 또 티무르가 명나라에 얼마만큼의 손실을 입힐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명나라의 손실이 커진다면 명나라를 뒤에서 괴롭혀 조금 더 이득을 취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나, 명군이 생각보다 일찍 티무르를 패퇴시킨다면 조선군 또한 병력이나 무기의 손실을 아직 벌충하지 못한 상태에서 티무르의 20만 대군에 맞서는 명의 대군을 고스란히 맞아서 싸워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런 문제가 걸리고 나니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북쪽으로 들어가 봐야 명나라에서 여진족 사이에 듬성듬성 설치한 건주위 같은 것만이 있을 뿐, 이것을 친다 해도 실질적으로 여진족들의 땅인 만주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가는 길의 몇 개의 위(衛)를 정리하고 목표가 될 만한 곳은 요동인데, 이곳은 영락제의 근거지였던 연(燕) 땅이 지척으로 자칫하다가는 큰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

세훈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결단을 내리고 휘하의 관료와 장수들을 모아 생각을 전달했다.

“지금 조정이 그만 화평을 하고 전쟁을 마무리할 것과 승기를 잡았으니 더욱 진격하자는 두 부류로 나뉘어 그 적합을 놓고 말이 많은 줄 아외다.”

세훈은 자신에게 모아진 시선들이 부담스러웠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목소리에 힘을 주고 최대한의 강단 있는 자세로 임했다.

“우선 더 이상은 전선을 먼 곳까지 확대시키지 않고 일단의 병력을 움직여 명이 국계(國界) 가까이 여진 땅에 설치해 놓은 건주위를 쳐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마전군에서 전조의 제사를 받들고 있는 왕조의 혈통을 이유로 들어 원나라 봉작(封爵)인 심왕(瀋王)의 위를 다시 돌려 우리 조선에서 작봉(爵封)할 수 있게 하라 주장을 하겠소.”

“심왕의 자리는 원(元)조가 전조 고려의 왕실에 봉작하여 준 것으로, 이미 그 혈통이 끊기고 철폐된 지 오래되어 명(明)에서는 그것을 습속하여 아조(我朝)에 들어줄 이유가 없으며, 또 설사 그것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왕조가 받는 것은 명분은 있으나 전조의 왕족을 왕(王)에 봉하게 되면 그 위계가 지금 아조의 금상과 같게 됩니다. 황제가 아니고서는 왕을 봉할 수도 없고 심왕의 자리를 받아 오더라도 왕조에게 주면 이것은 역란(逆亂)을 자초하는 일이니 한 번 더 숙고하십시오.”

그간 말을 아끼고 있던 예조전서 이직이었다.

세훈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으나 심왕의 자리를 내어 놓으라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도 당장 요동을 어떻게 내어 받아 뭘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오. 다만 들어주기 힘든 요구를 전면에 내세워서 압박하면 건주위에 대한 문제는 명에서 어렵지 않게 들어주게 될 것이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것으로, 비록 건주위가 명에서 여진족의 방계 족장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도위 삼아 병력을 안치시킨 지 얼마 안 되는 그저 병참(兵站)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 이것만을 요구하게 되면 분명히 줄이고 깎아 더 들어주지 않으려 할 것이오. 다만 전란 중의 위급한 상황에서 심왕의 자리를 내어 놓으라 하면 건주위 정도는 쉽게 내어 줄 수 있을 터이니, 우선은 그렇게 요구만 해두도록 하고 건주위로만 군사를 내어 그곳을 점령하도록 합시다.”

세훈이 내놓은 것은 일종의 타협책이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나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우선은 이것이 그나마 상책(上策)이라는 것에 수긍한 것이다.

세훈이 신료들을 대동하고 내전으로 국왕 이석근을 찾아가 전결을 내어 줄 것을 요청하니, 이 힘없는 국왕은 그저 어떤 일인지 듣고서는 바로 옥새를 가져다가 찍어 주니, 원래 정권이 바뀌며 왕위에 옹립되어 전란 중에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니, 그것이 끝난 뒤로는 더욱 위신이 서지 않는 탓이었다.

“아조의 위신을 드높이는 일이니 과인은 그저 반대치 않겠소. 다만 천조와는 일이 이렇게 되었으나 더 이상 서로 대적하지 않고 이웃으로서 사사로이 지냈으면 좋겠소이다.”

뭔가 왕으로서 위신을 세워 보려 하는 이야기였으나 다들 형식상 들어주고 있을 뿐, 진정으로 위엄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전결을 받고 나자 이미 이주로 진격해 있던 제1진위대와 시위대를 그간의 전투로 각각 손실이 있었기에 일시적으로 하나의 부대로 편제하여 이것을 양은계에게 맡긴 다음 건주위를 요격하도록 하였다.

건주위는 명목상으로는 명의 지방 군사편제인 위(衛)가 설치되어 요동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 설치된 지는 이제 고작 3년째였고 그나마도 이사성(李思誠)이라는 명나라 이름을 받은 후리가이[胡里改路]씨의 부족장 아하추[阿哈出]가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의 벼슬을 받아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직 건주좌위와 건주우위로 분할되어 기존의 건주위와 함께 건주삼위가 성립되기 전이라 여진족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이 일대의 여진족마저도 온전히 명나라, 혹은 아하추의 권세 아래에 들어왔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실질적인 목표는 혹여 조선을 공격하기 좋은 배후지로 성장할 수 있는 이 건주위를 명나라에게서 떼어 놓고, 가급적이면 여진족 족장들을 구슬려 조선의 벼슬을 내린 다음, 이 건주위의 기구를 흡수하여 후방의 여진족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기능만을 취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서북면과 동북면에도 인구가 모자라고 개척이 완전히 되지 않아 아직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계(水系)까지도 진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북쪽으로 진군을 계속하여 여진족과 싸워 가며 영토를 넓히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설사 여진족을 몰아낸들 그곳에 이주시킬 사람도 없는 판국이었다.

우선은 일종의 교역 동맹 같은 관계를 수립시켜 여진족 족장들에게는 조선의 벼슬을 주어 추켜세우고, 군권은 최대한 견제하여 조선의 북방을 노리지 못하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명과 조선 사이의 방어 장치처럼 기능하게 하면 일단은 충분하다고 세훈은 생각했다.

이렇게 건주위로 진군한 양은계는 음력 3월 17일에 아하추로부터 항복을 받아 조선에 신속(臣屬)하기로 확답을 받고, 조정에 상계하여 아하추에게 건주현남(建州縣男) 건주병마도절제사(建州兵馬都節制使)의 자리를 내리고, 기존의 건주위를 폐지한 다음 병력 5천을 주둔시켜 건주파견대(建州派遣隊)를 편성하고, 그 대장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군공을 세운 고상온의 부관 안정재(安定在) 정위를 부령(副領)으로 특진시켜 이곳에 부임시키고 아하추를 견제하는 동시에 조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통제하는 임무까지 맡겼다.

일이 마무리되자 남경 응천부로 조선의 요구 사항을 담은 장계를 보내니, 대충 건주위를 폐하였으니 앞으로 여진족의 문제에 대하여 관여치 말 것과 명목상 심왕의 자리를 내어 놓을 것, 또한 가급적이면 지금의 왕 이석근을 조선의 왕으로 인정하는 칙서(勅書)를 내려 줄 것 그리고 정기적인 사절단에서 보내는 물품을 제외한 공납(貢納) 및 공녀(貢女)를 앞으로 폐지할 것, 폐주 이방원을 돌려보낼 것 등을 요구했다.

이중에서 세훈이 중점적으로 관심을 둔 문제는 건주위의 문제로서, 나머지는 어찌 되어도 크게 문제가 없는 요식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1405년

명(明) 영락(永樂) 4년 맹하(孟夏)

대명국(大明國) 하남성(河南省) 남양당왕부(南陽唐王府).

남양(南陽)이라는 고을은 낙양의 남쪽 머지 않은 곳에 있는 고을로 백하(白河)의 서안에 닿아 있는 유서 깊은 땅이다.

서한(西漢) 황족의 후예인 광무제, 당명(當名) 유수(劉秀)가 이곳에서 거병하여 왕망의 신나라를 거꾸러뜨리고 동한(東漢)을 건국하였다.

지금의 남양은 명태조의 스물세 번째 아들이자 지금의 영락제와는 배다른 형제가 되는 당정왕(唐定王) 주경(朱經)의 봉지로, 이른바 당왕부(唐王府)라 불리고 있었다.

당정왕 주경은 이곳에 기반을 확실히 다지고자 성곽을 보수하고 약간의 병력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수가 물경 2만에 달했다.

당왕 주경은 이제 겨우 스물하나의 젊은 나이였는데, 어린 나이에 당시 연왕이었던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한 이른바 정란(靖亂)의 변을 겪은지라 황족의 일원으로서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계(利計)의 밝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성정이 간사하게 더렵혀지지는 않아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날개를 꺾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이였다.

그러나 숨겨진 날개는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 주경이 남양의 당왕부의 터를 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에서 티무르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이내 섬서의 고을들을 파죽지세로 돌파하여 하남의 경계에 이르니, 바로 그곳의 접경에 있는 고을이 낙양(洛陽)이었으며, 그 낙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바로 이 남양이었다.

당왕은 이들이 서안을 공격할 때부터 이 사실을 알았는데, 조정에서 황제로부터 남양을 사수하라는 칙령이 내려오자 하남승선포정사사의 관료들과 도지휘사를 불러들여 군적을 조사하여 징병을 엄밀히 하고, 지금 각 위(衛)에 주둔한 경내의 병력을 최대한 모아 남양으로 모으게 하니 그 병력이 남경의 조정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12만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왕 자신이 군적의 문란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리 이 문제를 파악해서 조치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무르의 13만 정예는 여러 나라를 치며 단련된 정예요, 남양에 모인 12만은 태반이 훈련받지 못한 졸개라. 당왕은 우선 조정에서 각성의 군사를 모아 지원군을 보내 줄 때까지 버티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하남 각 고을의 관리들의 도움을 얻어 병사들에게 댈 식량을 모으고, 적이 육박하기 전에 화약을 비축하고, 포를 들여놓고, 병력의 조련(調練)을 시작했다.

다행히 서안을 함락시키고 파괴하느라 발을 멈추었던 티무르군 덕분에 약간의 시간이나마 벌 수 있었다.

그렇게 남양에서 티무르군에 맞설 군사의 조련이 이루어지는 사이 응천부의 조정도 한껏 시끄러웠는데, 조선에서 돌아오고 있는 병력이 그 손실이 막심하고 피로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티무르군을 막아서는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남양에서 아우 당왕이 군세를 힘껏 모아 적을 일선에서 방비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뚫리게 되면 개봉(開封)이 지척이며, 그 뒤로는 모아진 군사가 없다. 대명(大明)의 군사가 백만에 이른다고 하나, 이는 죄 각 고을과 변방에 흩어져 주둔한 산병(散兵)들이오, 적의 밀집된 군세를 막아설 대군을 빠른 시일 내에 모으기가 난이(難易)하다.”

영락제의 말에 조정 신료들은 침음성을 흘렸다.

명의 군제는 넓은 땅을 수위(守衛)하기 위해서 크게 13개의 성과 요동, 대령(大寧), 만전(萬全)까지 총 16개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두었고, 그 책임을 정2품의 도지휘사(都指揮使)에게 맡겨 두는 일종의 지방군 체제였다.

적게는 수만에서 많게는 십만까지의 병력을 각기 지니고 있으나, 이 병력 또한 5천에서 6천 규모로 수백의 위(衛)로 나뉘어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에게 통괄되니 변방의 병력은 함부로 빼낼 수 없고, 가능한 병력을 차출하여 한 군데에 모아서 동원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나라의 병력은 강대하나 쉬이 끌어다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밀집된 티무르의 대군이 섬서를 유린한 것도 섬서의 병력만으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조선의 병력을 회군시키려 한 것도 이미 차출한 병력이기에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판단한 터였다.

언제까지 진행될지 모를 티무르의 진격을 막아내려면 이 병력을 동원할 재계를 정확히 짜내야 했다.

일전 섬서에서 티무르군이 파죽지세로 진군한 것을 방비하지 못했다 하여 질책당하고서는 한동안 소침해 있던 병부상서 금충(金忠)이 부복하고 황제 앞에 엎드려 나섰다.

“조선에서 귀환하는 5만의 병력을 도읍으로 들이지 마시고 바로 개봉부(開封府)로 보내어 하남일대를 단단히 하시어 혹여라도 남양의 일이 좋지 않거든 바로 지원케 하시고, 적군의 군세가 이미 호광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남으로 들어갔으니 호광은 변경에 접경하지 않은 내륙의 행성(行省)이나이다. 이곳의 병력을 가능한 모아 남양으로 들어가는 적의 군세를 양양으로부터 나와 뒤로 요격하게 하시면 한쪽에서는 성을 끼고 농성하며, 반대쪽에서는 뒤를 요격하고, 불상시에는 다시 5만의 병력을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 이것이 제가 내어 놓을 계책의 첫째요. 둘째는 바로 이 계책이 실패할 것을 대비하여 산동, 강서, 직례의 군사들을 모아 직례(直隷)로 들어오는 대군이 행군할 길목을 막아 지키게 하면 이것을 뚫지 못할 것이오. 혹여 군세를 살려서 직례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직례에 주둔한 군력이 20만이라 결국에는 승리하게 될 것이니, 처음으로 막으면 가장 상책이오, 두 번째로 막게 되면 중책이오, 마지막으로 오면 이기기는 하겠으나 패책이나이다. 폐하께서 이 계책을 들어서 사용하시면 당왕을 지원하여 처음의 수로 막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 소신은 그리하시길 주청 드리나이다.”

티무르군이 섬서를 들쑤셔 놓은 뒤로 잠을 못 이루고 심계(深計)를 짰을 것이다. 영락제는 병부상서의 제안을 들어다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네 계책이 옳도다. 이대로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여 호광과 섬서의 군사가 모아서 남양 일대로 보내지고, 조선으로 파병되었던 양영의 군대도 칙명을 받아 옛 연왕부(燕王府)에서부터 주둔해 있던 연군(燕軍) 2만을 지원받아 7만의 병력을 이끌고 개봉으로 들어가 주둔하니, 이때 티무르군 또한 남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지척에 있었다.

20만 내외의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로 들어와 아직까지 두 번의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13만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티무르군이었으나, 오랜 행군에 지치고 보급이 불안정한 상황이라 안에서부터 곪아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패하지 않고 쉽게 달려온지라 그 기세만큼은 등등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 막사에서 지시만 내리는 티무르를 대신하여 그 아들 샤로흐가 전면에서 군세를 지휘해 남양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샤로흐 자신은 티무르의 넷째 아들로 막내였으나 그 형들이 이미 모두 세상을 떠 조카들과 후일 티무르의 유산을 놓고 경쟁을 해야 할 사이였다.

그렇기에 이 전쟁에서 군공(軍功)을 세워 놓으면 그런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샤로흐는 지치지 않고 군세를 독려해 가며 행군을 시켰는데, 원래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던 그도 두 번의 승전을 거치고 나자 약간의 호승심이 일어 파죽지세로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남으로 들어서 남양성 앞에 티무르군이 진을 치니, 이것이 음력 3월 스물엿새의 일이었다.

1월에 서안을 함락시켰으니 남양까지 진격하는 것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 셈이었는데, 후방에서 보급을 취하고 섬서 일대를 약취(掠取)하며 분산되어 있던 명군의 잔병들을 소탕하고 군세를 정비하고서 들어온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방책에 불과해 여전히 보급 부족과 병력의 피로는 갈수록 쌓여 가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 사이에 당왕은 하남의 12만 병력의 조련을 마치고 남양성을 단단히 방비했으며, 호광의 병력도 양양성을 나와 멀리서부터 티무르군의 동태를 주찰(周察)하며 때가 되면 요격할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고, 티무르군이 남양성에 진을 친 전날에는 멀리서부터 명을 받들어 빠르게 귀환한 군세에 연군의 병력을 더한 동정장군 양양이 이끄는 7만의 군병이 개봉부에 입성하니, 티무르가 비록 다소의 손실을 입고서도 아직 13만의 병력이 무너지지 않고 있다 하나, 이것을 사방으로 막아선 적들이 이미 30만에 가까운 숫자였다.

티무르와 그 아들 샤로흐는 이것을 모르고 담주와 서안에서 제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왕에게 항복하고 개종할 것을 요구하나 당왕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남양성의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당왕은 수성(守城)에 능해 열흘 밤낮을 버티며 적군의 병세를 소진시켜 갔다. 이때에 양양에서 나온 호광의 13만여 병력이 티무르군이 공성에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 뒤에서부터 요격을 해 들어오니, 이것을 지휘하는 이가 호광 도지휘사 반여신(潘勵晨)이었다.

반여신이 병력을 휘몰아치듯 지휘해서 티무르의 군세를 유린하니 샤로흐와 그 휘하의 장수들은 전부 티무르의 군막을 호위하며 공성을 하러 앞으로 나가 있는지라, 후방에는 죽은 티무르의 맏이 자한기르의 아들이자 적손(嫡孫)인 피르 무함마드가 이끄는 군세가 약간은 해이해진 대형을 이루며 있었다.

“적군이 산개(散開)해 있으니 들이닥치면 부서질 것이다. 포는 멀리서 엄호하도록 하고, 기병대는 돌격하여 적군의 후위를 흩어 놓는다!”

반여신의 명령이 내려지자 13만 병력 중 5만의 기병이 피르 무함마드의 군영을 흩어 놓으며 산산이 부숴 놓았다.

이런 상황이 되니 티무르의 군세는 앞으로는 성벽이 막고 뒤로는 반여신의 군대가 막고 있는지라 한층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티무르에게는 10만이 넘는 병력이 남아 있었고, 티무르가 직접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군세를 지휘하여 수습하여 샤로흐와 바미야르가 뚫고 나가니, 병력의 일부를 버려서 적군을 차단하고 다시 대치하기를 거듭하며 남양성 30리 밖으로 물러 나갔다.

티무르의 군대는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고, 다시 남양성을 공격하러 들어갈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적군은 병력을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이나 이곳에서부터 사마르칸트는 구원을 요청하고 응답을 받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이런 국면에 놓였으나 여전히 티무르는 남쪽의 남양성의 당왕과 호광 도지휘사 반여신의 병력을 견제하며 틈을 내어 주지 않은 채 대치를 이어 가고 있었는데, 티무르군에는 아직도 십여 만 이상의 병력이 남아 있는지라, 큰 피해를 감수해 가면서 당왕과 반여신도 이것을 도발하기는 무리가 따르는 상황이었다.

이때에 당왕이 개봉에 은밀히 서찰을 보내 양영으로 하여금 7만 병력을 이끌고 다시 티무르군을 요격하게 하니, 당왕과 반여신만을 신경 쓰고 있던 티무르군은 다시 한 번 예기치 않은 습격에 전투를 치르게 되고, 여기에 반여신의 병력이 합세를 하니 전투가 길어지자, 병력면에서 불리한 티무르는 다시 한 번 퇴각을 시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10만의 병력을 겨우 수습하여 서안부 방향으로 다시 군세를 물려 패퇴하니, 하남으로 들어설 때는 기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들어갔으나, 다시 섬서로 도망쳐 나올 때는 겨우 10만의 군세를 살려 나왔으니 이것 또한 적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중국을 도모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병력이었다.

이렇게 서안으로 물러난 티무르군은 100리 밖에서 더 이상 추격해 들어오지 않고 있는 반여신과 양영의 군대와 대치한 채 잠시 전투를 멈추고 영락제에게 교섭을 요청하는 사절을 무자파르 이 호드빈에게 이끌려 응천부로 보냈다.

이 사절을 응천부로 안내하는 것은 양영의 휘하에 있으면서 조선 원정 때에는 이주성에 주둔해 있었던 지휘첨사(指揮僉事) 주문(周文)이 맡았고, 여기에는 조선에서부터 따라 들어와 양영의 아래에서 전투를 도왔던 양녕대군 이제 또한 함께했다.

이제는 본진에서 떨어져 나온 티무르의 기병대를 맞아 직접 100여 기의 기병을 이끌고 회전(會戰)하기도 했는데, 큰 손실을 입히지 않고 적의 300여 기병을 격파해 적군의 퇴로를 일시 차단하는 전공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주문과 양녕을 대동한 티무르의 사절이 응천부에 도착한 것이 음력 4월 보름의 일이니, 같은 날 조선에서 세훈이 정사를 좌정승 이서(李舒)로 삼고 부사를 고봉지로 하여 보낸 사절단 또한 응천부에 들어섰다.

1406년

명(明) 영락(永樂) 4년 중하(仲夏)

대명국(大明國) 직례(直隷) 응천부(應天府).

조선과 티무르의 사절들이 응천부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보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영락제는 이들을 접견해 주지 않고 있다가 달이 바뀌고 나서야 알현을 허락했는데, 이들을 대전에 들여놓고서도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신들을 쏘아보고서는 예부상서 이지강(李至剛)에게 화전(和戰)을 논하라고만 이르고서는 내전으로 사라졌다.

영락제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사신들은 크게 개의치 않고 이지강과 협의를 시작했는데, 어차피 전쟁을 더 하기 힘든 세 나라 모두 마찬가지였기에, 지금 상황에서는 황제의 냉대보다도 이지강과의 협상에서 무엇을 얻어 갈 것인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몸이 다는 것은 티무르의 명을 받들어 사절로 온 무자파르였는데, 병력만 잃은 채 남의 땅에서 철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의 사절들은 조바심을 내지는 않고 있었는데, 어차피 얻어 가려고 목적한 것은 제한적이었고, 협상을 통해서 더 얻어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티무르군을 물린 명나라가 다시 군세를 돌려 조선으로 재차 들어오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지강과 먼저 회동을 가진 것은 무자파르였다.

몸이 다는 것은 이지강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관련된 일이야 지금은 어느 정도 결착이 난 상태로 협상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티무르군은 여전히 수만의 군세를 거느리고 초토화시킨 섬서에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도 완전 격퇴를 각오하면 병력의 손실을 입더라도 이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있겠지만 거듭된 전쟁으로 명나라도 피로가 상당히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국세(國勢)가 압도적이라고는 하나 양면에서 적을 맞서 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영락제의 연왕 시절 근거지였던 북평(北平)으로 도읍을 옮기려 계획하여 수많은 예산이 들어갈 것이 자명하고, 정화의 보선단(寶船團)에 들어간 돈도 만만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아직 회수가 되지 않은 것으로 국가 재정에 만만치 않은 부담을 주고 있었기에 더 이상 무리한다면 승리는 거둘 수 있으나 그만큼의 상처가 남을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때문에 이지강 또한 티무르의 사절과 하는 협상을 우선적으로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조(我朝)에 이런 막대한 손실을 입혀 놓고 그냥 물러갈 수는 없소이다.”

이지강은 처음부터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무자파르는 역관을 통해 말을 전해 듣고서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충분히 지금이라도 마음먹으면 철군할 수 있소. 다만 주군의 건강이 좋지 않고 돌아가는 길에 소모전을 펼치게 된다면 애꿎은 병력을 더 잃을 것 같아 그렇소. 이미 우리가 들어와 있는 곳 안쪽으로는 명나라의 군대가 없으니 추격전을 펼쳐 봐야 서로 피곤해질 뿐이오.”

무자파르 역시 쌍방의 의무 없는 종전을 주장하는 것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남의 강역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휘저어 놓고서는 몸만 빠져나가겠다는 말씀이오?”

“그렇다면 양군이 또 한 차례 손실을 보며 부딪치는 수밖에 없겠지요.”

무자파르도 대쪽같이 맞서고 나왔으나 입장이 궁하기는 서로가 매한가지였다.

결론이 안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세 차례 결렬 끝에 밤을 새운 뒤에서야 서로가 만족스럽지는 못하나 받아들일 만한 해답이 나왔다.

가장 첫 번째는 티무르의 셋째 아들인 미란 샤의 아들 중 하나인 아바 바크르를 명나라로 3년간 인질로 보내고, 두 번째는 매년 정월에 티무르의 사절들이 조공입조(朝貢入朝)할 것, 그리고 마지막이 동(東) 차가타이한국, 혹은 모굴한국이 명나라에 사절을 보내고 조공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의 세 가지였다.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국경을 접하고 있으나 티무르의 영향권으로 들어가 이번에도 명나라를 공격하는데 길을 내어 준 동 차가타이한국을 압박하여 일차적인 방비를 삼고, 티무르의 조공 사절을 받음으로서 명분을 세우고, 또 이것이 지켜지고 동시에 전쟁을 또다시 도발하지 못하도록 티무르의 손자를 인질로 잡아 두는 데 그 목적이 있었지만, 반대로 티무르의 입장에서는 화이(華夷)의 관념이 없으므로 예전 홍무제에게 몇 차례 보냈던 것처럼 사절을 매년 보내기만 하면 될 일이고, 또한 유목적 전통에 따라 티무르 사후는 하나의 후계자가 아닌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분승(分承)될 것이므로 하나의 인질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신경 쓰일 만한 문제는 동 차가타이한국의 경우였는데, 이 나라의 경우 칸[汗]의 혈족들이 오분사열되어 티무르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으므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 측에서도 무리 없이 조건에 동의할 수 있었다.

이 협상의 결과를 간단히 말한다면, 명나라는 중화질서에 입각한 명분을 챙겼으며, 티무르군은 더 이상의 큰 손실 없이 실속을 차리고 퇴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지엽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으나 그것은 세부적으로 정하기로 하고 이지강은 조선에서 정사(正使)로 온 이서와 회동을 가졌다.

이서를 비롯한 조선 사신들은 그때까지 유유자적하게 황도(皇都)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객빈 대접으로 편안하게 쉬고 있었는데, 협상이 지연되는 것에 대한 초조함을 전혀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기에 정사로 온 이서라는 인물은 이미 나이 일흔을 넘기고 세상의 곡절은 겪을 만큼 겪은 인물로, 여말(麗末)의 혼란과 국초(國初)의 불안한 정세에서도 꿋꿋이 조정 안에서 살아남은 노회한 인물이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예부상서를 맡고 있는 이자강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으나, 이 이서의 태평함을 자신의 유리한 쪽으로 도무지 끌어 올 재주가 없었다.

그럴싸한 제안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마련이고, 조선에서 가져온 제안은 깊게 논의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이백의 시가 어떻다느니, 송나라 때의 유명한 도회라는 천주(泉州)는 물이 좋다던데 여기서 몇 리 길이냐는 둥 도무지 답답한 소리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뜬금없이 심왕(瀋王)의 자리를 내어 놓던가, 아니면, 폐주 이방원을 내어 놓던가, 그도 못하겠으면 하륜의 목이라도 가져가야 명분이 선다는 소리를 뜬금없이 하고 나오니 이자강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 공께서는 조선이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도 해 주지 않으시고 이렇듯 무리한 요구만 하시니 나는 이 협상으로 무엇을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자강이 결국에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나오자 이서는 껄껄 웃으며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고서는 딱 여섯글자를 썼다.

讓建州得健隣 양건주득건린

건주를 내어 주면 편안한 이웃을 얻게 될 것이다.

이자강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건주위 정도는 지금은 놔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면 충분하오이까?”

이자강이 물어 오자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동의하셨으니 이제부터 논의가 시작이올시다.”

이서의 대답에 이자강은 머리를 다시 싸매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 조선에서 부사(副使)로 온 고봉지는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무자파르를 몰래 만나 접견을 여러 차례 하고 있었다.

고봉지가 어릴 때는 탐라가 몽골의 총관부 산하에 있었고, 무자파르도 원래 차가타이한국의 많은 몽골계 귀족의 후손이고 글줄을 익힌 사람이라 둘은 부족하나마 몽골어로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귀국에서 둘, 아조에서 둘, 이렇게 각각 상대방에게 보내어 그 문물과 풍습을 익힌 뒤에 사절이 오갈 길을 열어 왕래함이 어떻소이까?”

고봉지의 제안에 무자파르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쉽지 않다는 눈치였다.

“명나라에서 길을 열어 줄 리 없고, 오이라트를 거쳐 오는 길은 불안하니 서로의 나라에 다다를 길이 없소이다. 원방(遠邦)과 교류를 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몇 년이 걸려야 다시 서로 오고 가겠소이까?”

당장은 서로가 이어질 수단이 없었다.

우연히 동시에 명나라와 전쟁을 하는 상황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마주 보고 있기도 힘들 것이었다.

그러나 고봉지는 이곳에 오기 전에 가능하면 티무르와도 접촉해 보라는 세훈의 부탁을 받았기에 어떻게든 성과를 내 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한 번 사람이 오고 가게 되면 두 번은 어떻게든 길이 열릴 터이니 먼 나라의 풍습과 말을 익혀 다음에 서로 돕게 될 일이 있을지 어찌 알겠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너무 귀한 신분은 제외하고 사절 중에서 견식하길 좋아하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둘 뽑아 서로 맞바꿔서 십 년 뒤를 가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겝니다.”

다 늙은 티무르야 이런 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지만, 이국적이고 색다른 것을 좋아하는 그 아들 샤로흐에게 조선인 둘을 데리고 가 소개한다면 분명히 좋아할 것이었다.

무자파르는 너무 깊게 교역을 수립하고 외교적인 계산으로 이러한 관계를 맺는다기보다는 우선은 흔히 있는 인질 겸 사절의 교환으로 받아들이고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아바 바크르가 이곳에 인질로 남게 된다면 그 시위(侍衛)를 들어 줄 사람을 남겨야 했는데, 그 가운데 둘 정도를 차출하여 조선으로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손해 볼 것은 없는 제안인 것 같소이다. 그러면 갈 사람이 정해지는 대로 보내겠으니 그쪽에서도 준비하여 주시오.”

무자파르의 말에 고봉지는 흡족한 기분으로 자리를 물러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서와 이자강은 갑론을박을 거듭하며 강화책(講和策)을 논하여 보았으나 좀체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조선이 더 이상 이방원과 그 가신들의 인도를 요구하지 않는 대가로 명이 조선의 지금 국왕인 이석근을 인정할 것을 합의하고, 또 심왕(瀋王)의 작호(爵號)를 조선에게 주되 그 권리만을 가지고 실제로 봉작(封爵)하는 것은 삼가는 대신 부정기적인 공물을 폐지하고, 공녀를 요구하지 않으며, 심요(瀋遼) 지역에 고려 출신의 사람이 많으니 그들이 본국과 소통할 수 있는 관읍(關邑) 하나를 만들 것과 그곳에서 개시(開市)하여 무역할 수 있도록 할 것으로 합의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추가로 요구한 것 때문에 협상은 잠시 또 지연되었는데, 그것은 고봉지의 생각으로 제안한 것으로 예전 명주(明州)라 불리던 영파부(寧波府)에 요동과 마찬가지로 해선(海船)이 바다로 들어와 무역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고봉지는 탐라 출신이라 탐라를 기점으로 이 영파를 상대로 무역을 하게 되면 그 이익이 적지 않을 것이라 계산해 제안하게 된 것이었는데, 명나라에서 그 입선(入船)하는 양을 정할 수 있게 하는 감합(勘合)을 주는 형태라면 가납할 수 있다 하여 그렇게 하기로 타결을 보았다.

영락제는 이자강에게서 조선과 티무르에 관한 협상의 결과를 받아 두고서는 더 이상의 협상을 명하지 않고 이것에 황제의 옥새를 인준(認准)하여 처결토록 했다.

영락제로서는 지금은 잠시 이 정도로 일을 접어 두고 안남(安南)에서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일, 그리고 언제 준동할지 모르는 북원(北元)에 대해 방비하는 일, 그리고 북평으로 천도할 문제와 그렇게 되면 이 응천부와 북평 사이의 대운하를 확장하는 문제, 그리고 바다로 내보내는 보선단의 문제까지 국력을 동원해 처결할 문제에 집중하기로 생각한 것이다.

잠시 궁지에 몰려서 발을 빼더라도 이것은 언제고 강성한 힘을 유지만 한다면 기회를 봐 응징을 가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이렇게 조선, 명, 티무르의 3국은 제각기 바쁜 생각으로 이 문제를 매듭짓고 합의를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각자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한 전쟁인 줄 알 뿐이었다.

1406년 중추(仲秋)

조선국 한성부.

금상 이석근의 부친인 익안대원공(益安大院公) 이방의가 졸하여 국상(國喪)이 선포된 것은 명나라로 건너간 사신들이 한창 전결(戰結)의 문제를 놓고 명의 관료들과 입씨름을 벌이고 있던 그해 초가을의 일이었다.

이방의는 태조의 제3자이며 익안대군으로 진봉(進封)된 뒤 정사에 일체 개입치 않고 복잡한 정세에서 몸을 지키기 위해 신중을 기해 왔다. 성질이 온후하고 화미(華美)한 것을 즐기지 않았고, 손님이 이르면 술자리를 베풀어서 취하더라도 시사(時事)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채 늙기도 전에 중한 병을 얻어서 폐주 이방원이 패퇴한 뒤로 왕위를 물려받을 것도 고사하고 그 아들 이석근이 왕위를 물려받아 대원공(大院公)으로 다시 진봉되었다.

그러나 병환이 깊어져 임금이 의원을 보내 돌보았으나 채 몇 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결국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에 전(奠)을 베풀고 문무대신이 배례(拜禮)하고 국상이 열리게 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임금의 부친이 돌아갔으니 그 상을 얼마간 치를 것인가였는데, 세훈이 직접 나서서 철조(輟朝)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상에 매여 있기에는 명과의 전쟁에 관한 문제가 아직 처결되지 않았으므로 나라 전체가 애도로 해를 지새울 수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해, 열흘간 국사를 중단하고 상복을 입는 기간은 한 달로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시호(諡號)로 안양(安襄)이 내려져 안양왕으로 차제 진봉되어 그 묘만큼은 능(陵)으로 조성하여 양주에 묻으니 이른바 안릉(安陵)으로 조선 개국 이래 최초의 능묘가 되었다.

상복을 입는 기간이 끝나자 이내 명으로 들어갔던 사절단이 돌아와 그 논의의 결과를 알렸다.

그 성과가 기대했던 것보다 컸기에 조정에서는 그 공을 크게 치하하고, 정사로 간 이서와 부사 고봉지의 작위를 높일 것을 주청하고, 다른 배석 사절들도 각자 그 공에 합당한 훈상(勳賞)을 내릴 것이 결정되었다.

이에 세훈이 제안하여 훈장(勳章)의 제도를 공표하니, 우선은 대훈위(大勳位)와 훈(勳) 및 공(功)으로 세 위계를 나누고 각각 3개의 등위를 두어 총 9개의 등급으로 나눈 다음, 문공(文功)을 세운 이에게는 왕실의 문장인 이화(李花)를 그 이름으로 삼아 이화장을, 무공(武功)을 세운 이에게는 상서로운 별인 서성(瑞星)을 그 이름으로 삼아 서성장을 수여하도록 우선적으로 반포하였다.

세훈은 이것을 구상하면서 직접 패용할 수 있도록 훈장을 제작할 생각을 하였으나 아직 관복 제도 등이 정비되지 않고 고려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었기에 우선은 정비된 신군복을 착용할 시에만 패용할 수 있도록 훈장을 제작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이번의 내란과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공훈이 있는 자를 선별하여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니 주요한 수작, 수훈의 대상자는 다음과 같았다.

이화장 및 서성장 각 대훈위 1등 김세훈. 진봉 없음.

이화장 대훈위 1등 이서. 안평백(安平伯)으로 진봉.

이화장 대훈위 3등 고봉지. 정의공(旌義公)으로 진봉.

이화장 훈위 2등 최해산. 영천백(永川伯)으로 진봉.

이화장 훈위 3등 황희. 장수백(長水伯)으로 진봉.

이화장 공위 1등 심온. 청송백(靑松伯)으로 진봉.

이화장 공위 2등 부석소. 개령 개국자(開嶺開國子)로 진봉.

이화장 공위 2등 정탄. 소의 개국자(紹宜開國子)로 진봉.

이화장 공위 3등 변현. 원주후(原州侯)로 진봉.

기타 이화장 공위 3등에 3명 수훈.

서성장 대훈위 2등 송거신. 여산후(礪山侯)로 진봉.

서성장 대훈위 3등 고상온. 제주공(濟州公)으로 진봉 및 부장(副將)으로 1계급 특진.

서성장 대훈위 3등 조사의. 진봉 없음.

서성장 대훈위 3등 양은계. 남양후(南洋侯)로 진봉 및 대장(大將)으로 1계급 특진.

서성장 훈위 1등 강현. 안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기에 길주후(吉州候)에 추증하고 부장(副將)으로 2계급 특진.

서성장 훈위 3등 안정재. 상주현남(尙州縣男)으로 진봉.

서성장 공위 1등 조홍. 참령(參領)으로 1계급 특진.

기타 서성장 공위 2등에 4명, 공위 3등에 12명 수훈.

이로서 전공에 대한 포상이 끝나고 전쟁이 일단락되었기에 국가에 대한 기틀을 일신하고자 연이어 조정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세훈의 주장으로 전쟁 중에 설치한 비변사를 다시 폐지하지 않고 우선 열어 두어 세훈을 중심으로 한 전쟁공신(戰爭功臣)들이 이 비변사에서 모든 일을 처결할 수 있도록 일종의 과두정 체제가 들어선 것이었는데, 이것은 세훈에 의해 옹립된 국왕 이석근이 국정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예전 5등작과 함께 부여했던 대부(大夫)의 자리를 공경(公卿)이 더 낮은 계급인 대부의 자리를 같이할 수 없다는 이유로, 5등작에 진봉된 자들은 대부의 자리를 서임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는 심왕(瀋王)의 작위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명나라와의 합의하에 이 왕위를 당분간 봉작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우선은 기존에 거론되었던 합당한 수여자인 고려 왕실의 후사인 왕조에게 추후 봉작할 것이냐가 문제가 되었다.

이것 또한 세훈의 주장대로 우선은 심왕의 처결 문제는 명목상 국왕인 이석근의 권리로 두고, 대신 왕조에게는 심양백(瀋陽伯)의 자리를 주어 보상케 하였다.

따라서 심왕의 자리는 더 이상 고려 왕실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심왕의 자리는 명나라와 이야기된 대로 우선은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세훈은 이 심왕의 자리를 후일의 계산에 넣어 두고 있었다.

그 다음은 요동에 설치하기로 합의한 읍락에 관한 문제였는데, 우선 이름을 동녕관(東寧關)로 하여 심양성 100리 밖 명나라와 여진 사이의 국경 지역에 1,000명이 상주 가능한 규모로 설치하기로 했는데, 이것은 예전 원나라가 평양에 두었다가 요동으로 옮겨 설치한 동녕총관부에서 그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이곳에는 책임관으로 안찰사(按察使)를 두어 관리하기로 하고, 그 책임자로는 장수백 황희를 보낼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 아래의 도위(都尉) 자리를 두고 일전 이석근의 즉위 기념으로 개최한 별시에서 장원의 자리를 차지한 김종서(金宗瑞)를 부임시켜 황희를 도와 실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황희가 동녕관 안찰사로 부임함으로서 비게 되는 시위대장의 자리는 무관인 이화영(李和英)을 참장(參將)으로 임명하여 맡도록 하였다.

그 다음은 명나라 영파의 감합 무역을 상설할 관청을 만드는 일이었다. 우선 임시적으로 예조(禮曹) 아래에 무역사(貿易司)를 설치하고 관청의 주된 기능은 제주로 보내어 탐라역무서(耽羅易務署)를 설치하고, 그 책임관으로 고봉지의 아들인 고상경(高尙敬)을 임명했다.

고상경은 이제 스물다섯의 나이로 아버지 고봉지를 따라 조정에 출사할 수 있었으나, 직접 과거에 응시하여 김종서의 다음으로 차석(次席) 통과하였으므로 특별히 그 재능을 세훈이 눈여겨보았다가 고봉지가 직접 제안하여 성사시킨 영파의 감합 무역 책임관으로 특별히 보임시킨 것이다.

세훈의 강력한 지지 기반인 탐라계의 세력을 조금 더 강화하려는 목적도 큰 편이었다.

이렇게 영파의 감합 무역은 제주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양자강 하류에 접한 영파와의 거리가 가까울 뿐더러 예전 세훈이 탐라에 있을 때 만든 비누 및 강철의 생산 시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므로, 그곳에 고용해 둔 인원을 유지시켜 이 무역을 위한 생산품을 만드는데 투입할 생각이었다.

이런 와중에 고상지가 무자파르에게 두 명의 역관을 딸려 보내고 이쪽으로 데려온 두 명의 서역인을 어떻게 조치하느냐는 문제를 환기시켰다.

세훈은 그렇잖아도 이들에게 관심이 지대했는데, 물론 고려 때로부터 이곳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회회인(回回人)들이 있었으나, 이렇게 티무르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서로 상대국으로 인물을 교환하여 보낸 것은 세훈이 특별히 지시해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호디르(Bahodir)와 셰르조드베크(Sherzodbek)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하급 무관들이었다. 그중 바호디르는 페르시아 사람이었고, 셰르조드베크는 투르크인의 혈통을 이어 받은 이였다.

따라서 바호디르는 페르시아어를, 셰르조드베크는 후일 우즈벡어로 발전하는 차가타이한국에서 사용하는 투르크 방언의 일종인 차가타이어를 모국어로 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특히 바호디르는 페르시아어로 시를 즐겨 쓸 정도로 그 문리에 밝아 세훈이 특별히 그들을 역관들이 근무하는 관청에 함께 근무하게 하면서 서로 간의 언어를 깊게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들이 지내기 편하도록 벽란도 근교에 아직 남아 있는 회회촌(回回村)에도 작은 땅과 집을 주어 그것으로 녹봉(祿俸)삼아 생활을 꾸리고, 그곳에 있는 회교도 사원에서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처결된 다음에는 지금까지 공조와 병조만 그 수장을 판서(判書)로 두고, 나머지 4조는 한 품위 낮은 전서(典書)로 두었던 것을 모두 판서로 올리고, 공조의 예를 따라 각 조에 딸린 사(司)와 서(署)의 부류를 고칠 것을 장기적인 시책으로 삼아 논하기로 결정했다.

이 행정기관의 산하 부서를 조정하는 일은 앞으로 세훈이 추진하게 될 식산 발전과 중요하게 결부된 문제였기 때문에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문제였으나,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는 각조의 관료들의 반발을 급작스럽게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선은 관련 정책이 입안되는 순서대로 천천히 그 부서를 조정하기로 하였다.

다만, 공조와 병조는 세훈이 강력히 주장하여 다시 다른 4조와 구별을 두어 부(部)로 승격시켰는데, 지금까지 세훈이 중점적으로 실시한 것들이 공업과 군사에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동력을 실어 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처결이 바삐 진행되어 비변사로 등청(登廳)한 뒤 며칠간 퇴청하지 않고 그곳에서 숙식하기 일쑤였던 세훈이었으나, 어느덧 중추(仲秋)의 달도 보름으로 접어드니 한가위가 찾아왔다.

세훈은 간만에 계동의 집으로 퇴청하여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결혼한 뒤 바깥일이 정신이 없어 아내와 자식들을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었다. 세훈은 22세기의 교육을 받고 자라왔기에 기본적으로 남녀는 평등하고 집안의 가사도 분담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일보다는 가정을 중요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근대사회인 15세기의 조선에 불시착해 정신없이 살아오다 보니,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어느새 당대 조선인의 관습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 면이 컸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22세기의 사고대로 가정 문제를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컸으나 워낙 밖에서 터진 일들이 큰지라 그간 신경을 쓰지 못한 면이 커, 늘 아내인 고상희와 현도, 현진 두 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22세기에 남아 있을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의 위패를 적어다가 차례를 지내는 것은 내심 씁쓸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 차례를 정성스럽게 준비한 아내 고상희를 바라보며 그 마음을 이내 지웠다.

어차피 이곳에 남아서 15세기의 조선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이기에 지금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차례가 끝나고 아내와 조용히 차반(茶盤)을 들며 세훈은 간만에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간 미안했소이다. 바깥일이 바빠서 그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구려. 가정의 일을 잘 돌봐 주어 고맙소이다.”

“소첩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다만 가끔은 집에 들러 소첩과 함께 시간을 보내 주고 글월도 짓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리다.”

세훈의 대답에 고상희는 배시시 웃었다.

22세기로 보면 아직 대학을 한창 다닐 젊은 나이인 스물둘의 고상희는 이 15세기의 조선에서는 밖의 일에 정신없는 남자에게 시집와 아이를 둘이나 놓고 내조에 전념하고 있으니, 세훈은 그것이 내심 안쓰러웠다.

“부인은 혹시 배우고 싶은 게 있소이까?”

“배우고 싶은 것이라뇨?”

고상희가 반문했다.

한문도 꽤나 익혀 한시도 지을 줄 알고 서적도 무리 없이 읽으며 세훈이 만든 방적기로 베를 잣거나 하는 일도 손에 익은 터였다. 거기에 현(弦)도 탈 줄 아니 15세기의 기준으로는 크게 부족한 것이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세훈의 생각은 달랐다.

“공상(工商)의 관한 일이나 국사(國事)에 관한 것도 좋소이다. 그대가 더 알고 싶고, 익히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하시오. 아이들도 이제 어미의 품을 떠나 차차 스승에게서 배우고 일신이 갖춰지게 될 터이니 그대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전념하면 좋지 않겠소이까. 남녀의 유별함을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지원해 줄 터이니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보시오.”

세훈의 말에 고상희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아녀자가 하는 일을 거리낌 없이 지원해 주겠다는 남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러나 딱히 배우고 싶은 것은 더 없었고 다만 해 보고 싶은 일은 있었다.

“이번에 전란으로 인하여 집과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게 된 아이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구휼(救恤)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소첩은 생각했나이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사온데…….”

고상희는 막연히 생각해 보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는 않는 듯했다.

조정에서 국사를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남편 세훈에게 말하면 무언가 조정에서 논의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생각만 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집에 모아둔 사재(私財)를 풀어 그 아이들을 모아다가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가르치고 길러 줄 집을 지어 부인이 직접 맡아 보는 것이 어떻소이까?”

“집을요?”

“음, 고아원은 너무 이름이 속되니, 보육원(保育院)이라 하여 한성 부내나 혹은 그 근방에 집을 짓고 전국에서 전란으로 가족을 잃은 고아들을 모아 클 때까지 가르쳐 자립을 돕는 것이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해 보겠사옵니다.”

고상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가 배시시 웃는 모습이 세훈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와 결혼한 것도 꼭 은혜를 입은 고봉례의 제안이어서가 아니라, 처음 봤을 때의 그 모습이 눈에 박혀서 생각에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세훈이 바빠서 집에 자주 들르질 못하는 것을 빼고는 부부 금슬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고상희 또한 아버지가 짝 지어 준 남편이기 이전에 남자로서 세훈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당당하고 거침없으면서도, 따뜻하게 말할 줄 알고, 든든하게 자신을 지켜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방님. 정말 감사합니다.”

고상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세훈에게 안겨 왔다.

세훈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이런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가정을 좀 더 챙겨야겠다고 세훈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렇게 세훈의 제안으로 고상희가 흥인문 밖 마장(馬場) 근처에 그녀가 일전 지어 둔 호인 경애당(敬愛堂)이란 이름을 붙여 경애당 보육원이라 현판을 걸고 전국에서 나이 열넷 이하의 고아 팔백여 명을 모아다가 이들을 돌볼 일종의 고아원을 만드니, 훗날 조선 최초의 사립학교인 경애학사(敬愛學舍)의 전신이 되는 곳이었다.

기초적인 한문 전적(典籍)으로 예절과 문자를 교육시키는 것 외에 세훈이 이들을 길러 앞으로 일어날 각종 산업에서 제 몫을 하게 할 요량으로 산수와 기초적인 과학, 천문과 지리를 가르치고 그 외에도 원하는 아이들에게는 한어(漢語)나 일본어, 몽골어 등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렇게 또 한해가 바삐 지나가고 새로운 해가 찾아오려 하고 있으니 1406년 병술(丙戌)년이 지나가고 1407년 정해(丁亥)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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