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식산흥업(殖産興業) (10/82)

제9장 식산흥업(殖産興業)

「……우리 조선은 땅이 좁고 물산이 부족하니 이로 인하여 인구가 번성치 못하고 굶는 자가 많은지라. 이러한 연유로 안민지락하기 위해서는 당금에는 우선적으로 첫째는 공(工)이오, 둘째는 상(商)이라. 이 둘은 예로부터 천한 이들의 업이라 하여 괄시가 있었으나 사농(士農)이 안족하기 위해서는 이 둘이 필수라. 공업을 힘쓰면 여러 물자가 생길 것이오, 이것이 늘어나면 상업이 흥하여 나라의 재보가 늘어날 것이오, 이것이 백성에게 돌아가 나라가 부택(富澤)해질 것이니 사민(士民)으로 하여금 이에 힘쓰도록 하여 나라의 부강함을 기르는 것이 시급책인 줄 안다.」

―매산문집(梅山文集) 중, 부국책에 관하여

1407년 계춘(季春)

조선국 한성부.

티무르의 원정길에 종군하였다가 고봉지의 외교 협상으로 인하여 부지불식간에 조선국으로 오게 된 바호디르와 셰르조드베크 두 사람은 이제 어느덧 조선에 들어온 지도 반년이 넘게 지나 어느 정도 말을 익히고 적응을 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에 의해 두 사람은 사역원(司譯院)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사역원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기관으로 역관의 교육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기존의 사역원에서는 중국어를 가르치는 한학(漢學), 몽골어를 가르치는 몽학(蒙學), 일본어를 가르치는 왜학(倭學), 여진말을 가르치는 여진학(女眞學) 등의 4분류로 나누어 주되게 가르쳤다.

세훈은 이러한 기존의 분류를 직접 관여하여 개편하였는데, 한학과(漢學科), 몽학과(蒙學科), 일본학과(日本學科), 여진학과(女眞學科), 유구학과(琉球學科), 월학과(越學科), 돌궐학과(突厥學科), 파사학과(波斯學科), 회회학과(回回學科)의 10과로 재편시켰다.

그중에서 돌궐학과는 셰르조드베크가 유일한 훈도가 되어 4명의 생도에게 투르크어의 일파인 차가타이어를 가르치게 되었고, 바호디르 역시 파사학과의 유일한 훈도로 5명의 생도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쳤다.

회회학과는 아랍어를 가르쳤는데, 이곳에 편성된 5명의 생도에게는 쿠란을 익히며 배운 실력으로 셰르조드베크와 바호디르가 번갈아 가면서 이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쳤다.

기존의 다른 학과들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앞으로 역관이 될 생도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유구학과와 월학과의 두 곳에서는 고려말로부터 입국해 들어와 살던 유구 출신과 안남(安南) 출신의 표류민들을 훈도로 기용하여 유구어와 안남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특히 유구어는 일본어와 그 뿌리가 같은 것으로, 기존에는 왜학에서 간단히 취급해 왔으나 새로이 개편되면서 일종의 전문인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세훈의 제안에 따라 특별히 분과되어 설치되었다.

이렇게 사역원에서 바쁘게 지내던 두 명은 특별히 세훈의 초청을 받아 함께 식사를 들게 되었다.

“요즘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소. 먼 곳까지 와서 고생들이 많으시오. 조선에서 지내 보니 좀 어떻소이까?”

세훈의 물음에 먼저 셰르조드베크가 대답했다.

몽골인의 피가 섞여 있는 그는 완전한 페르시아 사람인 바호디르보다 조선 사람의 눈에는 좀 덜 낯선 외모였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셰르조드베크의 말은 아직은 어눌했다. 빠른 속도로 조선어를 익히고 있었으나 아직 넉넉히 말하기에는 어휘가 모자랐다.

“말도 낯설고 풍토도 다른 곳에서 이렇게 적응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오. 그러나 앞으로 양국 간에 서로 우호를 다져야 하니 서로 말을 익히고 사정을 아는 것이 중요하오. 그런 사명을 가지고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 주시구려.”

세훈의 말에 둘은 씩 웃음을 지으며 알겠노라 대답했다.

셰르조드베크와 바호디르, 둘 모두 아직까지는 조선 생활에서 힘든 것을 느끼거나 고향 생각을 하기보다는 신기하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신기한 방적기로 자아낸 부드러운 면이라던가, 명나라를 물리치는데 사용했다던 보총, 단단한 강철이나 향이 나는 비누 같은 것은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페르시아 상인의 후손인 바호디르는 나중에 돌아가면 어떻게든 무역로를 뚫어서 이 물건들을 가져다 팔 궁리를 해 보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서로 간에 왕래가 없으나 예전까지만 해도 아랍이나 페르시아 상인들이 고려까지 오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벽란도에는 이들을 위한 거류지가 있었고, 아직도 그곳에는 그 후손들이 남아 회회사(回回寺), 그러니까 모스크를 만들어 놓고 이슬람의 율법대로 예배를 보고 있었다.

지금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김세훈이라는 재상이 이 무역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바호디르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되어 기회만 잘 닿는다면 바호디르는 원양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거상이 되는 것도 꿈만은 아닐 듯싶었다. 여기 조선에서 머무는 기간을 그 토대를 다지는 것으로 삼으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바호디르보다 좀 더 조선말이 익숙한 셰르조드베크를 통해서 바호디르는 사역원의 교습이 끝나면 항상 저잣거리로 나가 수소문을 했고, 이래저래 여러 사람을 거치고 나자 나상(羅商), 즉 제주도 상인들을 조직해 동영주상행계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선에 등장한 새로운 공업물품들, 즉 비누나 강철 등을 팔아서 크게 이문을 남기고 있는 오상복에게 연결이 되었다.

“반갑소. 오상복이라 하오.”

“바호디르라고 합니다.”

오상복은 이미 세훈에게서 이 낯선 서역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으므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상복은 그해 연초부터 예전 육지와 탐라를 오갈 때 사용했던 선박의 규모를 더 늘려 그중 절반을 명나라 영파로 가는 감합 무역에 투입하고 있었다.

나라에서 추진하는 일이었으나 실제로는 명나라에서 받은 입항 허가, 즉 감합의 숫자를 관청에서 받아 와서 공시를 하면, 이 무역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각자 응하여 자리를 놓고 일종의 경매를 진행했다.

이것을 매좌(買座)라 했다.

이 매좌는 한 번에 한 선(船)의 규모로 진행되었고, 명에서 제시한 입항 가능한 선박의 숫자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금 조선에서는 해외 무역을 할 선박을 사적으로 소지하고 있는 것은 주로 나상과 송상밖에 없었고, 특히 영파 무역의 근거지로 지정된 제주는 나상의 본거지였으므로 실제로는 나오는 자리의 8할 정도를 오상복이 이끄는 나상이 가져갔다.

그러나 오상복은 세훈의 조언대로 경쟁 없는 독점은 폐단을 낳는다는 신조로 이 영파 무역의 감합 매좌에 있어서만큼은 동영주상행계라는 조합의 이름으로 입찰하지 않고 각 조합원들에게 개인적으로 입찰할 것을 권유했는데, 아직까지는 그 자리가 넉넉해 조합원들이 불만 없이 응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감합 무역에 뛰어들어 영파를 이미 두 차례 다녀온 오상복은 해외 무역의 가능성에 눈을 떠 가고 있었는데, 이미 영파가 주로 나상들에게 독식되고 있는 것처럼 송상이 일찌감치 선수를 쳐 깔아 놓은 요동의 변경시에도 진출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좁은 두 개의 해외 시장을 놓고 나상과 송상 두 거상이 경쟁해서는 앞으로 서로 물어뜯는 것밖에 안 된다는 생각에, 오상복은 세훈에게 언질받은 대로 일본, 유구, 안남, 섬라 등과의 무역 확대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바호디르가 오상복을 찾아왔고, 오상복은 그로서 좀 더 먼 시장까지 계산하여 넣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귀국까지는 너무 거리가 머오. 파사라는 나라는 이번을 통해 그 이름을 처음 들었으니 전조 고려 때에는 많은 상인들이 다녀갔다고 하나, 지금은 그 맥이 끊겨버렸소. 이 무역로를 다시 복구하려면 꽤나 많은 공이 들어갈 것이오.”

오상훈이 짐짓 엄살을 떨어 보았다.

그러자 안달이 난 바호디르가 짧은 조선말로 열심히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우선, 배를 만듭니다. 배를 만들면, 파사,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 좋은 배여야 합니다. 배만 있다면, 나, 자신 있습니다.”

“글쎄, 그렇게 원양으로 나갈 배를 만드는 기술자를 구하는 것이 쉬울지 모르겠소. 기술자는커녕 이 조선 땅에 그 기술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소이다. 우리 배를 튼튼히 만들면 안남이나 섬라까지 가는 것은 장담해 볼 수 있으나 파사라…….”

“중국 사람들, 멀리까지 갑니다. 배, 잘 만듭니다. 조선, 할 수 있습니다. 배만 만든다면, 물건, 잘 갑니다. 비누, 철, 면, 그리고 도자기, 모피. 모두 파사 사람 좋아 합니다. 타타르 칸들, 전부 좋아합니다.”

오상복은 바호디르의 열의에 지는 척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배를 조선(造船)하는데 투자를 해 보도록 하겠소. 대신 그대의 말대로 우리가 투자를 하는 것이니 처음에 우리 배를 가지고 무역을 시작하되, 우리가 9할, 그대는 1할을 가져가도록 계약합시다. 무역의 횟수가 늘고 배를 만드는 데에 투자한 비용이 회수가 되면 다시 우리의 비율을 줄이고, 그대가 가져가는 비율을 높이고, 이것이 모두 회수된다면 뜻이 있다면 우리를 떠나서 직접 무역을 해도 말리지 않겠소이다. 이런 조건으로 계약하시겠소?”

바호디르가 상단을 이끌고 장사를 해서 남는 이문의 9할을 오상복의 나상이 가져간다는 것은 어쩌면 손해처럼 느껴졌지만, 바호디르 입장에서는 어차피 티무르가 다스리는 땅으로 당분간 돌아갈 방법도 없었고, 이 배를 만드는데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장사를 시작해 볼 수 있는 상황이므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 계약, 맺습니다.”

둘은 손을 맞잡고 다음 날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가운데에 도장을 찍은 다음에 두 부분으로 찢어 각자 보관하여 그 내용을 증명했다.

오상복은 그쯤에 영파 무역에 들어간 돈을 회수하고 있었으므로 그 돈을 치재(致財)하지 않고 바로 조선소를 짓는 데에 투입하였다.

큰 함선을 짓기에는 제주에 건선거(乾船渠)가 들어갈 자리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큰맘 먹고 전라도 목포진(木浦鎭)의 수군영(水軍營)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상으로서는 제주가 아닌 육지에는 처음인 막대한 시설 투자를 하여 조선소를 만들었다.

아직까지 공식적인 해외 무역이 명나라에 국한된 상황에서 이것은 어찌 보면 모험에 가까울 수도 있었으나, 세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옆에서 지켜봐 잘 알고 있는 오상복은 이 무역이 조만간 현실로 실현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투자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전국의 이름 난 배 만드는 장인들을 모으고, 바다로 나갈 큰 배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니, 조선 최초의 원양 무역 함대는 이렇게 관의 주도가 아닌 오상복과 나상, 그러니까 민간 상인들의 주도로 차츰 윤곽을 갖춰 가게 되었다.

1407년 맹하(孟夏)

조선국 경기도 인천군(仁川郡).

여름의 인천은 시끄러웠다.

바로 2년간의 공사 끝에 제철소가 완성된 것이다.

세훈이 일찍이 탐라에서 강철을 만들기 위해 설치했던 동영고로(東瀛高爐)의 기술을 바탕으로 총 20개의 고로를 설치하여 만들어낸 작품이었는데, 물론 19세기에 발전했던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제철소에는 한참 부족한 편이었지만, 강철의 생산 규모를 크게 확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조선에서 필요한 수요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강철의 양산이 가능해졌습니다.”

부석소가 감탄하며 말했다.

공조 산하 제철사의 참의를 맡아 이 인천 제철소를 만드는 일에 가장 큰 헌신을 해 온 그였기에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주에서 대장 기술을 배우던 젊은 그에게 세훈과 함께 처음으로 동영고로를 만들고 작업해 새로운 기술을 익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거기에 그 인연으로 재능을 인정받아 조정에 출사까지 하여 이런 거창한 임무를 맡고, 조선의 제철 기술을 발전시킨 공으로 훈장까지 받고, 자작의 작위에 진봉되어 개령 개국자(開嶺開國子)라는 거창한 봉호(封號)까지 붙게 되었으니, 이 제철소야말로 그의 젊음을 그대로 상징하는 남다른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제철소가 이제 완성되어 첫 불을 틔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제철이 완료되면 곧 부평(富平)에 완성될 총포도감(銃砲都監)에서 이 철을 가져다가 바로 양질의 무기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네. 2년을 벌려 온 일이 이제 실현이 가능하겠어. 이제 제주에서 먼 길을 돌아 물자를 실어 올 필요가 사라졌어.”

최해산이 부석소의 말에 맞장구쳤다.

최해산 또한 공조의 판서가 되어 그간 추진해 온 일들이 이제 하나둘씩 성과를 보이자 요즈음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번에 부평에 설치한 총포도감이라는 것은 한성에 있는 공조 산하 화통서(火桶署)의 연구 기능을 제외하고 생산을 위한 일종의 공장 시설을 만들어다 설치한 것으로, 인천에서 생산된 강철과 한성의 화학사(化學司)에서 생산된 화약을 이곳에서 받아서 보총과 각종 포 같은 화약을 사용하는 무기들을 앞으로 생산하게 될 곳이었다.

이로서 인천―부평―한성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생산 지역이 형성되게 되었는데, 이것은 장기적으로 세훈이 구상하고 있는 근대적 공업지대의 시발점이 될 곳이었다.

세훈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최해산에게 특별히 지시하여 공조 산하의 교통사(交通司)에 특별히 예산을 할당하여 한성에서 출발하여 삼개나루[麻布]에서 한강을 건너 부평을 지나 인천으로 이어지는 가도(街道)를 정비하도록 지원했는데, 널찍하게 잘 다져진 도로는 특별히 교통사에서 부평 총포도감 옆에 역참(驛站)을 설치하고 이곳에 관리들을 상주시켜 항시 도로를 관리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기존의 불규칙하고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들과 달리 계획적으로 정비하여 만든 최초의 도로로서 후일 조선 최초의 국도가 되는 경인가도(京仁街道)였다.

이 당시에는 특별히 이름이 붙여지지 않고 단순히 신작로(新作路), 혹은 총포도감을 지난다 하여 도감길이라고도 불렸는데, 신작로라는 것은 근대에 등장한 용어이나 세훈이 이 길을 언급하며 사용했던 것이 교통사 관리들의 입을 통해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막상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기존의 세수로는 이런 일을 도저히 시작할 엄두도 낼 수 없었거니와 세훈이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 갑신반정(甲申反正)에 이어 명나라와 일전을 벌인 이른바 을유전역(乙酉戰役)으로 인하여 국가 재정은 그야말로 거의 바닥에 가까워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 사업들을 무리해서나마 추진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세훈이 그간 탐라에서 상업을 시작해 오상복 등을 통해 모아 둔 자본과 명과의 무역을 시작함으로서 들어오게 된 세입 등을 모두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추가로 들어온 수입이 전란 뒤의 복구에 바로 사용되지 않고 제철소를 짓고 도로를 닦는데 쓰이게 된 것에 대한 조정 신료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세훈이 생각하기에 당장은 조금 힘들더라도 어렵사리 가져온 평화 시기에 이런 기반 시설을 닦아 놓지 않으면 그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세훈은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국가의 재정이 흔들리고 지난 전란으로 인해 세입도 줄었지만 세훈이 생각하는 국가 경제의 초석들이 이렇게 하나둘씩 완성되기 시작하면, 여기서 생산되는 물건들이 곧 자본으로 바뀔 것이고 그 자본의 상당 부분은 국가의 창고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최해산은 세훈에게 이런 것을 자세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조의 판서로서 이 제철소와 총포도감 그리고 도로를 닦는 일에 누구보다 열성이었다.

그런 그와 제철사의 부석소 그리고 앞으로 총포도감을 관리하게 될 화학사의 정탄은 그야말로 일심동체처럼 움직여 이 일을 진행시켜 왔던 것이다.

물론 세훈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지는 견고했고 명과의 힘든 싸움을 벌였던 을유 전역의 도중에도 비록 공기에 차질은 있었을지언정 이 시설들을 건설하는 삽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이 고로는 볼 때마다 대단합니다.”

정탄이 감탄하며 말했다.

제철소의 준공을 기념하여 이곳에서는 스무 개의 고로에 불을 하나씩 틔워서 첫 선철을 뽑아내는 일종의 시무식(始務式)이 진행되고 있었다.

세훈은 이 자리에 꼭 참여하고 싶었으나 나라의 재상으로서 처결해야 할 일이 몰려 안타깝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곳의 주빈은 최해산, 부석소, 정탄의 3인방이 되고야 말았는데, 세훈이 못 온 것이 다들 아쉽기는 했으나 이 일의 결실을 보는 감동에 곧 흠뻑 젖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일세. 어제 한성에서 섭정공 합하를 뵈었을 때 앞으로 추진하게 될 일들을 일러 주셨네. 지금까지 만든 것들은 제주에서부터 섭정공께서 꾸준히 추진해 오던 것들로, 그 규모가 커졌을 뿐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네. 거기에 그나마 염료에 관한 것은 아직 제주와 한성에서 더디게 만들고 있으니 이것 또한 확충하고, 방적기를 이 경기 지역에 보급하여 면직물을 추가 생산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네. 거기에 올해가 끝날 무렵이면 이제 화학전습원의 첫 수료생들이 나오게 되니 이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실무에 투입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할 것이네.”

“한숨 돌리나 했더니 아직도 할 일이 산더미로군요.”

최해산에 말에 부석소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썩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또 하나 처리하고 나면 섭정공께서 또 일을 던져 주시겠지요.”

정탄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도무지 합하의 생각하시는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지 않네. 뭐든지 몇 발 앞서 나가 생각하시니 이거 원, 말씀하시는 걸 쫓아가는 것만 해도 버거우이.”

최해산이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부석소가 낄낄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장가는 언제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경행저의 고부인께서 중매를 세워 황희 대감의 여식과 혼담이 오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탄까지 옆에서 거들자 최해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최해산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려보려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결국에는 이렇게 일이 진행되어 최해산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되자 요동의 동녕관에 안찰사로 부임한 황희에게 찾아가 인사를 여쭙게 되고, 주변의 독촉으로 한성에 돌아오자마자 결국 황희의 딸 수임(秀任)과 혼사를 치르니 그제야 결국 늦장가를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공조판서 최해산에게 그 해는 특별한 해가 되었다.

공조를 맡아 부임해 추진한 일들이 하나둘씩 결실을 보기 시작하였고, 결혼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입이 벌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신혼을 채 즐기기도 전에 최해산은 결국 세훈에게 불려 가 등청해 일을 또 떠맡게 되었다.

“신혼인데 미안하게 됐네. 영파와 동녕관에서 명으로 들어가는 비누와 면직물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나 세수가 넉넉히 걷혀 또 하나 추진해 볼까 하는데…….”

세훈이 못내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줄였다.

최해산은 속으로는 울상이었으나 겉으로는 비죽이 웃는 도리밖에 없었다.

“…….”

“큼, 그럼 일러 주겠네. 자세한 것은 공조로 내려 보낼 문서에 설명되어 있겠지만 이번에 다축방적기를 500대가량 만들어 200대는 돈의문(敦義門) 밖 삼개나루[麻布]가는 길의 복사골[桃花洞]의 신작로 길가에 직물창(織物倉)을 지어 그곳에서 군복에 사용될 원단을 생산하도록 하고, 나머지 300대는 나상, 송상, 경상 등에 불하해서 민간에서 면 직업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할 생각이네. 그러니 미안하지만 자네가 일을 지휘해서 직물창 건물을 잘 짓도록 감독하고, 복식서(服飾署)에 들려 방적기를 만드는 일을 감독해 주게. 미안하지만 부탁하겠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라는 것이 결국 이런 것 아니겠나.”

“분부하신 대로 시행하겠나이다.”

최해산은 울상이 되려는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띄우고서는 퇴청하려고 물러섰다.

집에 있을 부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미리 결혼할 것을 아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일거리를 잔뜩 떠안고 돌아가려는 최해산의 발걸음을 무심하게도 세훈이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아! 방적기를 그만큼 늘려 면직물을 만들려면 목화가 많이 필요할 터이니 예전에 제주에서 개량해 둔 목화씨를 들여와서 조림서에 주어 재배지를 선정하고 충분히 심도록 하게. 이것도 직접 나서 줬으면 좋겠네. 방적기를 상단에 불하하더라도 이 목화만큼은 국가에서 전매하면 다시 세입이 더욱 늘어날 것이니 자네가 중히 다뤄 주어야 하네.”

세훈의 무심한 지시에 최해산은 그저 고개를 다시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최해산이 추진케 될 일은 다음해가 되어야 결실을 맺게 될 터이니, 최해산은 한해를 다시 일에 치여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1407년 중추(中秋)

조선국 한성부.

세훈은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덧 14세기의 조선으로 넘어오게 된 지도 8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이제 조선을 개혁하는 일이 자신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지만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과거에서 살아남아 볼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탐라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혼인을 치르게 되었고, 처음에는 돈벌이로만 여겼던 미래의 기술들이 곧 세력이 되었다. 탐라에서 시작했던 그의 손에 이제는 조선이라는 일국이 놓여 있었다.

이제 세훈의 꿈은 조금 커졌다. 정치, 기술, 사상, 예술, 군사 등의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시대의 진보를 앞당기는 것이었다.

그 첫 대상은 조선이 될 것이다.

세훈은 서양이 먼저 시작해 전 세계가 겪었던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시대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폐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우선은 조심스럽게 그 산업혁명의 시대로 한 걸음 내디뎌 볼 생각이었다.

기술적인 부분은 지식이 공유되면 그 발전이 따라오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도 실제로 그랬다.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건 이상 민생과 군사에 관련된 일만큼은 크게 반대할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훈이 생각하기에 진짜 문제는 사상적인 부분이었다. 산업이 발전하면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할 것이다. 공장제 공업에서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단계였다.

공장에 시설을 투자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고 그 능력이 있는 자들은 소위 말하는 자본가가 되어서 노동자들을 그들의 공장에 고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세훈의 주도로 몇몇 공장들이 국가의 관리하에 놓여 있었지만 이번에 방적기를 상계에 불하한 것처럼, 앞으로는 민간 주도의 공업이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계급간의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꼭 서양사에서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생과 똑같은 길을 밟으리라 장담할 수 없으나 어떠한 새로운 사상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서구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역사의 흐름을 따라 태동한 산업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어찌 보면 세훈이라는 개인에 의해서 촉발된 조선의 때 이른 산업혁명은 그것을 뒷받침해 줄 사상적 발전 없이는 불안한 파국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조선 후기만큼 유학이 조선 사회에 뿌리 깊게 내려 모든 사회 구성원을 규율하는 하나의 단일 윤리가 되어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나, 지금의 조선은 어찌 됐건 국시(國是)를 유학으로 하는 국가였다.

민속신앙과 삼국 이래 내려온 불교적 전통 위에 고려 말에 다시 유학의 큰 팽창이 있었고, 그것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들은 다시 조선 건국의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중 많은 이들은 이번의 변란을 통해 이방원 세력과 함께 밀려 나갔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지금도 김세훈 정권하에서 등용되어 나라의 녹을 먹고 일하고 있었다.

세훈은 이들을 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이 시대의 기준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지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훈과 그 주변의 인물들이 꿈꾸는 것은 막연한 성리학 입본(立本)의 국가가 아니라 과학적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산업국가였다.

그 책임자로 선정된 것은 호조전서에서 참판으로 승진해 있던 허조(許稠)였다.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직언을 아끼지 않았고, 때문에 이방원에게 미움받던 차, 정란 통에 세훈의 조정에 합류하여 그 후로 줄곧 호조를 맡아 오고 있었다.

기존의 잦았던 대신들의 자리 이동을 세훈은 지양시키고, 대신 믿을 만한 관리를 한 자리에 오래 유임시켜 두고 있었는데, 호조의 수장으로서 허조 또한 3년 차가 되고 있었다.

“허 공. 누추하지만 들어와서 앉으시오.”

“염치 불구하고 실례하겠나이다. 합하께서는 어쩐 일로 저 같은 녹봉 도둑을 부르셨습니까.”

허조가 껄껄대며 세훈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까지 업무가 공조와 병조 등에 편중되어 있어 호조에서 하는 일이 없었음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세훈은 그런 허조의 넉살에 슬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 공께서는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의 세 관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세훈의 뜬금없는 물음에 허조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야 세 전각(殿閣)이 모두 전조 고려에서부터 내려온 것으로 모두 경전을 관리하고 그것을 강연하고, 현유(賢儒)들을 모아다가 집론(集論)하던 기관입지요. 왕조가 바뀌고 나서도 폐지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만.”

허조의 군살 없는 대답에 세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여는 이 세 관청을 모아다가 새로운 나라의 동량을 세울 작정이외다. 원래 이것은 예조판서인 이직 공과도 상의해 봐야 할 일이나, 이 공이 원체 깐깐한 유학을 하시다 보니 여가 오늘 유연하신 허 공을 뵙길 청하게 되었소이다.”

“그 관청들을 어찌 개편하실 요량이십니까?”

“우선 세 관청을 합쳐다가 한림원(翰林院)이라 칭하고, 의정부 직속의 독립 관청으로 만들 생각이오. 그 한림원 아래에는 그대로 보문각, 수문전, 집현전의 세 관청을 그대로 두되, 보문각은 말 그대로 서책을 모아다 장서(藏書)하는 기능으로 하여 지금까지 나온 서책을 모으고, 앞으로 조선에서 발행될 모든 책을 이곳에 한 부씩 받아 보관하게 할 생각이외다.”

“그 뜻은 좋으시나 그렇게 서책을 한 곳에 모아 두었다가 불이라도 붙으면 어찌하시려고.”

“그래서 이 보문각은 궐외(闕外)에 석조로 지을 생각이외다.”

세훈은 일종의 국립도서관을 세울 생각이었다.

22세기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이 모든 국내에서 출판되는 책을 장서해서 늘려 나갔듯이 앞으로 이 보문각이 그 기능을 하게 할 생각이었다.

세훈은 전통 건축에 대해서 그 미적 단아함을 좋아했으나, 장기적으로 건축에 대해서도 근 현대 서양에서 발전한 건축 기법을 차츰 자연스럽게 기존의 전통 건축 위에 도입시켜 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 보문각을 통해 세훈은 처음으로 완전 석조 건축을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돌을 가져다 말씀이십니까?”

“석재도 훌륭한 자재올시다. 다만 나무로 짓는 단아함은 따라가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석조로 지어 화재에 좀 더 방비가 된다면 그걸로도 괜찮지 않겠소이까. 건물 전체가 타 버려 안의 장서들을 모두 유실하는 일은 없지 않겠소.”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다른 관청들은 어찌하시려고?”

“수문전은 앞으로 국가 주도로 필요한 서책을 편찬하고 보수하는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 가장 중요한건 집현전이고, 앞으로 허 공께서는 호조에서 한림원 대학사(大學司)로 자리를 옮기셔서 그 집현전을 위주로 한림원 전체를 맡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여의 바램입니다.”

허조는 세훈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집현전에서 어떤 일을 하실 요량이신지?”

“여는 그곳에서 조선의 국시(國是)를 삼을 만한 학문을 연구시킬 요량이외다. 고래의 것을 답습시키는 것만이 아닌 앞으로 발전해 나갈 학문 말이오. 시작은 아조(我朝)의 많은 유생들이 공부한 유학에서부터 출발하여도 좋소. 그러나 장기적으로 성리학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그 기치로 삼게 할 요량이오.”

허조는 난처하다는 듯이 세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 조선이란 나라는 성리학에 감화받은 유학자들이 새 조정에 뜻을 바쳐 세워진 나라이옵니다. 소위 이학(理學)을 버리고 그 뜻에 맞추어 훈고하자는 이야기로 들리게 되면 논란이 분분할 것입니다.”

“여도 그럴 줄은 잘 압니다. 허나, 이미 당금의 우리 조정은 명과도 한 번 척을 지었고, 조정의 시책 또한 나라의 살림을 도모하자는 것이니, 우선은 말씀드린 대로 추진하여 주셨으면 좋겠소. 내가 그래서 따로 예조참판을 불러 일을 묻지 않고, 허 공에게 한림원을 부탁하는 것이오.”

허조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못내 수락하는 의사를 표했다.

세훈은 한 고민 덜었다는 듯이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고는 주안상을 내어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훈이 허조를 앞세워 내어 놓은 한림원의 등장과 그 정책에 대해서 조선의 학자들과 선비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이 오고 갔다.

기존의 주자학이 공론(空論)에 치우쳐서 도리를 세운다고는 하나 오히려 전조 고려의 망국도 바로 잡지 못했고, 지금의 조선에 들어서서도 전란의 씨앗만 뿌리고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죽은 학문이라 강하게 주장하는 후일 관료들의 주축이 되는 경사학파(關西學派)와 탐라학파(耽羅學派)가 성리학을 공격하는데 일관된 선봉을 섰고, 세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학파들로 기존 유학의 질서를 탈피해 새롭게 학문을 추구하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이 학파의 거두는 후일 세훈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는 김종서와 고봉지의 아들 고상경이 그 거두가 된다.

그 다음이 실질적으로 처음 집현전으로 들어가 완만한 기존의 유학과 세훈이 요구하는 실용주의의 경계를 허물고 절충하는 시도를 한 허조와 그 휘하의 한림원 학사들에 의해 정립되어 조선의 학문의 큰 줄기를 주도하게 되는 후일 속칭 관학파(官學派), 혹인 실학파(實學派)로 불리게 되는 경사학파(京師學派)로서 후일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에 의해 그 학문이 크게 정립된다.

그보다 유학에 좀 더 치중하고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나온 것이 이직이 주장한 농업입조(農業立朝), 소위 농사일이 나라를 세운다는 이론이었다.

한림원, 특히 그중에서도 집현전에서 주장되는 새 학문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직이 정립했고, 후일 성삼문에 의해 대성되어 호서학파(湖西學派)로 성장하게 된다.

마지막이 완고한 성리학적 전통을 유지하는 학파로,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지방에 산재해 있던 고려의 유신들을 중심으로 지켜진 학문적 전통으로, 후일 김종직(金宗直)에 의해 정리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로 불리게 되나, 정부 시책에 의해서는 가장 나중 순위로 배제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렇게 하여 세훈에 의해 시작된 한림원의 등장으로 조선은 이른바 신유학(新儒學)이라는 것이 등장하고, 나중에는 유학적 색채마저 지워 버린 학파들이 난립하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로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들 학파들은 주로 지역적인 근거를 삼아 활동하게 되고, 이것은 향후 그 지역의 특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상공업과 무역이 크게 뿌리 내린 관서와 탐라 그리고 관료들이 주도하는 경사, 중농주의를 주장한 호서, 완고하게 보수적인 유학을 꿋꿋이 발전시키는 영남은 각각 그 학문들이 지역의 특색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1407년 가을, 정식으로 한림원이 개원하여 젊은 학사들과 신진 관료들을 집현전으로 모아 서로 강론(講論)하고 새롭게 나라가 갈 방향을 제시하게 하니, 해동(海東)의 사상사에서 한 획을 긋게 되는 순간이었다.

1407년 맹동(孟冬)

조선국 한성부.

상공(商工)과 학문에 관한 일이 어느 정도 처리되자 세훈이 서두른 것은 해군의 창설이었다.

일전 갑신반정(甲申反正)과 을유전역(乙酉戰役)을 치르는 동안 육군의 편제는 신식으로 정비되었으나 수군(水軍)은 아직도 구식 편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한성의 시위대와 각 지방에 편재된 진위대로 나뉘어 비변사의 일관된 통제를 받는 육군과 달리 아직도 지방 수군영(水軍營)의 분산된 편제를 따르는 수군을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세훈은 양은계와 이 문제에 관해서 논의한 뒤에 직책은 일전 개편한 육군의 계급 체계를 그대로 수용하되, 편제는 새로 창설되는 해군의 실정에 맞추기로 했다.

우선 가장 상위급 부대로 기존에 있던 참모부를 육군 참모부로 개편하고, 그에 걸맞게 해군 참모부를 신설하여 당분간은 육군 참모장인 송거신 대장으로 하여금 해군 참모장 서리에 보임시켜 겸직케 했다.

그 다음은 함대(艦隊)의 단위를 편제하여 제주에 탐라진충함대(耽羅盡忠艦隊)를 창설하고, 우선적으로는 영파를 오고 가는 상선의 호위와 주변 경계 및 남양에 출몰하는 왜구의 격파를 그 주 임무로 맡겼다.

두 번째로 신설된 함대는 기존의 전라도 무안 당곶포에 있던 전라수영을 확대하여 삼남(三南)의 수군을 모두 통제하는 남해함대(南海艦隊)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기존의 동래의 경상수영을 재편한 영남전단(嶺南戰團), 충청수영을 재편한 호서전단(湖西戰團), 그리고 남해함대 직속으로 호남전단(湖南戰團)을 설치했다.

마지막 함대는 벽란도에 설치된 서해함대(西海艦隊)로, 대동강 하구와 청천강 하구에 각각 그 분견대로 남포전대(南浦戰隊)와 안주전대(安州戰隊)가 설치되고, 함대와 두 전대 사이에 관서전단(關西戰團)을 설치해 일괄 통솔하게 하였다.

그리고 함대급 규모에 속하지 않고 강원, 영길 양도의 해안을 방어할 목적으로 동북전단(東北戰團)을 설치하니, 이것은 독립 전단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거창하게 편제를 짜놓아도 문제는 함대를 실질적으로 채울 전선(戰船)이었다.

거북선[龜船]은커녕, 판옥선(板屋船)도 실제 역사에서는 명종 때에 이르러야 등장하는 선박이니, 지금은 고작 세금으로 거둔 물품을 한성에 올릴 때 사용하는 조운선 겸용의 맹선(猛船)들이 고작이었다.

그 숫자는 적지 않았지만, 특히 탐라진충함대나 남해함대의 경우는 장기적으로 보아 제대로 된 군선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선박은 죄 상용(商用)으로 군무에 적합한 것인지는 저로서도 잘 알지 못하나이다.”

일전 오상복이 무역선을 만들겠다고 전라도 목포에다가 조선소를 차려 놓고 선박을 건조하고 있는 사실을 기억해 낸 세훈이 그를 불러서 군선을 건조할 것을 타진해 보았으나, 오상복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오상복이 만들고 있는 것은 소위 신라 말에서 고려 중기에 이르기까지 교관선(交關船)이라 불리던 배랑 비슷한 것으로서 원양 항해용 선박이었다. 그러나 여말(麗末)에 이르러 이런 원양 선박의 건선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오상복은 원양 선박을 만들어내는 데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래서 전통 한선(韓船)의 직공들을 전국에서 물색해 삼백여 명을 모아 놓고서도 첨저(尖底) 형태의 선박을 구상만 해놓고 직접 짜내지 못하고 있다가, 영파에서 원(元)나라 때부터 건선하던 인부들을 비싼 돈을 주고 몰래 목포로 데려오고, 유구에서도 배를 만드는 기술자를 데려오고, 일전 제주에 있었던 대마도 왜구의 내습 때 포로가 된 뒤, 귀화한 화선(和船), 즉 일본배를 만드는 기술자까지 불러 모아다가 그 방법을 강구하더니, 결국에 66자(약 20m)크기의 첨저형 범선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거기에 철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용골 위로 격벽(隔璧)을 층층이 놓아 쉽게 침몰되지 않게 하고, 마치 부품을 조립하듯 나무못을 사용해 촘촘히 잇댄 기술로 만들어냈으니 나름 성공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멀리 갔을 경우 안남(安南) 정도까지를 생각하고 만든 배로서, 오로지 무역에 종사하기 위해 만든 상선이었다. 대포를 놓기 위한 자리도 마련되지 않았고, 수군이 탑승할 선실도 없는 배였다. 다만 바다에서 기초적인 방비를 취하기 위한 무장 정도만 갖출 수 있게 해 놓은 배였다.

“하지만 지금 조선에서 제대로 된 배를 생산할 수 있는 조선소라 할 만한 것은 자네가 만든 목포의 선창밖에 없네. 나머지는 죄 수영(水營)에서 제각기 누전선이나 평전선, 맹선 따위를 만드는 작은 규모거나, 아니면 근해에 오갈 사선(私船)을 만드는 곳뿐이니 이대로는 제대로 된 해군의 창설은 물론이거니와 구색도 맞추기 힘드네. 자네가 좀 힘써 줘야겠어.”

“지금 당장은 힘듭니다. 지금까지 들어간 돈만 해도 한두 푼이 아니라, 영파에서 벌어 온 돈을 죄 쏟아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오상복이 슬슬 내빼려고 하자 세훈은 그 어깨를 부여잡고 다그쳤다.

“어차피 자네가 배를 만들어 봐야 국가에서 관인(官印)이 나오지 않으면 영파를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갈 수가 없네. 아직까지 조선은 그런 사례를 허락한 전례가 없으이. 괜히 배를 만들어 헛수고 하고 싶지 않으면 군선도 만들어 주게. 다만 그 값은 최대한 후하게 쳐 줄 터이니, 우선은 무역선과 함께 군선도 개발해달란 말이네.”

세훈의 으름장에 오상복도 기어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소인도 별 도리가 없습니다만……. 혹여 만드시고자 하는 배에 대해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간 비누며 강철, 발화기, 염료, 면포 등 세훈이 진귀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보아 왔던 오상복이기에 혹시나 세훈에게서 배 짓는데 쓸 만한 생각을 귀동냥할 수 있을까 싶어 물어 보았다.

그러나 세훈은 딱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여도 배까지 설계하는 재주는 없네. 다만 몇 가지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은 있네. 확실한 것들은 아니지만, 자네가 공들여 직공들과 함께 실험해 본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세훈이 일러 준 것은 판옥선에 관한 지식이었다.

세훈은 조선술이나 전통 선박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어 그가 알고 있는 판옥선에 대한 지식은 매우 단순한 편으로, 그저 기존에 맹선처럼 위에 누각을 올리지 않은 평전선에서, 보다 지휘와 방비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누각을 올린 옥형(屋型)의 판옥선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보다 더 들어가 보아야 노를 짓는 부분과 전투 병력이 승선하는 부분이 나뉘어, 전투에서 좀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평저(平底) 형식으로 만들어져 원양으로 나가는 데는 부적합하나, 근해에서 빠른 방향 전환과 이동이 가능하다는 장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훈이 계산하기에 이 정도만 일러 주어 판옥선만 시범적으로 만들어 보아도 일단 배의 상장이 올라가기 때문에 배의 균형을 새롭게 맞추어 계산해 보아야 하고, 그 복원력도 검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안정감 있게 하선체와 선심의 길이도 조정해야 하기 때문에 분명히 그 방면에서 기술적인 발전과 습득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이것은 세훈이 직접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부분이거니와 잘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대충 방향만 일러 주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 판옥선이란 것은 이제 앞으로 500척 정도 전국에 분산되어 있는 맹선을 대신하여 기본 전선이 되어야 할 것이니 앞으로 10년간 최소 200척은 생산되어야 하네. 이것으로 기술 습득이 된다면 그것과 지금 만들고 있는 무역선의 첨저 기술을 합쳐 좀 더 큰 규모의 대형군선을 만들어 제주에 배치해 원양 무역을 지원할 생각이니 힘써 주게나.”

세훈의 말에 오상복은 열심히 동의만 할 뿐이었다. 그로서도 배에 대해서 전문적인 식견은 없었으니, 그저 잘 들어 두었다가 직공들에게 전하여 새롭게 시도해 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거 어쩐지 섭정공 합하를 만난 뒤로는 일복이 넘쳐 나는구만…….’

오상복은 그저 일이 많아지는 것이 꼭 좋지 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육지에서 다니다가 제주로 돌아와 조용히 살던 그였는데, 양노인이 섭정공을 구해 온 뒤로는 정신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제 세훈이 시작해 오상복 자신이 거의 만들다시피 한 동영주상행계가 조선의 상권의 삼분지 일을 쥐고 있고, 명나라 영파로 무역을 하는 거상으로 성장했다지만 점점 일에 치여 입맛을 일어가고 있는 그였다.

그저 이제는 일도 줄이고 첩실이나 들여서 노후 대비나 해 볼까 하고 있었는데, 괜히 욕심을 부려 원양을 항해하는 선박을 건조하겠다고 나섰다가 군선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큼, 일이 좀 고되지만 다 자네 잘되라고 하는 것이네. 자네가 잘될 뿐만 아니라 나라가 잘되는 일이니 어찌 침식을 즐기느라 시간을 허송하겠는가.”

오상복의 표정에서 그 생각이 여실히 드러났는지 세훈이 먼 산을 바라보며 지나가듯이 말했다.

문득 처음 제주에 떨어져 오상복의 작은 갈옷을 입고 앞으로 어찌할까 고민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이제 오상복을 상계의 심복으로 키워 놓은 셈이니, 앞으로도 제 몫을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상복도 눈치가 있어 더 이상 엄살을 늘어놓지 않고 세훈에게 엎드려 말했다.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소인에게 돌아온 바, 뜻하시는 대로 만들어 보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오상복이 고개를 들어 히죽 웃었다.

“다만, 군선 만드는 값은 단단히 쳐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오상복이 군선을 만드는 것을 구상하러 내려가자 세훈은 비변사에 등청하여 무과(武科)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여 조정을 다시 한 번 들썩여 놓았다.

이번에는 세훈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병조판서 양은계마저 질색하여 놀랐다.

“도대체 무과를 폐지하시면 장수는 어찌 뽑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너무 그렇게 깜짝 놀랄 필요 없네. 다만 무반직의 편제도 바뀌었고 하니, 기존의 서반의 장수들을 뽑는 방법보다, 새 편제에 맞게 장교들을 뽑아 동량으로 키울 생각이네.”

그러나 대신들은 그 말하는 요량이 잡히지 않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세훈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합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소만, 무과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가장 훌륭한 장수를 뽑는 방법이외다. 그 실력을 직접 나라에서 시험하여 전국으로 두루쳐 뽑으니 아무나 조정에 등청하지 못하고 실력 있는 자들이 나라의 방위를 책임지게 되는 것이지 않겠소.”

참모장 송거신마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러나 세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여가 말을 잘못 전한 것 같소이다. 무과를 폐지한다는 것보다는 그 무과의 내용을 조금 바꾸어 사람을 뽑아 3년간 의무적으로 교육시킬 요량이오. 이 기간 동안 각종 병서(兵書)는 물론이거니와 병졸을 지휘하는 법, 보총과 화포를 다루는 법, 마술(馬術), 그리고 무관으로서의 덕목을 배우게 될 것이외다.”

“그러나 기존의 무과에서도 그런 것들을 익혀 오지 않으면 뽑히지 못하니 오히려 나랏돈을 들이지 않고도 같은 재능을 가진 장수를 뽑을 수 있는 무과가 보다 좋지 않소이까?”

송거신이 반론했다.

그러나 세훈은 이것만큼은 져 줄 생각이 없었다.

군대의 편제를 신식으로 바꾸고 육군과 해군을 나누었으니 수륙의 구분 없이 단순히 장수만을 선발했던 무과로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 조선의 군대가 이제 기존의 활과 창을 위주로 한 군대에서 화포와 기마대를 앞세운 병력으로 전환되고 있소이다. 그 편제 또한 새로워졌으나 그것을 맡아 줄 장교들이 부족한 현실이외다. 그리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뒤에야 이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여가 생각한 것이 육군과 해군에 각각 육군진무관(陸軍振武館)과 해군상무관(海軍尙武館)을 개설하여 진사, 생원시의 합격자들이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는 것처럼 무과 급제자는 앞으로 이곳에서 학습을 반드시 수료케 할 생각이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진사, 생원시 합격자들이 성균관에서 수학하는 것처럼 문과 급제자들도 한림원에서 2년간 수학시킬 생각이오.”

이렇게까지 세훈이 강경하게 나오자 대신들도 그저 제도의 개선 정도로 여기고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군역을 반드시 지도록 하되, 그 기간은 2년간으로만 하고 대신 반가의 자제들은 3개월간 본인의 선택하에 육군조련소(陸軍調練所)와 해군조련소(海軍調練所)에서 교육을 이수하고 병졸이 아닌 참교(參校)로 복무케 하시오. 다만 나라의 예산이 이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전례를 따라 자식이 여럿인 집은 맏이를 군적에서 빼는 대신 그에 합당하게 군포를 내도록 하고, 나머지 손실분은 나라에서 보전하도록 하시오. 다만 지금 나라에서 편성된 필요 인원 이외에는 무리해서 뽑지 말도록 하고 이것은 당장 시행하기 곤란한 면이 많으니 요동에서 무역하는 세가 걷혀서 축적이 되면 그것으로 시행케 하시오.”

조선 초의 군역은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였고, 사족(士族)의 자제들도 잡색군으로 군역을 지던 시기였으니 병이 아니라 현대의 하사관급에 준하는 참교로 복무시킨다는데 큰 불만이 있을 턱은 없었다.

다만 예산 등의 문제로 진정한 개병제는 아직까지 실행하기 힘든 면이 있었고, 세훈도 장기적으로 개병제를 정착시켜 군대에 지나치게 힘을 실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군역의 형평성을 생각하고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위기를 따져 볼 때 우선은 시도는 해 봄직한 일이었다.

이렇게 육군만 개편된 채로 미완이었던 군제의 개편을 마무리 짓고 외전(外殿)의 윤허를 받아 1408년, 다가오는 무자(戊子)년부터 시행하도록 비변사에서 예비하여 군무조칙(軍務詔勅)이란 이름으로 그 대강이 내려졌다.

이로서 아직까지 부족하고 형식적인 부분에 치우친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세적인 군대 체제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전략)…….

고렇게 말을 해놓고 보니, 기실 白氏도 할 줄 아는 것이 업서서 무릎팍을 고냥 쭈그리고 앉아 하늘을 보며 매양 구름만 기워 보다가, 아, 거 사는 것이 고생스럽구나, 하고 한탄만 했던 모냥인데.

그때에 윗마을에 김 진사라는 냥반이 있었다.

이 어른이 서울서 조정에서 가르치는 학문을 배워 본 사람이라. 아, 이 백씨라는 일자무식의 농군을 불러다 놓고 학문을 鍊磨薰陶하라느니 하며 헛바람을 잔뜩 불어 넣어다가 시대가 바뀌었는데 집에서 놀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해 보지 않겠냐며 충동질을 시켜대니, 이놈의 백씨가 어디서 들은 왈줄로 공자를 읊어댄다.

“아, 그냥, 어르신도 학문을 하셔서 잘 아시겄지만, 공자님도 말씀하시기를 소인은 한가로이 居할 때 못된 짓만 한다고 하시니.”

이 김 진사란 냥반이 거기에 맞장구를 넣는다.

“아 고럼, 고럼, 공자님 하신 말씀이 거기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지. 小人閒居爲不善이라구. 그런데 그 자왈도 맞는 말이야. 인자는 것보다 제 몸에 맞는 재능을 익혀 立身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야.”

백씨가 그 진사 하는 말 들어보니 다 백이면 백 맞는 말 같고 해서, 한량 노릇 하는 진사댁에 매일같이 줄을 대어 들어가니, 결국 둘이 작당해서 김 진사가 돈을 대고 백씨가 가게를 열어 물건을 한 번 팔아보겠다고 나섰는데, 당시 한성부중에 제일가는 시장이 모개전이다.

모개전이라 하면 도성의 남문 밖에다가 당대에 호령하던 珍良公이 장사한다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편 큰 시장인데, 말 그대로 물건을 크게 떼어다가 손객이 아닌 장사치들한테 파는 시장이었다.

그렇게 장사를 크게 열어다가 한탕 해 볼 요량으로 두 인물이 합심하여 판을 한 번 벌려보는데…….

…(후략)…….」

―이기문(李麒雯)작, 한성별곡(漢城別曲) 中

건안(建安) 21년 4월, 서울, 진조출판(珍鳥出版)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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