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해동풍월(海東風月)
1408년 계춘(季春)
대명국 산동성(山東省) 요동도사 직하(直下) 동녕관(東寧關).
요동이라 불리는 곳은 예로부터 중국에서 보자면 산해관(山海關) 너머 요하(遼河)의 동쪽이다.
명대에 이르러 홍무제 때 이곳에 있던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를 폐지하고, 바다 건너 산동성에 귀속시켜 요동지휘도사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스물다섯 개의 위소(衛所)를 설치하여 군치(軍治)를 행하게 되었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요동을 넘어서 여진족들에게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압록강 유역에 건주위를 설치하고, 보다 나아가 노아간도사(老兒干都司)를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노아간도사는 그 직책만 걸어 놓았을 뿐 실제로 위군을 파견하는 데에 이르지는 못했다.
게다가 지난 을유전역으로 인하여 명군은 이곳에서 결국 전부 철수해 건주위마저 조선에 내어 주고 변장(邊牆) 안쪽으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요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 여진, 명이 상호 교역할 수 있는 시가(市街)를 열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명이 이를 받아들여 요양(遼陽) 동북쪽에 홍무 19년(1386년)에 설치한 동녕위(東寧衛)의 군역(軍役)을 철수하고 조선에 내어 주니, 조선은 동녕위를 동녕관(東寧關)으로 개칭했다. 이로서 동녕은 조선이나 여진에서 심요(瀋遙)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조선 상계의 전방 기지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 동녕이라는 지명은 옛 원나라에서 설치했던 동녕총관부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요동지역 중에서도 특히 이곳 동녕에는 고려 유민이 많이 살았고, 그 다음이 여진 출신으로 명조에 귀부(歸附)해 온 사람들로 그 수가 한족의 숫자를 훨씬 웃돌았는데, 그나마도 명나라에서 동녕에 설치해 두었던 위소(衛所)를 철수하고 그 병력과 식솔을 개주위(蓋州衛)로 옮기고 나서는 그 주민들 중에서 한족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 동녕관에 성린(成潾)이라는 자가 살았는데, 옛 원나라 심왕부(瀋王府)에서 벼슬 살던 고려인의 후손이었다.
그 백부(伯父)가 성환(成煥)으로 명나라에서 보충통사(補充通事)를 지내고 좌군도독부경역(左軍都督府經歷)의 관직을 살았던, 그야말로 원과 명의 왕조를 이어서 이곳 요동에서는 고려인 중에서도 명문의 벌족(閥族)인 집안 사람이었다.
성린은 비록 문재는 트지 못했으나 그 집안에서 물려받은 재산이 많고 재리(財利)에 밝았었는데, 때마침 을유전역이 끝나고 이곳에 조선의 상병(商兵)이 모두로 함께 들어오니 그것을 기회로 여기고 계속해서 장사를 벌여 볼 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에서 물건을 받아 올 방법이 없어 계속해서 고민만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민 끝에 패물을 짊어지고 찾아간 것이 동녕관 도위(都尉) 김종서(金宗瑞)의 사저였다.
“저는 원래 고려 사람으로 이제 이곳에 조선의 상청(上廳)이 설치되었으니, 그간 모아 둔 재산으로 장사를 해 볼 요량인데 조선의 상관(商館)과 연이 닿지 않아 도무지 시작을 해 볼 수가 없나이다. 김 도위께서 어찌 좀 처결해 주실 수 없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뵈었으니 한 번 살펴봐 주십시오.”
성린은 처음부터 저자세였다.
시류를 파악할 줄 아는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는 성린은 실지로 동녕관 안찰사인 황희보다 이 젊은 김종서라는 관리가 동녕관의 실무를 거의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꿰고 있었다.
그러나 김종서의 반응은 별로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나는 사적인 부탁은 받지 않소. 거기에 패물까지 짊어지고 와서 청탁을 하니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소이다. 관리가 오탁(汚濁)하여 뇌물을 받아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나라에 해가 되지 않고 사사로운 일일지라도 해줄 수가 없소. 그러나 패물을 물려가고 나중에 몸만 따로 찾아오시오. 그때 이야기를 다시 들어주겠소.”
김종서는 을유전역이 끝나자마자 조정에 출사한 인물로 아직 젊은 패기와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순수한 마음으로 조정의 일에 종사하기로 마음먹고 한성에서 수천 리 길인 국경 밖 동녕관까지 와서 전심전력으로 일을 보고 있는데, 청백리를 지향하는 그에게 뇌물청탁이야말로 절대 받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의 반응에 성린도 적잖이 당황해했는데, 당연히 관리에게 무언가 부탁할 때 적당한 성의를 보이는 것으로 아는 그에게 김종서의 끼끗한 자세는 내심 탄복스러운 것이었다.
그 뒤로 성린은 보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부터 김종서를 찾아가서는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업무를 거들어 주고 사람을 소개시켜 주며 그저 옆에 머무르기만 했는데, 마치 관직이라도 얻어서 동녕관의 관부(官府)로 등청하기라도 하는 것 같을 정도였다.
김종서도 내심 그가 뇌물을 물리고 정성으로 대하자 눈여겨 보았다가, 어느 날 언질 없이 공양지(孔諒知)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게 되었다.
“김 도위님의 소개로 찾아온 공가라 하외다. 성 공께서 계시면 한 번 뵙길 청하오.”
성린은 김종서의 소개란 말에 버선 바람으로 뛰어 나와서 공양지를 맞아들였다.
“김 도위님의 소개로 오셨다 하셨소? 어서 들어오시오. 분명히 김 도위님이 보내셨으니 귀인이 분명 하올시다.”
이렇게 일이 되어 둘이 주안상을 놓고 상담(商談)을 시작하는데, 공양지 또한 충청도 공주(公州) 사람으로 원래 반가의 서출이었으나 탐라군이 공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그 군중에 지원하여 역무를 돕다가 한성에 들어가서는 오상복을 만나 상행계에 가입하고 장사 밑천을 조금 차금(借金)해다가는 의주에다가 객상(客商)을 차렸다가, 이번에 좀 더 큰 장사를 하기 위해 동녕관으로 찾아온 사람이었다.
동녕관은 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오상복을 위시로 한 나상보다는 송상(松商)의 객주들이 먼저 들어와 장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 주요 품목은 인삼, 말, 모피, 한지(韓紙), 삼베 등으로 전통적으로 명과 교역하던 품목 위주였다.
반대로 나상은 영파로 가는 바다 무역으로 명에다가 발화기, 비누, 면포 등을 내다 팔았는데 이 때문에 상호 간에 서로 큰 경쟁 없이 독점에 가까운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양지는 그런 무역의 틀을 깨고 장사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동영주상행계를 통해 일전 조정에서 불하해 준 다축방적기 중에 10대를 받아와 의주에다가 공방을 차려 놓고 조정에서 관리하는 목화밭에서 목화를 정기적으로 들여와 면사(綿絲)를 짜내어 포(布)를 지어냈다.
애초에 공장을 의주에 차렸기에 그간 평안도 일대에 조금씩 장사를 했었는데, 평안도에 진주한 진위대와도 군복을 납입하기로 거래를 트고, 조금씩 그 규모를 키워 오던 차에 아주 요동으로 나가 명으로 면포 장사를 해볼까 싶어 찾아온 것이다.
그에게 이곳에서 장사를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고 마땅한 사람을 물색하던 차에 김종서의 호의로 성린과 연결된 것이다.
이 지역에 정착한 지 몇 대를 넘어가는 호족(豪族) 출신인데다가 장사에 관심이 있고 고려 출신의 조선말을 할 줄 아는 동족이라는 점이 가장 마땅한 사람이라고 공양지도 여기고 있었다.
“지금 송상에서 파는 품목 중에 면포는 큰 비중이 없소이다. 송상에서도 이 방적기라는 놈을 불하받아서 무명을 자아내다 팔고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경기와 풍해도, 강원도, 동북면 일대에만 내다 팔 뿐 이곳 동녕까지 가져올 생각은 못하고 있소이다. 물론 이곳에 송상들이 크게 자리 잡아서 특히 인삼 장사를 크게 하고 있소만, 이 무명이란 놈을 방적기로 쉽게 자아다가 싼값에 팔면 그걸 살 사람이 한둘이 아니오. 먼저 들어가서 파는 사람이 이기는 셈이니 성 공께서 쌀 천 섬을 내어다가 이곳에 상점을 크게 내어 주면, 내 의주에서 이곳으로 보내는 역참(驛站)으로 객원들을 심어 놓아 필요한 대로 바삐 보내 주겠소.”
성린이 공양지의 말을 들어 보니 그럴싸한 제안이었다. 어차피 장사만 시작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차에, 이런 좋은 동업자를 찾고 나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동녕관 성내 목 좋은 곳에 크게 포점(布店)을 열고 우선 염색이 되지 않은 백포(白布)부터 받아 팔기 시작하니, 여기 있는 포들은 다 베로 자은 것이 아니라 무명으로 지은 것이라 그 품이 좋은데도 값은 베의 반절밖에 되지 않으니 이내 산해관을 넘어 장사하러 들어온 명나라 상인들과 모피며 건육(乾肉), 양마(良馬)를 거래하러 들어온 여진족들이 모두 혹해서 면이 순식간에 동날 정도로 장사가 성황이 되었다.
“이거 공 선생 덕분에 좋은 장사를 하는 것 같소이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물건을 다 못 팔 지경이오.”
그러나 장사가 잘되더라도 걱정거리는 있었다.
공양지는 이즈음 동영주상행계에서 나와 의주에 심요상행(瀋遼商行)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면직물 생산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방적기 10대를 밤낮으로 돌려도 동녕관의 성린이 요구하는 수요량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단행한 것은 방적기 한 대를 해체하여 의주에서 유명한 공인(工人)인 계단우(季旦宇)에게 이것을 복제하는 일을 맡긴 것이었는데, 원래 불법으로 삼을 만한 일이었으나 공조에서 따로 방적기를 불하해 줄 때 단서 삼은 것이 없었기에 공양지가 모험 삼아 결국 일을 벌인 것이다.
계단우가 결국 일에 성공하여 의주에는 따로 방적기를 만들어내는 공방이 들어서고, 그 방적기를 죄 받아와 공양지가 공장의 규모를 늘리니 거의 그 복제한 방적기가 150여 대의 규모가 되어 조정에서 지은 도성 서대문 밖 복사골[桃花洞]의 직물창 다음으로 조선팔도에서 제일 규모가 큰 방적 공장이 되었다.
이 복제한 사실이 호조에 들어가서 최해산이 이 문제를 어찌 처결해야 할지 고심을 하다 결국 세훈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어차피 지적재산권이니 특허권이니 하는 것들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 이런 복제 방적기를 딱히 제제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세훈은 관청에 따로 문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주의를 주고, 원하는 만큼 그 방적기를 생산해서 면직물을 뽑아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나라에서 전부 뒷받침할 수 없는 자발적인 산업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여가 만든 것이긴 하나 이제 그것으로 내가 돈을 벌기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쓰여져야 할 것이네. 그 방적기를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면 마음껏 만들어 팔게 해 주어야지. 그만큼 기계를 만들어다 면직물을 팔면 목화라는 놈은 나라에서 지금 전매를 하고 있으니 그만큼 세수가 늘 것이오, 거기에 나라 안에서 팔기보다 명나라에 가져다 파는 것이니 또 세금이 추가로 들어와 다른 일을 도모할 자산이 되어 줄 것이니 말릴 것이 무에 있겠어.”
최해산은 세훈의 말에 납득하고, 들은 대로 심요상행의 공양지에게 일러 주었다.
공양지는 그 뒤로 아주 계단우에게 자금을 빌려 주어 계단우에게 방적기 생산을 전담하게 하고, 자신은 그 방적기로 면공업에 전업하였다.
그곳에 들어가는 목화의 생산은 거년(去年)에 안주(安州)에 새로이 편성되어 주둔하게 된 제8진위대의 둔영(屯營)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평안도 일대에서 새로운 군역제에 따라 징병된 병사들이 이 목화를 재배하여 진위대에서 이것을 방적공장에 내다 팔고, 이 수익의 6할을 진위대의 경비로 사용하여 국고의 부담을 줄이고, 나머지 4할은 중앙 정부에 납입하여 세수(稅收) 처리되는 방식이었다.
가끔은 이 목화의 대금을 완성된 군복으로 받는 조건으로 대신해 주기도 했는데, 양쪽 모두 손해 볼 것이 없는 구조였다.
세훈은 전매 품목의 생산권을 지방 군영으로 내려보냄으로서 징병제의 시행에 따르는 세수의 부담을 조금 더는 동시에, 산업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효과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상계와 군영의 합작으로 생산된 면포는 그대로 새로이 의주에서 동녕관까지 가는 길을 따라 신설된 소위 동팔참(東八站)이라 불리는 역로를 따라 안전히 보내져 동녕관의 성린에게 넘겨진 뒤 성린에 의해 명나라와 여진 상인들에게 팔려 나갔는데, 성린과 그 아래에서 일하는 상인들이 소위 요상(遙商)이라 불리게 되어 이곳에서 송상(松商)과 함께 동녕관의 시장을 양분하게 되었다.
송상도 무리하게 면포 시장에 뛰어들지 않고 종래 하던 대로 인삼을 중심으로 한 교역에 크게 치중했는데, 이로서 요동을 거쳐 나가는 무역 자금은 서로 비등하게 분할되어 요상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다만, 이런 사정으로 인해 거점 지역이 다른 나상은 더 이상 동녕관으로 뛰어들지 못했는데, 오상복은 이미 조선업을 벌여 놓아 상선이며 군선을 생산해 내는 일에 신경이 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 상인들은 죄 영파 무역에 투자하여 발화기나 비누를 생산해 내느라 정신없으니 먼 동녕까지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탓도 있었다.
한창 면 장사에 이렇게 심취해 있는 성린에게 여진족 후리가이씨의 족장이자, 일전 을유전역 이후로 건주위가 조선에 복속되어 건주현남(建州縣男) 건주병마도절제사(建州兵馬都節制使)의 벼슬을 받은 아하추가 찾아온 것은 그해 3월의 일이었다.
아하추는 성린의 장사하는 양을 쭉 지켜보다가 그와 거래를 본격적으로 틀 심산으로 찾아온 것이다.
“내가 우리 후리가이 일족과 그 주변의 내게 복속한 여진 일파에서 생산하는 마유주와 건육(乾肉), 그리고 말을 내다 팔고 싶은데 그 계산을 죄 성 공이 해 주었으면 하네. 그리고 그 댓가로는 면포를 지불해 줘도 좋고, 그 물건에 상당하는 곡식이나 발화기 같은 것으로 바꿔 줘도 좋으니, 적당히 그 거래 대금 중에 1할이나 2할 정도를 가져가고 내게 남은 것을 주면 되네.”
아하추가 이끄는 후리가이족은 압록강 연안에서 가장 강성한 여진 일파로, 이를 잡게 되면 동녕으로 들어오는 여진 무역의 거의 대부분을 점유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나이다. 내다 파실 물건을 언제고 이곳 동녕으로 보내주시면 제가 직접 그 물건을 처분하여 한 치 속임 없이 그 값을 쳐서 보내드리겠나이다.”
일이 이쯤 되니 고려 유민 출신으로 심요 지역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은 성린이 되었다.
동녕관에 나와 있는 황희, 김종서를 비롯한 관리들과 함께 조선에 복속된 건주위의 여진족 실세인 아하추와 그곳에 주둔한 파견대의 책임자인 안정재까지 성린을 독려하고 지원하니,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채 일 년이 못되어 큰 성공을 이루고 거상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런 상인들이 조선 각지에서도 점차 성장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주의 나상(羅商)과 개성의 송상(松商)은 이때 벌써 양대 거상으로 국제 무역의 중추가 되어 있었고, 이외에도 남대문 밖 모개전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도매망을 구축하고 있는 경상(京尙)이 그 다음이오, 무자년이 되면서 동래에 설치된 왜포(倭浦)에서 일본과의 무역에 일찌감치 뛰어들어 독점 시장을 구축한 부산의 내상(來商), 아직 조선에 복속하지 않은 여진족과 동북면에서 그 상업을 일으킨 함주의 함상(咸商), 약령시를 열어 약재와 낙동강변의 곡물 거래를 중심으로 성장한 달성의 구상(丘商), 충청도에서 면공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공주의 호상(湖商) 등이 성장하니 이른바 지역적으로 상단들의 할거가 시작된 셈이었다.
1408년 맹하(孟夏)
조선국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풍산현(風山縣).
천칠개(千七介)는 안동부 풍산현에서 소작 살던 집의 맏이였다. 아버지 두복(斗福)은 천상 상놈으로, 그 윗대로부터 대를 이어 농사만 지어 온 전형적인 양민 집안이었다.
천칠개에게는 가족이 아버지 외에도 여럿의 형제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키워 낸 그 형제가 4남 2녀였다.
“아부지, 몸은 좀 괜찮으신겨? 죽을 좀 자사 왔는데 좀 드셔 보시소.”
아버지 천칠개는 이제 나이가 오십 줄에 접어들어 몸이 부쩍 노쇠했는데, 폐병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 천칠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야야. 내는 괜찮다. 가서 볏자리나 좀 봐라. 인자 한참 벼가 자랄 때인데 혹시 밭이 푸성지기라도 하믄 고마 이번해도 그냥 끝이다.”
“밭은 상개(上介)랑 막내가 가서 보고 있니더. 아부지 돌본다고 들어왔으니 고마 죽이나 좀 드이소.”
천칠개의 말에 자리에 누운 천두복은 그저 말없이 퍼주는 죽을 억지로 떠넘길 뿐이었다.
자리에 누워 있으나 천두복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논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평생 지어 온 농사였다. 자기 땅은 없고 그저 대갓집의 땅을 소작 부쳐 먹고 있으나 열심히 한 해 일해야 먹고 살 만큼의 곡식을 일궈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농사일을 해야 할 자신이 자리에 드러누우니 자식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저 좌불안석일 따름이었다.
“고마 신경 쓰여가 넘어가도 안 한다. 칠개야, 니가 맏인데 아무래도 니가 나가 봐야 안 되겠나?”
“아부지. 거 참 그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인겨. 자리에 누워가 자꾸 농사만 걱정하면 우야능겨. 고마 좀 있다가 함 보고 나가 볼 테니까 인자 좀 누워서 쉬시소.”
“니가 어련히 잘 알아서 안 하겠냐만서도…….”
천칠개는 누워서도 농사 생각만 하는 아버지 걱정에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듣기로 폐병은 얼마를 견디다 가느냐의 문제지 살기 힘든 병이라고 들어 왔지만, 막상 아버지가 누우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천칠개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데 아직 스물여섯 먹도록 혼처도 못 구해 장가도 못간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 그거 참 돌아 삐겠네. 올해도 풍년은 아니고, 소작 부친 거 생원댁에다가 갔다 줘 뿌면 뭘로 또 먹고 살아야 되노…….’
그렇게 답답한 심정으로 논에 나갔다가 동생들을 데리고 저녁 무렵이 다 되서 들어올려고 하니, 집 앞에 웬 나졸 하나가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까지 무슨 일인겨?”
“칠개야, 미안하다. 위에서 병적 조사해가 고마 군역 살라고 니 명단이 올라왔다 안 카나. 전에는 미루거나 군포를 갔다 내면 됐는데 인자는 얄짤 없이 니 가야 된다.”
“갑자기 뭔 군역이라 캅니꺼?”
“위에서 하는 일이니 난 모르재. 고마 인자 안동에도 좀 있으면 진위대(鎭衛隊)라고 하나 부대를 포설하나 보든대, 그거 때문에 군역 살 나이가 꽉 찬 아들 다 불러 모으라 카고 안 있나.”
“우리 아부지는 우야고요?”
“니 동생 상개도 인자 나이가 스물도 넘었고 하니까 가가 집안은 돌봐야지. 우에 생각하면 니 입 하나 더는 거니까 괘안을 수도 있다.”
“우에 못 빠지는겨?”
도무지 아픈 아버지와 동생들을 두고 군역 살러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천칠개는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나장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니 소작 받아먹는 유 생원 댁, 그 집 장남 되는 도령 알재? 전에 와 안 있나 한양에 과거도 보러 왔다 갔다 하던.”
“예, 성보 도련님예. 잘 알지예.”
“그 도령도 고마 군역 살러 조련소인가 뭔가 간다고 하는데 니도 빠지는 게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나. 힘 있는 집에서도 고마 몬 빼고 나라에서 가라는 대로 자슥들 보내는데, 없는 놈은 더하지.”
천칠개는 이쯤 되니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 나장에게 사정해 봐야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일찌감치 안 것이다. 그저 군역으로 협박해서 군포나 더 뜯어내러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 확실해졌다.
“그럼 언제 가야 합니꺼?”
“오월 되면 바로 들어가야 된다. 요즘 군역 살러 가는 걸 입대(入隊)한다 카이께. 여 안동부 읍성 밖에다가 지금 땅 다지고 있는데, 그 진지가 완전히 들어서면 그때가 니 입대하는 날이다.”
그렇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5월이 되어 안동에 새로 생기는 진위대의 군영으로 천칠개는 입대하게 되었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군역은 2년밖에 안 된다고 했고, 그가 군역을 살러 들어가자 관부에서 집으로 위로금 삼아 쌀 2섬을 보내 주었다고 했다.
안동 진위대는 제9진위대로, 진위대는 계속해서 을유전역 때부터 지역 단위로 증설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청천강에서 압록강까지를 책임질 제8진위대에 이어, 경상도 북부를 방비할 목적으로 안동에 진위대가 창설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병력 증원이 불가피했고, 그동안 군역을 실시하고 있지 않던 이들을 병적을 조사해 불러 모으게 되었던 것이다.
천칠개가 입대하자마자 처음 받은 것은 이상하게 생긴 군복이었다.
단추라는 것이 달린 군복을 처음 받자마자 천칠개는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몰라 당황했고, 주변의 동기들도 마찬가지라 이내 조교에게 불려가 기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옷을 입는 법을 익히고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훈련은 두 달 동안 이어졌는데 안동, 예천, 풍기, 문경, 의성, 봉화 등지에서 징집되 온 천칠개의 동기들은 약 천 명으로, 두 달 뒤에 훈련이 끝나면 다음 기수가 입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천칠개는 안동 진위대 제1기의 병사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옷을 입는 법을 익히고, 직접 앞으로 살게 될 막사를 짓는 작업에 돌입해 오전에는 체력을 기르는 훈련을 받고, 오후에는 막사를 짓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자 보총이라는 것을 받아 총을 쏘는 훈련을 해 보게 되었다.
천칠개는 처음에 그 총에서 탄알이 나갈 때의 소리에 깜짝 놀랐고, 그 다음에는 백 보 밖의 거적때기를 누더기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에 놀랐다.
그렇게 어렵사리 훈련을 받고 이등졸의 계급을 받아 진위대의 보병으로 편재되게 된 천칠개였으나, 실상 마음은 아직까지 차도를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안부 걱정과 농사일에 가 있었다.
그나마 조금 심려를 덜 수 있었던 것은, 농사 중에 어렵게 시간을 내 안동의 진위대영까지 찾아와 콩과 보리를 싸다 준 동생 상개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이야기를 좀 들었는데, 나도 언젠가는 군역 지러 가야 한다고 하니더. 한 집에 한 명이 아니라 나이가 찬 남정은 다 군역을 져야 하는데, 대신 형제간에 그 기간은 안 겹치게 해 준다고 합디더.”
상개는 주섬주섬 싸온 콩을 풀어 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거 고마 잘 갖고 있다가 입 심심하거들랑 좀 드시소. 군역지는 동안 밥을 우에 해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 거둔 거니까 집 생각 나면 좀 드시는 게 좋지 안 겠는겨.”
“고맙다. 아부지는 좀 어떠시노?”
“약간 좀 나아진 거 같대예. 아무래도 행님이 장가도 몬 들고 그 나이에 군역 지러 가니까 농사보다 그게 걱정이 더 되나 보대예. 근데 여기는 뭐 논때기처럼 나가서 보겠다고 우기지도 몬하니까 덜 움직여서 몸이 좀 괘안아진 거 같기도 하고.”
“니는 요즘 좀 어떻노?”
“농사 좀 둘러보고 낮부터는 저수지 파러 가니더.”
“저수지?”
“내년부터 그 저수지 물을 잘 가져다가 이앙법인지 먼지 해야 한다고 위에서 내려왔다는데, 모내기라고도 한다 카니더. 나랏님이 하라고 했다 하니까 뭔지도 모르고 하긴 하는데, 그래서 그 모내기 하는 법이랑 골뿌림법이라고, 밭두둑을 높이 쌓아 가지고 고랑에 씨 뿌리는 게 좋다고 카대예. 그게 겨울바람을 덜 탄다고. 논농사는 그래서 앞으로 모내기로 짓고, 밭농사는 골뿌림으로 지으라고 캐가지고 그래 하니더. 잘만 지으면 흉년도 피해 가고 수확도 많이 한다 카니까 그렇게 하는게 안 낳겠니꺼.”
동생의 말에 천칠개는 얼마 전 진위대의 어떤 참교(參校)에게 들은 말이 기억났다. 그 참교의 당숙이 조정에 출사해 호조(戶曹)에서 일하고 있는데,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는 책의 편수가 끝나는 대로 이 부대에도 내려와 농사일을 시험해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책에 담긴 내용은 관아를 통해 나라에서 직접 장려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 안동부에서도 관내의 여러 현(縣)들에 그 책과 요령을 내려 저수지도 파고 농사법도 전수하는 모양이었다.
“그거 하믄 좀 수확이 낳겠나. 안 그래도 우리 부대에서도 조만간 그거 한 번 해 볼 거 같다고 이야기는 돌든데.”
“나라에서 전국적으로 하는 일이니까 안 괘안캤니꺼. 이야기 들어 보니 확실히 손을 좀 타긴 해도 걷이는 좋겠대예. 뭐 말만 해가 알겠니꺼. 내년에 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니꺼.”
“그래. 인자 내가 집에 없으니 니가 우리 집을 잘 끌어 나가야 된다.”
그래도 집안에 별일 없다니 천칠개는 그저 안심이었다. 아버지의 병환도 더 악화되지 않고 동생이 잘해 주고 있으니, 농사일도 그저 잘되기만 바랄 따름이었다.
그 해 무자(戊子)년, 1408년 조선에서는 지난해에 합문대령(閤門待令)하여 받은 명대로 군적을 토대로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지방에 설치되는 진위대에 병력이 충원되었다.
호조에서는 농업을 육성하고 장려할 방책을 강구하여 섭정공의 명대로 이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앞으로 5년간 전국적으로 저수지를 확충하여 비가 안 올 때도 모내기를 해서 물을 댈 수 있도록 저수지를 여유가 되는 곳부터 확충하도록 했다.
그렇게 저수지가 확충되면 다음 해부터 바로 이앙법을 실시하도록 했으니, 그중에는 진영이 설치된 군대의 둔전(屯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세세한 방법을 세목이 담아 편찬한 것이 「농사직설(農事直說)」이었는데, 세훈이 실제 세종 때에 편찬되었던 관찬 농업서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이었다.
이 농사직설이 전국 관청에 보급되고 저수지를 확충하고 이앙법을 실시할 것이 장려되니, 조정에 바치는 세수가 줄더라도 우선적으로 지방 관아에서는 저수지를 만들도록 하고, 여기에 안정화된 지방 진위대에도 적극 참여토록 명하도록 했다.
거기에 많은 토지를 보유한 지방 향반(鄕班)들을 진위대의 무관들로 하여금 조금 압박하여 이약(里約)을 조직해 저수지를 만드는 돈을 일부 내도록 했다.
이에 따른 불만이 없잖아 있었으나 우선은 조정에서 섭정공의 뜻대로 일을 진행시키니,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향반들은 그 불만이 겉돌 뿐이었다.
거기에 먼저 시범적으로 이앙법을 실시한 곳에서 그 효과가 입증되니 저수지를 만드는 데에 돈을 대는 것도 결국 제 땅에 좋은 일이라 조정의 뜻대로 곧 이 이앙법은 삼남(三南)을 위주로 빠르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1408년 계추(季秋)
조선국 한성부.
강희수(康熙秀)는 화학전습원의 1기 졸업생이다.
아버지는 의관(醫官)이었으나, 형이 그 대를 이어 의술을 배우기에 강희수는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아보다 군으로 입문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때마침 화학전습원이라는 것이 공조산하에 개원되어 무턱대고 찾아가 산학(算學)시험을 보고는 덜컥 붙어서 전습원 학도(學徒)로 2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어찌 보면 전습원의 첫 졸업생이라는 것은 자부심이 될 수도 있으나, 그만큼 아직 체계가 잡히지 못한 교육을 받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1년차에는 「산학계몽(算學啓蒙)」, 「물학본원(物學本源)」, 「야금통종(冶金統宗)」, 「화학소론(化學小論)」등의 교재가 간신히 준비되어 이것을 통해 기초적인 과학의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희수가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화학소론」을 통해 배운 <화학일반(化學一般)>의 과목이었다.
김세훈의 감수를 받아 최해산이 편찬한 「화학소론」은 원소론(元素論)의 대강을 제안하면서 아직 기술이 미치지 못해 실증(實證)할 수는 없으나 합리적으로 강구해 볼 때 그것이 옳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질의 기본 단위는 원소, 혹은 그보다 더 작은 입자(粒子)가 될 수 있는데, 만물은 이 원소들의 결합에 의해 구성이 되며, 이 결합 상태를 궁구(窮究)하는 학문을 화학(化學)이라 하여 그 학문을 앞으로 연마할 학유(學諭)를 길러내는 것을 그 책의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강희수는 원소론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지만, 책의 설명이 조목조목 이치가 맞는지라 이내 책을 달달 외우듯이 빠져들게 되었다.
2년 차가 되자 강희수에게는 교관이 부족한 관계로 3일만 수업에 나가고 3일은 홀로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강희수는 2년을 마치고 화학전습원 교관으로 남아 후기 학도들을 가르치면서 학문을 계속 연마하기를 희망했다.
그의 동기생 서른 명 중 전습원에 남기를 희망한 사람은 겨우 그를 포함해 셋이었는데, 다른 두 명은 각각 2년 차에 산학(算學)을 전습(傳習)한 조진(趙進)과 물학(物學)을 전습한 변서두(卞敍斗)였다.
당초 공조와 화학전습원에서는 이 외에도 야금(冶金)을 전습한 차기 교관도 뽑기를 희망했으나 마땅한 지원자가 없어 야금을 배운 이들은 모두 인천 제철소로 배속받아 가고, 전습원에는 이렇게 강희수, 조진, 변서두의 삼 인만이 남아, 종9품의 학유(學諭)를 제수받아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강희수는 특별히 이론의 실증에 매달렸는데, 일전 최해산과의 대화에서 허황된 말로 사람을 감복시키기는 쉬우나, 그것이 진정한 진리가 되려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최해산도 그이야기를 김세훈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런 관점은 강희수가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화학소론」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런 강희수였기에, 졸업하자마자 사고를 하나 치고 말았다.
「화학소론」에서 간략이 그 가능성을 언급해 둔 보일의 법칙을 증명해 낸 것이다.
미래에서 화학과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한 경력이 있는 세훈이기에 「화학소론」에서 간략히 언급해 두고, 그 식을 정리해 두었는데, 강희수가 이것을 직접 실험 도구를 짜다가 실험해 관측 자료를 만들어다가 3개월간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산학과 학유가 된 조진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수식으로 만들어 정리하니 다음과 같았다.
壓乘積 同 甲
여기서 壓은 기체의 압력, 작은 乘은 곱셈의 표시, 積은 기체의 부피, 작은 同은 이퀄‘=’의 의미로 사용되어, 마지막 甲은 일종의 비례 상수를 나타내는 표지로 사용되었는데, 기체의 양과 온도가 일정하면, 압력[壓]과 부피[積]은 서로 반비례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고 새로이 수식화시킨 것이다.
이런 수식법은 조진이 화학전습원을 찾아온 세훈에게 특별히 미지수의 개념에 대해서 언질을 받고, 수식화(數式化)에 대한 조언을 받은 뒤에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것으로 강희수도 조진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증명을 정리하는 데에 그의 수식법을 사용하였다.
세훈은 이 결과에 적잖이 감탄했는데, 17세기 화학의 여명기에 보일이 증명할 정도의 법칙으로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치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나, 아직까지 화학이라는 것이 연금술(鍊金術) 내지는 도가(道家)의 단술(丹術) 비슷한 것에 머물러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비록 간단한 개념에 대해 언질은 받았다고는 하나 독창적으로 증명해 낸 것은 대단한 성과였기 때문이다.
당장 이 법칙을 응용할 수 있는 곳은 없으나 이런 결과들이 하나하나 쌓여 가면 기술들과 결합해 묵직한 성과들을 내게 될 터였다.
세훈은 그에게 특별히 전습원에서 강의를 하는 동시에 화학사(化學司)의 종7품 직장(直長) 벼슬을 내려 화학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틈틈이 염료서(染料署)에도 등청하여 합성 염료를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합성 염료의 연구는 진척이 없었는데, 실제로 이런 합성 염료들은 많은 화학적 지식과 기술들을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훈이 만들어 낸 모브 염료 이상의 것을 지금 더 이상 성취해 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다만 강희수는 그 염료를 만드는 공정을 잘 살펴 익히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화학적 실험과 생산의 관습적인 방법을 몸에 익숙히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강희수는 그 동안 이것을 서책에 정리하면서 아닐린은 남주(藍澍)라 이름하고, 모브에도 자단(紫丹)이라 이름 붙여 세훈이 만든 것이라 기록했다.
강희수가 합성 염료보다 주목하고 계속해서 실험을 거듭한 것은 기체에 관한 것이었는데, 보일의 정리를 증명해 <압적식(壓積式)>이란 이름을 붙인 뒤로 이 기체에 관한 것은 강희수를 사로잡았다.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불가결한 요소인 공기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것은 그에게 가장 흥미로운 일이 되었다.
이렇게 강희수를 비롯한 화학전습원 졸업생들은 바로 관료로 등용되어 공조나 호조의 각 관청으로 나가 그 실무를 돕거나, 전습원 학유로 남아 후배들을 가르치고 특출 난 자들은 연구를 하도록 지원받아 이런저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조선에도 차츰 과학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는 것이다.
1408년
명(明) 영락(永樂) 6년 맹동(孟冬)
대명국 남직례(南直隷) 회안부(淮安府) 술양현(퓖陽縣).
회안부(淮安府)는 명나라 도읍인 응천부를 둘러싼 직례(直隷) 안에서도 도읍으로부터 수백 리 떨어진 외곽에 설치된 부청(府廳)이었다.
남쪽으로 회수(淮水)를 끼고 있어 그 이름이 회안(淮安)이 되었는데, 그 회안부 아래에 술양(퓖陽)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회안부의 부청이 있는 산양(山陽)에서도 백 리 떨어진 곳으로 농자(農者)들이 오고 가며 들에 곡식을 키우는 그저 조용한 한촌(閑村)이었다.
그런데 이곳 술양까지 태상왕(太上王) 이성계의 부음이 전해져 왔다.
응천부에서 파발을 달려 술양왕(퓖陽王)를 찾아와 복배하고 조선 태상왕의 안가(晏駕)를 전하니 일시 이곳 술양후의 사저는 상중이 되어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술양왕이라는 봉위(封位)는 바로 지난해에 명의 종군(從軍)을 따라 망명해 온 폐주 이방원에게 내려진 작위로, 명에서 복위를 시켜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명 황실에서도 방계에 주어지는 번왕(藩王) 중에서 나라의 이름을 받지 못하고 고을의 이름을 왕호(王號)로 삼는 일개 군왕(群王)의 예를 준 것이다.
명나라로서는 언제고 조선의 숨통을 틀어쥘 수 있도록 이방원으로 내려지는 사직을 보존케 해 주고자 궁리를 한 것이다.
그리고는 한촌에 내려 보내 식읍(食邑)을 주고 부쳐 먹게 해 준 것이니, 같은 왕호를 달고 있다 하나 한 나라를 호령하던 왕재인 이방원으로서는 그저 몰락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래, 묘호(廟號)는 무어라 붙였다 하느냐?”
이방원이 침상에 누워 힘에 부친 목소리로 아들 이제를 불렀다.
이제는 열여섯의 훤칠한 장부가 된 이 아들은 바로 양녕(讓寧)으로서 이제는 식읍 3천 호짜리 술양국(퓖陽國)의 세자가 된 이방원의 맏이였다.
“태조(太祖)라 하였다 하나이다. 할아버님께서 개국을 하셨으니 당연히 올라갈 묘호였습니다.”
“그래. 그렇다.”
이방원은 이 술양현으로 거의 반쯤 쫓겨나다시피 내려오고 난 뒤로는 그저 술로 소일하며 동쪽으로 앉아 이를 가는 것이 소일이었는데, 부친 이성계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나서부터는 기력이 빠져서 그만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다.
그저 믿는 것은 아들 이제뿐으로 조선에 있을 때 이제 겨우 젖살 빠진 어린 나이에 명군(明軍)을 솔군(率軍)하여 동북면을 치기도 했고, 명으로 넘어와서는 티무르군과 싸우는 데에 종군하기도 해, 지금은 그 공 정8품 병부주사(兵部主事)로 명나라 조정에 벼슬을 받았다가 이방원에게 술양왕의 군왕부가 내려지면서 세자로 삼게 되어 지금 여기에 내려와 있으니, 이방원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줄 후사가 된 셈이다.
“충녕은 무엇하고 있느냐?”
이방원의 또 하나 아끼는 아들이 바로 충녕군 이도로 이제는 조선왕이 아니기에 망실(亡失)된 것이나 다름없는 군호를 이방원은 아들들에게 꼬박꼬박 붙여 불렀다.
“여전히 서책을 끼고 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어떤 책들을 보고 있느냐 요즘.”
“운서(韻書)를 즐겨 보는 것 같은데, 시부(詩賦)를 지으려 그러는 요량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추우나 더우나 밤새 글을 읽으니 건강이 염려되는구나. 책 읽는 것을 금하여도 또 읽기를 그치지 않고, 만 리 밖으로 떠밀려 와서도 명나라 서책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니 그 재질이 귀하다. 그 아이 공부를 도와줄 선생을 좀 구해 보았으면 좋겠는데.”
이방원의 말에 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안부중으로 나가 이름 난 유사(儒士)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굳이 가까운데서 찾을 필요는 없다. 영파로 나가면 요즘 조선 상객들이 들어온다고 하니 거기서 조선 사람으로 찾아보아도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오나…….”
이제는 아버지 이방원의 말에 덜컥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파에 들어온다는 조선인들은 죄 관부(官府)에서 허원(許願)하여 장사하러 들어오는 인물들이니, 그 연원이 따지고 보면 섭정공이라 자칭하는 김세훈과 닿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방원으로서는 지금의 조선 조정이래야 불구대천의 원수이니 그 시책을 받들어 영파로 들어온 인물 중에 스승을 찾아보라니, 도무지 이제가 보기에 이방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맏아들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옛 전조 고려의 유생 중에 출사하지 않고 지금 장사 끼어 오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들었다. 물론 그네가 보기에 내 집안에 들어와 가르치는 것은 절개를 잃는 것과 다를 것이 뭐 있겠냐마는, 나도 이렇게 된 형편이고 분명히 충녕의 문재(文才)를 보면 기뻐하며 가르치지 않을 스승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원로(遠路)에 있는 고국의 소식도 듣고 좋지 아니한가.”
“그럼, 말씀 받잡들어 그리하겠나이다.”
“부탁한다.”
패기로 움직였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이제에게는 이제 불혹(不惑)을 갓 넘겼음에도 요 근래에 백발이 잡혀 보이는 아버지의 머리가 그저 눈에 밟힐 따름이었다.
가열(苛烈)하게 젊은 날을 불태워 왔던 이방원이나 이제는 먼 나라에 유형(流刑)된 바 다름없는 초로의 늙은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는 뜰로 나와 왕부(王府)를 슬쩍 둘러보았다.
왕이 기거하는 곳이래 봐야 겨우 서른여 개의 건물이 잇대어 서 있는 정도로, 예전 경복궁 시절에는 한참 미치지 못할뿐더러, 명나라의 거신(巨臣)은 물론이거니와 부호나 세가 있는 환관들의 저택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나가 봐야 식읍이 3천 호에 미치지 못하니 허울만 좋은 왕작(王爵)이오, 빈신(嚬呻)이 절로 나오는 대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평해 봐야 망국의 자제인 이제로서는 그저 아버지를 보필하며 동생들과 함께 망명지에서 살아 나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는 말을 준비시켜 영파로 향했다.
수백 리 길이었으나 아버지가 원하는 동생의 스승 될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면 만 리 길도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었다.
1409년 중춘(仲春)
조선국 전라도 무안현(務安縣) 목포진(木浦鎭).
목포진(木浦鎭)은 1397년에 전라도의 연안을 방비할 목적으로 설치된 수군 진영이었다. 이것이 작년의 수군이 해군으로 재편되면서 삼남의 해군을 모두 지휘하는 남해함대(南海艦隊)의 사령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당곶포(唐串浦), 즉 목포진 일대는 아예 해군의 중추가 된 셈이었다.
거기에 이 남해함대의 진지에서 유달산을 끼고 서쪽으로 돌아 나간 곳에는 나상에서 영파 무역에 사용될 교관선과 해군으로 들어갈 군선을 생산하기 위한 조선소가 있었다.
이렇게 조선소와 남해함대를 중심으로 유달산 언저리에 군속(軍屬), 공인(工人), 상자(商者) 등 백서(白庶)의 사람이 모여들어 물경 2천 호는 되는 인구가 정주하니 무안읍보다 더 큰 성시가 되어 목포진 일대는 번영을 구가했다.
이에 조정에서 무안현의 속진(屬鎭)이던 목포를 오히려 무안현보다 큰 목포부(木浦府)로 위계를 높이고, 그 목포 부사(府使)에 설경수가 부임해 오게 되었다.
설경수는 설손(퐄遜)의 넷째 아들이었다.
설손은 원래 원나라 고창(高昌) 사람으로 위구르계의 인물이었다.
설씨라는 성은 몽골로 가는 고원의 설하 주변에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성으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고려(高麗)에 귀부해서 벼슬을 살게 된 것이다.
설손의 맏아들이자 설경수의 형인 설장수는 고려가 망하자 등청하길 거부하다가, 그 재능을 산 이성계에 의해 대명(對明) 외교에 종사했었는데, 졸(卒)한지 이제 거의 십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설경수도 원래 1376년(고려 우왕 2년) 병진방(丙辰榜)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나, 조선이 들어선 뒤 출사하지 않고 있다가 이성계의 부름을 받아 다시 등청하게 되었다.
학문뿐만이 아니라 공예에도 재능이 있어서 훼손된 용상의 용무늬를 이성계의 명에 따라 다시 조각했을 뿐만 아니라, 1395년 제작된 유명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글씨도 그가 썼다. 이 공적에 따라 필원(筆苑)에 그의 이름이 실렸다.
이제 그의 나이도 쉰이 넘어서자, 아들들과 조카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일시 하향했다가, 1404년에 경상도 수성현(壽城縣) 현감(縣監)으로 잠시 벼슬을 살다가, 갑신반정(甲申反正)때 인근 고을의 수령들을 규합하여 세훈에게 투항해 왔다.
그 후 반정의 공로를 사양하고 낙향해 있던 것을 세훈이 특별히 불러들여 목포부사로 부임시킨 것이다.
그 혈통을 입증하듯 수염이 면면에 치렁치렁하고 눈매가 굵고 크며, 코가 높은 그가 사모관대를 쓰고 새롭게 지어진 목포부 동헌 대청에 앉아 있는 모습은 위압감이 있었다.
목포부사의 직위를 제수받아 임금 이석근에게 배례(拜禮)하고 비변사를 찾아가 세훈을 보았을 때, 세훈은 그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목포부를 설치한 경위와도 같은 내용이었다.
“원로(遠路)에 목민관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을 줄 아오만, 꼭 설 공께서 목포로 가서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소. 설 공이 그 적임자라 판단해 부득불 전하의 명을 빌어 이렇게 먼 길을 고생하게 하였소.”
“합하(閤下)께서 뜻하시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설경수가 부복하고 뜻을 물으니 세훈이 이내 몇 가지를 유의시켰다.
그 첫 번째가 조선소에 관련된 것으로 국가에서 대금을 나상의 오상복에게 차입(差入)하는 것을 설경수가 관리, 감독할 것과 그 배를 짓는 과정을 살펴보고 장계를 지어 올릴 것. 두 번째는 천일염(天日鹽)을 만드는 방법을 담은 유시(諭示)를 세훈이 설경수에게 주며, 목포 부외(府外)의 바닷가에서 마땅한 곳이 있거든 바로 장계를 올리고 이 소금을 만들어 볼 것을 지시한 것이다.
설경수의 공재(工才)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세훈이 호조에서 벌려 놓은 사업으로 바쁜 기존 양성 인력 대신에 설경수를 부득불 불러 발탁해 내려 보낸 것이다.
“그중 비금도(飛禽島) 일대의 갯벌을 막아 시작해 보는 것이 내 생각에 좋을 듯싶소. 그 인근이 다 수심이 얕고 조석의 차가 크니, 비록 비가 많다고는 하나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는 있소.”
그렇게 세훈의 말을 유념해 듣고서는 설경수가 목포부의 첫 부사로 부임해 온 것이 지난해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의 일이었다.
설경수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남해함대가 설치된 목포진의 해군영(海軍營)이었다. 이 때 남해함대의 수장은 해군참장(海軍參將) 이지실(李之實)이었다. 경기도수군절제사로 있다가 수군이 해군으로 재편되면서 참장의 위를 받고 남해함대의 사령관이 되어 부임한 것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공, 오랜만이오. 이 바다 맞닿은 곳에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시방(時方)의 목포는 조정에서 추진하는 중책이 모여 있는 곳이라 전라도 수군영이 삼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함대로 승급되었고, 이렇게 일개 현의 속읍인 목포가 호구(戶口)가 늘었다고 하여 일거에 목포부가 되어 조선소며 성읍이 들어서고 있으니 설 공 같은 명신(名臣)을 내려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내가 보기에 지금 조정의 한직(閒職)들보다는 이곳이 오히려 힘이 있는 자리일 듯싶소이다.”
“벼슬을 거기에 따라오는 권세를 보고 하는 것은 아니오만, 그만큼 중직(重職)인 듯싶어 어깨가 무겁소.”
둘은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누각에다 주안상을 풀어 놓고 담소를 나누었다.
주된 화제는 지금 조정의 정치가 돌아가는 이야기와 남해함대에 관한 것이었다.
“실은 이름은 거창해지고 규모는 커졌다고 하나, 실제 바다로 들어서는 배들은 죄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작은 선박들이 태반이오. 화포를 싣기도 하지만 군선 자체의 내구도도 떨어지고 이래저래 군선의 편성을 바꿀 필요가 있었는데, 차제에 조정에서 나상의 조선소에 돈을 대어 크고 튼튼한 군선을 건조하게 해 준다 하니 그야말로 다행이지요. 그러면 앞으로 해군도 육군만큼 제 몫을 하게 될 것이외다.”
이지실의 말에 설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쌀 이만 섬과 금 육백 관(貫)을 조정에서 받아 오지 않았던가.
“갑작스레 왜구가 준동한다거나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이까?”
설경수가 묻자 이지실이 대답한다.
“별것 없소이다. 요즘 들어 왜구의 내습이 줄기도 하였거니와 우선은 여말(麗末)로부터 이런 맹선(猛船)들에 화포를 실어 막은 것이 효과를 보았으니, 아직까지는 유용하게 막아낼 수 있소이다. 거기에 지난해 처음으로 판옥선이 이십여 척 들어와 이곳 목포진에서 지자총통을 일괄적으로 탑재하고 보총 든 사수(射手)를 조련시켜 함장(艦檣)에 배치하고 노 젓는 역부들도 병졸로 하여금 대체하였으니 앞으로 이를 통해 막아내면 차고도 남을 것이외다.”
지난해 처음으로 나상의 목포 조선소에서 판옥선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남해함대로 인계되어 실제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경수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일이 그렇게 되고 있다니 다행이나이다. 그런데 왜구를 막아내는 데에 십 년간 2백 척 이상을 판옥선으로 채운다는데, 그 일이 꼭 필요한 것입니까?”
설경수가 은근슬쩍 물어보자 이지실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섭정공 합하께서 이 이지실을 떠보라고도 하셨소이까? 하하!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요, 설 공? 판옥선은 시작일 뿐이외다. 지금 나상의 조선소에서는 첨저형 교관선을 군선으로 개조한 수선(帥船)도 만들고 있소이다. 일전 섭정공께 들어보니 남양(南洋)으로 해군을 뻗게 하실 요량인 듯싶소. 근안(近岸)에는 기존의 맹선으로 순시하게 하고, 연해(沿海)는 이 판옥선으로 방비하고, 수선으로 하여금 먼 바다로 나가게 할 요량이신 듯싶소. 거기에 거북선[龜船]이란 놈도 만든다 하니 이 군세가 나라의 초석이 될 것이외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다음 날 설경수가 조선소를 찾아가 관에서 내어 준 대금을 주고 조선소를 둘러보니 일대가 짓고 있는 배들로 가득했다.
좌안(左岸)의 조금 수심이 깊은 곳에서는 영파며 앞으로 월(越)이나 부남(扶南) 등지로 나가게 될 무역용 교관선들이 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고, 우안(右岸)에는 판옥선과 군선들이 쉴 새 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되고 하니 조선술이란 것도 이제 많이 익어서 선공(船工)들의 기술이 일취월창입니다. 조선 뱃장들 말고도 원나라 때부터 건선(建船)해 오던 선장(船匠)에, 왜구로 들어왔다 귀부(歸附)하여 왜선(倭船)을 짓는 기술을 접목시킨 자도 있지요. 제주며 영파에서 이런 선공들을 구하지 못했으면 이렇게까지 크고 멀리 나가는 함선을 건조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조선소를 찾아온 설경수를 마중 나온 오상복이 바다에 늘어선 배들을 보며 자랑스럽다는 듯 설명했다.
처음에는 바호디르의 서역까지 배로 무역을 해 보자는 제안에 들떠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세훈이 군선 건조까지 부탁해 일이 감당할 수 없게 커져 나가는 듯싶었지만, 오상복은 어찌어찌 그 조선소를 안정시켜서 이제는 배들을 수지맞게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다음 해쯤에는 동래나 아산 등지에도 조선소를 만들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큰 배를 가지고 도대체 어디까지 나가실 생각이시오?”
“지금 군선을 짓고 있는 것이 다 섭정공 합하께서 앞으로 먼 곳까지 무역 나가기 위해 받아야 할 관인(官印)을 주시는 댓가지요. 처음에는 유구, 안남 등으로 배를 띄우겠지요. 그 다음은 천축(天竺), 파사(波斯)까지 나갈 생각입니다. 때문에 배를 짓는 동시에 이곳 목포 읍내에 올해 습외어학원(習外語學院)이라는 학당을 지을 요량입니다. 조정의 사역원만큼은 못되어도 이곳에서 앞으로 장사를 위한 외국어를 배우고, 그 외에도 독서(讀書)니, 습자(習字), 지리(地理), 대산법(大算法), 거기에 화학전습원에서 가르치는 내용도 조금 배워 만물격치(萬物格致)도 가르칠 생각이니 앞으로 이 나라의 거상(巨商)은 목포에서 나오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이거 목포부사인 내게 학당을 만들게 허락해 달라는 소리가 아니오. 허허! 이거 원 참.”
설경수가 한 대 맞았다는 듯 웃었다.
“잘 부탁드리겠나이다.”
“오 공이 생각하는 게 어찌 보면 섭정공 합하의 생각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오. 당연히 그 학당을 만드는 건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리다. 목민관으로서 내 고을의 학명을 떨칠 일을 막을 이유가 없지 않소이까.”
설경수가 슬며시 웃으며 한 가지를 덧붙였다.
“대신 오 공이 날 좀 도와줘야겠소.”
오상복은 이렇게 군선을 떠맡게 된 전례가 있어 설경수의 하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관에서 나온 사람들은 하나를 부탁하면 대가로 다른 걸 하나씩 요구하니 심장이 먹먹하다. 다행히 군선은 대금을 정확히 지불받고 있지만 왠지 설경수가 하는 부탁은 그닥 이익이 남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소금밭을 만들 생각이오.”
“소금밭이라뇨? 소금이 나는 밭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오 공이 섭정공 합하를 뵙고 받은 특무가 군선 건조라면, 나에게는 이 소금밭이 되겠소이다.”
“그 일에 제가 도울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별거 없소이다. 그냥 인부 열댓 정도 동원하여 근해의 섬들 중에서 일기(日氣)가 좋고 갯벌이 넓으며, 바다가 얕은 곳을 물색해 주시오. 그리고 그 목지가 정해지면 돈은 관부에서 댈 터이니 내가 주는 설계대로 사람을 부려다가 소금밭을 만들어 주시면 되오이다. 그저 조선소에서 쓸 인력을 좀 더 사서 쓴다 생각하고 꼭 해 주시기 바라오.”
꼼짝없이 손해 보는 장사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소금이라는 이야기에 귀가 번쩍 뜨인 오상복은 설경수를 슬쩍 떠보았다.
“그 만들어진 소금은 어떻게 처분하실 요량이십니까?”
오상복의 눈에서 탐재(貪財)를 읽은 설경수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아, 글쎄. 내가 말했다시피 섭정공 합하께서 지시하신 일이오. 이미 호조에 전매사(專賣司)라는 관청을 만들어다가 기존의 목화와 철광에 이 소금을 합쳐서 나라에서 그 생산과 판매를 모두 관리할 생각인 모양이니 허튼 데 욕심 부리지 말고 이번 염전을 조성해 주고 그 대금을 받는 일이라 생각하고 부탁한 일이나 잘해 주시오. 그러면 내 그 학당 설립하는 일은 잘 돌봐 주리다.”
오상복은 아쉬운 대로 입만 쩝쩝 다시는 수밖에 없었으나, 나라에서 전매한다니 별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해 봄에 천일염을 만들 염전이 목포 외해의 비금도와 도초도 그리고 목포 조선소에서 가까운 압해도 등지에 조성이 되어 천일염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곳의 천일염전은 물을 가두어 두는 저수지와 그것을 증발시키는 증발지, 거기서 마지막으로 소금을 얻어내는 결정지로 이루어져서, 만조 때 수문을 열어 물을 들여와 증발지에서 염분 함유량이 높은 농축된 염수를 얻어내 그것을 결정지로 보내 소금 결정을 얻어내는 방식이었다.
바람이 심하게 되면 결정이 작아지고 기온이 낮아지면 소금에 쓴맛이 나서 그 질이 떨어지니 택일(擇日)을 잘해야 할 뿐더러 그 위치도 중요했다.
다만 이 목포 바깥 섬들의 염전들은 우량(雨量)이 많다는 것이 단점이었는데, 대신 맑은 날에는 일조량이 좋아 날짜를 잘 고르면 좋은 소금을 얻기도 쉬웠다.
설경수는 그 뒤로 이 염전을 돌아다니며 그 천일염을 생산하는 방식을 다시 한 번 정리하여 「제염직해(製鹽直解)」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여기서 생산된 소금들은 목포부중에 설치된 전매사의 국고(國庫)로 모아져 바로 한양으로 보내져 전매사에서 직접 이 수매(收買)와 판매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부는 여진이나 명으로 수출되고, 동래의 왜포를 통해 일본으로도 나가니 그것이 거의 국고로 충당되어 조정의 세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매사 제검(提檢)이 호조판서보다 낫다.’는 속담은 이로 인해 나온 것으로, 전매사에서 관할하는 수입이 국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그 상위 부처인 호조의 판서보다 전매사의 책임자인 정4품 제검이 힘이 더 있다는 말이었다.
실제로는 관료제 안에서 전매사를 거느린 호조의 판서가 더 힘이 있었으나, 오죽 민간에서 전매사에 청탁 들어오는 것이 많으면 그런 이야기가 도는 것도 꼭 헛말은 아닐 터였다.
이렇게 군항(軍港)이 들어서고, 조선업과 염전으로 돈이 모이고 사람이 들어와 점점 목포의 성읍이 부유해지고 윤택해지는 만큼, 나라가 걷는 세금 또한 점점 풍족해지니 목포가 이때에 이르러 호남제일시(湖南第一市)라 불리게 된 것도 가히 허명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