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경인동정(庚寅東征)
「섭정공(攝政公)이 송거신, 양은계, 고상온 등을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이 좋을까 어떨까.”를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허술한 틈을 타는 것은 불가하고, 마땅히 적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 유독 고상온만이, “허술한 틈을 타서 쳐야 합니다.” 하니, 섭정공이 말하기를, “금일의 의논이 전일에 계책한 것과 다르니,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 오고, 우리 군사는 거제도에 물러 있다가 적이 돌아옴을 기다려서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와 배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구류(拘留)하고, 만일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베어 버리고,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만은 구류하여 경동(驚動)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불가하니, 후일의 환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하고, 이에 상(上)이 이종무를 정왜장군(征倭將軍), 육군부장으로 명하여, 동래와 안동과 대구의 진위대를 합하여 거느리게 하고, 이지실로 하여금 삼남(三南)의 해군을 솔군하여 종군케 하고,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4백 척과 하번 갑사(下番甲士), 별패(別牌), 시위패(侍衛牌) 및 수성군 영속(守城軍營屬)과 재인(才人)과 화척(禾尺), 한량 인민(閑良人民), 향리(鄕吏), 일수(日守), 양반 중에서 배 타는 데 능숙한 군정(軍丁)들을 거느려, 왜구의 돌아오는 길목을 맞이하고, 3월 초8일에 각도의 병선들을 함께 견내량(見乃梁)에 모여서 기다리기로 약속하였다.
○攝政命召柳廷顯, 宋居信, 梁殷啓, 高尙溫等, 議乘虛征對馬便否, 僉曰:“不可乘虛, 當待賊還而攻之.” 趙末生獨曰:“可乘虛擊之.” 攝政公曰:“今日之議, 異於前日之策. 若不掃除, 而每被侵擾, 則可異於漢之見辱於凶奴乎? 不如乘虛伐之, 取其妻Я, 退師巨濟, 待賊還邀擊之, 奪其船而焚之, 爲商販而來者及留船者, 竝皆拘留. 苟有逆命者, 則剪除之, 其九州倭人, 毋令拘留驚動.” 且曰:“不可示弱也. 後日之患, 庸有極乎?” 卽上命以李從茂爲征倭將軍陸軍副將, 合東萊及安東大丘各鎭衛隊, 將其軍, 以李之實爲率三南海軍, 將慶尙, 全羅, 忠淸三道兵船四百퐿, 下番甲士, 別牌, 侍衛牌及守城軍營屬才人, 禾尺, 閑良, 人民, 鄕吏, 日守, 兩班中, 有能騎船者及騎船軍丁等, 以邀倭寇還歸之路, 約以三月初八日, 各道兵船, 竝集見乃梁以待.」
―목종(穆宗)실록 제9권 7년(庚寅) 1월 10일
1410년 계춘(季春)
조선국 경상도 거제현(巨濟縣).
거제현의 별칭은 기성(岐城)이다. 수륙(水陸)이 만나는 협로(峽路)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떨어져 바다에 떠 있는 거도(巨島)요, 이런 연유로 거제(巨濟)라고 불리게 되었다.
거제에서 배로 고읍(固邑)이 있는 길로 넘어가려면 그곳이 이른바 견내량(見乃梁)이다. 고려 의종이 거제로 유배될 때 건너가 전하도(殿下渡)라고도 불렸다.
가끔 거제로 건너가는 널 배가 뜰 때를 빼고는 한적하게 고깃배만 나다니던 이 견내량이었으나, 지금은 이곳에 군선 수백 척이 정박하여 깃발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리 떨어진 거제의 둔덕 위에서는 수만 군사의 조련이 한창이니, 이것이 모두 대마(對馬)를 치기 위해 조정에서 내려보낸 병력들이었다. 경상도에 그간 설치된 진위대가 대구에 제4진위대, 동래에 제7진위대, 안동에 제9진위대가 있으니 병력이 도합 6만이다. 이 경상도의 방비(防備)하는 병력을 모두 거제로 모아 들여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그 아래에 또 이지실로 하여금 목포의 남해함대(南海艦隊)에 속한 삼남의 병선을 모두 그러모아 이종무를 호보(扈保)하게 하니 육해(陸海)의 병력을 합쳐 도합 7만 8천의 군세요, 4척의 수선(帥船), 80척의 판옥선을 포함해 군선이 도합 420척이었다.
이번에 조선에서 대마도를 정벌코자 군사를 일으킨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1389년(고려 창왕 2년)에 박위(朴폘)가 대마도 원정을 나선 바 있고, 1396년에도 왜구의 내습을 미리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대마도로 군사를 출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규모가 확연히 달랐는데, 대마도를 징지(懲止)하고자 하는 선이 아니라 아예 정역(征役)한 뒤 군세를 주둔 시킬 요량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그 명분을 지난해 가을에 기근으로 인해 대마(對馬), 일기(壹岐)의 수적들이 합세해 명으로 크게 적세(賊勢)를 일으켰다가 풍해도 비인(庇仁), 해주(海州) 등지를 약탈하다 해주에 주둔한 제1진위대에 의해 격퇴당해 쫓겨 간 것을 구실로 삼았으나, 실상은 세훈이 탐라에서 정의현감으로 있을 때 왜적 내습을 겪은 뒤로 생각해 왔던 것으로, 갑신반정, 을유전역 이후의 내치가 안정되고 대규모 왜구의 준동으로 명분이 생기자 일시에 정벌을 결의해 비변사를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번에 군사를 일으켜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를 받게 된다면 한(漢)나라가 흉노(匈奴)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러니 이번에 적지로 군사를 직접 일으켜 그 배들을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와 배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구류(拘留)하여 경동하지 못하게 하고, 약한 것을 보여 후일의 환을 입을 수 없는 노릇이니 이번에 단단히 징치(懲治)해서 그 전범을 보여야 할 일이오.”
세훈이 단단히 으름장을 놓은 바, 임금 이석근은 그저 상유(上諭)랍시고 그대로 시행케 하니 국새(國璽)가 찍힌 조칙을 받들어 군세가 거제로 모여든 것이다.
“이번에 단단히 마음먹고 오는 길이니 이 8만에 가까운 군세로 물러선다면 그것이 욕되는 일이 아니겠소. 군사의 조련이 마쳐지는 대로 바로 대마로 갑시다.”
남해함대를 끌고 온 해군참장 이지실이 이종무를 종용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 해군이라고 창설되었으나 전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군은 그 감신반정과 을유전역을 거치며 그 공적이 높았으나 해군은 바다에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도록 합시다. 우리 병력은 단지 이번 동정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수년 간 훈련을 달게 받아 온 정예이니 오히려 시간을 끌다가 적에게 틈을 보여 주는 것이 더 나쁠 듯싶소. 보름 때를 기해서 바다를 건넙시다.”
이종무도 갑신반정의 난중에 이방원을 따라가지 못하고 개성에서 은거(隱居)하며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있다가, 난정(亂政)이 안정된 뒤로 조정에 뒤늦게 다시 등청하였으나, 전역에서 세운 공이 없는지라 심심한 취급을 받다가 이번에 기회를 잡았으니 제대로 군공(軍功)을 세우겠다는 야심이 내심 있었다.
“그럼 보름까지 조련을 마치고 만월(滿月) 밤에 도항(渡航)하는 것으로 하겠나이다.”
그렇게 군선 420척이 3월 보름에 7만 8천의 군사 중 선발대 4만을 추슬러 주원방포(周原防浦)를 출발하여 다음날 대마도 연안에 다다랐다.
그 병력 중에는 안동 사람 천칠개(千七介)도 있었는데, 계급이 상등졸(上等卒)로 올해 여름 전역을 앞둔 차에 안동의 제9진위대가 대마도 정벌에 차출되면서 10인대[分隊]를 맡아 선발대에 뽑혀 들어간 것이었다.
‘고마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수가 없다. 오히려 군문(軍門)에서 무훈을 세우면 일신이 편안케 될지 모를 일이니 오히려 전훈(戰勳)을 세워 군문에 몸을 의탁하는 것도 괜찮다.’
천칠개는 처음에 곧 전역을 앞두고 먼 곳으로 원정을 나가는데 끌려가는 것이 영 마음이 편치가 않았으나, 다행히 아버지의 병세도 한동안 진정되어 있고, 이앙법을 실시한 뒤로 수확이 그나마 괜찮아 동생들이 입에 풀칠하는 것도 걱정이 없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전공을 세워 보자고 결심하고 왔다.
집안에 돌아가 농사일을 거는 것도 좋으나, 집에 입이 한둘이 아니고 농사짓는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러나 군문에 들어가 진급을 하는데 성공한다면 되레 높게는 사족(士族)의 반위에 들 수도 있는 노릇이오, 낮게 보아도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사관(士官)이다.
목숨을 내어 놓고 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천칠개는 자신감이 생겼다.
여기 모인 병력들만 보아도 거의 2년 이상 진위대영에서 꾸준히 조련받은 병력들이었다. 거기에 그 숫자도 적지 않으니 보총을 앞세워 들어간다면 대마도의 왜적들도 감히 엇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천칠개가 보기에 충분히 덤벼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천 상졸님. 곧 대마도 해안에 닿는다고 합니더.”
그의 후임이자 안동부 풍산현의 동향(同鄕)인 일등졸 소만식(蘇萬殖)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말했다.
“바다 끝 언저리에 섬이 보입니더.”
“갑판에 함 가보자.”
소만식을 데리고 판옥선 갑판으로 나오니 정말로 멀리 대마도의 해안이 보였다.
이내 배들 사이로 북과 징이 울리며 병력의 정렬을 지시했다. 상륙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천칠개도 심장이 뛰는 것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진짜 전투가 곧 벌어질 것이었다.
1410년
오에이(應永) 17년 계춘(季春)
일본국 사이카이도(西海道) 츠시마노쿠니(對馬國).
츠시마(對馬)의 이름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올 정도로 유래가 깊은 지명이었다. 율령제에 따라 대마국(對馬國, 츠시마노쿠니)이 설치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었는데, 지금의 도주(島主)는 츠시마노쿠니의 지토다이(地頭代)이자 슈고다이(守護代)에 봉책(封冊)되어 여몽(麗蒙) 연합군을 막았던 소 스케쿠니(宗助國)의 후손으로 소씨(宗氏)의 8대 당주(堂主)인 소 사다시게(宗貞茂)였다.
소씨는 12세기 무렵부터 대마국의 사이쵸칸진(在廳官人)의 관직을 받아 등장해서, 당시 츠시마에서 가장 위명있던 아비루(阿比留) 일족이 당시 국교가 없어 비법(非法)이던 고려와의 무역을 한 것을 구실 삼아 토벌령을 받아와 아비루씨를 멸하고 대마도 전토(全土)를 수중에 넣어 대마도의 국주가 된 가문이었다.
소(宗)라는 씨족은 원래 도래계의 성씨인 하타우씨(秦氏)의 방계인 코레무네(惟宗)가의 일파로, 대마도의 사이쵸칸진이었던 코레무네노 시게히사(惟宗重尙)가 그 씨명(氏名)을 바꾸어 소씨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소 시게쿠니(宗盛國)가 쇼니씨(少貳氏)의 슈고다이(守護代)로서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대마도의 지배를 승인받았다. 그러나 쇼니씨가 슈고(守護)의 직(職)을 잃게 되고, 막부에서 큐슈 일대를 통괄코자 큐슈탄다이(九州探題)로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을 내려보내 슈고를 겸직하게 되나, 이 이마가와도 곧 물러가고 소 스미시게(宗澄茂)가 슈고다이에서 슈고(守護)로 승격되었다.
그 소 스미시게의 손자가 바로 지금의 당주인 사다시게였다. 사다시게는 아버지인 노리시게(賴茂)로부터 가독(家督)의 지위를 탈취해서 당주가 되었는데, 조선에는 교역을 청하면서 상당히 순종적인 자세를 보여 왔었다.
잠시 치쿠젠노쿠니(筑前國)의 슈고다이가 되어 큐슈에 나가 있기도 했지만, 일전의 하야다 일파의 탐라 침공 이후 그것이 외교 문제로 비화되자 1406년에 동생인 사다스미(貞澄)에게 슈고다이를 물려주고 오로지 대마국의 슈고, 즉 국주(國主)로서 그 임무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부가 지방의 슈고다이묘들에게 제 힘을 쓰지 못하듯, 대마도의 슈고다이묘인 소 사다시게 또한 대마도의 제 씨족들에게 완전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옛 대마도의 유력가로 아직도 그 세력이 상당한 아비루(阿比留) 가문은 물론이거니와 대마도 왜구의 두령(頭領) 노릇을 하는 하야다 사에몬 타로(早田左衛門太郞) 또한 소 사다시게의 영향력 밖에서 제멋대로 구는 이들 중 하나였다.
원래 대마도는 산지가 많고 경지가 협소해서 소씨 가문은 조선과의 무역의 이익에 의존해 왔는데, 특히 이 시기 무로마치 시대의 초엽에는 큐슈 서안(西岸)의 다이묘들, 상인들, 그리고 대마도의 여러 세력이 독자적으로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씨가 조선의 왜구의 발호를 막는 대책 등을 이용해서 독점적으로 무역권을 수립하자 이런 세력들의 반발이 일어난 것이다.
그중에서도 하야다는 가장 골칫덩어리였다.
사다시게가 조선에 종신(從臣)하며 들인 공을 무위로 돌리게 만든 것이 이 하야다의 제주도 침공이었다.
그러나 대패하고 포로가 되어 그 신변을 속환받은 뒤에도 왜구들을 모아다가 절치부심해 이번에 그 권속 카게야 마사노리(影家政則)를 보내어 조선 풍해도에서 준동을 피우다 토벌되어 이번에 외구(外寇)의 명분을 주고 말았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야다 일파가 제멋대로 굴어 결국 이렇게 조선이 우리 츠시마에 철퇴를 놓겠다고 대군을 몰아오고 있으니 어찌하여야 좋소?”
사다시게는 그저 느는 것이 한숨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하야다 일가의 무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 그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게 된다면 견분(쩸忿)하는 마음도 모두 의미가 없지 않겠나이까.”
사다시게의 배신(陪臣)인 코쿠네 카츠시게(古久根勝重)가 말했다.
그러나 사다시게는 그저 눈만 끔뻑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코쿠네는 답답한 마음에 말을 이었다.
“하야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조선군을 막아서기 위해서는 그를 용서하고 거두셔야 합니다. 지금은 그 외에는 방법이 없나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다시게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태는 조선과 선린 통교하려는 내 뜻을 거스르고 하야다 일가가 준동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오.”
“그럼 한 수 물려서 지켜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한 수 물리다니?”
“우선 조선군이 서안(西岸)에 나타났다 하니, 이것은 필히 하야다 가의 근거지인 오사키(尾崎)를 먼저 멸하려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코쿠네의 말에 사다시게의 눈에 번쩍 떠졌다.
“아하, 그렇구만. 오사키에서 합전이 벌어진 뒤에 그 계산을 해보아도 늦지 않아. 하야다가 대패한다면 조선군을 달래야 할 것이고, 하야다가 이겨준다면 그대로 군사를 내어 하야다를 원조(援助)하면 될 것이니.”
“그럼 오쿠무라(奧村)가의 아들인 유지로(祐次郞)가 입이 무겁고 몸이 날래니 한 번 오사키로 보내어 그 합전(合戰)하는 양을 보고 그 동향을 보고하게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코쿠네의 제언에 사다시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시오.”
그렇게 사다시게의 배신 중 하나인 오쿠무라 켄키치(建吉)의 둘째 아들 유지로가 칼을 차고 말을 달려 오사키로 향하는 동안, 조선군은 대마도를 남북으로 나누는 아소만(淺茅灣)으로 접어들어 그 내안에 접한 오사키의 하야다군 군영을 바다 바깥으로부터 둘러싸고 있었다.
“이, 이, 조선 놈들! 결국에 나를 짓이겨 놓아야 분이 풀리겠느냐!”
하야다 사에몬 타로는 칼로 바닥을 두드리며 분에 겨워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시위하듯이 바다 바깥에서 총포로 오사키 포구 안쪽에 정박한 왜선(倭船)들을 두드려 대고만 있었다. 때문에 배를 끌고 나갈 수 없으니 요격을 할 수도 없고, 총포가 없으니 바다 바깥에 있는 조선군에게 반격할 수도 없었다. 화살을 날려 보았지만 바람이 서풍(西風)이라 무용이다.
이때 하야다의 근거지 오사키의 포구 주위에는 대마도의 왜선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150여 척의 선척이 정박해 있고 천여 명의 왜구들이 오사키 포구 주위에 진둔(鎭屯)하고 있었는데, 조선군이 사백여 척의 배로 포구를 둘러싸고 매어둔 배에 총포를 쏘아대니 이미 가라앉은 것이 백여 척에 이르렀다.
“일전 제주에서 크게 당했을 때 그만 욕심을 부렸어야 했다. 그때 나를 잡았던 수령이 이제 일국을 호령하는 섭정이 되었으니 그 위세가 예전에 비할까.”
하야다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한번은 운이 좋아 목숨을 건져 왔으나, 그의 속하인 카게야는 얼마 전 풍해도로 나갔다가 결국 두령으로 지목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그 칼이 바다를 건너 자신의 목전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모두 도검을 들고 적이 육지에 내리면 끝까지 저항한다. 츠시마 남자의 의기를 보여주어라!”
심기를 정리한 하야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이제는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에서 이번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한 것이 자신이었다. 일이 어찌 되든 이제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야다 휘하의 왜구들이 무기를 집어 들고 포구에서 내릴 곳을 막아설 때쯤에는 이미 바다에 떠 있던 왜선들은 모두 포격에 가라앉은 뒤였다. 조선군의 군선이 좀 더 안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포격은 이제 포구 안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이내 조선군의 상륙이 시작되나 왜구의 저항에 뭍으로 내려서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바닷가에서부터 시작된 전투는 이내 조선군이 속속들이 배에서 내리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반전되어, 하야다 휘하의 왜구들은 죽거나 흩어져 산중으로 숨어들고, 하야다는 분전 끝에 조선군의 병졸의 총탄에 분사(焚死)하니 그 하야다를 잡은 것이 바로 안동 진위대의 상등졸 천칠개였다.
1410년
오에이(應永) 17년 맹하(孟夏)
일본국 사이카이도(西海道) 츠시마노쿠니(對馬國)
오사키(尾崎)에서 대마도 왜구의 두령 하야다 사에몬 타로가 이끄는 도당(徒黨)을 격파한 조선군은 이내 3만 8천의 군세를 상륙시켰다. 4만이 건너왔으나 2천의 군세는 오사키 전투에서 명을 달리하고야 말았다.
오사키의 폐허 위에 진채를 만들고 다시 병선을 거제로 보내어 남아 있던 3만 8천의 병력을 실어오니, 도합 7만 6천의 조선군이 대마도에 진주하게 된 셈이었다.
닷새간 병력을 정렬시킨 뒤 이종무는 이지실로 하여금 군선들을 이끌고 대마도의 포구들을 공격하게 한 뒤, 2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북쪽 섬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코후나고시(小船越) 일대를 요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코후나고시에 있던 병력들은 모두 하야다 일파의 도주병 및 일대의 씨족들이 규합하여 차출한 병력으로, 그중에 소씨 직계의 대마국 정병들은 없었다.
소 사다시게는 조선군의 병력이 이렇게 대규모로 올 것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오사키의 하야다가 분전하리라 기대했었고, 그래서 전세를 탐지코자 오쿠무라 유지로를 정탐 보냈었다.
그러나 유지로가 오사키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포격전이 진행 중이었고, 전세는 일거에 뒤집혀 하야다가 목숨을 잃고 왜구들이 산산이 격파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이미 하야다가 이끌던 군세는 산산조각이 나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선군은 오사키에 상륙하여 지금 진채를 짓고 병력을 내리고 있나이다.”
유지로의 보고에도 사다시게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에도 궁신(챓身)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자신은 막부의 봉책을 받아 슈고다이묘로서 대마국(對馬國)의 영주 노릇을 하는 몸이었다.
그렇다고 병력을 모아 조선군과 싸우자니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 이미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대마도에 상륙해 있는 조선군에 미칠 바가 못되었고, 괜히 부스럼을 만들었다가 이긴다고 한들 앞으로 조선과의 교역이 물 건너가는 노릇이니 이 척박한 대마도의 산야를 일궈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루 이틀 하는 사이에 조선군은 병력을 모두 정비하고 코후나고시까지 들어와 습격을 하고 있다니 그저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우선 큐슈에 나가 있는 사다스미(貞澄) 도련님께 서찰을 보내어 큐슈의 제후들로 하여금 원군케 하시는 것이 요량입니다.”
코쿠네 카츠시게가 사다시게를 부추긴다. 그러나 사다시게는 그저 좌불안석일 따름이다.
“그러나 쇼니 미츠사다(少貳滿貞) 님께서 도와주시리라 장담할 수 없지 않겠소.”
“사다스미 도련님께서 쇼니씨의 일에 봉직(奉職)하여 돕고 계시니 미츠사다 님께서도 그냥 물리치지는 않으실 겁니다. 거기에 이곳 츠시마에서는 치쿠젠(筑前)이 지척이라 쇼니씨에게도 위협이 될 일입니다. 반드시 도와주실 겁니다.”
“그러나 쇼니씨는 지금 다자이후(大宰府)를 놓고 큐슈탄다이 시부카와 미츠요리(澁川滿賴)와 대립 중이라 쉽게 발을 빼어 놓을 수 없을 것이오. 거기에 이 시부카와란 놈도 막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조선과 관계를 돈독히 하려 하는 놈이니 전후가 적이오. 게다가 원군 출병이 될 즘이면 이곳 츠시마는 조선군 손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외다.”
사다시게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 큐슈의 정황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전 큐슈는 남조(南朝)를 지지하는 다이묘들이 많았고, 그 때문에 막부에서는 이를 경계해 이마가와 료순을 큐슈탄다이로 임명하여 큐슈의 상황을 정리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곧 큐슈에서 세력을 할분하고 있던 쇼니씨, 오토모(大友)씨, 시마즈(島津)씨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마가와는 남조의 세력을 큐슈에서 몰아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반 이마가와, 반 막부의 정서가 큐슈의 다이묘들에게 뿌리 깊게 내렸다.
이마가와가 해임된 뒤 시부카와 미츠요리가 새로이 큐슈탄다이로 임명되어 다자이후에 부임해 왔으나, 이곳은 원래 쇼니씨가 다이묘로 있는 치쿠젠 국중(國中)이었기에, 그 대립의 골이 한층 깊어져 가고 있는 차였다.
거기에 한때 막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결국 패퇴하고 이제는 막부의 편에서 큐슈탄다이를 돕고 있는 스오(周防)의 오우치(大內)씨까지 큐슈 진출을 노리고 쇼니씨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으니, 소 사다시게가 줄을 대고 있는 쇼니씨의 형편이 가히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우선은 사다스미에게 서찰을 보내 쇼니가의 가독, 미츠사다 님께 원군을 청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이걸 기다리고 있다가는 목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우선은 니이우라(仁位浦) 주변에서 병력을 거느리고 막아 보도록 하겠소.”
“분부 받잡겠나이다.”
코쿠네의 목소리다 잠겨 들어갔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 될지는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소 사다시게가 끌고 나갈 수 있는 병력이래야 육백 명 남짓이었다.
“적군의 수가 수만이고, 우리는 고작 육백이니 막아내길 바랄 수는 없는 일이오. 다만 그냥 목숨을 내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사다시게가 육백의 병사를 이끌고 니이우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누카다케(糠岳)의 산길에 매복하여 기다리니, 코후나고시(小船越)에서 승보를 거두고 진격해 들어오는 이종무가 이끄는 2만의 군세가 이 길로 지나가려고 진군해 들어왔다.
“냄새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종무를 옆에서 보필하던 부관 서중관(徐中觀) 참령이 말했다.
“어떤 게 말인가?”
“왜구 잔당을 소탕하고 이까지 넘어왔으면 대마도주 종(宗)씨가 반응을 보일 때가 되었는데 이렇게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니, 혹여 군사라도 매복해 두고 기다리고 있지 않나 하고 말입니다. 여기를 보니 산세가 험하고 좁은 길 좌우로 시야에 보이지 않는 험지가 많으니 이곳에서 각궁(角弓)을 들고 겨누면 일시(一矢)에 목숨이 달아날 듯싶습니다.”
서중관의 말에 이종무가 손을 들어 뒤에서 따라오는 군세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좌우를 살피니 과연 서중관의 말이 옳았다. 과연 이 협로(夾路)의 양쪽에 군사를 매복시켜 둔다면 힘을 들이지 않고 많은 병력을 잡을 수 있는 요지였다.
“그러나 대마도란 섬이 산중이라 이곳까지 포를 끌고 오지도 않았고, 우리가 가진 보총이란 놈은 이런 험지에서 숨은 적을 사냥하기에는 마땅치 않으니 어찌하여야 좋을까.”
이종무의 말에 서중관이 옆에서 읊조린다.
손을 내밀어 풍향을 살피니 서풍으로, 산길이 넘어가는 방향을 따라 바람이 불고 있었다.
“때마침 날씨도 건조한데 바람도 서풍이나이다. 하니, 기름에 불을 붙여 산중을 태우고 진천뢰를 던져 뛰쳐나오는 적을 요격하고, 그러고도 밖으로 빠져나오는 이는 보총으로 잡으면 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군사를 잃지 않고도 적의 매복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이나이다. 혹여 매복이 없다 해도 불을 잦아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니, 조금 도중에 시간을 버린다 해도 당장 급할 것이 없나이다.”
과연 들어보니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그럼 불은 누가 붙이는 것이 좋겠는가?”
“이번에 별동대에 뽑혀온 안동 진위대의 병졸 중에 왜구 두령을 총으로 쏘아 죽인 천씨 성을 쓰는 자가 있나이다. 몸이 재빠르고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로 하여금 분대(分隊)를 맡겨 앞을 수색하고 불을 피우게 하십시오.”
이종무가 서중관의 진언을 받아들여 천칠개로 하여금 그 정찰과 특무를 맡기니, 천칠개는 그저 벌벌 떨면서도 기회가 온 것을 알고는 마다하지 않았다.
하야다의 목숨을 취한 것에 이어 이번의 일까지 성공한다면 상훈이 대단할 것임이 틀림없다. 이번 대마도 정벌에서 병졸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그렇잖아도 하야다 건으로 이미 병졸 신분을 벗어나 한 계급 특진해 참교(參校)가 되었다. 거기에 자신이 끌고 다니던 일등졸 소만식도 진급해 상등졸이 되었으니 이번 일만 잘되면 소만식까지도 참교가 되어 하사관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식아. 요번 일만 잘되면 니도 참교다. 뭔 말인지 알재? 양반님네들 입대하면 받는 자리라 안 카나. 그 말은 우리도 동반(東班)이 된다 이 말씸이다.”
천칠개의 말에 소만식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야, 뭐, 그저 천 참교님 말씸만 듣고 여태까지 않왔니껴. 고마 생각하는 대로 끌고 가이소. 가다 보면 좋은 일 않있겠니껴. 지는 천 참교님 믿심더.”
소만식의 사탕발림에 천칠개의 입에 웃음이 머금어졌다.
그러나 천칠개의 눈은 사납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몰래 옆 산길을 타고 가다 보니 확실히 사람이 움직인 흔적이 많았다. 뒤를 경계하던 소만식과 그 휘하의 조원들을 멈추게 하고서 천칠개는 지고 온 기름을 그 자리에 붓게 했다.
“내 보기에 분명히 이 앞쪽으로 왜놈들이 매복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카니까 고마 이쪽에다 기름을 산비탈을 따라 부어서 흘러가게 하고 불을 붙여 버리면, 바람이 서쪽으로 부니까 불이 금방 번질 끼다. 그럼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빨리 나르면 된다.”
천칠개가 조원들을 둘러보며 나직히 말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잘 알겠재? 각자 위치로 흩어지고, 만식이는 기름에 불을 붙여라.”
대원들이 각자 퇴로를 확보하고 물러서자, 소만식이 기름을 부은 곳에서 백 보 정도 떨어져 비격진천뢰를 던졌다. 이내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름에 불이 붙어 순식간에 산중(山中)의 수림(樹林)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어서 퇴각해라!”
천칠개의 지시에 이내 대원들이 흩어져 본진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누카다케의 산중에 붙은 불은 사흘 밤낮을 타올랐다. 과연 서중관의 말대로 그곳에는 매복이 있었고, 소 사다시게가 마지막으로 안배한 육백의 병력은 그렇게 화염 속에서 사그라 들고 말았다.
겨우 목숨을 건져 나온 이들도 보총의 총탄 속에 결국 명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으니, 소 사다시게의 처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누카다케의 조선영 진영에서 반대편 니이우라에서 전황을 보고받고 있던 사다시게는 이내 누카다케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고, 육백의 병력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알고야 말았다.
결국 병력을 모두 잃고 호위하는 무사들만 몇 남고 만 사다시게는 슈고다이묘의 관인(官印)을 가져다가 이종무에게 바치고 엎드려서 선처를 바라니, 대마도 전역은 조선군에게 장악되었다.
이종무는 대마도를 징치한 것을 알리는 장계를 조정에 올려 보내고 그 뒤의 일을 조치해 주기를 품신(稟申)하니, 이것이 경인년 음력 4월 초 6일의 일이었다.
1410년
오에이(應永) 17년 중하(仲夏)
일본국 산요도(山陽道) 스오노쿠니(周防國) 야마구치(山口).
이종무가 대마도의 일을 품신하고 조치를 기다리는 동안, 한성에서는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었다. 대마도에 상륙하여 큐슈 일대에 큰 소란을 일으키고서는, 여든 먹은 노인인 이서(李敍)를 대신하여 그 밑에서 외교술을 배운 고봉지를 스오(周防), 나가토(長門), 그리고 부젠(豊前)의 슈고다이묘인 오우치 모리미(大內盛見)에게 보낸 것이다.
오우치가는 그 기원을 백제 성왕(聖王)의 셋째 아들로 알려진 임성태자(琳聖太子)의 후손을 자칭하고 있었다.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건너와 스오노쿠니(周防國)의 타타라하마(多多良浜)에 이르렀기에 그 이름을 타타라(多多良)라 하였다가 후일 오우치무라(大內村)로 이거한 뒤로는 그 지명을 따 오우치를 씨명(氏名)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 기원이 확실한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 오우치 일족이 백제왕계의 후손을 자처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 오우치가의 지금 당주가 모리미(盛見)로, 그 아버지인 히로요(弘世)는 원래 남조(南朝)의 신하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오(周防), 나가토(長門). 즉 흔히 말하는 보쵸(防長)의 2국이 이 오우치가의 세력권이 되면서 북조(北朝)를 지원하는 막부의 고심이 커졌고, 결국 히로요를 회유해 막부의 편으로 돌려 놓는데 성공했다.
히로요는 한편 야마구치(山口)에 근거지를 조영(造營)하여 대외 무역의 거점지로 삼는데, 그 번영이 서쪽의 도읍(西の京)라 불릴 정도로 상당했다.
그 아들인 요시히로(義弘)은 큐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순을 따라 큐슈로 들어가 봉직(奉職)하다가 야마나 우지키요(山名氏淸)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스오와 나카토의 2국뿐만이 아니라, 이와미(石見), 부젠(豊前), 키이(紀伊), 이즈미(和泉)까지 6개국의 슈고직(守護職)을 얻어 일본 서남의 대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부에 불만을 가지게 된 요시히로는 이즈미의 사카이(堺)에서 막부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키니, 이른바 유명한 오에이의 난(應永の亂)이다.
이 싸움에서 요시히로는 대패하여 막부에 의해 토살되고, 그 동생인 모리미가 가독을 이어 받아 난국을 수습하고 이와미, 키이, 이즈미의 3국을 내어 놓은 뒤 남은 세력을 다독여 모은 것이 지금의 오우치가였다.
오우치 모리미는 이런 상황에서 세력을 더 키우고자 다자이후의 큐슈탄다이로 있으면서 큐슈의 제세력(諸勢力)들을 견제하고 있는 시부카와 미츠요리(澁川滿賴)를 뒤에서 지원하며 큐슈 북부의 유일한 유령(遺領)인 부젠을 중심으로 큐슈의 내전에 깊게 개입하고 있었는데, 이른바 오우치, 시부카와의 외군(外軍)들이 전통적인 큐슈의 세력인 쇼니, 키쿠치, 오토모, 시마즈 등을 견제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조선의 사자로 고봉지가 오우치 모리미를 내방한 것이다.
“조선에서 어찌 먼 길을 걸음 하셨습니까. 이 스오의 산중(山中)에는 마땅히 내어 놓을 것이 없는 처지요.”
고봉지를 마주한 오우치가 되려 엄살부터 부렸다.
“일전 사절을 보내어 대장경을 받아 가셨을 때, 그 귀안(貴顔)이 어찌한가 궁금했는데, 오늘 보니 오우치 가독께서는 그 관상의 대인의 것이올시다. 뭔가를 받아내려 온 것이 아니니 편하게 마주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장경이라 함은 몇 해 전 모리미가 조선에 사절을 보내어 교역을 청함과 동시에 대장경을 한 부 내어 주길 바라, 동래 왜관에서 교역할 수 있는 관인(官印)을 주고 대장경을 한 부 인쇄해 준 일을 말하는 것이다.
고봉지의 말에 오우치 모리미는 껄껄 웃으며 손을 홰홰 내저었다.
“이거, 고 공의 말에는 당할 수가 없겠소이다. 우리 일가는 백제(百濟) 왕통의 말예(末裔)로 귀국과는 동조지간(同祖之間)이니 한 핏줄이나 다름없는 일이오. 뜻하시는 바 있으면 편히 말씀하시오.”
오우치 모리미가 자세를 편히 고쳐 앉으며 차를 권했다. 조선과 일본의 차도(茶道)는 서로 달랐으나, 고봉지의 차 마시는 법도를 보고도 오우치는 따로 토설을 달지 않았다. 오히려 고국의 예법인가 싶어 눈여겨 지켜보았다가 따라할 심산인 듯 보였다.
고봉지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아조(我朝)의 군세가 대마를 점거하고 종(宗)씨를 포로로 잡아 그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종씨는 감히 덤비었다가 군세에 놀라 항복하였으니 그 처분을 관대히 할까 생각 중입니다만, 그 배후에 있는 쇼니(少貳)씨를 치리(治理)하지 않으면 앞으로 후환이 되어 우리 조선의 배후를 노릴 셈입니다. 이에 우리 섭정공께서 우리 한인(韓人)과 같은 핏줄인 오우치 님을 찾아 뵈어 같이 상의하라 하셔서 이렇게 불근(不近)한 곳까지 발걸음을 놀려 왔습니다.”
“예전 대장경을 내려주신 것도 다 섭정공의 사은(私恩)이라 들었소이다. 섭정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유념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원래 귀가(貴家)는 백제의 말예로 우리나라와 같은 핏줄이고, 일전에도 지금 막부를 등에 업은 북조가 아닌 남조(南朝)를 지지하던 구래의 충신 가문이오. 거기에 귀공의 형님 되시는 분은 막부에 의해 토살되고, 가령(家領)은 갈가리 찢겨 원수 되는 야마나(山名)씨에게 돌아가지 않으셨소이까. 거기에 큐슈의 남적(南賊)들은 사사건건 귀가의 일을 방해하고 나서니 사방이 적이오, 이를 일컬어 고사에서는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도 합지요.”
고봉지의 말에 오우치 모리미의 눈매가 어두워졌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살기 위해 막부에 굴신하며 큐슈 다자이후의 시부카와와 손을 잡고 있으나, 동쪽으로는 대대로의 원수인 야마나씨가 버티고 있고, 남쪽으로는 큐슈의 강적들이 오우치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오우치 모리미의 눈치를 슬쩍 본 고봉지가 말을 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 섭정공께서는 그간 오우치 님께서 보여 주신 아조에 대한 정성을 생각하여 큐슈를 정벌하는데 힘을 보탤까 하여 이렇게 저를 보내셨나이다. 오우치 님께서 잘 설득하여 구주탐제(九州探題) 시부카와 님과도 연결이 되어 우리 조선은 바깥쪽 바다로부터, 그리고 오우치 님과 시부카와 님께서는 안쪽 육지를 건너 쇼니씨와 다른 큐슈 제족(諸族)들을 일벌하면 일시에 위명이 자자할 것입니다.”
“과연 고 공의 말씀이 구구절절 옳소이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소이다. 만약 일이 잘된들 우리가 귀국에 귀부(歸附)하리이까. 막부에서 천황을 등에 업고 동쪽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만약 일이 그리된다면 막부에서 이 일을 토평하고자 전란을 벌일 것이오. 그 군세를 우리가 먼저 막아야 하는데 어찌하실 요량이오?”
“그것은 우선 큐슈를 토평한 뒤에 논해도 늦지 않을 일이나이다. 대마도주도 아조와 막부의 벼슬을 동시에 받은 예가 있으니 당분간 막부에는 편한대로 내조(來朝)하여 어르시고, 섭정공께서는 귀공에게 백제공(百濟公)의 위명을 하사하신다 하셨으니, 산양(山陽), 산음(山陰), 구주(九州)의 여러 땅에 귀공의 명리가 자자할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우치가 들어보니 구구절절 그럴싸했다.
형인 요시히로가 막부에 반기를 들었다 전사한 뒤로 내리막을 걷고 있는 오우치가를 이번 일이 잘된다면 새롭게 번영하는 세대로 이끌 수 있을 성싶었다. 어차피 지방 다이묘로서 막부와는 대립한 역사가 길지언정 충성심이라고 할 것이 없었던 그에게는 일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귀국의 병력이 어느 정도 되오?”
“대마도에 내려 있는 병력만 물경 8만입니다. 거기에 전라와 충청 양도에 언제든 필요할 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장계를 내려 놓았으니 일이 어려워지면 언제든지 군세를 내어 올 수 있지요.”
“좋소. 그 정도면 충분하리다.”
이렇게 거사를 치르기로 약조를 단단히 하고, 밀약(密約)을 맺은 것은 함구한 채, 고봉지는 대마도로 건너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고, 오우치는 큐슈 다자이후에 있는 탄다이(探題) 시부카와 미츠요리에게 밀정을 보내어 교묘히 조선측에 붙어 일을 도모하도록 부추겼다.
시부카와마저 그에 혹해 조선군이 큐슈에 상륙하면 육지에서 동조하여 일어나기로 약조를 하니, 이 일이 진행되는 것이 오우치에 의해 그 즉시 대마도의 조선 군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때 한성에서는 이미 대마도의 이종무의 직함을 정왜장군에서 평동대장군(平東大將軍)으로 올리고 그 계급도 육군대장(陸軍大將)으로 진급시켜 그 위신을 더해 주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큐슈에 상륙할 때를 대비하여 그 지휘권을 좀 더 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종무, 오우치 모리미, 시부카와 미츠요리 3인간의 조율이 끝나는 대로 일을 도모하기로 합의하고 조정에서는 이종무에게 전략적인 부분에 대하여 전권을 내어 주니, 이른바 대마도 정벌로부터 시작된 경인동정(庚寅東征)의 전세는 여름과 함께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