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장 남해토평(南海討平) (13/82)

제12장 남해토평(南海討平)

「존숭하는 선조(先朝)는 백제국(百濟國)의 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13대 위덕왕(威德王)의 제3왕자이신 임성태자(琳聖太子)께옵서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19년에 일본으로 건너오니, 산요(山陽)의 팔개국(八箇國)이 사(賜)되어 자자손손 대물림 하여 무(武)를 닦고, 용(勇)을 연마하며 식산공업(殖産工業)뿐만 아니라 광업(鑛業)을 추진해 해외 무역을 행하니, 그 부강함이 바다 안에 겨룰 곳이 없다고 일컬어졌다. 제42대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에 이르러 남북양조(南北兩朝)의 일통에 애써 그 큰 공이 있고, 그 아우 오우치 모리미는 큐슈 일벌(九州一伐)의…(후략)…….

○抑先祖ハ百濟國ノ始祖都慕大王ニ始マリ其第拾參代威德王第三王子琳聖太子推古天皇之十九年日本ニ移リ山陽八箇國ヲ賜ハリ子孫相嗣ギ武ヲ煉リ勇ヲ磨キ傍ラ殖産工業及ビ鑛業ヲ奬メ尙ホ海外貿易ヲ司リ其富强海內無雙ト稱エラレ且ハ第四十貳代大內義弘ニ至リテ南北兩朝統一ニ盡シテ大功有リ其弟大內盛見ハ九州一伐ノ…(後略)…….」

―증보(增補) 오우치가 계보(大內家系譜) 서문(序文) 中

1410년 맹추(孟秋)

일본국 사이카이도(西海道) 이키노쿠니(壹岐國).

이지실이 이백 척의 함선과 1만 5천의 군사를 내어 받아 바다에서 이키(壹岐)섬을 내습한 것은 음력 6월 12일의 일이었다.

대마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채를 세워 본토의 거제와 자유로이 교통하게 되자, 이종무의 명으로 이지실이 병력을 이끌고 대마도에서 큐슈로 들어가는 입륙(入陸)의 요충지인 이키섬을 확보하기 위해 공략한 것이다.

이키섬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국주(國州)로, 이키노쿠니(壹岐國)의 국부(國府)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대 이키노쿠니의 슈고다이묘는 쿄고쿠 다카미츠(京極高光)였으나, 이 쿄고쿠씨는 원래 이즈모(出雲)의 호족으로, 막부의 하명을 받아 이키의 수호직에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이 절해(絶海)의 섬에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곳은 왜구의 소굴이 되어 대마도의 해적들과 함께 준동하곤 했는데, 전년 왜구의 풍해도 습격 때 대마도의 햐아다와 함께 이 이키의 왜구 수령인 카와다 야스로(河田安郞)등이 함께하였기에, 그 핑계를 삼아 이지실이 군세를 몰아 일거에 토벌하고 만 것이다.

섬 밖에서 포문을 열고 쏘아대니 카와다를 비롯한 왜구들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곧 깃발을 내리고 투항하여 목숨만 구명(求命)하여 주기를 빌며 섬을 내어 주니, 이지실은 그곳에 앞으로 큐슈로 들어갈 전진기지로 삼아 선창(船艙)을 짓고 둔영(屯營)을 조성했다.

이키섬 우안(右岸), 큐슈와 마주 보는 쪽의 내항(內港) 주위가 조선군의 기지화되자, 대마도에 6천의 병력을 남기고 7만의 병력이 이 이키섬으로 넘어와 진둔했다.

원래 크지 않은 섬인데, 7만에 달하는 병력이 상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출진 명령이 떨어져 큐슈로 넘어가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지내거나 했지만, 바쁘게 섬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다름 아닌 부교(副校)로 진급한 천칠개와 참교(參校)가 된 소만식이었다.

“그래, 이게 뭐라고? 꽃인데, 꽃.”

“하나(花).”

“그래. 꽃은 하나.”

바로 이키섬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붙잡고 일본어를 익히고 있었다.

천칠개가 일본어를 배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다른 아닌 부교로 특진하게 되었을 때, 이종무가 직접 찾아와 격려해 주며 한 말 때문이었다.

“이번 동정은 아무래도 길어질 듯싶네. 천 부교 같은 인재가 이 일본땅의 말도 배워 두면 군문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반드시 쓸 일이 있을 걸세.”

이종무는 그저 천칠개의 의지를 독려할 심산으로 던진 이야기였을지 모르겠으나, 천칠개는 그 말을 듣고서는 마치 적에게 덤벼들 듯이 일본어를 흡수하는데 필사적이 되었다.

그러나 마땅히 배울 방법이 없던 차에 이키섬을 점령하고 주둔하게 되자 하사관 계급인 그는 외출이 허락되었고, 덕분에 섬을 휘젓고 다니며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었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네 고마.”

“그럼 그게 그렇게 쉬울 줄 알았는겨. 내는 우리나라라 캐도 서북면 사람들이나 제주 사람 말은 도통 몬 알아 먹겠드만.”

은근슬쩍 소만식이 말을 내리는 것 같아 보이자, 천칠개의 눈이 부라려졌다.

“니 지금 은근슬쩍 말 놓네? 맞재?”

소만식은 순간 움찔했다. 같이 하사관이 되었다고 뻗대 보았던 게 잘못이었다.

“아입니더. 걍 혼잔말 하다 보니 그래 된 거 아이겠니껴.”

“카믄 됐고.”

둘은 보총을 등에다 대충 둘러매고서는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 위에 걸터앉아 풀피리를 물고 잠시 휴식을 즐겼다.

이키섬은 대마도와는 달리 높은 산이 없고, 섬 전체가 평지에 가까워 이런 나지막한 언덕 위로는 풀밭이 넓게 펼쳐져 있곤 했다.

“근데 구주(九州)로는 언제 들어간다고 들었습니꺼?”

“니나 내나 진급해 봐야 인자 겨우 하사관이다. 그렇게 한참 위에서 도는 이야기를 내가 우에 알겠노.”

“그렇긴 한데……. 원체 요즘에는 조용하니까 불안시럽기도 하고 해서 말입니더.”

“좀만 있어 봐라. 뭐라고 말이 내려오겠지.”

확실히 불안하기는 했다.

지금은 이렇게 태연히 바닷바람을 쐬며 누워서 한가함을 누리고 있으나, 대마도에서의 전투와는 비교도 안 될 진짜 싸움이 바다 건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천칠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진급을 날개 단 듯 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기회가 좋고 운이 닿아서 그렇게 된 일이지 어려운 전투를 성공시켜서 그런 것은 아니었었다.

“그런 이야기는 고만하고 일본말이나 해 봐라.”

애써 찝찝한 기분을 없애려고 천칠개가 소만식을 괜스레 닦달했다.

“제가 무슨 일본말을 합니꺼?”

“니가 그래도 내보다는 조금 낫잖아.”

그렇게 둘이서 토닥거리는 사이에 저 언덕 아래에서 병졸 한 명이 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일등졸의 계급장을 단 병졸은 힘겹게 언덕을 올라와 천칠개가 보이자 외쳤다.

“천 부교님! 귀대 명령 떨어졌습니다! 일본 본주(本州)에서 누가 넘어왔다고 부대 외출을 금지하고 경계 철저하랍니다!”

천칠개와 소만식의 시선이 일순 마주쳤다. 둘은 말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매어 둔 말을 풀고 부대로 향해 달려갔다.

서로 경주하듯 말을 달려 부대로 돌아오니 아닌 게 아니라 바다 바깥에 대여섯 척의 왜선이 정박해 있고, 부대 분위기가 어수선해 보였다.

“정확히 뭔 일이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본주에서 귀한 분이 오셨다고. 지금 상부에서는 그 손님과 함께 뭔가 이야기 중인 것 같습니다.”

천칠개가 병졸의 말을 듣고 본대(本隊) 쪽을 보니 확실히 뭔가 엄중하게 경계를 서고 있기는 했다. 보총을 맨 조선군 병사들 주변으로 칼을 차고 갑주를 입은 무사들도 여럿 보였는데, 등 뒤로 모밀[花麥]의 문장을 그려 넣은 깃발을 꽂고 있는 이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지금 본대의 막사에 들어가 있는 손님의 가문(家紋)이었다.

이 보리 꽃을 가문의 문장[家紋]으로 쓰는 이는 바로 다름 아닌 보쵸(防長)의 영주인 오우치 모리미(大內盛見)였다.

일전 고봉지의 내방을 받고 시부카와를 끌어들여 삼각동맹을 맺고 큐슈를 토벌하기로 일기투합한 뒤, 큐슈 상륙에 관한 마지막 조율을 할 겸 조선군과 친목을 다져 두기 위해 직접 이키섬까지 몰래 행차한 것이다.

“군기가 엄정한데다, 그 군세가 막대하니 보기만 해도 큰 힘이 납니다.”

오우치 모리미는 이키섬에 당도했을 때부터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조선군과 손을 잡기로 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시부카와 님과는 이야기가 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종무가 넉살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쇼니씨의 등살에 못 이기고 있는 판이니 시부카와 님께서도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이 오우치와 조선의 정병(精兵)을 믿지 않으면 수천 리 밖 막부가 조치를 취해 주기만을 고개를 빼놓고 기다려야 하는 판이 아니겠습니까. 먼데 있어 오가지 못하는 군사보다는 가까이 있는 든든한 배병(配兵)이 이럴 때야말로 힘이 되는 일입니다.”

오우치의 넉살에 이종무도 기분이 좋아졌다.

휘하의 군세를 칭찬하는 것은 곧 지휘관의 능력을 찬상(讚賞)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옆에 배석해 있던 이지실도 못내 흐뭇해하며 말했다.

“오우치 님의 무신(武臣)들도 그 기세가 등등하니, 가히 서국(西國)의 정예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합니다.”

“어인 말씀을요.”

그렇게 분위기가 도타워지자 이내 주안(酒案)이 나오고 잔이 오고 가며 이야기가 무르익어 갔다.

“출병은 언제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술이 거나하니 코가 불콰해진 오우치가 물었다.

“지금이 7월이니 장마도 이제 지나갔으나 아직은 날씨가 매서우니 처서(處暑)가 지나는 보름께에 군사를 일으켜 볼까 합니다.”

이종무의 대답에 오우치가 고개를 넙죽 끄덕인다.

“그럼요. 그때가 좋을 겁니다. 이제 곧 추수철이니 때를 노려 기세 좋게 내려가면 됩니다. 거기에 조선의 정병들은 다 본국의 농기(農期)와 상관없는 직병(職兵)들이니 사정을 관여치 않고 호쾌히 진군할 수 있을 겁니다.”

오우치는 조선군 정병들을 둘러보자 자신에게도 그런 군세가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조금 동했다. 처음에는 갑주도 차지 않고 신기하게 생긴 면의(綿衣)를 입고 나무막대기 같은 총자루를 쥐고 있는 조선군의 무력이 쉬이 와 닿지 않았지만, 이내 군영 한편에서 보총을 격사(擊射)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그 생각을 달리했다.

이백 보 밖의 목판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보총 몇 자루 얻어서 자신의 병력을 무장시켜 보았으면 하는 심산이 있었다.

그런 오우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종무는 술을 한 잔 더 권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럼 금월(今月) 16일께로 함께 출병토록 합시다. 오우치 님께서는 풍전(豊前)에서 출진하여 북구주(北九州) 일대를 맡아 주시고, 시부카와 님께도 이와 같이 전해 대재부(大宰府) 일대를 기점으로 내합(內合)하여 주시면 우리 군은 비전(肥前)으로 상륙하여 쇼니씨를 배후에서 도모하겠습니다.”

내심 보총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하던 오우치는 조선에서 그런 무기를 쉽게 내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그저 계책에 동의하며 우선은 전략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합시다. 보쵸에 있던 군세는 모두 부젠(豊前)으로 거의 옮겨 놓았으니 그 수가 물경 1만입니다. 쇼니의 군세가 도합 팔천이 안 되니, 이 병력만으로도 쇼니씨는 이제 봉문(封門)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조선이 거국적으로 이번 정벌에 동원한 병력이 약 8만이었다. 그런데 오우치 모리미가 세력 있는 슈고다이묘라고 하나, 근거지인 보쵸 지역을 지킬 병력을 제하고도 1만이나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율령제(律令制) 이래 세워 왔던 장원제(莊園制)와 국제(國制)가 무너져 가고, 이것을 기존 장원과 국유지의 절반분의 소유권과 징세권(徵稅權)을 슈고다이묘들에게 나눠 준 이른바 한제이켄(半濟權)과 그 나머지마저도 구래의 장원 영주들을 대신하여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게 해 준 권리인 슈고우케(守護請)로 인해 기존의 코쿠시(國司) 등의 세력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지방의 무사들을 장악하고 식호(食戶)를 내려 주며 세력을 기른 슈고다이묘들이 지방을 완전히 장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우치만 해도 그 휘하의 가신으로 삼은 무사들이 그 숫자가 8백에 이르렀고, 일기에 운용하여 큐슈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1만이나 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출정의 낙승(樂勝)을 기원하며 한잔 듭시다.”

이종무의 건배사에 다들 잔을 들고 전승을 기원하니, 무더운 여름밤도 이제 한 끝 물러서는 듯싶었다.

이렇게 연합군이 출정의 준비를 마치고 큐슈 일통(一統)을 향하여 깃발을 드높이 올리니, 이것이 무자년 7월의 일이다.

1410년 중추(仲秋)

일본국 사이카이도(西海道) 치쿠젠노쿠니(筑前國) 하카다(博多).

치쿠젠국 하카다(博多)는 고래로부터 유서가 깊은 항읍(港邑)으로, 가외(街外)의 멀지 않은 곳에 예로부터 중앙에서 큐슈의 통치를 도모하고자 세운 관청인 다자이후(大宰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다자이후는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으나 명목상 큐슈탄다이가 중앙으로부터 부임해 오면 그 권직(權織)에 수반해 이곳에 주둔하곤 했는데, 이마가와 료순에 이어 큐슈탄다이가 된 시부카와 미츠요리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시부카와 미츠요리는 원래 막부에 봉직하던 무사 출신이었으나, 전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에 의해 큐슈로 보내져 막부의 권력 강화에 매진해 왔다.

그러나 막부가 시부카와 미츠요리가 크게 의존하고 있던 오우치씨와 사이가 틀어지고, 일본 전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슈고다이묘들을 억눌러 중앙정권의 힘을 키워 왔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죽고, 그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쇼군이 되면서 시부카와 미츠요리는 주변의 반 막부, 반 시부카와 세력인 쇼니씨, 키쿠치씨, 오토모씨 등의 다이묘 가문들에게 둘러싸여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오우치 모리미가 조선군을 끌어들여 같이 힘을 합쳐 큐슈에 새로운 정권 수립에 매진해 볼 것을 제안해 오니 감히 막부에 상고(上告)도 하지 않고 외방(外邦)의 군대를 끌어들여 큐슈를 토평(討平)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고민도 해 보았으나, 언제고 다자이후를 둘러싼 치쿠젠국 일대를 시시탐탐 노리는 당금의 쇼니씨 가독인 쇼니 미츠사다(少貳滿貞)의 서슬 퍼런 칼날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그렇게 삼자간의 이야기가 맞아떨어져 조선군 함대가 하카다에 입항하는 것을 묵인하고 군청(軍廳)을 내어 주고 접빈(接賓)하여 시부카와 자신의 사병들을 조선군과 함께 주둔시키니, 이것이 음력 7월의 일이었다.

이 당시, 하카다 상인들의 주청을 받아들인 막부가 1401년에 견명선(遣明船)을 보내어 명과 막부 간에 책봉 관계를 수립하고 영파로 가는 감합 무역이 실시된 이래로, 하카다는 호상(豪商) 12명이 이른바 넨교지(年行司)라 불리며 하카다 항구의 내정(內政)은 물론이고 명, 조선, 유구, 안남 등으로 나가는 각지의 대외 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명에서 들여온 생사(生絲)가 일본에 들어오면 20배의 가격이 되고, 반대로 일본의 동(銅)을 명으로 가져가면 5배의 가격이 되곤 하니, 그 무역으로 축재한 규모가 가히 대단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번성하는 항구이니, 항만이 있는 동북부의 오키노하마(息浜)지역과 서남 내륙지의 하카다하마(博多浜)를 합쳐 도합 1만호의 호구(戶口)가 있으니, 그 인구가 물경 5만에 육박해 큐슈 제일의 성읍이라 할 만 했다.

이런 하카다이다 보니 쇼니씨와 오토모씨 등이 이를 탐내 연중으로 군사를 출병시키며 시부카와를 압박하고 있으니, 시부카와로서는 조선군을 입항시키는 결단을 내림으로서 이들과 대립하는 동시에 자구(自求)의 책(策)으로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시부카와의 보호를 받는 하카다의 넨교지 중에서 가장 크게 상단을 꾸리던 이가 이른바 소킨(宗金)이라는 자였는데, 몇 년 전 조선이 동래(東萊)에 왜포(倭浦)를 허락해 무역을 하도록 한 뒤로 하카다와 동래 그리고 영파를 오고 가며 큰 부를 쌓은 사람이었다.

조선어에도 매우 밝았기에 시부카와가 이종무 등을 영빈(迎賓)하면서 소킨을 불러다 동석시켰다.

“조선의 대장군을 뵙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종금이라 합니다.”

종금이라 하면, 다름이 아니라 소킨의 이름을 조선말로 읽은 것이니, 대외(對外)로 조선에도 이미 알려진 이름이었다.

“동래를 오고 가며 큰돈을 굴리는 거상이라고 들었소이다. 명의 동전(銅錢)으로 거래하니 그것이 수십만 냥에 이르는 가액(價額)이라들 하던데.”

“과찬이시나이다. 오늘 시부카와 님께서 불초(不肖)한 상인을 이렇게 귀한 자리에 동석시켜주시어 존안들을 뵙게 되었으니 소인이 오늘 주안을 대접하겠나이다. 마음껏 드시고 원정(遠征)의 일을 논하시면 그걸로 기쁘게 여기겠나이다.”

이종무의 말에 소킨은 그저 고개를 에두르며 몸을 낮췄다.

조선이 아주 큐슈로 들어오게 된 이상, 잘 살린다면 무역의 규모를 배로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시부카와도 이런 점을 십분 고려하여 그를 불렀을 것이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은 조선의 대장군님과 함께 지금이 치쿠젠의 다이묘로 수시로 이곳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 쇼니 미츠사다를 벌할 계책을 논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쿠고(筑後)의 오토모 치카아키(大友親著)는 오우치 님께서 분고에서 출격하여 토평하기로 하셨으니, 우선은 십 리 밖부터 진을 치고 있는 쇼니씨를 먼저 패주시켜야 할 일입니다.”

시부카와 미츠요리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카다의 접빈관에 마련된 이 주청(酒廳)에는 시부카와와 그 휘하의 가신들과 함께 소킨을 비롯한 상인 두어 명 그리고 이종무, 이지실을 휘시한 조선군의 막료(幕僚)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매우고 있었다. 이내 좌중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역관을 자리에 놓고 여러 차례 의견이 오고 가니 조선군은 상륙한 병력 중에 1만을 이 하카다와 다자이후를 방비하기 위해 주둔해 놓고 나머지 6만을 동원하기로 하고, 시부카와는 휘하의 5천 병력을 모두 내어 조선군을 호군(護軍)하기로 하니, 도합 병력 6만 5천을 내기로 결의되었다.

거기에 소킨을 비롯한 하카다의 넨교지 상인들이 십만 냥의 명나라 동폐(銅幣)를 내어 전비를 부담키로 스스로 자청하고 나섰다.

이종무는 이 덕분에 큰 시름을 덜었는데, 군량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던 와중에 원정이 길어지자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청하여 군비를 부담하기를 청하니 마음이나마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전란이 안정이 되면 무역에서 덕을 보고자 하는 것을 터이나, 전비까지 부담하는 정성이니 조정에 상주(上奏)해 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카다의 상족(商族)이 일심으로 모아 헌납하는 것이니 쾌히 가납해 주십시오.”

소킨을 비롯한 하카다 상인들의 마음은 진정이었다. 이들은 대외 무역에 종사하면서 최근 내란을 종식시키고, 명까지 물리친 조선군의 무력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조선군이 큐슈에 상륙해서 안 그래도 하카다의 배후에 있던 시부카와 미츠요리와 손까지 잡았으니, 이미 가망 없는 쇼니 미츠사다에게 줄을 대어 패망의 지름길을 가느니 기꺼이 재부(財富)를 정역(征役)에 헌납하여 훗날의 더 큰 부귀를 도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로서 군세가 등등하고 뒷배도 안전하니 하늘이 승리를 내려준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시부카와 미츠요리도 껄껄 웃는다.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가 아니겠는가. 이미 하카다에 7만 조선군이 내려 그 위세를 보는 순간 시부카와는 의심을 접은 뒤였다. 적절한 선에서 막부와 대전(大戰)이 벌어지지 않는 한, 큐슈는 이미 조선군을 등에 업은 그의 손에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하카다에서 주청을 벌여 놓고 조선군과 시부카와 그리고 상인들이 한바탕 일전을 결의하는 와중에, 그곳에서 머지않은 카스야(糟屋) 일대에서는 쇼니 미츠사다가 8천의 군세를 모아 놓고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다자이후를 나와 시부카와를 토평할 세력을 모으던 길에 대마도로부터 소 사다스미를 통해 급보가 들어와 조선군이 내습하였으니 큐슈 일대에서 군사를 모아달라는 전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창 오우치, 시부카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차에 갑작스럽게 큐슈를 방비하고 대마도를 탈환할 병력을 세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급한 대로 동맹인 오토모 치카아키에게 군력을 모아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시부카와가 선수를 쳐 오우치와 협력하여 조선군을 하카다에 상륙시켰다고 하니 쇼니 미츠사다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든 조선군의 자세한 규모를 모르고 있던 쇼니 미츠사다는 그간 모아 둔 8천의 병력으로 이번 기회에 시부카와를 토평할 심산으로 하카다 다자이후에서 멀지 않은 카스야에 진을 치고 정황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이 이왕지시 이렇게 되었으니 조선의 외적을 몰아내고 그 구실로 시부카와를 토평해 큐슈에 다시 내 이름을 세워야겠다. 이마가와 료순으로부터 시부카와 놈에 이르기까지 큐슈탄다이라는 자들에 의해 우리 일가(一家)에 이름이 욕보여져 왔느니라. 이번은 그걸 다시 돌려 세울 절호의 기회다.”

쇼니 미츠사다는 이를 갈며 칼의 날을 세웠다.

그러나 쇼니 미츠사다의 막하(幕下)에 있는 소 사다스미는 그저 대마도가 걱정될 따름이었다.

형인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의 인편으로 급히 보낸 편지에는 그 절박함이 고스란히 묻어나와 있었다. 그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지금은 그저 조선군이 대마도를 징벌하고 이미 하카다까지 들어와 있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하니 그저 걱정이 태산이었다.

“츠시마국에 이어 이키국까지 쉽게 떨어지고 이미 시부카와 오우치와 연합하여 하카다에까지 들어왔다고 하니, 이 조선군의 위세가 가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한 수 물리셔서 다음을 도모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심 걱정에 소 사다스미가 주군인 쇼니 미츠사다를 말려 본다.

그러나 이미 복수할 마음에 사로잡힌 쇼니 미츠사다의 귀에는 들려올 턱이 없었다.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전투 준비하기나 하게. 이번에 반드시 대승을 거두어 진서(鎭西, 큐슈의 舊名)에 쇼니가의 위명을 떨치고 말 것이네.”

이렇게 쇼니 미츠사다가 마음이 달아 서둘러 군세를 일으켜 하카다로 몰아치니, 이미 출격을 준비하고 있던 조선군과 격돌하여 크게 손실을 입고 말았다.

보총을 앞세운 조선군이 다자이후의 외벽(外壁)으로 방비 삼아 돌격하는 쇼니군을 몰아세우니, 8천의 병력이 순식간에 총포에 희생되어 죽거나 흩어져, 겨우 목숨을 건져낸 쇼니 미츠사다가 카스야로 돌아와 군세를 수습하니 겨우 남은 병력이 2천 남짓이었다.

쇼니 미츠사다는 그 동생인 노리후사(賴房)가 조선군에게 인질로 붙잡히고, 전투를 만류했던 소 사다스미는 전중에 낙마하여 그 목숨을 잃고 마니, 주변의 가신들도 죄 흩어지고 목숨을 구명할 방도만 강구하게 되었다.

카스야에 모인 2천의 병력을 수습하여 살길을 도모하려고 생각하니 갈 곳은 치쿠고의 오토모씨의 막중(幕中)뿐이라.

이렇게 8월 초두에 펼쳐진 다자이후의 일전(一戰)에서 조선군의 보총의 위력을 예상치 못하고 덤볐던 쇼니 미츠사다는 그 군세를 크게 잃고 치쿠고로 도망쳐 오토모 치카아키에게 몸을 의탁했다.

조선군은 치쿠고로 넘어가는 길목의 히젠국(肥前國) 미네(三根)까지 진격하니, 부젠에서 오우치 모리미가 1만 군세를 이끌고 내려와 이곳 벌판에서 합류했다. 이 미네의 들판 바로 앞에는 히젠국과 치쿠고국의 경계로 삼는 치토세가와(千歲川)의 강물이 흐르고, 그 맞은편이 바로 치쿠고 국부(國府)가 있는 쿠루메(久留米)의 성읍이었다. 이곳에서 오토모 치카아키가 가신들을 성중에 불러 모아 일전에 대비하니, 이른바 미네 합전(合戰)의 막이 오르려 하고 있었다.

1410년 중추(仲秋)

일본국 사이카이도(西海道) 치쿠고노쿠니(筑後國) 쿠루메(久留米).

가을이 한창이었다.

치토세가와(千歲川)의 하안(河岸) 좌우의 들판으로 벼가 고개를 숙이고 가을볕 아래에 익어 간다. 황금빛 물결치는 논두렁은 평온하기 그지없으나, 이 온적(穩寂)한 들판을 둘러싸고 강 양쪽에서는 수만의 군세가 서로 등등하게 대치하고 있으니, 가을 들판의 평온함도 실상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치토세가와는 치쿠젠국과 치쿠고국의 자연 경계를 만드는 하천으로, 혹 별칭으로 이치야가와(一夜川)라고도 했는데, 예전 이곳에 제방이 들어서기 전에 하룻밤 홍수에 대지가 황폐하게 쓸려 나가곤 했다고 해서 붙여진 고명(古名)이었다.

다른 말로는 치쿠젠과 치쿠고 사이를 흐른다 해서 치쿠마가와(筑間川)라고도 하고 치쿠고가와(筑後川)이라고도 했다.

50여 년 전에는 이 유역을 둘러싸고 쿄토의 북조(北朝)와 요시노(吉野)의 남조(南朝)가 격돌하니 이른바 유명한 치쿠고가와의 합전(合戰)이다.

내려오는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이 강을 끼고 큐슈 제일의 토지가 펼쳐져 있다 보니 예로부터 명문 거족의 장원(莊園)이 산재해 있었고, 근자에 이르러서도 큐슈의 명문인 오토모씨의 가신가문들이 평야를 끼고 번성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름난 집안이 카마치(蒲池)씨로 그간 치쿠고를 한 손에 넣은 세력이 없었기에 이 카마치를 비롯한 호족의 집안들은 모두 근린의 대다이묘이자, 치쿠고의 슈고(守護)를 겸직하고 있는 오토모의 막하(幕下)에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러 이들이 오토모씨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른바 타이신15가(大身十五家), 혹은 치쿠고15성(筑後十五城)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 필두에 있는 것이 야나기가와 성(柳川城)을 본거지로 하는 카마치씨였고, 지금의 당주인 카마치 시게히사(蒲池繁久)도 일단의 무사들을 이끌고 쿠루메로 들어온 오토모 치카아키에게 군막(軍幕)을 차려 주고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토모 치카아키는 분고(豊後)국에서 병력을 일으켜 이곳에 다다르고 있었는데, 이미 다자이후에서 조선군과 일전을 벌이고 패주한 쇼니 미츠사다도 남은 병력을 주워 모아 이곳에 합류한 데다가, 카마치를 비롯한 치쿠고의 속하 영주들이 군사를 내어 바치니 쿠루메의 오토모 치카아키의 군영의 군사가 물경 3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것은 근래에 큐슈에서 일어난 병력 중에도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병력이었으니 오토모 치카아키가 이번 일에 얼마나 이를 갈고 준비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몹쓸 조선인들이 제멋대로 굴며 남의 땅에 들어와 이렇게 횡행(橫行)하며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원구(元寇) 이래로 이런 욕된 일이 없었다. 거기에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다는 오우치, 시부카와 같은 간신들이 외적과 손을 잡고 우리의 목을 노리고 있으니, 이야말로 조적(朝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군막에 배하 장수들을 모아 놓은 오토모 치카아키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남북조로 편을 나눠 싸운 이래 제일의 적이라 할 수 있는 큐슈탄다이 시부카와와 호시탐탐 큐슈를 노리고 있는 오우치 모리미가 외적을 끌어들여 큐슈를 일벌하겠노라 큰소리 치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대들은 이 일을 어찌 해야 할지 좋은 꾀를 내어 보게.”

오토모 치카아키가 3만의 군세로 8만의 병력을 막을 꾀를 내어 보라 종용한다.

그러나 좋은 계책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는 법, 공론이 오고 가며 적을 쿠루메로 끌어들여 농성해야 한다, 혹은 도강(渡江)하여 미네에 진을 치고 있는 적을 급습하는 것이 좋다는 둥 말이 오고 갔으나 오토모 치카아키의 귀에 썩 마음에 드는 제안이 없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카마치 시게히사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우선 막하의 3만 병력으로는 아무래도 8만의 군세를 도모하긴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밤마다 병력을 조금씩 내어 적진을 야습(夜襲)하여 지치게 하고, 그 사이 본대는 히젠(肥前)의 키쿠치 카네토모(菊池兼朝) 님과 연대하여 군세를 늘려 치토세가와를 앞에 놓고 맞서면 적이 함부로 준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토모 치카아키가 그 말을 들어 보니 맞는 말이긴 하나 썩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그러나 괜스레 키쿠치 님의 군사를 빌려 공훈을 나누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겠는가?”

오토모 치카아키는 아직 젊은 나이로 약간의 공명심(功名心)이 있었다.

때문에 패전의 경우는 생각지도 않고 우선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이겨서 큐슈 전역에 영향력을 떨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쇼니 미츠사다가 조심스레 나선다.

다자이후에서 대패를 하고 지금은 키쿠치 막하에 몸과 병력을 의탁한 처지이나, 그도 원래는 큐슈의 대영주이니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 태도는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지금 패전지장의 몸이 되어 혹여 변명이 될까 싶어 입을 열기도 두렵소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적군은 그리 녹록하지 않소이다. 진형을 짜고 한자리에 머물며 함부로 준동하지 않고, 군기가 엄정하니 병사들이 임전(臨戰)하여 달아나지 않소이다. 이런 기세만 해도 두려운 것인데 보총이라는 화포를 쉴 새 없이 쏘아 적진에 채 다가서기도 전에 인마(人馬)가 스러지니, 이 적은 병력으로 일전을 불사하는 것은 죽음을 앞당기는 지름길이오. 이른바 같이하다가 땅과 군사를 모두 잃고 몸만 도망쳐 나온 사람의 말이니 유념해 주시오.”

자신 있게 맞서 들이치지 못하는 것은 쇼니 미츠사다도 애석하기 매한가지였으나, 한 번 당한 바가 있어 몸을 사리기를 충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토모 치카아키는 아직도 일전을 불사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군은 먼 길에 지치고 우리는 본진에서 적을 맞는 격인데…….”

오토모 치카아키의 표정은 좀체 밝지 않았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탓이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 보이자, 뒷줄에 입석(立席)해 있던 몬츄쇼 사다지로(問註所貞次郞)가 입을 열었다.

“주군.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손실 없이 적을 물리치고자 하는 것이니 카마치의 계책을 쓰도록 하십시오.”

주위에서 우선은 한 번 피할 것을 권하니 오토모 치카아키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접 계책을 낸 카마치 시게히사로 하여금 야습(夜襲)을 지휘하도록 하고 타지리 시게나미(田尻鎭漣)를 히젠의 키쿠치 카네토모에게 보내어 원병(援兵)을 내어 함께 적을 막을 것을 요청하고, 진채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채 농성을 준비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병력은 나오지 않은 채 밤마다 강을 몰래 넘어와 후진(後陣)을 두드려 대니, 조선군 진영도 이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낮에는 혹여 일전을 벌일까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밤에도 야습을 방비코자 쉬지를 못하니 병력의 손실은 크지 않았으나 피로가 점점 진중에 쌓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소. 적군이 분명히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자 시간을 끄는 것이 틀림없소이다.”

이종무의 표정에서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 그 또한 상황을 파악하고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느라 사흘 밤낮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다.

“오우치 님.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풀어 나가야 좋겠소이까?”

시부카와 미츠요리의 눈 밑도 검었다.

내놓은 병력이 별로 없다 보니 막중(幕中)이 어수선하자 눈치껏 돌아다니며 야습을 방비하곤 했던 탓이다.

오우치 모리미는 지쳐 있는 이들을 보자 무슨 뾰족한 계책이라도 있으면 내놓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스스로도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런 소모전을 타개하려면 적지를 들이쳐야 하는데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수성(守成)하는 적을 공략해야 하니 우리로서는 적이 군세를 이끌고 평지로 나서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소이다. 그런데 놈들이 이걸 알고 밤마다 기습만 넘어올 뿐 성밖을 나서지 않으니 도무지 대책이 없소이다.”

이렇게 서로 답답한 와중에 궁리를 계속해 보지만, 답이 쉬이 나지 않았다. 이때 진중에 하카다로부터 군량을 싣고 온 상인 하나가 도착했으니, 바로 일전 하카다의 넨교지들을 주동하여 군량과 전비를 내어 놓겠다 약조한 소킨이었다.

그가 그 약속한 양곡(良穀)을 우마(牛馬)에 줄줄이 싣고 진중으로 들어서니, 밤손님만 받던 진중의 막료들에게 간만의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렇게 환대를 받으며 소킨이 군막에 들어서니 그가 보기에도 상태가 침중했다. 자리를 청하여 앉고서 좌중을 둘러보니 근래의 명장이라 불리는 장수들이 지쳐서 꾀를 부리지도 못하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전황이 어찌하여 다들 이렇게 지쳐 보이십니까?”

소킨이 떠보듯 묻자 오우치 모리미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는 이곳 들판에서 적의 협격(挾擊)을 막아 보총대로 몰살시킬 요량이었소이다. 그런데 쥐새끼 같은 오토모의 어린 놈이 앞으로 나서지 않고 성 뒤에 숨어 밤마다 병력을 내어 괴롭히다 사라지니 진중의 병졸과 장수 모두가 지금 지쳐 있소.”

소킨이 가만히 들어보니 이것이 모두 시간을 끌어 보려는 수작이 틀림없다.

“오토모 치카아키라는 장수는 협심(俠心)이 끓는 어린 나이라 분명히 그가 뒤에 물러 있기를 내켜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 막하에 지금 카마치 시게히사 같은 지모(智謀)가 좋은 장수가 있으니 그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킨의 말에 좌중의 귀가 기울어졌다. 그는 내심 이런 명장들이 고전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다 분명히 일전에 쇼니 미츠사다도 함부로 움직이다 크게 손을 보고 지금 오토모의 막중으로 도망쳐 있으니, 분명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조언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경거망동하지 않더라고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노릇인데 왜 이리 시간을 끄는지 알 수가 없소.”

이종무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소킨이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다.

“분명히 키쿠치나 시마즈, 둘 중의 한 집안을 끌어들여 군세를 불린 다음 맞설 생각입니다. 아니면 혹여 이들이 원군을 끌고 오면 이들을 부추겨 들판에서 맞서 싸우게 하고, 성에서 경과를 지켜보다가 농성에 들어갈지 합전을 볼 것인지 관망하고자 하는 수작일 테지요.”

이종무를 비롯하여 모두의 귀에 소킨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상재가 뛰어나니 내심 이런 책모에 역시 능하다고 이종무는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상인의 머리를 빌린 것을 해결책도 물어보겠다 생각하고 이종무는 소킨을 떠보았다.

“그럼 우리는 어찌하면 좋겠소?”

“카마치가 제 주군이 밖으로 병력을 끌고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키쿠치의 군세가 올라오기 전에 이것을 끌어내면 됩니다. 오우치 님께 미색 좋은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싶어 오우치 모리미의 눈에 둥그레졌다.

“그렇긴 하네만, 갑자기 딸년의 이야기는 왜 하는 건가.”

“내분을 가장하여 키쿠치에게 동맹을 제안해 만약 수락한다면 안에서 준동해 조선군을 공격하는 것을 돕겠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그 증거로 혼약을 제안하면, 오토모 치카아키는 분명히 공명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고, 거기에 오우치 님의 따님께서는 재색이 뛰어나기로 국중에 소문이 자자하니, 미색을 탐하는 오토모 치카아키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그렇게 약조를 받아 놓고 거짓으로 약속하여 이곳까지만 끌어낸다면 될 것입니다.”

소킨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침묵했다. 과연 옳은 계책이었다. 다만 오우치 모리미만이 전면에 나서기가 꺼림칙한 듯 약간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되겠는가?”

“시부카와 님께서는 쇼니, 오토모씨와는 구래로부터 서로 원한을 품었는데, 오우치 님께서는 구원(舊怨)을 크게 진 사실은 없으니 따님을 내세워 몰래 선을 대는 시늉을 한다면 적들이 감히 의심치 못할 것입니다.”

이야기가 그쯤 되자 오우치 모리미도 납득하고 그 계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종무는 그저 힘안들이고 코를 풀 수 있는 방책이니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이렇게 오우치가 밀정을 보내어 오토모 치카아키에게 밀약을 들이미니, 그간 오우치 모리미의 과년한 딸 에히메(惠姬)의 미색에 대한 풍문을 수차례 들은 바 있던 오토모 치카아키는 이에 혹해서 덥석 제안을 받아들인다.

“장인어른께 미네의 전장에서 곧 뵙겠다고 전해 드리게. 이 사위가 곧 가겠노라고 말이네.”

그렇잖아도 조선군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오토모 치카아키는 괜히 부담스러운 키쿠치 카네토모의 병력을 빌리지 않고서도 적진의 내분을 이용하여 승리를 거머쥐고, 미색 좋은 여자까지 손에 넣어 보쵸의 거물 오우치와 혼인동맹까지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뻐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이렇게 일이 된 줄을 뒤늦게 안 카마치 시게히사, 몬츄소 사다지로 등의 배하 무신들이 이를 말려 보려 하였으나 이때쯤에 이르러서는 시부카와 미츠요리가 하카다로 돌아간 것이 알려지고, 오우치 모리미가 제 병력을 따로 빼내서 십 리 밖까지 군세를 물린 것이 밀정을 통해 정해지자 내분이 일어났다 오우치가 밀맹을 제안해 왔으니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는 오토모 치카아키의 목소리만 커져 갔다.

조심스러워도 모자랄 판인데 오토모 치카아키는 이제 승리를 장담하고, 후방의 병력을 추려서 제 영지인 분고로 보내니 추수철이 한창이라 병력을 놀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병력마저 줄이고 8월 그믐에 이르러 오우치의 밀약을 믿고 군세를 일으켜 치토세가와를 건너 미네의 조선군 둔지까지 병력을 밀고 나갔다. 아직 키쿠치는 병력을 몰아 북상하는 중이고, 오우치의 말을 믿고 오토모 치카아키가 끌고나온 병졸의 숫자는 보졸(步卒) 급의 아시가루(足輕)까지 포함하여 겨우 2만이 조금 넘었으니, 나머지 병력은 죄 분고에 추수하러 돌려보낸 탓이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오우치의 내응(內應)은 커녕, 기다렸다는 듯 조선군이 평야 양쪽에서 진채를 펼치고 있다가, 그 사이로 오토모 치카아키가 병력을 이끌고 달려오자 좌우에서 보총으로 사격을 개시하니, 우선 말에 탄 무사들부터 떨어지고 보졸들도 우왕좌왕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오토모 치카아키는 속은 줄 모르고 병력을 돌리지 않은 채 오우치의 깃발이 보이기만을 내심 간절히 바랐으나 오우치의 깃발이 다가왔을 때는 기뻐할 수 없었으니, 총을 대어 사격하는 조선군 보총대 앞에 대나무로 엮은 방패를 쳐주고 뒤에서 화살을 날리며 장창으로 다가오는 오토모군을 찍어대는 것이 모두 오우치의 병졸들이었던 것이다.

“아, 내가 욕심에 젖어 이렇게 될 줄을 모르고 허황된 꿈을 꾸고 말았구나.”

뒤늦게 후회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토모 치카아키는 결국 제 몸만 겨우 건져내 산중의 호분지(法文寺)로 숨어들었다가, 그곳에서 할복하여 목숨을 마감하니, 전장에서 흩어진 자들과 분고로 돌아가던 병력을 다시 끌어모아 카마치 시게히사가 도우러 왔을 때는 이미 모든 때가 늦어 있었다.

쇼니 미츠사다는 전황이 불리해진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막부에 구병(救兵)하러 이요(伊予)를 거쳐 배를 타고 달아나니, 카마치 시게히사가 남은 병력을 인솔하여 헤매다 결국 다시 쿠루메로 들어가니 이미 국부(國府)의 성채는 하카다로 돌아갔다던 시부카와 미츠요리의 손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저항을 포기하고 카마치 시게히사는 할복한 오토모 치카아키의 종형제인 오토모 모치나오(大友持直)를 오토모씨의 새로운 가독(家督)으로 추대하고 오토모 모치나오에게 간언해 조선군과 화의를 맺고 더 이상 대립하지 말 것을 주창하니, 오토모 모치나오도 그 휘하에 부릴 수 있는 군사가 부족하니 결국 이를 받아들여 훗날의 처분에 따르기로 하고 화의를 청하니 이종무가 이를 받아들여 치쿠고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오토모 치카아키의 주청을 받아들여 군세를 몰아오던 키쿠치 카네토모는 전세가 급전(急轉)한 것에 놀라 병력을 회군하여 제 땅을 지키고자 다시 히고국으로 물러가니, 북큐슈 일대는 이른바 조선, 오우치, 시부카와의 삼각동맹에 일시 평정되게 되었다.

1410년 맹동(孟冬)

일본국 사이카이도(西海道) 히젠노쿠니(肥前國) 나가사키(長崎).

북큐슈 일대를 평정한 조선군은 남부에서 웅거하며 아직 복속하고 있지 않은 키쿠치씨와 시마즈씨의 세력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우선은 겨울을 날 둔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히젠국 일대로 철수해 있었다.

조선군이 주둔하기로 선택한 곳은 나가사키(長崎)라 불리는 서해안의 한촌(閑村)이었다. 이 일대는 예전에 치바(千葉)씨의 방계인 나가사키씨의 관(館)이 있었다. 하여 나가사키라 불리게 되었는데 지금은 겨우 70호 남짓한 어민들만이 해안을 따라 듬성듬성 살고 있었다.

실제로도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시가가 형성되고 대외 무역으로 번창하는 곳이니 지금이야 주변 사방 백 리 안에서도 눈에 띌 것 없는 그야말로 해안가의 볼 것 없는 촌락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양 조정에서는 전황의 보고를 듣고 세훈이 밀지를 내려 이곳을 군 주둔지로 확보해 둘 것을 주문했고, 이종무는 의아하면서도 명령받은 대로 주둔지를 이곳에 확보하였다.

막상 이곳에 둔영을 조성하고 보니 가히 천혜의 항구라 일컬어도 손색없는 곳이었다. 좁은 만이 육지 사이로 파고 들어와 군선이 안착(安着)하기 좋았고, 주변을 둘러싼 산세는 육지로부터 들어올지도 모르는 적을 방비하기 좋았다.

마이다케(舞岳)에서 히코산(英彦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조선식의 산성을 구축하고, 나가사키의 만구(灣口)로 흘러들어 가는 우라카미가와(浦上川)의 상류에 수문을 만들고 그 옆에 성의 정문 삼아 평강문(平康門)을 세우니, 그 현판은 이종무가 직접 쓴 것이었다.

조선군이 이처럼 주둔지를 확보하고 성곽까지 세워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큐슈 일대의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히젠, 치쿠젠, 부젠으로 이어지는 북큐슈 일대를 각각 조선군, 시부카와씨, 오우치씨가 점거하고 대마도의 소씨 일가는 조선군 진중에 포로로 잡혀 있으며, 쇼니씨는 궁지에 몰려 사이가 좋지 않던 막부에까지 원병을 청하러 갔으니, 치쿠고국 이남의 키쿠치씨와 시마즈씨는 번려(煩慮)하기만 거듭할 뿐, 감히 군사를 내어 대항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잠시간 싸움이 멈춘 상황을 이용해 조선군은 큐슈에 확실한 거점으로 만들고자 나서 이 나가사키 일대에 성곽을 세우고 시가를 조성하니, 원래의 이름인 나가사키의 한자를 그대로 가져와 이른바 장기(長崎)라 불렀다.

조정에서는 이곳 장기성 포안(浦岸)에 큐슈 일대의 별칭(別稱)인 친제이(鎭西)라는 이름을 가져와 진서도독부(鎭西都督府)를 설치하라는 명을 내리고, 진서대도독의 벼슬을 우선 이종무에게 내리니, 이것은 아직 전란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정(軍政)을 함께하고자 내린 것이다.

진서대도독 아래에 도독부의 관부가 있는 나가사키를 장기부(長崎府)로 삼아 대읍(大邑)을 설치하니, 그 속읍이 다음과 같았다. 이키섬에 있었던 이키국을 폐지하고 일기군(壹岐郡)을 설치하고, 대마도에는 대마상군(對馬上郡), 대마하군(對馬下郡)의 양군을 세우고, 고토열도(五島列島)에는 왜구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기르고 있던 우쿠(宇久)씨를 이지실이 해병을 내어 단속하고 그 관부가 있던 후쿠에(福江)섬에 복강군(福江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내륙의 옛 히젠국 영내에는 옛 관령(關領)을 참고해 기이군(基肄郡), 승안군(勝安郡), 신기군(神埼郡), 좌하군(佐賀郡), 소성군(小城郡), 송포군(松浦郡), 저도군(杵島郡), 승진군(藤津郡)의 8군을 설치했다.

보통 구명(舊名)을 가져와 쓴 경우가 많았으나, 다만 승안군은 원명(原名)이 미네(三根) 오토모 치카아키에 대하여 대첩(大捷)을 거둔 자리라 개명하여 승안이라 하였으니, 혹 일본어로 읽기를 카츠야스라고도 하였다.

이렇게 진서도독부 아래에 1부 12군이 설치되니 그 속현(屬縣)의 숫자 또한 서른이 넘었다.

이렇게 옛 츠시마, 이키, 히젠의 삼국(三國)을 도독부의 직할로 하고 오토모 모리미에게 백제공(百濟公)의 작위와 정2품 장문안찰사(長門按察使)의 벼슬을 내려 본래 지니고 있던 가령(家領)을 관독(管督)하게 하고, 시부카와 미츠요리에게는 축주후(筑州侯) 축자안찰사(筑紫按察使)로 임명해 신속(臣屬)시켰다.

그리고 오토모 치카아키가 자결한 후 항복해 온 오토모 모치나오에게도 풍주백(豊州伯)의 작위를 주고 분고(豊後)국에 있던 본래의 가령(家領)을 유습(遺習)할 수 있도록 해 주니 바로 이들이 이른바 한번(韓藩, 카라한), 혹은 칸조쿠 다이묘(韓屬大名)이라 불리게 되는 이들이니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다이묘의 지위를 받지 않고 조선으로부터 영지를 내려 받은 꼴이 되니 붙은 이름이었다.

이렇게 북 큐슈 일대의 행정을 새로이 정비하고 장기부 읍성(邑城)도 돋아 세우고 포구를 짓고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이 마무리 하였으나, 아직까지 전란의 불씨가 수그러든 것이 아니니 한성의 조정이나 장기의 도독부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기왕에 종군했던 병력을 다시 정비하여 새롭게 진서군(鎭西軍)을 창설하여 휘하 부대를 편제 하려고 하니, 기존의 병력 또한 재정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미 병졸로 입대하여 그 복무 기간이 전쟁 중에 만료된 천칠개에게도 혹여 전역할 의향이 있는지 타진이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직속 상관인 이회(李回) 부령(副領)에게 불려간 천칠개 부교는 뻣뻣이 굳은 채로 앞에 섰다.

“천 부교의 신분이 지금은 하사관이나 본래 군역을 지고자 들어온 것이니 이미 그 복무 기간이 차고도 넘쳤네.”

“…….”

요즘 아주 군문에 남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천칠개는 혹여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제대 명령을 내릴까 싶어 노심초사 대답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이회가 슬쩍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상부에서는 귀관과 같이 종군하여 훈공을 세워 진급한 이들 중에 복무 기간이 만료된 이들을 대상으로 군문에 남을지 심사하기로 했네. 그것을 직속 상관이 하게 되었으니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이야.”

“그럼 남을 수 있습니까?”

천칠개가 반색하자 이회가 웃는다.

“이미 자네 부하인 소만식은 군문에 남기로 마음을 굳혔더군. 그래서 부교(副校)로 진급시키기로 정하고 이를 상신했네.”

이회의 말을 듣고 보니 천칠개가 느끼기에 느낌이 이상했다. 굳이 소만식만 따로 불러서 먼저 물은 것도 그렇고, 이놈의 소만식이 자기에게 여태 입 하나 뻥끗 안 하고 있었다는 것이 괜히 신경 쓰였다. 자기가 무슨 문제가 있어 전역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순간 천칠개를 파고들었다.

그런 천칠개의 의중을 다 안다는 듯 이회는 밝게 웃으며 천칠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자네는 훈적(勳籍)에 남아 있는 공록이 더 크니 혹시 남겠다면 이번 기회에 그냥 특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군진무관(陸軍振武館)의 입교를 추천할까 싶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천칠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유, 육군진무관 말씀이십니까?”

육군진무관은 내년에 개교되는 사관학교(士官學校)의 일종이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육군사관학교에 갈음할 수 있는 학교로, 군제 개혁에 수반된 사관(士官) 계급의 적실한 육성을 위하여 해군상무관(海軍尙武館)과 함께 개교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 그곳의 입교 대상자로 상신해 준다는 이야기는 본래 입교를 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무과(武科)를 면제해 주고 군내의 특례로 생도가 될 자격을 준다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일개 소작농에서 당당한 무관(武官)이 될 기회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었다.

“그래, 해 볼 생각이 있나?”

평소에 이 싹싹하고 재능 있는 천칠개를 눈여겨 본 이회가 천칠개에게 기회를 줄 겸 물어온 자리였던 것이니, 천칠개가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은 이회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괜스레 한 번 떠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혹여 기회가 날아갈까 싶어 천칠개는 깜짝 놀라 말했다.

“예, 예! 하겠습니다. 꼭 시켜 주십시오!”

“그래. 꼭 당당한 위관(尉官)이 되어 오길 기원하겠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육군진무관 입교 대상자가 된 천칠개는 음력 12월 말, 설을 조금 앞두고 장기에서 하카다를 들렀다 동래로 가는 하카다 상인 소킨이 운영하는 무역선에 몸을 실었다.

그해 설이 지나면 바로 입교하여 학무(學務)를 시작한다고 하니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천칠개는 배를 타고 가면서 이름을 안석(安錫)으로 고치고, 깨끗한 도포도 하나 장만하여 동래 포구에 내려서 육군진무관이 들어선 진주(晉州)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이로서 천안석이라는 이름은 조선에 새로운 편제의 육군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병졸 신분에서 공을 세워 사관까지 올라간 이로 기록되었으니, 이런 특진도 시대가 만들어낸 풍운(風雲)의 일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천안석이 전장을 나와 진주로 가고 있는 동안에, 바다 건너 큐슈에서는 잠시 멎었던 전란도 다시 불붙을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새해가 밝아 오자 쿄토의 막부(幕府)와 남적(南賊) 키쿠치와 시마즈가 절치부심하여 다시 준동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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