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장 진서풍전(鎭西風戰) (14/82)

제13장 진서풍전(鎭西風戰)

「된 바람에

나타났던가

한의 나라여

北風に

現れたのか

韓の國.」

―모토가와 안유(本河安祐) 작

하이쿠 이백선(俳句二百選) 中 「키타카제니(北風に)」

1411년 중춘(仲春)

일본국 키나이(畿內) 쿄토(京都).

작금의 일본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자를 말하라고 한다면 다름 아닌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였다.

천황가가 양조(兩朝)로 나뉘어 쿄(京)와 요시노(吉野)에서 서로 싸우기를 수십 년, 일본 전토가 두 편으로 나뉘어 분란의 세월을 보낸 것을 수습하고 정국을 안정시킨 것이 바로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부친이자 전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이니, 잠시나마 막부에 의해 일본 전역이 평천하(平天下)하여 번영하는 듯하였다.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아홉 살의 나이에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쇼군의 직을 양위받았으나, 실상은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불가에 귀의하여 삭발하고 그 핑계로 쇼군자리를 물러나와 태정대신(太政大臣)의 지위에 올라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는 방편이었다.

때문에 이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특별히 권력을 쥔 것에 대한 부담 없이 부친을 의지해 쇼군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 걸물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오에이(應永) 15년, 1408년 여름에 적몰(籍沒)하니 그때부터 나라를 이끌어나갈 부담이 고스란히 그 어깨에 내려오게 되었다.

게다가 이복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츠구(足利義嗣)가 부친의 편애를 받은 탓에 부친 생전에 그 관계가 돈독하지 못했고, 덩달아 이 동생 요시츠구와도 의가 상한 상태이니 쇼군가의 가내에서도 분란의 씨앗이 상존해 있었다.

오죽하면 부친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사후 직전에 코고마츠(後小松) 천황이 그간 요시미츠가 태정태신으로서 머물렀던 호쿠산(北山) 로쿠온지(鹿苑寺)에 친림(親臨)하였을 때도, 요시미츠가 총애했던 요시츠구가 나서서 알현하고, 명목상 쇼군인 요시모치는 도읍을 방비하라는 이유로 나오지 못하니 그 어깨가 처질만도 한 일이었다.

그러니 부친의 죽음 이후 권위를 되찾고자 한 일들이 모두 부친의 종적을 지우는 일들뿐이었다.

요시미츠 사후에 일시적으로 쇼군의 거처였던 그 유명한 무로마치의 하나노고쇼(花の御所)에서도 얼마 살지 않다 나와 전전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가 살았던 산죠보몬(三條坊門)의 구저(舊底)로 들어간 것에 그치지 않고, 요시미츠가 말년에 기거했던 호쿠산의 장원은 로쿠온지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헐어 버렸다.

거기에 정략적인 재간이 아버지만 못하다 보니 보신(保身)하는 것이 과제가 되어 막정(幕政)을 수구적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천황이 요시미츠의 사후 내려 보낸 태상천황(太上天皇)이라는 묘호마저도 반려해고, 근자에 이르러서는 요시미츠가 공들여 추진했던 명과의 조공 무역마저도 철폐하라는 막령(幕令)을 내려보내니, 그간의 종적이 모두 아버지를 지워 자기 입지를 세우려는 행보에 불과했다.

그렇게 쇼군의 위명에 걸맞은 권위를 되살리고자 애를 쓰던 상황에 터져서는 안 될 악재가 터지고야 말았으니, 다름이 아닌 조선군이 내적(內賊)들과 동조하여 큐슈에 쳐들어온 것이다.

이에 준동한 이들 중에서 오우치 모리미야, 그 형이 일전 막부에 대항해 반란을 벌인 일도 있고 겨우 막부와 타협한 형편이었다고는 하나, 막부의 가신으로 신임하여 큐슈로 내려 보냈던 시부카와 미츠요리마저 거기에 부화뇌동한 것은 도무지 분이 삭이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전말을 가지고 온 것이 이른바 남조(南朝)의 편에 서서 막부에 내내 항거해 왔던 쇼니씨의 가독 쇼니 미츠사다였으니, 아시카가 요시모치로서는 어이가 다 없을 지경이었다.

“츠시마의 소씨 일가는 전부 조선군의 포로가 되어 그 행방을 알 수 없고, 다자이후에 상륙한 것을 물리치려 군세를 내어 보았으나 불미하게도 패전하여 오토모 치카아키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나 그마저도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 패주하고 자결하였기에, 이 막중한 사태를 고하지 않을 수 없어 이요(伊予)국으로 도망쳐 나와 사카이(堺)로 가는 배편을 구해 몸만 상락(上洛)하여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쇼니 미츠사다는 초췌한 모습으로 꿇어앉아 담담히 전황을 이야기하나 아시카가 요시모치로서는 화가 치밀다 못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좋소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도읍에는 아무런 전말이 전해지지 않고, 내 귀에는 태평한 이야기만 들렸던 것이오?”

아시카가 요시모치에게는 이 지방의 다이묘란 자들이 제멋대로 굴며 막부에 고변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일을 처리하는 것이 괘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쇼니 미츠사다도 일이 이 지경이나 된 지금에서야 막부에 찾아오고 다른 큐슈의 번경(蕃卿)이라는 자들은 전령 하나 올려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다 막부와 구원(舊怨)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일의 경중이 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쇼니 미츠사다라고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큐슈에서 내지[本州]로 오는 가장 빠른 길목이 스오와 나가토의 양국(兩國)이온대, 그 곳이 바로 오우치씨의 가령(家領)이니 큐슈에서 나가는 전령이 거쳐 갈 길이 없습니다. 이런 차에 외적이 불시에 내습하여 이 오우치씨와 작당하고 준동하니 이요로 가는 바닷길을 제하고는 큐슈 전역이 고립이라 이렇게 고변함이 늦어진 줄 압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아시카가 요시모치로서도 더 이상 무어라 질책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쇼니 미츠사다의 불충함을 꾸짖을 문제가 아니라 큐슈 일대를 뒤덮고 있는 외적과 역도를 몰아낼 계안을 짜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선은 병력을 내어 적을 토평하는 것이 우선이다. 쇼니 미츠사다, 그대가 이것을 제대로 막지 못한 책임이 있으니 나를 도와 제국(諸國)의 다이묘들에게 병력을 내라 기별하고 토벌군을 조직해야겠다.”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본래 꽁한 면이 있기는 하였으나 중요한 상황에서까지 고집을 피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쇼니 미츠사다가 석패(惜敗)하였다고는 하나, 본래 큐슈에서 그 무명(武名)이 자자했던 이이니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그에게 이름을 씻을 기회는 주어야 했다.

그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심중을 읽은 쇼니 미츠사다도 감복하여 엎드린다.

“패장에게 오명을 씻을 기회를 주시니 부족한 목숨이나마 다하여 징토(懲討)에 매진하겠나이다.”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칼을 하나 들고서는 칼집에서 살짝 빼었다가 탁 하는 소리가 나게 다시 집어넣고 땅을 두드리듯 칼을 내려주니, 엎드려 칼을 받은 쇼니 미츠사다는 분전코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장수만 명해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막부에서 자체적으로 동원해 줄 수 있는 군사는 많지 않았다. 거기에 도읍을 지켜야 할 병력이 있으니 우선은 지방의 다이묘들로 하여금 병력을 내어 놓게 해야 했다.

그렇게 전국으로 파발을 달려 보내니 가장 먼저 병력을 끌고 등청해 온 것이 하리마(播磨)의 아카마츠 모치사다(赤松持貞), 이즈모(出雲)의 쿄고쿠 다카미츠(京極高光), 막부의 관직인 카가슈고(加賀守護)의 직을 수임한 무장 시바 미츠타네(斯波滿種) 등이 한달음에 병력을 내오니 이들은 전부 막부에 충성을 다하는 가신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이 외에도 키나이와 관서(關西) 일대의 다이묘들과 무가(武家)에서 병력을 내어 앞 다투어 상경하니 그 수가 물경 십만에 다다랐다.

막부 제장(諸將)들이 제각기 내어 온 병력이라 명목상 그 지휘권이 쇼니 미츠사다에게 돌아갔으나, 쇼니 미츠사다가 직접 가진 병력은 그나마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막부 직속의 병력 5천을 내어 준 것이 전부였으니 실상은 다이묘들의 연합군이라고 해도 좋은 군대였다.

그러나 서부 일대의 다이묘들과는 달리 관동(關東)에서는 쇼군의 명력을 받고도 갖은 핑계를 대어 병력을 내어 놓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카마쿠라쿠보(鎌倉公方)의 벼슬을 받아 관동 10개국을 관할하는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는 와병을 핑계로 쌀 2천 석만 보내고서는 군사는 한 명도 내지 않았다.

이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8촌쯤 되는 방계 혈족으로 대대로 카마쿠라쿠보의 직위를 세습하여 관동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거의 막부의 영향력 밖에 있는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이런 작태가 괘씸하게 느껴졌으나 아쉬운 병력이나마 모였으니 우선은 출병하기로 마음먹고, 음력 3월 5일에 쇼니 미츠사다에게 조적(朝敵)을 토벌할 것을 명하여 10만의 토벌군이 서쪽으로 출진했다.

우선 큐슈에 들어서기 전에 보쵸의 오우치 모리미를 먼저 토벌해야 그 길목이 열리는데, 때마침 바로 옆 지방인 빈고(備後)국의 다이묘가 야마나 토키히로(山名時熙)로, 오우치 모리미와는 오에이의 난 이래로 대립각을 세워 온 원수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막부에서 오우치를 비롯해 외적을 토평하러 큐슈로 군사를 낸다고 하자 기회를 포착한 야마나 토키히로는 군세가 지나가는 길목을 내어 주고 자신의 거성에서 후하게 대접한 다음에 스스로 2만의 군사를 무리하게 만들어내 종군(從軍)을 자처하니, 오우치씨를 물리치고 보쵸[周防 및 長門]를 손에 넣어 큐슈로 진출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스스로 곳간을 열어 가까운 곳에 보급을 댈 수 있는 창고를 내기를 자처하니, 이제 야마나 토키히로 그 자신의 나이가 마흔을 갓 넘겼으니, 이것을 천우의 기회로 삼아 가령을 넓혀 거족(巨族)으로 거듭나려는 야심이 충천해 있었다.

오우치 모리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견제하는 일에는 수가 튼 이 야마나 토키히로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서자 이 원정군의 기세도 날이 갈수록 높아져 빈고에서 야마나 토키히로의 군세와 함께 오우치 모리미의 본거지인 스오의 야마구치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아키(安藝)국에 다다른 4월 초엽에는 그야말로 진군하는 길에 승리가 잇따를 것만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또한 본격적으로 오우치를 치기 전에 큐슈 남부로 밀정을 보내어 키쿠치씨와 시마즈씨에게도 함께 들고 일어날 것을 청하니, 그간 조선군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던 이들도 기회를 봐 거병할 것이 자명했다.

이런 기세등등한 토벌군이 진격해 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아차린 오우치 모리미는 바로 진서도독부의 이종무에게 파발을 급파하여 12만의 군세가 곧 자신을 들이치고 큐슈로 진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니, 전운(戰雲)이 다시 한 번 몰아치려 하고 있었다.

1411년 맹하(孟夏)

일본국 산요도(山陽道) 나가토노쿠니(長門國) 단노우라(壇ノ浦).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군령을 받은 쇼니 미츠사다 이하 관서 각지의 다이묘들이 스오국으로 들어오자 오우치 모리미는 거관(居館)이 있는 야마구치 성중에 틀어박혀 농성을 시작했다.

이미 조선에 의해 공가(公家)의 사직을 내려 받고 적극적으로 큐슈 평정과 진서도독부 수립에 일조한 오우치 모리미로서는, 이미 막부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데다 쇼니 미츠사다와의 악연으로 인하여 이번 전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관서 영주들의 10만 대군에 야마나 토키히로가 이끌고 합세한 2만을 합쳐, 총 12만의 막병(幕兵)들이 시시각각 야마구치 성을 포위해 들어치기 위해 다가오니 오우치 모리미의 1만 5천 병력으로는 성을 지키기에 급급한 숫자였다.

야마구치 성중 가장 높은 곳의 천수각에서 멀리서 휘날리는 막부군의 군기를 보는 오우치 모리미의 가슴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무턱대고 지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일이다.”

오우치의 탄식을 듣던 가신 히가시노 산자에몬 사다요(東野三左衛門政世)가 조용히 귀를 빌려달라 청한다.

“지금으로서는 막연히 죽음을 불사하고 적에 맞설 것이 아니라 기회를 봐 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 무사의 몸으로 적을 피해 도망을 간단 말인가?”

오우치가 생각하기에 쳐들어온 적을 피해 몸만 빠져나가는 것은 제대로 된 영주라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이 이 땅을 가령(家領)으로 지켜 나가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묘가 성과 땅을 버리고 도망을 다닌다면 그를 믿고 신종(臣從)해 온 무사들과 영민(領民)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그러나 히가시노 사다요는 생각이 달랐다. 우선 목숨이 붙어 있어야 영지도 의미가 있고, 명예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주 큐슈로 도망가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야마구치를 버리고 큐슈와 마주보는 아카마가세키(赤間關) 일대의 단노우라에서 적을 맞이하자는 생각이었다.

“야마구치에는 성이 있고 그간의 준비가 잘되 있어 적을 상대로 수성을 할 수는 있으나 군세의 차이가 워낙에 크다 보니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오나, 적이 들이닥치기 전에 후방으로 전력을 빼고 성을 비워, 적이 보급을 취하지 못하도록 곡식을 태우고 큐슈와 마주한 아카마가세키의 단노우라로 가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기다린다면, 그곳은 가히 산세가 험한 아래로 바다와 마주한 곳이니 성이 없더라도 능히 적을 막을 수 있는 지세라, 적이 함부로 준동하여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 큐슈에서 지원군이 넘어오기도 좋으니 지금으로서는 마땅히 그리하셔야 하나이다.”

히가시노 사다요가 부복하고 주청하자, 오우치 모리미로서는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스오국은 본래로부터 혼슈의 끄트머리로 큐슈와 마주한 고장이니 야마구치에서 큐슈로 건너가는 길목인 단노우라의 물길까지는 그 거리가 지척이었다.

결국 오우치 모리미는 적이 성 앞까지 들이닥치기 전에 성을 비우고 단노우라로 퇴각하기로 마음을 먹고 야마구치 성에 주둔해 있던 군사를 모두 비워 후면(後面)으로 탈주하고, 성내에 있던 군량고를 모두 태워 적군의 보급을 막고 황급히 군사를 몰아 나갔다.

단노우라(壇ノ浦)는 아카마가세키에 있는 큐슈로 건너가는 나룻목의 이름으로, 오래전 이곳 일대에 나가토(長門)국의 국부(國府)가 설치되어 있었다.

해협이 가장 좁아져 혼슈에서 큐슈로 넘어가는 주요한 물길이 지나가는 곳이라, 예로부터 그 요충(要衝)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 단노우라에서는 큰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었는데, 그 유명한 단노우라의 전투이다.

헤이안 말년(末年), 카마쿠라 막부의 태동기에 이 싸움으로 인하여 그 영화를 자랑하던 헤이케(平家)는 멸망하고, 안토쿠(安德) 천황은 삼종신기를 지니고 바다에 뛰어드니, 그곳이 바로 이 단노우라였다.

이 싸움의 결과로 미나모토(源)씨가 정권을 잡아 카마쿠라 막부를 세우니, 이것이 대략 3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 미나모토씨와 그 외척인 호조씨의 천하가 이어졌고, 이 뒤로 다시 천하가 뒤집혀 남북조의 분란이 이어지고, 그 뒤를 쳐 아시카가 막부가 태동했으니 지금의 정국과도 무관하지 않은 땅이었다.

그 아카마가세키 땅으로 들어온 오우치 모리미는 군세를 정비하고 급히 큐슈의 진서도독부에 연통을 보낸 다음, 단노우라의 해안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미 이 소식을 접한 조선군이 진주한 큐슈의 진서도독부에서는 시부카와 미츠요리가 한달음에 달려와 진서대도독 이종무와 이 일을 상의하니, 군사를 내어 막을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미 우리가 큐슈에 군세를 몰아 들어왔을 때 막부에서 이를 되찾고자 군사를 일으킬 것이란 것은 쉬이 짐작했던 바이오. 다만 이 진서의 땅과 경도(京都) 사이에는 그 거리가 멀어 소식이 들어가고 군사가 내려오기까지 그 시간이 걸려 그간 군열을 정비하고 치안을 다질 기회가 있었으나, 이제는 다시 총을 잡고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소이다.”

이종무는 휘하 배관들을 모아 놓고 말을 이었다.

“적의 병대를 이끄는 것은 쇼니 미츠사다로, 일전 크게 패하여 도주한 뒤로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제 땅을 되찾길 소망하고 있을 터이니, 그 기세가 등등하고 관서 일대의 영주들도 그 권속(眷屬)을 부려 땅 한 뼘을 더 얻고 그 위세를 떨치고자 일어나 백제공(百濟公) 오우치전(殿)의 가령으로 들어와 지금 매섭게 몰아치고 있으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간의 신뢰가 모두 헛일이오. 이에 진서대도독의 권령(權令)으로 단노우라의 맞은편 메카리(和布刈)에 그 군막을 차리고 장기, 대마, 일기의 각주(各州)에 주둔한 병선을 모두 내어 이곳에서 일전을 준비하고자 하니 해군부장 이지실은 군량의 보급과 군선에 관한 일을 일체 책임지도록 하고, 나는 직접 진서 일대에 주둔한 8만의 군세를 모두 내어 이 메카리로 향하고자 하니 의의 있는 자는 지금 그 의견을 표명하라.”

쉽게 말할 자리가 아니었다. 반대하는 의견이 딱히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조선의 우산 안으로 들어온 혈맹인 오우치를 버리고서는 이 외지의 진서도독부가 생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 되면 사방을 적으로 맞서 이 조그만 출지(出地)를 지켜내기도 힘들 일이니, 이것은 진서도독부의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출진이었다.

이렇게 4백 척의 군선과 8만의 군세가 단노우라의 큐슈쪽 맞은편인 메카리로 진군하여 진채를 차렸다.

이 메카리와 단노우라의 사이는 아주 좁은 해협으로, 그 폭이 몇 리에도 채 이르지 않는 협해(峽海)였다. 이 좁은 바다 사이를 조선군의 군선으로 매우고 건너편의 오우치군을 응원하는 한편 군사를 움직여 단노우라의 전력을 보강하니, 때마침 막부군이 들이쳐 단노우라로 내려오는 구릉 위에 그 군세를 정렬시키고 있었다.

막부군으로서는 조선군의 군세가 이미 들어와 오우치군을 돕고 있을 것이라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해협 양측을 가득 매우고 있는 그 군세의 위용에 적잖이 놀라서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막부군의 병력이 12만이나 적군은 총포로 무장하였을 뿐더러, 막부군에서는 지금 동원한 수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적인 조선군을 견제할 수군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의 시코쿠(四國)의 남서(南西), 혼슈와 큐슈 사이를 마주보고 있는 이요(伊予)국의 국주가 코우노 미치유키(河野通之)로 그 휘하의 이요 수군(水軍)의 유명이 등등했다.

쇼니 미츠사다가 이 이요의 슈고 코우노 미치유키의 도움을 받아 일전 쿄토로 탈출한 인연을 구실 삼아 전령을 보내어 필히 조적을 토벌하는데 이요의 수군을 내어 도와줄 것을 요청하니, 조정을 들먹이는 일에 코우노 미치유키도 모르는 척 손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화선(和船) 3백 척을 내어 이요 부중을 출발해 단노우라로 수군 1만을 몰아가니, 이요로부터 이 아카마가세키의 단노우라까지는 겨우 하루면 갈 길이었다.

이요 수군이 단노우라로 들어오는 길목에 조류를 벗 삼아 빠른 속도로 내입(內入)해 들어오고, 그 깃발이 멀리서 확인되자 쇼니 미츠사다는 군세를 재빨리 정비해 습격키로 하고, 단노우라에 바삐 진채를 건설하고 있는 조선군과 오우치군을 들이치기 시작했다.

“이요의 수군이 우리를 도우러 왔으니 우리 군세가 적의 물경 두 배에 가까운 일이다. 이런 전투에서 질 수 없는 노릇이니, 각 다이묘들을 비롯하여 무관잡병(武官雜兵)에 이르기까지 보국(報國)의 일심(一心)으로 싸울지어다!”

쇼니 미츠사다의 외침과 함께 돌격이 시작되었다.

매서운 기세로 단노우라의 해안으로 쳐 내려오니 길게 방비할 목적으로 진채를 세우고 있던 조선군과 오우치군의 진영은 일시 혼란에 빠졌다.

“전열을 정비하고 바다의 군선을 벗 삼아 싸워라!”

오우치 막하의 장수 히가시노 사다요가 전지(戰地)를 말을 달리며 수습하고 나서니, 그 무력이 대단하여 막부군의 병력이 함부로 근처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러는 와중에 전투가 시작된 것을 안 이지실이 해군의 군선을 전열을 바꾸어 해안을 향해 일직선의 대형을 만들고 포열을 열어 지자총통으로 적군의 공로(攻路)에 포탄을 쏟아부으니, 막부군이 일시에 발이 묶여 함부로 진군치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단노우라에 진을 치고 있던 조선군들도 기습에 일시로 흩어졌던 대형을 육군 정령(正領)으로 진급한 이회의 지휘 아래에 정비하여 보총의 사격 대형을 갖추고 포탄이 떨어지는 사이로 공격해 들어오는 막부군의 병졸을 막아 세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총포전이 가열되는 가운데, 단노우라의 해협으로 들어온 이요 수군이 가담하여 조선해군의 뒤를 공격하기 시작하니, 가장 포문이 많은 거함인 수선(帥船)이 단노우라를 지원하지 못하고 이 이요 수군과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수선은 목포 조선소에서 특별히 교관선의 장점인 침저형의 선형과 길고 높은 선체를 살려 군용으로 제작한 선박으로 돛대가 3개가 달린 조선 해군의 신예 함선이었다.

그러나 그 제작의 까다로움으로 인해 이번 큐슈 원정에 동원된 수선은 겨우 3척이었고, 그중 이 단노우라에 와 있는 것이 2척이었으니, 이 수선이 진열을 빠져 이요 수군과 맞서기 시작하자 일순 전대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이 이요 수군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그간 혼슈와 시코쿠 사이의 세토 내해를 누비며 수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적(水賊)질로 단련된 이 이요의 정예가 바다 바깥에서 온 조선 해군에 비해서는 안마당에서 기세등등하게 싸우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좁고 거센 물길이 지나는 단노우라의 해협에서 조선군의 빽빽한 선대의 움직임은 자유롭지 못했는데, 우위에 있는 것은 그 숫자와 함선마다 실린 포였다.

이요 수군과 충돌한 앞부분 선대의 진형이 깨지기 시작하자, 뒤에서 수선 및 판옥선이 선수를 돌려 이 이요 수군의 함선에 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는데, 조류를 이용해 재빠르게 오고 가는 이 이요 수군은 생각보다 큰 손실을 입지 않고 조선 해군 사이를 휘저어 놓고 있었다.

포의 지원이 사라진 가운데에도, 오우치군 1만 5천과 상륙해 있던 조선군 3만의 도합 4만 5천 병력은 막부군 12만의 돌격을 저지하며 어렵사리 버티고 있었는데,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보총의 위력 덕분이었다.

선두에서 돌격해 들어오던 쇼니 미츠사다를 총으로 이전 천칠개의 부하였던 부교 소만식이 쏘아 맞추니, 목숨을 앗아 가지는 못했으나 오른쪽 어깨에 큰 관통상을 남기고, 그 충격으로 낙마(落馬)하여 다리를 다치니 막부군 선봉의 진열이 일시 흩어져 쇼니 미츠사다가 이끌던 쇼군 직속의 5천 군세는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그 뒤에서 공격해 오던 관서 일대 다이묘들의 군세는 공격이 조금 무뎌져 조선군이 방비하기가 조금 더 용이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조선 해군을 몰아붙이던 이요 수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된 것은 단노우라 맞은편 메카리에 남아 있던 조선군이 진중에 있던 소포와 천자총통을 해안선에 설치하고, 그 사이사이로 보총대(步銃隊)를 배치하여 해협 사이를 휘젓는 이요 수군을 공격하게 한 뒤로부터였다.

해협에 조선 해군과 이요 수군이 뒤섞여 있는 관계로 아직 명중률이 떨어지는 총포를 바다를 향해 쏘는 것은 결국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는데, 이종무는 이 전투의 승패가 해협을 지켜내는 것이라 판단하고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해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격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요 수군의 피해가 매우 컸지만 조선 해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수선 하나가 메카리에서 쏜 조선군의 포에 맞아 침몰되었으니 아군이 격침시킨 셈이오. 그 외에도 이요 수군 사이를 횡행하던 판옥선들 중 일부도 이 포에 침몰되거나, 승선해 있던 해군들이 해안에서 날라온 아군의 보총에 피격되어 목숨을 잃는 등, 그 전황이 난전(亂戰)에 가까웠다.

이요 수군의 남은 40척 함대는 간조가 되어 조류가 빨라지자 결국 단노우라를 빠져나와 켄카이나가(玄界灘)로 나가는 바닷길로 도망쳐 나갔는데, 조선군의 함선도 이때는 70여 척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코우노 미치유키도 40척의 함선으로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단노우라의 해안에 남아 있는 70척의 조선군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배를 물려 육지에 대고 수병을 상륙시켜 막부군에 합류하여 단노우라의 진채를 공격하는 것으로 그 전략을 바꾸었다.

그러나 수많은 함선을 잃은 끝에 해협을 지켜낸 덕분에 단노우라의 조선군은 좀 더 안심하고 막부군의 진격을 방비할 수 있었고, 병력의 손실이 생기면 메카리에서 바로 지원병을 보내어 그 빈자리를 매워 주니 막부군도 이런 손실을 계속 입으며 싸움을 지속할 수 없었다.

거기에 막부군의 총령(總領)으로 명목상이나마 12만 대군의 전권을 지니고 있던 쇼니 미츠사다가 총상을 입고 중태에 빠져 있으니 지휘 계통에도 혼란이 와 각 다이묘들이 전공을 세우고자 무모하게 덤비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병력을 보전코자 뒤로 제멋대로 후퇴하거나 하니, 병력의 우세도 그 운용할 이가 없으니 무용(無用)에 가까웠다.

결국 해가 저물자 막부군은 가장 많은 병력을 남긴 시바 미츠타네와 야마나 토키히로의 지휘 아래에 아카마가세키의 관도(官道)를 따라 야마구치 방면으로 퇴각하니, 9만의 병력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쇼니 미츠사다의 목숨은 경각에 빠져 있고 이요 수군은 전몰(戰歿)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진서도독부의 병력 손실도 적지 않았는데, 보총도 없는 오우치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여 1만 5천의 군사 중 겨우 2천이 살아남았고, 단노우라에 진주했던 조선군도 거의 2만의 손실을 내어 그 병력을 많이 잃었고, 해협에 진을 치던 조선 해군은 겨우 70척의 선박만을 남기고 손실이 막대하니, 비록 막부군이 더 이상 손실 입기를 주저하고 퇴각하였다고는 하나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투가 되고 말았다.

결국 전쟁의 향방은 이 전투에서 결정지어지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준동하는 일에 영향을 받게 되니, 그 불길은 관동(關東)의 카마쿠라로부터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1411년 계하(季夏)

일본국 토카이도(東海道) 사가미노쿠니(相模國) 카마쿠라(鎌倉).

관동(關東) 지방은 고래로부터 일본에 있어서는 오지(奧地)에서 끊임없는 개척과 토벌로 차츰 중앙 권력의 아래에 편입되어 간 지역이었다.

끊임없는 전란으로 인하여 이곳에서 무사 계급이 성장하였고 이 지역을 근간으로 카마쿠라 막부가 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 카마쿠라 막부는 다시 남북조동란의 시대가 열리며 상락(上洛)하여 쿄토를 근거지로 정한 무로마치 막부에 다시 자리를 내어 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로 이 카마쿠라에 설치된 것이 소위 말하는 카마쿠라부(鎌倉府)였다.

남북조시대의 초두(初頭), 고다이고 천황이 친정 복귀를 꾀하며 먼 고장인 칸토의 제국(諸國)에 영향력을 뻗기 위해 태자였던 나리요시 친왕(成良親王)에게 전권을 주어 카마쿠라에 내려보낸 뒤, 그 어린 태자를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한 무로마치 막부의 일족 아시카가 타다요시에 의하여 카마쿠라부가 설치되고 관동 8주를 그 관할 아래에 놓게 되었다.

그 뒤로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의 차남 아시카가 모토우지(足利基氏)가 카마쿠라부에 파견된 이래, 이 모토우지의 자손들이 카마쿠라부의 장관격인 카마쿠라쿠보(鎌倉公方)의 자리를 세습하고, 그 보좌로 칸토칸레이(關東管領)의 직이 설치되어 우에스기(上杉)씨가 대대로 그 직을 맡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카마쿠라부 아래에는 관동 8주 이외에도, 이즈(伊豆), 카이(甲斐), 무츠(陸奧), 데와(出羽)의 4국이 더 늘어나 총 12개국에 이르는 거대한 영역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당금의 카마쿠라쿠보는 아시카가 모치우지, 칸토칸레이는 우에스기 우지노리(上杉氏憲)였다.

그러나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나이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약령(弱齡)인지라, 실질상 이 카마쿠라부의 권력은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숙부인 아시카가 미츠타카(足利滿隆)와 우에스기 우지노리의 밀실 정치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정국이었다.

본디 이 관동 일대의 정서는 도읍이 위치한 관서(關西)의 그것과는 달라서, 이 카마쿠라쿠보의 직도 처음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섰을 때, 아시카가 일족에게 나누어 주어 막부의 명령이 잘 미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다시 몇 대를 내려와 그 혈연도 희미해지고 무가(武家)들의 고장인 이곳에서 언제고 세를 일으켜 쿄토를 칠 수도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런 정서는 지금 관동의 실세인 아시카가 미츠타카나 우에스기 우지노리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결국 큐슈에서 전란이 발생하자 막부에서 군사를 내어달라는 청도 묵살하고 오히려 뒤에서 모반을 준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 겨우 성인식[元服]을 마친 어린 나이인 아시카가 모치우지를 일선에서 제외해 두고, 이 아시카가 미츠타카와 우에스기 우지노리가 공모하여 카마쿠라쿠보의 이름을 빌려 카마쿠라부 아래의 모든 주향(州鄕)에 군사를 내어 토막(討幕)할 것을 지시했다.

“지금 도읍[京都]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참람된 정치를 행하여 천황의 위신을 더럽히고 스스로 막명(幕命)이란 이름으로 제국(諸國)에 과다한 군역과 부세(負稅)를 주어 전란을 일삼으니 나라가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외방(外邦)의 군대가 상륙하는 변(變)에 이어 온 나라가 전화(戰禍)에 휩싸여 있으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이런 연유로 카마쿠라쿠보 아시카가 모치우지 님의 이름으로 칸토칸레이 우에스기 우지노리와 아시카가 가문의 가인(家人) 나, 아시카가 미츠타카는 직접 군세를 내어 모범을 보이기로 하였으니 관동 제주(諸州)의 백관(百官)들은 그 의지를 받들어 군사를 내어 무사시(武藏)에 집결, 상락(上洛)하여 그 뜻을 세상에 보이도록 하라.”

아시카가 미츠타카의 면밀한 주도 아래에 모인 5만의 관동군은 여름이 한창으로 접어들 무렵 무사시국 츠즈키(都筑) 일대에 집결하여 그 깃발을 휘날리며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하니, 때가 야마구치가 막부군에 의해 함락되고 단노우라에서 조선군, 오우치군과 더불어 일전을 벌이려 할 때였다.

서쪽에서 싸움이 격렬해지는 것과는 상관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하여 군사도 없이 비어 있는 관서 일대를 접수하고 쇼군을 끌어내리려는 생각으로 관동군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음력 5월에 이르러서는 그 군세가 오미(近江)국에 이르러 쿄토를 지척에 두고 일시 그 세력을 가다듬었다.

이쯤 되어 그 사실을 안 쿄토의 막부는 뒤집힐 노릇이었다.

일대의 강성하던 군세는 모두 서정(西征)하고자 보내졌다가 단노우라에서 그 승부의 결착을 보지 못하고 오우치가의 가령인 스오와 나가토 일대에서 적군과 소모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인데, 그로 인해 쿄토 일대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관동군이 5만의 군세를 이끌고 쿄토 지척에 다가와 있으니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조선군과 대적하고 있는 군세를 물려서 오려 하여도 이미 그 진군한 거리가 멀고, 쿄토를 노리고 있는 관동군은 코앞에 있으니 이미 그 군세를 돌려 쿄토를 방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고코마츠(後小松) 천황을 종용하여 삼종신기를 지니고 몽진하게 만드니, 쿄토 일대의 읍락을 허물고 서진하여 서쪽에 있는 막부군에 합류하여 다시 일전을 도모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쿄토가 천황이 없이 비어 있으니 쿄토에 들어온 관동군으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남북조를 합쳐 번갈아 가며 천황위에 오르기로 하고, 남조의 고카메야마(後龜山) 천황이 분조를 합친 뒤로, 북조(北朝)의 고코마츠 천황을 비롯한 막부의 대접은 차갑기 짝이 없었는데, 이를 분하게 여긴 고카메야마 천황과 그 아들 오구라노미야 츠네아츠(小倉宮恒敦)가 경제적인 이유를 핑계로 남조의 근거지였던 요시노로 돌아가 남조의 재건을 획책하고 있었다.

관동군의 아시카가 미츠타카와 우에스기 우지노리에게는 그 명분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실상 이때껏 막부의 종용으로 북조의 천황을 섬겨 왔으나 그 대명(大名)은 본래 남조에게 돌아감이 마땅한 일이오.”

쿄토로 입성한 아시카가 미츠타카의 말에 우에스기 우지노리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합법한 천황의 직계를 들어다가 천황위에 다시 앉히고, 막부를 토벌할 명분을 좀 더 강화하면 온 나라의 제후들이 떠받들어 숭앙할 것이니 이것이 가장 상책이외다.”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보자 이들은 요시노로 사절을 보내어 남조의 태자(太子) 오구라노미야 츠네아츠를 모셔와 남조의 유지를 이어 천황으로 받들게 하니 이른바 고닌묘(後仁明) 천황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큐슈는 조선군 수중에 들어가 있고, 츄고쿠(中國) 일대는 북조의 고코마츠 천황을 받드는 막부군이 고립되어 있고, 혼슈 태반은 남조의 고닌묘 천황을 받드는 관동군이 점령한 상황이 되었다.

일이 이쯤 되어 쿄토를 점령하고 천황까지 옹립하게 되자 아시카가 미츠타카와 우에스기 우지노리는 이쯤에서 권력을 순순히 본래의 주군인 어린 아시카가 모치우지에게 내어 줄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은 아시카가 모치우지를 그대로 카마쿠라쿠보의 지위에 묶어 두고 자신들은 조정에 출사하여 천황에게 직접 지위를 하사받아 아시카가 미츠타카는 정사를 대리하는 셋쇼(攝政)의 자리에 오르고 우에스기 우지노리는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의 관위(官位)를 받았으나, 새롭게 막부를 창설하지는 않고 구래의 관습을 돌려 정무(政務)를 관장코자 한다는 위시만 내렸을 뿐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일본 전역에서 여러 세력이 합종연횡하며 전란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여전히 보쵸에서는 오우치군과 조선군이 연합해 막부군을 몰아내는 작전을 진행 중이었고, 막부군은 병력을 나누어 서쪽으로는 조선군을 상대하고, 동쪽으로는 쿄토의 관동군이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게 경계하고 있으니, 병력을 잃지 않고 쿄토를 얻고 남조의 천황까지 옹립한 아시카가 미츠타카와 우에스기 우지노리의 기세만 갈수록 등등할 뿐이었다.

1411년 맹추(孟秋)

조선국 진서도독부(鎭西都督府) 장기부(長崎府).

단노우라의 전투에서 총탄에 맞아 크게 앓던 쇼니 미츠사다의 부음이 전해진 것은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이쯤에 이르러 야마구치는 다시금 오우치씨의 수중에 들어왔고, 보쵸 일대의 오우치 가령(家領)은 거의가 다시 오우치 모리미의 수중에 돌아와 있었다.

조선군과 오우치 모리미의 협동으로 결국 쿄토까지 점령당하고 내쫓긴 막부군은 더 이상 저항할 생각을 포기하고 보쵸에서 물러가 야마나씨의 근거지인 빈고로 군세를 물렸다.

그런 와중에 큐슈의 조선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막부군을 이끌고 내려왔던 쇼니 미츠사다의 죽음은 큰 화제거리도 되지 못한 채 유야무야 빈고의 이름 없는 산중에서 화장되어 그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쇼니 미츠사다도 죽었고, 동쪽으로는 적들이 난립하고 있으니 이리 가다가는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겠구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한숨만 자욱이 늘어나고 있으니 휘하 배신들의 근심만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한때 대마도의 소씨를 휘하에 거느리고 큐슈 일대에서 위명이 자자했던 쇼니 미츠사다도 이렇게 세상을 등지고 더 이상 막부군 내부에서도 큐슈 정벌을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야마나씨의 호종을 받아 군막과 함께 설치해 두었던 빈고의 행궁도 다시 빈츄(備中)국 카야(賀陽)로 옮겨 앞으로의 방책을 궁리하나 뜻하는 바대로의 일이 쉽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이 힘드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카야의 빈한한 거처에서 평정을 열고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물어보나 배하의 신료들은 묵묵부답이다.

한참을 있어서야 하리마의 슈고 아카마츠 모치사다가 입을 열었다.

“근래의 일이 참람되나 여기서 몸을 엎드려 불민한 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전에 큐슈에 상륙하면 키쿠치와 시마즈 양씨(兩氏)가 동조하여 들고 일어나기로 하였으나, 아쉽게도 단노우라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동적(東賊)들에 의해 이곳 빈츄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난국이나이다. 그러나 아직 키쿠치와 시마즈의 군세가 건재하니 그들로 하여금 조선군을 내몰게 하시고, 쇼군께서는 휘하의 군세를 부려 동적과 일전을 준비하는 것이 수순일 줄 아룁니다.”

아카마츠 모치사다가 아뢰고 나자 시바 미츠타네 또한 옆에서 한마디를 거든다.

“소관이 보기에도 그 계책이 옳은 줄 아룁니다. 일전 단노우라에서의 싸움 뒤에 키쿠치 카네토모가 사람을 보내어 군사의 일으킴을 어찌할지 물었는데 전황이 난국이라 그 대답을 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이 기회에 칙령을 내려 남적(南賊)을 치라 명하시고 우리 군세는 그대로 동적을 토평하는데 쓰신다면 가히 좋은 결과가 있을 줄 압니다.”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들어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그렇다면 즉시 키쿠치와 시마즈 양가에 인편을 보내어 남적을 치라고 명하고 부중에 남은 군사를 독려하여 쿄토를 되찾기 위해 진격할 준비를 하도록 하라.”

그러나 야마나 토키히로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영지가 바로 조선에 복속한 오우치 모리미의 가령과 붙어 있는 곳으로 막부군이 동진하여 일대가 비게 되면 언제고 오우치가 그 영지를 노리고 쳐들어오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하오나 그리하게 되어 이곳 츄고쿠 일대의 각국에서 병력을 비워 동진하게 되면 조선군은 키쿠치와 시마즈 양씨에 맞서느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바로 이곳 지척에 있는 오우치씨가 언제고 준동하여 이곳 비츄와 비고 일대를 노릴지 모르는 일이니 함부로 병력을 움직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야마나 토키히로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도 그르지 않았다.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다시 한참을 고민하고 계책을 부려 키쿠치와 시마즈에 보내는 일은 은연중 비밀로 부쳐 적군이 알지 못하게 하고, 반면으로는 오우치와 조선군에 밀사를 보내어 화의를 청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이 성공적으로만 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키쿠치와 시마즈는 군대를 일으켜 막부를 믿고 조선군을 칠 것이오, 이것이 막부에 의해 획책된 것을 모르는 조선군과 오우치는 양쪽에서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화의에 동조하여 주고 막부는 공격받지 않을 터였다.

사실 키쿠치와 시마즈를 버려 다른 기회를 얻는 것이니, 제 살을 깍아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나 지금의 곤란지경에 처한 막부로서는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계책대로 행하기로 결정하고 나자 이내 진서도독부와 키쿠치 카네토모,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히사토모(島津久豊)에게 보내는 사람을 각각 서로 알지 못하게 하여 따로 보내고는 막부군을 모아 동정의 준비를 기하도록 했다.

이 중 진서도독부로 보낸 사절은 오우치 모리미를 거쳐 열흘 쯤 뒤에 장기부에 도착하였다.

이내 사절로부터 정전(停戰)하자는 요청을 듣자마자 진서대도독 육군 대장 이종무는 군내의 수뇌들과 오우치 모리미, 시부카와 미츠요리를 불러들여 계책을 논했다.

장기부의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도독부 청사격인 안향관(安鄕館)에서 이야기가 오고 간다.

“이미 막부군을 맞이하여 많은 병사와 특히 전선(戰船)의 손실이 막대하니 이들과 계속 싸워 과중한 전역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오. 조정에서도 현재의 영역을 굳혀 방비를 단단히 하는데 주력하라고 하니, 이쯤에서 막부의 청을 받아들여 막연한 전란을 지속하지 않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번속을 치리하는데 공을 들였으면 하는데 어떻소?”

막부의 청을 받은 뒤로 이미 이종무의 마음은 어느 정도 굳혀져 있었다.

조선에서 군세가 충원되지 않으면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일본 전체를 정벌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기에 다만 이번 기회에는 큐슈 일대의 영향력을 손에 넣고 앞으로 남해(南海)로 진출할 교두보를 만드는데 의미를 두고 있었다.

한성의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이종무이기에 더 이상 무리한 진출은 그만두고 큐슈 북부일대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는 데에 생각이 미치고 있었다.

“단노우라에서 이요 수군에 의해 군함을 많이 잃었으니 본주(本州, 혼슈)의 적세(敵勢)를 토벌하는 것은 힘이 부칠 일입니다. 이쯤에서 그 청을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야심만만하게 일본으로 끌고 왔던 해군 병력의 태반을 잃은 이지실도 무리한 전선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일본의 영주였다가 이제는 조선의 봉신(封臣)이 된 오우치 모리미와 시부카와 미츠요리도 마찬가지였다.

오우치 모리미로서는 이미 자기 가령이 전장이 되어 수대에 걸쳐 공들여 만들어 온 야마구치의 거점이 반파되고, 단노우라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기에 마음 같아서는 야마나 토키히로를 쳐서 가령을 넓히고 혼슈 내륙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지금의 정황이 그러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부카와 미츠요리 또한 본래 그가 가진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고, 주요 관심사가 하카다의 무역을 운용하여 치부(致富)하는 것에 있었기에 조선의 그늘에 들어가 조선 내지와 명으로 가는 교역을 거머쥘 수 있었기에 더 이상의 큰 욕심을 주장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두 사람과 그 휘하의 배장들은 이미 막부의 칙임을 버리고 조선에 귀부하여 그 은혜를 입고 봉신(封臣)이 되어 공후(公侯)의 사직을 세웠으니 이것으로만 해도 만세에 내릴 은사(恩事)이니 더 이상의 욕심은 없소이다. 다만 대도독께서 일을 잘 정리하여 앞으로의 대국(大局)을 이끌어 나가는데 한마음이 되어 도울 생각이오.”

오우치 모리미가 마음먹은 바를 말하자 중인(衆人)의 생각이 모두 막부의 화평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렇게 단지 정전의 제안일 뿐이니 이 전역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오, 막부에서도 조선이 북큐슈 일대를 점령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도 아니고, 조선도 완전히 물러선 것이 아닌 이미 굳어진 상대의 영역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수준에서 화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도 모른 채 비슷한 시기에 막부의 공작을 위해 파견된 사절들을 받아들인 키쿠치 카네토모와 시마즈 히사토모는 일을 단단히 오해하고 막부에서 조선군의 토벌을 함께해 줄 것을 기대하고 막부의 밀지를 받아들여 군사를 일으키고야 만다.

“조정에서 이리 적들을 토평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가 일어나 돕지 않겠소. 이미 적이 큐슈의 북부를 점령하고 있다 하나, 우리 양씨가 남부에서 비등하게 대치하고 있으니 여기서 막부의 도움만 있다면 가히 일이 어렵지 않소.”

사절이 오고 간 뒤 함께 만난 키쿠치 카네토모와 시마즈 히사토모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함께하여 일을 벌이기로 마음을 굳히고 도합 6만의 군세를 내어 진서도독부의 부중으로 진군을 시작한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막부와 화의를 맺었으니 당연히 함부로 키쿠치씨와 시마즈씨가 일을 벌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조선군은 이것이 막부의 교묘한 술책이라는 것도 모르고, 갑작스런 공격에 바삐 방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막부에게 이용당한 셈이나 다름없는 양 진영이었으나 오토모 치카아키의 패주 이래 일을 확실하게 매듭지어 놓지 못한 터라 언제고 부딪히거나 한쪽이 물러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양군이 히고국 야츠시로(八代) 일대에 진을 벌이고 대치를 하니, 서로가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하고 조금씩 군사를 내어 접전을 수차례 벌였다.

이 히고국은 키쿠치씨의 가령이므로 이 일대의 지세가 어두운 조선군은 무력에서 앞서면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반대로 이 키쿠치와 시마즈의 양씨는 보총과 조선군 화포의 위력을 체감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군사를 내어 돌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전국의 돌파구는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한창 진중에서 전략을 두고 토의를 하던 와중에 조선군을 따라 종군(從軍)해 있던 카마치 시게히사가 꾀를 내었다.

이 카마치 시게히사는 지난해 오토모 치카아키를 따라 조선군을 치는데 군사를 내어 전투를 벌였으나, 오토모 치카아키가 계략에 속아 대패하고 전국이 위태로워지자 오토모가의 가신으로서 이 가령을 보전하기 위해 오토모 모치나오를 그 가독(家督)으로 새로이 옹립하고 조선군과 화평하여 어렵사리 오토모가와 그 자신을 비롯한 오토모가 가신들의 영역을 지켜내는데 일조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원래부터 조선군과 함께하여 종군했던 오우치나 시부카와에 비하여 그 대접이 당연히 뒷전일 수밖에 없었는데, 진서도독부의 평정에도 초대받지 못하고 단지 통지만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나온 형편이니 어떻게든 공을 세워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때마침 시마즈씨와는 돈독한 교분이 있던 처지라 계모를 내어 이종무를 찾아갔던 것이다.

“귀공이 이곳까지 어인 걸음이시오?”

이종무가 한때의 적이었던 카마치 시게히사를 보는 눈이 그렇게 좋을 리가 없었다.

언제고 뒤에서 간계를 내어 조선군의 뒤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아는 카마치 시게히사이니, 이번 계책에 그 모든 것을 걸고 작심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꾀가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오?”

“아직까지 저를 비롯한 오토모가의 일속(一屬)을 믿지 못하시는 줄은 잘 압니다. 하지만 시국을 보는 눈이 있어 이렇게 조선에 배종(陪從)하게 되었으니 저를 비롯하여 오토모 모치나오 님과 그 휘하의 배장들은 모두 이제 조선의 속신으로서 마음을 새로이 먹고 대도독의 하시는 일에 전심전력으로 도우려 합니다. 그러니 한 번만 계책을 들어보시고 합당하다고 여겨지면 가히 들어 써 주시길 청합니다.”

이렇게 굽히고 들어오니 이종무로서도 한 번 들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한 번 말해 보도록 하시오.”

이종무의 허락이 떨어지자 반색한 카마치 시게히사가 밤새 궁리한 계모를 늘어놓는다.

“지금 키쿠치씨와 시마즈씨가 힘을 합하여 저항하고 있다고는 하나, 원래 시마즈 히사토모는 키쿠치 카네토모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나이다. 거기에 군사를 키쿠치 카네토모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전역의 주도권을 키쿠치가 지니고 있으니 분명히 마음에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데 저와 시마즈 히사토모는 구래(舊來)로부터 교분이 있는 사이라, 시마즈 히사토모의 당숙(堂叔)이 저희 집안의 여식과 혼인을 맺기도 하였나이다. 그러니 제가 그 구면을 들어 찾아가 시마즈 히사토모를 구슬려 조선군의 강맹함을 은연중에 흘리고 키쿠치 카네토모가 오토모에 밀사를 보내어 조선군의 내부에서 들어치자고 권한 뒤, 일이 잘되면 그 군세를 바로 물리지 말고 바로 시마즈씨를 협격해 큐슈 남부를 이분하자고 제안했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면 시마즈 히사토모가 생각이 복잡해질 것이니, 잘되면 조선에 귀의하여 올 것이오, 일이 생각보다 못하더라도 최소한 키쿠치 카네토모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할 것이니 적군의 내분이 심화될 것입니다. 거기에 제 이름을 알리고 시마즈 히사토모를 찾아간다면 그 일이 키쿠치 카네토모에게 알려져 시마즈 히사토모가 내통을 하고 있다고 의심할 것이 분명하니, 어떤 방향이든 조선에 손이 될 것이 없으니 가납하여 주시면 늦은 밤을 틈타 적지에 들어가 시마즈 히사토모를 만나길 청해 보겠습니다.”

이종무가 들어보니 확실히 카마치 시게히사의 전략이 조선군에 손 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군 내부에도 알리지 않고 카마치 시게히사를 몰래 시마즈의 막중으로 보내었다.

밤에 몰래 적지로 들어가 시마즈의 오랜 친구로 일을 도우러 왔다고 변명하며 제 이름을 밝히고 들어가길 청했다. 막내의 병사들이 카마치 시게히사를 시마즈 히사토모에게 보내어 둘이 마주 앉으니, 시마즈 히사토모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조선군에 귀부했다는 카마치 시게히사가 여기까지 웬 걸음이시오?”

시마즈 히사토모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오토모가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마즈 님께서는 이렇게 많은 군사를 내어 오셨으니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입을 놀려 나를 곤란케 할 생각이라면 그만두시오. 이런 구태한 계책에 내 어찌 속겠소.”

“그건 오해이십니다. 저는 조선군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랜 지인으로서 시마즈 님에 혹여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 하여 몰래 넘어온 것이니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카마치 시게히사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시마즈 히사토모의 표정도 조금은 풀어졌다.

“지금 막부의 밀명을 받아 조선군을 들이치는 것이니 설사 우리가 조금 밀리게 될지라도 막부군이 이내 곧 큐슈에 들어와 조선군을 토막 낼 것이오. 그러니 카마치 공도 일을 잘 생각하여 군세를 이끌고 아군에 투항하는 것이 앞날을 위해 현명한 방책이 될 것이오.”

시마즈 히사토모의 기세는 당당했다.

그러나 카마치 시게히사가 들어보니 일이 돌아가는 모양이 조금 이상한 듯싶었다.

“막부군이 밀명을 내려 군세를 일으키게 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만.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조선군은 이미 막부의 사절을 받아 당분간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화의를 맺고 막부군은 관동에서 일어나 쿄토를 점령하고 남조의 천황을 옹립한 역적들을 토벌한다고 군세를 모두 끌어모아 지금 쿄토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 그게 사실이오?”

시마즈 히사토모는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조선군도 막부에서 밀명을 내려 키쿠치와 시마즈의 양씨를 준동하게 한 줄 몰랐으니 마찬가지인 일이나, 그에게는 막부가 그런 곤란지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도 처음 듣는 일이었다.

혼슈로 가는 길이 모두 조선군과 그 속신들에게 가로막혀 교통이 원활하지 않으니 아시카가 미츠타카와 우에스기 우지노리가 군세를 관동에서 일으켜 쿄토까지 점령하고 남조의 천황이 옹립되고, 막부는 서쪽으로 쫓겨났다는 사실까지도 죄 처음 듣게 되는 것이었다.

“아시카가 미츠타카 자신은 셋쇼의 자리에 오르고 우에스기 우지노리는 타이죠다이진이 되어 지금 쿄(京)에서는 그 기세가 등등합니다. 일이 이리 되니 쇼군이 머리를 써 일을 꾸민 듯한데, 조선군에서도 키쿠치 님과 시마즈 님께서 막부의 명으로 거병하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조심하실 일이 그뿐은 아닌 듯합니다.”

“무슨 말이오 그게?”

운이 좋게 막부의 술책을 알아채 시마즈 히사토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성공했다고 여긴 카마치 시게히사는 좀 더 밀어붙이기로 마음먹고 준비해 온 간책을 꺼내 들었다.

“사실은 키쿠치 카네토모가 저에게 몰래 접선하여 조선군을 안에서 속여 공격해 주길 청하면서, 그 뒤에 이 계책이 성공하게 되면 군세를 물리지 말고 바로 시마즈 님을 급습하여 시마즈의 가령을 양단하여 키쿠치와 오토모의 양가에서 나눠 가지기로 하자고 제안해 온 일이 있습니다. 그 말은 좋게 거절해서 돌려보냈는데 그러고 나니 어쩐지 시마즈 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렇게 위험한 길을 달려 온 것입니다.”

카마치 시게히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뭔가 일이 수상쩍은 것을 눈치챌 수도 있으련만, 이미 막부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대노한 시마즈 히사토모는 마음이 혼란하여 카마치 시게히사의 말이 구구절절 옳게만 들렸다.

“그러면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저는 혹시나 시마즈 님께서 오토모씨를 보위하여 주실 방법이 없을까 하고 찾아왔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쉬운 대로 조선군에 귀부하시는 것도 방법일 것입니다. 저도 이 일을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막부와 키쿠치씨가 모두 시마즈 님을 속이고 조선군의 위용이 막대하여 언제고 토평하려고 벼르고 있으니 이런 국면이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내키지가 않소이다.”

“시마즈가를 존치시키고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조선군도 방책입니다. 처음부터 조선군에 붙은 오우치씨와 시부카와씨가 작위와 사직까지 내려 받았을 뿐더러, 제가 모시는 오토모 모치나오 님도 오토모 치카아키 님이 조선군과 대립하여 전란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귀부하자 큰 벼슬은 주지 않아도 가문과 가령을 잇도록 돌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마즈 님께서 이러한 때에 조선에 귀부하신다면 큰 소란이 될 수도 있는 전역을 끝내게 하여 준 공을 사서 하다못해 가문은 존치시킬 것이오, 잘되면 오우치씨나 시부카와씨만큼의 벼슬을 내릴지도 모를 일이니 생각해 봄직한 일은 아니겠습니까?”

이미 마음이 뒤숭숭한 시마즈 히사토모에게는 그 말이 달콤하게 들렸다.

카마치 시게히사가 다시 말을 달려 조선군의 진영으로 돌아간 뒤에도 생각은 복잡해져 막부와 키쿠치에 대한 적개심이 들끓으니, 결국 며칠을 가지 못하고 내분을 일으켜 보다 우위에 있는 군세로 내부에서 키쿠치 카네토모를 들이쳐 내분을 일으켰다.

결국 승리하여 키쿠치 카네토모의 목을 가지고 조선군 진영으로 찾아와 귀부하기를 청하니, 진서대도독 이종무는 반색하여 시마즈 히사토모를 맞아들이고, 한성의 조정에 청하여 그 대우에 소홀함이 없게 하기를 약속하여 주니, 시마즈 히사토모는 앞으로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조선에 종신하기로 맹약하고 군세를 물려 사츠마로 돌아갔다.

이 카마치 시게히사의 계책으로 인하여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두게 되자 이종무는 이 카마치 시게히사를 다시 보고 진서도독부의 부중에 들어와 조정의 신료가 되어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니 카마치 시게히사로서도 과거의 일을 씻고 새롭게 출발해 볼 수 있는 일인지라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만, 가신인 카마치 시게히사의 공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오토모 모치나오도 전공에 상신되어 이종무가 오토모 일가에도 작위를 내려주기를 주청해 주니, 이 모든 것이 카마치 시게히사의 활약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보다 쉽게 큐슈 일대가 평정되어 진서도독부의 직령(直領)을 중심으로 하여 큐슈 일대와 혼슈 남서의 보쵸에 이르기까지 오우치, 시부카와, 오토모, 시마즈의 4대 영주가 모두 조선에 종신(從臣)하여 오니 조선에서는 이들의 구래의 가령은 인정해 주되, 모두 조선의 속신으로서 앞으로 그 신하된 의무를 소홀이 하지 않기를 서약받고 진서도독부의 군사 중 일부를 내어 이들을 단속하거나 지켜주기 위해 각지에 주둔시켰다.

이러는 와중에 막부는 계책이 실패하게 된 줄도 모르고 쿄토로 병력을 내어 시시각각 진격하다 남조 관동군의 군대를 맞아 미노(美濃)에서 대패하고 다시 빈고로 철수하니, 내전의 소용돌이는 잠식되지 않고 다시 난국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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