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4장 안태남해(安泰南海) (15/82)

제14장 안태남해(安泰南海)

「구주의 도진구풍(島津久豊, 시마즈 토모히사)이 예조에 글을 보내 와 말하기를 “조선에서 본도를 토벌할 때 왕명을 경외하여 감히 화살 하나도 쏘지 않았고, 오히려 관군을 잘 호종하고 신종(臣從)하기를 청하니 그때의 장수들은 이 일을 다 알 것입니다. 부디 관작과 품계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고 하였다.

○九州中島津久豊通書于禮曹曰:“貴國見討本島時, 敬畏王命, 不敢發一箭, 且護從官軍, 請臣從貴國, 其時將帥悉皆知之. 乞受官爵品階.”」

―목종(穆宗)실록 제12권 9년(壬辰) 1월 3일

1413년 맹춘(盟春)

조선국 진서도독부 기주부(崎州府).

진서도독부가 큐슈에 설치되고 전란이 잦아든 지도 1년이 훌쩍 지났다.

조용한 어촌이었던 나가사키에 설치된 장기부는 뒤의 기(崎) 자를 가져와 기주(崎州, 키슈)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장주라고 하지 않은 것은 나가토국의 별칭인 쵸슈(長州)와 그 글자가 같아 혼동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1년 사이에 기주 부중으로 많은 사람이 흘러들어 오고 또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이 흘러 나갔다.

처음 일본에 상륙한 조선군의 3개 진위대가 주둔하고 성벽을 쌓고 임시로 만든 포구와 도독부에서 설치한 건물들이 들어섰을 때만 해도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협만(峽灣) 입구에 들어선 군사 요새와 다를 바 없어, 진서[九州] 각지의 번창한 성읍들과 비교해 볼 때 도독부의 수부(首府)가 들어서기에는 사실 부족한 면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차츰 그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조선으로 오고 가는 선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무역업에 종사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나, 어느덧 기주부의 시가는 군인을 제외하고도 물경 1만 3천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하는 항구로 변모하였다.

이내 이 기주는 경인동정의 공적으로 조선으로부터 축주후의 작위를 받은 시부카와 미츠요리의 영지인 박주(博州, 하쿠슈)와 더불어 진서의 주요한 항구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박주 또한 옛 구칭인 하카다에서 시부카와 미츠요리가 주(州)의 읍호를 붙여 바꾼 이름이었는데, 이런 연유로 기주와 박주의 두 고을이 진서 양주(兩州)라는 이름으로 번창했다.

그러나 이 두 고을의 성격은 진서에서 들고 나가는 무역항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다른 점도 있었는데, 박주의 경우에는 소킨을 비롯한 옛 하카다의 거상들인 넨교지들이 축주후의 보호 아래 여전히 번창하면서 조선 본토의 동래와 명나라 영파로 가는 무역을 계속하며 아직 막부군과 관동군으로 나뉘어 남북조의 전란을 재현하고 있는 일본 내륙까지 그 판로를 넓혔다.

기주는 그와는 다르게 조선의 내상과 나상, 송상들이 앞다투어 들어와 주로 진서도독부의 보호 아래 들어온 조선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 뿐더러, 앞으로 남만(南蠻) 각지로 나가는 무역의 거점을 삼을 생각으로 상관을 건설했다.

따라서 그 취급 품목이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박주의 경우에는 기존 그대로 원래 일본의 주요 수출 품목이었던 동, 구리, 유황, 도검 따위를 그대로 취급하면서 명나라 물건을 위주로 사들이고 있었고, 기주의 경우에는 조선의 인삼, 면직물, 모시, 한지, 비누, 발화기, 도자기 등을 팔고 진서 각지에서 왜선을 만드는데 종사했던 선박 기술자들을 확보하는 한편, 화약을 만드는 주재료가 되는 황을 수입하고, 금광 및 은광을 개발하고 목재를 사들이는 등의 투자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런 상단들이 기주의 항구 접안에 큰 가로를 형성하며 늘어서니 속된 말로 진서제일가(鎭西第一街)라고 불리게 되었으니, 본래의 명칭은 남정방(南町方)으로, 혹은 미나미쵸토리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이 맞은편으로는 새롭게 창설된 진서함대(鎭西艦隊)의 군영이 있고, 그 뒤로는 진서도독부의 육군영이 있었는데 조선의 편제를 그대로 따르는 주둔 해군과는 달리 육군의 경우 독립 부대로 편성이 되어 진서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기존의 경인동정 때 들어온 3개 진위대 본대는 조선으로 돌아갔다.

진서군의 아래에는 새로운 편제의 부대가 재편성에 들어가 1만 병력의 보병대(步兵隊) 3개와 2만 병력의 기병대(騎兵隊) 1개 부대가 들어서니, 진서 제1보병대와 진서 기병대는 기주의 둔영에 주둔하고 진서 제2보병대는 박주에, 진서 제3보병대는 대마도에 주둔했다.

이 외에도 각기 수천 정도의 규모로 도독부 직할로 편성되어 진서 각지의 복속영주들의 감시 및 지원을 목적으로 파견대(派遣隊)가 편성되어 각지에 주둔해 있었는데, 대략 때에 따라서 다르나 총 규모가 2만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견대가 그 비호를 하는 복속 영주들은 조선에서 이르기는 진서제후(鎭西諸侯)요, 일본말로는 흔히 카라한, 혹은 칸조쿠 다이묘라고 불리는 이들로 경인동정 초기부터 조선과 함께한 오우치 모리미와 시부카와 미츠요리는 각각 백제공, 축주후로 그 작위가 높았고, 오토모 모치나오와 시마즈 히사토모 각각 풍주백(豊州伯)과 살주백(薩州伯)에 분봉되어 그 위계가 한 품 낮았다.

이 외에도 포로가 되었던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는 아예 대마도가 진서도독부의 직할로 편입되면서 그 영지를 모두 잃고 대주현남(對州縣男)의 이름뿐인 작위를 받고 조선 내륙으로 불려와 한성에 기거하며 종씨의 성에 대마의 본관을 하사받아 종정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예조참판(禮曹參判)의 벼슬을 살게 되고, 시마즈 히사토모를 귀부시키고 전란을 진정시키는 데 공을 세운 카마치 시게히사는 유천현남(柳川縣男)에 진봉되고 진서도독부의 참의(參議)로 벼슬을 살게 되었으니, 조선군에 저항한 이력이 있으나 아주 전란 중에 패퇴하고 산산이 흩어진 쇼니씨나 키쿠치씨의 멸족에 비하면 그 처우가 상당한 편이었다.

원래 막부가 원거리에 있는 각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임명했던 슈고다이묘로서의 그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나, 경인동정의 전란 와중에 막부와의 인연을 버리고 조선에 귀부했기에 명분상 그 가령을 통솔하는 권위를 조선에서 내려준 봉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들과 진서도독부, 넓게는 조선 본국과의 관계가 도타워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자녀, 혹은 질서(姪壻) 등을 가까운 기주부나 아주 조선의 한성까지 보내어 견문을 쌓고 조선의 유력자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전란에서 가장 공이 크고 그 가문의 기원이 백제왕가라는 핑계로 전략적으로 우대해 주는 오우치 모리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우치 모리미가 아직 아들을 얻지 못해 일전 막부에 대항하여 반역하였다가 죽은 형 오우치 요시히로의 아들, 즉 조카 되는 오우치 모치요(大內持世)를 조선에 보내면서 의외의 인물을 하나 딸려 보내게 되었는데, 바로 오우치 모리미가 아껴 마지않는 금지옥엽인 딸 에히메였다.

에히메는 올해로 열여섯의 나이였는데, 이미 열넷일 무렵에 그 미색이 자자하기로 소문이 나 오토모 치카아키에게 이 에히메와의 거짓 혼사를 제안하니, 그 미색이 탐이 난 오토모 치카아키가 계략인 줄도 모르고 응했다가 결국 전쟁에서 패할 정도의 미모였다.

이 에히메는 원래 천성이 활달하고 재치 있는 여자아이였는데, 백제공 오우치 모리미는 절대로 에히메를 놓아 줄 생각이 없었으나 바깥세상을 구경해 보고 싶은 이 에히메가 조선으로 유학 가는 길에 사촌 오라버니인 오우치 모치요를 돌봐 줄 집안 여식이 하나는 있어야 된다며 바득바득 우겨 길을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오우치 모리미는 혼내고 달래 보아도 에히메가 뜻을 꺾지 않자 마지못해 1년간만 보내길 허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모치요와 에히메가 벽란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기주부로 건너오게 된 연유였다.

특별히 오우치 모리미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경인동정에서 여러 차례 무훈을 세우고 육군 참장으로 진급하여 진서 기병대를 지휘하게 된 이회가 직접 이들을 맞이하러 나와 주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네. 나는 이곳 기주에 있는 진서 기병대장 이회라고 하네.”

이제 나이가 사십 줄에 가까워지는 이회였지만, 멀끔한 군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시원시원해 보였다.

그 이름을 종종 들어왔던 모치요가 먼저 감사의 예를 표하고 나섰다.

“이렇게 마중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백제공가의 후사(後嗣)가 된 오우치 모치요라고 합니다.”

“본토로 가는 길을 나서기 쉽지 않았을 텐데 견식을 넓히고자 자청했다고 들었네.”

이회가 모치요의 두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오우치 모리미의 공이 크니 그 자제도 환대를 받는 것이었다.

“백제공의 딸 에히메라고 합니다.”

뒤에 숨어 눈치를 보던 에히메도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이회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에히메 공녀의 미색이 자자하다고 소문이 나 있더만 허명이 아니었구려. 아녀자의 몸으로 행장을 꾸리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오라버니의 수발을 들기 위해 타지 생활을 자처했다고 들었네.”

이회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갈 길이 머니 오늘은 우선 행장을 풀고 하룻밤 유숙한 다음에 내일 배편에 오르기로 하지.”

이회가 직접 자기 관사의 방을 내어 줘 모치요와 에히메 그리고 그들을 호종하기 위해 따라온 하인 십여 명의 거처를 돌봐 준 다음, 다음날 일찍 서둘러 다시 짐을 꾸려 항구로 나섰다.

벽란도로 가는 선박은 나상에서 조선소를 꾸려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근래에 기주나 영파로 오고 가기 시작한 교관선이었는데, 목포와 제주를 거쳐 기주에 정기적으로 기항하는 선박인지라 그 선명을 기주의 옛 이름인 장기를 빌려 장기호라고 명명해 놓았다.

“오라버니, 이렇게 큰 배는 처음 보았어요.”

에히메는 교관선의 규모에 깜짝 놀랐는데,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모치요는 웃으면서 대꾸해 준다.

“이런 큰 배가 먼 바다를 건너 조선에도 가고, 명나라에도 가고 한단다. 이 배를 만드는데도 이 큐슈의 화선(和船) 만드는 기술자가 건너가서 많이 도왔다고 하지. 그러니까 조선과 진서, 그리고 멀게는 명나라의 기술까지 합쳐져 만들어진 작품인 게야.”

에히메는 모치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배에 오르면서도 연신 감탄하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무엇을 보아도 신기하고 즐거울 나이인 것이었다.

이렇게 정초(正初)에 기주에서 출발한 장기호는 제주에 들렀다가 다시 목포에 기항하고 벽란도에 이르니 그때가 대보름 무렵이었다.

벽란도는 조정의 시책으로 인하여 고려말 이래 쇠퇴하던 것을 무역항의 위신을 점차 되찾아 가며 번창하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한성이나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한 항만으로서 근래에 들어서 많은 선박들이 벽란도에 기항하고 있었다.

때마침 정월 대보름이라 배가 들어올 무렵에는 벽란도 일대에서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아직까지 화약이 많이 보급되지 않은 진서에서 막 건너온지라 모치요와 에히메 모두 이 불꽃놀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런 명절에는 벽란도 같이 부유한 항구에서는 주민들이 품을 모아 이런 잔치를 열기도 하는 것이었다.

예성강 하구의 하안(河岸)에서 밤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치는 화려한 형형색색의 불꽃을 보면서 에히메는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평소 같으면 에히메를 한마디 타박이라도 했을 모치요였으나 역시 그 또한 깜짝 놀라서 감탄하며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에히메도 모치요도 마치 이 불꽃이 자신들이 조선에 온 것을 환영해 주고 있는 것 같이 느끼고 있었다.

1413년의 정월 대보름이었다.

1413년 계춘(季春)

조선국 한성부.

봄이 한창이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모두 물러가고 북한산 언저리 한성의 도읍에서는 매실이 익어 가는 장마의 계절이 어느덧 성큼 지척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우기가 오기 전에는 날이 화창하고 따뜻한 바람이 산하에 부는지라 놀기 좋아하는 한량들이 뱃놀이 하며 경강(京江, 한강)을 오가는 부선(艀船)에 올라 시부 한 절 짓기도 하고 술도 한 잔 마시며 흥락(興樂)하기 마련이었는데, 이 해의 봄은 유난히 날씨가 좋아 용산 모개전 밖 밤섬 지척의 강물 위에는 뱃놀이 하는 이들로 성황이었다.

세훈의 아들인 현도도 올해로 열 넷이라 다른 고관의 자제들과 어울려 뱃놀이라는 것을 처음 나와 보았다.

여유가 있고 제대로 논다는 선비들은 기생도 끼고 노는 모양이지만, 현도와 그 친우들은 모두 약관도 되지 않은 풋내기들이라 삼삼오오 모여서 배에 올라 직접 노를 저으며 어쭙잖게 한시 한 줄 지어 보며 웃고 노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현도가 유유자적하게 여흥을 즐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세훈의 아들, 즉 섭정공의 자제로서 자라난 현도는 세훈의 방침에 따라 각종 고전과 전적은 물론이거니와 화학전습원의 학유인 강희수에게도 따로 가르침을 받았다.

거기에 세훈이 틈틈이 자신이 아는 것들을 교육시키곤 하니, 기마술과 궁도(弓道)를 연마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다.

세훈이 앞으로 가문의 대를 이어 나갈 장남으로 현도를 모자람 없이 키우기 위해 신경을 여러모로 썼기 때문에 현도는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아버지가 원하는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던 차에 이제 나이 열 넷이 되어 봄바람이 부니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어머니인 고상희에게 청해 하루 뱃놀이를 허락받고 같이 공부를 하던 친구들과 용산 밖 경강으로 나온 것이다.

강가의 버들 잎 하나 꺾어다가 입에 물고서 바람도 불어 보고, 배에서 풍덩 뛰어내려 멱도 감고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 저리로 가 보자.”

지치는 줄 모르고 배와 뭍을 오가며 놀더니 현도가 용산 언덕 언저리에 있는 정자를 보며 말했다.

“저기가 어딘 줄 알고?”

함께 다니는 동무 중 하나인 황보인(皇甫仁)이 말했다.

이제 거뭇하게 코 밑으로 수염이 나기 시작하는 황보인은 아직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시커멓게 얼굴이 그을릴 정도로 밖으로 다니길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다만 글줄 꿰는 재능 하나는 탁월해 주변에서도 머리가 좋기로 평판이 자자했다.

그런 동무이니 만큼 현도는 괜히 지기 싫은 오기가 생겨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는 말했다.

“누구 정자인지 어떻게 알어? 하지만 지금 주인이 없다면 잠시 올라가 강물 구경하는 것도 선비의 풍류 아니겠어?”

괜스레 선비의 풍류 운운하며 황보인의 자존심을 슬슬 긁어 놓자는 심보다.

황보인은 대관(大官)의 자제는 아니다 보니 어울리면서도 약간의 자격지심이 있었는데, 때문에 나이는 어리지만 선비의 구색을 갖추는 일에는 열성이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현도가 어린 마음에 나이가 좀 많은 황보인을 골려 먹은 것이다.

“그래, 그러면 가 보도록 하자. 별것 있으려구.”

황보인이 툴툴대자 현도가 씩 웃으면서 앞장서 달려 나갔다.

무리를 좌지우지하는 현도와 황보인이 동의를 하자 소년들도 제각기 앞다투어 언덕으로 뛰쳐나가는 현도를 쫓았다.

그 용산의 정자라는 것은 다름 아닌 농월정(弄月停)으로 한 잔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의미니, 주인이 풍류를 즐김을 족히 알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 주인이란 다름 아닌 군부의 수뇌인 송거신으로, 평소에 자주 숭례문 밖으로 나와 이곳에서 지인들을 불러 놓고 술 한 잔 하며 시국을 논하고, 사람을 품평하기도 하고, 기분이 유쾌하면 그 앞 벌판에다가 과녁을 세워 놓고 활쏘기를 겨루기도 하곤 하는 곳이었다.

아직 어려 그런 어른들의 도락(道樂)하는 곳을 알 턱이 없는 아이들이기에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키는 이 없는 정자에 올라서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웬 기묘한 복장을 한 두 남녀가 서 있었는데, 남자는 이제 갓 약관(弱冠)의 나이로 보이고, 여자는 나이 차이가 썩 나 보이지는 않지만 현도보다는 두세 살 많아 보여 황보인과 동갑내기쯤으로 보였다.

남녀의 복장은 현도와 황보인을 비롯한 아이들이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조선 사람의 복장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여자는 머리장식이 독특하고 허리에는 두터운 띠를 두르고 있었다.

설마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뛰어 올라간 현도는 깜짝 놀라서 흠칫 그 자리에 서고 말았는데, 그 바람에 인기척을 느낀 두 남녀의 시선이 현도와 스쳤다.

현도를 뒤쫓아 오던 아이들도 이상함을 느끼고 정자로 올라오는 계단에 멈춰 서서 분위기를 살피니, 정자의 주인과 마주쳤나 싶어서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저, 죄송합니다. 주인이 있는 줄도 모르고.”

현도는 머리를 긁으며 사과부터 했다.

그러면서도 남녀의 신기한 복색을 힐끔거리며 살펴보았다.

“아니오. 우리도, 아, 그러니까 주인이 아니오. 그냥, 음… 뱃놀이. 그렇소, 뱃놀이라는 것을 보려고 하루 자리를 카(借)시테, 아, 음. 빌린 손님이니 올라와서 함께하셔도 대장부(大丈夫)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선분이 아니신가요?”

복색을 보며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뭔가 말하는 품도 신기했다.

조선말을 더벅거리면서 이상하게 쓰는 것이 확실히 조선인은 아닌 듯했다.

“그, 그렇소. 아직 조선말을 배운 지 오래 되지 않아서. 말이 변(變)한가 보오. 나는 진서의 쿠다라코, 아, 그러니까 백, 박… 제공의 조카로 한성에 학문을 익히러 온 오우치 모리요, 그러니까 대내지세라고 하오.”

“백제공이요? 아, 그렇다면 그 유명한 진서의 호족이라는 대내씨 집안의 공자시로군요!”

옆에서 은근슬쩍 끼어들어온 황보인이 아는 척을 하며 말했다.

조선의 소년들도 자신의 가문을 알아보자 어깨에 힘이 들어간 모리요가 말했다.

“그, 그렇소. 숙부께서는 이번 전란에서 큰 공이 있으셔서 직접 조선의 임금님께서 쿠케, 아, 뭐라고 말해야 하나, 그러니까 공가를 세워 주셨소! 덕분에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견문을 넓히고 있소이다.”

기세등등하여 이것저것 익혀 둔 조선말로 소년들과 대화하는 모리요와 달리, 아직 조선말을 잘 모르는 에히메는 옆에서 사촌 오라버니가 하는 말을 귀동냥만 하고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니 하며 또래 소년들과 거리를 두거나 하는 에히메가 아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저 부끄럽게 뒤에 물러서 있을 뿐이었다.

기주부에서 항해를 출발할 때까지는 조선을 오가던 장사치 등을 통역으로 기용해 대화를 조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 지장이 없었지만, 막상 조선에서 살기 시작하니 신기한 것도 많고 눈은 재밌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이 많았다.

이 모리요와 에히메는 이때 진서도독부 군관들의 주선으로 송거신에게 연통이 되어 한성에서는 송거신의 자택에 별채를 얻어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오늘도 뱃놀이가 한창이라는 말을 듣고 나가 보고 싶었으나 같이 어울릴 사람도 마땅치 않고 하니 대신 경강이 잘 내다보이는 정자에서라도 구경을 해 보라는 송거신의 배려로 이렇게 한나절 정자에서 다른 사람들 노는 모양을 구경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또래의 아이들이 나타나니 에히메의 눈도 반짝였지만, 여전히 말을 나눌 수 없으니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오라버니가 말이 좀 통하니 조금은 재미있겠다 싶어서 모리요를 보챈다.

“彼の者等と相携えて遊びたいならば, そう話しても良いで御座ります. (저 이들과 같이 놀고 싶으면 그렇게 말해도 좋아요.)”

에히메가 일본말로 귓속에 말하자 모리요가 씩 웃으며 말한다.

“旣に言ったぞ. (벌써 말했어.)”

자기가 놀고 싶으니 괜히 모리요에게 놀고 싶으면 놀라고 말하는 폼이었다.

사촌 동생의 그런 모습에 괜스레 웃음이 난 모리요는 짐짓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서는 다시금 현도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와 함께 어울립시다.”

“좋아요. 노는 김에 조선말도 좀 더 가르쳐 드리죠. 특히 거기 계집아이요.”

현도가 씩 웃으며 말한다.

“계집아이? 온나노 코노 코토카이? 이쪽은 아이가 아니라 히메사마, 아, 그러니까 나와는 사촌인 숙부 백제공의 따님이시오.”

“아!”

현도가 괜히 말했다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나마 조선말이 아직 완전하지 못한 모리요였기에 망정이지, 조선사람에게 같은 실수를 했으면 크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었다.

공녀에게 계집아이라니, 제가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멋쩍은 웃음만 흘리다가 괜히 에히메와 눈이 마주치고 마는 현도였다.

에히메는 뭐라고 대화가 오간지는 몰라도 현도가 자길 더러 뭐라고 한 것은 눈치채고는 눈을 흘겼다.

“그러게 괜히 나서지 말라고 내가 늘 이야기했지 않냐?”

옆에서 돌아가는 꼴을 보던 황인보가 핀잔을 주고 만다.

이렇게 우연찮은 만남으로 같이 정자에서 놀다가 나중에는 아까 놀다 매어 둔 배에 같이 올라 다시 뱃놀이를 즐기고,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우왕좌왕하며 통성명을 하게 되었는데, 모리요와 에히메도 그제서야 현도가 그 유명한 섭정공 세훈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히메는 현도에게 타박을 준 것이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하여간 현도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언제 한 번 황인보와 함께 꼭 경행방의 집으로 들러달라고 모리요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도 괜히 에히메의 눈치를 한 번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스레 멋쩍어진 현도는 에히메에게 웃음을 한 번 지어 보이고서는 집으로 총총이 사라졌다.

이렇게 서로 교류하게 된 이들은 종종 모리요와 에히메가 기거하는 송거신의 별채나 현도가 사는 경행방의 섭정공저, 혹은 황인보의 집을 오가며 우정을 쌓았다.

현도는 특히 일전의 일로 에히메와의 사이가 머쓱하다고 생각되자 자청해서 에히메의 조선말을 가르치는 것을 돕고 나섰는데, 둘은 토닥거리면서도 이내 곧 조금씩 친해져 갔다.

에히메를 보호해야 할 입장에 있는 모리요는 둘 사이가 너무 가까워질까 봐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어쩌다 보니 육군진무관으로 입교하기로 예정이 되어 자기일이 바빠지고 말았다.

거기에 현도가 당금 조선에서 가장 빼어난 명문이라 할 수 있는 섭정공의 아들이기도 하다 보니, 구태여 교분을 쌓는 것을 말릴 이유는 없었다. 거기에 황보인이 항상 끼어들어 어울리고는 하니 내심 안심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며 에히메의 조선말도 어느덧 부쩍 늘어가고, 현도와 황보인은 그렇게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이들을 찾아가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생원시를 준비했다.

세훈은 아들 현도가 하는 모양을 내심 틈틈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백제공의 자제들과 교분을 쌓는다는 핑계로 종종 송거신의 집에 놀러가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런 현도가 가끔 멍하니 구름만 쳐다보고 하는 모양을 보니, 그 생각하는 게 왠지 세훈은 뻔히 알 것만 같았다.

“현도도 이제 다 자란 모양이오.”

아들이 공부한답시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고 온 세훈이 내실에 와서 괜히 처 고상희에게 뜬금없이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남편이 무슨 말을 꺼내려 하는지 알 턱이 없는 고상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다.

“백제공의 여식이 그렇게 미색이 뛰어나서 동정 때도 진중에 그 명성이 자자했다더니만, 현도도 감탄한 모양이오.”

세훈이 말하자 그때서야 고상희가 알겠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짓는다.

일전에 세훈의 권유로 세운 경애학사의 일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고상희였지만, 자식들이 하는 일은 세훈보다 오히려 꼼꼼히 지켜보고 있는 그녀였다.

“소첩은 현도가 혹여 공가에 실례될 일을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아니, 아니,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두면 될 일이지.”

고상희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하니 세훈이 태평하게 대꾸한다.

사실 세훈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가급적이면 아들들이 원하는 대로 짝을 지어 줄 생각이었다. 파격적으로 위험하지만 않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며느리를 들여 줄 요량도 있었다.

그것이 세훈이 살아왔던 세상에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지금 조선의 섭정공으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남들의 눈을 봐 가며 피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일 만큼은 뜻대로 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한창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나이인 현도의 고민도 세훈에게는 그저 걱정하고 놀랄 일이 아니라, 흐뭇하게 보일 뿐이었다.

거기에 현도가 푹 빠져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에히메가 오우치 모리미의 딸이라면, 세훈은 굳이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사춘기 때의 춘정(春情)이 평생 갈 반려를 정하기에는 철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양가가 약정하여 얼굴도 모르고 통혼하는 일이 많은 이 시절에 그나마의 순정이라도 지켜줄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세훈의 조그만 바람이기도 했다.

1413년 중추(仲秋)

조선국 진서도독부 기주부(崎州府).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었다.

가을 무렵으로 접어든 진서도독부 기주의 항구에 동래에서 오는 배 한 척이 기항했다. 조선 해협을 지나 대마도를 건너, 다시 현해탄의 섬들 사이를 지나서 3일간의 항로 끝에 기주에 이른 배였다.

목포에 이어서 두 번째로 방파제와 석축을 잇대 만든 기주의 항만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그 정비가 끝나 해군의 수선이나, 일반 민간의 교관선 같은 큰 선박들도 항만의 수심 깊은 곳에 십수 척이 정박할 수 있고, 해안을 따라 건설된 석축 부두에는 보다 작은 선박들이 수십 척 부두에 메어져 있었다.

그 부두로 말끔히 신식 조선군 장교복을 차려 입은 남자가 내렸다.

안광은 번득하게 빛나고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은 건강해 보였다.

왼쪽 가슴에 패용한 명패에는 천안석이라는 이름 석 자가 명료했는데, 다름 아닌 일전 육군진무관에 입교하면서 이름을 바꾼 천칠개였다.

일전 진서에 상륙한 뒤 전중의 공을 인정받아 이회에 의해 육군진무관의 1기 생도로 입교 추천을 받게 되었고, 2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참위로 임관한 뒤 진서로 병력을 많이 내어 보내 인원을 보충하고 훈련을 다시 해야 하는 고향 안동의 진위대에서 반년 간 실무를 익히며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을 마음껏 즐기다, 이제 진서도독부의 군부로 발령받아 다시 바다를 건너오게 된 것이다.

입대하기 전의 집안을 생각하면 가는 발걸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다행히도 이제는 봉록을 받아서 집에 넉넉히 부쳐 줄 정도가 되었고, 좋은 음식을 잘 섭취하게 된 아버지의 병세도 많이 회복이 되었다.

거기에 자신이 장교로 임관한 덕택에 동생들의 군역도 면제가 되었고, 이앙법의 도입도 어느덧 정착이 되어 소출이 좋은데다가, 전쟁에 종군할 때 받은 수당을 모아 논밭 몇 마지기라도 제 이름으로 사 놓았으니, 따로 소작을 받아 오지 않아도 집안 식구들이 먹고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이렇게 집안의 대소사가 처리되고 나니, 천안석의 마음도 편안해져서 진서의 도독부로 오는 발걸음도 자연스레 가벼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장가도 가지 못하고 나이를 서른한 살을 먹고 말았으나, 요즈음에는 군대에서 장가를 들지 않아 상투를 틀지 못한 이들에게는 단발을 권하는 추세라 뒤로 꼬리 내린 총각 머리가 영 거추장스러웠던 천안석은 계속해서 단발을 하고 있었다.

불문에 들어설 때도 머리를 자르듯이, 군문에 들어서면 속세와는 멀어지는 하나의 수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천안석은 머리를 자르기를 주저하는 다른 반가 출신의 동기들과는 달리 지체 없이 머리를 삭발했었다.

그러나 이 단발이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군대에 들어간 총각들 사이에서나 하는 일로, 그나마도 글줄 읽었다는 양반 출신의 군관들은 좀체 하려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천안석은 상민 출신이라 이런 일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거기에 군대에서 입신하고 집안까지 일으키려 들어온 일이니 군부에서 추진하는 일에 추호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앞장서 단발을 하였더니 얼떨결에 포상까지 받게 된 일도 있었다.

천안석이 진서도독부 휘하의 진서군 본영(本營)으로 도착하자, 정문의 경계를 서고 있던 보졸들이 경례를 붙여 왔다.

천안석은 가볍게 전립에 손을 붙여 경례를 받아 주고서는 본영의 군적과로 찾아가 전속에 따른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그 군적과의 담당자라는 것이 다른 이가 아니라 이제는 차근차근 진급하여 하사관 계급의 최고인 특무정교에 올라 군적과의 실무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필승! 이거, 어라 천 부교님 아니십니꺼!”

“부교는 무슨, 참위에 임관한 지가 어느 시절인데. 소만식, 너도 계급장이 번쩍거리는구나, 야.”

“이제는 고마 사투리도 안 쓰십니더.”

“육군진무관에 갔더니 말투부터 뜯어 고치는 게 시작이더라. 이게 입에 붙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안동 가니까 안동말이 절로 나오더만. 왜, 지금은 부대 안이라 이렇게 말하기는 한데 사투리 써 주랴?”

“아입니더. 됐습니더. 고마 저도 오랜만에 천 참위님을 뵀더니 사투리가 고마 입에서 흘러 나오지 않겠니껴. 사실 고마 여기 진서에는 갱상도 사람이 제일 많다 보니 사투리 요게 잘 안 바끼니더.”

“그렇지, 그거야.”

천안석이 기분좋게 웃었다.

간만에 들어보는 소만식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근데 이름이 왜 바뀌셨니꺼. 천안석이라고 적힌 것 같니더.”

“아버지가 너무 대충 지은 이름인 것 같아서 진무관 들어가는 길에 바꿨다. 야, 그런데 이거, 만식이 너 이제 글자도 볼 줄 아나 보구나!”

“글자도 못 읽으면 여기 군적과에 앉아서 어떻게 일을 보고 있겠니껴. 천 참위님 진무관 가서 생도 하시는 동안 지도 여기서 글자도 익히고, 책도 보고, 일본말도 계속 배우고, 그렇게 하다 보니 진급이라고 특무정교까지도 않했십니꺼.”

아닌 게 아니라 소만식도 군문에 몸을 담기로 마음을 굳힌 후 필사적으로 한자라는 것도 익히고 이두문이라는 것도 공부했다.

물론 반가의 자제랍시고 군역을 지러 하사관으로 입대하는 이들에 비해 그런 글줄 보는 게 떨어지니 지지 않으려고 밤을 새워 가며 공부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근무지가 진서도독부이다 보니 경인동정 중에 배우기 시작했던 일본말도 잊지 않도록 계속 열심히 연마했다.

그런 공이 인정되어 다행히도 진급을 거듭하여 서류를 다루는 군적과에도 앉아 있게 되었으니, 몇 년의 세월이 짧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기까지 놀러 오시지는 않으셨을끼고, 보자, 일로 전속받으신 거니껴?”

“그래. 참위 천안석. 진서군 기병대에 참위로 발령받아 전속 절차를 밟으러 왔다.”

“그럼 여기서 지가 군적에 기입하고 바로 직인받으러 기병대장님께 갈 테니꺼 고마 바로 같이 가셔서 보고도 하시는 게 어떻십니꺼?”

“그래, 그렇게 해야지. 기병대장님이 누구시더라?”

“보면 아실 깁니더. 많이 반가워 하시지 않겠니껴?”

소만식의 말 대로 진서기병대장이 이회이니 천안석을 반가워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바로 자신이 직접 추천해서 진무관에 생도로 입교시켰던 천칠개가 천안석 참위가 되어 돌아왔으니 그냥 보기만 해도 흐뭇할 터였다.

천안석도 기병대장에게 경례를 붙이고 나서 그 얼굴을 보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전속 보고를 하는 자리니 억지로 표정을 굳히고는 있으나 얼굴에 기쁨이 가시지 않았다. 좋아하는 상관의 아래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된 것이 내심 기뻤기 때문이다.

“필승! 육군 참위 천안석, 오늘부로 진서군 기병대에서 복무하게 되었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그래, 반갑다. 천칠개 이놈이 많이 커서 돌아왔구나. 이름까지 바꾸고 말이야. 병사에서 장교까지 진급한 놈은 조선군 전체에 너밖에 없을 거다.”

“아직까지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상관이 이 참장님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진무관에 넣어 주신 것에 보은하기 위해 언제고 찾아 뵈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여기 계신 줄 알았다면 임관하자마자 이리로 배속신청할 걸 그랬습니다.”

“이거 사투리도 안 쓰고 말도 청산유수가 됐구만. 내가 자네 보낼 때 다시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알고 온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이회의 농에 천안석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 아닙니다. 다 알고 왔습니다.”

“다 알고 오기는 뭘 알어, 몰랐다면서. 하하!”

이회는 그 모양이 재미있는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거 몰랐는데 서류를 보니 자네 나이가 서른하나로구만.”

“예. 금년으로 삼십일 세가 되었습니다.”

“근데 자네 장가 안 갔지 않았나?”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거 나이를 그만큼 먹도록 조선 천지에 장가 안 간 남정네도 찾기 힘들겠네. 내가 올해 중으로 참한 처자 하나 찾아 중신 넣어 주겠네.”

“괘, 괜찮습니다.”

천안석의 얼굴이 그만 다시 벌게졌다.

자신을 놀려 먹던 천안석이 이회 앞에서는 쩔쩔 매는 모습이 재밌어 소만식은 뒤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다 몰래 고개를 돌려 키득댄다.

천안석은 소만식이 그러는 걸 알고는 괘씸하기도 했지만, 상관의 앞인지라 꿈쩍도 못하고 어안 벙벙히 서 있었다.

“아직 이곳에는 자네가 진무관의 1기 생도이다 보니 자네만큼 제대로 기마술에 관한 훈련을 받고 온 이가 없어. 그래서 앞으로 기병들을 조련시키는 부서에서 그 일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네. 어떤가?”

“이의 없습니다!”

“그래, 좋아. 전장의 영웅 천 참위가 이렇게 다시 내 밑으로 와 주니 기쁘기 짝이 없구만. 지금이 아주 중요한 시기네. 반드시 전심전력을 다해 잘해 주길 바라네.”

“예! 말씀 감사합니다. 필승, 보고 끝!”

신고를 마치고 퇴실하여 나오자 옆에서 졸래졸래 소만식이 따라오면서 키득거린다.

“이놈 자식이 계속 웃네. 소 특무장교. 상관 앞에서 그렇게 하라고 배웠나!”

천안석이 괜히 심통이나 으름장을 놓자 소만식은 꿈쩍도 안 한다.

“아, 그기야 아마 천 참위님은 조련과로 가시게 될 끼고, 저는 군적과니 직속 상관도 아니시고, 허허. 그기에 천 참위님은 총각이신데 지는 결혼까지 했다 아입니껴.”

전립을 쓰고 있어서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소만식이 예전처럼 자기를 따라서 단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투를 튼 듯 보였다.

“야. 너 결혼했구나. 정말 축하한다. 이거 괜히 어른 앞에서 으름장 놓고 말았네.”

“그러니까 고마 천 참위님도 적당히 혼처 찾아서 결혼 좀 하시라 안 카니껴. 병사 시절에도 천 참위님보다 어른 아들도 다 장가가고 입대했는데, 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총각 아닙니껴?”

소만식의 말에 괜스레 천안석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나 소만식은 말만 그럴 뿐 천안석에게 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진위대에 입대해 함께 병사 생활을 하다 경인동정 때 함께 활약한 전우이니 소만식이 천안석을 따르는 마음이야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장기부 번화가에 가까운 소만식의 신혼집의 뒷채를 홀몸인 천안석에게 세를 주어 밥 한 끼라도 챙겨 줄려고 나서는 것을, 천안석이 뜯어말리고는 기병대 둔영에 가까운 곳에 작은 집을 빌렸다.

천안석의 생활은 그 뒤로 단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 사내 홀로 사는 살림이라 옆집 일본인 아주머니에게 품을 쳐 주고 밥을 얻어먹고, 가재도구라고는 이불에 요강, 그리고 책들 뿐이니 그야말로 아침 일찍 일어나 바로 출근하여 하루 종일 둔영에서 기병들을 조련시키는데 밤낮으로 매진한다.

이회의 중신도 여러 차례 마다하다가 얼떨결에 반쯤 강압에 못 이겨 동래의 어떤 반가 여식과 혼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덕분에 알뜰히 휴가까지 받아다가 본토에 한 번 더 다녀올 수 있었다.

그렇게 진서로 돌아와 장교로서 복무하며 늦장가까지 들게 되었으니 천안석은 하루하루가 그저 즐거운 노릇이었다.

1414년 계추(季秋)

조선국 전라도 목포부(木浦府).

오상복은 그날 하루 종일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크게 치를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목포에 있는 동영주상행계의 상관(商館)에 찾아드는 빈객을 접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항구로 나아가 배에 실리는 물품도 일일이 확인해야 됐다.

거기에 선원들의 품태도 하나하나 직접 점검하고, 배의 상태도 수검하고 하니 하루가 그냥 지나간 버린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다름이 아니라, 을유전역 직후 티무르측에서 앞으로의 교류를 위해 파견해 조선에 입국했던 바호디르로부터 제안받은 대로 그간 조선소를 짓고, 대양 무역을 준비했던 일 때문이었다.

경인동정 이래 일본의 화선 기술자를 다량 확보해 그 속도가 매우 빠르게 진척되어 생각보다 이르게 남양을 향해 무역에 나설 수 있게 되어 그 처녀 항해를 준비하느라 이리도 바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기한을 10년으로 잡고 거기에 군선의 건조까지 떠맡아 내심 조금 더 늦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오상복이었으나, 오히려 많은 양의 선박을 건조하다 보니 그 기술이 쌓여 발전이 있었고, 거기에 직접 선박을 운용하다 보니 문제점의 개선도 즉각 이루어지게 되었다.

부족한 바다 바깥의 경험 많은 외방 기술자들도 보다 손쉽게 구하게 되어 그 덕을 많이 보았으니 어찌 보면 운이 좋은 일일 수도 있으나 7년여 세월 끝에 이제 바다 바깥으로 나가 볼 욕심을 부리게 된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호디르도 아주 사역원의 교관 생활을 그만두고 짐을 꾸려 목포로 내려왔는데, 7여 년간 교육시킨 역관들의 실력이 이제 만만치 않아 조정에서도 바호디르의 사임을 말리지 않았다.

다만, 바호디르와 함께 조선에 입국했던 셰르조드베크는 아주 조선으로 귀화해서 서재백(徐材白)이라는 이름을 쓰며 아주 눌러 앉았는데, 사역원에도 계속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호디르에게는 원양 무역을 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고, 7년의 세월 동안 이제 조선말도 많이 늘어 대화를 나누는 데도 아무 지장이 없었기에, 바다로 나갈 배가 갖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짐을 싸서 목포로 내려온 것이다.

“오 대방님, 그거 계약 조금만 고치면 안 됩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1대 9는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는 아주 오상복을 쫓아다니며 계약을 고치자고 들러붙기 일쑤였다.

“무슨 어림도 없는 소리를. 안 됩니다. 우선은 그렇게 시작하고 예전에 이야기된 대로 무역의 횟수가 늘어나면 차츰 조정해 가도록 합시다.”

오상복은 그러나 전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세훈 덕분에 장사에 입문하여 이제는 조선에서 가장 거상으로 성장한 그였지만, 본인이 가진 상재 또한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계약에서 절대로 손해를 볼 오상복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처음 항해 때는 1대 9로 하기로 계약을 맺었지만 다음 항해부터는 언제 협의한다고 명시된 것이 없으니 이제 그 이야기나 조금 해 보도록 하지요.”

바호디르는 어차피 첫 항해는 경험 삼아 나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페르시아 상인의 상술을 익힌 몸이니 협상에서 으레 져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 좋습니다. 거기 관해서만 이야기해 봅시다.”

오상복도 사업상의 동료를 무턱대고 괄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지는 척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정도를 허락해 주려고 생각하고 바호디르의 보챔에 응해 주었다.

바호디르는 결국 초항(初航) 때의 계약 조건을 수정하지는 못했지만, 첫 항해의 결과가 좋으면 바로 다음번의 항해부터 3대 7의 이문 조정을 하기로 결국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계약 조건도 타결이 되고, 다음 문제는 어떤 항로로 기항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바로 파사로 들어갑시다. 예? 기다린 세월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꼭 바로 직항로를 찾고 말 겁니다.”

바호디르는 바로 페르시아까지 들어가는 항로를 개척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오상복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우리가 우리 배로 그런 대양을 항해한 관록이 없으니 처음부터는 좀 힘들지 않겠소? 우선 진서의 장기에 들린 다음, 영파를 거쳐, 안남으로 간 다음, 우선은 섬라까지 가도록 합시다. 아니면 유구쪽으로 해서 바로 안남으로 가는 항로도 괜찮소. 그런 다음에 이번에 그 가능성을 점쳐 보고 다음 항해에서 파사까지 가 보는 것이 어떻소이까?”

“음…….”

이것만큼은 오상복의 말이 옳았다. 처음부터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거기에 바호디르 자신도 항해술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 바가 없으니, 그저 만만하게 여겨서 될 일은 아니었다.

“우선은 목표를 섬라까지 합시다. 다만 생각보다 항해 여건이 좋다면 우리 쪽에서 가는 선장과 함께 의논하여 천축까지는 한 번 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소. 단순히 뱃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문이 달린 일이니 좀 신중해질 필요가 있소이다.”

“그렇게 합시다. 이건 솔직히 더 이상 우길 수가 없겠네요.”

이렇게 대강의 항로를 정하고, 우선 먼저 가져갈 품목으로 면직물을 위주로 하여 비단과 모시 등을 추가하고, 발화기, 비누 등의 공산품, 인삼, 도자기 등의 사치품을 넣고 장기로 건너가 일본도와 동, 구리 등도 추가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리고 바호디르와 함께 조선의 상인들도 일부 동승하여 처음 들리는 나라에서 각각 앞으로 지속적으로 교역할 만한 품목을 구해 오게 하였다.

이 항해에 나가게 될 선단은 교관선 10척으로 구성되었는데, 먼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에 일부 선척이 손실될 것도 고려하여 넉넉하게 잡은 것이 그 정도였다.

이것은 명나라의 정화함대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원양 항해의 경험이 일천한 조선에서는 불모지에서 싹을 틔워낸 업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곧 원양으로 나가는 상단이 출항의 준비가 끝나게 되자, 오상복은 직접 한성으로 올라가 세훈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관인을 내어 주길 청했다.

“합하, 이제 약속하신 허락을 내려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오상복이 고개를 조아리며 해외 무역을 허락해 주길 청했다.

그 조건으로 오상복이 군선의 건조를 떠맡았으니 세훈으로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장려하고 싶은 형편이니 더더욱 말릴 이유가 없었다.

“좋소이다. 진서의 각항이나 명나라의 영파로 가는 무역선과는 별도로 그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관허(官許)를 그간 내려준 전례가 없으니 그대가 처음이 되겠구려.”

“모두 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곧 사항을 준비하여 시행토록 할 터이니, 며칠만 기다리시오.”

세훈은 그간 생각만 해 두었던 문제를 하나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원양으로 나가는 배에는 특별히 태극에 사괘를 그린 깃발을 내걸도록 하였는데 태극기와 그 모양이 같은 것이었다.

세훈은 이 깃발로 하여금 원양으로 나가는 조선 선박이 관허를 받았다는 표시로 삼게 해서, 앞으로 국기로 자연스럽게 가져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는 국민국가라고 불릴 만한 것이 조선에서 태동하지 못했고, 따라서 일부 기술적인 발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15여 년 사이에 중세국가가 근대국가로 탈바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세훈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아직까지 국기니 국가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생소한 것이었고, 세훈은 이런 것으로 관례를 삼아 앞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할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니 비슷한 예도 있긴 했다. 옛 일본에서 무역선들이 주인(朱印)을 받아 내걸고 나갔던 것을 결국 그 국기로 삼게 된 것을 세훈은 알고 있었다.

이런 하나하나가 조금씩 조선의 민중들에게 익숙해지면, 앞으로 세훈 자신 하나만의 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을 향해 걸음을 내딛어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세훈은 이미 그런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원양을 향해하는 교관선 무역은 세훈이 주도한 관부의 작품이 아니라, 세훈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오상복과 나상, 그리고 티무르와 조선의 우호의 증표로 온 페르시아인 바호디르가 모두 추진한 일이었다.

오히려 세훈은 그 과정에서 군선을 얻어내는 성과까지 얻었다.

이렇게 자생적으로 이루어 가는 발전을 세훈은 아낌없이 지원해 주고 싶었다.

그 자신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으나, 그가 개입해서 영향을 끼침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이 달라지고, 그 흐름이 역사의 줄기를 점차 바꿔 나가고 있는 것이다.

세훈은 예부 아래에 외행사(外行司)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세 척 이상의 교관선을 확보한 상단, 혹은 상인이 원양 무역하기를 원하면 이곳에서 심사하여 관허를 내주도록 하고, 그 증표로 태극기를 선수에 매달게 하니, 이것이 그 관허의 증표로 삼는 것이었다.

다만 깃발을 아무나 매달 수도 있는 노릇이기에, 명나라의 감합처럼 따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도장을 찍고 반으로 나누어 관부와 상선에 각각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당장 급한 문제는 아니었는데, 조선업에 뛰어들어 교관선을 갖추고 있는 것이 오상복을 비롯한 나상뿐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선주는 오상복의 이름으로 대서한 나상의 상단이, 무역상은 바호디르의 이름으로 관부에서 감합(勘合)을 받고, 태극기를 내어 받아 처음으로 열 척의 선박에 그 깃발을 매달고 목포에서 출항하여 제주와 장기를 거쳐 바깥 바다로 나가는 항적(航跡)을 외행사에서 허락받아 그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었다.

당시 목포부에는 첫 부사였던 설경수가 호조참판을 제수받아 한성으로 올라가고, 동녕관 도위 김종서가 새 목포부사로 내려와 비금도의 염전과 목포의 조선소의 편의를 보아 주고 있었는데, 특별히 오상기가 그 무역을 도모하고자 세웠던 외국어 교육을 위한 학당인 습외어학원(習外語學院)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김종서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목포부에서 부지를 내어 주고 특별히 학당의 세금을 면제해 주는 한편, 오상기를 비롯한 나상에서는 그 교원과 학생을 뽑고 관리를 하는데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이 1기 졸업생들이 배출되어 이번 무역에도 동행하게 되었다.

바호디르가 직접 이곳에서 실력이 좋은 학생들을 특별히 선별해 데려갈 명단을 확정 지었고, 김종서는 직접 이들을 데려와 일일이 면접을 보았다.

나라에서 먼 바다로 처음 보내는 무역선인 만큼 관료인 김종서도 특별히 쓰지 않아도 좋을 일에 발 벗고 나서 돌보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동녕관 도위로 재직했던 경험이 십분 발휘되었는데, 조명 무역 및 여진과의 교역의 중심지였던 동녕관에서 몇 년간의 생활은 김종서의 안목을 넓혀 주고 국제 교역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확고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를 잘 살펴본 세훈이 특별히 김종서를 다시 목포로 내려 보낸 것은 앞으로 이 무역 관계에서 전문화된 관료를 키워내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 항구에 매어 두었던 열 척의 배가 닻을 올리고 바다를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소, 바호디르 공. 조선과 귀국을 위하여 앞으로 힘써 매진하여 주시오.”

김종서가 바호디르의 어깨를 붙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첫 출항이 잘되어야 그 다음도 순조로울 터였다. 선단을 이끌게 된 바호디르의 책임이 막중했던 것이다.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노릇이니, 나와 나상 또한 바호디르 공에게 모든 것을 걸고 기다리는 것이오. 부디 좋은 성과를 내어 함께 번창합시다.”

오상복도 김종서의 마음과 한 가지였다.

여러 상인들과 유지들의 독려 속에서 출발하게 된 바호디르의 마음도 책임감과 설레임으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조선에 온 지 7년 만에 떠나는 바깥세상이었다. 그동안 기다린 만큼 무언가 이루어내고 말겠다는 마음가짐이 충전했으나, 쉽지 않은 초항길이니 만큼 그 부담감도 사실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바호디르는 마음을 다잡고 이 좋은 기회를 살려서 조선과 다른 나라들을 거쳐, 멀리 페르시아까지 이르는 무역의 선봉에 선 거상이 되리라 굳게 다짐했다.

“제가 반드시 이 열 척의 배에 보화를 가득 채워 돌아오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저와 이 선단을 믿고 마음 편히 기다려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고 오겠습니다.”

이렇게 바호디르를 그 단장으로 하고, 열 척의 교관선과 칠백여 명의 상인 및 수부로 구성된 나상의 첫 무역 선단이 서력 1413년, 갑자로 계사(癸巳)년 음력 10월 7일에 목포를 출발하여 첫 기항지인 진서도독부의 기주로 향했다.

이 바호디르 선단이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에는 정화의 제4차 남해 원정단이 영파를 떠나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를 그 목표로 출범했다.

이 정화의 원정단과 비교해 아직 조선의 선단은 초라할지 모르나, 그 의기만큼은 정화의 대선단 못지않았으니, 명에 이어서 조선 또한 먼 바다로 나가서 교역을 하는 항행 무역의 전성기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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