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주마가편(走馬加鞭)
「남만(南蠻)은 나라의 정남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3개월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일본국(日本國)은 나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5일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중국은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20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南蠻在國正南, 順風則可三月乃到, 日本國在國東南, 順風則可五日乃到, 中原在國西, 順風則可二十日乃到云.」
―안주렴(安珠廉), 해동풍세기(海東風歲記) 중
1415년 맹춘(孟春)
조선국 한성부.
금상(今上) 이석근이 급환으로 병중에 누운 것은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갑신반정의 와중에 세훈에 의하여 왕위에 옹립되어 왕좌에 앉아 있기가 어언 10여 년, 그러나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처첩을 거느리고 내전에 숨어 기름진 음식과 좋은 술을 탐하는 것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대로 좋은 일이었으나, 나이가 차고도 그런 생활이 계속되니 몸이 결국 견디어내지를 못하고 엎어지고야 만 것이다.
겨울에 찬바람이 들기 시작하자 궁중 여관의 처소로 들려고 준비하다 돌계단에 엎어져 졸중(卒中)하고 말았으니, 자리에 누워서 의식이 없는 것이 어언 두 달째였다.
으레 국왕의 병중이라면 국사가 어지러워질까 두려워 신료들이 전전긍긍하고, 내의원은 바쁘기 짝이 없으며, 혹여 대통이 끊어질까 소문이 무성하게 마련인데도, 이 비만한 국왕의 침전에는 나인들만 오고 가며 수발을 볼 뿐, 아무도 찾지 않고, 왕의 신세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 궁중에서 오가질 않았다.
이렇게 외롭게 견디던 왕은 결국 봄이 오자 오지 않을 길로 건너가고 마니, 뒤늦게 찾은 어의가 명주솜을 코에 대어 숨이 오가지 않은 것을 확인하니, 승하(昇遐)한 것이 언젠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근신 가족들이 지켜보지도 않는 외로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나라의 임금이었던지라 국장(國葬)이란 것을 준비해야 할 일이었다.
근전 내관이 왕의 의복을 들고 내전 지붕으로 올라가 초혼(招魂)하나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도성에 나팔이 길게 울리고 백관(百官)이 입조하여 왕의 붕어를 알리는 고지를 듣고 땅에 엎드려 눈물을 짜내나, 가는 길에 마땅한 치적도 없고 꼭두각시 같은 왕에게 누가 진정히 눈물을 흘려 줄 리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니, 국장도감은 장례를 도맡아 하는 임시 기관이요, 산릉도감은 왕릉의 축조를 맡은 기관이었다.
이렇게 국장이 준비되어 90일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들어가나, 조정의 중론이나 저잣거리의 민심이나 말할 것 없이 이 불쌍한 왕의 장례를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있음은 달리 말할 것이 없었다.
어쨌든 왕의 후사를 옹립해야 했는데 여태껏 세자를 책봉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비변사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상주하여 섭정공에게 가져가니, 세훈이 이를 들여다보고는 한참을 고민하다 말한다.
“임금께서 존체 아래 자제가 일곱이시고, 당연히 그 맏이인 신의대군(愼宜大君)께서 나이가 차시고 그 품위가 마땅하니 국사를 이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소.”
좌중에서도 가히 반론이 없다.
다만, 신료들이 물러가고 이제는 공조판서에서 물러나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최해산만이 남았다가 은근히 세훈에게 물어본다.
“조종(祖宗)을 폐하고 이제 합하께서 보위에 오르셔도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고려가 문을 닫은 이래로 조선이 들어서 그간 한 일이라고는 나라 안으로 갈라져 싸우고 바깥으로 내딛어 싸운 일밖에 없으니 백성의 삶이 그간 좋아진 것은 모두 섭정공 합하와 백관 대신들의 공입니다. 민심이 이미 왕실을 떠났으니 이제 적당히 구실을 들어 반정(反正)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은 비단 최해산의 것만은 아니었다.
갑신반정 이전부터 함께해 온 탐라 출신의 신료들은 이미 예전부터 공공연히 세훈의 옹립을 물밑에서 주장해 왔었고, 왕실에 종사하는 대신들도 이미 대세를 판독하여 왕성(王姓)을 갈음하는 문제에 대해서 대놓고 논하지는 않으나, 갑론을박하며 대체로는 시류가 그러하다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세훈이 보기에는 아직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양위가 아니라 왕의 죽음을 시기로 잡아 전주 이씨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기에는 보기에 좋지 않았다.
거기에 지난 갑신반정 이래 많은 구신들이 흩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조정에는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일조한 신료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각기 취한 입장이 다를 터였으나, 조선을 닫고 다시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워 일조할지는 과연 의문인 일이었다.
무엇보다 세훈 자신이 아직까지는 이 일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미 조선의 모든 내정이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들고 나가지를 못했다.
이 섭정공의 자리만 해도 일을 도모하기는 훨씬 쉬웠다. 번잡스러운 왕조의 의례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원래는 왕권으로 인하여 나와야 할 일이라, 세훈이 추진하는 일에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모양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연유로 며칠이 지나지 않아 최해산이 비밀리에 사람을 모으니, 탐라계의 신료들을 비롯하여 세훈의 휘하에서 공후(公侯)의 작위를 받고 복배하길 마다하지 않는 궁중 신료들이 모이니, 문무 막론하고 마흔 명쯤 되는 숫자였다.
고봉지, 고상온, 고상경 등의 고씨 일족은 물론이거니와 양은계 등의 탐라 구신들은 다 모였고 송거신, 조사의, 황희, 심온, 조홍, 안정재, 거기에 국상을 맞아 목포에서 먼 길을 등청(登廳)한 김종서 등이었다.
이른바 한성의 저잣거리에서 세훈의 거취를 따라 경행당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섭정공께서는 차제에 왕위에 오르실 생각은 없으신 듯하외다.”
최해산이 주억거리며 말을 꺼내니 다들 침묵이다. 왕성을 바꾸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지금은 과히 좋지 않소이다. 선양을 받아도 잡음이 많을 터인데, 금상의 죽음을 핑계 삼아 왕위를 바꾸려 든다면 이래저래 반대할 족속들이 치기 좋게 나올 터요.”
황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좌중의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에 심왕(瀋王)의 왕작을 보유케만 하고 봉작(封爵)하지는 못하게 해 두었었는데, 이번에 신의대군께서 왕통을 이으신다면, 섭정공 합하께는 새롭게 조정이 열릴 때 우선 이 심왕의 작위를 봉작받게 하시어 품위를 공에서 왕으로 높이게 주청하는 것이 어떻소?”
송거신이 일전의 심왕의 자리를 세훈에게 내리게 하는 것이 어떻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 일은 그것대로 문제가 있소이다. 명국에서는 이 왕작을 사직(社稷)에 봉호(封號)만 하고 습작치 못하게 하기로 하였으니, 먼저 이 심왕의 자리를 올리려면 이 문제를 처결해야 할 것이고, 두 번째로 좁은 나라 안에 왕작이 둘이니 위로는 밖으로 가져가기 우스운 일이오, 안으로는 주상과 심왕의 위계가 어지러울 수 있으니 감히 고려의 옛일을 따라가지 않겠냐고 누가 장담하겠소.”
심온이 말하니, 이것도 그대로 타당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굳이 그런 전례를 들어 피하지는 않아도 좋을 일이오. 안으로 심왕을 칭하고 이를 명에는 사절을 보내어 습작(襲爵)하지는 않고 다만 당대(當代)에 한하여 그 공을 기려 위봉(爲封)하겠다 하면 명에서도 과히 트집을 잡지 못할 것이고, 유구국왕이니 하는 외번(外蕃)의 왕들도 신하됨을 청하며 아조에 조신을 보내어 참례하니, 심왕의 위계를 국왕에 두지 않고 번왕(藩王)이라 하면 감히 그 위계를 문제 삼을 이는 없을 것이오. 이로서 초석을 삼아 두면 훗날 조정의 산만함을 이유로 들어 합하께서 양위받으시는데도 문제가 도리어 없을 줄 압니다.”
문제를 정리하고 나온 것은 조사의였다.
갑신반정 때에 동북면에서 거병하여 나라를 삼분하였다가, 이후 명나라의 개입이 있을 때에 세훈에게 투항하여 안주성 등에서 군공을 세워 영흥공(永興公)에 봉작되고 지금은 좌정승의 자리에 올라 그 위신이 높아져 있었다.
조사의의 말대로만 처결하면 작위의 문제는 일단은 해결될 듯싶었다. 좌중의 사람들이 연판장을 돌려 앞으로도 뜻을 함께하기로 하고, 이것을 세훈에게 전달하니 세훈도 심왕의 자리를 받아들이기로 가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세훈의 입장에서는 불감청고소원인즉, 예전에도 심왕의 자리는 세훈도 은근히 가지고 싶었던 바였다.
이렇게 해서 국상이 치러지는 동안 새롭게 보위에 오를 이로 이석근의 장남 신의대군 이인(李仁)을 삼고, 국상이 끝나자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열어 하례를 올렸다.
승하한 임금 이석근에게는 목종(穆宗)의 묘호가 올라가고,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의 시호를 올리니, 사적(史籍)에 올라가기를 목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이다.
이로써 이석근은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에 이어 조선조에서 두 번째로 묘호를 받은 왕이 되었다.
아직도 개성의 이방과가 태상왕이 되어 멀쩡히 살아 있기 때문이었고, 폐주(廢主) 또한 존호가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나, 어찌 되었든 명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탓이었다.
이렇게 불운한 조선의 4대 왕 목종은 세상을 등지고 그 아들이 왕위를 이어 자리에 오르니, 이것이 1415년 음력 3월의 일이다.
이때 조정에서 논박 끝에 즉위하는 차에 섭정공으로 하여금 심왕의 작위를 내리게 하고, 더불어 경상도와 평안도의 식읍 7,000호를 내리니 가히 세훈의 위세가 갈수록 등등한 일이었다.
1415년 계춘(季春)
믈라카 술탄국 믈라카.
예전 남양(南洋)의 바다에는 스리비자야라 불리던 왕국이 번성을 했었다.
수세기에 걸쳐 이 일대에서 강력한 국가로 군림하던 이 나라는, 결국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새롭게 부상하는 마자파히트 왕국의 공격에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스리비자야의 왕자였던 파라메스와라는 이 마자파히트 왕국의 침공을 피해 말레이 반도의 일대를 전전하다가, 1402년에 이르러서 나라를 개국했다.
해협을 점유한 믈라카의 새로운 왕 파라메스와라는 인근의 팔렘방 등과 무역 요충지로서의 경쟁에 들어갔고, 이슬람 상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수마트라 북부의 이슬람 왕조였던 파사이의 공주를 신부로 맞이하여 혼인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즘에 이르러 명나라 정화의 함대가 말라카를 종종 방문하기 시작했고, 이 위세를 등에 업고자 파라메스와라는 명나라에 조공하고 왕으로도 책봉받기를 청하는 등, 마자파히트를 비롯한 주변국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른바 명조실록에 전하는 만랄가(滿剌加)국왕 배리미소랄(拜里迷蘇剌)이 파라메스와라인 것이다.
이렇게 나라의 초석을 쌓고 나라를 존치시키기 위해 번려를 거듭하던 파라메스와라도 지난해 결국 세상을 뜨고, 메가트 이스칸다르 샤(Megat Iskandar Shah)가 술탄의 자리를 이어 집정(執政)하고 있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화의 함대가 다시 한 번 믈라카에 들러 물산을 교역하고 조공품을 받아서 서쪽 바다로 넘어갔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북쪽에서 다른 함대가 내려와서 믈라카에 입항하기를 청했다.
그 함대의 규모는 정화의 그것에 비하면 조촐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10척의 큰 배가 믈라카의 앞바다에서 입항을 기다리고 돛을 내린 모습은 나름대로 장관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무역 거점으로서 명맥을 잇는 믈라카의 상황에 비추어 이들 함대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명확해지면 입항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술탄 이스칸다르 샤는 이들의 입항 사유를 확인하고자 사절을 보내어 배에서 책임자를 만나게 한 뒤, 곧 입항을 허가하고 접견을 허락했다.
이 함대라는 것은 다름 아닌, 지난 늦은 가을에 조선을 떠나 남해의 각국을 방문하며 교역로를 트고 있던 바호디르의 상단이었다.
“중국에서 오셨소?”
이스칸다르 샤가 처음 배가 들어와 믈라카의 항구에 내린 사람들을 보고 물은 것은 중국인이냐는 말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복색이 상당히 유사하니 그럴만도 한 일이었다. 이 근방과 믈라카 해협 서쪽의 국가들은 힌두계 국가가 아니면 이슬람 제국(諸國)들이니 명나라 사람과 상당히 닮은 복색을 하고 있는 이들을 오해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닙니다. 우리는 조선에서 왔습니다.”
바호디르가 나서서 아랍어로 조아렸다.
술탄의 역관이 나서서 그 말을 통역해 주자, 이스칸다르 샤가 다시 물었다.
“조선이라는 곳은 어디 있는 나라요?”
“중국의 동쪽에 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해외와 교역하는 것을 장려하고 서로 간의 우호를 돈독히 하며, 물산을 풍부히 하고자 이 먼 길을 상인들이 오고 가는 것을 허락했나이다.”
“그대는 서쪽 사람처럼 보이는데, 어찌하여 그 나라의 명을 받들어 가 있소?”
“저는 원래 페르시아 사람으로 티무르의 궁정에서 봉직하고 있었는데, 일전에 명나라와 티무르 사이에 전란이 있어 그곳에 종군하였던 중에 때마침 명나라 황도(皇都)에 들어와 있던 조선의 사신들을 만나 그곳으로 가서 일신을 도모하게 되었나이다. 이에 고향으로 가는 뱃길을 개척하고자 조선의 상인들에게 지원을 받아 먼 바닷길을 나서게 되었으니, 저를 빼고는 다 조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도 무슬림인가?”
“예, 유일신의 말씀을 받드는 사해(四海)의 신도들 중 하나입니다.”
바호디르의 말에 이스칸다르 샤의 안색이 밝아졌다.
“반갑소. 같은 말씀을 모시는 형제로서 그대와 그대의 권속들을 환영하오. 먼 동쪽 바다에도 알라의 영광이 있기를.”
이렇게 믈라카의 궁중에 들어가 극진한 환대를 받게 된 바호디르는 이내 이스칸다르 샤와 친분을 도탑게 하고 교역을 청하니, 이스칸다르 샤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이 뱃길을 따라 정기적으로 상단이 오고 갈 수 있도록 항구변에 상관(商館)을 하나 짓고 우리 사람 수십 명 정도가 거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소.”
바호디르가 건네준 면포와 발화기 등을 보고 그 품질에 감탄하고 있던 이스칸다르 샤는 앞으로 그 교역이 번창하기를 내심 갈망하게 되었다.
이런 마당에 믈라카 안에 조선인을 거류시켜 그 교역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오는 길에 해적들이 가끔 출몰하여 격퇴는 하였으나, 앞으로 오고 감에 있어서 훼방을 하는 무리들이니 어찌 물리쳐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부끄러운 말이나 이 나라가 세워진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바다 먼 곳까지 영향력이 미치지 않소. 그들은 오랑 라우트[海民]라 불리는 토민(土民)들로 해적질로 생계를 유지하니, 함부로 어찌할 수가 없소. 일전에 중국의 함대가 들어와 이 토민들을 한 번 격파하고서는 잠잠해졌는데 근년 들어 다시 준동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소.”
“그렇다면 혹여 우리 상선이 오고 가는데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이 땅 남쪽 끝에 있는 섬에 요새를 하나 건설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바호디르의 물음에 이스칸다르 샤는 곤란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섬이라면 일전 선대왕 때에 마자파히트에 의해 쫓겨나 우리 힘이 닿지 않는 곳이 되었소. 지금은 그 마자파히트의 세력이 물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나, 감히 추천하고 싶지는 않소. 다만 귀공들의 능력이 되어 그 땅을 점유할 수 있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혹여 그렇게 되거든 우리 식읍이 지척이니 밀접하게 지내면 우리 병사들을 보내어 그 호위를 해 줄 의향은 있소.”
“그렇다면 돌아가는 길에 섬에 사람을 내려 그곳에 주둔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이 잘되면 인편으로 사절을 보낼 터이니, 부디 몇몇의 병사를 내어 조금만 돌봐 주십시오.”
“어렵지 않소.”
그 섬이란 테마세크, 혹은 싱가푸라라고 불리는 섬으로 테마세크는 말레이어로 바다 마을, 싱가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읍(獅子邑)이라는 뜻이었다.
그중에 테마세크라는 이름이 그 연원이 좀 더 오래된 것이었는데, 싱가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섬이었다.
이스칸다르 샤의 아버지이자 믈라카 술탄국을 건국한 파라메스와라는 한때 이곳 싱가푸라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는데, 주변 세력과의 거듭된 항쟁 와중에 지금은 딱히 주인 없는 땅처럼 되어 오랑 라우트의 해적들만이 출몰하는 애매한 땅이 되어 있었다.
바호디르는 이곳 믈라카로 오는 길에 해적들과 여러 번 조우하면서 그 연안에 있는 이 섬을 눈여겨 봐 두었었는데, 해협을 마주한 반도의 끝에 자리한 요충지인지라, 앞으로 상행의 거점으로 꼭 확보해 두고 싶은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이스칸다르 샤가 오히려 능력이 된다면 마음껏 하라고 나오니, 오히려 안심이 되는 바호디르였다. 조선군에서 쓰는 보총은 민간에 불하가 되지 않아 구할 수 없어 상단을 보총으로 무장시킬 수는 없었으나, 원양 항해를 나가는 선적에 한해 소포(小砲)와 화승총(火繩銃)으로는 무장을 허락해, 해적쯤을 토벌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앞으로는 어디까지 갈 생각이오? 중국의 함대는 서쪽 먼 곳까지 간다고 출항했소만.”
“원래는 이쯤에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아직 선원들이 건강하고 배의 상태도 쓸 만하니 인도까지 가 볼 생각입니다.”
“부디 오는 길에도 꼭 들러 주시오. 이렇게 동쪽의 귀인을 맞이할 수 있었으니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 돈독히 합시다.”
이스칸다르 샤와의 거래가 꽤 만족스럽게 끝나고, 바호디르는 상단을 이끌고 다시 서북쪽으로 갈피를 잡아 나섰다.
수마트라 섬 서북쪽 끝에 위치한 파사이에 들러 다시 한 번 무역을 하고는 서쪽으로 항로를 잡아 석란(錫蘭, 스리랑카)으로 향했다. 석란은 당시 코테 왕조에 의하여 통일되어 있었는데, 새롭게 그 도읍으로 정비된 스리 자야와르다나푸라 코테(Sri Jayawardanapura Kotte)의 항구에 들러 무역을 하기를 청하고 국왕인 파라크라마바후를 알현하고 무역을 하기를 청하고, 다시 항로를 인도의 서해안으로 잡아 코지코드(Kozhikode)로 향했다.
이곳은 인도양 무역의 정점에 있는 항구로서 향료, 염료, 장신구, 직물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곳이었다.
아랍인들은 이곳을 칼라쿠트라 불렀고, 중국에서는 고리(古里)라 불렀으니, 기존 역사에서는 후일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캘리컷으로 알려지게 된 도시였다.
이미 정화의 원정단은 이곳을 거쳐 호르무즈로 향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는데, 바호디르는 고향까지 이제 멀지 않은 거리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첫 항해에서 무리하지 않기로 조선의 상단들과 약조한 대로 아쉬운 대로 이곳 코지코드에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바호디르는 아쉬운 대로 코지코드의 토후(土侯)에게 조선 상인 네 명을 남겨 상관의 기능을 하게 만드니, 이것이 바로 조선 코지코드 상단[古里商團]의 기원이다.
이곳에 남은 조선 상인들 중 둘은 목포에 세워졌던 습외어학원 출신의 재자(才子)들로, 이미 페르시아어를 익혀 이곳 상인들과의 의사소통이 무난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코지코드의 궁중에 남겨져 이곳 케랄라 지역 일대에서 통용되는 말라얄람어를 익히고, 더불어 인도 각지의 언어를 익히기 시작하니, 다음 상행이 올 때에는 이들로 하여금 통역을 직접적으로 삼고, 일부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나상의 습외어학원에서 교역어를 추가하여 가르치게 될 터였다.
바호디르는 코지코드에 들어온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과 접촉해 고국의 소식도 듣고 유리 제품, 양탄자, 모피, 향신료 등 조선에서 팔릴 만한 물건을 적재하고 싣고 온 방적기로 뽑아낸 면포, 발화기, 비누, 비단, 도자기 등을 모두 처분했다.
다만 인삼은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는데, 명나라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인삼의 약효에 대해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큰 이문을 남기고 조선으로 다시 항로를 잡아 석란을 거쳐 믈라카에 들러 다시 여기에 이십여 명의 젊은 상인들을 남겨 말레이어를 배우게 하고 교섭을 위한 상관도 세우니, 이른바 믈라카 상관[滿剌伽商館]이다.
이곳에서 바호디르의 상단은 정화 함대의 분견대(分遣隊)와 마주치게 되었다.
본대는 수마트라 섬의 토후국들에 내정 개입을 하며 군사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이곳 믈라카로는 돌아갈 항로의 식료 등을 구하러 일부의 함대만 들어와 있었는데, 때마침 이슬람교도이자 정화의 심복의로서, 페르시아어 통역관을 지낸 마환(馬歡)이 그 책임자로 와 있었다.
마환은 바호디르를 보자 크게 반기며 맞아 주었는데, 같은 이슬람교도에 유창한 페르시아어로 대화가 가능하자 그것으로 기쁘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조선에서 오셨다고 하셨소?”
“그곳에서 상행을 맡고 있소.”
“먼 길 고로가 많으시오. 나도 황상(皇上) 폐하의 명령으로 이번에 정화 제독을 수행하여 먼 나라를 돌아오는 길이오. 파사까지도 이르러서 각종 진품을 조공받고 기린까지 실어다 오는 길이라오. 하여간 조선의 상인들이 이 먼 곳까지 나온다니 대단한 일이구려. 반갑소이다.”
다행히도 바호디르가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마환은 조선의 상단을 경계하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보급을 위해 분견하여 나눈 함대가 바호디르가 끌고 온 조선 상단의 2배 규모에 이를 정도니, 본대의 규모는 짐작하기 힘들 정도일 것이었다.
그 정도 되는 함대이니, 이런 조그만 조선의 원양 함대는 그저 이 대양을 오고 가는 여러 무역 선단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보일 것이었다.
거기에 조공 관계를 수립하고 황제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완전무장하고 바다를 횡행하며 그 위세를 세우는 정화의 함대와는 달리, 조선의 상단은 순수하게 무역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목적이고 사실상 관의 협력을 받았다고는 하나 사상(私商)으로 분류할 만한 것이므로 정화 함대에 있어서 크게 경계하거나 할 대상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껄끄러울 만한 것이 있다면 일전 을유전역 때 충돌한 앙금으로 대할까 싶었던 것이었으나, 이미 그 세월도 십여 년 가까이 흘러 불식되고 있으니 마환의 표정에서는 그런 거리낌을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곧 보급품을 가지고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출항해야 하오. 언제 다시 한 번 볼 날이 있으면 뵙기를 바라겠소.”
마환이 믈라카를 떠나가고, 열흘을 더 머문 조선의 상단은 이제 다시 믈라카 해협의 해적들을 소탕하며 남쪽의 끝에 이르러 싱가푸라의 섬 위에다가 목책(木柵)으로 된 주둔지를 세웠다.
배가 접근할 수 있을 만한 간단한 부두 시설도 만들고 백여 명의 선원을 내려 화승총으로 무장하게 하고는 보급품을 주고, 믈라카 상관으로 연락하게 하여 믈라카 술탄의 병력 일부를 약속했던 대로 조원(助援)받았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믈라카의 교역 거점과 연결하며 보급을 받는데 지장 없도록 조취한 뒤에, 다시 안남을 거쳐 유구를 통해 진서도독부의 기주로 들렀다 목포로 귀항하는 항로를 세우고 출발하였다.
항로 중에 150여 명의 인명 손실도 있었고, 일부 향신료는 취급의 잘못으로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습기를 먹어 못 쓰게 된 것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는 성공하여 1415년 음력 9월 거의 1년여 만에 목포에 바호디르의 함대가 귀항하였을 때는 그 성공담이 팔도에 자자할 정도가 되었다.
나라에서는 특별히 이 바호디르를 불러다가 치하하고, 그 항로를 지도로 특별히 편수(編修)하여 서고에 존치하게 하고, 항해 기록도 엄정히 편수하여 남영해운기(南瀛海運記)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나상에서도 그 성공에 고무되어 추가로 건조한 열 척의 교관선을 더 보태어 다음 항해는 스무 척의 교관선을 꾸려서 페르시아까지 갈 계획을 짜니, 나상의 오상복과 바호디르의 꿈이 이른바 이루어지려 하고 있었다.
1415년
비잔티움력(曆) 6924년 중하(仲夏)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가지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의 열기에 사람들은 밖으로 나서지 않고,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여름이 어서 물러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마르마라해와 마주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외항(外港) 중 하나인 엘레우테리오스 항구에 연한 황소 광장의 주위로는 동로마 제국의 옛 귀족들의 사저(私邸)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십자군전쟁 이래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전성기의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문에 길거리는 휑하게 비어 있고, 버려진 저택들에는 엉겅퀴만이 무성히 자라 마치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성읍마냥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에서 가장 빛나는 왕관을 내려놓지는 않고 있었다. 제국은 황혼으로 접어들고 있었으나, 오히려 예술과 학문은 번창하여 비록 배를 곪을지언정 번뜩이는 예기(銳氣)만은 잃지 않고 신학과 철학을 논하고, 성화(聖畵)를 장식하며 천 년 로마제국의 마지막 유산을 꽃피워 내고 있었다.
이 근방에 저명한 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의 조그만 저택이 있었는데, 환갑에 이른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지적 활동을 하고 있는 노장이었다.
그는 남부의 모리아스에서 잠시 황실에 봉공(奉公)하기 위하여 돌아와 있던 참이었는데, 그 저택의 별채에 기이한 복장의 인물이 머물고 있었다.
얼핏 보면 타타르인 같은 외모를 가져 티무르가 보낸 사람이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긴 머리를 쪽을 지듯이 위로 틀어 올리고 신기한 관(冠)을 쓰고, 소매가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티무르의 권속들과는 매우 달랐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일전 명나라와의 교전 이후 바호디르 등과 함께 교환되어 티무르 궁정으로 파견되었던 조선 사람 한학정(韓學正)이었다.
그가 조선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이 머나먼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흘러오게 된 사연은 복잡했다.
처음에 그와 함께 갔던 김제(金堤)는 티무르군의 회군 행로 중에 그만 열병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고, 천산(天山) 아래에 묻히고 말았다. 결국 홀로 남은 그는 풍속도 다른 사마르칸트에서 티무르의 권위를 높여 주는 장식품처럼 여겨지며 궁중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내 얼마 가지 않아 티무르가 병사하고 그 아들과 손자들이 권력 투쟁에 돌입하면서 부평초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티무르의 가장 총애받았던 아들인 샤로흐를 따라 종군했었는데, 그만 북쪽의 카라 코윤루[黑羊朝]의 바그다드 침공 때 포로가 되어 카라 코윤루의 카라 유수프(Qara Yusuf)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에 노예로 팔려 갔다.
투르크 상인들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팔려 온 그는 우연히 제네바의 호상(豪商) 프란체스코 만디니(Francesco Mandini)에게 사들여졌다가 그와 교류하던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의 눈에 띄어 자유의 몸이 된 뒤 줄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게미스토스 거관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한학정은 원래 몽골어 역관(譯官)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한학(漢學)과 몽학(蒙學)을 익히고 유교 전적들도 깊게 공부했었는데, 통역을 위해 명나라로 들어갔다가 고봉지에 의해 먼 서역까지 보내지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학식이 깊고 언어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그였기에 티무르의 궁정에서 차가타이어와 페르시아어, 아랍어를 두루 익히고 노예 신분으로 전전하는 동안에도 언어에 대해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었는데, 게미스토스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되어 그의 집에서 손님으로 머물게 된 뒤에는 그리스어도 익히기 시작해 이제는 그 대화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게미스토스는 이 총명한 청년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날도 황제를 친전하고 돌아온 게미스토스는 이 한학정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먼 동쪽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내게도 항상 즐겁소. 어떻게 보면 플라톤이 말한 철인국(哲人國)이 진정 그대의 나라인 듯싶소. 철학을 깊게 공부한 관료들이 그 원리에 입각하여 국가를 운영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신선하구려.”
“저는 아직도 그 철학(哲學)이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감이 잡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유교라는 것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통치하고 백성을 구제할 것인지를 강구하는 학문임에는 틀림없지요. 거기에 주자학이라 불리는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은 사람의 본성과 천지(天地)의 운행을 깊이 공부하기도 하니 그 철학이란 것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재미있소. 그대의 나라는 그 강성한 중국과 전쟁을 했다고 했지 않소?”
“예. 나라에 정변이 있어서 도망친 옛 왕이 중국을 끌어들여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군사를 다루는 제도를 일신하고 새롭게 화약을 쓰는 병기들이 많이 보급되어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만, 중국은 강력한 국가라 더 이상 확전은 하지 않고 화의를 나누기 위해 사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티무르의 왕자와 서로 젊은 사신을 각각의 나라로 보내기로 하여 제가 티무르의 궁중으로 보내지게 되었지요.”
“하여간 이 먼 나라까지 온 것이 그대에겐 불행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정말 귀중한 만남이 되었소. 이렇게 빨리 엘라스[希臘, 그리스]의 풍속을 익히고 말 또한 유창하니 그대의 총명함이 정말로 뛰어나오.”
게미스토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들어 한학정은 그리스 정교의 신학도 공부하는 틈틈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古典)도 게미스토스의 지도로 익히기 시작했는데, 그 성취와 이해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한학정으로서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만리타향에서 자신을 돌봐 주는 게미스토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꽤나 재미가 붙어서 혼자서도 서책과 씨름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더운 여름을 나고 있었다.
“저도 이국의 학문을 익히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이 서쪽에도 뛰어난 성현(聖賢)들이 주옥과 같은 말들을 남기고 서로의 학문을 두고 씨름한 것이, 마치 중국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문명이 번성하면 많은 뛰어난 현자들이 나오게 마련이오. 옛 사람들의 말은 언제고 귀담아 들을 만하지. 혹시 보다 깊게 공부를 해 볼 생각이 있소?”
갑작스러운 게미스토스의 물음에 한학정은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게미스토스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렇게 가르침을 주시니 기꺼이 배우고 있습니다만, 어떤 말씀이신지?”
“그대가 괜찮다면 내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에 학생으로 들어가길 추천하고 싶소. 나는 곧 책을 마무리 지을 겸 모리아스로 돌아갈 생각이니, 그대만 괜찮다면 이곳의 내 집에 남아서 유숙하며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소. 생활비는 내가 넉넉히 보내 줄 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대학에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도 많은 이들이 공부하러 오니 다양한 사람들과도 교류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신경 써 주신다면, 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감사히 은혜를 받아들여 공부를 해서 앞으로 게미스토스 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나라로는 이제 돌아갈 길이 요원하니, 이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렇게 해서 한학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한때 전란 중에 문을 닫기도 했던 이 명성 높은 대학은 13세기 말 유능한 재상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에 의해 재건되어 역사가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등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동로마제국 말기의 학문의 융성을 이끌었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한창 르네상스를 맞아 번성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학문도 들여와 가르치고 있었는데, 비록 제국은 이제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었지만, 학문만큼은 아직까지 서양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곳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김에 한학정은 동방정교의 세례를 받고 요안네스라는 세례명을 받아 요안네스 안노스(Joannes Hannos)라고 새롭게 이름을 칭했는데, 안노스란 성은 다름 아닌 그의 본성인 한(韓)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한학정은 대학에서 고전철학과 법학을 공부하며, 신학 강좌도 틈틈이 들었다.
동로마제국의 학문은 신학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천 년에 걸쳐서 동방정교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신학 논쟁을 거듭해 왔는데, 한학정은 그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새롭게 어울리게 된 이탈리아와 아라곤 왕국 출신의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틈틈이 금각만 건너편의 제노바인 거류지나 항구에 있는 남프랑스, 이탈리아, 카탈루냐(아라곤 왕국)의 상인들과도 교분을 맺으며 그들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는데 주력했다.
본래 학자로서의 천성이 있었던 한학정이기에, 유목민적인 성향이 팽배했던 티무르의 궁정에 머물 때보다, 이곳에서의 삶이 그에게 활력을 주고 있었는데 때 없이 도지는 고향 조선에 대한 향수를 제외하고는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저물어 가는 제국의 수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예전의 거대한 도성은 허물어져 가고 옛 유산들이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쓸쓸해져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10만의 인구가 상주하는 도시였고, 항구에는 여전히 동과 서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무역을 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런 곳에서 학자와 학생들과 교류하며 새롭게 접한 학문을 익히고 그가 조선에 있을 때 공부했던 동방의 학문도 소개하면서, 사방에서 모여든 풍물을 구경하는 일은 한학정으로 하여금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름을 잊게 해 줄 수 있었다.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품에 지니고 있던 논어(論語)와 춘추(春秋)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쉽지는 않은 일이었으나 해가 바뀔 무렵에는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일 정도가 되고 있었다.
이렇게 그로서는 조선으로 돌아갈 길을 단념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며 그의 재능을 꽃피우려 하고 있었으나, 이때쯤에 이미 바호디르의 상단이 인도에 도착하여 서방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으니, 언젠가 그가 조선에 귀환할 길이 열리는 것도 어찌 보면 멀기 만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몰랐다.
1416년
명(明) 영락(永樂) 14년 중춘(仲春)
대명국(大明國) 직례(直隷) 응천부(應天府).
영락제 치세하의 명나라는 번영하고 있었다. 조선 및 티무르와의 일전 뒤에 잠시 영락제는 국내 문제에 관심을 돌리는 듯했으나, 명나라의 강계(疆界)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영락제는 연왕(燕王) 시절, 북쪽의 초원 지대와 가까운 북평(北平)에서 기거하면서 비록 중원에선 밀려 나갔지만 아직까지 강성한 몽골과 바로 지척의 요동 이동으로 넓게 퍼져 있는 여진족의 실질적인 위협을 피부로 느꼈다.
이런 환경이 그로 하여금 황제가 된 뒤에도, 압도적인 무력으로 변경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물론 내부의 문제를 밖으로 투사하여 진정시키려는 이유도 있었다. 조카로부터 황제의 위를 찬탈하여 용좌에 올랐기에 내부에서 알게 모르게 나오는 목소리를 불식할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북방의 문제를 핑계 삼아 도읍도 근거지였던 북평으로 옮기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북평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도읍의 축조가 10여 년째 계속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많은 돈을 들여 대운하를 개보수하는 데도 많은 이들의 노력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여전히 외부 문제에 강한 집착을 보이곤 했다. 때때로 국경을 넘어 침입하는 몽골족의 타타르부와 오이라트부를 무장 구복(丘福)에게 10만의 대군을 주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구복이 참패하자, 1410년에는 51세의 몸을 이끌고 직접 북방으로의 친정을 감행하여 케룰렌 강가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또 동시에 조선과 티무르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쌓인 전쟁 피로 때문에 미뤄 왔던 안남으로의 원정도 1408년 단행하여, 안남국 전체를 명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시켰다.
당시 안남을 지배하고 있었던 쩐씨(陣氏)가 호씨(胡氏)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이 쩐씨 왕족들이 영락제에게 원군을 요청해 왔던 것이다.
당시 쩐씨는 왕위에서 밀려나 호꾸이리(胡季너)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다이응우(大虞)로 고치고 쩐씨가 도망친 찌엠탄(占城)을 들이치고 있었는데, 안남국왕의 손자라는 쩐티엔빈(陳天平)이 영락제에게 도망쳐 와 원군을 요청하자, 영락제는 이 쩐티엔빈을 안남국왕에 봉하고 다시 돌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군사 없이 안남으로 돌아간 쩐티엔빈은 바로 호씨들에게 주살되었는데, 이를 명분 삼아서 결국 영락제는 안남으로 개입한 것이다.
처음에는 총사령관으로 주능(朱能)을 보냈으나, 원정 중에 병사하고 이로 인해 기강이 문란해져 원정군에 손실이 거듭 생기자, 영락제는 장보(張輔)로 그 지휘관을 바꾸어 보냈다.
장보는 승리를 거둔 뒤에 안남은 원래 중국의 땅이라고 영락제에게 상소를 바쳤고, 영락제는 장보의 의견을 받아들여 포정사(布政使), 도지휘사(都指揮使) 등의 지방관을 임명하여 안남으로 내려보내 나라를 통째로 그냥 들어 삼켰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 기간 독립국가로 존속해 왔던 안남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고, 1410년에는 대규모로 반란이 발생하여 현지의 명군으로만은 대응하기가 힘들어져, 결국 장보가 토벌군을 지휘해 다시 안남으로 들어가 진압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란이 계속 이어졌는데, 비록 호꾸이리는 잡아서 명으로 압송하였으나 호꾸이리가 황제의 위를 물려주었던 호한뜨엉(胡漢蒼)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장보는 1415년에 이르러 이 호한뜨엉의 신병을 국경 지대에서 확보하여 영락제에게 바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태자인 호응우에(胡芮)와 삼남인 호응우옌쯩(胡元澄)은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
사실 이들은 동쪽 해안에서 180여 명의 사람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결국 조선에 이르러 그 내력을 밝히고 조정에 입조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1416년 정초의 일이었다.
조선에서는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명에 일절 밝히지 않고, 이들에게 전라도 나주 근교에 식읍을 주고 호응우에는 대우백(大虞伯)에 봉하고 호응우옌쯩은 가선대부의 작을 주어 정착시켰다.
이후로 호예와 호원징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니, 각각 대우 호씨와 나주 호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명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고, 호씨의 세력이 완전히 안남에서 밀려났음에도 여전히 반란이 끊이지를 않아, 계속해서 장기간 군대를 주둔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예전의 양녕군 이제가 이 군대에 종군하여, 안남의 도읍인 탄론(登龍)을 공격할 때 공을 세우고, 호한뜨엉을 사로잡는 데에도 무훈이 있었다.
이런 사실을 원정군의 대장인 장보가 영락제에게 상주하여, 이제는 도지휘사사의 자리에 오르고 응천부에도 거대한 저택을 하사받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쫓겨난 왕실의 세자로서 크게 무공을 세운 것이었다.
덕분에 영락제에 의해 술양왕(퓖陽王)에 봉작되어 시골의 한촌인 술양현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이방원과 그 식솔들은 명나라의 도읍 응천부로 올라와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그때 병환이 깊어서 결국 응천부로 나가는 것을 마다하고 술양에서 가료하기로 하고, 나온 것은 셋째 충녕군 이도뿐이었다.
이도는 이때에 나이가 스물이라 약관(弱冠)의 때에 이르렀으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는데, 비록 명나라 관직에 출사하긴 힘들지라도 학식 깊은 명유(名儒)로서 이름을 남기고 싶은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갈고 닦은 이도의 학문은 매우 출중했다.
원래부터 학문에 두루 조예가 깊고 한 번 들으면 기억을 잊지 않는 명석함으로 조선에 있을 때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었는데, 그 총명한 재기는 명나라로 쫓겨 와서도 빛을 잃지 않고 명의 궁중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어렵게 조선인 스승을 구하여 공부를 계속하던 이도는, 이때 응천부로 들어와 이제 막 젊은 나이로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자리에 제수받은 학자 황찬(黃瓚)과 교분을 맺게 되었다.
“이 공의 학문은 정말 뛰어나시오. 나도 스스로는 이 명나라에서 쫓아올 이가 없다고 스스로 자만하고 살았었는데, 이 공의 학식을 보니 내가 부끄럽기 그지없구려.”
황찬은 우연찮게 이도와 교분을 맺게 된 이후로 매일같이 그의 집을 드나들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학문을 논하곤 했는데, 특히 운서(韻書)와 글자의 자음(字音)에 대해서 깊이 따지고는 했었다.
황찬은 나름대로 이 분야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 왔었는데 그에 못지않게 이도의 식견이 깊음을 알고서는 감탄하길 마지않았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많은 면에서 부족하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먼 외방(外邦) 출신이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쫓아 이 만 리 타역까지 들어왔으나, 아직도 한어(漢語)를 쾌히 내려 쓰지 못합니다. 이런 연유로 말을 제대로 쓰고자 음운(音韻)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어찌 재능이 있어서라고 하겠습니까. 필요한 일이니 했을 뿐입니다.”
“먼 나라에서 이 명조(明朝)로 들어온 이들이 한둘이 아니나, 그 모두가 이 공처럼 뛰어난 학예를 지니지는 않소. 다들 한어를 몸으로 익히기는 하나, 이 공처럼 음운에 통달한 이는 내 아직 보지 못했소이다. 그것은 태어나서부터 한어를 쓰는 사람도 쉽게 이르지 못하는 경지요.”
황찬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황찬은 내심 이도를 추천하여 한림원에 들여보내 함께 한림학사로서 학문을 하고픈 마음이 있었으나, 이도는 그다지 거기에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쫓겨난 왕인 아버지 이방원에게 영락제가 명나라의 왕작(王爵)을 주었고, 형인 이제는 분골쇄신하여 명나라의 전장을 모두 쫓아다니며 공을 세워 저택도 하사받고, 도지휘사의 벼슬도 내려 받았으니, 자신마저 벼슬을 하고자 들면 지나친 은택(恩澤)을 준다 하여 역으로 조정에서 견제받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명나라 사람도 아니고, 왕위를 망실하고 도망쳐 온 일가가 지나치게 조정에 출사하려 하여도 빛을 보지 못할 것이라 내심 짐작한 것이다.
때문에 이도는 황찬이 추천해 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그저 책을 읽으며 시간을 소일하며 보냈다.
가끔은 응천부 거리로 나가 구경도 하고 맛 좋은 음식을 먹는 일에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으나, 여전히 생활은 거진 하루 종일 책을 보고 문장을 짓고, 글을 논하는 것이었고, 이러다 가끔 황찬 같은 학자들이 내빙하면 마주 앉아 전적(典籍)을 논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집안에서 중신을 받아와 영파에 들어와 있던 조선 선비인 오계(吳季)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오계로서는 내심 폐주의 집안에 딸을 보내는 것이 녹록지 않은 일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명문의 집안인지라 아주 명나라에 눌러 앉을 생각을 하고 딸을 작심하고 보낸 것이다.
이도는 이 오계의 딸을 혼례를 치를 때 처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금슬이 곧 좋았는데, 곧 아들을 얻어 이름을 향(珦)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런 안분지족의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 이도는 곧잘 시름에 빠지곤 했는데, 학문을 익혀 보아야 뜻하는 곳에 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 조선 땅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그곳에서 뜻하는 바대로 학문을 펼칠 길이 있을 것이나, 이곳 명의 학문은 깊고 넓으나 내 재주를 들어다 쓸 길이 없으니 막막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명나라의 풍류도 이제 다 헛것처럼 느껴지고, 어린 시절을 보낸 조선이 그리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도가 돌아갈 길은 없고, 폐주의 자손이라 땅에 발붙일 길이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 이방원이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유명을 달리하고 말자, 그 답답한 마음이 이를 길이 없게 되었다.
“우리는 왕위를 망실한 자손으로 천조에서 구원하여 왕작을 내리지 않았다면 버린 목숨이었다. 네가 비록 머리가 뛰어나 학문이 깊으나, 이런 시대에 그 학문을 벼려 쓸 곳이 마땅치 않다. 내가 이미 만리를 종군하여 황상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았으니 너의 가솔은 내가 앞으로 돌봐 주도록 하마. 부디 어려운 길을 자청하지 말고 유유히 삶을 도락(道樂)하면서 즐기는 학문이나 공부하도록 하여라.”
이방원의 상을 마치고, 맏이인 이제가 이도를 불러서 에둘러 말했다.
어차피 많은 것을 바라기 힘든 몸이니 자신이 가문을 건사할 것이고, 따라서 괜히 분란을 일으킬 거리를 만들지 말고 조용히 처신하라는 이야기였다.
본래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던 이제이기에, 동생이 최근 번려한 것을 꿰뚫어 보고 하는 이야기였다.
이도는 내심 뜨끔한 면이 없잖아 있었으나, 부친의 기중(忌中)이 끝나자마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형이 못내 얄미워 괜히 말을 덧붙였다.
“소제의 일은 알아서 할 터이니, 형님께서는 황조(皇朝)에 봉사하여 부디 장수하시고 번영하십시오. 그저 그 뒷물만 받아 마셔도 소제는 족하나이다.”
이도의 비꼼에도 이제는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 평소의 성격대로 불과 같이 역정을 부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이 구차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안남으로 종군하여 반도들을 토벌하고 황명의 위신을 세우러 가야 한다. 알다시피 둘째 보(補)는 불문에 귀의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내가 없는 동안은 네가 집안의 어른이다. 그러니 부디 집안을 잘 단속하거라.”
그렇게 다시 이제는 남쪽으로 떠나가고 그 동생들은 응천부에 남았으나, 둘째 이보는 곧 소주(蘇州)의 한산사(寒山寺)로 출가하여 혜능(慧能)의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되고, 말 그대로 이제 쓸쓸한 응천부의 저택에는 늙은 어머니와 이도의 식솔들, 그리고 어린 동생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도는 집안을 단속하라는 형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행장을 꾸려서 천하의 명산을 본다는 핑계로 천하 주유를 나서니 이것이 1416년 늦은 가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