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청천백월(晴天白月)
「이른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 목종의 치세 이후 조선은 격랑(激浪)의 파도로 깊숙이 들어서게 된다. 이른바 이전의 목종 연간이 내외의 전란에 휩싸이고 태조가 세웠던 전주 이씨의 왕통이 도전받게 되는 시기였다면, 목종 이후로는 섭정공이 완전히 그 내외의 권력을 장악하고, 심왕의 작위에 이르러 국사를 일괄(一括), 개혁의 깃발을 들고 나라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게 되는 것이다.」
―최명길(崔鳴吉),
학도(學徒)를 위한 국사소편(國史小編) 중
1417년 맹춘(孟春)
조선국 한성부.
예전에 한성부 계동에 위치했다 하여 계동저라고 불렸던 세훈의 저택은 이제는 심왕저(瀋王邸)라고 불리고 있었다. 국왕은 아니고 일개 번왕인지라, 감히 한성 안에서 궁호(宮號)는 붙이지 않고 그저 저(邸)라고 택호(宅號)하여 현판에도 심왕저라고 걸어 두었으니, 별칭이었던 계동저와는 달리 이제는 숫제 제 이름으로 내걸고 있는 셈이었다.
세훈의 나이도 이제 어느덧 마흔 둘에 이르러 불혹을 넘기고 장년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탐라 앞바다에 표착한 지도 열여덟 해가 지나 이제는 심왕(瀋王)으로 불리며 가히 조선 내에서 권세를 따라올 자가 없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나이까?”
이제는 서른을 훌쩍 넘긴 아내 고상희가 다과상을 내어 오며 세훈의 곁에 앉아 물었다.
세훈은 물끄러미 아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부끄럽게 뭘 그리 보시나이까?”
“아니, 내자도 나도 이제 젊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소.”
고상희는 대답 없이 슬쩍 웃음을 여미고서는 세훈의 어깨에 슬쩍이 기대 왔다.
세훈은 가만히 눈을 감고 아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지나온 세월을 되짚어 보았다.
탐사선에 타고 있던 그가 불시에 먼 과거의 제주로 표착하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그 원인이 묘연했다.
물리학을 깊게 공부했던 세훈이 알고 있는 22세기의 물리학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다른 평행 우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들, 느닷없이 다른 우주로 넘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물리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훈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늘 의심해 왔다. 그러나 분명히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아내의 체온을 거짓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어느샌가 새롭게 주어진 삶에도 적응하게 되어 이제는 조선에서의 삶도 스무 해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어느 쪽의 삶이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세훈은 자신이 꾸린 가정이 있는 조선에서의 삶을 더 중요하다고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보육원의 일은 어떻소?”
세훈이 문득 생각이 나 아내가 설립한 보육원의 일을 물었다.
일전 명나라와 싸운 을유전역 이후 고아들을 구휼하고 교육시켜 나라의 동량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흥인문 밖 마장에다가 고상희가 자신의 호인 경애당의 이름을 붙여 경애당 보육원이라고 이름 지어 만들었던 것이다.
세훈은 고상희가 틈틈이 집안의 대소사가 없을 때는 자주 이곳에 들르며 일을 보아 오던 것을 알고 있었고, 얼핏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어 왔으나 최근에는 통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던 것이 생각나 물어 본 것이다.
“이제 햇수로는 열 해째지요. 그때 들어왔던 아이들이 이제 훌쩍 자라서 배움도 마치고 잘된 아이는 문과에도 급제하여 한림원에도 가 있고, 다른 아이들도 상인이며 군인이 되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나이다.”
“내자가 신경을 많이 쓰더니 자리를 꽤 잡았구려. 내가 보육원 출신 중에 한림원에도 들어가 있는 이가 있는 줄은 몰랐소.”
“왜어며 한어도 배우기에 사역원에 들어가 있는 아이들도 많나이다.”
“아직도 고아인 아이들이 많소?”
“나라 간의 싸움도 그친 지 오래이긴 하나, 병환이나 가난으로 부모가 목숨을 잃어 갈 곳 없이 되는 아이들이 어찌 사라지기야 하겠나이까. 나라가 태평성대라도 사람 목숨은 나랏님도 어쩌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이제는 새로이 들어오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 대청에 빼곡하게 앉아 습자(習字)하던 녀석들이 이제는 절반 남짓으로 줄었나이다.”
세훈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서는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아내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 주고 싶었고, 기왕이면 사재를 내어서라도 전쟁으로 갈 곳 없게 된 아이들을 보살펴 주자는 생각에 고상희에게 추천했던 일이었지만,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 그곳 출신의 아이들이 한림원이며 사역원, 그리고 상공계 각처에 진출해 있다는 이야기는 세훈에게 새삼스레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고아들이 많이 줄었다면 혹, 상천(常賤)을 막론하고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까지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있도록 학당으로 이름 바꾸어 교육에 매진해 보는 것은 어떻소? 물론 앞으로도 고아들은 계속 거두어 교육시키더라도 말이오.”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 있어 어찌할까 여쭈어 보려 했나이다.”
“하하! 내자가 맡아서 하는 일인데 어찌 내게 의견을 물어보려 하시오. 뜻대로 하시면 될 것을.”
“그렇다곤 하지만 소첩은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나이다.”
세훈이 들어보니 아내가 하는 말도 내심 이해가 갔다.
부부의 연을 맺고서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려 늘 노력해 왔지만 바깥에서 나라를 좌우하는 위치에 오르다 보니 내심 섭섭하게 했을 부분이 많았을 것 같았다.
아내가 이런 것까지 봉건적으로 물어본다고 생각한 세훈은 내심 안타까워 한 이야기였지만, 고상희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이 가진 고민거리를 남편과 나누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것이다.
세훈이 괜히 아내의 얼굴을 보니 애틋한 마음이 들어 진지하게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경애당 보육원의 현판이 경애학사(敬愛學舍)로 바뀌고 민간의 자제들까지 간단히 시험 쳐 뽑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양천(良賤)을 막론하고 학생을 뽑았다는 점인데, 때문에 고아와 천민들이 득실한 학당이라 해서 양반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상민(常民)들도 자녀를 보내기 꺼려 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훈조차도 이런 작태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때문에 세훈은 의무 교육을 도입하고 계급 제도를 점차 철폐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는데, 당장 재정 상황이나 민중의 교육 정도를 보아서도 쉬이 도입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에 우선은 과거제도를 뜯어고치는 데에 나섰다.
기존의 복잡한 시험 제도를 정리하고, 시(詩)와 부(賦), 그리고 경전의 요해를 보던 과거 과목을 유학(儒學), 물학(物學), 법학(法學)의 3과로 정리했다.
당연히 이런 일에는 반대가 치솟게 마련이었는데, 특히 물학이니 법학이니 하는 것들을 유학 경전과 함께 나라를 다스릴 인재들이 배워야 할 과목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상공(商工)의 진흥으로 인한 국운이 성장하는 것을 직접 목도한 이들이 권력의 핵심부에서 강건하게 일을 밀어붙이는 세훈을 거스르고 더 이상 아쉬운 소리를 내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개병제의 실시와 총포로 무장한 덕에 강력해진 조선군의 대부나 다름없는 세훈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정이라는 것은 꿈에도 꾸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덕분에 이 과거제도의 개혁은 속도가 붙었는데, 기존의 복잡하던 과거 절차를 개혁한 결과는 간단히 다음과 같았다.
지방 부목군현(府牧郡縣)에서 매년 정초(正初)에 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고, 이것을 읍시(邑試)라 하여 이것을 통과한 자는 생원(生員)의 학위를 수여하기로 했다.
생원의 학위를 받은 이는 매년 단오(端午)에 부목(府牧) 단위에서 인근 생원들을 모아 주시(州試)를 치르고, 이것을 통과한 자에게 거인(擧人)의 학위를 주었다.
이 거인들은, 다시 하지(夏至)에 각 도의 감영(監營)에서 치르는 상시(庠試)를 치르게 했는데, 이것을 통과하면 진사(進士)의 학위를 얻고, 한성에 올라가 추분(秋分)에 전시(殿試)를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 대강의 기존의 제도에서 크게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우선 별시(別試)를 모두 폐지하고 매년 정기적으로 시험을 단계별로 치르게 한 것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기존의 공조 산하에 있던 화학전습원을 공조에서 독립시켜 성문 밖 왕십리(往十里)의 행당산(杏堂山) 터럭에 옮겨 이름을 학습원(學習院)으로 고치고, 성균관의 독점적 지위는 이때에 이르러 폐지하여, 유학 교육을 하는 기관으로 격하하고 특별히 성현에게 배향하는 것은 전행서(奠行署)를 두어 예조 관할하에 둠으로서 성균관이 독점적인 지위를 주장할 근거를 뺏었다.
또한 사역원에서 일부 교수진을 빼와 외학원이라는 공립학교를 흥인지문 안쪽 낙산(落山) 아래 성균관 근방에 새롭게 만들었다.
이들 세 학교에 사립학교로서는 경애학사까지 하여 네 학교가 한성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학습원, 성균관, 외학원, 경애학사의 네 학교는 최소 4년간의 교육을 받도록 교육 연한을 늘리고, 기존의 중점적으로 취급하던 학문 외에도 다른 학문을 두루 배울 수 있도록 외연을 넓히는 대신에, 이들 학교의 졸업생을 3할은 갑(甲), 7할은 을(乙)로 나누어 졸업 시험에서 갑등에 든 이들에게는 진사(進士)의 학위를 주고, 을등에 든 이들에게는 거인(擧人)의 학위를 주어, 바로 전시(殿試)나 상시(庠試)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 외에도 목포에 나상이 세운 습외어학원이나, 일본 산구(山口, 야마구치)에 백제공 대내씨가 사재를 털어 세운 백제숙(百濟塾) 등 지방 및 외번(外蕃)의 16개 학교를 선정하여 최소 3년간의 각종 교육을 이수하도록 하고, 이들 학교의 졸업 시험에서 3할은 을등(乙等), 7할은 병등(丙等)으로 나누어 을등은 거인의 학위를, 병등은 생원의 학위를 주도록 하였다.
또한 제도를 고쳐, 지방에서도 이졸(吏卒)이 보던 업무를 고쳐 국고에서 보조하는 관료를 지방관 아래에 수임토록 하게 하니, 이들 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원의 학위를 지닐 것을 요구했다.
거인의 학위를 지닌 자는 중앙 및 지방의 종9품의 벼슬에 출사할 자격을 부여하고, 진사는 종7품의 벼슬에 출사할 자격을 부여했으니, 학습원, 성균관, 외학원, 경애학사의 네 학교중 하나를 졸업하게 된다면 바로 종9품이나 종7품의 벼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전시(殿試)에 합격한 자는 한림원에 반드시 입학하여 2년간의 집중적인 교육을 받은 뒤에 종5품의 벼슬에 보임되도록 하였다. 특별히 이 한림원의 교육을 마친 자들을 일러 박사(博士)의 학위를 부여했다.
이로서 아쉬우나마 지방 향교(鄕校)에서 학습원 따위의 상급 학교, 그리고 한림원으로 이어지는 체계가 정비되었고, 이 교육 제도는 당분간은 관료 제도의 일부로서 작동하게 되었다.
세훈은 장기적으로 이 관료 충원 제도와 교육 제도를 철저히 분리시킬 생각이었으나 아직까지는 나라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은 자들을 충분히 나라에서 쓰는 것이 중요했기에 불가피하게 이렇게 관료 제도와 교육 제도가 함께 움직이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세훈이 등장하고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관료 제도도 외연적인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관료 체제를 정비하면서 곧 각 단계의 학위가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등급의 자격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합격자를 대폭 축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조정에서 일할 관료의 자리가 그다지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정비된 이래로 조선의 관청은 관료 기구로서 성장을 거듭하여 매년 충원하는 인원이 늘어나게 되는데, 나라에 식산(殖産)하고 이를 흥업(興業)하기 위해서는 힘써 일할 관료들이 그만큼 더욱더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1417년 계하(季夏)
조선국 한성부.
1417년의 여름은 유난히 습하고 더웠다. 남쪽 바다에서부터 밀려온 뜨거운 공기는 물을 잔뜩 머금고 전국에 긴 장마를 내렸다. 이쯤에서 그치면 좋았을 일이지만, 그해는 유난히 역병이 심하게 돌았다.
평안도 안주에 주둔한 제8진위대의 병영 중에는 이질이 심하게 돌아 진위대의 속병(屬兵) 및 인근 고을의 주민들까지 거의 2천 인이 병사했을 뿐더러, 전라도 전주 일대에는 두창(痘瘡), 즉 천연두가 창궐해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까지 번지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해의 가장 직접적이고 치명적이었던 역병은 바로 한성 부중에 창궐했던 정체 모를 곽란, 즉 구토를 동반한 열병이었다.
남문 밖 모개전 일대에서 시작된 이 곽란은 인근 상가를 죄 휩쓴 뒤 성안으로 들어와 종로 시전행랑(市廛行廊)을 거쳐 개천(開川, 훗날의 청계천)을 따라 마장(馬場) 일대까지 휩쓸고 지나갔는데, 이들 지역은 모두 학업을 하지 않는 유생, 상인, 공인, 기타 잡색(雜色)이 기거하는 곳으로 한창 발전을 희구하던 한성의 생산 능력에 막심한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그러나 궁중과 북촌, 계동 일대 등에서는 같은 성내에 있으면서도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으니, 이들은 모두 지권(持權)한 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왕후장상(王侯將相)과 문벌거족(門閥巨族)이 사는 동네였다.
어찌 되었든 당장 도성 안에 불이 떨어졌으니, 궁중에서는 으레 급한 대로 각의(閣議)를 소집하고 방책을 의론하여 고려 때에 있었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의 제도를 본 따서 동부 연희방(東部燕喜坊)에는 동활인원(東活人院)을 세우고 용산 모개전 측편(側偏)에는 서활인원(西活人院)을 세워 역병에 걸린 자를 진맥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막(廬幕)을 설치하고 이를 일컬어 활인서(活人署)라고 불렀다.
그러나 증상만으로 옛 중국 의서에 나온 대로 곽란으로 의심하여 처방하는 것이 그럴싸한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유현(劉玄)은 의원으로, 이때에 의관으로 궁중에 입시(入侍)하였다가 역병이 창궐하자 연희방에 설치된 동활인원에서 진휼(賑恤)토록 명받아 환자를 돌보기 위해 나와 있던 차였다.
그가 아는 곽란의 증상대로 환자를 돌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도무지 환자는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갈수록 늘어서 환자를 진료하기 위한 여막 전체에는 설사 냄새만 진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보시오, 내 아들 좀 살려 주시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업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든 것은 유현이 점점 환자를 진찰하는 일에 지쳐 갈 때쯤이었다.
뛰어든 남자는 선비로 보였는데, 품이 넉넉한 도포에 갓을 매고 정갈한 수염을 기른 것이 이렇게 방정맞게 뛰어다닐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큼 체면 따질 겨를 없이 아들의 목숨을 살려 보고자 이곳까지 뛰어온 것이다.
아이를 눕혀 놓고 유현이 진맥을 해 보니, 영락없는 곽란의 증상이다.
“내 아들이 요즘 도성 중에 유행하는 열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소이다.”
“그냥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증한(憎寒), 두통, 현훈(眩暈)이 일어나고 손발이 차며, 거기에 구토나 설사를 하니 영락없는 곽란이올시다. 냉물(冷物)을 섭취하거나, 시장하거나, 혹은 대노하거나 찬 기운이 몸에 스며서 위의 기운을 동요시킨 손상이 장위교축(腸胃絞縮)하게 해 심복(心腹)이 동통하게 되는 것이지요.”
“내 그런 말을 듣고자 온 것이 아니오. 이래 뵈도 나도 의원 집안의 아들이올시다. 분명히 설사를 이리 해대니 건곽란(乾?亂)이 아니라 습곽란(濕?亂)일 테지. 내 병명을 듣고자 온 것이 아니란 말이요. 도대체 이 조선 땅의 의방(醫方)이란 자들은 이런 역병이 돌 때면 왜 아무런 진방도 내어놓지 못하고 이리 환자들을 늘어놓고 있소.”
그러나 곽란이 이리 사람에게 옮겨 다니며 쌀뜨물 같은 설사를 일으키는 것은 유현이 공부한 어떤 의서에서도 본 기억이 없는 일이었다.
건곽란은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에 목향(木香), 빈랑(檳갈), 지각(枳殼)을 가해 쓰면 좋다고는 하지만 도무지 설사를 동반하는 습곽란, 거기에도 이런 대규모로 역병처럼 행하는 것에는 내어놓을 방책조차 궁한 것이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설사를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쌀뜨물 같은 설사를 내어놓으며 열이 나자마자 내 감이 좋지 않아 바로 이리로 업어 왔소.”
“그래도 아직 시작이니 차도를 볼 수나 있겠습니다만, 여기 누워 있는 환자들 태반이 끊임없이 설사만 내어놓다가 벌써 수백 구가 성 밖에 버려졌습니다.”
유현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자 남자의 안색이 답답하게 죽어 갔다.
도무지 누워서 신음만 하는 아들 걱정에 침음성만 삼킬 뿐 앉으나 서나 편하지 않은 몸이었다.
“나는 관부(官府)에서 일하다 금년에 학습원 교유(敎諭)로 옮겨 격물(格物)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서생이올시다. 거기에 의원 집에서 의술을 어깨너머로 배운 몸이니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돕게 해 주시오. 아들이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소이다.”
의원 집에서 자라나 지금은 새로 생긴 학습원 교유, 즉 선생으로 있는 이 남자는 바로 다름 아닌, 보일의 법칙을 스스로 발견해 압적식이란 이름으로 정리하여 세훈에 눈에 든 뒤, 화학전습원과 염료서를 오가며 공부와 가르침을 계속하다 이제는 화학전습원이 학습원으로 개편되어 옮기면서 그곳으로 아주 교유자리를 맡아 자리를 옮긴 강희수였다.
강희수도 연년이 나이가 차, 화학전습원을 졸업한 지도 어연 십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그간에 혼사도 치러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맏이인 놈이 이 도성 중을 유행하는 괴상한 곽란에 옮겨 오고야 만 것이다.
화학전습원에서부터 이른바 격물(格物), 즉 허상이 아닌 실제를 시시비비를 가려서 따지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강희수였으나, 병리(病理)에 관한 분야는 의관 집안 출신인 그 자신도 마찬가지로 대대로 물려받은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으로 사람의 몸을 보는 방식에서 한 치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
이것은 동시대의 서양 의학도 마찬가지로, 미신과 생약(生藥) 치료, 사혈(瀉血)만 거듭하며 4원소론 따위로 사람의 몸을 설명하려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아직까지 사람의 몸과 질병의 예방 및 치료를 과학적 방법론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강희수는 더 이상 음양오행으로 이런 대규모 곽란이 발생하는 원인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그저 눕혀 놓고 머리가 하얘질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네 글자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강희수에게는 이성이 곧 활인(活人)의 길이었다.
“이곳 동활인원에 오는 병자들은 죄 어디서 오는 사람들이오?”
뜬금없는 강희수의 물음에 유현이 고개를 돌린다.
“거의 한성 부중의 주민입지요. 뚝섬[纛島], 마장, 그리고 선생님이 사시는 왕십리에서 오는 환자도 많습니다만, 지금은 주로 흥인지문 안쪽에서 나옵지요.”
“흥인지문 안쪽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소?”
“거의 사족(士族)은 없고 거의가 상민입지요. 특히 그중에서도 장사하거나 공인이 많습니다.”
“그런 공상들이 개천변에 살고, 동문 밖에 나서서도 그 개천 따라 있는 마장, 왕십리, 뚝섬에서 환자가 나는 것이 우연치 않소. 그놈의 개천 물에서 사람에게 옮긴다는 것은 그 물을 길어다 마셔서 그렇지 않겠소?”
강희수는 무엇인가 가닥을 잡은 느낌이었다. 그는 순간 질병에 관련된 문제도 그가 배운 화학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명료해지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확신이 생겼다.
그러나 전통적인 한방 교육을 받은 의관인 유현은 그저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생각이었다.
“의서에 따르면 수(水)는 찬 기운과 연관이 있고, 이 찬 기운은 화(火)와 상극이니 물을 잘못 들이키면 그런 열병을 불러올 수는 있지요. 그러나 이런 여름에 수운(水運)이 잘못되어 화의 기운을 불러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지금 음양오행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오. 잘 보시오. 우리 집도 왕십리 근교 행당산 아래 학습원 교사(校舍)와 면하고 있소. 우리 아들놈은 나흘 전 개천 물가에 다녀와 그 물을 실컷 들이키고 온 뒤였으나, 나와 내 처, 그리고 내 어머님께서는 개천 물을 길어다 마시지 않고, 행당산 위쪽으로 내려오는 중랑천 물을 길어다 마시오. 그리고 그냥 역병과 달리 이 곽란이라는 놈이 신기하게 물길만 따라 번지니 이상하지 않겠소.”
그 순간 유현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번쩍 들기는 했다. 도성 안에서 역병이란 놈이 용산에서 들어온 뒤 개천이 시작하는 종로 통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물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역병을 번져 오니, 그것이 왜 물길을 따라 사람을 옮기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우선은 개천의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이 옳아 보였다.
이렇게 강희수와 유현이 도무지 답답한 마음으로 무언가 해 보려고 하고 있을 때, 이 상황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또 있었으니, 바로 세훈이었다.
이미 섭정으로서 각의에 들어가 이미 이 사태에 대해서 전말을 들어 보고받고 있는 세훈으로서는 이것이 콜레라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을 전공한 적이 있는 세훈이었으나, 의학을 깊게 배운 적은 없었기에 확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증상들이 세균학(細菌學)에서 다루는 콜레라균의 전염 경로와 발병 증상들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다만 의아하게 생각한 점은, 실제 역사에서 콜레라는 19세기가 되어야 중국을 통해 조선에 유입되어 크게 창궐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조선으로 되돌아오는 형태로 거의 100년에 가깝게 세도정치하의 조선을 역병의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질병이었다는 것이다.
아직 15세기의 초두(初頭)에 지나지 않는 지금에 있어서, 갠지스강 델타지대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여겨지는 콜레라균이 조선에 유행할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생물학적 단계에서 그냥 콜레라균에서 이렇게 강한 전염성을 지닌 유행성 균이 등장하는 것 자체는 자연적 변이에 의해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그것이 19세기에 일어났다고 하지만, 15세기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설사 운이 좋지 않아 이때에 이르러 인도에서 이런 유행성 균이 창궐할 수는 있지만, 세훈이 보기에는 때마침 중국이나 조선에서 배들이 인도양 일대를 오가기 시작한 것이 균이 퍼지는 데에 일조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작년부터 명나라 영파나 전라도 목포, 벽란도, 개성 일대에서 이런 곽란이 심심찮게 도지는 것에 대해서 세훈은 그저 여름철 식중독이나 유행성 이질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사실 한성 부중에 이렇게 대규모로 창궐할 콜레라의 전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훈이 지금 내어놓을 수 있는 방법 중 뾰족한 것이 없었다. 현대 의학이 이룩한 눈부신 성과가 전혀 없는 중세의 조선에서 무언가 제대로 된 의학으로 역병을 구제한다는 것은 첩첩산중인 일이었다.
세훈 자신이 살던 나노로봇이 혈관을 뚫고 다니던 시대와는 천양지차의 의료 기술인 것이다.
콜레라균은 물을 통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장에서 독소를 배출하고, 이것이 끊임없이 설사를 일으켜 결국 탈수증상을 일으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뒤, 그 배설물은 다시 수계(水界)로 스며들어 물을 통해 다시 다른 숙주로 균이 옮기는 과정을 통해 전염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조선이 가진 기반 산업으로 항생제를 만들 능력이 없는 세훈으로서는 당장 이 독소를 내지 못하게 균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한방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원인이 되는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대신 경구수액, 즉 수분과 염분이 적절히 배합된 물을 환자에게 지속적으로 섭취시켜 탈수증상으로 죽음에 이르지 않게 막는 방법밖에 없었다.
콜레라에 의한 사인은 탈수증상이니, 이것을 막는다면 자연적인 면역에 의해 치료가 언젠가는 될 것이었다.
이렇게 세훈이 고민하던 차에 헐레벌떡 강희수와 유현이 찾아와 엎드려 고했다.
이들이 어떤 고민을 마치고 왔는지 알 겨를이 없는 세훈으로서는, 보일의 법칙을 압적식이란 이름으로 정리한 뒤로 쭉 관심을 쏟아 왔던 강희수의 얼굴을 보고서는 물었다.
“강 공이 여기 무슨 일인가?”
“섭정공 합하. 이렇게 불초하게 찾아뵌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만 사안이 긴박하나이다. 저와 함께 온 자는 동활인원에서 지금 도성에 횡행하는 역병을 다스리기 위해 애를 쓰는 의관 유현이라고 하나이다.”
“고생이 많소. 그래. 강 공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불초소생의 못난 아들이 지금 도성을 오가는 역병에 옮아 동활인원에 누워 있나이다. 그리하여 활인원에 찾아가서 유 의관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 역병을 잡을 쓸 만한 방책이 없나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옮겨 오는 환자들이 다 개천 물길을 따라 거주하고, 그 물을 길어 마시는 자들이니 우선은 그 물을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생각되어 이리 급하게 찾아왔나이다.”
세훈은 순간 머리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심어 두었던 과학적방법론의 씨앗이 여기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적방법론이라는 것은 현대 학문의 가장 근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컴퓨터로 치자면 같은 OS 아래에서 프로그램이 작동되게 해 주는 하나의 체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같은 체계 아래에서 출발한 지리학의 성과를 지질학이, 지질학의 성과를 생물학이, 생물학의 성과를 화학이, 화학의 성과를 의학이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음양오행론에서 출발한 풍수론의 성과를 한방이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가능해도, 지리학의 성과를 한방과 즉결적으로 공유한다던가 한방의 연구 결과를 지리학이 응용한다던가 하는 관계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민족이라는 이름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직시하면, 과학적 학문들은 서양 학문이 아니라 단순히 ‘현대 학문’으로 환치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동양과 서양의 학문 대립이 아니라 형이상학에 근간한 중세 학문과 과학과 이성, 합리에 근간한 현대 학문 간의 대립이 되는 것이다.
세훈은 그렇기에 조선이 스스로 자립하려면 과학적방법론을 토대로 한 계몽 혁명과 과학 혁명을 언젠가는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혼자서 그것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세훈은 자기가 씨앗은 뿌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노력해 왔는데, 이제 그런 성과가 보이는 것 같은 확신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강 공과 유 의관이 하는 말이 옳소. 내가 보기에도 그 병은 물을 매개로 해서 움직이는 것이 확실하오. 아마도 그 물을 섭취한 뒤 물에 든 병인(病因)이 사람으로 옮기고, 그 병을 앓아 설사가 나오면 그것이 물에 또 버려져 다시 그 물이 흘러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 번지는 것 같소.”
“합하의 말씀이 저희가 생각하는 바이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병을 번지지 않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 뿐, 강 공의 아들이나 다른 이미 병을 옮은 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오.”
세훈의 말에 강희수의 눈이 축축하게 내려앉는다.
“소인도 이미 잘 알고 있나이다. 다만 병에서 살아나는 이도 많다고 하니 이겨내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소인의 아들이 앓고 있다 해서 뻔히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앓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아는데도 행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나이까. 그것은 군자의 도가 아니나이다.”
세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은 수분의 섭취를 충분히 시켜 주어 탈수를 막으면 될 일이다. 이것을 막는 방법은 경구수액(經口輸液)이라 하는데, 경구는 말 그대로 입으로 직접 받아 마시게 하는 것이고, 수액은 정맥 등에 기술적인 방법으로 액체를 집어넣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 지금 당장 주어진 기술로 정맥에 주사를 하는 기술을 만들어내기는 어불성설이었다. 근대 유럽에서도 그렇게 쉬운 기술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콜레라 환자의 직접 흡수율을 낮아질지라도 직접 입으로 물을 흘려 넣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유 의관은 듣게.”
“말씀하십시오.”
“한성 부중의 포도청에 명하여 나장들과 이하 한성부윤이 거느리는 권속들을 모두 동원하여 이미 병을 옮기는 물인 개천이 아니라 북악산 근처와 중랑천에서 깨끗한 물을 날라 동서활인원에 보낼 터이니, 이를 큰 솥에 끓였다가 식혀 설사를 하는 환자에게 밤낮으로 먹이시오. 또한 그 배변을 직접 손으로 잡아 입으로 가져가는 행위는 절대 하지 말고, 잘 모아 두었다가 팔팔 끓인 뒤에 죽여서 볕에 말린 뒤 나중에 거름으로 쓰시게. 절대 물가에 버리거나 해서는 안 되네.”
세훈은 침을 삼키고서는 말을 이었다.
강희수가 자식 걱정하는 마음이 몸에 스며든 탓이었다. 세훈 자신의 자녀들이 그런 병을 앓고 있는데 치료할 방법이 궁하다 하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었다.
“아마 경구하여 깨끗한 물을 계속 섭취하게 한다면, 자네의 영식(令息)이 그렇게 목숨을 쉬이 잃지는 않을 것이네. 내가 보기에는 그 지독한 설사로 인하여 몸의 수액이 빠져 탈진해 죽는 것이지 병이 뜨거워 죽는 것이 아니니, 빠져나가는 이상으로 수액을 충분히 계속 전해 주면 몸이 병을 이겨내고 말 것이네.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게나.”
이렇게 한성 부중에 임시적인 콜레라 방역책이 발효되어 개천의 물을 길어 마시거나 오물을 버리는 행위가 금지되고, 용산 일대의 우물물도 길어 마시지 못하게 막으니 채 닷새가 지나지 않아 더 이상의 환자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또한 깨끗한 물을 다시 한 번 끓인 뒤 환자에게 끊임없이 마시게 하고 그 설사를 한데 모아 함부로 버리지 않으니 치사율이 급격히 줄어 병을 앓는 이 열 중에 한둘만 목숨을 잃고 나머지 여덟아홉은 살아서 나가게 되었다.
강희수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자신의 추측과 용기 덕분에 남의 목숨을 부지기수로 살렸을 뿐더러, 그 아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다행히 병의 초기였던 그의 아들은 경구로 물을 직접 마시게 하는 방법으로 결국에 목숨을 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로서 강희수가 가지는 과학적 태도, 당대 조선에서 말하기를 고전에서 가져온 말 그대로 격물치지의 네 글자는 그의 마음속에 더욱더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이 워낙에 빠른 속도로 번지고 한성 부중을 가로질러 관통하는 개천이다 보니, 이번에 콜레라로 목숨을 잃은 이가 이미 육천오백에 이른 뒤였다. 이때의 한성 인구가 겨우 십오만에 이를 때이니 부지기수로 죽어 나간 셈이었다.
그러나 이 한바탕의 난리 뒤에 태어난 것은 바로, 중세 동양 의학과는 다른 새로운 현대 의학의 새싹이었다.
이 사태를 직접 현장에서 목도하고 그 방법론의 적합을 몸으로 체험한 한의 유현은 학습원에 입학하여 새로이 그 격물로 학문을 궁구하는 법을 직접 익히고, 그것을 의학에 반영할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또한 이 콜레라에 한의서에서 가져온 이름을 따다 곽란역(藿亂疫), 즉 설사와 복통을 동반하는 역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병증이 물을 통해 퍼진다는 사실과 그것을 막는 법, 그리고 경구로 물을 넣어 수분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방법까지 모든 것을 집성하여 이른바 벽온신방(僻瘟新方), 즉 염병을 피하는 새로운 방책이라는 이름의 책을 지어 내어놓으니, 세훈 또한 이를 보고 의관 제도의 개수를 생각하게 되어 호부에 진휼서(賑恤署)를 두어 학습원과 연계하여 의술을 탐색하게 하고, 그 산하에 근대적 의학을 연구하는 토대를 삼을 요량으로 교육기관인 제중원(濟衆院)과, 역병을 방역하는 부서로 벽온도감(僻瘟都監)을 설치하니 이 중 제중원의 책임자로 유현이 부임하게 되었다.
이 제중원에서 채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종두법(種痘法)을 체계화시켜 마마, 즉 천연두를 잡게 하고, 그 뒤에 해부를 허용하느냐의 문제로 학파가 나뉘어 해부 허용파가 용산에 광혜원(廣惠院)을 세워 나갈 때까지 조선 근대 의학의 선구가 되게 된다.
1419년 맹추(孟秋)
믈라카 술탄국 싱가푸라[湘南].
사 년 전, 처녀 항해에서 믈라카 술탄국을 지나며 그 술탄에게 반도 끝자락에 있는 작은 섬, 싱가푸라에 상관(商館)과 거류지를 세워 줄 수 있기를 바호디르가 주청한 바 이래로, 이곳에는 조선인 상인이 기거하기 시작했다.
옛 이름으로 테마세크,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읍이라는 이름의 싱가푸라로 불리게 된 이 섬은, 이제는 기거하는 이들 중 태반이 조선인과 진서 출신의 일본인으로, 그 총 수가 80호 326명에 이르게 되었다.
바호디르가 1차 항해에서 돌아가는 길에 60여 명을 내려놓고 진지를 다지게 하였으나, 믈라카 술탄 이스칸다르 샤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근처의 토민들과의 교전으로 이듬해 2차 항해를 나왔을 때는 그 수가 스물여덟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이곳에 정착할 상인들과 그 식솔이 배를 타고 건너와 있었고, 이스칸다르 샤도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하고는 호위 병력을 더욱 대동해 주었다.
이렇게 점차 정착촌이 생기고 목재로 지었던 둔영도 이제는 석축의 요새로 바뀌고 어설프나마 항만이 생겨 원양 무역의 거점으로 발돋움할 노릇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이 요새와 마을에 상남(湘南)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조선을 오고 가는 상인들과 그들을 통해 들어오는 장계에 그대로 사용이 되면서, 조선에서는 이곳을 상남이라 부르는 것이 정착되었다.
상(湘)이라는 것은 원래 중국 남부를 흐르는 강의 이름으로 그 협로(夾路)가 기이하며, 유역의 무더운 날씨로 유명했는데, 믈라카 반도와 이 섬을 가르는 좁은 해협이 마치 이 상수(湘水)의 물과 정경과 꼭 닮았다 하여 그 남쪽 해안에 위치한 섬을 상남이라 부른 것이다.
이 외에도 산스크리트어, 즉 범어 지명인 싱가푸라를 그대로 직역하여 사자읍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 사자읍은 곧 상남의 별칭이 되었다. 마치 경주가 계림으로 불리고 평양이 유경인 것처럼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 상남 일대는 정착이 지난 뒤 몇 해가 흘러서는 미묘한 지역 균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믈라카의 술탄 이스칸다르 샤는 처음에 이곳 싱가푸라까지 엄밀한 권위를 미치지 못해 이곳이 아직 근해의 바다를 오가는 해민들의 영역으로 남아 있기에 조선인 상단들에게 그럴 수 있다면 그러라는 식으로 대응했었다.
거기에 오히려 이를 통해 모종의 영향력을 반도 끝까지 확대할 수 있다면 좋다는 생각에 오히려 속하의 창병 따위를 내어 줘 든든하진 못하더라도 이 거류민들을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년간에 걸쳐 이곳 근처에서 상선을 상대로 한 해적질과 연안 어업을 생계 수단으로 삼아 왔던 원주민들과 몇 차례의 소모전 끝에 정착지가 요새화되는데 성공하자 이스칸다르 샤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믈라카는 바다 건너 맞은편 수마르타 섬의 이슬람 항구도시들과 인도양에서 남중국해로 넘어가는 상선의 기항지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선들이 기항한다는 것은 곧 중계무역의 거점으로서 막대한 재화를 손에 쥘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싱가푸라섬에 조선인들이 요새를 짓고, 해가 지날수록 많은 조선의 상선들이 오고 가며 믈라카에는 더 이상 기항하지 않고 이 상남의 요새항(要塞港)을 거점 삼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 섬에 기항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조선의 상단들이 전부요, 그나마도 바호디르가 이끄는 대규모 상단을 제외한다면 아직까지는 실험적으로 바다 간의 항로를 탐색하는데 지나지 않은 나상의 군소 상선이나, 혹은 송상이나 경상에서 출자하여 바다로 내보낸 탐색선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스칸다르 샤는 여기서 불안함을 감지하기 시작했고, 그간 보호하던 병력을 철수시킨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매달 조세를 바치지 않으면 병력의 철수는 물론이거니와 요새를 포위해 버리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전하의 심기를 흩어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페르시아로 갈 준비를 단단히 해 3번째 상행을 나왔던 바호디르는 술탄의 궁저로 불려가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별거 아니오. 다만 귀국에서는 내 영토에 정착하겠노라 하고 또 보호를 요청하여 나는 관대하게 이를 수락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이득 없이 그대들을 그저 관용하고 베풀어 주기만 하는 것이니 나도 신의 이름을 빌어 더 관대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 필요한 상황이오.”
“조세를 원하신다면 얼마를 드려야 합니까?”
“명나라의 영락통보(永樂通寶)로 한 달에 천 냥을 내어놓으시오. 그리한다면 내가 영구적으로 그대 나라의 신민이 내 땅에서 기거하는 것을 보호하리다.”
바호디르는 듣자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처음에 내항했을 때 이스칸다르 샤는 매우 반기며 뭐든지 협조할 기세로 굴었다. 섬을 쓸 수 있냐고 물었을 때는 좋다고 하며 병사까지 내어 줄까 하더니, 이제는 중계무역의 이권을 좀 더 취하려고 아집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은 중국처럼 큰 나라도 아니고, 아직까지는 무역을 크게 하는 나라도 아니며, 당장 무력으로 위협이 될 만큼 가까이 있지도 않으니, 괜히 강짜 한 번 부려봄 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큰 이윤을 남긴다기보다는 먼 바다를 오가며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바호디르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감내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바호디르가 이끄는 상단에서 나오는 이문이 저 조세를 내는 데에 사용된다면 그 이문의 폭이 심각하게 줄 것이 눈에 보듯 선한 것이었다.
결국 바호디르는 이를 갈며 우선 선액으로 6천 냥을 내어놓고 반년간의 보호를 주청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조선으로 돌아가자마자 나상의 오상복을 통해 세훈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쳇말로 계동 임금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세훈은 심왕의 작위까지 보유한 이른바 임금보다 기세등등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호디르는 사안의 중요성과 세훈이 관심을 보일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리낌 없이 보기를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세훈은 이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믈라카 술탄이 앞뒤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 말 아니오?”
“그렇습니다. 심왕 전하.”
“심왕의 작(爵)은 공공연히 입에 올리지 않기로 했소. 그냥 섭정공으로 부르시오.”
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복궁에 아무리 허수아비 취급이라지만 멀쩡히 임금이 익선관을 쓰고 앉았는데 작급이 아무리 낮다고는 하나 똑같이 전하 소리를 듣고 있기는 내심 불편한 세훈이었다.
“알겠나이다, 합하. 이해하신 바 그대로나이다. 이제는 그 항촌(港村)이 커져 그곳에서 객식하는 호구가 벌써 백 호에 가까워졌으니, 모두 이 조선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약조와 달리 핍박받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왕명의 은덕이 먼 바다까지 아직 미치지 못하는 탓이나이다. 지금 믈라카의 추왕(酋王)이 이제 으름장을 놓으며 군대를 물리니 언제고 바다 도적들의 손에 풍전등화처럼 섬의 백성들이 고스란히 놓여 있는 판국이나이다.”
“날더러 조선의 군대를 내어 그곳에 파유해달란 말이로군.”
“더 이상 여쭐 말이 없나이다.”
그러나 막상 바호디르의 말을 들은 세훈은 갑갑한 심정이었다. 물론 여태껏 군대가 필요하다면 동원해 왔다. 그러나 명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내전을 벌이고 전쟁으로 이어지게 만들어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전례에 이어 경인동정 때는 원래의 의도했던 왜구 소탕 이상으로 교전 범위를 확대해 큐슈의 다이묘들을 복속시키고 영향권을 확대해 조선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세훈은 근대화를 시키기 위해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다른 국가들을 노골적이든 교묘하든 눌러야 된다는 것이 영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었다.
나라가 힘을 얻게 되고 여기저기 그 힘을 사용하게 된다면 분명히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근대화는 힘을 얻겠지만, 반대로 내부에서는 마치 예전의 유럽 제국주의 국가나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국가들에게 문화적인 개화 정도로 서열을 매기고 조선인이 아닌 사람들은 토인이라고 얕보며, 원주민에 대해 총질하기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삐뚤어진 국수주의자, 혹은 제국주의자들이 등장할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결합되는 것으로 순수하게 교육의 문제로도 해결할 수 없고, 그렇다고 세훈이 생각하는 근대국가로 가는 길에서 이들의 등장을 예견하기에는 충분했지만 막을 방법이 뾰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래도 주변 국가와의 비등비등한 싸움에 가까웠고, 활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핑계가 가능하지만, 먼 상남, 그러니까 세훈이 기억하는 22세기의 싱가포르가 있었던 그 땅에 군사적인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확히 선후 관계를 따져서 내게 명문화된 장계를 올리시오. 내가 좀 숙려해 보고 대답하리다.”
세훈은 이렇게 일단 바호디르를 물리고 나서, 나중에 따로 올라온 장계를 토대로 심사숙고를 거듭했다.
분명히 세훈이 생각하기에 만약 지금이 현대라면, 군사를 투입하기 위한 명분은 나름대로 충분한 것이었다. 굳이 국제법을 빌린다면, 싱가푸라 섬, 즉 상남은 이스칸다르 샤도 분명히 클레임을 가지고 있는 땅이지만, 반대로 여기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주지였으므로, 무주지 선점으로 실효 지배의 권한을 획득했다고 해석하고 군대 주둔의 여지에도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비록 이곳에 오랑 라우트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있다고는 하나 정치 세력화된 집단이 아니므로, 조선이 이곳을 지배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 근대식 논리로는 당연히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아직까지 이런 국제법 체제는커녕 근대적인 민법, 사법도 정리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논리의 주장은 그저 갈 곳 잃은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스칸다르 샤의 변덕은 중세의 관점에서는 그저 용납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세훈은 세훈대로 이렇게 어렵게 키운 함대가 오갈 기항지를 이미 얻었는데 손쉽게 놓아 주기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국 바호디르를 불러서 대충 합의를 보고 왕을 설득시켜 파유외방군인칙유(派留外邦軍人勅諭)라는 조칙을 하나 만들어다가 진서도독부의 기주에 주둔해 있던 일부 병력을 차출해 30의 기병, 100여 명의 소총병과 20문의 소포를 보내어 주둔케 했다.
파유외방군인칙유란, 본토 및 진서도독부를 떠나서 원양(遠洋) 각처에 주둔하는 군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수칙 같은 것으로, 어설프게나마 근대적 인권과 교전 수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훈이 초안을 잡고 이것이 그대로 왕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인데, 대충은 적의 공격을 받기 전에 쉽게 공격을 행하지 않고, 근방의 원주민들을 멸시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먼 바다에서는 왕덕(王德)을 친히 보일 것이며, 세세의 덕업을 만방에 고하는 첨병이 되라는 따위의 것이었다.
당연히 지켜지기 쉽지 않을 말들 투성이었지만, 세훈으로서는 이제는 이론가보다는 정치가 입장에서 이런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 가을이 되자 다시 페르시아로 가는 항로를 내기 위해 출발하는 바호디르 상단에 군선 한 척이 끼어 상남으로 향하니, 아직까지는 이스칸다르 샤가 약속대로 그곳의 조선인들을 보호해 주고는 있었다.
총 170여 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내려 이곳에 있던 100여 명의 믈라카 창병들을 설득 후 무장해제시킨 것은 다름 아닌 진서군 상남파견대(湘南派遣隊)의 파견대장인 기병 정위(正尉) 천안석이었다.
천안석은 이제 그간의 실력과 공훈, 그리고 육군진무관에서의 성적이 참작되어 이 상남파견대를 이끌 가장 적임자로 선발되었고, 이번에 부위로 진급하게 되어 기주를 떠나 이 먼 바다 밖 상남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찌 되었든 바다에서 포를 몇 방 쏘고 거리에서 총으로 위협해 얼마 안 되는 수의 믈라카 창병을 무장해제시켜 술탄에게 송환시켰다고는 하지만, 믈라카 술탄 입장에서는 이제 배신이라 여기고 치를 떨며 이곳 상남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이를 갈며 덤벼도 사실 조선에서도 잘못이 없다고 결백을 주장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믈라카의 이스칸다르 샤의 입장에서도 요새를 아주 함락시킬 정도의 병력을 이곳까지 동원하기는 수월하지 못한 입장이었는데, 아직까지 믈라카의 중심부와 이곳 상남 사이에는 국가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반농반적 집단인 오랑 라우트들이 바다와 땅을 오가며 활개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상남을 보호해 주기 위해 우호적으로 100여 명의 창병이 바다를 통해 오고 간 것과는 전혀 다른 정벌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부터 유화하던가 대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안석은 우선 이곳에 오자마자 이러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다행히도 이곳 상남에 머무른 지 수 년이 된 자들 중에서는 말레이어를 어느 정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자들이 있었고, 이들을 통해 교역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조선 거류민들과는 미묘한 관계인 이들 오랑 라우트와 접촉해 믈라카 술탄의 편에 서 주지 말 것을 부탁하며 패물을 주었다.
조선의 배만 공격하지 않는다면 바다에서 해적질을 얼마든지 관용하겠다는 구두 약정을 체결하고, 이들이 상남의 항구에 접안하여 상거래를 하는 것도 묵인하겠다는 특권을 주어 우선은 조선의 편에 서 있게 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거, 천 부위님이 하는 일 보면 신통하긴 한데,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니더. 이런다고 믈라카 술탄이랑 전투를 피할 수는 있긴 한 거니껴?”
천안석을 따라 자청해 종군해와 파견대의 보급관으로 있는 소만식이 물었다.
“이것 봐라. 여기서 왈패 짓할 거 아니면 내편은 있어야 하고 나중에 이득을 보려면 손해를 볼 때도 있어야 한 거고.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
“그렇다고 캐도 저런 시커멓고 수염도 안 나는 것들을 일일이 비위 맞춰 주기도 빈정 안 상하니껴.”
“옛말에 호월지가(胡越之家)라고 했다. 호라는 것은 북적(北狄)이요, 월이라는 것은 남만(南蠻)인데, 우리는 명나라 놈들이 보기에는 동이(東夷)이니 이 말마따나 죄다 형제 아니냐. 껄껄.”
“허이고, 그러고 보니까 그 나상 상단을 이끄는 그 눈 부리부리한 파사인 선주는 서융(西戎) 아닌겨. 천 부위님 말 듣고 보니 참 그렇네.”
“너도 문자가 늘었다.”
천안석이 빙그레 웃자 소만식이 되레 손사래 친다.
“천 부위님이야말로 누가 안동 풍산 바닥에 돌아가면 그 천칠개라고 생각하겠니껴. 하여간 장가도 몬 가고 땅 부치며 죽상 쓰고 다니던 그때 모습을 지금 형수님도 봤어야 하는 긴데.”
“사람이란 다 바뀌는 거다. 나 같은 농군도 이렇게 출세할 수 있으면 그게 나한테는 요순지절 아니겠냐. 어쨌든 두고 봐라. 니 걱정한 만큼 이게 손해도 아니고, 믈라카의 술탄도 이들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천안석의 예측대로 이스칸다르 샤는 발을 동동 구르기는 했지만, 괘씸하다고는 해도 따지고 보면 자신도 군사 하나 동전 한 푼 잃은 것이 없는지라, 괜히 손실을 자초해 가며 상남을 공격하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대신 이스칸다르 샤는 조선인이 믈라카의 항구로 들어와 무역하는 것을 엄금한다는 으름장만 놓고 말았는데, 애초에 믈라카에서 무역을 크게 하지 않고 중계지가 필요했던 조선으로서는 상남의 요새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1420년 맹춘(孟春)
조선국 한성부.
어느덧 한 해가 또 저물고 새로운 해가 밝아 왔다.
봄바람이 조금 불어오기 시작해 날이 따뜻해지자 육군 대장 송거신의 정자인 농월정(弄月亭)에는 가벼운 주안상이 올라오고 여러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학생인 듯 유건(儒巾)을 두른 이도 있었고, 육군의 군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패도(佩刀)한 이도 있었으며, 화려한 자색의 도포를 차려입은 한량도 있었는데, 이들 모두 약관 전후의 나이로 이제 막 어른 행세를 할 법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다음 세대를 일굴 면면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중에는 세훈의 아들 현도와 현진도 있었다. 이 해 봄에 현도는 스물하나 현진은 열일곱으로, 제각기 장성하여 준재(俊才)를 빛내고 있었다.
특히 맏이인 현도는 이제는 어릴 때의 장난기 어린 얼굴을 찾아보기 힘든 잘생긴 헌헌장부의 태가 나고 있었는데, 그 뛰어난 외모와 머리로 한성부중에는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현도는 네 해 전 공조 산하였던 화학전습원에 입교하였다가, 이듬해 화학전습원이 4년제의 교육 기관인 학습원(學習院)으로 개편되자 이곳으로 옮겨 공부를 마친 뒤, 갑등의 성적으로 졸업이 예정되자 그해 가을에 전시(殿試)를 치르고 차석으로 급제하여 올해는 한림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동생인 현진은 학습원을 택하지 않고 활달한 성정대로 육군진무관에 제9기 생도로 입교하여 올해 2년 차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육군진무관과 해군상무관 또한 보다 뛰어난 장교를 양성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4년제로 개편된 뒤였다.
그 선배가 바로 백제공 대내(大內, 오우치)가의 후계자로 조선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건너온 오우치 모치요(大內持世, 대내지세)였는데, 13년에 입교하여 제3기 생도였다.
모치요는 이미 예전에 육군진무관을 마치고 참위로 임관하여 여러 진위대에서 경력을 쌓고, 이번에 이방원을 몰아냈던 갑신반정과 명과 싸웠던 을유전역 당시 창설되어 국왕의 비호와 수도 방비를 담당하는 시위대(侍衛隊)로 보임되어 정위(正尉)의 계급을 달고 보병과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열 넷이 되어 올해 학습원에 일찍 입교하게 된 최해산의 장남 최공손(崔功孫)도 유건을 쓰고 자리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현도와 어릴 때부터 막역지우로 지금은 스물 셋의 나이가 되어 이미 한림원에서 수학중인 황보인(皇甫仁), 성균관 출신으로 갑등 장원으로 졸업하여 전시에서도 장원 합격하고 황보인과 함께 한림원에서 수학중인 정인지(鄭麟趾), 육군진무관 제5기 생도로 모치요보다는 두 기수 아래, 현진보다는 네 기수 선배인 이징옥(李澄玉), 목포부사로 부임해 있던 설경수의 조카이자, 외학원(外學院)을 갑등으로 졸업해 두 해 전 전시에 급제하여 역시 한림원에서 공부 중인 설순(퐄循) 등이 그 면면으로 있었다.
이들은 거의가 명문거족의 자제들이었지만, 그보다 뚜렷한 특징은 바로 실력이 뒷받침되는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부유한 환경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를 감안하고서라도 각기 학습원, 육군진무관, 외학원 등에서 탁월한 재능을 이미 보인 이들이었다.
때마침 이들은 나이도 비슷해 이미 어울리고 있던 현도, 황보인, 오우치 모치요의 3인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해 어느덧 새해를 맞이하면 연례행사처럼 이들을 도타이 아끼는 송거신의 농월정에서 모여 주반을 올리고 시사를 논하곤 했다.
“요즘 공부는 어떠한가?”
술자리가 거나해질쯤, 이제는 조선말이 어색하지 않게 입에 붙은 모치요가 현도에게 물었다.
서로 자주 붙어 지내곤 했지만 모치요가 다시 한성으로 부임되어 온 것이 최근의 일이라 한동안 서편으로 소식만 왕래할 뿐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저 그렇소, 형님. 전시에 급제하여 이제 한림원에 들어가면 졸업하는 대로 종5품에 등용되는 일이나 딱히 아직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없으니 사직에 누가되지나 않을지 걱정이올시다.”
현도의 말에 모치요가 껄껄 웃는다.
“그러니 군인이 편한 노릇이지. 무관이야 하는 것이 나라를 단단히 방비하고 적을 막아낼 궁리만 하면 되는 일이니 말이네. 그나저나 자네도 이제 혼사를 치러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슬슬 내 사촌 누이를 그만 데려가게나.”
모치요의 말에 현도가 그만 마시던 술에 사레가 들었다.
사촌 누이란 다름 아닌, 현도가 7년 전 이곳 농월정에서 처음 마주하여 교분을 쌓기 시작하다, 이내 남녀의 감정으로 발전하고 말았던 당대의 오우치가 당주 오우치 모리미의 무남독녀인 에히메를 말하는 것이었다.
“흡……. 요즘 혜희(惠姬, 에히메)는 어찌 지낸답니까?”
“허, 그 남편 될 사람이라는 자가 어떻게 된 게 아내가 될 사람이 지내는 요량도 몰라.”
“장난 그만치고 말씀해 주십쇼. 학습원 4년 차가 되어 졸업과 전시(殿試)를 준비하는 통해 쉽게 연락 닿지 못한 것을 아시잖습니까. 괜한 소문이 돌아 폐가 될 것 같기도 하고. 혜희 나이가 이제 열아홉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겠지만, 조선에서는 시집가고도 남을 나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그런데 이미 그 엄한 나이에 심왕의 세자와 백제공의 무남독녀가 청춘(靑春)이라고 온 장안에 소문이 다 났으니 이 어이할꼬.”
현도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그만 헛기침만 해댔다.
혜희, 그러니까 에히메가 조선으로 건너온 지도 어느덧 일곱 해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 나이는 방년(芳年)인지라 혼사를 닿고자 야마구치의 백제공 오우치 모리미에게는 딸을 시집보내라는 온갖 중신이 들어온 지 벌써 여러 해였다.
게다가 모리미 자신도 어여쁜 딸을 보기 위해 여러 번 딸에게 한성에서 그만 돌아오라고 서찰을 보냈으나 도무지 좀 더 있겠다는 회신 말고는 받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한성에 입조(入朝)하러 상경한 길에 딸과 조카를 찾았더니,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딸이 심왕 김세훈의 아들과 정분이 두터워져 둘 다 집안에 들어오는 혼사를 거절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하여 몰래 찻상을 차리고 세훈과 독대하여 이 문제를 논하니, 세훈은 그저 짐짓 웃으며, “그야 마음 가는 대로 하여 주면 될 노릇이지요.”하고 말하니, 오우치 모리미는 이것을 약혼이나 다름없이 여기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야마구치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이 뒤로 세훈과 에히메가 맺어지는 것은 기정사실화되어 더 이상 양가에 중신이 서지 않을 정도로 조선 본토와 진서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것이 둘 다 그 외모가 헌앙할 뿐더러, 조선에서 명문으로 따지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집안의 자제들이니 그럴 법도 했다.
거기에 굳이 보태자면 조선의 실세인 섭정공, 즉 심왕인 세훈의 아들과 경인동정 때 조선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공가(公家)의 사직을 세우고 진서 일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확보한 오우치 모리미이 딸이니 그 상징적인 의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훈의 애매한 태도로 인하여 아직까지 혼사를 맺는다는 확언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이것은 현도가 직접 찾아와 마음을 밝히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조선인이 보기에는 혼사는 가문의 일이오, 이것을 세훈이 이렇게 다루는 것은 의뭉스럽기 짝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세훈은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가 살았던 22세기처럼은 아니더라도, 세훈과 에히메가 서로 집안의 이해와 얽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확신을 갖고 혼례를 치르기를 바라 직접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세훈의 영향 아래서 자랐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의 사고를 접하고 자란 현도이니 만큼, 신부감을 직접 데려와 아버지에게 혼사를 청한다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니, 이 일을 다 알고 있는 아버지가 혼사에 관해서는 입 하나 벙끗하지 않는 것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학습원에 들어가고 전시를 준비하면서 에히메와도 자주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에히메는 금강산에 들어가 산을 구경하고 심신을 다스린다는 핑계로 신라조 의상 대사가 창건한 금강산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가 통 나오지를 않았다.
“금강산에 들어간 뒤로는 연통을 해 보지 않았지?”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보인이 현도에게 은근슬쩍 물어 왔다.
황보인 또한 처음에는 치기 어린 관심을 에히메에게 표하기도 했으나, 이내 현도와 에히메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알아채고서는 물러섰다.
특히 조선의 사대부 예절을 교육받은 그로서는 나이가 찬 뒤로는 에히메와는 자리도 같이 하지 않고 그저 치기 어린 지난날의 춘정(春情)으로 치부하여 멀리서 현도와 에히메의 사이를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언제고 혼사를 치르려니 하던 그들이 아직까지도 이러고 있는 것이 묘하게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연통은 무에 연통인가. 이미 이 사이를 다 알면서도 일언반구 없는 아버님이 야속할 뿐이네.”
현도의 한숨에 모치요가 술잔을 부어 주며 반색할 만한 말을 던진다.
“에히메는 엊그제 한성으로 다시 올라와 정동(貞洞)에 집을 들였다. 늦지 않았으니 월장(越牆)이라도 해보던가.”
모치요의 말을 듣고 나니 현도의 얼굴에 번쩍 화색이 돈다. 현도는 그길로 정자에서 뛰쳐나와 말을 달려 숭례문으로 들어서 정동으로 향했다.
정동은 숭례문에서 올라와 서쪽으로 난 골목에 있는 반촌(班村)으로 화려하게 단장된 기와지붕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그중 모치요가 일러 준 한 집에 이르러 차마 문을 두드리지는 못하고 술기운에 담을 넘어 들어가니, 운이 좋게 안뜰이었다.
“혜희, 혜희, 날세. 돌아왔으면 왜 연락이 없는가.”
마루에 털퍽 주저앉아 울음 머금고 주정하니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안에 있는 줄 잘 아네. 제발 나와서 얼굴이라도 비추어 주게나.”
그때서야 문틈이 살짝 열리고 발 하나가 슬쩍 밀려 나온다. 현도가 얼굴을 들어 보니 틀림없이 에히메가 분명했다. 그녀는 말없이 현도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어찌 서찰에 답장 한 번 하기가 그렇게 어려와 붓 한 번 안 들었는가.”
“먼 데서 공부하시는 님에게 어찌 그리 연정을 강제하겠나이까.”
에히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훈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벌떡 일어나 마당을 휘젓더니 눈을 번뜩이며 말한다.
“나도 더 이상은 아버님이 언질을 주시기를 기다리지 못하겠네. 우리가 혼사를 맺게 해 달라 오늘 당장 주청하러 가 봐야겠네.”
“성급하신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현도는 말리는 에히메가 도리어 원망스러운 기분이었다.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 나가 다시 말을 달려 계동의 심왕저로 들어서 대청마루 아래에 꿇어앉고 세훈이 나오길 기다리니, 무슨 일인가 싶어 세훈이 곧 방문을 열고 나와 앉는다.
“현도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아버님, 소자 긴히 드릴 말씀이 있나이다.”
엎드려 있던 현도가 얼굴을 들자 불콰한 술기운이 면전에 가득한 것이 눈에 보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술 취한 채로 뭔가를 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세훈이기에 기분이 썩 좋지 않게 이야기를 듣는다.
“말해 보거라.”
“백제공의 여식과 소자와의 염문이 저잣거리에 자자한 것을 소자가 잘 아나이다. 그간 아버님께서도 이 사실을 익히 들어 아셨으나, 여기에 대해서 어떠한 언질도 없으셨나이다. 그러니 소자 일단의 공부는 마치고 이제 한림원에 들어가게 되니 그만 혼사를 윤허하여 주십시오.”
아들 현도의 말이 세훈의 기대에는 내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너희들의 혼사를 막은 기억이 없다.”
“그럼 어찌 이런 추문이 돌아다니는데도 가만히 계셨나이까?”
“내가 결정한 일이 아니라 너희가 연정을 품어 일이 장안에 자자한 일이니, 네가 내게와 직접 허락을 구하면 나는 언제고 허락해 주려 했다. 이것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뜻한 것이니 나는 사사로이 간여치 않으려 했다.”
세훈이 나직한 음성으로 타이르자 현도는 침착하게 대꾸한다.
“그것은 반가(班家)의 법도가 아니나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가문의 의중은 없이 함부로 행동하여 연정을 품고 만난 것은 반가의 법도이더냐. 네가 시작한 일이니 만큼 네 스스로 매듭을 맺어야지. 이렇게 술 취해서 내게 주정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니라. 내일 맑은 정신이 되거든 혜희를 데리고 나를 다시 찾아오거라.”
이렇게 아비의 마음을 뒤늦게 안 현도는 그만 부끄러운 나머지 무릎을 꿇고 술기운을 털어내며 목소리를 고치고는 앉아 큰절을 했다.
“소자가 잘못했나이다. 내일 의관 정제하여 다시 찾아뵙겠나이다.”
다음 날 현도는 에히메를 직접 계동의 심왕저로 데리고 와 면면히 인사를 올리고 세훈의 허락을 받아, 직접 진서의 야마구치로 건너가 오우치 모리미에게도 혼사를 허락받아 양가가 통혼하기로 되어 늦은 봄 혼사를 치르니 현도의 나이 스물 하나, 에히메의 나이 열아홉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