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장 갑진경장(甲辰更張) (18/82)

제17장 갑진경장(甲辰更張)

「홍범(洪範) 8조

1. 명(明) 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국본(國本)의 터전을 튼튼히 세운다.

1.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의 본분과 의리를 밝힌다.

1. 임금은 정전(正殿)에 나와서 시사(視事)를 보되 정무(政務)는 직접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재결(裁決)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1. 왕실에 관한 사무와 나라 정사에 관한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

1. 의정부(議政府)및 육부(六部) 등 관아(官衙)의 직무와 권한을 명백히 제정한다.

1.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徵兵法)을 적용하여 군사 제도의 기초를 확정한다.

1. 민법(民法)과 형법(刑法)을 엄격하고 명백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하거나 징벌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1. 인재 등용에서 문벌에 구애되지 말고 관리들을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洪範:“一, 割斷附依明國慮念, 確建國本基礎. 一, 制定王室典範, 以昭大位繼承ズ宗戚分義. 一, 大君主御正殿視事, 政務親詢大臣裁決, 后嬪宗戚, 不容干豫. 一, 王室事務與國政事務, 須卽分離, 毋相混合. 一, 議政府及六曹等各官衙職務權限, 明行制定. 一, 敎育將官, 用徵兵法, 確定軍制基礎. 一, 民法、刑法嚴明制定, 不可濫行監禁懲罰, 以保全人民生命及財産. 一, 用人不拘門地, 求士遍及朝野, 以廣人才登庸.”」

―진종어제홍범칙유(眞宗御製洪範勅諭)

1424년 계춘(季春)

조선국 한성부.

1424년의 조선의 정세는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고려가 몰락하고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여 조선을 개국하고, 그 자제들이 서로 왕권을 다투는 와중에 반정(反正)이 연이어 섭정공 김세훈이 국권을 휘두르며 개혁 정치를 단행한 지도 어언 2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그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이런 개혁의 흐름은 당연히 수구(守舊)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일조하게 마련이다.

특히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여론을 주도하며 조선을 개국하는 데도 그 공의 일조가 있는 유학자들의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경사(京師)의 관리들보다는 삼남(三南)의 유생들이 개혁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격분한 어조로 연대하여 경복궁 앞에 3천 인이 꿇어앉아서는 국권(國權)을 회복할 것과 섭정공을 폐하고 심왕의 작위를 박탈하며, 국왕이 몸소 친정할 것을 호소하고 나섰는데, 시위대가 출동하여 이들을 강제 해산시켜도 다음 날이면 다시 나타나 방을 붙이고 꿇어앉아 호소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유학의 대본(大本)을 내세워 군권을 감히 신하가 농단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의 상소를 줄기차게 내놓았지만, 실상은 세훈의 집권 이래 사회적으로 줄어드는 자신들의 입지에 대한 불만의 연대 표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 유학자들은 고려 때로부터 지방에 거대한 산야(山野)와 농지를 보유한 지주 계급으로, 세훈의 등장 이후 상업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호상(豪商)이 늘어나고, 제조업이 등장하면서 농산물에 기반한 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이행되는 현상이 일어나자 상대적인 부의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이앙법 등의 보급과 학제(學制) 및 과거제도의 대대적인 개편으로 인하여 전통적으로 교육받은 유학 계급보다는 일반 양인(良人)들의 관직 진출이 비교적 늘었고, 상인들과 함께 새로이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 이들 계급의 성장은 소작농의 규모 축소와 자영농(自營農)이나 부농(富農)의 성장을 가져왔다.

고려 말로부터 소위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라는 계층을 형성하며 성리학을 숭앙해 왔던 이들은 이런 공상(工商)의 성장과 양민들의 권리 증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신진사대부들의 생각이 동일했던 것은 아닌데, 특히 경사(京師), 즉 한성에서 관직(官職)과 연관된 대관(大官)들은 이른바 경사거족(京師巨族)이라 불리며 김세훈 정권하에서 단단한 끈을 형성해 놓고 있었다.

이들은 이방원을 따랐던 구신단(舊臣團)이 이미 제하여 거르고 남은 벼슬아치들과 탐라의 호족들, 그리고 조사의 군의 수뇌를 흡수한 것을 근간으로 하여 고려 때부터 줄곧 조정에서 복지부동으로 출사하고 있는 몇몇 대신들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세훈의 지지층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거기에 전란을 통한 대대적인 군제 개혁으로 인하여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총 22개의 진위대 및 진서군과 해군까지 포괄하는 군사력의 확보는 감히 세훈을 끌어내리고자 한성으로 진격하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였다.

물론 여기에는 세훈의 집권 이후 성장하게 된 양민 계급의 근본적인 지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두 번의 전란 이후 태평성세를 구가하며 생활이 안정되자 현재의 상황이 고착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상업의 성장은 한성, 특히 세훈의 섭정 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가져다주고 있었는데, 가장 큰 규모로 국내와 국외를 오가며 상업을 하는 나상(羅商)은 거의 세훈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외의 송상, 경상, 내상 등을 비롯한 지방 각처의 상인 집단도 이 섭정 정부의 정책과 긴밀한 연간관계를 맺고 있는 터라 정권의 든든한 옹호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아직까지 지방에서 지도층 행세를 하고 있는 신진사대부들에게는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방적인 과거제도의 개수로 인하여 더 이상 지방에서 사서삼경을 읊는 교육 방법으로는 관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것은 세훈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기도 했는데, 사실상의 진사(進士), 혹은 거인(擧人)의 학위가 나오는 교육기관은 모두 한성에 집중되어 있었고, 실질상 과거제도에 포함 되는 소위 격물학(格物學), 즉 과학(科學)이라 할 만한 내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에서 지방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전통적 유교 성리학에 대한 극단적인 옹호로 휘몰아치면서, 근 10여 년간 지방 사대부들 사이에 불편한 기운이 조성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해를 거듭하여 눈에 보이는 결과들로 나타나자 사대부들의 불만이 폭발하고야 만 것이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이러다가는 반란이라도 일으킬 기세로구려.”

일전 전란 중에 설치한 뒤 폐지하지 않고 세훈 자신이 개별적으로 내각(內閣)을 꾸린 것이나 다름없는 비변사에서 쉴새 없이 회의가 주재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훈은 상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마를 찡그렸다. 이제 쉰하나의 나이가 된 그는 아직 새치 하나 없었지만 피부에 생긴 주름들은 이제 나이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의료 제도가 미비한 조선으로 넘어오게 되니, 아무리 스물여섯 살까지 22세기에서 잘 관리되던 몸이었다 할지라도, 어금니가 몇 개 썩어 문드러지는 등 치아의 관리도 부실해지기 짝이 없었고 노화를 방지할 방법도 마땅치 않으니 이미 조선인의 평균 수명을 넘긴 그가 이 정도 젊음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일반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는 대단한 것이었다.

강력한 권력을 20여 년간 휘둘렀으나, 나름대로 그것을 남용하지 않고 적실한 일에 사용하려 했던 세훈이었기에, 조정은 그의 지지 세력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꿀이 있는 곳에 벌이 모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훈이 제시하는 시책(施策)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들보다 이득을 보는 이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비변사에 등청해 있는 이들은 지방의 사대부들과는 다르게 무너지고 있는 중세사회의 위에서 새롭게 태동하는 근세사회의 관료 집단으로서 득세하고 있는 지금의 기득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밖에 있는 이들은 한 나라의 지붕을 이고서 궁궐에는 주상이 앉아 계시고 계동에는 심왕 전하께서 앉아 계시니 아무리 왕작(王爵)의 봉위(封位)가 서로 달라 하나는 국왕(國王)이오, 하나는 번왕(藩王)이라고 하나 도대체 임금을 둘을 모시는 형국과 다를 것이 없으니, 신하된 도리로 심왕 전하께서는 이제 물러나고 주상께서 친정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나이다.”

대사헌(大司憲) 맹사성(孟思誠)이 말을 꺼내자 시선이 이내 그에게 몰렸다.

“그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소. 대사헌 영감이 도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오?”

예조판서(禮曹判書) 황희가 이를 비꼬듯이 쏘아붙였다.

황희는 평소 맹사성의 이런 늘어지는 기질을 못내 답답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맹사성은 두 눈을 끔뻑 하고서는 마치 느린 소처럼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주상 전하의 칭호(稱號)의 격을 올려야 합지요.”

“그 무슨 괴상한 이야기요? 그럼 황제(皇帝)의 존호라도 올리자는 말이오.”

황희가 반론하고 나오자 순간 좌중이 얼어붙었다.

지난 전란 이후 명과는 관계가 틀어진 지 20여 년이 흐르고 있었지만, 명목상의 조공 사절은 아직도 오고 가고 있을 뿐더러, 명나라에서 이제 조선에 직접 사절을 보내와 공물을 요구한다거나 내정에 간섭을 하는 일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지금의 국왕 또한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까지 서슬 퍼런 영락제가 두 눈을 부릅뜨고 도읍까지 북경으로 옮겨서 조선의 지척에 있는 와중에 주상을 황제로 칭하고 북경의 코앞에서 큰소리친다는 것은 늙은 영락제의 수염을 뽑아대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부적 소요를 해결하자는 일인데, 그것이 외부에서 오는 전란을 한 번 더 부추기게 되는 것이라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맹사성은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국왕의 위, 황제의 아래에 있는 존호를 올리면 됩지요. 주상 전하(主上殿下)를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로, 왕대비 전하(王大妃殿下)를 왕태후 폐하(王太后陛下)로, 왕비 전하(王妃殿下)를 왕후 폐하(王后陛下)로, 왕세자 저하(王世子邸下)를 왕태자 전하(王太子殿下)로, 왕세자빈 저하(王世子嬪邸下)를 왕태자비 전하(王太子妃殿下)로 하고, 전문(箋文)을 표문(表文)이라고 하고 내리는 말씀도 칙(勅)이라 하여 임금의 존위는 높이데 황제를 거스르지 않으면 될 일이오.”

“그러나 폐하라는 것은 원래 황상에게 삼갈 때 쓰는 말이오, 태후나 태자라는 말은 황(皇)과 나란히 오는 것이지 왕(王)의 존호와 감히 같이 쓰지 않는 말이오. 이 전례 없는 농단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황희가 여전히 반대를 하고 나옴에도 불구하고 맹사성은 그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미묘하게 왕의 봉호에도 등급이 있어 지금의 주상 전하는 궁호(宮號)를 달고 과인이라 칭하시고 육조(六曹)를 거느리며 국본을 일컬으나 심왕 전하는 저호(邸號)를 쓰고 여(余)를 칭하며 왕부(王府)로 딸린 것이 고작 호종(護從) 삼백여 명이니, 같은 왕작이라도 이리 다를진대, 그 사이에 봉호(封號)가 늘어난다고 해서 황제의 위에 서는 것도 아니니 명에서도 시비 잡을 명분이 없소이다. 또한 아래위로 위계가 서니 이를 통해 사대부의 동요를 수습하고 다시 민심을 치리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훈은 내심 맹사성의 제안이 반가웠다.

장기적으로 안정된 권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섭정공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머무르기 힘들어 심왕(瀋王)의 작위를 확보한 것인데, 이것이 왕작(王爵)이다 보니 주상과의 지위 문제가 다시 미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트집 잡는다면, 임금의 칭호를 고치면 될 일이라는 맹사성의 대답은 유쾌한 것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라 쉬쉬하기는 하나, 세훈은 실제로 조선말에 이 호칭들을 고종(高宗)이 사용한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문헌 고사를 뒤져 보아도 제왕의 군호(君號)로 쓰인 바 없는 것이니 다들 저어하는 것이다.

“여도 대사헌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오. 다만 이것은 대내적으로 치리하는데 쓰고, 명에 들어가는 서계에는 이전과 같이 조선 국왕의 봉호(封號)를 쓰고 당분간 신속(臣屬)한다고 여겨지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직 적절하지 않소이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위계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국왕과 왕족의 존호를 높이는 방향으로 일단락되어, 대내적으로 사용하는 대군주의 옥새를 만들고, 관가(官家)에 칙유(勅諭)를 하달하여 전국적으로 널리 알리도록 하니, 이것이 1424년 음력 3월 보름의 일이었다.

1424년 중하(仲夏)

조선국 한성부 경복궁.

금상 이인(李仁)은 목종의 장남으로 보위에 오른 지 올해로 십 년째였다.

폐주 이방원을 제하고라도 조선의 4대째 임금으로서, 왕조의 중흥기에 접어든 이때에도 하는 일이라고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경복궁에 틀어박혀 활을 쏘거나 난을 치거나 하는 것이 다였다.

그는 그다지 아버지처럼 욕심이 없고 대세에 휩쓸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고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이 무언가를 펼치기에는 심왕의 위세가 너무나도 강고했기에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침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정 신료들은 거의가 모두 심왕 김세훈의 수족과도 같이 되어 경복궁에 등청하는 것은 매년 정초의 조회(朝會)나, 국경사(國慶事)에 관련된 때라고만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조정 신료들 중에 내심 근왕(勤王)을 말하며 드나드는 몇몇의 인물이 있었다.

이인은 혹여나 말이 새 나갈까 하여 조심스레 이들을 불러 요즘의 정국을 듣거나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근왕파로서 경복궁을 드나드는 것이 바로 최만리(崔萬理)였다.

봄이 끝날 무렵, 이인은 느닷없이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대군주(大君主)라는 존호(尊號)를 올릴 것이니 추인을 해 주십사 하는 장계를 하염없이 읽고 있었다.

최만리가 마침 이때에 들어와 어떤 전말인지를 알고서는 엎드려 부복하고는 임금에게 고했다.

“신이 근자에 듣기에 바깥에서는 감히 존왕을 겁박하는 심왕을 폐하고 나라의 국사를 국본이신 전하에게로 돌리라는 삼남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친 줄 압니다. 이에 심왕과 간신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이런 칭호를 올려 사태를 무마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부디 가납치 마시오소서.”

최만리의 말을 들은 이인이야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먼 곳에 있는 삼남 유생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까운 도성의 성내에는 죄다 심왕의 정치를 칭송하는 자들로 끓어 넘친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는 이인이었다.

“과인은 그저 허수아비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옥새를 찍어 넘기는 것뿐이네.”

이인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하자, 최만리는 더욱 엎드려서 눈물을 흘린다.

“통촉하시옵소서, 전하. 감히 짐(朕)이니 폐하(陛下)니 칭호만 올려 안으로는 사직을 겁박하고 밖으로는 대국의 심기를 어지럽혀 제후 된 도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 어찌 천기가 무너지지 않고서야 이런 불의한 일을 할 수 있겠나이까. 차라리 신에게 명하시어 대전 앞 품계석에 머리를 찧게 하소서.”

“그러나 과인과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여기서 한숨을 토해내는 일밖에 없다. 과인에게는 군대도 없고 신하도 없으며 이제는 백성도 없구나.”

이인의 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지금 삼남의 유생들이 들끓고 있나이다. 전하께옵서 저에게 교지(敎旨)를 하나 내려 주신다오면, 이것을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내붙여 유생들로 하여금 보게 하겠나이다. 삼남의 뜻이 이미 이러하니 심왕의 권세도 앞으로 얼마 가지 못할 것이나이다.”

그러나 이인은 분별은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옥좌에 앉아 있으나 왕권은 그의 손에 있지 않았기에 이것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한성에 흘러들어 와 대좌하던 유생들이 시위대(侍衛隊)에 의해 해산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대의 충정은 내 갸륵히 여기나 이는 이미 교지 한 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춘추전국(春秋戰國)의 제후들이 사분오열하여 서로 칭왕을 할 때도 주나라의 사직은 천 년을 흐를 수 있었네. 그것은 무딘 검을 벼리는 것을 날선 검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네. 내가 자중함으로서 종묘와 사직을 굳건히 할 수 있다면 이것이 후세의 덕복(德福)이 되리라 생각하는 수밖에.”

그렇게 이인은 스스로 납득을 시키고 칭호를 올리는 것을 가납한다는 교지를 내리고 옥새를 찍었다. 이로서 이것이 정식으로 공포되어 금상 이인은 조선 국왕에서 대조선국 대군주로 그 호칭이 높여졌다.

경복궁 대좌에 앉아 포석 위에 나열한 조정 신료들이 대군주 폐하 구천세를 외치는 동안에도 이인의 귀에는 그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북악산의 바람 소리만이 내돌아 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최만리의 분별은 임금의 그것 같지 못했다.

최만리는 결국 대군주의 존호가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울화가 치밀어 어찌 식음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앓다가 이내 붓을 들어 교지를 흉내 내어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최만리가 지어낸 교지의 내용이란 다름이 아닌 근왕보위(勤王保衛)하여 가렴주구하는 심왕 김세훈의 도당을 작폐(作弊)하고 국본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옥새를 심왕이 훔쳐 국시(國是)를 내리고 있어 교지에 옥새마저 찍지 못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다분히 감정적인 선동을 하면서도 교지의 위조를 일축하는 괴문(怪文)이었다.

최만리는 성리학만을 끊임없이 공부한 근본주의 유학자였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의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여겨지자 임금을 부추겨 나라를 바로잡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마땅치 않자 기괴한 수단까지 동원하게 된 것이었다.

한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에 빠져 그만의 원리를 고집한다면 결국 일이 이렇게까지 치달아도 그 잘못을 모르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위조된 교지가 한성 부중에 여기저기 나붙고, 석고대죄를 하겠노라고 상경하여 시위대에 추포(追捕)되기를 거듭하던 삼천의 사대부들이 이 방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대군주의 칭호를 올려 위계의 질서를 잡는다는 일에 대하여 천조인 명나라의 재가 없이 제멋대로 왕권을 농단하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의견이 비등하던 차에, 최만리의 위조 교서가 나붙자 그것의 진위는 따져 보지도 않고 근왕을 위해 거국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선동이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교지를 전부 회수하고 한성 각지에서 이를 선동하던 상경한 유생들을 모두 추포하여 죄질이 무거운 자는 구금하고 나머지는 한성 밖으로 추방령을 내렸는데, 이들 중의 일부가 이 교지를 필사하여 삼남의 각 고을로 가지고 내려가 마치 주상이 봉기를 촉구하는마냥 각처의 사대부들을 들끓게 만드니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소란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1424년 계하(季夏)

조선국 충청도 공주부.

충청도의 수부(首府)인 공주에서 인근 사대부들이 이른바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각자의 사노비들을 끌어 모아 도검으로 무장시키고 공주부 일대를 장악한 것은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공주는 그간 한성과 전라도의 곡창지대 및 목포부를 잇는 주요 교역로의 요지가 되어 호상(湖商)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번창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직접 땅을 사들어 곡물 장사에 뛰어들고, 공주부 일대에 영향력을 점차 증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조선의 신분 제도의 근간은 양천제로, 비록 비공식적으로 권력 집단인 사대부를 칭하는 양반(兩班) 계급이 있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 양인과 천인의 구분이 더 중시되어, 양반과 상놈을 가르는 잣대는 그다지 엄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지방 사대부를 전혀 중시하지 않는 세훈의 정책이 계속해서 시행되자 그렇잖아도 많은 것을 잃고 있던 공주 일대의 사대부들이 먼저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물론 그 기폭제는 최만리의 위조 교지였다. 이때 공주 출신의 안학기(安學基)라는 유생이 한성으로 석고대죄를 청하러 올라갔다가 대군주의 호를 올리는 것이 천조의 추인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비분강개하던 차에, 이것이 심왕이 작당하여 왕을 겁박하여 꾸민 일이라는 내용으로 임금이 직접 내린 교지라 주장하는 방문이 붙자 이내 그것을 하나 뜯어 품에 간직하고 있다가, 한성 일대의 추포령이 삼엄해지자 고향인 공주로 내려와 평소에 뜻을 같이하던 사대부들에게 돌려 회람시킨 것이 그 시발이었다.

단순히 이 상황을 뒤엎길 바라던 사대부들에게 이 교지는 좋은 빌미가 되었고, 이내 몰래 밤에 사노비들을 동원하여 공주부 관아를 습격하고 충청감사인 변계량(卞季良)을 잡아다가 목을 베었다.

변계량은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문신으로, 조선조에 출사한데 이어 정변 이후에는 세훈의 아래에서 녹봉을 받아먹은 변절자라는 이유로 이들 대동계에 의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공주부와 충청도 일대에서 호상의 편의를 봐주었을 뿐더러, 이들의 사노비를 혁파해 상단 및 공방에서 고용할 수 있는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장계에 올려 조정에 제안한 것이 지역 사대부들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화를 입은 것은 변계량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경기와 호남의 가운데에 위치한 덕에 날로 번창하던 호상의 거부들도 이들 대동계에 의해 참살되었다.

이 당시 공주의 제12진위대는 공주 성내가 아니라, 금강에서 보다 올라간 쪽의 한밭[大田] 일대에 새로이 축지 공사를 하느라 공주 부성을 단단히 경계해 방비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틈을 노렸다가 공주부성을 장악하고 대동계가 농성에 들어가고야 만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충청도 일대의 사대부들이 사노비와 자신들이 소작을 주는 농민들을 선동하여 무장시키고 공주성으로 모여 들기 시작하니 소요가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역도들이 공주성을 점거하고 내륙의 운로(運路)를 막아서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에서 임한 방백(方伯)과 양만을 참살하였으니 이를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 병력을 집결시켜 공주성을 수복하고 역도들을 한성으로 압송하라!”

일이 벌어진 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제12진위대장 육군 참장(參將) 오견(吳堅)은 진위대 2만 병력의 군세를 몰아 공주성을 포위하고 총포로 성을 두드리니 이내 도검과 활로 무장한 역도는 와해되어 주동자 성수일(成秀壹)은 자결하고 나머지 사대부들은 추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당하니, 공주로 모여들던 충청도의 사대부들과 그 군세는 이내 곧 조각 나 도망가기에 바쁘게 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준동을 불사하려던 사대부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는데, 이미 각 지방마다 배치가 완료되어 징병제와 훈련 제도가 정착된 진위대들이 소요가 발생하면 즉각 총포로 이를 진압 가능하다는 것이 조선 전체에 확인된 사건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이 공과(功課)를 듣고는 육군 참장 오견을 부장(副將)으로 진급시키고 서성장 대훈위 3등을 수여하여 그 공을 치하하고, 공주12진위대의 각 공이 있는 장교와 병졸을 진급시키고 포상하여 독려했다.

또한 이 일의 원인을 밝혀 방을 붙인 최만리를 추포하고 국문하여 참수한 다음 남대문 밖에 효시하니 다름 아니라 어령(御令)을 참칭하고 반역을 선동한 죄였다.

대군주 이인은 이로서 더욱 궁내에서 자중하게 되니, 혹여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올 경우 그나마 지니고 있는 왕좌도 위태롭기 짝이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조정과 군부, 상공업자와 일반 양민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했던 이 역란(逆亂)은 사대부들의 의지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고, 오히려 새로운 개혁론이 나오는 데에 힘을 실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해,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조정에서는 새롭게 조선의 틀을 바꿀 논의가 시작되기 시작하니, 이른바 갑진경장(甲辰更張)이 시작되려 하는 것이었다.

1424년 맹추(孟秋)

조선국 한성부.

공주의 변란에 대해 갑론을박을 거듭하던 조정은 가을에 접어들자 세훈을 비롯한 탐라당(耽羅黨) 및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지지에 힘입어 강력한 조정책을 내어놓는 것에 대한 공론이 무르익고 있었다.

첫 번째로는 지방의 사대부들이 병력을 손 쉬이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 기존의 사노비에게 무장시키고 사대부의 땅을 부치는 소작인들을 겁박하여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전면적인 사노비 철폐를 시책으로 내어놓았다.

두 번째로는 지방의 교육 체계를 정비하여 이들 사대부가 관직에 출마할 기회를 넓혀 줌으로서 불만을 위안하자는 것이었는데, 각 도의 관찰사 주재지에 졸업 시 을등과 병등의 자격이 나오는 상학(庠學)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지금의 교육 시책에 따른 격물학 관련의 교육 과정 또한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편성하여, 일반 유자(儒者)들에게도 신식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히 배분하고자 했다.

세 번째로는 왕실의 내탕금(內帑金)과 조정에서 행정에 사용하는 예산을 완전히 분리하고, 징세(徵稅) 제도를 일원화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세훈의 주장으로 은본위(銀本位)의 제도를 수립하여 화폐를 발행하고자 하는 준비가 시작되었는데 평안도, 강원도 일대 등의 30여 개 광산을 국가에서 보유 및 관리하고, 여기서 채석된 은을 화폐의 가치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보유고로 두고, 순도 97%의 은으로 제조한 정량 화폐를 찍어 보급시키기로 했다.

그에 이어 보조 화폐로 동전 또한 주조하기로 했는데, 이에 따라서 은전의 단위는 냥으로 하고, 동전의 단위는 푼으로 하기로 했다.

이를 전국적으로 유통시킬 단계가 되면, 화폐의 유통이 활발한 곳부터 우선적으로 세금을 은납(銀納)하도록 하고, 나라의 발전에 따라 과중되는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인두세(人頭稅)를 도입하여 연간 1인당 반 냥을 납부하도록 관청에 고시하기로 했다.

네 번째는 법제(法制)의 정리를 주문했는데, 과거의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여 신법(新法)을 세우되, 사법(私法), 즉 민법(民法)과 상법(商法)을 특히 새로이 분법(分法)하여 체계를 세우도록 하였다.

형법의 경우 특별히 형벌의 정량화를 도입하여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형벌을 부과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 이를 추괄하여 국시(國是)를 특기한 것을 홍범(洪範)이라 하여, 현대의 헌법(憲法)에 대충이나마 갈음하여 홍범 및 민법, 상법, 형법을 4법이라 하고, 이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이란 이름으로 편찬하게 하였다.

여기에 이어 제대로 된 사법 제도를 세우기 위해 육전학당(六典學堂)을 개성에 세워 법률가를 양성시키기로 하니, 육전학당의 육전이란, 원래는 이전, 호전, 병전, 공전, 병전, 예전으로 육조(六曹)에 딸린 법을 일컫는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홍범, 민법, 상법, 형법 및 소송법(訴訟法)과 법리학(法理學)을 합쳐 6개의 전범(典範)을 교육시킨다는 의미로 고쳐졌다.

그중에서도 아직 민사 및 형사 소송 제도가 조선의 현실에는 아직 부적합하며, 전문적인 판사 및 검사, 변호사를 양성하여 지금의 조선에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세훈의 개인적인 판단에 의해, 이 소송법과 관련해서는 특별히 사법제도의 정비와 함께 교육 및 양성을 하기로 하고, 나머지 5전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편수와 함께 지속적인 교육을 행하게 명했다.

이 육전학당의 학도들은 나오면 법리학거인(法理學擧人)의 학위를 일괄적으로 받아 팔도와 각 부주군현에 파견되어 지방관의 법리해석을 자문하고 판결을 돕는 일에 종사하도록 정해졌는데, 지방관이 위임(委任) 시에는 직접 판시가 가능하도록 단서 조항을 두었다.

이들은 소위 그 학위를 따라 거인(擧人)이라 불리기도 하고, 공식적으로는 전리(典吏)라고 불렸는데, 정7품에 해당하는 지방 관리였다.

판결이 필요하면 백성들은 따라서 각기 속한 고을의 지방관에게 판결을 맡기고, 이에 불복하면 관찰사가 주재하는 재판으로 상소하도록 했다. 이른바 2심제였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정한 특별한 재판에 대해서는 한성에 설치된 어전법원(御殿法院)에서 최종 판결을 내리도록 했는데, 주로 국사(國事)에 관련된 일, 패륜(悖倫), 살인(殺人) 등 중범죄에 해당하는 것들과 행정상의 문제와 관련된 일들이었다.

이름은 어전법원으로 붙었으나, 실질상으로 임금 이인이 주재하거나 하지 않거나, 재판은 필요하다면 열리도록 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형부판서를 항시 포함한 정3품 이상의 관리 5인과 육전학당의 학유 3인, 그리고 왕족 1인과 작위를 지닌 자 1인으로 총 10인으로 구성한 뒤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종적으로는 국왕의 재가를 받아 판시토록 하였으나, 실질상으로는 형부판서(刑部判書)의 판결이 그대로 수용되는 구조였다.

마지막으로 행정제도를 정비하여 기존의 육조를 모두 육부(六部)로 고치고 육부 아래에는 기존의 서(署)와 도감(都監)을 처(處)와 과(課), 그리고 국(局)으로 고쳐 체계를 매기도로 하고, 기존의 조는 청(廳)으로 고쳐 독립 부처의 관호(官號)로 삼게 했다.

또한 6부의 관할 사무도 조정하여 이부(吏部)에서는 세무와 예산을 관장하도록 하고, 예부(禮部)에서는 교육과 전례를 관장, 호부(戶部)에서는 행정을 관장, 공부(工部)에서는 공산(工産)과 토건(土建)의 업무, 형부(刑部)에서는 법률, 병부(兵部)는 육해군의 사무를 관장하게 했다.

거기에 이어 외무청(外務廳)을 설치하여 대외 사무를 보도록 하고, 궁내청(宮內廳)을 세워 기존의 왕족과 환관(宦官) 등의 관리 업무와 왕실 사무에 관계하여 내탕금(內帑金)을 예부 예산에서 불하받아 사용하도록 조정하였다.

또한 훈작청(勳爵廳)에서는 훈장 제도와 대군주 아래의 왕작(王爵), 공작(公爵) 등 5등작(五等爵)의 보유자에 대한 사무를 보도록 하였다.

이렇게 정해진 내용을 비변사에서 정한 뒤 대군주의 재가를 받아 홍범(洪範) 8조로 반포하니, 이것이 훗날에 이르는 경진홍범(庚辰洪範)이라 하는 것이고, 이에 따른 개혁을 경진경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의 임시 기구가 상설로 변하여 내전 회의에 거의 갈음하여 국사를 일괄하던 비변사가 공식적으로 혁파되고, 대신의 의정부(議政府)의 조직을 정리하고 그 기능을 확대하여, 영의정(領議政)과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의 관직을 확고히 하고, 거기에 6부 판서와 각 청의 전서(典書)를 포함시켜 장관(長官)을 만들고 일종의 비변사를 대신할 의회(議會)에 해당할 만한 포괄적인 권한을 주었다.

의정부 회의는 대군주의 주재 없이도 열릴 수 있고, 이 의정부 회의에서 올린 내용을 상주하면 대군주의 재가 후에 효력이 발생하도록 하였으나, 지금과 같은 때에는 대군주 이인이 감히 의정부에서 올린 내용을 반려하여 돌려보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리하여 심왕 세훈이 섭정공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영의정에 자리에 오르고, 우의정에는 황희(黃喜), 좌의정에는 맹사성을 보임시키고, 이부판서에는 이직(李稷), 예부판서에는 고봉지, 공부판서에는 최해산, 호부판서에는 설경수(퐄慶壽), 형부판서에는 윤회(尹淮), 병부판서에는 송거신을 보임시켰다.

그에 이어 외무청(外務廳)의 전서(典書)에는 허조(許稠), 궁내청의 전서로는 서선(徐選), 그리고 훈작청 전서로는 김종서를 명했다.

이렇게 총 12인의 의정부 내각(內閣)이 들어서니, 소위 정치사에서 이를 이전과 구분하여 비변사 시대에 이은 경진내각(庚辰內閣)의 시기로 일컫기도 한다.

이를 통해 내무(內務)와 사법 및 재정 제도가 일괄적으로 개혁 및 정리되어 홍범과 함께 반포되니, 이것이 음력 9월 1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반응은 각계각층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군주 이인은 이를 추인하고서도 아무런 말을 사서에 남기지 않았는데, 혹여 비사(秘史)에는 전하기를 이미 이전과 달라질 것도 없으나 의정부의 권한을 두고서 불쾌감을 표했다 하기도 한다.

그 이후로 이인은 의정부 회의가 있을 때 내전으로 이들을 불러들이지 않고 칩거하며 옥새만 찍을 뿐 국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된다.

심왕이자 영의정인 세훈을 중심으로 한 신료 계층은 크게 세 줄기로 구분이 되고 있었는데, 세훈과 함께 반정을 주도하여 공신 계층이 된 탐라계 호족들을 일컫는 소위 탐라당과 고려에서 여태까지 벼슬을 하거나, 한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근거지를 마련한 명문벌족(名門閥族)을 일컫는 경화사족(京華士族), 그리고 마지막으로 을유전역 이후 새롭게 관직에 진출하고 과거제도와 교육제도에 간여하며 적극적인 개혁 정책의 지지 계층이 된 사대부 유학자 출신의 이들을 일컫는 한림당(翰林黨)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소 이해관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세훈의 개혁 정책으로 실질상의 권력 기반을 더욱 확충할 수 있기에 강고한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었고, 조정의 관직들을 거의 이들이 독점하는 상황에서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지방의 신진사대부 계층에서는 개혁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공주의 역모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뒤로 자중할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기존의 강경한 보수 정책을 옹호하는 이들과 지방에 상학을 설치해 주고 관직 등용의 기회를 넓혀 준 뒤로 정부 시책에 찬성하는 이들로 여론이 나뉘어 단합된 힘을 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에 장기적인 추세에서 지방에서 행사하던 영향력을 잃기만 할 뿐인 상황이라 이들에게 유일한 출구는 사노비를 해방하고 소작농으로 전환해 여전히 영향력에 두거나 한다거나, 자제를 지방에 설치되는 상학에 보내거나 한성에 있는 유수의 명문 학당에 진학시켜 관직에 등용되기를 열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세금 제도의 개편은 양민 계층에서 양면적인 반응을 불러왔는데, 은본위 제도의 도입과 은화의 발행이 지난 20년간 부흥한 상공업 계층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이득이 되는 정책으로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양민 계층의 주를 이루는 소작농들은 이앙법의 시행으로 인한 이득 등을 크게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두세가 부과됨으로 인하여 세금에 대한 가중을 느끼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소작료를 4할 이상 걷지 못하도록 하는 시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시 사대부의 힘을 꺾는 정책이라 지방 유림에게는 또다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행착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지지 기반 위에서 시행된 이 경진경장의 주요 정책들은 조선 사회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 정책들이 실행되기 위해서 조선 초의 혼란기에 세훈이 등장하여 새로운 권력 계층을 정착시키고, 국초(國初)의 안정기를 이끄는데 지대한 힘을 쏟아부어 조선 사회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정도로 만들기까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음에도 크고 작은 저항에 부딪히는 것은 사회의 발전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고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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