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장 만월연운(滿月煙雲) (19/82)

제18장 만월연운(滿月煙雲)

「이 해에 정안군의 셋째 아들 도가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是年, 靖安君三子祹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진종(眞宗)실록 제12권 13년(戊申) 11월 5일

1424년 계동(季冬)

티무르조(朝) 페르시아 호르무즈.

인도양의 몬순을 피해 여름내 인도에 머물던 바호디르의 함대는 겨울에 접어들 무렵 인도의 서해안에서 출발하여 처음으로 페르시아의 해안을 항해했다.

그간 다섯 차례의 원양 항해 결과 명나라 선대(船隊)에 뒤처지는 규모와 조선 기술에도 불구하고 이제 항로 탐색은 결실을 맺어 바호디르의 숙원인 페르시아로의 무역 항로 개척이 이루어진 것이다.

바호디르가 을유전역 직후 셰르조드베크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것이 1406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8년이 흘러 페르시아만의 넘실대는 파도를 보는 그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 들어올 때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원숙한 마흔 둘의 원숙한 장년이 되어, 페르시아어만큼이나 조선어가 익숙해진 사람이 되어 무역 선단을 이끌고 아라비아 반도와 마주본 이곳 협만(峽灣)에 위치한 무역항 호르무즈에 당도하게 된 것이었다.

“아! 알라시여, 감사합니다!”

호르무즈의 무역항이 위치한 암석도(巖石島)에 다다라 함대가 정박하자 몸을 던지다시피 땅에 내려 붉은 땅 위에 입을 맞춘 바호디르는 주체하는 눈물을 도무지 그칠 수 없었다.

22년 만에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바호디르 자신은 이곳 해안 지대가 아니라 내륙의 고도(古都) 이스파한(Isfahan)출신이었으나, 조국의 땅에 도착한 사실 하나 만으로도 감격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조선의 함대가 기항한 호르무즈는, 페르시아 만의 만구(灣口)에 위치해 대륙부에 연한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반도가 마주 보는 곳에 자리 잡은 섬의 이름으로, 섬 자체가 항로의 요지에 위치한 덕에 10세기 말엽부터 무역항으로 번성하기 시작한 섬이었다.

섬의 이름은 페르시아어의 이 지역 방언으로 대추야자를 의미하는 후르모그가 그 어원으로, 섬에 무성한 대추야자가 그대로 그 이름으로 삼아진 것이었다.

이미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귀환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 호르무즈에 관한 기록을 남긴 바 있었고, 실제 역사에서는 1507년에 포르투갈이 무역 거점으로 삼기 위해 공격해 점령한 뒤 총독을 파견하기도 했을 만큼 무역항으로서의 입지가 대단한 곳이었다.

바호디르 또한 이 항구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앞으로 대(對)페르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을 생각으로 여기에 상관(商館)을 설치할 작정으로 입항한 것이었다.

이 당시의 호르무즈 태수(太守)는 라술이라 하는 자로, 바호디르의 먼 친척이기도 했다.

라술은 먼 나라에서부터 친척인 바호디르가 무역 함대를 이끌고 온 것을 알고서는 바호디르와 함대에 동승한 나상의 상인들을 관저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바호디르, 반갑네. 자네 아버지로부터 자네가 중국을 정벌할 때 종군했다가 먼 이국으로 다시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자네 아버지가 탄식해 마지않았으이.”

라술은 이제 오십 줄에 접어든 노회한 사내로, 희고 무성한 수염을 실룩이며 카펫 위에 앉아 있었다.

“아! 아버지께서는 아직 정정하십니까?”

“안타깝지만 네 해 전에 평안히 알라의 품으로 돌아가셨네. 주변 고을에서 모두 자네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십분 뜻을 모아 성대한 장례를 치렀네.”

“알라께서 불운한 아버지의 후생을 돌봐주시길!”

바호디르의 눈에서 다시 굵은 눈물이 한 줄기 떨어졌다.

라술은 바호디르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는 한숨을 푹 내리 쉬고서는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알라의 가호하심이 있을지언저! 어찌 되었든, 자네가 이렇게 타향에서 대성하여 돌아오니 내 마음도 다행스럽기 그지없네. 이런 대단한 함대라니, 그대가 온 곳이 조선이라고 했나?”

“중국 동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 그 나라가 흥성(興盛)하여 바다로 이렇게 무역을 하고자 함대를 보내고 있으니, 제가 부족하나마 그 책무를 지고 일신을 도모해 이리 다니고 있습니다. 십수 년간 이곳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항로를 열기 위해 여러 번 항해를 하고서야 이리 닿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에 조선의 상관을 열고 정기적인 무역을 하도록 허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 바호디르, 내 형제여.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네. 다만 헤라트의 영명하신 샤로흐에게 입조(入朝)하여 이러한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일세.”

태수 라술의 말을 들은 바호디르는 의아함이 앞섰다.

“현명한 샤로흐께서 보위를 물려 받으셨군요. 그런데 국부(國府) 사마르칸트에 계시지 않으신 겁니까?”

“이미 거의 스무 해의 세월이 흘렀네. 절름발이 티무르께서 원정 중에 병을 얻어 돌아온 뒤 돌아가시고 나서 여러 제후(諸侯)와 왕자들이 분열하여 그 후사를 다투었네. 그러나 결국 샤로흐께서 승리를 거두시고 아버지의 권좌를 이으셨지. 그러나 사마르칸트는 역시 예전의 적들이 주변에 포진한 땅이라 그분의 근거지였던 헤라트로 모든 정청(政廳)을 옮기셨네.”

바호디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 라술의 신원 보증을 받아 일주일 뒤, 바호디르를 비롯해 역관을 포함한 10여 인의 조선인 상인들이 티무르조의 군주 샤로흐를 내알(內謁)하러 헤라트로 향하는 장정에 올랐다.

헤라트는 고원지대의 동쪽에 위치한 고읍(古邑)으로, 그 역사가 천 년을 훌쩍 넘기는 도시였다. 이곳 호르무즈에서는 수천 리 길에 가까운 거리로, 사산조 페르시아 이래로 꾸준히 정비되었던 가도를 이용하더라도 보름이 훌쩍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다행히도 이들은 큰 무리 없이 한 달을 넘기지 않고 헤라트에 당도하여 샤로흐를 내알할 수 있었다.

“그대가 조선에서 왔다는 이인가? 그런데 페르시아 사람이 어찌하여 그 먼 곳까지 가 있는 게지?”

군살 없이 대쪽 같은 외모의 늙은 샤로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중국에 쳐들어갔을 당시 젊은 왕자였던 그도 이제는 세월이 지나 만인을 호령하는 군주의 자리에 걸 맞는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일전 중국과의 전쟁 뒤에 조선에서도 강화를 위에 찾아왔던 사절단과 조우하여 서로 간에 사람을 교환했었습니다. 이제 스무 해가 넘게 지나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명나라와의 전쟁 뒤에 이자강과의 교섭을 수행했었고 이제는 샤로흐의 재상이 되어 옆에서 근시(近侍)하며 보좌하고 있는 무자파르가 옆에서 조아렸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나를 따라 흑양조와의 전투에 종군했었던 조선인이 있었지.”

샤로흐의 중얼거림을 들은 바호디르가 눈이 번쩍 뜨여 엎드려 조아렸다.

“영명하신 주군이시여.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자는 어찌 되었는지 시말(始末)을 들을 수 있겠나이까?”

바호디르는 혹시 무례가 될까 싶어 어깨를 떨며 물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어 먼 서쪽으로 보내진 그 조선인이 살아 있다면 이번 돌아가는 항해에 조국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무례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러나 그 조선인은 바그다드에서 흑양조와 싸우는 와중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죽은 모습을 보았다는 자는 없으니 어쩌면 카프카스 산중이나 투르크로 팔려가 목숨을 부지했을지는 모르나 나로서는 더 이상 알 도리가 없노라.”

샤로흐는 바호디르의 물음에 불쾌해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대답은 결국 생사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호디르는 아쉬웠지만 이쯤에서 더 이상 쓸데없는 이야기로 샤로흐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는 없었다.

“저와 함께 주군을 내알한 이들은 모두 조선의 상인들로, 저희가 어렵사리 바닷길을 열어 호르무즈에 내항하였나이다. 여기에 호르무즈 태수 라술의 신임장이 있으니 부디 호르무즈에 상관을 열어 물산을 교역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길 바라나이다.”

바호디르가 내민 신임장을 받아들고 샤로흐가 읽어 보는 동안 대전으로 바호디르가 샤로흐에게 바치기 위해 고르고 골라 온 물건들이 들여보내졌다.

은괴 열 상자와 철괴 다섯 상자, 보총(步銃) 삼십 정, 포 네 문, 발화기 100개와 비단 500필, 방적기로 자아낸 면포 1,000필과 조선의 서책 150권이었다.

“일개 상인이 이만큼을 내어놓다니 그 정성이 갸륵하구나. 내가 호르무즈에 이들이 상관을 열기를 쾌히 허락하니, 무자파르는 호르무즈 태수 라술에게 전갈을 이들이 돌아가는 길에 부쳐 상관을 개설함을 돕도록 하고, 이들이 거래를 할 때 그 이윤의 2할을 떼어 궁중에 세납(稅納)토록 하라.”

무자파르가 이에 명을 받드니, 바호디르를 비롯한 조선 상인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한 뒤 대전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상관을 개설함을 허락하는 칙유(勅諭)를 받아 호르무즈로 돌아온 바호디르는 항구에 연한 곳에 큰 창고가 있는 건물을 아랍 상인에게 사들이고 이곳에 그간에 나상의 습외어학당 출신으로 페르시아어에 능통한 10여 인을 주재원으로 머무르게 하고, 각종 물품을 교역하고 페르시아 융탄자와 유리 공예품 및 사향(麝香)과 향신료를 사들여 조선으로 귀환하는 항로에 올랐다.

1426년

명(明) 선덕(宣德) 원년 맹하(孟夏)

대명국 산동성(山東省) 요동도사 직하(直下) 동녕관(東寧關).

영원히 제위에서 천하를 호령할 것 같았던 영락제도 결국 수명의 다함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그 맏이인 태자 주고치(朱高熾)가 황위에 올라서 그 아버지가 했던 대외로의 팽창 정책을 폐지하고, 보선단의 규모도 줄이고, 정난의 변에 건문제의 편에 서 몰살을 당한 일가의 신원을 회복하고 재산을 반환하는 정책과 영락제에게 간언하여 투옥된 하원길(夏元吉)을 석방하는 등 인정(仁政)을 베풀고, 도읍을 다시 남경(南京)으로 옮기려 했으나 채 한 해도 지나지 못하고 병환을 얻어 급서(急逝)하게 되니, 명나라의 정국은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할아버지 영락제를 꼭 닮아 총애를 받았던 홍희제의 아들 주첨기(朱瞻基)가 그 자리를 이었으나, 영락제의 사후 어지럽기 짝이 없던 정국은 혼란함 그 자체였다.

이 와중에 조선이 왕호를 올려 대군주를 칭하고 명나라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홍범(洪範)까지 반포한 사실이 북경에도 전해졌으나, 어수선한 조정은 이것까지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영락제의 아들 중 하나로 선덕제 주첨기의 숙부가 되는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가 역란을 일으키니, 명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선덕제는 어렵사리 이를 진압하여 주고후를 구리 솥에 집어넣고는 이를 달궈 죽이는 잔혹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은 동요되고 이 젊은 황제에 대한 구설이 늘어나니, 선덕제는 더욱 폭압적인 정치를 펴기 시작했다. 다만 나라 안이 어지러운 만큼, 선덕제는 나라 밖의 일은 영락제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결국 정화의 보선단도 이때의 마지막 항해를 끝으로 더 이상 떠나지 못하니 명조는 이제 다시 쇄국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선덕제는 적어도 내치에 있어서는 발군의 평가를 받을 만했는데, 비록 폭압적인 황제의 전제정치를 펼쳤으나, 일반 민중이 살기에 그다지 어려운 시절은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 반기를 든 이에게는 가차 없는 보복을 단행했는데, 을유전역 이래 명으로 도망쳐 와 술양왕의 봉위를 받고 명조의 조정에 봉직해 온 이방원의 일가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이방원이 죽은 뒤, 양녕군 이제는 왕위를 습작(襲爵)하여 술양왕이 된 뒤 군문에서 승승장구 하였으나, 이 혼란기에 반역을 꾀한 한왕 주고후의 줄에 섰다가 선덕제에 의해 징치되어 참수당하고 술양왕의 작위 또한 폐지되고 그 가족이 모두 낙인 찍혀 토살당하고 말았다.

이 난중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것은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자, 이제의 동생인 충녕군 이도뿐이었다.

그 당시 이도는 명나라의 산천을 떠돌며 계속해서 주유하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조선 사람이 많은 요동 동녕관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고 처자를 남경에서 대동해 올라왔다.

그러는 와중에 맏형 이제가 한왕의 편에 섰다가 멸문되는 지경에 이르니, 그 신분을 숨기고 목숨을 부지하려 동녕관의 조선인들 사이에 섞여 들어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의 역사대로였다면, 태종 이방원에게 보위를 물려받아 이미 성군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할 그였으나, 이미 그 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세상은 그에게 냉혹하리만치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이 와중에 자신과 처자의 목숨은 구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으나, 그 와중의 갖은 난고(難苦)를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세상 시름을 잊으려 매진한 학업은 날로 성취가 높아져 고금의 모든 전적(典籍)을 꿰뚫고, 음운(音韻)과 음률(音律)에도 정통하였을 뿐더러, 조선에서 흘러나온 격물학의 서적들까지 흡수하여 그 학문의 경지는 조선과 명을 통틀어도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는데, 그의 신분을 알게 된 동녕관 안찰사 이맹균(李孟畇)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맹균은 원래 젊어서 고려 때 벼슬을 시작한 이로서, 이방원 아래에서도 벼슬을 한 적이 있어 어릴 적 이도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 황희 등 여러 구신들과 함께 갑신반정 이후 신조정에 참예하면서 계속해서 벼슬을 살고 있었는데, 마침 동녕관 안찰사로 부임해 요동에 들어왔다가 이곳에 이름난 유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초빙(招聘)해서 대화를 나누다 그가 옛 충녕군인 이도임을 알아본 것이다.

북경에서 이도의 형인 이제가 역모에 연루되어 참수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이맹균은 명나라 땅에 있으나 조선의 관할하에서 명나라의 영향이 닿지 않는 이곳 동녕관에서 이도의 일가를 숨겨 주며 비호를 해 주었다.

이도는 늘 이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이맹균을 따라 동녕관에 들어온 이맹균의 처조카들을 가르쳐 주며 그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이맹균은 그런 이도를 불러다 종종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군(君)께서는 요즘 갈수록 수척해지는 듯하여 보는 마음이 썩 좋지 않습니다. 요즘 어떤 시름이라도 있으십니까?”

폐주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조선의 왕족 명부에 해당하는 선원록(璿源錄)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이방원이 죽은 뒤 묘호를 받기는커녕 폐주 정안군으로 호칭되며 멸칭(蔑稱)되고 있었으나, 이미 쫓겨난 지 스무 해의 세월이 흘러 금상이 대군주를 칭하게 된 갑진년에 이를 봉축하며 폐주의 가계에 대하여 사면령이 내려졌으니, 이제 이도의 신분은 종친(宗親)에 준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이맹균 또한 이도에게 그의 신분에 걸 맞는 예절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사면령이 내려진 뒤에도 형제를 모두 잃고 고국산천을 쉬이 밟지 못하는 이도에 대한 연민도 뒤섞여 있었다.

“형님도 역도로 몰려 참살되어 나는 이제 명나라 땅에도 갈 수 없고, 그렇다고 아버지의 구원(舊怨)이 남은 조선 땅에도 쉬이 발걸음을 들일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니 이곳 동녕관 같은 양국의 변계(邊界)에서 조용히 묻어 지내는 수밖에 없지요. 여기는 명나라도 조선도 아니니 말입니다.”

이도의 한탄 어린 눈을 마주하니 이맹균은 그의 처지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제가 조정에 주선(周旋)을 놓겠으니 이만 귀국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숙부 되시는 분들께서도 이제 모두 노쇠하셔서 멀리 떠난 조카를 만나시면 좋아하실 것입니다. 왕실 종친들이 이제는 따뜻하게 맞아 주실 겁니다.”

이맹균은 진심으로 이도가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그 뒷배를 봐줄 마음이 있었다.

그는 심왕 김세훈과 훈공대신(勳功大臣)들과도 두터운 교분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간 묵묵히 봉직해 온 공로로 이화장 훈위 1등의 훈장도 받아 한산백(韓山伯)에도 진봉된 조정의 중신 중 하나였다.

그는 명으로 도망쳐 족적을 알길 없는 충녕군 이도에 대하여 심왕이 여러 번 언급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조선에 돌아와 나라 일에 힘써 주었으면 하노라 하고 씁쓸한 어조로 말을 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내밀한 술자리에서나 하는 말이긴 했으나, 이맹균은 심왕의 진심을 이를 통해 알고 있었다.

세훈으로서는 당연히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치적을 잘 알고 있었고, 비록 과거로 돌아와 새로이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와중에 불가피하게 정안군 이방원과 척을 지어 그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명과의 일전을 불사하게 되었지만, 그 아들 충녕군을 거두어 쓸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기에 세월이 흘러 때가 되었다 여겨지자 혹여 돌아올까 하여 사면령도 내리고 그간 선원록에서 이방원 일가의 이름도 지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 시절에 이르러서는 이방원의 핏줄을 내세워 복위를 꿈꾸는 자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도는 이맹균의 말을 듣고서도 고개를 내저었다.

“만리타향에서 쓸쓸하게 묻힌 아버님과 묘마저 없이 그 죽은 몸이 들에 버려진 형님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압록강을 건널 수는 없습니다. 저는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부형(父兄)을 추모하고 제사를 올리며 학문이나 가다듬겠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게 되겠지요.”

이도의 마음이 아직 명나라 땅의 원혼이 된 아버지와 형을 떠나지 못함을 안 이맹균은 더 이상 조선으로의 귀환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 계속해서 운서(韻書)를 공부하고 계신 겁니까?”

“물론 거듭하여 보고 연구하고는 있으나, 이제는 사실 새로울 것이 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조선의 나랏말이 명과는 다르니, 그 말을 제대로 틔어 쓸 수 있는 방법을 궁구하고 있습니다. 고래의 문자를 전사(全寫)하고 어언(語言)의 법리를 살펴보고 있지만 아직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이도는 평이하게 말을 했으나, 이맹균은 내심 속으로 감탄하여 되묻는다.

“이두문도 있고 옛 신라에는 향찰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새로운 전서법이 필요한 것입니까?”

“지금 생각하기로는 이두나 향찰로 내려 적는 법을 배우기도 까다로울 뿐더러, 지방과 사람마다 그 적는 법이 서로 다르고 나라에서 통서(統緖)하는 것이 없으니, 말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 글들은 훈음(訓音)이 서로 혼용되어 뜻을 살리면 음운(音韻)이 없으며 음운을 살리면 그 훈의(訓意)가 살지 않으니 제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없지요.”

이맹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의 학문에 미치지 못하는 그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쉬위 와 닿지 않았다. 이도는 조선이 조선말만을 적는 글자를 가지게 될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이맹균으로서는 아직 그 맥락을 가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디 뜻하시는 일에 좋은 성취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군께서 언제고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제가 이 동녕관에 안찰사로 있는 동안만큼은 그 편의를 모두 봐드리겠으니, 부디 세상의 시름을 잊고 학업을 대성하길 빌겠습니다.”

이맹균의 진심된 마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도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늘 소생의 궁색함을 살펴주시니 감사한 마음이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저 지금같이 가끔 쌀과 양식을 주시고 제 마음이 편하도록 처질(妻姪)들의 공부를 보게 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처조카들은 덕분에 공부가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 그리 겸손히 말씀하시면 제가 도리어 부끄러워집니다.”

이맹균의 처조카들은 서관(徐寬)과 서충(徐充) 형제로 후일 이 이도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을 인연으로 하여 그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깊게 공부하게 된다.

그렇게 이맹균의 도움을 받아 이도는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방안을 밤낮으로 궁리하며 세상과 연을 끊고 매진을 거듭하니, 그 박복한 삶을 잊어 보고자 그리도 책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었다.

1426년 중동(仲冬)

조선국 한성부.

세훈의 맏아들 현도가 에히메와 혼사를 치르고 살림을 꾸린 뒤 다시 학업에 매진하여 한림원을 졸업한 지도 어느 덧 여러 해가 흘렀다.

그 사이에 아들도 보아 손자를 일찍 보길 내심 바라 마지않던 세훈과 고상희 부처(夫妻)의 마음도 기쁘게 해 주었는데, 심왕가의 적손(嫡孫)이 된 이 네 살배기 사내아이 서윤(瑞潤)은 심왕저에서 온갖 어여쁨을 받으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그 사이 현도는 관직에 출사하여 평택현감(平澤縣監)을 지낸 뒤 공부(工部)에 들어와 교통처(交通處)의 책임관인 정랑(正郞)을 맡아 최근 국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가도 정비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덕분에 일에 매진하느라 집에 머물지 못하기가 일쑤였던 현도가 심왕저로 간만에 들어왔다. 아버지 세훈 또한 국사를 보는 일에 바쁘니 부자를 비롯해 고상희와 에히메, 서윤까지 함께 앉는 것은 몇 달 만의 일이었다.

“요즘 일이 매우 바쁜 모양이구나.”

간만에 마주 앉은 아들을 맞은 아버지 세훈은 좋은지 싫은지 내색 없는 얼굴로 말했다. 현도는 그것이 부친의 오래된 습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던 아버지였으나, 나라를 흔드는 권좌(權座)에 오래 앉아서 연년(年年)을 보낸 세훈은 어느 때부턴가 감정을 내색하는 일이 줄었다.

“나도 부끄럽게 그렇지 못했다만 바깥일만큼 집안도 돌봐 바로 세워야 한다.”

“유념하겠습니다.”

세훈은 그때서야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세훈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고상희는 그 모양을 보고서는 웃으며 세훈을 나무랐다.

“예전에는 얼굴에 웃음도 그리 많으셨는데, 이제는 아들에게도 웃음이 그리 박하시니 어찌 나이 들면 이런지.”

세훈은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아내의 타박이 그리 싫지 않은 듯했다.

현도는 아직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오고 가는 잔정이 변치 않은 것이 보기 좋았다. 괜히 그 모습에 옆에 앉은 에히메를 돌아보니 그녀 또한 같은 것을 느꼈는지 현도를 향해 살짝이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종종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니던 서윤이 세훈의 수염을 틀어잡고서는 낄낄거렸다. 현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려 했으나, 세훈은 손사래를 치며 서윤을 안아 올렸다.

“이놈은 내 손자다. 허허. 벌써 이렇게 자라 할애비 수염 틀어쥐는 힘이 억세구나. 서윤아, 네 이름의 뜻을 잘 아느냐?”

세훈의 품에 안긴 서윤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앞으로 상서롭고 풍요로운 일만 있기를 바라 네 이름을 서윤이라 지었느니라. 앞으로 네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잘 배우고 익혀 군자(君子)의 풍모를 갖추어야 하느니라.”

세훈의 말에 서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옛말에 손자 불알을 만지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더니 과연 세훈이 딱 그 꼴이었다. 한참을 그 재롱을 보던 세훈이 문득 고개를 들어 말한다.

“며늘아기야.”

세훈의 부름에 조신하게 좌정해 있던 에히메가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의 말괄량이 기질은 이제 다 사라지고, 현숙한 여인이 되어 심왕가의 내사(內事)를 꼼꼼히 돌보는 에히메가 세훈은 그저 예뻐 보였다.

“네, 아버님.”

“네가 이리 가정을 꾸리고 집안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으니 내가 보기에 마음이 흡족하구나. 증자(曾子)께서 이르시길, 수신제가를 하고서야 치국을 하고 평천하를 한다고 하셨느니라. 네 몸을 닦고 가정을 다스리도록 하여라. 네가 거느린 식솔(食率)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은 흉이 되느니라. 아녀자는 함부로 집밖을 출입하기를 삼가라고들 하나, 내가 보았을 때 남정네 못지않은 여자를 집안에만 묶어 두는 것도 옳지가 않다. 네가 용색이 단아하고 말하는 품이 안온하여 집안은 이미 잘 돌보고 있으니 해 보고 싶은 일이 있거든 언제고 현도든 나한테든 이야기하여 해 보도록 하여라.”

세훈은 백제공의 여식으로 현해탄을 건너 조선에서 시집살이 하는 에히메가 안쓰러운 맘도 있었다. 그래서 고상희에게도 에히메에게 제 하고 싶은 일을 맡아 해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고 일러 두기도 했다.

그러나 에히메는 한동안 서윤을 돌보고 심왕저의 대소사를 살피느라 바깥일은 고사했었다. 그러나 이제 서윤도 갓난아기가 아니고 하니, 에히메는 그 말을 숙려(熟廬)하고서는 대답한다.

“그렇다면 한 번 어린 계집아이들을 가르치는 학당을 열어보고 싶나이다.”

에히메의 말을 들은 세훈은 적잖이 놀랐다. 그 자신도 22세기의 사람으로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드는 초석을 다지는 데 일생을 쏟아부었지만, 여자아이를 가르치는 학교를 열겠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그만큼 조선의 관습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이었다.

고상희가 만든 경애학사에도 고아들과 천출(賤出)의 아이들도 받아들였었지만, 여자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산하의 보육원(保育院)에서 고아가 된 여아들을 돌보기는 했으나 나이가 차면 다 시집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 일이 절대 쉽지는 않을 터인데, 각오는 서 있느냐? 내 재보(財寶)를 좀 내어 도와주기는 할 터이다만, 부딪힐 문제들은 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예. 그동안 각오는 충분히 세웠나이다.”

세훈은 아내 고상희에 이어 며느리까지 학당을 세우고 교육을 진흥하는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아직까지 재정이 풍족하지 못한 나라의 예산으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적으로 교육의 기회를 넓히는 데에 일조하고자 하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고상희와 현도 또한 에히메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독려하고 나오니, 그에 힘을 얻은 에히메는 북촌(北村)의 조용한 사저(私邸) 하나를 얻어 수신당(修身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아직 시집가기에는 어린 반가(班家)의 여아들을 불러다가 글자와 산술, 그리고 시부 짓는 법과 이때의 조선에서 여자로서 요구되는 각종 덕목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또한 스스로 학식 있는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각종 학문을 기초적인 것이나마 가르쳤다.

비록 시대적인 한계가 있고 반가의 여아들로 한정되어 있다고는 하나, 이렇게 여자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곳은 조선팔도는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세계를 통틀어 보아서도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세훈이 처음에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성 부중의 권문세가 사이에서 이 학당의 평판은 매우 좋았는데, 이들은 여기에서 집안의 여식들이 현모양처로서의 현숙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비록 아직까지 자립하는 여성으로서 교육이라는 것은 요원한 마당이었지만, 이렇게나마 여성의 교육 기회를 넓히는 것은 앞날을 내다보았을 때 에히메의 현명한 판단이었음이야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427년

비잔티움력(曆) 6935년 중춘(仲春)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비교적 온화한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가 1421년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무라드 2세가 권좌를 물려받게 되자, 비슷한 시기에 늙은 동로마 황제 마누엘을 대신하여 정권의 전면에 부상한 태자(太子) 요안네스 8세와의 불화가 빚어지게 되었다.

결국 1422년 무라드 2세는 군세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여 요안네스 8세에게 항복을 종용하였으나, 태자 요안네스는 침착하게 수성전을 치러내 결국 술탄 무라드는 얻은 것 없이 군세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설사 술탄의 공세를 막아냈다 하더라도,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방이 오스만의 영역으로 둘러싸인 채, 고립되어 황폐화되는 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마누엘 황제의 시대는 저물고 무라드 2세의 공격을 막아낸 영웅이었던 태자 요안네스 8세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드리워진 암운은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도읍이 이미 질서가 없고 마치 거대한 문명의 무덤처럼 변해 가는 모습은 아직까지 동로마제국의 위대한 영광을 암송하듯 기억하는 많은 신민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요안네스 안노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름 아닌 조선인 한학정인 그는 이곳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정착해 정교회 신자로 세례를 받고 이름을 바꾸어 산 지도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기에,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도 직접 겪었고, 그간의 어려워진 도성의 삶도 고스란히 체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학정의 형편은 조금 나았던 것이,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속칭 플라톤 주의자라는 뜻의 플레톤이라는 별칭을 가진 명망 있으나 조금은 별난 학자가 한학정의 후견인 노릇을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에서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나중에는 중매를 세워 몰락한 동로마 귀족 가문의 여인인 헬레나와 혼인을 맺을 수 있도록까지 배려해 주었다.

덕분에 한학정은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정착할 수 있었으며, 돌아갈 길이 막연한 고향에의 향수로 인한 시름을 조금은 잊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한학정은 춘추와 논어를 각각, 「봄과 가을의 연대기」와, 「어록」이라는 제목으로 그리스어로 번역해 펴냈다.

이것은 동방의 지혜를 소개한 책으로 이름이 났는데, 한학정의 그리스어 실력이 출중했을 뿐더러, 이미 당대의 이름난 학자인 게미스토스가 미려한 그리스어로 써질 수 있도록 교정을 보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천사까지 써 주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식인들 사이에 크게 회자되었다.

이듬해에 이르러 이 책은 로마의 학자 지오반니 안틸리오네(Giovanni Antillione)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구(西歐)에 소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 비추어 한학정의 근심을 깊어져만 갔는데, 이제 마음을 막 붙인 이곳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황혼에 접어드는 것이 그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게미스토스 또한 더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그리스어로 모리아스, 혹은 라틴어로 모레아(Morea)라 불리는 옛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안정된 장원(莊園)으로 건너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게미스토스는 이때 모리아스 전제국(專制國)의 군주(君主)인 테오도로스 2세 팔라이올로고스와 상당한 교분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테오도로스 2세는 다름 아닌 동로마 황제 요안네스 8세의 동생으로, 그가 다스리는 모리아스 전제국은 황족(皇族)인 군주, 즉 데스포테스라 불리는 이들에게 은급되는 영지들 중 하나였다.

이때의 모리아스는 그리스의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하여, 십자군 전쟁 이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던 라틴계 공국(公國)들을 모두 몰아내고 거의 모든 땅이 테오도로스 2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

시시때때로 오스만 술탄의 위협을 받는 불안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비해 이 모리아스는 번성하고 있었는데, 많은 그리스 귀족들은 더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어 떼를 지어 이 남쪽 땅 모리아스로 몰려들고 있었다.

다행히 게미스토스는 이 모리아스 일대에 많은 장원을 보유한 지주였고, 모리아스의 군주인 테오도로스 2세가 직접 와 주기를 청하고 있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한학정은 내심 정이 든 이곳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버리고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가야 한다는 것이 내심 내키지 않았지만, 그를 후원하는 게미스토스와 따로 떨어져 있기에는 아직까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그의 생활이 당장 곤란할 지경이었다.

결국 한학정은 게미스토스를 따라 짐을 꾸려 모리아스의 수도 미스트라스로 옮겨 가게 되었다.

“게미스토스 선생, 와 주셔서 고맙소. 앞으로 이곳 미스트라스의 궁정에서 부디 좋은 학문을 강연해 주시길 바라오.”

이제 인생의 완숙기에 접어들어 젊음을 자랑하는 듯 다부진 몸매를 뽐내는 모리아스의 군주 테오도로스 2세는, 단단한 두 팔을 벌려 좋은 스승인 게미스토스를 맞아들였다.

게미스토스는 간단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뒤, 자신과 함께 테오도로스 2세를 내빙(來聘)한 한학정을 소개했다.

“함께 온 이는 먼 동방에서 건너온 학자로, 세례를 받아 정교회의 믿음을 따르는 이이자 충실한 제국 신민이 된 요안네스 안노스라고 하나이다.”

테오도로스가 눈을 돌려 보니 과연 그곳에는 타타르인의 외모를 한 30대 후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검고 성긴 수염과 깊은 눈동자를 지닌 이 사람의 이름은 테오도로스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일전에 화제가 되었던 중국의 책들을 그리스어로 옮긴 이로구만. 그대가 중국에서 왔다고 했던가?”

테오도로스의 물음에 한학정은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하고서는 대답해 올린다.

“저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조선이라 하는 나라에서 왔나이다. 저의 조국은 중국과 전쟁을 치렀는데 그 전쟁의 강화협상을 하는 사절을 따라 중국에 들어왔다가, 우연히 티무르의 사절들과 조우하게 되어 나라 사이의 약정에 따라 티무르의 궁정에서 봉공하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또다시 전화(戰禍)에 휩쓸려 투르크인들에게 노예로 팔려 갔다 이렇게 게미스토스 선생에게 구은을 받아 어쭙잖은 실력으로 대학을 마치고 학자 행세를 하게 되었으니, 모두 게미스토스 선생의 덕이나이다.”

“겸손한 자로고!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우리 궁정에 서사(書士)의 자리를 하나 마련하겠네, 부디 책들을 모으고 꼼꼼히 필사하거나 주석을 달아 주게나. 그대가 어학에 능통하여 먼 동방의 말은 물론이거니와 타타르 말과 투르크인들의 말도 할 줄 안다고 하니, 부디 여러 나라의 서책을 번역해 주는 일도 해 주었으면 하네.”

한학정이 테오도로스의 환대에 당황해 슬쩍 게미스토스를 돌아보니 게미스토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나이다. 부디 베풀어 주신 그 은혜 잊지 않고 보답하겠나이다.”

테오도로스는 원래 성정이 거침이 없고 사람 욕심이 있어 재능 있는 자들을 우대했는데, 이 재능에는 진기하고 특별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먼 동방에서 온 학자를 기용하여 후원한다는 것은 마치 신약성서에 나오는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들의 영광을 입는 것 같은 착각마저 주는 것이었다.

군주의 영광에 대해 환상이 있는 그로서는, 한학정을 거느리고 있으면 뽐내기 좋으리라 내심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테오도로스의 이런 허영을 잘 알고 있는 게미스토스는 그것이 한학정에게 해가 아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테오도로스의 친절을 받아들이라 한 것이다.

“좋네, 좋아. 오늘 내 스승인 사랑하는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과 먼 곳에서 이 궁정에 찾아온 요안네스 안노스를 반기는 축하연을 열도록 하자! 그러고 보니 오늘 흑해에서 온 제노바 상인들이 내게 물건을 들린다고 하니, 오늘 연회에 그들도 불러 진귀한 물건이 없나 함께 살펴보도록 하지.”

들떠 있는 테오도로스를 보며 한학정은 내심 한숨을 돌렸다.

한학정은 그가 잠시나마 섬겼던 티무르 궁정의 샤로흐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었다. 적당히 허영이 있고 적당히 사치를 즐기는 그는 사람이 호인(好人)이었기에 차마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군주의 위엄을 뽐내며 전장을 오고 가던 샤로흐와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것이었다.

한학정은 잠시 동로마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이렇게 학문을 애호하고 예술을 후원하나, 그만큼 모질지 못하고 허영이 있는 군주들이 많아서 그렇지 않나 생각을 했다. 학문과 예술이 화려하게 피어났던 남송(南宋)이 결국 오랑캐들에게 무너진 것처럼 말이다.

저녁이 되어 연회가 벌어지자, 그 자리에는 미스트라스에 들어온 제노바 상인들이 입회하여 군주 테오도로스를 위해 진귀한 물품들을 늘어놓았다.

당시 이탈리아의 리구리아 해안에 연한 공화국이었던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지중해 무역을 경쟁하며 흑해 연안에 식민 도시 여럿을 세우고 직접적으로 이슬람 국가들 및 트레비존드 전제국(專制國) 등과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이 흑해의 식민 도시 일대를 돌아 나온 배가 제노바로 돌아가는 길에 이 미스트라스에 들른 것이다.

상인은 페르시아로부터 흘러온 물품들이라며 여러 가지를 내보였는데, 항상 들여오던 융탄자나 유리잔, 혹은 향신료와 다르게 이번에는 유럽에서는 보기 힘든 비단이 섞여 있을 뿐더러, 이상하게 생긴 납함과 매우 부드럽고 고와 보이는 면직물도 있었다.

“오, 이것이 비단이라 하는 것인가?”

테오도로스는 그마저도 접하기 힘든 비단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마치 녹아들듯 부드러운 그 촉감은 자주 접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저희와 거래가 닿는 페르시아 상인이 특별히 구해 온 것이나이다. 동방의 상인들이 페르시아를 찾아와 교역하게 되었기에 이 귀한 물건들을 어렵사리 구해서 저희에게 매각했나이다.”

동방의 상인들이란 말에 자리 한쪽에 앉아 있던 한학정의 귀가 번쩍 뜨였다. 낯선 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에 숨어 있느라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비단을 보니 혹시 중국이나 조선에서 온 상인들이 페르시아에 왔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유념해서 보니 상인들이 내어놓은 납으로 된 자그마한 함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조선을 떠나기 전에 이미 유통되기 시작해서 본 기억이 있는 물건이었다. 다름 아닌 발화기였다.

한학정은 순간 큰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잊고 있던 고향에서 바다와 먼 길을 돌아 이곳까지 팔려 온 물건이라니!

“페르시아에 동방의 상인들이 들어왔다고 하였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한학정이 불쑥 일어나 제노바 상인을 향해 외치자, 좌중의 시선이 모조리 그에게로 쏠렸다.

“그, 그렇소만. 그러고 보니 당신도 타타르인 같은 외모로구만. 왜, 이 물건들에 대해 잘 아시오?”

“그 납으로 된 함은 분명 기름을 먹여 불을 쉽게 틔우게 해 주는 기구가 분명하오. 내 고국에서밖에 만들지 않는 것이오.”

“맞소이다. 이곳에는 처음 가져 오는 것인데 잘 아는 것을 보니 분명하구만. 페르시아 상인들이 중국보다 더 동쪽에 있는 나라에서 팔러 온 물건들이라 했소.”

한학정은 그 순간 자리에 엎어져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 만리타향에 흘러들어 와 고국을 잊고 살기 어언 몇 해째던가. 감히 돌아갈 길은커녕 고국의 물건을 보리라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군주 테오도로스와 게미스토스 선생은 그런 한학정을 측은한 듯 바라볼 뿐, 아무도 선뜻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만큼 고향과 멀리 떨어진 사람은 어디에 가더라도 떠도는 듯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정착해 제 고향을 삼으려 하더라도 태어나고 자란 곳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울다가 자신도 모르게 실신을 한 한학정이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의 일이었다.

이제 자신이 섬기기로 한 모리아스의 군주 테오도로스가 특별히 그를 배려하여 좋은 방에 뉘어 주고 하녀로 하여금 그의 용태를 돌보게 한 모양이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어제의 일을 생각하니, 머나먼 고국을 조금 훔쳐본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움과 미련이 가득 남아 있었다. 그런 기분을 잘 알기라도 한 듯, 해가 중천쯤 되었을 때 게미스토스 선생이 문안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남자를 하나 대동하고 한학정을 찾아왔는데, 다름 아닌 어제의 제노바 상인이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나도 바다를 떠돌아 다니며 장사를 하는 처지라, 오랜 기간 먼 곳에 나가 있다 보면 고향 제노바의 냄새가 그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오. 그런데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온 그대는 어떻겠소.”

제노바 상인의 심심한 위로에 한학정은 그의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페드로 알부아니(Pedro Albuani)라고 하오. 아버지도 제노바 상인이었고,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셨소.”

“저는 요안네스 안노스라고 합니다. 조선에서의 이름은 따로 있습니다.”

“조선, 조선이라. 확실히 페르시아 상인들과 거래를 하는 동방의 뱃사람들이 바로 자네 조국에서 온 모양이로구만. 어찌 되었든 이런저런 사정은 게미스토스 선생에게 이미 들었소. 나는 이제 제노바로 출발해 몇 달 머물고 다시 흑해로 돌아가는 길에 여기에 다시 들를 것이오. 흑해로 돌아가면 다시 그 페르시아인 상단과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니 자네의 사정을 전하거나 조선인들과 접촉할 방법을 물색해 보리다.”

이 제노바 상인 알부아니의 선뜻한 도움에 한학정은 다시 눈물이 올라왔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게미스토스도 한학정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한다.

“우선은 깨끗이 마음 비우고 테오도로스 전하(殿下)에게 봉공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게. 그동안 잊고 매진하고 있으면 나와 이 알부아니가 그대를 대신하여 소식을 물어올 것이네.”

게미스토스의 따스한 한마디에 한학정은 다시금 눈물을 머금었다.

게미스토스의 말마따나 이제는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마음을 비우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알부아니는 혹시나 나중에 조선인 상인들과 페르시아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를 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학정에게도 이리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 었는데, 물론 이렇게 계산적이냐고 물을 수도 있으나 알부아니에게는 한학정을 동정하는 마음 또한 여전히 있었다.

이렇게 한학정은 테오도로스의 궁정에서 관료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간 제노바를 들른 알부아니의 함대는 다시 미스트라스로 들러서 한학정이 혹시 전달할 수 있나 하여 준 서찰을 챙겨들고 다시 흑해로 떠났다. 트레비존드에 들어가면 그곳에 흘러온 페르시아 상인들과 다시 접촉이 가능할 것이었다.

이제 한학정은 고국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다시 품게 되었으니, 이제는 결과야 어떻든 알부아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마음이 확실히 개운해진 한학정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어 준 테오도로스의 궁정에 최대한 봉사하며 그 은혜를 갚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이 알부아니가 다시 항로를 한 바퀴 순례하고 어떻든 수소문을 통해 알아봐 줄 기회가 있을 것이라 한학정은 의심치 않았다.

1427년 계추(季秋)

조선국 한성부.

근 스무 해 동안 조정에서 제일 바쁜 곳은 공부(工部)였다.

갑진경장 이전에 일찌감치 조(曹)에서 부(部)로 승급되었으며, 최해산이 그동안 거의 다른 자리로 옮기지 않고 장기간 판서의 자리에 앉아 공부에서 진행하는 조목조목의 일들을 감독해 왔었다.

초창기에 가장 힘을 쏟았던 것은 바로 기본적인 산업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강철을 뽑아낼 수 있는 제철소를 짓고, 서울 근교에 가도를 정비하여 기전(畿甸) 지역에서의 물자 소통을 활발하게 하고, 마차의 도입을 적극 장려하며, 염료, 복식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개선을 위해 매진해 왔던 것이다.

소금 등의 전매품을 관할하는 호부에서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 주면, 그 예산은 고스란히 거의가 공부와 병부로 흘러들어 가 끊임없이 쏟아부어졌다.

1차적인 사업들이 모두 완료되자, 그 다음으로 바빠진 것은 특히 교통사(交通司)와 토목사(土木司)로, 갑진경장 이후 부처가 확대되어 교통처와 토목처로 이름을 바꿔 달고 수백의 관료를 거느리는 기구로 거듭났다.

교통처는 일전 화통도감을 부평에 만들고 인천에 고로를 지었을 때 이를 수월히 하기 위해서 경인가도를 정비한 일이 있었다.

이 후로 수년 간 한성에서 개성, 그리고 해주를 있는 경해가도, 한성과 공주를 잇는 호서가도를 새로이 닦아 왔다.

길은 마차 네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로 처음에는 흙으로 다진 길이었으나, 점차 포석(鋪石)을 깔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정비되었다.

길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 역참(驛站)이 설치되고, 도로를 상시 정비하는 관리가 상주하고, 여객(旅客)을 받는 여각이 세워져 길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이로서, 적어도 해주에서 공주까지 가는 천 리 길은 말을 달리거나, 혹은 마차를 이용할 경우 넉넉잡아도 열흘이 걸리지 않게 되었다.

일차 가도 정비 사업이 완료되자, 공부에서 다음으로 힘을 쏟은 것은 한성의 도시 정비 사업이었다.

한성은 비교적 최근에 조성된 성읍이었기에, 도읍으로 정해져 옮겨진 지도 스무 해를 조금 넘기는 새로운 도시였다.

때문에 보다 근대적인 도시 설계를 적용하기도 훨씬 수월했는데, 가장 먼저 한 것은 한성 부내(府內)의 도로를 곧게 내고, 돌을 깔아 포장하는 일이었다.

또한 궁궐보다 높은 건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조잡한 관례를 들어 단층의 건물이 일색이던 한성의 거리를 바꾸기 위해 복층 이상의 건물도 허용하고, 목조뿐만이 아니라 석조 건물도 장려했다.

한성 최초의 석조 건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보문각으로, 1407년에 나라의 장서(藏書)를 보관하는 곳으로 화재에 취약한 목조 대신 처음으로 석축을 시도하여 정동(貞洞)에 축조를 시작한 건물이었다.

처음으로 규모가 큰 석조 건물을 짓는 일이라, 기단(基壇)을 쌓는 법, 성벽을 축조하는 법에 이어 처음으로 벽돌을 찍어내어 쌓고,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궁륭(穹퀙)을 올리는 법들이 연구되고 시도되고, 실패를 거듭하기를 반복했다.

이런 와중에 공부의 토목처 관리였던 임서응(林瑞鷹)이 거중기를 연구하여 내놓았고, 조선 전토에 남아 있는 석조 형태의 장묘와 사찰 등을 조사하고 연구하길 거듭하여, 무려 12년이 걸려서야 지난 1419년에 준공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이를 통해 축적된 기술은 크게 활용되어, 한성, 특히 숭례문에서 경복궁으로 향하는 이른바 80자(尺)의 폭으로 넓은 길인 통칭 육조거리에는 이러한 석축 건물들이 점차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가장 보문각 다음은 바로 공부의 건물을 3층의 석조 건물로 크게 올린 것이었다.

이 당시 석조 건물의 특징은, 석조 건물의 꼭대기에 힘을 지탱할 수 있도록 궁륭을 겹겹이 쌓아 설계하고, 그 지붕 위로는 기와를 얹은 것이었는데, 건물들을 지탱하는 기둥은 목조의 배흘림 양식을 응용하여 장식을 배제하고 깔끔하게 올려졌으며, 건물의 창들은 모두 나무틀에 창호지를 엇대어 만들어졌는데, 아직까지 조선의 유리 기술이 깔끔하고 투명한 유리를 만들어 창으로 사용할 만큼 발전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런 가도와 건물의 정비 사업이 한창이던 때, 역병이 크게 돌아 조정은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곽란역, 즉 콜레라가 유행하여 병의 원인은 밝히지 못했으나 오염된 물을 통해 옮겨진다는 사실은 확인이 된 뒤로, 공부는 이후 일체의 다른 사업을 줄이고, 한성 내에 상하수도를 정비하는 일을 시도했다.

한성 부내를 관통하는 하수도는, 하나의 지하 도로와 같이 설계 되었는데, 관을 매설하여 보수하는 기술이 부족하기에 엄청난 자금과 시간이 소요되는 지하의 하수로(下水路)를 건설하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1417년 한성에 대규모 역병이 돈 이듬해인 바로 1418년에 먼저 경복궁에서 숭례문을 향하는 육조거리 아래에 대규모의 하수 체계를 먼저 건설한 뒤, 이것을 지하로 한성 부중 여기저기로 뻗어 나가는 공사를 계속했다.

거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공사는 아직 마무리 지어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한성부중의 주요 지점의 하수를 받아서 경강(京江) 하류, 즉 마포 쪽으로 흘려보내는 체계는 갖춰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도심을 관통하는 개천으로는 하수를 내보내지 않게 만들었는데, 이곳에 오물을 버리는 자에게는 태형 30대를 가한다는 막중한 엄포를 놓아 함부로 오물을 투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정된 장소로 모여지는 오물들은 모두 하수관을 통해 경강의 하류로 밀려가게 되었고, 또한 사람의 배설물은 특별히 성곽 밖에 매립지를 만들어 비료로 쓰거나 매립해 썩히게 하니, 뒷간에서 이것을 수거해 성 밖으로 옮기는 것이 새로운 한성의 도시 빈민의 일자리로 자리 잡았다.

“시골에서 거름 푸던 놈은 서울 가서도 똥물 푼다.” 라는 속담이 이 때문에 생겼는데, 시골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거름을 푸던 일을 하던 농군이 서울에 올라가서도 재주가 없으니 남의 똥을 받아다가 성 밖으로 옮겨 주는 일밖에 못한다는 뜻이었다.

다음은 상수도의 정비가 문제였는데, 일단은 한성 부중을 흘러 나가는 개천과 그 지류, 그리고 성곽 밖을 크게 돌아 나가는 중랑천을 그 수도원으로 삼아 그 물을 끌어온 뒤, 시내 적소에서 펌프가 부착된 우물로 물을 길어 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물을 쉽게 길 수 있는 철제 펌프를 만드는 것이 문제였는데, 다년간 철을 다루는 기술이 축적되어, 이것을 주조(鑄造)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아래에 있는 물을 보다 압이 높은 지층으로 끌어 올리는 기술을 설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외의 돌파구를 마련해 준 것은 바로 바호디르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서재백으로 이름을 고치고 아직도 외학원(外學院)에 교유로 출강하며 학생들에게 돌궐어, 즉 투르크어와 회회어, 즉 아랍어를 강의하는 셰르조드베크였다.

아랍에서는 이 펌프 기술이 아르키메데스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13세기에는 알자자리가 왕복 펌프, 수력 펌프, 피스톤 펌프와 같은 각종 펌프의 원리를 기술한 책을 쓰기도 했었는데, 셰르조드베크의 삼촌은 바로 이런 각종 기물(器物)의 원리를 탐독하던 사람이었고, 셰르조드베크는 적어도 나선형이나 왕복 펌프 같은 기초적인 수준의 펌프의 원리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혀 있는 서책도 없이 이것을 시도해 보는 것도 난관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최초의 상수도관과 펌프는 경복궁 궁내(宮內)에 5개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에 붙일 이름이 애매하자, 대군주 이인이 직접 구경하고서는 물 수 변 위에 돌 석자를 씌워 빙(빠)이라는 한자를 만들어 명명했다.

이렇게 물 뽑는 펌프, 즉 수빙(水泵)이라 불리는 것들이 근년 들어서는 한성 각처에 확충되어, 상하수도 체계의 얼개나마 갖추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당대 조선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선지적인 안목으로 이 상하수도 체계를 갖춘 것은 적어도 한성의 공중 보건이라 할 만한 것의 등장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이 상하수도를 건설하는 십여 년간, 국가 예산의 거의 3할에 준하는 액수가 매년 이 사업에 직접적으로 투여되었다.

공부에서는 이 사업 때문에 그간 공주에서 목포 및 대구, 그리고 해주에서 평양으로 연장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가도 정비 사업을 포기하고 여기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십 년간의 가도 정비 및 한성 내의 석조 건물 축조와 복층 건물의 허용, 그리고 상하수도 정비가 끝났을 때 한성의 모습은 도성의 위용에 가히 걸맞는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조선 각처에서 유입된 인구가 들어와, 한성과 그 근교를 포함하는 한성부의 인구는 물경 32만에 이르게 되었고, 이 인구를 먹여 살릴 각종 관청과 각종 상업 조합들, 그리고 제철, 석공, 직물 등으로 마포 일대에 조성되기 시작한 소규모 공장들에서 이들을 고용하여 안정된 체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한성의 인구 32만이래야 고대와 중세를 거치며 한때 100만의 인구를 자랑했던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바그다드, 장안 같은 한때 제국의 수도들에 견줄 것이 못되지만, 근대적인 산업이 집약되어 태동하고, 교육받은 인재들이 모이고, 국가의 도읍으로서 초석을 다지기에는 충분한 인구였다.

이렇게 한성이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가꾸어진 뒤로 한성의 부민들의 의식도 많이 바뀌었는데, 돈이 모여 풍족해지고, 생계가 안정이 되며, 병치레가 줄면서 일종의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각종 서책을 빌려 주는 업이 등장하고, 구전으로 이야기를 과장된 동작으로 읊어 주는 변술가(辯術家)들이 등장하고, 탈을 쓰고 공연하는 일종의 마당놀이 같은 것들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또한 한성 사람들의 복식에도 변화가 생겨, 군복에서 그 기능적인 면을 보고 일반 민중의 복식에 퍼진 것이 바로 단추였으며, 또한 예의보다는 실용을 따지는 한성의 양민들이 치렁치렁한 소매를 활동성이 좋은 좁은 소매로 고쳐 다니기 시작하면서, 복식에도 기능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것이 마치 오랑캐들이 하고 다니는 옷 모양 같다고 해서 호복(胡服)이라고도 불렸는데, 사실상 그 근원을 따져 보면 세훈이 제주도에서부터 가지고 와 보급시켰던 군복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하간 이렇게 지방과는 확연히 다른 한성의 모습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으며, 한성의 부민들은 속된 말로 서울내기, 혹은 경인(京人)이라는 말로 자부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니, 폐주 이방원 때까지만 하더라도 구도읍인 개성과 경쟁을 하며 심심하면 불거지던 천도론(遷都論)은 이제는 아주 쑥 들어가 한성을 조선의 도읍으로 보지 않는 이는 조선팔도에 더 이상 없었다.

1428년 맹춘(孟春)

조선국 한성부.

이른 봄, 의정부의 조례를 마치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나와, 호부에 시찰을 들어온 세훈을, 호부판서인 설경수가 붙잡았다.

위구르 출신 설손의 아들로, 세훈의 아래에서 여러 자리를 유임하며 특히 호부의 관련된 일과는 잔뼈가 굵어진 인물로, 목포부사로 있을 때 나상에서 추진하는 조선업과 천일염의 전매에 관여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시 한성으로 돌아와서도 호부판서를 맡아 은전(銀錢)의 제조 및 유통과 세수의 은납, 그리고 각종 상업의 진흥 및 규제에 힘써 왔던 그였다.

“심왕 전하. 국경 근변(近邊)에서 이상한 문서가 떠돈다고 평양의 유상(柳商)들이 가져온 것이 있어 살펴보았는데, 조목을 보아도 요해가 가지 않아 한 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팔도와 나라 밖으로 퍼져 나가는 상인들과 돈에 관련된 일을 맡고 있다 보니, 설경수는 본의 아니게 정보를 모아다 전해 주는 일을 하곤 했는데, 이번도 그런 경우와 한 가지였다.

세훈은 특별히 깊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설경수가 보여 준 문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순간 엄청난 전율이 그를 놀라게 했다.

그곳에 적혀 있는 글자들은 다름 아닌 한글이었던 것이다. 중세국어로 쓰인 그 글에는 반치음ㅿ과 아래아(·)가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현대의 한글도 아니고, 바로 당대의 조선말을 명확히 살리고 있는 글이었던 것이다.

내용은 대충 별것이 없었다. 동녕관의 상인 오 모(吳某)와 의주 상인 김 모(金某) 사이에서 평양 유상에다가 각각 견포 50필을 내어 맡겨 두었다가, 각자 위급할 때 내어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일종의 계를 맺은 수결이었다.

그러나 세훈은 우선은 모르는 척 입을 닦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한글이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걸 알고 있는 것이 더욱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었다.

“나도 이게 도대체 어떤 것을 적어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구려. 한 번 이 문서를 자네에게 보여 준 유상의 그 상인을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 봅세.”

세훈도 내심 한글이 어느 때인가 등장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이 문서를 통해 확인했지만, 과연 어떻게 된 일인지 내막이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세훈과 설경수가 그 문서를 가져다 준 유상의 상인을 불러다가 앉혀 놓고 물으니, 조선말을 좀 편히 적기 위해서 동녕관 상인들이 언제부턴가 쓰던 것이 요 근래에 평안도 일대의 상인들에게도 퍼져, 상업 거래에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자를 어렵게 익혀 쓰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상업하는 자들은 학문을 닦는 것보다는 계약의 내용이 명확하고 이해가 갈 수 있는 문서가 중요한 것이므로, 배우기가 쉽고 간단해 상인들 사이에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동녕관에서부터 쓰였다는 말인데, 누가 이것을 제일 먼저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하는가?”

세훈의 물음에 상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저희들한테 뭐 그리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저희 물건을 사고파는 놈들이야 저희들 만 알기 좋으면 되는 일이니, 동녕관의 상인들이 필요해서 고안한 것인 줄 알았습죠.”

이 상인에게 더 캐낼 것도 없다고 생각한 세훈은 그를 돌려보내고서는, 동녕관에서 보고가 올라오는 조목(條目)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 그간 쌓아 둔 서류 더미로 시선을 옮겼다.

동녕관 안찰사 이맹균(李孟畇)이 올리는 서찰은 그간 동녕관에서 명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의 동향을 관찰한 측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소한 분쟁이나 정기 보고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라 크게 유념해서 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한참을 살피다 보니 1년 전에 짤막하게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있었다.

폐주 정안군의 3남 이도가 명나라에서의 정변을 도망쳐 와 동녕관에 거처를 잡았는데, 일전의 사면령도 있으니 자신이 그를 돌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몇 줄 아래에 이도가 이두문(吏讀文)과 같은 종류의 나랏말을 적는 서법을 고안하여 한자를 잘 깨치지 못한 상인들 사이에 쓰임이 좋다고 적어 둔 것이었다.

당연히 세종이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그냥 일개 왕족인 이도로써 동녕관에 숨어 살며 고안한 글이었으니 그 중요성을 누군들 잘 알았겠는가 싶지만, 한글에 관해 이맹균이 이리도 짧게 보고한 것이, 상인들 사이에 날개 돋힌 듯 퍼져 나가는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글을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들이 이 한글의 명확한 쓰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듯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짤막하게 보고해 놨으니, 바쁜 와중에 세심히 살피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막연히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충녕군 이도가 동녕관으로 흘러들어 와 한글을 고안해 이미 언중에 퍼뜨렸다니, 세훈은 이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겹쳐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혹여 그의 업적을 훔치는 일인가 싶어 마음속에 께름칙한 부분이 언젠가부터 있었다. 그래서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그 자신이 한글을 창제한 것처럼 반포할 수 있음에도 차마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또, 내심 속으로는 아직까지 우리 글자를 가지자고 주장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가 한참을 다르게 돌아도, 사람에게 주어진 몫은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충녕군 이도는, 세종대왕으로서가 아니라, 폐주 정안군의 아들, 그리고 아무 권세도 없는 일개 사인으로서 이것을 연구하고 다듬어 실제 역사보다 몇 년은 빠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세훈은 그렇게까지 사실을 알고 보니, 더 이상 그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조선으로 불러들여 한성에서 보다 그의 재능을 꽃 피울 일을 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제는 많은 이해관계가 겹치고 세월이 바뀌어 그가 더 이상 왕좌에 오를 수는 없을 테지만, 그것은 그에 대한 부끄러움과 사죄의 맘으로 세훈이 짊어지고 가야 할 일이었다. 지금은 충녕군 이도 그 자신과 나라를 위해서 그가 조선으로 돌아와야 될 때라는 것이 세훈의 생각이었다.

세훈이 바삐 글을 적어 급하게 동녕관 안찰사 이맹균에게 서찰을 부치니, 보름여가 지난 뒤에 그 글이 압록강을 건너 이맹균에게 당도하였다.

서찰을 급히 살펴 본 이맹균은 이도를 불러다가 함께 자리를 만들어 앉고서는 물어본다.

“일전 만드셔서 상인들에게 일러 주신 글이 이제 조선 땅에도 들어가 평안도에서도 널리 쓰이기 시작해, 심왕 전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시게 되었나이다. 때문에 그 공이 심대하고, 그 기재가 탁월한 군께서 이제는 구원(舊怨) 없이 본국으로 돌아오셔서 왕족으로서의 작위를 받고 나라를 위해 애써달라고 하십니다.”

이맹균의 말을 들은 이도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채 열 살이 되기 전에 궁궐에서 쫓기듯이 도망쳐 나와 평양과 의주를 전전하다 회군하는 명군의 군세에 짐짝처럼 얹혀서 도망 나온 명나라였다. 그 후의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은 쉽지 않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이제 서른이 되고, 명에는 살 붙일 친족도 없이 부인과 아들 하나와 함께 이곳 동녕관에 흘러들어 온 몸이 되었으니, 이제는 고국산천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겠습니다. 들려오는 풍문에 한성이 많이 바뀌었다 하더군요.”

“지금의 대군주 폐하께서는 항렬을 따지면 군의 조카뻘 되시는 분입니다. 분명히 왕숙(王叔)으로 예우를 아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심왕 전하께서도 군에 대한 예우를 약속하셨으니, 분명히 그 대우가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 쫓겨 나온 고국에서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저 이제는 내가 난 곳에서 무엇이라도 이루어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담담한 마음으로 조선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채비를 하여 처자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충녕군 이도가 조선으로 돌아가니, 이것이 그해 음력 3월의 일이다.

이도는 내려오는 길에 여러 고을과 고장을 거치며 내심 이리저리 놀라고 있었다.

지금의 조선의 생활은 자신이 어릴 때 기억하는 그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보고 자란 것과도 달랐다. 백성들이 추레하고 등이 굽은 것은 별 다를 것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 입은 옷은 깔끔하고 단정해 보였고, 거래되는 물자들은 풍족해 보였다.

처음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에 들어왔을 때는 생활이 그다지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보이는 것이 점차 달라졌다.

평양에는 이미 거대한 시전(市廛)이 들어서 있었고, 파사국에서 들여왔다는 유리 공예품까지 팔리는 것을 보았을 때, 이도는 내심 숨을 들이켰다.

해주에 이르니, 바다를 마주한 해주의 성곽은 그냥 돌로 이은 성을 걷어내고 한창 벽돌과 석회를 발라 굳히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그곳에서 시작되어 한성으로 바로 간다는 포석 깔린 경해가도를 보았을 때는 적잖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이제 막 하루에 한 번 정기적으로 서울로 여객을 운송한다는 역마차(驛馬車)라는 것이 생겼다 하여, 그것을 타 보니 아직 마차라는 것의 안정성이 떨어져 몸이 심히 괴로웠지만, 역참을 걸쳐 가며 쉬어 가니 단 사흘 만에 한성에 도달하게 되었다.

서대문 앞의 마지막 역참에서 내려 우선은 호패가 없어 동녕관 안찰사 이맹균이 써 준 증명을 내어 보이고서는 성문 안으로 들어서니, 길을 따라 늘어선 가가호호(家家戶戶)가 기와가 올려져 있고, 담은 벽돌로 쌓아 정갈하며, 길 위로는 포석이 깔려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도가 어안이 벙벙하며 서대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성안을 둘러보고 있으니, 군복을 입은 사내가 하나 다가와 묻는다.

“정안군의 아드님 되시는 충녕군 이도님이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의정부에 빈청(賓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영의정 심왕 전하와 빈객(賓客)들이 모두 기다리고 계시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도가 고개를 끄덕이고 군인들이 함께 대동해 온 교자에 올라 광화문 앞 의정부에 들어서니 어릴 적 보았던 익숙한 얼굴들이 이제 늙어서 자리하고 있었다.

허리가 굽고 검버섯이 피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방과(芳果) 백부이고, 그 옆에 앉은 것은 분명히 숙부 문안군(文安君) 방연(芳衍)이었다.

“어서 오너라. 먼 길에 고로가 많았다.”

기침을 토해내듯 이방과가 가래 끓는 소리로 말했다.

실제 역사보다 벌써 여덟 해를 더해 살고 있는 이 태상왕(太上王)은 늘 정안군 이방원에게 겁박받다가 끝내 왕위를 내어 주었으나, 이제 와서 그 아들을 보는 일은 이제 똑같이 힘 없는 왕족의 어른으로서 반가이 맞아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방과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본 이도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며 말한다.

“백부님, 백부님, 상왕 전하(殿下), 오랜만에 뵙겠나이다.”

“도야. 나는 보이지 않느냐.”

이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삼촌 방연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방연 또한 이제 나이가 쉰이 넘어 이제는 새치가 그득이 잡히고 얼굴은 붉그스름하게 변했으나, 옛 얼굴은 그대로였다.

“아닙니다, 숙부, 어찌 숙부를 몰라 뵈겠습니까!”

큰절을 올리고 돌아보나 안타깝게도 친족은 그것이 다였다.

아버지 이방원의 나머지 형제들은 일찌감치 다들 명을 달리했으니, 제 수명을 다하거나 혹은 이방원과 다투어 목숨을 잃었다. 이방원의 바로 손위 형인 회안군(懷安君) 이방간도 네 해 전에 목숨을 달리했다고 했다.

이제는 노추(老醜)한 모습이 되어 좋아하는 격구도 즐기지 못하는 늙은 태상왕 이방과와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는 이방연만이 아버지 항렬의 형제들 중 아직 남은 것이었다.

“어서 앉거라. 맞은편에 계신 분이 바로 심왕 전하이시다.”

이방연이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이도에게 세훈을 소개시켜 준다.

세훈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이도는 마음속에 씁쓸한 기분이 말로 다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려보았다.

이도는 순간 말을 이을 수 없었는데, 공손히 예를 갖추려 읍을 하고 그와 눈을 마주치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세훈은 말없이 그렇게 이도를 마주보다가 술을 한 잔 부어 건네고서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연회를 즐거이 즐기시오. 언제 따로 뵙도록 합시다.”

이도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술을 마시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이상 풍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피해 가는 세훈의 마음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도를 마주한 순간 세훈은 자신이 조선을 위해 추진한다던 일들이 과연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있었던 일들을 바로잡기는 하되, 그것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이도는 조선으로 돌아와 개성후(開城候)에 봉작되고 충녕의 군호(君號) 또한 정식으로 복작되니, 그 신원이 완전히 회복되고, 한림원, 학습원, 외학원 및 각종 학당을 자유로이 출입하여 공부하거나 가르치거나 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아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또한 따로 한림원 산하에 집현전(集賢殿)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특히 이도가 고안한 정음(正音)과 국문의 어운(語韻)에 관해 연구하게 하고, 그 책임자로 개성후 충녕군 이도가 부임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듬해 정리하여 펴낸 것이 바로 개성후제(開城侯制)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정식으로 국문(國文)으로 반포되니, 이것이 1429년 음력 4월 18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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