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9장 북안만리(北岸萬里) (20/82)

제19장 북안만리(北岸萬里)

「……(전략)…….

맹사성은 말하기를, “《시경(詩經)》 소민편(召旻篇)에 이르기를, ‘옛날 소공(召公)이 날마다 1백 리씩 땅을 넓혀 갔다.’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것은 곧 금세(今世)를 상심(傷心)하고 옛날을 생각하면서 분격하여 한 말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의 선원(璿源)은 대대로 공주(孔州)에 살았는데, 지금은 그 공주가 모두 풀이 우거진 황야가 되어 야인의 점거(占據)한 바가 되었음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옛날 경원(慶源)에서 아군(我軍)이 패한 것은 흥부(興富)가 적임자(適任者)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수로서의 지략(智略)이 있는 자가 있어서 거기를 지킨다면 어찌 패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시기가 이처럼 절호(絶好)하니 바로 국토를 넓힐 때입니다.”라고 하였다.

孟思誠曰: “《詩》云: ‘昔召公日(鬪)〔闢〕國百里.’ 此乃傷今思古, 憤激而言也. 惟我璿源, 世居孔州, 今也鞠爲茂草, 爲野人所據, 何歟? 昔慶源之敗, 以興富之非其人故也. 若有將略者居之, 何敗之有? 今其時如此, 正是(鬪)〔闢〕國之秋也.”」

―의정부실기(議政府實記)

제24권 진종 17년(辛亥) 6월 1일

1429년 계동(季冬)

조선국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북계(北界)의 변방은 원래 강계(疆界)가 일정하지 않고, 고려 때부터 진채나 속현(屬縣)이 세워졌다가 물러서길 반복하곤 하는 땅이었다.

땅이 척박하고 물산이 희귀할 뿐더러, 북쪽 들판에는 이른바 야인(野人)이라 불리는 여진족이 강성하여 때때로 조선에 들어와 살기도 하고는, 때로 강맹하고 어지럽게 침공하여 노략을 자행하기도 하니, 적은 인구로 방비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노릇이었다.

그러나 을유전역 이래 명이 설치했던 건주위가 물러가고 이곳에 조선군이 진주하여 여진족을 묶어 둔 덕에 북방의 강계는 비교적 안전해졌으나, 그렇다고 드넓은 국경연선을 모두 관장하기는 무리가 있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몇 해 전 최윤덕(崔潤德)이 서북면에 연대적인 방어 체제를 마련할 수 있도록 소현(小縣)을 혁파하여 거진(巨鎭)을 설치하자는 건의를 했는데, 이 논의가 발전하여 결국 이 해에 이르러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고, 강계부사에 이순몽(李順夢)을 보임하여 이곳에 설치할 행정 체계를 정비하도록 했다.

새롭게 강계에 제19진위대를 편성하여 이곳에 육군 참장(參將) 이각(李恪)을 진위대장으로 삼고, 육군 정령(正領) 이징석(李澄石), 부령(副領) 김효성(金孝誠), 홍사석(洪師錫) 등에게 분대(分隊)를 주어 요지에 진주하게 했다.

이들은 건주의 조선군에 저항하는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을 건주의 건주파견대(建州派遣隊)의 군세와 함께 협공하여 정벌하고, 압록강 안으로 들어와 약탈의 근거지를 만들어 놓은 야인들을 모두 몰아내어 이곳에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했다.

이 원정 후 여연과 강계 사이에 성을 쌓아 자성군이라 하고 여연의 남촌, 강계의 북촌 일부를 떼어내어 붙이고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또한 여연군 동쪽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을 설치하여 군으로 승격시키고, 이듬해에는 여연과 자성의 중간 지점인 우예보(虞芮堡)에 우예군을 설치하여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이른바 4군이 완성되었다.

이로서 압록강 남안(南岸)은 모두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이주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20년간 세금을 면제하기로 약속하여 인구가 많은 삼남에서 사람을 옮겨 오게 했는데, 이렇게 이때까지 이 4군에 나누어 정착한 인구가 총 2,800호, 1만 7천여 명이었다.

이렇게 어렵사리 안정화된 강계부 일대에 김종서가 북방안찰사(北方按察使) 및 임시 육군 중장(中將) 직함을 달고 내려온 것은 1429년 겨울의 일이었다.

“먼 길에 고로가 많으셨나이다.”

김종서가 강계부의 성문으로 들어서자 강계부사 이순몽(李順夢)이 마중 나와 있었다.

북쪽의 겨울은 마치 살을 에는 듯했고,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부옇게 번져 나가는 것이 도무지 견디기 힘들었다.

바짝 마른 입술로 주변을 살피니 얼어붙은 공기에 파랗게 산란된 빛이 눈 위로 떨어져 쓸쓸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날이 추우니 어서 들어가시지요. 온돌을 지피고 화로를 틔워 놨습니다.”

이순몽의 말에 김종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강계부사가 기거하는 행랑(行廊)으로 들어섰다.

좁은 문을 들어서자 사방이 벽으로 막혀 마루도 없고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북쪽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필시 열을 아끼려 이리 지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방백(方伯)이랍시고 거창한 이름을 달고 삼남에서처럼 하려 했다가는 겨울을 채 이겨내지 못할 겁니다. 때문에 비록 궁색하지만, 겨울에 이만한 안락을 주는 곳도 없지요.”

대낮임에도 꽁꽁 막힌 벽 사이로 빛이 들어오지 않아 등잔을 틔워 놓고 이순몽이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고맙소.”

김종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화로에 가까운 곳에 앉았다.

예전 젊은 시절에 요동에 있는 동녕관에서 도위(都尉) 노릇을 한 적도 있지만, 그곳은 막막한 평원 위에 서 있는 곳이라 이렇게 추위를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강계는 백두산 줄기 아래에 있는 높은 산중의 성채(城砦)로 이곳의 겨울 추위는 도무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전령이 일러 두어서 대강의 내용은 알고 계실게요.”

“물론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이곳 강계에서 병사를 조금 내어 겨우내 준비시킨 다음 날이 풀리면 동북면으로 건너가 함주의 진위대 병력과 합세한 뒤에 두만강변에 군현(郡縣)을 설치하려 하신다는 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겨울에 여기서 군사를 조련시킨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소리처럼 들리오.”

“조정에서 내린 명이니 쉬이 이야기는 못하겠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이 계절에는 여진족도 토막(土幕)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방비고 조련이고 이 계절에는 모든 산야와 사람이 쉬는 때이지요. 민초들도 가을걷이를 마친 뒤로는 집밖을 잘 나서지 않습니다.”

“고로가 많소.”

“별말씀을요. 저야 그저 이곳의 지방관이고, 이곳에 주둔한 진위대의 사람들이 그저 괴로울 뿐입니다. 겨울이면 주둔지에서 나무를 때느라 봄이 되면 산이 또 한 겹 벗겨지고, 그곳에는 농민들이 들어가 땅을 일구지요. 그렇게 개간하면 그것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야인들을 막아내고, 매년이 반복입니다.”

김종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에서도 야인들을 복속시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소. 다만 양강(兩江)의 이남은 빠른 시일 내에 안치시키고, 건주파견대처럼 일부 병력을 강 너머로 보내 거점을 만들고 진채(鎭砦)를 만들겠다는 복안이오.”

“그곳에 농민들도 이주시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추운 곳에서는 벼나락도 아니 맺히겠소, 허허. 압록강 너머에 건주파견대가 있으면, 두만강 안쪽에 군현을 다진 뒤로는 그 너머에도 그런 파견대를 만들어 동북면을 노리는 야인들을 다스리겠다는 이야기요.”

“잘 알았습니다. 일단은 오늘 푹 쉬시고 내일 저와 함께 진위대의 둔지(屯地)로 가시어 함께 진위대장 이각(李恪) 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다음 날, 김종서와 이순몽이 이각을 찾아가니 이각은 과연 도리질을 친다.

겨우내 군사를 강하게 조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추위에 오히려 몸을 상하고 말 것이니, 조금 날씨가 풀리면 강맹하게 조련시켜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가 보는 것이 어떻냐는 것이었다.

김종서도 가히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조정에 장계를 부쳐 날이 풀리고 움직이겠다고 고하고, 이듬해가 되어 봄이 오자 강계 진위대의 병력 중 사분지 일인 5천을 따로 뽑아 강하게 두 달간 조련시키고, 개마고원의 산중을 돌아 동북면으로 향했다.

발걸음마다 첩첩산중에 울창한 수림으로 사방이 보이지 않는 숲을 헤쳐 경성부(鏡城府)에 닿은 것은 5월의 일이었다.

이곳 경성 일대의 북변(北邊)은 예로부터 고려, 몽골, 여진이 잡거(雜居)하던 곳으로, 고려 말에도 이미 홍건적과 나하추[納哈出]의 침입, 여진부족 우량하[兀良哈], 오도리[斡者里]의 발호로 동북면 국경 지대가 소란하였다.

1393년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 안무사 이지란(李之蘭)으로 하여금 갑주(甲州), 공주(孔州) 지역에 성을 쌓아 오랑캐를 진무하게 했었고, 1398년 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 정도전(鄭道傳)을 동북면으로 보내 주·부·군·현의 지계를 정하고, 공주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여 부를 설치, 경원(慶源)이라 이름하기도 했다.

을유전역 후에 경원, 경성에 무역소를 두어 여진족에게 교역 편의를 제공하였으나, 1413년 경원부를 중심으로 하여 우디하[兀狄哈]의 내습이 잦아지자 경원에서 경성으로 부를 옮기고, 경성을 여진족 방어의 요충지로 삼았다.

조정에서는 이번 기회에 이곳을 완전히 안전하게 다져 두고, 오히려 두만강 너머로 군사를 진둔시켜 두만강 안쪽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세훈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종서가 북쪽으로 출발하기 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퇴축(退逐)하는 것은 조정의 척지(拓地)하는 뜻에 심히 어긋나는 일이네.”

세훈의 말은 김종서 또한 심히 공감하는 바였다.

이렇게 그 뜻을 받들어 북쪽으로 올라와 강계의 정병 5천을 이끌고 이 경성부로 들어서니, 벌써 네 해째 지방관인 부윤조차 부임하지 않고 인구도 채 천 명이 되지 못하는 말 그대로 폐군(廢郡)이나 다름없었다.

김종서는 이곳에 진둔하여 한 해 동안 석막의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겨 종성군으로 하고, 여진의 내침 염려가 많은 알목하에는 회령진(會寧鎭)을 신설하여 부(府)로 삼는 한편 경원부는 회질가(會叱家)로 옮겨 안전히 방비하도록 했다.

옛날의 경원부였던 공주 지방에는 따로 1천의 병력을 내어 함흥 진위대에 예속시키고 경흥 분견대(分遣隊)를 설치하여 단단히 방비토록 하고 이곳을 경흥이라 이름 하여 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만강이 돌아 나가는 북쪽 끝에 온성군을 설치하고, 석막의 옛 땅에는 부령부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시키니, 동량북(東良北, 무산)을 제외한 모든 두만강 유역을 수복하고 삼남 지방의 사람을 옮겨 살게 해 안정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김종서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431년 계춘(季春)

조선국 영길도 영흥군(慶興郡).

조선군의 별동대가 두만강을 건넌 것은 1431년의 봄의 일이었다.

김종서가 진둔한 영흥군은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 나가는 하구(河口)와 면한 곳이었는데, 이곳에 토성(土城)을 진축하고 관아를 세워 우선은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이곳에는 함주 이남에서 이주시킨 120호 620인가량의 조선인과 육진의 개척 중에 조선에 복속한 오도리[斡都里] 일족의 충샨[充善]이 이끄는 여진족 800인가량이 정주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은 군인이었는데, 강계에서 끌고 온 5천의 군세 중 경흥에 배속시킨 1천을 제한 4천의 군세가 고스란히 주둔해 있었는데, 이 중 1천을 남겨 두어 영흥분견대라 이름하고, 나머지 3천의 군세를 이끌고 강을 건넌 것이었다.

이 김종서가 가는 길의 길잡이 삼아서 동행한 것이 오도리의 족장 충샨이었는데, 충샨은 원래 이 일대에서 용맹등등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몽케테무르[猛哥帖木耳]의 아들로, 몽케테무르가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자 젊은 나이에 부족의 족장이 되어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두만강 남쪽 일대를 전전하던 이들 부족은 김종서의 군세가 들이닥치자, 이내 저항을 포기하고 조선에 복속해 유목을 포기하고 정착을 하기로 다짐했는데, 이 신뢰 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김종서는 이 충샨을 인질 겸 길잡이 삼아서 두만강을 건너온 것이다.

“가도 가도 너른 산하뿐이니, 도대체 여진족들은 어디에 흩어져 산단 말인가?”

두만강을 떠나 정찰을 해가며 해안가를 거슬러 올라간 지 이틀이 지났을 때 김종서가 충샨에게 물었다.

김종서는 일전 동녕관 도위 시절 여진말을 배워 어느 정도 그 뜻을 통할 수 있었는데, 조선말을 어줍잖게 배우기는 충샨도 마찬가지인지라, 겨우 뜻을 맞춰 가며 말을 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인적이 뜸합니다. 해안가에서는 가축을 몰고 다니기가 적합하지가 않아 모두 안쪽의 초원에서 생활합니다. 동쪽의 바다 해안을 돌아나가는 중에는 사람을 마주치기가 힘들 것입니다.”

김종서는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둔지를 찾으신다면, 이곳에서 다시 이틀 거리에, 너른 협만(峽灣) 사이로 삐져나온 곶에 예전 원나라의 둔지인 영명성(永明城)이 있습니다. 몽골 사람들이 물러간 뒤 버려진 곳이나 다름없으니 그곳을 보수하여 진둔하십시오.”

“일단은 직접 가 살펴보기로 하자.”

영명성은 예전 몽골인들이 들어와 이곳을 다스릴 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딸려 있던 둔지 중 하나로서, 그들이 물러간 뒤로는 이곳에 기거하는 이 없이 버려진 진채였다.

이 영명성이 있던 곳이, 원래 역사에서는 훗날에 해삼위(海參威)라 불리다 나중에 러시아 사람들이 들어와 블라디보스토크라 부르게 된 바로 그곳이었다.

과연 김종서가 그곳에 이르니, 주변으로는 산이 있어 방비하기가 좋고, 앞으로는 바다가 있어 나루를 대기도 좋았다. 주변의 평야에는 쌀은 힘들더라도, 보리나 밀을 심어 봄직할 정도는 되었다.

예전 원나라에서 구축한 영명성은 사실 돌로 지은 것도 아니고, 흙으로 쌓아 이제는 거의 허물어지고, 안에 세워진 건물들도 거의 무너져 처음부터 다시 손을 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쉬운 대로 그나마 멀쩡한 건물에다 막사를 차리고, 주변을 단속하며 진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제 곧 여름이라 이곳의 기온은 활동하기 딱 좋은 정도였고, 다행히도 군사들을 부리는 데 지장이 없었다.

흙으로 성곽을 다시 다지고 그 위에는 나무를 베어 깎은 다음 목책을 둘러 단단히 방비시키고, 사방을 살피기 좋게 동서남북으로는 누대(樓臺)를 세운 다음 바다 방향으로 문을 하나 내고 내륙 쪽으로도 문을 하나 내었다.

그러고는 나무와 흙으로 병사들이 기거할 둔영(屯營)을 축조하고, 장교들의 숙사(宿舍)와 둔영의 중심인 본막(本幕)도 세웠다.

영명성을 정비하는 데는 거의 세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3천의 군사가 달라붙어 일을 했음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배를 댈 수 있는 나루를 만들어 두고서는 목선(木船)을 만들어 병사들로 하여금 나가서 어물(魚物)을 잡게 하는 한편, 성 북쪽의 평지에는 밭을 갈아 보리를 심어 두었다.

우선은 영흥부에서 식량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조선군, 특히 경계 지대의 병사들은 일종의 둔전병(屯田兵)으로 살 수밖에 없었는데, 현재 조선군이 유지하는 징병제를 모두 세금으로 감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금 등의 전매금을 내려 보조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또한 목화를 재배하여 그것을 팔아 수입을 하는 것도, 경기도, 평안도 일대의 면직 공업이 자리 잡은 곳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총포(銃砲)의 유지, 탄약의 보급, 병사의 군복 및 각반(脚絆) 및, 장교의 녹봉 따위는 정부에서 어떻게든 지원해 주고 있었지만, 식량 문제는 거의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이곳에 주둔지를 확보할 때 김종서는 식량문제를 먼저 고려하고 농지와 어로를 따져 본 것이었다.

이것은 중세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근대 국가도 아닌 애매한 위치의 조선이 징병제를 선택할 때부터 이미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군역(軍役)을 지러 나가 고된 생활을 하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조금 나아진 상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다만 조정의 세수가 5할은 공부로, 3할은 병부로 빠지니, 끊임 없이 새로운 재원(財源)을 찾아 조정은 고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민을 누구보다 익히 잘 아는 김종서는 이곳의 주둔병들이 최대한 자급적으로 식량은 보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이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심을 거듭하다 김종서가 충샨을 부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혹시 자네의 부족원들을 이곳에도 조금 이주시켜 군사들을 도와 가축을 조금 길러 볼 생각이 없는가? 비록 이곳이 내륙만큼 초지가 넓은 곳은 아니나 얼마 안 되는 부족민들이 가솔을 이끌고 정착하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애써 키운 가축들을 병졸들이 징발해 갈 것이 분명한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은, 자네 부족민들도 우리 조선군에 편입되어 완전히 이곳에 정착한 둔전민(屯田民)이 되라는 이야기네. 대신 모든 세금을 탕감해 주고, 그대에게 육군의 계급을 정식으로 부여할 생각이네. 그러니까 여기 병사들과 같이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고 하며 서로 통혼(通婚)도 맺어 이곳에 완전 정착해 볼 생각이 없냐, 이 이야기네.”

김종서의 말을 들어 보니 충샨에게도 그다지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사실 충샨의 아버지인 몽케테무르가 죽은 뒤로 오도리 일족은 다른 여진족 일파들에게 크게 세가 밀리게 되었고, 충샨이 이것을 버텨 나가기 버거워하던 차에 조선군이 밀고 들어오자 그냥 백기를 들어 버린 상황이었다.

어차피 조선의 그늘 아래서 연명해야 할 상황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군에 들어와 당당히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충샨이 김종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존의 6진에 나누어 정착한 부족민들 중 일부와 몽케테무르가 죽은 뒤로 두만강 일대에서 흩어져 제각기 생활을 꾸리던 옛 오도리 일족의 부족민들을 규합하여 1천 인 정도를 이끌고 영명성으로 들어와 정착시켰다.

대충 성을 세우고 숙식할 곳을 만들어 둔지의 조영(造營)이 끝나고, 농지를 만들고 고기 잡을 목선도 넉넉히 만들고, 가축을 키울 초지도 확보하고 나니 어느새 반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러나 김종서에게는 이곳이 조선의 북방 경영의 가장 중요한 요지가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렇게 모든 정비가 끝나고 군세 2천을 이곳에 주둔시키고, 두만강 안쪽의 6진 중, 온성과 경흥에서부터 길을 닦기 시작하여 이곳으로 이어지는 군로(軍路)를 확보하고, 그 중간 중간에 진채를 세워 나머지 1천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켰다.

이렇게 마무리가 되자 김종서가 조정에 장계를 적어 이 사실을 알리니, 조정에서는 이곳에 옛 영명성의 이름을 따 영진도독부(永鎭都督府)를 설치하고, 영길도 관찰사로 하여금 이곳 대도독(大都督)의 지위를 겸하게 한 뒤, 이곳의 3천 병력을 모두 함주진위대 소속의 영진분견대(永鎭分遣隊)로 편제했다.

또한 이곳의 영진분견대장은 특별히 참령(參領)이 아닌 육군 부령(副領)을 파유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모든 것에 협력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길 자처한 충샨에게는 육군 정위(正尉)의 계급 및, 회령개국자(會寧開國子)의 작위가 부여되었다.

김종서가 이 모든 조성을 마치고 당분간의 이 관할을 계속하기 위해 영길도 관찰사 및 영진대도독의 지위로 제수받아 새로이 함주(咸州)에 설치한 감영으로 옮겨 가니, 이곳으로 육군 정령에 제수된 대도독이 파견되었는데, 바로 믈라카 해협의 무역로에 위치한 상남(湘南)에서 파견 생활을 마치고 2계급 특진하여 귀국한 천안석이었다.

1432년 맹하(孟夏)

조선국 영진도독부(永鎭都督府) 영명진(永明鎭).

육군 부령 천안석은 영진도독부의 수읍(首邑)인 옛 영명성인 영명진에서 일대를 관장하는 지방관 겸 육군의 분견대장으로서 군정(軍政)을 행할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도독부라고 해 봐야 사람이 제대로 기거하는 성은 이곳 영명진뿐인 데다가, 온성과 영흥, 회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진 산채(山砦)에 주둔한 병력을 관리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의 거의 전부였다.

다만 이곳은 유사시에는 막중한 책무를 띠게 되는데, 바로 북쪽의 여진족들이 두만강 주변에 출몰하거나 영길도를 노릴 요소가 보이면 바로 타격해서 진압하거나, 혹은 이들을 잘 구슬려 감히 덤비지 못하게 해야 했다.

바로 그것이 두만강을 국계(國界)로 지키기 위해서, 조선인이라고는 군인 말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곳 두만강 너머에 굳이 도독부를 설치하고 수천의 병력을 주둔시킨 이유였다.

그런 곳이니 만큼 천안석이 이곳에 발령이 된 이유는 명확했다.

천안석은 원래 농민 출신으로, 경인동정 때 입지전적인 공로를 세워 육군진무관 1기 생도로 차출되어 장교의 계급을 달게 된 사람이었다. 때문에 이렇게 척박한 곳에 따로 떨어져 지내는 병졸들의 심리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는 군부의 판단이 있었다.

또한 그것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군 생활을 경인동정 때 일본을 징치하고 점령한 진서와, 무역로의 거점으로 믈라카 술탄과 알력 및 토민(土民)들과의 반목이 있었던 상남에서 책임관으로서 보내 왔기에, 이번에 북변(北邊)의 야인(野人)들을 다루는 데도 그간 쌓아 온 능력을 보여 주리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소만식은 그를 따라오지 않았는데, 그는 상남에서 바로 전역을 해서 그간 모아둔 돈으로 이제는 부쩍 늘어난 상남에 기항하는 조선의 무역 선원들을 상대로 잠자리와 식사, 그리고 술을 제공하는 여각(旅閣)을 짓고 그곳에 가족과 함께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고향이 그리울까 싶어, 여각에 안동여숙(安東旅宿)이라는 명패까지 달아 두었으니, 천안석은 떠나오는 길에 그저 웃을 수밖에.

어찌 되었든 천안석이 이곳에 부임해 보니, 어지간한 것은 모두 김종서가 다져 두어 크게 심려할 것이 없었다.

아직까지 영길도에서 보내온 곡식은 창고에 충분해 올해를 나기에는 거뜬했고, 내년부터는 올해에 이곳에서 지은 농사로 버틸 수 있을 듯 보였다.

또한 이곳 앞바다는 어획(漁獲)이 풍부해 해산물도 충분히 걷을 수 있었고, 여진족이 기르는 말과 소에서 짜낸 젓으로 마유주(馬乳酒)도 담글 수 있었으니, 기본적인 군영의 생활은 자립할 수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 장기적인 주둔을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천안석의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떠오른 것이 일전 상남에서 군생활을 할 때 들은 이야기였다.

그가 한창 그곳에 상남파견대(湘南派遣隊)의 대장으로 있을 때 바호디르가 페르시아로 가는 무역 항로를 기어이 개척해 냈고, 그 뒤로 나상에서는 바호디르의 선단 말고도 독립 함대를 일궈내 무역 항로에 보냈다.

또한 그간 원양 무역을 하고자 벼르고 있던 송상(松商)과 경상(京商)이 차례로 뛰어들고, 진서도독부의 박주(博州, 옛 하카다)의 일본계 상인들도 이 무역에 선단을 꾸려 참여하니, 상남에서 서역으로 나가는 조선 배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바로 서역으로 들어가는 모피(毛皮)가 품귀하다는 이야기였다.

좋은 품질의 여우나 호랑이 가죽 같은 것은 당연히 높은 값이 쳐져 팔리는 것이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피복을 짓는 방법이 다른 서방에서는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팔려 나가는 모피의 수요가 꾸준했던 것이었다.

요동과 이곳 영진도독부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벌판에는 여진족들이 유목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고, 산림이 드문드문 펼쳐져 있으나, 이곳에서 북쪽으로 계속해서 펼쳐진 해안가를 따라서는 산맥이 뻗어 있고 침엽수림이 울창해, 각종 모피를 얼마든지 구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이것을 무두질해 조선에서 외국과 닿는 상인들에게 보내어 팔면, 그것을 이곳 영진도독부를 개척하고 유지하는 일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구체화되자, 천안석은 바로 충샨을 불러들였다.

충샨은 이제 오도리 부족에게 사성(賜姓)된 목(目)씨의 성을 받아들여 목충선(目充善)이라 이름하고 있었다.

“목 공. 이리 일단 앉아 보게.”

“무슨 일이십니까?”

이제는 영명진에서의 정착 생활에 익숙해져 조선군과 자기 속하의 여진인들과의 다리 역할을 충실히 행하고 있는 목충선이었다.

밖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로 이제는 변발을 잘라 버리고 군대식으로 단발을 한 그의 모습은 꽤나 듬직해 보였다.

천안석은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서는 계급을 떠나서 교분 관계를 쌓고자 노력했는데 목충선의 성격 또한 꽤나 시원털털한지라, 둘은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내가 전에 저 남양(南洋)의 바다 끝에 부임받아 군생활을 했던 것은 잘 알지 않은가?”

“물론이지요. 하지만 저야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이 조선 사람들에게서가 처음이니까, 그런 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여하간 그곳에서 서역으로 나가는 배들에 탔던 상인들이 말하기를, 좋은 모피가 그리 귀하니 호랑이나 하얀 여우 따위를 잡아서 잘 뜯어 말리면 그것을 비싼 값에 팔 수 있다고 하더군. 아직까지 조선에서도 이를 업으로 삼아 수렵(狩獵)하는 이는 잘 없네. 활로 산을 뛰어다니며 이를 잡아내는데 한계가 있는 법이지.”

“그렇지요. 활을 들고 하루 종일 뛰어 다녀도 건질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곳 북쪽 해안가로는 드넓은 수림이 있고, 우리에게는 총이 있으니 한 번 해 볼 만한 일이지 않은가?”

천안석이 제안하는 일은 다름 아닌 원래 역사에서 화승총이 전래된 이후 조선말에 팔도를 뒤지며 사냥으로 업을 삼았던 엽사(獵師)들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렴요, 그런 거라면 한 번 해 볼 만한 일이지요.”

목충선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천안석은 우선 목충선을 필두로 하는 여진족과 총술이 뛰어난 조선인 병졸을 합하여 100명 정도로 추려낸 다음 북쪽 해안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길을 살피고, 지세를 기록해 도첩(圖帖)을 만들어 오라 지시했다.

그러나 길을 찾고 지도를 그리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는데, 이미 금(金)나라의 멸망이후, 이곳에 들어와 있던 몽골인들도 소수로서 이미 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은 버려진 오지(奧地)처럼 된 지도 벌써 수백 년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길도 없고, 오로지 울창한 숲만이 펼쳐진 곳에서 하나하나 길을 만들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 훗날의 연해주라 불리는 이 해안가 일대는 여진족조차 살지 않는 땅으로, 헤첸족[赫哲族] 같은 북방계 수렵민들이 듬성듬성 퍼져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니, 여진족의 길잡이도 여기서 만큼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수렵 겸 탐사의 행로는 몇 차례고 이어지게 되었는데, 점차 북쪽으로 더 멀리까지 나가게 되었다.

그 행로에서 잡은 동물은 그 살은 식량으로 삼고 동행한 무두장이에게 모피를 상하지 않게 걷어내게 해 그것은 바로 영명진의 군영 창고에 바로 비축 해두도록 했다.

탐험이 거듭될수록, 조선인과 여진인의 혼성부대인 이들 탐험대는 점점 대담해지고, 숙련 되어 갔다.

이들은 육로로 탐사를 거듭하는 동시에 영명진에서 건조한 작은 목선을 타고 해안가를 탐사해 나갔으며, 조선에서 물건을 들여와 가는 길에 마주치는 원주민들과도 교역을 해 나갔다.

이렇게 가장 남쪽에 있는 헤첸족뿐만 아니라 우데거, 예벤키 족들과도 조우하게 되었다. 탐험대에 속한 여진족들은 이들의 말을 빠르게 배웠는데, 오래지 않은 옛날에 같은 말에서 서로 갈라져 나온 한 갈래였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인들은 이들과 소통하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의 성과가 나기 시작하자, 천안석은 영명진의 나루를 좀 더 확장해 큰 배가 충분히 접안할 수 있을 정도로 보수를 시키고, 우선 함주의 김종서에게 인편을 보내어 일의 진행을 알리고 모피를 사들여 줄 상인을 수배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종서는 천안석이 하는 일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여, 지원금을 좀 더 보내 줄 뿐더러, 함주 일대의 상인들을 우선 보내어 주었다.

함주에서 세력을 키워 나가던 함상(咸商)은 원래 동북면 일대의 여진족들과 거래를 해가며 성장해 왔는데, 다른 지역의 상인들에 비해 그 규모가 아직 많이 열세였다.

때문에 지역 밖으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이 함상들은 이번을 기회로 삼아 볼 작정이었다.

이들 함상에게 모피를 공급해 주기로 약정이 맺어지고, 함상에서 파견한 상대(商隊)가 영명진에 들어와 상관(商館)을 짓고 모피를 전량 수매해 갔다.

함상은 이것을 바로 경기도로 운송하여 원양 무역에 종사하는 경상과 송상에게 팔았는데, 이미 다른 물품들을 독점하여 크게 이윤을 내고 있는 나상보다 이들이 더 비싸게 값을 쳐주었기 때문이다.

이들 경상과 송상은 이것을 다시 벽란도에서 출항하는 상선에 실어 명나라 영파에서 일부를 매각하고, 그 빈 부분을 명나라의 특산품으로 채워 유구, 대월을 거쳐 상남에 들렀다가 바로 인도를 거쳐 페르시아로 가는 항로에 투입시켰다.

이것은 페르시아에 도달하면 동로마제국이나, 제노바 상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입찰되어 팔렸는데, 특히 호랑이의 모피가 제일 인기가 높았다. 이른바 ‘조선의 가죽’이라 불리게 되는 것으로, 유럽의 궁정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다.

이렇게 무역이 성사되기 시작하자, 원래는 주로 평안도 출신으로 강계에서 차출되어 이곳에 병역을 살러 온 영명진의 병사들도 전역후 군관(軍官)을 지원해 남거나, 이곳에서 아주 엽사로 전업하여 정착하게 되는데, 때로는 목충선 휘하의 여진족과 혼인을 맺어 살림을 차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전역 장병이 엽사가 되면, 군적(軍籍)에서 호적(戶籍)으로 이름이 옮겨지고, 잡아 온 모피 값의 삼분의 일을 사냥에 보총을 빌려 가는 대가로 내어놓게 되는데, 이것이 고스란히 영명진의 수입으로 들어가고, 많은 부분은 상위 부대인 함주의 제16진위대의 재정으로 올라가고, 또 영길도 관아에도 올라가니, 이들 수입이 상대적으로 빈한한 영길도 전체의 주요한 수입원으로 올라서게 된다.

때문에 군에 입대하는 이들 중에는 아주 전역 뒤 엽사를 할 요량으로 영진분견대로 보내주길 바라는 이들이 많았는데, 가장 북쪽에서 어렵게 군 생활을 하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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