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교학상장(敎學相長)
「옥을 쪼개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고,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에 왕이 된 자는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임금 노릇을 함에 교와 학을 우선으로 삼았다. 비록 좋은 안주가 있더라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지극한 도가 있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그 좋음을 모른다. 이런 까닭으로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야 막힘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안 연후에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막힘을 안 연후에 스스로 힘쓸 수 있으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남을 가르치는 일과 스승에게서 배우는 일이 서로 도와서 자기의 학업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玉不琢이면 不成器요 人不學이면 不知道라. 是故로 古之王者는 建國君民에 敎學先學하니라. 雖有佳肴라도 不食하면 不知其味야요, 雖有至道나 不學하면 不知其善也니라. 是故로 知不足한 然後에 知不足하고 敎然後에 知困하니라. 知不足한 然後에 能自反야요, 知困然後에 能自强야니 故로 曰 敎學相長야니라”」
―언해(諺解) 예기(禮記), 학기편(學記編),
진종(眞宗) 19년, 집현전 刊
1431년 중하(仲夏)
조선국 한성부.
조선의 제2대 왕인 태상왕(太上王) 이방과가 죽은 것은 1431년 4월의 일이었다. 오래 병을 앓았음에도 목숨을 길게 이어 온 그도 더 이상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무에게도 그렇게 특기되지 못했는데, 이미 폐주 정안군을 포함해 5대째가 된 왕실은 그저 이방과를 태조에서 폐주로 왕위를 승계하기 위해 잠시 머물러 있었던 공적 없는 사람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묘호도 바쳐지지 않고, 그저 실록에도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리며 남아 있다 한참 뒤에서야 그 조종(祖宗)의 시호가 올려지게 되니 풍파 많은 세상에서 은인자중한 대가라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공정왕은 따로 적자(嫡子)가 없었기에, 조선으로 귀국한 개성후 충녕군 이도가 이 상청(喪廳)을 차리고 개성의 수창궁을 비롯한 공정왕의 거처와 제사를 그대로 물림받게 되었는데, 때문에 수창궁은 이후로 개성후의 저택이라고 하여 후작저(侯爵邸)라는 별칭으로 통칭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도는 그 이후로도 개성에는 거의 머물지 않았는데, 한성에서 하는 일이 산더미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집현전(集賢殿)의 전관에 이어서 한림원의 시독학사(侍讀學士)로 부임받았는데, 이 시독학사란 원래는 황제나 왕의 곁에서 글 읽는 시중을 드는 관리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당금의 조선에서는 한림원의 총장 격인 대제학(大提學)의 바로 아래에서 한림원의 각종 학업을 관장하는 정3품의 벼슬이었다.
이렇게 자리를 맡고 보니, 이도는 한림원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처음으로 한 일은 한림원 산하에 부설된 집현전에 이어 주자소(鑄字所)를 만들고 금속활자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1403년에 계미자(癸未字)라 불리는 금속활자를 주조한 예가 있었지만, 이것은 글자가 고르지 못하고 한자만 갖춰진데다가, 이미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정부 각처에서 서책을 찍어내는데 활용되어 더 이상 사용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때문에 새롭게 활자를 만드는 일은 나라에서 추진하는 일이 되었고, 이것이 원래는 공조로 내려왔다가 공조의 업무가 이미 과하다 하여, 이 일을 이도에게 맡기기로 하고 한림원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이도는 이때부터 성심성의껏 활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예전의 주조 기술은 그대로 있기에 동을 녹여 부은 뒤 틀을 정교하게 짜서 날카로운 글자체를 만드는 데에 주력했다.
이렇게 등장한 것이 바로 동국자(東國字)라 불리는 것으로서 한자와 국자(國字), 즉 훈민정음의 글자들을 모두 포괄한 활자였는데, 아직까지 활자의 효율성은 상당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국문으로 된 글자는 전부 초, 중, 종성을 따로 조합하여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자본을 하나로 해서 만들었기에 그 숫자만 수천 자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한자로 된 활자를 보태니 그 숫자가 총 6만 8천자에 이르게 되어 활자를 찍어낼 때 많은 품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활자에 전념하기 위해 한림원에서 주자소를 독립시켜 주기를 청하니, 이에 의정부에서는 의론 끝에 이도를 지중추원사에 임명하고 이하 직제학 김돈(金墩), 공부좌랑 장영실, 직전(直殿) 김호(金鎬), 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主簿) 이순지(李純之) 등으로 활자를 연구하는 일을 함께하게 했다.
이들은 연구 끝에 합금(合金)을 사용하여 활자가 쉽게 갈라지지 않게 했으며, 먹이 어느 정도로 먹여져 찍히는지 일일이 실험해 가며 적절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거기에 국문을 좀 더 효율적으로 찍어내기 위해 초, 중, 종성을 각각 따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할 때 틀에다가 바로 조립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했다. 그와 함께 한자의 주조에 들어가 많이 사용되는 자는 그 자형을 많이 만들고, 적은 글자는 적게 만들어 그 제작의 효율성을 도모했다.
이렇게 활자를 만들어내고 나무틀로 그 인쇄틀을 짠 뒤, 아교로 활자를 끼운 뒤 단단히 고정시키는 방법까지 고안해 냈다.
이로서 1431년, 새로이 12만 9천자의 방대한 활자를 만들어내니,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이른바 신해자(辛亥字)로 불리게 되었다.
이 신해자는 그 글씨가 매우 유려하고, 활자가 쉽게 상하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주자소에서 이 활자를 부어 만들 때 사용한 주물 틀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가 정기적으로 활자를 제조해 각 관청이나 지방 관아, 그리고 한림원, 성균관, 학습원, 외학원(外學院) 등의 주요 학교와 지방의 상학(庠學) 등에도 활자를 나누어 주어 관령(官令)을 고시하거나, 교육에 필요한 서책을 찍어내거나 하는데 널리 사용되게 만들어 조선 전토에 크게 보급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 뒤인 1440년 구텐베르크가 고안한 인쇄술에 비해 몇 가지 못 미치는 점이 있었는데, 우선은 압축기를 활용하여 밀도 있게 찍어내는 기술이 결여되어 있었고, 둘째로는 국한문혼용(國漢文混用)에 가장 적합한 글자체인지라, 같은 자형의 알파벳이 활자를 충분히 만들어 두고 찾아서 조립하기 쉬운 것에 비해 사람의 품이 더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체질적인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 신해자의 보급으로 인한 인쇄술의 촉진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비견할 만한 조선에서의 파급력 있는 사건이었는데, 이것이 훈민정음의 보급과 함께 맞물려져 특히 공상(工商)의 계층을 시작으로 하여 양민층에도 글을 아는 이가 늘게 되어 책을 소비하는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경인가도 가운데의 부평(富平)에 위치한 총포국(銃砲局, 옛 총포도감)의 인근에 대규모의 제지소를 세워,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이곳에서 한성에서 필요한 종이의 수요에 대응하도록 만드니, 이 해 1431년에 처음 출간된 4서 6경에 이어 이듬해에는, 왕실의 내력을 밝힌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과 각종 교육 서적이 출간되고, 1433년에 이르면 한 해에 총 전국에서 140종 2만 8천여 권이 이 신해자로 찍혀 나오니, 가히 인쇄술의 혁명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432년 맹춘(孟春)
조선국 한성부.
장영실(蔣英實)의 아버지는 원래 원나라 사람으로, 동래현의 관기였던 장영실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였다. 이로 인해 어머니의 신분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동래현의 관노로 삶을 시작한 장영실은, 비록 미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다루는 재능이 뛰어나 동래현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관노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경인동정 때 동래부에서 차출되어 원정군을 호군(護軍)하여 갔다가, 소소한 공적을 쌓고 관노에서 해방되어 양민(良民)이 된 뒤 기주(崎州)에 정착하여 진서군의 군영에서 총포를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그는 강선의 원리를 연구하며 이것을 총포에 적용시킬 방법을 강구했는데, 이때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기술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진서군의 총포를 개량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을 눈여겨 보았던 당시 진서군의 수뇌였던 이종무가 이를 보고 조정에 천거하였고, 장영실은 한성으로 불려와 화학전습원에 입교하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학전습원을 마친 그는 총포도감과 염료서, 그리고 나중에는 학습원에서 학유를 맡아 기물(器物)의 연구를 계속했는데, 이 와중에 그가 손수 발명한 것이 측우기(測雨器)와 자격루(自擊漏) 등 수십여 종이 되었다.
그는 갑진경장 때에 새로이 공부에 편성된 기기국(器機局)의 정5품 별좌(別座)에 제수되어, 이곳에서 각종 기물을 연구하고 개량 및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제일 큰 업적은 치륜(齒輪), 즉 톱니바퀴를 정교하게 연구하여 치수비(齒數比)를 이용하여 서로 다른 크기의 톱니바퀴를 어떻게 의도한 간격으로 정교한 동작을 하게 만드는지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이것을 응용하여 어떻게 동력의 방향을 전환하거나, 의도된 시간마다 일정한 움직임을 하게 하는 등의 방법론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이 톱니를 응용하고 우마(牛馬)가 끄는 힘을 이용해 이 톱니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으로 기계 시계에 가까운 통종(通鐘)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은 남대문 밖 용산길 위에 설치되어 시간을 알리는 데에 사용되기도 했다.
공부판서 최해산은 이러한 장영실을 눈여겨 보았다가 매우 많은 일을 맡겨 주었는데, 장영실은 여기에 큰 부족함 없이 일을 잘 처리하여 공부에서는 유능한 별감(別監)으로 이내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다.
이어 그는 공부좌랑(工部佐郞)으로 그 관직이 올랐고, 잠시 대제학, 좌의정, 평안감사를 거쳐 다시 공부판서에 유임된 최해산의 오른팔이 되어 공부의 시책을 주도해 나가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셰르조드베크의 도움을 얻고 수차(水車)의 원리를 응용하여 한성부에 상수도 관과 그것을 끌어올리는 수빙(水빠)의 기본 틀을 설계하고 보급시킨 것도 그의 공로였다.
이 장영실이 개성 후 이도와 마주하게 된 것은 바로 신해자(辛亥字)의 활자를 찍어 내기 위해 주자소가 확대되고 이곳에 공부에서 나온 감독관으로 참여하게 되고 부터였다.
주자소는 독립된 임시 관청으로 세워졌지만, 이곳에 들어가는 물자와 기술은 모두 공부에서 축적하고 지원해 주기에, 이 일을 맡아 볼 사람으로 장영실이 추천되어진 것이다.
이렇게 함께 연구하고 머리를 맞대어 일을 추진시켜 신해자가 성공적으로 완성되는 사이, 이 두 사람은 친밀한 교분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원래 역사에서의 군신(君臣)지간이 지금은 막연한 교우(交友)가 되어 함께 사물을 연구하는 데 매진하기 시작했다.
“혹시 물학본원(物學本源)은 보셨습니까?”
그날도 장영실은 이도의 사저에 들러 책을 한 묶음 풀어 놓으며 말했다.
“예전에 읽었네. 그야말로 격물학을 배우려면 거치지 않고서는 안 되겠더군. 이것을 심왕 전하 스스로 편수해 냈다 하니, 놀라울 따름이네.”
세훈이 22세기에서 과거로 거슬러 온 인물인 줄 알지 못하는 이도로서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으니, 비록 섭정공에 이어 왕작(王爵)을 받아 전횡(專橫)을 휘두른다고는 하나, 이로서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흥성하고 있으니, 옥좌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이렇게 그 자리에 안분지족하고 있는 그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였다.
“이 책은 지금도 학습원에서 초년생을 가르치는 데 늘 사용되고 있는 책입니다. 저도 예전 학습원이 화학전습원이던 시절 이 책으로 공부를 했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기물(器物)을 만들고 다루는 일에도 이 물학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이리 책을 짊어지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날더러 함께 공부하자는 소리로구만. 이 사람.”
이도가 헛바람 빠지는 웃음을 짓자, 장영실은 그저 이빨을 보이며 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밤낮을 더불어 지내며 계속해서 물학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보냈는데, 세훈이 이 책을 쓴 때는 거의 스물다섯 해 전의 일로, 당시 처음 이런 학문을 접하는 화학전습원의 학도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쓰인 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문에 이도와 장영실은 이 책을 한참을 연구한 뒤에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는데, 이때에는 이들이 이미 다른 격물학의 종통(宗統)을 세우려면 이 물학이 대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난 25년간 가장 발전한 분야는 물학이 아니라 화학과 토건, 야금 등으로, 심지어 산학(算學) 또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 물학만큼은 학습원이나 지방의 상학(廂學)에서 이 물학본원의 책 한 권으로 간단히 다루고 넘어가니 쉬이 생각할 문제가 못되었다.
“이 물학을 저희가 연구하고 대성하여 새로이 책을 펴내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한참을 생각하던 장영실이 먼저 어렵사리 말을 꺼내자 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주자소의 일이 끝난 뒤로 한림원에 돌아갈까 했네만, 잠시 이 일에 매진하고픈 생각이 들었네. 함께 학문을 연구해 보는 것도 참 기쁜 일이 될 게야.”
이렇게 이도와 장영실이 산학과 함께 물학을 공부하며 시작한 일은 먼저 격물학이라 불리게 된 이 학문들이 무엇이냐 하는 본질적인 물음에 도전해 보는 것이었다.
이 조선에서 태동한 격물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세훈이 가져다 준 충격에 반응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하겠지만, 여러 가지 물품의 발명 이후, 화학전습원의 설립과 국책 사업의 주도 이래 세훈이 그렇게까지 이 분야에 기여한 부분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후로는 국정을 주도해야 하는 위치에 자리하게 되어 정치에 시간을 많이 소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또한 하나의 사람일진대, 하나부터 열까지 손을 댄다고 조선이 손쉽게 코 푸는 형식으로 나라를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조성해 둔 토양을 거름 삼아, 처음에는 그저 잡학으로 분류되던 이들 학문이 일종의 격물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 시작했다.
이 격물이라는 단어는 대학 장구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송나라의 주자(朱子)는 이 뜻을 격(格)을 이른다[至]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가면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는, 이른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확립하였고 성리학을 태동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자가 말하는 사물의 이치는 형이상학(形而上學), 즉 실재의 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논리의 세계와 맞닿아 있었고, 때문에 성리학은 상당히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해석은 여전히 골치 아픈 주제였고, 이도와 장영실이 여기에 맞닥뜨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이 격물학이라 할 때의 격물과 주자께서 격물치지를 강해한 것이랑 그 의미의 차이가 무엇이 있습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신 때의 이 격물치지란 이기(理氣)를 모두 포괄한 것으로, 알다시피 기(氣)라는 것은 사물의 생동과 만물을 형성하는 질료적인 것을 일컫는 말이고, 이(理)라는 것은 음양과 오행을 포괄하는 것으로 우리 눈으로는 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을 일컫네. 이는 서로 다른 것이니, 다만 이는 사물에 내재된 섭리를 일컫는 것이니 이것은 기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네. 그런데 이 주자께서 격물치지를 말씀하실 때에는 격물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마주하였을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궁구한다는 것에서는 이 격물학에서의 격무와 같은 말이나, 이로서 알게 되는 진리가 음양 오행의 이(理)라는 것에서 다른 것이지.”
그러나 이도의 설명을 들어도 장영실의 머리는 명쾌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제가 바퀴가 굴러가는 원래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을 끌어 주는 힘이 있기에 계속 굴러가게 되고, 끌어 주는 힘이 없으면 이것은 굴러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격물학에서 말하는 격물을 한다면, 알 수 있는 것은 힘의 유무에 따라서 사물이 움직이거나 멈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째서 성리학에 따르면 음양 오행의 이치와 심성론(心性論)을 저절로 요해하게 되는 데에 이른다는 말입니까?”
장영실의 질문을 듣고 보니 이도는 그제서야 무릎을 치고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음양 오행이라는 것이 사물의 섭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 이 격물을 하다 보면 치지(致知), 그러니까 앎에 이른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 깨달음을 요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명쾌하게 앞뒤가 맞도록 설명이 되는 정합(整合)적인 것일세.”
“그렇다면 우선은 주자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출발해야 하겠군요.”
“그렇네. 격물을 했을 때에 이르게 되는 앎이라는 것에서 추상적이고 사람의 관념으로 상상해 낼 수 있는 것은 걷어내야 하는 것이네. 그래야 사물을 똑바로 보고 꼼꼼히 따져 볼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들은 격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소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격물학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과학적 방법론을 일컫는 것으로, 연역과 귀납의 논리학을 바탕으로 관찰―이론―실험―재현을 바탕으로 한 과학, 즉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칭한 말이다.
이것은 세훈에 의해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발생되어 과학이라는 이름 대신 격물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유학을 빌려 설명하려던 것이, 이제는 성리학의 심성론과 음양오행론을 잘라내고서야 명쾌해진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증거 없이는 믿지 않는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이었다.
음행 오행이라는 것은 증거가 없으며 연구하고 탐구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이 이도와 장영실이 내린 결론이었다.
여기서 이 격물학은 성리학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격물학론(格物學論)」이라는 책을 펴내어 이날의 대화로부터 발전한 논리를 보강하여 이기론(理氣論)에서 이(理)라는 것은 음양오행과 맞닿은 증명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물로부터 얻어지는 명쾌한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심성론(心性論)과 맞닿을 수는 없다고 논했다.
그러면서 진정 격물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며 논하기를,
一. 有存萬物 만물은 존재한다.
二. 人知物存 사람은 이 만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三. 稱貫物氣 이 만물 사이를 이어 주는 것을 기라고 한다.
四. 法則攝氣 기는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五. 人了解法 사람은 이 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
여기서 설명하는 만물이란, 물질에, 기라는 것은 근대적 언어로 말한다면 자연(自然)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의 법칙이란 곧 자연 법칙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자연법칙은 곧 사람에게 의해서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뒤의 행간에서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유교의 언어들에 기초한 격물학론 이내 한성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새로운 학문 질서를 둔 갑론을박을 일으켰고, 기존의 성리학의 질서를 부정하는 이단(異端)이라 주장하는 지방의 유학자들의 반발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한성을 중심으로 한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은 이러한 격물학에 근간한 새로운 학문들이 생활을 개선시키는 실례를 이미 접해 왔고, 또한 그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통로가 이러한 격물학을 직간접적으로 가르치는 학당들이었기에, 이미 조정을 비롯한 한성 부중에서는 성리학을 버리고 공공연하게 격물학이 새로운 유학의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이 격물학도 유학이랑도 완전히 결별해야 할 것이지만, 서양에서 과학이 철학의 토양 위에서 등장했듯이, 지금 조선에서는 유학의 토양을 거름 삼아서 격물학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격물학론(格物學論)」이 채 발간된 지 한 해가 지나지 않아 학습원(學習院)에서는 교재로 채택하고, 이 뒤를 따라 각종 학교와 지방 유학의 색채가 뿌리 깊은 상학(廂學)에까지 보급되니, 이도와 장영실 스스로가 공을 들여 만들었던 신해자로 가장 많이 찍히게 된 책들 중 하나가 바로 이 「격물학론」이었던 것이다.
1432년 계하(季夏)
조선국 한성부.
명나라와 싸웠던 을유전역의 직후에 문과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조정의 녹명부(錄名府)에 이름을 올린 이 중에서 박연(朴堧)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교리(校理)를 거쳐 지평(持平), 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지금의 대군주 이인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악사(樂事)를 맡아 보았다.
당시 악학(樂學)이라는 것은 기예(技藝)의 한 분야로서가 아니라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등의 유교적 전통의 한 분야로서 공자 때부터 이미 예악(禮樂)이라 하여 그 중요성을 설파한 바 있었다.
때문에 유학자였던 박연이 음율에 정통할 수 있었고, 악학별좌라는 자리를 맡게 된 것이었다.
이 악학별좌라는 자리는 갑진경장 이후 예부(禮部)에 예악처(禮樂處)가 설치되면서 박연은 이 예악처의 정랑(正郞)으로 임명되게 되는데, 이때 불완전한 악기 조율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이에 따라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궁중 예악을 정리하여 개혁하려던 박연은 이때 조선의 정세와 맞물려 이 악률을 정리하는 데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 조선에는 경인동정 이후 일본의 악기가 건너와 이를 연주하는 진서 출신의 일본인 기예자(技藝者)들이 한성에도 들어와 있었고, 인도 및 페르시아까지 무역 항로가 열리면서, 이들 서역의 악기 또한 조선에 전래되어 벽란도를 비롯한 항구와 한성에서까지 보기 힘든 것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양반들은 그래도 이런 것을 별스런 취미 정도로 여길 뿐 이것이 고려 때로부터 내려온 조선 음악의 종통을 뒤흔드는 것은 아니었는데, 박연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으나, 이들 악기가 조선에 들어와서 궁중의 별연(別宴)에서까지 연주되는 것을 보고는 관심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동쪽으로는 중국에서 서쪽으로는 로마에 이르기까지 이미 고대에 한 옥타브의 음정 안에서 인간의 귀로 식별할 수 있는 최대의 분계(分界)라 할 수 있는 12계음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조선에서 사용하는 것은 그중 다섯 음계 만을 쓰는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오성법(五聲法)이었다.
이것은 음양오행론의 오행(五行)과 결부되어 철학적인 해석을 음악에 넣어, 당연한 조선식의 향악(鄕樂)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박연은 외국의 악기가 어째서 조선의 악기와 서로 어울려지지 않는지를 연구하다 보니, 이 12음계에서 취하는 음계가 서로 다를 뿐더러, 이 12음계의 조율법이 서로 달라 음이 미묘하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성법을 사용하는 악기와 그렇지 않은 악기가 다르고, 또한 아악(雅樂)에서는 오성법을 사용하지 않는데, 향악에서는 오성법을 사용하니 이와 다르고, 또한 아악에서 따르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과 이슬람 악기의 피타고라스식 조율법의 기준음 산정에 따른 미묘한 어긋남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박연이 이도와 장영실이 펴낸 「격물학론(格物學論)」을 읽은 것은 우연찮은 계기였다.
편종(編鐘)을 주물하기 위해 공부에서 놋쇠를 구하러 갔다가, 공부의 관헌들이 읽다 놓아둔 이 「격물학론」을 얼핏 보게 된 것이다.
우연찮게 관심을 가져 이 책을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니, 철저히 음율(音律)의 원리에 따라 악제를 정비하고, 악기를 편성하여야 진정한 예악에 다다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음양오행론이니 심성론을 아악에 구현해 낼 수는 없으나, 정확히 수학적인 원래에 따라 음율이 산출되는 음악의 경우는 격물학론에서 주장하는 바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박연은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깊어지자 그는 직접 이도를 찾아가 문안하고 이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도 스스로도 음율에는 조예가 깊었기에 박연을 맞이하고서는 기뻐하며 논의에 열의를 띠었다.
“향악에서 쓰는 오성법을 따라 쓰게 된다면, 이것이 결국 사람의 생각과 진리를 분별할 수 없는 음양 오행론에 맞닿게 되고, 결국 제대로 이치에 맞추어 예악을 하지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박연의 물음에 이도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음(邪音)이 되는 것이고, 사음으로 제사를 지내고 예악을 운운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지요.”
“십이율(十二律)이라는 것은 원래 주나라 때부터 아악(雅樂)의 정수로 세상의 모든 음을 분별하여 놓은 것이지요. 이 십이율에서 음양론에 따른 구분인 양성(陽聲)과 음성(音聲)의 구분을 떼어 놓고 보면, 순수하게 각 음간의 거리만이 남게 됩니다. 이 이치를 탐구하여 음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것이 아악의 악율을 편성하는데 사용된다면 그야말로 옳은 것일 테지요.”
이도의 말을 듣고 보니 박연은 과연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예악처로 돌아와 십이율을 그대로 편종에 옮겨 놓고 여러 차례 연구한 결과, 온음과 반음, 그리고 장음(長音)과 단음(短音)에 대해서 생각이 정리되게 되었다.
음양론에 기초한 십이율의 분별에서 벗어나 보면 어느 음이나 그 시작음이 될 수 있고, 그 시작음에 따라 다시 십이음이 순서대로 배열되면, 이것을 다시 장조(長調)와 단조(短調)로 구분 지을 수 있었다.
장조는 즐겁고 밝은 분위기를 내며, 이것은 기존의 계면조(界面調)의 구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반대로 단조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내며, 이것으로 인해 장조와 대별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가 직접 만든 음정을 잡는 피리인 12율관(律管)을 사용하여 이 조율법을 정리하니, 이렇게 편수한 책이 「아악보론(雅樂普論)」이었다.
또한 여기서 박연은 악기를 크게 세 종류로 대별하니, 금(琴)은 현(弦)을 쓰는 것으로 현악기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관(管)은 입으로 소리를 불어 내는 것으로, 관악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鼓)는 북을 일컫는 것으로, 크게 보아 두드려서 소리내는 모든 악기를 말하니, 타악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연은 여기서 이 세 종류의 악기가 서로 소리내는 법이 다르니, 금과 관과 고가 같은 비중으로 아악에 편성되어 서로의 소리를 섞고 나누며 진음(震音)한다고 하니, 박연이 아악에 대하여 정리한 사상은 바로 조정의 주류 이론인 격물학(格物學)에 어울리는 것이다.
이것은 격물학을 숭앙하고 기존의 성리학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강하게 보인 당시 대두하던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학파(關西學派)와 제주 출신으로 세훈의 사상적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탐라학파(耽羅學派)에 의해 크게 지지받았다.
동시에 아직까지는 격물학 자체를 성리학의 이론적 해석 틀 안에 있다고 보나 격물학 자체는 지지하는 조정의 주류인 관학파(官學派), 즉 경사학파(京師學派)에 의해 보완되고 지지를 받아 예악처에서는 기존의 궁중음악을 박연이 새로이 정리한 12율법에 따라 편수하니, 이로서 조선 음악의 대종은 12율법에 근거하여 장조와 단조, 전음(全音), 즉 온음과 반음(半音)을 나누어 구별하는 방식이 정착이 되었고, 이것은 후일 전통음악을 벗어나 음악적 발전을 희구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