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1장 칭제건원(稱帝建元) (22/82)

제21장 칭제건원(稱帝建元)

「영의정 심왕 김세훈(金世勳)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예로부터 임금이 더없이 존귀한 것은 천하 사람들이 감히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인 것이고, 또한 신하와 백성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높이 받들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훌륭한 덕(德)과 대단한 업적으로 오늘날의 성세(成歲)를 만나서 조서(詔書)와 칙서(勅書)로서 이미 황제(皇帝)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아직도 군주(君主)의 지위에 있습니다. 군주와 황제는 바야흐로 지금 천하에 통용되는 규례이므로 살펴보면 그 법은 한 가지입니다마는, 본국(本國)의 신하와 백성들이 좁은 소견으로 모두 원하는 것은 제(帝)라고 칭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까닭을 말씀드리면, 대체로 황(皇)이라는 글자와 제(帝)라는 글자의 뜻은 모두 크다는 것을 일컫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20여 년 동안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는 데서 한 가지 행실도 내버려 둔 것이 없었고 덕을 펴고 인자한 정사를 시행하는 데서 한 가지 문건도 이루어 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현(儒賢)을 예의로써 대하여 학습(學習)을 바로잡아 주었고 선비들을 많이 길러내어 문풍(文風)을 이룩하였으니 빛나고 빛나서 일월(日月)과 짝하였으니, 크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넓게 확대하는 큰 도량을 열어서 한 모퉁이도 막히지 않았고 변천하는 시운(時運)에 순응하여서 그 올바름을 잃지 않아 천지 사방 밖에까지 뻗쳐 마치 한 집안의 무리와 같이하였으니, 크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천리 넓은 지역과 진서(鎭西)와 영진(永鎭)의 두 도호부를 아우르는 육지와 바다의 공고한 진채에 의거하여 곰·범·사자와도 같은 수십 만의 병사들을 길러냈기에 그 견고함은 능히 자력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게 되었고 그 강대함은 능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크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폐하께서 지니신 큰 덕, 큰 사업, 큰 세력인데 크게 존귀하다는 칭호에만 아직도 미처 다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신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여 높이 받드는 정성에 비추어 볼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후략)…….”」

―진종(眞宗)실록 제25권 17년(癸丑) 4월 10일

1433년 중춘(仲春)

조선국 한성부.

항상 과중한 업무를 수행해 가면서도 한 번도 몸져눕지 않았던 세훈이 졸중(猝重)에 쓰러진 것은 무덥던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서안(書案) 앞에 앉아 장계를 검토하던 그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져 무려 닷새를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세훈의 나이가 어느덧 환갑이 지척인 쉰 아홉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처음 탐라에 표착했던 1399년에 이미 나이가 스물여섯이었으니, 거의 서른 해가 넘게 흐른 지금은 이미 환갑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세훈이 22세기에서 건너왔을 때는 매우 젊은 몸으로, 발전한 의학 기술의 혜택을 받아 탁월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넘어왔다.

때문에 15세기의 조선이라는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변변하게 아픈적 한 번 없었던 것이다.

비록 치아가 몇 개 상해서 빠지고 얼굴엔 주름인 늘었지만, 환갑에 다다르면 장수했다 하여 잔치가 벌어지는 시대에는 농담으로 여겨질 만큼 나이에 비해 멀쩡한 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으로 온 이래 그가 계속해서 해 온 것은 막중한 부담과 업무량 속에서 조선의 개혁국정을 이끌어 온 것이었다.

그러기가 이미 수십 년이 되었던 것이다.

그간 쌓여 온 피로가 결국 졸중을 터뜨려 자리에 눕게 한 것이다.

다행히 풍까지 오지는 않아 닷새 뒤에 깨어난 세훈은 기억력에도 지장이 없었고, 몸을 움직이는 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만큼 세훈 그 자신과 주변에 경각심을 주기엔 충분한 것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궁에서 퇴청(退廳)하여 일찌감치 병 수발을 들기 위해 곁에 자리 잡은 아들 현도의 물음에 세훈은 어렵사리 의식을 챙겼다.

“괜찮다. 손발이 멀쩡하고 의식이 명료하니, 내가 아직 죽을 목숨은 아닌가 보다.”

“보령이 이미 환갑에 닿으셨으니, 이제 무리하지 마시고 자중하셔야 합니다.”

현도의 말에 세훈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고개를 돌려 침상의 곁에 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이마에는 주름이 그득하고 수염은 듬성이 하얗게 새어 있었다.

세훈은 문득 22세기에서의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평균 수명이 100세를 넘기는 시대였다. 이제 60의 나이라면, 은퇴 연령이 80세로 조정된 시대에는 아직 한창 몸이 성하게 일할 때였다.

21세기 초엽의 40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발전된 의학 기술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15세기의 조선에서 세훈은 노화를 이겨낼 수 없었다.

이렇게 졸중이 찾아올 것이라 미리 예측하고 예방할 수도 없으며, 병이 걸렸을 때는 정확히 병명이 무엇이고 치료법이 어떻다고 밝혀낼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앞으로 자신 스스로도 몇 십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 물러설 때가 되었는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훈의 혼잣말에 현도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이제는 서른을 넘겨 장성한 아들이었다. 현도의 듬직한 어깨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젊은 시절이 문득 생각나는 세훈이었다.

“일전에 내가 태조대왕(太祖大王)이 개성에 다시 오셨을 때 찾아뵙고 문안한 적이 있었다. 그때 목청전(穆淸殿)의 옛 집에서 조용히 불경을 외며 앉아 계셨는데, 내게 던지신 물음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걷느냐는 것이었다.”

현도가 묵묵히 듣고 있자 세훈이 말을 이었다.

“그때 생각하기에 계동의 집에 돌아와 마루에 앉아 있으니, 어린 네가 천자문을 외며 재롱을 떨더구나. 그래서 나는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걸어야겠다, 이 나라를 성대(聖代)로 이끌어야겠다. 그리 생각했느니라.”

세훈이 조용히 한숨을 들이키자 현도가 고개를 도리 젓는다.

“아버님께서는 그리하셨나이다.”

그러나 세훈은 대답 없이 현도에게 문을 열라 하고서는, 밖으로 내다보이는 북악산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 거의 한 달여 만에 등청(登廳)한 세훈은 의정부에 들어와 각의(閣議)를 소집했다.

의정부의 각의가 열리면 좌, 우의정과 6부와 각청(各廳)의 장관(長官)들이 등청하여 국사를 의론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대군주의 재가가 필요했으나 지금까지는 거의 막강한 신권(臣權)으로 왕권을 짓누르던 세훈의 존재가 있었기에, 그저 대군주 이인은 옥새를 찍는 몸에 불과했었다.

“정정하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공부판서 최해산이 먼저 그간 쓰였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는 표정으로 반갑게 맞았다.

세훈이 자리에 앉아 좌우를 둘러보니 황희, 맹사성을 비롯해 설경수 등 각부의 판서와 각청의 전서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입시(入侍)하고 있었다.

“그간 다들 여(余)가 없는 동안 고려(苦慮)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줄 아오. 오늘 여가 이리 각의를 소집한 것은 그간의 생각이 있어 중요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요.”

세훈은 몸을 생각하고 그간 누적된 피로를 따진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영의정의 자리를 반려하고 심왕저로 들어가 여생을 학문을 발전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며 보내고 싶었지만, 이미 섭정공(攝政公)의 직책을 내어놓은 마당에 명목 없는 신권으로 누르고 있는 영의정의 자리마저 물러선다면, 그 뒤를 잇는 이는 분명히 대군주 이인이 군권(君權)을 세우고자 도전하는 것을 명분 없이 막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훈은 차마 쉽게 그럴 수가 없어, 우선은 이 조선을 확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뒤 조정의 제도를 한 번 손을 볼 생각이었다.

“내가 그간 느끼기에, 아조(我朝)는 연년이 부흥하여 이제는 반석에 올라 북쪽으로는 야인(野人)들을 몰아내고 영진(永鎭)의 도호부에서는 개가의 나팔이 들리고, 남쪽으로는 왜적을 징치하여 일찌감치 진서(鎭西)의 일인(日人) 제후들을 모두 복속시켜 남해를 태평하게 한 지 오래니, 국세(國勢)는 이미 북변(北邊)의 두만강 너머부터 바다 건너 진서에까지 이르고 있소. 또한 식산(殖産)이 이루어져 아조의 기물은 바다를 건너다니며 만 리 타방에까지 그 명성이 높아지고 있으니, 가히 개국 이래 채 오십여 년이 지나지 않은 이때에 이미 그 융성함이 모자라지 않소. 이에 우리 조선이 국본(國本)을 바로 세우고 그 문물제도를 다시 한 번 바로 잡아 억년(億年)을 융성할 기틀을 잡고자 하면 어떤가 하오.”

세훈의 말에 의정부 각의에 모인 관료들은 모두 침묵으로 응수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고 싶은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세훈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짐작이나 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세훈은 잠시 좌중을 일별(一瞥)하고서는 다시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말했다.

“사해(四海)의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었으니 이제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제도를 천자(天子)의 나라에 알맞게 정비하는 것이 어떻냐, 이 말이오.”

세훈의 말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감히 무어라 말을 함부로 내어놓지 못했다.

비록 명나라와 을유전역으로 크게 척을 진지도 스무 해가 흘렀고, 그간 예전 같지 않게 조공도 일절 하지 않고 있었지만, 책봉(冊封)을 버리고 대군주를 칭하는 것과 명나라와 대등하게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천자국(天子國)을 칭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이것은 명나라가 생각하는 세계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되어 또 다른 전란을 불러올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며,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아직까지 칭제를 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세훈은 이제는 매듭을 지어야 될 때라고 생각했다.

이미 조선의 국세(國勢)가 강성해져 명나라의 요동을 향해 목줄을 틀어쥐듯이 북변(北邊)에 거의 십만의 군대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판국에 명나라가 쉽게 거병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세훈의 생각이었다.

또한 자신이 정권을 쥐고 있을 때 이것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그것이 불투명해지는 것이 이 일이었다.

세훈이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제국(帝國)으로 거듭나 위용을 뽐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나라가 되면, 그 문물과 제도에 있어 고래(古來)의 것을 준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명나라 제도를 본 딴다던가, 제후의 나라에서 행해야 하는 제도의 엄중함에 굳이 얽매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천자의 나라가 되었으니 국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나라의 제도를 새로이 다 고쳐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황제의 권력보다 신하의 권력이 더 큰 제도를 이번을 기회로 정당하게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권은 곧 언젠가는 민권에 의해 대체될 것이었다.

세훈은 그렇게 큰 그림을 그려 놓고 보니,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다 이뤄내기는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여력, 그리고 자신에게 힘이 있을 때 이 칭제건원을 관철시켜 구래(舊來)의 폐습에서 벗어나 보다 세훈이 생각하는 근대국가에 걸맞는 제도를 미리 갖추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천자를 칭하는 나라는 그 방역(邦域)이 강대하고 여러 나라를 거느리는 나라만이 감히 황제를 칭하고 제국(帝國)이라 일컬으니, 중원(中原) 밖에서 그러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세훈의 말에 먼저 고개를 내저은 것은 맹사성이었다.

그 또한 쉽게 황제의 칭호를 올린다는 말에 동의하기가 힘든 듯 보였다.

“그러나 이미 우리나라는 본토의 내지(內地)를 제하고도, 이미 주상은 대군주의 위(位)로서 아래로 나 같은 왕작(王爵)과 공, 후, 백, 자, 남의 5등작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계시며, 또한 진서(鎭西)의 제후들은 실로 고래로부터 우리나라의 계통이 아니나 대군주 폐하의 위명(威名)에 감복하여 일본의 조정의 봉록을 받지 않고 이제 아조(我朝)의 하늘 아래에 있게 되었으니 이들을 필히 생각해볼 진대, 이미 우리 대군주 폐하는 여러 제후를 거느린 제왕(帝王)이신대, 거기에 더해 북쪽으로는 영진(永鎭)의 도독부를 세우고 여진 야인(野人)과 그 외의 번속(蕃俗)들에게 입공(入貢)을 받고 있으니, 이 도독부라는 것은 옛 당나라 때에도 자기 나라 밖의 번지(蕃地)에 제도를 세우는 일이었소. 이미 이것만 보아도 나라 안으로 여러 작위가 있는 봉신(封臣)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더러, 원래의 강역 밖에도 남으로는 진서의 여러 제후들과 유구왕(琉球王)과 안남왕(安南王) 등이 조공하고 북으로는 여러 호인(胡人)들이 입공하니, 이 어찌 천자의 위신을 세우기에 부족하단 말이오?”

좌중의 신료들이 세훈의 말을 듣고 보니 타당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쉽게 동의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항상 세훈의 의견에 의심 없이 찬성하고 일을 집행하던 설경수도 이번에는 감히 그러지 못하고 반론한다.

“그러나 고제(古制)를 보건대, 진시황이 황제의 칭호를 세운 뒤로 천자(天子)를 칭한 것은 모두 중원의 계통으로, 그 법례가 한(漢), 당(唐), 송(宋)으로 이어져 이제 명(明)나라에 와서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제를 이어받지 못한 나라이니 황제를 칭한들 그 위신이 서겠습니까?”

설경수의 우려에도 세훈은 고개를 젓는다.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나라와 당(唐)나라의 옛 땅에 붙어 있고 의관과 문물은 다 송 나라의 옛 제도를 아직도 따르고 있으니 그것을 칭한다 한들 계통을 잇지 못한다 하겠소? 중원에서 그 계통이 전부 이어졌다고 하나, 요(遙)와 금(金)은 거란과 여진의 야인 족속들이 세운 나라였음에도 황제를 칭했고, 원나라 또한 그리하였으니, 법식을 이었다는 송나라는 이에 세폐(歲幣)를 바치며 안전을 구하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니, 이런 야인들도 황제의 존호를 올리고, 지금도 중국의 고전(古傳)에는 이것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있는데 문물 제도와 법식이 중국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가 황제를 칭한다 해서 문제될 것이 있겠소? 또한 고래로 대체로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은 황(皇)이라고 불렀고 요(堯)나 순(舜)은 제(帝)라고 불렀으며 하우(夏禹)나 성탕(成湯), 주 문왕(周文王)이나 무왕(武王)은 왕(王)이라고 불렀으니 그 차이가 없었는데,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로 황과 제를 합쳐 황제(皇帝)로 불렀으며 왕의 지위는 드디어 오작(五爵)의 위에 놓이게 된 것인데, 이미 주나라의 법통이 이어질 때에도 각지의 제후들은 한결같이 왕으로 이름을 높였으며, 중국의 전적에도 이미 이때에 조선후(朝鮮侯)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이름을 높였다고 전하니 이때는 아직 황제의 존호가 없을 때요. 이렇게 예로부터 천자(天子)의 칭호는 일정함이 없었고, 다만 나라가 남의 나라의 그늘에 있을 때 감히 그 나라의 존호를 따라하지 못하고 등위를 낮추어 칭한 것인데, 고려 때에도 이미 제각기 왕을 칭하던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묘호(廟號)를 올렸으니, 이 묘호라는 것이 이미 황제의 제도가 아니오. 우리나라도 이미 이를 따라 선왕에게 묘호를 올리고 이미 대군주를 칭하여 폐하(陛下)라 존(尊)하니, 이제 그 난삽함을 바로잡아 칭제(稱帝)를 하고자 함인데 과연 어떻소이까?”

이렇게 갑론을박을 하나, 대체로 세훈이 주장하는 바에 신료들은 감히 반박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마음속을 부여잡는 것은 일말의 불안함이나, 대체 그 칭제를 하고자 하는 논리는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여러 차례 의정부 각의가 소집되어 대신들이 의론을 거듭하니, 결국 대군주 이인에게 칭제건원을 할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리기로 하고, 심왕 김세훈을 비롯하여 이하 작위를 가진 제후들과 조정의 대신들이 그 이름을 함께하여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1433년 계하(季夏)

조선국 한성부.

경복궁에서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던 대군주 이인은 칭제건원을 주장하는 연명상소를 받아 보고서는 그저 기가 차서 뿔이 나고야 말았다.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인 자신이 칭호만 올려받는다고 좋아질 것이 무에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탓이다.

일전의 왕호(王號)를 대군주로 올리자고 하여 그리 시행했을 때도, 심왕의 봉호와 함께 나란히 있으니 나라의 근본이 안 설 뿐더러 세훈이 섭정공으로 왕공(王公)의 우예를 받으며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난 삼남의 유생들을 핑계 삼아 호칭을 정리한다고 대군주라는 칭호를 올리고 도리어 이것에 반대하는 이들을 역도로 징치하지 않았던가.

사실상 이들은 모두 근왕(勤王)을 하고자 뜻을 품었던 이들로,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던 자들이었다.

오히려 왕일 때보다 대군주가 되고서 더 날개의 힘이 꺾였으니, 다시 황제로 칭호를 올린다면 아주 허울 좋은 황궁의 벽 안에다가 아주 가둬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나에게 무슨 일인들 권하지 못하겠는가마는 전연 당치 않는 칭호로 부르자고 말하는 것은 실로 경들에게서 기대하던 바가 아니니, 시국을 바로잡을 계책이나 강구하고 다시는 이에 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인이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이렇게 비답(排答)하고서는 상소를 되물림에도, 신료들의 상소는 그치지 않고 올라왔다.

오늘 이 모(李某)가 상소를 올리는 것에 가당치 않다고 대답해 돌려 보내면, 내일은 오 모(吳某)가 상소를 올려 건원칭제를 주장하는 식이었다.

이제는 조정 신료들 뿐만 아니라 저잣거리에도 소문이 퍼졌는지 한림원 학사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고, 지방의 상학(庠學)이니 하는 곳에서도 학생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 대좌하고 칭제건원할 것을 주청하고 있으니 이인은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과연 저들은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는 일일 터이지만, 그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가 말이다.’

이인은 그렇게 생각을 곱씹어 보았으나 애당초 힘없는 군주가 오랫동안 그렇게 어깃장을 놓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신을 가까이에서 돌봐 주는 내전의 환관들까지 귓말로 상소를 받아들일 것을 여쭈니, 더 이상 이인도 역정을 부릴 여력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어전 회의를 열겠다고 의정부에 통고를 놓아, 조정의 신료들을 모두 모아 놓고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상좌에 앉아 품계석에 도열한 대신들을 보며 상유(上諭)했다.

“그간의 상소를 모두 물리며 오랫동안 근려(謹慮)하였으나, 도무지 보위에 오른 지 지난 십칠 년간 도무지 덕업(德業)을 쌓은 것이 없는데, 이렇게 지금 막중한 대호(大號)를 올리려 하니 그저 부끄러움에 땀이 날 뿐이다. 그러나 관리들은 상소를 갖추어 청하고 대신(大臣)들은 연석(筵席)에 나와서 청하며 온 나라의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복합(伏閤)하여 청하니 내가 더 이상 버티어 낼 수가 없다. 그리하여 곰곰이 이에 마지못해 애써 따르기로 하였으나, 이것은 중대한 일이니 마땅히 예의(禮儀)를 참작하여 행하도록 하라.”

이렇게 말을 하고서는 다시 내전으로 물러 들어가니, 대신들은 구천세를 외치고 자리에서 물러나 연호를 올리고 칭제를 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연호는 정덕(正德)과 흥정(興定)의 두 개로 추렴하여 올리니, 내전에서는 흥정이 좋다고 비답하여, 연호는 흥정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함을 고할 날짜가 택일(擇日)되어 대군주 이인이 직접 공경대부(公卿大夫)를 거느리고 제사를 올리러 가니,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배참(陪參)하였다. 예를 끝내자 심왕(瀋王)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김세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김세훈이 나아가 열두 무늬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유씨(劉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김세훈이 백관을 거느리고 국궁(鞠躬), 삼무도(三舞蹈), 삼고두(三叩頭), 산호만세(山呼萬世), 산호만세(山呼萬世), 재산호만세(再山呼萬世)를 창하였다.」

이렇게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하니, 이것은 이미 의정부 각의에서 모두 비정해서 올린 것이었다.

삼한(三韓)의 계통이 이미 나라에 전해져 오고, 옛 왕조들은 모두 나라 이름을 땅 이름으로 삼았으니, 땅 이름인 한(韓)을 국호로 삼는 것이 가장 옳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국이 대한제국으로 국칭을 달리하고, 이를 봉축(奉祝)하여 각지로 사절을 보내니, 우선 일본국 및 유구국에 이 사실을 알려 입공하는 사절을 보내라 전하고, 북쪽의 야인 제번(諸藩)에도 이를 알렸다.

다만 명에는 앞으로 책봉(冊封)을 끊고 입공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서계를 보내기만 했는데, 북경에서는 묵묵부답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영파로 들어오는 감합(勘合)을 크게 축소시켜 버렸는데, 일부를 남겨 둔 것은 무역하러 오는 이들 상인들을 입공 사절인 거처럼 취급해 대국으로서의 권위를 무리하게 세우려 하는 탓이었다.

그러나 동녕관의 사정은 영파만큼 녹록하지 못했는데, 명에서는 동녕관을 폐지시키고 싶어도 요동은 군병(軍兵)이 주둔할 뿐 그 속민의 태반이 모두 고려인(高麗人) 혹은 여진인지라, 그중에서도 동녕관에는 조선에서 관리와 병졸이 파견되어 있고, 지척에는 건주의 분견대가 무장하고 있으니 함부로 무역을 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되었든 대한제국이라 칭함이 되어 통칭 조선이라 불리던 내호(內號) 또한 한국(韓國)이라 일괄되고, 이해를 흥정(興定)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쓰게 된 것이다.

1433년

흥정 원년 맹동(孟冬)

대한제국 황성부.

칭제건원을 한 뒤 사면령이 내려지고, 한성부에는 이를 봉축(奉祝)하는 깃발이 여기저기 내걸리고 황제의 무병장수를 비는 폭죽이 쏘아지는 등 한동안 축제 분위기였다.

국호를 고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부 또한 이름이 국격에 걸맞게 황성부(皇城府)로 고쳐지니, 입말로는 서울이라 하고 별칭으로는 여전히 한성(漢城)이란 이름이 남아 있으나, 황성이란 칭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오상복은 오랜만에 경사(京師)로 올라왔는데, 때마침 황제로의 등극을 축하하는 분위기로 들끓고 있어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세훈을 따라 한성으로 들어왔을 때는 그도 젊고 뭘 모르는 청년이었으나, 이제는 그 도움으로 크게 상업을 일으켜 먼 바다까지 장사를 다니는 나상의 수뇌로서 재물이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세훈에게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을 일이 바빠 목포와 제주, 그리고 진서의 기주를 오고 가느라 한동안 문안을 하지 못했었는데, 칭제건원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부랴부랴 좋은 기회다 싶어서 올라와서 그동안 바뀐 황성부를 한 바퀴 휘젓듯 구경하고서는 계동의 심왕저로 찾아온 것이다.

“심왕 전하, 그동안 격조하였나이다.”

이제는 똑같이 늙어 머리가 하얗게 샌 오상복은 이제는 나이가 들어 부유한 뱃심이 배인 듯 강퍅했던 얼굴도 많이 부드러워져 이제는 둥글둥글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세훈은 오랜만에 보는 옛 친구가 반가워 대청에서 몸을 일으켜서 마당으로 버선발로 내려가 오상복을 껴안았다.

“그간 많이 바빴나 보구나. 어찌 한 번 들여다보지를 않아.”

세훈의 말에 오상복이 낄낄 웃는다.

“그야 이렇게 저를 일복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 다름 아닌 전하이시잖습니까. 그저 탐라에서 유자나 따고 있을 저를 이렇게 먼 세상을 구경시켜 주고, 이런 거상이 되게 해 주셨으니 제가 이렇게 일이 많은 것도 절반은 전하의 탓이옵지요.”

“하하, 그렇군. 내 탐라에 쓸려와 처음 뵌 것이 그 양 노인이요. 그 양 노인이 불러다 준 것이 자네 상복이였으니, 그로부터 벌써 어언 서른 해가 넘는 세월이 흘렀네.”

세훈이 껄껄 웃으며 오상복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왕에 오상복이 문안을 들어온 것을 핑계 삼아, 세훈은 오늘 탐라에서부터 고락을 같이 해 온 지기들을 모두 불러 모을 생각이었다.

이제는 처숙(妻叔)이었던 고봉지도 이미 저승으로 가고, 고씨 중에서 황성에 남아 있는 것은 고상온뿐이었다.

그 외에 탐라의 구신(舊臣)들 중 황성에 남아 있는 것을 가만히 따져 보아도 육군 대장(大將)으로 전역하여 지금은 소일하는 양은계, 골방 노인이 되어 거동도 불편한 문충세(文忠世) 등이 전부이니, 이른바 지금 조정에서 탐라당이라고 하는 것도 다들 반정 뒤에 탐라에서 뒤좇아 온 이들이거나 젊은 2세들로, 이들이 함께한 갑신반정 이전의 탐라에서의 일들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세훈이 간만에 술자리를 만들기를 청하여 이들에게 연통을 보내니, 늦은 밤이 가까워 옴에도 이들은 거절 없이 다 모여 들었다.

다들 이미 서른 해 전에 생사를 함께하기로 한 사이였으니, 이렇게 오랜 만에 모이는 술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들 이렇게 모여 앉기는 정말 오랜만이오. 다들 서른 해도 전에 탐라에서 그 뜻을 모아 함께 군세를 이끌고 한성을 벼려 천하를 손아귀에 넣은 듯 함성을 질렀었는데, 이제는 그 세월이 이렇게 흘러 다들 뒷방 노인네가 되었으니 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소. 허허.”

세훈이 술 한 잔을 들이키며 웃자 좌중은 쓸쓸한 웃음이 감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니,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작은 방 안에 다들 모여 앉아 세훈을 추대했던 일이 과연 엊그제의 일 같았다.

그때 앉아 있던 이들이 고스란히 지금 여기에 또 앉아 있었지만, 이제 그 장소는 제주의 고봉례의 저택에서 황성의 심왕저로 바뀌어 있었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이제 늙은 노인들로 훌쩍 시간이 흘러 있었다.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혈기에 덤빈 것 같은데, 이리도 시간이 흘러 가문의 사직(社稷)이 열리고 제후의 반열에 올라 나라가 승운(乘運)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으니 그저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 심왕 전하의 은덕이 아니었으면 헛 구름 같은 이야기였겠지요.”

양은계가 무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처음에 표착한 세훈을 구해 주었던 양 노인의 손자였던 양은계는 그것을 인연으로 세훈이 탐라에서 조직했던 신식군에 가담해 군문(軍門)에 들어선 뒤 갑신반정과 을유전역에서 승승장구하며, 큰 훈공(勳功)을 많이 세워 지위는 남양백(南洋伯)에 이르고, 그 봉록이 매 해 은화로 2천 냥에 이를 정도로 국초(國初)의 공신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나도 그렇네. 지금 돌이켜 보면 심왕 전하께서 내 처남이 된 것은 나에게도 참 운이란 말이지. 음, 덕분에 이 조선 팔도에서 제주가 제일 잘난 고장이 되지 않았냐, 이 말이네. 허허.”

고상온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심왕 곁 아랫목에 앉아 가래침만 뱉어내는 노인 문충세도 걸걸하게 그 말에 맞장구를 친다.

이미 그 당시에 나이가 꽤나 많았던 문충세는 이미 지금에는 나이가 팔순을 넘겨 거동이 불편함에도 오늘 오랜 얼굴들을 보고자 교자를 타고 계동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나저나, 은계는 동네의 그저 그런 동생이었는데 오늘에 보면 남양백이라는 제후의 반열이고, 저는 치부는 많이 했다지만 기껏 나상의 객주(客主)이니 이것도 이것대로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오상복이 볼멘소리를 한다.

그는 군문도 아니고 정계에도 들어서지 않아, 탐라에서부터 하던 대로 세훈을 장사로 보조해 왔다.

그래서 덕분에 크게 상업을 일으키고 팔도에서 제일 가는 거부라 불릴 정도로 크게 재산을 모았으나, 속된 말로 명예는 없는 거죽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내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상복이 너에게도 훈장 하나 주도록 힘써 보마. 그 훈장이란 놈을 받으면 작위는 없더라도 대부(大夫)의 대우는 해 주니, 그저 상놈이 아닌 것도 어디냐. 허허.”

누가 들으면 세훈이 섭섭한 소리를 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오상복 자신의 재능에 알맞은 일을 잘 마련해 준 세훈의 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잣거리에서도 앞으로 어찌하실지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으니 정말 본심은 어떠하십니까?”

아무래도 장사치들을 거느리는 몸이다 보니 오상복이 듣는 소문이 적지 않았다.

세훈은 스스로 당장 어찌하겠노라 정한 바가 없으나, 시장통에서는 무언가 이참에 조정에 무언가 사단이 있거니 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대군주가 황제도 되었고, 제국이 왕국과 같을 수 없으니 뭔가 아래 위로 고침이 있지 않겠느냐는 소리였다.

“나도 아직 뜻한 바는 없네. 나라가 바뀌었으니 제도도 바뀌어야겠지. 나 또한 언젠가는 물러나겠지만, 이것이 내일이 될지 십 년 뒤가 될지 난들 알겠어. 내 대한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아야 쉬이 눈 감을 수 있으리.”

세훈의 말은 농이 아니었다.

조선으로 표류한 뒤 평생을 바쳐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매진해 왔다.

서른 해가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뒤돌아 보니 험한 길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어차피 완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없어도 알아서 그가 바라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확실하게 반석 위에는 올려놓아야겠다는 것이 세훈의 생각이었다.

배도 침반(針盤)이 맞은 연후에야 노를 젓든 돛을 올리든 할 노릇이었다.

한참을 항해한 후에 누군가가 새로이 항로를 틀어 버리겠다고 하면 배가 가는 방향은 전연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는 누군가 노를 젓든 돛에 바람이 실리든 가는 길은 이전과는 전연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훈은 이미 그 자신이 한 번 조선의 침로(針路)를 수정하여 이날의 이때에 이르게 만든 공신이었다.

그렇게 서른 해를 흘러왔는데 다시 이 침로를 돌리겠다고 손을 댄다면 그 서른 해가 의미 없이 무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훈이 나이가 들면서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그것 한 가지였다.

“자네도 배를 남북의 원양으로 보내니 잘 알 걸세만, 나라도 이 배와 같아서 침반을 보는 이가 허망하면 배가 항로를 잡지 못하듯, 나라도 타륜(舵輪)이 엉망이면 그 흘러감을 아무도 알지 못하네. 그러기에 조타(操舵)의 솜씨가 좋은 사람이 늘어나면 누구 하나 잘못 하더라도 다른 이가 물려받을 수 있으니 둘이 해도 좋고 셋이 해도 좋은 일이지. 다만 배는 목적지로 가면 될 일이야.”

오상복이 세훈의 말을 들어보니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과연 그리했다.

뭔가 지난 세월 매진한 일이 있다면 제대로 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올려놓고 물러서는 것이 맞았다.

심지어 그것은 세훈 홀로 매진한 일도 아니고, 이 대한의 수백만 인이 모두 나라의 시책으로 받들어 여태 동분서주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권력의 문제로 여기저기서 훼손을 당해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되거나, 일이 모두 되물려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울 일이었다.

물론 오상복이 생각하기에도 이미 지나온 길이 한참이라 무슨 수에도 되돌아가기 쉽지 않게 여겨졌지만, 이렇게 때맞춰 권력을 내놓거나 한다면 이 공석을 노리는 승냥이 떼들이 침을 흘리며 덤벼들 것이었다.

“나도 당장은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최대한 빨리 일을 마쳐 놓고 이 계동저에 몸 편이 돌아와서 책이나 쓸 요량이야.”

세훈의 웃음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언가 이루고 나서도 또 앞으로 갈 곳을 생각해 나아가는 모습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으신 것 같아 보이니, 소백(小伯)의 마음이 그저 따뜻합니다.”

양은계가 푸념 투로 읊조린다.

일찌감치 군문에서 은퇴해 해 놓은 것 없이 녹봉 높은 백작이랍시고 배만 두드리고 살아왔던 것 같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좌중이 양은계의 그 마음을 읽고는 시원하게 웃는다.

밤바람에 계동의 심왕저 처마에 달린 풍경(風磬)이 울리는 소리만 조용히 이 웃음소리를 비껴 나가고 있었다.

1433년

흥정 원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황성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고쳐 달고 난 뒤에도 기존의 제도는 대군주 시절의 구제(舊制)를 아직 쉬이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조(曹)를 부(部)로 고쳐 놓는 따위의 명칭의 손은 제국을 칭하기 이전에도 이미 손보아 둔 사실이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그렇기 쉽지 못한 것이, 미묘한 알력 관계에 기반해 이때까지의 조선의 정치가 이루어져 온 탓이 컸다.

폐주 이방원이 갑신반정과 을유전역의 큰 싸움 이후 압록강 너머로 쫓겨 간 뒤 근 서른 해에 가까운 세월을 권력이 김세훈 1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섭정공(攝政公)으로서 권력을 행사하였고 나중에는 이를 반려하였으나, 이미 심왕(瀋王)의 자리에 오른 뒤였고, 섭정공을 내놓음과 동시에 갑진경장의 제도 개혁을 추진하여 의정부(議政府)의 권한을 확대하고 그 의정(議政)의 자리에 오르니, 이야말로 보기에 따라서는 비변사를 의정부로, 섭정공을 의정으로 말만 고쳐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제도의 명분상으로는 이 의정부의 회의는 의정이 상시 모집할 수 있으나, 임금이 전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행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질상으로는 무형의 권력이 세훈에게 가 있으니 세훈이 상주하여 올린 문서를 임금이 거부하여 내린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단 한 번 황제의 위의 올린다는 상소에 그리 복지부동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마저도 결국 포기하고 황제의 면류관을 쓰겠노라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훈 스스로도 이런 것을 황상(皇上) 이인 개인으로만 놓고 본다면 마음이 안 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으나, 시중의 양민도 아니고 이제는 황제가 된 자이니 스스로 나라를 잘 이끌 수 없으면 이렇게라도 나라가 잘 굴러가도록 몫을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황상 자체가 모자란 인물은 아니었으나, 설사 황제의 전권을 휘두른다 하더라도 성덕(聖德)의 치세를 열 인물은 못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저 그런 사적의 임금처럼 적당히 잘나고 적당히 못난 범부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인물을 황위에 올려 손에 칼자루를 쥐어 주려고 세훈이 이렇게 서른 해를 보내 온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조선조 최대의 명군이라고 불리는 세종이 보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애시당초 한성으로 군세를 이끌고 상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충녕군 이도는 지금 자신의 길을 찾아 그 몫을 하고 있었지만, 이 이인이라는 자는 원래 역사에서는 그저 종친으로 사람이 호인(好人)이라는 기록 말고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자였다.

그런데 그가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왕위를 물려받고 한때는 대군주의 위에 올랐다가 이제는 황제가 된 것이니, 세훈이 혹여나 이인이 제대로 된 친정(親政)을 행사하겠노라고 덤벼드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친정의 자루를 쥐었을 때 도대체 무슨 방향을 튀어 나갈지 짐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섭정공을 내려놓고도 의정부 의정의 자리를 맡아서 의정부의 권한을 키운 다음에 쉽게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눌러 왔는데, 지금 황제가 되어 천하가 나라가 제국이 된 것이 황제의 덕업인 것처럼 칭송하고 있으니 괜히 헛바람이 들어 정말로 황제 노릇을 하겠노라고 덤비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이었다.

그러나 황상 이인은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이제 나이가 점차 들어가고 있었고, 대권을 되찾겠노라는 의지도 많이 약해져, 그저 허울 좋은 탈일지언정 황제의 관을 쓰고 사방의 제후를 거느리게 되었다는 사실로 만족하려 하고 있었다.

세훈 또한 그런 동태를 직접 늘 듣고 있으니, 당장 이인이 어떠한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칭제건원을 해야 한다고 세훈이 강짜를 부려 하고자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나중에라도 이인이 되었든 그 후손이 황제의 위를 물려받든 나라를 함부로 독단적이게 전횡(專橫)하는 것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국호를 바꾼 뒤에도 세훈은 잠시간 이 문제를 어찌 처결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느라 의정부에서도 제도를 바꾸겠다고 해 놓고서는 갑론을박 의견이 분분하기만 했다.

물론 이런 시대에 민주주의를 행하니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그것은 앞으로 제국의 사회가 성장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세훈은 정교하게 신권으로 황권을 누를 장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대충의 의견을 같이하는 의정부 대신들과 의론하여 고안해 낸 것이 추밀원(樞密院)이었다.

이 추밀원은 일종의 귀족 회의(貴族會議)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의정부의 의결 기능을 좀 더 확대한 것이다.

이곳에 참여하는 이들은 정3품 이상의 대부(大夫) 및 각등(各等)의 작위 보유자였는데, 이로 인해 공후회(公侯會)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 의정부를 황제의 제도에 걸맞게 내각(內閣)이라 이름하고, 재상(宰相)을 그 수반에 놓으니, 바로 일전의 의정(議政)에 갈음하는 것이었다.

이로서 완성된 조선의 정책 의결 구조는 다음과 같았는데, 먼저 각부 각청에서 직접 정책의 시행을 놓고 상주하거나, 매달 한 번 소집되는 추밀원에서 제안을 내어놓는다. 그럼 이것이 내각에서 검토되고 황제에게 상주되면 황제는 이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다만, 추밀원에는 좀 더 교묘한 장치가 들어갔는데, 이 의안을 발의하는 것을 추밀원의 명의로 하지 않고, 추밀원의 의원 개개인이 개인 자격으로 발의할 수 있도록 해 둔 것이었다.

이것은 황제의 전결을 요하는 직소(直訴)가 내각의 심의만 통과한다면 몇 번이고 황제에게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황제는 이것을 일반 상소처럼 처리하지 못하고 꼼꼼히 전결해야 했으니 그 압력이 좀 더 가중된 것이다.

이렇게 앞으로도 신권이 우위에 놓여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세훈은,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개혁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기존의 6부제를 철폐하고 각 부(各部)의 명칭을 수정하니 다음과 같았다.

궁내부(宮內部)는 왕실 업무를 총괄한다.

내부(內部)는 기존의 이부(吏部)의 기능을 흡수하여 확장한 것으로, 각종 지방의 행정과 관련된 일과 국중(國中)의 민간 생활과 관계된 전반을 총괄하게 되었다.

외부(外部)는 기존의 외무청을 확대 재편하여 국외의 사무를 일람하게 되었다. 이 해에 상남의 거류지를 감독할 상남서(湘南署)가 이 외부의 직하(直下)에 설치되었다. 또한 기존의 예부에 속해 있던 사역원의 기능을 이전받았다.

탁지부(度支部)는 국가의 예산 및 재정, 회계를 관장하는 부서로 설치되어 기존의 호부(戶部)의 많은 기능을 이전받은 부처였다.

군부(軍部)는 기존의 병부를 확대 재편한 것으로, 이 아래에 육군청(陸軍廳)과 해군청(海軍廳)이 들어섰다.

상공부(商工部)는 상업과 공업의 전반적인 기능을 관장하여, 기존의 공부(工部)를 바탕으로 하여 호부에서 상업을 관장하는 기능을 이전받아 철저히 산업 위주의 정책을 관장하도록 해당된 부서였다. 설치될 당시에도 지방 관료까지 포함하는 내부에 이어서 가장 많은 인원의 행정 관료를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문부(文部)는 교육제도와 과거제도를 관장하기 위해 새로이 신설된 부서로, 철저히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근념(勤念)으로 삼아 기존의 여러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국가 시책에는 격물학이 가장 걸맞다는 전제하에서 국가 정책을 운영하게 되었다.

법부(法部)는 기존의 형부(刑部)를 더욱 확대한 것으로, 새로이 정비될 각종 법률의 정리와 사법 체계의 정비를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렇게 각 부의 장관을 상서대신(尙書大臣)이라 하니, 여기서 상서를 줄이고 각부의 호칭을 붙여 문부대신이니, 법부대신이니 운운하며 부르게 되었다.

또한 지방의 제도를 고쳐, 기존의 난삽한 행정구역을 일원화시켜, 내지(內地)에는 도(道) 아래에 부(府), 군(郡), 현(縣) 만을 설치하였고, 외지(外地)에는 진(鎭)과 보(堡)를 설치하였다.

다만 진서도독부의 경우에는 내지와 거의 같은 체계로 가되, 부와 군의 두 종류만 설치하고 이 아래에 주둔지에는 보(堡)를 할당하였다.

이로서 내외의 정비가 마무리되자 세훈은 등청하여 이것을 황상에게 내어 보이고서는 직접 칙훈(勅訓)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니, 이것이 1433년 늦은 겨울의 일이었다.

“그대는 짐의 권리를 또다시 뺏으려 하는구만.”

황제는 근래에 건강이 좋지 않아 내원(內院)에서 몸을 가료하고 있었는데, 눈 밑에 내려앉은 검은 그늘이 그간의 고심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세훈은 묵묵히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마주하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라는 황제 일개인을 위해서 움직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쉬운 대로 이를 견제하기 위해 귀족과 대신의 권한을 확대한 시안(試案)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황제 또한 권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고, 자신이 없는 때에는 이 신권과 황권이 적절히 균형이 맞춰져야 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나이까. 단지 황제의 법례(法例)를 세우고자 할 뿐이니 그리 모질게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세훈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국궁(鞠躬)하니, 황제는 그저 아무말 없이 옥새를 들어다 인주를 찍어 내린다.

이 내용이 이듬해 원단(元旦, 설)에 전국에 반포되어 공시(公示)되니 1434년 흥정 2년의 새해가 되면 일체 차질 없이 시행하도록 하니, 이 해에 이르러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거듭나 새로운 시대의 격변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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