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3장 요동전역(遼東戰役) (24/82)

제23장 요동전역(遼東戰役)

「평안 감사 정문익(鄭文益)이 치계하였다.

“방금 도망쳐 온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명병(明兵)이 어젯밤에 동녕관(東寧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육군 부령(副領) 성석(成惜)은 형세가 지탱하기 어려울 듯하여 건주파견대(建州派遣隊)의 별승군(別勝軍) 1천 7백 명을 이미 안경완(安景完)으로 하여금 이끌고 가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건주위는 아병(牙兵) 3천 3백 명과 여진병(女眞兵) 3천여 명이 있어 이들로 군대를 나누어 성첩(城堞)을 수비하도록 하였고 또 주변의 평안도 진위대의 장령들로 하여금 각각 장병을 인솔하고 월경(越境)토록 하였습니다.”

○平安監司鄭文益馳啓曰:“卽刻走廻人來告:‘明兵昨夜攻陷東寧關’ 云. 基形勢, 似難支撑, 陸軍參領成惜, 故建州派遣隊別勝軍一千七百名, 已令安景完領率往救. 建州衛則有牙兵三千三百及女眞兵, 三千餘名, 以此分軍守堞, 且令傍平安道各鎭衛隊將領, 各率將兵越境” 云.」

―진종(眞宗)실록 제40권 21년(흥정 5년) 11월 7일

1437년

명(明) 선덕(宣德) 12년 계추(季秋)

대명국(大明國) 북직례(北直隷) 북경 순천부(順天府).

당대 대명의 황제는 선덕제(宣德帝) 주첨기(朱瞻基)였다.

성정이 강퍅하고 메마르기로 유명한 이 황제는 아직 어릴 적에도 그 총명함이 비상하여 할아비인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영락제는 그 아들인 홍희제보다 이 주첨기를 눈여겨보았기에 어린 나이에 황태손이 되어 제왕학을 배웠고, 결국에는 황제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영락제가 나라 밖으로 원정을 다닐 때 수행을 다녔음은 물론이거니와 충언을 아끼지 않아 영락제가 가장 아끼는 손자였다.

아버지 홍희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를 오르고 나서는 숙부인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가 일으킨 반란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선덕제는 친정(親征)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종래에는 이 한왕 주고후를 구리 항아리에 가두어 달궈 죽였다.

이러한 내부의 소요를 진정시키고 황권의 전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과감한 내정을 펼치느라 여러모로 힘써 온 선덕제도, 이제 내정이 어느 정도 확립되자 외부의 문제에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외부 문제 중에서도 늘상의 두통거리가 있으니 바로 대한제국, 옛 조선(朝鮮)의 일이었다.

“이 무엄한 오랑캐들이 감히 황제를 칭하고 조공의 사절을 보내지 않은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간에 짐이 이들이 황은을 입어 교화할 여지를 두고자 내버려 두었는데 이제 그 참람함이 목 앞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조황(祖皇)이신 영락황제의 연간(年間)에 이 오랑캐들이 한번 기고만장하여 황군을 파병한 유래가 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방자함이 고쳐지지 않으니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는가?”

붉은 얼굴에 기세 좋게 뻗힌 수염을 들썩이며 주첨기는 용상에 앉아 일갈했다.

주첨기의 물음에 대신들은 일시 침묵하였다.

마치 영락제가 현신한 것 같은 주첨기의 모습은 대신들로 하여금 주눅이 들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숙부마저 구리 항아리에 달궈 죽인 인물이니, 언제고 그 잔혹함을 드러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히 아뢰옵니다. 조선은 고래로 아조의 속방으로 그 예를 다해 왔으나, 감히 그 세가 강성해지면 황은을 입기를 꺼려 하고 제멋대로 굴곤 하였나이다. 이미 옛 수나라 때에 고구려(高句麗)가 그리하였는데, 이것을 도모하려다가 내정을 치리하지 못해 수나라가 무너지고 당나라가 들어서게 되었나이다. 감히 옛일을 상고해 보건데 먼저 내치를 다독이고 군세를 증강하는 것이 우선이고, 당장에 또다시 먼 곳으로 병사를 내어 공략하는 것은 하책(下策)인 줄 아룁니다.”

좌중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권근(權謹)이었다.

권근의 자는 중상(仲常)으로 서주(徐州) 사람이었다. 서주의 역사를 다룬 「팽성지(彭城志)」를 쓰기도 한 이 걸출한 학자는 효행으로도 유명했다.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셔 왔는데, 영락 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악안지현(樂安知縣)으로 그 관력(官歷)을 시작하여, 광록서승(光祿署丞),대학사(大學士)의 자리를 두루 거쳐 이때에 이르러서는 재상에 해당하는 내각 대학사의 수보(首輔)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세 명의 황제를 모신 그 명성이 자자한 대신이었기에 선덕제의 서슬 퍼런 눈동자에도 감히 꿈쩍하지 않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첨기는 좀처럼 이 권근의 의견이 맘에 들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감히 제국을 칭하고 뻗대는 조선을 징치할 생각이 굳어진 탓이었다.

사실 부득불 내전에 각의를 소집한 것도 이것을 확인받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수보의 말은 짐이 잘 들었도다. 그러나 짐은 이미 그 오랑캐들을 징치할 생각이다. 그러니 대신들은 군사를 내어 조선을 칠 방책을 논하라.”

주첨기는 권근과 같은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아주 못을 박았다.

수보이자 구래의 명신인 권근의 말마저 잘리고 나자 대신들은 더 이상 반대하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럴싸한 방책을 쥐어짜느라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조선의 임금이 황제를 칭했다고는 하나, 아직 그 강계가 손바닥만 한 조그만 나라이나이다. 소신이 일전에 동정(東征)에 종군하였을 때에 서쪽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황조의 대군은 이 도읍까지 지척으로 육박할 수 있었나이다. 비록 이때는 불가피하게 회군(回軍)하여 동서의 적세를 방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지금은 조선을 제외하고는 천조의 사방이 안락하게 되었으니 지금이 기회라고 할 수 있나이다. 부디 20만의 대군을 내어 도적 떼들이 들어와 준동하고 있는 요동의 동녕관부터 징치하여 다시 복속시키시고, 적의 국경을 넘어 육박한다면 채 한 달을 견디지 못하고 조선은 항복하여 올 것이나이다.”

주첨기의 입맛에 맞는 의견을 내어 놓은 것은 일전 을유전역 때에 동정장군(東征將軍) 토평총병관(討平總兵官) 양영(楊榮)을 따라 종군했었던 내각학사(內閣學士) 조참(趙參)이었다.

“그렇다면 누구로 하여금 이 군세를 이끌게 하면 좋겠는가?”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당염무(唐艶懋)에게 명하여 이 군세를 이끌게 한다면 이미 그곳의 지세가 밝고 조선의 내정에 훤한 그가 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나이다.”

“짐이 친히 친정을 하는 것은 어떠한가?”

“근래 폐하의 옥체가 편치 않으시니 우선은 궐에서 보중(保重)하시는 것이 우선일 줄 아옵니다.”

이미 실제 역사보다 2년이 지나서 수명을 잇고 있는 주첨기였다. 그러나 내장에 생긴 병은 생각보다 깊고 짙게 그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내심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주첨기 자신이, 보다 안정된 제국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조선으로의 원정을 서두르는 것도 있었다.

조참의 진언에 주첨기는 친정을 하려는 생각은 물리고, 진언받은 대로 요동총병관 당염무에게 군사를 보내고, 그 지위를 일전의 양영이 맡았던 바대로 동정장군 토평총병관에 보임시켰다.

느닷없이 이런 명령을 받아서 당염무가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을유전역 이후 약조한 대로 원래 명나라의 영역인 동녕관에서 조선인들은 단순히 상행(商行)과 거주의 자유를 얻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이곳은 명나라의 권력은 공백화되고, 이곳에 파견된 조선인 관리가 행정을 치리하는 데에 이른 것을 당염무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조선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는 여진족과 함께 건주위에 주둔하고 있는 건주파견대의 보총병 5천의 위력 때문이었다.

4만의 명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요동이었지만 무기와 군율에서 열세에 있었기에 도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북경에서 이들을 공략하라고 무려 16만의 병력을 보내오면서 기존의 요동 4만 병력을 합하여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치라고 하는 것이다.

감히 황명을 거역할 자신도 없고, 이제는 앞뒤로 물러설 길이 막막하게 된 당염무는 자신을 다독여 전투에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앞으로 나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구나.”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기에 시기상으로도 무리가 있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이런저런 사항을 고려해 주지 않고 있었다.

당염무는 때문에 속전속결로 전투를 치르리라 마음을 먹고 11월의 어느 날, 20만 병력을 전개시키는 동시에 1만의 별동대를 내어 동녕관을 치게 했다.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는 명나라의 땅이니 만큼 조선에서는 이곳에 경비 병력 일부를 제외하고는 따로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지 않았는데, 당염무는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이곳을 노린 것이다.

때문에 동녕관은 부지불식간에 함락되어 명군에게 장악되고 말았다.

이 소식이 건주위의 건주파견대에 도달한 것은 이틀 뒤였고, 이내 국경 전선은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다시 새로운 전역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1437년

흥정 5년 중동(仲冬)

대한제국 평안도(平安道) 직하 건주위(建州衛).

건주위는 원래 명에서 여진족을 단속하기 위해 세운 일종의 병참(兵站)으로서, 이것이 을유전역 이후 조선에 인계된 뒤에,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북변(北邊)의 거점 기지 노릇을 하고 있는 군사도시였다.

이제는 인구가 물경 1만에 이를 정도로 꽤나 규모가 잡힌 성읍이 된 건주위는 같은 이름의 경계가 불확실한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때로는 명나라의 영역인 동녕관을 포함하기도 하고, 경계가 선으로 그어진 영역이라기 보다는 이 건주위에 복속되어 세폐(歲幣)를 지불하고 군사적인 보호를 받는 여진족 부족들이 퍼져 있는 곳이 곧 이 건주위의 관할 영역이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이 일대에 주둔해 있는 건주파견대는 이 일대의 군사적인 이점을 사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병력은 5천의 총포병과 건주위 휘하의 여진족 부족에서 차출한 여진병(女眞兵) 3천으로 총 8천의 군세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건주파견대는 실질적으로 명나라를 그 주적으로 생각하고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녕관이 함락되자마자 이 건주파견대로 그 소식이 들어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건주파견대장인 육군 부령(副領) 성석(成惜)은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침음성을 삼켰다.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단 말이냐. 동녕관의 관부는 어찌 되었는가?”

“동녕관 안찰사(按察使) 이형(李衡) 공께서는 밤새 급습한 명군에 의해 살해당하셨고, 도위(都尉) 강유명(姜裕明) 공께서는 그 행방이 묘연하나이다.”

“나머지 우리 아조(我朝)의 백성들은 어떠한가?”

“모두 명군에 의해 출입이 봉쇄되어 있어 어떠한 상황인지 알 길이 없나이다.”

“이 무슨 재난인가.”

성석은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재빠르게 평안도 관찰사에게 장계를 올리고 나서는 평안도 일대 국경 연선에 주둔해 있는 각 진위대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병력을 내어 줄 것을 청했다.

“우선은 안경완으로 하여금 별동대 1천 7백을 꾸려 다시 동녕관을 탈환하도록 한다. 그리고 나머지 파견대의 병력은 이 진위대를 중심으로 각처의 성첩(城堞)을 수호하고, 평안도에서 본국의 병력이 건너오는 대로 명군의 대군에 맞서 본토를 방비하도록 한다.”

본국에서 방침이 내려올 때까지 대강의 행동 요령을 지시한 성석은 재빠르게 전투태세로 건주파견대의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명나라와 충돌했던 을유전역 이후에도 근 30여 년간 건주파견대의 전투력은 잘 유지되고 있었다.

조정에서 특별히 외지에 주둔한 병력으로서 국가 방위의 제1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주위의 병력은 처음 설치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5천 병력에 이후에 건주위의 관할하의 여진족 부족에서 자원받아 총기병으로 훈련을 거친 뒤에 편성된 여진병(女眞兵) 3천까지 도합 8천의 간소한 병력이었다.

그러나 항상 엄중한 훈련을 거듭하며 무급으로 군역을 지는 각지에 주둔한 일반 징집병들과는 다르게 높은 보수를 쳐서 받았고, 복무 기간도 특별히 5년에 이를 정도로 강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 대비된 곳이다 보니 동녕관이 명군의 군세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민첩한 대처를 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명나라와의 자극적인 충돌 요인을 만들지 않고자 공식적으로는 명의 영토인 동녕관에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기에, 백 리 넘게 떨어진 건주위의 병력이 즉각적인 방어전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빠른 파발 체계를 통해 전투태세로의 즉각적인 전환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적세(敵勢)는 조목이 파악하였는가?”

별동대 1천 7백을 이끌고 동녕관 지척까지 도달한 안경완 참령(參領)이 부관에게 물었다. 그는 강원도 출신으로 육군진무관을 차석으로 졸업해 북방의 각처를 두루 거치며 변경 방비의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건주파견대장보좌(建州派遣隊長輔佐)의 직책으로 영전(榮轉)해 온 것이다. 현지 파악을 하고 지역 전술을 고심하던 차에 이렇게 명나라와의 급박한 일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을유전역 이후에 군문에 들어선 이들이 거의 그렇지만, 그 또한 실전의 경험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래의 병법을 좀 더 체계화시키고, 보총 및 포병과 기병의 적극적인 운용의 교리를 섬세화시킨 것 외에는 특별히 전술적인 발전이 없는 육군진무관의 교육 과정을 뛰어넘어 보다 심도 깊게 현장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늘 관심을 쏟았던 이가 이 안경완이었다.

때문에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적군의 수와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1만의 별동대가 동녕관을 점거하고 진주하고 있으며, 그 외의 병력은 물경 십만은 넘는 것으로 여겨지옵니다만, 현재는 동녕관이 아니라 요동남로(遼東南路)를 따라 의주(義州)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사옵니다. 필시 건주위를 직접 타격하고 속개해서 국경을 넘고자 하는 방책입니다.”

“동녕관을 친 것은 단순히 후방의 방비와 거점 확보를 위해서란 말이로군. 확실히 망원경이라는 놈이 이런 데에 쓰기는 탁월하구만.”

부관의 보고에 안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비교적 정밀한 동태 보고가 가능했던 것은 5년 전부터 경주 남산의 수정(水晶)을 캐다가 연마를 거쳐 만든 망원경이 전방의 군막(軍幕)에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유리를 공예하는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대한제국으로서는 15년 전부터 이 수정으로 기초적인 렌즈를 연마하는 방법을 연구해 왔는데, 학습원(學習院)의 학자들의 주도하에 이 수정을 이용한 망원경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망원경은 동시대의 유럽의 것에 비하면 약간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는 것이었는데, 우선 유리가 아니라 섬세한 세공이 힘들었고, 수정의 값이 높아 정밀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로 채굴되기 시작한 이 경주 남산의 수정은, 남석(南石)이라 불리며 각종 안경의 제작에 활용된 실례가 있는 것이었다.

세훈이 이 사실에 근거해 옛 공부(工部)를 통해서 발주를 맡긴 것이 그 성과가 나온 것이다.

이렇게 적군의 주둔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미리 그 규모와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진 건주파견대의 병력은 철저하게 사전의 적군 전력을 인지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었다.

“우선 내일 새벽녘에 동녕관 지척으로 접근해 보총을 든 보군(步軍) 칠백은 일대의 야지(野地)를 장악하도록 하고, 혹여 적군이 건주위의 성 밖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올 것을 대비해 마군(馬軍) 8백이 이들을 엄호하는 한편, 보총으로 동녕관의 토성을 방비하는 병사를 견제하도록 한다. 나머지 2백의 포병이 동녕관의 남문을 중심으로 포격전을 전개해서 침입로를 확보하도록 하라.”

안경완의 명령에 따라 병력은 우선 하룻밤을 대기한 다음에 방비가 허술할 수 있는 새벽녘에 도발적인 행군을 감행해 동녕관을 에워싸는 데 성공했다.

동녕관은 원래 무역을 위해 세워진 성읍이라 처음에는 명 측도 조선 측도 총포로 무장한 병력에 맞서 싸울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성벽을 축조하지 않았다.

혹여 예상되는 주요 적은 여진, 몽골 등의 북방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기마 상태로 움직이며 활이 주요 무기이기 때문에 높지 않은 토성이 이들의 진격을 저지할 정도로만 쌓여 있었다.

거기에 병력도 주둔하지 않았으니 명군의 쉬운 먹이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총포로 무장한 대한제국군에게 또한 함락이 어렵지 않은 성이 되어 있었다.

“공격을 개시하라!”

동틀 녘이 되어 안경완의 명령에 따라 대한제국군의 동녕관 공성이 시작되었다.

비록 1만의 명군 병력이 있었지만, 이들은 건주파견대의 병력을 이미 5천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시시각각 이들을 향해 다가가는 명군의 19만 병력에 맞서는 것이 빠듯하다고 여겼다.

때문에 이렇게 별동대를 내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연히 총이나 포가 아닌 기본적인 도검과 활로 무장한 병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목적은 후방 방비였기에 경계 태세도 허술한 편이었다.

1천 7백의 대한제국군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한 전력이었던 것이다.

동녕관의 확보를 둘러싼 전투는 이내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동녕관의 문루가 무너지고 투입로가 확보되면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다행히도 동녕관 자체가 기존 병력이 주둔하지 않았기에 명군이 진주하는 과정에서도 큰 파괴가 없었고, 대한제국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제외하고는 민생의 피해도 크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곳 일대에서 전략적으로 식량의 지속적인 징발을 하기 위해서 동녕관에 주둔한 명군의 지휘관 동문확(董文確)이 약탈을 금지한 탓도 있었다.

때문에 동녕관의 탈환을 위해 진입한 대한제국군과 최후까지 방비를 하고자 한 명군과의 소모전에 희생된 일부 지역과 주민을 제외한다면, 대체적으로 동녕관의 상태는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안경완은 파괴된 남문의 문루를 보수하도록 지시한 뒤, 명군의 병력을 정리하고 주둔지를 조성하는데 전념했다.

별동대로 파견된 병력은 고스란히 이 동녕관을 중심으로 요동 일대의 명군 거점을 유격전으로 타격하는 방식으로 이용될 터였다.

문제는 시시각각 건주위를 직접 타격하고 의주로 진격하려 하고 있는 나머지 19만의 명군 병력이었다.

1437년

흥정 5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평안도(平安道) 직하 건주위(建州衛).

그해 겨울의 추위는 혹독했다.

명군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요동의 남쪽을 통해 진격해 와 건주위의 주둔지 지척으로 들어선 것은 다시 달이 바뀌어 그믐달에 접어들어서였다.

한창 추위가 기승을 부릴 시기이기에 이미 병력 손실이 행군 중에도 일어나고 있었다.

요동에 본래 주둔해 있던 5만여의 병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강남(江南) 호광(湖廣) 일대에서 동원된 병력이라 북쪽 요동의 매서운 동장군에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었다.

춥기는 건주위의 제국군도 매한가지였지만 비교적 이곳에서 매년 겨울을 나며 동계에도 가급적이면 훈련을 해 온 건주파견대의 병력은 충분히 이런 날씨에도 전투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 단련은 되어 있었다.

요동반도의 끝과 압록강이 접하는 지역에서 이미 얼어붙은 강 위를 도강(渡江)하여 의주를 타격하고자 한다면 건주파견대와 충돌하지 않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명군이었다.

하지만 이 추위에도 굳이 의주로 바로 가지 않고 건주위 관내로 들어선 것은 후방의 불안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 가고 싶다는 원정군 사령관인 동정장군 당염무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염무는 이미 을유전역 당시 분산되어 격파된 명군의 사례를 잘 알고 있었다.

본디 조심스러운 성격인 데다가 병력의 분산 운용이 낯선 원정지에서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잘 알았기에, 그는 굳이 19만의 병력을 동녕관 공격 이외에는 나누지 않고 한 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나마도 건주위 영내에 들어서서는 동녕관이 별동대에 의해 다시 탈환되고, 1만의 병력이 고스란히 손실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더욱 몸을 사리며 일부의 병력으로 의주로 바로 진격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적어도 19만의 병력이라면 이제는 별동대를 빼고 나서 겨우 5천에서 7천 사이로 추정되는 남은 건주파견대의 병력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로서는 대한제국 국경 너머의 진위대의 병력과 질은 전혀 알 도리가 없었고, 그간 요동도사의 총병관으로 있으면서 충분히 그 실체를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는 건주파견대를 기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주위를 정리하고 겨울철에 압록강이 얼어붙어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국경 안으로 들어선다면 적어도 평안도 일대를 점령하고 제한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20만의 병력이라면 순식간에 조선 전역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북경 조정의 기대와는 달리 당염무는 조금 현실적으로 적어도 평양 정도만 점령한다면 조선이 다시 굴복하는 형태로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확한 전력 비교를 하지 못한 데서 나온 판단이었으니, 사실 을유전역 이후 30년간 지속적으로 개량된 대한제국의 무기와 전술을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못했을 뿐더러, 즉각적으로 지원을 나오게 될 의주, 안주, 강계에 주둔한 3개 진위대 6만 병력의 존재 또한 전연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염무는 오히려 이런 전력을 상정하는 것보다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확하게 건주위를 정리하고 남쪽으로 진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매서운 추위에 병사들이 지쳐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 등을 이용한 방한(防寒) 대비가 대한제국군에 비해서 확실히 떨어지는 명군은 이미 동상 및 탈진 등으로 전투 불능인 병력이 2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나머지 17만의 병력도 그다지 좋은 상태라고는 하기 힘들었지만 건주위를 정리하고 남쪽으로 진격하면 진격할수록 그 상태는 호전될 것이었다.

비록 동녕관을 다시 빼앗겼지만 그들이 지나온 요동남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보급로는 여전히 원활했고, 여차하다 싶으면 해로를 통해 직접 물자를 공수하는 방법도 있었기에 식량의 보급보다는 우선적으로 추위에 의한 병력 손실을 타개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다소 보급선이 길어지더라도 후방을 바삐 정리하고 남쪽으로 진격하는 전술을 택한 것이다.

“재빠르게 건주위의 병력을 정리하고 남쪽으로 진로를 돌리도록 하겠소. 각 진(陳)의 지휘사(指揮使)들은 이를 유념하고 미리 준비해 둔 병략(兵略)대로 건주위 앞의 평지에 견고하게 진영을 구축하시오. 적군은 총포로 무장했고 날랜 기병이 있으니 단단한 진영으로 족쇄처럼 적을 옭아매는 것만이 방법이오. 다만 적의 숫자가 적으니 이런 강고한 진영을 함부로 뚫지 못하고 큰 손실을 내고 말 것이외다.”

당염무는 모자란 장수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실수한 것이라면 단지 건주파견대의 전투력을 오산(誤算)한 것뿐이었다.

정확히는 건주파견대는 물론이거니와 곧 압록강을 넘어 명군의 본진을 타격하기 위해 건너올 진위대의 병력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슨 소리냐!”

멀찍이 떨어져서 명군의 동태를 관측하기만 하는 건주위의 병력을 보고서 진영이 세워지는 대로 바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려 했던 당염무가 느닷없는 포성에 놀란 것은 이곳에 둔지를 차린 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남동쪽에서 포가 떨어지고 있는데 얼마나 멀리서 쏘는지 알 수가 없나이다.”

당염무 휘하의 지휘동지(指揮同知) 공만생(孔萬省)이 읊조린다.

“멀찍이서 정찰만 돌고 있는 건주위의 병력이 아니란 말이더냐! 놈들은 파수병들이 정확히 볼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지 않던가.”

“건주위에서 오는 포가 아니옵니다. 우선은 진영을 흩어서 포에 의한 피해를 줄이고 직접 가까이 있는 건주위에 정공을 펼치는 것이 좋을 듯 여겨지나이다.”

“허어.”

당염무는 당황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즈음 대한제국의 소포(小砲)는 개량되어서 보다 사거리가 길고 정확도가 좋으며, 기존의 포의 주조에 쓰던 동(銅) 대신에 생산이 안정화된 철을 사용하여 성능을 개선한 대포(大砲)를 일선에 배치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전선에 즉각 투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신기전(神機箭) 등의 신병기도 상공부의 군기국(軍器局)과 군부의 군수처(軍需處) 사이에 조직적인 협력으로 개발되어 전방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 대포와 신기전 등으로 무장한 포격전의 주인공이 개전 직후 신속한 판단하에 제일 먼저 도강하여 건주위의 역내로 진입해 명군이 오기를 기다리던 의주의 제15진위대라는 사실을 당염무가 알 도리는 없었다.

의주의 제15진위대는 1421년, 을유전역 이래 계속되는 군사력 보강 정책에 힘입어 국경 최전선의 방위와 유사시 건주파견대의 후견을 하기 위해 당초 1만의 병력으로 만들어진 부대였다.

이것이 계속된 인원 보충에 힘입어 현재는 2만의 병력을 유지하며 상시 대기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건주파견대에서 조정으로 들어갈 서계를 올리자마자 이곳의 의주 진위대 본영에서 봉화를 올리고, 즉각적으로 육군청에서 봉화로 올린 신호로 출정을 비답(批答)하자 지체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 일대에서 건주파견대와 함께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의주파견대는 특히 기동력 좋은 기병과 강력한 대포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멀찍이서 위치를 노출하지 않고 이렇게 명군의 진영을 두드려 대니 명군이 혼란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염무는 알 수 없는 포격에 대처하기 위해 병력을 어쩔 수 없이 세 줄기로 나누어 건주위를 전면과 좌우에서 들이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건주위의 성채는 언덕에 있었고 언덕 능선에는 겹겹이 참호가 둘러쳐져 건주위의 총병들이 그 안에서 교대 사격을 실시해 접근이 쉽지 않았다.

거기에 후방에서는 여전히 제15진위대의 포격 지원이 계속되고 있으니 명군의 진로는 교란될 수밖에 없었다.

“다소의 손실을 보더라도 어쩔 수 없다. 공격의 물꼬를 늦추지 마라!”

당염무는 우선은 전세를 반전해서 뒤엎지 않으면 의주로 들어가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병력수로 우선은 참호진을 뚫고 지나갈 것을 명령했다.

건주파견대의 총병들은 수적 열세에서 상당히 분전하며 방어했지만 물밀듯이 밀려오는 명군의 군세 앞에서 참호는 한 열씩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들이치는 명군의 후방으로 포격 지원만 하던 제15진위대의 총기병을 중심으로 한 기동 병력 일단이 명군의 후방을 들이치면서 이 돌격 대열 아래에 명군의 후방은 급속도록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치열하게 참호를 뚫고 나가며 손실을 보고 있던 명군의 우익(右翼)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전방과 좌익의 병력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 우선 건주위만 함락시킨다면 병력을 재정비할 수 있느니라!”

당염무는 시시각각 변하는 전세에 조심스럽게 대처해 보려고 했지만, 지금은 큰 병력의 손실을 보더라도 건주위를 우선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손실을 입은 채로 의주로 들어간다면 후방에 도사린 이 병력들이 고스란히 뒷목을 노리고 들어올 것이 뻔했다.

다행히도 건주위의 성채를 둘러싼 참호에서 명군의 진격을 막던 건주파견대 병력은 거의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녕관과 건주위 성채 안에서 방호하고 있는 파견대 병력을 제외하면 참호전에 투입된 병력은 2천 남짓이었다.

그 참호를 뚫고 지나가는데 명군의 병력은 3만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선두의 병력이 건주위의 성벽에 다가가 성안에서 수성하는 건주파견대의 나머지 병력과 교전을 시작할 무렵 명군의 후방은 계속해서 전열이 무너지고 있었다.

건주위 성벽 주위에서는 명군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지만 후방이 무너지는 속도가 그것보다 빨랐다.

때마침 건주위에 도착한 강계 주둔의 제19진위대 1만 5천 병력이 명군의 본대(本隊) 후방을 흩뜨리기 시작했고, 여전히 우익에 가해지는 제15진위대의 파상 공세도 지속되고 있었다.

거기에 매복해 있던 건주파견대 휘하의 여진기병들이 명군 좌익 후방을 휘저으며 교란시키자 명군의 내력도 점점 떨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조선의 군대가 강성했단 말이더냐!’

당염무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을 속으로 삼켰다.

생각 이상의 고전이었다.

을유전역 당시를 기준으로 예측한 병력과 화력이 잘못된 것이었다.

이미 서른 해가 지나는 동안 명나라의 군사 기술은 큰 발전이 없었지만 제국군은 달랐다.

더군다나 병력 운용의 기술에 있어서도 근세적인 사고로 접근하기 시작한 제국군과 중세 병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명군의 차이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병력을 돌리셔야 하나이다. 계속해서 병졸의 주검만이 성 아래에 쌓이고 있나이다. 우측은 거의 무너져서 제 구실을 못하나이다.”

당염무의 곁에서 전황을 살피고 온 부관이 귓전에 대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염무가 봐도 건주위의 성벽은 꽤나 튼튼했고, 이대로 가면 함락을 시킬 수는 있다 하더라도 병력의 궤멸적 손실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다가 그렇게 해서 병력을 남겨 보아야 본래 각오했던 조선 본토로의 정벌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병력을 퇴각시키도록 하자.”

당염무는 씁쓸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기를 놓친 퇴각 명령에 명군은 질서정연하게 퇴로를 확보하여 철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후퇴를 결정한 뒤에도 지루한 산발전이 반나절 넘게 계속되었다.

건주위를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전사자와 전상자를 도합하여 물경 7만에 가까운 손실을 내고서 당염무는 결국 다시 요동도지휘사사의 본영으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군은 병력 손실만 낸 채로 결국 참패하고 만 것이다.

1438년

명(明) 정통(正統) 원년 맹춘(孟春)

대명국 산동성(山東省) 요동도사 직하(直下) 요양성(遼陽城).

요동도사(遼東都司)는 명나라 국초(國初)에 옛 원나라의 장관으로 요양을 통치하던 유익(劉益)이 투항해 오자 이를 받아들여서 요동위지휘사사를 설치하고, 유익에게 종3품 지휘동지를 사사함으로서 명나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당대(唐代) 이래로 발해, 요, 금, 원을 거치며 줄곧 유목민족의 지배를 받아온지라 땅은 넓으나 사람이 적고, 더불어 국경 연선(沿線)의 가혹한 추위와 불안한 환경을 감내해야 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명 조정에서는 이곳에 산해관(山海關) 안쪽과 같은 내지의 통치 체제를 준용하지 못하고 군현이 아닌 25개의 위소(衛所)를 설치해 군정 체제로 통치해 왔다.

행정상으로는 이 요동은 성(省)이 아니라 일개 도사(都司)였기에 산동포정사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병부 5군 중 좌군(左軍)에 속해 있었다.

이 군무를 총괄하는 것이 총병관(總兵官)이었다.

때문에 요동도사의 총병관인 당염무가 동정장군이 되어 조선의 정벌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떠맡게 된 것이었다.

예전에 이방원을 지원하기 위해 을유전역 당시 원정군을 이끌었던 양영이 내각 대학사라 신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 당염무는 훨신 격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몽골, 즉, 옛 북원(北元)과 여진, 대한제국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뒤섞여 명나라와 접하고 있는 이곳에서 군사 업무를 총괄해 온 경력을 따져 보아서, 중앙의 관리보다 현실적으로 전장과 적을 더 잘 아는 인물이라 판단되어 정략적으로 임무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조심스레 건주위로 밀고 들어간 당염무는 순식간에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다시 요동도사의 본영(本營)인 요양으로 패퇴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요양의 동북쪽 지척에는 동녕관을 점거한 제국군이 호시탐탐 요양성 수십 리 밖에서 정찰을 돌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요동 지역은 고려계의 유민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곳에 정착해서 살았다는 것일 뿐 언어나 풍습에 있어서 지금 대한제국의 평안도 지역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런 고려인 마을이 요양 동북쪽의 동녕관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요양(遼陽)에서 동북쪽으로는 개주(開州) 인근까지 퍼져 있고, 또한, 남쪽으로는 개주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대 요동도사 관할의 호구(戶口) 중 3분의 1이 이 고려인이었다.

거기에 을유전역 이후 동녕관이 설치되고 이곳에 명나라 군사가 진둔하지 못하는 일종의 중립 무역 지대로 바뀌면서 30년간 대한제국에서 흘러들어 온 사람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당대 요동 인구 40여 만 명 중 절반이 고려계와 제국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요동도사의 지휘보다는 대한제국에 종속되어 있는 건주위 휘하의 여진인 중 요동에 들어와 있는 이나, 몽골족으로서 원나라의 패퇴 뒤에도 여전히 요동에 머무는 이의 숫자를 생각해 본다면, 비(非) 한족 인구가 거의 칠팔 할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런 화약고 같은 지역에서 원정 행위를 해서 불을 지른 셈이었으니 당염무는 막상 요양성으로 목숨과 군사들을 살려 숨어들고서 문을 걸어 닫아도 마음이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이미 건주위와 동녕관 사이에 있는 개주위(開州衛)의 주둔 병력은 제국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고, 제국군은 시시각각 이 동녕관까지 진군해 요양(遼陽)을 공격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크, 큰일입니다!”

총병관 당염무가 침상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마당에서 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헐레벌떡 마당에 놓인 초라한 정원을 지나 당염무의 침실에 다다른 이는 바로 부총병관 지휘동지 공만생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가?”

“방금 북경과 산동 양쪽에서 급박한 소식이 들어왔나이다. 북경에서 내려온 파발꾼과 산동의 포정사사께서 보내신 내용이 얼추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 이 말이네.”

“가붕이나이다.”

“뭣이? 가붕이라고!”

가붕(駕崩)이라는 것은 곧 황제의 죽음을 조심스레 일컫는 말이다.

당대의 명나라 황제이자 이번 전란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선덕제 주첨기의 죽음이 요동에 파발로 닿은 것이다.

북경과 산동 양쪽에서 들어온 이야기이니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황상 폐하께서 그리되실 성치(聖齒)가 아니시지 않은가?”

“지금 북경은 발칵 뒤집힌 모양이나이다.”

실제 역사보다 삼 년을 더 살고 있는 주첨기였으나, 젊은 나이의 요절할 운명을 결국엔 비껴 나가지 못했다.

“보위는 누가 이었다고 하는가?”

“황태자 전하께서 이으셨다 하나이다.”

“올해 보령이 열하나 되시던가?”

“이제 막 그리되시나이다.”

“아……! 조정에서는 이 전란을 어찌 수습하려고?”

“지금 북경의 조정에서는 양사기 님을 비롯해 여러 내각의 대학사와 상서대신들이 정사를 차질 없게 하기 위해 밤낮으로 절치부심이라 하나이다.”

“그러나 내부 문제도 어지러운 일인데 이런 바깥일은 그야말로 죽음의 첩경일세. 안의 일이 복잡하니 아무도 요동 변장에는 신경을 쏟지 못할 터인데, 이곳에서 우리가 뚫리면 북경이 지척이네. 그런데 지금 북경에서는 우리가 아마 조선의 경내로 들어서 전투를 벌이는 줄 알 터이고, 이곳으로 패퇴해 와 보낸 파발은 아직 북경에 닿지 않았을 터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조선군은 이미 지척에 와 있는데 말이네.”

당염무는 결국 탄식을 뱉어 내고야 말았다.

쫓겨 나오는 와중까지도 적군의 정확한 군세를 알 길이 없었으나, 요양으로 쫓겨 들어와 척후병을 이용해 이동 중인 적의 병력을 탐지하니 그 군세가 물경 6만 가까이 이른다고 했다.

이들 중 도검과 활로 무장을 마무리한 이는 없고, 칼을 패도하더라도 모두가 총을 들고 있고, 많은 이들이 말을 타고, 또 포를 끌고 있으니 그 위세가 자못 두렵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우리 휘하에는 병력이 얼마나 있는가?”

“돌아온 병력과 이곳에 남겨 두었던 병력 3만을 합쳐 전부 15만이나이다. 그러나 요양 일대에는 7만을 두고, 산해관으로 가는 길목인 금주에 3만, 산해관에 2만, 그리고 요남(遼南)의 산동으로 가는 해로(海路)의 거점인 고을들을 방비하러 병력을 다시 배치할 수밖에 없었나이다.”

“이제 우리가 수세에 몰렸으니 본진을 싹 비워 두고 적을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이 요양에서 벌어질 전투는 우리에게 쉽지 않게 되었구만.”

당염무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런 와중에 대한제국의 군세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건주위의 복구를 위해 남은 기본 병력을 제외하고 의주의 제15진위대, 강계의 제19진위대, 안주의 제8진위대가 속속히 도착하여 비교적 상태가 안정되어 있었다.

훈련이 잘된 이들 병력이 안주 제8진위대의 진위대장인 육군 참장(參將) 서정식(徐情識)의 지휘하에 대오(隊伍)를 지어 요양 동쪽에 있는 명나라의 위진(衛鎭)들을 정리하며 서쪽으로 육박해 오고 있었다.

“곧 요양의 지척입니다.”

서정식의 군세와 동녕관에서 합류한 안경완이 말했다. 동녕관을 점령하고 있던 안경완의 부대는 진군 중에서도 탁월한 척후병으로서 군대를 엄호하며 길을 살피고 있었다.

“요양이라… 유래 깊은 성읍이라 들었네.”

“사적(史籍)에 이르는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이 바로 이곳입니다. 선진(先秦) 전국(戰國) 때의 연나라 양평(襄平) 또한 이곳이었습니다. 요나라가 이곳에 발해 유민들을 거두기 위해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를 설치했던 것이 요양이란 이름의 기원이 되어 지금에 이르니, 그야말로 천 년을 훌쩍 넘는 고읍(古邑)입니다.”

“국조(國朝)의 흥망에 따라 주인을 바꿔 가며 살아남은 곳이니, 요지임에는 틀림없네. 공략이 쉽지는 않을 것이야.”

서정식의 말에 휘하 군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나라의 공격이 있었을 때는 분전하여 여러 차례 수성에 성공하였으나, 당 태종의 공격에는 열이틀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그때의 고구려군과 같이 지금 성중(城中)의 명군은 지치고 보급이 끊겨 있으니 총포로 무장한 우리 군세가 이를 함락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의 요양성은 접전을 거듭하던 고구려 때의 견고함에 미치지 못하니 승산은 충분히 있습니다.”

안경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충분히 전략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요양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요양성 30리 밖에 둔지를 만들고 주둔을 한 제국군은 군막에서 이 문제를 놓고 회의를 거듭했다.

“안 참령의 말대로 공세는 취하기 나름일 수 있네. 그러나 견벽(堅壁)을 깨뜨리려면 사방을 정지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한참의 논의를 거듭한 끝에 서정식 참장이 당장의 군략(軍略)을 정했다.

“요양성을 지원할 만한 가장 요지라면, 바로 북쪽 백 리 안에 예전 원나라 때에 심왕부(瀋王府)가 있던 심양중위(瀋陽中衛)가 있습니다. 대략 3천의 병력이 이곳에 주둔하여 요양의 북쪽을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심왕부가 있던 곳이라면, 명분상 명나라의 공세를 반전할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겠군. 고려말로부터 이곳에 왕부가 있어 고려 왕실이 이를 겸작(兼爵)하였고, 지금은 심왕 전하께서 비록 이름뿐이긴 하나 이곳의 권익을 주장할 수 있으니 무에 두려워할 것인가? 우선 북쪽은 이곳을 토평하여 단단히 하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심(瀋)의 땅을 평정한 것을 알린다면 후일 단단히 치하함이 있을 것일세.”

서정식은 단순히 공명(功名)을 위해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기회가 닿고 그것이 합당한 일이라면 굳이 명예를 마다할 사람도 아니었다.

이제 나이가 오십줄을 넘어선 데다가 육군진무관이 설립되기 전에 군문에 든 무장이라 그만큼 군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미 전쟁 이후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공명을 얻기 위해서 심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요양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라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정식은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다음에 판단한 것이었다.

“남쪽은 어떤가?”

“남쪽으로는 땅끝에 여순구(旅順口)가 있어 산동과 사무와 교역을 처리하나, 이곳은 여기서 수백 리 길이라 당장은 요양에 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요중위(遼中衛), 해주위(海州衛), 광녕위(廣寧衛), 개주위(蓋州衛) 따위의 둔지가 요양 지척에 여럿 있으나, 다들 지금 군세가 빈약하여 총포로 들이치면 곧 백기를 들고 성문을 열 수준입니다.”

요양 남쪽은 상대적으로 북방의 위협에 안정된 상태라 명나라에서 이곳에는 위소를 설치하고도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북쪽의 심양이었다.

“좋네. 그렇다면 본대는 북쪽의 심양을 들이치고, 삼분의 일의 병력으로 따로 지대(支隊)를 내어 남쪽의 요중에서 개주까지를 토벌하도록 하겠네. 본대는 제8진위대와 제19진위대의 병력으로 편성하고, 심양을 정리한 뒤 바로 요양의 북문 가까이 둔진을 편성하겠네. 지대는 제15진위대의 병력에 안 참령이 이끄는 별동대 병력을 더하도록 하겠네. 남쪽의 위소의 정리가 끝난 뒤에는 안 참령이 요양의 서쪽으로 들어가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 주도록 하게.”

서정식의 말에 휘하 배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다음 날, 지시받은 대로 병력을 운용한 제국군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심양을 토평하고 명의 관리들을 사로잡아 건주위로 보냈다.

남쪽의 지대 또한 손쉽게 요중, 해주, 광녕, 개주의 네 위소(衛所)를 정리하고 남과 서의 보급로를 끊는 데에 성공했다.

요양의 명군은 이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것이었다.

1438년

명(明) 정통(正統) 원년 맹춘(孟春)

대명국(大明國) 북직례(北直隷) 북경 순천부(順天府).

작년 그믐에 승하한 선덕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바로 아직 코흘리개인 정통제 주기진(朱祁鎭)이었다.

새해가 되자마자 즉위해 원호를 정통(正統)으로 하고, 양사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힘입어 겨우 어려운 난국을 정리하고 있었다.

실상은 겨우 이 열한 살의 어린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전전대의 황제인 홍희제의 황후였던 태황태후(太皇太后) 장씨(張氏)가 양사기 등 대신들과 함께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렵사리 황제의 갑작스러운 승하에 따르는 정국의 어지러움을 수습하는 데에 성공했을 무렵, 갑작스러운 비보가 요동에서 건너온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무에야?”

태황태후 장씨는 전해진 소식에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가 앉아 있던 목좌(木座)가 흔들릴 정도였다.

“요양 본성의 상황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하옵니다. 당염무가 이끄는 군세는 건주를 치고 국경을 넘기 위해 동진을 감행했으나 순식간에 조선군의 반격에 그 군세를 잃고 요양성으로 철수했으나, 그 사방을 조선군이 들이쳐 길을 모두 막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고 하옵니다.”

서계를 조심스럽게 전한 간관(諫官)이 엎드려 태황태후에게 조아렸다.

“그럼 이런 소식은 어떻게 전해졌단 말이냐?”

“산해관 바로 밖 금주(錦州)의 지휘동지가 탐찰(探察)을 한 뒤 급하게 보낸 서계이옵니다.”

“이 무슨 괴악한 일이란 말이냐. 그렇다면 요양이 무너지면 바로 금주에 다다르고, 그렇다면 산해관이 지척 아니냐? 산해관을 넘어선다면 바로 이곳 북경이니라.”

“요양의 군세가 절반 이상 남아 있다고 하니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태황태후는 이마를 쥐어 잡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각 수보 양사기(楊士奇)와 병부상서 대학사(大學士) 양영에게 입시(入侍)들 하시라 전갈하라.”

“분부 받잡겠나이다.”

간관이 물러선 지 채 한 시진이 지나지 않아 급하게 관복을 정제한 양사기와 양영이 태황태후가 기거하는 순양전(順陽展)에 들어섰다.

“소식들은 들으셨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

어렵사리 입을 연 양사기가 말끝을 흐렸다.

그 좌측에 나란히 입시한 양영은 채 무어라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화평을 해야 할 일입니다. 산해관까지 적세가 육박한다면 북경을 방비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일전 을유전역 당시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갔다가 많은 손실을 내고 결국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양영이 조아렸다.

조선 국내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요동에서도 밀리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발을 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감히 천자를 칭하여 아조의 황실을 우롱하는 조선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들은 바에 따르면 요양의 군세가 아직 태반이 남아 있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기전(畿甸)의 병력을 동원하여 산해관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단단히 방비하고, 적세가 움츠러들 때를 기다렸다가 반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직접적으로 대한제국과의 전쟁에 종군한 경험이 없는 양사기는 주전론(主戰論)을 펼쳤다.

“요양에는 아군의 소식이 닿지 않으니 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이라도 조선군에게 전갈을 보내 화평을 제의하고, 남아 있는 요동의 병력이라도 살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것이 늦게 되면 요양성이 함락되고 십수만의 병력을 고스란히 잃고 산해관까지 적군이 육박하는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양영은 진심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안정된 상황에서 전력으로 부딪혀도 모를 일인데, 지금 들어오는 전갈들을 보니 나라가 어수선할 때 잘못 원정을 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자는 말이오? 내 양 학사를 그렇게 보지 않았소만. 어림군까지 동원하여 일전을 각오한다면 반드시 필사로 산해관을 사수하고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이전에, 요양이 그렇게 순순히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외다.”

“그만들 하시오!”

양사기와 양영의 논전이 불붙으려 하자 태황태후가 손을 휘저으며 제재하고 나섰다.

두 노신(老臣)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시간의 침묵에 들어갔다.

답답한 공기가 그들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우선은 병력을 동원하여 산해관의 장성을 넘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비하고, 최대한 요양을 지원해 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보시오. 그리고 만약에 적세가 산해관에 육박해 와 도읍을 위협한다면, 화평은 그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게 어떻소?”

태황태후가 논전을 정리했다.

“그러나 막대한 병력의 손실을 입고 그 뒤에 화평한다면 더욱 치욕스럽지 않겠습니까? 요동을 내어 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막아 보지도 않고 화평을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조종(祖宗)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태황태후의 말에도 두 노신들은 여전히 의견의 합일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들 하시오. 그리고 내가 말한 대로 처리하는 것으로 하시오. 지금은 그 외에 방법이 없을 듯하오. 내 두 노신들을 믿어 이리 불러 국사를 의론하건만, 대체 뚜렷한 방책도 내어 놓지 못하니 앞으로 어린 황상을 누가 일러 보위할 것이오?”

태황태후의 일갈에 두 노신은 씁쓸한 침만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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