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서행사절(西行使節)
「미르자 자한 샤의 자애로운 다스림이 펼쳐지던 때에 카라코윤루[黑羊朝]는 번영하는 나라였었다. 그 공정한 주권은 정의를 행하기를 열망했었고, 나라의 부를 보호하며, 그의 가신들을 영예롭게 다루었었다. 도읍인 타브리즈에서는 셀 수 없는 사람이 평화를 마음껏 누렸었다. 왕의 선한 품행에 관한 소문은 사방 만 리로 널리 퍼졌고, 동방왕국의 사신들도 왕의 궁정에 입조해 그를 칭송했었다. 신이 가호하시는 왕국의 신민들은 아, 자애롭게도 시간의 화살마저 비껴 나가며 평화를 즐겼었다.」
―1462년, 아브드 알 라자크(Abd al-Razzaq),
《미르자 자한 샤의 자애로움에 바치는 송가(頌歌)
1442년
페르시아력(曆) 820년 맹춘(孟春)
티무르조(朝) 페르시아 호르무즈.
신숙주(申叔舟)는 올해로 나이 스물여섯의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네 해 전 외학당을 졸업하고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공부까지 마쳤다.
희망한 대로 신숙주는 외부(外部)에 발령받았다. 신숙주는 외학당에서 그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언어의 귀재(鬼才)였다.
일본어, 유구어를 비롯해 중문(中文)과 고문(古文)에도 능통할 뿐 아니라 몽어(蒙語), 회회어(回回語)까지 그 터득이 빨랐다.
때문에 전시에서의 성적이 우등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한림원에서는 특별히 그 능력을 아껴 심도 깊은 공부를 계속하도록 배려해 주었고, 덕분에 신숙주는 외부에 등청하자마자 종4품의 참서관(參書官)의 직위를 제수받을 수 있었다.
때마침 1437년 명의 침입으로 촉발되었던 정사전역(丁巳戰役)의 전후 처리를 성공적으로 이끈 외부대신 이예는, 이 총명한 준재를 눈여겨보았다가 전례 없던 임무를 맡기기에 이른다.
내각 회의에서 추밀원에도 알리지 않고, 비상히 논의되어 비급(秘級)으로 인준된 이 내용은, 서방으로 사절을 겸한 탐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학습원에서 지도 제작을 연구한 서생인 백응규(白應規)라는 이와 국서(國書)를 간수할 정7품의 번역관보(飜譯官補) 1인, 여행의 노정(路程)을 기록할 주사(主事) 2인, 그 외에 호위무관으로 동행할 육군의 민열(閔說) 정위(正尉)까지 총 5인이 자네와 함께 파견될 것이네. 이 임무는 당장 제국의 안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일은 아니나, 장차를 큰 안목으로 내다보고 대계를 세우기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네. 부디 잘 부탁하겠네.”
외부대신인 이예가 직접 이제 막 관직의 길에 들어서 참서관을 불러다 놓고 하는 이야기 치고는 엄중한 것이었다.
이예는 갈기털 같은 수염을 좌우로 쓸며 이 젊고 잘생긴 영민한 관리를 살펴보았다.
신숙주는 갑작스러운 파견명령, 거기에다가 이것이 내각 회의에서만 대외비로 긴밀히 의결되어 황제의 인준도 받지 않고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신숙주의 표정은 복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덤덤한 표정 아래에서는 기대감에 찬 시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준비는 생각보다 서둘러 진행되었다.
내각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는 일이니 만큼 관련 부처에서도 최소 인원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을 통지받은 군부의 육군청 역외국(域外局)에서는 주임관인 천안석 정령만이 내용을 알고 나서 휘하의 부관인 민열 정위를 특별히 파견 형식으로 보냈다.
가장 많은 인원이 투입된 외부에서도 특별히 외교 문서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장정국(章程局)이라는 부서를 황급히 개설하여 신숙주를 포함한 관련 관리들을 모두 이곳에 배속시키고 일을 진행시켰다.
이 일을 이예와 함께 주도한 현도는 상공부대신의 직임으로 특별히 이들을 서쪽으로 보낼 상선을 비밀리에 수배했다.
당연히 그로서는 나상의 오상복과 부친 세훈을 통해 닿아 있는 줄이 있었으니 오상복은 흔쾌히 호르무즈까지 가는 선박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이 비밀로 진행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 조정은 전후 처리 등의 문제로 상당한 예산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당장 시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이런 해외 사절의 파견에 추밀원이나 황제가 동의해 줄 리가 없었다.
아니, 황제는 오히려 꼬투리를 잡았다는 심정으로 반려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도와 이예 등은 이 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을유전역 이후 티무르조와 서로 간에 사절을 교환하여 조선에 들어온 바호디르는 결국에 페르시아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해 지금 제국에 막대한 이익을 선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정화 이래 다시 해금령을 내려 바다로 배가 나가는 것을 금지한 명나라와 다르게 대한제국은 동방의 무역을 독점하며 상행에서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내각의 대신들은 정확한 서방의 정보를 탐지하고 무역 대상을 늘리기 위한 이 원정이 언제고 한 번 시작 되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의 중요성을 모르는 다른 곳에서 흠을 잡기 시작하면 어렵지 않은 일도 시작을 되레 하지 못할까 싶어 비밀리에 일을 진행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신숙주를 포함해 총 6인으로 꾸려진 조촐한 원정단은 나상에서 제공하는 범선, 명경호(明鏡號)에 올라 벽란도에서 출항했다.
목포와 제주에 잠시 기항한 명경호는 다시 서남으로 방향을 틀어 영파에 들렀다가 최근 나상과 송상(松商) 등에서 해안에 기항지를 마련하고 식수 등을 공급받기 시작한 대만(臺灣)을 거쳐 상남(湘南)에 이르렀다.
상남에서 그들은 보름간 정박하면서 천안석의 후배인 소만식이 운영하는 안동여숙에서 숙박하고는 다시 배에 올라 인도의 해안을 두루 거쳐 호르무즈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대한제국에서 출항하는 상선들의 최종 기착지는 바로 이곳 호르무즈였다.
대부분의 상선들은 멀어도 상남이나 인도 등을 그 목적지로 하고 있었고, 정기적으로 이곳 호르무즈까지 상선을 운용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나상뿐이었다.
다만, 송상(松商)이나 경상(京商) 등에서 비정기적으로 함대를 호르무즈까지 출항시킬 뿐이었다.
그래도 호르무즈에는 바호디르가 다져 놓은 상관(商館)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주재원이 마흔 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를 자랑하는 나상의 상관은 비정기적으로 입항하는 송상과 경상에서 차입금을 내고 이곳에 파견한 주재원들을 포함해 그 수가 총 쉰 명에 다다랐다.
멀리서 국서를 받들고 온 신숙주 일행을 이들이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로가 많으셨습니다. 신 참서관님.”
상관에서 일행을 맞은 것은 상관장이자 오상복의 막내 아들인 오태주(吳泰株)였다.
“이곳까지 거쳐 오며 들른 나라들이 다 풍광이 제각각이었는데, 여기는 바람까지 메마른 느낌이 듭니다.”
“이곳 호르무즈 섬이 아니라 뭍으로 내려서시면 그런 느낌이 더하실 겁니다. 파사국(페르시아)의 내륙은 습기가 없고 모래 바람이 날리는 고원에서 사막이 시작되고, 이것이 서쪽바다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렇소이까?”
“우선 상관에서 하루 쉬시고 가시고자 하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선편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호조(護照)가 있어야 내륙을 왕행할 수 있으니 내일은 이곳의 태수님을 만나 보시지요.”
신숙주는 다음 날 직접 호르무즈의 태수 라술을 찾았다.
라술은 바호디르와 먼 친척 되는 이로, 이제는 나이가 많아 허옇게 샌 수염을 늘어뜨린 채 카펫 위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먼 곳에서 또 손님이 오셨구려. 알라께서 안녕을 주시길.”
신숙주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서는 자신이 페르시아의 서쪽으로 가서 여러 지방을 둘러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미 나상을 통해서 충분히 필요할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는 티무르조의 페르시아이기에, 신숙주는 굳이 필요하다면 국교를 맺기 위해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괜히 티무르조의 군주 샤로흐를 진노하게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주변 국가와 통교하려 하려는 것을 알게 되면 견제받을 것도 예상해야 했다.
때문에 태수 라술은 신숙주를 그저 상인들의 우두머리 정도로 생각했다.
“더 먼 데까지 가겠단 말씀이시오? 내 신분을 보증하는 호조(護照)를 내어 주리다. 페르시아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뿐더러, 원한다면 국경의 관병에게 이를 내어 보이고 다른 나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오.”
라술은 별 의심 없이 태수의 직인을 찍어 호조를 내주었다.
호조라는 것은 일종의 여권과도 같은 것으로 외국인이 내륙을 통행하기 위해서 필시 지참해야 하는 신분 증명 같은 것이었다.
호르무즈에서 모든 상행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나상의 상인들이지만, 종종 내륙으로 이스파한까지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라술은 그때마다 직권으로 이들에게 호조를 발급해 주곤 했었다.
거기다 여태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신숙주를 의심할 이유도 없었다.
이렇게 신숙주와 그 일행은 라술의 호의에 힘입어 1442년 3월 30일, 바스라(Al Barah)로 가는 배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항로의 탐측을 위해 페르시아 선박과 함께 동행한 나상의 명경호는 다시 이곳에서 호르무즈로 돌아가고, 나상에서 동행으로 보낸 5명의 상인들만이 신숙주의 일행과 함께 바스라에 들어섰다.
1442년
이슬람력(曆) 846년 계추(季秋)
카라코윤루(Qara―Qoyunlu, 黑羊朝) 타브리즈.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드는 만구(灣口)에 위치한 바스라를 통해, 강을 거슬러 바그다드로 올라간 신숙주 일행은 행로를 북쪽으로 잡았다.
바스라로부터 이 북쪽은 모두 투르크족 일파인 오구즈인들이 세운 왕조인 카라코윤루[黑羊朝]가 지배하는 땅이었다.
이 카라코윤루는 티무르와 몇 번 자웅을 겨룬 전력이 있었다.
1400년, 티무르의 군대는 카라코윤루를 대패시키고 당시의 군주였던 카라 유수프(Qara Yusuf)는 이집트로 도망쳐 맘루크 왕조에게 원조를 구걸하는 처지가 되고야 말았다.
어렵사리 이집트의 도움으로 병력을 모은 카라 유수프는 절름발이 티무르가 명나라로 원정을 간 사이를 노렸다.
그 빈틈을 타서 티무르의 땅을 들이친 그는 카라코윤루의 수도였던 타브리즈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가 곧 병사하자 일련의 권력 투쟁 뒤에 정권을 잡은 샤로흐는 이것을 좌시하고 있지 않았다.
샤로흐가 이끌고 온 군대는 카라코윤루를 공격했고, 이는 곧 거친 전투로 비화되고야 말았다.
전세는 비등했으나, 결국 1410년의 전투에서 카라코윤루가 티무르 군을 물리치고 바그다드를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비옥한 지대가 모두 카라코윤루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대했던 지도자인 카라 유수프가 1420년 죽은 뒤에도 티무르의 위협은 여전히 강성했고, 그를 이은 후계자인 카라 이스칸데르(Qara―Iskander)는 이 샤로흐의 위협과 맞서야만 했다.
카라 이스칸데르에게는 다른 동생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인 자한 샤는 트레비존드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4세(Alexios IV)와 황후(皇后) 테오도라 칸타쿠제네(Theodora Kantakouzene) 사이에서 난 황녀와 결혼을 했다.
이 혼인 동맹으로 트레비존드가 티무르에 지불해 왔던 세폐(歲幣)를 그 뒤로 카라코윤루에게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샤로흐의 불만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잠재적인 왕위 승계자로서 위협을 받고 있던 자한 샤를 이용해 샤로흐는 1436년 카라 이스칸데르를 물리치고 자한 샤를 카라코윤루의 왕위에 앉히는 데에 성공했다.
샤로흐의 도움을 얻어 즉위한 자한 샤는 샤로흐의 궁정에 입조하여 봉신이 되기를 맹세했고, 카라코윤루는 그 후로 티무르조의 속국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카라코윤루와 티무르가 서로 충돌할 때 이곳에 와 노예로 팔려 가는 신세를 면치 못했던 한학정과는 다르게, 스무 해를 지속된 강고한 평화 시기에 찾아온 신숙주 일행은 호르무즈의 태수 라술이 내어 준 신분 증명만으로도 쉽게 바스라에 입항해 통행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곧 바그다드에 입성해 바그다드의 군주인 이스펜드(Ispend)를 만나 직물과 비단을 포함한 몇 가지의 공물을 바치고 알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스펜드는 당대의 카라코윤루의 임금인 자한 샤의 배다른 형제로, 바그다드를 통치하고 있었다.
“꼭 부디 도읍인 타브리즈로 올라가 내 형님, 자한 샤를 뵙고 왕국의 번영을 축원해 주길 바라네.”
이스펜드의 도움에 힘입어 신숙주는 대한제국의 공식 사절로서 카라코윤루의 수도 타브리즈에 환영을 받으며 입성할 수 있었다.
타브리즈는 자한 샤의 안정된 치세에 힘입어 번영의 일로를 걷고 있는 부유한 도시였다.
카펫에 그림을 수놓는 직물 공예가 번성하고 있었고, 페르시아에서 흑해(黑海)로 나가는 교역로에서 무역을 중개하며 부를 쌓고 있었다.
“번영하는 도성인 것 같습니다.”
호위무관으로 신숙주의 곁을 지키고 선 육군 정위 민열이 입을 열었다.
평소에 과묵하게 묵묵히 할 일만 하는 성격인 그가 이런 심심한 감탄이라도 내뱉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아조의 황성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꽤나 치부(致富)한 도읍 같습니다. 성벽도 잘 쌓여 있고, 물산도 부족함 없이 잘 관리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학습원 교리(校理)로 이번 사행 길에 지도를 편수하기 위하여 동행한 백응규도 감상을 표시했다.
그는 타브리즈에 들어와서 조목조목 길과 풍경을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는 참으로 먼 곳까지 왔소. 지금부터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한인(韓人)으로서는 처음으로 딛는 것이니 감회가 새롭다 하지 않겠소.”
신숙주 또한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각오를 다졌다. 길가에 내놓은 향신료와 음식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러 왔다.
바그다드의 군주 이스펜드가 붙여 준 전령의 안내에 따라 이들은 곧 자한 샤의 궁정에 들어설 수 있었다.
네 개의 주탑(柱塔)의 가운데에 마치 호위를 받는 왕처럼 강건히 선 궁전은 아름다운 공예품들과 아랍 글자의 서예 장식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긴 회랑(回廊)을 따라 궁중 환관의 안내를 받아 내전에 들어서니 짙은 쌍꺼풀에 비해 얇은 입술을 가져 매우 날렵하게 생긴 한 남성이 앉아 있었다.
주위의 시중꾼도 물리고 홀로 카펫을 두텁게 깐 좌대(座臺) 위에 앉아 있는 이 남자는, 화려한 비단 터번과 술이 많은 옷을 입고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신숙주 일행이 들어서자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름 아닌 카라코윤루의 왕, 자한 샤였다.
“위대하신 왕의 존안(尊眼)을 친견합니다. 멀리 동쪽의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전하의 안부를 여쭙기 위해 미천한 몸을 사절로 보냈나이다.”
신숙주가 자한 샤가 앉아 있는 좌대 밑에 꿇어앉고, 공손히 국서를 받쳐 올리며 유창한 돌궐어(突厥語, 투르크어)로 읊조렸다.
“그대는 투르크 말이 유창하구나. 그러나 그대가 말하는 나라의 이름은 일전에 들은 바가 없다. 몽골의 일파(一派)더냐?”
친히 손을 내밀어 국서를 받은 자한 샤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신숙주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고려국(高麗國)의 후예로, 옛 이름은 조선(朝鮮)이라 하였고, 지금은 명을 물리치고 대한(大韓)이라 이름하였나이다.”
“그대들이 코레(Kore)에서 온 사신들이란 말인가? 페르시아 전역의 그대들이 가진 진귀한 산물에 대한 명성이 자자해, 산중에 있는 나에게까지 들려오더군. 나도 그 불을 틔우는 기구와 화려한 비단은 직접 보았네. 지금 내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터번도 자네 나라의 비단으로 만든 귀한 물건이지.”
자한 샤는 신숙주의 몸을 일으켜 주며 손을 부여잡았다. 정말로 그의 표정은 반가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리 와서 곁에 앉게. 그래, 나의 도성, 타브리즈를 둘러본 감상은 어떻던가?”
“번화함이 세상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어 보였나이다. 모두 전하의 성덕(聖德) 덕분이나이다.”
타브리즈가 번화한 도시이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들의 도읍과 비교해서 우수하게 손에 꼽힐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신숙주는 외교상의 예절로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관례적인 대답에도 자한 샤는 썩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그래, 먼 동쪽의 황제께서는 나와 친교를 맺고 싶어 하신다는 말이시지? 좀 더 그대들 나라의 물건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인가, 앞으로는?”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호르무즈를 거쳐서 직접 물건을 보실 필요 없이, 바스라를 통해 거래를 하고 진상을 올릴 수 있나이다. 호르무즈에서 바스라로 오는 길에 저희 함선이 뱃길을 자세히 살펴, 앞으로 뜻하신다면 상단을 보내겠나이다.”
신숙주의 말에 자한 샤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걱정하는 바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왕좌에 티무르의 아들 샤로흐의 힘을 빌려 올랐기에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대들과 직접 교역을 한다고 하면 과연 샤로흐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외람된 말씀이오나, 헤라트에 계시는 영명한 샤로흐께서는 호르무즈에 들어오는 본조(本朝)의 상단에서 바치는 공물 이외에는 큰 관심이 없으신 듯하나이다. 그분의 관심은 헤라트에 많은 건물을 세우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번영하는 문화를 물려주는데 있사옵니다. 이러한 교역에 일일이 토를 달 분이 아닌 듯싶나이다.”
실상 신숙주는 샤로흐의 얼굴은 커녕 발끝에도 다가선 적이 없었다.
호르무즈에 내리자마자 바로 바스라로 건너와 카라코윤루의 왕궁으로 직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호르무즈에 있는 나상의 주재원들은 샤로흐의 성정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정말로 샤로흐는 이 무역 거래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단지 정기적으로 상단에서 바치는 거래세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가운 이야기다. 나야말로 그대들의 물건을 보고 좀 더 쉽게 구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바스라의 항구에 그대들이 얼마든지 배를 대고 물건을 내릴 수 있도록, 바그다드에 있는 내 형제 이스펜드에게 서계를 보내 놓을 터이니 그대들이 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하라.”
“저희가 원하는 것은 단지 저희 황제 폐하와 전하 간의 변함 없을 두터운 우의뿐이나이다. 서로 먼 데에 있는 나라끼리 다툴 일이 없으니, 앞으로 친선을 도모하는 일 만이 중요하지 않겠나이까?”
“그야말로 옳은 이야기이다. 우리 선조들은 티무르와 그 자식들과 여러 차례 싸웠고, 얼마 전만 해도 건방진 사카르트벨로(Sakartvelo, 그루지야)의 알렉산데르가 세폐를 바치길 중단해 내 친히 2만의 군세를 이끌고 이를 징치(懲治)한 적이 있다. 그러나 먼 나라는 서로 다툴 일이 없으니, 오히려 우의를 쌓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대의 말이 옳다고 하지 않겠는가.”
자한 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숙주와 그 일행은 열흘에 걸쳐 자한 샤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이들 먼 곳에서 온 사절을 진심으로 환대해 주었다.
“내 비(妃)는 원래 기독교도로, 트레비존드 제국의 황녀였다. 서쪽으로 가려 했다면 내가 이를 통해 길을 주선해 보도록 하지. 건방지고 버릇없는 오스만 놈들과 부딪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독교도들의 나라를 통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서쪽으로 가다 보면 모두 기독교도들의 나라들 뿐이니 말이다.”
서쪽으로 사행(使行)을 계속하겠다는 신숙주의 말에 자한 샤는 친히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알아봐 주겠다고 나섰다.
신숙주와 일행으로서는 이 서쪽으로는 어떤 나라들이 더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우선은 움직여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신숙주는 자한 샤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조선의 사절단이 타브리즈의 성문을 나서 트레비존드로 향하는 길을 출발한 것은 가을이 저물 무렵의 일이었다.
1443년
비잔티움력(曆) 6951년 맹하(孟夏)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신숙주가 이끄는 사행단은 타브리즈에서 출발해, 소아시아 북부의 가도를 따라 흑해 남쪽에 연한 트레비존드 제국으로 향했다.
트레비존드의 황제 요안네스 4세 메가스―콤네노스(Ianns IV Megas Komnnos)는 심심한 환영연을 베풀어 이들을 맞아 주었다.
십자군 시기 비잔틴 제국이 한때 무너질 때, 그리스계의 유민들을 모아 이곳에 세워진 이 나라는 남쪽과 동쪽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이슬람교도들의 공세에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동쪽의 카라코윤루와 결혼 동맹을 통한 세폐 납입으로 화평을 유지하고 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멀리서 온 손님을 대접할 여유 정도는 있었기에, 이 이름만 황제인 초라한 왕관의 주인에게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대접을 받으며 신숙주 일행은 이곳 트레비존드에서 겨울을 났다.
신숙주는 그동안 그리스어 문헌을 수집하고 이것을 공부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와 동행한 외부의 번역관보와 주사들도 신숙주의 그리스어 공부를 도우며 그들 자신도 자료를 모으고 익히느라 시간을 쏟았다.
다시 날씨가 풀려 봄이 오자, 신숙주의 사행단은 트레비존드에서 무역을 하러 입항(入港)한 제노바 선적의 배를 타고 제노바의 식민 도시인 카파(Caffa)로 향했다.
카파는 흑해 북쪽의 크림 반도에 위치한 제노바의 식민 도시였다.
카스티야 왕국의 여행가였던 페드로 타푸르(Pedro Tafur)는 1430년대에 이 도시를 여행하고는, 동방의 노예와 물산(物産)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적었는데, 그만큼 카파는 제노바 동방 무역의 전초기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숙주 일행은 이곳의 제노바 총독과 접견을 하고, 인근의 그리스계 소국(小國)인 테오도로 공국(公國)의 알렉시오스 2세(Alexios II)를 알현한 다음에, 제노바 총독이 주선한 배를 타고 곧장 동로마제국의 심장,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신숙주가 도착한 1443년 초여름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야말로 한때 강성했던 제국의 폐허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수도는 사방으로 오스만 투르크에게 포위되어 있었고, 해운(海運)으로 들어오는 교역품 만이 이 오래된 도시의 목숨을 지탱시켜 주고 있었다.
동로마 황제, 위대한 제국의 수호자, 요안네스 8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매우 늙고 지친 모습이었다.
급증하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그는 몇 해 전 수백 년을 반목해 온 로마의 교황청의 가톨릭과 동로마 제국의 국교인 그리스 정교회 간의 교회 단일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온 적이 있었다.
1439년에 개최된 피렌체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직접 참가해 의론하기로 한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요세포스 2세와 혈혈단신 그리스로 흘러들어 온 한학정을 사승(師承)해 주며 돌봐 준, 이탈리아의 철학사조에 큰 영향을 미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을 포함한 700여 명의 수행단을 이끌고 피렌체로 갔었다.
그러나 교회의 단일화를 통해서 서방의 지원을 받으려 했던 황제의 절박한 의지와 다르게, 신학적인 정체성을 완고하게 고집한 그리스 정교회의 반대로 이 단일화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최후의 희망마저 사라져 가고 있는 느낌을 하루하루 받으며, 침식을 잊고 잠을 들지 못하는 이 황제는 신숙주의 내방을 받자마자 속사포처럼 물어 대기 시작했다.
“그대는 기독교국의 사절인가? 그대의 나라는 오스만과의 관계가 어떠한가? 이 무너져 가는 제국을 도와줄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신숙주는 그 어느 것에도 그렇노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 피골이 상접한 황제는 깊은 한숨을 토해 내고서는 다시 씁쓸한 표정으로 잠겨 들어갔다.
이곳,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더 오래 머물러 봐야 이득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신숙주의 일행이 앞으로의 행방을 논의하던 와중에 뜻밖의 소식이 그들을 찾았다.
“당신네 나라 사람이 이곳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지금 있소. 그가 당신네 나라 사람들을 지난 십수 년간 제노바 상인 페드로 알부아니를 통해 수소문했었는데, 그가 카파에 들렀다 소식을 듣고 모리아스에 있던 그자에게 전했다고 하오. 지금 그대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 있는 것을 알고, 제도(帝都)로 올라와 그를 보호하던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저택에서 그대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주기만 기다리고 있소. 그대들이 머물고 있는 것이 황궁 안이라 그가 출입을 자유로이 할 수 없으니, 꼭 소식을 듣는 대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찾아와 주었으면 한다고 하오.”
황실의 전령이 전해 준 소식은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웬 조선인이 이 만리타향에 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누군지 모를 상대방의 의지는 적극적이다 못해 절박한 듯싶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에 대한 궁금증도 들어, 신숙주는 무관 민열만 대동한 채 유명한 학자라는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 아……!”
저택 응접실로 안내를 받아 쥘부채를 흔들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어떤 초로의 동양인이 나와서 신숙주를 끌어안고서는 울음을 멈추지를 못한다.
“제국민이십니까?”
신숙주는 당혹스러워서 사내를 일으켜 세우고서는 물었다.
“나, 나는 조선 사람이오. 아, 못 가 본 지가 어언 몇 해더냐. 정말, 정말 내 생에 동향지인(同鄕之人)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곤 기대치도 않았소.”
약간은 투박한 발음이었으나 분명히 조선말임에 분명했다. 아직 국호가 바뀐 것을 모르니 조선 땅을 떠난 지도 한참 지난 듯 보였다.
“어떤 연유로 이 먼 곳까지 와 계시는 분이십니까?”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사내를 겨우 다독여 앉혀 놓고 신숙주가 물었다.
“나는 을유년(乙酉年)에 명과의 전란이 끝난 후, 조선과 티무르 간의 사관(士官)의 교환으로 이 서쪽 땅으로 오게 된 한학정이라 하오. 티무르의 궁정에 있던 중 전란에 휩쓸려 노예로 팔려 이곳까지 왔다가, 이 게미스토스 선생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학문을 공부하며 정착해 살기를 어언 서른 해가 지나가고 있소.”
한학정은 고국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들떠 의관을 정제하고 나왔다.
바로 조선에서부터 입고 온 그 옷이었다. 동로마의 풍습을 따르면서 머리를 짧게 치고, 평소에는 튜닉을 입고 지내던 그였으나, 고이 모셔 둔 한복을 오늘만큼은 입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좀먹은 옷과 올이 나간 갓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신숙주는 이 만리타향에서 조선인을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늙은 한학정의 손을 틀어잡고서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감정이 무딘 무관 민열도 그 먹먹함에 말을 잊을 정도였다.
“……그간, 그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일찍들 올 것이지. 내 생사를 알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을 선친들은 어찌할 것인고. 아……! 십 년이면 귀국할 줄 알았더니 그것이 마흔 해가 다 되어 가는구나…….”
한학정 또한 그간 살아온 세월 품어 온 향수(鄕愁)가 물밀듯이 밀려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저희는 이제 그만 귀국길을 재촉해 볼까 합니다. 어르신께서도 저희와 함께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신숙주는 한학정과 대화의 꽃을 피우느라 시간을 가는 줄 몰랐다.
며칠을 그곳에서 머물며, 그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흘러온 세월에 관한 이야기와 이곳 서역(西域)의 나라와 언어, 풍습, 그리고 종교와 삶에 대해서 두루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숙주는 한학정에게 함께 돌아가자고 물었다.
한학정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내심 궁금해 하다가 먼저 묻고야 만 것이다.
“나는 이미 나이가 환갑에 다다라 몸이 예전 같지 않소. 이곳의 여자와 결혼하여 이미 자식이 일곱이 있고, 어떤 이는 장가를 가고, 어떤 아이는 또 시집을 들었소. 저 남쪽 모레아스의 미스트라스에 가면 내가 섬기는 주군이 또 있으니, 이제는 만 리 너머 고향으로 가기에는 몸이 녹록지 않소.”
한학정은 고뇌하는 표정으로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 가기 시작했다.
“……다만 부탁이 있다면 혹여 내 막내아들은 장가를 들지도 않았고, 이곳에서 다양한 공부도 마쳐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하니, 혹여 귀국길에 동행해서 데려가 줄 수 있을까 싶소. 어차피 이곳 동로마제국은 앞으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오. 나나 내 다른 식솔들은 이미 이곳에 꾸린 삶들이 있어 쉽게 움직이지 못하지만, 막내아들이라면 조선에 돌아가 부디 끊긴 가문의 제사를 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소.”
신숙주는 한학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재촉할 수도 있었으나 신숙주는 이 한학정 곁에서 여덟 달을 더 머무르며 많은 교분을 나누었다.
그동안 이곳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온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남부 프랑스의 여러 사람들과도 교분을 맺고, 한학정의 스승 격인 나이가 아흔이 가까운 늙은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학정은 그간 공부한 그리스어 내용을 신숙주에게 아낌없이 가르쳤다.
“……이 고전어(古典語)라는 것은 시기도 옛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 때와 같아, 나라마다 방언이 제각각이고 그것이 통일되지 못했으나, 아테네라는 도읍이 가장 강성하여 그 말을 표본 삼아 나중에 이 그리스어가 전파되었을 때 코이네(Koine)라는 말로 바뀌었네. 이 코이네는 공통어(共通語)라는 말로 옮기면 좋겠구만. 이것이 이 서쪽 전역에서 널리 쓰이다가 지금에는 이 제국에서 사용하는 엘리니키(Ellinik)가 되었으니, 말 그대로 헬라인들이 사용하는 말이네.”
“그렇다면 읽는 것은 어찌 달리 해야 좋겠습니까?”
“가장 규범이 되는 말이라 하면, 우리가 시경(詩經)의 고문(古文)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치듯, 오래된 것일수록 마땅한 것이네. 당연히 이 아테네의 옛말을 가장 전범으로 삼아 그렇게 읽고 쓰도록 해야 할 것이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신숙주는 많은 것을 한학정으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점차 돌아가야 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작정도 이곳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신숙주의 일행은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이 동쪽에서 온 사절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요안네스 황제를 마지막으로 알현한 뒤, 이들은 다시 트레비존드로 가는 제노바 배에 올랐다.
한학정은 각종 그리스어, 라틴어로 적힌 고전들과 성서, 법전(法典), 문학작품 따위의 서책 600여 권을 귀국 사절 편으로 조국에 헌납했다.
그리고 그의 가계도를 그려 족보에 넣어 줄 것을 청하라 하며 함께 가는 막내아들 손에 쥐어 주었다.
막내아들의 이름은 한학정을 충실하게 돌봐 준 동로마의 대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이름을 따 게오르기오스 안노스였다. 조선식 이름으로는 한경조(韓慶造)라고 했다.
이제 스물넷인 이 청년은 조선어가 아주 짧은 편이었는데, 아버지의 고국에 간다는 말에 의욕은 아주 앞서 있었다.
거기에 요안네스 황제는 이들의 귀국 편에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선별한 수도사 한 명을 대한제국에 파견했다.
이렇게 귀국길에는 기존의 인원 7명에 더해 한경조와 알렉시오스 수사(修士)가 동행해 총 9명의 인원이 동쪽으로 향하는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오른 것이 1444년 1월의 일이고, 다시 호르무즈를 거쳐 벽란도에 입항한 것은 꼬박 1년이 지난 1445년 2월 8일의 일이었다.
외부의 주사(主事) 한 명이 홍역으로 결국 목숨을 잃고 만 것을 제외하고는 전원 무사히 제국의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신숙주는 이때의 기행을 엮어 총 28권의 책으로 펴내니, 이른바 그 유명한 『해서제국기(海西諸國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