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백천학해(百川學海)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 혹은 동로마제국은 그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 몰락을 전후하여 많은 동로마의 인문 철학자들은 그 생계를 잇고자 서방으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이렇게 이탈리아로 흘러들어 간 그리스의 학자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학문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기욤 랑부아는 자신의 저서 《15세기 이탈리아의 역사적 이해》에서 이 그리스인 철학자들에 관해 “그리스 로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천 년 유산을 고스란히 이탈리아로 이식한 이들”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 같은 시기에 동로마제국을 방문했던 신숙주를 정사(正使)로 하는 서방의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보내진 밀사단(密使團)은 이런 몰락의 풍경을 마주했을 것이다. 역사의 우연이란 것은 기묘하게도 이럴 때에 장난을 치곤 하는데, 을유전역 때 명에 들어와 있던 티무르군 과의 사절 교환으로 보내진 조선인 한학정이 이곳 동로마제국에 흘러들어 가 명망 있는 학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령의 나이로 귀국을 사절하면서, 막내아들인 한경조[Georgios Annos]를 신숙주의 귀국 편에 보낸다. 한경조와 함께 동로마 황제 요안네스 8세의 호의로 동행하게 된 정교회 수사 알렉시오스, 이 두 사람이 신숙주와 함께 15세기 대한제국에 고대 희랍 이래의 서양 인문학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최명길(崔鳴吉),
학도(學徒)를 위한 국사소편(國史小編)
1445년
가경(嘉慶) 원년 맹추(孟秋)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당금의 황상인 흥정제 이인(李仁)이 경복궁 별전(別殿)에서 숨을 거둔 것은 1444년도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고질적인 등창이 크게 도져 결국 목숨을 앗아 가고야 만 것이다.
가붕(駕崩)을 알리는 검은 깃발이 황성부중에 내걸리고, 새벽녘 황제의 혼을 초혼(招魂)하는 뿔 나팔 소리만이 적막을 깨며 궁중에 울렸다.
1415년에 부왕 목종(穆宗)을 이어 보위에 올라 대군주의 칭호를 받아들고, 종국에는 황제에 올라 흥정으로 연호를 세운 지도 어느덧 12년이 지났으니, 그 치세가 도합 서른 해였다.
조선의 5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개국조(開國祖)인 이인은 이렇게 죽어, 진종(眞宗)의 시호를 받고 양주의 형릉(衡陵)에 묻히게 되었다.
궁내부(宮內府)에서는 이내 황실의 법통을 세우기 위해 어린 황태자 이현(李泫)을 황제로 세우고 연호를 가경(嘉慶)이라 했다.
이로서 14살 어린 황제인 가경제의 치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섭정(攝政)을 빙자한 내각과 추밀원의 막료 정치가 더 공고해지는 계기였다.
신숙주 일행이 귀국하여 벽란도에 도달한 것은 바로 이 새로운 황제의 치세가 막 시작될 무렵의 일이었다.
가경 원년 2월 8일이었다. 햇수로 치면 4년간의 긴 여정이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나상을 통해 미리 들어온 전갈을 받고 이들의 귀국 사실을 알고 있던 외부대신 이예와 지금은 상공부대신에서 새 황제의 등극과 함께 재상(宰相)이 된 현도가 이들의 마중을 나왔다.
이들이 도착한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전조 고려 때에 못지않은 번성함을 누리고 있었다.
흥정 원년에 인구가 물경 3만에 다다른 이 벽란도에 예성부(禮成府)를 설치하였고, 예성부사의 휘하에 벽란도승(碧瀾渡丞)을 두어 항만 관리를 감독하고 있었다.
예성강 하구의 바다와 접하는 부분부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10리 안쪽까지는 잘 정비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는 배들은 이곳에서 가까운 송도를 근거지로 하는 송상(松商)의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상(羅商), 경상(京商), 최근 들어서는 유상(柳商)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박주며 영파로 가는 정기 연락선이 운행하기 시작한 지도 꽤 여러 해를 지나고 있었고, 항만에 들어선 상단의 창고에는 사해(四海)를 건너온 온갖 재보들이 쌓여 있었다.
오랜만에 이런 풍경을 본 신숙주도 감회가 새로울 따름이다.
遷遠見四海萬國 천원견사해만국
我朝第一有聖德 아조제일유성덕
“먼 길을 돌아 사해만국을 둘러보아도, 내 임금의 성덕(聖德)이 미치는 내 나라가 가장 아름다워라.”
벽란도 항구에 내려 시 한 줄 읊으니, 눈에서는 고인 눈물이 주르르 떨어진다.
겨우 몇 년 떨어져 있었던 고국이 이렇게도 그리웠는데, 거의 마흔 해가 지나도록 만리타향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한학정을 생각하니 그 눈물마저 사치였다.
그러한 마음은 한학정의 막내아들로, 신숙주의 귀국길에 동행해서 대한제국에 따라온 한경조도 마찬가지였다.
부친을 대신하여 동쪽으로 돌아가 뜻을 펼치겠다는 그의 굳건한 각오도 아버지의 고국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먹먹한 감정에 압도되고 말았다.
같은 하늘 아래에 놓여 있는 땅이건만, 사람들이 어찌 이다지도 오가기 힘들어 아버지는 평생을 그리워만 했던가.
한학정과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혼혈인 한경조는, 높은 콧대가 시큰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코를 훔쳤다.
“자네가 한 공의 아들이로구만.”
현도가 먼저 다가가 한경조에게 말을 걸었다. 이미 미리 도착한 서계로, 티무르에게 보내졌던 두 명의 조선인 사신 중 한 명인 한학정이 살아 있으며, 서쪽 나라에서 학업(學業)을 대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존체 높으신 분께 안부 여쭈나이다. 한가의 경조라 하나이다.”
대한제국으로 귀항하는 여러 달 동안, 꾸준히 신숙주에게 조선말을 연마받은 한경조의 솜씨는 썩 나쁘지 않았다.
재상인 현도가 다가서자, 알아서 예를 표하고 격식 있는 말로 대답한 것이다.
현도는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도닥이고서는 옆에 서 있는 수염이 부리부리하고 검은색 모자와 옷으로 몸을 둘러싼 괴인(怪人)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름 아닌 동방 정교회 수사인 알렉시오스였다.
“바, 반갑, 습니다.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아, 알렉시오스입니타.”
“서방사찰(西方寺刹) 중에 정종(正宗)의 가르침을 받은 승려입니다. 평생을 혼인하지 않고, 조용히 그들의 경전을 강구하며 일생을 신에게 바친다 합니다. 이름은 알렉시오스라 하고, 안력서(安歷西)라고 우리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조선말이 능숙하지 못한 알렉시오스를 대신해 그간 서방에 대하여 많은 공부를 하고, 그리스어도 능숙하게 쓸 줄 알게 된 신숙주가 대신해서 현도에게 설명했다.
“신숙주 자네와 이 두 분은 내 아버님께서 뵙고 싶어 하시네. 도성에 가거든 시간을 한 번 내어 계동으로 찾아와 줄 수 있겠는가?”
현도가 신숙주에게 조곤이 묻는다.
당금의 재상이 묻는 일이다. 거기에 그 아버지라 함은 지금의 대한제국이 있게 만든 일등공신인 심왕 김세훈일 것이다.
비록 은퇴하여 조용히 책이나 쓰고 있는 노인이라고는 하나, 국사의 부분 부분이 아직도 그의 손을 거쳐 나가고 있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신숙주로서는 거절한 명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 자신도 한번 뵙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반드시 그리하겠나이다.”
“우선은 준비해 둔 마차에 올라 황성부로 향하도록 합세나. 개경을 지나가는 가도가 이 예성강변까지 정비되어 하루가 채 저물기 전에 황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네.”
과연 현도의 말대로였다.
국장(國章)인 태극이 찍힌 관용 마차는, 잘 정비된 가도를 따라 개경으로 곧 접어들었고, 개경부중을 정차 없이 통과해, 지금은 계속된 공사로 해주에서 뻗어 나가 평양까지 이어진 옛 경해가도(京海街道)―지금은 서북가도(西北街道)라 이름이 바뀐―로 접어들었다.
이 가도를 따라 내려가면 문산(汶山)이 지척이고 좀 더 내려가면 고양(高陽)이었다.
잘 포장된 가도를 따라 이렇게 반나절을 가면 바로 황성부의 서문인 돈의문(敦義門)이 여행객을 맞이하게 되어 있었다.
“허어, 이거 정말 놀랍습니다.”
“오, 내 생전 이리 찬란한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늘 보는 풍경이라 황성부에 들어설 때 침착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육중한 석조 건물들 사이로 포석도로가 넓게 뻗어 있고, 아름다운 기와들 사이로 가도 정비가 섬세하게 이루어진 황성부의 풍경을 처음 본 한경조와 알렉시오스 수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숙주 등 조선인 사신들은 오랜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 회포를 풀고, 한경조와 알렉시오스 수사는 도성 서쪽에 있는 접빈관(接賓館)에 행장을 풀고 이틀을 머물렀다.
이틀 뒤에는 이들은 모두 계동저로 초대되어 세훈과 석찬(夕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일흔을 넘은 노구(老軀)이나, 세련된 태도를 보이는 이 늙은 세훈에 대해 알렉시오스 수사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전략)…….
이 늙은 귀족은 십여 년 전까지 이 제국의 섭정(攝政)으로 나라를 통치했던 고귀한 신분이라고 했다. 그의 아들이자 지금의 재상은 그가 중국에게서 다시 빼앗은 북서쪽의 넓은 땅을 봉지(封地)로 가지고 있어 심왕(瀋王)이라 불린다고 했다.
그는 체구가 크고 비록 나이를 못 이겨 허리가 굽어 가고 있었지만, 앉은 자세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말에는 품위가 있었고 거동하는 품새, 식사하는 예절, 무엇 하나도 그의 고귀함을 의심할 수 없게 했다.
거기에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비교적 정확한 그리스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우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그는 이 말을 정확히 그리스어로 이야기했다.
나와 게오르기오스 형제(한경조)뿐만이 아니라 좌중에 앉아 있던 제국인들까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의아해했다. 그리스어를 그 노왕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신숙주 공을 의심했고, 신숙주 공은 우리를 의심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어를 말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 가는 일이지만, 적어도 분위기가 무거워질 수 있는 만찬을 그가 그렇게 말함으로써 부드럽게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 늙고 현명한 왕은 그 스스로가 귀족이며, 정치가이고, 철학자이며, 연금술사였다. 그는 지난 평생 이 나라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고 현명한 책들을 써냈었다.
……(후략)…….」
알렉시오스 수사의 회고처럼, 적어도 이날의 연회는 성공적이었다.
신숙주, 한경조, 알렉시오스 수사는 서방의 언어와 정치, 문화에 대해 세훈과 많은 이야기를 늦게까지 나누었다.
세훈은 한경조의 아버지인 한학정의 사연을 듣고서는 눈시울을 훔치기도 했다.
을유전역 때의 일이니 마흔 해 전의 일이었다.
“그리되었던가……. 이곳에 왔던 티무르의 속하 셰르조드베크와 바호디르 두 사람은 다들 자리를 잡고 편히 살았건만, 우리가 보낸 이들은 한 명은 죽고, 자네 아버지는 모진 풍파를 다 겪고 대불림(大拂臨, 동로마)까지 흘러들어 갔었단 말인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한경조의 대답에 세훈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역사가 달라지면서 본의 아니게 기구한 삶을 사는 이들도 생겨났다.
한학정은 그중에서도 모진 고초를 겪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머나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학문의 일가를 쌓아 대성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집념이 투철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대 둘은 원한다면 저 서북쪽의 내 왕령지(王領地)로 가서 그곳의 일을 도와주시는 것은 어떻소? 내 보수는 섭섭지 않게 하리다. 원한다면 훈작도 줄 수 있소.”
“그렇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신 은혜 감사히 받겠습니다.”
세훈의 제안을 이 두 사람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황성부 계동저에서 몇 달을 머물며 황성부를 구경하고, 그 뒤에 심양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것은 세훈의 행적으로 기록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일이기도 했다.
1446년
가경 2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 심양 심왕부(瀋王府).
정사전역이 끝난 뒤로 심왕부가 들어선 심양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하고 있었다.
요양부와 동녕부의 기능까지 집어삼키며 가히 요동제일시(遼東第一市)라 불릴 정도였다.
한경조와 알렉시오스 수사가 이 심양에 도착한 지도 어느덧 석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어를 배워 온 신숙주와 그 휘하의 외부 소속 사절단 관리들이 외학원(外學院)에 희랍어과(希臘科)를 창설하는 것을 도운 뒤, 이곳에 교본으로 삼을 1백 권의 서적을 기증하고 심양으로 향했다.
그 사이 신숙주 일행의 서행 사절에 대한 일이 내각에 의해 공표되었고, 그간에 사실을 전연 알지 못하고 있었던 황성부중에는 신보 지상에 이런 행적이 오르며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린 황제가 이들을 보고 싶어 해 신숙주를 대동하고 한경조와 알렉시오스 수사가 알현을 하기도 했다.
특히, 한경조의 부친인 한학정의 기구한 사연은 황성순보 등에 대필(大筆)되기도 했다.
그만큼 한동안 장안을 들썩거리게 한 화제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렇게 어수선한 황성 생활을 마치고 심양으로 향한 이들이 가장 처음 한 일은 심양에 설치된 국립인 상학(庠學)과 더불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현도는 현진을 통해 이곳에 심왕부에서 직접 조성하여 관리하는 학교인 어립심양문리과대학(御立瀋陽文理科大學)을 세웠는데, 어립이라는 것은 곧 심왕이 직접 세운 학교라는 뜻이었다.
줄여서 심양대학이라 불리게 된 이 학당은 대한제국에서 최초로 대학(大學)이라는 학호를 사용한 학교였다.
현도는 이 학교를 황성부에 있는 4대 학교, 즉, 학습원, 성균관, 외학원, 경애학사 등의 관료 배출의 명문과 대등한 학교로 성장시켜 이 요동 지역 인재의 산실로 만들 계획이었다.
다만, 세훈이 현도에게 내려준 복안(腹案)에 따라 이 심양대학은 문리과대학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균관에서 가르치는 유학, 학습원에서 가르치는 기술학문, 그리고 외학원에서 가르치는 어학 등을 가급적 배제하고 순수하게 문학(文學), 즉 인문학과, 이학(理學), 즉 자연과학이라 할 수 있는 격물학을 가르치는 데에 집중했다.
외학원에 기증한 100권의 서양서를 제외한 나머지 책과 자료들을 모두 이 심양대학의 서학관(西學館)에 기증한 한경조는 곧 이곳의 학유(學諭), 즉 교수로서 서양의 사정과 전통을 몇몇 생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을 나와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에도 유학한 경력이 있는 한경조는 이곳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헌을 국문(國文)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생도들에게 기하학, 수사학, 논변술, 소묘법, 천문술 등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법부(法部)에 자문으로도 참가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법전과 옛 로마법, 그리고 현재의 동로마제국 및 서방 각국의 법제(法制)를 참조하여 기존의 대한제국이 가지고 있던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비교하는 연구도 진행하였다.
여기서 합리적인 성과가 나온다면 법부에서는 법제도의 개선에 반영할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수사는 심양 교외에 정교회당(正敎會堂)을 짓고, 여기에 북변사(北邊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 명의 단촐한 신도를 가지고 그리스 정교의 포교를 시작한 이 알렉시오스 수사는 종교의 전파보다도 오히려 심양대학에 출강하여 고전그리스철학과 로마철학, 그리고 정교회의 신학교리에 대해서 가르치는데 시간을 더욱더 보냈다.
이들 서양 학문은 지금의 서양보다 기술이 비등하거나 혹은 더 발전한 대한제국에서는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이렇게 인문학을 중심으로 먼저 흡수되기 시작했다.
다만 이것은 관료가 되기 위해 꼭 갖춰야 할 소양은 아니었고, 이렇게 심양대학에서만 처음으로 강좌를 연 것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그 내용도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학문에 치중되어 있는 편중이 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서양의 문화상이 대한제국에 전래되는 계기가 되어 훗날 폭발적으로 진행되는 문화 융합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학뿐만이 아니라, 심양의 곳곳은 급속한 성장을 체험하고 있었다.
처음 정사전역 이후 심양부가 설치되었을 때만 해도 이곳의 인구는 겨우 7천 명 남짓이었다.
그러던 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인구가 늘어나 지금은 5만 9천에 이르는 대읍(大邑)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현도와 현진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이 크게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도로를 사방으로 포석(鋪石)을 깔아 중앙의 심왕부에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설계하고, 황성과 같이 상하수도와 수빙(水빠)의 설치로 안전 위생을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심왕부의 외벽(外壁)은 아름다운 석축으로 다시 세우고, 그 앞에 광장을 만들어 시민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선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한창 개발되고 있는 심양의 도시 설계에 한경조는 적극적으로 참가해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심양의 도시 개발에 대하여 세훈으로부터 이미 전통적인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사해만방의 물산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사람들이 교통할 수 있는 대처(大處)의 초석을 다지라는 말을 들은 바 있는 현진은 이 한경조의 충언을 게을리 듣지 않았다.
조정의 재상으로서 황성부를 떠나지 못하는 형을 대신해 계영군 현진은 상업적인 수완과 재주 좋은 역량을 발휘하여 이 심양의 도성 축조에 마음껏 매진하고 있었다.
특히 가장 특이한 것이라면 여태까지 대한제국의 성읍에는 등장한 바 없던 광장의 조성이었는데, 이것은 한경조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심왕부의 정문인 건안문(建安門) 앞에는 돌로 잘 포장된 광장이 들어섰는데, 그 사방으로 계영양행의 심양 지부, 조폐청(造幣廳)의 심양 본행(本行), 심양부사(瀋陽府使)의 관저 등이 나란히 들어섰다.
이 광장의 이름은 대광장(大廣場)이라 간략히 불렸는데, 이후에는 비석광장(碑石廣場)이라 불리기도 했다. 로마 이래로 광장에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전통을 떠올린 한경조가 이른바 심양의 명물이 될 비석을 이곳 광장에 가져다 세워 놓은 것이다.
바로 다섯 해 전, 연선 순찰을 돌던 건주파견대의 기병들에 의해 발견된 압록강변의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였다.
이것이 이곳 심양의 대광장에 세워지게 된 계기는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는데, 황성부에서 심양으로 올라오던 길에 압록강변에 진귀한 유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찾아가 비문을 살펴보고 눈여겨보아 두었던 한경조가 광장의 조성이 도시 계획에 반영되자 바로 이 비문을 가져와 세우는 게 어떻겠냐고 현진을 부추겼던 것이다.
이런 것은 예전 로마 황제들이 이집트 정벌 뒤에 오벨리스크를 끌고 와 광장에 세우던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한경조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궁 앞에 그런 기괴한 비석을 세우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소? 내용을 탁본 뜬 자들이 이르기를 옛 고구려 왕의 능비(陵碑)라던데?”
현진은 처음에는 그것을 매우 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왕가의 위엄을 세워 주는 표물이 될 것입니다. 우선은 심양부중으로 끌고 와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한경조의 독촉에 현진은 결국 못 이기고 이 광개토대왕릉비를 백 리 길을 끌어와 심양에 가져다 놓았다.
다만, 이것은 결국에는 대광장과 면한 심왕부의 정문인 건안문과 직선으로 놓이지는 못하고, 광장 한쪽에 아홉 척(尺)짜리 축대를 놓고 그 위에 올려 석회로 아래를 단단히 고정시키는 형태로 세워지게 되었다.
심양부의 도시 조성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제는 평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진 서북가도가 다시 요양까지의 공사를 마쳐 심양 지척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요양에서 심양까지는 이미 황보인이 심요대도독으로 요양에 있던 시절에 가도를 정비해 두었기에, 결국에는 황성에서 출발한 서북가도가 심양에서 종착하게 되었다.
이 광개토대왕릉비 바로 아래에는 이 서북가도가 이곳에서 종지(終止)한다고 글을 새긴 가도종표(街道終標)가 놓여졌다.
이 가도가 정비되자마자 현진은 계영양행을 통해 재빨리 심양―평양 간의 역마차 운행에 뛰어들었다.
평양에서 황성까지는 이미 해주에 가도가 들어섰을 때부터 역마차를 운영해 온 이들이 많았기에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심양―평양 간이 오히려 채산이 맞을 것이었다.
물론, 드물게 황성까지 가는 역마차도 편성하기도 했다.
요양, 동녕, 건주, 의주, 안주, 평양, 해주, 예성(벽란도), 개경을 거쳐 황성까지 들어가는 이 역마차는, 심양에서 황성부까지 꼬박 닷새가 걸렸다.
그러나 이 정도 속도로 여객을 나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 장거리 운행에 투입된 역마차의 설계는 장영실이 맡았으며, 이른바 새같이 빨리 달린다 해서 비조거(飛鳥車)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여기가 완연히 북쪽의 도읍이로구만.”
“허이구, 황성부 뺨치게 늘어섰네 그려.”
“저기 건물은 양식이 기괴하구만.”
“고구려왕의 비탑(碑塔)도 세워졌다 하든데 구경 가 보는 것이 어떤가?”
심양부를 찾은 사람들은 계획적으로 잘 설계된 도시의 풍광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곤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물들과 정원이 잘 조화된 옛 도심지의 구조를 한경조가 심양에 반영해서 길을 내게 했고, 곳곳에는 나무를 심고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심양부 교외에는 넓은 숲과 양모 산업의 근간이 되는 목초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단단한 내성(內城) 외에도 목책과 방어선으로 편성한 참호진지들이 교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 내성 밖 교외에 거의 모든 인구가 살았는데, 요양으로 연결되는 남쪽으로는 직물 공업, 인쇄업, 가죽 공방, 양모 방적 공방 등이 들어서 있었고, 동녕부로 이어지는 동남쪽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물산의 교류가 원활했다.
북쪽에는 요동군의 보병대 주둔지가 들어서 있었고, 내성(內城) 안에는 각종 행정, 산업, 상업의 관련 건물이 들어서 있고 내성의 3분의 일은 심왕부가, 나머지 3분의 1은 어립심양문리과대학의 학교가 차지하고 있었다.
심양이 이때에 이르러 성경(盛京)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것도 가히 허명(虛名)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로 번성하는 도읍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447년
가경(嘉慶) 3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충녕군 이도가 공정왕의 제사를 이은 것과 그간의 공적을 치하받아 개성공(開城公)에 봉해진 것은 1447년 봄의 일이었다.
기존의 후작위(侯爵位)보다 한 단계 높은 것으로, 그야말로 황제와 공작 사이에는 심왕(瀋王)의 직위뿐이었으니 명예롭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 시기 이도가 제국의 문화 전반에 끼친 탁월한 영향은 공작의 작위로도 부족한 것이었다.
비록 세훈이 깔아 놓은 토대 위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전개시킨 것이긴 했지만, 실질상의 격물학(格物學)의 토대를 완성시키고, 이것을 물학(物學, 물리학), 화학(化學), 주학(宙學, 천문학)의 삼과(三科)로 나누고 학습원의 교육 과정에 반영시킨 것이 바로 이도였다.
또한 장영실과 함께 기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공작술(工作術)을 연구하기도 하였으며, 천문 현상의 관측과 기상의 변화를 살피는 데도 관심이 많아 장영실과 함께 측우기(測雨器)등을 만들어 실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공적은 이제는 민간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한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創製)라 할 수 있었다.
이도가 폐주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씻고 귀국할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던 이 훈민정음은, 이제 국문(國文)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민간 거래의 장부나 신보(新報)의 지면 위, 그리고 기초 학문 서적에서도 사용되고 있었다.
진정 이 국문의 탁월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신숙주가 한경조와 알렉시오스 수사의 자문을 받고, 나중에는 이도의 교열(校閱)까지 받아 펴낸 플라톤의 『국정논해(國政論解)』였다.
플라톤의 유명한 『국가(Politeia)』를 번역한 이 신숙주의 역작은 국한문의 혼용으로 쓰여졌으나, 고대 그리스의 인명 및 지명은 모두 국문(國文)으로 발음을 옮겨 와 썼다.
플라톤이 이 『국정논해』에서 말하는 사상은 이른바 뛰어난 철인(哲人), 즉 학문적 수양을 닦은 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교적 도덕과 교묘하게 결합하여 대한제국의 시중에 성황리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신숙주가 이를 통해서 알리고자 했던 것은 이른바 황제가 철인왕(哲人王)이라는 것이 아니라, 세훈이 철인으로서 나라를 이끌다 스스로 때가 되어 물러간 것처럼 강인하고 지성적으로 고매한 신료들이 나라를 이끌어 감으로써 황제의 덕이 빛나고 나라가 태평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숙주는 조심스레 이를 에둘러 주해(註解)에서까지 밝혀 가며 『국정논해』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의도를 배제하고 보면, 이 『국정논해』는 그 자체로도 이미 탁월한 번역서였다.
아름다운 국한문혼서의 미문(美文)으로 번역된 이 글은 플라톤이 썼던 그 내용을 빠짐없이 전달하는 동시에, 국어(國語)의 저변까지 넓혔다.
이것은 신숙주 그 자신이 탁월한 학자였고, 이도, 한경조 등을 비롯한 여러 뛰어난 인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화(中華)만 있고, 사방이 외이(外夷)들로 가득 차 사해에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것이네. 이렇게 태서(泰西)의 전적(典籍)을 옮겨 보니 이 또한 고매한 생각을 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진정 유학을 사람을 위한 학문으로 끌어 내려야 한다면 이런 태서의 학문을 수용하는 것 또한 마다할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이도는 번역이 완료된 『국정논해』의 원고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서행사절의 공적을 인정받아 외부에서도 높은 직급인 종3품이자, 칙임관(勅任官)인 협판(協辦)의 자리에까지 오른 신숙주였지만, 이러한 학문적 활동을 전연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이도는 그러한 그릇을 아꼈고, 이와 함께 한림원 출신의 정인지 등이 합세하여 이도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교류하고 있었다.
이때, 이도는 이미 한림원의 대제학(大提學)을 십수 년간 지내고, 문부대신도 한차례 역임한 뒤, 한림원을 졸업하고 바로 관직에 출사하지 않고 나라를 위한 공부를 더 하길 원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집현전(集賢殿)의 전관(殿官)으로 머물며 이런 고급 관료이자 뛰어난 학자들의 학문을 지도 편달해 주고 있었다.
“확실히 원방(遠邦)의 말을 옮기다 보니 어음이 맞지 않은 한자를 빌려 쓰는 것보다 음이라도 조금 사리에 맞게 밝혀 적을 수 있는 국문이 더 적합한 듯 보입니다.”
한림원을 나와 문부에서 관료 생활을 하다 지금은 한림원 시독학사(侍讀學士)로 있는 정인지가 이도에게 읊조렸다.
이도는 신숙주와 정인지 등으로 사람을 꾸린 다음에 플라톤의 나머지 저작을 옮기는 일을 시작했다.
신숙주의 번역으로 시작된 관심이었지만 이제는 이도 그 자신이 만년(晩年)에 이르자 시간을 보내기 좋은 취미처럼 된 것이다.
“국문(國文)을 비록 내가 고안하였지만, 이것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한적(漢籍)의 진서(眞書) 어음들을 정확히 나랏말로 들여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랏말이라는 것은 우리의 입말에 맞추어진 것으로, 일전 신숙주가 옮겼던 『국정논해』때도 그랬듯이 우리 입에 닿지 않는 어음도 먼 나라에는 부지기수로 많느니라. 그러니 국문이 모든 음성을 판별해 적을 수 없고, 다만, 한문보다는 그에 가깝게 적을 수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니, 지나친 맹신은 경계해야 하느니라.”
이도 자신이 고안한 국문에 대한 칭찬임에도, 이 학문에 심취한 강고한 선비는 자신의 업적마저도 비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의 좋은 관료란 바로 잘 교육받은 사람이었다. 이러다 보니 학교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학생은 바로 과거를 치를 자격이 주어졌고, 이로서 전시를 치러 임용을 받게 된 관료들이 공부를 하러 오는 한림원(翰林院)이야말로 최고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한림원을 나와 정부 요직에 종사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학문의 연마를 위해 집현전(集賢殿)에 모여든 학자 관료들은 그중에서도 대한제국의 지성의 집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집단을 이끄는 이도이니 만큼 그 학문적 자세가 여러모로 선후학(先後學)들에게 귀감이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때문에 이도는 더욱이 주관적이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을 갈고닦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후학들에게도 그런 태도를 견지하도록 훈련시켰다.
이렇게 15세기 대한제국의 학문사(學文史)에 세훈에 이어 그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이도는, 이제 말년을 각종 전적을 두루 살피고 주석을 달고, 혹은 새롭게 들어온 고전 그리스 문헌의 적합한 번역을 추진하는 일에 매달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른바 집현전 성현들의 전설적인 시대를 그의 손으로 열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1447년
가경(嘉慶) 3년 계하(季夏)
대한제국 황성부(皇城府).
건강이 좋지 않아 은적(隱迹)의 생활을 하던 세훈이 결국 숨을 거둔 것은 1447년, 가경 3년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일흔셋의 나이였다.
1399년, 탐라에 표착해 탐라의 호족들과 결탁해 나라를 반정(反正)으로 뒤엎고, 명과 일본과의 전란을 승전으로 이끌고, 국제(國制)를 개혁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겨 격물학(格物學)의 토대를 닦았다.
상공(商工)의 진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문인과 기술이 있는 자를 우대하여 나라의 발전에 매진하도록 함으로써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거듭나는데 수많은 기여를 했다.
섭정공의 지위에서 시작해 심왕(瀋王)의 작위를 받고, 후일에는 의정부 의정을 거쳐 내각의 재상(宰相)을 역임하며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데 밤낮으로 매진해 왔다.
건강의 악화로 은퇴한 뒤에는 손자인 서윤의 도움을 받아 글을 쓰는데 매진하여, 말년에만 총 24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것은 주학(宙學, 천문학), 화학, 물학(物學), 산학(算學), 성리학, 국정 및 외교에 관한 내용을 두루 포함하는 저작으로, 그간의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세훈의 인생이 집적되어 있는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모두 세훈의 사후에 맏이 현도의 손에 의해 『계동유고집(桂洞遺誥集)』이라는 문집으로 묶여 나오게 되었다.
황제에 의해 시호가 성명(成明)이 내려져 성명왕(成明王)으로 위패가 심양에 모셔지게 되었다. 또한 제국이 되기 전 종묘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태묘(太廟)에도 문성(文聖)으로 위패가 모셔졌다.
황제는 3주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이 뛰어난 명신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심왕의 왕작(王爵)을 그 맏이이자 당대 내각의 재상인 현도가 습봉(襲封)하는 것을 허락했다.
모든 문무 대신들이 위패에 배향하고 고인의 망로(亡路)가 평안하기를 기원했으며, 황성순보를 비롯한 저잣거리의 신보지상에서는 고인을 추념(追念)하는 글을 앞다투어 실었다.
세훈이 묻힐 능역(陵域)이 심양 교외의 심왕가의 종묘(宗廟) 인근에 조성되었고, 성명왕릉의 패호(牌號)가 그 숙문(肅門)에 걸렸다.
장지를 다지고 고인을 묻으니, 장례일이 1447년 음력 7월 5일이었다.
“이렇게 가셨구나……!”
현도의 손을 붙잡고 쓸쓸한 표정으로 울음을 삼키며 최해산이 중얼거렸다.
당시 폐주 이방원의 명령으로 세훈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탐라에 들어갔다가, 도리어 세훈에게 발탁되어 공조(工曹)에서 공부(工部), 그리고 다시 상공부(商工部)로 바뀌는 세월 속에서도 집념 있게 그 수장으로 있으며 세훈이 주도한 국가 시책을 현실로 바꿔 온 것이 바로 그였다.
“탐라의 구신(舊臣)들 중 남은 것은 나밖에 없구나. 고봉지 숙부께서도 돌아가셨고, 양은계도 작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이제 세월이 천연히 바뀌었구나.”
세훈의 처남이자, 현도의 외삼촌이 되는 고상온도 그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나이도 이제 여든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이곳 심양까지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임에도 부득불 고집을 부려 세훈의 장지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오고 가는 와중에도 한쪽에서 자리를 지키며 이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아낌없이 대어 주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다름 아닌 나상의 상주 오상복이었다.
그 또한 세훈에게서 상업을 배워 그의 지원을 업고 나상이라는 거대 상단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도 여든줄에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설마 세훈이 먼저 가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듯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간 많은 은혜를 입었나이다.”
조용히 읊조려 보지만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최해산, 고상온, 오상복 등 탐라에서부터 함께한 인물들을 제외하고도 세훈과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이들은 많았다.
갑신반정 당시 세훈의 진영에 투항해 을유전역 당시 공을 세운 조사의의 아들로, 영흥공(永興公)의 작위를 이어받은 조홍, 장수백(長水伯) 황희, 여산후(礪山侯) 송거신 등이 만장이 휘날리는 장막 아래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학습원 대제학(大提學) 강희수, 개성공(開城公) 이도, 내부상서대신 부평백(富平伯) 김종서 등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 모두 지난 수십 년간 세훈이 펼친 정책에 따라 국가의 요직에 들어서 봉공(奉公)한 이들이었다.
심양 벌판에 조성된 능묘에 세훈의 관이 들어가고 심왕가의 문장이 된 목화문(木花紋)이 그 관 위에 덮여졌다.
방직기를 만들어 민생을 돕고자 했던 세훈의 공적을 기려 만들어진 문장이었다.
그 위로 흙이 덮이고 장지의 조성이 끝나자 쓸쓸한 북쪽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밤이 찾아왔다.
“……네 아버지께서 평생을 나와 함께하자고 하시더니, 이리도 먼저 가 버리시는구나.”
세훈의 죽음 뒤에 부쩍 늙어 보이는 고상희가 말을 잇지 못했다.
현도는 어머니를 꼭 안아 다독이고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능묘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세훈의 그늘은 참 컸다.
걸출한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맏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온 현진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현도였다.
그렇게 이제는 내각의 수반인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라서 아버지의 시책을 이어서 나가는 데에 심려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마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떠나간 아버지가 내심 야속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계동저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무릎 맡에서 재롱을 피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자신의 나이도 불혹을 넘어가고 있었다.
“위패를 챙겨 돌아가도록 하자. 상청(喪廳)을 차리고 곡을 해야지, 이제.”
어머니 고상희의 말에 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바뀌어 3년 상을 치르지 않게 된 지도 오래였지만, 적어도 몇 주는 자식 된 도리로서 상청에 들어가 곡을 해야 했다.
“또 한 세월이 저물었구나.”
이들 모자를 뒤에서 지켜보던 고상온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쓸쓸한 바람이 요동 벌판을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