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가경성세(嘉慶成歲)
「예악(禮樂)이 백 년 만에 일어나니 대저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며, 천자께서 구퇴례(九堆禮)를 마치니 아름다운 의식을 다시 보게 되었도다. 천지(天地)가 함께 기뻐하고 신민(臣民)이 서로 즐거워하니, 삼가 생각하건데,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聖人)으로서 건부(乾符)를 잡고 왕위에 오르셨나니. 검소하고 부지런하심은 하우씨(夏禹氏)의 구혁에 힘씀을 체득하시고, 음탕함이 없고 안일함이 없으심은 주문왕(周文王)의 강전(康田)을 본받았노라. 바야흐로 태평 무사함을 누리는데 오히려 광전(曠典)을 거행하지 아니함을 염려하였네.
○禮樂百年而興, 蓋有待於今日. 諸侯九推而舍, 幸復覩其縟儀. 天地同懽, 臣民胥悅. 恭惟主上殿下, 挺天縱之聖, 握乾符而乘. 克儉克勤, 體夏禹之溝洫; 無淫無逸, 卽周文之康田. 方撫太平之無爲, 尙慮曠典之未擧.」
―기로가요전(耆老歌謠典) 중, 《찬태평가(贊太平歌)》
1452년
가경(嘉慶) 8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충청도 공주부(公州府).
모도이(毛道二)는 원래 충청도 논산에서 향반의 땅을 부쳐 먹고 살던 소작농이었다.
그가 태어난 때는 매우 어수선한 시기로, 탐라에서 세훈이 충청도를 거쳐 한성을 치러 올라갈 무렵이었다.
나라 안이 세 갈래로 쪼개져 내전이 시작되고, 곧이어 명나라에서 침공을 해 와 민생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성도 없는 그저 만석(萬石)이라는 이름을 가진 평범한 농민이었는데, 당시 충청도 일대에서 공주와 논산에 걸쳐 수만 정보의 땅을 가지고 있던 대지주인 성수일(成秀壹)에게 소작을 받아 근근이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 보아도 손에 들어오는 벼나락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흰 쌀은 커녕 매일같이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모도이도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를 거들어 종일 농사일에 매달려 배움이 일천했다.
대단한 공부는 물론이거니와 글자도 익히지 못하는 것이 그를 비롯한 다른 소작농들의 뻔한 삶의 굴레였다.
아침 일찍 성수일 일가가 소유해 빌려 주는 소의 여물을 먹이고 억지로 달래서 데리고 나와 하루 종일 논을 돌보고, 잡초를 뽑고, 그저 비만 오기를 바라며 고생하기를 반복하는 생활이었다.
이앙법이라는 것이 보급되어서 처음에는 소출이 좋아져서 여유가 조금 생겼지만, 이내 소작료가 올랐다. 소출이 더 나오는 만큼 더 거두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와중에 모도이는 징집되어 군역을 지러 공주의 진위대로 입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 일이 눈에 밟히기 그지없었지만 나라에서 내린 명령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군대에서의 생활은 그래도 그나마 나았다. 밥을 굶을 일은 없었고, 그렇게 2년을 지내다 나가는 것은 특별히 고될 것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변란이 터졌다.
성수일을 비롯한 공주 일대의 사대부들이 역심을 품고 근왕(勤王)한답시고 공주성을 점령하고 역모를 꾀한 것이다.
그때 공주 성내가 아닌 근교의 한밭[大田]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진위대의 병력은 곧장 공주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모도이도 그때 처음으로 보총으로 사람을 쏘았다. 그의 총탄에 맞은 것은 다름 아닌 하늘같이 떠받들던 성수일의 아들이었다.
모도이의 삶은 그때부터 변화가 찾아왔다.
성수일의 일족이 멸절되면서 그가 부치던 땅은 소작을 부치던 농민들에게 나누어졌다. 나라에서는 이 일대에 호구조사를 엄정히 하고 불합리한 조치가 없도록 잘 선처했다.
이때 아버지 만석도 모(毛)씨라는 성을 만들고 장계에 등록해 부치던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이제 나라에 내는 세금만 잘 바치면 되니 먹고 사는 데에 시름이 좀 덜어져 갔다.
공주 변란을 진압하는 데에 참여한 공로로 모도이는 상등졸(上等卒)로 진급하여 군역을 일찍 덜 수 있었고, 전역 후에는 바로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하다가 공주 성내로 들어가 호상(湖商)의 사환 노릇을 시작했다.
사환이래 봐야, 사실상 물건을 지고 나르는 일을 하는 것으로서 글줄도 모르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충청도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한창 성장을 거듭하던 호상에서 지불하는 급료는 모도이가 혼례를 치를 자금을 만들 정도로는 충분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농군의 딸과 결혼한 모도이는 공주성 밖의 작은 오두막을 사서 자신은 성 내로 들어가 호상의 사환 노릇을 계속하고, 아내는 근처의 밭을 부쳐 먹으며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제들이 자기 땅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 부양할 가족이 많지 않고, 자기 식구의 입만 건사하면 되니 그다지 모자람을 느끼지 못하는 삶이었다.
그렇게 아들딸을 보고 나이를 먹어 갈 무렵에 갑자기 국문(國文)이라는 것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왕실 종친인 어떤 대학사(大學士)가 고안했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도 모도이는 처음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한자라고는 제 이름밖에 적을 줄 모르는 모도이로서는 글이라는 것은 어렵게 느껴지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평안도 일대에서 시작된 상인들 사이의 거래 수결을 국문으로 적는 관행이 이내 충청도의 호상에도 영향을 미쳐 보다 거래의 용이함을 위해 국문이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호상에서 일을 하는 모도이다 보니 이 글의 간편함을 알고 어렵지 않게 배워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렵지 않은 공부였지만 우선 글을 알게 되고 나니 대우가 달라졌다.
비록 한자는 볼 줄 모르고 아는 것은 국문뿐이나, 짐을 져 나르고 심부름을 해 주는 일꾼에서 장부 관리를 하는 것을 돕는 직책으로 올라선 것이다.
“열심히 해 보게. 하다 보면 호상의 물건을 도급받아 자네 가게를 차리는 것도 꿈이 아니야.”
장부의 회계를 담당하던 늙수그레한 상인이 모도이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모도이는 어쩐지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평생 소작이나 하다가 땡볕에 말라 죽겠거니 생각했겠지만, 이렇게 여유는 없지만 부족함 없이 자리를 잡고 살다 보니 세상이 조금 좋아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살다 보면 기회가 오게 마련이었다.
각 지역을 거점으로 한 이런 대형 상단들은 상단원들이 도제 생활을 길게 하고, 어느 정도 실력이 갖추어지면 상단에서 크게 들여 쓰거나 혹은 자본을 대 주어 가게를 열도록 도와주곤 하는 제도가 있었다.
모도이는 잠을 줄여 가며 열심히 일에 매진했다.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래 봐야, 장부에 적힌 제목을 보고 분류를 해 놓는다던가, 중요한 서류가 함부로 돌아다니다 분실되지 않게 단속을 하는 등의 대단치는 않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모도이는 마냥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돌아가는 방법이나 서식을 작성하는 요령 따위를 익히려고 애를 썼다.
모도이가 이렇게 호상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일을 하는 동안, 자녀들은 점차 자라 나갔다.
수완 있게 윗사람에게 붙임도 잘해 가며 요령을 익혀 수결을 작성하는 일까지 맡게 된 모도이는, 충분한 급료로 자녀들을 부양할 능력이 충분히 되었다.
자녀가 넷이니 다른 양민들에 비추어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모도이는 자녀들의 교육에 아낌없이 매진하였다.
그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사는 수완이나 국문을 쓰고 읽는 법 정도가 다였지만, 그 자신이 아버지 만석에게 배운 것이 소 모는 법이나 밭 매는 법이 다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자식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기만 했다.
어느덧 나이가 마흔에 접어든 모도이는 드디어 상단의 지원을 받아 공주 성내에 가게를 하나 가질 수 있었다. 모도이가 처음 시작한 것은 서책(書冊)을 파는 가게였다.
본시라면 사 볼 사람도 적고, 잘 찍어 봐야 목판인쇄였기에 책 값 자체도 비싸 장사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쇄술이 급격히 보급되기 시작하자 모도이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국문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국문으로 쓰여진 소설(小說) 따위가 찍혀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을 싼값에 보급하는 것이 모도이가 하는 장사였다.
거기에 신보(新報)라는 놈이 황성에서부터 내려와 공주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고 싶은 사람은 수태로 있다. 그러나 입소문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없잖아 있는 것이다.
모도이는 누구보다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
당장 자기부터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소 모는 일에만 인생을 허비해 오지 않았던가.
모도이는 그간 모아 둔 돈으로 인쇄기를 하나 불하받아서는 황성에서 내려오는 제국신보(帝國新報)의 내용에다가 충청도 일대의 소식을 조금 더 추려 넣어 공주제국신보(公州帝國新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돈은 급격히 모였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책과 신보가 팔리는 값이 고스란히 모도이의 주머니로 들어왔다.
처음 가게를 내고 빚진 돈과 인쇄기를 불하받기 위해 추가로 빌린 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갚을 수 있었다.
모도이가 성장하고 있는 동안 호상도 한 발짝 더 성장의 발판을 다지고 있었다.
그간 벼려 왔던 원양 무역에 나서기 위해 때마침 조선소를 완성해 배를 만들기 시작한 함주의 계영양행에 접선해 원양을 다니는 교관선 열 척을 발주한 것이다.
모도이는 이제 자기 자본이 조금 모였으니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이 배를 만드는 데에 보태 나중에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투자했다.
도박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호상의 원양 상단은 상남을 나서 남양의 군도를 돌며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그 수익이 고스란히 배를 만드는 데 투자한 모도이의 지분만큼 계산되어 모도이에게 돌아왔다.
여유가 되니 자녀들의 공부도 성과를 보기 시작했다.
맏이 승호(昇浩)는 공주상학(公州庠學)을 마치고 황성부에 유학을 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가서 대성한다면 아들이 관료가 되어 등청하는 것도 꿈만은 아니었다.
모도이는 그저 요즘 같은 세월이 계속되라고 매일같이 삼신에게 빌고 있다.
같은 세월을 살아도 그만큼 밑바닥에서 성공해 올라온 사람들이 흔치는 않겠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1452년
가경(嘉慶) 8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황성부.
서윤의 나이도 올해로 서른이었다.
그간 할아버지 세훈의 병수발을 들고 집필을 돕느라 관직에 출사하는 것을 미루어 왔으나 세훈이 병사한 이후 상을 치르고 나서 한림원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한림원을 나오고 나서도 딱히 서윤은 관직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심왕(瀋王)의 자리를 이어야 할 세자(世子)라는 신분도 무겁기 짝이 없는데, 황제를 봉공하고 제국에 선정을 펴기 위해 관도(官途)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성정에 맞지 않았다.
서윤에게는 그저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한림원을 졸업한 후 혼인을 핑계로 서윤은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그다지 여자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윤이기에 적당히 좋은 자리의 중매혼을 받아들여 혼사를 치렀다.
상대는 내부대신 김종서의 맏손녀였다.
“나는 관직에 올라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거나 하는 데는 욕심이 없소.”
혼례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머리맡에 나란히 누운 부인에게 서윤은 그렇게 말했다.
물론 부족함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관직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저 또한 내조하는 것만을 생각할 뿐, 서방님 하시는 일에 대해 큰 욕심을 지니고 있지 않사옵니다. 그저 뜻하는 바대로 행하시옵소서.”
다행히도 아내 김연(金姸)은 현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심왕가에 시집온 뒤로, 시할머니 고상희가 관리하던 경애학사의 일을 거들며 그녀 자신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녀자가 학문을 하는 일은 드물었기에 서윤도 아내 김연의 학문이 가진 깊이에 적잖이 놀랐다.
아내를 보고 자극을 받은 서윤도 공부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집현전에 들어가 개성공 이도에게 사사받기 시작했다.
같은 문하에 있는 조정의 관료이자 동시에 집현전의 학사(學士)인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成三問) 등과 어울리며 학문을 깊게 하는 데에 주력한 것이다.
서윤은 고문(古文) 전적(典籍)에서부터 학습원 재학 시절부터 배워 온 격물학(格物學), 그리고 요즈음 한창 집현전에서 번역이 앞다투어 이루어지며 흥미를 유발하는 고대 희랍(希臘)의 사상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탐독하고, 또 읽고, 공부하기를 계속했다.
“자네는 언젠가 심왕의 작위를 물려받아 일개의 번국(藩國)을 다스리게 될 것인데,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익히기보다 이렇게 잡학(雜學)에 매진하고 있으니 부친께서 심려가 많으시겠네. 허허.”
서윤의 학문을 모자라지 않게 지도 편달해 주던 이도가 어느날 지나가는 소리로 그렇게 말하고서는 껄껄 웃었다.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말이었다.
이도 자신 또한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아버지 폐주 이방원 때문이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은 그 자신이 의연하게 권력과 거리를 두고 학문에 매진해 온 탓이기도 했다.
같은 집현전의 동숙(同宿)이라 하더라도 외부에 등청하여 관료로 일하며 틈틈이 집현전에 들르는 신숙주 같은 학자 관료와 아주 집현전에 틀어박혀 살고 있는 서윤 같은 이의 생활은 전혀 판이한 것이었다.
집에 아내를 두고서도 거의 집안 출입을 하지 않고, 집현전 한 켠에 있는 숙사(塾舍)에 간단한 요침만 가져다 놓고 일어나자마자 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해, 사방이 어두컴컴해지고 나서야 책을 놓고 자리에 드는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서윤은 정말로 이런 생활이 만족스럽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도 한동안 아무도 그에게 그런 생활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집현전의 학사도 엄연히 정5품의 관리이니, 관직에 출사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현도는 그런 것을 가만히 좌시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현도 자신부터 아버지 세훈의 족적을 쫓기 위해 평생을 관직에 머무르며 정사(政事)에 매진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만큼 서윤도 그 길을 제대로 쫓아가 주길 바랐던 것이다.
“집현전에서 마른 책이나 파고 있을 성싶거든 심양으로 올라가 심왕세자로서 왕부(王府)를 돌보는 일을 하도록 하여라.”
그렇게 덜컥 통보가 날아온 뒤 내려온 것이 심요대도독의 관직이었다.
내각(內閣)에서 심의가 이루어진 뒤 황제의 재가가 난 사안이니 뭐라고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친정은 커녕 현도가 주도하는 내각과 추밀원의 그늘 아래에서 꼼짝도 못하는 젊은 황제이니 만큼 이에 따른 반발도 없었다.
서윤으로서는 심왕세자로서 심왕부를 돌봐야 하는 데다가, 심요대도독의 자리까지 주어졌으니 그야말로 갑작스레 요동천리의 정무를 돌봐야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뜻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어쩔 수 없이 부친의 의지에 굴복해 심양으로 내려온 서윤은 그간의 서치(書癡)로 지내던 삶을 일단은 접어 두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심양의 행정은 자리가 잡힌 뒤였기에 숙부인 현진도 심양에는 거의 행차하지 않고, 함주에 머무르며 계영양행의 업무에 주력하고 있었다.
때문에 서윤은 보좌해 줄 관리를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도 지척에는 그런 관리로 등용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심양문리과대학의 학생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황성의 4대 학당에 비해 중앙 관직에 출사할 기회가 적은 이들은 심왕부나 심요도독부의 관직에 등용되기를 바라 마지않고 있었고, 서윤은 이들을 일일이 만나 본 뒤 재능이 있는 이들을 발탁해 요직에 앉혔다.
서윤은 우선 일시적으로 심왕부와 심요도독부의 기능을 통합하여 요동행정서(遼東行政署)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이 행정서를 중심으로 심양과 요양등의 성읍뿐만 아니라 요동 역의 전반적인 구조 혁에 앞장섰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우선 막료(幕僚)로 심양대학에서 학유를 하며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는 한경조를 불러들여 자신을 보좌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집현전에서 같이 동숙하며 고로를 마지 않았던 정인지와 성삼문, 두 사람도 황성에서 불러들여 관직을 맡겼다.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중앙 관직에는 출사할 뜻을 보이지 않던 두 사람이었으나, 비교적 자유롭게 뜻하는 바를 실천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요동의 관직은 쉽게 수락해 주었다.
이렇게 모여든 서윤 이하 관료들이 처음 시작한 일은 요동의 산업을 정밀하게 배치하는 일이었다.
원래 인구에 비해 땅이 넓고, 농경보다는 목축에 유리한 요동의 환경은 아직까지 농업이 절대적인 생산 우위를 점하고 있는 본토의 경제 상황보다는 좀 더 다른 방향의 급진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심양을 주위로 하여 양의 목축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양모는 심양의 방적장에서 모직(毛織)으로 만들어져 내지를 비롯한 바다 밖까지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북쪽에 위치해 겨울이 길고 공기가 찬 곳이라 벼농사가 잘되지 않으니 이런 목축업의 규모를 늘리는 것이 보다 현명한 방책일 것입니다.”
성삼문은 근본적으로 농업이 안 된다면 목축으로 경제를 지탱해야 한다는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근본적인 농업 제일의 사고를 아직 크게 벗어나지 못한 그의 의견은 시대적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요동의 현실에는 적합한 부분이 분명히 존재했다.
“학문을 장려하고 제도의 개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구가 유입되어 증대되도록 해야 합니다. 명나라에서 제국의 본령(本領)으로 이어지는 요지에 위치한 이점을 잘 살려서, 늘어나는 인구를 상업으로 유입시키고, 각처에서 생산되는 상품을 매매하고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요동은 북쪽으로 척식(拓植)하는 정책에 있어서 가장 이점이 있는 곳이니, 여진족 등의 이적(夷狄)들을 잘 교화해서 선정을 펼쳐야 할 것이나이다.”
정인지의 생각은 성삼문과는 달랐다. 그는 국가의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농축산의 생산량이 아니라, 재화의 생산량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농질이 좋지 못한 이곳 요동에서는 더더욱 재화를 긁어모아 부를 증대시킬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통로를 정비하면 사람의 이동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움직이게 되면 재화가 모여들게 되나이다. 사람이 먹고 입을 것을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고, 먹고 입을 것이 갖추어 지면 배우고 즐길 것도 중요해지나이다. 희랍의 대학자 소크라테스가 이르기를, 중용(中庸)이 중요하다고 하였사온대, 중용이라 함은 사방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가장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나이다. 옛 중국에서도 이 중용(中庸)이 치세의 모본(母本)이라 하여 가장 아름다이 여겨졌었으니, 동서를 막론하고 이 중용의 이치를 벗어나면 정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나이다. 하나의 길을 택해 고집스레 가시는 것보다는 두루 성덕이 미치도록 정사를 펼치시는 것이 나을 줄 아뢰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윤의 마음에 가장 든 의견은 한경조의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대학과 파도바대학에서 공부를 했었고, 또 이미 동로마제국에 있던 시기에 아버지 한학정으로부터 동양의 고전 또한 깊이 배운 한경조는, 가장 균형잡히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윤은 그런 그의 생각과 사고의 깊이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학사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풍경은 다른 곳에서는 조금 낯선 것이었다.
황성에서도 적절한 공부를 마친 이 만이 관료로 등용될 수 있었지만, 서윤이 심양에 온 이후로 이곳에 설치한 요동행정서의 관료들은 거의가 학자를 겸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요동행정서에서 관료로 일한다는 것은 곧 어립심양문리과대학에 학유로서 출강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학자들의 정치에 의해 요동에서는 몇 가지의 정책이 시행되어 성과를 보기 시작했다.
심양부와 요양부, 동녕부을 거쳐 의주로 들어가는 가도를 우선 동녕부에서 건주부까지 연장하였고, 이런 대맥(大脈)을 줄기로 하여 가지 치듯이 각 군치(郡置)로 뻗어 나가게 했다.
북쪽으로는 몽골의 일파인 오이라트와 접한 개원군에서 남쪽으로는 요동반도 끝에 위치한 여순군까지, 동쪽으로는 건주부에서 서쪽으로는 산해관까지, 이런 가도가 거미줄 치듯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정비되어지게 된 것이다.
예산을 문제로 본토에서는 막상 지연되고 있는 이 가도 정비가 중앙 정부에서 군비를 부담함으로 인해 재정의 여유가 생긴 요동에서는 재빨리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목축업에서 방직, 방적의 산업, 그리고 다시 심양대학의 물학부(物學部)에서 고안한 수차를 이용한 동력 산업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체계화시켰다.
방직 공장과 방적 공장의 동력원은 이내 사람에서 수차를 이용한 자연 동력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곧 요동의 고질적인 인력난을 뛰어넘어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한경조의 제안에 의해 요양에 은행서(銀行署)를 세우고, 심양과 개원에서 캐낸 은광의 순은을 이곳에 비축하여 요동폐(遼東幣)라 불리는 독자적인 화폐를 찍어 내 요동 지역에 유통시켰다.
요동 지역의 각 부와 군에 설치된 은행서의 지청(支廳)을 통해서 일괄적인 예금 및 출금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는데, 한경조가 동로마에서 제노바나 베네치아 상인들의 행하는 것을 보아 두었다가 이곳에 접목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요동폐로 10냥의 은화를 심양에서 예치한다면 그 전표를 가지고 여순군의 은행서 지청에 가서 10냥의 한도 내에서 은화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제도의 확충은 자연스럽게 상업의 발전을 부추겼고, 동녕부를 중심으로 중개무역이 성행하던 요동의 상계는 좀 더 물자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각종 상업의 집적이 발생하면서 그 외연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심양과 요양을 비롯한 심요 지역은 이제, 제국의 변경이 아니라 또 하나의 핵심 지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453년
가경(嘉慶) 9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황성부.
경복궁 앞의 관청가, 즉, 의정로(議政路)를 따라 내려오면 광통교 바로 남쪽에 황성부청(皇城府廳)이 있고, 그 서쪽으로 들어서는 길이 바로 정동(貞洞)이었다.
이 정동에는 한명강화장정에 따라 황성부에 주재하게 된 명나라 주재정사(駐在正使)의 공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1453년 당시의 명나라의 주재정사는 산동포정사를 역임한 왕기흠(王企欽)이 부임해 와 있었다.
왕기흠은 아직도 대한제국의 황성부에 들어섰을 때 느낀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천자의 도읍인 북경(北京)이 천하에서 가장 빼어난 도시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물론 그 아름다움으로 치자면 소주(蘇州)와 천주(泉州)에 비길 곳이 없었고, 번화함이라면 남경(南京)이나 개봉(開封)도 대단했지만, 북경에는 천자를 위해 조성된 황읍(皇邑)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웅장한 자금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겹겹의 정숙한 대궐(大闕)들은 감히 아무렇게나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천하의 질서를 옮겨 놓은 축도(縮圖)요, 신성한 천자가 기거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곧 대한제국의 국경 내로 들어오면서부터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부임할 때 거쳐 온 심양 일대는 한창 개척이 이루어지며 성장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잘 정비된 목축지를 가로지르는 가도를 따라 심양부중에 들어서면 사방으로 포장된 도로가 잘 뻗어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수빙(水泵)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물을 따로 길어 오지 않고도 마당에서 바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에 가까웠다.
그러나 심양은 심양일 뿐이었다. 요양이나 동녕 모두 번화한 도시였으나, 그 자체는 명나라의 지방 도시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이 요동 지역의 성읍들은 얼마 전까지 명나라의 국속(國屬)이기는 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이 심요 지방으로부터 황성까지는 삼천 리 길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동안 축조된 가도를 따라 역마차가 운행하고 있었고, 외부(外部)에서 수배해 빌려 준 역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가는 길은 지체됨이 없었다.
밤낮으로 달려 동녕부에서 출발한 마차는 다음 날 의주에 다다랐고, 그 다음 날에는 안주, 그 다음 날은 평양, 하는 식으로 채 이레가 되지 않아 황성부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런 길이 나라의 곳곳에 정비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은 지금 심요에서 황성까지 달리신 바로 이 길과 여기서 인천으로 가는 길, 그리고 공주를 지나 목포로 가는 길, 그리고 문경의 새재를 거쳐 대구까지 가는 길만이 정비되어 있습니다. 이런 토목 사업은 나라의 재정이 많이 들어 쉽지 않지요.”
정비된 것이 일부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쌓아 온 장성(長城)이나 황하와 장강 사이를 수로로 연결하는 대운하에 비하면 장대하다고 하기는 힘든 그저 길일 뿐이었다.
그러나 마차에 올랐을 때 흔들림 없이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정비된 길이라면, 그 길을 닦기 위해서 흘렸을 노고가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감탄을 거듭하며 황성부에 들어와 보니 그곳의 풍경은 기가 막히기 그지없었다.
성내는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고, 관가(官街)에는 석조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심양에서 한 번 보고 감탄했던 수빙은 도심 곳곳에 늘어져 있었고, 상하수도가 정비되어 도심에 오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놀라게 했다.
도성 안에는 흙길이 없었고, 전부가 돌로 포장된 길이었으며, 더욱이 놀라게 한 것은 운종가를 따라 늘어선 상가(商街)의 번영함이었다.
가까이는 명과 일본, 그리고 여진의 각종 산물이 들어와 늘어서 있었고 발화기, 망원경 등의 제국 각처에서 생산된 기물들, 그리고 멀리 인도나 파사에서까지 들어온 화려한 장식품들이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에 잔뜩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신보(新報)라는 것이 팔려 사서 읽어 보았더니, 각종 정부 시책(施策)에 대한 논평이나, 최근의 시사(時事)에 관하여 민간에 인쇄해 보급하고 있는 것이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정교하게 주화된 은화와 동전으로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세금도 모두 이것으로 은납(銀納)한다고 하니, 나라의 부유함이 가히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또한 학문 또한 번창하여 황성 안에만 큰 학당이 4개가 있고, 전시를 통과한 관료라 하더라도 다시 한림원에 들어가 몇 년간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다.
비록 성리학의 테두를 벗어난 이단(異端)이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으나 말이다.
왕기흠은 가만히 관저의 마루에 서안(書案)을 놓고 앉아, 북경 조정에 보낼 서계(書啓)를 어찌 작성해야 할지 고민을 잠시 했다.
그간 이곳 황성부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적어 보낸들 명나라의 나태한 신료들이 그 시책을 보고 무어라 폄훼할지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갑작스러운 오이라트의 침공으로 인한 토목의 변을 겪고, 황제는 북방으로 끌려갔으며, 그 이복동생이 환관들의 농간(弄奸)에 둘러싸여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 기가 막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타국에 나와 가만히 고국을 생각하며 고민을 해 보나 번민만 깊을 뿐 서계에 올라간 붓은 좀처럼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5권에 계속≫
부록 <대한제국 군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