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만호성경(萬戶盛京)
「남에는 황성(皇城)이 있고, 북에는 성경(盛京)이 있어 제각기 그 번영함을 다투니, 황성의 사람들을 스스로를 경인(京人)이라 부르고, 성경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조인(兆人)이라 불렀다. 경(京)이란 글자도, 조(兆)라 하는 글자도, 모두 한 갈래로 경조(京兆)에서 나온 말로 도읍을 일컫는 말이었다.」
―최명길(崔鳴吉), 학도(學徒)들을 위한
국사소편(國史小編)
1457년
가경 13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 성경심양부(盛京瀋陽府).
1455년, 가경 11년에 칙령(勅令)이 포고되었다. 칙령의 골자는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와 심왕부(瀋王府) 사이의 기묘한 권력 관계를 심왕부로 일원화한다는 것이었다. 말인즉슨, 명목상이나마 황제가 임명할 권리가 있던 심요대도독의 지위를 앞으로는 심왕(瀋王)이 겸직하게 한다는 것이다. 요동 일대를 심왕의 봉지(封地)로 인정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황제로서는 당연히 이것을 추인하는 일이 내킬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철저하게 신권화(臣權化)된 대한제국의 정치는 황제가 이를 반려할 여지를 두지 않았다. 이른바 근황당(勤皇黨)이라고 불릴 수 있는 세력도 와해된 지 오래였고, 세훈의 사후 여러 가지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신료 집단들이 등장하고는 있었지만, 심왕가(瀋王家)를 위시한 기존의 관료들은 아직까지 막강한 결집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정치는 바로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400년대 초반 세훈과 탐라당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이 새로운 관료 집단은, 1430년을 전후하여 학습원 등의 각종 학교 출신의 문관들과 육군진무관, 해군상무관 출신의 장교들을 주축으로 하는 강고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뭉쳤던 초반의 모습과는 달리, 현재에 이르러서는 제도화된 교육기관을 통해 관료가 되었다는 공통된 동질 의식이 이들로 하여금 제국의 앞날을 이끌어 가야 할 엘리트라는 자의식을 심어 주고 있었다.
그런 동질감이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사상이 심왕가(瀋王家)에 빚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집현전(集賢殿) 등의 최고 교육기관에서는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보다는, 여러 층위로 권력이 분산된 분권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바로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등을 주축으로 한 이른바 경사학파(京師學派), 혹은 관학파(官學派)가 이러한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 학문적 원류는 기본적으로 세훈이 주장하고 보급하기 시작한 격물학(格物學)에 맞닿아 있었다. 이 사상적인 흐름은 관서학파(關西學派)와 탐라학파(耽羅學派)에 의해 가장 강성하게 주도되는 것과 다르게, 관학파는 이 세훈의 사상을 독창적으로 수용한 개성공(開城公) 충녕군 이도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기존의 학문 질서를 거의 부정하려고 하는 관서학파와 탐라학파의 사상과는 다르게, 경사학파, 즉 관학파는 깊은 유교 전통과 왕조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완화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세훈의 급진적 사상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면서 고려말로부터 내려온 관료집단에 의해 독창적으로 해석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과 급제자를 상대로 한, 최고 교육기관인 집현전(集賢殿)을 중심으로 학문적 이론을 발전시켜 나간 관학파는, 고전의 훈고와 각종 학문의 격물학(格物學)적인 진척, 그리고 근래에는 그리스 고전의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 분야에 있어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들의 사상은 황성과 경기 일대의 사족(士族)들을 중심으로 급격히 퍼져 나갔고, 1454년, 개성공 이도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집현전에서 그에게 교육받은 관료학자들인 신숙주, 박팽년, 이개 등에 의해 정밀화되고 발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이제 대한제국을 이끄는 가장 큰 정치 권력으로 정착한 관료집단의 통치에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바로 반세기 전의 사상가이자,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의 재평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도전의 신권 강화 사상을 엄밀하게 집주(集註)하기 시작한 집현전 학자들은, 1397년 초간되었던 《삼봉집(三峰集)》에서 빠진 글을 다시 모으고, 철저히 관학파의 사상에 따라 이에 주석을 단, 《봉화공삼봉문집대편(奉化公三峰文集大篇)》이라는 24책 45권을 1455년, 가경 11년에 출간하였다.
이중 《경제의론(經濟議論)》과 《감사요약(監司要約)》에서 주장한 것이 권력을 일극(一極)에 집중시키지 말고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이른바 분권론(分權論)이었고, 이를 근거 삼아 제2대 심왕이자, 당대 제국의 재상이었던 세훈의 장남 현도가 서주(西周)의 봉건치세(封建治世)를 들먹이며 중앙정부의 심요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황제의 신하로서 제국에 복속하고 복종하되, 봉지(封地)의 자율성을 획득하여 소국대업(小國大業)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넓은 영토와 여러 고을들 간에 단일한 잣대가 적용되는 것은 세수의 낭비가 심하고, 효율적이지 못하므로, 심요 지역은 심요의 특성대로 심왕가에서 행정을 펼쳐 통치를 좀 더 효율적으로 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관학파에서 주장하려고 했던 것은 지방분권이 아니라, 신권의 확대와 강화를 통한 황권의 견제 이상이 아니었으나, 이것이 현도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이용되어 심요 지역의 행정을 심왕가로 단일화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세훈 이래로 이 심왕가에 의해 크게 정치적 자산을 빚지고 있던 조정의 대신들은 이 안건에 대해 반대를 하지 않았고, 황제는 결국 칙명을 내려 이를 추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심요도독부의 관청(官廳)은 축소되어 요양부에서 심양부로 옮겨지고, 이를 심왕세자(瀋王世子)이자 현재 실질상 심왕부의 우두머리인 현도의 아들 서윤이 심요대도독 대행의 지위를 겸작(兼爵)하면서, 심요의 행정 일원화는 완료되게 되었다.
다만 군권(軍權)만큼은 조정으로 이어지도록 고쳤는데, 군사력만큼은 함부로 지방에서 사유(私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모든 조정 신료들의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조정에서는 왕부(王府)가 자리한 곳이니 경호(京號)를 땅 이름에 쓸 것을 허락하고, 심양에 성경(盛京)의 칭호를 내려, 성경심양부(盛京瀋陽府)로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이제, 성경(盛京)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이곳은 완연히 북쪽의 도읍이나 다름없소. 이제는 이곳도 새로이 일신(一新)되어 도읍에 걸맞은 위신이 있어야겠으니, 제공(諸公)들은 이를 일심으로 진력하여 여(余)를 도와주시오.”
이제는 수염의 터럭도 늘어나고, 성숙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는 서윤이 심왕부의 신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심왕세자로서, 젊은 날에는 할아버지 세훈의 수발을 들며 공부를 계속하고,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개성공 충녕군 이도의 밑에서 수학하며 학문의 길을 꿈꿔 왔던 서윤은, 아버지 현도의 강압에 의해 이곳 심요에 들어와 사실상의 심왕으로서 심요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것이 여러 해를 지나다 보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마따나 이제는 그럴싸한 군주로서의 위엄도 자연스레 갖춰지게 된 것이다.
심요도독부가 심왕부에 축소 통폐합되고 나서, 서윤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은 관직의 정비였다. 실질상 조정에서 파견된 신료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 심요 지역에 독자적인 기관과 관청을 정비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우선적으로 가장 상급의 기관으로 심왕부와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를 임시적으로 병합해 두었던 요동행정서(遼東行政署) 존치시켰다. 이 요동행정서는 일종의 행정부의 기능을 했는데, 심왕이 심요대도독의 지위를 겸직하므로 실질상 의정부(議政府), 혹은 비변사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이 심요도독부 아래에 여덟 개의 아문을 두었는데, 내무아문(內務衙門), 공무아문(工務衙門), 상무아문(商務衙門), 문교아문(文敎衙門), 교행아문(交行衙門), 호무아문(戶務衙門), 법무아문(法務衙門), 척식아문(拓植衙門)이었다.
이 여덟 개의 아문은, 병무(兵務)와 외무(外務)가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황성부의 제국정부에서 관할하는 일로, 지방 정권에서 행할 일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할 것은 법무아문으로, 심요 지역에 독자적인 법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시도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1456년에 어립심양문리과대학(御立瀋陽文理科大學)에 법학부(法學部)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법제의 연구가 시작된 것에 영향을 받았다.
이 법학부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전(大典)을 비롯해 로마법과 동로마법을 연구하는 데에 중점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편찬된 유스티니아누스 대전은 제국법대전(帝國法大典)이라는 이름으로 편수되어 나왔다.
이외에도 척식아문(拓植衙門)은 정확한 경계 없이 여진족, 몽골족 등과의 변경 지역을 공유하는 심요 지역의 특성상, 이곳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변방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특수 관청으로 설치되었으며, 교행아문(交行衙門)은 교통과 역참(驛站), 그리고 봉화제(烽火制)의 관리 감독만을 전문으로 하는 부서로 설치되었다.
내무아문의 판서(判書)는 정인지(鄭麟趾)가 임명되었고, 문교아문(文敎衙門)에는 특별히 젊은 김시습(金時習)을 발탁해 와 판서 자리에 앉혔다.
공무아문(工務衙門)과 상무아문(常務衙門)은 한경조가 양 아문의 판서를 우선 겸직했으며, 법무아문(法務衙門)의 판서는 안력서(安歷西), 즉, 심양의 동방정교회 성당인 북변사(北邊寺)의 주지(住持)인 알렉시오스 수사가 대리 겸직(代理兼職)했다.
이외에 호무아문의 판서에는 하위지(河緯地), 교행아문의 판서에는 유응부(兪應孚), 척식아문(拓植衙門)에는 유성원(柳誠源)이 판서를 역임하니, 그들 모두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로 중앙 관직을 포기하고 심요에 와서 새로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기 위해 일심매진하는 사람들이었다.
1457년
가경 13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 성경심양부(盛京瀋陽府).
알렉시오스 수사가 건립한 극동 유일의 정교회 성당인 심양의 북변사(北邊寺)에서는 때 아닌 조종(弔鐘)이 울렸다.
다름 아닌 동로마제국의 멸망을 추도하는 종소리였다. 북변사 정문(正門)에는 비잔티움 황실(皇室)의 문장이 내걸렸고, 수십 명의 그리스인들이 성물(聖物)을 호송해 북변사로 들어갔다.
성물은 다름 아닌,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유골 일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사도 대성당(Agioi apostoloi)의 제단으로부터 이곳 먼 동방의 땅 까지 2년의 여정 끝에 옮겨져 온 것이다.
이 유골을 봉납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그리스인들의 여정은 복잡한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형제들이여. 침통한 마음으로 이 먼 곳까지 오느라 수척해졌구려.”
동포들을 맞이하는 알렉시오스 수사의 표정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 이들을 통해 들은 조국의 멸망에 대한 소식은 그로 하여금 눈물을 멈추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냈던 한경조도 그러한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조선 출신으로 동로마제국까지 흘러들어 갔던 한학정의 아들로 태어나, 그리스인으로 자라났던 한경조였다. 그런 그이니 만큼, 아버지의 조국인 대한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음속에서 향수(鄕愁)로 남아 있는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가슴 아프고 비통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천 년 제국의 문도 닫히고 우리는 이렇게 조국을 잃은 불행한 어린 양이 되어 먼 길을 돌아, 이곳 동쪽의 끝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Gennadios Scholarios) 예하(猊下)께서는 이교도 술탄 메메드의 마수에 의해 위대한 제국 황제들의 유골이 침탈될 것을 우려하여, 성 사도 대성당에 봉안되어 있던 두 분 선대 황제 폐하의 유골의 일부와 성물(聖物)을 내어 몰래 저희로 하여금 이곳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제노바 상인 페드로 알부아니를 통해 저희는 바스라에 와 있던 대한제국의 상인들과 만나 먼 길을 항해해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정교회 수사들과 학자들을 이끌고 이곳을 찾아온,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의 대학사(大學士)였던 페트로스 테밀리오스(Petros Themilios)가 알렉시오스 수사에게 말했다.
동방 정교회의 가장 높은 권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자리는 웅장한 하기아 소피아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벌하자마자, 이곳을 모스크로 바꾸고 총대주교를 성 사도 대성당으로 내쫓았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는, 몇 달 뒤 술탄의 압박에 못 이겨 이곳 성 사도 대성당마저 내놓고 파마카리스토스의 수녀원 교회로 옮겨갈 때, 유골과 성물의 일부를 몰래 빼돌려 안전한 장소로 옮겨 두려고 했다.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는 동로마 제국이 언젠가 부활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때를 위해 이 신성한 유물들은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제국의 학자들은 기나긴 탈출 행렬에 몸을 실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이탈리아는 가깝고, 종교적으로 비록 가톨릭이었으나, 적어도 이들 그리스 학자들을 매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많은 이들이 베네치아로 건너갔으며, 또 다른 이들은 교황의 보호를 받아 로마에서 기거했다.
옛 제국 남부의 모리아스 지방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뒤에도 아직까지 동로마 제국 황실의 후예들의 술탄의 배려를 받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탈출했으며, 많은 성유물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탈출은 바로, 이 페트로스 테밀리오스를 비롯한 학자와 수사 50인의 동방으로의 여정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이 점령당한 뒤, 페트로스 테밀리오스는 총대주교 겐나디오스의 보호 아래에서 성 사도 대성당에서 기숙하며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었다.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 총대주교는 성 사도 대성당을 술탄에게 내어 놓게 되자 이때 성물과 유골을 일부 취합해 페트로스 테밀리오스에게 넘겨주고, 제노바 상인 페드로 알부아니를 알선해 주었다.
원래 이 유물들은 제노바로 옮겨질 계획이었으나, 페드로 알부아니는 제노바로 곧장 가는 것은 오히려 술탄의 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페트로스 테밀리오스에게 조언했다.
“술탄은 지금, 저희 제노바 상인들이나 베네치아 상인들에 대한 의심을 걷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가 언제고 많은 그리스의 기독교들과 연대하여 술탄의 목에 비수를 꽂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항구는 저희들에게 접근이 허가되지 않고 있고, 마찬가지로 그리스 전역의 많은 항구들도 그렇습니다. 다만, 이집트에는 맘루크의 부르지(Burji) 왕가가 술탄으로서 오스만 튀르크의 영향력 밖에 있고, 알렉산드리아 항구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이 여전히 기항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콥트 정교회 사제인 밀레토스 주교에게 서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해 놓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바스라를 통해 2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오는 동쪽 코레아(Corea) 왕국의 상인들이 있습니다. 이미 십수 년 전에 선대 황제께서 알렉시오스라는 수사와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제자이자, 그곳 동쪽 왕국 출신의 학자인 요안네스 안노스의 아들 게오르기오스를 그곳 코레아로 보내셨으니, 그 왕국에 가서 보호를 청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페트로스 테밀리오스가 들어보니, 과연 페드로 알부아니의 제안이 나쁘지 않게 들렸다.
멸망 직후 이탈리아로 도주한 다른 이들과 달리, 지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경내에 갇혀서 이미 2년의 세월을 보낸 페트로스 테밀리오스가 탈출할 수 있는 경로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페트로스 테밀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가 알렉시오스 수사에게 보내는 서간을 소지하고, 성물과 유골을 거적에 덮어서 여러 학자들과 함께 여러 차례에 나누어 십자군 전쟁 시대 이래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에게해의 키오스(Chios) 섬으로 옮겨 갔다.
이곳에서 일부는 제노바 행을 택했고, 일부는 제노바 상선에 몸을 실은 뒤 흑해 북부의 제노바 식민 도시인 카파를 거쳐 마지막 남은 그리스계 트레비존드 제국으로 도피를 택했다.
최후까지 키오스에 남은 페트로스 테밀리오스를 비롯한 50인의 학자들은 1455년 나상의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오는 때에 맞춰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콥트 정교회의 회당에서 3개월을 머문 뒤, 나상의 상인들과 섞여 바그다드를 거쳐, 바스라를 통해 먼 동방으로 가는 항해에 올랐던 것이다.
“오, 현명한 제노바 사람, 페드로 알부아니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그는 오랜 기간 우리 아버지 요안네스를 도우셨고, 제국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이들을 만나도록 도운 사람입니다. 결국 그가 이곳까지 그대들을 이끌게 된 것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페드로 알부아니의 이름을 들은 한경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아버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그 페드로 알부아니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꽤나 늙은 나이일 텐데도, 아직까지 살아서 이들을 도와 이곳까지 이르게 했으니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경조에게는 내심 근심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페드로 알부아니를 위해 짧은 기도문을 읊고서는 페트로스 테밀리오스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 부친, 요안네스 안노스의 거취에 대해서는 어찌 되었는지 아십니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동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중대한 시련에 마주한 아버지가 어찌 되었을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한경조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떠나올 당시에도 늙은 몸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았다.
“요안네스 안노스 님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기 두 해 전에 스승인 게미스토스 플레톤님이 모리아스에 연 학당(學堂)으로 옮겨 가 그곳에서 고전(古典)을 강해하며 머무셨다고 들었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그곳으로 옮겨 가 있었습니다. 요안네스 안노스 님의 장남인 콘스탄티노스 안노스 님은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여러해 전에 옮겨 가서 그곳에서 서적상을 열었다고 들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아직까지 모리아스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게미스토스 플레톤 선생은 저희가 떠나오기 한 해 전에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페트로스 테밀리오스는 한경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말해 주었다. 아버지 요안네스 안노스, 즉, 한학정이 아직까지 신변에 큰 문제없이 안전한 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고 있다는 소식에 한경조는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주님께서 게미스토스 플레톤에게 안식의 자비를 베푸시기를. 그분은 우리 가족을 많이 도우셨습니다.”
한경조는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죽음은 때 이른 것은 아니었고, 거의 100세에 가까워서 죽었으니 당대에 있어서 엄청난 장수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학정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노예로 팔려와 게미스토스 플레톤에 의해 거두어질 때, 이미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나이가 환갑을 넘어섰으니,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늙은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했으며, 나이 아흔에 가까워서도 피렌체로 건너가 강의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한학정을 매우 유심히 돌보아 주었고, 한경조 또한 그의 가족에 대한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우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성물과 유골의 운구가 북변사 안으로 모두 옮겨지고, 페트로스 테밀리오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와 수사들이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알렉시오스 수사의 집전 아래에 봉안식(奉安式)이 열렸다.
성물은 북변사의 십자가 아래에 모두 안치되었고, 먼 나라까지 옮겨진 동로마제국을 건국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유골과 유스티니아누스 대전을 만들고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유골이 지하 납골당에 봉안(奉安)되었다.
조촐하지만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유민들이 모여 만리타향에서 바치는 예배는 장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주님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퀴리에 엘레이손(Kirie eljison), 즉 그리스어로 “주님이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의미의 송가(頌歌)가 회당 안에서 끊임없이 송창(誦唱)되었다.
묵묵하게 눈물을 흘리며 손을 틀어잡고 주저앉은 이들은 이 성가(聖歌)에 목이 메여 왔다.
전례 예식이 모두 끝난 뒤에, 페트로스 테밀리오스는 겐나디오스 총대주교로부터 부탁받은 서간을 알렉시오스 수사에게 건네주었다.
서간의 내용은, 알렉시오스 수사를 앞으로 심양대주교구(瀋陽大主敎區, Patriarchekon Simionelas)의 대주교(大主敎, Archmepiskopos)로 임명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나머지 총대주교들의 바로 아래에 위치하도록 수권(授權)하여 그 서열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또한 술탄에 의해 모스크로 바뀐 성 사도 대성당의 성물과 유골의 일부를 이었으므로, 이곳의 북변사를 앞으로 심양 성 사도 대성당(Agioi Apostoloi)로 개칭(改稱)하고 심양대주교구의 주교좌(主敎座) 성당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알렉시오스 수사는 서간을 받아들고, 총대주교의 안위와 동방 정교회가 술탄의 탄압으로부터 살아남기를 기원하며 이 서간을 삼가 받아들였다.
“주님께서 겐나디오스 총대주교님과 정교회의 앞날에 무한한 축복을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는 앞으로 이곳 심양의 대주교로서 이 먼 동방에서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동로마 제국의 찬연한 유산을 이어 나가는 데에 평생을 바치겠나이다.”
알렉시오스 수사의 대한제국식 이름은 안력서(安歷西)였으며, 요동행정서의 법무아문(法務衙門) 판서 대리를 당시 역임하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수사, 이제는 대주교의 신변은 심왕세자인 서윤이 책임지고 있었으므로, 알렉시오스 대주교는 이 일련의 일들에 대한 보고장계를 써서 다음 날 서윤을 찾았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되었단 말이오? 여순구(旅順口)를 통하여 나상 선적의 배를 타고 50명의 망명자들이 내려, 지금 안 공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이야기는 간략히 한경조 판서를 통해 들었소. 나로서는 그대들 서교(西敎)의 예전이 어찌 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 그대가 좀 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소. 그러나 미풍(美風)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 이곳 심양과 요동의 발전을 위해 그대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고, 앞으로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다면 전례(典禮)를 지키고 전교(傳敎)를 행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제약을 가하지는 않겠소.”
서윤은 비교적 알렉시오스를 비롯한 정교회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알렉시오스 수사가 심양에 정착한 뒤에, 같이 동로마에서 건너온 한경조와 함께 심왕부의 행정 업무에 많은 공적을 쌓았었다. 이들은 특히 어립심양문리과대학을 세우는 데에 많은 공훈이 있었고, 지금도 학문적인 발전을 위해 많은 서책들을 펴내고 판서의 자리를 맡아 각기 책임지고 있는 아문(衙門)에서 행정을 돌보고 있었다.
그러니 특별히 풍속을 해치지 않는다면, 이러한 정교회를 막아설 이유가 서윤에게는 없었다. 더군다나 제국인이 주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진족, 몽골인, 한인(漢人)이 뒤섞여 있는 변경 지대인 이 심요도독부에서 이러한 독특한 문화적 색깔이 하나쯤 더 섞인다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보다 이곳에 망명해 찾아왔다는 그 오십인의 승려들과 학자들이오. 그들의 학문에 대해서는 그대가 보장할 수 있소?”
서윤의 물음에 알렉시오스 대주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들은 지금은 비록 지붕을 잃은 행려(行旅)의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나, 한때 동로마 제국의 황실에 봉사하며 천 년을 넘게 내려온 학문과 신학의 전통을 사수하던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심양대학에 학유(學諭)로 채용하여 학문을 증진하고, 이들에게 상당하는 녹봉(祿俸)을 지급하여 생계를 잇도록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아마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들 중 나이가 많고 심신이 지쳐 있는 이들이 있어, 심양 교회에 수도원을 지어 조용히 은거하게 하고자 하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 조그만 배려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머지 젊고 튼튼하며, 지성이 명석한 이들은 대학에서 강연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도원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이를테면 산중의 사찰(寺刹) 같은 것으로, 암자(庵子)와도 비슷한 것입니다. 사람의 행적이 많이 닿지 않는 곳에 조용히 은둔하여 생활하며 명상하고 덕을 닦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소. 그렇게 하도록 하고, 나머지 이들은 부디 심양대학의 학유로 불러 주시오.”
서윤의 말에 심양 대주교 알렉시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이듬해 봄이 되자, 알렉시오스는 심양 근교에 북해수도원(北海修道院)을 세우고 늙은 수사 출신의 망명객 여덟 명을 이곳에서 생활하도록 도왔다. 나머지 마흔두 명은, 각기 능력에 따라 요동행정서에서 서리(書吏)로 들어가기도 하고, 심양대학의 학유(學諭)로, 법(法)과 그리스 로마 고전(古典), 그리고 그리스어[希臘語]와 라틴어, 건축술과 측량법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이들 동로마 제국 출신 학자들이 크나큰 기여를 한 부분이 있다면, 이곳 동쪽 끝의 요동에서는 이들 쉰여 명의 망명 학자들이 대한제국의 문예부흥(文藝復興)에 일조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심양은 바로 그 새로운 학문의 줄기를 흡수하는 가장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1458년
가경 14년 중하(中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 성경심양부(盛京瀋陽府).
심양이 빠른 속도로 요동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심왕부의 근거지가 되었던 심양부는, 결국 요양부에 있었던 심요도독부의 행정권까지 흡수하여 심왕부 아래에 요동행정서가 설치됨으로서, 결국 요동 전역, 즉 심요도독부의 도읍이나 다름없는 위치가 되었다.
심왕의 왕부가 자리한 곳이기도 하니, 성경(盛京)이라 불리게 된 데는 그런 연유가 있는 것이었다.
또한, 심왕가에 의한 적절한 산업 투자로 인해, 교통망이 빠르게 확충되었고,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농업에는 적절하지 않은 북쪽에 위치한 탓에, 이곳에는 목축업과 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이 일찌감치 자리 잡게 되었다. 심양부를 휘돌아 나가는 혼하(渾河)에는 수차(水車)를 통한 직물공방(織物工房)이 빼곡하게 들어섰고, 동녕부를 중심으로 했던 명과 대한제국 사이의 중계 무역도, 이제는 심양으로 상당 부분 이전되어 물자의 유통이 더욱더 활발해지고 있었다.
세훈의 둘째 아들이자, 서윤의 삼촌인 현진이 심양―황성 간의 역마차 사업에 뛰어든 것도 모두 이러한 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물자의 빠른 이동은 중요한 화두가 되었고 인적, 물적 교류가 제국 각지에서 활발해짐에 따라 주요 도시를 잇는 이러한 가도의 정비와 역마차의 운행은 큰 수익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심양은 요동 일대와 관서(關西) 지방의 상권을 이내 흡수하고 장악하게 되었는데, 제국 정부에서 공식으로 발행하는 탁지부(度支部)에 조폐청(造幣廳)의 은화인 가경통보(嘉慶通寶)―발행 시점의 연호에 따라 통보의 명칭이 바뀌었다―의 보급이 더디게 이루어지는 와중에, 요동행정서에서 은행서(銀行署)를 세우고, 심양과 개원에서 캐낸 은광의 순은을 이곳에 비축하여 요동폐(遼東幣)를 찍어 낸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요동폐는 은본위(銀本位)라는 점에서는 국화(國貨)인 가경통보와 크게 다를 점이 없었지만, 은의 함량이 99%로 가경통보에 비해 2%P가 높았고, 보조 화폐로 동화(銅貨)도 찍어 냄으로서 빠르게 요동을 중심으로 화폐경제를 접수할 수 있었다.
이 요동폐는 이내 압록강 너머의 평안도 상권에서도 급격히 유통되기 시작했고, 때문에 관서(關西) 지방은 황성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의 화폐경제에 묶이지 않고, 심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의 화폐경제에 예속되게 되었다.
이 요동폐는 여진족과 몽골인들에게도 유통되었을 뿐더러, 국경을 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서도 거래 수단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국화(國貨)인 가경통보보다 먼저 이렇게 국제 거래 수단의 지위를 획득한 오동폐는, 북쪽 변방에서 드넓게 그 유통이 확대되었는데, 이내 영진도독부와 동북면(東北面), 즉, 영길도에서도 이 요동폐가 화폐경제를 장악하게 되었다.
반면, 남쪽으로는 황성부 조정에서 찍어 내는 가경통보의 인기가 훨씬 높아, 삼남(三南)을 비롯한 진서도독부와 나상, 송상 등의 거대 상단에서도 이 가경통보를 사용했는데, 화폐의 가치를 균일하게 유지하기 위해 설치한 양정국(量定局)에서 가경통보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신뢰할 만한 거래 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가경통보는 상남(湘南)을 거쳐 남양(南洋)의 여러 제국(諸國)과 멀리는 페르시아와 흑양조까지 흘러들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렇게 상이한 두 종류의 화폐가 유통됨에 따라 불편한 부분도 적지 않았는데, 상거래 규모가 큰 주요 도시에는 이 양 화폐를 환전해 주는 환전상이 등장하고, 매 주 그 시세가 고시되어 그에 따라 환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환율은 당시 교통이 빠르지 않고 지역적으로 상권이 분할된 특성에 따라 지방별로 제각각이었는데, 대체로는 그 은의 함유량을 따져 교환하도록 되었다.
두 화폐가 가장 크게 경쟁하는 점이지대(漸移地帶)라고 할 수 있는 황해도에는 이 화폐를 서로 거래하는 환전장(換錢場)이 해주부에 들어섰고, 이곳에서는 일종의 환거래를 통해 일확천금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정부에서 거래를 규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연유로 특히 평안도는 빠른 속도로 심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지역과 긴밀한 연관성을 맺게 되었는데, 학문적으로도 평양을 중심으로 했던 관서학파(關西學派)의 학맥(學脈)이 심양문리과대학과 요동행정서를 중심으로 결합되면서, 많은 학자와 선비들이 심양으로 옮겨 가게 되기도 했다.
관서학파는 갑신반정과 을유전역(乙酉戰役)이래,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 일대의 명사(名士)들이 반명독립(反明獨立)과 격물학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태동한 학파였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정부에 출사하여, 관학파와 서로 학문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으나, 사실상 이름나게 내세울 만한 학자도 없었으며, 학문적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 학파였다.
관서학파가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실질적으로 심양의 학문적 영향력에 들어간 뒤였다.
당시 심양에는 집현전(集賢殿) 출신으로 심왕부에 기용되어 요동 지역에서 학문적 영향력을 펼치기 시작한 정인지, 김시습,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의 학자들과 동로마 출신의 한경조, 안력서를 비롯한 학승(學僧)들에 의해 요동행정서와 심양대학을 중심으로 융합적인 학문의 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들 중 집현전 출신은, 특히 개성공 충녕군 이도로부터 시작하는 관학파의 학문적 전통 속에서 학문을 익혔으나, 요동으로 건너와 실물적인 현실 정치에 깊게 관여하면서 실용적인 자세를 보다 강고하게 견지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동로마의 서양 고전 학문의 바람이 심양대학을 통해 건너오면서, 이 실용적이고 경계 없는 학문의 기풍은 보다 단단해졌다.
이런 분위기에 관서학파의 학자들이 쉽게 경도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자로부터 시작된 신유학(新儒學)을 전부 버리고, 한왕조(漢王朝) 이전의 고전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이것을 격물학적으로 해석하자는 극단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관서학파였기에, 이들은 손쉽게 심양의 학문적 기풍에 감화될 수 있었다.
관서학파의 학자들은 심양으로 자제들을 유학 보내는 한편, 자신들도 심양으로 건너와 심양행정서에서 관리로 일하기를 희망했다.
이렇게 평양을 중심으로 했던 관서학파의 학맥이 요동으로 옮겨 오면서부터, 관서학파는 자연스럽게 심양(瀋陽)을 중심으로 한 학문사조를 통칭하는 말로 그 범위가 넓어졌고, 관서의 사대부들이 비교적 출세가 용이한 심양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평안도는 실질상 요동의 배후지 노릇을 하게 되었다.
황성부의 조정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견제할 법도 했지만 사실상 조정으로서는 그러할 이유가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 재상인 현도가 심왕의 작을 겸하고 있었으며, 대한제국의 행정 방향도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기묘한 절충 형태로 조정되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성부의 관료들은 끊임없이 제국 전체에서 시행될 칙령들을 황제의 재가를 받아 반포하고 있었지만, 심요, 영진, 진서 등 여러 외지(外地)를 제국의 판도로 포함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지역에 일률적인 제도를 포괄적으로 시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존재했다.
때문에 황성부의 조정에서는 이들 심요, 영진, 진서 등의 여러 지역을 효율적으로 경략하기 위해서 차등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를테면, 심요, 즉 요동 지역에는 심왕부(瀋王府)를 통한 간접 지배만을 하며 군권과 외교권만을 대신 행사하는 방향으로 가닥 지었으며, 영진 지역에서는 일종의 군정(軍政)을 시행하면서 군사적, 행정적으로 영길도의 지휘 감독을 받도록 하고 있었다.
진서는 원래 이곳에 기본적으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던 다이묘들이 대한제국에 귀순한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이들 칸조쿠다이묘(韓屬大名)들에게 공후(公侯)의 작위를 내려 기존의 권리를 폭넓게 인정하는 한편, 역시 군권과 외교권만은 중앙 조정에서 대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안정된 구도가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황성부(皇城府)만이 비대하게 발전하고 있던 기형적 구조는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다.
각 지역에서 중심 도시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왕부가 자리한 성경심양부(盛京瀋陽府)는 요동과 서북 일대에서 중심 도시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함주부(咸州府)는 영길도 관찰사가 주재하는 한편, 영진도독부의 수권(授權) 도시로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고 있었다.
진서에서는 기주(崎州, 키슈)와 박주(博州, 하쿠슈)의 두 도시가 여전히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내지(內地)에서도 이러한 대외 거점과 황성부를 잇는 요충지의 성읍들이 발전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요동과 황성을 잇는 서북가도를 따라 의주(義州), 평양(平壤), 해주(海州), 개성(開城) 등의 도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동북면으로는 함주에서 황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춘천(春川), 그리고 서남으로는 주요한 해외 무역의 거점이 된 목포(木浦)로부터 시작해 황성으로 올라오는 길목의 나주(羅州)와 공주(公州), 그리고 동남으로 동래(東萊)와 대구(大邱)의 성읍이 성장 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들에 비해서도 심양의 성장은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이른바, 성경(盛京)이라 불리며 북쪽의 도읍이라 칭송받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해가 다르게 거듭 늘어난 인구는 30만에 육박하고 있었고, 이것은 황성부의 40만 인구와 비교했을 때도 적다고 하기 힘든 것이었다.
빠르게 성장한 인구를 효율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성곽의 안팎으로는 빠르게 거주지가 들어서고, 공업 지대가 확충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단순한 직물 공업만을 위주로 하던 심양의 산업은, 이제는 방직(紡織)과 방적(紡績)뿐만이 아니라, 양모(羊毛) 산업과 목축업, 그리고 명나라와 본토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어서 은광(銀鑛)과 철광(鐵鑛)의 개발을 통한 광업(鑛業)에 이어서, 금은(金銀)으로 치장한 사치품을 생산하는 공예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양이 황성부에 비해서 독창적인 우위를 가질 수 있는 분야는 바로, 제국 전역에서 심양에서만 생산해 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유리, 시계, 건축의 분야에서 심양은 독보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신라 때에 이미 페르시아로부터 유리 세공품이 전래된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대한제국에서 유리 공업의 기반은 전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주의 석영을 이용하여 원시적인 렌즈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명나라와의 전쟁에서도 망원경이 사용되어 전략적 우위를 점하는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유리를 생산해 내는 것은 유리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대한제국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로마로부터 탈주해 온 이들 중에 유리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타나시오스 지아노풀로스(Atansios Gianopoulos)는 아테네 출신의 유리공(琉璃工)으로, 그의 고용주였던 수사학자 테오필로스 아미긴토스(Theopilos Amigintos)를 따라 동방행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의 조상은 원래 라틴계로 십자군 전쟁 이래 이탈리아에서 건너와 아테네에 정착했던 유리공으로, 아타나시오스 지아노풀로스 본인도 이러한 서유럽과 동로마제국의 유리 공예 전통을 폭넓게 체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가치를 알아본 현진에게 발탁되어 계영양행에서 제공해 준 공방에서 유리 제품을 생산하는데 전념할 수 있었다.
아타나시오스 지아노풀로스는 조선식 이름인 지안태(祗安泰)라는 이름을 썼다. 이 지안태가 특별히 대우받을 수 있었던 주요한 유리는 그가 당대 일급 수준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판유리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판유리는 서유럽과 동로마제국 일부에서만 제작되던 가장 최첨단 기술로, 이것을 제작할 수 있단 말은 곧, 유리로 된 창문이나 커다란 거울 따위를 만들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아직까지는 여건이 갖춰진 것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힘써 주시면 그만큼 좋은 결과를 내어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안태의 말마따나 그렇다고 해서 곧장 판유리가 뚝딱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안태는 몇 년의 시간을 들여, 그를 보조해 줄 공원(工員)들을 교육시키는 데 노력을 했으며, 계영양행을 통해 규사(硅砂)를 구하는 데도 애를 썼다.
규사는 결국 평안도에서 많은 부분을 반입하고, 일부 부족한 부분은 명나라를 통해 충당하여 결국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성경초자공방(盛京硝子工房)이 심양 교외에 세워져 유리를 생산해 내기 시작한 것은 1458년 2월의 일이었다.
심양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의 또 한 가지는, 바로 시계(時計) 등의 생산을 통한 초기 단계의 기계공업이었다.
이미 장영실 등을 통해 기초적인 기계 원리는 정리되어 수차(水車)와 기중기, 건선거(建船渠)등을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있었지만, 물을 이용한 자격루(自擊漏) 이상의 본격적인 기계 동력을 이용한 복잡한 시계의 등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공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던 동로마 출신의 학자 중에서 자카리아스 코테아스(Zakarias Koteas)와 안티모스 코스마토스(Anthimos Cosmatos)의 두 사람과 학습원 물학과 출신으로 심양에서 공무아문의 관리로 있던 이명세(李明世)가 협력하여 처음으로 기계 시계를 만들어 심양의 광장에 설치하였다.
이 대형 시계는 높이가 거의 10척(尺)에 가까웠다. 이 시계는 큰 회전통에 노끈이 감겨 있고, 노끈에는 추가 달려 있었다. 무거운 추의 무게로 이 회전통이 회전하고, 그 회전이 치륜(齒輪), 즉 톱니바퀴를 통해 지침에 연결되어 시각이 표시되는 구조였다.
자시(子時)부터 해시(亥時)까지 열두 개의 시각이 표시되었고, 하나의 지침이 천천히 이 표시된 시각의 위를 움직이는 구조였다. 이 시계는 광장의 한 측에 있는 심양문리과대학의 문루에 딸린 탑에 설치되었으며, 심양의 시간 표시의 기축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 하에서, 기계 장치의 성과를 다양한 분야로 옮기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다양한 용도에 사용하는 기중기(起重機)가 도심에 설치되고, 보다 효과적으로 물건을 옮겨 나를 수 있는 간단한 승강 장치도 고안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크고도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건축술이었다.
우선적으로, 명과의 전쟁으로 요동이 대한제국에 복속된 이래, 심왕가의 주도 아래 심양을 개발하고 왕부(王府)에 어울리는 도성으로 축조하기 위해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었다.
황성부에서 석축 건물과 도로 시공 등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건축공들이 심양으로 많이 불려 왔었다.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황성부의 다양한 건축 현장에서 많은 기술을 쌓아 왔었는데, 이들이 동로마제국의 건축적 지식을 가지고 있던 탁월한 건축가 바실리오스 카넬리스(Vasilios Kanellis)와 만나면서 새로운 건축 양식을 심양에 탄생시켰다.
바실리오스 카넬리스가 건축에 대해서 폭 넓게 배웠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제는 이미 멸망하여 오스만 튀르크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지만, 전성기 동로마제국의 건축 기술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던 곳이었다.
중세 시대, 서유럽에 비해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 대륙의 유일한 대도시를 자처할 만한 거대한 성읍이었으며, 전성기 인구는 80만에 육박했다.
20km에 달하는 육중한 성벽과 수많은 교회들, 그리고 수천의 무역선이 정박하던 거대한 항구가 있는 도시였다.
바다쪽 성벽 위로 뒤섞여 있던 지붕과 돔들의 정상에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거대한 돔이 있었고, 밤이면 이 성당의 돔 지붕과 아치문의 놋 사슬에 매달린 1천 개의 램프에 불이 밝혀져 건물 전체에 끼워져 있는 얇은 대리석판을 빛냈다.
이 불빛은 30km 바깥에 떨어진 바다에서까지 보여 등대 노릇을 했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물의 무덤이나 다름없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건축에 대해 심원한 연구를 해 오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바실리오스 카넬리스가 심양에서 활동한 24년간은 새로운 건축 양식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보다 석조 건축물을 효과적으로 세우기 위한 궁륭(穹窿) 기법이 도입되었고, 늘씬한 처마를 자랑하는 기와지붕은 보다 간결한 형태로 어디에나 올리기 좋게 개량되었다.
황성부에서부터 시작된 석축과 목축의 혼합 형태와 벽돌의 사용은 심양에 와서는 저변화되었으며, 각종 벽돌 건축이 흥성하기 시작했다.
보다 높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 단단한 돌을 채굴하는 사업이 연이어 진행되었으며, 비교적 조잡한 형태로 세워졌던 옛 북변사는 새로운 심양 성 사도 대성당이자, 대주교좌 성당에 걸 맞는 새롭고 웅장한 건축물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은 바실리오스 카넬리스 최대의 역작으로, 그가 죽은 뒤 15년이 더 지난, 1486년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되었다.
바실리오스 카넬리스 이후 심양에서는 석조 건물을 건축하는 데에 있어서 큰 기술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바실리오스 카넬리스가 익히고 있던 동로마제국 말기의 건축 기술은 주로 수도원 건축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수도원의 건축 기술은 일반 주거용 건축에서도 넓게 채용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필로게니토스 궁전(宮殿) 또한 이러한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바실리오스 카넬리스는 이 궁전의 개수 작업에 참여한 이력이 있었고, 이 외에도 이슬람 교도들과의 대립이 격화되지 않았던 모리아스 지역에서 여러 황족과 귀족들의 저택을 설계하고 지은 바 있었다.
이러한 바실리오스 카넬리스의 기술들은 고스란히 심양 지역의 건축 방식에 녹아들었다.
가장 중요한 발전은, 난방 방식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심양 같은 북쪽 지방에서는 온돌을 설치하기 위해 복층 이상의 건물을 올리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심양에서 벽돌 및 석조(石造)의 건축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보다 높은 건물에서 효율적인 난방을 하기 위해 온돌이 개량되어 건물의 층층이 깔리는 구조가 되었다.
이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수학적 계산에 의한 기둥과 궁륭의 배분이 이루어졌고, 규모가 있는 건물의 난방에는 상당한 열량이 필요했으므로 목재에 의한 난방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석탄(石炭)이 난방용 땔감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심양 주변의 산지(山地)에는 이러한 질 좋은 석탄이 다량으로 묻혀 있었다. 석탄의 사용은 고대로부터 야금(冶金)에 필요한 연료로 사용된 전례도 있을 뿐더러, 중국에서도 석탄을 난방에 사용한 전례가 있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으로 연료로 활용되기 시작해 석탄의 강한 화력을 대장간뿐만 아니라 난방, 요리에도 사용할 정도였다.
이미 석탄의 효율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상황에서 심양 주변의 대대적인 광산 탐색과 더불어 석탄이 다량 발견되면서, 심양 지역에서는 도시의 설계 초반부터 목재보다는 석탄 사용을 선호하는 건축물들이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심양이 이른바 북쪽의 중심지로서 새롭게 거듭나게 된 것에는 이렇듯 동로마 출신 망명 학자들과 그간 대한제국에서 쌓여온 격물학적 지식의 초석들, 그리고 심왕가의 의지와 재산이 덧대어져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 시기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심양부는, 빠른 속도로 인구가 불고 산물이 집적되기 시작해 채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적어도 황성부와 명나라의 북경 이외에 동방에서 이 심양에 버금갈 도시는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