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태평연월(太平烟月)
「○황상이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익일연(翌日宴)을 베풀었다. 황제가 술을 돌리고, 재상(宰相) 심왕 김현도, 상당백 한명회(韓明澮), 인산후 홍윤성(洪允成), 창녕개국자 조석문(曹錫文), 심의(審議) 성봉조(成奉祖), 지사 이석형(李石亨), 정현조(鄭顯祖) 등이 차례로 술을 돌렸다. 최안(崔安)이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바야흐로 옥좌(玉座)에 있으나, 조정(朝廷)을 공경하여 여러 번 성대한 잔치를 베푸시니 후한 은혜에 깊이 감사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잔치를 베풀지 마소서.”
하니, 황상이 감히 하지 못하겠다고 사례하고서 드디어 잔치를 파하고 환궁하였다. 궁내부 상서대신(尙書大臣) 권감(權瑊), 칙임관(勅任官) 김유례(金有禮) 등을 명하여 머물게 하고, 최안 등에게 안마(鞍馬) 등의 물건을 주었다.
○皇上幸大平館, 設翌日宴. 上行酒, 宰相瀋王金賢道, 上黨伯韓明澮, 仁山侯洪允成, 昌寧開國子曺錫文, 審議成奉祖, 知事李石亨, 鄭顯祖等, 以次行酒. 崔安就前曰: “陛下在玉座中, 然敬朝廷, 累設盛宴, 深感厚恩. 請自今勿設.” 皇上謝不敢, 遂罷宴還宮. 命留宮內府尙書大臣權瑊, 勅任官金有禮等, 贈安等鞍馬等物.」
―예종(睿宗)실록 제85권 30년(가경 30년) 4월 7일
1475년
가경 31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황성부.
현도의 나이도 어느덧 일흔다섯에 이르렀다.
그는 세훈의 장남으로 제주에서 태어나, 1419년에 학습원을 졸업하고, 전시에 급제하여 한림원에서 수학했다.
이 해에 백제공 오우치 모리미의 외동딸 혜희(惠姬, 에히메)와 혼례를 치렀다. 관직에 출사한 이후 평택현감(平澤縣監), 공부(工部) 교통처(交通處)의 정랑(正郞)을 거쳐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상공부(商工部) 주임관(奏任官)을 역임했다.
1436년 최해산의 후임으로 상공부대신(商工部大臣)에 오르고, 1444년에는 내각 재상(宰相)에 올랐다.
그 뒤로 재상의 자리에만 어느덧 서른 해를 앉아 있었다.
아버지 세훈이 세상을 뜬 것이 1447년의 일이므로, 그가 심왕의 작위를 이은 지도 벌써 서른 해가 가까워져 오는 일이다.
어머니 고상희도 벌써 스무 해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그가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지 세훈과 함께 나라를 일으켰던 구신(舊臣)들은 남아 있는 이가 없었다.
그가 문득 살아온 궤적을 뒤돌아보게 된 것은 김종서(金宗瑞)의 죽음이 끼친 영향이 컸다.
미수(米壽)를 넘겨서도 정정하던 이 노신은 결국 지난 해 아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순천공(順天公)에 봉해지고 내각의 요직을 두루 거쳐, 그 공훈을 표창받아 이화장 대훈위 1등과 서성장 대훈위 2등의 훈장이 하사되고, 마지막에는 충정공(忠貞公)의 시호까지 하사되었으니 그 공적(功績)이 실로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런 인물도 떠나간 뒤에 남는 것은 스산한 묘소뿐이었다.
현도는 김종서의 묘역(墓域)에 들러 배향을 하고 한강을 건너 오는 길에 문득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십수 년 전, 공부(工部)에서 야심차게 추진하여 완공한 경강대교(京江大橋)를 초헌을 타고 지나가며 현도는 수심에 잠겨 들었다.
경강대교 너머로는 용산(龍山) 일대에 빼곡하게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멀리 어슴푸레 하게 황성부의 성곽과 숭례문(崇禮門)의 정경이 한눈에 비쳐 들어왔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상경(上京)하여 철모르고 뛰어다니던 옛 한성부(漢城府)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멀리 강가에 보이는 지금은 죽고 없는 송거신의 농월정(弄月停)만이 옛 추억을 더듬어 보게 해 줄 뿐이었다.
그곳에서 에히메를 만났고, 어릴적 막역지우(莫逆之友)들을 얻었다. 지금은 다들 관직을 두루 거치며 늙은 관료들이 되어 있었고, 어떤 이는 낙향하여 죽란(竹欄)을 치고 지내거나, 또 어떤 이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세월이 이리도 빨리 지나갔던가.”
짐짓 한숨을 보여 보지만 실로 지나간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재상의 자리에 앉아 정신없이 보낸 것이 서른 해, 아버지 세훈이 얼마나 바쁜 삶을 살았는지 그 자신이 몸소 느끼고 있었다.
그 많은 시간들이 흔적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무언가 웅대한 포부를 지니고 대업을 이루어 보려고 했으나, 기실 이루어 놓은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국록(國祿)을 먹으며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었다고 자부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처럼 여겨졌다.
현도를 태운 초헌은 네 명의 나졸들이 바삐 끌어 성문을 지나 계동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 계동저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어느덧 일흔 해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처음 올렸던 기와는 이미 허물어져 몇 번을 새로 올리고, 조그만한 사당(祠堂)과 벽돌로 지어 2층으로 올린 서재도 들어섰다. 사랑방을 크게 내어 응접실을 새로 이어 붙이고, 뒤쪽에는 작은 정원도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큰 부분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세훈이 만들었던 수세식 화장실은 여전히 뒷간에 남아 있었고, 현도도 즐겨 애용하고 있었다.
어머니 고상희가 다도를 즐기던 내실(內室)에는 지금은 현도의 처인 에히메가 조용히 자수를 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이곳에서 세월을 보낼까 하오. 왕작(王爵)도 서윤이 놈에게 물려주고, 그냥 수양이나 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겠소. 그간 임자와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실컷 하고 말이오.”
내실을 찾은 현도가 에히메에게 말했다.
주름이 잔뜩 잡히고 늙은 태가 나는 현도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에히메는 가만히 남편의 늙은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쳐 보고서는 수줍게 웃었다.
“님도 늙고 저도 늙었습니다. 한때는 곱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노파(老婆)의 용모가 되었으니 님과 정담(情談)을 나누다 들키면 사람들이 웃을까 두렵습니다.”
에히메의 말에 현도가 나직이 웃는다.
“남들 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면 누가 탓을 하리오. 내 그대 하나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약조를 하고 시집을 오게 하였으니, 죽을 때까지 정인은 그대 하나요. 임자도 나도 이렇게 늙어 못난 용모가 되었지만 마음만큼은 한 치도 변한 것이 없으니 부끄러울 것이 무에 있겠소.”
현도가 에히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비록 주름진 손이었으나, 전해져 오는 온기는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내실에서 숙침(熟寢)하고 현도는 다음 날이 밝자 바로 내각으로 등청해 재상의 자리를 내려놓을 것을 표명하고, 궐로 들어가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황제에게 주청했다.
이제는 보령이 마흔다섯이 된 황제, 이현(李泫)은 느닷없는 현도의 주청에 깜짝 놀라 용상(龍床)에서 내려와 현도의 손을 부여잡았다.
강력한 황권이 무엇인지 본 적도 없고, 그 자신도 크게 욕심이 없어 능력 있는 신료들이 나라를 이끌어 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마저 가지고 있는 황제였다. 그렇다고 무능하고 주색만 찾는 용렬한 황제가 아니라, 학업을 장려하고, 각지에 학당을 세우고, 군병을 위무하거나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게 하거나 하는 일에 시간을 소소히 쓰고 있는 이였다.
내각이나 추밀원(樞密院)에서 올라오는 장계의 대부분을 꼼꼼히 살폈고, 비록 실권은 없을망정 가끔 내각회의나 추밀원회의에 자리하여 정사(政事)를 살피려 애를 썼다.
그런 황제이니 만큼, 세훈과 현도가 2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는 동안, 어떻게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번영의 일로에 접어들었는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만큼 황제는 재상으로서 현도의 능력에 의심을 품지 않았고, 그가 힘이 다할 때까지 일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내심 있었다.
그런데 현도가 직접 재상의 직을 반려하고 처사(處士)가 되어 조용히 칩거하겠다니 혼란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공이 나이가 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정신이 명료하고 육체가 강건하여 정무를 보는 것에 무리함이 없소. 그간 재상의 자리에 서른 해를 앉아 있으며 여러모로 나라를 위해 힘써 준 바를 짐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부디 이 소청을 물리고 조금만 더 짐과 조정,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애써 주시오.”
“이렇게 부끄러운 말씀을 여쭙게 되어 망극하기 그지없나이다. 그러나 자고로 신하된 자는 들고 물러설 때를 잘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지금이 그때인 듯하나이다. 이제는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고 집안을 돌보는 데에 남은 여생을 보내고자 하나이다. 앞으로 폐하를 도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들이 지금 조정에 고루 자리하고 있으니, 부디 제 소청을 가납해 주시옵소서.”
황제 이현이 설득해 보려 하지만, 현도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대를 이어, 지금 심양에 있는 서윤 공이 재상에 오르게 되어 있소? 그대가 물러난다 하더라도, 그가 재상의 지위를 물려받아 준다면 한시름 덜겠소만.”
이현은 내심 속에 있는 기대를 드러내 보았다.
서윤의 국정 능력은 이미 요동 일대에서 증명이 되었다. 규모가 커져서 제국 전체의 행정을 맞게 되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게 황제의 판단이었다.
“일국의 재상을 함부로 사사로이 물려주어서야 되겠나이까. 서윤은 그대로 심양에 머무르게 두고, 그만 심왕의 작위도 폐하께서 가납하신다면 그것을 물려줄 생각이나이다. 내각과 추밀원의 신료들과 논의하시어 자리에 오를 만한 이를 앉히도록 하소서.”
“그럴 만한 인물이 과연 누가 있단 말이오?”
황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의 뜻과는 크게 관련 없이 의정부와 추밀원에서 새로운 재상에 대해 인선(人選)을 하겠지만, 황제 자신도 당연히 공적이 있는 심왕가에서 세습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훈에게서 현도를 거치며 70년을 일국(一國)의 재상으로 부자가 봉직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현도는 강고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기괴한 체제를 자자손손 끌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가문의 텃밭이 되어 줄 요동이 이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으니, 굳이 재상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세훈이 관직을 내려놓는다는 이야기에 당혹감을 느끼기는 이미 통보를 받은 내각의 대신(大臣)들과 추밀원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후선(後選)을 어찌하여야 좋겠소? 심왕가에서는 더 이상 재상의 관직을 맡지 않고 죄 반려하겠다고 이미 통지가 왔소이다. 우리가 협의(協議)하여 추대를 하여야 할지 고민이오이다.”
내부상서대신(內部尙書大臣) 황보인(皇甫仁)이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현도와 동고동락했던 그 또한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겨 지금은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일찍이 없던 일이나, 마땅히 황제 폐하께서 인재를 들어 올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상이라 함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니 만큼 황제 폐하께서 결정을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독단을 전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재상이 폐하에게 책임을 지고, 만약 실정이 있으면 언제든지 파직하기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재상은 자리를 보전코자 성실히 임할 것이오, 그가 누가 됐든 우선은 믿고 맡겨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문부상서대신(文部尙書大臣) 최항(崔恒)이었다. 그의 의견은 단지 재상이 앞으로 황제 앞에서 책임을 지도록 하여 그가 전횡하는 것을 막자는 의견이었으나, 황권을 강화시키자는 어조로 들려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내각 대신의 뽑아 씀을 늘 그리해 왔듯이, 재상도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선 재상의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 우선 재상에 오를 수 있는 대상자를 내각의 대신들로 한정합시다. 의결(議決)을 심의해 온 바대로, 추밀원에서 대신들 중 재상의 지위에 어울리는 이를 추천받은 연후에, 내각의 대신들이 다시 그를 심사하고, 최종적으로는 폐하께서 의결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법부상서대신(法部尙書大臣) 김영유(金永濡)가 대신들에게 말했다. 대신들은 그 뒤로도 이런저런 방식을 의론해 보았지만, 역시 김영유가 제안한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생각이었다.
재상의 자리에 추천을 받을 수 있는 대상자를 현재의 내각 대신으로 한정함으로서, 안정되고 신뢰할 수 있는 인재 목록이 생기는 셈이며,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겪을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을 간추리는 일을 추밀원에 맡김으로서, 국정 운영에 있어서 추밀원의 공고한 지지를 꾀할 수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인준을 받아 형식을 도모하니, 당장 보아서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대안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내각의 권한을 좀 더 확장시키는 일로, 우선 재상의 출신이 당시 내각에 참여하는 대신으로 한정됨으로 인해 앞으로 재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내각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직의 대도(大道)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앞으로 내각 대신들의 입김도 더욱 세어질 것이고, 국정 운영에 있어서 한 발짝 더욱 큰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것은 내각과 추밀원을 막론하고 뿌리 깊게 관료사회 전체를 지지 계층으로 두었던 세훈과 현도 부자의 경우와는 달리 갈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누가 물망에 올라 재상의 자리에 오르든 간에 이들 부자와 비교되어 혹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내각에서는 좀 더 밀도 있는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게 재상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 힘을 실어 준다는 것은 곧 내각의 힘을 강화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내각에서 마련된 재상 선발에 관한 세칙(細則)이 황제에 의하여 재가를 받고, 다시 추밀원으로 보내져 이 규칙대로 인물을 천거해 줄 것이 추밀원에 요청되었다.
1475년
가경 31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황성부.
내각에서 규칙을 제정해 추밀원으로 내려 보내자 추밀원의 분위기는 이내 뒤숭숭해졌다.
그간 내각은 행정을 집무(執務)하고, 추밀원에서 법제(法制)를 관할하고 사안을 심의(審議)한다는 암묵적인 분권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까지 일괄된 법체계를 갖추려고 수십 년에 걸쳐 노력하고 있는 대한제국에서도 정비가 되지 않는 분야 중 하나였다. 이러한 권한의 분립(分立)은 정확히 명시되지 않고 있었고, 그간의 방침은 대체적으로 황제권에 비해 신료의 권한을 수위(首位)에 놓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막상 내각을 이끌어야 할 재상의 자리가 서른 해 만에 공석으로 남게 되자, 갑작스러운 자리를 놓고 이런 말이 오고 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추밀원에서 이 규칙대로 사람을 뽑을 수 없다고 가장 으름장을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상당백(上黨伯) 한명회(韓明澮)였다.
조정에서 노회함으로 손에 꼽히는 대신이었던 한명회는 실제의 정치보다는 사람 사이의 정치를 더욱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책략(策略)과 계모(計謀)에 있어서는 수위를 다투는 이였다. 그는 개경의 상학(廂學) 출신으로, 주로 황성 안의 4개 학교 출신들이 주류인 조정 안에서는 학력(學歷)이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개경에서 개성공(開城公)이 기거하는 경덕궁(敬德宮)에 관직을 얻어서 한미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개경공 이도의 아들인 수양군(首陽君)과 교류하여 수양군이 조정에 관직을 얻어 출사하게 되자 이를 따라 등청하여 내부(內部)와 탁지부(度支部)를 거치며 관력(官歷)을 쌓았다.
본디 시류를 잘 읽는 면이 있어 탁지부상서대신(度支部尙書大臣)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가 여러 해 전 관직을 내려놓고 그간의 공훈을 인정받아 상당백으로 봉해져 추밀원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심 현도가 재상의 직에서 물러났을 때 이 재상의 직을 노리고 있었으니, 차기 재상직에 오를 대상을 현직 내각 대신으로 제한한 내각의 안에 가장 극렬하게 반대를 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도무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내각에서 일방적으로 이런 일을 황제에게 올려 재가를 받은 뒤에 추밀원에 강제한단 말이오? 국초(國初)로부터 이런 전횡은 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언제부터 내각 대신들이 국가의 대사를 자기들끼리 논의하고 결정했단 말이오. 추밀원이 그저 장식으로 가져다 놓은 병풍이란 말이오?”
추밀원 회의에서 한명회는 경성(經聲)을 지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추밀원 의원들이 모두 한명회에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명회가 이미 자신의 무리로 끌어들인 이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내각의 결정에 순순히 동의하고 있었다.
이들 동의하는 이들은 주로 대대로 관직을 살아온 이들로, 보수적인 방안을 선호하는 이들이었다.
상공부상서대신을 역임하고 지금은 이미 오래전 타계한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 영천후(永川侯)로 추밀원에 참예하고 있는 최공손(崔功孫), 육군진무관을 일찌감치 졸업해 군부에서 탄탄한 경력을 쌓고 병부상서대신으로 관력을 마치고 양산백(梁山伯)에 진봉된 이징옥(李澄玉) 등이 바로 그랬다.
한명회를 주축으로 한 이들과 최공손, 이징옥을 주축으로 한 이들은 추밀원에서 삼 일 밤낮으로 갑론을박을 거듭했다.
내각에서는 재상을 뽑으라고 추밀원에 보낸 안건이 이제는 앞으로의 정치를 놓고 판을 짜는 기묘한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현도가 직접 추밀원에 등청하여 상황을 중재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도는 초헌을 타고 의정로에 있는 추밀원에 직접 들어가 이들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의원들을 질타하고서는, 상석에 앉아 이번의 안건은 그대로 처리하도록 하되, 앞으로 내각에서 독자적으로 제도(制度)를 정비하는 일 없이 추밀원에서 반드시 이를 심의 받도록 법령을 제정하는 선에서 타협을 보라고 재촉했다.
비록 재상에서 물러났으나 70년간 대한제국 정치를 이끌어 온 심왕가의 수장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을 추밀원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꼿꼿이 수염을 세우고 있던 한명회마저도 한 수 접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만큼 심왕가의 유산은 거대한 것이었다. 세훈과 현도 2대에 걸쳐서 이 대한제국의 기틀을 닦고 거국적으로 식산(殖産)을 진흥시켜 민간의 삶을 나아지게 했다.
이른바 지금의 강고한 신권이라는 것도 결국 이들로 인해 탄생하게 된 것이었으니 함부로 입을 댈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추밀원에서는 더 이상의 정쟁을 그만두기로 하고 일단 내각에서 내려온 안대로 내각 대신 중에서 차기 재상직에 어울리는 인물을 선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누구를 추천하느냐를 놓고 다시 언쟁을 불붙었지만, 결국 상공부상서대신(商工部尙書大臣) 서거정(徐居正)이 그 물망에 올랐다.
서거정은 인품이 고야하고, 맡은 바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며, 그 학식이 높아 명망이 자자했다. 더군다나 조정의 신료들과도 두루 인맥이 두터워 현도도 그를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한명회나 최공손도 서거정이 재상에 오르는 것을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서거정이 추천되어 내각에서도 만장일치로 그를 인준하여, 황제에게 천거(薦擧)하니, 황제는 칙임(勅任)으로 그를 재상의 자리에 명했다.
1475년 음 6월 초하루에 서거정이 재상의 보위에 올라 집무를 시작하니, 세훈과 현도로 이어진 70년간의 이른바 섭정정치(攝政政治)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1475년
가경 31년 맹추(孟秋)
대한제국 황성부.
서거정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적극적으로 추진한 일은 바로 그간 큰 소득을 보지 못하고 있는 법제도(法制道)를 제대로 정비하는 일이었다.
법제도를 정비하고자 하는 첫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1424년의 갑진경장(甲辰更張) 때의 일이었다.
형부(刑部)를 통해서 법제의 정리를 주문하여 신법(新法), 공법(公法)과 사법(私法)의 큰 틀을 나누어 공법(公法)에서는 헌법이라 할 수 있는 홍범(洪範)과 형법(刑法)을 다루고, 사법(私法)에서는 민법(民法)과 상법(商法)으로 크게 체계를 나누도록 정해졌었다.
이것은 초안이 작성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가운데에 법의 표본이 되었다.
여기에 추가로 절차적 법이라고 할 수 있는 소송법(訴訟法)과 법 그 자체를 다루는 법리학(法理學)을 합쳐 육법(六法)이라고 일괄하여 개성의 육전학당(六典學堂)에서 법관을 양성하도록 했다.
이 육전학당의 학도들은 졸업을 하게 되면 법리학거인(法理學擧人)의 학위를 받게 되었고, 내지의 부군현(府郡縣)과 외지의 진보(鎭堡)로 파견되어 지방관의 법리 해석을 자문하고, 판결을 돕는 전리(典吏)가 되도록 했다.
이 전리라는 이름은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에도 이어져 지방 관아를 관할하는 내부(內部) 소속으로 되었다.
서거정은 법부상서대신 김영유(金永濡)와 밤낮으로 의론하여 법 제도의 개혁을 내각회의에 붙이고 추밀원의 동의를 얻어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방 관아 소속이었던 전리가 개편 이후 법부(法部) 소속의 관리가 되면서, 판사(判事)라는 이름으로 관직명이 고쳐졌다.
지방관의 영향에서 독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방관이 위임할 시에만 직접 판시가 가능하도록 단서 조항이 있었던 것이 철폐되고 특수한 재판을 제외하고는 일반 민법, 상법, 형법에 해당하는 것은 판사가 직접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고쳐졌다.
황성과 각 도의 수부(首府), 즉, 황성부(皇城府), 개성부(開城府), 공주부(公州府), 나주부(羅州府), 대구부(大邱府), 춘천부(春川府), 함주부(咸州府), 평양부(平壤府)에 도법원(道法院)이 설치되었다.
이 도법원은 법부의 정3품의 칙임판사(勅任判事)가 관장하며, 이 아래의 정4품부터 종6품까지의 주임판사(奏任判事), 예비판사(豫備判事), 판사시보(判事試補) 등이 각 도법원에 소속된 부, 군, 현에 정기적으로 순회재판소(巡廻裁判所)를 열도록 제도가 정비되었다.
기존의 판결이 필요할 때 백성들이 각기 속한 고을의 지방관에게 판결을 맡기고, 이에 불복하면 관찰사가 주재하는 재판으로 상소하여, 이들 지방관이 전리(典吏)의 자문을 얻도록 했던 2심제의 큰 틀에서 지방관의 역할을 배재한 채 2심제의 성격만은 남긴 것이다.
또한 법률적으로 정한 특별한 재판 즉, 국가와 황실, 그리고 조정, 그리고 고위 관리 및 황족과 귀족에 대한 재판에 대해서는 황성에 설치되었던 어전법원(御殿法院)을 제도법원(帝都法院)으로 이름을 고치고 이곳에서 판결을 내리도록 했다.
기존 어전법원에서는 형부판서 즉, 나중에는 법부상서대신을 항시 포함하여 정3품 이상의 관리 5인, 육전학당의 학유 3인, 그리고 왕족 1인과 작위를 지닌 자 1인으로 총 10인에 의해 의견을 모아 최종적으로 황제가 판시하도록 하였으나, 제도법원에서는 그 재판을 법부의 종2품 칙임관인 협판(協辦)이 주재하였고, 황제의 재결(裁決)을 형식상 남겨 놓긴 하였으나, 실질상 협판의 판결이 그대로 수용되는 구조가 되었다.
다만 반역죄(反逆罪)에 있어서만큼은 이곳에서 특별 법정이 열렸다. 특별 법정이 열리게 되면 내각과 참의원의 모든 관료 귀족이 입회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재판이 열리도록 했는데, 황제는 이곳에서 모든 법률적 해석을 받아들여 판시를 직접 내려야 했다.
이렇게 법제도를 정비하고, 서거정은 긴 협의 끝에 추밀원에 입법(立法)의 부여할 것을 홍범(洪範)에 삽입하기로 했다.
추밀원에서는 황제가 직접 칙령으로만 개정할 수 있는 홍범을 제외하고는 일반 민법, 상법, 형법 및 정부 제도에 관한 법률에 관해서 이를 의결(議決)하여 법제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추밀원에서 의결한 법률은 황제에게 상주되었고, 이때 내각에서는 이의를 제기하여 황제가 이를 반려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내각(內閣)의 개혁이었다. 그러나 서거정은 내각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조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내각이야말로 제국 정치의 표상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에 세훈과 현도로 이어지며 실질상 재상이 내각 대신을 임명하던 관행이 그에 비해 힘이 없는 서거정에게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때문에 기존의 재상을 비롯한 내각 대신들이 새로운 내각 대신 및 주요 칙임관(勅任官)을 천거하면, 이것을 추밀원에서 검토하여 인준(認准)하고, 최종적으로 황제의 칙임으로 임명하도록 제도화시켰다.
다만, 실질상 정치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때에는 내각에서도 추밀원이 상주하는 법령에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이고, 추밀원도 내각이 천거하는 사람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서거정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권한은 지금 정도가 딱 적당한 것으로, 명분상 권력은 황제에게서 나오되 황제가 권력을 집적 휘두르지 않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른 조정의 대신들도 마찬가지로, 지난 70년간 굳어져 온 황권 약화의 역사는 이제 거스르기 힘든 추세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서거정의 개혁 작업을 통해 일종의 초보적인 삼권분립(三權分立)이 이루어진 셈이 되었는데, 다만 사법부라고 할 수 있는 법부(法部)는 내각에 포함되어 있었고, 추밀원과 내각의 기묘한 공생 관계는 그 경계가 흐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거의 모든 절차는 황제의 옥새를 필요로 했는데, 지금같이 신권이 황제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것이 다만 형식상의 절차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혹여 황제가 법제상의 권한을 들어 스스로 이를 권력의 수단으로 삼으려 할 소지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이렇게 시책을 정리하여 반포하려 합니다. 분명히 잡음이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이 뜻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괄목할 만한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거정을 비롯한 내각, 추밀원이 공히 이 개혁안에 동의하고 황제에게 이를 상주한 뒤, 서거정은 계동저를 찾아 조용히 독서하는 생활에 잠겨 있는 현도를 찾았다.
현도와 마주앉은 서거정은 이러한 일에 관해 현도의 의견을 조심스레 물었다.
“알아서들 할 일이지, 아직도 뭣 하러 이런 늙은이를 찾는다 말이오. 허허.”
현도는 그러나 더 이상 정치에는 입방아를 놓지 않겠다는 견해를 확실히 했다. 이것만큼은 아버지 세훈과도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아버지 세훈은 자리에서 물러나 앉은 뒤에도, 이곳 계동저에 앉아서 국가의 시책들에 이런저런 훈수를 두곤 했었다. 그러나 현도는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궤도에 올랐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마저 손을 대지 못했던 부분을 그가 물러나자마자 서거정이 신속히 정비하는 것을 보고서는 그러한 생각이 확연히 굳었다.
“이제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이야. 자네도 이만 이런 늙은 퇴물을 그만 찾고, 갈 길을 가야지. 나는 남은 여생 이곳에 앉아 조용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관상(觀賞)하다가 갈 생각이네. 다만 사적인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네.”
현도의 다정한 축객령에 서거정은 머쓱해져 고개를 끄덕이고 예를 갖춘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도의 말마따나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밝아 오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여 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